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Stunt/Ready(1부 1권) (1/33)

1. Stunt/Ready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간간이 길게 미끄러지는 타이어 마찰음도 났고, 뭔가에 격렬히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컨테이너가 빼곡히 늘어서 있는 저 끝에서 불쑥 흰색 차량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흙먼지 가득한 차량은 얼핏 보기에도 폐차감이었다. 그럼에도 그 운전대를 잡은 검은 실루엣은 마치 경주라도 하듯 빠른 속도로 여러 장애물을 피해 달렸다. 그 뒤를 3대의 검은 차량이 매섭게 쫓고 있었다.

검은 차량에는 각각 서너 명의 장정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 중 몇 명은 차창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서 위협적으로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도망가는 흰색 차량을 향해 총을 난사했고, 흰색 차량은 그에 맞춰 뒤의 유리창이 깨지고 여기저기 생채기가 생겼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흰색 차량의 운전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부두의 푸른 바닷물을 보며 흰색 차량의 운전자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차량의 모든 창문을 완전히 내리고서 힘껏 액셀을 밟았다.

풍덩!

흰색 차량은 거침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워낙 속도가 빨랐고 주행거리로 인한 가속도까지 붙은 터라, 차량은 부두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입수되었다.

보닛부터 고꾸라져 빠르게 가라앉는 차체를 보며 부두 끄트머리에 검은 차들이 속속 정차했다. 밖으로 뛰쳐나온 검은 정장의 이들이 성난 표정으로 우왕좌왕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체는 완전히 물속으로 잠겨 버렸다.

“컷!”

확성기를 통한 컷 소리가 들리자마자 검은 정장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풀며 후다닥 물가에 붙었다.

“야, 서은율! 멀쩡하냐?!”

“컷 사인 떨어졌어! 빨리 나와!”

험악하게 생긴 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란 참으로 볼만했다. 그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반응하듯 서서히 검은 머리가 올라왔다.

“푸하!”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서 숨을 거칠게 토해 낸 은율이 미역처럼 달라붙은 제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의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장정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은율은 그중 가장 가까이 있는 손을 잡아챘다.

장정들이 단체로 끌어 올려 주자 물을 잔뜩 먹은 몸이 뭍으로 쑥 올라왔다. 은율이 가볍게 기침하며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디 다친 데 없어?”

장정들이 걱정하며 묻자 은율이 괜찮다는 듯 으쓱여 웃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정장 입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가 나온 미남 청년과 다를 바 없었다.

장정 중 한 명이 근처 스태프에게서 은율의 안경과 타월을 받아 왔다.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근처 장정들이 헛기침을 하며 그렇게 웃지 말라고 충고한다.

얼굴과 머리를 대충 닦은 은율이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내렸다. 그러자 그의 잘생긴 얼굴이 콧등까지 덮은 답답한 앞머리에 의해 단숨에 가려져 버렸다. 그 변화에 장정들이 다 같이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인마, 웬만하면 앞머리도 좀 자르고 렌즈 끼자. 아까워 죽겠다.”

“전 이게 편합니다.”

단호한 말에 장정들이 안타까운 혓소리를 냈다. 그들은 은율에게 친근한 말을 건네며 함께 컷 사인을 냈던 감독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엔 스태프와 배우들을 포함해 근 3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감독이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은율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은율 씨 덕에 아주 좋은 장면이 나왔어. 수고 많았네.”

“연출을 잘 짜 주신 덕분이죠.”

사람 좋게 웃으며 꾸벅 인사하는 은율의 어깨를 호탕하게 두드린 감독이 말도 예쁘게 한다고 좋아한다.

“열흘 뒤에 있을 파주 쪽 촬영에 좀 와 줘야 할 것 같은데, 시간 되나?”

“아, 제가 그날은 시험이라…….”

은율이 얼굴 가득 죄송함을 담아 말끝을 흐렸다.

“그럼 그다음 날은?”

“시험 마지막 날이니 그날은 저녁때라면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그날 저녁때 부탁 좀 하지. 그때 꽤 거창하게 할 건데 말이야…….”

감독이 조감독에게 촬영용 콘티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곧 그는 파주에서 촬영할 부분의 콘티를 보여 주며 세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은율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해서 설명을 들었고, 간간이 의견도 주고받았다.

은율은 스턴트맨들뿐 아니라 감독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유명했다.

마른 몸에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 때문인지 얼핏 저질 체력의 범생이처럼 보였지만, 실은 전혀 달랐다.

워낙 근육이 붙지 않는 체질이라 잔근육만 조금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 몸놀림은 숙련된 스턴트맨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빨랐다. 어렸을 때부터 갖가지 무술을 섭렵하고 자라 온 그는 액션 스쿨 내의 내로라하는 무술인들 사이에서도 실력이 상위권이었다.

성격 자체도 예의 바르고 붙임성이 좋은 편이라 어딜 가나 환영받곤 했다. 너무 깍듯한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딱하진 않았다.

거기다 눈치가 좋아서, 조금만 지시해 줘도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파악해 내 표현해 준다. 그래서인지 깐깐하기로 유명한 이번 감독마저 그의 앞에선 소탈한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정작 감독들이 전업 스턴트맨도 아닌 ‘스턴트 알바생 서은율’을 찾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현 스턴트맨 중에서 은율만큼이나 비율 좋은 신체를 가진 사람은 확실히 드물었다. 거기다가 그런 조건의 인물 중 위험한 난이도의 액션을 모두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두셋뿐이었다.

스턴트맨들은 기본적으로 체력과 근력, 순발력을 기르기 위해, 그리고 대역을 할 때 덜 다치기 위해 매일 액션 스쿨 내 체육관에서 고강도의 트레이닝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근육이 붙어 다부진 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근육량이 적거나 늘씬한 이들도 있긴 했지만, 은율처럼 연예인 느낌의 몸매는 아니었다.

젊은 배우들은 죄다 모델 출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키나 몸매부터가 일반인과는 확연히 달라서, 아무 스턴트맨이나 쓸 수가 없었다. 스턴트맨을 쓴 게 최대한 티가 나지 않아야 하는데, 대역을 할 만한 스턴트맨 중에서 그러한 배우들의 외견을 맞출 수 있는 이들이 워낙 적은 것이다.

그에 비해 은율은 옷차림을 조금만 신경 써 줘도 모델 같은 느낌인지라 감독들 입맛에 딱딱 맞았다. 덧붙여 아무리 위험한 걸 시켜도 단박에 알겠다고 하며 뛰어들어 주고 NG 한번 없이 연기해 주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다만 은율은 현역 대학생인 데다가 스턴트 일은 그저 시간이 될 때 간간이 하는 아르바이트일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를 꼭 필요로 하는 감독들에게는 주연 배우 다음으로 스케줄 조정을 거쳐야 하는 2순위 인물이곤 했다. 고작 스턴트맨일 뿐이었지만 대역으로 그를 쓴 장면이 주연 배우의 연기를 집어삼킬 정도로 워낙 잘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 들여 콘티를 설명한 감독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축축한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럼 그때도 잘 부탁하네. 근데 은율 씨, 정말 배우 해 볼 생각 없나? 비주얼도 좋지만 연기가 아주 좋은데 말이야. 액션 배우, 어때?”

감독이 모니터를 힐끔 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모니터로 잡혔던 은율의 얼굴이 떠올랐다. 편집해서 잘라 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표정 연기가 아주 좋았다. 한두 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인 배우가 과연 은율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따라올 수 있으려나 의문일 정도였다.

‘누가 배우이고 누가 대역인지 참.’

감독이 순간적으로 씁쓸한 표정을 흘렸다.

그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한 은율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저도 주제를 알죠.”

웃으며 거절한 은율은 물기를 닦아 낸 타월을 스태프 중 한 명에게 공손히 건네주며 주변 이들에게 인사를 돌렸다. 할 일이 다 끝났으니 스턴트팀 사람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스턴트팀 멤버들이 인사하는 사이, 검정 12인승 승합차로 달려간 은율이 얼른 맨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그곳엔 은율의 검정 백팩과 큼직한 쇼핑백이 있었다. 축축한 정장 재킷과 셔츠를 단숨에 벗어 버리고 쇼핑백에서 사복을 꺼내 옆자리에 두었다. 때마침 남자들이 하나둘 차량으로 들어왔다.

“으왓! 너 어디서 훌렁훌렁 벗고 있는 거야!”

뒷좌석의 은율이 상체 탈의 상태로 바지 버클을 푸는 것을 보며 그들이 고개를 돌렸다. 은율은 여전히 옷을 벗어 가며 웃었다.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새삼 왜 그러세요.”

“야, 그래도 넌 아직 젊잖냐. 게다가 넌 그…… 그…….”

속옷을 내리던 은율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입구에서 어정쩡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두 남자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는 차 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그들은 차로 다가오는 다른 이들에게 아직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막았다. 은율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은율은 차 안임에도 순식간에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청바지에 네이비 후드 티를 입고 재킷을 하나 걸친 그는 창문을 두 번 노크해서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차 문이 열리고 차 안으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애 감기 걸리겠다. 근처 사우나로 갈까, 은율아?”

40대에 가까워져 가는 듬직한 장정 하나가 뒷좌석으로 넘어오며 은율에게 물었다.

“전 아주 멀쩡합니다. 형님들 피곤하실 텐데 얼른 서울 올라가서 쉬셔야죠.”

“오늘 제일 힘들었을 녀석이 뭔 소리냐.”

그렇게 말하며 은율의 젖은 머리를 큰 손으로 헤집었다. 다른 남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친동생 대하듯 은율을 챙기기 바빴고, 그때마다 은율은 착한 미소로 화답해 왔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 피곤했던 장정들은 모두 푹 잠이 들었다. 은율은 홀로 깨어 백팩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펼쳐 보고 있었다.

국제 재무 분석사 자격증을 위한 교재로, 모든 내용이 영어에 전문 용어로 되어 있어 웬만한 사람은 제대로 읽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은율은 한국어로 된 책을 읽는 것처럼 수월하게 읽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부재중 전화 3통과 새 메시지 수십 개가 표시되어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모두 한 사람에게서 와 있었다.

차 안의 적막을 깨지 않기 위해 전화를 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건 이번 조별 과제를 함께하게 된 3명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들과의 단체 메시지방에 들어가 내용을 읽고 있는데,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1 사라졌다!]

[이제 확인했나 보네.]

[야! 뭐가 그리 바쁘냐아.]

기다렸다는 듯 3명에게서 동시에 메시지가 왔다. 3명은 시험 직후에 있을 조별 과제에 대해 한창 의논 중이었던 듯했다.

[미안해. 알바 하고 있었어.]

[대체 무슨 알바인지 궁금하다, 궁금해.]

[시간이 들쭉날쭉하네. 파견 알바야?]

[아, 나도 알바 알아봐야 하는데…….]

어느새 메시지방에는 알바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해져 갔다.

은율은 일단 밀려 있던 메시지부터 천천히 읽어 나갔다.

은율은 스턴트 알바에 대해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가족이야 당연히 걱정하며 반대할 것이 뻔했지만, 특히나 남동생은 위험했다. 그는 부리부리한 얼굴과 듬직한 덩치를 가진 것과 달리 넉살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 형인 자신의 친구들과도 연락처까지 교환하며 자주 연락하곤 했다.

그렇다 보니 친구들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서 ‘범생이’, ‘말라깽이’로 종종 부르는 친구들도 제 가족들처럼 저를 말릴 것이 눈에 선했다.

스턴트 알바는 그들이 말릴 게 이해될 정도로 거칠고 위험한 일이었다. 전업으로 돌려 매일 체력 단련을 하고 팀원들과 합을 쌓는다면 모를까, 은율처럼 알바로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구나 좀 전의 총격전과 추격전, 혹은 폭파 장면 같은 부분은 전업 스턴트맨도 혀를 내두를 만큼 위험했다. 그런 장면을 고작 알바생이 촬영했다는 말이 나온다면 업계에서는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애당초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런 액션을 맡길 리도 없었다.

하지만 은율은 특전사 육군 중령인 아버지에 의해 어릴 때부터 갖가지 무술을 섭렵해 온 만큼, 굉장한 순발력과 센스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스턴트 액션을 배울 때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고난도 스턴트 액션도 척척 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집안 사람들이 모두 무술을 배웠던 것은 아니었다. 아래에 두 동생이 있었지만, 반드시 무술을 배우도록 강요받아 온 것은 은율 혼자뿐이었다. 동생들은 그런 은율에 비해 상당히 자유분방하게 자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큰 교통사고가 났다.

TV에서도 한동안 크게 다뤘던 사고였다.

서해안 고속도로 12중 추돌사고.

빗길에 미끄러진 대형 트럭 때문에 뒤차들이 줄줄이 추돌하고 큰 폭발까지 일어났다.

아버지가 지인을 만나러 간다며 어머니와 은율을 데리고 셋이서 전라도로 향하다가 그 사고에 휘말려 버리고 말았다. 부모님은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은율 혼자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것은 은율이 고작 17살, 두 동생은 각각 15살, 10살 때의 일이었다.

돌아가신 것에 대해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부모님이 모아 둔 돈은 부모님의 장례식과 은율의 치료비로 모두 사라졌다. 아직 미성년인 그들 앞에 주어진 사망 보험금은 법적 보호자를 자처한 친척들에 의해 공중분해 되었다. 결국 유족 연금으로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

육군 사관 학교를 가려던 은율은 그 즉시 마음을 바꿔 먹었다. 두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대학까지 다 보내려면 생활이 빠듯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은 아주 잠깐이었다.

은율의 모든 것은 두 동생을 자신이 책임지고 돌봐야 한다는 데 맞춰져 버렸다.

끌려다니기만 할 뿐 명확한 미래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와 달리, 두 동생에겐 명확한 꿈이 있었다. 은율은 그들의 꿈을 반드시 이뤄 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아무 꿈도 없이 흘러가던 길을 그대로 내던졌다.

필요한 건 오직 돈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기 전, 다방면으로 진로를 알아보던 은율은 그전까지 목표로 하고 있던 대학이 아닌 명문대 금융학과로 덜컥 진학해 버렸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갖기 위해. 은율의 목표는 오로지 그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닌다고 해서 돈이 나가면 나갔지, 쌓이는 것은 아니기에 고민이 많았다. 아버지의 지위 덕에 매월 넉넉하게 들어오던 유족 연금은, 은율이 25살이 되는 날 법률상 그의 몫이었던 연금액만큼 줄어든 채 지급된다. 그렇게 되면 당장 삼남매는 생계에 큰 타격을 받게 될 게 뻔했다.

그래서 은율은 성인이 되자마자 곧바로 돈이 될 만한 여러 일을 알아보았다. 그러다 시작한 게 스턴트맨이었다.

‘정기 알바를 할 수 있었다면 스턴트맨이 아니라 다른 일을 했겠지?’

그런 생각을 해 본 은율이 피식 웃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르겠다.

스턴트맨이라는 직종은 비록 처음부터 많은 돈을 받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기고 위험성이 높은 일을 하게 된다면 한 건으로도 상당한 액수를 벌 수 있었다.

대학을 빨리 졸업하더라도 그사이 쑥쑥 커 가는 동생들의 학비와 등록금을 댈 방법이 없었다. 당시 남동생만 하더라도 곧 대학 입시였다.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과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휴학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을 2년간 휴학하고 학과 관련 자격증 공부와 스턴트맨 일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스턴트는 기본적으로 액션 스쿨에 소속되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써 주질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맥도, 검증된 능력도 없는 사람을 무작정 그런 위험한 일거리에 집어넣는 곳은 없다.

아무리 몸을 잘 써도 곧바로 액션신에 투입될 순 없었다. 우선은 능력을 검증받고 팀워크를 맞추는 법, 그리고 스턴트 일 자체에 대해 세세히 교육을 받아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이를 배우는 과정은 은율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일을 배우며 간간이 작은 스턴트 일을 뛰다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후부턴 점차 위험한 스턴트를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턴트맨들 사이에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보통의 스턴트맨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장면을 족족 찍으며 쉴 새 없이 스턴트 일을 뛰었더니, 제법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후 대학에 복학한 후부터는 되도록 단순 대역 스턴트 일보다는 수당이 좀 더 센 액션 쪽 위주로 일을 받았다. 그러다가 한 유명 배우의 액션 대역을 해 준 게 대중적으로 크게 평가받았다.

그 뒤부터는 늘씬한 배우들의 대역을 주로 맡았고, 위험천만한 액션이나 연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틈틈이 쌓인 돈은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데에 아낌없이 들어갔다.

은율은 자신과 달리 꿈이 있는 동생들이 걱정 없이 제 꿈을 펼치길 바랐다.

동생들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학과 동기들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은율은 일단 조별 과제를 준비하기 위한 의견 취합에 열중하기로 했다.

*  *  *

감독과 약속한 날, 파주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밥도 챙겨 먹지 않고 부랴부랴 달려온 은율은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30분은 족히 걸어서야 세트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통나무로 된 산장 근처에 다가가니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조감독님, 안녕하십니까.”

반갑게 부르며 뛰어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은율 씨, 어서 와. 감독님! 은율 씨 왔어요!”

조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치자 저 멀리서 스태프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은율은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건넸고, 이내 그는 감독의 두툼한 손에 잡혔다.

“오느라 수고했네. 바로 준비할 수 있겠나?”

“물론이죠.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은율은 한 스태프에게 메고 있던 무거운 백팩을 촬영 버스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장이 들어 있는 쇼핑백만 챙겨 든 은율이 조감독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통나무 산장 안으로 들어간 은율은 내부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 세트 짓기 힘들었을 텐데 아깝네요. 여길 통째로 터뜨리는 겁니까?”

“카메라에 잡히진 않겠지만 성능 좋은 폭탄을 열 개 넘게 설치했어. 그러니까 은율 씨도 동선대로 빨리 이동해서 바로 나와야 해. 알았지? 이건 NG 나 버리면 은율 씨도 죽고 우리도 다 같이 죽어. 이 세트는 복구 불가야.”

“네. 배우분은 이미 촬영했습니까?”

“다른 세트장에서 미리 클로즈업 위주로 찍어 놨어. 이번에 찍는 거랑 편집만 하면 끝나.”

짧게 대화가 끝나고, 산장 안의 작은 방에 도착했다. 촬영할 예정이 없는 방이라서 그런지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은율이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하고는 얼른 겉옷과 셔츠를 벗었다. 그 모습을 문가에서 바라보고 있던 조감독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은율 씨는 안 무서워?”

“예? 뭐가요?”

“동선대로 뛰어가는 동안 앞, 뒤, 옆 할 것 없이 사방에서 폭발하고 무너지고 할 텐데 안 무섭냐고. 까딱 잘못하면 골로 갈 건데.”

몇 번 얼굴을 보고 얘기도 나눠서인지, 싸가지가 없다는 소문의 조감독은 나름 걱정을 해 왔다. 은율이 바지를 벗으며 웃었다. 조감독은 헛기침하며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멀쩡히 살아 나올 자신은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콘티 보니까 동선대로 간다면 별로 위험할 것 같지도 않은걸요.”

“은율 씨가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다만…….”

어느새 속옷만 남긴 상태로 전부 탈의한 은율이 쇼핑백에서 단정히 다려 놓은 정장을 꺼내 입었다. 저번에 물에 빠졌을 때야 클리닝을 맡긴 것으로 끝이 났다지만, 이번처럼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절대 의상이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래서인지 쓴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입어 본 정장이었는데 아쉽네.’

지급받은 거라고는 해도 비싼 정장이니만큼 그 핏감이 참 좋았는데.

빠르게 정장을 갖춰 입고서 뒤로 돌아보니 문가에 조감독이 아직 서 있었다. 안경을 벗어 제 사복과 함께 쇼핑백에 넣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조감독이 은율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피식 웃었다.

“진짜 렌즈 껴. 안경이 최대의 에러야.”

“비쌉니다. 사 주고 말씀하세요.”

“사 주면 잘 끼고는 다닐 거냐?”

“음, 렌즈는 너무 불편해요.”

“그러면서 사 달라고 하기는.”

조감독이 눈을 가늘게 뜨다 은율의 쇼핑백을 낚아챘다.

“일단 내부 동선 체크하고 있어. 준비 다 되면 감독님이 사인 주실 거야.”

“알겠습니다.”

조감독은 은율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산장 밖으로 나갔다.

밖은 상당히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조감독이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니, 감독 옆에 검정 롱코트를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다른 스태프들은 그를 중심으로 일정 거리를 두고서 눈을 빛내는 중이었다.

“야, 무슨 일이야?”

“아, 조감독님! 이진환이에요! 이진환이 왔어요!”

“뭐?!”

조감독이 깜짝 놀라며 감독 옆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큰 키와 탄탄한 몸, 뒷모습에서도 풍겨 나오는 아우라는 확실히 예사 사람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진환이 왜 왔어?”

“파주에 화보 촬영 있어서 왔다가 들렀대요. 알다시피 우리 감독님하고 친하잖아요.”

조감독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환은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중 한 명이자 연기력으로는 누구든 씹어 먹을 수 있다는 평의 톱스타였다. 그 연기력과 매력적인 비주얼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먹혀, 최근엔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다.

뭣 모르던 신인 시절, 이진환의 싹수를 알아본 감독이 그를 대뜸 주조연으로 써먹었다. 그 역은 사람들에게 이진환의 이름을 명백히 새겨 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에도 감독은 이진환과 몇몇 작품을 함께했고, 작품을 함께하지 않더라도 가끔 만나 술 한잔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

감독은 업계에서 작품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심혈을 기울여 찍고 있는 드라마이니 이진환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다.

진환은 선글라스를 벗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산장을 훑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 폭파신만 남은 겁니까?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제가 늦었군요.”

“다음에 한번 보러 오게. 진환 씨에겐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봐 줄 만은 해.”

감독이 웃으며 제 옆자리에 놓인 의자를 권했다. 진환은 의자에 앉고서 제 뒤에 서 있는 젊은 매니저 김연우에게 말했다.

“연우야, 오늘 더 스케줄 없지?”

“네, 형. 이따 올라가시게요?”

“보다 가려고. 차에서 눈 좀 붙이고 있어.”

연우는 앳된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주차해 둔 밴으로 뛰어갔다.

진환은 모니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5대의 모니터에는 각각 다른 각도로 산장 내부가 찍히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산장 내부를 걸어 다니는 검은 정장의 은율이 담겼다. 워낙 빠르게 걸어 다녀서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절도 있는 걸음걸이와 반듯한 몸이 눈에 띄었다.

“안에 배우가 있습니까?”

의아하게 물었다. 분명 연기하는 배우는 오늘 없다고 했는데.

감독이 진환의 눈을 따라 모니터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스턴트맨이야, 스턴트맨.”

감독은 산장이 폭파될 때 그 안을 가까스로 탈출하는 장면을 찍는 거라고 하면서, 이런 데에 진짜 배우를 썼다가는 큰일 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진환의 눈이 모니터 속 은율을 주시했다.

준비를 끝낸 스태프들이 산장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조감독이 감독에게 달려와 물었다.

“준비 완료입니다! 시작할까요, 감독님?”

“그래! 얼른 끝내고 회식이나 가자!”

감독이 확성기를 잡고서 산장을 향해 소리쳤다.

“서은율 씨! 숫자 셀 테니까 준비해!”

산장 안에서 음성을 들은 은율이 동선의 시작점에 있는 1번 카메라에 대고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은율의 OK 사인을 확인한 감독이 큰 소리로 3부터 아래로 숫자를 세었다.

“……둘! 하나! 액션!”

큰 소리로 외치자 폭파 스위치를 잡고 있던 스태프가 버튼을 꾹 눌렀다.

쾅!

산장 한 귀퉁이가 큰 소리와 함께 폭파되어 날아갔다. 1번 카메라에 비친 은율이 동선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펑! 퍼펑! 펑!

첫 번째 폭탄을 시작으로 연달아 다른 폭탄들이 터졌다.

진환은 감독과 함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은율은 폭발로 인한 파편들과 불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예정된 동선대로 몸을 날렸다.

펑!

“어?!”

감독이 깜짝 놀랐다. 은율이 지나간 후에 터져야 할 곳이 미리 터져 버렸다. 그 바람에 동선상에 문제가 생겼다. 예정된 동선의 한가운데가 폭파되어 갈 길이 막힌 것이다.

콰앙!

앞의 것보다 화력이 더 강한 폭탄이 큰 굉음을 내며 터져 버렸다.

이에 은율의 걸음이 멈추었다. 왔던 길은 모두 터져 버렸고 가려고 했던 길은 막혔다. 그리고 새롭게 터진 폭발 때문에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폭파 건물 한가운데에 갇힌 꼴이 되었다. 감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색이 된 얼굴로 스태프 쪽을 바라보았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왜 저기가 터져?!”

“모,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폭파 순서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 새끼들아! 똑바로 안 해?! 당장 은율이 빼 와!”

스태프들은 감독의 노성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말이 쉽지, 저 폭탄 덩어리 산장에서 어떻게 사람을 구해서 나온단 말인가? 더구나 아직 연결된 폭탄이 남은 상태였다. 미리 준비한 소방대원들이 대기하고 있다지만 이럴 때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다 같이 폭발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꼼짝없는 대형 사고였다.

진환이 긴장한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던 그때, 은율이 움직였다. 그는 제 머리를 팔로 감싸며 옆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겁도 없는 그 모습에 모니터를 보던 감독과 진환, 스태프들 모두 경악했다.

카메라가 없는 옆 불길에 뛰어든 은율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머리카락만 약간 그을린 상태로 다음 카메라에 불쑥 튀어나왔다. 예정대로라면 그의 정면 얼굴이 보여야 했지만, 옆길로 샜다가 다시 원래의 동선으로 돌아오느라 카메라의 바로 옆에서 뛰쳐나온 상태였다.

그렇게 그는 원래의 동선에 맞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모든 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보았다.

처음 예정되었던 것보다 더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어느덧 산장에선 거대한 불길과 연기가 끝도 없이 치솟고 있었다.

쾅!

다음 폭탄이 터지고, 내부를 비추던 마지막 카메라에 거센 불길만이 잡히다 곧 신호가 끊어졌다.

나무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온 그 순간, 마지막 폭탄이 터졌다.

콰쾅!

은율이 입구 근처의 마지막 폭탄으로 인한 여파를 피하기 위해 바닥을 박차 날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환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율 씨!”

놀란 감독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다들 뭐 해?! 빨리 불부터 끄고 의사 대기시켜!”

일부 스태프는 준비해 둔 소방차를 이용해 빠르게 불을 진압했고, 몇 명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대기하던 의사를 부르고 담요를 챙겼다.

제일 먼저 은율에게 다가간 감독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그를 부축하며 살피기 바빴다.

“괜찮은가?! 안 다쳤어?!”

겉보기에 머리카락이 약간 그을린 것 말고는 큰 상처가 없어 보였다. 은율이 피곤한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영상은 잘 나왔나요?”

“영상이 중요해, 지금?!”

“중요하죠. 이렇게 목숨 걸고 찍었는데 별로면 허탈할 것 같아서요.”

감독이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가 이내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장면은 아주 멋지게 나왔으니 걱정하지 마. 다만 내가 정말 미안하네. 스태프들이 실수를 한 모양이야.”

은율의 그을음 묻은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은 감독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면목이 없어. 까딱했으면…….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이러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정말.”

곤란한 듯 웃는 얼굴로 감독을 만류한 은율에게 한 스태프가 다가와 담요를 어깨에 둘러 주었다. 걱정하는 얼굴로 젖은 수건을 건네주고는 의사가 버스에서 대기 중이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래, 얼른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혹시 어디 다친 데 있으면 의사에게 다 보여 줘.”

“예, 모니터링만 하고 바로 갈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예의 바른 모습으로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인 은율이 젖은 수건으로 얼굴의 그을음을 닦으며 모니터 여러 대가 세팅된 쪽으로 향했다.

“야! 너희들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까딱하면 사람 죽을 뻔했잖아! 정신 안 차려?!”

감독의 거친 노성이 스태프들의 어깨를 무섭게 짓눌렀다. 은율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가 위험했던 건 변하지 않기에 감독도 스태프들을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은율이 미안해할 정도로 거친 고함이 오갈 무렵,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조감독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며 그가 등지고 있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이진환 씨?”

멈춰 서서 눈을 여러 번 깜빡여 보았다. 은율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남자가 진짜 이진환이라는 것에 놀라다가 형식적인 가벼운 인사를 한 뒤에 다시금 모니터를 보았다.

이진환을 모를 리 없는 은율이지만, 사실 그는 연예인들에 대한 환상이나 동경이 없는 편이었다. 제 앞길 살기에 바쁘기도 했고, 스턴트 일을 하면서 별의별 배우들을 다 만나 보았기에 면역되어 있기도 했다. 아무리 상대가 한류 스타이자 연기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톱배우라고 해도 사람과 사람인 건 다르지 않았다.

진환을 의식하지도 않고 조감독에게 바싹 붙은 은율이 그와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영상 괜찮아요?”

“네가 그렇게 애썼는데 괜찮지, 그럼. 진짜 고생 많았다. 그리고 미안해. 애들이 폭탄을 배치 순서를 틀렸나 봐.”

“괜찮습니다. 멀쩡히 살아 나왔고 영상도 잘 나왔으면 된 거죠.”

은율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긴박함을 담은 영상에 시선을 두었다. 찍어 둔 영상을 보니 아까의 일이 생각나 잠깐 오싹했다.

그 순간에 은율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거나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마지막 폭발 때는 정말 아슬아슬했다. 1초, 아니 0.5초만 늦게 나왔어도 거대한 불길이 그를 끌어안고 말았을 거다.

“뭐가 괜찮다는 겁니까? 당신, 진짜 죽을 뻔했어요.”

냉랭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꽉 쥔 진환이 은율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은율은 눈을 깜빡이다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조감독과 진환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얼른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진환이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버스 안에 몸을 실은 은율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나이 지긋한 남자 의사와 함께 버스의 가장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의사는 아픈 데는 없는지 물으며 무리하지 말고 상의를 천천히 벗어 보라고 말했다. 재킷을 벗는 순간 오른팔에서 섬찟한 쓰라림이 느껴졌다.

팔뚝에는 가로로 긴 자상이 나 있었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배어 나와, 흰 셔츠와 재킷에도 진득하니 물을 들인 상태였다. 촬영 직후에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통증을 못 느꼈나 보다.

상처를 본 의사는 눈가를 찌푸리며 일단 마취와 봉합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처 부위를 깨끗하게 닦아 내고서 근처에 부분 마취 주사를 놓은 의사는 곧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마취를 했음에도 느껴지는 바늘의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상처가 봉합되는 걸 내려다보던 은율이 짧게 몸서리쳤다. 등줄기에 오한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 내었다. 멀쩡히 살아 나왔고, 자신이라면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위험한 스턴트 액션을 거듭해 온 감 같은 것이다.

일곱 바늘을 꿰맨 후, 의사가 붕대를 단단히 감아 주었다.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병원을 가서 소독도 할 겸 약을 처방받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 외에도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핀 의사는 팔의 상처 외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며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편하게 옷을 갈아입으라며 의사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듯 버스 앞좌석으로 이동했다.

옷을 갈아입은 은율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 내렸다. 배우와 헤어스타일을 맞추기 위해 헤어 젤로 세팅한 머리는 폭발 때문에 이미 그 형태가 거의 어그러진 상태였다.

머리를 정리하고 백팩을 멘 은율이 밖에 나왔을 때쯤엔 산장의 불이 거의 다 진압되어 매캐한 연기만 올라오고 있는 상태였다.

분주한 모습의 스태프들 사이에서 조감독이 빠져나와 은율에게 다가왔다.

“은율 씨, 내일 입금될 거야. 감독님이 오늘 일 미안했다고 넉넉히 넣어 주겠다고 하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은율이 씩 웃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 감독님께도 인사드리고 가야 하는데…….”

“지금 감독님은 상황 정리하시느라 바쁘셔. 내가 먼저 보냈다고 말해 둘 테니까 어서 들어가. 피곤하겠다.”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말은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했다. 그 소리를 들은 스태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 무너진 세트장의 잔해를 한 번 바라보다 몸을 돌린 은율은 길을 따라 큰길로 걸어 내려갔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서울까지 돌아갈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 했다.

“아…….”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충전 한 번 못 한 휴대폰은 완전히 방전 상태였다.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점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울로 돌아가는 차편의 시간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뒤에서 차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검정 밴이 내려오기에 얼른 길옆으로 비켜섰다. 자신을 지나쳐 내려가던 밴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운전석의 창문이 열리며 앳된 얼굴의 청년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아까 그 스턴트맨이세요?”

은율은 처음 보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운전석에 앉은 진환의 매니저 연우는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를 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작은 대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다시 머리를 빼며 눈을 반짝거렸다.

“못 알아볼 뻔했네요. 혹시 어디로 가세요?”

“버스 정류장으로 갑니다.”

“버스 정류장이요? 이 근처에서 못 본 것 같은데…….”

“한 30분 걸으면 있습니다.”

“30분이나요?”

연우가 차 안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안으로 돌렸다가 도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버스 타고 어디 가세요?”

“서울이요.”

“그럼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저희도 서울 가거든요.”

은율은 의문을 담은 눈으로 슬쩍 밴을 훑어보았다. 연예인이 타고 있을 게 분명한 밴을 보며 안에 타고 있을 사람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이진환 씨 매니저분이십니까?”

“네, 맞아요.”

앳된 얼굴의 연우가 귀엽게 웃었다.

“진환이 형이 어차피 서울 가는 거니까 같이 가면 어떠냐고 하셔서요.”

“그럼 너무 죄송한데…….”

그러면서도 솔깃했다. 차비를 아낄 기회였다.

매니저라는 사람이 웃는 낯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율이 마주 웃어 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전 서울 도착해서 지하철 있는 곳 아무 데서나 내려 주시면 됩니다.”

돌아서 뒷좌석 문 쪽으로 다가갔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뻗다가 팔뚝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왼손으로 문을 열었다.

창가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던 진환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만 봐도 뭔가 촬영 중인 것만 같다.

진환에게 꾸벅 인사한 은율은 그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냉큼 올라탔다.

문 쪽 의자에 앉아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은율은 백팩을 앞으로 돌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처음 타 본 밴의 넓고 아늑한 내부를 관찰하며 작게 감탄했다. 이런 편하고 푹신한 좌석이라면 쪽잠을 자도 편안할 것만 같다.

그러다가 진환이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한참 시선을 주고 있던 진환이 물었다.

“안경은 패션용은 아닌 것 같고……. 귀찮아질까 봐 쓰고 다니는 건가요?”

“반 정도는요.”

은율이 애매하게 대답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진환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흥미가 담긴 눈을 거두지 않았다.

눈앞의 스턴트맨이 여태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안경 하나로 이렇게까지 이미지가 바뀌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거기다 앞머리까지 길게 커튼처럼 내리고 있으니, 이미지가 바뀌다 못해 존재감이 훅 사라진다.

정장 차림에 맨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있던 은율은 진환조차 관심을 가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약간 치켜 올라갔지만 날카롭진 않은 선한 눈매, 새카만 렌즈를 낀 것 같은 깊고 맑은 검은 눈동자, 자연스럽게 올라간 오뚝한 콧날,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음에도 탐스럽기 그지없는 붉은 입술, 깨끗하고 부드러운 피부.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매력적인 얼굴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남 미녀를 질릴 정도로 보고 사는 진환마저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약간 말랐지만 비율 좋은 몸매도 인상적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아까의 이미지를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핏감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싸구려 티셔츠에 도톰한 항공 점퍼가 그의 몸매를 심할 정도로 잘 가려 주고 있다. 그나마 색 바랜 청바지가 다리 라인을 조금 드러내 주고 있긴 하지만, 상의와 하의의 조합을 모두 합하면 그냥 ‘다리가 마른 남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무식하게 큰 동그란 안경과 길게 내린 앞머리가 그의 매력을 모두 가려 버렸다. 마치 시골 출신의 촌스러운 모범생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 이리도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꽤나 신기했다.

볼을 긁적이던 은율이 운전석의 연우에게 물었다.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거의 한 시간 정도면 갈 거예요.”

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것에 비해 30분 정도 절약하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줄어든 이동 시간을 허무하게 보낼 순 없었다. 은율은 곧바로 백팩에서 국제 자격증 교재를 꺼내 들었다.

백팩까지 바닥에 내리고서 책을 무릎 위에 펼친 은율이 한 손에는 파란 펜을 쥔 채 포스트잇이 잔뜩 붙은 페이지를 펼쳤다.

옆에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환이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며 물었다.

“학생이에요?”

“예. 4학년입니다.”

진환이 은율의 책으로 눈을 두었다. 모든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어서 그런지 대충 봐도 어려워 보였다.

저걸 다 해석해서 이해하고 공부할 정도이니 은율의 영어 실력 정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곧 은율의 손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책에 붙은 포스트잇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의 굳게 다물린 입이 벌써 책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다. 진환은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 역시 대본을 꺼내 들었다.

*  *  *

장시간 몸을 구부리고 있었던 탓인지 몸이 뻐근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온몸을 긴장한 채 폭발하는 세트 건물을 뛰쳐나왔으니 뻐근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아무 생각 없이 기지개를 켜다가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뻔했다. 아랫입술을 꾹 물고서 길게 들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상처를 봉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친 팔뚝에 손을 얹었다. 상처 때문인지 그 부분만 유독 따뜻한 게 느껴졌다.

마취가 풀려서 아릿한 팔뚝을 신경 쓰며 고개를 돌리다가 옆자리의 진환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는 어느새 손에 깔끔히 제본된 책자를 들고 그것을 집중해 읽고 있었는데, 표지에 적힌 글씨가 상당히 낯익었다.

“<메아리>네요?”

알은체를 하니, 진환이 고개를 들어 은율을 바라보았다.

“알아요?”

“예. 김현우 씨 대역 요청을 받았거든요.”

김현우라면 <메아리>의 주연 배우 중 한 명으로, 아이돌 출신의 연기자였다. 주연 배우라고는 하지만 연기 쪽으로는 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환이 페이지를 몇 장 훑어보며 의아해했다.

“어느 부분 대역이죠?”

“18페이지에 있는 원효대교 신이랑 44페이지의 액션신, 56페이지의 도망신, 58페이지의 절벽 추락신입니다.”

그의 말에 따라 페이지를 펴던 진환이 멈칫했다.

“어떻게 대본 페이지까지 알고 있어요?”

보통 특정 배우의 대역을 맡는 스턴트맨에게는 해당 장면 부분만 자른 내용이나 콘티만 제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은율은 대본을 받은 것처럼 아예 페이지까지 외우고 있었다.

“감독님이 대본을 줬어요?”

“예. 지금 이진환 씨가 들고 계신 거랑 같은 대본입니다.”

진환은 <메아리>의 영화감독 곽철민을 떠올리며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곽 감독은 깐깐한 괴짜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씬 하나하나에도 비현실적일 정도로 공을 들일 때가 있어서 그럴 때마다 주변 이들이 힘들어 하곤 했다. 대신 그만큼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니 그저 괴짜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곽 감독이니만큼 자연스러운 연기와 몰입감 있는 액션을 위해 대본을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감독들이라면 거의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진환은 이제 막 크랭크 인한 영화 <메아리>의 감독 곽철민을 떠올리며 대본의 18페이지를 폈다. 진환이 연기하는 주인공 한태진과 김현우가 연기하는 강민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부모도 재산도 명예도 잃은 전직 검사 강민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강에 떨어져 자살하려는 것을 절친 한태진이 열 일 제쳐 두고 달려와 그를 말리고 구하려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한태진이 오기 전부터 다리 난간에 서 있던 강민은 강한 척만 하느라 여태껏 말하지 못했던 제 속을 힘들게 털어놓으며 결국 한강에 뛰어내린다. 한태진은 이에 오열하며 강민을 대신해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간다.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다. 사교성 없고 기계처럼 제 할 일만을 반듯하게 해내는 한태진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였던 강민의 좌절과 자살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모든 것에 무심하던 사람이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슬퍼하다가 분노로 인해 복수심을 갖는 감정선을 원 테이크로 표현해야 한다. 이는 상당한 연기력이 아니면 한 번에 표현이 힘들기 때문에 진환도 나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진환이 은율을 바라보았다.

“페이지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대본을 열심히 봤나 봐요?”

“예. 통째로 수십 번은 읽었을 겁니다.”

대역할 부분만 읽진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게 진환의 흥미를 건드렸다.

“어차피 잠깐 대역하는 것뿐인데 다 읽을 필요가 있어요? 연기하는 배우도 아니고.”

일부러 약간 비꼬듯 말했다. 은율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작품의 분위기와 캐릭터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있다면 그만큼 자연스럽고 좋은 액션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어차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본인이 아니라 대역을 쓴 그 배우일 텐데요.”

“그럼 더 좋죠. 배우를 빛나게 하는 게 저희 역할이니까요.”

성실한 말과 스턴트맨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손등에 턱을 괸 채 은율을 바라보던 진환이 묘한 미소를 띠었다.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의아해하던 은율이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죠. 이렇게 차도 태워 주셨는데,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적극적이라 다행이네요.”

진환이 대본을 들어 보이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사실은 캐릭터를 다듬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있으면 완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가능하면 나와 대사 좀 맞춰 봐 줄래요?”

“대사……를요?”

당황한 얼굴의 은율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전 대본 리딩 경험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폐가 되진 않을지…….”

“괜찮아요. 국어책 읽는 수준만 아니면 되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진환은 촬영 직전에 모두가 모여서 대본 리딩을 갖는 경우가 아니면 누군가와 따로 대사를 맞추거나 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베테랑 배우와 맞춰 보는 게 아니고서는.

그런 진환이 은율에게 대본 리딩을 도와달라고 한 이유는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성실해 보이는 스턴트맨이 과연 담당 배우의 캐릭터에 대해 분석을 하긴 했는지, 대사에 감정을 담을 수는 있는지, 그런 쓸데없는 게 궁금해졌다. 어쩌면 한순간의 유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본이 필요할 테니 이걸로 봐요. 어차피 난 다 외웠으니까.”

대사까지 외웠을 리가 없다며 자연스레 대본을 건네었지만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어차피 외우고 있어서 상관은 없지만…….”

대사까지 다 외우고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진환은 점점 더 눈앞의 스턴트맨에게 관심이 갔다.

은율이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웃는 얼굴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진환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럼 잠깐만 실례할게요.”

진환은 은율의 안경을 벗기고서 제 무릎에 있는 대본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제 손으로 은율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드러난 얼굴에 일순 눈이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연기는 아무래도 눈을 제대로 보면서 해야 하니까요.”

진환은 제 행동에 대해 괜히 변명해 보았다. 은율은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쓸어 넘겨진 앞머리가 쏟아지지 않도록 몇 번을 더 넘겼다.

진환이 대사를 맞출 부분을 지정해 주고, 곧 시작 사인을 보냈다.

짧게 심호흡한 진환의 표정이 금세 복잡하게 변하며 눈가가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은율은 그가 순식간에 완벽한 ‘한태진’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흠칫하고 말았다.

“민아……,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목소리에 절절한 감정이 실렸다. 역시 배우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은율 역시 제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던 강민을 떠올렸다. 그러자 멋대로 속이 울컥한다.

“태진아.”

은율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갔다. 진환을 또렷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감길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나 말이야. 모든 걸 다 잃고 나니까…… 생각나는 게 여기밖에 없더라.”

조금 촉촉해진 은율의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원효대교 한가운데에서 한태진과 강민 두 사람은 10년 전,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을 이루자 약속했다.

“나한테 꿈이란 건 꿀 가치도 없었나 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부서져 버리는 걸…… 무슨 대단한 꿈인 양 꾸고 있었을까…….”

“민아, 내려와. 내려와서 이야기하자.”

진환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 그의 눈에 비치는 건 푹신한 밴 좌석에 앉은 은율이 아닌, 위태롭게 원효대교 난간에 서 있는 강민이었다.

은율의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은 채 떨렸다.

“내가 쓸데없이 꿈을 꿔서 모두 죽었어. ……다 사라져 버렸다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눈을 내리깐 은율의 한쪽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진환이 이를 악물며 얼굴을 아프게 무너뜨렸다.

“네 탓이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너 그렇게 약한 소리 하는 놈 아니었잖아?!”

은율이 우수에 젖은 눈으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순간 연기 중이라는 것도 잊고서 숨을 멈추었다.

누군가의 눈에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마치 시간이 그의 숨처럼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입술을 덜덜 떨던 진환이 천천히 은율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죽음의 구덩이 앞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친우에게 제발 붙잡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은율이 그 손을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끝이 살짝 맞닿았다.

은율이 두 눈에서 눈물을 떨구며 해사하게 웃었다. 너무도 가슴 아프고 또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걸 마주한 진환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여태껏 떨리던 목소리와는 아예 다른, 맑은 목소리였다. 그게 더 진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은율의 눈이 굳게 닫히고, 그의 손은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서로의 대사가 오가는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이후로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태진이 오열하며 강민의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이었다.

은율은 여기까지면 되지 않았나 싶어 촉촉이 젖은 눈을 떠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반쯤 멍하니 굳어서는 벌게진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심할 정도로 요동치는 것이, 아직 연기 중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말씀하셨던 부분은 여기까지……인 것 같은데요.”

은율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제야 진환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표정을 되돌리려 애썼다.

이상하게도 감정의 폭풍이 아직도 안쪽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제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손이 뻗어 나간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당황스럽기만 하다.

어느새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진환이 은율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눈물을 흘렸던 눈가를 손등으로 비벼 대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걸 직접 연기하니까 저도 모르게 울컥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약간 들뜬 듯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대사를 내뱉으며 연기해 본 적은 처음인 게 분명해 보였다.

‘처음인데 그런 연기를…….’

진환의 가슴이 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대본 리딩 자체가 처음인데 그만한 연기를 펼쳤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압도당할 뻔했어.’

조금 전의 연기를 상기하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와 동시에 또 한 번 연기를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끝도 없이.

기묘한 욕망이 저 깊은 곳에서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진환은 전율하는 속을 달래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왜 웃었죠?”

그새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내린 은율을 보며 진환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본상에는 눈물을 흘리며 떨어지는 강민……이라고 되어 있어요. 떨어지기 전에는 한태진과 한탄과 체념 섞인 짧은 대화를 나눴고요. 정황상 슬프게 울면서 눈을 감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쪽은 웃으면서 눈을 감더군요. 그 이유가 궁금해요.”

은율이 머뭇거렸다. 연기에 정평이 나 있는 톱배우 앞에서 자신의 연기에 대한 해설을 해 주자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요.”

재촉하는 진환의 목소리에 핀잔을 주거나 타박하려는 의도는 담겨 있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순수한 의문뿐.

“……강민은 모든 걸 잃고 힘들어 했잖아요. 이젠 편해지고 싶어서 한강 다리 위에 섰죠. 그런 자신을 끝까지 붙잡아 주는 한태진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은율이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두 사람이 연기한 장면이 영상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강민이라면…… 그런 한태진에게 홀가분하다는 표정이라도 지어 주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슬프고 아픈 표정이 마지막이 되어 버리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잖아요. 어차피 죽음을 결심한 상황이라면 소중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 수 있도록 웃어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은율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생 웃는 모습 한 번 보여 준 적 없던 무뚝뚝하고 엄하디엄한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끔찍한 교통사고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 처음으로 은율에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미안하다고.

당시에는 죽어 가면서 제게 왜 웃어 주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은율은 강민의 마지막 장면을 제 아버지의 마지막과 겹쳐 보고 있었다.

진환은 말없이 은율을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잠깐의 정적을 깬 것은 운전석의 연우였다.

“서울 진입했는데 어디쯤 내려 드릴까요?”

연우가 룸미러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은율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더니 얼른 백팩에 책을 쑤셔 넣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 주시면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팩을 메며 감사 인사를 건네자, 룸미러로 마주 본 연우가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차가 지하철역 앞에 멈추자, 쇼핑백을 챙겨 든 은율이 진환과 연우에게 번갈아 인사하며 얼른 차에서 내렸다. 은율이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써서 얼른 문을 닫으려는 그때, 진환이 작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또 봐요, 서은율 씨.”

들려오는 제 이름에 잠깐 움찔했다. 어떻게 이름을 알았지 싶었지만, 감독이 제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는 것이 떠올라 그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닫힌 문의 창문을 통해 은율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진환의 얼굴에서 금세 미소가 사라졌다. 밴이 출발했음에도, 진환은 은율을 바라보던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까의 연기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었다. 연기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가 누구든 갈가리 찢어 버릴 수 있을 거라 장담하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 그걸 장담할 수 없는 스턴트맨을 만나 버렸다.

진환은 강민을 연기했던 은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지한 얼굴을 했다.

*  *  *

“형! 늦어!”

은율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현관 앞에서 팔짱을 낀 채 하진이 잔뜩 굳은 얼굴로 은율을 노려보고 있었다. 190을 조금 넘는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건장한 청년이 그러고 있으니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쇼핑백 버리고 와서 다행이다.’

촬영용 정장이 든 쇼핑백을 들고 있었으면 꼼짝없이 뺏겨서 조사당했을 거다. 이번 촬영만 끝나면 버려도 된다고 들어서 고민하다가 버리고 온 차였다.

“오늘 오는 날 아니잖아?”

머릿속으로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 세어 보니 목요일이었다. 은율도 하진도 목요일까지만 수업이 있지만, 하진은 수업이 대여섯 시에 끝나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인 금요일에 일찍 찾아오곤 했다.

“시험 일찍 끝난 김에 그냥 왔어. 형도 오늘이 시험 마지막 날이잖아? 형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형도 일찍 끝났다던데, 집에도 안 들르고 어디 갔다 온 거야?”

현관문을 닫고 작은 원룸에 발을 들인 은율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밖에서 공부 좀 하다 오느라고…….”

하진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긴 했지만 깊이 캐묻진 않았다. 은율의 집중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가 밤늦도록 공부했다고 해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 버렸다.

“밥은?”

“아직…….”

“잘한다, 아주!”

하진이 표정을 구기며 은율의 등에서 백팩을 뺏어 들었다.

“이걸 어떻게 메고 다니는 거야, 대체. 어깨 빠지겠다.”

전공 서적과 자격증 관련 책이 가득한 백팩은 절대 가볍지 않은 무게였다.

백팩을 구석에 내려놓은 하진이 멀뚱히 서 있는 은율을 그대로 화장실에 밀어 넣었다.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꺼내 놓을 테니까 우선 씻어. 밖에 지금 미세먼지 폭풍이야? 왜 이렇게 먼지 냄새가 나.”

그 말에 순간 흠칫했다. 옷을 갈아입긴 했지만 아직 몸에 폭발물로 인한 그을음 냄새나 화약 냄새 같은 게 남아 있을 거다. 다행히 하진은 단순한 먼지 냄새라고 생각한 듯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콧등까지 내려오는 긴 앞머리에 커다란 안경을 쓴 남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눈을 가만히 깜빡이고 있다.

‘진짜 안 닮았다.’

날로 몸이 좋아지는 하진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진은 워낙 골격이 좋고 근육이 잘 붙는 타입이라서 딱히 운동을 안 해도 남자다운 체구였다. 아마 헬스클럽이라도 다니게 되면 금세 근육질 몸이 될 것 같기도 했다.

몸도 좋은데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얼굴선도 날카로워서 제법 위압감이 있었다. 눈매도 매서운 편이라 무표정하게 있으면 말도 쉽게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인상이 되지만, 평상시에 잘 웃고 다니는 편이라서 그런지 호감형으로 봐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은율은 안경을 벗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을 드러낼 때마다 칭찬은 많이 받는 편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은율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진이 같은 얼굴이 좋은데.’

여러 도장을 다니면서 우락부락한 얼굴에 탄탄한 근육을 가진 이들을 많이 보았다. 커 가면 커 갈수록 자신은 왜 그들처럼 되지 않는지 한탄했다.

남자다운 얼굴을 가진 듬직한 형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모습을 가지게 된 건 하진이었고, 자신은 그저 연약해 보일 뿐이었다. 동생인 하진과 겉모습부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니, 괜히 시무룩해진다.

생각을 떨치며 따끈한 물을 틀었다. 붕대가 감긴 부분을 수건으로 감싸고 그 팔을 되도록 쓰지 않도록 조심했다.

한쪽 팔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난이도가 생겨 버린 샤워를 가까스로 끝내고서 타월로 몸의 물기를 찬찬히 닦아 냈다. 다친 지 얼마 안 된 것뿐만 아니라 봉합까지 해서 그런지 그런 별것 아닌 움직임만으로도 팔이 시큰거렸다.

옷을 집으려고 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자, 문 앞에 곱게 접힌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 속옷이 있었다. 하진은 가스레인지 앞에 붙어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그가 돌아보기 전에 얼른 옷을 집어 들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다친 팔에 주의하며 옷을 갖춰 입고는 버릇처럼 안경을 집어 들어 썼다. 그 상태로 새 타월을 제 머리 위에 얹으며 나갔다. 멀쩡한 한 팔로 머리를 닦으려니 여간 뻐근한 게 아니다.

타월로 머리를 닦다가 포기한 채 주방에 가까이 가자 따끈하게 퍼 담은 밥 두 공기가 보였다.

“밥 안 먹었어?”

벌써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하진이 그답지 않게 입을 삐죽였다.

“당연한 거 아냐? 형 두고 어떻게 나 혼자 밥을 먹어?”

“미안…….”

볼을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돌아보던 하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은율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가 머리에 얹어진 타월을 잡고서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머리 제대로 닦아야지. 감기 걸려.”

하진이 문득 손을 멈추며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선 안경 좀 벗고 있어.”

커다란 안경알 뒤로 긴 속눈썹이 팔락였다. 하진을 올려다보던 은율이 안경을 벗어 손에 들었다. 그제야 하진이 작게 웃으며 다시 손을 놀렸다.

“안경 안 불편해? 눈도 좋은 사람이.”

은율이 살짝 웃어 보였다.

“지금은 내 몸처럼 편해.”

하진은 은율의 뒷머리를 닦아 준다며 잠시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사이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지나갔다.

은율의 시력은 좌우 모두 2.0이었다. 그런 그가 밖에선 꼬박꼬박 안경을 썼다. 그것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무렵부터 아버지가 강요한 일이다.

세련된 안경이 아닌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으로 얼굴의 반이 가려진 어린아이는 아무리 예쁘고 잘생겨도 모 만화의 안경잡이 꼬마 탐정을 코스프레한 아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도 모자라 앞머리까지 길게 길러서 커튼이라도 늘어뜨린 것처럼 다니고 있으니, 드러나는 거라고는 코 일부분과 입술이 전부였다.

‘아버지 나름의 방어책이었겠지.’

남다른 외모를 가진 은율에겐 어릴 때부터 이상한 사람들이 잘 꼬이곤 했다. 무뚝뚝한 아버지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볼품없는 안경과 긴 앞머리를 고집한 것일 거다.

‘이게 은근히 효과가 좋단 말이지.’

안경을 벗고 앞머리를 올려 둔 것뿐임에도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진은 얌전히 서 있는 은율을 내려다보며 따뜻한 눈을 했다. 똑 부러지는 면이 많은 형이었지만 가끔 둔하게 굴 때는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작은 것조차 살뜰히 챙기게 된다. 여자 친구에게도 그러지 않는데.

얼마 전 헤어졌던 여자 친구와의 일을 떠올렸다.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뭐?’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미안해.’

그 말 한마디로 뺨까지 얻어맞았다. 며칠 뒤, 여자 친구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얘기를 꺼냈고 또 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녀는 참다못해 한 번 더 따귀를 때리고서 곧바로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하진은 그녀를 잡지 않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다.

예전부터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면 모두 같은 말을 들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하진은 애인이 없을 때 고백을 받으면 일단 사귀곤 했다. 그러고선 사귀는 동안에 상대를 좋아하게 되기 위한 나름의 최선을 다해 본다. 결과는 언제나 같았지만.

‘아직도 마음 정리가 안 됐나.’

쓴웃음을 지은 하진은 은율의 눈이 힐끔 그를 향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씩 웃고 있었다.

은율은 드라이까지 해 주려는 하진을 만류하고서 조금 식어 버린 밥을 좌식 테이블에 세팅했다. 김치를 비롯한 밑반찬 몇 개를 배치하고 나니, 하진이 그 가운데에 인스턴트 육개장이 담긴 냄비를 내려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밥상을 두고 마주 앉은 둘이 동시에 내뱉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둘 다 배가 고팠던지라 잠시간 말없이 식사만 했다.

밥공기가 반쯤 비워졌을 때, 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내일 뭐 해?”

“공부하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얼굴로 눈도 돌리지 않는 은율에게, 하진도 마찬가지로 눈도 돌리지 않고 식사하며 물었다.

“공부 하루 쉬어도 되지?”

은율이 젓가락질을 멈추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니고, 지희가 외롭대서.”

은율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뭐? 언제 그랬어? 난 연락 못 받았는데…….”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진은 은율이 오해하지 않도록 얼른 말했다.

“나도 아까 오는 길에 통화하면서 들었어. 형도 걔가 형한텐 우는 소리 한 번 안 하는 거 알잖아.”

이번엔 은율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무슨 소리야! 그냥 형이 걱정할까 봐 그러는 거지. 괜히 부담 주기 싫은 거야.”

하진이 김치를 집어 입에 밀어 넣으며 힐끗 은율을 보았다. 다행히 처졌던 어깨가 조금 올라가 있다.

“학교 끝날 때 맞춰서 저녁이나 같이 먹고 놀아 주다 오자. 어때?”

은율이 환하게 웃었다.

“그럴까?”

과할 정도로 화사한 얼굴을 보며 짧게 헛기침한 하진이 마주 웃으며 제안했다.

“그쪽에서 하루 자고 올래?”

여동생 지희의 학교는 같은 서울이라곤 하지만 은율의 집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지하철로 갈아타는 것까지 하면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잠시 생각하던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잘 곳 잡아야 하잖아. 돈 아까워.”

“어플 통해서 받아 둔 쿠폰이랑 포인트 쓰면 얼마 안 해. 그리고 사실은…….”

하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 실연당했어…….”

“뭐?!”

예상대로 은율이 깜짝 놀라며 시선을 주었다. 하진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그런지 좀…… 우울해. 그래서 내일 나간 김에 기분 전환도 하고 밤에는 옛날처럼 같이 침대에 누워서 얘기도 하고 싶어. 형이랑 같이 편하게 푹 잘 수 있으면 머리 복잡한 것도 좀 풀릴 것 같아.”

“……그래?”

“옛날에 셋이 같이 잘 때 맨날 형이 우리 안 좋은 일 있으면 토닥여 주고 위로해 줬잖아. 그때 생각이 막 나네.”

거기까지 얘기를 들은 은율은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생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 토요일에 밖에서 다 같이 점심 먹고 헤어지면 되겠다.”

결국 은율은 지희네 학교 근처에서 하루 쉴 곳을 잡기로 했다. 하진이 은율 몰래 씩 웃었다.

연애 경험이 없는 은율은 이렇듯 동생들의 연애사에 약한 편이었다. 이런 점을 이용하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가 하루라도 편하게 쉬었으면 하는 게 하진의 바람이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합심해서 상을 치웠다. 그러고는 좁은 싱크대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하진이 물에 불린 설거짓거리를 세제 묻은 수세미로 꼼꼼히 닦아서 건네면 은율이 그것을 따뜻한 물로 씻어서 싸구려 식기 건조대에 열을 맞춰 올렸다.

“요즘은 무슨 알바해?”

하진이 묻자 은율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냥 당일 알바 이것저것. 이제 막노동도 한번 해 볼까 해.”

굳이 마지막에 막노동을 이야기한 건 오늘처럼 스턴트 일을 하면서 상처가 났을 때 둘러대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하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막노동은 하지 마. 몸 상해.”

“나 보기보다 튼튼해. 알다시피 도장 한두 군데 다닌 거 아니잖아.”

그의 말마따나 여러 도장을 다녔던 만큼 근육을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도 알고 어떻게 해야 덜 다치는지 아는 사람이긴 했지만, 하진은 그의 몸에 큰 무리가 가는 일은 되도록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돼. 하지 마.”

단호하게 말한 하진이 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장학금 받게 됐으니까 학비 걱정은 안 해도 돼.”

“진짜?!”

은율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릇을 건네받아 씻고 있다.

“응. 그리고 점장님이 시급 올려 준다고 했어. 나 생활할 돈은 충분하니까 형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여차하면 휴학을…….”

“휴학은 안 돼.”

싸늘한 목소리에 하진이 움찔했다.

“휴학해야 할 것 같으면 차라리 형이 일을 늘릴게.”

은율의 목소리에는 강한 책임감 같은 게 느껴졌다. 하진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은율은 두 동생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것에 심한 강박증을 갖게 되었다.

하진이나 지희가 돈 때문에 다른 학과, 다른 진로를 알아보려고 하면 은율이 그때마다 단호히 만류했다. 돈이든 뭐든, 절대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길로 가라고.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맏이로서 죽은 부모님을 대신해 두 동생을 살뜰히 뒷바라지하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러면 정작 본인이 하고 싶은 것, 본인이 꿈꾸는 것은 어찌 하나 싶었다. 그런 걸 물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너희들이 잘 되는 게 내 꿈이야’ 정도의 말일 테지만.

눈을 내리깐 하진이 애써 웃어 보였다.

“정말 휴학한다는 건 아니었어. 여하튼 내 학비는 내 선에서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형은 나 대신 지희만 신경 써 줘.”

“……고마워. 그래도 무리하지 마.”

딱딱하던 목소리가 조금 풀려 있다. 하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입에 담는 그가 안타깝기만 했다.

은율은 하진과 지희를 각 학교의 비싼 기숙사에 넣어 놓고는 저 홀로 싸구려 반지하 원룸에 살고 있었다. 보증금 300에 월세 20만 원의 6평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방 한 칸.

그런 곳에 살면서도 하진과 지희에겐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작 본인은 책 한 권을 사더라도 10원이라도 더 싼 책을 찾느라 밤을 새우고, 옷은 서너 벌의 싸구려 티와 바지로 버티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은율은 힘들다는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하진은 그가 얼마나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들을 책임지고 잘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하루하루 짓눌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꿈이 뭔지도 모르면서 두 동생의 꿈을 부족함 없이 이루어 주려고 필사적이다.

뒤늦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다면 여태껏 밀어준 은율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하진은 학교에 들어간 직후부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분석해 나갔다.

조금 잘 찍나 정도의 실력으로는 안 된다.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굉장한 사진을 연신 찍어 내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

여태껏 뒷바라지밖에 할 수 없었던 형이 그 본인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고 꿈을 찾았으면 했다.

‘앞으로 2년…….’

2년 후엔 졸업이다. 그 안에 프로 작가도 놀랄 정도의 성과를 내어, 졸업하자마자 얼른 유명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위해 피를 토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실적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2년이나 남았다는 것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2년 동안 동생들밖에 모르는 형은 얼마나 힘들게 버티게 될까.

마지막 식기를 건네주는 하진의 눈에는 측은함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 눈동자는 이윽고 은율의 어깨에 닿았다. 왜소한 어깨이지만, 그 어깨로 매달린 묵직한 짐을 잘도 지고 있다 싶어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  *  *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은율의 낯빛이 어두웠다.

하늘에 먹구름이 껴 있다. 오늘의 날씨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몇 시쯤 비가 오는지 체크해 보니, 다행히 늦은 밤이나 새벽녘에 잠시 오고 그친다고 했다.

비가 오는 날은 기분이 좋지 않다. 아니, 최악에 가깝다.

거기다가 오늘은 촬영장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몸에 열까지 나고 있었다.

촬영에서 다쳤던 팔의 상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꿰매고 치료했지만 그로 인해 열이 오르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은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바닥을 박찼다. 그의 긴 다리가 시원하게 움직였다.

비가 오는 날을 뺀 매일 오전마다 1시간씩은 조깅을 다녔다. 이렇게 가볍게라도 몸을 움직여 주면 온몸의 혈관이 뚫리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땀방울을 매단 채 조깅을 끝내고 돌아오던 은율은 진동을 느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강 팀장님’이라는 글자를 확인하자마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이번 곽 감독의 작품에 발 담그고 있는 스턴트팀의 팀장으로, 은율은 촬영을 위해 임시로 그 팀 소속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이른 아침부터 미안해. 혹시 내일 대역 가능해? 곽 감독님이 급하게 액션신 하나 넣자고 하시는데.

“아……. 내일이요?”

하진과 지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동생과 모처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인 만큼, 일정이 너무 이른 시간이거나 촬영장과의 이동 거리가 멀면 쉽사리 하겠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디서 몇 시 촬영입니까?”

-의정부역 쪽 세트장이야. 예전에 짜 놨던 패턴을 다듬어서 쓰면 될 것 같아. 7시 촬영인데 합 맞춰야 하니까 5시까지 오면 되고, 의상은 그쪽에 준비되어 있어.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곳인 데다가 저녁 무렵이라 다행이었다. 마침 지희의 학교도 강북이라서 조금만 더 지하철을 타고 올라가면 되겠다 싶었다. 공부 계획이 연달아 틀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일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형님들도 가세요?”

-응. 우리 팀 다 들어가고, 넌 김현우 씨 대역. 가능하냐?

“예, 가겠습니다. 그럼 이번 건 보수가 어떻게…….”

팀장에게 이번 건의 보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생겨 버렸다. 이번 달은 일이 많아지면서 벌이가 두둑해졌다. 우울했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조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그 소리에 잠에서 깬 하진이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기숙사 침대에서 자던 녀석이 바닥에서도 참 잘 잔다 싶어 피식 웃었다.

“조깅 갔다 왔어?”

몽롱한 눈으로 은율의 차림새를 훑은 하진이 볼품없이 큰 하품을 해 대며 물었다. 은율은 그의 뻗친 머리를 거칠게 헤집어 주고는 갈아입을 옷을 챙기기 위해 구석의 서랍장을 열었다.

하진이 뒤에서 손을 뻗어 동그란 안경을 벗겼다. 안경을 서랍장 위에 두고서 은율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졸지에 하진의 품에 폭 안겨 버린 은율은 제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묻은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럴 때 보면 어릴 때랑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땀 흘려서 냄새나. 씻고 나올게.”

“으응, 괜찮아.”

“답답해. 좀 풀어 봐.”

“형 따끈따끈하다. 조금만 더…….”

비몽사몽인 상태로 제 얼굴을 목에 비벼 온다. 간지럼에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제 몸을 속박한 하진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그 안쪽의 급소를 꾹 눌렀다.

“악!”

하진이 깜짝 놀라며 팔을 풀었다.

“아, 아아! 형, 항복! 항복!”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말 듣자, 동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풀어 주자, 하진이 제 손목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으으, 형 못됐다. 사진사의 손을…….”

“셔터 누르는 손 아니잖아. 엄살 피우지 마.”

“바디 받치는 손도 중요하거든요?”

볼멘소리를 하는 하진의 머리를 한 번 더 거칠게 헤집은 은율이 제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진은 저리는 손목을 몇 번 흔들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면서도 이부자리는 깔끔하게 정리해 한쪽 구석에 놔둔다.

하진이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작은 냉장고로 걸어갔다. 안에서 우유를 꺼내 유리컵 두 잔을 가득 채웠다. 때마침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은율이 제게 자연스레 건네지는 컵을 받아 들었다. 시원한 우유를 단번에 쭉 들이켜자 하진이 빈 컵을 받아 싱크대에 두었다. 그가 제 몫의 우유를 홀짝이며 은율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형, 몸 안 좋아?”

하진이 미간을 모으며 약간 상기된 은율의 얼굴을 살폈다. 은율이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늘 비 온대.”

하진은 곧바로 납득했다. 비 오는 날 은율의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가지 말자. 지희는 내가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 들러서 보고 갈게.”

“아냐, 괜찮아. 비도 밤늦게나 잠깐 온다고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여동생을 보는 거기도 하고, 게다가 외롭다는데 안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진이 제 컵을 비워 싱크대에 놓고서 은율에게 성큼 다가섰다. 찬 우유가 든 컵을 만져서인지 시원해진 하진의 손이 그의 뜨끈한 목을 매만졌다.

“열까지 있네.”

하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은율은 얼른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웃었다.

“여태 달리다가 뜨거운 물로 샤워했는데 열이 있어야 정상이지.”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하자 하진이 입을 다문다. 의심스러우면서도 은율이 워낙 태연하고 아무렇지도 않아서 자기가 과민 반응하는 건가 싶었다.

전날에 밥상으로 썼던 좌식 테이블을 펼치고서 은율은 국제 자격증 교재를, 하진은 제 교수가 선물로 준 두꺼운 포토 북과 메모를 위한 수첩을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은 상태로 말 한마디 없이 책에 집중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두 사람은 정오가 될 때까지 그 상태로 각자의 책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하진이었다. 마지막 사진을 보며 포인트 요소에 대해 적어 본 하진이 포토 북을 덮고서 시선을 올렸다. 은율은 영어로 뒤덮인 책을 통째로 먹어 치울 것 같은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책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삼 속눈썹이 참 예쁘구나 싶었다.

‘이럴 때면 아버지가 백번 이해된다니까.’

제 형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둔한 형 빼고는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 아버지가 형을 밖에 내놓기도 두려워할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다는 걸.

‘뭐, 아버지는 워낙 겉으로 드러내질 않는 분이셨지.’

겉과 속이 따로 놀던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은율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하진이 나른하게 웃었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애정을 알고 있었음에도 하진과 지희는 시샘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시샘하기엔 너무도 사랑하는 형제였기에.

은율이 집중하던 책에서 눈을 뗀 것은 그로부터 약 30여 분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큰 대목을 완벽히 머릿속에 넣고서 책을 덮고 나니, 그제야 눈앞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챘다.

“공부 끝났어?”

냉장고를 활짝 열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하진이 용케도 알고 물어왔다. 은율이 책을 덮으며 깊이 숨을 내쉬는 소리를 귀신같이 들었나 보다.

은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의 뒤로 다가가 섰다. 하진이 목을 뒤로 꺾어 그를 귀엽게 올려다보았다.

“형아야-.”

“응?”

애교 섞은 비음에 미소를 띠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제도 말하려고 했는데, 진짜 공장 같다.”

“공장? 무슨 공장?”

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스턴트식품 공장.”

은율은 그제야 하진이 보고 있던 냉장고 안을 바라보았다.

인스턴트 육개장, 인스턴트 설렁탕, 인스턴트 카레, 인스턴트 덮밥, 인스턴트…….

인터넷으로 산 반찬 몇 가지와 김치 말고는 죄다 즉석식품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반찬과 김치도 싸구려 중국산이었다.

민망해진 은율이 볼을 긁적이며 눈을 피했다.

“인스턴트만 먹으면 속 버린다고 했잖아.”

“하지만 요리는 정말…….”

몇 번 시도해 본 요리의 흉물스러운 결과물을 떠올린 은율이 끙끙거리다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먹을 거니까 오늘은 외식하자.”

“뭐? 아니, 굳이 외식하자는 건 아니었는데…….”

“원래 오늘 외식하려고 했어. 나가자.”

안 그래도 매주 얼굴을 보는 하진이 집에 올 때마다 인스턴트만 먹게 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자신의 끔찍한 요리를 선보여 주는 것도 안 되겠다 생각한 은율이 냉장고 앞에 앉아 있는 하진을 붙잡아 질질 끌어냈다.

얼마 가지 않아 결국 두 사람은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하진은 한쪽 어깨에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메고서 은율의 등에 있는 백팩마저 뺏어 들었다. 책이 가득 들어 무겁다며 만류했지만, 하진은 고집을 부리며 기어코 그것을 비어 있는 한쪽 어깨에 메었다.

지희에게 가는 길에 해장국집에 들러 숙취 해소라도 하는 것처럼 얼큰하게 한 사발씩을 해치웠다. 자연스레 돈을 내려던 은율을 만류하고, 하진은 제가 아껴 둔 용돈을 꺼내 값을 지불했다. 그 때문에 잠깐 실랑이가 있었지만, 주인에게 막무가내로 돈부터 쥐여 준 하진이 이기고 말았다.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주 의기양양했다.

식당을 나선 두 사람은 곧바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노선을 확인하고 올라탄 열차는 가장 사람 많은 열차라는 걸 바로 실감할 정도로 북적거렸다. 노선상 두 정거장 뒤에는 환승역이라 상당히 많은 사람이 들이닥칠 것이다.

하진은 은율의 손을 끌어 문가 구석에 몰아넣었다. 문과 기다란 쇠기둥 사이에 폭 들어간 은율을 제 몸으로 가리듯 그 앞에 서면서도 은율이 답답하지 않도록 조금의 여유 공간을 두었다. 덕분에 은율은 등을 편히 기댄 채 서 있을 수 있었다.

하진은 은율이 휴대폰을 꺼내 드는 것을 보며 그도 목을 쭉 빼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영어로 뒤덮인 화면을 보고 있다. 그것은 은율이 이렇게 앉아서 이동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미리 다운받아 놓은 국제 자격증 교재 내용이었다.

보다 못한 하진이 은율의 휴대폰을 확 뺏어 버렸다.

“형, 오늘은 더 이상 공부 금지.”

“그렇지만 지하철 타고 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하여튼 공부벌레.

하진이 심통 난 얼굴로 은율의 휴대폰을 그의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하고 얘기해, 얘기.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이럴 때마저 그런 꼬부랑 글씨를 보고 있고 싶냐?”

은율은 매주 보면서……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심통 부리는 하진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친구들은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 동생은 동생이 아니라 웬수라던데 은율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은율이 손을 뻗어 하진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환승역은 금방 다가왔고, 예상대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사람에 치이고 밀리면서도 하진은 쇠기둥과 벽을 짚은 팔에 힘을 가득 주며 그것을 버텨 냈다. 하진에게 가려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은율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쉬이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진아, 좀 더 붙어도 돼.”

하진의 뒤는 사람들로 빈틈이 없이 꽉꽉 들어찬 데 반해 은율과 하진의 사이엔 사람 하나 더 설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하진은 그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때 아닌 힘자랑을 하는 중이었다.

“바짝 붙으면 답답하잖아.”

“괜찮아. 붙어, 빨리.”

저쪽 입구에서 미처 못 탄 사람들이 어떻게든 타 보려고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여파는 도미노처럼 밀려와 하진에게까지 이르렀다. 어쩔 수 없이 한발 다가선 하진이 은율과 바짝 밀착했다.

사람을 빼곡하게 실은 열차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고, 약간 서늘하던 지하철 안은 금세 후끈한 온기로 가득 찼다.

하진은 환승해야 할 역을 체크하기 위해 입구의 노선표를 확인하다가 제 어깨에 뭔가 툭 닿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마주 본 채로 서 있던 은율이 어느새 제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피곤해?”

은율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 안으로 손을 넣어 눈을 비볐다. 어깨에서 이마를 떼려 하자, 손을 올려 그 동그란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섯 정거장 동안은 이쪽 문 안 열리니까 잠깐 눈 좀 붙여. 날씨 때문에 힘든가 보다.”

그렇게 말하며 왼손으로는 쇠기둥을, 오른팔로는 은율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원체 서서 잘도 자는 은율이었지만, 혹시 몰라 팔에 힘을 주고 지탱해 주었다. 졸지에 은율은 하진에게 안긴 채 말 그대로 선잠을 자게 되었다.

하진은 어느덧 잠이 들어 버린 은율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매일 바쁘고 피곤하게 사는 형인데 날씨까지 도움을 안 준다.

‘평생 안 나으려나.’

비가 줄기차게 오는 날이면 수업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그러면 어김없이 어두운 집 안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진 은율을 볼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만 했다.

비가 심하게 오는 날 큰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은율도 죽을 뻔했다. 병석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치료와 재활에 힘썼고, 빠른 회복을 보이며 동생들만 남아 있던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비가 심하게 내리던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던 은율이 갑자기 쓰러지며 발작을 일으켰다. 웅크린 채 한쪽 복부를 부여잡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 모습에 처음엔 맹장이 터졌나 했다.

급히 병원에 데리고 가 들은 말은 맹장 수술을 하자는 말이 아닌, 정신과 상담을 받자는 것이었다.

은율이 손으로 짚고서 아파하던 복부는, 사고 당시 트럭에서 쏟아진 철근이 날아와 관통한 자리였다. 장기 손상이 심하지 않아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으나, 치료가 다 끝난 후에도 트라우마로 인한 그곳의 고통은 여전했다. 지금은 트라우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흉터를 지워 버렸지만, 가끔 상태가 심할 때면 다시금 통증이 오는 모양이었다.

부모님을 앗아 간 교통사고는 은율에게 빗줄기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흉터마저 없애 버린 자리에는 찢어지는 고통을 심어 주었다.

정신과 상담의라는 사람이 보호자 명목으로 불러 온 고모와 이모에게 하는 말을 듣고 하진은 저도 모르게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사고 당시 잠들어 있어서 망정이지, 깨어 있었으면 차까지 못 탈 뻔했다고 다행이란다.

‘미친 새끼. 의사도 아닌 새끼.’

은율에게 대놓고 직접 말했으면 정말 죽도록 패 줬을지도 모른다.

그 후 은율은 지금까지도 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월이 꽤 흘러서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증세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발작을 일으키거나 숨넘어갈 지경까지 가진 않았다. 정신과 상담의도 말하길,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지만 않으면 크게 발작하는 일 없이 점점 나아질 거라고 했다.

하진은 가슴 아픈 눈으로 제 형을 내려다보았다. 비가 오면 출근할 수가 없어서 제대로 된 정기 알바 대신 단기 알바 위주로 일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자신이라도 빨리 학교를 졸업해야 그에게 부담이 가지 않을 텐데.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형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으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다섯 정거장을 지나, 은율과 하진이 서 있는 쪽에서도 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진은 몸을 살짝 틀어 은율을 쇠기둥 쪽에 붙이고 제 등으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접근하는 걸 막았다. 다행히 은율은 잠든 채로 깨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더 지나자, 은율이 바르작거리며 눈을 떴다. 허리를 잡은 손이 가볍게 토닥인다. 잠이 가득 든 눈을 깜빡이며 하진을 올려다보더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왔어?”

“역 두 개 남았어. 조금 더 자.”

은율이 고개를 저으며 잠을 깨기 위해 눈을 비볐다. 하진의 어깨 너머로 보니 서 있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그제야 하진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며 미안한 얼굴로 약간 거리를 벌렸다.

잠깐 실없는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내릴 때가 되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으로 향하는 동안, 하진은 지희가 요즘 사춘기인 것 같다는 얘기를 꺼내며 불퉁하게 투정 부렸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던 은율은 문득 지하철 벽면에 있는 커다란 광고판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광고판에 나온 이진환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은율은 매력적인 눈동자에 시선을 사로잡혀 버려, 하진이 부르는 소리도 채 듣지 못했다.

“형! 뭐 하냐고.”

하진이 다가와 어깨를 흔들자 그제야 은율의 시선이 떨어진다. 광고판을 본 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웬일로 형이 게임에 관심을 다 가지냐?”

이진환이 광고 중인 건 모바일 게임이었던 모양이다. 중세풍 모바일 게임 광고에 왜 정장 차림의 훤칠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남자는 은율이 실제로 봤던 이진환이었다.

은율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하진의 등을 밀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면서도 신경 쓰이는 듯 광고판을 한 번 더 힐끔거리다 걸어갔다.

‘재미있었는데.’

진환의 차에서 둘이 대본 리딩을 했던 걸 떠올렸다. 직접 입으로 소리 내어 대사를 말하며 연기해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즐거움이 있었다. 캐릭터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것도 좋았고, 대배우와 눈을 맞대며 연기했던 것도 좋았다. 짧은 대본 리딩이었지만, 은율은 그 일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해 보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할 거다. 연기자는 다른 무엇보다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기 공부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이 우연하게나마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들을 애써 지워 나갔다.

지희의 학교는 역에서 도보로 5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역 밖으로 나와서 시간을 보니,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버렸다. 그래서 지희에게 끝났다는 연락이 올 때까지 근처 카페에 있기로 했다.

학생들이 주 고객인 작은 개인 카페여서인지, 내부는 손님 한 명 없이 조용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아 휴대폰을 두드리던 젊은 여성이 웃는 낯으로 반겼다.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짐부터 내려놓고 안을 둘러봤다. 낙서가 가득한 색색의 포스트잇이 벽 가득히 붙어 있었는데, 몇 개 읽어 보니 대부분 근처 학생들이 남긴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려는 은율을 만류하고 하진이 나섰다. 그는 은율이 말하지 않아도 아메리카노만 고집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은율은 생긴 것과 달리 단것은 전혀 못 먹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진은 생긴 것과 달리 단것만 먹는 사람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카페모카를 사 들고 자리로 돌아오자, 은율은 예상대로 책을 펴고 공부를 시작할 참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내려다보자 그가 눈을 마주하며 헤헤 웃는다.

“가방을 못 들고 나오게 해야 했는데.”

“어차피 휴대폰으로 볼 수도 있어.”

“……휴대폰을 아까 돌려주지 말았어야…….”

“시끄럽고, 앉기나 해.”

입을 삐죽이던 하진이 자리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그러고선 제 몫의 커피에 올려진 생크림을 빨대로 휘휘 저으며 은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은율이 뒤늦게 그의 시선을 눈치챘다.

“왜?”

눈을 가만히 깜빡이자 하진이 컵을 내려놓았다. 그는 두리번거리다 창가의 발을 내려 밖에서 안쪽이 보이지 않게 했다. 카운터를 힐끔 보니 아까의 여성은 처음 봤을 때처럼 카운터 속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하는 중이었다. 고개를 쭉 빼 봐도 서로 시선이 얽힐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양 팔꿈치를 대고 몸을 쑥 내민 하진이 씩 웃었다.

“형. 나 사진 좀 찍어도 돼?”

“사진?”

“연습 상대로 모델 좀 돼 주라.”

은율이 눈을 굴렸다.

“저번 주에 찍은 거 있잖아.”

“그건 배경이 화장실이잖아. 그것도 형네 좁아터진 화장실.”

“그 전 주엔 자고 있는 것도 찍어 갔잖아.”

“눈 뜨고 있을 때 찍은 거 아니잖아. 그리고 이런 곳에서도 찍어 보고 싶단 말이야. 안 돼? 응?”

하진이 제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엽게 애교를 부리니 은율도 계속 마다하고 있기가 미안했다. 입가에 미소를 띤 그가 알았다고 대답하며 책을 덮었다.

“포즈 같은 거 취해야 해?”

“아냐, 자연스러운 게 좋아.”

하진이 은율의 안경을 벗겨 테이블 한쪽에 두고서 그의 앞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일부는 뒤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쓸어 주고, 일부는 옆으로 넘겼다. 젤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며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자연스러운 세팅도 나쁘지 않다.

머리를 어느 정도 세팅하고서 얼굴로 시선을 내리니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왜인지 귀여워서 웃음이 날 것 같다.

깔끔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정리된 머리를 바라본 진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눈 떠도 돼, 형.”

하진이 카메라 가방에서 묵직한 DSLR을 꺼내 들며 말했다. 카메라 설정을 조정한 뒤 테스트 삼아 파인더에 은율을 담았다. 눈만 깜빡이며 멀뚱히 정지해 있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형, 지금 테스트하는 거니까 그냥 편히 움직이면 돼. 이쪽 신경 쓰지 마.”

그제야 은율이 편안한 얼굴로 손을 뻗어 따끈한 아메리카노를 집었다. 뚜껑을 열고 후후 부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서 실소해 버렸다.

찰칵- 찰칵찰칵-

테스트라는 것도 잊은 채 연신 찍어 댔다. 은율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것도 좋다며 찍고, 또 찍었다.

은율은 어느덧 포즈나 표정을 잡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린 채, 그저 귀여운 동생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분주하게 구는 걸 감상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몰입해서 촬영하던 하진은 카페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밀어닥칠 때가 되어서야 카메라를 내렸다.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오는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은 하진이 얼른 은율에게 안경을 씌워 주었다. 그러면서 손으로 빗듯이 머리를 내려 준다.

“지희네 학교 교복 맞지?”

여학생들의 교복을 알아본 은율이 묻자, 하진도 그녀들의 교복을 체크했다. 넥타이의 색으로 보아 지희와 같은 학년인 게 분명했다.

그새 카메라를 정리한 하진이 가방을 들며 말했다.

“같은 학년이네. 지금 끝났나 보다. 전화해 볼 테니까 바로 나가자, 형.”

두 사람은 곧바로 카페를 나와 지희의 학교를 향해 걸었다.

하진이 앞서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때마침 지희에게 수업 마치고 내려가고 있다는 문자가 왔다. 그녀의 학교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 여러 명을 지나치며 교문에 다다른 하진은 곧바로 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교문이야.”

-진짜? 완전 빨라! 뛰어간다!

전화 너머로 쾌활한 목소리가 울렸다.

“뛰지 마. 너 저번에도 뛰어 내려오다가 시원하게 굴렀잖아.”

학교 본관에서 교문까지는 다소 경사가 있는 언덕이었다.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오다 그대로 넘어져서 서너 바퀴를 구르던 제 여동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진이 주의를 주었다.

“이미 달려왔지롱!”

-이미 달려왔지롱!

옆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놀라서 주먹 쥔 팔을 올렸다.

“야! 한 대 때릴 뻔했잖아!”

“히히!”

하진이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렸다. 그는 제 앞에 뒷짐을 지고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지희는 삐져나온 머리카락 하나 없이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고 있었다. 그에 반해, 옷차림은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타이도 없고 셔츠 단추는 2개나 풀어진 상태였다. 짙은 남색 교복 재킷 안에는 단추를 죄다 풀어 놓은 조끼가 바람에 살짝 팔락거렸다.

지희의 뒤로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두 여학생이 바짝 다가서서 인사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저희도 지희랑 같이 밥 얻어먹어도 돼요?”

넉살 좋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들은 하진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서 눈웃음을 쳤다. 지희가 ‘이런 여우들’이라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던 지희의 눈이 은율에게 향했다.

“헉…….”

은율은 말없이 지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희는 딱딱하게 굳은 채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지희의 친구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와 은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희가 시선은 은율에게 둔 채로 하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진이 순순히 끌려와 그녀의 입가에 제 귀를 가져갔다.

“왜, 왜 율이 오빠가 있어?”

“아, 말 안 했나? 너한테 연락받았단 얘기하고서 같이 왔어.”

“야! 말을 해야지!”

지희가 나이 차도 무시한 채 반말로 버럭 화를 냈다. 그런 지희의 귀에 은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지희야. 내가 기억하는 단정한 교복 차림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제대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은율의 눈빛이 평상시와 달리 제법 싸늘하다는 것을.

“아하하, 마지막 시간이 체육이어서 급하게 갈아입고 나오느라 그랬어. 절대 평소에 이러고 다니는 거 아니야, 오빠!”

후다닥 변명하며 얼른 셔츠 단추와 조끼 단추를 채우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자동 넥타이를 꺼내 재빨리 목에 걸었다. 지희가 흐트러진 옷을 단정히 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사이, 지희의 친구들이 얼른 하진에게 붙어 작은 소리로 속삭여 물었다.

“저 오빠는 누구예요? 오빠 친구분이세요?”

“지희 저러는 거 처음 봤어요.”

하진을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확실히 친근해 보였지만, 하진에게 하듯이 막대하거나 맞먹으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앞에서는 쩔쩔맨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조심하려는 게 보였다.

“우리 집 첫째.”

“예?!”

“전혀 안 닮았는데요?!”

하진의 대답에 예상대로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여학생들이 보기에 연약한 모범생 느낌의 은율과 그의 남동생 하진은 덩치나 골격, 분위기 등, 어디 하나 닮은 곳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형제인 데다가 활발한 여장부 느낌의 지희와도 남매라니, 통 매치가 되지 않았다.

단정해진 차림의 지희를 눈으로 훑어본 은율이 그제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잘 지냈어?”

그러자 지희가 환해진 얼굴로 은율의 품에 뛰어들었다.

“오빠아!”

애교를 부리듯이 은율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비빈 지희가 보란 듯이 입을 삐죽이며 투정 부렸다.

“아, 진짜아! 오빠 오는 줄 알았으면 더 이쁘게 하고 있는 건데!”

“충분히 예뻐. 옷만 단정히 하고 있으면.”

칭찬을 들은 지희가 헤실거리며 웃더니 불시에 은율의 볼에 뽀뽀하려 했다. 하진이 기겁하며 얼른 지희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게!”

“안 놔?! 어?!”

입을 막힌 지희가 눈을 부라리며 하진을 노려보았다.

“싸우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은율의 말에 하진과 지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으며 떨어졌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남매가 분명했다.

*  *  *

“난 오빠 못 올 줄 알았어. 시험 기간이잖아.”

지희가 은율의 팔에 팔짱을 끼고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나도 시험 기간이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뚱한 얼굴을 한 하진의 시선이 앞서 걷는 두 사람의 얽힌 팔에 머물렀다.

“시험은 어제 다 끝났어. 근데 서운하네. 하진이한텐 외롭다고 했다면서 나한텐 그런 얘기 한마디도 안 하고.”

“뭐? 하진이 오빠가 그렇게 말했어? 순 사기꾼이네.”

지희가 뒤를 따라오는 하진을 노려보았다. 하진은 일그러뜨린 얼굴로 ‘내가 뭐’라는 입 모양을 해 보였다.

“그냥 기숙사에만 있으니까 심심하다고 폰 게임 추천해 달라고 한 건데, 그걸 그렇게 말하냐?”

“그래?”

은율도 고개를 돌려 묻자, 하진이 언제 얼굴을 일그러뜨렸냐는 듯 생긋거리는 얼굴로 도리질 쳤다.

“저 기지배가 수 쓰는 거야. 분명히 외롭다고 한숨 쉬었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아니라고!”

“맞잖아!”

“아, 쫌!”

다 큰 청년과 여고생의 앙칼진 입씨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연신 힐끔거렸다. 두 사람의 투닥거림을 보고 있던 은율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의를 시켰다.

“둘 다 그만해. 길거리에서 그러면 민폐야.”

은율이 만류하자 그제야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은율은 제 팔에 들러붙은 지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오빠가 저녁 사 줄게. 먹고 싶은 거 뭐든 말해.”

“요 앞에 떡볶이 맛있게 하는 집 있어! 거기 가자!”

“떡볶이?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지희가 씩 웃었다.

“이 동네에선 떡볶이가 제일 맛있어.”

지희의 마음 씀씀이에 괜히 짠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빵빵-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들렸다. 건물 쪽으로 바짝 붙어서 차가 지나갈 수 있게끔 비켜섰는데도 경적을 울린 차량은 그들을 지나쳐 가지 않았다. 옆에 선 고급 외제 차량의 뒷좌석 유리가 내려갔다.

“전화를 안 받더구나.”

세 사람이 깜짝 놀란 얼굴로 뒷좌석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50대로 보이긴 했지만 젊었을 적부터 꾸준히 관리를 받은 듯, 나이에 비해 피부도 좋고 주름도 적어 보였다. 화장기 짙은 얼굴의 길게 찢어진 눈매가 그녀의 표독함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은율이었다. 그는 제 팔짱을 낀 지희의 팔을 떼어 내며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모님.”

“…….”

이모라고 불린 여인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은율을 흘겨보았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곧바로 지희와 하진을 바라보았다.

“둘 다 이모 전화를 왜 그렇게 안 받니? 섭섭하구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하진이 뭔가 말하려다 은율의 얼굴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다.

“타거라. 이야기 좀 하자꾸나.”

“할 말 없어요.”

지희가 툭 내뱉었다. 싸늘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여인의 표독스러운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여인이 눈꼬리를 휘며 지희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니? 난 상관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은율을 힐끔거렸다. 하진과 지희가 흠칫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 두 사람의 등을 토닥인 은율이 애써 미소를 보였다.

“어디 들어가 있을 테니까 이모님하고 이야기하고 와.”

“……형.”

“괜찮으니까.”

은율이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하진은 조수석에, 지희는 뒷좌석에 올라타면서 은율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끝까지 웃는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차가 출발하고 저 앞 모퉁이를 돌아 대로변으로 나갈 때까지 은율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웃고 있던 얼굴은 어느새 서글픈 얼굴이 되었고, 그의 양손은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  *  *

“웃기지 말아요. 우린 이모 도움 없이도 잘 살고 있거든요?”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잖니. 너희들은 제대로 된 보호자와 든든한 지원이 필요해. 그 애 혼자 해 봐야 얼마나 할 수 있겠니?”

하진이 코웃음을 치며 백미러로 여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우리 둘만 당신한테 붙으라고? 형은? 형은 어쩌고?”

여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자기 앞길 하나 못 찾을까.”

“말 잘했네. 우리도 우리 앞길 하나 못 찾을까, 설마.”

“너희는 다르지.”

여인이 달리는 차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놈과 너흰 달라. 너흰 나영이 자식들이야. 내가 앞길도 찾아 주고 뒤도 닦아 줘야지. 그게 이모 된 도리 아니겠니?”

“율이 오빠한테도 이모잖아!”

“그놈은 아니야!”

여인이 언성을 높이며 지희를 노려보았다. 지희가 지지 않고 시선을 맞댔다. 여인이 약간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나직이 말했다.

“난 근본도 모르는 놈의 이모가 아니야. 너희를 위해 참고 있을 뿐이지.”

무릎 위에 둔 주먹을 불끈 쥐며 하진이 이를 갈았다. 그가 매서운 눈을 하며 백미러에 비친 여인에게 말했다.

“당신도 적당히 해. 우리에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형이야.”

“너희가 그놈한테 매달리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너희는 그 사고가 있기 전부터도 진작 알고 있었잖아.”

하진과 지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놈이 너희 부모의 자식이 아닌 거.”

여인의 말에 하진이 눈가를 찌푸렸다. 날뛰는 감정을 억누르듯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주먹을 쥔 손에는 여전히 힘이 바짝 들어 있었다.

“나영이의 피를 이은 너희들이니까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거야. 하진이는 졸업하면 스튜디오도 차려 주고 사진전도 열어 줄게. 지희는 빈으로 유학을 가자꾸나. 좋은 선생님을 붙여 줄게.”

제 할 말만 하는 이모라는 여인에게 지희가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우린 율이 오빠 두고 어디 안 가.”

여인이 냉정한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희가 그놈한테 짐이 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잖니?”

하진의 꽉 쥔 주먹에서 힘이 탁 풀렸다. 지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잘 생각하렴. 너희들만 좋은 게 아니라 그놈에게도 좋은 일이야. 운동밖에 모르던 놈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고 금융학과를 간 이유가 뭐겠니? 알바 병행하면서 국제 자격증 따려는 이유가 뭐야? 그게 그놈 꿈이래니? 그놈이 간절히 하고 싶었던 거라고 하든?”

두 사람은 여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여인은 비웃음을 담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의 너희들은 그놈한테 그냥 짐이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생각 잘 하는 게 좋아.”

여인의 입꼬리가 초승달처럼 높이 올라갔다.

“너희가 그놈 인생을 망치고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남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멍하니 걷던 은율은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팔이 부딪쳐 비틀거렸다. 찌릿한 통증에 오른팔의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 보니 병원을 가야 하는데.’

현장에서 의사가 치료를 하긴 했으나 병원에 들러서 상처를 보이고 약을 처방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전날에는 시간이 늦기도 했고 응급실은 비싸서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으로 그대로 돌아왔다. 그 후 이른 아침에 조깅할 때 말고는 계속 하진과 붙어 있었기에 병원에 들를 틈이 없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별의별 잡생각이 나기 전에 할 일이나 해야겠다며, 대로변에 보이는 외과로 걸어 들어갔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곧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에게 꿰맨 상처를 보이고 가벼운 소독과 드레싱을 한 후, 새로이 붕대를 감았다. 형식적인 상처 관리법을 들은 후, 일주일 정도는 충분히 먹을 만큼의 약을 처방받았다.

병원을 나올 때까지도 휴대폰에는 연락 하나 오지 않았다. 아직도 동생들은 이모와 이야기 중인 모양이었다.

은율이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모는 여태껏 제게 단 한 번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 준 적 없는 사람이다. 아니, 그의 이름조차 부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경멸하는 듯한, 증오하는 듯한 시선만 주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하진과 지희에게는 자상한 면모를 자주 보이곤 했다. 어릴 때는 그것이 너무도 서운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모두 ‘어머니’ 때문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떠올리자, 저절로 어머니의 눈빛이 그려졌다. 이모가 보이는 것과 같은 싸늘한 눈빛이다.

은율이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동생들에게서 연락이 올 동안 어디 들어가 있어야 하나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휴대폰이 울려, 얼른 액정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동생들의 번호가 아니라는 것에 깊이 실망하면서도 누구인가 싶었다. 스턴트팀 사람들이나 감독, 중요한 촬영 스태프들의 번호는 모두 저장해 두었다. 학교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생소한 번호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은율은 통화를 수락하며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대었다.

-서은율 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전화 너머로 상대가 낮게 웃었다.

-이진환입니다.

“……예?”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이진환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이진환 씨?”

멍하니 묻자, 상대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더 많은 이진환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제 만난 이진환을 떠올린 거라면, 맞아요.

숨을 집어삼키고 눈을 연신 깜빡였다. 아니, 그 대배우가 갑자기 왜?

-번호는 감독님 통해서 받았습니다. 부탁할 게 좀 있어서요.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어요?

한국에서 원톱으로 꼽히는 젊은 대배우에게서 예고도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은율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놀라긴 했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내일 의정부 세트장에서 김현우 씨 대역 촬영 있죠? 나도 거기 가거든요.

“아, 예…….”

은율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물음표는 여전했다.

-들어 보니 김현우 씨는 스케줄 때문에 좀 늦는다던데, 그 전까지 서은율 씨가 같이 연기 좀 맞춰 줄 수 있어요?

은율의 머릿속으로 진환과 대사를 맞추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제가 과연 도움이 될까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환이 진지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정극 배우도 아니고 일개 스턴트맨입니다. 저보다는 역시 합을 맞추실 배우분과……!”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실해요.

상대의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 건너편에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 움찔했다.

-그 배우라는 사람보다 서은율 씨가 훨씬 낫다는 것 정도는요.

은율이 적잖이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담담하던 진환의 목소리에 누군가를 향한 짜증이 담겼다.

-아이돌 출신에 뒷배 끼고 뛰어들었으면 열심히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전체 대본 리딩 이후로 단단히 쫄아서는 내 눈도 제대로 못 보고요. 연기도 그냥 발 연기가 아니죠. 길 가던 개를 데려다가 연기를 시켜도 그것보단 잘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김현우를 직접 만나거나 그가 연기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진환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진환의 스스럼없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씁쓸한 감정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작게 웃으니, 진환이 말을 멈추었다. 이를 알아챈 은율이 아차 싶어 얼른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냉정하고 무심하기만 할 것 같은 사람이 짧게나마 감정을 드러낸 모습이 나름 새로웠다.

진환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할 것 없어요. 기분은 좀 풀렸나 봅니다.

“예?”

-전화받았을 때부터 목소리가 안 좋던데요.

귀신같다.

전화는 처음이라 평소 통화할 때의 목소리도 모를 텐데 어떻게 기분 상태를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대화를 해 본 건 어제가 처음이었는데.

은율은 일부러 잡아떼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서은율 씨 평소 목소리의 높낮이나 억양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같이 연기도 해 본 사이잖습니까?

어제 처음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누고 연기를 주고받았다. 고작 그것뿐인데, 진환은 어제의 제 목소리를 기준점으로 감정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오싹한 느낌에 입을 다물고 있자, 진환의 목소리가 평이하게 돌아왔다.

-서은율 씨. 난 이번 작품 대충 연기할 생각 없어요. 애당초 대충 연기한다는 게 내 사전에 없긴 하지만 이번은 특히 중요하죠. 카메라 돌기 전에 확실히 감정 잡고 몰입하고 싶어요.

새삼 이진환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업계에 은근히 퍼져 있는 이진환의 소문은 은율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대본 받자마자 당장 연기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빠른 캐릭터 이해력, 메소드 연기가 가능한 손꼽히는 능력자, 신이 내린 연기 천재 등등. 그의 연기에 관한 소문은 대체로 그렇다. 그 소문을 뒷받침하는 건, 진환의 이런 열정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상대가 필요해요.

은율은 한 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짚었다.

-서은율 씨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가슴을 짚은 손이 괜한 셔츠만 구겼다.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고마워요.

놀라서 움찔했다. 뭔가 그와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말 같은데, 묘하게 달다.

-추가된 부분 대본은 못 받았죠? 일부러 한 부 더 받아 뒀으니까 내일 만나서 줄게요.

은율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내일 보죠.

“아.”

끊으려던 진환이 은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닙니다.”

-뭔데요? 말해 봐요.

은율이 피식 웃었다.

“저번부터 느꼈는데, 억지로 존댓말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요?

진환이 약간 낮게 웃었다. 스스럼없는 음색이라서 그런지 첫인상에 비해 상당히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뭐, 금방 친해져서 말도 놓게 될지 모르겠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진환이 한결 편안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내일 세트장 갈 때 연락해요.

“예, 알겠습니다.”

진환의 전화가 끊어진 뒤, 은율은 가만히 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왜 연락해야 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뭘 당연하게 알겠다고 한 거지.

*  *  *

통화 중이라는 음성 메시지만 세 번째 듣고 나자 불안해졌다. 하진은 한숨을 깊이 내쉬며 괜히 죄 없는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소매를 잡아끄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지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우리, 진짜 떠나야 돼?”

평소의 강단 있던 눈매가 약간 촉촉해져 있었다. 하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율의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약간 거친 손길이었다.

“그럴 일 없어.”

“우리가 율이 오빠한테 짐이 되는 건 맞잖아.”

“우리가 떠나면 형이 어떻게 될 것 같냐?”

하진의 말에 지희의 두 눈에 물기가 서렸다. 하진이 지희의 볼을 쓰다듬으며 상기시켰다.

“그 여자가 처음에 한 말 들었지?”

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가 형 생각한다고 그 사람 양자로 들어가 버리면, 형은 정말 홀로 남게 되는 거야.”

지희가 눈물이 떨어지려는 눈가를 손등으로 거세게 비볐다. 그러면서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율이 오빠 혼자 두고 싶지 않아.”

두 남매가 이모의 양자가 되어 은율의 곁을 떠나면 그는 자유로울지 몰라도 혼자가 되고 만다. 자신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그에게는 절망스러운 일일 거다.

거기다 그렇게 되면 이모 때문에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던 ‘그 남자’가 손을 뻗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더욱 곁을 떠날 수 없다.

“지희야.”

눈물을 참아 내려는 지희를 하진이 품에 꼭 껴안았다. 가슴팍에 따뜻한 물기가 배어들었다.

“방법을 찾아볼게. 형도 지키고, 우리도 곁에 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든 해 볼 거야. 넌 그냥 지금처럼 형 걱정하지 않게 학교 열심히 다니고 레슨이나 잘 받아.”

지희가 하진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은 제 품에 얼굴을 묻은 지희의 등을 토닥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안부를 물으며 전화로만 회유를 하던 이모다. 그런 그녀가 직접 찾아오면서까지 현 상황을 짚었다는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인정하긴 싫지만, 여태까지 은율과 자신들이 ‘삼 남매’로 지내 올 수 있던 것은 그녀 덕분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건 ‘그 남자’를 막아 줬기에.

하지만 이모의 방패가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점점 몸집을 키워 가고 있는데.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은율이었다. 액정에 뜬 ‘사랑하는 형♡’이라는 문구가 시선을 잡아챘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

-통화하느라 전화 온 걸 몰랐어. 이모님하고는 이야기 끝났어?

다행이다. 우울한 목소리가 아니야.

하진이 조금 전까지 내뱉던 진지한 목소리와 달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지금 어디야? 형 있는 데로 갈게.”

-여기가…….

품에서 벗어난 지희가 눈가를 닦아 내고서 하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말끔해진 얼굴로 작게 웃었다. 하진은 그런 지희의 머리를 한 차례 더 쓰다듬어 주었다.

*  *  *

늦은 밤이 되어 지희를 학교 기숙사까지 바래다주고 나오자 어디선가 쿠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겠다.”

은율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하진은 말없이 그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두 사람은 곧 검게 칠한 커다란 건물 앞에 다다랐다. 으리으리한 호텔은 아니었지만, 내부 전경과 후기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가격 비교까지 해서 고른 괜찮은 모텔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에 서 있던 두 종업원이 깍듯이 인사했다. 인사도 절도가 있고 깔끔한 검정 와이셔츠를 유니폼으로 입고 있어, 마치 고급 호텔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하진으로 예약했습니다. 결제되어 있을 거예요.”

휴대폰 어플을 통해 미리 괜찮은 방을 예약해 두었다. 하진은 제 휴대폰 어플에 뜬 예약 번호를 보여 주었고, 은율은 신기한 눈으로 그걸 바라봤다. 은율은 휴대폰을 정말 휴대폰의 용도 및 E북을 볼 수 있는 용도로만 사용했지, 저런 어플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새삼 휴대폰의 좋은 사용법의 예라며 감탄하다가, 하진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저 어플 쓰는 거, 너무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다가 하진이 키를 받고 돌아서자 얼른 시선을 피했다. 하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앞서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인 7층까지 올라갔다. 그 층의 가장 끝에 있는 방에 다다른 하진이 카드 키를 도어 록에 대었고, 짧은 알림음이 울렸다. 방 안으로 들어간 하진이 벽걸이형 플라스틱 카드 케이스에 키를 꽂으며 문을 닫자, 방 전체가 단번에 환해졌다.

“야……, 여기 얼마 들었어?”

은율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입구에서 대강 훑은 것뿐인데도 넓은 공간과 고급스러움이 한눈에 보였다. 결코 저렴한 방은 아닐 것이다.

하진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마 안 들었어. 요즘 어플로 예약하면 할인율이 얼마나 높은데.”

“그래서 얼마 들었냐고.”

“형이 오늘 하루 냈던 밥값만큼 들었어.”

“거짓말하지 마.”

은율이 방에 들어서며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제 지갑을 꺼내 들었다. 하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열리던 지갑을 강제로 닫았다.

“내가 가자고 했고, 내가 번 돈으로 예약했는데 왜 돈을 주려고 그래?”

“네가 번 건 너 필요할 때 써. 형이랑 있을 때 쓰지 말고.”

“내가 필요해서 썼으니까 넣어 두라는 소리야.”

하진은 완강했다. 힘으로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은율은 제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하진이 씩 웃으며 은율의 백팩을 뺏어 들었다.

“여기 월풀 욕조도 있어. 큰 욕조는 오랜만인데, 같이 들어가자.”

하진이 눈짓한 곳을 보니, 투명한 유리 안에 장정 둘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동그란 욕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그 옆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은율은 꿰맸던 오른팔을 붙잡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난 됐어. 너나 들어가.”

“에이, 같이 들어가자. 옛날 생각도 나고 좋잖아.”

8년 전, 그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은율과 하진이 함께 목욕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때는 다소 부유했던 터라 욕조도 1인용의 길고 좁은 욕조가 아닌, 널따란 사각 욕조였다. 은율과 하진이 함께 물장난을 치며 씻기에도 충분한 크기여서, 두 사람은 자주 함께 들어가 즐겁게 목욕을 하고 나오곤 했다.

어릴 때를 잠시 떠올린 은율이 기대감 가득한 하진에게 미안한 얼굴을 했다.

“오늘 말고 다음에…….”

“아……, 그래.”

축 처진 강아지 귀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은율이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내가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함께 씻다가 상처를 보이게 될까 봐 둘러대는 것만은 아니었다. 희미한 비 내음을 맡자마자 느낀 오한은 실제로 은율의 컨디션을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었다. 간단히 씻고 얼른 잠을 청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진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은율의 손목을 붙잡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많이 안 좋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응…….”

뭔가 나름 기대를 했던 게 있는 모양인지 하진답지 않게 시무룩해했다.

안경을 벗어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은율은 모텔에서 제공하는 흰 가운을 집어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상처를 감싼 붕대에 물이 튀지 않게끔 몸을 씻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엉성하게 샤워를 마친 후 품이 넉넉한 가운을 대충 걸쳐 입고 허리띠를 매었다. 왼손만을 이용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밖으로 나가자 TV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하진이 TV를 끄고서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금세 딱딱하게 굳었다.

“형, 절대 딴 놈들이랑 이런 곳 오지 마라.”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하진이 실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은율의 앞에 다가와 다소 벌어진 앞섶을 정리해 주고 허리의 끈을 다시 단단히 동여매 주었다.

“아니, 덮치다가 형한테 고자 킥이라도 맞으면 송장 치워야 하잖아.”

“덮쳐? 고자 킥?”

“아무것도 아니야.”

은율의 되물음을 귀엽다고 생각한 하진은 그의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살짝 손으로 훔쳐 내고는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 부스에 물소리가 시작될 때쯤, 은율은 널따란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온몸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저절로 나른해졌다.

이대로는 잠들 것 같아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직 잠들면 안 돼. 하진이 연애 상담을 해 줘야지.’

은율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일부러 모텔까지 온 이유가 뭐였던가. 하진의 연애 문제를 들어 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은율에게 있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실을 나선 하진은 침대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은율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그리 비장해.”

“빨리 와서 앉아 봐.”

제 앞을 팡팡 두드린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짤막하게 출렁거렸다. 하진이 웃는 낯으로 그의 앞에 걸터앉았다.

“우리 형아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실까.”

장난스러운 말에도 은율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하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연……말이야. 그거 어떻게 된 건지 좀 말해 봐.”

“아, 그거?”

무슨 소리냐고 하려다가 전날에 은율에게 했던 말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이 순진한 형은 자신이 진짜 실연 때문에 우울해하는 줄 안다.

하진이 목으로 웃으며 침대에 올라왔다. 그가 앉아 있는 은율의 옆에 모로 누우며 그의 얇은 허리를 제 팔로 단단히 감았다. 은율의 살집 없이 단단한 허리에 얼굴이 닿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 전에 차였어, 슬프게도.”

은율이 안타까운 얼굴로 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쩌다가?”

“음~.”

하진이 갑자기 은율의 상체를 확 끌어 눕혔다. 그러고선 그의 위에 올라타서 씩 웃었다.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대.”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무방비하게 제 말을 가만히 들어 주고 있는 은율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지.”

은율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짧게 혀를 차며 하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바보냐? 그럴 때는 사랑한다고 했어야지.”

“나 거짓말 못 해.”

“그럼 진짜 헤어질 생각이었어?”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래야지.”

“하……, 이런 바보 멍청이가……. 그러니까 차이지.”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이 쏟아졌음에도 하진은 딱히 실연에 대한 감흥 하나 없는 것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꾸 디스하면 확 덮쳐 버린다?”

“되겠냐?”

은율이 코웃음을 쳤다. 하진이 도전적인 얼굴로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우우웅-

우렁찬 진동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침대 옆 선반에 올려 둔 하진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하진은 귀찮은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상대를 확인한 하진이 인상을 쓴 채 전화를 받았다. 말하기도 전에 상대가 불쑥 목소리를 냈다.

-율이 오빠 덮치지 마.

“……야, 너, 솔직히 말해. 지금 어디야. 여기 CCTV 달았냐? 재주 좋네. 고딩이 텔에다 CCTV도 달고.”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이렇다 할 만한 건 보이지 않는다.

-안 봐도 척이지. 경고하는데 진짜 잠만 자라고, 잠만. 비 올 텐데 율이 오빠 힘들게 하지 말고.

“말 안 해도 알고 있거든?!”

-경고했다?! 내가 내일 확인할 거야!

앙칼지게 말하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진은 애꿎은 휴대폰 액정만 노려보았다.

또다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은율의 휴대폰이었다.

-오빠, 하진이 오빠가 덮치면 고자 킥 날려. 알았지?

“오늘따라 얘들이 왜 이리 고자를 만들라고 하는 거야.”

“저게 어디 감히 신성한 오라버니의 거시기를!”

옆에서 하진이 역정을 냈다.

-곧 비 올 것 같더라, 오빠. 빗소리 들리기 전에 얼른 자.

걱정스러운 여동생의 목소리에 은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동생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내일 수업 끝나는 시간 맞춰서 점심 사 주러 갈게.”

-응, 기다릴게. 사랑해, 오빠! 내 꿈 꿔!

“나도 사랑해.”

건너편에서 지희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고 나자, 하진이 바짝 다가와 안는다.

“형, 나도.”

“그래그래. 너도 사랑해.”

건성인 듯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진이 기분 좋은 얼굴로 은율의 어깨에 볼을 비비더니, 그대로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이러고 자자.”

하진의 큼직한 손이 은율의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였다.

“여자 친구 문제는?”

“해결됐잖아.”

“뭐가?”

“사랑하지 않으니 잘 헤어졌다. 해결 완료.”

은율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야?”

“아주 중요한 문제를 명쾌하게 풀었잖아. 그럼 다 한 거지.”

하진이 팔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있는 여러 전등 버튼 중 ‘전체 등’이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방 안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은율은 뭔가 속은 느낌을 받았지만, 피곤했던 탓인지 불이 꺼지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등을 토닥이는 하진의 손길에, 그는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은율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그의 귓가를 때렸다.

은율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불안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고 이마를 짚었다. 그새 식은땀이 배어 나왔는지 손바닥이 바로 축축해졌다.

옆에는 하진이 고른 숨을 뱉으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은율이 조용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헐떡이던 은율은 복부에서 느껴지는 지끈거리는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그곳에 떨리는 손을 대고 꾹 눌렀다.

쿠르릉-

짐승의 목 울림을 닮은 천둥소리가 은율의 뇌를 흔들었다. 핑 도는 듯한 어지러움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튀어나갈 것처럼 빠르게 뛰고 그 뜀박질에 맞춰 복부의 통증이 점차 심해졌다. 은율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복부를 기다란 막대기가 거침없이 헤집는 것 같은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은율아.’

빗소리 사이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눈을 번쩍 떴다. 숨이 턱 막혔다. 사시나무처럼 떨며 천천히 눈을 들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TV 앞에 놓인 소파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 소파에 앉아 있는 고등학생 정도의 소년도, 그 옆에 다가선 가녀린 몸매의 여인도.

여인은 소년을, 은율이라 불렀다.

여인이 소년에게 머그잔을 건네었다. 그것을 받아 든 그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코코아……를 타 봤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소년은 눈을 깜빡이며 머그잔과 여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다.

단것을 전혀 먹지 못한다는 걸 기억하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소년은 그저 감격한 듯 웃었다. 단 걸 먹는 날이면 하루 종일 속이 불쾌하고 수시로 구토감이 올라오는데도, 소년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여인이 건넨 코코아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주스라도 되는 것처럼 꿀떡꿀떡 잘도 마셨다.

‘마시면 안 돼!’

입을 벙긋거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은율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따뜻한 코코아를 남김없이 마신 소년을, 여인은 안심한 듯 바라본다. 이내 소년의 몸이 소파에 축 늘어지고, 그가 들고 있던 머그컵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은율은, 복부에 가해지는 순간적인 격통에 숨을 들이켰다. 몸을 웅크린 채 힘겨운 숨을 몰아쉬었다.

‘약을, 빨리…….’

환상까지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백팩에 넣고 다니던 신경 안정제가 절실했다.

한 손으로는 복부를 잡은 채 다른 한 손과 무릎 꿇은 다리를 겨우 움직여 백팩을 향해 기어갔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기어가는 도중에 몇 번을 휘청거렸다.

백팩에 손이 닿을 거리까지 기어갔다. 은율이 팔을 뻗어 백팩을 잡으려 했다.

그의 손목을, 뒤에서 뻗어 나온 새하얀 손이 잡아챈다. 그녀의 손에서 비 내음을 품은 물이 뚝, 뚝 떨어졌다.

차갑다.

너무 차가워.

‘은……율……아…….’

끼긱, 끼긱. 고장 난 기계인형처럼 제 이름을 끊어 부른다.

‘죽고…… 싶지…… 않았어…….’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인의 목이 기괴하게 길어졌다. 몸은 은율의 뒤에 붙은 채 얼굴만이 은율의 정면까지 다다라 시선을 맞췄다. 영롱하던 여인의 눈동자는 마치 피가 터진 것처럼, 금세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은율……아……. 은율아…….’

은율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어머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여인의 증오가 한가득 담긴 서슬 퍼런 시선에 숨이 막혔다.

‘은율아…….’

이번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냉랭하면서도 따뜻한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훤히 드러난 은율의 목에 서늘한 기운이 서렸다. 남자가 뒤에서 은율의 목을 양손으로 감쌌다. 물에 푹 젖은 투박한 촉감에, 은율의 어깨가 들썩인다.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아빠랑 멀리 떠나자…….’

목을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붙잡힌 목이 아니라 전신이 고통으로 저릿거렸다.

“흐윽…….”

몸을 덜덜 떨며 신음을 흘렸다. 귓가에 두 목소리가 음산하게 속삭인다.

‘엄마가…… 지켜 줄게…….’

‘아빠가…… 지켜 줄게…….’

그리고 두 사람은 비명처럼 신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은율은 귓가를 찢는 웃음소리에 제 귀를 양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더 크게, 더 깊이 파고들었다.

없어진 그날의 상처에서도, 웃음소리로 가득 찬 머릿속에서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에서도, 그 무엇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전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착각마저 엄습했다.

“형!”

웃음소리 사이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이 식은땀 범벅이 된 채 제 귀를 막고 미친 듯 도리질 치는 은율의 몸을 끌어안았다. 바들바들 떠는 은율을 제 품에 가두고 한 손을 뻗어 은율의 백팩을 뒤졌다. 언제나처럼 가장 앞주머니에 작은 흰색 약통이 들어 있었다. 하진은 그것을 꺼내 한 손에 쥐고 은율을 번쩍 안아 들었다.

침대에 눕히고서 방의 불을 켰다. 은율이 한 손으로는 제 귀를, 한 손으로는 예의 상처가 있던 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하진이 다급한 얼굴로 방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병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약통에서 타원형의 새하얀 약을 꺼내 은율의 상체를 제 팔로 지탱해 일으켰다.

“형, 정신 좀 차려 봐. 약 먹자, 응?”

초점 하나 없는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은율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알약을 쓱 밀어 넣어 주었다.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입에 차가운 물을 살짝 흘려 넣어 주자, 그의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초점을 맞춘다.

어렵사리 약을 먹고 나자, 얼마 안 가 몸이 점점 나른해졌다. 복부의 고통과 전신의 경련도 이내 점차 사그라졌다. 귀를 때리던 웃음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하진은 은율을 편하게 눕혀 주며 식은땀에 절은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좀 괜찮아?”

은율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이 누워 있는 은율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툭 기댔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는 은율의 심장 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또…… 봤어?”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수긍하듯 눈을 깊이 감았다 뜬다. 은율이 욱신거리는 복부를 손으로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진이 얼른 부축해 주었다.

“수면제 좀 줄래……?”

하진이 말없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백팩 앞주머니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약통을 찾아내 은율에게 가져갔다. 푸른 통에서 수면제 한 알을 꺼내 물과 함께 건네주었다. 은율은 단번에 약을 물과 함께 삼키고서 깊은 숨을 뱉었다.

“미안해.”

은율이 힘없이 웃었다. 하진이 찌푸린 얼굴로 그를 눕히고서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럴 때는 바로 날 깨웠어야지.”

“미안…….”

하진은 이불에 가려진 은율의 가슴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였다. 아기를 재우기라도 하는 듯이.

“……아파?”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은율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제 복부를 더듬었다.

“병원 다시 다니는 게 어떨까?”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위해 다니던 병원은 그가 성인이 된 후로 발길을 뚝 끊은 상태였다. 아무리 병원을 다녀도 증세는 완치되지 않았다.

언제 나을지도 알 수 없는 막연함에, 은율은 결국 병원 다니는 걸 그만두고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로 버티는 걸 택했다. 그 편이 돈도 덜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처럼 심한 증세가 나타나도 신경 안정제 한 알이면 금세 회복한다는 점이다.

수면제로 인한 졸음에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몸의 감각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복부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자연스레 사라져 갔다.

어느덧 은율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들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하진이 제 손에 들린 파란 약통에 시선을 두었다. 하진은 그 안을 열어 들여다보았다.

저번 주에 비해 약이 상당히 줄었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하진은 한동안 제 손에 들린 수면제 약통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  *  *

의정부역으로 가는 지하철은 꽤 한산했다. 새벽녘의 일 때문에 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는데, 다행히 앉을 자리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백팩을 앞으로 돌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백팩 속 책의 무게가 상당했다.

등을 기대어 눈을 잠깐 감는다는 게, 그대로 잠들어 버렸나 보다. 잠결에 의정부역임을 알리는 안내 소리를 듣고 얼른 눈을 뜨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나쳐 버릴 뻔했다.

역에 내려서 미리 받아 둔 주소를 검색해 위치를 가늠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와 버렸다.

주소지에 도착하니 커다란 폐공장이 보였다. 그 안은 상당히 시끌시끌했다. 폐공장 입구 밖으로 촬영 준비가 한창인 스태프 무리가 보였다.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는 스태프 무리를 보다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5시까지 오면 된다고 했지만 도착하고 보니 1시간이나 일찍 와 버렸다.

폐공장에 가까이 다가가 바쁘게 지나가는 남자 스태프 한 명을 붙잡았다.

“저, 감독님은 어디 계십니까?”

“예?”

남자 스태프가 은율을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 보는데, 누구시죠? 감독님은 왜 찾아요?”

“김현우 씨 대역을 맡은 서은율이라고 합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서 일단 감독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남자 스태프가 눈을 깜빡이더니 얼굴을 팍 찡그린다.

“오늘 대역이요? 스턴트맨?”

“예.”

“……진짜 스턴트맨 맞아요?”

남자 스태프가 코웃음을 치며 묻자 은율이 볼을 긁적였다.

“감독님과는 만난 적이 있으니 알아보실 거예요.”

“감독님 지금 촬영하시느라 바빠요. 전달해 드릴 테니 잠깐 기다려 봐요.”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제 갈 길을 슥 가 버렸다. 자신을 스턴트맨이라고 도무지 믿지 않는 눈치인데, 과연 감독에게 말을 전해 줄지 의문이었다.

다른 스태프를 잡아야 하나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폐공장 저 안쪽에서 우렁찬 컷 소리가 들렸다. 은율은 컷 소리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메아리>의 촬영 스태프는 전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는 얼굴 하나 없었다.

기어이 한 스태프가 은율을 붙잡았다.

“여기 일반인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요.”

작은 키의 여자 스태프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누가 봐도 일반인, 그것도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촬영장을 돌아다니니 잡힐 만도 했다.

“아, 저는……!”

“서은율 씨.”

여자 스태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은율의 뒤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은율이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팔짱을 낀 채 미간을 모으고 있는 이진환이 보였다.

그는 체크무늬 남방에 검정 면바지만 입은 단출한 차림이었다. 그 상태로 앞머리를 곱게 내리고 있으니 은율과 동년배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였다.

그런 진환의 모습에 은율이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처음 봤을 때는 회사 간부 같은, 관록 가득한 느낌이라 정장 차림의 캐릭터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이것 또한 제법 잘 어울린다.

진환이 은율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은율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세트장 갈 때 전화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전화로 그런 말을 하긴 했지.

은율이 미안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깜빡했습니다. 죄송해요.”

여자 스태프가 은율과 진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는 사이예요?”

그러고는 진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진환이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답했다.

“김현우 씨 대역 스턴트맨인 서은율 씨예요.”

“어?! 말도 안 돼, 정말요?”

여자 스태프가 깜짝 놀라며 은율을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녀에겐 은율이 운동 하나 못 할 것 같은 비실한 청년으로 보였다. 엑스트라라고 했으면 그러려니 하고 믿었을지도 모르지만, 스턴트맨이라고 하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녀가 여태껏 봐 온 스턴트맨들은 모두들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이었고, 몸을 쓰는 사람들 특유의 기백 같은 게 있었다. 은율과는 기본 이미지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진환이 제 손목에 채워진 싸구려 가죽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스턴트맨들은 5시에 올 거라던데, 일찍 왔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감독님은 어디 계신가요?”

진환이 조금 전까지 자신이 촬영하던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벙거지를 눌러쓴 왜소한 남자가 간이 의자에 앉아 여러 대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엔 손에 종이를 말아 쥐고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는 조감독과 조연출도 함께 있었다.

은율은 알려 줘서 고맙다고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선 감독을 향해 걸어갔다. 등 뒤의 인기척으로 보아, 진환도 그를 따라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곽철민 감독에게 다가간 은율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었다. 철민과 조감독, 조연출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하는 얼굴을 하는 조감독, 조연출과 달리 철민의 깐깐하고 딱딱하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게 누구야! 우리 은율이 아냐!”

철민은 과거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흑막>에서 은율과 연을 맺었다. 직접 시나리오까지 썼던 영화인지라 배우 섭외도 그가 직접 하러 다녔는데, 마침 마음에 쏙 드는 배우를 주연으로 앉히게 되었다.

하지만 액션 스릴러물이다 보니 격한 액션이 많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철민의 성격상 그 배우를 완벽히 대역해 줄 만한 스턴트맨을 찾으러 직접 액션 스쿨까지 방문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은율의 대련을 보게 되었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영화는 화려한 액션과 연기력이 뒷받침되어 삽시간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인기도가 그리 높지 않은 배우였던 그 영화의 주연은, 그 후 상당한 몸값을 받으며 여러 영화의 주연 자리를 줄줄이 꿰차게 되었다.

은율이 대역으로 펼쳤던 화려하고도 완벽한 액션 덕분에 그러한 종류의 시나리오도 많이 받고 있다고는 하는데, 이상하게도 액션물을 다시 찍진 않았다. 자존심 세던 그가 은율의 대역 액션을 보고 얼굴을 굳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했다.

철민이 땅딸막한 키로 벌떡 일어나 은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조감독과 조연출은 처음 보는 철민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먼!”

철민의 주름진 얼굴이 미소로 인해 들썩거렸다. 조감독과 조연출이 궁금한 얼굴로 은율을 뜯어본다.

“감독님이 말씀하시던 스턴트맨이 이 청년입니까?”

“말씀과 많이 다른데…….”

두 사람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철민이 음산하게 웃었다.

“낄낄낄, 자네들이 은율 씨 변신한 모습을 못 봐서 그래. 이따가 아주 까암짝 놀랄 걸세.”

강조하듯 ‘깜짝’이란 표현을 늘려 말했다.

은율의 뒤에 서 있던 진환이 철민의 손에 붙잡힌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진환이 은율의 잡힌 손목을 붙잡아 빼내었다.

“감독님, 그럼 스턴트팀 올 때까지 은율 씨 좀 빌리겠습니다.”

“그래그래. 은율이랑 대기실에서 좀 쉬고 있게. 아, 은율아. 대기실에 갈아입을 옷 준비되어 있다.”

“예, 감독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철민의 허락이 떨어지자 은율은 그대로 진환의 손에 끌려갔다.

마주치는 스태프들마다 무슨 동물원 원숭이 보듯 두 사람을 보았다. 싸구려 옷을 입어도 빛이 나는 대배우, 그리고 지나가다 마주쳐도 ‘그런 사람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평범한 학생의 조합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연기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는 법이 없다고 소문난 이진환이다. 누군가와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라곤 제 매니저나 감독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 저 청년은 손목까지 잡아 끌고 간다.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구나 싶은지, 그들의 시선 대부분이 호기심으로 변해 번뜩였다.

대기실로 쓰는 곳은 폐공장 구석의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에는 여러 의상이 걸린 기다란 이동식 행거가, 정면에는 메이크업을 위한 큼직한 벽걸이 거울과 주광색 전등 여러 개가 세팅되어 있다. 가운데에는 대본 2부가 놓인 유리 테이블이 있었고, 그 테이블을 두고 붉은색 1인용 소파 2개가 마주 보는 형태였다.

진환은 소파를 지나쳐 이동식 행거로 다가가, 수많은 의상 중 가장 앞에 걸려 있는 의상을 꺼내 들었다. 진회색의 얇은 줄무늬가 들어간 네이비색의 투 버튼 슈트였다. 슈트용 옷걸이의 가느다란 목 부분에는 ‘김현우 대역’이라고 적힌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진환이 은율에게 가까이 다가가 옷걸이째로 슈트를 그 몸에 대 보았다.

“안경 벗고 앞머리 좀 올려 줄래요?”

은율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가 말하는 대로 안경을 벗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진환은 은율의 얼굴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런 옷도 잘 어울리네요.”

은율이 스티커를 확인하고서 옷을 받아 들었다.

“대본은 옷 갈아입고 같이 보죠.”

진환이 은율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몇 번 쓸어 올려 주었다. 은율은 처음과 달리 제법 상냥해진 말투만큼이나 친근한 행동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번에 통화할 때도 느낀 거지만 뭔가 많이 변하셨네요.”

진환이 픽 웃었다.

“어떻게 변했는데요?”

“거리감 있고 어려운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대하기 편해진 것 같아요.”

“흠, 그렇군요.”

진환이 몸을 돌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가 소파 깊이 등을 기대고 다리를 멋들어지게 꼬았다.

“사실은 내가 지금 은율 씨한테 관심이 좀 생겼거든요.”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관심……이요?”

진환이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난 내 연기를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을 아주 좋아해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생각보다 찾기 어렵죠.”

눈가를 휘며 흥미로운 눈빛을 보낸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말인데, 내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어요?”

이상한 논리였다.

진환을 가만히 마주 보던 은율이 비어 있는 소파의 등받이에 슈트를 걸쳐 놓고 묵직한 백팩을 그 옆에 내려놓았다.

“그런 거라면 전 친구가 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요?”

진환이 순수하게 의문을 담아 물었다.

은율은 무식하게 크고 동그란 안경을 벗어 유리 테이블 위에 접어 올려 두었다.

“제가 생각하는 ‘친구’라는 개념과 이진환 씨가 생각하는 개념이 다른 것 같아서요.”

입고 있던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서 드러난 후드티를 허리에서부터 잡아끌어 올렸다. 그 사이, 진환이 얼굴에서 옅게 걸려 있던 미소를 지웠다.

“다를 것 없어요. 친구라는 건 원래…….”

뭐라 말을 하려던 진환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은율의 팔에 있는 상처에 닿아 있었다.

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붕대가 감긴 은율의 팔 아래쪽을 잡았다.

“다쳤어요? 어쩌다가?”

갑자기 훅 다가와 물으니 은율은 당황해서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진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맞췄다.

“왜 다쳤냐니까.”

친근한 척 말을 건넬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은율이 그의 손을 힘줘서 떼어 냈다.

“일하다가 그랬습니다.”

“저번 폭파 촬영 때?”

진환이 은율의 팔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하긴, 그 정도 폭발을 뚫고 나오고도 상처 하나 없을 리가 없지.”

짜증스러운 듯 중얼거린 진환이 그제야 팔을 놔주었다. 은율이 슬쩍 한발 물러섰다.

“상처, 많이 심한 건가?”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공기가 무겁게 바뀌어 있던 터라,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생긴 은율은 상처에 대해 더 말하기 싫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곧바로 억센 힘에 어깨를 잡혀 다시 홱 돌려세워졌다. 바로 눈앞에 진환의 싸늘한 얼굴이 다가와 있다.

“반창고도 아니고 붕대를 감을 정도로 다쳤는데 뭘 걱정할 정도가 아니야? 이 정도 부상이면 오늘 촬영도 미루든가 다른 사람한테 넘기든가 했어야지. 배우한테는 몸이 생명인 거 몰라?”

서늘한 기운까지 깔려 있는 낮은 목소리에 은율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진환이 왜 말을 놓을 정도로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시선을 맞대던 은율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전 ‘스턴트맨’이에요. 이진환 씨처럼 다쳐선 안 되는 정극 배우가 아니라.”

가장 먼저 진환의 마지막 말을 정정한 은율이 뒤이어 말했다.

“그리고 무책임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시네요.”

은율은 제 어깨를 잡은 진환의 양 손목을 잡아서 떨궜다.

“저희 같은 스턴트맨이 부상 핑계로 촬영을 미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도 대역해야 할 배우와 체격이 맞는 사람으로 새로 찾아야 하고, 그전에 급하게 합까지 맞춰야 해요. 여러모로 민폐이고, 그게 누적되면 신뢰가 떨어지니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될지도 모르죠. 무엇보다…….”

은율이 진환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을 했다.

“전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는 무책임한 사람은 절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나마 좋게 생각했던 진환의 이미지가 다시금 바뀔 판이었다.

은율이 옷을 갈아입는 걸 보며, 진환이 소파에 엉덩이를 살짝 기댄 채 팔짱을 꼈다. 그는 은율의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팔의 상처가 계속 신경 쓰이는지 그 부분을 유독 유심히 보았다. 간간이 은율이 팔을 움직이다가 멈칫할 때면 그의 눈꼬리도 같이 꿈틀하곤 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나자, 진환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그는 은율의 약간 접힌 셔츠 깃을 손수 단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책임감이 강하다는 건 알겠네.”

나름 쏘아붙였는데도 불쾌해하기는커녕 먼저 다가왔다.

“하지만 몸이 생명인 건 변하지 않아. 스턴트맨도 엄연히 대역‘배우’인걸.”

그렇게 말한 진환이 다시금 옷 속에 가려진 붕대 쪽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수식어가 붙든, 배우라면 다치지 마. 그 이상은 말하지 않을 테니까.”

이미 은율을 ‘배우’로 인정한 듯한 말을 내뱉은 진환이 돌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보다 친구, 해 주면 안 돼요?”

“……그냥 반말하세요. 진짜 적응 안 되네요.”

여태껏 반말로 강하게 말하다가 사람 좋은 척 존대를 하니 어색하게만 보였다. 마치 실생활에서도 연기를 하는 것만 같다.

“그럼 그러지, 뭐.”

얼결에 완전히 말을 놓게 된 진환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까 친구는 힘들 것 같다고 했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개념과 다르다고.”

은율이 몸을 돌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약간씩 어긋난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진환에게 시선을 주었다.

“친구는 필요해서 사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맞으니까 사귀게 되는 거죠. 서로 정도 주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가 친구죠.”

진환이 제 턱을 손으로 쓸었다.

“이쪽 업계에서 단맛 쓴맛 다 본 나에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네. 친구라고 마음 터놨다간 다음 날 그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가 떠돌아서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되고, 나중엔 강제로 업계를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어.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도 많이 봤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왜인지 그가 쓸쓸해 보였다.

은율이 소매 단추를 채우며 물었다.

“그럼 이진환 씨가 생각하는 친구는 어떤 겁니까?”

“서로에게 도움 되는 놈.”

진환이 즉답하며 다가섰다. 그는 은율의 소매 단추를 직접 채워 주며 살짝 웃었다.

“그래서 내가 서은율 씨와 친구 하려는 거잖아.”

“저와 친구가 된다고 해서 이진환 씨에게 도움이 될 게 있어요?”

“있지. 내 대본 리딩 상대를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도움이야.”

단순한 연습이라 할지라도 연기력이 받쳐 주지 않는 상대와의 대본 리딩은 진환이 가장 질색하는 것 중 하나였다. 연기자들 중에서도 그와 개인적인 대본 리딩을 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은율이 깔끔하게 단추가 채워진 소매를 보다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눈이 마주쳤다.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싫은데요. 이득을 따져서 친구를 사귄다니, 저와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네요.”

“그런 것 같네.”

실없는 친구 이야기가 끝났나 싶어 뒤를 도는데, 물러나지 않고 서 있던 진환이 약간 고개를 숙여 눈을 바라보았다. 또렷한 눈이 시선을 잡아끈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은율 씨가 말한 마음 맞는 친구라는 거, 나도 한번 갖고 싶어졌어. 그렇게 되면 언제든 같이 대본 정도는 봐 주겠지.”

은율이 짧게 헛웃음을 쳤다. 결국 그가 가진 ‘친구’의 기준은 그대로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거기에 자신이 기준이라고 내놓은 요소가 형식적으로 곁들여진 격이 되었다.

“진환 씨는 역시 이상하네요.”

“그런가?”

천천히 미소를 지우고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 된 진환이 벽걸이 거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거기엔 작은 스테인리스 통이 매달려 있었고, 안에 다양한 빗과 기다란 악어 핀 몇 개가 꽂혀 있었다. 빗을 때 아프지 않게 약간 뭉툭하게 마감되어 있는 브러시를 집어 든 그가 스스럼없이 은율의 앞머리를 빗어 올려 주었다. 그게 워낙 자연스러워서 은율마저도 그를 밀어내거나 만류하지 못했다.

앞머리를 빗어 올린 덕에 환해진 은율의 얼굴을 보며 진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준비 다 됐으면 앉아 봐.”

은율의 손을 붙잡아 소파에 앉혔다. 건너편에 앉은 진환이 웃는 낯으로 대본 한 부를 그에게 밀었다.

“추가된 부분에는 책갈피를 꽂아 놨어.”

진환의 말대로, 이전에 보던 대본에서 새롭게 추가된 장면의 페이지에는 손바닥만 한 나뭇잎 형태의 금속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고급스러운 문양의 책갈피를 빼서 유리 테이블에 올려놓고 추가된 분량을 확인했다.

“대사는 거의 앞부분에만 있고 그 뒤는 액션 위주야. 앞부분 대사 좀 맞춰 줘.”

진환도 제 몫의 대본을 펼쳐 들었다. 새 대본의 추가된 페이지에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대본 내의 내용을 심도 있게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은율이 보았다면 분명 진환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을 거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그저 타고난 연기 천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천재성을 갈고닦는 노력 또한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대본에는 필기가 없는 쪽이 없을 지경이다. 자신의 캐릭터뿐만이 아니라 그와 대사 한 번 섞는 일 없는 출연진 모두의 캐릭터마저 완벽히 분석해 머릿속에 넣어 둔다. 심지어 대사 한 줄 없는 엑스트라마저도.

그에게 어떤 캐릭터를 물어봐도 그는 그것을 쓴 작가보다도 더 장황하게 캐릭터 성격을 읊을 수 있었고, 각 캐릭터의 완벽한 메소드 연기까지 가능했다. 어떤 작가는 그 모습을 보고서, 언젠가 이진환에게 1인 5역을 하는 다중 인격 주인공을 안겨 주고야 말겠다고 벼르기까지 했다. 100퍼센트 대박 날 거라고.

진환이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건 단순히 연기에 미쳐서다. 완벽한 연기를 하고 싶고, 어떤 연기든 가능한 배우가 되고 싶었다. 돈도, 여자도, 권력도, 그 무엇도 하등 관심을 두지 않는 그에게 있어 배우는 삶의 유일한 목적이자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는 별다른 훈련이나 특별한 과정 없이 자신의 연기를 받아 낸 은율에게 굉장한 관심을 가졌다. 은율과 연기를 한다면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그 캐릭터의 내면을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은율은 추가된 분량의 내용을 빠르게 읽고 있었다. 머리에 각 캐릭터의 대사와 분위기를 꾹꾹 눌러 담은 후에야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진환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해 두지만, 만족스럽지 못하실 확률이 큽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염두에 둘게.”

은율이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은율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진환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 완벽한 ‘강민’이 나타났다.

자신감 가득한 눈동자, 굳게 다물린 입술, 곧게 편 허리, 자로 잰 듯 동일한 각도로 약간 벌어진 긴 다리.

은율은 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강민의 시선과 몸짓을 완벽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은율이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유리 테이블에 툭 던졌다.

“누가 너 보고 이런 거 빼내 오랬어?”

원래대로라면 작은 USB를 한태진 앞에 던지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강민이 검사로서 조사 중인 가온그룹의 비리 문서 일부가 담긴 것이었고, 애당초 그 문서를 구해 그에게 전해 준 것이 한태진이었다.

한태진이 된 진환이 무뚝뚝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난 그저…….”

뭐라 변명하려던 진환이 고개를 들어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 은율은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표정으로 돌변해 진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은율의 굳게 주먹 쥔 손에서 떨림이 퍼졌다.

“이러다 너도 위험해져.”

“민아, 같이 하자.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은율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넌 안 돼. 너까지 이 일에 휘말려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들은 어쩔 건데?! 겨우 찾은 네 여동생은?!”

인자한 미소를 가진 따뜻한 부모님, 그리고 잃어버렸다가 겨우 찾아낸 연년생인 여동생. 태진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은율이 힘없이 웃었다.

“한태진. ……정신 차려.”

그리고 그 미소는 비릿한 조소가 되었다.

“네가 이러는 거 도움 안 되니까, 내 인생에 참견 말고 네 가족들이나 챙기라고. 주제를 알아야지.”

일부러 모진 말을 뱉었다. 태진이 된 진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화를 참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쥔 채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그러다 한숨을 깊이 내쉰다.

“난 네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냐?”

“가족? 언제부터 내가 너와 가족이 되었지?”

코웃음 친 은율이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 올린 은율은 마치 저 혼자 서서 진환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너와 난 엄연히 타인이야. 남이라고.”

진환은 등줄기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생각했던, 분석했던 느낌과 달랐다. 진환이라면 이 대사를 찡그린 얼굴로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을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치워 낸다는 느낌으로.

그런데 은율은 애초에 서로 갈 길이 달랐다는 걸 극적으로 상기시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대사만 본다면 한태진과의 사이를 ‘타인’으로 표현해 거리를 두려는 목적이었다. 은율은 그 목적에 ‘가온반도체공장 계약직 한태진’과 ‘검사 강민’의 사회적 지위를 섞었다. 그 결과, 그 대사에 의해 태진의 자존심은 박살이 났다.

진환이 이를 악물었다. 뿌득- 하는 소리가 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 뚜벅-

은율이 앉은 소파 옆으로 걸어간다.

대본대로라면 원래 두 사람은 폐공장 한가운데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고, 그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지금처럼 의자에 앉는다든지 다가간다든지, 그러한 지문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 대본 리딩에서 완벽히 ‘한태진’과 ‘강민’이 되어 움직였다.

진환이 은율이 앉은 소파를 힘껏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선 소파 팔걸이에 제 양손을 짚고 은율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넌 참 말이 쉬워.”

씹어뱉듯 말했다. 은율은 자신을 팔 안에 가둔 채 씨근덕거리며 노려보는 진환의 눈을 피했다. 그것은 모질게 마음먹자 했던 강민의 마음속을 뒤흔든, 아주 작은 흔들림이었다. 그에 맞춰 은율의 부릅뜬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네가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지 잘 알아. 우리가 하루 이틀 같이 있었어? 너와 나 한두 번 붙어 있었냐고.”

분노에 찬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힘이 없었다.

“네가 하는 거짓말 따위, 눈만 봐도 알아.”

은율의 눈동자가 여과 없이 흔들린다.

“혼자 다 짊어지지 마.”

애원하듯 목소리가 늘어졌다. 진환이 제 고개를 은율의 어깨에 툭 대었다. 시선 밑으로, 떨리는 은율의 손등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게 해 줘. 부탁이야. 너희 부모님은 나에게도 부모님 같은 분들이셨잖아.”

그렇게 대사를 치고 고개를 들었다. 진환은 그가 눈물을 떨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개를 든 진환은 은율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은율은 핏발 선 눈으로 진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다.

또 달라.

은율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분노했다. 그것은 강민이 태진에게 보이는 분노가 아니었다.

“……난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힘없는 자신에 대한.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던 부모님이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힘없는 검사라서, 그 범인이 너무도 막강한 자들이라서 아무 손 쓸 방도가 없었다. 강민은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 무력함으로 누군가를 잃는 것에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은율의 분노하던 얼굴은, 단숨에 공포로 허물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제 양손에 묻었다.

“제발……. 태진아, 제발…….”

어깨가 사정없이 떨려 왔다.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진환의 가슴에 머리를 대었다. 진환은 가슴팍에 전해지는 떨림에 오금이 저렸다.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또렷이 귀에 박혔다. 한숨과도 같은 그 말이 어찌나 가슴을 후벼 파던지, 저절로 목이 메었다.

진환이 은율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냈다. 그의 몸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민아, 고개 들고 날 봐.”

은율의 얼굴이 천천히 들렸다. 물기가 차 있었지만, 눈물을 떨구진 않았다. 격한 감정의 파도가 그 짙은 눈망울에 모두 들어 있었다.

진환이 찡그리듯 미소 지었다.

“나도 널 잃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은율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굳게 감았다. 숨을 삼키듯 목울대가 움직였다.

“나한테 널 지킬 기회를 줘.”

진환의 애절한 대사에 은율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에는 분노도, 슬픔도, 격앙된 감정도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

“……약속해 줘. 위험해지면 바로 발 빼기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물었다. 진환이 작은 미소를 띠었다.

“알았어.”

그제야 은율이 진환의 시선을 마주했다. 은율의 입가에도 그와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마주한 진환은 일순 둔기에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던 그가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진환은 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가를 강하게 찌푸렸다.

혼란스러웠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느낀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 이 남자와 평생 연기하고 싶다.

비록 두 번 함께한 게 다이지만, 누군가와 연기를 하는 게 이렇게까지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물론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과 셀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을 맞춰 온 진환이다. 그럼에도 왜 이런 느낌을 받는지 알 수 없었다. 뭐랄까, 여태까지 해 왔던 연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설렘이다.

연기 호흡을 맞출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기만 하던 가슴이, 그 깨달음과 함께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야생마가 날뛰는 느낌이란 게 이런 것일까.

은율은 대사를 맞추는 부분이 모두 끝났기에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이 뒤에는 한태진과 강민이 함께 폐공장을 나가려 하고, 그때 가온그룹에서 보낸 폭력배들의 공격을 받는다. 은율이 진짜 대역 연기를 해야 하는 건 이 부분부터였다. 대사는 거의 없고 액션 위주이니 더 리딩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강민의 느낌을 단숨에 지워 낸 은율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진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진환 씨?”

작게 불러 보았다. 은율은 미동도 없는 진환을 보며 의아한 얼굴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진환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치 뭔가에 홀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뭔가를 채 감당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뭔가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은율이 진환의 얼굴을 보며 그의 상태에 당황하는 동안, 그 반대 역시 이뤄지고 있었다.

진환은 은율의 얼굴을 하나하나 샅샅이 뜯어보고 있었다.

맑고 진한 눈동자, 손으로 쓸어 보고 싶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 적당히 날카로운 예쁜 콧날, 틴트라도 바른 것 같은 붉은 입술, 잡티 없는 부드러운 피부.

그 모든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한눈에 쏙 들어왔다.

‘아, 어쩌지.’

심장의 거센 두근거림이 뇌까지 가격하듯 울리고 있었다. 진환은 황홀경에 젖은 사람처럼, 몽롱하게 달뜬 눈을 하며 은율의 시선을 잡아챘다.

‘죽을 것 같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심장은 미친 듯 뛰고 기분은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처음 겪는 이상한 현상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멋대로 숨이 가빠졌다. 정확히는, 뭔가에 막힌 것처럼 뜻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진환의 얼굴이 은율에게 점점 다가갔다. 굳은 얼굴로 정지해 있는 은율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팔로는 그의 늘씬한 허리를 휘감았다. 말랐지만 탄력 있는 몸이 일순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지척에 닿았다. 은율의 커진 동공이 바로 눈앞에 있다. 끌어안은 은율의 가슴과 제 가슴팍이 맞닿아, 심장 박동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와 닿은 모든 곳이 뜨거워 미칠 것 같았다.

진환의 열기를 띤 입술이, 은율의 붉은 입술과 맞닿았다.

그제야 막혔던 숨이 트였다. 그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  *  *

“뭐야, 도착해 있었어?”

스턴트팀의 리더인 강 팀장이 은율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은율은 폐공장 바깥벽에 기대고 서 있던 등을 떼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강 팀장의 뒤로 검은 정장의 스턴트맨 20명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안면 있는 은율에게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약간 힘이 빠진 듯한 얼굴로 있던 은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강 팀장이 건물 벽에 붙어 선 은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왜 밖에 있어? 들어가자.”

“아, 예…….”

은율이 찜찜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한껏 분주하던 스태프들이 간간이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대부분 은율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은율이 속한 강 팀장의 팀은 곽철민 감독과 다른 작품에서도 함께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와는 나름 친한 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이번 <메아리>에서 합을 맞추는 건 처음인지라 낯선 스태프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자꾸 힐끔거리는 거군.’

은율이 스턴트맨으로 있을 외모가 아니라는 데에는 강 팀장도 십분 동의하는 바였다. 오늘이 첫 촬영이니만큼 은율을 처음 보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많긴 많겠다 싶었다.

힐끔 뒤를 돌아 은율을 보았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복잡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평소처럼 괜찮다는 말만 할 게 뻔했기에 그만두었다.

스태프들 사이를 지나 촬영하는 위치 가까이로 가자 예상대로 감독 곽철민 감독이 보였다. 여러 장의 스토리보드를 보며 조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제 뒤에 다가선 검은 무리를 알아채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다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강 팀장과 악수를 하고는 스턴트팀을 향해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던 철민이 대열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은율을 발견했다.

“은율아!”

철민이 반가워하며 은율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위아래로 은율의 모습을 훑더니 씩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 잘 어울리네.”

“다행이네요.”

은율이 약간 어색하게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철민의 뒤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던 조감독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감독님, 오늘 새로운 배우 들어간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요.”

말 사이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철민이 익살스러운 얼굴로 조감독의 팔을 퍽 쳤다.

“아까 그 스턴트맨이이야. 서은율이!”

“아, 그렇군요……. 예, 예?!”

멍하니 수긍하다 놀라 자빠질 것 같은 얼굴이 된다. 그 표정을 즐기며 철민이 낄낄 웃었다.

“조심해라. 손이 아주 매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한 채 조감독이 마른침만 연신 삼켜 대었다.

철민이 스턴트팀 뒤쪽을 살폈다.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진환 씨는 어디 갔어?”

은율의 어깨가 움찔했다. 철민은 아까까지만 해도 그와 진환이 함께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은율의 얼굴에 닿았다.

“아직 대기실에 있나? 같이 합을 맞춰야 하는데.”

진환은 연기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렇다 보니 액션은 모두 본인이 소화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이번 액션도 그가 직접 연기할 것이다.

은율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지금 대기실에 다른 사람이 가면 큰일 나니까.

빠른 걸음으로 스태프들 사이를 지나간 은율이 심호흡과 함께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누가 볼까 봐 얼른 그 안으로 쏙 들어간다.

은율의 시선이 소파에 닿았다. 거기에 앉아 있던 장신의 남자가 그를 보고 눈을 흘겼다.

“서은율 씨…….”

은율이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합 짜야 하니까 나오시죠.”

창백한 얼굴의 진환이 한 손으로 명치를 짚으며 몸을 바르게 했다. 욱신거림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진환은 제 명치를 짧게 치고 빠졌던 은율의 매서운 주먹을 노려보았다. 은율은 진환의 명치를 힐끔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엄살 피우지 마세요. 봐드리면서 때렸습니다.”

“이게 봐준 거면…….”

진환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러게 누가 멋대로 키스하라고 했습니까?”

말하면서도 은율의 얼굴이 붉어진다. 진환이 코웃음을 쳤다.

“키스는 무슨. 입술 댄 지 0.5초 만에 나가떨어졌는데.”

은율이 눈을 부라렸다. 진환은 아파 죽겠는 와중에도 그 모습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게이세요?”

“아니, 전혀.”

즉답했다. 은율은 답답했다.

“그럼 왜 키…… 아니, 왜 뽀뽀하셨습니까?”

“인공호흡.”

인공호흡의 정확한 뜻이나 알고 하는 말일까.

은율이 헛웃음을 보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됩니까?”

“돼. 덕분에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거든. 곧바로 명치 맞고 저승길 구경할 뻔했지만.”

은율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진환을 노려보았다. 진환이 명치를 짚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걸었다.

“아까 일은 진심으로 사과할게. 사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돼, 왜 그랬는지. 그런데 하나는 알겠어.”

진환이 은율의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서은율 씨. 배우 하자.”

은율이 진환의 진지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놀리거나 장난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배우……요?”

진환이 내뱉은 ‘배우’라는 단어가 특히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정극 배우. 나랑 한 것처럼 진지하게 대사 치고 연기하는, 그런 배우가 되자고.”

은율이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크게 떴다. 진환의 입을 통해 그가 말한 ‘배우’에 대해 들으니 그제야 어깨가 흠칫했다.

“제가 말입니까?”

“은율 씨 진짜 재능 있어. 내가 보증해.”

진환의 자신 있는 말에 은율의 심장이 쿵- 한 번 크게 뛰었다. 그가 갑자기 불안해진 것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전……. 저는 잘 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은율이 눈을 내리깔았다.

액션을 하는 몸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연기하는 자신의 완전한 모습이 스크린에 나오는 건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무엇보다 얼굴이 드러났다가 누가 그 일을 캐기라도 하면…….’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은율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진환을 단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안전한 꿈은 꾸고 싶지 않아요.”

준비 중인 국제 자격증을 따고, 졸업하면 좋은 회사에 취직해야 했다. 나중엔 동생들과 함께 살 수 있을 정도로 돈도 잔뜩 모아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데에 한눈을 팔 시간은 없었다.

“국제 자격증? 그걸로 취업하는 거? 그게 은율 씨가 생각하는 안전한 꿈인가?”

꿈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

그것은 꿈이라기보다는 그나마 가장 가깝고 그나마 나아 보이는 길일 뿐.

진정한 미래의 꿈은 꿀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전 미래의 꿈 같은 건 꿔 본 적이 없습니다.”

왜인지 우울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일찍이도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했다. 하진과 지희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들은 이미 15살, 10살일 때 미래의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꿈이 뭐냐고 묻는 대답에 단 한 번도 대답해 본 적이 없었다.

진환이 은율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잘됐네.”

운을 뗀 진환을 마주 보았다.

“이제부터 나와 함께 꾸면 되겠어.”

그의 눈에는 왜인지 묘한 설렘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은율 씨는 연기하는 게 싫어? 나와 연기할 때 아무것도 못 느꼈어?”

진환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깊이 있게 연기하면서, 그렇게 캐릭터에 빠져들어 놓고선 아무것도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건 연기를 마주한 진환이 제일 잘 알고 있다.

“난 은율 씨와 연기하고 싶어. 스턴트맨 서은율 말고, 배우 서은율과. 이런 대본 리딩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자신만의 캐릭터로 같이 카메라에 담기고 싶다고.”

진환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은율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극 배우라니, 상상도 못 해 본 길이다. 그 길의 정상에 선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내가 길을 열어 줄 테니까, 함께 해 보자.”

그 말을 꺼내면서 진환은 자신의 가슴이 울컥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발굴한 보석이다. 지금은 그저 빛이 새어 나오는 돌덩어리로 보이지만, 분명 닦아 주면 닦아 줄수록 찬란한 빛을 여과 없이 내보일 거다.

그 찬란한 빛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내가…… 연기를……?’

은율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내뻗어진 선명한 손에 주춤했다.

꿈을 꾸라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길을 가라고 말해 준 사람도 없다. 그리고 누구도, 길을 열어 주겠다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남자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 어려운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었다.

은율의 주먹이 반사적으로 꽉 쥐어졌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거절하겠습니다.”

분명히 승낙할 거라 생각했던 진환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뭐?”

은율은 부가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아주 평온하고, 진지했다. 별것 아닌 이유로 거절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합 맞추게 바로 나오세요.”

“잠깐만.”

진환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은율의 오른팔을 잡으려다, 팔의 상처를 떠올리곤 얼른 왼팔을 잡아 돌렸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왜? 어째서? 내가 도와준다잖아. 배우가 될 수 있게 해 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냥 연기에 관심이 없을 뿐이에요.”

“거짓말하지 마.”

진환이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난 얼굴을 했다. 눈빛이 워낙 살벌해서 은율마저도 움찔할 정도였다.

“그런 연기를 보여 놓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순식간에 상황을 새겨 넣고 그 자리에서 캐릭터들에 관한 분석까지 했으면서? 정말 연기에 관심이 없었다면 대사만 쳤을 텐데 그러지 않았잖아.”

진환이 빠르게 말을 뱉으며 싸늘하게 눈을 치떴다.

“당신, 연기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둘러대지 말고 제대로 말해. 뭐가 문제인지.”

“……말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달라지지. 내가 뭐든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은율이 헛웃음을 보였다. 그러더니 곧 그의 눈빛이 삽시간에 달라진다. 그건 진환의 눈빛에도 전혀 지지 않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웃기지 마. 당신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은율의 말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당신은 잃을 게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거야.”

은율이 진환의 손에서 제 팔을 단번에 빼내었다. 그는 의문 섞인 진환의 눈을 노려보고는 그대로 대기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은율은 답답함을 느껴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풀었다.

진환은 나쁘지 않았다.

‘나쁜 건 나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말한 것처럼 연기가 좋다.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캐릭터가 된다는 기분 자체도 좋았고, 그는 왜 그랬을까 생각하는 것도 좋았다. 머릿속에서 캐릭터를 분석하다 보면 묘하게 들뜨고 기분이 좋아서 즐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생각할 수가 없다.

안정적인 수입도 보장할 수 없고 구설수에 시달리다 알게 모르게 매장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동생들의 뒷바라지에 큰 문제가 생긴다. 자칫 이모에게 두 동생들을 뺏길 구실이 될 수도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서은율.’

은율의 머릿속에서 비난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핑계일 뿐이야.’

머릿속에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네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그딴 시답잖은 게 아니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간밤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지, 이 어렴풋한 환청이 낯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날의 일을 알게 되고 손가락질하는 거지.’

운 좋게 배우가 되면 필연적으로 ‘그날’의 트라우마와 마주해야 한다. 아무도 모르게 트라우마를 이겨 내며 연기할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 사건에 대해서도 그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될 거고, 결국 그건 자신과 두 동생에게 모두 영향이 가고 말 거다.

‘네게 꿈이라는 건 사치야.’

목소리에 수긍했다.

그래, 내겐 사치를 부릴 자격이 없어. 그냥 지금처럼 흘러가는 대로, 거쳐 가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자.

부모를 죽인 살인자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

*  *  *

진환은 약간 떨어져서 스턴트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동선을 체크했다. 그와 더불어 기존의 구성 단계를 좀 더 세세히 다듬기 시작했다. 진환은 그들이 짜 준 대로 이전에 연습했던 합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거라, 애당초 그 사이로 굳이 끼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액션신은 그들이 더 프로니까.

“그럼 차라리 여기에서 제가 앞으로 굴러서 피하고, 곧바로 뒤로 돌아서…….”

우락부락한 정장남들 사이에 끼어 제 의견을 내는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턴트팀에 정식으로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가능할 때만 일하는 알바생이라고 들었다. 그런 것치고는 다른 이들의 신뢰도가 꽤 높아 보였다. 실제로 구성을 다듬는 데에 그의 의견이 상당수 반영되고 있다.

‘확실히 혼자만 튀네.’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폭력배 무리의 일원 같은 역할은 도저히 시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냥 맞아서 나가떨어지는 역할이더라도 너무 튀어서 안 되겠더라는 소리였다. 지금 보니 얼마나 튈지 감이 잡혔다.

말로 합을 조율하고 나자 저희끼리 순서를 맞춰 대충 엉성한 손짓 발짓을 해 본다. 그러면서도 수정할 부분은 즉각적으로 수정하고 있다.

액션 순서를 완벽히 구성한 이들이 두 파로 갈라졌다. 정장을 입은 이들은 은율과 대치해 물러섰다. 강 팀장이 진환에게 다가섰다.

“급하게 추가된 게 있긴 하지만 이진환 씨가 어려울 부분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진환이 맡은 배역인 한태진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액션신에서 합을 맞춘다고 해 봐야 어쩌다 주먹 몇 번 내지르고 얻어맞는 게 다였다.

이 액션신의 주연은 강민이었다. 완벽한 검사를 목표로 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도장을 다녀 유도, 합기도의 단을 따 두었다. 그런 그가 수많은 괴한을 상대하며 가까스로 이곳에서 살아 나가야 하는 장면이었다.

괴한 역할을 맡을 무리는 각자 준비해 온 야구 배트 모양의 스펀지 방망이와 금이 가 있는 각목을 손에 하나씩 쥐었다.

그들은 느릿한 동작으로 때리는 척, 맞는 척을 하며 은율과 합을 맞춰 보았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웃기는 모습이었지만, 그들은 꽤 진지해 보였다. 모든 액션신이 그렇듯, 이 합을 완벽히 맞추지 못하면 자칫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리에 끼지 않은 팀의 인솔자이자 지도하는 역할인 강 팀장이 옆에서 진환에게 하나씩 언질을 주었다.

“저 부분에서 진환 씨가 저기 저 친구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방망이에 등을 맞아 바로 쓰러지면 됩니다. 그럼 은율이가 보호하는 것처럼 끼어들어 앞의 두 사람을 쳐 내고 진환 씨 대신 각목을 맞아 줄 겁니다. 진환 씨는 거기서 일어나서…….”

강 팀장은 괴한들과 은율이 합을 맞춰 보는 부분을 따라 빠르고 확실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액션신을 한두 번 찍는 게 아닌 진환인지라, 그 정도 설명과 저들의 합 맞추는 장면만 봐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진환은 새삼 은율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짜 놓은 합에 부가적인 게 추가되었지만 그는 순서를 잊는다거나 헷갈리지 않았다. 가장 기억해야 할 부분이 많은 대역임에도 오히려 다른 이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긴, 오늘 처음 읽었던 대본 내용도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웠지. 캐릭터까지 완벽히 분석해서.’

아까 있었던 그와의 연기를 다시금 떠올리니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번에는 진환을 넣어 모두가 합을 맞추기로 했다. 이번 합이 한 번에 맞는다면 감독에게 요청해 곧바로 촬영을 진행해도 될 거였다.

남자들이 한 팀, 진환과 은율이 한 팀으로 나뉘어 서로 5미터 정도 거리를 벌렸다. 강 팀장의 사인이 떨어지자, 남자들이 먼저 두 사람에게로 우르르 달려갔다.

은율은 진환을 지키듯, 그를 제 뒤에 숨기고서 가장 앞에 달려온 정장남에게 시원한 발차기를 날렸다. 실제로는 톡 닿는 수준임에도, 남자는 해머에라도 맞은 듯한 액션을 취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곧바로 머리를 향해 방망이가 날아들었다. 은율은 그것을 한 손으로 턱 잡고는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아슬아슬할 정도의 공간을 남기고 닿지 않았음에도 상대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진환은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남자의 명치에 발길질을 했다. 신발 끝이 닿았다 싶었는데 상대가 명치를 붙들고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교대하듯 다른 남자가 뛰어들자, 주먹을 쥐고 안면을 강타한다. 볼을 살짝 스친 거지만 상대는 이가 두어 개는 나간 사람처럼 짧게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 등에 푹신한 감촉이 톡 닿았다. 그것이 방망이의 감촉이란 걸 알고 있는 진환은 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은율이 재빨리 끼어들어 방망이를 휘두른 남자를 몸으로 쳐서 밀어낸다. 차에 치인 것처럼 나가떨어지는 게 제법 그럴듯하다.

그 옆에 있던 남자를 팔꿈치로 톡 쳐서 밀어낸 은율이 고개를 돌리자, 몸을 일으키던 진환을 향해 각목을 높이 쳐든 남자가 보였다. 은율이 재빨리 진환의 머리를 보호하듯 오른팔을 내뻗었다. 어차피 때리기 직전에 멈출 거라곤 하지만, 각목이 내리쳐지는 속도가 꽤 빨랐다.

갑자기 진환이 벌떡 일어나 그 각목을 잡아챘다. 각목과 은율의 팔의 거리는 고작 1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이 부분, 바꾸죠.”

진환이 강 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정장남들이 자세를 풀었다. 강 팀장이 진환에게 달려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뭔가 문제 있습니까?”

“이 부분에서 각목을 팔로 막지 말고 그냥 내리치기 전에 때려서 밀쳐낸다든지, 뭐 다른 방법 있지 않습니까?”

“원래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은율이 반박했다. 진환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강 팀장을 바라보았다.

“여하튼 이 부분은 바꿔 주시죠.”

“예. 그러죠, 뭐. 그럼 은율아, 여기를…….”

강 팀장이 은율을 붙잡고 액션 수정에 들어갔다. 진환의 시선은 은율의 오른팔에 닿아 떨어지질 않았다.

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멀리서 보고 있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합을 맞추면서 보니 은율이 해야 할 액션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무리 짜고 치는 액션이라곤 해도, 지금처럼 합을 맞춰 보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액션을 취한다면 서로 간에 어느 정도 타격이 갈 수밖에 없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액션 부분을 다 찍고 나면 은율의 몸에 작은 멍 몇 개쯤은 우습게 들어 있을 것이다.

남자치곤 새하얀 피부였다. 그 피부에 피멍이 드는 걸 상상하니 왜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거기다 금이 가 있다곤 하지만 다친 팔을 들어 각목을 막는 장면이다. 주먹을 내지르고 팔을 휘두르는 부분까진 몰라도 각목을 맞는 충격은 피하게 해 주고 싶었다.

새로이 합을 조정하던 은율과 문득 시선이 맞았다.

‘웃기지 마. 당신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잃을 게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거야.’

그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기에 배우라는 길을 마다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서은율’이라는 원석이 내보인 빛이 너무도 강렬했다.

*  *  *

“컷! 20분 쉬었다가 강민이 단독으로 싸우는 부분부터 가자!”

은율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잠깐 이쪽 봐 봐.”

불쑥 은율의 앞에 나선 진환이 그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 주었다. 은율은 그의 손을 떼어 내려다 주변에 눈이 많음을 깨닫고 가만히 목을 내주었다. 저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던 스태프들이 웅성거렸다.

“팔은 괜찮아?”

아직 실밥도 풀지 않았기에 욱신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진환이 그의 팔에 무리가 갈 만한 부분들은 모두 수정을 요구해 줘서 그나마 이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무표정하던 진환이 깔끔하게 매진 넥타이를 보며 작게 웃었다.

“다행이네.”

은율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진환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뭐가?”

“모처럼 제안해 주셨는데 거절했잖아요.”

“그건 사과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심이었다. 몰아치듯 제의했던 것은 자신이었고, 은율은 이를 거절한 것뿐이다. 제의를 거절한 게 머리 숙일 이유가 될 순 없다.

은율이 딱딱하던 표정을 풀었다. 합을 맞추는 내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히 진환은 깊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반말한 걸 사과드리겠습니다. 화낸 것도요.”

“아, 그거.”

진환이 일부러 굳은 얼굴을 했다.

“반말하면서 화내니까 다른 사람 같던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눈앞에서 욕먹어 본 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딱히 나쁘지 않았어.”

그러고서 의외로 장난기를 담아 작게 웃었다. 그의 얼굴을 보던 은율도 작은 웃음을 뱉으며 다시금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두 사람의 어색하던 공기가 금세 누그러졌다.

진환은 감독 근처에 있는 간이 의자들 근처로 은율을 데려갔다. 비어 있는 의자 중 하나에 그를 앉히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환과 눈이 마주친 매니저 연우가 한달음에 달려오는 게 보였다.

“연우야, 여기 생수 두 통 가져오고 은지 오라고 해.”

“예, 형!”

연우가 쾌활하게 대답하며 뒤돌아 달려 나갔다. 진환은 은율의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피곤하진 않아?”

“예, 괜찮습니다.”

진환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쏟아진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이 참으로 조심스럽고 부드러워, 속이 간질거렸다.

“저기…….”

은율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떼자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진환이 먼저 말했다.

“은율 씨랑 친구 되려고 이러는 거야.”

“예?”

은율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자, 진환이 손가락으로 그 주름을 살살 펴 준다.

“난 은율 씨가 연기하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거기다가 내가 인정하고 밀어준다는데 잘되지 않을 리가 없지.”

거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은율 씨는 그런 내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지. 반말까지 하면서.”

움찔한 은율이 시선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니까. 난 그냥 순수하게 궁금한 거야. 은율 씨가 두려워하고 겁내는 게 대체 뭐기에 좋아하는 것도 못 하는 건가 싶어서 말이야.”

진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친구가 되면 말해 주지 않을까 해서. 본인이 그랬잖아,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도 있는 게 친구라고.”

은율이 눈을 돌린 방향으로 고개를 빼서 기어코 시선을 맞췄다. 그가 흠칫 놀라는 걸 눈가를 휘며 감상했다.

“만약 내가 믿을 만한 친구가 된다면 은율 씨가 뭘 겁내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은율이 눈을 내리뜨며 생각하다가 작게 웃었다. 그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정말 친구가 된다면 생각해 보죠.”

진환이 은율의 휘어진 눈가를 가만히 보다가 그 주변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다 좋은데 색기는 뿌리지 않는 게 좋겠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한 은율을 보며 진환이 목으로 작게 웃었다.

진환의 스킨십을 보고 있던 주변 스태프들이 저마다 속닥거렸다. 딱딱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이진환이 누군가를 챙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기한 광경에 사람들의 소곤거림은 점차 커져만 갔다.

물을 가지러 갔던 연우는 어깨에 검은 가방을 멘 젊은 여자와 함께 돌아왔다. 진환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제 앞에 선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은지야, 빗 좀 줘 봐.”

은지라고 불린 여자는 가방에 손을 넣더니 한 손에 여러 개의 빗을 꺼내 보여 주었다. 진환은 그중에서 꼬리빗을 받아 들고는 은율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은율의 등받이를 잡아 그도 자신을 마주 보게끔 돌렸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

은율이 눈만 굴리며 가만히 있자, 진환이 그의 앞머리를 빗으로 쓸어 올렸다. 약간 부스스하던 긴 앞머리가 깔끔하게 올라갔다.

은지가 은율을 빛나는 눈으로 넋 놓고 바라보다가 진환에게 말했다.

“진환 오빠, 제가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은율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 손은 은율의 머리에 닿기도 전에 진환에게 붙잡혀 떨궈졌다.

“건들지 마.”

놀랄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었다. 좀 전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은율이 눈치를 살피자, 그와 눈이 마주친 진환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머리를 정돈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깔끔히 정돈한 은율의 머리를 보며 진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연우에게서 받은 생수병의 뚜껑을 열어 은율에게 내밀었다. 은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그 입구를 입에 대었다. 시원한 물이 은율의 목을 타고 꿀꺽꿀꺽 넘어갔다.

그사이, 진환은 자꾸만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돌아보았다. 볼일이 끝났는데도 은지는 멀뚱히 서서 눈으로 은율을 훑고 있었다.

진환이 일부러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은지야, 일 끝났으니까 가야지.”

“아, 네? 음, 뭔가 더 시키실 건 없으세요? 격렬한 촬영이라 머리 흐트러지실 것 같은데, 그냥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까요?”

진환을 신경 쓰는 척했지만 그 시선이 어디 닿아 있는지 뻔히 아는 만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줄 생각은 없었다.

“볼일 끝났으니까 가라고.”

웃는 얼굴임에도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기분이 좋은 듯하면서도 어쩐지 날카로워 보이는 진환에게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인 그녀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진환이 연우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가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섰다. 진환이 연우의 셔츠 깃을 잡아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쟤 차에서 나오지 말라고 해. 신경 거슬려.”

“넵.”

깊이 캐묻지 않았다. 파고들었다간 자신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안색의 연우도 떠나고 나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진환이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은율에게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근육질의 남자가, 그와 상반되는 왜소한 남자의 팔을 붙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끌려가는 남자는 은율과 같은 옷차림에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김현우와 그의 매니저였다.

근육질인 덩치에 비해 상당히 귀여운 인상을 가진 김현우의 매니저, 건우가 스태프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화면을 체크하던 철민에게 현우의 매니저가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여 인사했다. 그의 뒤에 서서 귀찮은 얼굴을 하고 있던 현우도 감독에게는 깍듯이 인사했다. 철민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을 힐끔 보다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현우 씨는 저쪽 강 팀장한테 가서 찍힐 부분 체크해 와.”

“예, 감독님.”

매니저에게 아직도 손목을 잡힌 채로, 현우가 불퉁한 얼굴을 감추며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눈은 제대로 맞추면서 얘기하든가.’

현우는 속으로 철민에 대해 온갖 욕을 해댔다. 망할 꼰대.

철민이 눈짓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이들이 한쪽에 모여 있었고, 그들 중 혼자만 점퍼 차림인 남자가 있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그가 바로 스턴트팀 리더인 강 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아, 눈 마주쳤다.’

이진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침이 꿀떡 넘어갔다. 저번 촬영 때가 생각났다. 긴장한 탓에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자신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던 남자였다. 어디까지나 긴장해서 그런 거다, 긴장해서. 절대 연기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나 정도면 나름 잘하는 거지, 뭐.’

현우는 속성으로 연기 학원을 다니면서 칭찬을 몇 번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미친 연기력이라고 하는 이진환이 보기엔 한심한 수준일지 몰라도, 나름 만족스러운 연기력이라고 자부했다. 매니저 형인 건우도 그렇게 말했고 말이다.

‘그래, 내가 꿀릴 게 뭐 있어? 흥!’

연기력 말고는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음, 키 빼고. ……얼굴도.’

그래도 성격만큼은 자신이 그보다 훨씬 좋다.

이진환은 연기할 때 이외엔 냉기가 철철 흐르고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을 흘리곤 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날에는 오싹할 때도 있었다. 친해져 보려고 말을 걸면 살벌한 눈빛과 차가운 말로 선을 그어 댔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눈이 마주친 이상 인사를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이진환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 없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했으니까.

현우는 진환에게로 똑바로 걸어갔다. 주눅 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일부러 허리에 바짝 힘을 주고 걸어갔다.

지금 보니 진환의 옆에는 자신과 같은 옷차림을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자신의 대역 스턴트맨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자연스레 그의 얼굴로 시선이 갔다.

현우는 곧,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제 눈이 멋대로 휘둥그레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스턴트맨치고 몸이 늘씬하고 잘빠졌구나, 의자에 앉아 있는 데도 그림이 되네, 정도였다. 몸을 감상하던 시선이 그 얼굴에 닿았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다.

여자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남자다. 누가 봐도 남자. 그런데 여태까지 봤던 연예인을 모두 통틀어도 그보다 더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자신이 속한 아이돌 그룹의 리더나 저 남자 옆의 이진환 정도는 되어야 상대가 될 것 같다.

잘생긴 거로는 그렇지만, 예쁜 거로 따지자면 단연 스턴트맨이 우위였다. 그는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마성을 갖고 있었다.

멍하니 다가가다 보니, 진환에게 인사를 하려 했는데 졸지에 은율의 앞에 서 버렸다.

“아,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은율이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도 자신이 대역을 해야 할 배우인 김현우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김현우 씨.”

붉어진 얼굴로 은율에게 건네던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진환에 의해 가로막혔다. 은율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진환이 제 몸으로 은율을 가린 채 현우와 마주 선 것이다.

현우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놀라서 큰 소리로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책했다. 대선배를 옆에 두고 웬 스턴트맨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진환의 자존심이 상해도 크게 상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자기 잘난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던데.

‘아오, 큰일 났네.’

인사를 빌미로 또 얼마나 뭐라 할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들은 진환의 성격상 존댓말로 사람 오장육부를 다 뒤집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감독님이 강 팀장에게 가라고 한 것 같은데, 얼른 가 보는 게 어때요?”

예상과 달리 평온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긴장한 눈으로 진환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에 감정 없는 말투였다.

“아……, 예에.”

어색하게 대답하고서 몸을 돌리려다가, 진환의 등 뒤에 가려진 은율을 슬쩍 보려 했다. 그런데 귀신같이 알고 진환이 제 몸으로 그 시선을 차단한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을 때, 현우는 여태까지의 진환이 보여 주었던 모습이 모두 애교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 봐요.”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게 사실인가 보다. 마치 제 목에 날카로운 칼이 들이밀어진 것처럼, 순간적인 공포를 느꼈다.

현우는 진환을 바라본 채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행히 그를 따라온 근육질의 매니저 건우가 그의 팔을 끌어당겼기에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건우에게 끌려가면서도 현우의 사색이 된 얼굴은 돌아올 줄 몰랐다.

진환은 귀찮다는 얼굴로 혀를 한 번 차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평온한 얼굴로 은율의 옆에 앉았다. 은율은 진환과 현우 사이에 무슨 눈빛이 오갔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물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에 은율이 그 볼품없는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는 게 십분 이해되었다. 이런 얼굴에 이런 차림으로 밖에 나갔다가는, 헌팅이나 캐스팅으로 인해 꽤나 피곤할 거다.

진환이 제 무릎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그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의 시선은 은율의 얼굴에 그대로 고정되었다.

생수병의 입구에서 입술을 뗀 은율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진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환의 눈길은 이제, 생수병 입구에 눌려 좀 더 빨개진 붉은 입술에 닿아 있었다.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계속 쳐다보십니까?”

“예뻐서.”

당연하게 나오는 대답에 은율이 헛웃음을 뱉었다.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

진환의 눈꼬리가 스르르 웃는다. 그가 턱을 괴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은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진짜 예뻐.”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같은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하고도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은율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뺐다. 잡혀 있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좋은 안과라도 소개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돈 낭비야. 난 아주 멀쩡한 눈을 가졌거든.”

“보통 본인은 잘 모르더라고요.”

두 사람이 실없는 대화를 하며 작게 웃었다. 덕분에 그들을 희미하게 둘러싸고 있던 긴장감마저 점차 흩어져 갔다.

“은율아! 시작하자!”

시간을 체크하던 철민이 그를 불렀다. 알겠다고 대답한 은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환이 아직도 웃음기 있는 얼굴로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잘하고 와.”

부드러운 음성에, 자꾸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생소한 그 느낌에 은율은 대답도 않고 몸을 돌렸다. 뒤통수에 따라붙는 시선이 참 따가웠다.

은율은 남자들과 단독으로 대치해 섰다. 이 부분은 액션신의 중간쯤으로, 방망이에 맞아 기절한 태진을 굵은 콘크리트 기둥 뒤에 밀어 넣고서 강민 혼자 폭력배들을 상대하는 장면이다.

그전까지는 크게 다치지 않았던 강민도 폭력배들을 다 쓰러뜨린 후에는 크게 다쳐 쓰러질 예정이었다. 직후, 겨우 정신을 차린 태진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USB를 챙긴 후 강민을 부축해 폐공장을 나설 것이다. 폭력배들을 쓰러뜨리고 저 자신도 쓰러지는, 그 장면까지가 은율이 촬영해야 할 분량이다.

철민은 자신의 슛 사인을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합 순서를 되뇌는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분주하던 스태프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모여 있다.

화면에 나오지 않는 곳으로 피해 강 팀장에게 자신이 찍어야 할 순서를 듣고 있는 현우도, 그 매니저 건우도, 심지어 강 팀장도. 그리고 레이저가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뜨거운 눈빛을 한 진환도. 모두가 은율을 그 눈에 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아깝단 말이지.’

철민이 제 턱을 매만지며 은율을 주시했다. 몸매, 외모, 성격 뭐 하나 모난 데가 없다. 대사가 있는 정극 연기를 시켜 보진 않았지만 미리 받은 대본을 통째로 외워 오는 점이나, 캐릭터를 완벽히 분석하는 점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이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화면에 나오진 않는다고 해도 보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표정 연기와, 평소의 대화법에서 느껴지는 기본적인 발성도 마음에 들었다.

철민은 기획 중인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12명의 유명 감독들이 모여 각각 5분 이상 10분 이하의 단편 영화를 촬영하고, 그것을 모아 옴니버스 영화를 만드는 기획이었다. 상업 영화가 아닌 독립 영화이다 보니, 감독들은 각자 사비로 영화를 제작 중이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괜찮은 무명 배우나 신인 연기자를 구해 촬영에 들어갔다.

철민은 시나리오부터 촬영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를 구하지 못해 정작 촬영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아리>의 촬영도 바쁘다 보니 독립 영화는 가장 뒷전이 되어 버렸다. 슬슬 다른 감독들에게 영상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은율이가 딱인데.’

구상했던 주인공은 마치 은율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한 것처럼, 그와 너무도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대사 연기력만 입증된다면 당장이라도 그에게 출연을 요청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멍하니 있다가, 옆에서 시작하자는 조감독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철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남자가 카메라 앞에 검은 슬레이트를 내밀었다. 딱딱한 판 위에 ‘S#12-4 강민 액션신’이라고 적혀 있었고, 남자는 그것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쳐 주었다. 카메라에서 슬레이트가 빠져나가자 강민과 폭력배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 담겼다.

“액션!”

철민의 신호가 떨어졌다. 용이한 편집을 위해 약 5초 정도를 가만히 있다가 은율이 먼저 움직였다.

가장 앞에 나와 있던 남자가 각목을 쳐든 상태로 은율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교대하는 것처럼 다른 이가 튀어나와 방망이로 옆구리를 가격하려 했지만, 은율이 그것을 왼팔로 막아 내며 비틀거린다. 그러면서도 오른손으로는 얼굴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

뒤에서 한 남자가 은율의 목을 헤드록을 걸 듯 팔로 감아 꽉 조였다. 은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그의 복부에 건장한 다른 남자가 주먹을 갈겼다.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뱉은 은율이 한 대 더 갈기기 위해 뻗어 오는 팔의 팔꿈치 부분을 무릎으로 쳐올렸다. 영화 속 효과음로는 ‘빠각’ 하는 소리가 어울릴 것이다. 남자가 부러져 꺾인 것처럼 팔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은율은 제 목을 잡은 남자의 발등을 구두 굽으로 콱 찍었다. 붙잡고 있던 남자가 윽 소리를 내었고, 그의 팔 힘이 약해졌다. 은율은 남자의 팔을 삽시간에 풀어내고 그 팔을 뒤로 꺾어 버렸다. 남자가 으악- 하고 소리를 내었고, 은율은 달려드는 남자들 사이로 그의 등을 거세게 차 밀어 버렸다.

그들 중 한 남자가 은율이 방심한 틈을 타 뒤에서부터 각목을 내리쳤다. 은율의 머리를 가격한 각목이 미리 톱질을 해 둔 덕에 시원하게 부러져 나갔다. 은율은 멀쩡한 각목에 맞아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비틀거리다 콘크리트 기둥에 등을 대었다.

그의 머리 위로 또 하나의 각목이 내리꽂혔다. 은율은 몸을 숙여 그것을 가까스로 피해 내었다. 기둥에 부딪힌 각목 위쪽이 산산이 부서졌다.

은율은 몸을 숙인 상태로 제게 각목을 휘두른 남자의 다리를 발로 걸어 넘어뜨렸다. 큰 액션으로 넘어진 남자 뒤로 다른 남자가 달려들었다. 은율은 콘크리트 기둥을 잡고 일어나 화려한 발차기로 남자의 얼굴을 가격해 쓰러뜨렸다. 그 상태에서 또 다른 남자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뒤돌려 차기를 먹여 주었다. 남자가 방망이를 떨어뜨리며 나가떨어졌다.

그 직후, 다른 남자가 은율의 등을 각목으로 후려갈겼다. 은율이 바닥에 쓰러졌다. 보기엔 무시무시하지만 사실은 푹신하기 그지없는 야구 방망이가, 쓰러진 그의 머리를 향해 내려쳐졌다. 은율은 제 머리에 방망이가 닿기 직전, 양팔로 그 손목을 붙잡아 공격을 막아 내었다. 은율의 위에 올라탄 상태가 되어 있던 남자는 그의 발에 명치를 맞아 허공에 붕 떴다가 떨어졌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은율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고개가 홱 돌아갔고, 등 뒤에 콘크리트 기둥이 없었다면 은율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은율은 기둥에 등을 기댄 채로, 달려드는 남자의 얼굴에 방금과 똑같이 주먹을 꽂아 주었다. 남자가 쓰러지자마자 마지막 남은 사내가 방망이로 복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은율이 복부를 양손으로 쥐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손을 짚고 무릎을 꿇은 상태로 숨을 몰아쉬는 은율의 머리를 향해 방망이가 휘둘러졌다. 은율은 몸을 뒤로 젖혀 그것을 피해 내었다. 코 바로 앞에서 훅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율은 남자의 허벅지에 꽉 매달려 그를 쓰러뜨렸다. 사내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고, 은율은 그 위에 올라타 오른손으로 한 방, 왼손으로 한 방 크게 주먹을 갈겼다. 사내는 기절한 것처럼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은율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휘청거려 꺾일 뻔했지만, 결국 그는 반듯하게 일어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쓰러질 것처럼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카메라의 중앙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다 그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고, 그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몇 초 뒤, 철민의 컷 사인이 내려졌다. 그러자 사방에서 참았던 숨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멀쩡한 상태로 일어나 바닥에 쓰러진 남자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주었다. 그들은 은율의 액션 연기를 칭찬도 하고 진짜 맞는 줄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내었다.

은율은 웃는 낯으로 그들의 말을 받아 주며 철민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뒤로 섬뜩하리만치 빛나는 시선들이 가득했지만, 그러한 시선에는 상당히 둔한 은율이었다.

철민이 활짝 웃는 낯으로 일어나 은율을 반겼다.

“역시 은율이 액션은 그림이 되는구먼!”

“감사합니다. 수정할 부분이나 추가 촬영할 부분이 있나요?”

“없어, 없어. 아주 잘 나왔어.”

철민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 얼굴을 보니 은율도 기분이 좋아져 사르르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를 멍하니 보던 철민이 낄낄거렸다.

“하여튼 색기하고는.”

“예?”

“아니야. 수고 많았고, 얼른 옷 갈아입고 와.”

“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은율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은율은 제 뒤에 다가와 있던 스턴트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인사하며 자리를 떠났다. 스턴트팀은 이제 은율 대신 현우를 넣어 클로즈업이나 바스트 샷 위주로 한 번 더 촬영을 해야 했다.

은율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로 향하는데, 그 옆으로 진환이 바짝 따라붙었다.

“다치진 않았어? 팔은? 아까 연기할 때 세게 휘두르는 것 같던데.”

기척 없이 따라붙은 진환에 움찔 놀랐다. 은율은 자신의 오른팔을 조심히 잡는 진환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멀쩡합니다. 미리 다 짜고 하는 건데 다칠 리가 있나요.”

아예 맞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벼운 멍 정도는 은율에게 있어 다친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옷 갈아입으면서 확인해 보자.”

“뭘 확인합니까?”

“몸을.”

“……변태라고 불러도 됩니까?”

“순수한 의도인데 왜지?”

“순수한 의도인데 왜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말하죠?”

“잘못 봤겠지.”

진환이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생각보다 장난을 잘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은율이 그를 밀어냈다.

“김현우 씨도 오셨으니 그분과 연기해야 하잖아요. 바쁘실 테니 저한테는 신경 끄시고 어서 가 보시죠.”

“그래도……!”

“진환 씨! 여기 좀 와 보지!”

멀리서 철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은율이 쿡쿡 웃으며 진환의 미간에 손을 대었다. 진환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주름진 미간을 손으로 살살 펴 주었다.

“부르시잖아요. 얼른 가 보세요.”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렸다. 진환은 은율의 손가락이 닿았던 제 미간에 손을 대었다. 미간이 불이라도 닿은 듯, 뜨겁게 느껴졌다.

*  *  *

은율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땐, 현우가 진환과 대사를 맞추고 있었다. 철민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촬영하는 곳 근처로 걸어갔다. 평상시의 차림새라서 그런지, 스태프들은 그에게 아까 같은 뜨거운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스태프인가?’라는 시선을 주면 주었지.

철민은 현우에게 대본을 펼쳐 어느 한 부분을 짚으며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대사를 좀 더 힘 있게…….”

“그럼 이 부분에 악센트를 넣어서…….”

은율은 대화 중에 차마 끼어들 수가 없어 약간 거리를 둔 채 멀뚱히 서 있었다. 그의 옆을 지나가던 조감독과 어깨가 부딪쳤다. 누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조감독과 커다란 안경에 가려진 은율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 아까 그……. 어? 으에?!”

조감독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대화 중이던 철민과 현우도 이쪽으로 시선을 준다.

“낄낄, 왔어?”

철민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반겼다. 현우는 은율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웬 길 가던 대학생이 촬영장에 있나 싶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감독님.”

“그래. 다음 촬영 날짜 잡히는 대로 연락할게.”

철민이 의자에서 일어나 은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런 철민의 모습에, 현우는 놀랍기만 했다.

‘나한텐 맨날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웃어 준 적도 한번 없으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은율을 노려보았다. 철민이 친근하게 구는 그에게 질투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은율이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진환을 찾았다. 그는 저 멀리서 강 팀장과 대본을 들고 대화 중이었다. 괜히 불러 세워 흐름을 끊을 수는 없어서 인사는 포기하기로 했다.

얼떨떨한 얼굴의 조감독과 조연출에게 각각 인사한 은율이 몸을 돌려 건물 입구로 향했다. 그의 등 뒤로 얼핏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아까 그 대역 스턴트맨은 어디 갔어요? 아직도 옷 갈아입나?”

“낄낄낄. 눈치 없는 놈.”

“예?! 제가 왜요!”

은율은 일부러 못 들은 척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  *  *

촬영이 모두 끝난 것은 은율이 집으로 돌아간 후 3시간이 지나서였다. 진환은 오랜만에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은율은 자신이 연기 준비에 한창일 때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야속한 마음도 들었지만, 준비하느라 바빴던 자신에게도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려 보았다.

현우는 은율이 모처럼 멋지게 뽑아 놓은 액션신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해 쩔쩔매었다. 맞아서 아픈 척, 기합 넣는 척, 눈을 부라리는 척. 그놈의 척척척을 못 한다. 화려한 액션신에 넣을 클로즈업, 바스트 샷이 김이 팍 샐 정도로 엉성한 표정뿐이다. 모처럼 뽑아낸 액션신만 아까울 지경이었다.

진환의 기분은 은율과 연기했던 장면을 현우와 연기했을 때 기어코 바닥을 쳤다.

‘감정이 없잖아, 감정이.’

이가 갈렸다. 강민의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지문에서 나타내 주는 것만 겨우겨우 표현하는 꼴이란,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새삼 은율의 연기력이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다.

반쯤 억지로 연기를 마치고 나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진환은 대기실에 들어가 신경질적으로 손목의 시계를 풀었다. 싸구려 시계가 유리 테이블에 던져졌다. 이동식 행어에 걸린 자신의 옷을 꺼내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놓고서 남방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잠깐 실례합니다!”

양해를 구하며 조연출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진환을 보고 깜짝 놀라며 허리를 굽혀 인사해 보였다. 설마하니 대기실에 있는 게 진환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무슨 일입니까?”

“아, 메이킹 필름에 쓰려고 설치해 뒀던 카메라 회수 좀 하려고요.”

진환이 눈을 크게 떴다.

“카메라요? 여기 카메라가 있었습니까?”

조연출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예에. 첫 신 촬영 때 그것 때문에 양해를 구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다. 메이킹 필름에 다양한 영상을 넣고 싶으니 대기실에는 카메라를 설치한다고 말이다. 물론 여자 연기자가 대기실을 쓰게 될 때는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아까 그 대역 스턴트맨도 압니까?”

“예. 감독님이 미리 말씀하신 거로 압니다.”

조연출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기실의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는 한쪽에 놓여 있던 철제 의자를 끌어와 놓고는 그 위에 올라갔다. 그저 벽에 구멍이 난 거로만 보였던 자리에서 작은 카메라가 조연출의 손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잠깐 그것 좀 보죠.”

“예? 아, 예.”

조연출은 곧바로 진환에게 카메라를 넘겼다. 진환은 카메라의 영상을 빠르게 되감기해 보았다. 약 6시간 정도 촬영된 그 영상 안에는, 진환과 은율이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카메라의 위치는 은율과 연기할 때에 진환이 앉아 있던 소파 뒤쪽이었다. 진환의 큰 키에 가려서 은율이 옷 갈아입는 장면은 크게 노출되진 않았다. 다만 서로 나누는 대화는 확실하게 들어 있었다.

“이걸 직접 확인하는 건 누구입니까?”

카메라의 영상을 체크하던 진환이 물었다.

“감독님이 먼저 보시고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저희한테 주실 겁니다.”

혹여 카메라에 이상한 거라도 담길까 싶어 감독인 철민이 가장 먼저 체크하기로 했다고 한다. 진환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이건 제가 감독님께 들고 가죠.”

카메라의 영상을 보고 있던 진환의 눈이 반짝였다. 카메라에는 마침 은율과 그의 대본 리딩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