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너랑 찍는 거 괜찮을 것 같다고.”
본격 키스신에 베드신 비슷한 것도 있으니 차라리 아는 얼굴하고 찍는 게 낫다. 동성애에 관한 생각 운운하던 진이 형의 질문이 이 사태를 예견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열이는 좋은데 다른 남자하고 붙어 있는 건 싫다. 다른 여자도 싫지만.
고양이나 개라면 괜찮을지도. 안고 있으면 따뜻하고 복슬복슬해서 기분이 좋으니까. 뽀뽀도 기분 나쁘지 않다.
양용배는…….
“뭐, 뭐, 뭐어? 나랑 찍는 거 좋다고?”
좋진 않지만 엄청나게 싫지도 않다. 고양이나 개 정도?
“정열, 방금 최수호가 한 말 들었냐? 정말 최수호가 자기 입으로 한 얘기 맞아? 쟤, 최수호 아닌 거 아니야?!”
아니다. 고양이나 개가 더 낫다.
하지만 고양이나 개하고 황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애정신을 찍을 수는 없으니 열이를 제외한 인간 선택지 중에서는 양용배가 그나마…….
생각해 보니 불쾌하다. 그래도 그나마, 낫다. 불쾌하지만…….
“수호 씨, 용배 씨는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표정 되게 모멸적이거든. 표정 관리 좀 해.”
황 감독님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네…… 뭐……. 애정신을 뺄 수 있는 영화도 아니니까요.”
굳이 빼 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맞아야 하는 매라는 생각 정도였다.
“뭐야. 둘이 뭐라고 속닥거렸어요.”
“용배 씨가 해 주면 차암 좋겠다고. 그러고 보면 수호 씨랑 용배 씨 연기 합 잘 맞는다는 소리도 많았잖아? 둘이 같이 찍은 작품만 서너 개 되지? 겹치는 팬들도 많다며.”
양용배의 입술이 비죽비죽 올라갔다. 대놓고 웃기는 싫은데 신나 죽으려고 하는 게 다 티 난다. 저래 가지고 연기는 어떻게 하는 건지 참 신기하다.
“그으래요?”
양용배가 이번에는 나를 힐긋거렸다. 어쩌라는 건지.
“그렇지, 그렇다니까.”
황 감독님은 내 등 뒤로 손을 뻗더니 슬그머니 등을 콕콕, 찔렀다. 어쩌라고요.
입을 다물고 있자 황 감독님의 손이 약간 더 빨라졌다.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같다. 슬슬 아플 지경이다.
“시간 있으면 같이하든가.”
“내가 시간이 어딨냐. 나 같은 유명 배우가, 짜식아.”
“아까는 이 영화 촬영할 즈음에는 한가할 수도 있겠다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냥 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등을 쪼아 대고 있는 황 감독님의 손길이 집요했다.
“대표님한테 까일 각오까지 하고 들어가는 영화에 상대역으로 나를 부른다는 거는, 내가 대표님한테 꼰지를 거란 생각은 없다 보다. 나를 향한 신뢰, 그런 건가?”
여전히 우쭐한 얼굴로 양용배가 나불나불 입을 털었다.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한 얘기 아닌데. 애초에 소속사 배우가 작품 하는 게 대표님한테 숨길 수 있는 내용도 아니고, 비밀이라도 지켜 줄 생각이었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 너도 나를 내심은 믿을 만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거?”
“…….”
“사실은 아닌 척 마음에 담아 뒀던 우정이라든가?”
양용배는 왜 저렇게 친구에 집착할까. 친구가 없나. 난 열이가 있어서 괜찮은데, 양용배는 친구가 없어서 힘든가?
고민하느라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더니 황 감독님이 손을 펼쳐 내 등을 두드렸다.
“친구, 맞지? 둘이.”
“…….”
“하긴 두 사람 데뷔작도 같잖아. 친구지, 친구.”
데뷔작 같다고 다 친구면 저는 십년지기만 수십 명은 되는데요. 스태프까지 합치면 백 명도 노려볼 수 있겠다.
“친구요…….”
마지못해 중얼거리자 황 감독님과 양용배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갑게 꽂혔다.
이 중에 열이 빼고 다른 사람하고 꼭 친구를 해야 한다면, 양용배보다는 차라리 황 감독님하고 친구이고 싶다.
하지만 황 감독님의 저 초롱초롱한 눈빛이 뭘 말하는 중인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둔하지는 않다. 양용배가 캐스팅에 합류하면 상황이 훨씬 괜찮아질 거라는 것도 익히 예상이 간다.
“친구니까…… 이런 작품도 같이하고 싶은 거죠, 아무래도.”
한없이 떨떠름하게 말했는데도 효과는 볼만했다.
“그으래? 역시 너도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짜식, 그냥 싸가지가 없어서 말을 그따위로 했던 거지?”
“…….”
“그렇다면 또 내가 우정 출연. 그거 해 줘야지.”
“양용배, 우정 출연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와아! 좋다, 좋다. 다른 주연은 용배 씨로 낙점!”
“아직 한다고 한 건 아니고요. 생각을 해 보겠다는 거죠, 생각을. 저 톱스타예요. 바로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릴 수가 없다고요.”
“톱스타 혁준 씨가 내 영화에 나와 준다고 생각만 해도 떨려서 눈물이 다 나네. 사실은 말이야. 혁준 씨 아역 시절부터 난 싹이 보인다고 생각했어. 위대한 배우가 될 줄 알았단 말이지. 고르는 작품도 봐. 보는 눈이 오죽 좋아?”
“뭐, 제가 그렇긴 합니다.”
“혁준 씨 하면, 또 흥행 보장 수표 아니겠어? 혁준 씨만 와 준다면 모든 게 일사천리지. 나 이 영화에 사활을 걸었어. 혁준 씨만 와 준다면 이 한 몸 불사를게.”
“그렇게 저를 원하신다니 또 마음이 흔들리려고 그르네요.”
“장혁준! 장혁준! 최고의 배우! 추천합니다!”
“하하하! 최고의 배우! 그게 바로 접니다!”
단순한 놈. 내일쯤 양용배가 출연 계약서에 도장 찍는다고 해도 놀랍지 않겠다.
신명이 난 황 감독님과 왠지 모르게 그보다 더 신나 있는 양용배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혀를 차게 된다.
열이는 입을 다문 채 그런 양용배와 황 감독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열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괴고 눈썹을 움찔거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다.
“생각해 봤는데 정열 씨, 아르바이트 자리 필요하면 우리 촬영장에서 일하는 건 어때. 단역 겸 액션 조언.”
황 감독님의 시선이 열이에게로 넘어갔다.
“저 급여 줄 돈이나 있으세요?”
“상처다. 내가 그렇게 가난해 보여?”
“본인 입으로 가난한 영화인이라고 하셨잖아요.”
“명색이 최수호, 장혁준 주연인데, 투자자 유치가 이제는 꿈이 아니지!”
“안 돼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외치던 황 감독님이 내 반대에 다시 팔을 내렸다.
“절대.”
아예 못 박고 나니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왔던 황 감독님의 주먹이 무릎에 다소곳이 안착했다.
“어어? 본격적으로 뭘 찍자는 건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 정도로.”
“싫어요.”
“정열 씨는 복싱도 하니까 체육관에서 폼 보여 주면 좋지 않겠어. 아직 복싱계에 정열 씨 팬도 많으니까…….”
“열이랑 영화 절대 안 찍어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황 감독님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알겠지만 완전히 잘못 짚었다. 열이가 영화에 나온다니, 결사반대다. 열이가 하려고 할 리도 없지만…….
“할게요.”
열이가 입을 열었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재밌겠는데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란 이런 상황을 일컫는 걸 거다.
“어얼. 정열, 영화 데뷔하는데.”
충격에 빠진 사이 양용배가 한껏 과장된 투로 손뼉을 쳤다.
“정열 씨가 좋다면……. 사실 복싱 쪽은 안 그래도 자문을 받고 싶었거든.”
황 감독님이 내 안색을 살피다 어영부영 답했다.
열이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열이가 내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전적으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지금 반대하면 그대로 넘어가 주지는 않겠다는 으름장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지금 당황스러운 건 열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