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수호야. 꼭 내 옆에만 앉지는 않아도 돼.”
네가 내 옆에만 있었으면 하던 내 태도가 조금이라도 너를 묶어 뒀다면 미안해. 내가 서툴고 어려서 네가 나만 보도록 했던 거라면.
최수호는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처음 만났을 때하고 똑같다. 겁에 질려 있고 외로운, 내가 그동안 본 다른 어떤 것보다 예뻤던 최수호.
역시 나는 최수호를 좋아한다.
수호가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좋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막상 그렇게 되면 분명 쓸쓸해질 테지만, 그래도 그보다 더 기쁠 거다. 너한테 소중한 게 많이 생겼으면 한다.
나 하나 없다고 외로워하지 마.
내가 전부면 안 돼. 내가 없다고 죽겠다는 소리 같은 건 하지 마.
어떤 경우에도 수호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친구로 남아도, 그래도 나는 네가 제일 좋아. 그건 안 변해. 어차피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좋아해, 수호야.”
“…….”
“그걸로는 안 되겠냐.”
내 팔을 부러뜨릴 듯 움키던 최수호의 손이 헐거워졌다. 최수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덩치는 산만 한 게, 들썩이는 어깨가 청승맞다.
최수호는 나를 위해 전부 버려도 좋다고 말하지만, 나는 최수호를 지켜 주고 싶다.
수호를 좋아하니까.
나는 최수호가 소중하다. 너무나도.
“사랑한다.”
속삭이면서 나는 도망갈세라 최수호를 꽉 껴안았다. 숨이 막히도록 힘껏.
잔뜩 힘이 들어가 경련하는 수호의 등을 끌어안고 있으면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늘은 푸르고 먹구름 한 점 없는데 왜 폭풍우 한가운데 있는 것만 같을까.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힘으로 수호를 붙잡았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물길에 쓸리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나로부터도 지켜 주고 싶었다.
* * *
사내자식 둘이서 사람 없는 식물원에서 울고 짜고 얼싸안고 이게 다 뭔지.
고백 타임이 지나가고, 연못 앞에 최수호와 나란히 쪼그려 앉아 허탈해하는 중이다. 언제 울었냐는 듯 헤실대고 있는 최수호를 봤더니 한숨이 푹푹 나온다.
“좋냐.”
“응. 열아, 나 정말 좋아해?”
“어.”
“얼마나?”
“많이.”
“얼마나 많이?”
받아 주니까 아주 끝도 없지. 주먹을 쥐고 옆을 돌아봤다가 맥이 빠졌다.
눈가는 발갛게 부어오른 채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으니 뭐라고 할 마음도 사라진다. 나날이 최수호한테 약해져서 큰일이다.
“네가 전에 그랬잖아. 네가 죽어서 세상을 구할 수 있으면, 날 위해서 그렇게 할 거라고.”
“응.”
“나는 만약 너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고 하면 말이야.”
“나랑 같이 망할 거야?”
“아니. 세상을 구하려고 애써 볼 것 같아.”
“…….”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세상을 거뜬히 구할 인재라고 여길 정도로 현실 감각이 부족하진 않다만, 최수호가 걸렸다면 해 보는 수밖에.
최수호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난 좀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죽지 마, 최수호.”
“열아.”
“뭐, 또 이상한 말 하려고 그러지?”
“너무 키스하고 싶어.”
“친구 하자는 내 말, 어디로 들었냐. 다 삭제하고 너 듣고 싶은 부분만 남겼지.”
“둘이 서로 좋아하는데 어떻게 친구 해?”
와, 논리적이다. 할 말이 없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좋아한다고 다 털어놓는 순간 이런 전개를 예상하기는 했다.
나하고 최수호는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걸까.
“어, 열이다.”
“왜.”
“열이 말고, 열이.”
그게 무슨 해괴한 문장이냐. 눈살을 찌푸려도 최수호는 해맑게 연못 안을 가리켰다.
저 열이 말하는 거였구나.
연잎 위로 개구리 서너 마리가 뛰어놀고 있다. 개중에 뭐가 열이인지는 나야 알 길이 없지만 최수호 눈에는 정확히 보이나 보다.
“저기. 아직 살아 있네.”
“쟤가 열이야? 엄청 활기차 보이는데.”
“우리 열이는 장수할 건가 봐.”
최수호 목소리는 신이 났다. 정말 자기가 낳아 기른 자식 얘기하듯 뿌듯한 기색이다. 고가의 명품 광고 줄줄이 찍은 톱스타 최수호가 개구리 폴짝대는 걸 보고 이렇게 신나 할 일이냐.
“개구리들 다 비슷해 보이는데, 넌 쟤를 어떻게 매번 찾냐?”
“당연히 찾을 수 있지. 우리 열이가 제일 귀엽잖아.”
“아, 예.”
다 미끄덩하게 생겼구만. 귀엽기는 퍽이나 귀엽다. 어디든 내 이름만 붙어 있으면 좋은 건지.
“열이 너는 나 거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흐뭇하게 개구리를 구경하던 최수호가 물었다.
“그냥 보고 있으면 너 어디에 있을 것 같은지 대충 느낌 와.”
이렇게 말하니까 육감이라도 발휘한 것 같다. 최수호가 개구리 찾는 거랑 비슷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도 네가 찾아 줬어.”
“전에?”
“나 놀이터에 숨었을 때.”
어릴 때 얘기였네. 요즘 이 얘기 자주 나온다. 최수호가 연기하기 무서워서 연락 없이 혼자 숨어 버렸을 때 얘기다.
그때 어떻게 찾았더라. 그때도 그냥, 최수호가 거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예전부터 최수호 찾는 레이더라도 있었나 보다. 혹은 평소부터 최수호를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최수호가 어디 있을지 바로 알아차렸을지도.
“열아, 좋아해.”
“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좋아해.”
“……어.”
“좋아한다고 또 말해 줘.”
“개구리 다 듣는다. 개구리 열이 앞에서 남사스럽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럼 귓속말로 해 줘.”
“아…… 미친놈.”
요즘 얌전히 지내서 최수호가 또라이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신났네, 아주.
“귓속말은 됐고 그냥 말할게. 좋아해.”
“이름도 붙여서 말해 줘.”
“최수호. 좋아한다, 미친놈아.”
“뽀뽀도.”
“까불지 마라. 개구리 다 봤으니까 나 간다.”
“같이 가.”
벌떡 일어서서 입구로 향하는 나를 최수호가 금세 따라왔다. 점심시산이 지나서 그런지 이제는 입장하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최수호가 내 옆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짝 붙었다. 어설프게 피해 다니려고 하면서 열 받게 할 때는 언제고. 누가 너를 말리겠냐.
이번에는 나도 최수호를 밀어내지 않고 걸었다. 남들이 보면 뭐, 어쩌겠냐. 그냥 보라지.
“오늘 갑자기 왜 열이 보러 오자고 한 거야?”
“아, 그거.”
최수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침부터 식물원에 온 원래 목적이 떠올랐다.
고백받고 고백하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깜빡할 뻔했다.
본말전도로 때아닌 고백까지 해 버리긴 했다만 본래 여기까지 온 데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이미 바깥에서 얘기할 분위기는 아니게 됐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머리를 굴렸다.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자도 되냐?”
* * *
“봐. 다 터졌지.”
붕대를 벗긴 최수호의 손바닥은 엉망이었다. 피가 굳어서 엉겨 있는 곳을 닦아 내니 드러난 상처가 보기 제법 끔찍했다.
“아파.”
“엄살 부리지 마. 이거 소독하는 정도로 뭘.”
“진짜야. 아파.”
최수호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강 씻고 상처부터 확인하는 중이다. 익숙하게 구급상자를 찾아 들고 오자 최수호는 잠깐 멍하게 날 봤다. 자기가 어디다, 뭘 두는지 자기보다 잘 안다나.
“좋아한다고 말해 주면 덜 아플 텐데.”
“몇 번을 시키는 거야. 안 지겹냐, 이 패턴.”
“사랑한다고 해 주면 안 아플 것 같아.”
“아파라, 그냥.”
“나 사랑해?”
집요하다. 바닥에 앉아 얌전히 손을 내주고 있던 최수호가 소파로 올라왔다. 옆에 앉으면 될 텐데 기어이 끌어안으려 팔을 뻗어 온다.
“오늘 원래 나한테 하려던 말이 뭐야, 열아?”
“그걸 꼭 이렇게 딱 붙어서 들어야겠냐?”
“응. 못 참겠어.”
자랑이다. 최수호의 양팔은 이미 날 휘감으려 들고 있었다. 빠져나가기엔 늦었다. 이젠, 그러고 싶은지도 의문이고.
“사랑한다고 말해 줘.”
“…….”
“아까처럼 얘기해 줘.”
지금 내가 최수호한테 하려던 말을 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최수호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고, 나를 포기하지도 않을 거다.
“열아.”
“……왜.”
“난 포기 못 하겠어.”
왜 지금 최수호가 낯설게 보일까. 뭐가 다를까. 고민하는 틈에 최수호가 더욱 몸을 붙여 왔다.
“네가 뭐라고 해도,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너하고 친구로만 못 있어.”
최수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뜨겁고, 오싹할 정도로 낮았다.
뒤늦게 최수호의 달라진 점을 깨닫는다. 어느덧 물기가 마른 눈동자가 건조하게 타오르고 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라운드의 승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기울었는지도.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
커다란 손이 옆구리를 더듬으며 올라왔다. 최수호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내 몸을 붙잡았다.
“그런데 어떻게 친구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