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88)

74.

“남들 시선이라는 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요. 아무리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얻어맞으면 움츠러드는 게 인간이니까.”

그래서 어머님은 반대라는 말씀이신가요.

차라리 직접 묻고 싶어진다. 헤어지라고 하면 싫다고 고개라도 젓겠는데 계속 애매한 얘기뿐이라 오히려 더 초조하다.

최수호네 어머니니까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최수호네 어머니라 경계하게 된다.

“자주 다치나 봐요?”

수호네 어머니가 내 얼굴 쪽으로 턱짓을 했다.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아 아직 멍이 빠지지 않은 눈가에 손이 갔다. 옷 아래의 부상들도 아직은 여전하다.

“복싱 선수라서요.”

“힘들지 않아요?”

“할 만해요.”

따져 보면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을까. 힘들어도 하고 싶은 걸 찾는 게 어려운 일일 거다.

“계속할 건가요.”

중의적으로 말하는 게 이 사람 습관인가 보다. 이번에도 복싱 얘기인지, 최수호 얘기인지 헷갈린다.

“예. 계속할 겁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둘 다 안 그만둘 거니까.

수호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았다. 단순히 보는 건데도 사람 분위기 때문에 그런가, 자꾸 꿰뚫리는 기분이다.

“그래도 결혼은 더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게 좋아.”

콜록. 마시던 물이 목에 걸리는 바람에 급히 입을 닦았다.

“저기, 결혼은 역시 아직 좀.”

“하게 되면 미국에서 할게요. 계시는 데가 캘리포니아였죠.”

“야, 최수호.”

너무 앞서가는 모자의 반응에 당황해 말리 듯 이름을 부르자 최수호가 내 쪽을 돌아보면서 싱글거렸다. 이 자식이. 놀린 거였냐?

수호네 어머니 역시 매끄러운 미소로 나와 최수호 쪽을 보고 있었다.

말끔한 낯빛의 두 미인에게 혼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최수호랑 최수호네 어머니는 생각보다 서로 닮았다. 예를 들어 주변 사람 고생시킬 것 같은 면이라거나.

“음식엔 전혀 손도 안 대고 있네. 식사해요, 난 신경 쓰지 말고.”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어야 말이죠.

나는 물론이고 최수호도 그랬다. 접시에 놓인 음식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데 나나 최수호나 몇 입 깨작대는 게 전부다.

식사를 권하긴 했지만, 수호네 어머니는 그 이상 우리 접시 사정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한테 더 말을 걸지도 않았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 아들과 네가 만나게 둘 수는 없다며 막장 드라마처럼 김치로 뺨이라도 때렸으면 적어도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명확해졌을 텐데.

식탁을 메운 건 막장으로 치닫는 박진감 대신 이름 모를 클래식 곡과 속을 모를 미인이 주는 위압감뿐이었다.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야겠네요. 아직 식사 덜 나왔으니까 천천히 먹다가 가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수호네 어머니가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식사 즐거웠어요. 운동, 열심히 해요.”

일어서면서 인사를 건네는 타이밍까지,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당황할 틈도 없이 그저 우아하기만 하다. 뭐라고 인사드려야 하나 혼란한 사이 최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끝이에요?”

“뭐가 더 필요한가?”

대답이 하도 담담해서 듣는 내가 다 의아해지게 만든다. 그러게. 뭐가 더 필요한가.

“그럼 저 열이랑 계속 사귀어요?”

물론 최수호는 대답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아직 사귀는 건 아닌데요.”

하나 마나 한 얘기지만 덧붙여 봤다. 분명 아직은 안 사귀는 거 맞는데, 왜 나 혼자만 안 사귄다고 우기는 기분이지?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네가 소개하고 싶다고 해서 밥이나 한 끼 사 주러 온 거야.”

반대하시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거였나. 내가 최수호하고 사귀든, 결혼하든, 지지고 볶고 튀겨지든.

“대표님이 조심하라고 해도요?”

“어차피 천희가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쓸 거면서.”

할 말이 없는지 최수호가 입을 벙긋거렸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그건 그렇다. 누가 말린다고 안 할 최수호가 아니긴 하지.

“나도 젊을 땐 너 같았는데.”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이 스쳤다.

“참. 황춘식 감독 신작, 내가 프로듀싱 하기로 했어.”

선글라스를 쓰면서 수호네 어머니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잘해 보렴. 수호, 너도.”

통보에 가까운 인사였다. 답은 듣지도 않고 돌아서서 나가 버린다.

최수호는 일어서서 자기 어머니가 나간 문을 한동안 보고만 있었다.

“앉아. 그러고 있으니까 엄청 비극적인 영화 한 장면 같아서 보기 그렇다.”

팔목을 붙잡아 내리자 최수호가 그제야 내게로 주의를 돌렸다.

“무슨 영화?”

“멀어지는 네로를 바라보는 파트라슈.”

내 대꾸를 들은 최수호가 웃었다.

“그거 만화잖아.”

“만화 영화는 영화로 안 쳐주냐?”

시답잖은 얘기를 하면서 비로소 포크를 잡았다. 해산물 요리는 다 식은 지 오래인데도 맛있었다.

“너희 어머니, 매정한 건지 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너희 대표님 얘기는 뭐야.”

더 얘기하면 최수호 넋만 나갈 것 같아서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토마토소스에 절인 생선 살을 포크로 찍어 입가로 디밀자 최수호가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여기 오기 전에 대표님한테 불려 갔다 왔어.”

“어째 듣기도 전부터 불길하네.”

이래서 최수호네 어머니가 의미심장한 얘기를 엄청 하셨던 건가. 자꾸 대표 얘기가 나오길래 뭔가 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는 거 회사에서 알게 됐어.”

“너 은근슬쩍 나하고 자꾸 사귄다?”

“회사에도 이미 사귄다고 했어.”

“나랑?”

“너란 얘기는 안 했어.”

“왜. 화성에도 자랑한다더니.”

“너 귀찮게 할까 봐.”

최수호네 회사 사람들 몇몇 하고는 안면이 있고 연락도 한다. 그래도 최수호랑 사귀는 사이로 소개받으면 대하는 게 달라질 거다.

최수호 옆에서 보고 들은 게 있으니 얘가 뭘 걱정하는지는 예상이 간다.

“어머니가 회사에서 감시 안 해도 본인이 보호자니까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더라. 기사가 터지든, 제보가 들어오든 자기 손에서 해결하겠다고.”

사귀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돌아서던 뒷모습하고는 잘 겹치지 않는 얘기였다.

최수호한테 무정했을지언정 최수호를 입히거나 가르치는 일에 인색한 적 없듯, 이것도 그냥 책임지는 건가. 방금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는데도 저의를 모르겠다.

“그러고 너 보러 오는데, 기분이 이상했어.”

차 안에서 계속 조용하더라니.

“너, 뭐 어머니랑 이제 괜찮은 거야?”

“아니.”

평생 좋은 관계였던 적 없는 사람하고 이렇게 짧은 기간에 나아질 리 없다. 아는데도, 최수호가 아직 기대하는 걸 알아서 나도 기대하게 된다.

“근데 그냥…… 그 여자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보다 덜 궁금해.”

“좋은 거야?”

좋은 거였으면 한다. 어떤 방향으로든 수호한테 좋은 거였으면.

최수호는 대답하는 대신에 미간을 살짝 구긴 채로 웃었다.

그게 쓸쓸해 보여서, 접시 위의 음식을 최수호의 입 안으로 마구 옮겼다. 볼이 오동통하게 부풀 지경이 되니 좀 만족스럽다.

“결혼 얘긴 뭐냐고. 거기다 대고 넙죽 대답하냐?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알지?”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진심이면 더 문제가 크다. 아주 문제투성이다.

입에 넣어 준 아스파라거스를 열심히 씹은 최수호가 내 쪽으로 은근하게 몸을 기울였다.

“열아, 우리 여기서 자고 갈래?”

“까불어라. 잘 돈은 있냐?”

“응, 있어.”

최수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웃는 얼굴이 여유로워서 얄밉다. 좋겠다, 돈 많아서.

“그럼 자고 가.”

“…….”

“자고 가자고.”

뺨이라도 맞은 듯 멍한 최수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링에서 상대방을 KO시키기라도 한 듯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 * *

사실 섣부른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건 내 쪽인가.

그야말로 도시가 다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욕조에 앉아서 보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드는 중이다.

코흘리개 때부터 최수호랑 같이 지냈다. 볼 거 못 볼 거 이미 다 본 사이라는 소리다. 같이 목욕한 경험이야 당연히 있고, 심지어 실수로 속옷 바꿔 입은 채 돌아다닌 적도 있다.

그러니까 호텔 방에서 둘이 자게 됐다고 씻으면서 심장 쿵쾅댈 이유가 하등 없다, 이거다.

“정신 좀 차려라, 정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욕조 턱을 짚고 일어섰다. 실은 샤워를 마친 지 좀 됐는데 욕조에서 바깥 구경만 하고 있던 참이다.

이유는 터무니없다. 최수호랑 집 아닌 데서 자게 된 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게 떨려서. 수학여행 때 기어이 나 있는 방으로 와서 붙어 잔 적도 있는데 왜 그때는 귀찮기만 하더니 지금은 이러냐고.

자고 가자는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번에 1박을 결제해 버린 최수호하고 엘리베이터에 탈 때만 해도 별생각 없었다. 거실까지 붙어 있는 쓸데없이 큰 객실을 봤을 때도, 둘이 자고만 갈 거면서 이런 데를 잡고, 하여간 얘 경제관념이 언제 이렇게 해이해진 건가 싶기만 했다.

냉장고나 열어 보면서 놀다가 내가 양보해서 최수호가 먼저 씻었다. 헐벗은 최수호 따윈 극장에서도 보고, 잡지에서도 보고, 우리 집이나 최수호네 집에서도 흔하게 보는 거였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가운만 걸치고 나온 최수호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어야 했다.

없어야 했는데.

최수호가 입고 나온 것과 똑같은 호텔 가운에 팔을 꿰면서 한숨만 삼킨다. 슬슬 몸이 식을 법도 한데 여전히 손발이 뜨거웠다.

쨍한 파란색 가운을 걸치고 나타난 최수호는 평소하고 똑같았고, 인정하기 쪽팔리지만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좀, 야한 의미로.

도망치듯 최수호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오면서 새삼 깨달았다. 요즘 무슨 핑계만 생기면 최수호한테 흥분하는 중이다. 특히 옷장에서 나온 후부터는 더.

나 원래 이렇게 난잡한 놈이었나? 운동을 하다가 안 해서 뭔가 쌓였나?

“욕실 좋네.”

잡념을 떨쳐 내려 아무 말이나 하면서 침대로 걸었다. 침대에는 물론 최수호가 앉아 있었다.

가운 차림의 최수호가.

움직이느라 끈이 느슨해졌는지 옷섶이 벌어진 게 신경 쓰인다. 반듯한 빗장뼈 아래로 잘 발달한 흉곽이 살짝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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