49.
거실로 나가서 최수호의 핸드폰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누가 전화를 받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예, 호랑이 그려진 가방 여기 있네요. 최수호는 자는데 올라오시면 드릴게요.”
양용배는 최수호의 핸드폰을 들고 통화 중이었다. 하도 자연스러워서 최수호의 핸드폰이 맞나 곁눈질로 몇 번이나 확인했다.
“최수호 전화잖아.”
“엉, 계속 전화 오길래 부재중 찍힌 걸로 다시 걸어 줬지.”
“최수호한테 온 전화를 왜 네가 다시 거냐. 걔 폰에 암호도 걸려 있을 텐데.”
“받아 주려는데 마침 끊기길래 그랬다, 왜. 암호 걸려 있더라.”
양용배는 아주 태연했다. 암호가 있는데 쟤가 그걸 어떻게 받았는지 궁금해하는 내 쪽이 되레 얼이 빠지게.
“네 생일 치니까 풀리더라고.”
“…….”
오늘 정말 최수호 덕분에 여러모로 민망하다. 양용배가 자연스럽게 그걸 쳤다는 게 제일 민망하다.
“누구한테 온 전화였어?”
양용배가 대답해 주기 전에 나는 해답을 알게 되었다. 소파 옆에 놓인 더플백이 익숙했다.
체육관에서 자주 보는 투박하고 시커먼 더플백은 한쪽에 울부짖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몇 번 봐서 가방 주인이 누군지 기억하고 있다.
“황춘식 감독님, 이라고 저장돼 있네.”
양용배의 답이 들리자마자 소파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홍 감독님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누구라고?”
듣는 쪽이 순간 놀랄 정도로 격앙된 소리였다.
마침 현관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홍 감독님이 소파에서 내려와 인터폰 앞에 섰다.
인터폰에 뜬 얼굴을 홍 감독님은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뒤바뀐 분위기에 당황하는 건 나하고 양용배의 몫이다.
홍 감독님의 손가락이 인터폰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그 사람이 이를 악물던 걸 봐 버리고 말았다.
“미안, 수호 씨. 내가 어제 가방을 두고 가는 바람에…….”
황춘식 감독님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와 함께 거실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 발씩 다가와 거실에 나타나는 황 감독님의 모습은 무슨 영화 연출 같았다.
“오랜만이다, 선배.”
홍 감독님이 인사했다. 숙취에 몸도 못 가누던 사람이라고는 상상 못 할 정도로 냉철한 표정이었다.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저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얼굴일 거다.
오히려 멀쩡하게 들어오던 황춘식 감독님 쪽이 취한 사람 같았다. 능글맞게 웃고 다니던 얼굴이 굳어지더니 순식간에 온통 벌그죽죽해졌다.
불시에 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우뚝 멈춘 황 감독님의 어깨가 떨렸다. 황 감독님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발걸음이 비틀거리나 싶더니 부리나케 현관으로 멀어졌다.
나는 더 생각하지 않고 더플백을 집어 들고 황 감독님을 따라 나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끼어들었다. 내가 올라타고 바로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가고 나와 황 감독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닫힘 버튼을 누르던 손을 떼며 황 감독님이 머쓱하게 웃었다. 얼마나 힘주어 눌렀는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피가 몰리는 게 보였다.
“희백인 줄 알았네.”
이름을 발음하는 소리가 어찌나 떨리는지.
안도와 수치심이 섞여 괴상해진 웃음이 황 감독님의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참, 쪽팔린다…….”
황 감독님이 엘리베이터 벽에 이마를 박았다. 들썩이는 어깨를 보면서 나는 메고 온 더플백의 끈을 힘껏 움켜쥐었다.
* * *
황 감독님하고 나는 말없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입을 다물고 걷는 황 감독님 뒤를 나도 질문 없이 따랐다.
“밥 먹었어?”
가로등 앞에 서고 나서야 황 감독님이 입을 열었다.
“햄버거요.”
“사 주려고 했더니만.”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불편하시면 가방 드리고 갈게요.”
“아냐, 아냐. 불편한 게 아니라.”
버벅대면서 쭈뼛거리는 거 진짜 안 어울린다. 맨 바닥을 차던 황 감독님이 내 쪽을 보았다.
“정열 씨, 오늘 바빠?”
“저 백수예요.”
심드렁한 대꾸에 황 감독님이 고개를 젖혀 웃었다. 내 대답의 어디가 웃기지. 아니면 이유를 지어내서라도 웃고 싶은 건지.
“우리 집 갈래?”
황 감독님은 꼭 놀러 가자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손은 자꾸만 불안하게 쥐락펴락 움직였다.
황 감독님이 건넸던 대본 속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샌드백을 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던 소년. 어머니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 함께 사는 건지 늘 궁금해했고, 메스껍고 위협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빛나는 것을 찾고 싶었던 사람.
수호를 좋아하고 나서부터는 외로운 모든 것들이 수호처럼 보이곤 한다.
나는 최수호가 외로울 때 누구든 최수호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내가 없는 곳에서도 최수호가 혼자가 아니었으면.
“집까지 들어 드릴게요.”
나는 짊어지고 있던 더플백을 흔들었다. 최수호의 미지근하던 손을 쥐었던 감촉이 떠올랐다.
* * *
황 감독님네 댁은 낡은 아파트 1층이었다. 감독으로 잘될 때 그나마 이거 하나 건졌다는 황 감독님의 수다를 들으면서 운동화를 벗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아, 아빠 왔다.”
황 감독님이 크게 외치며 실내 불을 켰다. 밝아지자 벽 하나를 다 차지할 정도로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장난감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햄스터 케이지하고 연결된 터널들이었다. 톱밥에 파묻힌 햄스터가 허우적거리며 이빨 자국이 가득한 나무 집에서 기어 나왔다.
“햄스터 키우세요?”
“골목에 누가 케이지째로 버려 놨더라고. 귀엽지?”
귀여운 건 귀여운 건데 그보다 이름이 신경 쓰인다. 백이가 설마 내가 생각하는 이름에서 따온 그 백이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반대편 케이지에서도 톱밥을 뒤집어쓴 동그라미가 하나 튀어나왔다.
“두 마리예요?”
“응, 버려진 게 둘이었는데 햄스터는 합사해서 키우면 안 된다네.”
“혹시 얘는 이름이 뭐예요?”
“걔는 희야라고, 여자애.”
“…….”
“응?”
“옛날에 초등학교 다닐 때, 숙제 때문에 최수호가 올챙이를 길렀는데요.”
“응.”
“걔 이름이 열이었거든요.”
돌돌돌.
희와 백이가 각자의 쳇바퀴를 굴렸다. 저 동그랗고 털이 보송보송한 생명체들이 홍희백 감독님하고 어디가 닮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오히려 작은 곰처럼 보이는 게 주인하고 닮았다고는 우겨 볼 만하다.
“올챙이 열이는 어떻게 됐어? 잘 살았어?”
황 감독님이 재밌어 죽겠다는 투로 물었다. 남 얘기하듯 물어보시네요. 희야하고 백이 부친 되시는 분이.
“네. 금이야 옥이야 길러서 개구리 만든 다음에 학교에서 단체로 식물원에 기증했어요.”
최수호가 그 후로도 시간만 나면 식물원에 가서 개구리하고 인사를 나눴다는 눈물 나는 후일담도 있다. 난 거기 있는 개구리가 하나도 구별 안 되던데 최수호는 단번에 열이를 찾아내곤 했다. 걔가 진짜 열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최수호가 맞다면 맞는 거겠지.
“그게, 이름이 예쁘잖아. 희백이.”
“아까 분위기는 예쁘지 않고 살벌하던데요.”
“으음, 그랬나?”
지금 허허, 웃고 있는 저 사람이 아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달아났다니.
“차라도 마실래?”
“전 그냥 물이요. H예요?”
“아니, 물은 H2O지.”
“어디 가서 그런 농담하시면 몰매 맞아요.”
“정열 씨가 하도 뜬금없이 물어보니까 그렇지.”
다 알아들었으면서 시치미 떼시는 건 뭐람. 부엌으로 사라진 황 감독님이 금세 물 잔을 들고 다시 등장했다.
“정열 씨, 의외로 추리에 강하네.”
“대본에 적힌 이니셜하고 이름이 비슷해서 물어본 걸 가지고 뭘 추리까지 얘기하세요.”
[이 영화를 H에게 보낸다.]
대본 머리에 의미심장하게 적혀 있던 문구의 주인공이 대본을 쓴 사람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인물이리라는 건 딱히 추리력이 필요한 사실이 아니지 않나. 기르는 햄스터 이름도 희백이라는 와중에.
더군다나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둘 사이에 흐르던 기류를 목격했다면 심상치 않은 관계거니 직감했을 거다. 모른 척하기가 힘들 수준이었다.
“내가 많이 좋아했어.”
황 감독님이 내게 잔을 내밀었다. 유리잔 안의 물결이 출렁인다.
“물론 대차게 차였고.”
“…….”
“위로의 말은 필요 없으니까 고민하지 마. 차일 거 알고 한 고백이야.”
필요 없다니 차라리 다행이다. 할 말이 없어 그저 물 잔을 비웠다.
그러면 둘이 마주쳤을 때의 그 살벌한 분위기는 다 뭐였을까. 비록 찼다지만 제게 고백까지 한 사람을 그렇게 노려보는 사람도 있나.
“H는 에이드리언이 아니라 아폴로라면서요.”
“하하, 그러게. 에이드리언이면서 아폴로이기도 하다고 대답 바꿀게.”
“무슨 대답이 순식간에 바뀌어요.”
“막상 얼굴 보니까 그렇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미련이란 게…… 이래서 안 보려고 했는데.”
중얼대며 황 감독님이 연거푸 마른세수했다.
광경은 사람을 압도한다. 섀도잉과 스파링이 전혀 다른 것과 같다. 혼자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마주치는 건 역시 다를 거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시야에 있으면 마음을 떨어뜨리기도 어려운 것 같다.
최수호만 봐도 절로 먹먹해지는 심경을 나는 그렇게 변명했다.
“나도 뭐 물어봐도 되나. 정열 씨가 수호 씨랑 못 사귄다고 한 이유 말이야.”
언제 그 소식이 황 감독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범인은 최수호인가.
연달아 놀랍다. 내가 모르는 사람하고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최수호라니.
“수호 씨는 정열 씨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싫어한다는 둥, 그런 식으로 얘기하던데, 그런 게 아니지?”
그래도 그렇지. 최수호, 이 화상아. 넌 내 얘기를 어디까지 하고 다니는 거냐.
“최수호가 그래요?”
“나 붙잡고 울더라고.”
그러다 붕어눈이 됐나. 그래도 청승맞게 혼자 운 것보다는 낫다.
“수호는 외로운 애예요.”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던 햄스터들이 구불구불한 튜브를 타고 움직인다.
자기를 차 버린 남자의 이름을 딴 동물을 기르는 건 어떤 마음일까. 최수호도 그 올챙이랑 안 헤어지고 오래 같이 살았으면 좋았으려나.
하긴. 선생님이 허락해 줬어도 못 길렀겠지. 초등학생 때는 어찌어찌 기른다 해도 중학생이 됐을 땐 이미 자기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바빴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