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88)

57.

모든 게 비슷비슷해 보이는 초록의 난립 속에서 덩굴이 발목을 낚기라도 한 듯, 발길이 저절로 방향을 틀었다.

속도는 계속 빨라져 걷기보단 뛰는 데 가까웠다. 비슷비슷하던 풍경이 바뀌며 진흙과 물 냄새가 어렴풋이 끼쳐 왔다.

나는 오래 헤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본능의 나침반이 정해진 방향을 가리켰다.

온실의 끝이었다. 키가 훌쩍 큰 몬스테라 밑에 최수호가 주저앉아 있었다.

“찾았다, 최수호.”

커다란 연못 주변을 둘러싼 몬스테라 군락은 웅크린 최수호 정도는 가뿐히 가려 주었다. 인도를 벗어나 널찍한 잎 아래 앉은 최수호는 언젠가 수호가 훨씬 어렸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일곱 살 때도 안 하던 숨바꼭질을 지금 하냐.”

일으켜 주려 손을 내밀자 최수호는 내 손길을 피해 일어섰다. 자리를 벗어나려는 최수호의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손이 나갔다. 후드를 낚아채자 최수호는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최수호를 받아 내다가 내가 먼저 넘어졌다. 흙먼지가 일고 엉치뼈로 둔탁한 통증이 퍼진다. 뒤얽혀 넘어져 있으려니 상체를 제대로 세우고 있는 것만으로 버거웠다.

“대체 도망을 왜 쳐. 내가 잡아먹냐.”

최수호는 숨만 몰아쉬었다. 대답은 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수호, 인상 좀 풀어라.”

“왜 따라왔어?”

고개를 돌린 채로 간신히 한다는 대꾸가 그랬다. 뭐 이런 질문이 다 있을까. 네가 그렇게 혼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안 따라갈 수가 있냐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수호의 손목을 나는 힘껏 쥐었다. 혹시라도 놓치면 또 뒤도 안 보고 내달려서 멀리 가 버릴까 싶어서.

“너 보고 싶어서.”

또박또박 힘주어 얘기하자 최수호의 시선이 간신히 내게로 돌아왔다.

“수호야, 얘기 좀 하자.”

“싫어.”

고집스럽게 말하며 수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모자챙이 수호의 눈가를 가렸다. 꽉 깨문 입술이 아파 보인다.

“안 들을래.”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안 듣는대.”

“또 가라고 할 거잖아.”

“……그 말 하려고 이렇게 죽을 둥 살 둥 쫓아왔겠냐?”

“나 싫다고 할 거잖아.”

내게 잡힌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 최수호가 중얼거렸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안 봐도 훤하다. 최수호는 또 울기 직전이다.

“나 너 안 싫어해. 싫어한 적 없고, 싫어할 일도 없어.”

단호하게 말해도 최수호는 나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 너 좋아한다, 최수호.”

최수호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모자챙과 팔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물기로 축축하다. 요즘 나는 최수호를 자꾸 울리기만 한다.

“친구로서?”

헐떡거리며 묻는 최수호의 눈꺼풀이 떨렸다.

“친구로 좋아하는 거 말고. 너처럼 좋아해.”

최수호는 얼떨떨한 얼굴이다. 표정만 보면 나한테 한 대 얻어맞은 사람 같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에 대고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고민스럽다.

“나도 너 좋다고. 네가 나 좋다고 한 거하고 똑같은 의미로.”

“이유진보다?”

“유진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냐.”

“이유진보다 내가 더 좋아?”

최수호가 내 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아플 지경이다. 얘, 또 미치네.

“어, 좋아해.”

생애 두 번째로 하는 고백은, 떨렸다. 원래 이렇게 섣부르게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뭐 대단하고 근사한 고백을 꿈꾸진 않았어도 식물원에서 추격전 벌이다가 엎어져서 고백하려고 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나도 최수호, 너 좋아해.”

최수호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숨소리가 거칠다.

“다른 사람 누굴 가져다 대도, 최수호 네가 제일 좋아.”

최수호의 입술에서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최수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떨고 있었다.

잡혀 있는 손으로 최수호의 모자를 벗겼다. 어떻게 된 게 최수호는 머리가 눌려도 하나도 볼썽사납지가 않다. 최수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자 색이 옅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손길을 따라 흐트러졌다.

머리카락이 납작하게 내려앉든, 헝클어지든 똑같이 잘생긴 최수호는, 곧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이 숨 가빠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최수호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 황홀하다. 혹독한 뜀박질을 갓 마쳤을 때처럼 장기가 욱신욱신하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서늘한 바람이 뛰느라 달아오른 살갗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지금 최수호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나는 너하고 못 사귀어.”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그거였다.

“왜?”

최수호가 내 남은 한쪽 팔마저 잡았다. 크게 뜬 눈에선 불티가 튀고 팔뚝을 움켜쥔 악력이 뼈를 부러뜨릴 듯 우악스럽다.

아프다. 격렬한 반응을 예상했으면서도 순간 말을 하기 힘들어졌다.

“꽉 잡지 마. 너 손 다쳐.”

상처가 더 벌어질까 싶어 나는 최수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연하게 묻어난 핏자국을 닦아 주려 눈가까지 손을 대자 최수호가 파르르 눈꺼풀을 내렸다. 내 손이 최수호의 살을 태울 인두처럼 느껴진다.

입으로 숨을 쉴 때마다 흙먼지가 들어와 목구멍이 텁텁하다. 풀 냄새와 물비린내가 오감을 압박했다. 숨 막힌다.

“너하고 사귀다가 잘 안 되는 거 싫어서. 친구로만 있으면 더 오래 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들어도 참 흔한 답이다. 변명에 가깝게 들리는 말. 물론 최수호는 손톱만큼도 납득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안 헤어지면 되잖아.”

“그런 걸 어떻게 장담하냐.”

“난 절대 안 헤어져. 열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 내가 다 감당할게.”

“…….”

“내가, 다, 참을게.”

최수호는 한마디씩 끊어 가며 말했다. 너무 필사적이라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최수호가 자기 말대로 하리라는 걸 안다. 최수호는 정말로 나하고 사귀기 위해 어떤 희생이든 감내할지도 모른다.

“들어 봐. 친구로 아는 거하고 애인으로 아는 건 다르니까, 사귀다 보면 싸울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어. 전하고는 다를 거야. 그건 괜찮아. 만약에 잘 안 돼도 다시 친구 하면 된다고 치자. 그럼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다른 사람 얘기가 왜 나오는데? 최수호의 표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읽는 건 쉽다.

“너랑 나랑은 사귀다가 헤어져도 계속 친구 한다고 쳐. 우리 부모님은 어떡해. 형은. 최수호 너랑 사귄다는 얘기 듣는다고 나 호적에서 파낼 양반들은 아니라고 해도, 그냥 친구일 때랑은 받아들이는 게 달라지실 거 아니야.”

“너희 부모님 때문에 걱정하는 거면 내가…….”

“내가 걱정하는 건 우리 엄마, 아빠가 아니고 너야, 최수호.”

“그게 무슨 소린데?”

“너 우리 집에 못 올 일 생길까 봐 그러는 거야. 이런 말 내가 내 입으로 하면 간지럽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 너한테는 제일 가족 같은 곳이잖아. 우리 엄만 진짜 너 아들로 여긴다고. 박 여사가 너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알지?”

우리 집 식구들이 최수호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결국 최수호가 내 친구라서다.

천 관장님도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나하고 형이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을 드나들었고 웬만한 친척보다 가깝게 지냈다. 형과 나는 천 관장님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하지만 그런 천 관장님도 이젠 우리 집에서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사람이 됐다. 형의 사고는 천 관장님 탓이 아니었는데도.

관계란 연결되어 있어서, 연결 고리가 상하면 다른 관계마저 부식될 때가 있다.

“너는 내 가족이자 형제고, 친군데. 너랑 나랑 사귀면 그거 못 하잖아.”

최수호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지 않아도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나는 수호의 모든 것이다. 최수호가 맺은 관계는 모조리 나로 수렴한다.

수호한테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도.

세상에 수호가 편히 여길 수 있는 장소가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한다. 정말로 최수호한테 나만 남게 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수호 옆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최수호, 너 연예인이잖아. 남자랑 사귀는 거 숨기는 게 힘들기도 할 거고, 그러다 보면 분명히 내가 방해될 때도 올 거고.”

만약에 들키기라도 하면.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최수호가 무슨 말을 듣고, 무슨 일을 겪을지 다 상상도 안 간다. 비밀로 하든, 사람들이 알게 되든 내 존재는 수호를 고립시킬 것이다.

“방해 안 돼. 안 숨겨도 상관없어. 정말 내 일 때문에 못 사귀겠다는 거면, 일은 그만두면 돼.”

최수호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고집은.

배우 일 따위 아주 가볍게 버릴 수도 있다는 양 말해도 사실 최수호에게 일이 고작 그 정도 무게가 아니라는 걸 안다.

철들기도 전부터 카메라 앞에서 자란 애다. 배우 그만두고 싶다는 소리를 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최수호가 이제 와서 다른 직업을 갖는 건 상상이 잘 안 간다.

최수호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은퇴하겠다는 소리를 입에 올렸을 당시에도 최수호는 그 후의 계획을 얘기한 적은 없다. 상상이 안 가서가 아닐까. 내가 복싱을 그만두고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듯이.

“연기 그만두지 마라.”

내 팔을 잡은 최수호의 손을 감싸면서 나는 가능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직도 팔이 아프다. 최수호의 손에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힘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아하잖아.”

최수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한편, 최수호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반평생이 넘는 세월 동안 수호를 버티게 한 게 배우 일이었다는 건 안다.

“수호야, 나 때문에 뭔가를 포기하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내가 응원할게.”

어머니 때문에 꾸역꾸역 해 나간 일이었더라도, 배우로 사는 시간은 수호의 삶을 채워 나갔고 지금의 최수호를 이뤘다. 그런 걸 단번에 버리고 괜찮을 수는 없다.

“내가 복싱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기뻤으면 좋겠다고. 나도 그래. 최수호 너,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를 향해 부릅뜬 최수호의 눈이 일그러진다. 반박을 준비하고 있던 입술이 새하얘지도록 깨물리는 게 보였다. 젖어 가는 눈가를 닦아 주고 싶은데 잡힌 팔을 들 수가 없다.

“나하고 사귀면 네가 잃을 게 너무 많아.”

“……아니야. 그런 거.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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