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절대 손 안 댄다고 약속할게. 내가 바닥에서 잘게.”
최수호가 재빠르게 나를 따라잡았다.
저놈의 손 안 댄다는 약속은 볼 때마다 하냐. 내가 손대면 터지는 비눗방울도 아니고.
“누가 너더러 손대지 말랬냐. 내가 일 치면 어쩌려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귓가가 금세 화끈해졌다.
비좁은 옷장에서 최수호와 끌어안고 있을 때 느꼈던 저릿한 감각이 상기되었다. 갈비뼈가 폐까지 서서히 조여드는 것만 같던 느낌.
“아무튼 오늘 바로 천 관장님네로 갈 거야. 짐도 챙겼고.”
어물거리며 말을 마무리하는데 얼굴이 따가웠다. 최수호가 옆에서 당장 고개를 들이댈 것처럼 날 봐서 그렇다.
“열아, 나랑 어떻게 일 치려고? 나한테 뭐 할 건데?”
연애 공부 어쩌고 하더니 고작 몇 분도 못 가서 저 난리다. 다시 흥분에 찬 목소리가 당장 달려들 기세로 고조되어 있다.
“수호야, 닥쳐라.”
“나는 열이 너한테라면 무슨 짓을 당해도 좋아.”
“야, 좀.”
“마음대로 다뤄 줘.”
“안 닥치지.”
“아니면 내 마음대로 해도 돼? 괴롭혀도 돼?”
“지금 네가 하는 게 괴롭히는 거다, 이 새끼야.”
귀를 막고 걸어가도 최수호는 바짝 붙어서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려 들었다. 하필 이 자식은 다리도 길어서 아무리 빨리 걸어도 금방 따라잡힌다.
“열아, 우리 언제 연애해?”
“내가 너 책임질 수 있게 되면.”
“지금도 책임질 수 있는 거 같은데.”
“우긴다고 되냐?”
옷가지 몇 벌에 세면도구만 챙겨서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러 가는 길인데 책임질 수 있긴 뭐가 책임질 수 있다는 건지. 지금은 최수호는커녕 햄스터 한 마리도 못 책임질 처지다.
“나랑 재산 분할하면 나 책임질 수 있게 돼? 그러면 너한테 증여할래.”
“뭐라는 거야.”
“올해 생일 선물로는 건물 사 줄게, 열아.”
진짜 미친 새끼. 최수호라면 하고도 남을 일이라 소름이 돋았다. 생일날 건물 계약서와 함께 변호사 끼고 최수호랑 케이크에 초 꽂는 장면이 아른거린다.
“그딴 짓 하기만 해. 알았어. 언제 사귀는 지 말해 줄게. 나 이번 올림픽 출전할 거니까 거기서 메달 따고 나면.”
“올림픽? 내년이잖아. 너무 멀어.”
“중학교 때부터 기다렸다면서 그것도 못 기다리냐.”
사실 나야말로 중학교 때부터 기다리게 하고 1년을 더 기다리게 하냐는 반박을 들어도 할 말이 부족한 처지지만.
슬쩍 최수호를 보자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앞도 안 보고 나만 보고 있으면서 부딪히지도 않고 걷는 것도 능력이다.
“메달 못 따면 어떡하냐고는 안 물어봐? 못 따면 날짜 또 밀리는 건데.”
“그건 걱정 안 해.”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너무 확신하지는 말라고 충고해 줘야 하나.
올림픽에 나가겠다는 목표는 복싱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잡았다. 형은 올림픽 메달이 있지만, 난 아직 아시안게임 메달뿐이다.
원래도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다. 열일곱 살에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놓치고 나서 계속 다음 올림픽은 기필코 나갈 거라고 다짐했다.
그때도 최수호가 옆에 있었는데. 부상 때문에 쉬는 것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내 옆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딱 붙어서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올림픽 전까지는 사귀지도 않으면서 키스하는 사이야?”
그때하고 지금이 다른 건 최수호가 내 귀에 대고 지껄이는 소리에 위험스러운 달콤함이 섞였다는 것 정도.
“좀. 그걸 꼭 소리 내서 말해야겠냐.”
그리고 내가 그걸 싫어하지 않게 됐다는 것.
“키스하는 친구 사이.”
최수호가 굳이 못 박았다.
그 속삭임이 옷장에서 오갔던 달뜬 숨과 똑같아 다시 귀로 열이 몰렸다. 귓바퀴가 뜨뜻해지는 게 느껴질 지경이다. 아까부터 애꿎은 머리통이 달궈졌다가 식었다가 하고 있다.
연애란 이렇게 심란한 거였던가. 친구일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최수호와 닿는 게 혀가 저릴 것처럼 달콤하게 느껴진다.
“우리 연애하는 거 같아.”
나를 똑바로 보며 최수호가 미소 지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는 가슴을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에 빠진다.
“아직 연애 아니야.”
고작 허울만 남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꿋꿋하게 얘기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장 최수호를 붙잡고 집으로 끌고 가는 쪽은 내가 됐을 수도 있다.
“응, 근데 연애 같아.”
“아니라고.”
“열이랑 빨리 연애하고 싶다.”
“…….”
“빨리 내년이 됐으면 좋겠어.”
“…….”
“내년에서 기다릴게, 열아.”
“야. 1절만 해.”
시답잖은 말장난을 주고받으면서 최수호와 나란히 걸었다. 사방이 트여 있는 바깥에서도 연애라는 말은 자꾸만 나를 습하고 뜨거운 둘만의 공간으로 들여보냈다.
최수호를 억지로 떠밀어 보내고 버스를 타면서 입 안에서 그 단어를 굴려 보았다. 연애.
ROUND. 최수호
“너 연애하니.”
이 질문을 이렇게 빨리 받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우리 대표님한테.
표천희 대표, 로드 매니저부터 시작해 굴지의 연예 기획사를 일궈 낸 여성 기업인. 표범, 표독, 킬러표 등등, 하여간 업계에서 불리는 별명과 따라오는 수식은 많은데 우리 회사 내부에서 제일 자주 쓰는 별명은 이렇다.
표청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너의 죄를 네가 알렷다.
언제는 양용배가 아주 근엄한 어조로 표 대표님을 따라 한 바 있다.
‘딱 그거지 않냐? 판사야, 아주. 판사. 그러고 나서 이제 죄목이 밝혀지면 개작두를 대령시키는 거지. 포청천처럼, 딱.’
그렇게 나불댄 게 들켰든지, 아니면 양용배도 무슨 죄가 있는 모양이다. 표 대표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스캔들도 미치겠는데 하다 하다 남자랑.”
표 대표님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으로 레이저 광선을 쏘았다.
스캔들, 남자. 두 단어만 들어도 상황 파악이 얼추 된다.
혹시 양용배가 일러바쳤나. 눈빛으로 추궁하고 싶어도 양용배는 그야말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있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키스만 했다, 고 말해도 소용없겠지. 판사님, 술은 마셨지만 음주는 하지 않았습니다.
열이가 아직 연애 아니라고 했는데. 남의 입에서 우리가 연애한다는 말이 나왔다고 이 와중에 간질거리는 건, 내가 열이 말대로 또라이 기질이 있어서 그런 걸까.
“수호야, 너 데뷔하고 지금까지 잡음 하나 없이 여기까지 왔잖니.”
“그건 제가 일만 열심히 해서 그런 것 같은데요.”
“너 뒤에서 밀어 주고 받쳐 준 회사 사람들은.”
“그래서 저도 잘 시간 줄여 가며 일해서 건물 올려 드렸잖아요.”
“긴말 안 해. 헤어져.”
“싫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꾸하자 표 대표님의 이마에 잠시 혈관이 불거졌다.
“니들, 진짜 정신 못 차리지.”
“대표님, 그게요…….”
“혁준이 넌, 팬들한테 연애 안 하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다닌다며?”
표 대표님의 찌를 듯한 시선이 내게서 양용배에게로 옮겨 갔다.
양용배 연애하나? 알 바 아니긴 한데. 그래서 대표실에 같이 불려 와 있나 보다.
“내가 정말이지 머리가 아프다. 어떻게 한 회사에서 둘이.”
“그러게요.”
“수호, 자꾸 속 긁지? 그래서 둘이 어떻게 할 셈이야.”
“계속 사귈 건데요.”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어도 조만간 사귈 거니까. 사귀고 나면 안 헤어질 거니까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럴 거면! 적어도 바깥에서는 말 안 새게 해야지.”
표 대표님이 언성을 높였다. 그럴 때마다 양용배의 어깨가 심하게 움츠러들었다.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해도 환장할 판인데, 남자를…….”
표 대표님 입에서 나오는 얘기를 듣다 보니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남자?
“양용배, 너도 남자랑 사귀어?”
내 질문에 표 대표님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요즘 드라마스러운 연출로 치자면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떴을 법한 표정 변화라고 할까.
“혁준이,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르니까…… 저, 최수호랑 사귀는 거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최수호랑 사귀는’까지만 들어도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내가 너랑 왜 사귀어.”
“누군 너랑 사귀고 싶대냐?! 아오, 쪽팔려. 씨이.”
양용배가 무릎에 고개를 쏙 파묻었다. 나와 표 대표님은 차갑기 그지없는 눈길로 양용배의 등을 노려보았다. 양용배의 어깨가 점점 더 조그맣게 쪼그라들었다.
* * *
[최수호랑 어떻게 키스할까, 뭐 그런 생각?]
[왜, 내가 최수호랑 뽀뽀한다니까 질투 나냐.]
[걔랑 키스를 왜 하냐고? 엉, 글쎄. 그거는 아무리 우리 사이라도 말 못 해 주지.]
아무리 봐도 취한 것 같은 양용배가 카메라를 보면서 실실거린다. 화면에는 하트가 날아다니고, 옆으로는 읽기도 힘든 속도로 채팅이 올라오고 있다.
대표님이 틀어 준 영상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찬다. 양용배는 여전히 내 눈을 피하면서 진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술 마시고 브이앱 켰어? 잘 하는 짓이다.”
“아니, 내가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내 추궁에 양용배가 고개를 푹 떨구고 중얼댔다.
이제 내가 불려 오게 된 전말을 알 것 같다.
평소에도 심심하면 개인 방송을 켜는 양용배가 방송을 하다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오르고 나니 신이 난 나머지 쓸데없는 소리까지 실컷 했는데, 그게 하필 나하고 관련된 내용이었다.
최수호와 양용배. 안 그래도 막 방영을 시작한 대형 드라마의 두 주연인데다, 드라마는 기록적인 시청률로 출발해 폭발하듯 입소문을 타던 중이었다.
이 와중에 등장한 양용배의 개인 방송, 특히 거기서 터져 나온 최수호와 관련된 실언은 당연하게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라 온갖 SNS를 다 뒤집어 놓으셨다. 방송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었다.
덕분에 지금 아무 죄도 없는 나까지 끌려오게 된 거다. 공범 아닌 공범이라는 죄목으로.
판결. 양용배, 사형. 즉시 개작두를 대령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