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88)

ROUND. 정열

61.

삐삐삐.

알람이 빠르게 울렸다. 동시에 눈이 반짝 뜨였다.

집이었더라면 당장 일어나 세수부터 하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꼼짝할 수가 없다.

한 덩어리가 되다시피 달라붙어 있는 최수호 때문이다.

덩치도 큰 게 안고 있는 통에 무겁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어 있는데 이걸 매달고 잠은 어떻게 잤나, 나도 내가 신기할 지경이다.

익숙해져서 그런가. 이것보다 훨씬 작은 침대에서도 서로 뒤얽혀서 자곤 했으니까.

“최수호. 야, 일어나.”

“10분만 더 자자…….”

“그럼 넌 더 자도 되니까 팔이나 놔 봐.”

여전히 꿈쩍도 안 한다. 다 들었으면서. 그림처럼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있는 최수호를 보고 있자니 확신이 들었다.

“너 계속 깨어 있었지?”

나보다 한참 전에 깨어 있던 게 분명하다. 잠에 취한 상태도 아닌데 이러고 있는 거다, 지금.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최수호가 씩 웃었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다. 어이가 없다.

“일어나라, 좋은 말로 할 때. 나 나가야 돼.”

“가지 마.”

“안 가면. 너하고 종일 이러고 있을까 봐서?”

“응.”

아직도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뻔뻔하다. 어제도 자고 가라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매달리는 바람에 넘어갔는데 아침부터 다시 이러고 있다니.

“좋냐.”

“응.”

어제와 똑같은 대화였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만 천 번은 말한 것 같다.

‘열아, 나 좋아해?’

‘어, 좋아해.’

‘나 진짜 좋아해?’

‘어, 좋다고.’

‘얼마나 좋아?’

‘최수호, 제발 잠 좀 자자. 부탁한다.’

덕분에 잠은 늦게 잤지만, 아침부터 행복에 겨운 최수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보람이 있는 것도 같다. 요즘 계속 죽상이었으니까.

이런 최수호는 오랜만이다.

“나도 좋네.”

“뭐가? 내가?”

“어, 너 좋다니까 나도 좋다.”

최수호의 눈이 커졌다가 곧 초승달 모양으로 접혔다. 이 자식은 웃는 것도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웃지.

손가락으로 최수호의 눈매를 쓸자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을 적셨다. 속눈썹이 손톱 부근을 비질하며 지나간다.

최수호를 만지면 다른 사람과 닿아 있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최수호만이 일깨우는 감각이 있다.

“그러면 오늘은 열이가 좋아하는 나하고만 같이 있으면 안 돼?”

“너 좋아하니까 가야 하는 거야.”

콧잔등을 튕기자 최수호가 과장되게 아픈 표정을 지었다. 좋단다.

나로 인해 누군가 이렇게까지 행복해하는 걸 보는 건 역시 이상한 기분이다. 내가 최수호를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자만하지 말자는 나름의 다짐도 하게 된다. 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최수호가 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더라도, 수호의 행복이 협소해지게 두지 말자.

예전엔 링 위에서 이기는 것만 생각했다. 쪽팔리게 지지 말자. 배운 대로 하자. 이기자. 어떨 때는 그냥 생각을 안 했다.

한데 지금 만약 경기장에 오른다면 최수호의 얼굴이 가장 많이 생각날 것 같다.

“사랑도 해?”

최수호가 어느새 내 위로 올라탔다. 얜 왜 이렇게 나한테 올라타는 걸 좋아하는 건지. 일단 못 도망가게 잡아 두는 게 이득이라는 생각이라도 있나.

“어젯밤하고 똑같은 문답 할 거면 사양한다. 대답, 충분히 해 줬잖아.”

“어제는 어제잖아.”

“같은 말 하도 해서 외우겠다. 내가 무슨 인공지능 챗봇이냐? 대답하는 기계야?”

“꿈이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

“지금 네가 내 앞에 있는 것도 다 꿈만 같아.”

잘도 이런 말을.

그것도 저런 얼굴로.

갓 잠에서 깨어나 흐트러진 최수호는 지난번 만취했다가 일어났을 때 그랬듯 홀로 자체 발광 중이었다.

체급 차이 때문에 못 밀어내는 게 아니라 최수호가 가진 남다른 공격력에 밀리고 있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시켜 줘?”

“응.”

한껏 감상적인 눈빛으로 말하는 최수호의 뺨을 더듬어 보았다. 피부도 좋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낮밤 바뀌는 건 예사인 놈이. 역시 유전이 최곤가.

내 손이 닿자마자 최수호가 눈을 감고 본격적으로 손길을 만끽했다. 고양잇과였다면 갸르릉, 목 울리는 소리라도 냈겠다.

“자.”

보드라운 뺨을 쥐고 꼬집어 당기자 그림같이 잘생긴 얼굴이 더 친숙해졌다.

“여라, 나 아흔데.”

“아프냐? 꿈 아닌 거 알겠지?”

“모흐겠어.”

“고집은.”

상체만 위로 올려서 최수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최수호가 녹아내리듯 내 품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무겁다.

“만족했냐.”

“행복해서 당장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죽기만 해. 그 소리, 그만하라고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말 뒤집는 게 호떡 뒤집는 것보다 쉽다. 최수호의 팔이 다시 꾸물꾸물 내 허리를 조여들었다. 마구잡이로 퍼부어지려는 입맞춤을 피하려 최수호의 이마를 잡고 밀어내느라 다시 한바탕 전쟁이었다. 폭약고에 불을 붙인 내가 죄인이지.

“한 번만, 키스만.”

“친구끼리 키스를 왜 해!”

“친구끼리 뽀뽀는 해?”

“그건. 아, 몰라. 한다고 쳐. 정 그러면 앞으로 키스고 뽀뽀고, 다 하지 마.”

“그건 싫어…….”

“우는 소리 내도 소용없어. 사귈 때까지 너랑 이 이상 안 해. 나 나가야 한다고 했지. 이제 놔라.”

“오늘 어디 가는데?”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최수호의 팔을 억지로 떼어 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최수호가 내 이름을 연신 부르며 앓거나 말거나,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너랑 사귈 준비 하러 간다.”

내 옷자락이라도 쥐려던 최수호의 손이 비로소 멈췄다. 무슨 소리인지 표정으로 반문하는 최수호에게 나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천 관장님 뵈러.”

* * *

아기자기하다.

천 관장님네 체육관을 앞에 두니 드는 생각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애들이 주로 오는 체육관이라 그런지 대문부터 참 오밀조밀 알록달록하다.

거인이네, 괴물이네 하는 호칭과는 영 안 맞는 모습이다. 누가 보면 어린이집인 줄 알겠다. 예 사범님 소싯적 별명도 한 살벌 했다고 들었는데.

“열아, 왜 서 있었어. 얼른 들어와.”

도착했다고 전화를 한 것도 아닌데 체육관 앞에 선 지 얼마 안 돼 천 관장님이 문을 열었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거대한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단 모습이었다.

천 관장님의 목과 다리에 애들이 팔다리를 다 써서 매달려 있다. 동그랗고 새까만 세 쌍의 눈이 나를 향해 반짝인다.

“초등부 애들이야. 얘들아, 인사해야지.”

“안냐세요.”

“안영세요.”

“안녕하세요.”

발음이 제각각인 인사가 와르르 쏟아진다. 그 와중에도 천 관장님한테 야무지게 매달려 있는 모습들을 보아하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수업하는 중이신 거 아니에요? 사무실에서 기다려도 돼요.”

“아냐. 한가해. 얼른 들어와.”

천 관장님이 안쪽으로 팔을 휘저었다. 왕년의 헤비급 챔피언한테 아무렇게나 매달려 있는 애들보다 무서운 건, 애 셋을 몸에 달고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천 관장님이다.

“정식 수업은 아니고 애들 놀러 온 거야.”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나하고 형도 운동하는 시간이 아닌 날인데 체육관으로 달려가서 놀곤 했으니까. 괜한 향수가 인다.

의미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힐긋거리던 천 관장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열 선수 왔다!”

줄넘기를 하고 있던 인영 하나가 천 관장님의 목소리에 반응해 재빠르게 다가왔다.

머리를 아주 짧게 친 여자아이였다. 뛰어온 여자애가 내게 펜과 글러브를 내밀었다.

“사인해 주세요.”

얼굴이 군고구마처럼 벌겋다. 잔뜩 힘이 들어간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팬이에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는 데서 긴장이 느껴진다. 시합 올라간 지 한참인데 팬이라니. 황 감독님한테는 미안하지만 감독님한테 들었을 때하고는 사뭇 다른 감정이 일었다.

“나 알아?”

“애들 폼 잡는 거 가르칠 때 네 영상도 보여 주거든.”

천 관장님이 부연했다. 나 배울 때도 국내외 챔피언 영상을 보여 주면서 코칭해 주셨던 기억은 나지만, 내 영상을 보여 주셨다니 어쩐지 쑥스러웠다.

내가 한창 복싱할 때를 봤을 여자애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굽히고 글러브를 건네받으니 더욱더 쑥스럽다.

“복싱 좋아해?”

“네.”

여자애가 다부지게 양 주먹을 쥐었다.

“오빠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요.”

“……왜?”

“안 쓰러지니까요.”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하도 빛나서 별 같다. 뭐라고 대답해 줄지 고민하다 사인한 글러브를 돌려주며 덧붙였다.

“아니야. 나도 쓰러져.”

여자애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리다 다른 질문을 내놓았다.

“복싱 다시 안 하세요?”

“다시 할 거야.”

“정말요?!”

반문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천 관장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애들이 다 이쪽을 바라봤다. 물론 천 관장님도 그렇다.

“언제부터요?”

“오늘.”

내 대답에 천 관장님이 입을 떡, 벌렸다.

여자애가 손뼉까지 치면서 환호하는 게 귀여워 손바닥을 내밀었더니, 그 애는 야무지게 주먹으로 내 손바닥을 때렸다. 펀치력으로 봐서 장래의 챔피언감일지도 모르겠다.

애들이 천 관장님이 들고 온 주전부리를 하나씩 입에 물고 저들끼리 운동을 하러 흩어진 다음에도 천 관장님은 나한테 눈짓만 열심히 보내시는 중이다. 약간 넋이 나가 보이기까지 한다.

“왜요.”

“으응? 내가 환청을 들었나, 하고 있었지.”

벤치에 앉아서 묻자 천 관장님이 나른한 숨과 함께 대답했다.

“갑자기 온다고 연락했을 때 이미 짐작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그렇게 앞서 나가지는 않았어. 물론 조금, 조금은 기대했지만.”

“아무렴요. 저 친구들이 미래의 대한민국 복싱계를 책임질 새싹들이에요?”

“그럼 좋고. 원래 유도하는 애들인데 복싱도 재밌어 보인다고 해서 가르치는 중이야.”

내 말에 천 관장님이 껄껄, 웃었다. 애들이 복싱 재밌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신나하셨을지 보인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천 관장님은 복싱을 좋아한다. 우리 형제가 협회의 제약이나 복잡한 팀 계약 문제에서 벗어나 오롯이 운동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천 관장님이 맨땅에 헤딩해 가며 터를 닦아 놓은 덕이었다.

“저 쓰러졌을 때 병원 오신 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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