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88)

60.

“……그래서 사귀자는 거냐?”

“그건 아닌데.”

키스에 대한 갈망은 부차적인 거다. 열이가 좋다. 좋으니까 만지고 싶다. 남들이 못 하는 걸 하고 싶다. 열이의 이런 얼굴이 보고 싶다. 남들은 못 보는 얼굴. 귀여운, 사랑스러운, 나만의, 열이.

독점욕은 손쉽게 욕망이 된다.

“사귀는 것도 하고 싶고 야한 것도 하고 싶어.”

몸을 굽힐 때면 소파 솜이 눌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몸에 열이의 몸이 닿는 게 좋았다. 주변의 어둠과 고요가 열이를 묶어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꽁꽁 묶어서 먹어 치우고 싶어. 만지고 싶어.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징그러울 정도로 끈적거리는 생각만 한다. 이대로 꽉 안고 움직이고 싶지 않다. 화산재가 휩쓸어 온다면 너를 안고 행복하게 죽을 수도 있다.

이런 마음, 너는 모르겠지.

“이런 식으로 말고.”

무릎에 지그시 힘을 주어 온몸으로 나를 밀어내면서, 열이가 소파를 짚었다. 내 밑에 깔려 있던 상체가 서서히 올라왔다. 기껏 걷은 상의가 내려와 판판한 아랫배를 덮는다.

“이렇게 어영부영 네가 밀어붙여서 넘어가는 거 말고. 더 똑바로 하자, 그럼.”

눈높이가 다시 맞는다. 열이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아직 호흡을 가누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체온으로 데워진 소파마저 뜨거웠다.

“너도 내가 어정쩡한 태도인 건 싫을 거 아니야.”

별로 싫진 않다.

어쩔 수 없이 넘어오는 거라도 상관없다. 심지어 마지못해 동정으로 옆에 있어 주는 거라고 해도 괜찮았을 거다. 수단이나 방법을 가릴 정도로 풍족한 처지가 아니다.

얼굴에 생각이 드러났는지 열이는 대답을 다그치는 대신 한숨을 흘렸다.

“나도, 너하고 하고 싶어.”

열이가 입술을 적셨다. 혀가 아랫입술을 핥고 가지런한 이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고, 입 안의 점막이 붉게 드러났다가 입술이 닫히면서 사라지는 게 시야에 선명하다. 침을 삼키느라 오르내리는 울대뼈가 이상하리만치 야해 보였다.

“이런 거.”

시선을 빼앗긴 틈에 열이가 갑작스레 가까워졌다. 굳은살이 깊이 박인 딱딱한 손이 내 뒷덜미를 감싸고, 입술이 정중하게 와 닿았다.

열이는 아주 조심스러운 키스를 했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입술이 혹여 내 입술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라도 하는 사람같이 입술을 머금었다. 입술 안쪽의 촉촉한 점막이 닿을 때면 심장이 터질 듯 팽창했다.

혀끝만 겨우 스치는 키스를 하고 난 뒤 열이가 입술을 뗐다. 나는, 어지럽다.

“최수호 너는 어떻게 되든, 나하고 이런 사이 하고 싶단 말이지.”

“……응.”

“이런, 만지고 빨고, 친구보다 더한 사이. 내가 말한 거 다 들었으면서도. 다른 거 다 상관없다고.”

내가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겠다. 만취한 기분이다. 입 안이 자꾸 말랐다.

“나는 너만 있으면 다른 건 다 상관없어.”

이전에도 수없이 반복했던 말을 홀린 듯 다시 내놓는 나를 열이는 여느 때와 똑같이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다고. 네 마음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네 마음에 대고 우기느니 내가 생각 바꾸는 게 낫겠지.”

열이의 혼잣말이 의아해 어리둥절하게 고개만 들이밀자 열이가 내 뒤통수를 마구 쓰다듬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그럼 우리 사귀는 거야?”

“아니.”

그렇게 하라는 순순한 앞의 말과 달리 뒤는 다시 거절이다. 종잡을 수 없다.

“아직 안 돼.”

“왜?!”

“해결해야 하니까. 내가 말한 것들.”

해결이라고. 뭘, 어떻게?

아직도 의아한 나와 달리 열이는 결단을 마친 분위기다.

“우리 부모님하고 형, 너 배우 일. 그리고 나. 그거 다 해결하고 나서 사귀자.”

“열아, 무슨 소린지 잘 못 알아듣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사귀고 싶다며.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너 하나 책임질 수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열이 너는 그냥 내 옆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열이가 내 목 뒤를 꽉 쥐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열이는 단호하다. 마우스피스를 끼고 곧 올라야 할 사각 링을 노려볼 때만큼이나.

“해외 가지 마.”

“……어?”

“일 때문에 가는 건 어쩔 수 없어도 1년씩이나 나가 있진 말라고. 오늘 하려던 말이 그거야.”

아침부터 갑자기 밖에 가자길래 할 말이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정반대의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같이 있는 동안 쭉 긴장했었는데.

나는 네가 나를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

“내 옆에 있어.”

“…….”

“옆에 있어 줘. 부탁한다.”

하지만 열이는 내게 부탁하고 있다.

너한테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책임질게. 혹시라도 네가 나 때문에 배우 커리어 말아먹고 나 우리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내가 너 굶는 일은 없게 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아라.”

책임진다는 게, 말 그대로 내 인생을 책임진다는 거였다니.

비로소 열이가 어디까지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실감이 났다.

놀랐다. 언제나 진중하고 성실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열이답게, 열이는 나도 생각하지 않는 내 미래를 열심히 궁리하고 있었다.

나도 모아 놓은 돈은 많은데. 이런 어중간한 대답이나 떠올리는 나와 다르게.

하지만 당장 다음 커리어도 결정 못 했다. 10년 후, 20년 후에 뭘 할 건지 물으면 대답이 궁색하다.

만약 정말 배우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뭘 할 건지, 뭐가 될 건지, 어떤 식으로 열이하고 살아갈 건지.

나는 확실히 몰랐다.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을 위한 커리어였다.

좋아하는 건 열이뿐이라서 내 인생에 대한 애착조차 긁어모아야 겨우 한 줌이다.

“그거 해결할 때까진 정신 못 팔아.”

그런 내 인생을 너는 보호하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진 키스하지 마.”

매서운 펀치라도 맞은 양 머리가 얼얼하다.

“만지지도 마.”

한 방 더.

“그때까진, 친구야. 너하고 나.”

마지막 카운터펀치.

나를 때려눕히고도 열이는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다.

그러니까 그때가 언젠데?

다그쳐 묻고 싶은 걸 겨우 억누르고 있다. 무슨 결심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친구 하자’보다는 ‘좀 참아라’가 훨씬 나은 단계인 게 틀림없다. 고지가 코앞인데 여기서 망칠 순 없다.

“열아, 나는 진짜로.”

“수호야.”

열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나는 패배를 예감했다. 다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열이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너 혼자 참거나 다 감당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좋아하니까.”

거실에 밝힌 불이 모조리 열이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연노랑의 빛이 오로지 열이의 머리 위로만 내리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만 있으면 괜찮다고 했지. 알았어. 나는 네가 다 가졌으면 했지만, 네가 선택한 게 나라면.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복하게 해 줄게.”

열이가 내 뒤통수를 단단히 쥐고 끌어당겼다.

열이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인공 등의 불빛, 그리고 나.

나는 열이가 처음 링에 오르는 걸 봤던 순간을 떠올린다.

경기장만 비추는 하이라이트 속으로 거침없이 올라가던 열이.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그 단호한 모습.

빛은 다시 일곱 개로 갈라지고…….

“쉽지 않겠지. 나보다 수호 너한테 훨씬. 잘못되면 누군가 손가락질할 수도 있고 혹시 네가 좋아하는 일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 그래서 외롭거나 힘들어질지도 모르고, 오랫동안 숨겨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수호야.”

눈이 부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평생 최수호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평생.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발음이었다.

누가 나한테 이런 약속을 해 준 적 있었나. 평생에 다른 누가 비슷한 약속이라도 해 줄 가망이 있을까.

나의 평생은 내 마음대로 걸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생은 그 정도로는 살 수 없다. 나를 내던지는 것 정도로는 겨우 값을 부를 최소의 자격을 얻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지만 똑같이 평생을 걸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동등한 마음을.

심장이 그대로 폭발할 것처럼 아팠다. 혈류가 지나치게 빨라 살갗에서 피가 흐를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귀를 때릴 때마다 깨닫는다. 나는 분명하게 살아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도, 똑바로 살아 있다.

열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마가 맞닿았다. 똑바로 뜬 눈이 바로 앞에서 나를 향해 반짝이고 있다. 곧잘 인상이 사납다는 소리를 듣는 날카로운 눈이었다. 베일 것 같다. 잡힌 어깨가 아플 정도다.

“무서워하지 마, 최수호.”

그렇구나.

열이의 눈빛만큼이나, 목소리만큼이나 단단한 무언가가 가슴에 뿌리내렸다. 어린 시절 열이가 나의 지겨운 인생을 가르고 들어왔을 때하고 똑같이.

열이는 절대로 날 버리지 않을 거다.

“좋아해, 열아.”

“어. 알아, 나도.”

“정말 좋아해.”

“나도, 한다.”

정신없는 고백에 쑥스러운 듯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애를 위해 살자. 최선을 다해서.

나도 모르게 팔을 잡아당기자 대답을 재촉한다고 여겼는지 열이가 미간을 구겼다가 폈다. 나는 열이의 물결치는 볼의 근육과 속눈썹 한 올의 떨림까지 기억하고자 했다. 언제까지나 이 순간을 가지고 살아가자, 다짐하면서.

“정말로 좋아해.”

약해도, 한심하더라도, 누군가 손가락질하더라도, 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도. 미움받고, 버림받고,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그리하여 지금껏 쌓아 온 삶이 한갓 가치 없는 시간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지라도.

“나도 좋아해, 최수호.”

최선을 다해서 살자.

겨우 한마디일 뿐인데. 한 사람의 마음일 뿐인데.

열이가 웃었다. 멋쩍게 눈썹을 일그러뜨려 가면서.

나는 세계가 나를 끌어당기는 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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