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너 왜 여기 있어.’
가로등마저 고장 난 밤의 놀이터에서도 열이의 얼굴은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미끄럼틀 아래 웅크린 나를 쳐다보던 열이는 기꺼이 몸을 구기고 내 옆으로 들어왔다.
나는 당시 주인공의 아역으로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일일 드라마 촬영장의 혹독한 환경은 어린아이라고 대우가 썩 다르지 않았다. 사흘 밤낮 강행군에 시달리면 내가 자는지, 깨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건 내 연기였다. 오늘 촬영이 어땠는지 물은 후 짓는 어머니의 표정이 매일 받는 성적표처럼 느껴졌다.
돌아가야 한다.
반쯤 졸며 걷다 보니 길을 잃었다. 그나마 눈에 익은 곳을 따라 걷자 놀이터였다.
열이가 처음으로 나를 찾아냈던 곳.
‘최수호, 너 촬영하는 거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버거웠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열이가 내게 실망할까 걱정스러웠다. 엄마처럼.
‘그래. 그럼 됐고.’
‘…….’
‘나중에라도 힘들면 꼭 말해.’
힘들면 언제든지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게, 그래도 된다는 허락이, 내겐 어떤 의미였는지 열이는 몰랐을 거다.
“나 너 안 싫어해. 싫어한 적 없고, 싫어할 일도 없어.”
해가 다 저문 검은 밤하늘이 새파랗게 색을 달리한다. 수면 아래로 일렁이는 빛의 물결처럼, 유리 천장 밑으로 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 주저앉은 내 앞에서 열이는 숨을 씨근거리며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열이는 항상 나를 똑바로 본다.
평가하듯 어슷한 시선으로 흘깃 스치지 않고, 뜻 모를 한숨이나 고갯짓 없이.
손목을 쥐어 오는 열이의 손길은 내가 아무 데로나 흘러가지 않도록 묶어 두는 닻 같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는 다시금 묻고 싶다, 열아.
네가 나를 천 번씩 다시 버려도 나는 너를 못 버려.
“나 너 좋아한다, 최수호.”
하늘은 무섭게 드높고 바람이 볼을 베는 면도날 같다.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정면으로 얻어맞을 때처럼 콧잔등이 찡하게 아렸다.
나를 끌어안는 열이의 팔은 단단하다. 가슴을 맞대자 팔딱거리는 심장 박동이 들이닥친다.
좋아해 줘.
나를.
소중하게 대해 줘. 잃어버리지 말아 줘.
너를 좋아해도 된다고 말해 줘. 허락해 줘. 찾으러 오길 바라면서 외진 곳에 앉아 있을 때, 약속 없이도 만나러 와.
열이의 목덜미에서 흙과 햇볕의 냄새가 났다.
네가 나를 끌어안을 때 나는 정말이지 간절히 살고 싶다.
너하고 닿아 있을 때 세상은 왜 이토록 선명하고, 삶은 이다지도 생생해지는지. 네가 있다면 어디 외떨어져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느끼는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햇볕이 더웠다. 이 눈부신 생의 온도. 더께 같은 고통이 느릿느릿 씻긴다.
그리고 어김없이.
“사랑한다.”
오늘도 나의 구원자.
* * *
거실 조명이 밝은 레몬 색으로 내려앉았다.
집 안에서 밝은 곳은 거실 뿐이었다. 전면 창으로 되어 있는 거실 유리는 베란다 너머로 어둑한 밤하늘과 빌딩 숲의 불빛만 통과시켰다. 명도가 확실한 광경이 세상을 두 방향으로 갈라놓았다.
밝은 곳. 어두운 곳.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
불을 켠 열이가 소파로 다가왔다. 열이가 있는 곳은 보이는 곳이었고, 다른 곳은 보이지 않았다.
“난 포기 못 하겠어.”
생각해 보면 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
열이는 낯선 표정을 하고 있다. 흉포한 동물의 앞발에 눌린 자의 얼굴 같기도 하고, 난생처음 거친 파도를 맞은 뱃사람의 얼굴 같기도 했다.
시선의 위치가 조금 바뀌는 것만으로 이토록 다르게 보인다니 놀랍다. 아래 깔린 열이는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아니면 낮에 들은 말 때문일까.
나를 좋아하는 열이라니.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거다.
오장육부가 사납게 들끓었다.
갈증.
기어이 그렇게 원하던 말을 들어 놓고도. 또 갈증.
“그런데 어떻게 친구를 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열이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말라서 거칠다. 고개를 숙여 핥자 놀랍도록 빠르게 물기가 말랐다. 조금 더 깊이 혀를 넣으려 들었더니 열이는 바로 턱을 틀어 피했다.
“왜 못 해.”
열이가 말했다. 침착함을 되찾은 듯 단조로운 어조였으나 입술이 아직 떨렸다. 나는 그 가느다란 떨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네가 조금만 참으면 너하고 나는 영원히, 하고 싶은 만큼 친구 할 수 있어.”
그러면 우리는 가족도 할 수 있고. 나는 명절마다 너희 집에 가서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식사를 할 수가 있고. 너희 어머니가 살뜰하게 챙겨 주시는 보약을 받아먹고 감사 인사를 드릴 수도 있고.
그런 내 옆에 너도 똑같이 있을 테니 나는 언제까지고 혼자가 아니겠지.
열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나도 이해했다. 무엇을 지켜 주고 싶어 하는지 안다.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열이다.
“좋아해.”
열이는 아마, 모르는 거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억지로 뺨을 붙들고 이마를 맞대자 열이가 곤혹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옷 위로 몸을 만질 때와 같이 더운 숨이었다.
“……그만.”
희미하게 흔들리는 숨소리가 단번에 나를 모서리로 몰아붙였다. 가장 날카로운 곳으로. 몰리고 몰려서 더 피할 수도 없는 꼭짓점으로.
열이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열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만큼은 아닐 거다.
누구도 나만큼 너를 좋아할 수 없다.
너도,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할 수는 없겠지. 열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나는 신열에 들뜬 사람 같다.
쪽.
가볍게 입 맞출 때마다 소리가 났다. 열이는 구태여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혼란한 눈빛. 그 아래 잠자고 있는 나와 같은 재질의 욕망을 보았을 때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열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자 짧고 새카만 머리카락에 어리는 조명이 어떤 광휘처럼 느껴졌다.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 한 채 열이가 내 어깨를 짚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술을 축인다. 내가 핥았던 입술을 붉은 혀가 재빠르게 핥고 들어갔다. 아랫배에 사정없이 열이 오른다.
“사랑해.”
다시 키스하자 열이가 고개를 저었다. 미처 씻지 못해 아직도 바깥에서 묻어 온 먼지 냄새가 난다. 그마저 좋았다.
“최수호. 그만.”
“네가 너무 좋아.”
“……너, 내 말 들은 건 맞냐.”
“말했잖아. 상관없다고.”
“수호야.”
“열아, 너는 정말…… 너무 다정해.”
걱정이 많고 지독하게 다정한 열이.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면 열렬함에 기가 질려할까. 아니면 그마저 이해하고자 골똘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올까.
열이가 피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입 맞추었다. 가족이라니. 다른 사람들이라니. 너를 양보하고 나면 얻을 수 있는 많고 많은 삶이라니.
그런 건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나도 내가 갖지 못한 것 주변을 죽도록 배회하며 침을 흘렸을 수도 있겠다. 다정한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를 아들로 생각하는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하지만 내게는 네가 있었다. 결사적으로 매달릴 것이 내게는 이미 존재했다.
“네가 버리면 죽을 거라고 했잖아.”
“…….”
“너는 너 아니면 죽는 인간이 친구로는 안 되겠냐는 말에 대체 뭐라고 할 줄 안 거야.”
“……넌 진짜 어떻게 이렇게 말을 안 듣냐.”
“열아, 나는 지금 너하고 섹스할 수만 있으면.”
노골적인 단어에 열이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티셔츠 위로 드러난 곧은 목에 목울대가 도드라져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나는 손을 들어 야경이 아득하게 펼쳐진 거실 창을 가리켰다.
“저기서 뛰어내리라고 해도 그렇게 할 거야.”
열이의 손에 힘이 실렸다. 밀어내려는 것 같았다. 그전에 손목을 잡았다.
“열이 너도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
“나처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역시 너, 그 말밖에 안 들었지.”
“응.”
움켜쥔 손을 끌어와 무작정 혀를 댔다. 열이는 손목이 당겨지는 동안에는 손을 빼내려 열심이었지만, 손가락을 입 안에 머금는 순간 그것조차 잊은 듯했다. 일시에 힘이 쭉 빠져나간 손이 연약하게 느껴졌다.
상처가 많고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을 사탕이라도 되듯 빨았다. 아니면 신성한 것을 어루만지듯이.
조용한 공기에 새된 신음이 흘러들었다.
열이는, 떨고 있었다.
심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처럼 새빨개진 얼굴이 생소했다. 사랑스러워서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손목 안쪽에 연거푸 입술을 누르다 도드라진 뼈를 깨물기 시작하자 흐린 신음이 들렸다. 평소답지 않게 무너지는 숨소리가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고개 숙여 입 맞추자 손아귀에 잡힌 열이의 손이 꽉 주먹을 쥐는 게 느껴졌다. 키스에 열중한 사이 열이가 어정쩡하게 굽힌 무릎을 움직여 내 가슴 아래로 끼워 넣었다.
밀려난다. 억지로 거리가 벌어지는 건 당연히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무릎을 붙잡아 누르려는 순간,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긴장된 열이의 얼굴이 보여서. 역시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귀여워서 나는 열이를 강압할 타이밍을 놓쳤다. 네 사랑스러움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다.
“너는 나랑 그렇게.”
열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바깥이었더라면 하얀 입김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같이 뜨거운 숨이다.
입술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으로 젖어 반들거렸다. 손을 붙잡혀 가리지 못한 얼굴은 온통 빨간색이라 잘 익은 과일 같다.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면 갓 딴 사과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게 하고 싶어?”
노골적인 표현을 에둘러 피하는 것조차 귀여웠다. 열이는 보통 이상으로 성실하다. 하긴 어지간히 근면하지 않으면 평생 훈련의 연속인 운동선수를 하진 못했을 거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