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황 감독님 말이 맞다. 나는 최수호를 생각했다.
최수호는 뭘 하고 있을까. 속상할까. 최수호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감독님은 누가 보고 싶으셨는데요?”
“옛날엔 아부지, 이름 모를 내 미래의 연인, 대학 이후에는…… 홍희백.”
홍 감독님의 이름을 부를 때만은, 황 감독님의 목소리는 침착을 잃는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건 경이로운 거야.”
여전히 떨림이 남아 있는 음성으로 황 감독님이 말을 계속했다.
“내가 걔한테 들은 말이나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 자식이 참 미운데도, 가끔은 그냥 그리워져. 그 녀석을 순수하게 그리워할 수 있었던 시간도, 그때의 나도, 전부.”
황 감독님의 집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마음의 방향도 이렇게 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땀이 밴 피부가 불어오는 바람에 미지근하게 식는다. 열기가 빠져나간 만큼 최수호 생각이 돌아왔다.
“그리움이라니. 참 서정적인 말이야. 그치.”
“감독님 되게 감성적이시네요.”
“인생은 아름답다, 정열 씨.”
커다란 웃음소리가 섞인 황 감독님의 말이 우렁우렁하게 울려 퍼진다. 영화감독이라 그런가, 말도 무슨 영화 대사처럼 한다.
인생은 아름답다.
그런가. 아름다운가?
황 감독님의 집 주변은 낯선 풍경이었다. 주변에 건물과 도로로 가득한 도심 한복판은 우리 집 근처하고 다를 게 없지만, 커다랗게 덩어리진 것들을 더 세세히 뜯어보면 다 다르다.
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삶의 모양도 들여다보면 다르겠지. 빛이 비치는 대로 건물의 어느 면은 빛나고 그림자는 길게 고인다.
“정열 씨가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하다, 난. 복싱 관두는 거, 수호 씨가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거, 그런 게 정말 정열 씨가 바라는 거야?”
나란히 걷자 황 감독님과 내 그림자가 하나로 섞였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보다 앞세우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문득 황 감독님의 옆모습을 확인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떤 표정인가 알고 싶어서.
노을빛이 강렬해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황 감독님이 자기 인생을 살아 보고 얻은 결론이다. 말로 듣는다 한들 내가 단번에 깨우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란 거다.
“그럼 사랑은 뭐예요?”
조금은 낯간지럽게, 진심으로 궁금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알고 싶다.
최수호를 좋아한다.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랑이 뭔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까까지는 묻지 않은 것도 쉬지 않고 늘어놓던 황 감독님은 명쾌하게 대답해 주기는커녕 빙그레 웃는 데서 그쳤다.
“할 수 있을 때 해.”
황 감독님의 손이 내 등을 아주 살짝 떠밀었다.
* * *
버스로 가겠다고 사양하는데도 황 감독님이 부득불 차로 태워다 주신 덕에 집까지 편하게 왔다. 부모님 모임 나가신다는 건 아까 형한테 문자로 들었지만, 시간도 늦었고 형도 자기 방에서 할 일 하고 있을 테니 최대한 조용히 들어가려는 계획이었다.
형하고 내가 집 드나들 때 꼬박꼬박 인사하는 사이도 아니고 대강 들어가서 씻고 자자. 집에 들어갈 때만 해도 계획은 그랬는데.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옷부터 갈아입는다고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는 그림자부터 보였을 땐 공포물인 줄 알았고, 침대에 누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 예술 영화로 장르가 바뀌었다.
이 잘생긴 건 무엇인가. 고민할 것도 없이 최수호다.
도대체 최수호가 왜 여기 있나.
내 침대에서 자는 게 최수호라는 걸 알고 나서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레 뒷걸음질 쳐 나온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유일한 인간한테로 향했다.
“최수호가 왜 내 방에 있어?”
부모님도 안 계시는 지금 이 집에 깨어 있는 딱 한 사람, 정진.
“내가 주워 왔어.”
자기 방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형이 내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형, 최수호네 갔었어?”
“어, 근데 넌 없고 상태 안 좋은 수호만 있더라.”
“상태 왜.”
“이래저래 떠들썩한 거 때문 아니겠냐. 손 못 봤어?”
“이불 덮고 자고 있던데.”
잠자는 왕자님답게 얌전히 바른 자세로 자고 있어서 손은 보이지도 않았다. 갑자기 불안하게 손 얘기는 또 왜.
“좀 꿰맸어.”
진이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불길한 예감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꿰매? 어쩌다가. 다쳤어?”
“수호한테 직접 물어봐. 너희 둘, 아무 일 없는 거 맞아?”
맨날 그 소리냐고 따지고 싶은데 입이 안 떨어졌다. 아무 일 있는 게 맞아서 따질 게 없다.
원래대로라면 다치자마자 나한테 연락했어야 맞다. 최수호가 직접 얘기하는 게 아니라도 바로 나한테 연락이 들어왔어야 맞는 거다.
갑자기 조용해진 나를 쳐다보던 형이 혀를 찼다.
“정열. 수호 외국 나간다더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내게 형이 폭탄 발언을 날렸다.
효과는 엄청났다. 우리 형이 진심으로 던지는 스트레이트 훅만큼의 충격이 전해졌다.
“언제?”
“모르지. 1년 정도는 나가 있을 거래.”
생각도 못 해 본 기간이었다. 최수호와 나는 처음 만난 이후로 두 달 이상 떨어져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대회며 촬영 때문에 떨어지더라도 최수호나 내가 시간을 내서 얼굴을 보러 가던 사이였다.
1년이면, 난 재수 학원에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성적을 어떻게든 살려 보고자 바쁠 테니 내가 최수호를 보러 갈 수는 없을 거다. 최수호는 날 보러 올까?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최수호가 1년이나 나하고 떨어져 있기로 결심했다는 게 충격이다.
내가 최수호한테 너무 길든 건가. 피차 성인인데 어른스럽지 못한가?
최수호가 언제 나한테 말할지는 몰라도 그때 잘 다녀오라고, 어디서든 응원하겠다고 등 두드려 줄 준비라도 해 둬야 할까. 순식간에 심경이 복잡해졌다.
말을 잃은 나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보고만 있던 형이 턱으로 문 너머를 가리켰다.
“안방에서 자. 부모님 오늘 바깥에서 주무실 거야.”
“됐어. 내 방에서 이불 깔고 잘래.”
안방 침대 매트리스 좋은데. 그래도 최수호 아프다니까 옆에서 자는 게 낫겠다.
어쩌면 한동안 못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다른 데서 자기가 아까워졌다. 어린애 같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건 경이로운 거야.’
황 감독님의 말을 당장 들었던 때보다 지금 더 잘 이해된다. 생각해 보면 내게는 정말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었던 적이 없었다.
가족들과 최수호, 운동.
그거면 충분한 세상에서 살았으니까.
복싱도 잃었는데 최수호까지 볼 수 없게 되면 무슨 기분이 들까.
“수호가 그렇게 좋냐.”
형은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말투도 그렇다.
“뭐야. 왜 자꾸 시비야.”
저번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잡채 담는 내 뒤를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거리던 형이 떠올랐다.
“너 병원에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냐?”
형이 여전히 떫은 표정으로 입술을 축였다. 내 눈치를 보는 정진이라니, 적응 안 된다.
“또 복싱 얘기하려고?”
“그거 말고. 안 나면 됐어. 가서 자.”
요즘 정진, 정말 이상하다. 왜 저러냐. 복싱 가지고 괴롭힐 때는 그래도 걱정은 안 됐는데 저러니까 진지하게 걱정스러워지려고 한다.
어차피 캐물어 봤자 제대로 된 대답은 안 나올 게 뻔했다. 혼자 심각한 정진을 내버려 두고 안방에서 이불을 꺼냈다.
오랜만이다. 옛날에 최수호가 자주 자고 갈 때는 뻔질나게 이불 깔았는데. 침대도 최수호하고 잔다고 좀 크게 샀는데 최수호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바람에 망했다.
여분의 이불을 끌어안고 조용하게 내 방의 문을 열었다. 불도 켜지 않아 캄캄한 방에서 이불을 깐다고 돌아다니다 보니 몸이 여기저기 부딪혔다.
방금 찧은 엄지발가락을 주무르며 침대 옆에 주저앉았건만 침대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엄청나게 피곤했나 보다. 잠귀에 밝은 놈이 옆에서 이부자리 까는 데 깨지도 않고 자는 걸 보면.
하긴 최수호는 유독 내 방에서 자면 깊게 잤다. 나도 남의 집에서 잠이 더 잘 올 때가 있던데, 그런 건지.
이불을 살짝 들쳐 최수호의 손을 살폈다. 형 말처럼 다친 건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 붕대에 희미하게 비치는 핏자국이 거무스름한 얼룩으로만 보였다. 손끝에 붕대의 까슬대는 감촉이 느껴질 정도로만 살짝 손을 접했다가 금세 떼어 냈다.
“아프지 마, 최수호.”
속삭임이 입술 위로만 간신히 맴돌다가 사그라진다. 나는 침대에 뺨을 기대고서 잠든 최수호의 얼굴을 한참 구경했다.
“1년은 너무 길잖아.”
아무리 TV만 틀면 네 얼굴이 나와도 그렇지. 눈만 돌려도 전광판에 최수호가 뜨는 세상이니, 얼굴 까먹을 일은 없겠다.
점차 눈에 익어 가는 방의 어둠 속에서 최수호를 바라본다. 날렵한 옆선과 광대의 높이, 잘생긴 이마. 하염없이 보고 또 봐도 최수호는 눈을 뜨지 않는다.
“가지 마.”
아주 조용하게 속삭였다.
가지 마, 수호야.
좋아해.
괜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침대 시트에 이마를 묻었다. 눈시울이 저릿했다.
너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약한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불 바깥으로 드러난 최수호의 다친 손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나는 시트에 올려놓은 손을 힘껏 주먹 쥐기만 했다.
* * *
우리 집 거실이 남향인 건 좋은데 내 방이 정동향인 건 별로다. 커튼을 안 치고 자면 새벽부터 강렬히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뱀파이어가 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꺼풀 너머로 눈동자를 찔러 대는 빛 때문에 잠은 깼는데 감히 눈을 뜰 엄두를 못 내겠다.
미간만 한껏 찌푸리고 있을 때 갑자기 시야가 한결 어두워졌다.
뭔가가 햇빛을 가로막고 있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내 옆에 앉아 나를 보느라 여념이 없는 최수호가 보였다.
“어, 깼네.”
말을 건넨 쪽은 도리어 나였다. 최수호는 놀랐다고 써 붙인 창백한 낯빛으로 눈을 홉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