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88)

62.

“들었어?”

천 관장님이 머쓱하게 코끝을 긁었다. 형은 관장님이 복싱계를 위해 나를 복귀시키려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천 관장님은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다.

난 안다. 천 관장님한테 들은 적 있으니까.

“형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진이 입장에선 내가 미울 수도 있지. 이해해.”

“예전에 저한테 하신 말 기억나세요?”

“응?”

“복싱을 버릴 때는 꼭 네 손으로 버려라.”

천 관장님이 형을 따라 복싱을 그만두겠다는 나를 찾아와서 했던 이야기. 지금까지 토씨 하나 빠짐없이 기억한다.

“저는 한 번도 제 손으로 복싱을 버린 적 없더라고요. 버리고 싶었던 적도 없고.”

당장 남들보다 잘한다고 내세울 만한 건 그거다 싶기도 하고. 이왕 책임지기로 했는데 진짜로 입에 풀칠만 하게 만들 수는 없다. 적어도 최수호 지금만큼은 좋은 거 먹이고 입혀야 진짜 부양하는 거지.

설사 복싱으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복싱하고 끝장을 봐야 다른 데 열중할 수 있다. 내 손으로 버릴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겠다.

나 때문에 최수호가 불쌍해지지 않게 할 거다. 절대.

그러려면 링 위로 가야 한다.

“관장님, 혹시 저 쫓겨나면 여기서 재워 주실 수 있어요?”

“그거야 쉬운데, 진이가 괜찮다고 할까?”

“관장님이랑 저랑 형한테 쌍으로 욕먹는 거죠.”

“부모님은. 괜찮겠어?”

“모르겠어요.”

아빠야 그렇다 쳐도 엄마는 내가 운동하는 것도 싫어 죽겠다는 분 아닌가. 에휴,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근데 안 괜찮아도 복싱 다시 할 거예요.”

형한테 바로 가지 않고 천 관장님한테 들른 이유가 있다.

“응원해 주세요.”

천 관장님이 커다란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손등을 맞부딪히고 일어섰다. 응원이 필요했다. 이다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까, 더.

형은 나를 쓰러뜨릴 것이다.

* * *

형의 체육관은 아직 닫혀 있었다. 안에 불은 켜졌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유리문이 바로 열렸다. 얼마 전 출입 금지를 선언당했던 체육관에 발을 들이자니 금기를 깨는 기분이다.

체육관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형의 챔피언 시절 사진과 짧게 축약한 경력 일람이다. 형은 걸기 싫다는 걸 주변 설득으로 걸어 뒀다.

처음 이 체육관을 열었을 때 형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다른 일을 구하기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후유증의 경과를 지켜봐야 했고, 어릴 때부터 승승장구했던 운동선수답게 다른 진로를 생각해 둔 적도 없었다.

안전책을 마련해 두기에 형은 지나치게 유망했다. 그게 외려 불운으로 작용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미 어린 나이에 대회를 휩쓸어 간 국제 경기 메달리스트,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무패 신화의 초신성, 거물급 코치까지 버티고 있는 유망주에게는 아무도 ‘잘 안 될 경우’를 상정하지 않는다. 밥 먹고 복싱만 하기에도 바빴다.

형도 언젠가 체육관을 열거나 코치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은퇴 이후의 까마득한 미래의 계획이었을 거다.

선수로서 절정일 때 형은 바닥으로 내려와야 했다. 진 것조차 아니었다. 모든 게 사고였다. 부당한 불행.

형은 재활을 포기하고 모아 둔 상금으로 체육관을 열었다. 걱정하는 부모님께 형은 제대로 밥벌이하려면 그나마 이 길이라고 했었다.

복싱은 형을 버렸지만, 형은 복싱을 버릴 수 없었다.

“형.”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구를 정리하고 있는 형이 보였다. 밸런스 볼을 만지다 말고 형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창문을 가로질러 들어온 체육관 안의 그림자가 형을 덮고 있다.

다시는 링에 오를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형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체육관 오지 말라고 했지.”

형이 내 쪽을 쳐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말은 그렇게 해도 화나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손으로는 기구 정리에 열중 중이다.

“수호네에서 잤다며. 둘이 얘기 잘 했냐.”

“최수호 해외 안 나간대.”

“……정말로?”

되물은 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수호 없다고 절절 앓는 꼴 안 보게 돼서.”

“형, 내 걱정했냐.”

“어딜 봐도 수호보다는 네가 더 걱정이지. 수호야 자기 자리 잘 잡고 있는 앤데.”

반박할 수가 없네. 허접하다고 놀리지만 최수호는 몇 년째 자기 커리어에서 톱급을 유지 중인 인재 아닌가. 난 테스트 점수도 파탄 난 재수생이고.

형이 날 걱정하는 것도 이해한다.

나도 형을 걱정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형을 더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 복싱 다시 하려고.”

내 목소리가 체육관을 가로질러 나간다.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까지 뚜렷하게 보이는 조용한 체육관이 말은 명료하게 울렸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형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다시 말해 봐.”

1미터쯤 되는 거리를 남기고 형이 멈춰 섰다. 체대 입학 때문에 형하고 질리게 다툴 때 계속 봤던 표정이었다. 열 받고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얼굴.

“복싱 다시 하겠다고.”

“정열. 제정신이냐?”

“제정신 맞고, 형이 뭐라든 이번엔 진짜 다시 하기로 했으니까 설득할 생각, 하지 마.”

형의 뺨이 꿈틀했다. 트레이닝복으로 덮인 흉곽이 크게 오르내리는 게 보인다. 스파링용 링에 걸려 있던 글러브를 붙잡은 형이 그대로 내 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얼굴 정면으로 날아오는 글러브를 간신히 잡았다. 형은 이미 다른 글러브를 끼는 중이었다.

“글러브 껴.”

“미쳤어? 갑자기 왜.”

“복싱이 그렇게 좋다는 데, 복싱으로 정신 차리게 해 주는 수밖에 더 있어? 껴.”

“정진. 이래야겠냐?”

“왜. 병신 된 새끼라 네 상대 안 될까 걱정이야?”

“말 좀 그따위로 하지 마라.”

“너 이제 나한테 말버릇도 가르치냐?”

“형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나면 후회하잖아.”

천 관장님한테 모진 말 해 놓고 며칠을 끙끙거렸으면서.

형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링 줄을 넘어 링 위로 올라갔다.

“올라와.”

“보호구 차.”

“깝치지 말고 올라와라, 정열.”

“형이 안 차면 나도 안 차.”

“그래, 씨발. 알았으니까 올라오기나 해. 말로 할 때.”

열 받아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이거지.

나는 들고 있던 헤드기어를 덩달아 바닥에 팽개쳤다. 어차피 말려야 듣지도 않을 상태다.

형이 이렇게까지 열을 내는 일은 드물지만, 나하고 치고받을 정도로 열 받은 상태면 어차피 눈 돌아갔다는 소리다.

겉옷을 벗고 링으로 들어가자 심장이 세게 뛰었다.

이런 건 경기도 아니다. 헤드기어도 안 끼고 머리에 열 차서 주먹질하는 경기가 어디 있나.

복싱은 주먹이나 날리면서 사람 패는 짓이 아니다. 공격과 방어의 게임이다. 천 관장님이 우리한테 처음 복싱을 가르칠 때부터 하시던 말씀이었다.

형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만드는 형에게 화가 났다.

시합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기라도 한 것처럼 형은 곧바로 거리를 좁혀 왔다. 바로 전진 스텝이다.

얼굴로 들어오는 잽. 더블 잽. 현역 시절로 따지면 형이 나보다 윗 체급이다. 잽의 무게가 다르다.

몸통을 가볍게 맞아 보고 새삼 깨달았다. 시합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형은 복싱을 쉰 적은 없다. 지켜보고, 가르치고, 스파링을 계속했다.

형은 복싱을 떠난 적이 없다.

“너는, 등신 새끼야. 나 이 꼴 난 거 보고도 복싱 하겠다는 소리가, 나와?!”

레프트 훅을 뻗으면서 형이 고함을 질렀다.

왼손으로 공격하는 사우스포, 속사포같이 퍼붓는 펀치에 잰 듯한 정확도.

정진은 유명한 인파이터였다. 가드를 뚫고 들어오는 주먹은 날카롭고 무겁다.

상대방을 일어설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묵사발로 만들어 뭉개 놓는 게 형의 경기 방식이었다. 관중은 환호했고, 형은 정말로 무패의 화신 같았다.

“집안에 글러브 잡았다가 신세 망친 놈이, 둘이 돼야 속이 시원하겠냐!”

악다구니를 써 가며 훅을 쏟아 낸다. 보디 블로가 왼쪽으로 들어왔다. 더 위험한 데로 치다니, 진짜 해 보겠다는 뜻인가 싶어 머리로 열이 뻗쳤다.

“내 인생이잖아!”

몸통으로 버티던 걸 집어치우고 똑같이 주먹을 뻗기 시작하자 형이 주춤했다. 진심으로 달려들고 싶지 않았다.

형하고 나는 파이팅 스타일도, 버릇도 비슷했다. 같은 스승 아래서, 서로 보면서 자랐으니까. 형이 어떤 식으로 치고, 어디서 약한지 잘 안다.

형이 어디를 다쳤는지도. 약점이 어딘지도.

“나도 평생을 운동했어. 철들기 전부터 이것만 보고 달렸다고!”

1년을 후유증으로 앓았던 사람이다. 기술이 뛰어나도 한계가 있다. 헤드기어가 없어 보디 블로만 치면서도 글러브를 통해 전해지는 타격감에 소름이 끼쳤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내가. 형한테.

그런데도 해야만 했다. 나는 형한테 이겨서, 다음 경기로 가야 한다.

“시작한 건 형 때문이었을지 모르는데, 나도 내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계속한 거야. 나도 열심히 했다는 거 옆에서 봤던 형이 더 잘 알잖아.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설 경기 정도는, 내가 고를 수 있는 거 아니야?”

버티던 형이 얼굴로 뻗어 오는 라이트 훅을 흘려보낸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형은 뛰어난 복서였고 성실한 선생이었다. 그리고 다친 사람이었다. 생아마추어들을 가르치는 정도라면 몰라도, 형은 이제 매치에 설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승패는 확실했다. 내가 할 마음만 먹으면.

“솔직하게 말해 봐. 형이 나였으면 그만뒀을 것 같아? 다친 게 나였으면, 내가 그만두라고 했으면 형은 그만뒀어? 재활할 때 말렸으면 안 했을 거냐고.”

비틀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잡는 형을 링 구석까지 몰아가면서 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벅차오르는 날숨을 토하고 또 토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아직도 하고 싶어 하는 거, 다 아는데……!”

형에게 카운터를 날리는 대신 모서리의 주 기둥을 때리자 링 줄이 일제히 흔들렸다.

내 자세가 풀리자마자 형이 스트레이트를 쳤다. 머리가 세차게 돌아간다. 순식간에 입 안에 피 맛이 번졌다. 고개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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