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1 / Persona
별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밤이었다. 허름한 원룸 건물의 205호실에서 난데없이 비명이 들렸다.
“아아악!”
좁은 원룸 안. 흐릿한 전등 불빛 아래, 이젤 화판에 기대어 있던 종이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사람 실루엣이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비틀거리며 새 종이를 찾았다. 순백의 종이를 이젤 화판에 고정하고서 반쯤 닳아 있는 연필을 집어 든다.
빠른 속도로 그림이 그려졌다.
얼굴의 기본 틀을 잡고 십자선을 흐릿하게 그려 넣었다. 빠르게 비율을 가늠하고서 얼굴 부분에서 잠시 손을 머뭇거리다 헤어스타일을 먼저 그리기 시작했다. 얇은 머리카락의 세세한 연출이 돋보였다. 목 언저리를 약간 덮는 짧은 머리카락으로 보아, 그림 속 주인공은 남자였다.
헤어스타일은 상당히 현실감이 있었다. 군데군데 삐져나온 한두 가닥까지 모두 표현해 넣었다.
만족할 만큼 섬세한 헤어스타일이 완성되자, 연필 끝은 이제 눈가로 향했다. 그 끝이 종이에, 정확히는 눈을 그리기 시작할 부분에 닿았다. 종이에 눌린 연필 끝이 까득 하는 소리를 냈다. 연필을 쥔 손은 수전증이라도 온 사람처럼,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약간 뭉툭하던 연필 끝이 곧 우득- 하고 부러진다.
연필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제 얼굴을 양손으로 덮어 버렸다.
연필이 크게 원을 그리듯, 그 주변을 굴러갔다. 연필은 하얀 종이로 가득한 바닥을 끊임없이 굴렀고, 조명은 그것을 따라다니듯 바닥을 비췄다.
바닥에는, 전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저 끝까지 흰 종이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눈, 코, 입이 없는 러프 스케치뿐이다.
수명을 다해 가는 전등이 깜빡- 깜빡- 점멸했다. 이윽고 흐릿하던 그 불마저 꺼져 버렸다.
* * *
꿈을 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꿈이라 부르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도 바라 마지않던, 그날의 기억.
그날은 따스한 햇빛이 환하게 들이치고 있었다. 대학 캠퍼스의, 아무리 올라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높다란 언덕길에서 그를 보았다.
단정히 빗어 내린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자신과 달리 화사하고 밝은 외모가 자꾸만 눈길을 끈다. 훤칠한 키에 간편한 흰 셔츠를 입은 그는, 저 홀로 완연한 봄을 맞은 사람 같았다.
그의 앞에 예쁘게 차려입은 여학생 둘이 대화를 하며 걸어오고 있음에도, 그보다 조금 더 뒤에서 걷고 있는 그 남자가 눈에 밟혔다.
자꾸만 눈이 갔다.
환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시선을 박은 채 그대로 멈춰 서 버렸다.
남자가 한 팔로 두께감 있는 책 2권을 품에 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옆구리에 대충 끼워 넣은 전공서적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같은 과라는 건데……, 왜 처음 보지?
옆으로 수다를 떨던 여학생 둘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그 남자가 지나갔다. 더벅머리에 가려진 음침한 눈이 천상의 빛을 담은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일순,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환하게 웃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해, 혼란스러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뒤로 돌아보니 남자가 등을 보인 채 바른 자세로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굽은 등과 너무도 비교되는, 곧은 등.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쿵- 쿵- 쿵-
그리고 그것은 이내 쾅- 하는 소리가 되어 귀를 때렸다.
* * *
깊이 잠들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환하던 봄날의 배경은 어디 가고, 불이 꺼진 어두운 천장만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니, 창으로 흘러들어 오는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잠시 멍하니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은 꿈일 뿐일까.
남자의 얼굴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햇빛에 부서지는 머리카락과 새하얀 셔츠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
쾅쾅- 하고 한 번 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도저히 노크라고 부를 수 없는 방식으로 현관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며칠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림만 붙잡고 있느라 몸이 제 몸 같지가 않다. 머리가 일순 깨질 듯이 아파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가만히 있었다. 통증이 좀 사그라지자, 비척거리며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현관문을 열려다, 습관적으로 왼쪽의 기다란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허름한 원룸인 주제에 신발장 대신 붙박이 전신거울이라니, 참 센스하고는.
전신거울은 비참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분명 생머리임에도 정돈을 하지 않아 반곱슬처럼 보이는 더벅머리가 눈에 밟힌다. 미용실에 간 지 한참 된 게 분명한 머리는 앞으로 길게 쏟아져 눈과 코를 완벽히 가렸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습관적으로 등을 굽히고 있어, 그다지 작은 키가 아님에도 왜소해 보였다. 낡긴 했지만 상당히 헐렁한 검은 티셔츠가 그나마 그의 마른 몸을 어느 정도 커버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제 모습을 보고 자조하며, 다시금 두들겨 대는 상대를 들이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야, 죽은 줄 알았잖아!”
문을 열자마자 귀가 아팠다.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학과 내의 유일한 친구 윤지석이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눈앞에 들이댔다.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살지? 안 봐도 훤하다.”
지석이 내민 편의점 봉투를 받아 드니, 안이 꽤 두둑했다. 열어 보니 샌드위치가 4팩이나 들어 있고, 그에 맞춰 500밀리리터 생수도 4병이다.
지석이 방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으려다 움찔했다. 그가 질린 얼굴로 종이로 도배가 된 바닥을 훑어본다.
“미친……. 너 아직도 이러고 있냐?”
지석이 혀를 차며 편의점 봉투를 든 그 팔을 잡더니 그대로 끌고 원룸 밖으로 나왔다.
원룸 밖으로 나와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한창 강의 중일 때라 그런지, 대낮임에도 근처엔 지나가는 대학생 하나 없었다.
지석은 밖에서 봐도 음침하기 짝이 없는 제 친구 정한서와 자신 사이에 편의점 봉투를 내려놓게 하고서, 그 안에서 샌드위치와 생수를 꺼내 건넸다. 한서가 받아 드는 걸 본 후에야 제 몫도 한 세트 꺼내 손에 쥐었다.
“강의 안 나와?”
지석이 샌드위치 포장지를 뜯으며 물었다. 한서는 제 손에 들린 샌드위치와 생수병에 시선을 박은 채 대답했다.
“완성하기 전까진 못 나가.”
“미치겠네.”
지석이 전투적으로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 바닥에 있는 그림들, 전부 ‘그 사람’이지? 수십 장을 그리는 동안 이목구비도 다 못 넣을 정도로 기억 안 나는데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든…… 완성할 거야.”
한 번만 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릴 수 있을 텐데.
지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과 학생인 건 맞아?”
“확실해. 우리 학과 전공서적 들고 있는 거 봤어.”
지석이 먹던 샌드위치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생수병까지 깔끔히 비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착잡함이 감돌았다.
“졸작 제출 못 하면 유급인 건 알지?”
한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은 복잡한 얼굴로 그의 처진 어깨를 두드렸다.
“교수들한텐 너 아파 죽는다고 둘러대 놓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나와라.”
몇 날 며칠을 그려 댔는데도 얼굴이 없는데 과연 언젠가 그걸 완성할 수 있긴 할까. 차라리 일찌감치 정리하고 다른 피사체를 찾는 게 좋을 텐데.
지석이 씁쓸한 얼굴로 떠나가는 동안에도 한서는 제 손에 들린 샌드위치와 생수병에 시선을 둘 뿐 움직이지 않았다.
* * *
멍하니 있는 동안 시간은 참 빨리 흘러갔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졸다가, 또 깼다가, 멍하니 바닥의 그림만 바라보다가, 또 졸았다.
어느덧 깊은 밤이 되어, 러프 스케치 종이로 가득 채운 방 한가운데에 천장을 보며 누웠다. 전등은 그 수명이 간당간당했다. 전날에는 수명이 다한 듯 꺼져 버렸지만, 지금은 또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을 누워서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석이 다시 찾아왔나 싶어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켰다. 그러자 찌릿하는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끙끙거리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으니,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작지도, 크지도 않은 소리가 현관문을 통해 들려왔다. 일정한 박자를 가진 그 소리는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머리를 짚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갔다. 두통이 점점 심해져 왔다.
덥수룩한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왜 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시선을 들자, 그 자리에는 지석이 아닌 다른 이가 서 있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에 화사한 얼굴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 그날과 똑같은 흰 셔츠가 어두운 복도에서 저 홀로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그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한서는 두통도 잊은 채 그대로 넋을 놓았다.
남자의 손이 뻗어져 왔다. 천천히 다가온 그 팔이, 한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남자의 품에 안긴 한서가 눈을 크게 뜬 채 굳었다.
“왜 날 제대로 보지 않아?”
남자의 친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뜬금없는 말에 한서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제대로 보지 않아? 내가? 그날도, 꿈속에서도, 난 언제나 당신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데?
한서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팔을 올렸다. 그가 남자의 몸을 마주 안았다.
“봐. 지금도 보지 않잖아.”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흰 셔츠가 서서히 구겨졌다.
문득 두통이 일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현관 옆 전신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 모습을 눈에 담자마자 눈을 부릅뜨며 놀라고 말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자신 하나뿐.
분명 안고 있음에도, 그 느낌이 이 가슴과 손에 느껴지는데도, 거울 속의 자신은 홀로 누군가를 끌어안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거울에 비치지 않는 남자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이제, 제대로 봐.”
* * *
눈을 번쩍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전등이 삶에 지쳐 깜빡거릴 때마다 그에 맞춰 머릿속이 아프게 울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통이 심한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한서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한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공간. 바닥에는 여전히 얼굴 없는 남자의 러프 스케치가 한가득 굴러다닌다.
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제 방의 싸구려 책상에 다가갔다. 책상의 서랍을 한 칸 한 칸 거칠게 열어 뒤졌다.
맨 밑의 서랍, 그 안쪽을 뒤지니 날카로운 가위 하나가 나왔다. 그것을 집어 들고서 곧장 현관으로 다가갔다.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머리의 두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단편적으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순간이 영상이 아닌 사진이 되어 회상되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언덕길의 장면이 뭔가 달라져 있다.
자신을 지나쳐 가는 두 여학생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한쪽 어깨를 현관문에 대어 몸을 지탱하고서, 가위를 든 손을 올렸다. 한 손으로 앞머리 끝을 잡고서 가위로 눈썹 길이만큼 자르기 시작했다.
싹둑- 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다시 한번 그날이 떠오른다.
뒤로 돌아보았을 때, 그 사람은 과연 그 자리에 있었던가.
지금은 두 여학생의 뒷모습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린 그 날의 기억에 그 남자는 없었다. 그저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빛무리만이 그 자리에 맴돌 뿐.
앞머리를 잘라 낸 한서가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놓쳤다. 잘린 머리카락들과 가위가 바닥에 처박혔다.
몸을 덜덜 떨며 거울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그리도 찾아 헤매고 그리워했던 남자가 서 있었다. 더벅머리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맑고 선명한 눈동자, 오뚝한 코, 혈색이 돌았다면 분명 빨갛게 보였을 입술. 너무도 그리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일순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법한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아악!”
한서가 제 머리를 감싸 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머리를 압박했지만 깨질 듯한 두통은 점차 크기를 더해 갔다. 입에서 고통을 담은 신음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깜빡거리던 전등이 빠르게 점멸하더니, 이내 훅 꺼져 버렸다.
* * *
화창한 어느 아침.
회화과의 담당교수실 데스크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 교수는 문을 열고 들어온 훤칠한 남자를 향해 눈을 빛냈다.
“드디어 왔냐? 근데 아프고 나니까 신수가 훤해진 것 같다?”
“걱정 많이 하셨다면서요?”
새하얀 셔츠를 입은 밝은 이미지의 남자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화구통을 앞으로 돌려, 그 안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늦었지만 작품 제출하려고요.”
“기다렸다, 인마. 실기에 정평이 나 있는 녀석이 이렇게 애를 먹을 줄은 몰랐지.”
“죄송해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세요.”
남자가 꾸벅 인사하며 몸을 돌려 교수실을 나섰다. 김 교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제 손에 들린 종이에 시선을 두었다. 기대감 어린 얼굴로 종이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히 펼친 교수가 곧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야…….”
김 교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화상은 처음 그린다더니, 뭐 이리 잘 뽑았어.”
김 교수가 들고 있는 종이에는 화사한 미소를 띤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따스한 봄날이 떠오르는, 그런 얼굴이었다.
교수실을 나선 한서가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자른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눈동자에는 이전의 흐릿함 따윈 찾아볼 수가 없다.
한서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아진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다리를 시원하게 내뻗었다.
유난히 밝은 빛이 들이치는 복도 끝을 향해, 그가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