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88)

77. 

“좋냐.”

“티 많이 나?”

“보란 듯이 실실 쪼개고 있는데 티가 안 나겠냐.”

열이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꺼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아침의 햇볕이 내리쬔다. 한낮의 강렬한 레몬색도, 오후의 익어 가는 황금빛도 아닌 서늘한 공기에 실려 있는 투명한 빛이다.

“영화 잘되면 좋겠네.”

“너도 찍으러 올 거잖아.”

“그렇긴 한데. 아무튼, 네 영화잖아. 최수호 주연.”

내 영화.

그간 주연으로 들어간 영화는 제법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내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옛날에 네가 첫 주연 맡았을 때 생각나냐?”

“네가 촬영장에서 계속 기다려 줬잖아.”

“넌 종일 고생 말도 못 하게 하고.”

“촬영이야 나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고생하는 거니까.”

처음이라고 특별히 인상 깊지는 않았다. 그때는 촬영을 한두 개 하던 때도 아니어서 아마 작품을 두 개쯤 동시에 하고 있었을 거다.

나보다도 열이가 더 많이 긴장하고 축하해 줬던 게 기억난다. 내가 열이 원정 시합마다 혼자 긴장할 때 열이도 나 같은 기분이었을까.

“너 어떤 날은 물도 제대로 못 마셨잖아. 진짜 배우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그때 확실히 느꼈는데. 나 하라고 시키면 못 할 것 같더라.”

“넌 시키면 잘할걸?”

운동도 그렇게 꾸준하게 했는데 다른 일이라고 못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열이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난 너처럼은 못 해. 최수호, 너니까 한 거야.”

“…….”

“꿋꿋하게 계속하는 너 보면서, 자랑스러웠어.”

두 번째 버스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열이는 전광판이나 버스가 아니라 나만을 보고 있었다.

“시합 때 고비가 올 때면 네 생각이 들더라고. 수호도 정말 열심히 했지. 지금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

배우 일이 힘들어 촬영 현장에서 도망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난 열이를 생각했다.

링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는 열이. 늘 끝까지 싸우는 열이. 단연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

열이는 내가 혼자서 그 시간을 버텨 냈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그렇지 않다. 열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네가 그 영화 때문에 또 힘들어질 수도 있잖아.”

“나 또 집 밖에서 얻어맞을까 봐 그래? 이번에는 개신교 쪽에서 시위하러 올 수도 있겠다. 아는 사람은 퀴어 찍고 교회에서 쫓겨날 뻔했다는데.”

첫 주연 작품 때 드라마 내용 때문에 길에서 시비가 걸린 적이 있다. 마스크하고 모자가 기본적인 외출 복장이 되기까지 이런저런 사연이 있었다.

“그래. 너 욕 더럽게 먹고 또 길바닥에서 손가락질당할까 봐 그런다.”

열이가 푹,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챔피언을 딴 복서여도, 모든 세상으로부터 지켜 줄 수는 없다.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다. 모든 걸 가질 수는 없었다.

여전히 열이의 전부를 원하면서도, 나는 조금씩 인정하는 중이었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내가 사랑한다는 건 잊지 마.”

엷은 그림자를 밀어내며 햇빛이 어지럽게 반짝인다. 열이는 이 아침의 주인 같다.

“안 잊어버릴게.”

상대의 모든 순간, 모든 것이 되지 않더라도 응원할 수는 있다는 사실을.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살아갈 힘이 되는 것. 바람이나 햇빛처럼 존재만으로 나를 자라게 하는 것.

그게 사랑의 역할이라면 내게 사랑이란 열이와 동음이의어나 다름없다.

“수호야, 내가 진짜 다음 버스는 타야 해서 하는 말인데.”

쑥스러웠는지 열이가 애꿎은 바닥을 차며 말을 돌렸다.

“어제부터 너한테 부탁할 게 있었거든.”

“응. 뭔데. 다 할게.”

정말 뭐든 할 생각이었다. 예를 들자면 괴수의 머리를 잘라 오라는 왕의 명령이라도 기꺼이 받들 준비가 된 상태였달까.

“선인장 좀 찾아와라.”

정말 비슷한 미션이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 * *

주어진 미션, 선인장을 찾으시오.

방법은.

‘아무렇게나?’

어떻게 가져오면 되냐고 묻는 내게 열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 형 성격에 방에 뒀던 거 없어지면 모를 리가 없고, 가서 그냥 달라고 해라. 내가 가면 난리 나니까 네가 가.’

‘내가 가면 난리 안 나?’

‘형이 설마 너를 때리겠냐.’

얼굴에 아직도 멍을 단 채 열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진이 형이 아무나 막 때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맞으면 아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진이 형에 관한 가장 강렬한 추억이 떠오른다. 진이 형이 한창 유도로 날리던 초등학교 때였다.

진이 형하고 열이는 이미 유도로도 초등부를 제패하던 인재들이었다. 형이 유도 시범을 보여 준다고 도장까지 따라온 내 멱살을 잡고 매트로 던졌다.

몸이 붕 떠오르더니 천장이 보였던 기억이 난다. 다음으로 별이 반짝이더니 눈앞이 까매졌던 기억도. 내 인생에 그렇게 높이, 멀리 날아간 적이 있었을까?

형이 설마 나를 때리진 않겠지, 열아.

근데 아마 형이 때리면 나는 죽지 않을까?

진이 형네 체육관 앞에 서 있자니 생각이 많아졌다.

“수호 씨?”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스크부터 올려 썼다.

“수호 씨 맞네!”

익숙한 듯 아닌 듯한 얼굴이 나를 향해 열렬히 반가운 티를 냈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열이하고 같이 만났던 사람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열이하고 관련된 사람은 곧잘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나 기억 안 나는구나! 양지원이에요. 열이랑 인사했고, 이 체육관 다니는데. 체육관 앞에서 뭐 해요? 들어갈 거예요?”

“아, 네.”

말이 엄청 빠르다. 아무튼 앞장서서 걷길래 같이 계단을 올라갔다. 옆에서 계속 뭐라고 말하긴 했는데 대부분은 제대로 못 들었다.

체육관에 들어가자 타격 음이 귀를 때려 댔다. 자주 듣던 소린데 괜히 움찔했다.

안에서 진이 형이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살벌하게.

“관장님! 손님 오셨어요!”

“형, 안녕하세요.”

주먹질을 멈춘 진이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웬일로 왔냐, 최수호.”

진이 형은 한참 동안 나를 봤다. 아마, 노려봤다.

아직 용건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선인장 가져가겠다고 하면 정말 맞는 건 아닐까.

이쯤해서 수호를 보내 줘야 하나. 열이에게는 진짜 수호가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따라와.”

뭐라고 대답할까, 하던 참에 진이 형이 음산하게 나를 불렀다.

진이 형의 태도가 살벌하다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닌지 내 뒤에 서 있던 양지원인가, 하는 사람도 눈이 동그래져서 나와 진이 형을 살피는 중이었다.

열아, 나 아무래도 오늘 맞나 봐.

“들어가서 얘기하자.”

“네.”

이제 와 아니라고 나갈 수도 없었다.

열이가 갑자기 어머니하고 마주 앉아서 식사하게 됐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왜 그렇게 내 발등을 열심히 밟았는지 이해가 가려고 한다.

사무실에 따라 들어가자 진이 형이 내게로 주먹을 뻗었다.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눈은 왜 감아.”

“……네?”

슬며시 눈꺼풀을 들자 인상을 쓴 진이 형이 보였다. 손으로는, 내 뒤의 문을 닫고 있다.

때리려고 한 게 아니라 문 닫으려고 한 거였구나. 근데 왜 아직 안심이 안 될까.

아마 지금 날 보는 진이 형의 얼굴이 너무 험악해서 그런 것 같다.

“형, 화나셨어요?”

“…….”

“저 잘못한 거 있어요?”

진이 형의 눈매가 크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최수호, 내가 너한테 남자랑 그러는 것도 괜찮냐고 물어봤던 건, 딴 놈하고 그러라는 게 아니라 정…….”

“정……?”

“……아무튼.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방금 화냈던 것 같은데.

“정열하고 연락은 하냐.”

진이 형이 나보다 먼저 열이 얘기를 꺼낼 줄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진이 형은 열이를 끔찍이 여기니까, 걱정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서 더욱 나한테 열이 얘길 먼저 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만약에 열이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상황이라고 치면, 진이 형은 알고도 나한테 굳이 묻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면 열이가 불편해질 테니까.

“네. 오늘도 열이 때문에 왔어요.”

“정열이 왜. 자기 발로 나가 놓고. 무슨 일 있대? 최수호, 너 그 자식이랑 진짜 사귀냐?”

“예……?”

열이랑요? 안 그래도 오늘 열이하고 부모님이나 진이 형한테 차차 털어놓자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어떻게 아셨……. 아니, 아직 사귀는 건 아닌데요. 사귈 거긴 한데. 나중에 결혼을 전제로 사귀려고요.”

당황한 나머지 말이 횡설수설 두서없이 나왔다. 열이가 결혼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진이 형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정열도 알아?”

“……당연히 아는데요.”

점점 더 진이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열이랑 사귀는 건데 당사자인 열이가 모를 수 있나?

“걔가 그렇게 좋냐.”

“네.”

“네 나이에 결혼 운운까지 할 만큼? 정열한테도 그 얘기 했어?”

“네. 열이도 들었어요.”

“하……. 아이, 씨.”

진이 형이 마구잡이로 머리를 헝클더니 작게 욕설을 중얼댔다. 어딜 봐도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다.

“정열은 지금 어딨어. 너희 집?”

“형, 열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정열한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말을 하다 말고 진이 형이 입술을 깍, 깨물었다.

“최수호, 너. 야, 너는 어떻게.”

그러더니 다시 날 가리키다, 이내 한숨이다.

“됐다. 마음 가는 사람 좋아하는 거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해.”

이 정도면 긍정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상치 않은 반응이다.

“미안하다. 축하는 못 해 주겠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진이 형이 쐐기를 박았다.

진이 형은 손수 닫았던 사무실 문을 도로 열더니, 얼어 있는 내 옆을 빠져나갔다.

진이 형이 나가자 아까까지는 놀라고 당황해서 생각도 못 했던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왜?

나한테는 남자가 좋아해도 색안경 끼고 보지 말라고 했으면서. 상처 주지 말라더니.

혹시 그건가. 정작 자기 가족 일이 되면 태도가 달라진다는 경우인 걸까.

남 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응원하고 싶었는데 열이가 나랑 사귀는 건 마음에 안 드나? 내가 별론가?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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