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Stunt/Action(1) (2/33)

2. Stunt/Action(1)

은율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전화 올 곳도 없고 피곤했던 터라 푹 잘 요량으로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두었다. 이른 아침에 눈이 떠져 본능적으로 베개 옆에 둔 휴대폰을 확인했을 땐 깜짝 놀랐다.

진환에게 3통의 전화와 2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고, 철민은 무려 5통이나 전화를 했다. 철민은 애당초 문자를 하지 않는 사람이니, 메시지가 와 있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지만 불안했다. 한 번 걸어서 받지 않으면 알아서 연락을 해 올 때까지 다시 연락하진 않는 사람이 그이다.

먼저 진환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음부터는 내가 아무리 바빠도 갈 때 인사 정도는 나눴으면 하는데.]

[은율 씨의 친구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친구 타령이라니,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일단은 무시.

감독님이 먼저다.

은율은 급히 세수를 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얼음 같은 차가움에, 잠겨 있던 목이 탁 풀리는 느낌이 났다.

곧바로 철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날에 촬영이 늦게 끝났을 텐데 오전 7시가 되기도 전에 전화를 거는 것은 너무 무례한가 싶기도 했다. 신호가 서너 번 가고 나서도 받지 않으면 그냥 끊었다가 나중에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덥석 받는 소리가 났다.

-은율아!

인사도 건네지 않았는데 철민이 다급히 제 이름을 외쳤다. 은율이 얼떨떨한 톤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있었고말고!

왜 이리 흥분한 거지?

-지금 시간 좀 되나?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 아니다, 거기 어디야? 내가 가지!

이렇게 흥분한 철민은 오랜만이었다. 처음 은율의 액션신을 보고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지금 여기가……. 아, 잠깐만, 은율아.

철민은 혼자가 아닌지, 위치를 설명하려다 전화를 약간 멀리하고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은율아, 주소 불러 봐라. 차 한 대 갈 거야.

“예? 그러실 필요는…….”

-불러 봐, 빨리.

철민의 다그침에 은율은 결국 제집 주소를 불렀다. 철민 말로는 20분이면 도착할 거라고, 준비하라고 한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진 후였다. 철민이 볼일도 없이 다짜고짜 오라 가라 할 사람은 아니어서 굳이 다시 전화해 물어보지는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서 옷을 입고 나자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진환이었다.

“여보세……!”

-나와.

은율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예?”

-밖에 차 대고 있거든. 감독님이 보내서 왔어.

은율이 눈을 깜빡이다가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바라보았다. 반지하 창으로 보이는 것은 검은색 고급 승용차였다. 그것에는 저번 차량 추격신 때 썼던 차량과 같은 마크가 붙어 있었다. 이런 허름한 원룸촌에 서 있을 리가 없는 고가의 외제 차에 은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들어가?

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 그 말과 함께 달칵- 하고 차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바깥의 검은 외제 차에서 누군가가 내려섰다.

“나갈게요. 거기 계세요.”

은율이 급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은율이 후드 티 위로 평상시에 입던 허름한 재킷을 걸쳤다. 가방을 챙길까 하다가, 잠깐 이야기만 하고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차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서 있는 진환이 보였다. 약간 눈을 내리깐 채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참 이 동네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화보 촬영을 하러 온 모델처럼, 너무 멋들어졌다.

‘부럽다.’

은율은 솔직한 심정을 속으로 토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환은 그의 기준에서 가장 이상적인 남자상이었다. 은율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남자답게 잘난 남자.

뚜렷한 이목구비에 선명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다. 남녀노소 누가 보아도 잘생겼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 같았고, 어깨가 보기 좋게 벌어진 탄탄한 몸은 뭇 남성들이 부러워할 만했다.

진환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니 괜히 기분이 처졌다.

진환이 은율을 알아보고는 차에서 등을 떼었다. 그의 차가운 무표정이 갑자기 따뜻하게 웃는 표정이 되어 은율을 맞았다.

“10초 세어도 안 나오면 집 구경하려고 했어.”

은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예인이 이렇게 한가하셔도 됩니까?”

“한가한 건 아니지. 서은율 씨 픽업한다는 아주 중요한 임무 때문에 온 거야.”

“아, 예, 그러십니까.”

은율이 포기하듯 대충 반응했다. 진환이 웃으면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은율은 진환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러고선 진환이 문을 닫아 주기도 전에 얼른 그 문을 닫아 버렸다. 야무지게 안전벨트를 매는 그를 보며 진환이 피식 웃었다.

진환은 생각보다 운전을 부드럽게 하는 타입이었다. 규칙이란 규칙은 완벽히 지키며, 절대 급히 속도를 낸다든지 끼어드는 경우가 없다. 겉으로 보기엔 이래도 직진, 저래도 직진, 너도나도 직진이지만 자기가 먼저 직진을 고수할 것 같은 남자가 말이다.

운전 타입이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진환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답장 안 해?”

은율이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주변을 주시하던 눈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 말했다.

“메시지 답장, 안 하냐고.”

은율은 그제야 그 말을 알아들었다.

“지금 메시지에 대한 답장을 말로 해 드리면 됩니까?”

“아니. 메시지로 답장해 줘.”

“그럴 필요가 있어요? 바로 옆에 있는데.”

“그래도 메시지로 줘. 보관하게.”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황한 답장을 쓸 만한 메시지도 아니었는데 굳이 보관을 한다고 하니 이상해 보일 수밖에.

일단 진환의 요청대로 휴대폰을 꺼내어 답장을 2통 썼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되도록 인사드리고 가겠습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으니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죠.]

답장을 하고서 진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의 휴대폰이 짧은 진동 소리를 두 번 내었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정차했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답장을 확인한 진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굳이 자판을 눌러 메시지를 보냈다.

[되도록 말고 무조건. 내가 바쁘더라도 방해해도 되니까.]

[친구가 되는 건 얼마나 지나야 가능한데?]

왜 바로 옆에 있으면서 굳이 메시지를 보내는 걸까.

은율이 답장을 보고서 물었다.

“그냥 말로 하시면 안 됩니까?”

“안 돼. 빨리 답장해.”

막무가내다. 은율은 단호한 그의 얼굴을 한차례 노려보고는 답장을 썼다.

[알겠습니다. 꼭 중요할 때 방해해 드리겠습니다.]

[100년쯤은 지나야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휴대폰으로 답장이 오길 기다리며 한 손으로 아예 그것을 쥐고 있던 진환이 얼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얼굴이 일그러진다.

“100년은 상식적으로 너무하지 않나? 100일로 줄여 주지? 근데 그것도 긴 것 같은데.”

진환의 말에 은율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대체 뭐라고 딜을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자잘한 대화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메시지로 보내십시오, 메시지로.”

나름 복수한답시고 그렇게 말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곧 은율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메시지가 1개였다.

[100일로 줄여 줘. 그 정도는 참아 볼게.]

메시지를 확인한 은율이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억지로 내렸다.

때마침 진환이 차를 세웠다. 이번엔 신호에 걸린 게 아니라 아예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걸고 주차를 한다. 그러고선 몸을 옆으로 아예 돌려서 은율의 안전벨트를 풀어 준다. 그걸 보며 가만히 있자, 진환이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답장.”

은율은 질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시선 속에서 답장을 꾹꾹 써 내려갔다.

[100일 받고 100일 더.]

진동을 느끼고 휴대폰을 확인한 진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은율이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진환이 후다닥 내려 그의 옆에 붙었다.

“지금 딜 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싫으면 100년 하시던가요.”

은율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휴대폰을 눌러서 부술 것처럼 꾹꾹 터치했다.

[콜.]

대체 이게 뭐라고 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답잖은 딜이 끝나자마자 서로 피식 웃으며 걸었다.

앞서 걷는 진환의 뒤를 따라가자, 골목 사이에 있는 작은 카페가 보였다. 직장인들을 공략하기 위해서인지 유리문에 적혀 있는 오픈 시간은 7시부터였다. 평일의 이른 아침이었다면 상당히 손님이 몰렸을 테지만, 다행히 주말이라 손님이 없었다.

텅텅 빈 테이블 끝에 유일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작은 키의 남자가 보였다. 한 손에 얇게 제본된 책자를 들고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짓했다.

“은율아, 여기!”

은율은 철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가 내미는 손을 바라보았다. 웬 악수인가 싶었지만 일단 내민 손이 무색할까 봐 얼른 악수를 했다. 철민이 씩 웃으며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오느라 고생했어. 어서 앉지.”

조금 더 길어지면 저 손을 떼어 내야 하나 고민하던 진환은 다행히 두 사람의 손이 금세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은율 역시 진환의 옆에 앉으며 철민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낄낄.”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보며 은율이 진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진환은 무표정하게 있다가 은율과 눈이 마주치자 작게 미소 지었다.

“은율아, 본의 아니게 네 연기 좀 봤다.”

갑작스러운 말에 은율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에 진환이 설명을 덧붙였다.

“어제 대기실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어. 메이킹 필름용.”

“아.”

은율은 그제야 알아들었다.

대역 스턴트를 해야 하니, 탈의 때문에라도 대기실을 쓸 일이 종종 있었다. 실제로 이번 촬영 때도 그랬다.

철민은 그 때문에 미리 은율에게 양해를 구했다. 메이킹 필름에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을 예정이라서 대기실에 카메라를 설치할 것이라고.

물론 철민은 은율이 찍히더라도 그가 나온 부분은 쓰지 않기로 약속했다.

메이킹 필름용 카메라에 찍힌 것은 만일을 대비해 철민 혼자 확인하고 편집한 후에 조연출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니 어제 대기실에서의 일을 벌써 철민이 봤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은율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배우의 배역을 연기하다니,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연기를 목격한 게 해당 영화의 감독이니,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어제 그건……. 아…….”

문득 연기 직후의 일이 떠올랐다. 은율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은율이 진환을 바라보니, 그가 시선을 맞추며 씩 웃는다.

이 사람은 지금 웃음이 나오나? 자기 이미지 큰일 나게 생겼는데. 대배우 명치를 때리고서 한참 동안 끙끙거리게 했던 장본인도 큰일이지만.

은율이 한숨을 내쉬며 철민의 눈치를 봤다.

“다 보신 겁니까?”

당연히 다 봤겠지 싶었는데 철민은 고개를 저었다.

“진환 씨가 날 변태로 몰던데. 멀쩡한 남자 옷 갈아입는 걸 뭐 하러 보냐고, 낄낄. 난 둘이 연기하는 것만 봤어.”

은율이 눈을 깜빡거리며 철민과 진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메이킹 필름이고 사전에 협의를 했다고는 해도 원치 않는 부분에 대한 프라이버시는 지켜야지. 안 그래?”

“진환 씨 말이 맞아. 그런 건 충분히 존중해. 미리 요청만 하면 못 들어줄 게 어디 있어. 그리고 들어 보니 옷 갈아입는 거랑 연기하는 부분만 들어 있어서 메이킹 필름에 쓸 것도 없겠더라고.”

진환의 말에 철민도 동조했다. 그 카메라의 테이프는 현재 진환의 코트 주머니에 얌전히 안착해 있는 상태였다.

은율이 눈살을 찌푸리며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럼 차라리 전체적으로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시지 그랬습니까?”

“미리 요청하지 않으면 감독님이 보셔도 할 말 없어. 그리고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안 받았잖아.”

“거짓말하지 말아요. 감독님이 전화하신 게 이진환 씨가 전화하기 전이었습니다. 이미 그때 영상을 보여 드린 거잖아요?”

“예리하네.”

진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탄했다.

은율이 얼른 철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진환 씨 대사 연습을 좀 도와드렸어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예의 바른 사과에 철민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왜 사과할 일이고 불쾌해할 일이야?”

갑작스러운 칭찬에 은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철민이 낄낄거리며 제 손에 있던 제본된 책자를 은율에게 건넸다. 은율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은율은 묘하게 끌리는 필기체 제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건……?”

철민이 웃는 낯으로 그것을 읽어 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옆자리의 진환도 그가 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율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은 읽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새로운 영화를 기획하고 있고, 거기에 자신의 스턴트 액션이 필요한 걸 수도 있었다.

은율은 대본을 펴들었다. 곧 그는 대본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엄청난 집중력으로 그것을 읽어 나갔다.

은율이 대본치곤 얇은 그것을 다 읽는 데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철민과 진환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본을 덮고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자,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에 당황했다.

“어, 음, 이거 액션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액션은 전혀 없지.”

“그럼 왜 제게 이걸 보여 주신 겁니까?”

철민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좀 더 가까이했다.

“낄낄낄, 은율아.”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을 한다.

“나랑 영화 하나 찍자.”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반응이 한 박자 늦게 나갔다.

“어, 저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은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철민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려 웃었다.

“솔직히 말해 봐라. 이 대본 읽으면서 무슨 생각 했냐?”

은율이 즉답했다.

“짧지만 좋은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입바른 말은 아니었다. 읽는 순간 상업용 영화에 들어갈 대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상업 영화 같은 재미와 임팩트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체는 상당히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철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리고 또 없냐? 가령, 연기해 보고 싶다든가.”

갑작스러운 말에 눈만 깜빡였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어렵잖게 예측할 수 있었지만, 은율로서는 믿기 힘든 것이었다.

“내가 그 연기 영상을 보면서 확신한 게 있다.”

철민의 눈꼬리가 휘었다.

“넌 연기를 즐기는 거야. 천상 배우라고. 심지어 재능까지 출중한 배우.”

“아니, 잠깐, 잠깐만요.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네가 이 영화에 출연해 보면 어떻겠냐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은율이 입을 다물었다. 스턴트맨인 자신에게 액션신 하나 없는 대본을 주며 출연을 해 보란다. 주인공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단역에 가까운 조연이다. 그런 단역을 감독이 직접, 그것도 이렇게 절실한 눈으로 캐스팅할 리는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정도는 아무리 둔한 은율이라도 알 수 있었다.

“진심이세요? 전 정극 연기라고는 전혀 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나랑 해 봤잖아. 두 번이나.”

진환이 끼어들었다. 은율이 그를 곁눈질로 흘겨보며 대꾸했다.

“그건 그냥 대사 연습 도와드린 거잖아요.”

철민이 은율의 손을 두 손으로 그러쥐듯 붙잡았다.

“은율아. 내가 그 카메라에 담긴 네 연기를 봤을 때 뭘 했는지 아냐?”

은율이 의문을 담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현우 그놈 갈아 치우고 널 강민으로 세울 수 있을까 싶어서 스폰서한테 전화할 뻔했다.”

그랬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현우가 끌고 온 스폰서가 투자한 금액은 영화 제작의 사활이 걸려 있을 정도로 상당한 액수였으니까. 그건 다행스럽게도 진환 역시 알고 있었다.

“제가 말리지 않았으면 정말 그러셨을 테죠.”

진환이 덧붙이며 미간을 모았다. 은율의 손을 붙잡은 철민의 손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가 그걸 떼어 낼 것만 같았다.

“장담하마. 지금 네 또래, 아니 그보다 한참 나이 많은 놈들 중에서도 너만큼 연기할 수 있는 놈은 손에 꼽을 거다. 진환 씨를 상대한 것만 봐도 그래. 진환 씨, 직접 연기 마주해 봤으니 어디 말해 봐. 은율이 연기가 어땠나?”

결국 철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떼어 낸 진환이 은율의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진환이 눈을 휘며 웃었다.

“잡아먹으려다 제가 잡아먹혔죠.”

“낄낄, 하여튼 표현하고는.”

철민은 진환이 은율을 상당히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연애 감정인가 싶기도 했지만 천하의 이진환이 진정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쯤은 철민도 알고 있었다. 로맨스를 연기할 때는 카사노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연애에 능숙해 보이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아직 한 번도 연인을 만든 적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크게 뜬다 싶으면 어김없이 스캔들 기사가 나오기 마련임에도, 진환은 여태 조용하기만 했다.

그런 진환이 은율을 살뜰하게 챙기고 있으니, 장난삼아 연애 감정에 빗대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뭐, 진환 씨는 굳이 따지면 모처럼 연기 합이 맞는 사람을 만난 데에 대한 애정 표현인가. 아니, 원석을 발견한 설렘 때문인지도.’

업계에서 진환이 연기에 미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가 특이한 행동을 한다면 그건 백 퍼센트 연기를 위함이다. 연기 때문이 아니라면 평생 무심하고 차갑게 굴 사람이다. 그가 그나마 철민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서 나오는 작품마다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기 때문이다.

‘잘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철민이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꾸만 눈이 갔는데, 이제는 자신에게 영감마저 주는, ‘뮤즈(Muse)’ 같은 청년이 되어 버렸다. 그의 흡인력 있는 연기를 보았을 때는 어찌나 흥분했던지, 영상을 보는 내내 수전증을 앓는 사람처럼 사정없이 손을 떨었다.

철민은 은율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내 사비를 탈탈 털어서라도 넉넉히 챙겨 줄게. 촬영할 시간이 없는 거면 언제라도 좋으니 잠깐이라도 짬이 날 때 우리가 맞출게.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저 작품 속 인물이 되어 연기해 주면 돼.”

은율이 제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철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진환은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긴 했지만, 정작 거절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직 ‘친구’란 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다.

“왜? 뭐 때문에?!”

철민이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물었다. 은율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제가 해낼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니고, 잘 해낼 자신도 없습니다.”

“거짓말! 감독인 내가 인정할 정도의 실력이야! 연기에 인색하다는 진환 씨도 인정했어! 연기력이라면 이런 독립 영화에는 오히려 과분할 지경인데 당연히 잘 해내겠지! 그리고 원하는 건 뭐든 서포트해 준다고!”

진환이 흥분한 철민을 만류했다.

“일단 진정하세요, 감독님.”

철민이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진환이 물었다.

“감독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정도면 은율 씨는 연기를 굉장히 잘하는 거야. 자신을 가져. 그리고 무엇보다 은율 씨는 연기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잖아. 왜 연기하는 걸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아직 ‘친구’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건 간단하게라도 대답해 줘야 나도 감독님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은율은 시선을 내리깐 채로 고민했다. 말해야 할지 말지.

잠시의 고민 끝에, 은율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저에 대해 알게 되는 게 무섭습니다.”

그 말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철민과 진환은 그가 말하는 의미가 단순히 ‘주목받는 게 부담스럽다’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으리란 거란 것도. 자기에 대해 뭘 그리 숨기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사에 대한 건 섣불리 건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철민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은율의 말에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독립 영화라지만 주연 배우다. 거기다 내로라하는 영화감독들이 모여 만드는 영화였다. 국제 영화제에 하루나 이틀 상영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지만, 주연 배우가 주목받게 될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그 모습이라면…….’

철민은 힐끗 은율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스턴트 액션을 할 때와 다르게 커다란 안경과 긴 앞머리로 눈을 거의 가리고 있었다. 답답하고도 촌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안경을 벗고 앞머리를 쓸어 올려 그 얼굴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길 수 있는 마성의 남자다. 장담컨대, 그가 연예계에 발을 들이면 앗 하는 순간 웬만한 CF와 화보는 다 꿰찰 것이다.

비주얼만으로도 그 정도인데 연기력까지 좋다. 액션은 또 얼마나 화려한가. 그야말로 연예계에 몸담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명해지지 않는 게 기적이겠네.’

유명해진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유명해질수록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 조사하고 파헤칠 것이다. 은율 정도라면 사생팬이 생길 확률도 있고,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생활이란 게 없어질 것이다. 그것을 무서워한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진환이 입을 열었다.

“이름을 없애죠.”

은율과 철민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은율 씨만 괜찮다면 연기를 하긴 하되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밝히지 말죠. 엔딩 크레디트에 아예 넣지 않는 겁니다. 촬영 스태프도 입이 무거운 사람들로 엄선해서 촬영하고요.”

철민이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주연의 이름을 없애?”

다른 이들은 제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에서 조금이라도 윗줄에 있기를 바라며 뇌물을 쓰는 경우도 있다는데, 진환은 아예 이름을 지우자고 한다.

진환이 은율의 얼굴을 뜯어보듯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없애는 것뿐만 아니라 평상시와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은율 씨는 지금의 모습과 촬영 때의 모습이 도저히 매치하기 힘들 정도로 갭이 큰 사람이죠. 또, 연기할 때의 모습과 평상시의 모습도 또 다르고요. 마치 애당초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건 철민 역시 느꼈다. 은율과 진환의 연기 장면을 보면서, 조금 전까지 있던 사람과 의상만 똑같은 타인인 것처럼 느꼈다. 표정, 목소리 톤, 말투, 얼굴 근육을 사용하는 모양새, 버릇까지 전부 달랐다. 카메라 테이프에 담겨 있던 은율은, ‘강민을 연기하는 서은율’이 아니라 ‘강민 본인’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진정한 ‘천의 얼굴’에 가까웠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화장으로 피부 톤을 조금만 손대면 상황에 따라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여장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주연 캐릭터 성별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건 포기하죠. 그 상태로 개인적인 사항은 무엇 하나 공개하지 않는 겁니다.”

은율이 여장하는 것은 진환으로서도 여러모로 내키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어차피 상영한다고 해 봐야 하루 이틀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고편도 없이 잠깐 상영하는 건데, 그때만 화제성을 막으면 은율 씨가 드러나게 될 확률은 희박하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듣던 철민이 은율에게 물었다.

“은율아,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스타일을 바꿔서 아예 다른 사람인 척 촬영하면 어떻겠냐? 진환 씨 말처럼 상영은 고작 하루 이틀, 상영 횟수는 최대 4회밖에 되지 않아.”

“지금 두 분 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진환이 철민 대신 대답했다.

“메소드 연기를 하는 이름 없는 배우가 되어 달라는 소리야.”

생소한 말에 은율의 고개가 저절로 진환 쪽으로 돌아갔다. 진환의 눈이 이상하리만치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그 누구도, 은율 씨의 정체를 알 수 없을 거야.”

은율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도 모른다고? 그게 가능해?

“하지만…… 업계분들 중에 절 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스턴트팀도 알아볼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마. 며칠 시간을 내준다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서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줄게. 캐릭터 만드는 것도 맡겨 줘. 아, 그리고 혹시 날 걱정할까 봐서 하는 말인데, 내 스케줄은 펑크 나지 않도록 알아서 조정해 둘 테니 그건 신경 쓰지 마.”

은율은 진환을 바라보며 의문이 담긴 눈을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왜 자기의 비싼 시간까지 들여가며 자꾸만 연기를 시키려고 하는 걸까.

진환이 웃었다.

“당신 스스로가 연기를 좋아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아 줬으면 해서.”

*  *  *

차 안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진환은 운전석에 앉아 안전 운전 중이며, 은율은 무릎 위에 있는 대본 표지에 시선을 둔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은율이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잘할 것 같으니까 제의한 거야. 난 내 안목을 믿어.”

은율 본인보다도 훨씬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은율은 창에 머리를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결국 철민의 부탁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머릿속에서 거절하라는 신호가 자꾸만 흘러나왔음에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은율은, 본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대역 스턴트를 뛰면서 차오르던 갈증, 진환과 연기하면서 느꼈던 두근거림.

그것들이 뜻하는 건 단 하나였다.

모든 걸 잊고 그 캐릭터가 되고 싶다. 진정한 연기를…… 해 보고 싶다.

‘어쩌면 이번 일을 통해 연기에 대한 미련을 다 없앨 수 있지 않을까.’

그리도 원하던 정극 연기를 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연기에 대한 미련을 없앨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고민으로 점철된 은율의 얼굴을 힐끔거린 진환이 차의 방향을 틀었다. 그를 자택에 데려다주는 도중이었지만, 잠시 옆길로 샜다.

진환은 근처 한적한 골목길에 비상등을 켜고 차를 대었다.

“서은율 씨.”

진환이 몸을 완전히 돌려 은율을 바라보았다. 은율은 창에서 머리를 떼고서 진환과 시선을 마주했다.

“고민하지 마. 불안해하지도 마.”

진환이 봄날의 햇볕처럼 미소 짓는다.

“내가 도와줄게.”

왜 이 남자의 미소는 이리도 안정감을 주는 걸까. 불안한 게 너무 많은데, 머릿속은 복잡해서 터질 것만 같은데,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차피 할 거라면 완벽히 해내고 싶습니다.”

은율은 머릿속에 꼬여 있는 그 말들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이 내뱉는 말만 흘러나올 뿐…….

진환이 손을 뻗었다. 그가 은율의 안경을 벗기고서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를 한차례 쓸어 올려 준다. 드러난 눈동자가 아직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진환이 은율의 손을 잡았다. 전기라도 온 것처럼 찌릿해서 손끝이 움찔한다.

“은율 씨가 두려워하지 않고 연기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  *  *

“컷!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얼른 입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상기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이 퍼뜩 눈을 떴다. 뜨자마자 눈에 보이는 것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여인은 자존심 상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연우야, 휴대폰.”

진환은 저에게 달려온 연우에게 손부터 내밀었다. 그러자 예상했다는 듯 그의 손 위에 휴대폰을 올려 준다.

“진환 씨, 다음 신 바로 가능하겠어?”

감독이 물어왔다. 진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키스신 직후에 대사 치는 부분 들어가지!”

그 말을 듣고 휴대폰을 연우에게 돌려주려던 순간, 우우웅-하고 진동이 울렸다. 진환의 고개가 홱 돌아가 그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딱딱하기만 하던 그 얼굴에 설핏 미소가 감돌았다.

“감독님, 10분만 쉬어도 되겠습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진환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감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이들에게 잠시 휴식을 외쳤다.

진환은 ‘이진환’이라는 커다란 네임 태그가 붙은 간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가 부드러운 얼굴로 휴대폰의 터치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여자 스태프 둘이 속닥거렸다.

“야야, 이진환 씨 애인 생긴 거 아냐? 나 여태 촬영하면서 저런 표정은 처음 본 것 같은데.”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아닐걸? 이진환 씨는 연기 말고는 아예 관심도 없잖아. 저거 분명 다른 감독님이야.”

“그럴까? 그런 것치고는 뭔가 달달한데…….”

“좋은 시나리오라도 가져다줬나 보지, 뭐.”

“그런가……. 수상하긴 한데…….”

그러던 찰나, 두 여자 스태프의 눈이 반짝였다. 상대 배역인 신유리가 진환을 향해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신유리가 이진환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스태프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매번 진환의 촬영 스케줄을 물어보러 다니고, 그의 연락처를 얻으려고 이 사람 저 사람 찌르기도 했다. 이렇게 호흡을 맞출 때는 어떻게든 예쁘게 보이려고 갖은 애교를 떨며 은근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게 확연히 보였다.

유리는 조금 전 자신의 입술을 문대던 진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입술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 휘어져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름 외모와 연기력을 두루 갖춘 신예 배우로 이름 높이고 있는 그녀로서는 여태까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에게는 사적으로 저렇게 웃어 주지 않는지 불만스러울 뿐이었다.

처음 진환을 눈앞에서 봤을 때, 유리는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잘생긴 외모,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같은 위압감 넘치는 눈빛,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와 비율 좋은 몸매는, 그녀뿐만이 아니라 웬만한 여자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휘저어 버렸다.

제 마음을 깨달은 후, 그녀는 매일 날이 새도록 연기 연습을 했다. 진환이 연기에 심히 미쳐 있으며, 연기를 못하는 사람에겐 눈앞에서 경멸 어린 독설을 내뱉기도 한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남모르게 열정적으로 연기 연습을 해 왔고, 그에게 타박받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키스신을 찍었는데…….

‘어떻게 사인 떨어지자마자 뒤돌아서 가 버릴 수가 있지? 최소한 수고했다, 아니면 좋았다, 뭐가 부족했다, 그런 거 한마디도 안 하고.’

저절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원래 저런 남자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하단 생각에 마음이 상했다.

‘후우……, 침착하자.’

유리는 심호흡을 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녀는 제 네임 태그가 붙은 의자를 끌어다 진환의 옆에 놓고 앉았다. 진환은 곁눈질 한 번 주지 않았다.

“저, 진환 씨.”

최대한 부드럽고 살갑게 이름을 불렀다. 진환은 여전히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말해요.”

유리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바쁘시지 않으면 저와…….”

“바빠요. 문자 중인 거 안 보입니까?”

진환의 무덤덤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담겨 있었다. 유리는 찔끔해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자 스태프 몇 명이 소곤거렸다. 작업 걸기도 전에 차였다고.

진환은 유리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쉬는 시간이야. 하나도 안 바빠.]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바로 답장이 온다.

[촬영 중에 잠깐 쉬시는 걸 텐데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진환은 빠르게 자판을 눌렀다.

[괜찮대도. 지금 막 키스신이 끝났]

기다란 커서가 깜빡이며 다음 글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한 글자씩 뒤에서부터 지우기 시작했다.

[괜찮대도. 지금 막 키스]

“진환 씨!”

유리가 진환의 휴대폰 번호라도 받아 내기 위해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귓가를 파고드는 갑작스러운 하이 톤에 진환이 흠칫 놀랐다. 그 탓에 손이 움찔했고, 그대로 전송 버튼을 터치해 버렸다.

진환의 표정에 일순 당황함이 비쳤다.

“진환 씨?”

유리가 눈을 깜빡이며 진환의 얼굴을 살폈다.

우웅-

진환이 다급히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 와중에…… 참 굉장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진환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다가 감독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벌써 쉬는 시간이 끝나 버렸다.

옆에선 유리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표정이 좋지 못한 진환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저, 괜찮……아요?”

진환의 서슬 퍼런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온몸을 한 손으로 비틀어 잡고 있는 것 같은 압박감에 유리의 몸이 경련하듯 짧게 떨었다.

“……가죠.”

진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을 내딛다가 우뚝 멈춰 서더니, 심각한 얼굴로 제 손의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그가 머뭇거리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상대는 받지 않았다.

진환은 초조한 얼굴로 메시지를 작성해서 상대에게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자신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는 건 원치 않았다.

휴대폰을 연우에게 맡기고 씁쓸한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진환. 집중하자, 집중.’

심란한 머릿속을 달래며 눈앞에 선 유리를 끌어안았다. 키스신 직후에 이어지는 대사를 쳐야 하다 보니, 아까의 키스신 끄트머리 장면을 그대로 보여 줘야 했다. 한 손으로 유리의 허리를 감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뒤통수를 받쳤다. 유리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며, 유혹하듯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좀 더 길고 두꺼운 허리였지. 말랐어도 역시 남자 몸이었어.’

유리의 허리와 은율의 허리를 비교해 보았다. 기본 골격부터가 여자와는 달랐다. 눈앞의 여배우는 허리가 워낙 가느다래서 자칫 뚝하고 부러질 것 같았지만, 은율은 그렇지 않았다. 남자치곤 마르고 가늘었지만, 잔근육과 복근이 있어 탄탄했다. 개인적으로 안는 맛은 은율이 더 좋았다.

‘머리카락도 부드럽고, 향도 좋았고.’

미용실에서 세팅한 유리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찰랑거리고 있었지만 진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가락에 길게 감기는 맛도 별로고, 미용실 특유의 향도 싫었다.

부드러운 거로 따지자면 유리도 은율도 비슷했지만, 은율 쪽은 미용실에서 염색 한번 해 보지 않은 건강한 천연 모발이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는 흔히 맡아 본 싸구려 샴푸의 냄새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기분 좋은 내음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입술도……. 아니지, 그만 생각하자.’

더 생각했다가는 품에 안겨 있는 유리를 던져 버리고 은율을 보러 갈 것만 같았다.

“그럼 서로 끌어안은 채로 그윽하게 바라보는 데부터 시작하자고!”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팔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유리 씨! 너무 꽉 껴안았네! 조금만 힘 풀어!”

아무도 모르게 혀를 찬 유리가 진환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팔의 힘을 약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진환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리……. 율……. 은율…….’

진환이 시선을 내려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다르게 생긴 얼굴인데, 그 얼굴 위로 은율의 얼굴이 겹쳐졌다.

‘뭐지, 이게.’

신기한 현상에 눈만 깜빡깜빡해 본다. 유리는 자신을 조목조목 뜯어보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진환의 눈길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버렸다.

“유리 씨. 본명입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동그랗게 뜨던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가명……인데요.”

진환은 더 이상 묻거나 덧붙이지 않았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눈매가 날카로워져, 유리가 몸을 움찔했다.

‘왜 비슷한 이름을 쓰고 난리야.’

더 마음에 안 들어.

진환이 짧게 혀를 찼다.

*  *  *

진환은 생각보다 촬영이 빨리 끝난 것에 감사했다. 진환이 의욕적으로 촬영에 임한 것도 있었지만, 유리가 문제였다. 유리는 키스신 직후의 장면에서부터 너무도 지쳐 있었다.

‘미친……. 아니, 무슨 연기를 이리 살벌하게 해! 이거 로맨스거든?!’

심지어 키스한 직후다. 달달함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배려는 해 줘야 하는데 그저 살벌하기만 했다.

‘허리 부러질 것 같으니까 힘 좀 풀어요. 힘센 거 알겠으니까.’

‘뭐 하는 거예요? 거긴 좀 더 격렬하게 표현해야죠. 지문에도 써 있어요. 아, 눈이 안 좋아요?’

‘연기 학원 더 다녀야 하는 것 아니에요? 혀 꼬이는 것 같은데 듣기 힘들어요.’

‘침 튀니까 침 좀 삼키고 대사해 줄래요?’

‘대본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해서 대사를 씹게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껌인 줄 아나.’

실수를 연발한 유리도 제 잘못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진환의 박력과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알고는 있었지만, 진환은 여자에게도 배려심 하나 없는 독설가였다.

우울한 낯의 유리가 결국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간단히 난도질해 댄 진환은 태연하게…….

“프로 정신이 없네.”

라고 일침을 날렸다. 유리가 그 말을 듣자마자 대성통곡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감독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급히 촬영을 종료했다. 몇몇 사람들이 유리에게 달라붙어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유리는 기가 질려 끝까지 진환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빠르게 제 밴에 탑승한 진환은 운전석의 연우에게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우가 손바닥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하자,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오타였어. 잘못 보낸 거니까 오해하지 마.]

[오해를 왜 합니까?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촬영 열심히 하십시오^ㅡ^]

은율이 처음 쓴 이모티콘이 심할 정도로 신경 쓰였다. 메시지를 보관함에 저장하면서도 꺼림칙했다.

진환이 복잡한 얼굴로 운전석의 연우에게 물었다.

“연우야. 딱딱한 문자만 하던 사람이 마지막 문자에 생전 안 쓰던 이모티콘을 넣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무슨 이모티콘인데요?”

차마 이모티콘이 담긴 문자 내역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그냥…… 웃는 이모티콘인 것 같은데.”

“뭐 화나게 하신 거 있어요?”

“……화?”

진환은 저도 모르게 한 박자 늦게 반응해 버렸다. 연우가 뒤로 돌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보통 싸우거나 삐지면, 그래 너 잘났다- 하고 웃는 이모티콘 같은 거 보내잖아요.”

“그런 거야?”

진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연우가 그의 낯빛을 살피다 조심스레 말했다.

“형, 혹시…… 정말 아닐 수도 있지만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휴대폰을 보던 심각한 얼굴이 연우에게로 향한다.

“연애하세요?”

“아니.”

즉답에 연우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아니에요?”

“응. 아니야.”

연애라니, 무슨 소리야. 그건 여자랑 남자가 하는 거지.

진환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형이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상대는 누군데요? 형 원래 남하고 문자 안 하잖아요. 감독님들하고도 전화 말고는 안 하면서.”

“전화도 녹음하고는 있는데 뭔가 모자라서 메시지도 저장하려고.”

“어…… 네……?”

연우의 의문은 쌓여만 갔다. 채무 관계인가 싶지만, 그럼 왜 문자 속 이모티콘을 일일이 신경 쓰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형, 제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더 여쭤 보는 건데요……. 전화 녹음이랑 메시지 저장은 왜 하세요?”

“그러고 싶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채무 관계에 증거로 필요하다든지 그런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보관했다가 듣고 싶을 때 듣고, 보고 싶을 때 보려고 하는 거지.”

그럼 채무 관계 같은 건 아니라는 소린데, 대체 뭐지?

이쯤 되면 보통 궁금해지는 게 아니다.

“상대가 누구예요?”

설마 드디어 톱배우 이진환에게도 스캔들이 터지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됐다.

그러면 안 되는 일임에도 매니저 연우는 자신이 케어하는 배우의 첫 스캔들이 무척이나 탐이 났다.

“서은율 씨.”

기대하는 눈길을 보내던 그대로, 연우가 굳었다.

“예……? 제가 아는 그 스턴트맨, 서은율 씨……?”

“응.”

“두 분 친구세요?”

“아니, 200일 지나야 될 수 있어. 정확히는 196일.”

연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야……. 기념일 세니, 이 양반아…….’

그러더니 미심쩍은 얼굴을 하며 진환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은율의 메시지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연우야, 네 말대로 은율 씨가 화가 났거나 삐진 거면,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저기, 형, 일단 정말, 정말 죄송한데, 저한테 이해를 좀 시켜 주실래요? 며칠 전부터 휴대폰만 보고 수시로 전화랑 메시지를 했던 상대가 서은율 씨라는 거죠? 오늘도 그분이랑 연락하던 거고요?”

진환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할 때마다 어때요?”

“재밌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연우는 진환의 말 속에 그가 모르는 감정 같은 게 내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상시에 다른 사람하고 서은율 씨를 비교하거나 해요? 예를 들면 오늘 상대 배우였던 신유리 씨랑 비교해 본다든지.”

진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티가 났나?”

뭔가 알 것 같다.

연우가 한결 진지해진 표정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일할 때 외에 은율 씨 생각한 적 있어요?”

“일할 때 외에는 계속 생각하지. 내가 생각해도 심각할 정도로.”

큰일이 난 것 같다.

연우는 눈앞이 일순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형……. 지금 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 안 나오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당황스러워.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연우는 자신이 짐작한 걸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야, 왜 그래?”

“흑……, 몰라요. 저 지금 굉장히 심각해요.”

진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연우는 속으로 진환을 연애 고자라고 욕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은율은 휴대폰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대도. 지금 막 키스]

치다가 만 것처럼 뒤가 뚝 끊겨 있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사람은 대체 얼마나 입술이 가벼운 거야.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아 빠르게 답장을 쳤다.

[이 와중에…… 참 굉장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다 그가 로맨스 드라마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했다. 혹시 키스신이라도 연습 중인 걸까.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진환이 촬영장에서 연기에 집중하지 않고 누군가와 키스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저번에는…….’

폐공장에서의 촬영 때를 떠올렸다. 그땐 갑작스러운 입술 박치기도 그렇고 친구가 된다는 명목으로 많은 스킨십을 했었다.

‘설마 정말 그때처럼?!’

촬영에 성실한 진환의 이미지가 점점 깨지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우웅-

쥐고 있던 휴대폰이 긴 진동을 내뿜으며 액정에 한 사람의 이름을 띄웠다.

[이진환 씨]

은율은 고민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진환의 이미지는 이미 문란함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왜인지 이 전화를 받아 정말 그때처럼 스킨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전화가 끊어지더니, 곧 진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타였어. 잘못 보낸 거니까 오해하지 마.]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은율은 괜히 이상한 오해를 했다며 속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오해를 왜 합니까?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촬영 열심히 하십시오^ㅡ^]

아무렇지도 않은 척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메시지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져서는, 마지막엔 가끔만 쓰던 이모티콘도 적어 보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다음 답장을 기다렸지만 몇 분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촬영에 들어갔을 거라고 예상하며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한숨 쉬듯 도서관 책상에 엎드렸다.

‘연기라…….’

생각만 하면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뭔가 키워드라도 되는 것처럼 쿵- 하고.

은율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이 쌓아 놓은 책들을 훑어보았다. 전부 금융 관련 서적들이었다.

‘공부해야 하는데.’

하지만 얼굴을 들고 다시 책을 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철민의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이후, 이상하게도 공부가 잘되지 않았다. 집중하려 하면 어김없이 대본에 대한 분석이 떠다니고, 어떤 연기를 할지에 대한 고민만 가득해졌다.

‘촬영을 빨리 잡기를 잘한 것 같네.’

몇 달 뒤에 찍기로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자칫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낙방하기라도 하면 낭패다.

은율은 한동안 그 상태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은율.”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옆으로 고개를 뉘인 상태로 눈동자만 옮겨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스포츠머리를 한 구릿빛 피부의 청년이 씩 웃고 있다.

“웬일이냐. 도서관에서 잠을 다 자고.”

“자는 거 아니야. 생각 좀 하고 있는 거야.”

청년이 옆자리의 빈 의자를 소리 없이 끌어내 앉았다.

“조별 과제 준비는 다 끝냈어?”

상대가 물어오자, 은율은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켜 가방에 책들을 챙겨 넣었다.

“응. 포폴 만들어서 강희한테 넘겼어. 내 할 일은 이제 끝.”

나머지는 발표 담당인 강희가 알아서 할 것이다.

“기언이 너는?”

“방금 끝내고 오는 길. 너나 나나 미리미리 끝내서 한가하네.”

남기언이 은율의 가방에 들어가는 책들에 시선을 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괴물 새끼.”

한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한 글자도 없을 법한 외국어 서적을 잘도 읽는다.

은율이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언도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야, 애들이 MT 가자는데 갈 거냐?”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MT? 무슨 MT? 3월 말에 갔잖아.”

지금이 벌써 4월 마지막 주다. MT를 안 갔던 것도 아닌데 한 학기에 MT를 두 번 가겠다고?

“저번 MT 때 우리 죄다 빠졌잖냐. 1, 2학년 애들이 MT 같지 않았다고 한 번 더 가자고 피력해서 결국 날짜 잡혔다고 했는데, 못 들었어?”

시험공부에 자격증 공부, 거기다 스턴트 일도 갑자기 몰려들었던 터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내가 좀 정신이 없었어.”

“그런 것 같더라.”

묵직한 가방에 들어 있는 책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정신없이 사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학과장도 이번 MT는 가라고 한 소리 하더라. 상급생들 이번에도 빠지면 학과장이 과목 학점 각오하라던데?”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원래 우리 위대하신 학과장님이 사회생활 빌미로 그런 모임 같은 거 무조건 나가라고 하시잖아.”

은율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친 기언이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이 형님도 같이 가 줄 테니까 걱정 마라.”

“……안 가면 안 되겠지?”

“당연하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넌 학점 무지 중요하잖아.”

졸업반인 은율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수석을 차지하고 장학금을 타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기언도 알고 있었다.

은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해서 MT나 OT 같은 모임은 최대한 피하고 있었는데, 이번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집에 갈 거야?”

“응. 가서 밥 먹고 공부해야지.”

“징한 놈.”

기언이 질린 얼굴을 했다.

우웅-

도서관을 나서려던 그때,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진환의 이름을 확인한 은율이 웃는 얼굴로 기언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 잠깐 전화 좀 받는다.”

기언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의 휴대폰 가까이에 제 귀를 가져갔다.

“말씀하세요.”

상대는 말이 없었다. 끊어졌나 싶어 확인해 봤지만 통화는 연결된 상태였다.

“저기, 듣고 계세요?”

은율이 묻자, 상대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화났어?

“어…… 뭐라고요?”

-화났냐고.

다짜고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의아한 얼굴을 했다.

“화 안 났습니다.”

-그럼 삐졌어?

“예? 안 삐졌습니다만…….”

-정말이야?

“제가 뭐 때문에 삐지겠어요.”

-……야, 김연우. 이리 와, 너. 어떻게 된 일이야?

진환이 건너편에서 연우를 불러 작게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이 잠시 소란스러워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눈치를 보던 기언이 옆에서 물었다.

“누구야?”

“음, 알바 하는 곳에서 알게 된 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다시금 진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누구 있어?

“대학 동기입니다.”

“야, 딱딱하게스리. 우리가 그냥 대학 동기냐? 친구지. 것두 절친한 친구.”

기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의 모습에 은율이 작게 웃음을 보였다.

-……친구? 절친한 친구란 말이지?

진환의 목소리가 왜인지 딱딱해진 것 같다.

-지금 어디야? 거기로 갈게.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데…….”

-그럼 집으로 갈게. 다른 데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

“아……, 예…….”

처음 듣는 단호하고도 냉랭한 음성에 조금 놀랐다. 평소의 진환 같지가 않았다.

은율은 전화가 끊어진 제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언은 그의 어깨에 두른 제 팔을 풀고서 얼굴을 살폈다.

“뭔데?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무것도. 나 먼저 집에 간다.”

“야야, 벌써? 밥 사 줄게. 가자.”

은율이 곤란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 집에 손님 올 것 같아.”

기언이 은율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턱짓했다.

“그 사람?”

은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응시했다. 뭐라 말하는지 정확히 들렸던 건 아니지만 꽤 낮은 목소리의 젊은 남자라는 것과 그가 은율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분위기 이상하던데.”

“일은 무슨. 그럼 간다.”

은율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고, 기언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진이한테 말해야 하나?’

기언은 은율의 남동생 하진을 떠올렸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하진이 형처럼 보일 정도로 듬직하고 어른스러운 녀석이다. 제 형을 어찌나 아끼고 챙기는지, 처음 봤을 때는 둘 사이를 의심할 정도였다.

은율이 고등학생 때 눈앞에서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제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서로 기댈 곳이 형제밖에 없겠구나, 하고 측은함마저 생겼다. 하진은 그런 기언에게 은율을 잘 챙겨 달라며,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연락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기언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서하진’이라고 저장한 연락처를 화면에 띄웠다.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손가락을 멈췄다. 알바 관련해서 만난 사람과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괜한 오지랖인가 싶다.

고민하던 기언은 결국 하진에게 통화가 아닌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  *  *

원룸촌 골목에 들어선 은율은 좁아터진 길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검정 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골목을 지나가던 몇몇 청년들이 신기한 눈으로 밴을 힐끔거렸다. 짙게 선팅되어 있어 내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뭐라도 하나 보일까 싶어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당장 몸을 돌려 골목을 도로 나가려 했다. 눈에 띄어도 너무 띄지 않나.

은율이 한 발 내딛자마자 뒤에서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서은율 씨!”

익숙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순식간에 다가온 상대가 은율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왜 도망가?”

잘빠진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진환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은율은 그의 어깨 너머로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눈앞의 가슴팍을 밀었다.

“빨리 차로 가세요, 빨리.”

“대답은 해 줘야지.”

“민망하니까 일단 타시고 얘기하죠.”

진환이 제 가슴팍을 미는 은율의 손목을 잡아챘다.

“알았어. 타면 대답해.”

진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를 끌고 밴으로 돌아갔다. 넓은 밴 안에 탑승해 문을 닫자마자, 운전석의 연우가 심각한 얼굴로 은율을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서은율 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예? 아, 예. 안녕하세요.”

무슨 고생을 말하는 걸까.

진환이 은율을 안쪽 자리로 밀어 넣었다. 마치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잠깐, 뭡니까?”

이제는 백팩까지 벗겨내 뒷좌석에 올려놓는다. 진환이 은율이 앉은 좌석 앞에 서서 몸을 숙였다. 좌석 팔걸이에 두 손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는 한쪽 다리는 구부려서 은율의 다리 사이 공간에 올렸다. 순식간에 진환의 팔과 다리에 의해 앉은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은율이 얼굴을 찌푸리며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팍 포켓에 걸친 그가 차갑게 내려다봤다.

“왜 도망갔어?”

아예 좌석에 편안히 몸을 기댄 은율이 담담히 대답했다.

“사람들 때문에 민망해서 그랬습니다.”

“민망해?”

“그럼 민망하지 안 민망하겠습니까? 돈 없는 학생들이 몰려 있는 원룸촌에 으리으리한 연예인 밴이 있으면 당연히 수군거리지 않겠어요?”

“정말 그게 다야?”

“뭐가 더 있어야 합니까?”

진환이 약간 풀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싸늘한 공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까 그놈은 뭐야?”

“그놈?”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다가 기언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미간이 또다시 찌푸려졌다.

“그놈 아닙니다. 친구예요.”

“친구라고?”

진환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난 친구 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벌써 친구야?”

“놈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저에겐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진환은 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다. 그냥 친구도 아니라 ‘둘도 없는 친구’란다.

“그놈은 며칠이나 돼서 친구가 되었지? 나처럼 200일을 기다려서 친구가 된 건가? 아니면 그보다 더 짧아? 길어? 알려 줘. 진짜 궁금해서 그래.”

은율은 입을 다물고 진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친구를 자꾸만 ‘놈’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렸다.

기언은 과에서, 아니 대학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다. 비록 안경을 벗은 제 맨얼굴까지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과거의 교통사고와 은율의 집안 사정, PTSD, 하진과 지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왜 악착같이 과 수석을 고집하고 미친 듯이 자격증 공부를 하는지도 알고 있을 정도로, 깊다면 깊은 관계였다.

그런 기언을 나쁘게 말하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좋은 녀석이라서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친구가 됐습니다.”

“하….”

진환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은율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나한테만 그 기준이 까다로운 건지 모르겠는데.”

은율은 숨소리가 닿을 만한 그 거리에서, 그 맑은 눈동자로 진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폭풍처럼 흔들리는 그 눈동자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진환 씨.”

진환은 그의 붉은 입술이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 은율이 손을 올려 진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왜 이리 불안한 강아지 같습니까?”

“뭐?”

진환의 눈에서 요동치던 열기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누구든 친구가 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알려고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법이죠.”

입을 꾹 다문 진환에게 은율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잘 맞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알아서 친구가 될 겁니다. 전 이진환 씨와도 얼마 가지 않아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은율의 눈동자에 진환의 얼굴이 뚜렷이 담겼다. 두 눈동자가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더니 진환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친구…. 어렵네.”

“전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진환이 고개를 들고는 은율의 안경을 한 손으로 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은율의 귓가에 진환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나한텐 너무 어려워. 그러니까 제한 날짜 좀 줄여 주면 안 돼?”

낮은 목소리가 유혹하듯 귓가를 간질였다. 은율이 간지럼에 몸을 움츠리며 웃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뭘 믿고요?”

진환이 귓가에서 쿡쿡 웃었다.

“까다롭게 자꾸 그럴래?”

“평생 갈 친구 자리를 그리 쉽게 내줘서야 되겠습니까?”

진환이 흠칫하며 고개를 떼었다.

“평생 갈 친구?”

은율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만 친구 할 생각이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뭐, 기분 좋네.”

‘친구’보다도 ‘평생’이라는 단어에 더 기분이 좋다.

한편,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연우는 운전석에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웅크리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 못 들었어.’

연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망할 극한 직업…….’

누가 그랬던가. 연예인 매니저는 극한 직업이라고.

연우는 처음으로 그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  *  *

은율은 열쇠로 문을 여는 중에도 자꾸만 뒤를 힐끔거리며 머뭇거렸다.

“정말 들어오실 겁니까?”

은율의 등 뒤에 가까이 붙어 있던 진환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

은율은 달갑지 않은 얼굴로 결국 문을 열었다. 떼돈을 긁어 담는 대배우를 6평짜리 반지하 단칸방에 들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집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의 불부터 켰다. 어질러진 게 없는지 훑어보았지만, 평소에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니는 터라 딱히 치울 만한 것은 없었다. 치우려 해도 단칸방에서 뭘 얼마나 치우겠느냐마는.

은율은 신발을 벗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진환은 현관문을 닫고서 신발을 벗어 놓는 자그마한 공간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작은 방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이상했다. 이런 작은 단칸방이 왜 괜찮아 보이는 걸까.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벗어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던 진환이 대뜸 물었다.

“들어가도 되나?”

의외로 허락을 받아 본다. 생각지 못한 물음에 은율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오세요.”

진환이 그제야 값비싼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은율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고 생각하자, 뭔가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 같다.

은율은 메고 있던 가방을 방 한쪽에 내려놓고 진환에게 다가가 그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겉옷 주십시오. 구겨지면 안 되니 걸어 놓겠습니다.”

진환은 순순히 정장 재킷을 벗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몇 개 있지 않은 옷걸이 중 어깨라인이 둥그스름하게 되어 있는 정장용 옷걸이를 찾아내 진환의 재킷을 걸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스탠드형 옷걸이에,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정장 재킷이 떡하니 자리했다.

구겨진 곳이나 틀어진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핀 은율이, 멀뚱히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진환을 지나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요?”

“응, 부탁해.”

곧바로 대답하며 은율에게 다가갔다.

은율은 생수병을 꺼내 커피포트에 물을 채우고 그 아래 동그란 버튼을 눌렀다. 버튼에 푸른빛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은율이 찬장에서 아무 무늬 없는 흰색의 머그컵 두 잔을 꺼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약 20센티미터 너비의 투명 아크릴 상자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커피 티백과 스틱이 들어 있었다. 포장지만 봐도 쓰디쓸 것 같은 딥블랙커피부터 입에서 녹을 것처럼 달아 보이는 캐러멜 마키아토까지. 그런데 저 많은 것 중에 같은 종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마치 여기저기서 샘플을 얻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은율이 블랙커피 티백을 하나 꺼내고서 뒤를 돌아 아크릴 상자 내부를 보여 주었다.

“어떤 거로 드시겠습니까?”

여태껏 바짝 붙어 은율을 보고 있던 진환이 상자를 잠시 눈으로 훑었다. 그러더니 은율의 손에 끄트머리가 살짝 튀어나온 포장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이랑 같은 거.”

은율이 어떤 걸 꺼냈는지 보지도 못 했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진한 블랙이라고 언급한 은율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 같은 것을 찾아 꺼냈다.

머그컵에 티백을 걸어 놓고 방금 끓은 따끈한 물을 붓자, 진한 커피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진환에게 커피를 건네주고 자신도 한 손에 머그컵을 쥐었다. 뜯어낸 티백 포장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자, 진환이 은율에게 손을 내민다.

“줘.”

“아, 제가 버려도 되는데.”

확실히 쓰레기통은 진환의 위치에서 더 가까웠다. 내밀어진 진환의 큰 손에 포장지를 올려 주었다. 그것을 쥐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넣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진환은 스스럼없이 정장 바지의 포켓에 넣어 버렸다.

“그거 마음에 들었습니까? 몇 개 챙겨 드릴까요?”

“괜찮아. 이거면 돼. 당신 마셔.”

머그잔을 눈짓한 진환이 그대로 입가에 가져가서는 살짝 커피 맛을 보았다. 뜨끈하게 혀를 감싼 맛이 제법 마음에 든다.

은율은 그런 진환을 연신 힐끔거렸다. 유명 배우이니만큼 분명 집도 으리으리한 곳에 살 텐데, 이런 반지하방에 오고도 아무렇지 않게 있는 게 신기했다.

“집이 좀…… 볼품없죠?”

괜히 찔려서 물었다. 진환은 그런 은율을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좁긴 하지만 볼품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진환이 가만히 선 채로 좁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곳답고 좋아.”

장난스럽게 칭찬 맞냐고 물으니, 느낀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라고 한다.

문득 진환의 눈이 은율의 오른팔을 향했다.

“팔은 좀 어때?”

“토요일에 실밥 뜯으러 갔다 올 것 같습니다.”

그간 짬짬이 근처 병원을 찾아 소독을 하고 상태를 체크했다. 은율 본인의 회복력도 좋았지만, 꿰맸던 의사의 실력이 예상보다 출중했다. 새로 간 병원에선 그 덕분에 큰 흉터 없이 아물 거라고 말해 주었다.

진환이 놀란 눈으로 은율에게 한 발 다가섰다. 서로의 머그잔이 부딪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벌써 뜯어도 돼?”

은율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해서 그런지 회복력이 좋습니다. 다행히 차도가 좋아요.”

“다행이네. 병원 갈 때 같이 가.”

“괜찮습니다. 바쁘신 분이……!”

“같이, 가자고.”

진환의 압박 담은 말에 은율이 멈칫하더니 눈을 굴렸다.

“뭐……, 어차피 이번 주말 동안은 함께 있기로 했으니…….”

더 밀어내지 않고 알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진환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은율은 그 커다란 손길에 묻어난 애정에 민망한 듯 얼굴을 돌렸다.

“그보다 연우 씨도 들어오시라고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진환은 연우에게 차에서 대기하라고 말했다. 어딘지 불안한 눈을 하다가 한숨을 푹푹 내쉰 연우는 그들을 힘없이 배웅했었다. 은율은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진환이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상하게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왜 이리 늦게 받아.”

연우 성격상 전화가 가고 10초 안에는 재깍 받는데, 이번에는 그 서너 배가 걸렸다. 휴대폰 너머로 축 처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형. ……부디 정상적인 용건이길 바라요.

“정상적인 용건이야. 이제 그만 퇴근해.”

-……형, 제가 평소 같았으면 정말 기뻐하면서 퇴근했을 거거든요? 근데 왜 불안하죠?

“나야 모르지.”

오늘따라 연우 상태가 이상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퇴근할게요. 그럼 말씀하셨던 것처럼 전 월요일에 모시러 가면 되는 거죠?

“응. 그때 봐.”

-예. 부디 진도는…… 아니,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시고 하시던 거 계속하세요.

마지막에는 울먹이기까지 한다. 진짜 왜 이러나 싶었지만, 월요일에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시라고 하지, 왜 가라고 하셨어요?”

“그냥 둘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진환이 웃었다. 은율이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지금부터 캐릭터를 잡는 건가요?”

원래대로라면 내일 오전에 만나 캐릭터를 잡고 연기를 준비하기로 했었다.

“아, 뭐, 그럴까.”

생각지도 못했지만, 진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율이 생기 넘치는 눈으로 살짝 웃었다.

“사실 조금 기대하고 있었어요. 누군가와 함께 캐릭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생소하고 신기해서……! 아…….”

저도 모르게 약간 흥분해 버렸다. 진환이 눈웃음을 보이며 은율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선 함께 주방을 나섰다.

거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단칸방 바닥에 앉자, 은율이 얼른 접이식 상을 꺼내어 폈다. 그리고 그 위에 종이와 펜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성실한 모범생 티가 너무 나는데?”

“그렇습니까?”

은율이 히죽 웃으며 진환과 마주 앉았다. 그가 책상에 머그잔을 올려놓고 펜을 잡았다.

“뭐부터 하면 됩니까? 캐릭터 만드는 거.”

진환도 그처럼 머그잔을 올려놓고 책상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었다.

“그 전에,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예, 물어보십시오.”

“시력 나쁜 거 아니지? 오히려 좋은 쪽으로 보이는데.”

은율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하시네요. 양쪽 다 시력 2.0이고 안경은 도수 없는 보안경입니다.”

“왜 쓰고 다녀?”

“습관이라고 할까……. 어릴 때부터 쭉 써 왔던 거라서, 지금은 안 쓰면 불안할 정도로 허전해요.”

진환은 그의 안경을 조심히 벗겼다.

“꼭 이런 안경이어야 하나?”

안경을 벗기는 과정에서 앞머리가 콧등을 간질였다. 걸리적거려서 앞머리를 살짝 쓸어 올리니, 진환의 눈이 빛난다.

“다른 안경은 써 본 적이 없어서…….”

진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정장 재킷에서 선글라스를 빼 들었다. 그는 그것을 은율의 눈가에 살짝 대 보았다.

“안경을 좀 바꿔 봐도 괜찮겠어. 평상시에는 원래 쓰던 안경을 쓰고, 캐릭터 연기 중일 때만 다른 안경으로 바꾸지.”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 말고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은율은 그의 말에 저절로 관심이 갔다.

진환이 선글라스를 책상에 내려 두고 은율의 앞머리로 손을 뻗었다. 긴 앞머리를 한데 모아 2 대 8 가르마처럼 한쪽으로 많이 몰아 보기도 하고, 올백스타일로 깔끔하게 올려 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긴 ‘M’ 자 앞머리를 만들어 보고, 가운데로 가르마를 타서 좌우로 넘겨보기도 했다.

은율이 눈만 굴리다가 진환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요? 다 이상합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자꾸만 앞머리를 이리저리 바꾸니, 괜히 긴장되었다. 진환이 진지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전부 다 어울려서 고민 중이야. 뭘 해도 예쁘네.”

예상과 다른 대답에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저번에도 그러시던데, 건장한 남자한테 예쁘다가 뭡니까?”

“그럼 예쁜데 뭐라고 하지?”

“진짜 안과 소개해 드려야겠습니다. 아직 진료 시간일 텐데, 지금 갈까요?”

“가 봐야 정상이라고 나올 텐데.”

말로 티격태격하다가 진환이 실없이 픽 웃어 버렸다.

“헤어스타일은 나중으로 미루자. 캐릭터 성격에 맞춰 바꾸는 편이 낫겠어.”

그제야 은율의 머리카락을 놔주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주변인들 중에 되고 싶었던 사람이 있어?”

은율이 생각에 잠겼다. 되고 싶었던 사람이야 많고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눈앞의 진환처럼도 되고 싶었다.

“너무 많습니다.”

진환은 그 말에 은율의 자존감이 상당히 낮다는 것을 알았다. 주변엔 오히려 그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을 법도 한데.

“그럼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라고 처음 생각한 상대가 누구야?”

은율은 눈을 약간 내리깔며 대답했다.

“아버지……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시지?”

은율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말수가 굉장히 적고 거의 웃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도저히 반항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위압감이 넘치고 무뚝뚝하셨지만 알고 보면 저희를 위해 많은 걸 챙겨 주신, 좋은 분이셨어요.”

진환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색을 굳혔다.

“과거형이네.”

“……예. 8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진환이 안타까운 눈을 했다. 은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니 속이 쓰렸다.

“좋아.”

진환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카피하는 거야. 할 수 있겠어?”

은율이 눈을 굴리다 노트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섯 줄에 걸쳐 작성한 제 아버지의 성격이었다. 자신이 쓴 내용을 한 번 더 읽어 본 은율이 그것을 돌려 진환에게 보여 주었다. 진환은 적힌 내용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성격이 확실한 편이라 처음 잡는 캐릭터로는 나쁘지 않겠어.”

진환이 노트를 은율에게 돌려주며 그를 훑어보았다.

“성격에 맞추려면 사실 머리를 자르는 게 좋겠지만, 당장은 머리를 올리고 젤을 발라 고정하는 정도만 해도 될 거야. 안경은 각이 잡힌 검정 뿔테안경으로, 옷은 세미정장 스타일이 좋겠어. 피부는 하얀 편이니까 한 톤 정도 어둡게 하고, 그 외 액세서리는 시계 정도면 될 것 같네.”

진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꼼꼼히 필기한 은율이, 들고 있던 펜의 끝을 제 입가에 대고 누르며 고민했다.

“돈이…… 많이 들어가겠네요.”

안경, 세미정장, 일시적이라고는 하지만 피부톤을 바꿀 화장품이라든지, 태닝에 시계까지. 은율의 입장에선 돈 들 걱정에 심란할 만도 했다.

“내일 백화점에 들르자. 시간이 없으니 바로 맞춰 봐야지.”

“음……. 그냥 캐주얼한 의상으론…… 안 되겠습니까?”

은율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환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하는 거 지금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야지. 돈이라면 걱정 마.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어떻게 그래요?”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진환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캐릭터를 잡으면 겉모습 세팅은 나에게 맡긴다고 하지 않았나? 난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싶을 뿐이야. 은율 씨는 그 외견에 맞게끔 제대로 캐릭터를 연기해 보라고.”

“하지만…!”

“그만. 더 이상은 금지.”

진환이 눈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은율은 머뭇거리다 결국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나중에 갚을 테니까 영수증이나 잘 챙겨 주세요.”

“그래. 이 업계에 은율 씨 본인의 모습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때 갚아 줘.”

은율은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어 씁쓸히 웃었다.

문득 진동 소리가 들렸다. 은율은 그것이 제 휴대폰의 진동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휴대폰 액정 화면에는 하진의 이름이 떠 있었다. 눈으로 진환에게 양해를 구한 은율이 전화를 받았다.

-형!

받자마자 들리는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휴대폰을 귀에서 약간 떨어뜨렸다.

-지금 집이야?

하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응, 집에 와 있어.”

-혼자?

하진이 물어왔다. 아무래도 기언이 연락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하진에게 꼭 연락을 하더니 오늘도 그랬나 보다.

은율이 진환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손님 와 계셔. 형 알바 하는 곳 관계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진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팔짱을 척 끼고서 귀를 쫑긋 세웠다.

-멀쩡한 사람이야? 집적대진 않아? 막 스킨십 한다거나 친한 척한다거나, 그런 건 안 해?

하진의 말에 전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긴 애매했지만, 애써 말을 골랐다.

“그런 분 아니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 사람은 언제 가?

“음…….”

은율이 전화를 좀 떨어뜨리고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오늘 언제쯤 가실 겁니까?”

“가야 해?”

진환이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 은율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지금은 아니어도 일이 다 끝나면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왜?”

“왜라니, 어디서 주무시려고요.”

진환이 오른손 검지로 아래쪽을 향해 보였다. 설마하니 책상에서 자겠다는 건 아니겠고.

“이 좁은 곳에서 말입니까?”

하진이 매주 와서 자고 갔으니 이불 여분은 있었다. 베개도 혹시 몰라 새로 사 둔 게 있으니 막상 재운다면 못 재울 것도 없다. 하지만 단칸방과는 도저히 연이 없을 것 같은 대배우가 여기서 자겠다니. 그것은 은율이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잠은 돌아가서 주무십시오. 몇 시쯤 출발하실 겁니까?”

“안 간다니까.”

“아니, 대체 왜요?”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지만 진환은 그저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형! 뭔데!

휴대폰 너머로 하진이 큰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은율은 일단 그와 통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냐, 아무것도.”

-나 지금 형네 집 가고 있어.

은율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로? 왜?”

-기언이 형이 큰일은 아닌 것 같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역시 걱정돼. 그 형, 감 하난 장난 아니게 좋잖아.

“아니, 정말 기언이가 호들갑 떤 거야.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럼 내가 가도 별일 없겠네. 그렇지?

은율이 당황했다.

“그러니까…….”

진환이 한 손을 책상에 짚어 몸을 앞으로 쭉 빼고는 휴대폰을 잡고 있는 은율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러고선 손에 힘을 주어 귀에서 휴대폰째로 멀리 떨어뜨렸다. 휴대폰을 쥔 손이 잡혀 옆으로 팔을 쭉 뻗은 모습이 돼 버린 은율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누구?”

진환이 딱딱하게 묻자 곁눈질로 휴대폰을 보며 대답했다.

“동생입니다. 지금 집으로 오고 있다네요.”

“동생은 어디까지 알아?”

은율의 성격상 모든 걸 동생에게 털어놓았다고 보긴 어려웠다. 다른 건 몰라도 촬영에 대해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아예 모릅니다. 제가 스턴트 일을 하는 것까지도요.”

진환이 은율의 불안해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이름 있는 배우 이진환이 뜬금없이 반지하 단칸방에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그 방의 주인은 공부밖에 모르는 범생이다. 접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어떻게 하고 싶어? 알릴 거야, 말 거야?”

얼굴이 알려지면 자칫 과거가 파헤쳐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연기를 주저했던 은율이다. 그렇다면 그 동생도 극구 반대하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은율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머리를 굴리는 게 진환에게까지 느껴졌다.

진환은 은율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은율 씨 동생?”

-……당신 뭐야.

목소리가 상당히 위협적이다.

진환은 하진의 목소리에서 경계하는 사냥개의 모습을 떠올렸다.

“은율 씨를 키워 주고 싶은 사람.”

모호한 말에 하진이 입을 다물었다. 곧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형한테 수작 부렸다간 이빨 두세 개쯤 나가는 건 각오해야 할 거야.

“빨리 안 오면 그런 것쯤은 감수하게 될지도 모르지.”

일부러 하진을 자극하며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또 전화가 올까 싶어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동생한테 연기하게 되었다고 솔직히 말해. 지금의 당신 모습을 본다면 절대 반대하지 않을 거야. 정말 형을 위하는 동생이라면 말이지.”

말하는 걸 봐서는 형을 위하다 못해 끔찍이도 아끼는 동생이겠지. 형제 없이 홀로 큰 독자(獨子) 이진환에겐 새롭기만 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야기할 테니 당신은 대충 맞춰 주기만 해.”

진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에, 은율은 긴장했던 몸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는 다시 긴장했다. 현관문의 열쇠 구멍으로 열쇠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싶더니, 곧바로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예상대로 하진이었다. 학교에서 바로 온 것인지, 그의 어깨에는 검정 숄더백이 걸려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땀이 보였다. 은율이 얼른 일어나 하진에게 다가갔다.

“뛰어왔어? 천천히 오지, 왜.”

하진은 대답하지 않고 은율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가 은율의 맨얼굴을 보며 그의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려 주었다.

“이러고 있었어?”

화를 눌러 참는 목소리였다. 은율이 입을 달싹이려 할 때, 진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에게 다가갔다. 하진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은율을 제 등 뒤에 숨겼다. 그러다 제게 다가선 남자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치떴다.

“이진환?”

아무리 연예인에 관심 없는 하진이라지만, 길가에 붙은 광고 포스터나 TV 광고를 통해 진환의 위세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천하의 이진환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큰 혼란을 느꼈다.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배우 이진환 같은데, 맞아요?”

“맞아. 그 이진환.”

혼란 섞인 적대적인 눈초리에도 진환은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뭔가를 찾듯이 하진의 전체 모습을 구석구석 뜯어볼 뿐.

“닮은 데가 없네.”

체격, 외모, 성격, 분위기, 뭐 하나 같은 게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하진이 움찔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배우 이진환이 왜 이런 곳에 있어요?”

“하진아, 그게…….”

하진의 질문에 은율이 머뭇거리기만 하고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진환이 입을 열었다.

“서은율 씨가 연기에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나?”

“뭐…라고요?”

하진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려 제 뒤에 선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하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은율 씨의 재능을 보고 유명 감독님께서 단편영화 출연을 제의하셨어. 그걸 위해 내가 은율 씨를 도와주고자 왔지.”

“무슨 소리예요? 형, 이 사람 말이 맞아?”

하진이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은율에게 대답을 요청했다. 은율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 말이 맞아.”

“아니, 잠깐만. 형, 혹시 뭔가 약점을 잡혀서 강제로 하게 되었다든지, 속았다든지 그런 건 아냐?”

“아냐. 날 뭐로 보는 거야, 넌.”

은율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서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내가…… 연기를 해 보고 싶어서 하기로 한 거야.”

하진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아온 제 형이 갑자기 연기를 하고 싶단다. 여태껏 함께 있으면서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은율이 공부 이외의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자신도, 지희도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뜬금없이, 그것도 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배우 이진환에게 직접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진은 진환의 얼굴을 노려보다 은율에게 말했다.

“형, 나 이 사람하고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고 올게.”

“여기서 하면 안 돼?”

하진이 몸을 돌려 은율에게 웃어 주었다.

“금방 다녀올게.”

눈치를 살피는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하진은 갑자기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어느새 바뀌어 있다.

‘이것 봐라?’

하진은 진환의 반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불안해하는 은율을 방에 두고, 하진과 진환은 원룸 밖으로 나왔다.

“제가 TV를 잘 안 봐도 그쪽이 얼마나 유명한 배우인지 정도는 알아요. 그런 유명 배우가 뜬금없이 일반인 연기 도와주려고 나타났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하진이 성난 얼굴로 물었다. 그 모습을 본 진환은, 그가 은율 앞에서 나름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사실이야. 은율 씨가 엑스트라 알바를 하던 곳이 나와 그 감독님이 계신 촬영장이었고, 우린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고 정극 연기를 제의했지.”

진환은 일부러 ‘스턴트 액션’이 아닌 ‘엑스트라 알바’로 말을 바꿨다.

하진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단기알바 얘기하던 게 촬영장 엑스트라 알바였던 건가.

“그래서 그쪽이 연기 지도를 하러 이 집까지 찾아왔다는 겁니까?”

“난 연기에 재능 있는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거든.”

“좋아한다는 말이 참 거슬리네요. 형이 당신들 제의를 정말 본의로 받아들였어요? 강제적인, 그런 거 아니고?”

“은율 씨가 자기 의지로 선택한 거야.”

하진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은율이 선택한 거라면 자신이 터치할 수 없고, 터치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그 은율이 하고 싶다고 선택한 일이다. 그런 거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줄 생각이고, 지희 역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중 앞에 드러나야 하는 배우의 일이라면 쉽사리 응원할 수가 없었다.

“난 형이 선택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전력으로 밀어주고 싶어요. 근데…… 얼굴이 드러나는 일은 위험해요.”

“은율 씨가 자세히 말해 주지 않으니 나도 묻고 싶어.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얼굴이 드러나는 걸 꺼리는 거지? 은율 씨는 과거의 일을 사람들이 파헤치는 게 두렵다고 하던데.”

하진은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진환이 하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팔짱을 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의 일은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끔 수를 쓸 생각이야.”

“그래도 드러난다면요?”

“드러난 사실을 다른 사건으로 묻어 버리고, 드러낸 이들은 모두 매장시켜 주지.”

순간 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제 입을 한 손으로 막고는 몇 차례 더 웃음을 터뜨렸다. 진환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비웃는 것과는 느낌이 다른 웃음이었다. 이상한 기대감이 담긴, 그런 웃음소리.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어요?”

하진이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언론사의 메인 기자들과는 좀 깊은 연을 가지고 있지. 경찰 쪽에도.”

“믿어도 될까요?”

진환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진은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사냥개와 같은 얼굴 대신, 친근한 골든 리트리버 같은 얼굴로 변해 버렸다.

“좋아요. 그럼 그쪽에게 질문을 하나 하죠.”

하진이 진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지켜 줄 자신은 있어요?”

“뭐?”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환이 짧게 되물었다. 하진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기 한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그쪽에게 모두 밝힐 순 없지만, 지금 형을 노리는 자들이 있어요.”

하진의 머릿속에 K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진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처음 본 K의 얼굴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노리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알고야 있지만 일반인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진환의 깊은 눈동자가 하진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내가 그쪽을 잘 몰라서 온전히 다 믿을 수는 없어요. 우리에겐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섣불리 털어놓을 수도 없고.”

진환이 하진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상관없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중요한 건 내가 은율 씨와 평생 연기하고 싶을 만큼 그의 연기를 좋아한다는 거야.”

하진이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피식 웃는다.

“뭐, 좋아요. 방금 했던 이야기는 형도 모르는 이야기예요. 형은 그저 사람들이 과거를 파헤치다가 자기가 겪었던 사고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것뿐이에요. 그로 인해 나와 여동생이 그때를 떠올리고 슬퍼할까 봐.”

은율의 얼굴을 떠올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사실 나나 여동생은 그 과거 일보다 지금의 형이 행복해지는 게 훨씬 중요해요. 형은 우리를 키운답시고 자기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게 뭔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자라 온 사람이거든요.”

하진이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형이 하고 싶은 걸 찾았는데,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막을 수는 없죠.”

하진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런 톱스타가 지켜 주겠다는데, 더할 나위 없네요.”

진환은 가슴이 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별것 아닌 말이지만 뭔가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해 주는 건 왜지?”

하진이 바지 주머니에 제 양손을 꽂아 넣으며 익살스러운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톱배우 이진환이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진 않을 테니까요.”

“물론.”

하지만 하진에겐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쪽이 형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겠어요.”

“……어떻게?”

“눈빛이 나와 같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하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의미심장한 눈빛을 할 뿐이었다.

원룸 안으로 들어가려고 걸음을 옮기던 하진이 갑자기 우뚝 섰다. 그러더니 눈을 부라리며 몸을 돌려 진환에게 경고했다.

“그래도 너무 앞서가지 말아요. 난 아직 이진환 씨, 당신을 ‘그쪽’으로 허락한 건 아니니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형하고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건 내가 아직 용납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난 은율 씨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것뿐인데. 뭔가 오해하는 거 아닌가?”

진환이 이상한 눈으로 물어왔다. 하진이 입을 달싹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 누구 좋아해 본 적은 있어요?”

“연애 쪽을 말하는 거라면 없는데.”

진환의 흔들림 없는 말에 하진이 제 이마를 짚었다.

방에 돌아가자, 은율은 아까처럼 서 있는 상태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진과 진환이 멀쩡한 얼굴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주먹 쓰진 않았구나.”

“당연하지. 아무리 나라도 배우 얼굴은 안 치거든?”

“아니, 얼굴은 안 때려도 갈비뼈 하나 부러뜨리고 오진 않을까 싶었지.”

밝은 얼굴로 말을 참 살벌하게 한다.

은율이 하진을 지나쳐 진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진환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으며 걱정했다.

“어디 안 다친 거 맞습니까?”

“안 때렸다니까!”

하진이 억울한 마음에 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진환의 몸을 더듬는 은율의 손을 떼어 떨어뜨려 놓는다.

“이 사람 멀쩡하니까 가서 앉아 봐. 그쪽도 그렇게 서서 멍 때리지 말고 앉아 봐요.”

은율이 걱정했다고 그새 미소가 걸려 있다.

하진은 은율과 함께 앉은 채 진환에게 마주 앉을 것을 요구했다.

“형,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연기 하고 싶으면 해. 나도 응원할게.”

“어……?”

예상보다 반발이 너무 없다. 은율이 하진과 진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신,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 봐. 우리들 신경 쓰지 말고.”

그가 말하는 ‘우리들’이란 게 하진 본인과 지희를 뜻하는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진이 은율의 손을 꼭 잡으며 당부했다.

“형이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해 준 거, 너무 고맙고 좋아. 그러니 나도 형을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싶어. 형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우린 반대하지 않을 거야.”

은율이 흔들리는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부드러운 얼굴로 은율의 볼을 쓰다듬었다.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형 하고 싶은 대로 해.”

은율은 뭔가 울컥하는 기분에 눈시울을 붉혔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격려받고 응원받는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진이 은율을 끌어 제 품에 안았다. 그러고선 그의 등을 쓸어 준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 주고. 알았지?”

“……응.”

은율은 하진의 따뜻한 말을 들으며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이 고개를 돌려 못마땅한 표정의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씩 웃었다.

“저 사람이 못되게 굴면 얘기해 줘. 동생의 권리로 욕을 한 사발 해 줄게.”

“그럴게.”

은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떼었다.

“그리고 이진환 씨. 내가 아직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그쪽 믿고 형을 맡겨 볼게요. 형한테 무슨 일 생기면 진짜 찾아가서 깽판 쳐 버릴 테니까 각오해요.”

“말하지 않아도 은율 씨 서포트는 완벽히 해낼 셈이야. 걱정할 것 없어.”

진환이 당당하게 대답하는 걸 보며 하진이 은율의 양쪽 귀를 손으로 막았다. 그러더니 빠르고 조용하게 말을 뱉었다.

“당연하겠지만, 형이 아무리 좋아도 원하지 않는 스킨십은 하지 마요. 무엇보다 그쪽하고 이상하게 소문나면 그거야말로 난리가 나겠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스캔들을 얘기하는 거라고 이해한 진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가 막혀 답답해하던 은율이 제 귀를 덮은 하진의 손을 어렵사리 떼어 냈다.

“무슨 말을 한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형. 그냥 사소한 당부와 경고.”

하진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씩 웃었다. 은율이 수상해서 뭔가 캐려고 입을 열려는데,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말을 돌렸다.

“그보다 형, 저녁은 먹었어?”

“아니, 먹어야지.”

“또 인스턴트?”

“있는 게 그것뿐인걸…….”

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내부를 들여다본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든다.

“연우야, 멀리 안 갔지? 장 좀 봐 와야겠다.”

은율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요리하시게요?”

마트에서 사 와야 할 목록을 간단히 불러주고서 전화를 끊은 진환이 은율을 돌아보았다.

“웬만한 음식이라면 할 줄 알아. 작년에 한식 셰프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찍었던 적이 있거든.”

당시에 직접 요리를 배워, 신들린 실력으로 화려한 요리를 선보였다. 그 장면이 그대로 방송을 타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요리 실력은 웬만한 요리사들도 칭찬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하진이 눈을 빛냈다.

“손잡는 것까지는 용서해 줄게요. 대신 형한테 좋은 요리 좀 많이 해 줘요.”

“안는 것과 만지는 건?”

하진의 말문이 덜컥 막혔다. 진환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해 보였다.

“그건…… 형한테 허락받고 해야죠. 아니, 근데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요?”

“그런가?”

여전히 같은 표정이다. 하진 입장에서는 이 사람의 당당함은 대체 뭔가 싶기도 했다.

“저기, 둘의 기본적인 관계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스킨십을 따지는 건 순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태연하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하진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순간적으로 은율이 위험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했다. 그런 그의 눈에 동그랗게 눈을 뜬 은율이 보였다. 그는 자신들이 나눈 대화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아, 그러니까 요즘 막 가슴 뛰는 게 없다니까! 100일 넘어가니까 남친도 뭔가 시들해진 것 같고.”

“잘생긴 남친 둬서 사방팔방 자랑할 때는 언제고. 복에 겨운 소리 하는 거 아냐, 지지배야.”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두 여고생이 스크린도어에 삐딱하게 몸을 댄 채 수다를 떨었다.

“막말로 잘생기기야 무지 잘생겼지. 근데 그게 다란 말이야. 보다 보니까 푼수 같은 면도 보이고, 애 같고, 생각보다 좀 깨.”

“우리 또래 남자애들은 다 어린 느낌이지, 뭐.”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역시 분위기가 중요한 것 같아. 뭐랄까, 어른의 느낌? 그런 게 풍겼으면 좋겠고, 너무 웃어 대거나 실없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이, 너무 바란다.”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방송 소리와 지하철 운행 소리 때문에 소음이 생기자, 두 여학생은 더 큰 소리로 수다를 나누었다.

“역시 연상이 좋은 것 같아. 잘생기고, 진지하고, 어른스럽고, 뭔가 카리스마 있으면서 섹시하고, 피부도 좋고, 쌔끈하고…….”

“얼씨구. 바랄 걸 바라라. 그런 사람은 연예인 중에서 찾아도 몇 명 안 되겠다.”

“있을 수도 있지!”

볼멘소리로 툴툴거리는 사이, 지하철이 도착했다. 두 여학생은 스크린도어에서 몸을 떼고 탑승을 준비했다. 곧 문이 열리며, 여학생들이 지하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대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녀들의 입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눈은 이채를 띠었다. 그 시선 끝에는, 건너편 문가에 허리를 곧게 편 상태로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전문가의 솜씨로 깔끔하게 세팅한 남자의 얼굴은 지하철 내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다지 하얀 피부가 아님에도 점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은 뭇 여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했다.

거기다가 깐깐해 보일 수 있는 검정 뿔테안경이 저리도 잘 어울리는 남자라면 수많은 여성들의 이상형이 ‘안경 낀 남자’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굳게 다문 붉은 입술도 제법 색스럽다.

화보처럼 멋들어지게 팔짱을 꼬고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늘씬한 몸매를 세우고 있는 게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 와중에 늘씬하고 긴 다리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끈다.

핏감 좋게 달라붙은 진회색 세미정장 차림은 그의 실루엣을 부각하며 섹시함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재킷 안, 검정 V넥 셔츠의 파임 부분에 드러난 도드라진 선명한 쇄골이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놓게 만들었다.

두 여학생은 서로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사람들에게 밀린 척 그 남자 근처로 다가갔다. 문가와 좌석 사이의 공간에 밀착해 선 두 여학생이 말없이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진짜 연예인이나 모델이 아닐까 싶은 외모였다. 지하철 안에 들어오던 사람들도, 좌석에 앉은 사람들도 저마다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휴대폰으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도 보였다.

남자는 그런 시선들을 하등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두 여학생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후다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가, 두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휴대폰을 든 채 숨을 멈추고 말았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은 눈동자에 두 여학생이 담겼다. 무심하면서도 굉장한 압박감을 가진 시선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두 여학생은 터질 듯 얼굴을 붉힌 채 두근대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저… 사,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나요?”

여학생 하나가 침을 꼴깍 삼키며 용기 내어 물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여학생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대며 얼른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휴대폰에 담긴 사진을 보며 남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남자는 그저 그녀들을 힐끔 보았을 뿐, 말없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그가 검은 뿔테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켜올렸다. 그 모습마저 영화 속 한 장면 같아, 두 여학생은 그저 넋을 놓았다.

두 여학생이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야, 계 탔다. 대박!”

“이게 무슨 일이라냐. 너 무슨 예언자냐? 노스트라 뭐시기야?”

“그랬으면 좋겠다. 아, 나 진짜 내 남친이 순식간에 오징어처럼 보일 줄은 몰랐어.”

“야야, 사진 봐 봐.”

두 여학생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채 자신들이 찍은 사진을 공유했다. 같은 방향에서 비슷한 각도로 찍은 사진이라 실상 다를 게 별로 없었다.

“야야, 네 걸로 나 보내 줘. 그게 눈이 좀 더 많이 나왔다.”

“그럼 너도 보내 줘. 네 건 더 길게 나왔네.”

“콜. 메시지로 보내 줘.”

두 여학생이 소곤거렸다.

“아, 망했다. 습관적으로 단체 메시지방에 올렸어…….”

“야! 아, 진짜!”

그때, 지하철이 한 번 크게 덜컹거렸다. 한 여학생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이대로 넘어지면 볼썽사납게 자빠질 것 같은 예감에 망연자실한 그때,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팔이 있었다. 여학생들의 심장을 쥐고 흔들던 그 남자가 여학생의 허리를 붙잡아 지탱해 주며 물어왔다.

“괜찮아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 어어…….”

여학생은 얼떨떨한 얼굴로 비틀거리다 남자의 가슴팍에 손을 대었다.

‘헛, 대박, 근육도 있어!’

여학생이 침을 꼴깍 삼키며 홍당무 같은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리 가까이 붙어서 보니 머리가 하나 더 위에 있었다.

180정도 되려나. 어쩜 이리 이상적인 비율을 갖고 있지.

“고, 고맙습니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놔주었다. 그럼에도 여학생은 어버버하면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여학생이 ‘미쳤어’를 연발하며 그녀의 팔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남자는 그녀에게 완전히 가로막힌 상태로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멍한 상태의 여학생이 조금 떨어지고, 곧 지하철 문이 열렸다. 남자는 은색의 고급 시계를 찬 왼손으로 조금 전 여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지하철문을 빠져나갔다.

“와…….”

지하철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도 싱그럽고 화사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퀴퀴하기만 했다.

“사람 하나가 공기를 바꾸네. 대박.”

“부러운 지지배. 너 일부러 자빠지려고 했지?”

“아니거든! 야, 근데 진짜 대박. 근육도 있어.”

“미친. 대체 어느 동네 천상계 출신이야?!”

여학생들이 들뜬 목소리로 흥분한 그때, 두 사람의 휴대폰이 연달아 소리를 냈다.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메시지 알림음이 여러 번 울려 퍼지자, 두 여학생은 얼른 자신들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두 사람을 포함, 반 전체가 참여 중인 41명의 단체 메시지방에서 제때 읽기 힘들 정도로 많은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곧 메시지방의 이들이 예의 남자의 사진을 인터넷으로 퍼다 나르기 시작했다.

*  *  *

은율은 처음, 낯선 자신의 모습에 잔뜩 긴장했다. 상당히 많은 변화를 거치긴 했지만, 그래도 긴장을 안 할 순 없었다.

하진이 찾아온 그날, 한사코 자고 가겠다는 진환을 어르고 달래고 나름 협박(?)도 해서 자택으로 돌려보내 놓고, 은율은 하진과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진은 형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기쁘다며, 그날 밤 내내 자신을 붙잡고 놓질 않았다. 그것은 잠이 들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진이 이렇게 좋아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더 기뻤다.

다만 하진은 그렇게 기뻐하는 와중에도 신신당부를 했다. 비가 올 것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가지 말라고.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진환에게는 그의 PTSD에 대해 말해 두라 일렀다.

“얘기…… 해야겠지?”

남에게 자신의 치부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다. 그로 인해 진환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걱정도 되었지만, 하진은 그런 그를 격려했다. 그 사람이라면 은율을 더 챙겨 주면 챙겨 줬지, 이상하게 볼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워낙 사람 파악하는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힌 동생인지라, 하진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다음 날, 하진은 학교에서 급하게 왔던 거라 다시 돌아가 봐야 한다고 했다. 웬일로 갔다가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기에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붙잡아 추궁하니, 곤란한 얼굴을 하며 이모를 만나야 한다고 말해 왔다. 은율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동생들이 외가 쪽 사람들과 만나는 것만큼은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하진을 보내고, 은율은 자신을 데리러 온 진환과 만났다. 저번과는 다른 디자인의 흰색 외제 차를 보며 새삼 그가 부자구나 싶었다.

진환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예정대로 백화점을 간 것이 아니라, 으리으리한 호텔로 가는 것이었다. 은율도 호텔 이름을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 국내 최대 규모의 5성급 호텔, 그것도 스위트룸이라니.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점은, 스위트룸 안에 있는 커다란 침대 위에 갖가지 물품이 전시되듯 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슬림핏을 가진 고급 슈트, 부드러운 질감의 브이넥 셔츠, 영롱한 빛을 보이는 명품 시계, 값비싼 소가죽 벨트, 세미정장에 어울리는 가죽 로퍼, 약간 깎임이 뭉툭한 사각 뿔테안경까지.

놀란 은율에게 진환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백화점에서 이것들을 모두 보고 고르러 다니다 보면 싫어도 사람들 눈에 띄게 될 거고, 원래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돌아다닐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이다.

사실 백화점 VVIP인 진환이 백화점에 요청만 한다면 블라인드 쇼핑이 가능했지만, 그 와중에 은율의 맨얼굴과 옷 갈아입는 모습을 다른 직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호텔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백화점 VVIP가 뭔지도 모르는 은율은, 그저 진환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하고 말았다.

진환은 은율이 물품들을 착용해 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로션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바르고 난 후 며칠간 피부를 한 톤 정도 어둡게 만들어 주는 태닝 로션이었다. 바르고서 샤워를 해도, 땀이 나도 지워지지 않으며 며칠에 걸쳐 점점 연해지다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오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물론 곧바로 지울 수 있는 특수한 클렌징크림 역시 준비해 두었다.

은율은 옷 밖으로 드러나는 얼굴과 목 근처, 손 정도만 바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진환은 자연스러움을 위해 전신을 다 발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율은 로션을 먼저 바르기 위해 그 사용법 부분을 꼼꼼히 읽어 보고서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우선은 샤워를 하고서 물기를 모두 닦아 낸 뒤에 바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진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은율은 스스럼이 없었다. 옷을 다 벗고 샤워실에 들어간 은율은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준비된 타월로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닦았다. 욕실의 커다란 거울 앞에 서니, 그의 전신이 적나라하게 다 비쳤다. 진환은 그 모습을 샤워실 입구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은율은 로션을 적절히 짜서 목부터 가슴, 갈비뼈, 복부, 그리고 그 아래로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상당히 선정적이었다. 몸을 훑어 내리는 손놀림에, 진환이 입구에서 등을 떼었다. 그가 잠시 샤워실을 나서더니, 손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은율에게 다가선 진환이 그가 쓰고 있는 태닝 로션과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제 손에 쭉 짰다. 진환이 은율의 뒤에 서서 태연하게 웃었다.

“등은 손이 안 닿잖아.”

맞는 말이다. 은율은 거울에 비친 그에게 마주 웃어 주며 고맙다고 말했다. 진환이 은율의 미끈한 목덜미에 시선을 두고는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진환은 제 손에 묻은 크림을 양손에 비벼 넓게 묻히고는 은율의 목에 조심히 손을 대었다. 낯설고 차가운 손길에 은율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진환은 곧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몸에 크림을 발랐다.

목 뒤에서부터 시작한 손길은 은율의 어깨를 어루만지듯 훑으며, 그대로 도드라진 어깨뼈로 내려갔다. 탄탄하지만 부드러운 살결이 진환의 손에 그대로 느껴졌다. 살살 달래듯, 그러다 안마라도 하듯 힘을 주기도 하며 그의 등에 꼼꼼히 크림을 발라 나갔다.

척추뼈를 따라 일렬로 내려온 손에는 크림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보다 크림을 좀 더 듬뿍 짜서 은율의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크림의 차가움에 은율이 한차례 더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살집 없이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그 허리는, 그 탄탄함 때문인지 자꾸만 손이 갔다.

허리에서 내려온 손이 그의 골반 라인을 주무르듯 매만졌고, 그 손은 이내 탐스러운 엉덩이의 시작점에 닿았다.

그런 진환의 손목을, 은율이 잡아챘다. 그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만 뒤로 돌려 진환과 눈을 맞췄다.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목소리에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은율이 붉어진 얼굴로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은율이 저런 얼굴로 부끄러움을 표현하다니, 묘한 기분이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진환은 애당초 그의 손이 잘 닿지 않는 등에 꼼꼼히 크림을 발라 주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물러났다.

눈을 들어 은율이 비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은율의 뒤에 서 있는 자신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약간 상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울을 통해 은율을 바라보던 진환이 흠칫 놀랐다. 크림은 은율의 허리까지 깔끔하게 발려 있었는데, 그 아래는 하얗기 그지없었다. 그 대비가 참으로 색정적이었다.

진환은 문득 은율의 은밀한 곳에 시선이 가는 자신에게 의문을 느꼈다. 남자의 그곳 따위는 징그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연스럽게 그곳에 시선을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은율은 이제 진환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손에 크림을 짜낸 은율의 손이 사타구니로 향하려는 찰나, 진환이 얼굴을 굳히며 몸을 돌렸다. 그는 곧바로 샤워실을 나섰다.

얼굴을 포함해 전신에 빈틈없이 크림을 바른 은율은 용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바르고 난 후 5분 정도가 지나면 피부에 자연스레 흡수되어 다른 곳에 묻어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5분을 얌전히 기다렸다가 샤워실 세면대에 비치된 휴지를 한 장 뽑아 제 피부에 꾹 눌러 보았다. 티슈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은율은 그 신기함에 약간 들뜬 기분이 되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얗기만 하던 피부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평범한 톤이 되어 있었다. 이 피부색이 평생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샤워실을 나섰다.

샤워실을 나서서 옷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는데, 진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창가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얼핏 ‘연우’라는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은율은 그가 매니저와 일 관계로 통화 중인가 싶어,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방에 들어갔다.

은율은 벗어 둔 자신의 속옷을 챙겨 입고서 준비된 세미정장을 하나하나 갖춰 입었다.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맞춤옷처럼 딱 맞았다. 사실 그의 몸에 맞춰 수선을 한다면 더 좋은 핏이 나왔을 테지만, 은율은 지금의 핏으로도 굉장히 만족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방에 비치된 전신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쓸어 올리고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니, 제법 남자다워 보여 기분이 좋았다. 피부색과 의상만으로도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앞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동그란 안경을 쓴 것만으로도 평소와 다른 느낌이 되는 걸 어릴 때부터 쭉 겪어 왔으니, 이런 변화 조금 알 만했다.

생각보다 진환이 들어오는 게 늦어지자, 은율은 방문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전화를 끊은 상태였지만,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은율 쪽에서는 그의 등이 보이는 상태였기에, 그가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은율은 그가 꽤 심각해 보여서 말을 거는 것을 포기했다.

진환이 침실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약 10분가량이 지나서였다. 그때는 마침 은율이 머리에 젤을 발라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약간 굳은 얼굴의 진환이 은율의 손에서 꼬리빗을 뺏어 들고 직접 머리를 세팅해 주기 시작했다. 확실히 은율의 손길보다는 능숙했고, 잡아 주는 모양 또한 세련되었다. 미용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세팅 능력에, 은율이 순순히 감탄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 있는 은율에게 진환이 직접 뿔테안경을 씌워 주었다. 안경을 쓰고 나니, 외모 출중한 호스트 같던 느낌이 단박에 변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단정하고 위압감 있는 청년의 모습이다. 제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본 은율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진환을 돌아보았다.

“어때요?”

“예뻐.”

“어딜 봐도 남자다운데 예뻐가 뭐예요, 예뻐가.”

“정말 예뻐.”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말에, 은율이 풋 하고 웃어 버렸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다.

진환은 진지한 눈으로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는 은율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내가 미친 건가.”

“뭐라고요?”

“아니, 은율 씨 예쁘다고.”

“그러니까 예쁜 게 아니라니까요.”

은율이 장난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그걸 본 진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다른 사람들한텐 하지 마.”

“뭘요?”

“애교 떠는 거.”

“……한 대 쳐도 됩니까? 애교가 뭐요?”

“아니, 못 들은 거로 해.”

진환이 자연스럽게 명치에 손을 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은율은 또 한 번 웃어 버렸다.

진환은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은율의 손을 끌어 침대에 앉혔다. 자신도 그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 호텔을 나간 순간부터 ‘이유건’이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은율의 아버지 이름인 ‘유건’에 진환의 성씨를 붙인 이름이었다. 그의 아버지 서유건은 아직까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사진까지 올라와 있는 전(前) 특전사령관이었다. 성까지 같은 걸 쓰기엔 위험한 감이 있었다.

은율과 진환은 자기들이 잡은 ‘이유건’ 캐릭터의 이미지와 성격, 행동거지, 말투, 스타일, 현 직업 등, 다양한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은율은 그렇게 자신의 머릿속에 이유건을 완벽히 집어넣었다.

진환은 호텔 밖을 향하는 와중에도 선글라스 안에서 은율을 힐끔거렸다. 은율도 긴장이 되는지, 연신 심호흡을 해 댔다. 진환은 호텔을 나서면 격려 차원에서 어깨라도 두드려 줘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호텔 정문을 나선 직후, 진환은 제 옆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키는 분명히 자신이 더 크건만, 마치 자신보다 훨씬 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위압감뿐만 아니라, 그 무표정한 얼굴과 무심하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눈. 그 모두가 진환의 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듯하게 선 허리는 마른 몸임에도 그가 절대 연약한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고, 절도 있는 걸음걸이는 고위층에서 오랜 훈련을 받은 것 같은 기품이 느껴졌다.

은율이 앞서 걷다가 몸을 살짝 돌려 진환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진환은 자신이 심장이 있는 제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벽히 ‘이유건’이 된 은율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신의 뿔테안경을 추켜올렸다. 그에 맞춰 진환의 심장이 쿵- 쿵- 거대한 문을 두드리듯, 연달아 꿈틀대었다.

진환은 은율을 차에 태우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연신 그를 힐끔거렸다. 은율은 그의 시선을 알아챘지만, 관심 없는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

애당초 유건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태연함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 기본 성정은 말수가 굉장히 적었고, 무뚝뚝했다. 은율은 자신이 분한 ‘이유건’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굳이 진환에게 관심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 거면 말로 알려 주겠지.’

이유건을 연기 중인 게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면 진환의 성격상 분명 말로 은율에게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시선만 준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보여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진환은 당초의 예정대로 가장 붐비는 지하철역 앞에 차를 세웠다. 은율은 조수석에서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 은율의 팔을 잡고서, 그제야 진환이 입을 열었다.

“누가 뭐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고 그러면 안 돼. 만약 과도한 스킨십을 하려고 하면 급소를 걷어차 버리고, 사람들하고 너무 붙어 있지도 말고, 또…….”

진환은 뭐가 그리 걱정되는지, 어린애를 물가에 내놓은 사람처럼 별의별 충고를 다 했다. 은율이 그의 입을 손끝으로 꾹 눌러 막았다. 입술에 닿는 감촉에 진환이 말을 멈추었다. 은율은 무심한 시선을 그에게 한 번 던지고서 그렇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열차를 기다리며 은율은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전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내리고, 거기다 볼품없는 옷차림을 하고 다닐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만약 유건인 상태가 아니었다면, 얼굴을 붉힌 채 당장 앞머리부터 내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유건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를 완벽히 연기해 내고자 마음먹었다. 그 마음가짐과 집중력 덕인지 주변인들의 시선 정도는 이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알게 모르게 상당한 사진을 찍혀 버렸다. 개중에는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진환이 지시한 역까지 이제 한 정거장 남았을 때였다. 활기찬 여학생 둘이 그의 옆쪽에 서서는 계속 힐끔거리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하니, 얼른 사진을 찍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한 여학생이 넘어질 뻔해서 얼른 그녀를 잡아 주었다. 여학생이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모습에, 여동생 지희가 떠올랐다. ‘이유건’임에도 그는 찰나의 순간 ‘서은율’이 되고 말았다.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 지하철이 곧 문을 열었다. 은율은 여동생을 닮은 그 여학생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선 다시 완벽한 유건의 모습이 되어 열차에서 내렸다.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지정된 출구로 나가는 도중,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어 확인해 보니, 진환이 입구에 도착해 있다는 연락이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서 출구를 빠져나가는 내내, 너무도 긴장이 되었다. 막상 짧은 미션이긴 했지만, 낯선 자신의 모습과 주변의 시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도 태연한 유유자적함에 진환이 다 놀랄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은율은 출구 옆 골목에 정차해 있는 진환의 차에 스스럼없이 올라탔다. 말없이 안전벨트를 매고 나자, 진환은 그제야 차를 출발시켰다.

“고생했어.”

그 말이 끝나자, 은율의 입에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그가 ‘서은율’로 돌아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  *

은율은 진환이 오늘내일, 약 이틀간 빌려 둔 예의 스위트룸으로 돌아와 있었다.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고 거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을 오래해서 그런지 꽤나 피곤했다.

진환은 은율에게 수고했다며, 두세 시간 정도 침대에서 쉴 것을 권했다. 은율은 스턴트 액션을 할 때만큼이나 피곤해진 제 몸 상태를 보며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따로 편한 옷을 준비해 오진 않았기에, 집에서 입고 왔던 후드티로 갈아입었다. 타인이 있는 곳에서 잠시 낮잠을 자는데 가운으로 갈아입는 것도 민망하니 말이다. 바지는 불편할 것 같아, 후드티에 드로어즈만 입고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진환이 침대 옆으로 다가섰다. 그는 폭신한 이불을 손수 목까지 덮어 주며, 은율이 여태껏 쓰고 있던 뿔테안경을 벗겨 주었다.

“깨워 줄 테니까 자.”

진환이 부드러운 얼굴로 은율의 볼을 쓸어 주었다. 은율은 왠지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이불을 끌어당겨 입을 가렸다.

“옆에 계시면 불편해서 못 잡니다.”

“아…… 불편한가?”

진환이 서운한 얼굴을 하자, 은율이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불편하다기보다는…….”

신경이 쓰인다.

말을 잇지 못하자, 진환이 피식 웃으며 이불에 가린 은율의 가슴팍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나가 볼게. 필요하면 부르고.”

이상하리만치 다정한 분위기에 은율은 자꾸만 속이 간질거려 죽을 맛이었다. 이전에도 계속 저에게 다정하게 굴긴 했지만, 뭔가 분위기까지 바뀌었다. ‘이유건’에서 ‘서은율’로 돌아왔을 때부터인가? 아니, 정확히는 그가 매니저 연우와 통화를 끝낸 이후부터다.

‘연우 씨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렇게 추측해 보는 사이, 진환이 부드럽게 ‘잘 자’ 하고 말하며 방을 나섰다. 이윽고 은율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방 밖에 선 진환은 한동안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드물게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환의 머릿속에서, 낮에 연우와 통화했던 장면이 멋대로 재생되었다.

“연우야, 내가 아무래도 욕구 불만인가 보다.”

-다짜고짜 전화해서 뭐라는 거예요!

“왜 남자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아아악! 형, 제발! 저 지금 밖이거든요?! 10초, 아니, 5초만 기다려요!

연우는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듯 헉헉대다가 소리가 약간 울려 퍼지는 곳에 들어갔다. 화장실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왜 내가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반응하냐고.”

-둘 중 하나죠. 형이 변태거나, 게이거나.

“……뭐?”

-형, 근데 세세히 답해 드리기 전에 일단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혹시 은율 씨랑 같이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

-하아…….

연우의 깊은 한숨이 거슬렸다.

-형, 무슨 내용인지 상세히 말해 봐요.

“은율 씨의 벗은 몸을 보다 보니까……”

-으아아아악!

연우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진환이 눈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소리가 사그라지자, 진환이 그제야 다시 휴대폰을 귀에 대었다.

“너 밖이라며. 그렇게 소리 질러도 되냐?”

-안 되죠! 그러니까 제발 소리 지를 것 같은 내용은 말하지 말라고요!

“소리 지를 내용인가?”

-당연하죠! 여태 그런 적 없던 사람이 동성에게 발정했다는데 소리 안 지르고 배겨요?!

“발정?”

진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이 은율에게 발정을 했다니.

“내가 남자에게 발정한다고? 미쳤어?”

-네! 근데 제가 미친 게 아니라 형이 미쳤어요! 진짜 잘릴 각오하고 말하는데요! 형 지금 단단히 미쳤다고요!

“뭐?”

연우의 처음 듣는 답답한 외침에 얼이 빠졌다.

“내가 왜 미쳤다는 건데?”

-이제 자각 좀 합시다! 형 지금 은율 씨한테 제대로 빠졌거든요?!

“그래, 평생 같이 연기하고 싶어. 그래서 뭐?”

-와, 진짜 이 정도면 국보급이다.

건너편에서 퍽퍽, 연우가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가 깊이 심호흡하며 가르치듯 조곤조곤하게 물어 왔다.

-형, 잘 들어요. 은율 씨랑 평생 같이 연기하고 싶다고 했죠?

“했지.”

-그럼 연기를 안 할 때는 같이 있고 싶은 생각도 안 들어요? 정말 같이 연기하고 싶은 것 하나만으로 은율 씨한테 붙어 있는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연기를 같이 할 때가 아니어도 옆에 있고 싶긴 해.”

-은율 씨랑 떨어져 있을 때는 어때요? 은율 씨 생각 많이 하죠?

“그렇지. 은율 씨는 지금 뭐 할까, 공부 중일까, 아니면 스턴트 일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진환은 제 입으로 대답하면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정말 연기를 같이 하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고?

진환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때, 은율과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 따윈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진환에게 있어 크나큰 충격이었다.

-다른 연기 잘하는 사람들에게도 형이 그렇게까지 하신 적 있어요? 백방으로 서포트하고 길을 닦아 주고 그 사람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고 그랬어요?

진환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 찾으면 당연히 있다. 진환마저도 긴장하며 합을 맞춰야 할 정도로 가공할 연기력을 가진 배우도 만나 보았다.

그들에 대해 자신은 어떤 생각을 했던가.

-형, 은율 씨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게 된 게 언제부터예요?

“처음에는 일개 스턴트맨이 베테랑 배우인 양 정극 연기를 해내는 게 신기했지. 그러다 두 번째 대본 리딩 때는…… 뭔가 이상했더라.”

-이상했다고요?

“연기가 끝나니까 갑자기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답답하고, 눈앞은 뿌옇고……. 거기다 어지럽고 몽롱한데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지.”

-그건…….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키스하려고 했더라. 입술을 대자마자 맞아서 나가떨어졌지만.”

-…….

“지금도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돼.”

연우는 말이 없었다. 진환은 가슴이 답답해져, 가슴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스위트룸 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제야 형이 왜 그러시는지 확실히 알겠어요.

“알겠어?”

진환이 눈을 들어 창밖을 보았다. 어지럽게 꽉꽉 들어찬 빌딩들이 혼란스러운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곧 연우의 진지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형은 그날, 은율 씨에게 반한 거예요.

진환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입도 벙끗할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구에게 반해?

-지금 형은, 진심으로 은율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친구가 되고 싶다거나 연기를 함께하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남녀관계처럼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셨다고요.

머릿속에서 연우의 말이 되풀이되었다.

“내가……? 은율 씨를……? 하지만 우린 남자야. 그럴 리가…….”

-형도 해외 많이 나가 보셔서 알 것 아니에요. 동성 커플 굉장히 많아요. 우리나라도 점점 그런 거 부드럽게 봐 주는 쪽으로 가고 있고요. 그래서 요즘 드라마에 브로맨스 넣는 경우가 많아졌잖아요.

진환과 현우가 주연인 <메아리>도 그렇긴 하다. 영화가 개봉하면 한태진과 강민으로 커플링이 돌 거라고 스태프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동성끼리 연애 감정 느끼는 거, 흔하진 않지만 충분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형은 지금, 은율 씨와 그냥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애인이 되고 싶으신 거예요. 평생 같이 있고, 평생 챙겨 주고, 평생 같이 연기하는, 그런 애인이 되고 싶은 거라고요.

연달아 뇌를 강타하는 내용에, 진환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형이 물었죠? 왜 남자에게 반응하느냐고. 그건 남자여서가 아니라, 은율 씨여서 그런 거 아니에요?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반응한 거 아니냐고요.

그것은 결정타가 되었다.

연우의 답에, 진환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진환은 연우와 통화를 마친 후, 한동안 멍하니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발을 돌려 은율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 묘한 환상처럼 그가 보였다. 단순히 ‘이유건’이 되기 위한 작업 중 하나로, 제 앞머리를 넘겨 매만지고 있는 별것 아닌 모습임에도 이상하게 제 눈에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진환은 연우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제 손에 의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의 모든 것이 자신과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의 모든 것이…… 영원히 제 것이었으면 좋겠다.

*  *  *

잠에서 깬 은율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이 잠든 사이 진환이 커튼을 치고 불까지 꺼 줬는지, 방 안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그러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피곤하던 몸이 꽤 회복되었다.

일어나서 벽에 있는 전등 버튼을 누르러 가는데, 그 작은 소리마저 알아챘는지 방 밖에 있던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연다. 갑자기 확 열리는 통에 은율이 깜짝 놀라 그대로 멈춰 섰다.

“미안, 놀랐어?”

진환이 더 놀란 얼굴로 얼른 다가섰다.

“아, 괜찮습니다.”

은율의 말을 들은 진환이 얼굴을 풀며 그의 팔을 잡아 방 밖으로 끌었다.

“보여 줄 게 있어.”

진환은 은율을 스위트룸의 응접실로 데려가 2인용 소파에 앉혔다. 푹신한 소파에 앉은 은율 옆에 진환도 함께 앉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얇은 7인치짜리 태블릿 패드였다. 은율에게 내민 패드의 화면에는 익숙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이 떠 있었다. 은율은 왜 보여 주느냐고 말로 묻는 것 대신 진환의 눈을 바라보았다.

“직접 봐.”

은율이 의아해하며 태블릿 패드를 받아 들었다. 진환이 가리킨 곳은 실시간 검색어 부분이었다.

실시간 검색어 랭킹

1위 지하철 미남

2위 지하철 청년

3위 그것이 알고 싶을까?

4위 지하철 안경

5위 복면강황

6위 무박 2일

7위 슈퍼가 돌아왔다

8위 ……

이걸 왜 보라고 그러는 걸까? 은율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이리 갸웃, 저리 갸웃했다. 진환이 웃으며 은율에게 밀착하더니 1위에 올라 있는 검색어를 손가락으로 직접 클릭해 주었다.

화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은율은 이내 경악했다.

“이, 이게 대체…!”

은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씩 웃어 보였다.

“축하해. 단시간에 굉장한 주목을 받았네.”

은율이 입을 살짝 벌린 채 넋을 놓았다. 그는 패드 화면을 이리저리 드래그 해 둘러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지하철이 붙어 있는 검색어를 클릭하는 족족 은율의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은율이 직접 보고 찍지는 않은, 상당수의 ‘도촬’ 사진이었다. 그중 한 영상에는, 넘어지려는 여고생을 붙잡아 주고 머리까지 두드려 주는 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그 영상은 벌써부터 어마어마한 수의 추천을 받은 상태였다. 어떤 사람은 영상에서 여고생의 머리를 두드려 주는 장면만 일부분 잘라 연결해 놓기도 했다. 그가 만든, 일명 ‘머리 톡톡 짤방’은 벌써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 간 상태였다.

은율이 태블릿 패드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하철을 나선 지 이제 고작 3시간이 좀 지난 상태다. 그사이에 은율은 자기도 모르게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접 사진으로 보니까 다르지?”

진환이 은율의 전신이 가장 잘 나온 사진 하나를 클릭했다. 은율이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진지하게 대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빛과 분위기마저 자신의 모습이라곤 전혀 없는 것만 같았다.

“거 봐, 본인도 못 알아볼 거라고 했잖아.”

설마하니 이 정도로 다르게 보일 줄은 몰랐다. 변신한 모습을 호텔 안에서 거울로 꼼꼼히 체크하긴 했지만, ‘이유건’이 된 상태로 거울을 본 적은 없었다. 유건이 된 자신은, 호텔에서 거울로 보았던 자신과 분명 같았지만,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진환이 은율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으며 그의 어깨에 제 턱을 올렸다. 태블릿 패드에 정신이 팔린 은율은 진환의 행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그래서 일부러 환승 구간이 연달아 있는,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타라고 한 건가.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지하철처럼 사람들로 붐비는 곳에는 여전히 도촬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몰래 찍힌 사진들이 많았다. 또한 누군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는다면 허락해 주라는 진환의 말에 따랐기에, 당당히 찍은 사진들도 존재했다.

진환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귀에 속삭였다.

“은율 씨가 ‘이름 없는 배우’로 세상에 나오기 위한 첫걸음이야. 이름 없는 배우라고 해서 무조건 숨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어. 이름이 없는 거지, 얼굴이 없는 건 아니거든. 그 점을 이용하는 거야.”

무슨 말인가 싶어 태블릿 패드를 무릎 위에 내리고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환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이제 당신이 찍은 영화가 개봉되면 사람들은 그 주연을 연기한 사람이 누군지 찾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이 도달하는 건 결국 이름도 모르는 일반인 이유건이지. 그건 어차피 촬영이 끝나면 사라질 캐릭터. 방황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유건만 찾을 뿐, 전혀 다른 모습의 당신을 찾아내진 못해.”

“그럼 아예 이유건도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은율 씨는 ‘서은율’의 모습으로 촬영장에 가게 되잖아. 그곳의 스태프들이 언제까지 입이 무거울 수 있을 것 같아? 언젠가는 그들도 주연 배우가 누구인지 발설하게 되어 있어. 아무 정보도 없던 대중이 주연 배우의 정보를 일부나마 알게 된다면 그들이 파고들 부분이 많아져. 그러다 보면 그 주연 배우가 당신이라는 것도 금세 밝혀내겠지.”

진환이 은율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리해 주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평소의 당신과 너무도 다른 이유건이라는 인물의 사진과, 그 사람에 대한 스태프들의 증언이 있다면 어때? 사람들은 ‘주연 배우가 누구인가’라는 것보다는 ‘이유건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들을 통해 주연 배우가 발설된다 한들, 결과적으로 이유건에게 도달할 뿐이다. 즉, 서은율에게 눈이 가는 게 아닌, 허상의 인물 이유건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소리다.

“나마저도 이유건을 연기 중이던 사람이 지금의 은율 씨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어. 아예 다른 사람인 것 같았거든.”

은율은 시선을 내리며 볼을 긁적였다.

“근데…… 정작 사람들이 그 영화 주연 배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지금껏 한 행동이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단편에, 고작 영화제 이틀 상영인데…….”

진환이 낮게 웃으며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곽 감독님이 직접 연출과 각본을 담당하신 데다가, 당신의 대단한 연기력이 들어갈 작품이야. 사람들이 몰라 볼 리 없어. 내가 보증하지.”

진환의 확고한 목소리가 은율의 불안을 덜어 주었다. 은율은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였다.

“걱정돼요. 제가 감독님과 진환 씨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의 이유건만 봐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은율이 픽 웃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려는데, 진환의 팔이 은율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진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예요? 불편한데요.”

진환이 놀라는 척을 하며 손을 떼었다.

“미안. 잡고 있는 줄 몰랐어.”

그의 장난기 있는 모습에 은율이 피식 웃었다.

“하진이랑 닮으셨네요. 하진이도 붙어 있으면 꼭 만지고 안고 그러던데.”

“하진이? 그 동생? 아니, 남자끼리 왜?”

은율이 진환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남자인 걸 떠나서 형제잖아요. 그리고 진환 씨야말로 남자끼리 왜 이러십니까? 징그럽게.”

은율이 조금 떨어져 앉았다. 진환이 놀란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 말하려던 진환이 입을 얼른 다물더니 보란 듯이 눈을 내리깔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은율은 진환답지 않게 축 처진 얼굴에 당황했다.

“아, 저, 죄송합니다. 제가 장난이 너무 심했네요.”

“됐어. 은율 씨가 사과할 일도 아니고.”

은율은 어찌할 줄 모르다가 다짜고짜 진환을 끌어당겨 그의 허리를 안았다. 진환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런 건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달래 주거나 위로하거나 반가워서 하는 포옹 같은 거.”

시무룩한 제 동생들을 달래 줄 때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안아 주고 토닥여 주는 게.

진환은 자신을 끌어안고 제 어깨에 옆얼굴을 댄 채 말하는 은율을 당황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래, 괜찮네. 아주 좋아.”

진환이 은율을 마주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향긋한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진환은 은율의 허리를 덥석 잡아다 제 무릎 위에 그를 앉혔다. 드로어즈밖에 입지 않은 은율의 매끈한 다리가 진환의 다리 옆으로 구부려진 채 벌려졌다. 그의 엉덩이가 진환의 사타구니에 안착하자, 완전히 올라탄 모습이 되었다.

“이 자세는 뭡니까?”

“난 이편이 효과가 좋아. 달래 줄 거면 빨리 안아 줘.”

널뛰는 듯한 심장 박동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은율을 끌어안았다.

은율은 뭔가 이상한 자세에 의아해했지만, 결국 그 상태로 진환을 마주 안았다. 은율의 팔이 진환의 목을 둘러 감싸고 진환의 팔은 그의 허리를 감았다. 손을 깍지 껴 몸을 붙잡아 밀착하자, 서로의 심장 박동이 교환될 정도로 맞닿아 버렸다.

은율의 귓가에 진환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  *

월요일 이른 아침.

연우는 퀭한 눈으로 한 단독주택 대문 앞에 섰다. 검고 커다란 대문 옆에는 사각형의 도어록이 달려 있었다.

연우는 그것의 가장 윗부분에 있는 동그란 버튼 부분에 자신의 검지를 대었다. 그러자 삐리릭- 소리가 들리며 도어록 패드 부분에 흰색 사각 틀이 떠올랐다. 사각 틀의 한가운데엔 동그란 점이 하나 있었고, 연우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곧 ‘열렸습니다’라는 음성과 함께 대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등록된 인물의 지문과 홍채를 인식해야만 문이 열리는 구조의 대저택. 그 안으로 들어가니, 고운 잔디로 뒤덮인 마당과 깔끔하게 가지를 친 나무들이 한 폭의 예술품처럼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연우는 그 가운데에 대리석으로 깔린 돌길을 걸었다. 그는 세련된 모양새의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흰 외벽에 진회색 지붕으로 뒤덮인 2층짜리 저택은, 척 보기에도 그 평수가 어마어마했다. 안에는 한 층당 족히 5개 이상의 방이 있을 정도로 넓어 보였다.

깔끔한 이미지의 현관문 앞에 선 연우는 늘어뜨린 어깨를 바르게 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다시 한번 눌러 보았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다. 연우는 잠시 기다렸다가 결국 갖고 있던 작은 카드키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현관문 도어록의 카드 인식기에 가져다 대니, 곧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찰칵 하고 문이 열렸다.

안에 들어간 연우는 집주인의 기척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보아하니 1층에는 없는 모양이다. 연우는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2층의 가장 안쪽 방에서 뭔가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화 보고 계시나?’

소리가 나오는 방은 연우가 기억하기로, 고가의 홈시어터가 자리한 일종의 영화감상용 방이었다. 영화와 드라마 DVD로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반대쪽 벽에는 커다란 TV를 배치해 두었다. 화면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자리한 갈색과 어두운 붉은색이 조화를 이룬 3인용 벨벳 소파는, 언젠가 그도 직접 앉아 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푹신해 보였다.

연우는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형, 저 연우예요.”

“들어와.”

안에서 진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문을 열고 방 안에 발을 내딛었다.

예상대로 벽의 TV에서는 영상 한 편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1년 전에 공중파에서 방송되어 시청률 30퍼센트를 넘기는 기염을 토한 액션 스릴러 드라마였다. 마침 화면에서는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화려한 액션신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거 작년에 했던 <울새> 아니에요?”

“맞아.”

진환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형 이거 다 보셨지 않아요?”

연우가 기억하기론 그랬다. 갑자기 왜 이른 아침부터 액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거지?

문득 연우가 화면 안에서 돌려차기를 하는 주인공 남자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뒤태다. 눈치 빠른 연우는 진환이 왜 저걸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저거 은율 씨예요?”

연우가 화면 속 남자 주인공을 가리켰다. 화면에 스쳐 지나간 얼굴은 분명 유명 배우의 얼굴이었지만, 액션을 취할 때는 그 뒤태에서 은율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환이 작게 웃었다.

“참 대단하지. 어떻게 저럴까.”

연우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처음 이 드라마를 봤을 때, 스턴트맨 하나는 제대로 썼다 싶었어. 액션도 화려하고 신체 비율도 좋아서 정말 알짜배기를 썼구나 했지. 그게 은율 씨일 줄은 몰랐지만.”

진환이 팔을 풀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빌딩 옥상에서 끈 하나에 의지한 채 그 아래로 몸을 날리는 장면에서 정지를 눌렀다. 반짝이는 야경이 펼쳐진 허공을 향해 팔을 벌려 뛰어내리는 모습이 마치 영화 포스터 같았다.

“지금은 뒷모습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아.”

연우는 진환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며 신기했다. 2년간 진환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그의 수많은 모습을 봐 왔지만, 지금과 같은 얼굴은 처음 보았다. 일밖에 모르던 남자가 사랑에 한 번 빠지면 그렇게도 많이 바뀐다던데, 진환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시킨 건 해 왔어?”

연우는 진환에게 다가가 준비해 왔던 USB를 건네었다.

“영상, 사진, 짤방 할 것 없이 싹 긁어 왔어요. 여기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올라온 댓글들은 모두 캡처해서 넣어 놨고요.”

“수고했어.”

진환은 만족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연우가 은근슬쩍 소파에 앉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푹신하니 앉는 맛이 좋은 소파였다.

“근데 정말 괜찮아요? 은율 씨 사진 돌고 있는 거.”

진환은 USB를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의도한 거니까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환이 소파에 몸을 삐딱하게 기댔다.

“연예인이란 존재는 어떤 수를 쓰든 튀어야 해. 그게 뭐든 튈 수만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해야만 자리가 생기는 게 이 업계야.”

그건 연우도 알고 있다. 신인 연예인들이 자기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위해 그 어떠한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해도 사람들 뇌리에 조금이나마 각인이 될까 말까다.

하지만 연우는 의아했다.

“이건 어차피 잠깐 쓰고 버릴 캐릭터라면서요.”

이번만 쓰고 버릴 캐릭터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사람들에게 각인된다 한들, 앞으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을 캐릭터라면 얼마 못 가서 잊힐 것이다.

“이번 촬영이 끝나면 더 이상 ‘이유건’은 나오지 않아. 하지만 이후에 그는 또 다른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거고, 그 캐릭터를 지우면 또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화제가 될 거야. 그리고 은율 씨가 진짜 자신의 모습과 이름으로 연기를 할 날이 오면, 그 캐릭터들이 모두 그였다고 공개하는 거다.”

“어……, 그러니까, 화제가 되었던 인물들이 사실은 모두 서은율이라는 배우였다, 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

진환이 말없이 웃었다.

“은율 씨는 이번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아니었어요? 다음에 또 캐릭터를 만들어서까지 연기할 일이 있을까요?”

연우의 질문에, 진환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렇게 될 거야. 제대로 연기를 해 보고, 그걸 영상으로 직접 보게 될 때…… 그것만큼 짜릿한 순간이 없지.”

진환은 과거, 자신이 처음 연기한 작품을 영상으로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의 진환을 있게 했다. 그는 은율도 그러하리라 장담했다.

새로이 분한 이유건을 처음 사진으로 봤을 때, 은율은 저도 모르게 전율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반짝였고, 목소리는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기분 좋은 벅참과 흥분.

은율은 자기가 연기한 캐릭터를 보며, 진환이 과거에 느꼈던 것과 같은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은율 씨는 얼마 안 가 제대로 된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될 거야. 이번 일은 ‘서은율’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킬 첫 번째 열쇠가 되는 거지.”

은율이 환하게 웃는 모습과 이유건으로서 보여 준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확연히 다른 모습에 진환이 얼마나 가슴 벅차 했는지 모른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대사나 표정 연기뿐만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를 완벽히 생성할 수 있는 인물은 드물다. 아무리 제 아버지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들, 이유건이 된 은율에게선 그 어떤 위화감도 들지 않았다. 정말 ‘이유건이 실재한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환은 자신을 흥분하게 만드는 은율의 연기력에 다시금 두근거림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그와 함께 연기를 하고 싶었다. 곽철민 감독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엑스트라로라도 출연을 감행했을 것이다.

진환은 하루빨리 은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고서 자신과 단둘이서만 연기하도록 강요하고 싶기도 했다. 모순된 두 마음이 그의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진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은율의 다양한 연기를 직접 보고 그와 함께 영상에 담기려면, 같은 자리에 설 수밖에.

마음에 걸리는 건 그의 과거다.

은율이 유명해지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에 대해 여기저기서 파 보기 시작할 거다. 그러다 보면 은율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의 과거 이야기도 나오게 되는 게 필연적이다. 그가 밝히고 싶지 않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엔 대체 무엇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하진이 말했던 은율을 노리는 인물.

생각보다 은율에겐 비밀이 많았다. 얽혀 있는 것도 많고, 그가 두려워하는 것도 많다. 그것들은 대체 무엇이기에 그를 그리도 괴롭히는지 알고 싶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친구라고 했지.’

그렇게 되면 은율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새삼 깨달았다. 자신은 단순히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에게 자꾸만 잘해 주고 싶었던 게 친구가 되기 위한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과거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거다.

친구가 되기 위해 제시된 기간은 길었다. 일단은 그 기간을 단축해야 했다.

진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몇 시쯤 나가야 하지?”

진환의 물음에 연우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한 30분 정도 뒤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오늘은 오전에 인터뷰 예정이, 오후엔 인천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다. 늦은 밤엔 수원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화보 촬영을 끝내야 했고, 잠시 쪽잠을 잔 뒤 새벽부터 <메아리>의 촬영을 가야 했다. 지난 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내리 사흘 동안 스케줄을 빼느라 이번 주 일정은 상당히 빡빡해져 있었다.

“그럼 잠깐 여기 있어. 이것 좀 보고 올 테니까.”

“네, 다녀오세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우는 바로 대답했다. 진환은 그가 건네준 USB를 들고 방을 나섰다.

2층 반대쪽 끝 방에 다다른 그는 집 안의 방들 중 유일하게 이곳에만 설치해 둔 지문인식 도어록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그것에 엄지를 올렸다. 작은 사각형의 도어록은 진환의 손가락을 스캔했고, 곧 문이 열렸다.

방 안에 들어선 진환은 문을 닫고서 그 옆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주광색 전등이 환하게 빛을 내뿜으며 내부를 비추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고급 데스크와 의자, 최신형 노트북, 커다란 진열장이 전부였다. 진환은 안으로 들어가 진열장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진열장 안에는 투명 지퍼백에 들어간 물건 몇 가지가 열을 맞춰 자리하고 있었다.

<메아리> 대본. 굳이 한 부를 더 받아 놓고, 그전에 갖고 있던 것은 지퍼백에 넣어 진열대 첫 자리에 배치했다. 그 옆에는 폐공장에서 은율과 함께 연기했던 추가 대본이 놓여 있었다.

다음은 조금 작은 사이즈다. 구겨졌던 것을 열심히 펼쳐 둔 커피 포장지 2개, 은율의 집에 처음으로 쓰고 갔던 물건이자 은율에게 씌워 보기도 했던 선글라스, 그리고 마지막으론 반쯤 쓴 태닝 로션 2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진환은 진열장에서 눈을 떼고서 데스크로 다가갔다. 의자를 빼서 앉고 노트북을 켠 후 USB를 꽂았다. 안을 확인해 보니 연우가 정리한 것답게 파일 타입과 날짜별, 내용별로 상세하게 구분되어 있다.

망설임 없이 첫 번째 폴더를 클릭했다.

*  *  *

지루하긴 하지만 필히 들어야 하는 내용이라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꼼꼼히 필기를 하고 열심히 귀를 열었다. 그런 은율의 가방에서는 아까부터 계속 미세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옆자리에 있던 기언이 은율의 귀에 속삭였다.

“야, 전화 오는 거 아니냐?”

은율은 강의 중인 교수에게 눈을 고정한 채 기언의 귀에 마주 속삭여 주었다.

“전화는 아니고 메시지. 수업 때문에 전화는 받기 힘들다고 하니까 계속 메시지로 얘기하네.”

“누군데?”

“있어, 그런 사람.”

은율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기언의 머리를 자신의 귓가에서 밀어냈다. 필기를 하는 손이 빨라지는 것을 보고, 기언이 속으로 혀를 찼다.

수업은 얼마 안 가 끝이 났다. 은율은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전화는 한 통도 없고 메시지만 수십 개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하진에게 온 내용 두 개와 지희의 것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진 전부 진환의 것이었다. 우선 지희가 보낸 내용부터 확인했다.

[하진이 오빠한테 들었어! 응원할게! 아, 나중에 이진환 씨 싸인 좀 부탁해! 다섯 장만!]

5장이나 어디에 쓰려고…….

일단은 알았다고 답장하고서 하진의 것을 확인했다.

[오늘 밤에 비 오는 거 알지? 내일까지 내린다니까 내일 거 결석사유서 미리 제출하고, 어디 나가지 마. 문단속 잘하고 집에 꼭 있어.]

엄마 같은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안 그래도 은율의 가방 안에는 내일의 결석사유서가 들어 있었다. 기언에게도 내일 있을 수업의 필기를 부탁해 두었다. 기언은 평소엔 그다지 필기를 열심히 하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은율이 빠지는 날에는 그만큼 꼼꼼하게 필기를 해서 보여 주었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교수들은 은율의 PTSD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결석을 한다 해도 학년 수석을 놓치지는 않아, 딱히 문제 삼진 않았다. 출결에 관해서도 제법 관대했다.

은율은 하진이 보낸 다음 내용을 확인했다.

[그 사람에겐 말했어?]

웃고 있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했다가 진환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이라도 하면 충격이 클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 성격상 아무렇지 않게 ‘그래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은율은 잠시 생각하다가 하진에게 답장을 썼다.

[이틀 뒤에 만나니까 그때 얘기할까 해.]

이틀 뒤에 진환과 처음 대본 리딩을 했던 한강 신의 대역을 하러 가야 했다. 그 자리엔 진환이 있을 것이다.

하진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말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 할게.]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답장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화면을 끄려던 찰나였다.

[형.]

화면에 한 글자가 떠올랐다.

[사랑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은율은 약간의 공백을 두고 보내져 온 그 말에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답했다.

[나도 사랑해.]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사고가 나고 약 2년이 지났을 무렵, 이모를 만나러 나갔던 하진이 그녀의 집에서 술을 잔뜩 먹고 나타났다. 그날 하진이 자신을 붙잡고 고백하며 울던 게 생각났다. 횡설수설한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 주고 다독였었다.

사고 직후부터 이모는 동생들을 양자로 들이길 원했다. 은율만 제외하고.

처음에는 속으로 원망도 해 보고 서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소중한 쌍둥이 동생을 잃은 이모의 마음을 이해한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 홀로 버려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린 하진과 지희는 이모의 권유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은율과 함께할 것을 택했다. 그것이 너무 고맙고 가슴이 아파서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하진과 지희는 그 후에도 자주 이모에게 불려 갔다. 그날 역시 이모를 만나 갖은 협박을 동반한 양자 권유를 거절하고 왔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절절한 고백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목이 멜 수가 없었다. 마치 형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고백처럼 들려왔었다.

자신이 착각했을 거라 생각한 은율은 그런 하진을 웃으며 달랬다.

‘나도 사랑해, 내 동생.’

하진은 그 말에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듯,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은 하진이 살면서 가장 크게, 가장 오래 울었던 날이었다.

왜 그렇게 울었던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묻는 순간, 하진과 벽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은율은 대화 내용을 다시 읽어 보다가 씁쓸히 대화창을 나왔다.

이번에는 진환이 보낸 수십 개의 내용을 확인했다. 옆에서 짐을 싸던 기언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씨구. 무슨 내용이기에 그리 웃냐?”

은율은 그제야 자신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바쁜 사람이 한가한 척해서.”

“뭔 소리야.”

기언이 인상을 쓰며 남은 짐을 마저 챙겼다. 은율은 화면을 위아래로 드래그하며 진환이 보낸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가장 마지막 내용까지 읽은 후, 그에게 답장을 썼다.

[바쁘다고 알고 있는데 한 시간 동안 무슨 분 단위로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보내자마자 몇 초 되지 않아 ‘1’이라는 표시가 사라진다.

[인천으로 이동 중이야. 강의 다 끝났어?]

[30분 뒤에 다른 강의 들으러 가야 합니다.]

[나보다 더 바쁘네.]

[아무리 바빠도 잘나가시는 대배우님만 하겠습니까.]

장난스럽게 써서 보내니, 곧바로 답장이 온다.

[그럼 30분 뒤에 바쁠 예정이신 서은율 씨, 시간 되면 통화나 할까?]

은율이 답장을 하려는데, 기다리다 못한 기언이 손수 은율의 짐을 챙겨 주고 있다. 은율이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미안한 얼굴로 그의 손에 들린 자신의 책을 뺏어 들었다.

백팩을 등에 메고서 기언과 함께 강의실을 나선 은율은 자신이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휴대폰을 보았다.

[나랑 통화하기 싫어?]

[왜 읽고 답장 안 해?]

[바빠?]

읽고서 답장을 하지 않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진환은 참 소심하게 굴고 있었다. 정말 그 성격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은율은 결국 기언을 먼저 보내기로 했다.

“먼저 강의실 가서 자리 좀 맡아 주라.”

“오냐. 올 때 뇌물 사 와.”

“자판기 커피면 돼?”

“기왕이면 캔 커피.”

“날강도네. 알았어.”

기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은율의 등에서 백팩을 빼앗아 갔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다니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천천히 볼일 보고 오라며 먼저 가 버렸다.

[지금 전화합니다.]

그렇게 보내고서 통화를 시도하려는데, 그보다 빨리 진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많이 바빴어?

“강의실 옮겨야 해서 짐 챙기고 있었습니다.”

건너편이 꽤 소란스럽다.

“촬영장 도착하셨어요?”

-지금 막.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많네.

여자들의 비명 사이로 여기저기서 외치는 진환의 이름이 들렸다. 새삼 그가 진짜 유명한 배우구나 싶었다.

“그럼 얼른 가서 일하십시오. 끊습니다.”

미련 없이 귀에서 휴대폰을 떼려는데 진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끊지 마. 어차피 들어가도 머리고 얼굴이고 손 봐야 해서 대기 시간이 길어. 그쪽은 시간 여유 있어?

“다음 강의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습니다. 머리랑 얼굴 손보셔야 하면 바쁘신 거 맞는 것 같은데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바쁜 거지. 난 괜찮아.

건너편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촬영장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팔은 좀 어때?

지난 주 토요일에 그와 함께 근처 병원에 들러 팔의 실밥을 풀었다. 잘 아문 덕에 지금은 약간 욱신거리는 정도일 뿐, 상당한 무게의 물건도 번쩍 들 정도는 되었다.

은율은 진환과 함께 병원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다지 번화한 동네의 병원이 아니었던지라 당시 환자는 몇 명 없던 상태였다.

대기하는 곳의 소파 한가운데에 길쭉하고 다부진 체격의 검은 정장 차림을 한 남자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앉아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계속 힐끔거리고 무서워했었다. 처방전을 받기 위해 카운터에 갔을 땐 등 뒤에 어느새 진환이 지키듯 서 있었다. 그 바람에 간호사들이 자꾸만 그에게 한눈을 파느라 다른 환자의 처방전을 줄 뻔하기도 했었다.

“도베르만…….”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품종 좋은 커다란 도베르만을 떠올리던 은율이 몰래 웃었다.

“팔은 아주 멀쩡합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흉터 남는 거 아니지?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거의 흉터 없이 완치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흉터 좀 있으면 어때요?”

-안 돼. 절대.

세상 진지하다.

-앞으론 다치지 마. 절대.

걱정해 주는 진환의 말에 또 가슴이 간질거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죠.”

은율은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로 대학 내 편의점으로 향했다. 기언에게 줄 달달한 캔 커피를 고르는데, 진환의 아쉬움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얼굴 못 보겠네.

“연달아 나흘이나 봤잖아요.”

연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얼굴을 본 사이다. 연인도 아닌데,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굳이 얼굴을 볼 필요가 있을까.

-스케줄만 아니면 오늘도 보러 갈 텐데.

“말씀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국어책 읽지 말고.

건너편에서 진환이 쿡쿡 웃었다.

-내일은 뭐 해?

카페라테 캔 커피와 아메리카노 캔 커피를 한 손에 쥔 은율이 그 상태로 동작을 멈추었다. 아주 잠깐의 어색한 침묵을 깨고 은율이 태연한 척 목소리를 냈다.

“공부하겠죠.”

-오늘도 공부하고?

“당연하죠. 학생의 본분은 공부예요.”

-대단하다, 정말.

진환이 낮게 웃었다. 은율은 카운터에서 캔 커피 2개를 계산하고 나왔다. 나오고 보니 하늘이 아까보다 좀 더 어둡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내일 촬영 끝나고 밤에 가도 돼?

진환의 목소리에 은율이 입을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와 달라고, 곁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직 그는 자신의 PTSD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참에 말할까.’

고민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연 상대에게 PTSD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은율에게 있어 상당한 각오를 동반해야 하는 일이었다. 대학 교수들에게 병원 소견서와 증빙 자료를 준비해 제출하며 털어놓을 때와는 또 달랐다.

기언에게 말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긴장감이 엄습했다. 기언은 원체 시원시원하고 겉과 속이 같은 녀석이라 이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었다. 그저 이상하게 본다면 어쩔 수 없지, 정도의 마음이었달까.

기언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걱정하면 걱정했지,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동정하거나 측은해하지도 않았기에 털어놓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진환은 어떨까?

얼굴을 보고 있지 않은 지금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상하게 보면 어떻게 하지? 정신병자라고 기피하면? 지금처럼 지낼 수 없게 되면?

갑자기 닥쳐온 불안감은 머릿속에 부정적인 알을 하나하나 낳기 시작했다. 은율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괜찮아. 이해해 줄 거야.

은율이 입을 열었다.

-미안. 잠깐 감독님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진환의 말에 은율의 입가가 굳게 다물렸다. 그러다 곧 억지 미소를 지었다.

“예, 다녀오세요. 전 이만 강의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금방 끝내고 다시 전화할 거야.

“저도 이제 들어가서 강의 준비를 해 놔야 해서요. 그럼 일 힘내세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은율은 제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래, 다음에……, 다음에 이야기하자.’

시끄럽게 두근대던 고동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은율은 어두워진 낯빛으로 기언이 기다리고 있는 강의실을 향해 걸었다.

*  *  *

하루 종일 정신없이 끌려 다니느라 휴대폰도 제대로 확인하질 못했다. 중간중간 연우가 휴대폰을 보여 주긴 했지만, 은율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짬을 내서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공부에 정신이 팔린 건지 확인도 하질 않는다.

진환은 피곤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밴에 올라탔다. 연우가 운전석에 앉아 기계적으로 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휴대폰을 받아 자리를 잡은 진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밤 8시에 보냈던 메시지를 아직까지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덧 새벽 4시인지라 전화를 할 수도 없고, 답답했다. 메시지가 온 걸 모르는 건가 싶어 구태여 보고를 해 본다.

[지금 끝나서 서울 가고 있어.]

그렇게 보내고 잠시 머뭇거리다 자판을 짧게 두드렸다.

[자?]

당연히 자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다.

휴대폰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다가 포기하고 액정 화면을 껐다. 진환은 좌석을 조정해 뒤로 눕히고서 옆 좌석에 준비되어 있는 작은 베개를 머리에 대었다.

“서울 도착하면 깨워.”

“예, 형. 주무세요.”

연우는 센스 있게도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세팅해 주었다.

혹사당한 몸은 수면을 원하자마자 그대로 깊이 잠들어 버렸다. 그래 봤자 1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일어나야 할 판이지만.

짧게, 깊이 잠들었다가 연우의 목소리를 듣고 힘겹게 일어났다.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뒤틀어 보니 뿌득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의자를 바로 해 앉자마자 진환이 한 것은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메시지 알림과 부재중 전화 내역이 있기에 눈을 크게 뜨고 얼른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기대했던 은율이 아닌, 그의 동생 하진의 것이었다. 은율의 집에 있던 날, 하진이 그에게 서슴없이 번호 교환을 요청했고 진환은 이에 응했다. 은율의 동생이니만큼 그에 관해 나중에 물어볼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선은 하진의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지금 형이랑 같이 있어요?]

안부고 뭐고 없이 다짜고짜 물어오는 내용에 진환이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부재중 전화 시간을 보니, 메시지를 보낸 이후 연달아 3번을 전화했다. 진환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형은 옆에 있어요?!

“전화 하는 매너가 별로네.”

-매너고 나발이고, 지금 형이랑 같이 있냐니까요!

하진이 격앙된 목소리를 내었다.

진환은 그의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같이 없어. 무슨 일이야?”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이럴 줄 알았어! 나한테 같이 있다고 거짓말이나 하고!

건너편에서 하진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산하고 낮은 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는 흉흉하기 짝이 없어, 운전석에 있던 연우마저 몸을 떨 정도였다.

건너편에서 하진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형은 비가 오면 한동안 못 움직여요.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형한테 들어요.

“자르지 말고 자세히 말해. 그게 무슨 뜻이야?”

진환이 창가에 쳐진 발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차가 달리는 와중에도 눈에 선히 보일 정도로 많은 양의 비가 지면을 적시고 있다.

-비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것도 심하게.

진환이 눈을 크게 떴다.

-난 지금 형한테 가 볼 테니까……!

“내가 갈게. 은율 씨는 집에 있나?”

하진이 내달리던 소리가 우뚝 멈췄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형은 비 오는 날이면 집에만 있어요. 아마 지금도 그렇겠죠.

진환이 재촉하듯 말했다.

“가서 뭘 해야 할지 말해 줘.”

-…….

“빨리.”

하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고민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형 집 우편함 구석에 비상키가 있어요. 형이 힘들어하면 형 백팩 앞쪽 포켓에 있는 흰 약통에서 약을 하나 꺼내서 먹여요. 거기에 파란 통도 하나 있을 건데, 그건 수면제니까 형이 달라고 할 때만 주면 돼요. 형이 잠들어도 웬만하면 비가 오는 동안엔 함께 있어 줘야 해요. 언제 발작할지 모르거든요.

진환이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하진이 한숨과 함께 말해 왔다.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말해요. 어차피 나도 갈 테니까.

“내가 갈게.”

-……진짜 그쪽 믿어도 돼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진환도 알 수 있다. 은율이 밝히길 꺼리던 일종의 치부를 직접 보게 되는 거다. 하진은 그것에 대한 진환의 반응에 은율이 상처 입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진환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이 짧게 대답했다.

“믿어.”

하진이 복잡함 담긴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는 2시간 뒤쯤 도착할 거라며, 최대한 빨리 은율에게 가 달라고 당부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진환은 연우를 닦달해 밴의 행선지를 은율의 집으로 돌렸다. 그의 차가운 얼굴에 초조함이 서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비가 오고는 있지만 새벽이라 차가 거의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밴이 은율의 집 앞에 빠르게 도착한 그때까지도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가는 도중, 진환은 연우에게 오늘 스케줄을 어떻게든 옮겨 놓으라고 명령했다. 연우가 사색이 되어 대놓고 미쳤냐고까지 말했지만, 진환은 요지부동이었다. 새벽에라도 나가 줄 테니 오늘은 무조건 조정하라고 윽박질렀다. 곽철민 감독에게 직접 연락을 해 놓겠다고 말하자, 연우가 포기한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진환을 은율의 집 앞에 내려놓은 연우가 축 처진 어깨로 밴을 몰고 떠났다.

진환은 하진이 알려 준 대로 수많은 우편함 중 은율의 것을 찾아 그 안을 열어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지만, 손을 넣어 더듬거려 보니 구석에서 뭔가가 잡혔다. 그것은 검은 종이에 싸인 은율의 집 열쇠였다. 우편함 내부가 어두워서 직접 손을 넣어 더듬거리지 않는 이상 알아채지 못할 만했다.

검은 종이를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은 진환이 한달음에 은율의 집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려 보았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긴장한 얼굴로 작은 열쇠를 쥐어 문을 열었다. 잠이 들었다면 깨우고 싶지 않아 안으로 조심히 들어가 보았다.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까지 완벽히 쳐져 있어 어렴풋이 실루엣만 보일 뿐, 뭐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문을 조심히 닫고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무렵, 억누르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진환의 눈에, 창가 바로 밑에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는 은율이 보였다.

다급히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갑자기 환해진 빛에 은율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진환…… 씨……?”

힘겨운 작은 목소리에 진환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은율의 낯빛은 시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창백했다. 편한 긴팔 셔츠는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고, 웅크린 몸은 한겨울에 내몰리기라도 한 듯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 흐린 초점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진환의 모습을 담았다.

“괜찮아?!”

진환이 한달음에 달려가 은율의 몸을 붙잡았다. 격하게 떠는 은율의 상체를 안아 일으키고서 제 품에 그를 기대게 했다.

“어떻……게…….”

말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진환은 땀에 젖은 은율의 앞머리를 걷어 올려 주었다. 그제야 은율의 눈이 새빨갛고 촉촉하며, 얼굴은 흘러내린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에 찔리기라도 한 듯 아파 왔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환이 은율의 마른 어깨를 꽉 붙잡았다.

“많이 힘들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약은? 약은 먹었어?”

진환이 다급하게 물었다. 흐릿한 눈이 불안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 댔다.

“뭐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목소리 때문에…… 들리지가…….”

은율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진환의 셔츠 가슴팍을 붙잡았다.

“자꾸…… 아버지가…… 앞에 앉아 계셔서…….”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방에는 은율과 자신뿐이었다. 은율의 흐릿한 눈동자에는 다른 이들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했다.

“약 가져다주면 돼?”

은율이 대답 없이 그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가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힘들잖아. 약 먹자, 응?”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며 가방의 위치를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익숙한 백팩이 보였다. 약을 가지러 가려면 은율의 손을 떼어 내야 했다.

은율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가 불안한 눈으로 진환의 얼굴과 그 옆의 허공을 번갈아 바라보며 애원했다.

“가지 마……. 싫어…….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흐윽…….”

은율의 어깨가 움츠러들더니 그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진환은 생소한 가슴의 통증에 이를 악물며 은율의 볼에 손을 대었다. 따뜻한 눈물이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이 우니까 내가 죽을 것 같아. 그만 울어.”

연기를 하며 울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서은율’로서 우는 모습은, 너무도 가슴이 아파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은율이 물기 가득한 눈으로 진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환은 은율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손끝으로 조심히 닦아 주었다.

“나만 봐.”

은율의 흐릿한 눈동자가 진환에게 고정되었다. 진환이 칭찬하듯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양손을 들어 은율의 귓가에 대었다.

“아무것도 듣지 말고, 아무것도 보지 마. 당신은 그저 귀를 닫고…… 나만 보면 되는 거야.”

은율의 귀를 막아 준 진환은 은율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초점이 생겼다.

귀를 막은 진환의 손을 은율이 떨리는 손으로 덮었다. 은율의 울상이던 얼굴에 작은,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도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보였다.

진환은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그의 입술에 조심히 다가갔다. 말랑한 입술이 맞닿은 순간, 아프기만 하던 가슴이 이내 찌르르 울렸다.

두 사람의 귀엔,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의 소음 하나 닿지 못했다.

*  *  *

톡- 토독-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약해져 갔다.

길게 뻗어 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뻑뻑하던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 올리니, 어둑한 방 안이 보였다. 방의 불을 모두 끄고 커튼으로 창을 완전히 가린 상태라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은율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귓가에 선명히 들려오는 작은 빗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저 아래에 잠들어 있던 불안함이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절로 몸이 경직되고 호흡이 어려워졌다.

“일어났어?”

귓가에 감기는 저음을 듣자마자, 거칠어지던 숨이 탁 트였다. 은율은 그제야 진환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환은 은율의 허리에 한쪽 팔을 둘러 안은 상태로 다른 쪽 팔을 뻗어 흐트러진 은율의 머리를 부드럽게 정돈해 주었다. 그는 계속 깨어 있었는지, 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자. 얼마 못 잤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은율의 동그란 머리를 제 품에 기대게 하더니 가볍게 쓰다듬어 준다. 기분 좋은 느낌에 다시 잠이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상해…….’

밖에는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몸도 반응하듯,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자꾸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상한 느낌이다.

은율은 약간 멍한 눈으로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진환이 어둠 속에서 시선을 맞춰 왔다.

“…….”

왜 아직 있는 겁니까.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진환은 은율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

“잠이 안 와?”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한 다정한 목소리에 뭔가 울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진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은율은 문득, 그가 쫙 빼입은 상태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자신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촉감으로 보아 하니 정장에 얇은 코트를 하나 걸치고 있는 상태다. 미약하게 화장품 냄새와 헤어스프레이 향도 났다.

은율은 그제야 그가 이곳에 있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분명 오늘 밤까지는 스케줄이 많아서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일은…….”

약간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환이 그의 질문을 알아듣고 답을 해 주었다.

“스케줄이라면 조정했으니까 걱정 마. 밤까지는 계속 같이 있을 거야.”

은율은 조금 안심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은 이상할 정도의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진환은 은율의 등을 어린애 재우듯 토닥여 주었다. 은율은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일정한 박자로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마치 자신의 것만 같았다.

“……묻지 않으십니까?”

진환은 은율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직 친구가 된 게 아니니까, 물으면 안 되는 거잖아.”

이 사람은 이런 점에선 정말 고지식하고 둔하구나. 은율이 작게 웃으며 몸을 조금 틀었다.

은율은 진환의 가슴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 진환은 양팔을 뻗어 은율의 복부를 붙잡아 밀착시켰다. 은율은 진환의 쇄골에 제 뒷머리를 기대고서 다리를 편하게 뻗었다. 자신이 뻗은 다리 좌우로 진환의 굽혀진 다리가 보였다. 진환은 벽에 등을 꼿꼿이 대고서 은율의 몸을 단단히 받쳐 주었다.

편하게 기댄 은율이 약간 떨리는 음성을 뱉었다.

“그럼 많이 빨라졌지만, 친구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조금…… 할 거거든요.”

은율의 허리를 잡은 진환의 손이 움찔했다. 이내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그가 은율을 뒤에서부터 꽉 끌어안았다.

“들려줘.”

떨림이 담긴 그 목소리가 왜 이리 듣기 좋은 걸까.

은율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서 입을 열었다.

*  *  *

8년 전 그날은 오늘보다 더 심하게 비가 오는 일요일이었다. 장마로 인해 몇 날 며칠 동안 거센 빗줄기만 주룩주룩 내리는 통에, 일부 지역에선 홍수가 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합기도 도장에 있던 은율은 아버지 서유건의 호출을 받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웬일로 어머니 정나영이 직접 나와 그를 반겼다.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데 유건이 점잖게 나와 은율을 불렀다. 그는 곧바로 유건을 따라가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파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은 유건은 드물게도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와 만나게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한동안 그 사람과 지내게 될 것 같으니 옷을 몇 가지 준비하거라.”

“예, 아버지.”

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예’로만 대답해야 했다. 그다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음에도 그에게 기계처럼 알았다 답했다.

며칠 있다 올 것이니 캐리어에 짐을 꾸리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교수를 만나러 가는 것뿐인데 왜 며칠이나 있다가 와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은율은 묻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그러라면 군말 없이 그렇게 해야 했다.

캐리어에 갈아입을 옷 3벌과 소지품 몇 가지만 챙기고서 방을 나온 은율은, 안방에서 유건과 나영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이 닫혀 있어 정확히 다 듣지는 못했지만, 가끔 격양된 소리가 나오면 어느 정도는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밖에…… 일단은 ……로 보내야…….”

“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어떤 방법을 쓸지 모른…….”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은율은 직감했다. 부모님은 자신을 어디론가 보내 두려는 거다. 은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앞에 서 있던 은율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문을 열고 나오던 나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는 얼른 평소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오더니 말없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안방에선 유건이 굳은 얼굴로 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은율은 현관 옆에 캐리어를 세워 두고서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디로 보내려는 거야?

왜? 어째서?

내가 방해가 돼?

말 잘 듣고 하라는 대로 했잖아.

뭐가 문제야?

이제 내가 필요 없어?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내가 싫어진 거야?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눈가를 팔로 덮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으니, 옆에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건 한 손에 머그컵을 들고 있는 나영이었다.

“은율아.”

평소처럼 ‘서은율’이라고 부른 게 아니라 ‘은율아’라고 다정하게 불러 주었다. 적응이 되지 않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나영이 은율에게 손에 든 머그잔을 건네었다. 은율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고서 나영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코코아……를 타 봤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은율은 눈만 깜빡이며 머그잔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타 준 음료였다.

은율은 체질적으로 단것을 전혀 먹지 못했다. 음식도 마찬가지지만, 음료는 특히 심했다. 단걸 먹으면 속이 불쾌하게 뒤틀리며 심할 때는 구토를 하거나 끙끙 앓기도 했다.

은율은 자신이 단것을 전혀 먹지 못한다는 걸 기억도 못 하는 나영에게, 그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만큼 그에겐, ‘엄마가 타 준 코코아’가 세상에서 가장 귀했다.

나영은 코코아가 든 머그잔을 보다가 눈을 들어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평소처럼 차갑고 매몰차기만 하던 그런 게 아니었다. 왜인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은율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것을 입에 대었다.

쌉싸름한 맛보단 혀가 아릴 정도의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입을 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영의 집요한 시선은 은율에게 닿아 떨어질 줄 몰랐다. 무언의 압박이 담긴 그 시선 때문에, 결국 은율은 입 한 번 떼지 않고 코코아를 모두 마셔 버렸다. 그런 그를 나영은 안도하며 바라보았다.

은율이 다시 한번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맛있어요.”

벌써부터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순간 나영의 얼굴에 쓰디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은율은 머그컵을 싱크대에 가져다 놔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엉덩이를 조금도 뗄 수가 없었다. 몸 전체에 천근이나 되는 추를 달아 놓은 것만 같았다.

머리가 핑 돈다 싶더니, 눈꺼풀이 제멋대로 감기려 들었다. 고개를 내저어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오히려 더 어지러워졌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힘이 빠진 손에서 머그컵이 제멋대로 굴러 떨어졌다. 머그컵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 컵은 가만히 서 있던 나영의 발끝에 닿았고, 그녀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몸에 힘이 빠져 소파에 축 늘어진 은율의 귀로, 유건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은율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그를 단번에 안아 올렸다. 축 처진 은율을 안아 들고 현관으로 가자, 나영은 그의 캐리어를 챙겨 들며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유건이 정신을 잃어가는 은율을 차의 뒷좌석에 조심히 앉히고서 안전벨트를 매어 준 것이었다. 그러고선 그는 큰 손으로 은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잠든 채 어디론가 이동하던 은율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역시 ……이 따라오고 있어요.”

“……에 도착하면…… 이 차를 몰고 그대로 ……으로 가. 난 준비된 차로 놈들을 따돌리고…….”

“……에게 말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수면제는 그다지 많이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눈을 뜨거나 움직일 순 없었지만, 머릿속이 조금씩 깨어나는 걸 느꼈다. 장대비가 내리는지, 차 밖으로 빗소리가 요란했다.

“벌써 바로 뒤에……! 이러다간……!”

“꽉 잡아! 이대로……!”

“여보, 트럭이……! 아악!”

그 직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전신에 굉장한 충격이 전해졌고, 그때까지 희미하기만 하던 정신은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함께 맑아졌다.

차 안은 난장판이었다.

앞 유리는 당장 부서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조각조각 나 있었고, 보닛 부분은 철근을 가득 실은 5톤 화물트럭의 뒷부분을 제대로 박아 짓뭉개져 있었다.

앞좌석은 반응 센서 문제인 건지, 에어백 하나 터지지 않았다. 그 탓에 유건은 딱딱한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정신을 잃은 채였고, 나영은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힘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깨진 앞 유리로 보이는 트럭이 뭔가 불길했다.

트럭은 애당초 기다란 철근이 모두 보일 만큼 오픈되어 있는 상태였다. 누가 봐도 과적재라 생각할 정도로 많은 양의 철근을 싣고 있었다.

와이어로 묶어 둔 철근 뭉치를 한 번 더 쇠사슬로 묶어 두긴 했으나, 사고의 충격 때문에 이미 몇 줄이 박살 나 있었다. 철근 뭉치들이 하나둘 흐트러지더니, 그중 하나가 점점 기울어져 가는 게 보였다.

“여, 여보…….”

은율이 정신을 차리는 동안, 나영이 유건의 몸을 흔들었다. 그는 머리에서 나영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영이 재빨리 그의 목에 손가락을 대었다.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던 나영은 안전벨트를 풀고 제 셔츠 소매를 이로 물어 확 찢어 내 버렸다. 그것으로 피가 흐르는 유건의 머리를 꾹 누르자, 그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여보! 정신이 들어요?!”

유건의 상태를 살핀 나영이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크게 다치지 않은 채 눈을 뜨고 있는 은율을 보며 안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긴장을 풀진 않았다.

“움직일 수 있겠니?”

나영이 물었다. 은율은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자신의 몸을 붙들고 있는 안전벨트에 손을 대었다.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 실패한 끝에 겨우겨우 그것을 풀어내었다.

은율이 몸을 가운데로 옮기며 유건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다.”

유건이 힘겹게 말하며 몸을 돌려 은율을 바라보았다. 피가 흥건한 그의 얼굴을 마주한 은율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어, 어서 병원으로 가요. 당장 구급차를 부를게요.”

“그건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대로 가방 챙겨서……!”

차분하게 말하던 나영이 갑자기 입을 닫고서 차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차 앞의 트럭에서 무언가 기다란 게 여럿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울어지던 철근 뭉치는 은율이 탄 차와 지면으로 분산되어 꽂아 내렸다. 그중 하나가 유건의 명치를 사정없이 꿰뚫어 버렸다.

“여보!”

나영의 외침이 차 안을 울렸다.

처음 들어보는 어머니의 비명. 명치가 있는 부위를 뚫고 뒷좌석까지 그 기다란 몸을 박아 넣은 피 묻은 철근.

은율은 자신이 정말 잠에서 깬 건지, 아니면 지독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컥!”

유건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나영은 철근이 박힌 위치를 가늠하다 낯빛이 파리해졌다. 유건이 나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은율이를…… 빨리…….”

“여보!”

나영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유건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은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 빨리…….”

“아버, 아버지……. 대체 무슨……. 그보다 병원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유건이 복잡한 얼굴로 입꼬리를 떨어댔다. 피가 흘러내리는 입술을 끌어 올려, 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하다……. 아들…….”

빗소리 사이로, 철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하나의 철근이 은율을 바라보고 있는 유건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나영의 손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한 번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아아악! 여보!”

나영이 비명을 질렀다. 은율은 입도 달싹이지 못한 채 그대로 넋을 놓아 버렸다.

“은율아!”

어머니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좌석의 가운데에 걸터앉아 있던 은율의 몸이 강한 충격과 함께 좌석에 밀착되어 버렸다. 두 번의 커다란 충격이 오른쪽 복부를 관통했다.

은율은 순간적으로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나영의 놀란 눈이 제 오른쪽 복부에 닿아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를 따라 은율도 시선을 내렸다.

유건의 머리를 관통한 것과 같은 철근 2개가, 그의 복부를 완벽히 관통해 있었다. 직접 두 눈으로 그것을 보고 나서야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악……! 아……!”

은율은 사람들이 심한 격통을 느낄 때 왜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지르고 싶어도 너무 아파서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소리는 목에서만 맴돌며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고, 생리적으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으, 은율아! 그대로 움직이지 마!”

나영은 단박에 은율의 상태를 눈으로 훑고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은 긴장과 초조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때.

카라랑- 하는 철근들의 마찰음이 들렸다. 철근 뭉치 하나가 또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중 2개가 은율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위치상 그것은 머리와 어깨뼈를 정확히 꿰뚫을 터였다. 은율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로 제 아버지와 같은 죽음을 예견했다.

철근이 떨어져 내리며 앞 유리를 관통했다. 그대로 미끄러져 내리던 철근은 은율의 이마를 향해 속도를 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은율의 머리와 어깨뼈가 아니라 바로 옆 좌석에 박혔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은율이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멈췄다.

은율은 고작 20센티미터 남짓 앞에 있는 나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은율을 바라보는 상태로 철근에 박혀 매달려 있었다. 하나는 오른쪽 어깨뼈를 뚫었고, 하나는 오른쪽 가슴뼈를 관통했다. 철근이 그녀의 뼈에 박히면서 궤도가 틀어졌기에 은율이 살 수 있었다.

나영이 극심한 통증으로 인한 신음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어, 어머……니……. 어머니!”

은율은 제 복부의 통증을 잊고서 소리를 높였다. 복부가 찢어질 듯 아파 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철근에 뼈를 관통당해 의도치 않게 매달리게 된 나영이 피를 왈칵 토했다. 그녀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나영이 한 차례 더 피를 토하고서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율……. 움직이지…… 병원에 빨리 옮겨지면…… 살…… 수 있…….”

목소리가 자꾸만 끊겼다. 은율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계속 저었다.

“왜, 왜……. 어머니, 왜…….”

싫어했잖아.

미워했잖아.

경멸했잖아.

그런데 왜…….

나영이 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팔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은율의 보드라운 볼에 닿았다. 그녀는 제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며, 힘겹게 미소 지었다.

“다…… 괜찮을…… 거니까…….”

나영의 흐릿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미안해…….”

오늘은 나영에게 처음으로 듣는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또 처음으로, 그렇게 듣고 싶어 하던 그 말들이 모두 못 들은 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미소 짓던 나영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또 한 번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나영이 콜록거렸다. 은율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그만, 그만 말해요. 피가…… 피가 계속…!”

그녀가 은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영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군의관 출신인 그녀가 자신의 현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나영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죽고…… 싶지…… 않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직……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는데…….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만해요……. 정말 죽는단 말이야…….”

흔히들 출혈이 심한 사람에게는 명을 재촉하는 일이라며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꿋꿋이 제 할 말을 하고 숨을 거두곤 한다.

은율은 이제,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죽고 나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게 되니까.

아무 말도 남길 수 없게 되니까.

“내……가……, 엄마가…… 미안해……. 이제야 겨우…… 너한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영은 그렇게, 은율 앞에서 눈꺼풀을 굳게 닫은 채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은율은 제 볼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나영의 손을 붙잡았다. 은율은 연신 그녀를 불렀다. 더 가까이 가서 끌어안아 주고 싶은데, 복부를 꿰뚫은 철근은 너무도 단단하게 그를 붙잡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죽어 버린 나영의 얼굴이 있었다. 은율은 그 얼굴에 손을 대고 그녀를 다시 한번 ‘어머니’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시끄러운 저 비처럼, 이미 그녀가 차가워져 있을까 봐. 싸늘해져 있을까 봐.

목으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왔다. 크게 기침하며 뱉어 내자, 새빨간 핏덩이가 토해져 나왔다. 은율은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나영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자꾸만 감기는 눈에 끝까지 나영의 얼굴을 담았다.

갑자기 뒷좌석 문이 벌컥 열렸다. 세찬 빗줄기 사이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여럿이 보였다. 은율은 좌석에 머리를 댄 채 눈만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비 때문에 말소리가 일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꺼내는 건……!”

“그럼 저대로……?! 철근이……!”

“……가 우릴 죽일 거야!”

“애당초 저 꼬맹이를 데려가야……!”

저들끼리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들으며 은율은 힘겹게 버티던 눈꺼풀을 그대로 닫아 버렸다.

*  *  *

이야기를 마친 은율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허리를 잡은 진환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 후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누군가가 절 유괴하려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날 집 밖에 이미 그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제가 그런 일에 대해 모르게 하려고 수면제를 먹여 차에 태웠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제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랐던 거겠죠.”

유건은 은율을 엄하게 대하면서도 과보호하기 일쑤였다. 학교나 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큰 소리로 은율을 혼냈고, 일찌감치 마련해 준 휴대폰이 제때 연락되지 않는 날에는 심각한 얼굴로 그를 찾느라 사색이 되었다.

은율은 제 뒤통수를 진환에게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아직도 선명한 그날의 기억으로 인해 복부가 아려 왔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다시 나타나진 않았습니다.”

지금도 궁금했다. 그들은 왜 자신을 노렸으며, 왜 사고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은율의 머릿속에 나영과 같은 얼굴, 다른 느낌의 쌍둥이 이모 정가영이 떠올랐다. 어렴풋한 추측에다가 아무 정보도 없으니 확신할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PTSD에 대해 알게 된 건 퇴원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비가 오면 그날의 일이 떠오릅니다. 절 도망치게 하려던 아버지, 절 구하다 눈앞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두 분은 비가 오면…… 매번 절 찾아오십니다.”

은율이 제 복부를 잡고 있는 진환의 팔을 붙들었다. 은율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차라리 그날……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그 코코아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제가 깨어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두 분이 돌아가시는 일은 없었을지도…….”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미 8년이나 지났다.

진환이 은율의 어깨에 제 턱을 대었다. 그의 숨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당신 탓이 아니야.”

은율의 어깨가 흠칫했다. 진환은 그의 허리를 붙든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더욱 끌어안았다.

“당신 탓이 아니야…….”

복부에 느껴지던 통증이 점점 아련해졌다.

은율은 진환의 손등에 제 손을 겹치고서 눈을 감았다.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들리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사라져 가는 걸 느꼈다.

*  *  *

하진이 온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땀범벅이 되어 들어온 하진은 진환의 품에 곤히 잠들어 있는 은율을 보며 안도했다. 비에 절은 우산을 입구 구석에 놔둔 하진은 은율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은율이 공부용으로 사 둔 작은 스탠드를 켰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놀라지 않도록 전등의 머리 부분은 벽을 보게 했다. 벽에서 반사된 작은 빛이 좁은 원룸 내부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진이 입고 있던 재킷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은율의 앞에 앉았다. 진환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눈을 버젓이 뜨고 있었다.

은율의 지친 얼굴을 바라보던 하진이 진환을 노려보았다.

“다 들었어요?”

진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환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대부분 이야기한 것 같았다.

“사고 당시 이 사람을 유괴하려고 했다는 사람들이란 게 혹시 저번에 말한 그놈들인가?”

진환은 하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예상대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그들이 아직도 노리고 있다는 걸 몰라요.”

“내가 도와주지. 누군지 말해.”

단호한 그의 말에 하진이 잠시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말하기 전에, 그쪽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들어야겠어요.”

하진이 팔짱을 끼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금은 형을 어떻게 생각해요?”

진환의 대답에 따라 그에게 어느 정도를 오픈하느냐가 결정된다. 어쭙잖은 마음이라면 여기서 정리를 시킬 테고, 그렇지 않다면…….

진환이 제 품에 있는 은율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가 진지한 눈으로 은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눈을 들어 하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환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서.”

하진이 눈을 크게 떴다. 단호하고 또렷한 말을 들으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

허탈한 숨소리가 터졌다. 하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서 씁쓸히 웃었다.

“저번엔 그렇게나 둔하더니 그새…….”

다시 고개를 든 하진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젠 알고 있죠? 형이 뭘 두려워하는지.”

진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화젯거리가 될 거예요. 형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언젠가는 형이 겪은 그날의 사고, 그리고 PTSD에 대해 밝혀지겠죠.”

하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은 자신이 부모님을 빼앗아 갔다는 죄책감 때문에 언제나 우리만 챙겼어요.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해 본 적도 없죠. 형은 이번에도 연기를 하다가 혹시 사람들이 그 일을 꺼내서 우리가 부모님 생각에 힘들어할까 봐, 그리고 그날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신 때문에 걱정할까 봐, 그게 무서운 거예요.”

요즘 네티즌들은 굉장히 무섭다. 관심이 가는 게 있으면 ‘수사대’라는 이름까지 붙을 정도로 집요하게 찾아내고야 만다. 은율이 유명세를 타면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 많은 이들이 들러붙을 것이고, 네티즌들도 그의 뒤를 캘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당시 화젯거리였던 그 사건과 은율의 PTSD에 대해서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쪽은 그 일이 밝혀지더라도 형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도와줘요.”

하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형 곁에 있어 주란 말이에요. 난……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씹어 뱉는 듯한 그 말이 왜 이리 아프게 들리는 걸까.

“그리고 차라리 형을 아주 유명하게 만들어 줘요.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난리가 날 정도로 만들어 달라고요. 그래야 그 사람들도 섣불리 손대지 못할 테니까요.”

언제 ‘케이’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은율이 연기에 관심을 갖고 진환이 그 조력자로 등장한 것은 최고의 희소식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유명인을 건드리는 건 쉽지 않다. 하진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이모라는 뒷배보다 더한 최고의 방패였다.

과거가 드러날 확률이 크다는 점에 대해 은율이 걱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동생들’이었다. 달갑지 않긴 했지만, 일종의 걸림돌인 자신과 지희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며 응원해 준다면 분명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쪽을 믿고, 내가 아는 걸 전부 얘기해 줄게요.”

은율의 과거, 은율의 PTSD에 대해 알게 되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남자다. 오히려 평생 함께 있길 바란다며 고백을 털어놓았다. 진환의 진한 눈동자에는 명백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형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곧 하진의 입이 열렸다.

그것은 은율이 모르는, 은율을 둘러싼 이야기였다.

*  *  *

잠에서 깬 은율은 모로 누운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을 가리던 커튼은 좌우로 깔끔하게 걷혀 있었고, 유리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노을빛은 선명하기만 했다.

비가 왔다는 것을 상기한 은율이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 낸 그가 무릎을 꿇고 팔로 바닥을 짚어 창가로 기어갔다. 지면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있긴 했지만, 비가 그친 지 몇 시간은 된 상태 같았다.

은율의 머릿속에 진환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살폈으나 집에는 아무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돌아간 건가.’

그의 온기가 아쉬웠다.

‘약을 먹지 않고 견딘 건 처음이야.’

신기했다.

심할 때는 비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발작하며 깨어났고, 그때마다 약이 없으면 안정할 수가 없었다. 또 깰까 봐 겁이 나서 수면제를 꼭 끼고 살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하늘이 우중충한 날이면 그것을 먹어야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신경안정제 없이 버텨 냈고, 수면제를 먹지 않았음에도 깊은 잠을 잤다.

이 모든 게 진환 덕분인 것 같았다.

은율의 낯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왠지 불안했다.

‘혹시…… 날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을 달래 주고 이야기를 들어 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단지 그 이유로.

은율은 몸이 점점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불안한 마음은 그의 몸을 갉아 먹기 시작했고, 지친 몸은 쉽사리 어둠을 받아들였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그때였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율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몸을 웅크린 채 떨던 은율이 현관을 바라보았다.

노을빛을 받은 진환의 얼굴이 적잖이 놀라 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한달음에 다가왔다.

“일어났어? 괜찮아?”

진환의 산뜻한 향수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은율은 몸을 감싸고 있던 불안함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진환은 심각한 얼굴로 은율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아직 안 좋아. 좀 더 자자.”

은율이 고개를 푹 숙이며 진환의 코트 자락을 잡았다.

“가신 줄…… 알았습니다.”

진환이 떨리는 은율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 은율 씨 두고 어디 안 가.”

진환이 은율의 뒷머리에 제 손을 끼워 넣었다. 그러고선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바람 내음이 섞인 진환의 품에 얼굴을 묻은 은율이 그를 꼭 끌어안았다.

“형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은율이 살짝 웃으며 말했지만 진환의 얼굴은 복잡하기만 했다.

“어……, 기분 나쁘셨습니까?”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은율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진환이 그를 품에서 떼어 내고서 설핏 웃었다.

“형이 갖고 싶어?”

은율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는…… 동생들밖에 없어서…….”

현재 은율의 주변에는 그가 형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동급생 중에는 저와 동갑이거나 그보다 어린 학생들뿐이었고, 선배들에겐 선배라는 호칭 이외에 써 본 적이 없었다. 스턴트팀 사람들은 대부분 은율보다 나이가 많았으나, 분위기상 ‘형님’이라고 부르고 다녔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

은율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허락을 구하듯 눈을 깜빡였다.

“불러 봐. 형- 하고.”

은율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머뭇거렸다. 진환이 그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심신이 약해져 있어서인지, 이런 작은 스킨십에도 움찔하는 게 참으로 귀여웠다.

“어서.”

다정하게 독촉해 본다. 은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형.”

“진환이 형.”

“……진환이…… 형…….”

시키는 대로 하는 은율이 너무 귀여워, 진환은 다시금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앞으로 그렇게 불러. 듣기 좋다.”

은율이 얼굴을 붉히며 진환을 밀어냈다.

“진환 씨는 왜 이리…!”

“진. 환. 이. 형.”

“……진환이 형은 왜 이리 스킨십이 많습니까? 자꾸만 손도 잡고, 안아 주고, 거기다 키스까지…….”

거기까지 말한 은율의 얼굴이 삽시간에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그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왜 그래? 괜찮아?”

“……괜찮게 생겼습니까?”

은율이 드물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마저 너무나 귀여워, 진환은 자꾸만 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은율이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첫 뽀뽀에 첫 키스까지…….”

작은 소리였지만, 진환은 분명히 들었다. 그의 눈이 멍해졌다.

“첫 키스였나?”

은율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진환이 은율의 볼을 가볍게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선 억지로 눈을 맞춰 진지하게 물어본다.

“처음이었어?”

“당연하죠. 전 진환 씨와 달리 연애도 못 해 봤고…….”

“나도 연애해 본 적 없어.”

은율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정말이야.”

진환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믿지 않은 은율이 눈을 부라리며 그의 가슴팍을 한 대 퍽 쳤다. 매서운 손맛에 진환이 윽 소리를 냈다.

“그런 사람이 왜 남자인 저한테 그러는데요? 놀리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하니 은율은 기분이 팍 상했다. 진환이 그에게 맞은 가슴팍을 손으로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놀리는 거 아니야. 근데 기분 좋네.”

“맞는 걸 기분 좋아하다니, 변태인가 봐요.”

그것 때문이 아닌데.

자신만큼이나 둔한 은율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변태인가.”

진환은 손을 뻗어 또 한 번 은율을 끌어당겨 안았다. 식은땀에 절어 땀 냄새가 역할 만한데도, 이상하게 은율의 냄새는 무엇 하나 싫지 않았다.

‘단단히 빠졌군.’

진환은 연신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으며 은근히 그에게 물었다.

“근데…… 우리 친구 된 거 맞지?”

진환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꼼지락대던 은율이 동작을 멈추었다.

“아마……도요.”

애매하게 대답하니, 진환이 귓가에 대고 웃는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나도 호칭을 좀 바꿔야겠어.”

진환이 은율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언제까지 서먹하게 은율 씨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뭐……, 편하게 부르십시오.”

호칭 정도야 뭐.

“율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예……?”

“우리 율이.”

“앞에 한 글자 빠졌습니다.”

“일부러 뺀 거야.”

은율이 진환을 홱 밀쳐 냈다. 호칭 하나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린애 부르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여태껏 여동생 지희만이 부르던 호칭을 진환이 입에 담으니 왜인지 닭살이 돋을 것만 같았다. 진환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왜, 어때서. 예쁘기만 한데.”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진심이야.”

진환이 얼굴의 장난기를 지우고 은율의 어깨를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현관 근처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이제 보니 그 쇼핑백에는 유명한 죽 체인점의 로고가 그려져 있다.

“밥부터 먹자, 율아.”

“아니, 그러니까…….”

“율이는 삼계죽하고 소고기죽 중에 뭘 더 좋아하지?”

“어……, 둘 다 좋습니다.”

“그럼 가운데 놓고 같이 나눠 먹자.”

“그건 좀……. 그보다 호칭은……!”

“율아, 반찬도 꺼낼까?”

“아, 제가 꺼내겠습니다.”

은율은 저도 모르게 진환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진환에게 정신이 팔린 덕일까.

밖은 아직도 우중충했고 미미하게 비 내음까지 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몸의 떨림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고, 처지기만 하던 기분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훨씬 나아져 있었다.

신기한 느낌에, 은율의 입가에도 미소가 사르르 번졌다.

“율아, 컵은 어디 있어?”

그러다 이내, 아직까지 적응되지 않는 호칭에 미소가 일그러졌다.

*  *  *

수요일은 강의가 오전 위주로 몰려 있다. 그 때문에 보통 수요일 오후와, 강의가 없는 금요일에 대부분의 스턴트 액션을 몰아서 찍곤 했다.

은율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대충 점심을 먹고 원효대교로 향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저 멀리 원효대교 한복판에 사람들이 가득한 게 보였다. 그 한쪽에는 스태프용 차량과 연예인 밴 2대가 서 있었다.

‘환이 형도 와 있나 보네.’

전날, 하도 율이라고 부르기에, 그도 확 짜증을 내며 ‘환이 형’이라고 불러 버렸다. 그랬더니 진환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노림수가 먹혔나 싶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다시 ‘진환이 형’이라고 부르니 이젠 한사코 ‘환이 형’이라고 부르라 졸라 댔다. 그것은 진환이 자정 무렵에 은율의 집을 나설 때까지 거의 세뇌급으로 이루어졌다.

은율은 그들에게 다가가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진환과 나눈 메시지의 마지막엔 ‘도착하면 전화해’가 적혀 있었다. 은율은 스태프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진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갔을까.

눈여겨보던 익숙한 밴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 수수한 차림을 한 진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근처의 여성 스태프들이 술렁거렸다. 아직 촬영을 시작하지 않았던 터라 밴 안에 몸을 싣고 얼굴도 보이지 않던 진환이 갑자기 튀어나오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어머나’를 연발했다.

진환이 스태프들 사이를 지나 은율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휴대폰이 단단히 들려 있었다.

은율은 걸고 있던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새 눈앞에 다가온 진환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촬영 준비 중인 상태라 몸은 바빠도 눈은 한가하던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옷 갈아입어야 하지? 옷은 내가 받아 뒀으니 내 차에 가서 입어.”

왜인지 급한 느낌이다.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끌려가던 은율은 진환의 밴 뒤에 있던 또 다른 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오는 걸 보았다.

“어! 저번 그 대역분 맞으시죠?”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율은 진환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서 다가온 이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현우 씨.”

은율의 앞에 선 현우가 아이돌 특유의 화사한 얼굴로 웃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그보다…….”

현우의 눈이 번뜩였다. 부담스러운 눈빛에 은율이 뒤로 한 발 물러섰지만, 현우는 두 걸음을 내디뎌 그의 바로 앞에 섰다.

“진짜 이미지 다르네요. 정말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현우의 눈에 호기심과 흥미가 감돌았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안경 벗은 거 봐도 돼요?”

현우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여 댔다. 그러자 난감해하던 은율의 뒤에서부터 팔이 뻗어 나와 그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은율의 몸이 두툼한 백팩과 함께 그 팔의 주인 품으로 폭 들어갔다.

“안 됩니다.”

진환이 은율 대신 대답하며 싸늘하게 눈을 치떴다. 그제야 진환의 존재를 알아챈 현우가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김현우 씨는 참 예의가 부족한 것 같군요.”

“아……, 죄, 죄송합니다.”

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환에게 머리를 숙였다.

“왜 나에게 사과를 합니까? 율이에게 해야지.”

“죄송합니다. ……율이?”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진환의 손등을 꼬집고 있었다.

“왜, 문제 있어?”

“예, 좀 많이…….”

은율이 민망해하며 꼬집는 손에 힘을 꽉 줬다. 그제야 진환이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치웠다.

“먼저 차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이진환 씨.”

진환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은율이 현우에게 미안하다며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한 뒤 곧바로 몸을 돌렸다. 밴으로 다가가 문을 여는데, 진환이 은율의 옆에 얼른 다가섰다.

“율아,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형 소리 듣고 싶으시면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게 율이라고 부르지 좀 마세요. 스킨십도 하지 마시고요.”

“그래서 나도 환이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스킨십은…… 자제해 볼게.”

차에 올라탄 은율이 문 앞에서 진환을 홱 노려보았다.

“저 옷 갈아입는 동안은 출입 금지입니다.”

일부러 그리 말하며 문을 확 닫아 버렸다. 진환은 자기 차에서 추방된 채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환은 차 문에 등을 대고서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의 입꼬리는 당최 내려올 생각을 않았다. 스태프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꼈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은율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현우는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며 불만 가득한 얼굴을 했다.

‘아니, 내 대역 배우인데 왜 저 사람과 더 친한 거야?’

괜히 질투심이 일었다.

저번 촬영 때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헤어져서 아쉬움이 많았다. 설마하니 저렇게 평범한 옷에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존재감 없는 사람이 그 화려하고 아름답던 대역 배우였다니. 그날 곽철민 감독을 비롯한 조연출, 조감독 등등이 달라붙어 같은 말을 해 주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현우는 자신의 밴으로 돌아와 신경질적으로 차 좌석에 몸을 묻었다. 뒷좌석에서 휴대폰을 하던 단발머리 여인이 껌을 짝짝 씹으며 물었다.

“왜 또 신경질이야?”

“아, 몰라!”

현우가 다리를 꼬고서 팔짱을 꼈다. 그의 옆자리로 옮겨 오면서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젊은 여인이 킥킥거렸다.

“차였냐?”

“뭐?!”

현우가 당황했다.

“뭔 소리야, 인사하러 갔다 온 건데. 그리고 난 별로……. 미진이 누나, 듣고 있어?”

“엉? 어어, 듣고 있어.”

말 걸어 놓고 딴짓을 하며 웃는 걸 보니 열이 올라왔다. 현우가 그녀의 휴대폰을 확 뺏어 버렸다.

“이런 거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날 더 잘생기게 만들지 고민 좀 하란 말이야!”

“어쩌라고, 이 자식아! 뽀샤시 메이크업을 해 주고 싶어도 오늘 너 뒤지는 날이거든?!”

오늘 현우가 촬영해야 할 부분은 피폐한 얼굴의 강민이 한강에 뛰어내려 자살 기도를 하는 장면이다. 당연하지만, 잘생겨 보일 메이크업을 할 필요가 전혀 없을뿐더러, 해서도 안 된다.

“누나는 꼭 말을 해도…! 뭐야, 또 이 남자 파고 있어?”

미진이 뭘 그리 열심히 하나 했더니, 근래 질릴 만큼 떠도는 사진을 보며 헤벌쭉하고 있었다. 현우가 지하철 문에 기대어 있는 뿔테안경의 남자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잘한다, 아주. 잘나가는 아이돌 스타일리스트가 자기 아이돌 핥을 생각은 안 하고 일반인한테나 관심 주고……. 어휴.”

미진이 현우의 손에서 제 휴대폰을 낚아챘다.

“내가 핥기 시작하면 사생팬 저리 가라야. 감당할 수 있겠냐? 그리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너보다 이 사람이 백배는 잘생겼거든?”

“그건 아니다! 그리고 이 사람 분명히, 그, 뭐냐, 하여튼 분칠한 거라니까?!”

“이 누님이 너희들 얼굴에 분칠해준 경력이 몇 년인데 그것도 못 알아볼 것 같냐? 이런 게 바로 생얼이야.”

“그럼 성형이겠지!”

“내가 너 보자마자 성형한 부위 짚어서 견적 줄줄이 읊었던 거 생각 안 나? 천연이니까 내가 이리 목을 매지.”

도촬 사진이 아니라 정식 사진이었다면 분명 휴대폰 화면이 그 남자의 얼굴로 도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현우는 미진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이진환이고 지하철 미남이고 간에, 잘생긴 놈들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다.

제 대역 배우만 빼고.

*  *  *

은율은 제 허리춤에 둘러진 두꺼운 벨트를 직접 체크했다. 이음새는 새것인 양 손상된 부위 하나 없었고, 와이어를 걸 옆구리 좌우의 쇠붙이도 아주 단단했다. 애당초 겁을 먹지도 않았지만, 흠잡을 데 없이 세팅되어 있다는 것에 더욱 안심이 되었다.

은율은 와이어벨트를 세팅하느라 흐트러진 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촬영 현장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진환과 현우가 낯익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네 탓이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너 그렇게 약한 소리 하는 놈 아니었잖아?!”

진환의 악이 담긴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의 절절한 감정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한강 난간에는 현우가 자신과 똑같은 장비를 찬 채로 서 있었다. 하나 다른 점이라면, 그의 허리에는 긴 와이어가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현우가 괴로운 얼굴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미안……! 으왓!”

불안하던 몸이 일순 휘청거리나 싶더니, 현우가 크게 허우적거렸다. 가까스로 난간에서 내려와 숨을 고르는 그가 눈물범벅인 얼굴을 소매로 대충 닦아 냈다. 철민의 한숨 섞인 컷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감독님! 진짜 무서워 죽겠어요!”

현우가 투정을 부렸다. 철민이 제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그래서 와이어 달아 줬잖아! 떨어져도 와이어 때문에 추락 안 해! 왜 잘 견디다가 꼭 마지막에 그러냐고!”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하고 몸을 기울여 떨어지는 척하는 게 현우가 할 일이었다. 그 뒤는 대기 중인 은율이 벨트에 와이어를 걸고 멋지게 뛰어내리면 되는 것이다.

“10분 휴식! 현우 씨는 난간 위에서 연습이라도 좀 해!”

“예?!”

현우가 암담한 얼굴로 좌절했다.

진환은 곧바로 철민에게 불려 갔다. 두 사람은 잠시 대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금 전 장면을 찍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고개도 끄덕이고 뭔가 제시하듯 말하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현우는 황망한 얼굴로 난간에 기대어 땅만 보고 있었다. 한 스태프가 격려하며 마실 것을 건네주었지만, 그는 손짓으로 거부했다. 호의를 베풀던 스태프가 떠나자,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은율은 고민하다가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음에도 현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은율이 그처럼 난간에 등을 기대고서 말했다.

“난간 위에 서 있는 공포는 굉장하죠. 사실 저도 처음엔 엄청 무서웠어요.”

아무도 자신이 느낀 공포를 모른다며 속으로 욕도 해 보고 자책도 해 보던 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똑같은 옷에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은율이 보였다. 연예인은 자신인데 왜 같은 스타일을 하고도 진 느낌이 드는지 의문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은율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현우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누구든 이런 좁은 난간에 두 발 딛고 서 있으면 무섭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발을 올리자마자 난간을 붙잡고 기어 내려올 거고, 또 어떤 사람은 다리가 너무 떨려서 화면에 그게 다 나오는 경우도 있겠죠.”

아무리 와이어가 지탱해 줄 거라지만, 막상 몸이 흔들려 떨어지게 된다면? 와이어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와이어 조작이 잘못되어 그대로 한강에 추락해 버리면?

공포에 노출된 사람은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는 법이다. 그 생각이 또 다른 공포를 만들고 새로운 두려움을 불러들여, 결국 과도한 압박감으로 인한 트라우마까지 생길 수도 있다.

그 감각은 다른 누구보다 은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그 감각에 제대로 노출되고 나면 떨쳐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은율이 몸을 돌려 난간 위에 두 팔을 짚었다. 현우도 얼결에 그를 따라 몸을 돌려 기댔다.

“현우 씨는 잘하고 있습니다. 난간에서 몇 번을 내려와도 다시 그 수만큼 올라가는 것만 봐도 그래요. 최소한 현우 씨는 그 공포를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난간에서 보이는 풍경을 그저 단순한 바닥재라고 생각하세요. 앞으로 발을 내디딘다 해도 돌처럼 받쳐 주는, 그런 바닥재 말입니다.”

은율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와이어가 단단히 지탱하고 있어서 난간 앞으로 발을 내디뎌도 그대로 서 있게 될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우는 제 옆구리에 걸린, 얇지만 질기고도 질긴 와이어를 올려다보았다. 걸쇠에 손을 옮겨 그 단단함을 손수 느껴 보았다. 와이어벨트는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딱 맞게 조여져 있었고, 그 벨트는 정장 바지의 벨트 고리들이 너도나도 꽉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현우가 한층 나아진 혈색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 은율의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흩날렸다. 현우는 할 말도 잃고서 멍하니 은율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도 눈을 맞춰 왔다.

현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새삼 자신의 스타일리스트 미진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현우가 홀린 듯한 눈으로 은율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당장이라도 은율의 보드라운 볼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런 현우의 손목이 누군가의 큰 손에 붙잡혔다.

“김현우 씨.”

음산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현우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현우의 손목을 굳게 붙잡은 채, 진환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10분, 지났어요.”

그새 휴식 시간으로 주어진 10분이 다 지나갔다. 현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난 뭘 하려던 거지.

진환이 현우의 손목을 잡은 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현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율이한테 조언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아까처럼 또 NG 내면…….”

진환이 현우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정말 죽여 버릴 줄 알아.”

귀에 나이프라도 꽂아 넣은 것만 같았다. 현우가 파리한 안색으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손을 놓아준 진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은율이 팔짱을 끼고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다. 진환이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율이’라는 호칭만은 제대로 들었다.

“김현우 씨, 준비할게요!”

스태프 하나가 달려와 현우의 와이어를 다시금 체크해 주었다.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난간에 어렵사리 올라가는 현우에게, 은율이 격려의 눈웃음을 보여 주고는 몸을 돌렸다. 현우는 일순 삐끗했지만, 다행히 난간에 무사히 설 수 있었다.

은율의 뒤에 바짝 붙은 진환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은율은 그의 손에 의해 ‘이진환’이라고 적힌 의자에 반강제로 앉혀졌다.

“서서 기다리지 말고 여기서 보고 있어.”

진환이 의자에 걸쳐 둔 자신의 코트를 펼치고서 은율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끝자락이 바닥에 닿자 은율이 깜짝 놀라며 코트를 끌어 올렸다.

“비싼 코트 망가져요. 어딘가에 걸어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람이 세. 가만히 있다 보면 추우니까 얌전히 덮고 있어.”

진환은 기어코 제 코트로 은율의 무릎을 덮었다. 진환의 고집에 진 은율이 결국 손에서 힘을 뺐다.

두 사람은 나란히 현우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태프의 손을 굳게 잡은 채 난간 위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손을 잡아 주는 스태프가 천천히 손을 떼며 철민의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아직 준비 중인 모습을 보며 진환이 은율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졸지에 내려다보게 된 은율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스턴트맨이 전용 좌석에 앉고 배우가 쭈그려 앉아 있는 건 보기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난 곧 연기하러 갈 테니까.”

진환이 바람에 흐트러진 은율의 머리카락을 손수 정리해 주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진환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맞춰 감독이 스탠바이를 외쳤다.

진환이 친근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아닌, 평소의 차갑고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 카메라 앞에 섰다. 아까보다는 훨씬 자세가 반듯한 현우가 난간 위에서 깊이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은율은 현우가 부디 겁먹지 않고 자연스레 연기할 수 있길 바랐다.

은율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현우는 신기하게도, 연기하는 내내 떠는 기색 하나 없이 마지막 대사를 끝냈다. 긴장해서 목소리까지 떨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감정까지 제대로 담아 대사를 했다.

은율은 자신의 해석과 다른 현우의 강민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직 연기가 서투른 감이 있긴 하지만, 현우의 악에 받친 강민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팔을 벌리고 한강으로 뛰어내리는 척만 하면 현우의 연기는 끝이 날 거다. 은율은 저도 모르게 진환의 코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힘을 빼고 눈을 감은 현우가 앞으로 서서히 쓰러져 갔다. 당장이라도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모습에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현우의 몸은 45도 정도 기울은 지점에서 덜컥 멈췄다.

다행히 현우는 은율의 바람처럼 단번에 OK를 받아 내었다.

OK 사인을 들은 현우는 그제야 제 몸이 허공에 멈춘 것을 깨달았다. 난간에 발끝을 걸친 채 떨어질 듯 말 듯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기겁하며 몸을 파닥거렸다. 졸지에 난간에서 발이 떨어지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게 된 현우가 졸도할 듯 비명을 질러 댔다.

겨우 바닥에 발을 붙이자, 탈진한 것처럼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매니저 건우가 달려와 얼른 힘없는 몸을 부축했다.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와이어를 제거해 주고 나서야 그가 비척거리는 걸음을 떼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음에도, 현우는 조금 전 자신의 촬영 장면을 보기 위해 철민에게 다가갔다. 철민이 웬일로 그에게 웃어 주며 모니터를 보여 준다. 생생한 장면을 확인한 현우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웃는 현우를 보고 있자니, 은율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조언이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철민의 옆에서 재잘거리며 좋아하던 현우가 은율을 발견하고선 그에게로 냉큼 달려왔다. 그가 은율의 앞에 서서 머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주변의 스태프들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주목하는 게 느껴졌다. 진환의 코트를 의자에 걸쳐 놓고서 몸을 일으킨 은율이 당황하며 그를 만류했다.

“김현우 씨, 감사라뇨. 일단 고개를 좀…….”

“서은율 씨 덕분에 OK 받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는 현우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은율이 그의 어깨를 칭찬하듯 두드렸다.

“김현우 씨가 잘하신 거죠.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현우가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려 기분 좋게 웃었다.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이글거림에 현우가 흠칫 놀랐다.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니, 역시나 진환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NG 냈으면 날 죽였을지도 몰라…….’

저건 칼을 담은 눈빛이다.

무시무시한 시선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들 사이로 불쑥 철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율아, 바로 되겠냐?”

“예, 감독님.”

곧바로 대답한 은율이 현우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제야 이글거리던 진환의 눈빛이 사그라졌다.

은율은 현우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그가 연기했던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와이어 걸쇠를 들고 있던 스태프가 은율의 벨트에 그것을 걸었다. 당겨 보고 흔들어 보며 걸쇠가 멀쩡한지를 체크했고, 일부 스태프들은 와이어의 조임새와 볼트 부분을 점검했다.

현우와 달리 은율은 한강에서 떨어져 입수까지 진행해야 했다. 비록 와이어를 써서 추락 속도를 줄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충격이 아예 없을 순 없었다.

게다가 작중에서 강민은 한강에 떨어져 죽은 것처럼 되어 있지만 나중에 죽지 않고 돌아와 태진과 힘을 합친다. 즉, 강민은 이곳에서 떨어진다 한들 죽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현우가 연기한 강민의 추락 부분에서,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머리부터 떨어졌다. 은율은 와이어를 연결해 추락하며 적절하게 몸을 돌려 다리부터 추락하게끔 해야 했다. 20미터가량의 높이에서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리얼리티를 위해 수면에 다리부터 떨어져 그 충격을 일부 흘려보내야 했다.

말이야 쉽지, 실제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다. 그냥 추락하는 것이라면 가만히 몇 초를 흘려보내면 될 일이지만, 자세를 고쳐 떨어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너무 빨리 자세를 고치면 의도적인 게 티가 날 테고, 너무 늦게 자세를 고치면 어정쩡하게 떨어지게 되어 재촬영을 해야 했다.

한 번 떨어지면 그 몸이 물에 푹 젖을 게 뻔한 촬영이다. 재촬영은 수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기다리게 하는 꼴이 된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은율은 스태프들의 정비가 완료되자 날렵하게 난간을 손으로 짚어 홀로 그 위에 올라섰다. 아찔한 그 모습에 스태프들이 술렁거리며 놀랐지만, 은율은 너무도 태연하게 난간 위에 바르게 섰다.

난간 위에서 한강을 내려다본 은율은 서서히 긴장되는 몸을 느끼며 심호흡했다. 그는 조금 전 현우가 취했던 포즈를 상기하며 철민의 사인을 기다렸다.

“레디!”

현우가 했던 것처럼 팔을 약간 벌린 채 자세를 잡았다. 주변의 차 소리와 갖은 소음이 어느 순간,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은율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액션!”

드디어, 연기를 허락하는 신호가 들려왔다.

은율은 눈을 감고 그대로 앞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그를 주시하는 이들 모두가 숨을 멈췄다. 바람에 망토처럼 흩날리던 정장 재킷이 작은 날개가 되어 아름다운 하강을 시작했다.

은율은 제 몸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한강이 다가오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은율은 제 머릿속에서 계산한 타이밍을 수정하며 허리 축과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머리부터 떨어지던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계산상, 한강에 처박히는 시간은 약 3초 뒤.

2초 안에 자세를 완벽히 바꿔야 했다. 허공에 거의 한일(一)자가 되어 떨어지던 은율이 허리에 바짝 힘을 주고 다리를 구르듯 홱 내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자세가 바뀌어, 허공에 일어선 모양새가 되었다.

정확히 2초 만에 자세를 바꾼 은율은 곧바로 한강에 푹 잠겼다. 싸늘한 한강 물이 그의 몸을 휘어잡았다.

와이어로 인해 떨어지는 속도도 현저히 감소했고 자세까지 바꿔 다리부터 떨어지긴 했어도 충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은율은 갑작스런 충격에 머리에 순간적으로 두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두통은 오래가지 않았고, 은율은 의도적으로 한강 속에 약 10초간 잠수해 있었다.

은율이 물 위로 올라온 것은, 허리를 잡고 있던 와이어가 위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은 후였다. 컷 사인이 나왔단 신호에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은율이 몇 번 콜록거리면서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시원스레 쓸어 넘겼다.

한강 물 위에 머리를 내놓고 있던 은율이 저 멀리 산책로에 장비를 세팅해 촬영 중이던 카메라 감독을 바라보았다. 근처에는 꽤 많은 일반인들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강 다리에서 누군가 뛰어내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여러모로 놀라울 만했다.

카메라 감독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붙여 ‘O’ 표시를 만들어 보였다. 다행히 한 번에 OK가 난 모양이다.

은율의 몸은 곧바로 끌어 올려졌다. 바람이 상당해서 떨어질 때만큼 빠르게 끌어 올릴 수가 없어 천천히 올리다 보니, 젖은 몸이 바람을 맞아 으슬으슬했다.

뛰어내렸던 다리까지 끌어 올려져,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사뿐하게 난간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철민은 웬일로 모니터 앞에 있지 않고 은율이 올라올 지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간에서 훌쩍 뛰어내린 은율이 다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허리의 와이어 걸쇠를 떼어 냈다. 그의 어깨에 커다란 타월이 덮어진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타월을 손수 덮어 준 진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은율이 가볍게 웃어 주었다.

“멀쩡합니다. 감사합니다.”

진환은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굳은 표정을 풀었다. 안도한 진환의 옆에 철민이 섰다. 그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낄낄, 한 방에 성공할 줄 알았다.”

“다행입니다.”

자신이 한 일이 인정받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나 철민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두말하지 않고 인정해 줄 때는 더더욱.

“대단하세요!”

그들 사이로 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콧김을 내뿜으며 은율을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바짝 다가온 현우가 은율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진짜, 진짜 멋있었어요!”

현우의 달뜬 목소리에 주변 스태프들이 일제히 웃어 댔다. 현우가 민망해하다가 진환의 무시무시한 눈길에 놀라 얼른 손을 놓았다.

“고맙습니다.”

은율이 따뜻하게 웃어 주자, 현우를 비롯한 주변 스태프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 정적을, 철민의 웃음소리가 헤집었다.

은율은 철민과 다른 스태프들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네며 타월로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그런 그의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이 있었다.

“감기 걸리겠어. 차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자.”

은율은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진환이 제 어깨를 감싸 데려가는 모양새가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히 스태프들은 장비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진환에게 이끌려 그의 밴에 올라탄 은율은 운전석에 연우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촬영 시작하고부터 안 보인다 싶더니, 진환이 그에게 쉬고 있으라고 차에 보내 놓은 모양이다.

연우가 운전석에서 몸을 돌려 은율을 바라보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에 그가 깜짝 놀란다.

“으와, 안 추워요?!”

“춥죠. 그래서 얼른 옷 갈아입으려고요.”

“그래요, 빨리……. 어어……, 전 그럼 나가 있을게요.”

진환의 부리부리한 눈에 어색하게 눈을 돌린 연우가 차에서 내렸다. 은율은 의아해하다가 곧바로 정장 재킷을 벗었다. 하얀 셔츠가 물에 젖어 그의 몸에 치덕치덕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버젓이 드러났다.

은율의 옆자리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진환이 노골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환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셔츠 단추를 푼 은율이 그것을 마저 벗으려 할 때였다.

“난간에서 떨어질 때,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

진환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은율이 픽 웃으며 셔츠를 완전히 벗어들었다.

“죽기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정말 자살하는 사람처럼 연기했잖아. 너무 리얼했어.”

“와이어도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데 죽을 리가 없죠.”

진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다.

“내가 죽겠어…….”

워낙 작은 소리라, 은율은 미처 듣지 못했다.

헐벗은 상체를 타월로 꼼꼼히 닦고서 바지 버클로 손을 내렸다. 버클이 풀리는 소리에 진환이 움찔하더니, 밴의 맨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은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뒤에서 진환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후드티에 청바지로 갈아입은 은율이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지쳐 보이는 진환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다시 앞으로 넘어와 은율의 옆자리에 앉았다.

“갈 거야?”

은율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5시가 조금 넘은 상태였다.

“가서 공부해야죠.”

또 공부.

진환은 은율의 머릿속 절반 이상이 공부로 가득할 거라 예상했다.

“여기 정리되는 대로 곽 감독님 오실 거야. 금요일부터 <페르소나> 촬영 들어간다며.”

영화제가 얼마 남지 않아 급하게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철민을 제외한 다른 감독들은 이미 촬영과 편집을 모두 끝낸 상태였기에, 철민의 분량만 채워지면 바로 완성이었다.

이번 영화제가 평소처럼 5월 초에 시작했다면 철민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로만 구성해 내놓아야 할 판이었지만, 애매하게 낀 국제 행사들로 인해 5월 말로 영화제가 미뤄진 것이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시바삐 촬영을 끝내고 편집에 힘을 써야 했다.

철민은 짧은 분량이니만큼 금주 중에 촬영을 모두 끝마치길 원했고, 은율은 그 강행군에 동참하기로 했다. 은율의 입장에선 짧은 일수 동안 바짝 촬영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진환이 물기 젖은 은율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웃었다.

“금요일 오전 일찍 도와주러 갈게.”

“괜찮습니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은율은 자신이 연기했던 이유건을 떠올렸다. 이번 촬영은 이유건이 된 상태로 <페르소나>의 주인공 ‘정한서’를 연기해야 했다. 이유건과는 스타일이 아예 다른, 새로운 캐릭터다.

진환이 은율의 서늘한 손을 붙잡았다. 진환의 손에서 흘러나온 부드러운 온기가 은율의 손을 녹여 갔다.

“그날 스케줄 없어서 심심해서 그래. 네가 거부하면 난 집에서 시체처럼 잠만 자게 될 건데.”

“피곤하시면 그렇게 잠만 자는 것도 좋습니다.”

“안 피곤한데 자니까 문제라는 거야. 차라리 그 시간에 의미 있는 걸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진환의 말에 은율은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마침 스케줄도 없다고 하고, 은율 입장에서도 그가 곁에 있어 준다면 분명 든든할 것 같았다.

물론, 진환이 연우에게 억지를 부려 스케줄을 비웠다는 사실을 은율이 알 리 없었다.

철민이 차창에 노크를 한 것은 그로부터 30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그사이 진환은 세련된 사복으로 갈아입었고, 은율은 평상시처럼 머리를 단정히 빗질해 내리고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진환이 손수 문을 열어 주자, 철민이 낄낄거리며 안에 들어왔다. 진환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주고 은율의 뒷자리로 넘어갔다.

문을 닫고 밖의 상태를 잠시 훑어본 철민이 은율에게 웃으며 말했다.

“금요일에 시간은 잘 비워 뒀지?”

“예. 하루 종일 촬영해도 지장 없습니다.”

하진도 어차피 알게 된 거, 괜히 왔다가 헛걸음하지 않도록 스케줄을 말해 두었다. 하진은 저를 격려하며 잘 해낼 거라고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진이 말해 둔 건지, 지희에게서도 열렬한 응원문자가 도착했다. 사랑스러운 두 동생의 응원을 받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철민이 갑자기 입꼬리를 광대 언저리까지 길게 끌어 올렸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클릭하더니, 그 액정 화면을 은율의 눈앞에 가져갔다. 화면 안에는 팔짱을 끼고 지하철 문가에 기댄 낯익은 남자가 비뚜름하게 찍혀 있었다. 꽤 가까이에서 찍힌 바스트 샷이었다.

은율이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뒤로 뺐다.

“진환 씨한테 들었는데, 이거 너라며?”

진환을 돌아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철민이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이야, 처음엔 웬 일반인 가지고 이리들 호들갑이야, 하다가 사진 보고서는 나도 놀랐어. 너인 줄도 모르고 애들한테 이 사람 어디 소속이냐고 묻고 다녔다니까? 내 작품에 쓰고 싶어서.”

은율이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철민이 눈을 반짝였다.

“근데 그게 너였다지 뭐야. 진환 씨가 말하지 않았으면 평생 모를 뻔했어.”

철민이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웃었다.

“촬영할 맛이 나는구먼.”

진환이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같이 가려고 합니다.”

“자네가? 바쁘지 않겠나?”

“그래도 율이의 첫 촬영인데 함께 있어야죠.”

“그래 주면 좋긴 하지만……. 율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냥 지나갈 뻔했다. 어느새 은율의 호칭이 바뀌어 있다. 철민이 진환과 은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은율은 이젠 아예 포기한 듯, 약간 붉어진 얼굴로 고개만 푹 숙였다.

“낄낄, 그새 사이가 많이 좋아졌네.”

“예, 아주 좋아졌습니다.”

진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철민은 은율과 있을 때의 진환이 참 새롭다 느꼈다. 여태 촬영하면서 연기할 때 이외에는 편한 미소 한 번 짓지 않던 그다. 말투는 또 얼마나 딱딱한지. 그런 진환이 단시간에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눈길도 따뜻하고. 누가 보면 마음 있는 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철민이 화들짝 놀라며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뒷좌석에서 고개를 빼 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율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검고 동그란 머리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눈에서 달달한 내음이 났다.

업계에 근 20년을 몸담은 철민이다. 그런 그가 무의식중에 나오는 진환의 저 눈빛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어쩐지 오늘 촬영 내내 이상하리만치 은율을 챙기더라니.

‘허이구, 그 이진환이…….’

철민은 진환이 일방통행 중일 거라 예상했다. 오늘 촬영을 진행하며 느낀 거지만, 은율은 진환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진환에게 말 한 번이라도 더 걸어 보려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가까이 다가갔던 여성 스태프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쪽으로 마음이 있는 상태라면 그 장면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반대로 진환은 촬영 이외의 신경 대부분을 은율에게 쏟고 있었다. 짬만 났다 하면 은율이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 보고 있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감시하는 것처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시선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업계에 오래도록 몸담다 보면 자연스레 남녀 간의 사랑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기본적으로 동성 커플의 수가 꽤 될뿐더러, 지금은 아예 당당히 공표하고 세간의 격려를 받는 커플도 있었다.

철민은 진환을 질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힘든 사랑을 시작했구나, 하고 격려의 눈빛을 보낼 뿐이다.

이번엔 은율에게 시선을 두며 그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네가 고생 좀 하겠다.’

집착과 질투가 보통이 아니던데.

앞으로 진환의 열정과 애정을 받아 내려면 여러모로 고생길이 훤할 것이다.

*  *  *

대학가의 낡아 빠진 회색 건물 앞.

8명의 사람이 각각 촬영 장비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수군거렸다.

“그래서 주연배우는 누구래?”

“들어보니까 아예 연기 경력 없는 일반인이라던데.”

그 말을 들은 스태프 하나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허이고, 감독님이 오십 줄에 벌써 노망이 나셨나. 시나리오 보니까 대사보다는 지문이 훨씬 많던데, 그걸 일반인이 어떻게 다 표현하나?”

다른 스태프도 그에 동조했다.

“아무리 독립영화고 시간도 없다지만, 일반인 쓰면 분명 후회하실 건데.”

“우린 주말까지 죽었다 생각하자. 감독님 성격에 일반인으로 OK 사인 보내려면 한참 걸릴 거야.”

스태프들이 단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인을 배우로 써 보겠다고 패기 있게 나선 유명 감독들이 줄줄이 물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간혹 배우를 준비 중인 일반인이 섭외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촬영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만족할 만한 장면을 뽑아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스태프들은 첫 신이 OK 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내기하기 시작했다.

한 층을 올라가 205호에 다다른 스태프들은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보며 철민이 벌써 왔구나 싶어 잔뜩 긴장했다. 촬영 시작 시간은 8시였다. 지금은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니, 2시간 가까이 일찍 온 것이었다.

배우와 스태프, 심지어 장비까지 현저히 적은 독립영화라 하더라도, 기본 장비를 세팅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상업영화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팅에 한두 시간은 필요한 게 정석이다. 그렇다 보니 보통 감독은 스태프들이 어느 정도 세팅하고 있을 때쯤 오곤 했다.

긴장한 얼굴의 스태프들이 문을 슬며시 열었다. 답사할 땐 어둡고 칙칙하기만 하던 원룸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밝았다.

스태프들은 문을 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들은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얇은 대본을 펴 들고 있는 뿔테안경의 남자를 보며, 저마다 놀란 얼굴을 했다. 긴 다리를 그림처럼 꼬고서 초연한 얼굴로 대본을 넘기는 모습이 이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문가의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남자가 뿔테안경을 추켜올린 후, 다시 대본에 시선을 두었다.

남자를 보며 문가에서 도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던 스태프들은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이 또 한 번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라인부터가 남다른 터틀넥 티셔츠와 질 좋은 블랙진을 입은 톱배우 이진환이 한껏 어려 보이는 모습으로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오늘 주연배우 일반인이라며?”

“미친. 개런티 어마어마할 텐데 곽 감독 돈 너무 많이 쓴 거 아냐?”

“우와, 실물 장난 아니다.”

스태프들 앞에 다다른 진환이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조연 윤지석 역을 맡은 이진환이라고 합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조연이라는 말에 스태프들이 경악했다.

맙소사. 주연만 꿰차기로 소문난 그 이진환이 독립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다니. 감독이 단단히 미친 게 아닐까.

스태프들은 당장이라도 곽철민 감독의 멱살을 붙잡고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톱배우 이진환을 주연배우로 써도 모자랄 판에 조연이라니.

진환은 스태프들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뿔테안경의 남자에게 다가서서는 손에 들고 있던 2개의 캔 커피 중 하나를 직접 따서 건네주었다. 그제야 대본을 덮은 남자가 그것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진환은 창가에 서서 남자를 부드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고, 상대는 소리 없이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태프들이 입구에 장비를 내려놓으며 쭈뼛거렸다. 남자가 그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 손에는 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대본을 쥔 채 입구를 향해 걸었고, 그의 뒤를 진환이 당연한 것처럼 바짝 따랐다.

스태프들이 긴장한 얼굴로 남자를 훑어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이진환에게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외모였다. 뿔테안경 때문인지 주변에 꽤나 벽을 치고 살 것 같은 이미지였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 본판이 특출했다. 이런 사람이 일반인이라니, 스태프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스태프들에게 눈으로 가볍게 인사하며 그들을 지나 복도로 나갔다. 뒤따른 진환이 수고하라는 말을 남겼지만, 사람들은 그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남자와 진환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자, 스태프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방에 들어가 목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저 둘이 출연하는 거야? 진짜? 비주얼부터가 이미 독립영화급이 아닌데?”

“빨리 감독님한테 확인 전화 좀 넣어 봐.”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하던 스태프들은 결국 철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원룸 밖에 나온 은율은 선선한 바람을 쐬며 캔 커피를 홀짝였다. 블랙커피 특유의 쌉싸름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와 나란히 선 진환이 은율을 위아래로 훑었다. 배역에 맞게 캐주얼을 입혀서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은율이 연기하는 ‘이유건’은 역시나 뭘 입혀도 ‘이유건’으로 보였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은율의 무심한 눈동자가 진환을 바라본다. 하지만 목소리로 이유를 묻지는 않는다. 단지 눈빛으로 제 의사를 전달할 뿐.

“그렇게 입은 것도 잘 어울려.”

진환의 대답에, 은율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진환이 그의 옆에 한발 가까이 다가섰다.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긴장되진 않아?”

은율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캔의 입구 부분을 엄지 끝으로 쓸었다.

진환은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유건이 된 은율은 말수도, 표정도 현저히 줄어든다. 그래서 진환은 그의 눈을 보고 대답을 유추해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진환이 캔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은율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렸다. 문득, 은율의 어깨가 평소보다 딱딱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긴, 긴장 안 할 수가 없겠지.’

진환은 자신이 데뷔하던 때를 떠올렸다. 난생처음 제 얼굴이 카메라에 담긴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온몸이 굳고 입술이 떨렸었다. 스턴트맨을 하면서 카메라 앞에 많이 서 본 사람이니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처음 도전하는 정극 연기이니만큼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진환이 캔 커피를 원샷한 후 그것을 근처에 있는 분리수거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농구에 재능이 있나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골인하는 모습을 본 후 진환이 은율에게로 팔을 뻗었다. 그가 은율의 몸을 당겨 안고서 그 어깨에 제 턱을 대었다.

“이렇게 하면 긴장이 좀 풀리지?”

은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다만, 진환의 등에 제 팔을 두를 뿐.

은율은 긴장으로 뻣뻣하던 몸이 어느덧 사르르 풀리는 걸 느꼈다. 몸에서 적당히 힘이 빠지고 나니 진환의 품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을 감은 채, 은율은 제 몸을 꽉 붙잡고 있는 진환에게 속으로 고마워했다.

전날 밤, 철민에게 전화가 걸려 왔었다. 조연 윤지석 역을 맡기로 한 신인 연기자가 급한 가정사로 촬영을 펑크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민은 대타를 구할 때까지는 은율 혼자 나오는 부분만을 촬영한 후, 급조한 대타로 차후 추가 촬영을 하자고 제안했다.

은율은 고민할 것 없이 그러겠다고 답하며, 오히려 철민을 걱정해 주었다. 아무래도 당장 마음이 급한 건 철민이었을 테니까.

전화를 끊고 나자, 그전까지 메시지를 나누던 진환이 그사이 한가득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 갑자기 메시지가 끊기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은율은 철민이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고, 진환은 자신이 해결해 보겠다고 말했다. 설마하니 그 해결이라는 게 진환 본인이 조연 자리로 들어가는 거였다니.

진환은 자기가 연기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노 개런티로 출연하기로 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지만, 은율은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선 것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살면서 누군가가 진환처럼 성심껏 서포트해 준 적이 있었던가.

은율은 자신의 삶에 불쑥 들어온 진환이 싫지 않았다.

꿈도 없이 끌려다니기만 하던 인생에 불확실 요소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불확실 요소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결국 새로운 길에 발을 내딛게 했다.

은율은 진환의 품에서 떨어져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진환이 따뜻하게 미소 짓는다.

귓가에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운전대를 잡은 철민이 미끄러지듯 원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은율은 남은 커피를 단번에 마셔 버렸다. 쌉싸름한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철민의 차가 원룸 건물의 외부주차장에 들어왔다. 은율은 형편없이 구겨진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은율은 구겨진 그 캔이, 영락없이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옆에는 진환이 버렸던 캔이 깔끔한 상태로 놓여 있었다. 그 대조적인 모습에, 은율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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