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최수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나와 최수호의 옆얼굴을 가렸다.
노을 아래 드리운 짙은 갈색 그림자 아래로 최수호와 내 입술이 닿는다. 바나나 우유에서 나는 달짝지근하고 가벼운 향기가 입술을 타고 같이 전해졌다.
나는 최수호를 피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주저앉은 선수는 그럴 수 없는 법이다.
대신 최수호의 눈가가 승자의 빛나는 미소로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다음 경기는 꼭 보러 갈게.”
아직도 바나나 우유를 함께 쥐고 있는 나와 최수호의 손가락이 서로 얽혔다. 새끼손가락이 매듭처럼 걸린다.
최수호는 웃었고, 그래서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우리는 최소한의 가림막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마주 웃고 있었다.
얼얼한 녹다운이 지나가면 다음 시합을 위해 다시 일어서야 할 테지만, 나는 이 순간이 좋았다.
해는 저물어 가고 계절 역시 지나갈 것이다. 최수호와 함께 하교하던 학창 시절을 떠올렸으나 모든 것이 그때와 다르다.
최수호하고 내가 같이 있다는 것만 빼고.
그것만으로도, 뭐가 얼마나 달라지든 난 계속해 나갈 수 있다. 가끔 최수호하고 낯간지러워 못 견딜 말을 하고, 웃으면서.
멀리서 다시 버스가 오고 있다. 모자를 주워 털어 내고 최수호에게 씌워 주었다.
내가 버스에 오를 때까지 최수호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계속.
* * *
결론부터 말하면, 최수호는 내 경기를 보러 오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꼭 그 뒤로 최수호가 겪게 된 비극적인 사건을 얘기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긴데, 별거 없다. 단순히 바빠서다.
최수호가 휘몰아치는 촬영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다음 경기에 나갔다. 이겼고, 그다음 경기에, 다시 다음 경기에 나갔다.
그리고 아시아 복싱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확해 세계 선수권 대회 출전 티켓을 땄다.
그러고 나서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다시 다음 경기에 나온 참이다.
“역시 잘하더라. 복귀하고 나서 방어가 더 괜찮아졌어.”
이건 친선 경기라고 해야 하나. 천 관장님하고 막역한 사이인 관장님네 체육관에서 열린 교류전이었다.
예선 통과 소식은 빠르게 퍼져서 이젠 만나는 사람한테 다 그 얘기만 듣고 있다. 최수호네 영화 홍보에 힘입어 내 얘기까지 더 화제가 되고 있는 판국이다.
“든든하다, 정열.”
본인이 더 신나서 손을 올리는 관장님에게 나도 하이파이브를 올렸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씻고, 짐 챙겼고, 체육관 회원들하고 관장님한테 인사까지 했으니 이제 나갈 차례다.
“혼자? 천 관장 안 기다리고?”
“만나기로 한 사람 있어서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각까지 아직 여유가 있긴 했지만, 사막에서 어린 왕자 기다리는 여우도 아니면서 한 시간 전부터 설레어하며 안달복달할 약속 상대가 눈에 훤해서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 댔다.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20분은 넘게 남았는데 성질도 급하다.
누군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받으려다, 액정 속 이름을 발견하고는 뒤늦게 멈칫했다. 저장한 것도 잊었던 이름이었다.
“이유진?”
전화를 받자 반가운 인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어, 아, 잘 지냈어?”
말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하도 뜻밖이라 그렇다.
- 혹시 내가 실례한 건 아니지? 오랜만에 인사나 하고 싶어서. 기사 봤거든. 올림픽 나간다며. 축하해.
이유진이 나와 달리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어제도 나하고 전화한 사람 같다.
“실례는. 뭐 하고 지내? 아, 대학 다니나.”
이유진의 평온함 덕에 나도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이유진은 머리도 좋아서 정시로 서울 상위권 대학에 거뜬히 합격했다. 소위 말하는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 학교 그만뒀어.
다니던 학교를 관둬 버릴 타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 다녀보니까 안 맞는 것 같아서. 지금은 경찰대 신입생이야.
경찰대라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잠시 고민했다. 이유진이 경찰이 되고 싶어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를 지나간 사람들도 나한테는 보이지 않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 우승 축하해. 복싱 다시 시작한 것도.
이유진도 그런 생각으로 나한테 전화를 걸게 된 걸까.
영화 예고에서든, 복싱 관련 인터뷰 기사에서든, 분주하게 살아가다가 문득 보게 된 내 모습이 새삼스럽고 반갑고 이상해서 내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정말 좋다.
나한테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너도.”
통화를 마무리하고 체육관 건물을 벗어나자 길을 따라 심은 벚나무들이 가지를 흔들며 반겼다.
눈의 계절도 떠나고 바야흐로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다. 가지마다 흐드러진 벚꽃 잎이 바람에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그 아래에서 최수호는 나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언젠가, 나를 보면서 서 있었듯이.
“최수호!”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최수호가 내게로 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내가 최수호에게로 가는 만큼 최수호는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