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88)

85. 

“주변 사람들한테 신경 많이 쓰잖아, 열이 너는.”

머쓱해서 별 대꾸도 못 하고 애꿎은 땅바닥만 걷어찼다. 주변인의 컨디션에 영향을 받는 건 내 약점이었다.

“다정해서 그래.”

최수호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잡고 있던 만큼 체온이 섞여, 어느덧 최수호의 손도 미지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아.”

“……어. 뭐. 왜.”

최수호가 부르는 건데 왜 긴장이 되는지.

긴장이라기보다는, 떨린다고 해야 하나.

“시합 못 가서 미안해.”

“뭐가. 내가 오지 말라고 한 건데. 촬영 들어가느라 바쁜데 무슨 지역 시합까지 와.”

“그래도 복귀하고 첫 시합이었잖아.”

“그래서 쪽팔린 실수 많이 했어. 안 봐서 천만다행이다.”

아직도 전성기 때의 기량이 다 돌아왔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천 관장님은 이만하면 빠르게 적응한 거라고 했지만, 마음에 안 찼다.

“그 말 들으니까 더 후회돼. 실수하고 버벅대는 열이를 봤어야 하는 건데.”

“도대체 우리 엄마랑 아빠는 네가 뭐가 착하다는 거냐. 내가 어떻게 너를 괴롭힌다고.”

“그래도 나 요즘은 너 안 괴롭히잖아.”

“잘했다. 장하다. 고맙다.”

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안 놔주던 때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긴, 요즘은 서로 바빠 괴롭힐 시간도 없었지만.

“막국수 맛있었지?”

“그놈의 막국수.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닭갈비도 맛이 거의 기억 안 난다. 긴장하긴 했나 보다.

“두 분 보기 좋더라.”

“진심으로? 한숨 나오는 게 아니라? 한창때 어쩌고 하면서 본인들이야말로 한창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부모님 유난스런 금실이 보기 좋기는 하다. 평생 서로한테 보탬이 되는 사랑이라니.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하다.

“나도 너하고 가족이 되고 싶어.”

아파트 로비로 접어들면서 최수호는 조용히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때보다도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좋아해, 사귀자, 안 좋아해도 되니까 사귀어만 줘, 그딴 소릴 앞뒤 없이 퍼부을 때는 언제고.

“결혼 타령 오늘은 왜 안 하나 했다.”

일부러 투덜거려도 최수호는 씩 웃기만 했다.

잡은 손이 허공에서 약하게 흔들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네가 이유진하고 사귀었던 거 말이야.”

내 옛 여자 친구 이름이 이런 데서 나올 줄은. 갑작스러운 화제에 최수호의 안색을 살폈다.

최수호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유진 이름만 나와도 분리 불안 온 강아지처럼 애달프게 달려들던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이유진 옆에 있으면 편안했다고 했잖아.”

“어어.”

“나랑은, 어때?”

어마 무시하게 어려운 질문을 던져 놓고 최수호는 홀로 평화로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입만 벙긋댔다.

최수호는 대답을 조르지 않고 집으로 들어섰다. 나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이다.

“……너랑 있으면 좋아.”

시간을 끈 것치고 참으로 단출한 답변이었다. 없는 말주변을 갑자기 만들어 낼 수는 없지 않나.

앞에 서서 모자를 벗던 최수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좋아?”

역시나 최수호는 이 정도 대답으로 만족해 주지 않았다.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눈을 맞춘다.

“어떻게 좋아?”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으리라는 게 벌써 예상된다.

“……설명 못 해.”

“해 줘.”

최수호는 끈질기다. 애정에 얽힌 일이면 유난히 더.

막무가내로 굴 때 특유의 번쩍번쩍한 이채가 벌써 검은자위에 도사렸다. 몸은 한껏 내게로 쏠려 금세라도 끌어안고 입 맞출 것만 같았다.

“또 왜 이래. 심심하면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난리야. 그런 걸 어떻게 하나하나 다 설명하냐?”

“그래도 말해 줘. 알고 싶어.”

그간 못 봤다고 이러나. 분리 불안인 강아지처럼 구는 건 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집착이 묘한 데로 옮겨가 버린 듯했다.

최수호가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다. 최수호가 해 달라고 하면 쪽팔리는 것 정도는 무릅쓰는 수밖에.

더듬거리면서 말을 고르느라 혀가 무겁게 돌아갔다.

“전에도 말했잖아. 경기 중에 힘들면 네 생각 한다고. 네 생각을 하면, 혼자서는 못 할 일도 하게 돼.”

“내가 있어서 안심해?”

왜 이렇게 선뜻 입이 안 떨어지는 건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어서는 아니었다. 최수호가 너무도 구체적인 언어로 묻고 있어서였다.

곁에 있기만 해도 애틋하고, 제 존재가 나의 기반이 되냐고, 최수호는 묻고 있었다.

“……어.”

최수호는 흡사 미소로 계절을 바꾸어 버릴 것같이 환하게 웃었다. 저 미모에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나조차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넌 내 중심이야.”

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최수호가 속삭였다.

온 지구가 너를 축으로 돌아가고 있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너를 생각하면 괜찮아져.

최수호의 고백은 여전히 기가 질릴 정도로 대단하다.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는 스케일이 도무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최수호의 무서운 점이다.

“떨어져 있는 동안 생각해 봤는데.”

그걸 떨어져 있었다고 할 수는 있냐. 수시로 전화하고 문자 해 댔는데.

산통 깨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술이 최수호 얼굴만 보면 딱 달라붙는다.

“열아, 나도 너를 지켜 주고 싶어.”

맨날 어린애 같았는데 무슨 조화인지 지금은 살짝 연상처럼 보인다. 혹시 못 보는 사이에 자란 건 아닐까.

도대체 뭘 했다고 심장이 야단법석이었다. 최수호랑 둘이 있으면 심장에 무리 오는 병은 언제 고쳐지는 거지. 이러다 평생의 지병이 될까 두렵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네가 혼자 무리하지 않아도 되게.”

“무리는 무슨. 그런 거 안 해.”

“나 때문에 무리하지 마.”

최수호가 어리광을 부리듯 내 품에 고개를 묻었다. 이유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가 더 열심히 사랑할게.”

나는 여전히, 어떻게 다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최수호의 이 순고한 애정을.

어떻게 해야 조금도 다치지 않게 끌어안고 있을 수 있을까.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열심히 하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넌 최선을 다해서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만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머뭇거리며 묻자 최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서로 뭉쳐 있어 귀엽다.

역시 최수호는 허술해 보여야 안심이다. 섹시하고 어른스러운 최수호 같은 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 했어. 내 가족은 내가 선택해서 만들 수 있다는 거. 그리고 네가 나를 선택해 줬다는 것도.”

“…….”

“네가, 나한테 가장 집 같은 곳은 너희 집일 거라고 했잖아. 그걸 잃어버릴까 봐 걱정돼서 나랑 못 사귄다고. 근데, 열아. 아니야. 네가 있어서 그 모든 게 다 나한테 있는 거야.”

닭갈빗집에서 내가 아빠하고 씨름하는 동안 최수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맨날 뽀뽀만 해 달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손을 뻗어 앞머리를 마구 흩어 버리자 최수호가 소리 내 웃었다. 합주로 섞이는 음처럼 창가에서 빗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울 엄마 귀신이네. 베란다 문 닫아야겠다.”

점점 열이 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최수호를 밀어내고 베란다로 다가갔다. 떨쳐 낸 보람도 없이, 최수호는 금세 다시 뒤에서 내 허리를 껴안으며 달라붙었다.

빗방울이 튄 유리문 앞에서 최수호가 내 뺨에 입 맞췄다. 언제나와 똑같은 입맞춤인데도 금세 귀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비가 얼른 더 세차게 내렸으면, 하고 바랐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게 들키지 않게 빗소리가 더 빨라졌으면.

* * *

이제는 형 체육관 앞에서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다니. 인간은 과연 적응의 동물이라고밖에는.

최수호네서 일어나서 우리 형 체육관으로 왔더니 그냥 맨날 하던 거 하는 기분이다. 통제되어 있는 입구와 체육관 내부에 설치된 촬영 기기들을 보고도 그랬다.

그래도 스태프들 사이에 있는 황 감독님을 보니 저 사람이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은 실감 났다. 그간은 그냥, 고민 상담가 겸 햄스터 사육사 같았는데.

어디 가서 있어야 하나. 오늘은 기영이 형도 보이지 않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이러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관계자 아니라고 쫓겨나는 거 아니야.

서성댄 지 얼마 안 되어 내쫓길까 불안할 이유는 사라졌다.

“왔냐.”

벽에 기대 있던 체육관 주인이 내게 손짓했다. 장소 주인이 있으라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

형은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아수라장이 된 체육관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깔끔한 성격에 장소 빌려 준 거 후회 중인 거 아니려나.

설마 황 감독님이 빌린 건데 잘 치워 주겠지. 위로 차 한마디 할까 했는데 형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밥 먹다 말고 최수호랑 사귀겠다고 했다며.”

이건 또, 갑작스러운 화제네.

“어. 왜.”

“집에 와서 두 분 다 우황청심환 드시더라.”

정말로? 엄마랑 아빠가? 어제 창문 닫고 자라는 소리나 하던 사람들이?

“닭갈빗집에서는 막국수 타령이나 하시던데.”

“나 붙잡고 밤새 잠도 못 자게 난리도 아니셨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니까 왜 미리 안 알려 줬냐고 닦달하셔서 나만 시달렸다.”

나랑 최수호 앞에서는 별일 아닌 척 시치미 뚝 떼고 있더니만. 집에 가서 형 붙잡고 무슨 푸닥거리를 했길래 내 얼굴을 보자마자 저 소리를 하냐.

어제 한 건 닭갈비랑 막국수 먹은 거밖에 없는데 굉장히 요란한 커밍아웃이라도 한 것처럼 멋쩍었다.

“놀라기도 놀라셨고, 많이 걱정하시더라.”

“걱정할 건 뭐 있어.”

“뭐가 있겠냐.”

뭐, 사실 수두룩하겠지. 일일이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이 떠오른다. 내가 최수호한테 ‘우리가 사귈 수 없는 101가지 이유’로 들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세어 보려면 끝도 없다.

“네 앞에서는 덤덤하셨는지 몰라도 두 분 다 속은 그렇지만도 않아.”

“엄마랑 아빠도 형이 알아봤다는 무슨 부모님 단체 그런 데 가입했어?”

“넌 진짜 부모님께 잘해라.”

형이 인상을 빡, 쓰고 말하면 제아무리 나라도 무섭다.

가출 중인 사람한테 무슨 효도를 바라냐는 말이 쏙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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