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88)

53.

현관문이 닫히고 잠금쇠가 돌아가는 기계음이 들릴 때까지 나는 붙박인 듯 현관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혼자 사냐니. 꼭 그게 틀린 말처럼 들린다. 그러면 혼자 살아야만 하는 인간은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떡하라고.

멍하니 안쪽으로 들어오자 다 치우지 못한 유리 파편이 나를 반겼다. 휴지로 물과 유리 조각을 훔치다 충동적으로 깨진 컵을 움켜쥐었다.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뾰족한 유리가 손바닥으로 깊이 파고든다. 피부를 찢고 살을 뚫는 통증이 차라리 시원하게 느껴졌다.

새빨간 혈액이 손을 타고 떨어진다. 상처가 뜨겁다. 유리 조각을 꽉 쥔 채로 바닥을 내리치자 피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몄다.

통증이 뼈까지 활활 불태웠다. 온몸 중 유리를 쥔 오른손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니까, 이래서, 나는.

주먹 쥔 손으로 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잇새로 더운 숨이 샜다. 이 지경이니까, 나는. 열이도, 나를.

현관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바닥을 치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신경이 곤두서서 벨 소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피가 흐르는 손을 늘어뜨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뭐야.”

양용배가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문 앞에 선 사람은 좀 전에 나간 양용배와는 복장이 딴판이었다. 챙 모자를 쓰고 얇은 패딩을 입은 사람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뭐긴. 나다.”

진이 형이 모자챙을 올렸다.

“형?”

“뭘 놀라. 들어가도 되지.”

“네. 근데 형이 여긴 왜 오셨어요?”

“정열 찾을 겸…… 야.”

안으로 들어오려던 진이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등 뒤로 감춘 손에서는 이미 바닥에 떨어질 만큼 많은 피가 흘렀다.

“너 손이 왜 이래.”

내 손목을 세게 쥐고 당기며 진이 형이 나를 다그쳤다.

“손 펴 봐.”

“…….”

“최수호. 손 펴.”

“별거 아니에요. 유리 깨진 거 치우다 다쳤어요.”

“손 펴.”

진이 형의 말투에는 듣는 이를 고분고분해지게 하는 뭔가가 있다. 더군다나 열이하고 닮은 얼굴로 말하면 더는 고집을 세울 수가 없다.

손바닥을 펴자 피 범벅이 된 살갗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깊이 박힌 유리 조각이 살 위로 비죽 튀어나와 있다.

“미쳤냐.”

진이 형이 대번에 언성을 높였다.

“당장 병원 가. 손바닥에 자상 나는 거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힘줄 상했으면 어쩔 거야.”

“괜찮은데. 별로 안 아파요.”

“꼴이 이 모양인데 안 아프긴. 구급상자 있지? 핀셋하고, 지혈할 거 있으면 줘.”

“어디에다 뒀는지 기억 안 나는데……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열이가 나한테 연고 발라 주느라 쓴 건 기억나는데 어디에 뒀는지가 헷갈렸다. 거실에까지 날아와 널브러져 있는 유리 조각을 밟을 뻔한 나를 진이 형이 붙잡아 끌어당겼다.

“안 되겠다. 외투 입어.”

“지금 나가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바깥에 나가기 싫다. 시선을 받는 것도 별로고, 특히나 지금은 시기가 안 좋다.

“입기 싫으면 그냥 따라와.”

머뭇거릴 틈도 없이 진이 형이 나를 다시 현관으로 끌어냈다. 손을 펴 보라고 할 때와 똑같았다. 하도 단호해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게 된다.

아파트 바깥으로 나오자 진이 형이 걸치고 있던 패딩을 벗어 내 어깨에 둘렀다. 챙 모자까지 벗어 머리에 씌워 버리는 동작이 신속했다.

꼭 내 속을 다 읽은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진이 형의 등을 따라 걸었다. 형의 등은 열이보다 조금 더 크다.

“진이 형.”

“왜. 빨리 걷기나 해.”

“열이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진이 형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꿰매고 붕대 감고 해 놨는데 걔가 모르겠냐? 정열이 네 일에 얼마나 예민한데. 둘이 한 달 동안 안 볼 거야?”

하긴. 숨기려고 해도 보자마자 알아차릴 거다. 열이는 내 일에 기민하고, 나는 열이한테 뭘 숨기는 걸 못 한다.

한 달, 안 보려고 마음먹으면 안 볼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가 했던 권유가 떠올라 챙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저 곧 외국 나가요.”

“촬영하냐.”

“그것도 있고요.”

“언제 들어오는데.”

“1년 정도 나가 있으려고요.”

앞서 걸어가던 진이 형이 우뚝 멈췄다.

“정열은 알아?”

“아직 말 안 했어요.”

나가기로 했으니 열이한테도 말해야 할 텐데 뭐라고 해야 하나 막막했다. 말하면 열이는 뭐라고 할지, 그것도 막막하다.

병원이 보일 때까지 입 다물고 걷던 진이 형이 나를 힐금 돌아보았다.

“꼭 1년씩이나 가야 하냐? 나야 잘은 모르지만 보통 촬영 4~5개월이면 끝났잖아. 열이 지금 한참 마음잡기 어려워하는데, 너마저 없으면 더 힘들 거다.”

“…….”

“너도 열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해요.”

흐려지는 말끝을 붙잡듯 나는 급하게 대답했다.

좋아해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열이가 무거워할 만큼 좋아해요.

그래서 가려고 하는 거예요. 열이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 말고. 후. 그래, 너도 네 일 때문에 나가는 건데 어쩌겠어.”

병원 접수처로 걸어 들어간 진이 형이 나를 대신해 진료 신청서를 쓰기 시작했다. 응급실 옆에 앉아 호명을 기다리는 형은 이 모든 과정에 익숙해 보였다.

내가 상처를 꿰매고 돌아올 때까지도 진이 형은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후드가 달린 티만 입고 있는 옆모습이 추워 보였다. 진이 형은 돌아온 내 손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고 패딩을 여며 주었다.

“뭐래. 신경은 안 다쳤대?”

“상처 아물 때까지는 손 쓰지 말고, 혹시 계속 통증 있으면 바로 병원 오래요.”

“손은 잘못 다치면 큰일 나니까 진짜 조심해야 해. 손가락은 잘 움직여? 상처 아물면 잘 움직이나 보고 재활해. 기동성 잘 보려면 아물자마자 시작해야 돼. 아, 수납은 내가 했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잘 번다고 형한테 유세 떠냐? 약이나 타러 가자.”

진이 형하고 병원과 약국을 다니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에 진이 형을 마주치던 곳은 주로 열이네 집이나 체육관이었다. 간혹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진이 형은 항상 훈련으로 바빴다.

열이 시합장에 가면 항상 진이 형이 있었고, 열이네 어머니는 형제 둘 다 건강 체질이라 어릴 때부터 병원 구경해 본 적이 없단 말씀을 자주 하셨었다. 그러다 진이 형의 입원 기간엔 나도 바빠서 병원에 자주 못 갔고, 퇴원 후에는 진이 형이 사람을 멀리했었다.

진이 형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 때마다 열이는 학교에서 점점 더 말수가 줄어들었다. 3학년이 되고 진이 형이 다시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 이거.”

내게 약봉지를 보여 주는 진이 형은 어릴 때하고 별로 다른 게 없어 보인다. 걸을 때 약간씩 끌리는 다리를 제외하면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노력했을 거다, 진이 형도.

처음 진이 형이 쓰러진 날을 기억한다. 늘 체육관을 뛰어다니던 형만 기억하던 내게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조차 못하는 진이 형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진이 형 본인한테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진이 형도, 열이도, 형이 복귀하지 못한 게 충격인 모양이었지만 자기 체육관을 열고 일상을 유지하는 지금도 대단하다.

“약사 말 들었지? 진통 소염제는 하루에 세 번. 식후 30분.”

“네.”

“대답은 잘하지. 다치지 마, 인마. 누가 유리 줍다 실수로 그만큼 찔리냐.”

“…….”

“수호야, 열이가 너 많이 의지한다.”

“제가 열이를 의지하죠.”

“정열도 그래. 내가 걔 형인데 모르겠냐. 알다시피 걔가 운동밖에 모르는 놈이라 단순하잖아. 바라는 거 많이 없는 놈이야. 요즘 나 때문에 실망도 컸고. 너 있어서 힘내고 있는 거다. 걔가 너 많이 좋아해.”

열이하고 닮은 얼굴로 열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속이 어지럽게 울렁거린다.

진이 형이 내 팔목 부근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너 이러면 정열 속상해서 드러눕는다.”

“…….”

“나도 걱정되고. 너무 힘들면 말해. 밥이라도 사 주게.”

그 말을 듣자 뜨거운 물을 갑자기 삼킨 듯 목구멍이 조여들어 겨우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이 형은 내 팔을 잡고 계속해 걸었다.

“형, 저는 저쪽인데요.”

아파트 다른 동 방향을 가리키며 말해도 진이 형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라.”

진이 형이 아파트 로비를 앞에 두고 권했다.

“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봐. 처음 자 보는 것도 아니면서. 다친 애를 어떻게 혼자 둬. 촬영 끝나서 요즘 쉰다며. 자고 가.”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정열 방에서 자.”

“그러면 열이는요.”

“정열이야 바닥에 이불 깔고 자든지, 거실에서 자든지. 이따 부모님 부부 동반 모임 가셔서 오늘 안방도 빈다.”

진이 형 말대로 열이네서 자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근래는 별로 없던 일이었다. 진이 형 재활이며 열이 진로 문제로 이래저래 어수선했고, 나도 제때 귀가하는 날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것도 진이 형 손에 끌려가다니.

다른 것보다도 열이와 싸운 게 문제였다. 엄밀히 말하면 싸운 건 아니지만, 요즘 열이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진이 형이나 열이네 부모님 얼굴을 보는 것도 꺼려졌다.

고백하고, 차이고, 열이가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하고, 어쩌면 그래서 열이하고 떨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 전부 열이네 집에 선뜻 들어가는 걸 망설이게 했다.

말하자면 지금 내가 열이에게 느끼는 감정 같았다. 너무 좋은데, 과연 내가 거기 있어도 되나 싶다.

집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어색한 기분이 들었는데, 현관에 나와 반기는 열이네 부모님은 내 서먹함을 단번에 지워 버릴 정도로 우리를 반겼다.

“진이 왔니? 수호도 왔네?”

“최수호, 이리 와 봐. 손은 왜 그래. 다쳤어?”

열이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나를 맞이했다. 거실로 걸어가는 동안 분위기는 계속 떠들썩했다.

“손 어쩌다 이랬다니.”

“잔 깨져서 치우다 다쳤대. 안 그래도 나랑 병원 다녀오는 길이야.”

“세상에, 아프겠다. 오늘 안 그래도 소고기 미역국 끓였는데 진이랑 앉아서 먹어. 많이 먹어야 빨리 낫지.”

“진아, 열이 찾으러 나간다며. 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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