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Stunt/Action(2) (4/33)

3. Stunt/Action(2)

시끌시끌한 포장마차 안.

네 명의 중년 남자들이 모여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그들의 테이블로 한 50대 남자가 다가가 멋대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남자들이 그를 알아보고서 저마다 화색을 띠었다.

“오! 곽 감독 왔어?”

“이야, 영화도 지각, 술자리도 지각이구먼! 하하하!”

농담을 건네며 기분 좋게 웃어 젖히는 걸 보니, 이미 술이 꽤 들어간 모양이다.

철민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제 앞에 빈 소주잔을 끌어왔다.

“지각할 만했으니까 봐줘라, 새끼야. 낄낄낄.”

“그래서, 편집은 끝났어?”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가 철민의 술잔에 소주를 채워 줬다. 철민은 그것이 채워지자마자 단숨에 들이켰다.

“크!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정구한테 보내면 되는 거지? 오늘 안 왔냐?”

이정구 감독은 여기 모인 이들의 단편영화를 취합, 편집해 한편으로 만드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지방 로케 촬영 끝나고 지금 올라오고 있다더라. 한 시간 뒤쯤 도착할걸?”

남자가 철민의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그들 중 하나가 눈을 빛내며 철민에게 물었다.

“이번에 배우 없어서 결국 포기하나 싶었더니만, 그냥 급조라도 했나 봐? 어지간히 찍고 싶었나 보지?”

장난스럽게 비꼬았다. 철민이 주먹으로 때리는 척을 해 보이며 웃었다.

“새끼, 말본새하고는. 제대로 월척 데리고 찍었으니까 걱정 마라. 너희들 퀄리티 안 떨어뜨려.”

“오, 자신만만한데? 주연은 신인? 근데 네 눈에 찰 만한 연기력 가진 신인이 있냐?”

다른 감독들도 배우 때문에 골머리를 앓긴 했지만 철민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자비 출품인 만큼 개런티로 할당할 수 있는 금액은 굉장히 적다. 감독의 유명세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런 개런티라면 고작해야 신인 배우를 설득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철민도 마찬가지였다.

철민이 씩 웃어 보였다.

“일반인 데려다 썼다.”

“이야, 드디어 미쳤네. 요즘 노망이 참 무서워. 그치?”

감독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동조하듯 다른 감독들이 별의별 표정을 다 지었다.

“안 미쳤다. 주둥이 닫아라.”

철민이 두 번째 잔을 비웠다.

“장담한다. 내 작품이 아마 영화제에서 제일 히트 칠 거다.”

“얼씨구? ‘우리 작품’도 아니고 네 작품이?”

픽 비웃는다. 다른 감독이 소주를 들이켜며 끼어든다.

“야야, 아서라. 아무리 우리 명성이 있다지만, 이번에 해외에서 내로라하는 감독들 작품 쏟아져 들어오는 거 알잖냐. 그래서 우리도 이틀 동안 4회밖에 상영 못 하는 거잖아. 히트는 무슨. 안 묻히면 다행이지.”

한 명이 자조하니, 다 같이 그에 동조해 댔다. 그럼에도 철민의 자신만만한 얼굴은 사라질 줄 몰랐다.

“어디 두고 봐라, 시키들아. 낄낄낄.”

일반인을 배우로 써놓고도 자신이 넘치는 철민의 모습에, 다른 감독들이 이상한 눈초리를 했다. 철민은 그저 웃으며 제 잔에 직접 소주를 따랐다.

*  *  *

강의에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심장박동이 이상하게 빨랐다.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산만한 머리로 끙끙대던 찰나 강의가 끝났다. 은율은 교수가 나가자마자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버렸다.

“뭐야, 어디 안 좋냐?”

은율의 드문 모습에 기언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냥 머릿속이 좀 복잡하다.”

은율이 엎어진 채로 대답했다. 기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은율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선 긴 앞머리 속으로 손을 넣어 그 이마에 대어 본다.

“열은 없는데.”

은율이 제 이마에 닿은 기언의 손을 떼어 내고서 책을 챙겼다. 그런 두 사람의 앞에, 낯익은 여학생이 섰다.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작은 키의 여학생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둘 다 MT 가는 거지?”

과대답게 한 명 한 명 확인을 하는 모양이다.

“안 가면 학점에 영향 갈 수 있다는데, 가야지.”

기언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대답했다. 과대 김강희가 은율을 노려보았다.

“너도 빠지지 마. 학과장님이 진짜 벼르고 있으니까.”

“알아. 갈게.”

공부도 해야 하고 머리도 복잡한데 강제 MT까지. 은율은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강희가 새초롬한 얼굴로 몸을 돌리다 그를 곁눈질했다.

“……어디 아파?”

“아니. 아주 건강해.”

“그럼 됐고.”

그러고는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려 강의실을 나선다. 기언은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손등에 턱을 괸 채 음흉하게 킥킥거렸다. 강희가 은율에게 까칠하게 대하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걸 잘 알고 있어서인지 묘한 재미가 있었다.

그사이 짐을 챙긴 은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언도 따라 일어서며 강희가 나갔던 문을 통해 은율과 함께 강의실을 나왔다.

은율은 기언과 나란히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쯤 되니 기언이 진지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야, 진짜 뭐야? 뭔데 죽을상이냐고.”

안경에 가려진 처진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기언은 결국 은율을 잡아 세웠다.

“어디 말해 봐. 또 아냐? 내가 의외로 도움이 될지.”

은율이 머뭇거렸다. 기언은 답답함을 꾹 참고서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려 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데…….”

“자격증 공부, 뭐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

뜸을 들이는 모양새가 뭔가 이상했다.

“그게 지금 하는 공부와 전혀 맞지도 않고, 생소하고, 돈이 될지 어떨지도 모르거든.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기언의 머릿속에 별의별 직업이 다 떠돌았다. 돈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분명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걸 텐데 말이다.

“그걸 했다가 하진이나 지희한테 피해가 갈까 두렵기도 하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겁나고…….”

천하의 서은율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평소와 너무도 다른 은율의 모습에 기언이 흐음, 하고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하진이나 지희한테는 말해 봤어? 뭐래?”

“그 애들은 그냥 나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지.”

하긴, 그 두 동생이 은율이 하고 싶다는 걸 막을 리가 없다. 오히려 격려를 해 주면 해 줬지.

“그럼 해도 되는 거 아냐?”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럼 어떻게 해?”

기언이 하- 하고 숨을 뱉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됐냐?”

은율의 눈이 안경 안에서 깜빡인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목표가 뭐가 되었든, 도전적으로 달려들어서 쟁취해 왔던 게 너 아니냐? 공부에 깊은 뜻도 없이 운동만 하던 놈이 누구야? 너였어, 너.”

기언이 은율의 가슴팍을 검지로 쿡쿡 찔렀다.

“그런 놈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명문대 금융학과에 떡하니 입학해서 수석 꿰차고 있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야. 난 살다 살다 너같이 바람직하게 미친놈은 처음 봤다고.”

기언이 피식 웃으며 은율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미칠 수 있는 놈이 뭔들 못하겠어? 자신을 가져. 넌 무슨 일을 하든 결국 잘 해낼 거고 인정받을 거야. 모처럼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젊을 때 해 봐야지. 늙으면 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

늙은이 같은 소리였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 봐. 동생들 응원을 생각해서라도.”

“그럴까…….”

은율의 낯빛이 한결 편해졌다.

“고맙다. 덕분에 생각이 조금 정리된 것 같아.”

기언이 밝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근데,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뭐야?”

은율은 그저 대답 없이 작게 웃어 보였다.

*  *  *

퍽-

차 보닛이 그대로 찌그러졌다. 명치를 맞고 보닛 위에 떨어진 남자가 신음을 뱉으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은율은 차 지붕에 선 채, 자신의 다리를 향해 휘둘러진 쇠파이프를 높이 점프해 피해 냈다. 그대로 착지하자마자, 차 지붕을 양손으로 짚고서 긴 다리를 거세게 휘두른다. 남자가 쇠파이프를 떨어뜨리며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은율이 미처 몸을 추슬러 일어나기도 전에 바로 등 뒤에서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남자의 가슴팍을 발로 세게 밀친 후, 차 지붕을 그대로 굴러 바닥에 내려왔다.

이번엔 30센티미터 길이의 칼을 꺼내 든 남자가 목을 노리며 찔러 들어온다. 은율은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해 내고, 그대로 칼을 든 손목을 움켜잡아 비틀었다. 남자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놓치자, 은율은 그것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칼날을 제 팔 안쪽으로 향하게 한 은율이 칼의 손잡이 끝으로 남자의 가슴, 명치, 복부를 빠르게 친다. 남자가 억억 하며 비틀거리는 걸, 발로 차 버린다.

그때 확연히 덩치가 큰 한 남자가 은율의 몸을 뒤에서부터 끌어안듯 잡아 버린다. 팔까지 모두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은율은 몸을 비틀어 차량의 옆구리를 두 발로 세게 밀었다.

당연히 차량은 옆구리가 살짝 찌그러질 뿐 움직이지 않았고, 그 반동으로 은율을 안아서 포박하고 있는 남자가 뒤로 밀려났다. 남자의 바로 뒤에는 다른 차량이 있었고, 그 차량에 부딪힌 순간, 팔의 힘이 약해졌다.

그 틈에 은율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남자의 허벅지에 빠르게 찔렀다 뺐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팔의 힘이 현저히 풀어진 틈에 그대로 바닥에 쑥 주저앉아 빠져나와서는 조금 전 칼에 박혔던 남자의 피 묻은 허벅지를 주먹으로 세게 한 대 친다. 다친 다리가 순간적으로 훅 꺾이며 남자가 주저앉았다. 그 타이밍에 맞춰 무릎으로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은율의 무릎에 맞고서 튕겨 나간 그가 차창에 연이어 부딪히며 기절한 듯 옆으로 쓰러진다.

두 차량 사이로 들어온 다른 남자가 쇠파이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은율이 몸을 뒤로 빼서 점프하자, 그 자리에 쇠파이프가 내리꽂혀 깡- 하는 소리를 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저 멀리 던져 버린 은율이 곧바로 남자의 턱을 구두 끝으로 올려 찼고, 남자는 턱을 쥐며 뒤로 물러났다.

차 사이에 있던 남자가 넓은 공간으로 물러나자마자, 은율이 그에게 달려들어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화려하게 360도를 회전한 뒤돌려차기가 남자의 관자놀이를 후려갈긴다.

지면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은율이 주변을 훑어보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컷! 오케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말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쓰러져 있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일어났다. 은율은 그들에게 다가가 한 명씩 상태를 살폈다.

자주 호흡을 맞췄던 스턴트팀 멤버들인지라 이번 합도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으니, 그들과 자신이 합을 맞추는 장면은 이걸로 끝이었다. 다만 스턴트팀 멤버들은 주연 배우와도 합을 맞춰 찍어야 하니, 한 번 더 고생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경우 주연 배우는 제대로 된 액션을 취하기 직전과 취한 직후 위주로만 촬영을 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스턴트맨들이 방금처럼 격한 액션신을 소화하지 않아도 되니 힘은 덜 들 것이다.

은율이 습관처럼 모니터로 다가가 조금 전의 액션 샷을 확인했다. 그의 뒤로 다른 스턴트팀 멤버들이 서더니 함께 관전했다. 생각보다 화려하고 멋있게 나온 것 같아 나름 뿌듯했다.

스턴트팀 멤버들이 주연 배우와 촬영을 하러 이동하고 난 뒤, 은율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스턴트팀 차량으로 향했다. 이전에 봤던 강 팀장이 그를 뒤쫓았다.

“은율아, 잠깐만.”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을 벗어 한 팔에 걸친 은율이 그를 돌아보았다.

“혹시 다음 주 월요일에 스케줄 되냐?”

“아, 그날은 대학 MT가 있어서…….”

강 팀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대학 MT를 이런 시기에 간다고?”

“올해 두 번째 MT인데 이번에 빠지면 학점 영향 있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냐, 죄송할 게 뭐 있어. 음, 그쪽에서 널 지명했는데, 다른 사람으로 추천해 볼게.”

강 팀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물러났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은율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스턴트팀 차량으로 들어갔다.

평소처럼 허름한 캐주얼 복장으로 갈아입은 은율이 백팩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예상대로, 많은 수의 메시지 알림이 와 있었다. 확인해 보니 전부 진환에게서 온 것이었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대화방에 들어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금 막 화보 촬영 현장 도착했어.]

[(사진)]

[여기 배경 괜찮네.]

[지금은 뭐 해?]

[스턴트 액션 중?]

[촬영 시작하면 휴대폰은 아예 안 보네. 역시 성실해.]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잠깐 촬영하고 다시 연락할게.]

[너한테 연락 올까 봐 집중해서 빨리 끝냈어.]

[(사진)이거 괜찮게 나온 것 같은데 어때?]

[그쪽은 아직이야? 생각보다 기네.]

[어디 다치진 않았겠지?]

[다치지 마. 형 걱정되니까.]

다치지 말라는 마지막 메시지는 약 10분 전쯤에 온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 이제 끝났어요.]

보내자마자 메시지 옆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진다. 분명 오늘 하루 일정이 상당히 바쁘다고 들었는데,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처럼 곧바로 확인해 버린다.

[전화해도 돼?]

일방적으로 쌓인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면 꼭 물어본다.

은율이 피식 웃으며 진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받는 거로 봐선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다친 데는 없고?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물어본다.

“예, 멀쩡합니다. 걱정 마세요.”

-다행이네. 지금은 뭐 해?

“차 안에서 옷 갈아입었습니다. 스턴트팀 촬영이 마저 끝나면 함께 차 타고 돌아가려고요.”

-혼자 있을 때 갈아입은 거지? 차에 누구 없었지?

“예. 그리고 남자들끼린데 누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요?”

-그걸 말이라고……! 아냐, 됐어.

답답함을 참는 듯한 진환의 목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싶었는데, 들려오는 소리를 집중해 들어보니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길 안내 목소리였다.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 거의 도착해 가니까 잠깐만 기다려.

은율이 놀라며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전에 촬영장 위치를 물어보기에 알려 주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직접 올 줄이야.

“오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요?”

-응. 할 일 끝내고 데리러 가는 거니까 바쁘지.

작게 웃는 진환을 향해 은율이 걱정 담은 목소리를 냈다.

“데리러 와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 때문에 일에 지장 생긴 건 아니겠죠?”

-오늘 할 일은 일찌감치 끝냈어. 화보 촬영도 집중해서 네 시간 촬영할 거 세 시간으로 줄였는걸.

은율이 한숨을 내쉬며 차 좌석에 몸을 푹 파묻었다.

“그럼 지금 어디쯤이세요?”

때마침 촬영장 입구 근처에 검정 세단 한 대가 들어와 주차했다. 은율은 그 차의 디자인과 넘버가 상당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촬영장 도착했어.

은율이 화들짝 놀라 등을 떼었다. 보고 있던 세단의 차주가 운전석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어디야?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진환이 은율이 탄 스턴트팀 차량을 발견했다. 척 보기에도 화보 촬영 현장에서 바로 온 것 같은 화려한 차림새의 진환이 점점 다가왔다.

은율이 탄 차량으로 향하던 진환은 촬영 장비를 상자에 담아 옮기던 젊은 여자 스태프와 맞닥뜨렸다.

“어? 꺅!”

그녀가 진환의 등장에 깜짝 놀라 짐을 떨어뜨릴 뻔했던 것을, 그가 한 팔로 얼른 받아 주었다. 스태프가 붉어진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며 놀라자, 진환은 그녀의 품에 짐을 단단히 안겨 주며 말없이 스쳐 지나갔다. 짐을 받아 준 것까지는 좋았지만 괜찮냐는 둥, 도와주겠다는 둥의 말 한마디 없었다.

은율은 차 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렇게 무심하니 여태 연애도 못 해 봤다고 그러지.

그러다가 쓰게 웃으며 반성했다.

‘사돈 남 말 할 처지가 아닌데.’

여자 스태프가 상자를 든 채 멍하니 있다가 얼른 감독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달려가서 무어라 말하자마자 사람들이 일제히 진환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진환이 문을 열려고 하는 스턴트팀 차량 쪽으로.

문이 열리자마자 눈이 부셨다. 오늘따라 시원스레 올려 세팅한 머리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끝나자마자 바로 온 것인지, 얼굴에는 화보 촬영을 위한 화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가는 그 기세를 떨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이라인까지 그려져 있다.

진환이 휴대폰을 연회색 스트라이프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 차로 가자.”

“이진환 씨 아니야?!”

진환의 등 뒤로 한달음에 달려온 감독이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진환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뒤로 돌아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최 감독님.”

감독이 얼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진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감독의 뒤로 스태프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진환을 훑어보았다. 개중에는 웬 떡이냐는 얼굴로 저희끼리 좋아 죽는 여자 스태프들도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친한 동생이 이쪽에 있어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뭐?”

감동이 황당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진환에게 친한 동생 같은 게 있었나?’

업계에선 연기밖에 모르는 배우로, 연기나 일 때문이 아니라면 누굴 만나지도 않는다고 하던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아, 그러고 보니 이수하 씨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지? 수하 씨 데리러 왔구나! 그런데 둘이 동갑 아니던가?”

고개를 갸웃하던 감독이 뒤로 돌아보았다. 마침 진환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주연 배우 이수하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기 이전의 은율처럼 가죽 재킷에 블랙진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수하가 끼어들어 손을 내밀었다. 진환은 그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심드렁하게 맞잡아 주었다.

“그래.”

동갑내기인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진환처럼 화려한 얼굴은 아니지만 묘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을 가진 이수하가 눈웃음을 보였다.

“나 만나러 온 거냐?”

진환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

“그럼, 그럼. 아주 바쁘시지, 우리 대배우님.”

수하가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워낙 서로 간에 작은 소리로 말하고 있어, 주변에서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기에 그저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이진환과 이수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친한 동갑내기 배우로 보였다. 차갑고 딱딱한 벽을 치고 사는 이진환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년배 배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환에게서 흘러나오는 포스라는 건 업계에 오래 몸담은 베테랑 배우들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갈 수준이었으니까.

진환이 손을 떼고 몸을 물렸다.

“촬영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좀 더……!”

“촬영, 마저 하셔야죠.”

진환이 끊어 뱉자, 그제야 감독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스태프들에게 얼른 가서 일하라 지시를 내렸다. 감독은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촬영 장소로 돌아갔다.

스태프들까지 끌려가고, 남은 것은 수하와 진환뿐이었다. 가만히 대치하던 중, 수하가 열려 있는 차량 문에 힐끔 시선을 주었다. 진환이 열려 있는 차 문을 닫아 버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안에 누구 있어?”

“상관 말고 가지?”

수하와 진환의 눈 사이로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다.

이수하 역시 진환처럼 특출한 연기력과 단정한 비주얼로 히트를 친 톱배우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로 주가를 올리는 것도 모자라, 언제나 바른 행실을 보여 업계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그렇다 보니 무심하고 차가운 동갑내기 진환과는 라이벌 구도가 되어, 사람들 입에 비교되어 오르내리곤 했다.

수하는 사실 계산적이고 교활한 타입이었다. 자신을 알맞게 포장할 줄 알고 상황에 따라 각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한다. 그 모든 건 오로지 제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진환은 수하의 성향을 진즉부터 꿰뚫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적대감이 있었다. 수하는 수하대로,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진환이 아군이 되어 줄 리 없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남이 볼 때는 얌전하다가도 지금처럼 둘이 되면 자연스레 스파크가 튀었다.

“잘나가시는 양반이 남의 촬영장 와서 훼방이나 놓고, 아주 잘한다?”

“나한테 훼방 놓일 정도로 네 입지가 좁아진 줄 몰랐지.”

수하는 진환을 훑어보며 픽 웃었다.

“보아하니 촬영하다 온 모양인데, 협찬받은 옷을 이렇게 입고 다녀도 되나?”

“협찬 들어온 의상쯤은 현장에서 현금 결제할 정도로 돈이 차고 넘쳐서 말이지. 누구 씨랑 다르게.”

진환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수하가 픽 웃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촬영을 급하게 끝내고 올 정도의 상대란 말이지?”

수하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협찬 의상을 갈아입거나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우는 시간도 아껴 가며 달려온 거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의상으로 드레스룸이 터질 지경이라는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신생 메이커 의상을 현장 결제하겠는가.

‘거기다가…….’

수하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요즘 연애한다던데.”

그런 소문도 돌고 있었다.

진환의 눈썹 끝이 꿈틀했다. 수하의 예리한 눈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인가 봐? 그 이진환이?”

수하의 단정한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조소를 띠었다.

“얼마나 잘났기에 이진환이 목을 맨다는 소문이 돌까? 궁금한데.”

수하가 제 얼굴을 진환의 코앞에 가까이 가져갔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예리한 눈동자가 진환의 무심한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도 요즘 옆구리가 허전한데, 여차하면 가로채도 돼?”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진환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라면 보통 여자가 아닐 것이다. 외모도, 몸매도, 성격도 모르지만 진환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급격히 흥미가 생겼다.

진환이 눈을 부라렸다.

“사지 멀쩡하게 배우 생활 하고 싶으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텐데.”

강렬한 눈빛에 수하가 움찔했다. 그는 뒤로 한 발 물러서고서 양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려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뭐, 나도 작업할 상대는 가려서 말이야. 그래도 궁금하네. 대체 누구인지.”

진환이 팔짱을 끼며 거만한 눈으로 수하를 노려보았다.

“너 따위는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지.”

“이야……. 이거 아주 불을 붙이네. 자꾸 그러면 정말 강제로라도 취하는 수가 있어.”

그렇게 말하며 수하가 입술을 혀로 핥아 보인다. 마치 뱀의 혓바닥 같다.

진환이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한테 명치 제대로 한번 맞아 보면 도저히 그 말이 나올 수가 없을 거다.”

“뭐? 명치?”

진환이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수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진환의 등 뒤에 있던 스턴트팀 차량 문이 열렸다.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은율이 기다리다 못해 백팩을 멘 채 차에서 내려선 것이다.

차 문을 닫은 은율이 수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단정하고 예의 바른 낯으로 돌아온 수하도 마주 인사했다.

“계속 붙잡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이수하 씨 촬영 들어가셔야 하는데.”

진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걸 본 수하는 주변 공기가 확 달라지는 듯한 느낌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게. 마저 촬영하게 우린 자리 비켜 주자.”

수하가 입을 약간 벌린 채 눈만 깜빡였다. 이제껏 자신이 알던 이진환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수하가 다급한 나머지 얼른 은율의 팔을 잡아 돌렸다.

“잠깐만요.”

일순 진환의 눈에 흉흉한 빛이 서렸다. 그가 순식간에 수하의 손목을 잡아 비틀 듯 떼어 냈다.

“악!”

“환이 형!”

수하는 제 손목이 비틀린 것보다도, 은율의 입에서 나온 ‘환이 형’이라는 말에 더 놀랐다. 누군가가 진환을 저렇게 애칭으로 부르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은율이 진환의 손목을 붙잡으며 차분하게 경고했다.

“어서 놓으세요. 빨리.”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눈을 부라리던 진환이 의외로 순순히 손을 놔주었다. 수하가 저릿한 제 손목을 허공에 흔들며 힐끔 은율을 바라보았다.

이진환이 순간적으로 순한 대형견처럼 보였는데.

수하가 묘한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촬영장에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답답할 정도로 길게 내려온 앞머리와 커다란 안경 때문에 당최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가 내린 차량은 스턴트팀 전용 차량이었다.

‘스턴트맨? 그렇다고 하기엔 말랐는데…….’

수하의 머리 위로 수많은 물음표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진환은 은율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자기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러고선 수하를 한차례 노려보고는 제 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율은 수하에게 재차 인사하고는 진환의 강한 힘에 그대로 끌려갔다.

혼자 남은 수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진환이 그를 상당히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상당히? 아니, 그 정도가 아닌데. 저건 마치…….’

눈을 번쩍 뜨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스턴트맨에 불과한 남자애를?’

수하는 애써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오는 걸 본 감독이 그를 모니터 쪽으로 불렀다.

“수하 씨, 이게 아까 스턴트맨이 액션 한 거거든. 일단 쭉 보고, 연습한 대로 이 사람처럼 해 주면 돼.”

액션스쿨에 몇 차례 들러서 합을 맞춰 보았기 때문에, 사실 굳이 영상을 보지 않더라도 완벽히 해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볼 필요 없다고 하면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수하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모니터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곧,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말았다.

모니터 속에 비친 자신의 대역은 제 자존심이 뭉개질 정도로 너무도 날렵하고 화려했다.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자신이 꿀리나 싶을 만큼 몸매와 옷태까지 좋았다. 마르긴 했지만 잔근육이 있어 의상이 아주 멋들어지게 달라붙어 있다. 거기에 가죽 재킷까지 입혀 놓으니, 온몸에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수하는 이제 그의 액션보다도 얼굴이 더 궁금해졌다. 누가 봐도 연예인의, 그것도 모델 같은 몸매를 가진 그는 과연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을지.

하지만 최대한 얼굴을 잡아내지 않으려 노력한 대단한 카메라맨 덕분에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액션을 취하며 부분 부분 노출이 되긴 했지만, 정면에서 제대로 본 얼굴이 아니다 보니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나이 든 아저씨는 절대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모니터링이 끝나자마자 수하가 감독에게 물었다.

“이 대역 누구예요?”

액션물을 자주 찍는 수하였지만, 여태껏 자신의 대역에게 관심 한 번 준 적 없던 그였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도 자신의 대역을 할 사람에겐 도통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하면 멋있고 리얼하게 나올지에 대해서만 관심사가 쏠려 있었다. 지금은 그 관심사가 자신의 대역배우에게로 가고 있었지만.

수하가 모니터에서 짚어 낸 은율을 바라보며 감독이 자연스레 이름을 말해 주었다.

“서은율 씨.”

낯익은 이름에 수하가 손가락을 떼었다.

서은율이라는 이름은 들은 바가 있었다. 유명 감독들이 자주 찾는 스턴트맨이며, 전업 스턴트맨이 아닌 대학생이라고 들었다. 아무리 강도 높고 위험한 액션이라도 웬만해선 한 번에 OK를 받아 낸다는, 그 유명한 스턴트맨. 그런 사람이 자신의 대역배우였던 것이다.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수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모니터에서 봤던 늘씬한 몸매에 가죽 재킷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 어디 갔어요?”

“벌써 촬영 끝내고 옷 갈아입으러 갔지. 아까 진환 씨 있던 쪽에 스턴트팀 차량이 있었잖아? 아마 그 안에서 옷 갈아입고 집에 갔을걸.”

수하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려 스턴트팀 차량을 바라보았다.

그 차에 타고 있던 건 진환에게 끌려간 비쩍 마른 안경잡이 남학생 한 명뿐이었다.

*  *  *

진환의 차에 올라탄 은율이 안전벨트로 손을 뻗었다. 운전석에 앉은 진환이 그보다 빨리 손을 뻗어 손수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그러면서 얼굴 바로 앞에서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운전석에 몸을 바르게 하고 자신도 안전벨트를 채운 후 시동을 걸었다. 이내 차량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진환이 정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페르소나> 촬영 이후 진환이 매일 묻는 말이다. 지금처럼 직접 만나지 않는 날은, 그날 저녁에 꼭 전화를 걸어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은율은 왠지 부모님에게 일과를 보고하는 어린아이 같아 기분이 좋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도 그들은 제게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애당초 자신의 모든 일과를 꿰뚫고 있었고, 어머니는 관심 자체를 두지 않으려던 사람이었다.

‘아빠…… 같다고 하면 별로 안 좋아하겠지?’

괜히 그런 생각을 해 보며 볼을 긁적였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업 끝나고 곧바로 촬영장에 와서 합을 맞추고, 촬영에 들어갔죠.”

“힘들지는 않았어?”

“액션은 미리 팀 형님들과 합도 맞추고 리허설도 했던 거라 딱히 힘들지 않았어요.”

진환은 ‘팀 형님들’이라는 말에 조금 전, 은율이 자신을 향해 외쳤던 ‘환이 형’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까 기분 좋더라.”

“뭐가 말입니까?”

“환이 형이라고 불러 준 거. 기분 좋았어.”

은율이 운전대를 잡은 진환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의 기분 좋은 미소에 살짝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나온 겁니다.”

“매일 그렇게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좀 간지럽지 않아요? 한 글자씩 부르는 거.”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섰다. 진환이 고개를 돌려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망함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턱을 괴고 창가에 시선을 둔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난 간지러워서 좋은데.”

“그러니까 그게……!”

“간지러운 게 싫으면 익숙해지면 되잖아?”

“쉽게 익숙해질 만한 일이에요?”

은율이 뾰로통한 얼굴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진환의 온기 가득한 눈을 보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율아. 우리 율이. 귀여운 율이. 멋있는 율이. 예쁜 율……!”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은율이 손을 뻗어 진환의 입을 막았다.

“하지 마세요, 진짜.”

“들으면 들을수록 익숙해질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부끄럽다고요. 그리고 수식어가 그게 뭡니까? 민망하게.”

은율이 진환의 입을 막은 손을 거둬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바뀐 신호에 맞춰 다시 액셀을 밟았다.

“오늘처럼 환이 형이라고 불러 주면 나도 그냥 율이라고만 부르도록 할게. 그런 수식어 안 붙이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길게 실랑이를 해 봐야 저 사람은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냥 자신을 예뻐해 주는 형이 애정을 담아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싫지 않다. 은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은율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학과 내의 단체 대화방에 뭐가 자꾸 올라오고 있었다. 메시지의 대부분은 과대 김강희의 것이었다.

쭉쭉 올라오는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은율을, 진환이 힐끔거렸다.

“메시지? 누구야?”

은율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학과 단체 대화방이요. MT 관련 공지사항과 각 조별로 준비할 것들을 정리해서 올려 주고 있네요.”

진환이 그렇구나, 하며 눈을 깜빡이다 갑자기 핸들을 틀었다. 그가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가 비상등을 켜고 잠시 주차했다. 진환이 몸까지 틀어 은율을 바라보았다.

“MT라니? 언제? 어디로?”

“가평 쪽 펜션으로 다음 주 월요일에 갑니다.”

진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다음 주 월요일이라면 나흘 뒤였다.

“꼭 가야 하나? MT 가느니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 시간에 쉬면서 공부나 하고 싶은데…… 학과장님이 벼르고 계셔서 안 갈 수가 없어요.”

MT를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은율이지만, 굳이 그것을 체험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술로 친목 쌓는 게 주된 목적이라고 들었다. 아직까지 직접 입에 술 한 번 대 본 적 없는 은율은 그런 자리에 가면 필수로 술을 먹어야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선배라는 위치의 재량으로 어느 정도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교수들이 술을 권한다면 무조건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은율은 자신의 주량이 얼마나 되며, 어떤 주사가 있을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의 진환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어른’이 눈앞에 있지 않나. 거기다 그라면 자신이 주사를 피워도 왠지 다 받아 줄 것만 같았다.

“저, 민폐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은율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저와 술 한잔 마셔 주실 수 있습니까?”

“술? 갑자기?”

의아해하는 진환의 얼굴을 보며 은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말을 멈추진 않았다.

“제가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량이나 주사도 모르니까…… 혹시 가서 실수할까 봐…….”

은율이 점점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줄였다.

진환은 머릿속으로 은율의 나이를 떠올려 보았다. 올해 25세라고 들었는데, 여태 술 한 번 마셔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요즘 세상에 그럴 수가 있나 싶었지만 은율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때 부모님을 여의고 제 동생들 뒷바라지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그는 친구들과 편하게 술자리에 나갈 기회도 없었을 터였다. 짬이 날 때마다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책을 손에 쥐고 공부에 매진하는 게 그가 여태껏 살아온 길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짬을 내어 스턴트 액션 알바를 할 정도로, 그는 매우 바쁘게 살았다.

진환이 거기까지 생각하는 짧은 시간 동안, 은율은 그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주사 시험대가 되어 달라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역시 아무것도 아닙……!”

“좋아.”

고개를 들고서 못 들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진환에게서 짧은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진환이 은율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나라도 괜찮다면.”

은율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갑내기 친구들에겐 민망해서 안 되고, 스턴트팀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함께 일할 사람들이라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하진에게 부탁하기에는 맏형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형이라면 주사가 있어도 다 받아 주실 것 같으니까…….’

제가 감추려던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더 챙기고 아껴 주는 사람이다. 그라면 믿을 만했다.

기분이 좋아진 진환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럼 우리 집에서 마실까?”

“형 집에서요?”

형이라는 단어, 참 듣기 좋네.

자연스러운 호칭에 진환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혼자 살고 있거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보다는 단둘이 마시는 게 낫지 않겠어?”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은율은 다른 사람의 집에 간다는 것에 들뜨고 말았다.

“저 다른 사람 집에 가 보는 거 처음입니다. 왠지 기대되네요.”

또 한 번 놀라운 말을 들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술을 먹어 보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데, 타인의 집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니.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건지 의아하기만 했다.

“친구 집에도 가 본 적이 없어?”

“어릴 땐 아버지가 워낙 엄하셔서 친구와 노는 것 자체도 어려웠거든요. 돌아가신 후로는 제가 바빠져서…….”

은율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진환은 하진이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씁쓸한 낯을 했다. 은율이 안쓰럽게 느껴져 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그럼 친구 집에 가는 것도 처음이겠군. 율이는 형이랑 처음 하는 게 많네.”

‘율이’라는 호칭에 움찔했지만 ‘친구’라는 단어에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진환은 그 단어가 이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친구 미만이던 때보단 낫지 않나 싶어 애써 자위했다.

진환은 자택으로 차를 몰다가 한 편의점 앞에 차를 대었다. 은율이 술이라면 자신이 사 오겠다며 일어나려 했지만, 술 종류도 잘 모르는 사람이 뭘 사오냐며 진환이 한사코 말렸다.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까지 쓰고서 차에서 내린 진환은 이윽고 다양한 술이 들어 있는 묵직한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봉투를 건네받아 안을 훑어본 은율은 깜짝 놀랐다.

“뭘 이렇게 많이 사셨습니까?”

보아하니 상표도 종류도 다양했다. 요즘은 편의점에서 양주나 와인도 파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얼굴을 가린 것들을 벗어 낸 진환이 싱긋 웃었다.

“어떤 게 입맛에 맞을지 모르니까 하나씩 마셔 보자.”

아주 본격적이다.

“이걸 어떻게 다 마십니까?”

“못 마시면 다 마실 때까지 우리 집에 오면 되지.”

그런 방법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말에 그러자며 넘어갈 뻔했다. 자주 찾아가 폐를 끼치지 않게 되도록 오늘 최대한 마셔 둬야겠다. 은율이 봉투 속 술병들을 전투적으로 노려보았다.

진환의 집 앞에 도착한 은율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조수석에서 이리저리 밖을 내다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좋은 집 살고 계시네요.”

“그래?”

진환이 피식 웃으며 차를 전용 차고로 몰아넣었다. 차고 안에는 그들이 타고 있는 검정 세단 말고도 2대가 더 자리하고 있었다. 척 봐도 값비싼 외제 차다. 은율은 새삼 진환이 얼마나 부자인지 깨달았다.

차고에 차를 주차한 뒤 제 안전벨트를 푼 진환이 은율보다 먼저 그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이런 건 제가 할 수 있으니 일일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돼요.”

“도와주는 거 아니야. 내 개인 소망을 실현하는 중이지.”

“예?”

“아무것도 아냐. 내리자.”

이런 부분이 둔한 것도 은율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진환은 은율의 품에 있던 묵직한 봉투를 들고 내렸다. 은율이 따라 내려 그의 뒤를 쫓았다.

크고 세련된 집 내부로 들어온 은율은 현관에서 잠시 멈췄다. 진환은 자신이 은율의 집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들어와도 돼.”

그 말이 떨어지자, 은율은 그제야 신발을 벗고 현관 앞 슬리퍼를 신었다. 폭신하고 따뜻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옛날엔 실내에서 슬리퍼 신는 게 당연했는데.’

은율이 사고로 입원해 있던 그때, 아버지 소유의 저택마저 친척들의 계략으로 공중분해 되어 사라졌다. 퇴원한 은율의 손에 쥐어진 것은 그 저택을 판 금액의 극히 일부뿐.

그 돈은 동생들 뒷바라지와 자신의 대학등록금, 단칸방 보증금으로 모두 소모되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단칸방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치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추억에 잠긴 눈으로 슬리퍼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진환의 뒤를 얼른 따랐다. 그를 따라 간 곳은 꽤 넓은 크기의 주방이었다. CF에 나오는 아름답고 깨끗한 주방이 바로 여기 있구나 싶어 눈을 빛냈다.

진환은 크고 고급스러운 양문형 냉장고에 술을 하나하나 집어넣기 시작했다. 깔끔히 정리된 냉장고 안에 다양한 술이 들어찼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시간이 벌써 6시가 넘었다. 여태 촬영하고 있었던지라 둘 다 빈속이었다.

“식사부터 할까, 술부터 마실까?”

“둘 다는 어렵습니까?”

당연히 식사부터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

“어려울 것 없지. 그럼 식사거리보다는 배를 채울 만한 안줏거리를 준비해서 술과 함께 먹자. 가리는 건 없지?”

“예. 단것만 아니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할 때 단 걸 먹지 못한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진환은 그날의 이야기가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으려는 걸 애써 떨쳐 버리고서 냉장고 안을 훑었다.

“생햄이나 연어는 어때?”

“둘 다 좋습니다.”

은율은 진환의 옆에서 냉장고 내부를 구경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진환이 기분 좋은 얼굴로 냉장고에서 생햄과 연어 슬라이스 팩을 꺼내 들었고 뒤이어 찬장에서는 수입산 비스킷 통을 꺼냈다. 요리에 전혀 재능이 없는 은율은 진환이 꺼낸 재료만 봐도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진환이 고개를 돌리다 은율과 눈이 마주쳤다. 진환은 그의 손을 끌어 주방 바로 옆의 고급 테이블로 데려갔다. 푹신한 의자에 은율을 앉히고, 여태 메고 있던 백팩을 뺏어 그 옆에 내려놓았다.

“여기서도 보이니까 앉아서 봐.”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준 진환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은율은 테이블에 팔을 올려 제 턱을 괴었다. 남자치고 섬세한 손놀림에 자꾸만 시선이 쏠렸다. 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해 보인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나 보다. 같은 남자인데도 매력적이다.

진환이 만들어 내온 것은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올리브와 양파, 호스래디시 소스를 얹은 연어 크레페였다. 다른 하나는 크림치즈, 무순을 약간 얼린 생햄으로 돌돌 말아 놓은 것이었다. 두 안주의 비주얼은 은율을 적잖이 놀라게 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팔아도 되겠어요.”

“그냥 있는 재료로 꾸미기만 한 것뿐이야.”

진환이 큰 접시에 가득 담은 두 안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은율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었다. 그는 젓가락을 건네받는 그 순간까지도 기대감 어린 눈으로 안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환이 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냉장고로 향했다.

“먼저 먹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다시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가볍게 맥주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맥주 2캔을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올 때까지도, 은율은 가만히 안줏거리만 보고 있었다. 진환이 그의 앞에 캔 뚜껑을 따서 놓아 주었다.

“먼저 먹으라니까.”

은율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눈으로 진환을 마주 보았다. 캔 뚜껑을 딴 맥주를 은율의 손에 쥐여 준 진환이 제 몫의 캔을 따서 입으로 가져갔다. 시원한 맥주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입 안을 채운 술맛과 목을 때리는 탄산을 느끼며 캔에서 입을 떼자, 반짝이는 눈의 은율이 보였다.

“왜 안 먹어?”

“술도 어른이 먼저 드신 후에 입 대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읍, 콜록!”

맥주를 뿜을 뻔했다. 뭔가 예의 바른 어린애를 앉혀놓고 술 먹는 기분이었다. 고작 4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어른이라고 하니까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았다.

잔기침을 한 진환이 걱정스러운 얼굴의 은율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형 동생 사이에는 그런 거 없어. 그냥 먹어도 돼.”

진환이 손에 든 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젓가락으로 생햄말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그대로 은율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아 해 봐. 맛 좀 봐 줘.”

은율이 제 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음식과 진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빨리. 아.”

눈만 굴리고 있던 은율이 결국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 알맞은 크기의 생햄말이가 쏙 들어갔다. 입을 오물거리는 은율을 보며, 진환은 묘한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

“와……. 진짜 맛있네요.”

수입산 고급 생햄인 데다가 약간 얼려서 그런지 식감부터가 남달랐다. 은율이 미소까지 띠며 맛있어 하자, 진환도 덩달아 웃으며 캔을 잡아 내밀었다. 은율은 술을 마셔 보진 않았지만,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아채고서 얼른 자기 캔을 들었다. 두 사람의 캔이 허공에서 찰싹 부딪쳤다.

진환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어디, 우리 율이 주량이 얼마나 되나 볼까?”

*  *  *

솔직히 금방 쓰러질 거라 생각했다. 술도 처음 먹는 데다가 겉으로 봐도 그렇게 술이 세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테이블에 빈 술병이 쌓이고 쌓이는 동안 은율은 그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맛없다, 맛없다 하며 꾸역꾸역 마시고 있었다.

“하아, 대체 술은 왜 마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은율이 소주와 맥주를 섞은 글라스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환이 은율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진환의 물음에 은율이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했다.

“괜찮습니다.”

말투나 목소리로 보아 딱히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술로는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로 술이 센 진환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두 배는 먹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멀쩡하네.’

일부러 은율에게 더 많은 술을 권했다. 그럼에도 그는 얼굴만 빨개졌을 뿐, 변화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대량의 술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더는 못 마시겠습니다.”

은율이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두고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진환이 걱정 어린 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율은 얼굴이라도 빨개졌지, 진환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안주라도 더 만들어 줄까?”

“아뇨, 그냥…… 뭔가 다른 마실 만한 거 없을까요? 술 때문에 입이 써요.”

“잠깐만 기다려.”

진환이 냉장고로 향했다. 그 안에 있는 음료 중에서 술을 제외하면 주스나 요구르트, 이온음료, 탄산수 정도였다. 당분이 들어 있는 주스와 요구르트는 안 되니 무가당 이온음료와 탄산수를 하나씩 챙겨 들었다.

그러다 진환은 처음 맥주를 마실 때, 은율이 그 안의 탄산에 놀라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기억했다. 냉장고에 탄산수를 도로 넣어 놓고 이온음료만 갖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이온음료를 빈 글라스에 담아 건네자, 은율이 그것을 단번에 쭉 들이켰다. 급하게 마셔서 그런지, 그의 입가를 타고 음료가 약간 흘러내렸다. 진환은 그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텅 빈 글라스를 내려놓고 깊이 숨을 내쉰 은율이 손등으로 입가를 쓸었다. 진환은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은율이 진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어째 형은 물만 마신 사람 같네요.”

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진환이 신기한 듯했다. 그가 은율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이마와 볼을 만져 보았다.

“열이 많이 올랐네.”

“음……, 손이 차서 기분 좋네요.”

은율이 배시시 웃으며 진환의 손을 그대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진환의 손바닥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볼을 비볐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진환이 제 손을 은율에게 내준 채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은율이 약간 풀린 눈으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음……. 뭔가 몽롱해…….”

조금 전과 달리 은율의 눈동자가 많이 풀려 있었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지 여러 번 눈을 깜빡거리기도 했다.

술 마실 때 이온음료를 마시면 술이 깬다고 하더니, 어째 은율은 반대가 된 것 같았다.

‘술끼리 섞어 마실 때는 멀쩡하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온음료 한 컵에 바로 반응이 올 줄이야.

“혀엉.”

진환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가 눈을 세차게 깜빡이며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은율을 내려다보았다. 은율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졸린 것 같아요…….”

친근하게 말을 놓으며 손등으로 뻑뻑한 눈을 비볐다. 그것이 어찌나 귀엽던지, 술을 마셔도 멀쩡하던 진환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진환이 은율의 앞으로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율아, 졸려?”

일부러 아이 다루듯 나긋하게 말해 보았다. 평소처럼 민망해하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일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환은 심장이 간지럼 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죽을 맛이었다.

진환이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잡으며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잘래? 침대 있어.”

은율이 배시시 웃었다.

“침대 좋아.”

아이처럼 변해 버린 은율의 애교에 진환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니, 따끈하게 열이 오른 게 느껴졌다. 이게 결코 자신이 마신 술 때문만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진환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은율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으응, 왜 이러지이…….”

은율이 미간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뱉었다. 진환은 날뛰는 심장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자 은율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진환의 목에 팔을 둘러 껴안았다. 그러고는 어깨에 뜨끈한 볼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진환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은율의 모습에, 심장이 다 아팠다. 진환은 은율의 몸을 안아 들고 조심히 제 침실로 향했다. 말랐지만 근육량이 많다 보니 무게감이 없진 않았지만, 진환은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침실에 도착한 진환은 방의 불을 켜고서 그를 조심히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새 은율은 잠이 들었는지, 웃는 낯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안도하며 이불을 그의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아이처럼 쌕쌕거리며 잠든 모습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은율을 내려다보던 진환은 일단 테이블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4인용 테이블의 절반가량이 온통 술병이었다.

‘주량도 세고, 저 정도 주사면 크게 걱정은 없겠네.’

좀 더 여러 가지 주사를 상상했었는데, 반말로 애교 부리다 잠드는 거라니. 귀엽기 짝이 없었다.

진환의 눈이 이온음료 페트병에 닿았다. 저게 은율을 취하게 한 주범일 테니, 이온음료는 절대 마시지 말라고 해야겠다. 저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MT를 보낼 수가 없다. 혹시 모르니 MT 장소의 정확한 위치도 받아 놔야겠다.

테이블은 금세 정리되었다. 쓰레기는 편의점 봉투에 모아 한데 묶어서 쓰레기통에 넣었고, 빈 술병들은 하나하나 물로 씻어 분리수거 전용 쓰레기통에 조심히 모아 넣었다. 안주를 담았던 접시들을 씻고 테이블을 닦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졌다.

그때.

쾅!

침실에서 들려온 소리에 진환은 깜짝 놀랐다. 그가 한달음에 달려가 침실 문을 열었다.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불부터 켰다.

불이 켜지자마자 침대를 보았지만, 얌전히 누워 있던 은율이 없었다. 바닥에 부서진 스탠드가 굴러다니는 거로 봐서, 아까의 소음은 침대 옆 협탁에 있던 저게 떨어진 소리였나 보다.

진환이 당황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다, 침실 구석에 벽을 보고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은율을 발견했다. 이쪽에 등을 보이고 있어서 어떤 상태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진환의 가슴이 철렁했다.

“율아?”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진환이 긴장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은율이 고개를 돌려 진환을 바라보았다.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이때다 싶게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형…….”

분명 아까까진 잘만 웃더니, 갑자기 왜 울고 있는 거지?

“율아, 왜 울어.”

진환이 손을 내밀며 다가가자, 은율이 바닥을 기어 그 손을 잡았다. 그것이 무슨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간절하게 잡아 매만지며 제 볼에 가져갔다.

“혼자 두지 말아요…….”

은율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환은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심장이 아팠다. 누가 망치로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도 아릿하다.

진환이 은율을 끌어 제 품에 안았다. 그가 진환의 등에 팔을 둘러 꽉 매달렸다. 달래듯 등을 토닥이니 아이처럼 훌쩍거린다.

“혼자 두지 않아. 계속 옆에 있을게.”

“흑, 환이 형…….”

안고 있던 몸의 떨림이 점점 멎어 갔다.

진환은 진정한 듯한 은율을 안아 들어 다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은율이 몽롱한 눈을 애써 깜빡이며 손으로 진환의 옷깃을 꽉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그냥 옆에 누워 주니, 그제야 안심한 듯 작게 웃었다.

“내가 어디 갔을까 봐 울었어?”

진환이 손을 뻗어 은율의 눈물을 손수 닦아주며 물었다. 아직도 눈물 가득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외롭고 무서워요.”

“……왜?”

은율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또…… 사라질까 봐.”

살면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부모님이란 존재가 눈앞에서 죽어 버린 게 아직도 은율을 괴롭히고 있었다.

진환이 애써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정말이죠?”

옆으로 누운 채 진환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율이 아직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진환이 그 손을 잡아 치워 내며, 비벼져서 빨개진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약속할게.”

달달한 그 말에 은율이 움찔하더니 불안한 듯 시선을 돌렸다.

“형은 왜 저한테 잘해 주세요?”

옆으로 쏟아진 은율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넘겨 주던 진환이 동작을 멈췄다.

“저요……, 형이 잘해 줄 때마다…… 자꾸 기대게 되고…… 가슴이 너무…… 간지러워요…….”

가슴이 간지럽다는 표현에 진환이 상체를 살짝 일으켜 은율을 내려다보았다. 그 바람에 그가 잡고 있던 옷자락이 떨어져 나갔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진환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그러는 동안 은율의 말은 계속되었다.

“요즘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형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형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게 돼요. 형이…… 진짜 제 형이었으면 좋겠고…….”

진환의 얼굴이 굳었다.

형.

친구 다음은…… 형인가.

자신이 그리도 듣고 싶어 강요하던 호칭이었지만, 지금만은 그것이 너무도 싫었다.

진환이 딱딱해진 얼굴로 은율의 몸을 바로 눕혔다. 그가 눈을 멍하니 깜빡이며 올려다보았다. 제 무게가 그에게 가해지지 않도록 무릎과 팔로 몸을 지탱해 올라타고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율아. 형이 만약에…… 형이 아닌 다른 게 되고 싶다고 하면?”

“다른…… 거요?”

은율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다. 진환이 웃음기 없이 진지한 눈으로 얼굴을 천천히 내렸다. 두 사람의 입술 끝이 서로 맞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런 거 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면 어떨 것 같아?”

천천히 입술을 맞댔다.

포개진 입술을 비비다 그 입술을 혀로 할짝거려 보았다. 간지러운지 은율이 고개를 틀려 하는 걸, 진환은 한 손으로 그의 뒷머리를 받쳐 잡아 고정했다. 작은 머리가 진환의 손에 의해 옴짝달싹 못 하며 제 입술을 그대로 내주었다.

진환은 다른 한 팔로 은율의 얇은 허리를 휘감아 붙잡았다. 자연스레 은율의 몸과 진환의 몸이 가까워졌다.

진환의 혀가 조금 더 과감해졌다. 그가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술기운이 담긴 따뜻한 혀가 얽혔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은율이 움찔했다. 은율의 두 손이 진환의 가슴팍을 잡았다. 저를 확 밀어내면 밀려나 줄 생각이었는데, 은율은 그의 가슴팍을 잡기만 할 뿐 가만히 있었다. 진환은 그가 거부하지 않자, 제 몸을 그에게 밀착해 좀 더 깊이 입을 맞췄다.

혀가 목구멍까지 들어갈 기세로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은율의 얌전한 혀를 감아도 보고 살짝 빨아 당기기도했다. 입천장을 간지럽히듯 살짝 긁어 보며 고른 치열을 안에서부터 쓰다듬었다.

“으응…….”

은율의 입에서 작은 비음이 새어 나왔다. 진환은 너무 거칠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입 안을 휘저었다. 서로의 타액이 얽히고 섞여, 은율의 입가로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소극적인 은율의 혀를 한차례 쑥 빨아 당기니 그의 몸이 놀라는 게 느껴졌다. 달래듯이 붉은 입술을 정성스레 핥아 주니 경직된 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키스 경험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인 은율은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인 채 늘어져 있었다. 진환의 가슴팍을 잡던 손도 힘없이 바닥에 늘어진 지 오래다.

“하아, 하아……! 읍……!”

끝났다 싶었는데, 진환의 혀가 다시 쑥 들어왔다. 은율이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은 날카로운 눈매가 시야에 들어왔다. 은율의 눈동자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진환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따라왔다. 맹수를 닮은 진환의 눈동자에 은율이 겁먹은 사람처럼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입 안에 들어온 진환의 혀는 눈매와 달리 너무도 다정했다. 반응해 주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혀를 톡톡 치거나, 감았다 놨다 하면서 부드럽게 안을 탐닉했다. 농락당하고 있는 건 제 입 안인데, 가슴이 또 간지러웠다.

‘이상해……. 기분 좋아…….’

처음엔 당황스럽고 이상했지만, 혀가 얽히는 동안 몸이 저절로 달아오르며 기분 좋은 몽롱함을 가져다주었다. 은율은 이런 기분이 술에 취하는 기분인가 보다 하고 생각해 버렸다.

한없이 길게 이어질 것만 같던 키스는 진환이 혀를 회수하며 끝이 났다.

진환은 아쉬움과 열기를 담은 눈으로 은율의 입술에 몇 차례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의 입가에 흘러내린 타액 줄기를 제 혀로 핥아 올리며 한 번 더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심하게 헐떡이는 은율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환이 한층 붉어진 입술을 열었다.

“난…… 너와 이런 게 하고 싶은 거야.”

은율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을 굴렸다. 진환이 그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빼서 그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은율의 당황한 눈동자가 진환의 한없이 진지한 눈과 마주쳤다.

“좋아해.”

은율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얼굴을 했다.

“좋아하고 있어, 율아.”

진환은 여태껏 대본에서만 읊었던 그 말을, 결국 내뱉고 말았다. 여태껏 수많은 대본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던 사랑 고백 장면. 그것을 유치하다며 비웃어 왔던 자신을 반성했다.

감정 이입. 메소드 연기.

여태껏 그런 걸 해 왔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그 캐릭터를 ‘흉내 내기’했을 뿐.

드라마나 영화에서 제 입으로 내뱉었던 그 절절한 대사들이 어떤 것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백치가 되어 버린 것처럼, 입에서는 그저 이 말만 튀어나왔다.

“사랑해……. 율아.”

*  *  *

다음 날 아침, 은율은 머릿속이 깨질 것 같은 통증에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머리를 상하좌우로 때리는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술을 마시면 숙취라는 게 있다더니, 이건 그냥 ‘있다더니’ 수준이 아니잖아…….’

두통 때문에 거동도 제대로 못 할 정도라니. 대체 술을 왜 먹는가에 대해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일어났어?”

문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은율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편한 차림을 한 그가 한달음에 다가와 은율의 안색을 살폈다.

“많이 아파?”

부드럽게 물어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움직였더니 더 아팠다.

진환이 은율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두 손의 손가락 끝으로 은율의 머리를 꾹꾹 지압해 주었다. 아프던 머리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은율은 진환의 손에 머리를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머리 위에서 진환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좀 괜찮아?”

“예. 덕분에 좀 낫네요.”

“숙취 해소할 만한 거 만들어 놨어. 씻고 아침 먹자.”

은율이 끄덕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다 어지럼에 휘청거리자, 진환이 얼른 부축했다.

“안아서 데려다줄까?”

“농담이시죠? 혼자 갈 수 있어요.”

은율이 흘겨보며 진환을 밀어냈다. 진환이 순순히 밀려나는가 싶더니 은율의 허리를 손으로 잡아 기대게 했다.

“이럴 땐 그냥 부축받아.”

결국 은율은 진환의 도움을 받아 욕실로 향했다.

일단 욕실 사이즈에 깜짝 놀랐다. TV에서 재벌가의 넓은 욕실이라 소개하던 으리으리한 그것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은율은 욕실이 생각보다 후끈하다는 것을 느꼈다. 진환이 욕실 안의 커다란 사각 욕조로 다가갔다. 욕조는 기계식 자동 덮개로 덮여 있는 상태였다.

진환이 욕조 옆 벽면에 있는 버튼 중 하나를 누르자, 덮개가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가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심지어 입욕제까지 넣었는지, 약간 붉은빛이 돌고 은은한 장미향이 났다.

진환은 욕실 수납장에서 새 칫솔을 꺼내 쥐여 주며 문으로 향했다.

“씻고 몸 푹 담그고 나와. 숙취에 좋은 성분도 들어 있으니 좀 나아질 거야.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준비해 둘게.”

“예, 감사합니다.”

진환이 다정하게 웃어 보이고는 욕실을 나섰다.

은율은 옷을 벗으면서 전날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이상하게 취하지는 않고 쓰디쓴 술로 배만 채워서 지쳐 있었더랬다. 어렴풋이 진환에게 이온음료를 받아 들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문제는 그 뒤였다.

이런 게 바로 블랙아웃이라는 거구나.

새삼 신기했다.

이온음료를 마신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마치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뚝 끊겨 있는 게 참 생소했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는 것은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보통은 블랙아웃 타이밍에 주사를 부린다던데.

은율은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대체 무슨 주사를 부린 건지 슬슬 걱정이 되었다.

‘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진환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한 층 더 다정해진 것 같았다. ‘왜?’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다시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은 욕실에서 따뜻하게 몸을 담그고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은율은 보송보송한 타월을 수납장에서 꺼내 몸을 닦고서 문을 빠끔히 열었다. 문 앞에는 잘 개어진 편한 셔츠와 바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드는 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문 바로 옆 벽에 등을 대고 팔짱을 낀 진환이 보였다. 그가 고개만 돌린 채 자상하게 웃고 있다.

은율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올리며 진환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계속 여기 계셨어요?”

진환이 말없이 웃었다.

“왜요?”

“시간 체크해서 안 나오면 들어가려고.”

“……그건 또 왜요?”

“보통 그런 이벤트 있잖아. 욕조에서 잠들고 그러는 거.”

이벤트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한 은율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욕조에서 잠들지는 않습니다. 큰일 나요.”

“아쉽네.”

진환이 입맛을 다셨다. 오늘따라 더 이상한 것 같다는 소리를 한 은율이 옷을 집어 들었다.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은율은 아직도 같은 포즈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왜인지 은율의 옷차림을 다소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은율에게 진환의 셔츠는 상당히 큼직했다. 편하라고 준 반바지가 셔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늘씬한 각선미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런 게 바로 그이 셔츠…….”

“예?”

“음, 아무것도 아니야.”

진환이 웃으며 은율의 옷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침실에 가져가 스탠드형 옷걸이에 걸어 두고는 은율을 이끌었다.

다다른 곳은 드레스룸의 옆방이었다.

그곳은 화장대와 각종 스타일링 도구, 화장품, 향수 등이 있는 방이었다. 은율은 진환에 의해 화장대 앞에 앉혀졌다. 어느덧 진환의 손에는 드라이어가 들려 있었다.

진환이 은율의 머리를 덮고 있던 수건을 치워 내고 드라이어의 전원을 켰다. 소음이 있긴 했지만 드라이어치고는 작은 편이었다.

진환은 한 손에는 드라이어를 들고 한 손으로는 은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제가 할게요.”

은율이 당황해서 드라이어를 받으려 하자, 진환이 거부했다.

“가만히 있어. 형 이런 거 잘해.”

아니, 머리 말리는 걸 잘해서 뭐 해.

하지만 진환은 은율의 손을 한사코 거부했다. 제지하며 웃는 낯으로 그의 머리를 조심히 말려 주었다. 손가락이 닿는 그 느낌이 꽤 기분이 좋아, 은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어제 일은 얼마나 기억해?”

드라이어 소리 사이로 진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율은 솔직하게 말했다.

“형에게 이온음료 받아 마신 뒤로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 그럴 줄은 알았지만…….”

목소리가 이상하게 처져 있다. 은율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거울에 비친 진환의 얼굴이 어두웠다.

“저, 혹시 실수한 거 있어요?”

진환이 얼른 표정을 바꿔 미소를 내보였다.

“아니, 전혀.”

“거짓말하지 마요. 제가 뭔가 이상한 짓을 한 거죠?”

진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냐, 그냥 귀여웠어. 애교도 부리고, 칭얼거리기도 했지.”

“애교 말입니까? 칭얼거리기까지…….”

은율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생전 애교도, 칭얼거림도 부려 본 적이 없는데.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제 주사는…… 어린애가 되는 거였군요.”

“그래……. 내가 어린애 상태인 애에게 무슨 짓을…….”

“예?”

드라이어 소음에 가려질 만큼 작은 소리라,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말해 달라고 하니, 진환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씁쓸히 웃기만 했다.

은율의 머리가 두피부터 시작해 꼼꼼히 마른 것을 확인한 진환이 그의 목 언저리에 갑자기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역시 향이 배었네.”

진환의 말에 은율이 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은은한 장미향이 코를 자극했다. 입욕제 향이 몸에 밴 듯했다.

진환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은율을 일으켰다.

진환은 은율을 주방 옆 테이블에 데려다 놓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은율이 얼른 도와주려 하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만류했다. 손님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한사코 은율을 의자에 앉혔다.

은율이 앉은 테이블에 한 상이 가득하게 차려졌다. 다양한 밑반찬이 10가지 넘게 배치되었고, 뜨끈하고 맑은 콩나물국과 흰 쌀밥이 두 사람 앞에 각각 자리했다. 은율은 진환의 솜씨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걸 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

“반찬은 가정부 아주머니가 만들어 두신 거야. 내가 한 건 밥과 국 정도.”

“그래도 대단해요!”

은율이 윤기 흐르는 쌀밥과 향긋한 내음의 콩나물국을 내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진환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 국을 떠먹자, 그제야 은율의 손이 움직였다. 참 예의도 바르다 싶어, 진환이 작게 웃었다.

은율은 음식을 만들어 주는 보람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하나 맛을 보며 일일이 감탄하며 맛있다고 해 준다. 덕분에 앞으로 뭐라도 더 만들어서 먹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는 금세 끝이 났다. 은율이 진환을 도와 식기를 정리하고서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 앞에 섰다. 물을 틀려는데, 뒤에 다가온 진환이 뒤에서 허리를 잡아당기며 말렸다.

“손에 물 묻히지 마.”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을 안 묻히고 어떻게 설거지를 해요?”

“그냥 둬. 나중에 아주머니가 치워 주실 거야.”

기어코 끌어다가 도로 의자에 앉혀 준다.

은율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서 주방을 돌아다니는 진환을 가만히 감상했다. 커피를 내려 주겠다며 이것저것 준비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뭔가 평온하고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블랙커피 두 잔을 가지고 돌아온 진환이 자신을 여태 감상 중인 은율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왜 그러고 보고 있어?”

따끈한 찻잔을 건네받은 은율이 그 안에 담긴 새까만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표면에 비친 제 얼굴이 꽤 편안해 보인다.

“형은 굉장히 자상하시구나 해서요.”

진환이 픽 웃었다.

“내가?”

살면서 자상하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은율이 배시시 웃는다.

“예. 형 애인 되실 분은 좋겠습니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진환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은율은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자기 몫의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진환이 곁눈질로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커피 맛을 보았다. 유난히 맛이 쓰다.

애써 머릿속을 비우며 다시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MT 가면 되도록 술 마시지 마. 주량이 세다고는 해도 많이 마셔 봐야 속만 버려.”

“명심하겠습니다.”

은율이 깍듯이 대답하고, 진환은 기특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그런 스킨십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은율은 제 머리를 가만히 내주고 있었다.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기분도 꽤 좋다.

“혹시 모르니까 형한테 거기 주소랑 친구 연락처 하나 남겨 놔.”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왜라니,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해?”

진환이 당연하게 말했고, 은율의 얼굴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MT에서 일이 생길 게 뭐가 있습니까?”

“만약을 위해서지.”

은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제 머리에 얹어진 진환의 손을 걷어 냈다.

“걱정해 주시는 건 좋지만, 저보다는 일을 우선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에 집중하면서 신경 쓰려는 거야.”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형. 술도 조금만 마실 거고,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게끔 하겠습니다.”

진환과 있으면 과할 정도로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챙겨 주는 건 고맙지만, 뭔가 구속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미소가 사라진 진환이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진환이 굽히지 않고 고집을 부리자, 은율 역시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서 커피에 비친 굳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형을 모릅니까? 주소 남겨 두면 찾아오실 거잖아요.”

진환은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머릿속에서 다음 주 스케줄을 조정할 만한 게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형이 절 신경 써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그 때문에 일에 집중 못 하시고 무리하게 스케줄 조정하시는 게 보여요. 더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리하는 게 아냐. 내가 좋아서…….”

“전, 싫습니다.”

은율은 진환이 자신에게 수시로 연락하고 일정까지 맞춰서 자주 얼굴을 보러 와 주는 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

하지만 자신이 원인이 되어 그의 평판에 흠집이 날까 두려웠다.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은율인지라, 진환을 방해하는 짐이 되고 싶진 않았다.

못마땅한 얼굴을 바라보던 은율이 시선을 돌리며 찻잔에서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이만 돌아가 볼게요.”

싸해진 분위기를 등지고 은율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침실 옷걸이에 걸린 제 옷으로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소리 없이 다가온 진환이 은율의 몸을 잡아 돌렸다. 생각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가 은율을 마주 보았다.

“내가 널 신경 쓰는 게 잘못된 건가?”

말문이 막혔다. 바로 앞에 가까이 다가온 눈동자에 집어 삼켜질 것만 같았다.

“친구란 걸 처음 가져 봐서 그런지 잘 모르겠거든, 내가. 계속 신경 쓰고 싶고 챙겨 주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였나?”

그렇게 말하며 처진 목소리를 내니 할 말이 없어졌다. 잘못된 거라고 말하기엔, 진환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도 형이 생겼다는 것에 좋아하고 설레는 것처럼 그 역시 친구를 처음 만들어서 들뜬 거라고 생각했다.

은율은 반성했다. ‘형’이라는 존재가 동생을 챙기는 것은 여태껏 자신이 하진과 지희에게 해 왔던 것이 아니던가. 진환 역시 하진이나 지희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간다면 만약을 위해 위치와 주변인 연락처를 받곤 했다. 그러한 기억을 떠올려 보니, 진환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충분히 이해되었다.

은율이 눈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된 건… 아닙니다. 죄송해요, 제가 좀 과민하게 반응했나 봅니다.”

진환이 그제야 얼굴을 풀었지만 씁쓸한 빛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귀찮으면 그렇다고 말해 줘. 되도록 거리를 둬 볼게.”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전 그저…….”

은율이 손사래를 쳤지만, 진환의 얼굴은 나아지지 않았다. 은율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저번 호텔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진환이 잔뜩 상심한 얼굴을 했더랬다.

‘그때 분명…….’

은율이 진환을 잡아당겨 침대에 살짝 밀었다. 그가 침대 끝에 걸터앉는다. 은율이 머뭇거리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진환이 놀란 얼굴을 하자, 은율이 그를 어색하게 끌어안았다.

진환은 은율이 호텔에서 자신이 장난삼아 말했던 그 행동을, 진짜 달래 주려는 용도로 써먹고 있음을 알아챘다. 갑자기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은율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진환이 손을 뻗어 은율의 엉덩이를 잡았다. 그러고선 바짝 끌어당겨 서로의 배를 밀착시켰다. 두 다리가 진환의 다리 옆으로 자동으로 구부러져 벌려졌다.

“달래 주는 거 맞지?”

“……일단은요.”

은율이 우물쭈물하며 꽉 끌어안았다. 진환이 쿡쿡 웃으며 한 손으로는 그의 엉덩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럼 내가 귀찮은 건 아닌 거지? 주소랑 연락처, 줄 거야?”

결국 은율이 지고 말았다.

“하아……, 알겠습니다. 메시지로 보내 드릴게요.”

“음, 착한 율이.”

진환이 은율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씩 웃었다. 괜히 베테랑 배우라 불리는 게 아니다.

“대신 찾아오지는 마세요. 형 오시면 난리가 날 거예요.”

“별일 없으면 안 갈게.”

진환의 말을 들은 은율이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  *  *

MT 당일, 은율은 곤란한 상황에 부딪혔다.

졸업반이라는 이유로 후배들이 알아서 잘들 챙겨 주는 덕에 정작 나서서 뭔가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술판이 벌어진 후에는 감당이 되질 않았다. 여기저기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거기다 ‘주루마불’이란 이상한 게임까지 하면서 점점 시끌벅적해지니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은율도 그 안에 껴서 어정쩡하게 술잔을 부딪치고 술을 입에 대었다. 역시나 자신의 주량이 센 건지, 사방에서 학생들이 나자빠지는 꼴을 보면서도 정신이 멀쩡했다.

술판이 막바지에 이르자, 은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진환에게 메시지가 왔는데, 술판 때문에 정신이 없어 답장을 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 메시지가 가득하다. 대부분이 걱정을 담은 내용인지라, 은율은 새삼 그에게 고마워졌다.

‘동생들 말고 누가 날 이렇게 챙겨 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답장을 하려는데, 진환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확인했네? 지금은 뭐 해?]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지, 진환은 자신이 보낸 메시지에 붙어 있던 ‘1’이 사라진 것을 귀신같이 알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약간 섬뜩함을 느끼며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타이밍이 귀신같네요. 잠깐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통화할까?]

진환의 말에 가장 먼저 한 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마침 주변에 사람도 없었기에 은율이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걸자마자 바로 받는 것이, 손에 휴대폰을 꽉 쥐고서 노려보고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취하진 않았어?

“예, 멀쩡합니다.”

-다행이네. 잠은 어디서 자?

은율이 몸을 돌려 자신이 등지고 있는 펜션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펜션 안에서 자겠죠.”

-……혼자 자진 않겠지?

“방마다 몇 명씩 나눠서 같이 잔다고 들었어요.”

-…….

진환이 잠시 말이 멈췄다.

-되도록 구석에서 다른 애들하고 떨어져서 자.

은율이 쿡쿡 웃었다.

“제가 어린애입니까? 자는 위치까지 조정해 주게.”

-나한테는 어린애 맞지.

그보다 나이가 적긴 하니 틀린 말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애 취급은 좀 아니지 않나 싶다.

일부러 들으란 듯이 불퉁한 투로 물었다.

“형은 뭐 하고 계세요?”

주변이 조용한 것을 보니 촬영 중은 아닌 것 같았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있어. 그러고 보니 아까 곽 감독님께 연락 왔었어.

언제 불퉁했냐는 듯, 은율이 눈을 빛내며 들뜬 얼굴을 했다.

-전체 편집 완료했고, 상영 날짜는 영화제 첫날, 그리고 셋째 날 각각 2회씩 총 4회 상영하기로 결정되었대.

얘기를 들을수록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에 은율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직접 보러 갈까?

“그래도 돼요?”

은율은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약간 소리를 높여 버렸다. 건너편에서 진환이 작게 웃었다.

-<페르소나> 촬영본은 편집한 거로 이미 보긴 했지만, 그래도 스크린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돼.

“그럼…… 역시 직접 보고 싶어요.”

스크린에서 자신의 얼굴이 걸린 영화를 볼 수 있다니. 짧은 독립영화이긴 하지만 역시 스크린으로 크게 보고 싶었다.

-그래. 보고 나면 지금 율이가 고민하는 거, 결정 내릴 수 있을 거야.

은율의 어깨가 움찔했다. 진환이 말하는 ‘고민’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티켓은 내가 준비해 둘게. 첫 상영이 목요일 오후니까, 같이 보러 가자.

“예,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거세게 요동쳤다.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쉽게 두근거리게 되는 것 같았다.

“서은율.”

뒤에서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강희가 한껏 열이 오른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잠깐 전화 좀 하느라.”

강희가 긴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올린 모습으로 은율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은율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슬쩍 보다가 바짝 다가서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멀쩡하지 않길 바랐어?”

웃으며 말하자, 강희가 입술을 삐죽였다. 평소의 도도하고 차가운 그녀에게선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 그녀가 꽤 많은 술을 마셨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술 취한 것 좀 보려고 했더니…….”

작은 소리였지만 은율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생각해 보니, 게임에서 걸렸을 때마다 은율을 흑기사로 지정해 술을 먹였던 그녀였다. 은율은 자신이 마신 술의 절반가량이 모두 그녀의 흑기사로서 마셨던 술이라는 걸 자각했다.

강희가 은율의 가슴팍에 제 두 손을 대고는 그대로 가까이 붙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스킨십에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강희가 붉게 달아오른 볼을 가슴팍에 비벼 대는 게 느껴졌다.

“은율아…….”

딱딱하게 ‘서은율’이라 부르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은율아’ 하고 불러온다. 은율은 그녀의 상상도 못 한 모습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덕분에 진환과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고 말았다.

“넌 뭐가 그렇게 바빠. 붙잡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고, 이런 행사는 죄다 빠지고…….”

강희의 도도하던 얼굴이 애달프게 일그러졌다.

“나랑 얘기 좀 하면 안 돼? 응?”

은율이 어색해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강희야. 무슨 얘기 할까?”

취한 상태인 강희에게 아기 대하듯 반응해 주니 그녀가 팔을 뻗어 은율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은율은 더욱 당황하며 혹시라도 보는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이야……. 사실은 너한테 고백하려고 했었다?”

그 말에 은율이 놀란 눈으로 강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열기에 흐려진 눈으로 은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분명히 싫었거든? 난 쉬는 날도, 밤낮도 없이 공부만 하는데도 언제나 차석이었고, 넌 공부뿐만 아니라 자격증 준비에 알바까지 한다고 하지……. 너무 분하잖아. 공부 하나만 미친 듯이 팠는데도 1등이 될 수 없다는 건, 차석이 아니라 교과목 전부 F를 받은 사람처럼 비참하더라고.”

강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나서 일부러 너한테 어려운 과제를 떠넘기기도 했고 뾰족한 말도 해 봤는데 넌 그걸 또 다 웃으면서 받아 주고…….”

그녀가 은율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작정하고 못되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자꾸만 보고 싶고, 과제를 빌미로라도 연락하고 싶고……. 아, 진짜, 이게 아니라……. 하아…….”

그렇게 말하며 강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술을 잔뜩 먹여서 은율이 취하면 그가 비몽사몽 한 틈에 시원스레 고백하려고 했다. 자신도 그렇지만 맨정신인 그를 보며 고백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서.

그런데 어떻게 된 게 그는 취하지도 않고, 자신만 술에 잔뜩 취해서는 속내를 구구절절 풀어놓고 있다.

은율은 강희의 귀가 새빨간 것이 비단 술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은율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제게서 조심히 떼어 놨다. 반쯤 울상이 된 강희가 은율의 안경 너머에 있는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 너 무슨 일 하는지 알아.”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학교 끝나고 애들 없을 때…… 너 붙들고 고백하고 싶었어. 그날도 학교 끝나자마자 알바 하러 가길래, 뒤따라가다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안경과 앞머리에 가려진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그 너머로 모든 이목구비가 또렷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응시했다.

“……진짜 반칙이야.”

강희가 쓰게 읊조렸다.

그녀는 그날, 은율을 중간에서 붙잡아 카페에라도 데리고 가서 고백이라도 해 보자고, 큰마음을 먹었더랬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얼결에 그의 일터인 길거리 촬영장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하는 액션 촬영이라 주변엔 자신 말고도 구경꾼들이 많았다. 수많은 스턴트맨들이 엉성하게 싸우는 흉내를 내고, 주변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촬영 준비를 했다. 강희는 그 허약해 보이는 외견의 은율이라면 고작해야 스태프들 사이에 끼어 반사판을 들거나 전선 정리를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은율이 들어간 차량에서 후광을 등에 입은 것 같은 쫙 빠진 몸매의 남자가 내렸다. 처음엔 신인 배우인가 싶었지만, 몸매가 낯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밀치고 가장 앞줄로 나왔다. 목까지 길게 빼고서 그를 주시했다.

보아하니 남자와 스턴트맨들이 일 대 다수의 액션을 벌이는 장면인 듯했다. 남자는 엄청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남자의 선을 가졌음에도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고, 눈, 코, 입 어느 한 곳 과한 부분 없이 조화로웠다.

감독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의 사인이 떨어지고, 곧 그들이 움직였다. 남자는 날쌘 몸놀림과 화려한 동작을 선보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았다. 어찌나 리얼하게 연기하는지, 보는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쥘 정도였다.

그러다 스턴트맨들 중 한 명의 각목이 그를 가격했고, 각목은 반으로 깔끔하게 부러졌다. 너무 세게 가격한 충격 때문인지 각목의 반 조각이 허공을 빠르게 날았고, 그것은 강희가 있는 사람들 무리를 향했다.

각목 조각이 한 여인의 이마를 때리려던 찰나, 조금 전까지 화려한 액션을 펼치던 남자가 그녀의 앞까지 달려와 한 손으로 각목 조각을 낚아챘다. 그가 아니었다면 여인의 이마에 분명 상처가 났을 거다.

남자와 여인의 두 눈이 마주쳤다.

‘괜찮습니까?’

강희는 두 사람 건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경악했다. 이 목소리, 이 말투.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말도 안 돼.

무식하게 큰 안경 너머로만 보던 또렷한 검은 눈동자가 바로 거기 있었다.

남자는 잡고 있던 각목을 내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인의 이마 부근을 자세히 살폈다. 다친 곳이 없음을 확인한 그가 살짝 웃었다.

‘미안합니다.’

자기 때문이 아님에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가, 강희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남자와 너무도 똑같았다.

남자는 부러진 각목 조각을 들고서 스태프들 사이로 가 뭐라 부탁을 했다. 곧 스태프들이 나서서 구경꾼들을 더 뒤로 물러나게 했다. 강희 역시 그들의 지시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남자, 은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희는 제 머릿속에 아른거리던 그 날의 은율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하는 곳까지 본의 아니게 따라갔던 건 미안해. 네가 숨기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강희가 두 손을 가슴 앞에 꼭 모으더니 결연한 얼굴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나, 너 좋아해.”

은율이 놀란 눈으로 강희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묻자, 강희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가 용기를 낸 얼굴로 천천히 은율을 끌어안았다.

“좋아해. 좋아해, 서은율.”

은율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하고만 있었다. 강희를 그저 능력 있는, 의지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사랑 고백을 받아버렸다. 처음 받아 보는 고백은 낯설기만 했다. 은율의 경직된 몸이 강희의 팔에 단단히 붙잡혔다.

“날 좋아해 달란 말은 안 해. 그냥…… 내가 멋대로 고백하고 싶었던 거야.”

귀까지 빨개진 강희가 은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은율은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강희야, 난…….”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러다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은율은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검은 옷의 남자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사신처럼 검은 셔츠에 검정 정장 바지를 입은 그 남자가, 검정 마스크를 쓴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은율마저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안광을 쏘아 내고 있었다. 한기까지 느껴져서 몸이 살짝 떨릴 정도였다.

남자가 은율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와, 강희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잡아 떼어 냈다.

“뭐, 뭐예요, 당신은?!”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에게 우악스럽게 어깨를 잡힌 강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앙칼지게 물었다. 남자는 말 없이 그녀를 노려보더니, 돌연 은율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고선 그를 끌고 어딘가로 빠르게 걸었다.

강희가 얼른 달려가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뭐냐니까요?!”

남자가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전신이 경직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눈빛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은율이 얼른 나서서 강희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강희야, 아는…… 사람이야. 괜찮아.”

“……정말이야?”

강희는 미심쩍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율이 몸으로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얘기하다 돌아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미안해.”

그 말을 내뱉자마자, 은율은 그대로 남자에게 끌려갔다. 은율은 손목이 아릿한 것을 느꼈지만,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멍하니 선 강희가 빠르게 멀어지는 사이, 은율은 남자에게 뭐라 따질 새도 없이 바로 옆 펜션에 끌려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에 낯익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역시 또……!’

남자가 펜션의 수많은 문 중 하나를 열어젖혔다. 문이 잠겨 있지 않은 방에 억지로 밀어 넣어지고, 남자도 따라 들어와 문을 잠갔다. 은율은 방 안의 옷걸이에 걸린 얇은 코트와 그 근처에 있는 남성용 가방을 보며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아예 방까지 잡고 계셨던 거예요?”

은율이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눈을 한 남자가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평소보다 배는 딱딱해진 진환의 얼굴이 드러났다.

“제가 분명 오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까 다음 장소로 이동 중이라는 건 거짓말이셨습니까?”

“거짓말 아니야. 여기가 다음 장소고, 나도 지금 막 도착해서 바로 너한테 간 거니까. 그리고 별일 없으면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어.”

안 그래도 어느 정도 화가 나 있던 은율은 그 말에 눈가를 확 일그러뜨렸다.

“그게 지금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까 그건 별일도 아니었잖아요.”

“별일이 아니야?”

진환이 은율의 양팔을 잡았다.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간 탓에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네가 여자애한테 고백받은 게 별일이 아니야?”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 너는 별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애써 삼켰다.

자신과 달리 그 여자는 ‘이성’이었다. 은율에게 잘해 주고 그의 곁에 머물러 있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보지 않는, 그런 사람.

어떻게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은율이 혹시라도 그 여자를 받아들일까 봐, 착한 그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품어 줄까 봐 불안했다. 진환은 자신에게 없는 혜택을 가진 강희라는 여자가 부럽고 미웠다.

“난 굉장히 욕심이 많아. 그만큼 질투도 많고.”

진환이 숨을 고르며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백받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쉽게 생각할 수 있겠어.”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은율의 어깨에 머리를 대었다.

“네게 다른 사람이 생기면 나 따윈 쳐다도 보지 않을 것 같아. 지금처럼 지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저는……, 저는 지금 형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진환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은율의 멈춰 있던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켰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 같은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뭔가 기분이 얼떨떨했다.

“다른 사람이 생기든 아니든, 제가 왜 형을 멀리하겠어요.”

“멀리하게 될 거야, 분명히.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말하기만 해도 도망갈걸.”

작은 목소리였지만, 진환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분명 그렇게 될 게 확실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은율이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게까지 확신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뭘…… 겁내시는 건데요?”

차올랐던 화는 사그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그저 진환의 솔직한 생각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래. 단순히 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한숨과 같은 대답이었다. 그로 인한 반응에 대해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듯한 힘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은율에겐 다르게 다가왔다.

강희가 고백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가슴이 간질거리고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진환이 무슨 뜻으로, 무슨 마음으로 저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마치…….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 같잖아…….’

속으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진환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자신이 그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친구’의 범주에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진환의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다가 조금 어색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닿아 있던 얼굴이 떨어지며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위로하듯 등을 토닥이며 쓸어 주니 얌전히 안겨 있다.

“저도 형 많이 좋아해요.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형이 밉보이지 않았으면 싶고, 안 좋은 말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형이니까요. 그래서 아까 더 화가 난 거예요.”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진환이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게 있어 자신이 그저 ‘좋아하는 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뭔가에 까득까득 긁히는 것만 같았다.

*  *  *

“자, 일단 앉아요.”

은율이 방 안의 2인용 소파에 앉고서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그새 기분을 푼 진환이 작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몸을 틀어 소파에 비스듬히 앉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은율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진환을 노려보았다.

“앞으로는 무리하게 스케줄 변경해서 저 쫓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바쁘신데 데리러 오시는 것도 물론 안 되고요. 전 자기 일에 소홀하거나 주변에 민폐 끼치는 사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 무리하게 변경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건가?”

“스케줄이 원래 비어 있는 상태라면 상관없죠. 일이 많은데 그걸 억지로 변경해서 이러시는 게 부담스러운 거예요.”

진환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은율이 고개를 빼서 뭘 하나 봤더니, 메모장 어플을 열고 번호를 매겨서 내용을 적고 있다.

“그다음은?”

진환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그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린 은율이 짐짓 엄하게 말했다.

“강희에게 가서 사과하십시오. 물론 마스크 쓰고.”

진환이 일순 미간을 찌푸렸으나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금세 2번을 채워 넣고서 다음은 뭐냐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스킨십은 최대한 자제해 주세요.”

쉬운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진환은 잔뜩 고민하는 얼굴로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능한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야?”

“손을 잡는다든가, 끌어안는 것 같은 스킨십이요.”

진환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민 끝에 3번을 채워 넣었다.

“그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란 말이지. 그럼 사람들 없는 곳에서는 제한이 없는 거고?”

“너무 놀랄 정도만 아니면 됩니다.”

“좋아. 놀라게 하지만 않으면 웬만해선 다 된다는 거네.”

진환이 휴대폰에 적힌 내용을 한 번씩 속으로 읊어 보며 4번도 있냐고 물었다.

“아직은 없지만 나중에 생길 수도 있죠.”

“그럼 생기면 알려 줘. 추가해 둘게.”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진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2번부터 바로 해결하러 가자.”

은율도 따라 일어서려는데, 진환이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까 너무 세게 잡혀서인지 손목이 약간 빨개진 게 보였다.

진환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살짝 쓸어 보았다.

“미안. 아팠지?”

진환의 눈에 미안함이 담겼다. 은율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정말 미안해.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할게.”

진환이 진심으로 사과하며 은율의 안쪽 손목에 입술을 대었다. 그러자 은율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진환이 그런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장난삼아 혀를 내밀어 손목의 핏줄을 핥아 올렸다.

“흣!”

은율이 숨을 삼키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놀란 그가 장난기 가득한 진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진짜 변태 아녜요?”

은율이 얼굴을 확 붉히며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진환의 이마를 확 밀었다. 그제야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알았어, 안 할게. 화내지 마, 응?”

진환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뒤에 바짝 붙었다. 눈을 가늘게 떠서 노려본 은율이 테이블에 잠시 벗어 두었던 안경을 집어 들었다.

“화 안 낼 테니까 진심을 담아서 제대로 사과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율이가 그러라면 그래야지.”

뭐가 그리 좋은지, 방에 들어올 때와는 아예 딴 사람이다. 은율은 진환의 머리에 검정 모자를 씌워 주고서 마스크도 손수 착용시켜 주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 눈가와 손 외에는 죄다 검은색이다.

“오늘 복장은 왜 이리 다 까만 거예요?”

“그래야 눈에 안 띄……. 음, 아냐, 그냥 패션.”

진환이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에 웃음기를 담았다.

*  *  *

MT에서의 일은 진환이 직접 강희에게 사과를 하며 깔끔하게 끝이 났다.

은율은 진환을 마침 근처에 있던 아는 형이라 소개했다. 강희가 멋대로 은율을 끌어안아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는 잠시 오해했던 것이라 말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대해서는 강희도 미안해했다.

은율이 진환과 옆 펜션에 갔다 오는 사이, 강희도 바람을 쐬며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였다. 오늘의 일을 되짚어 본 그녀는 은율의 일터까지 본의 아니게 쫓아갔던 것과 오늘의 두서없는 고백에 대해 사과했다.

강희는 은율에게 오늘의 고백을 잊어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언젠가 멀쩡한 정신으로 다시 용기 내서 고백할 거라며 호기롭게 돌아섰다.

다음 날, 결국 은율은 진환의 차를 타고 돌아갔다. 워낙 많은 이들이 참여한 MT였다 보니 돌아가는 이들을 하나하나 체크하지는 않았다. MT에 참여한 교수들마저 일찌감치 돌아가 버렸다. 은율은 강희와 기언에게 알바를 핑계로 먼저 가 보겠다고 한 후, 진환의 차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동안, 은율은 자꾸만 제 머릿속에 맴도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진환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은 더 자주 생각이 났다.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래. 단순히 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 말에 꼬리라도 달린 것처럼, 희미한 소리가 뒤따랐다.

‘사랑해, 율아.’

꿈이라도 꾸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진환을 상대로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점점 생생해지는 말에 얼굴만 달아올랐다.

진환은 그저 독점욕과 질투가 많은 좋은 형이었다. 그런 그가 고백 같은 말을 하니, 자꾸만 꿈이라도 꾼 것처럼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사랑해’라는 말이 오버랩 되어 혼란스러웠다.

‘나는 남자인걸.’

고백일 리가 없다.

한동안 그렇게 머릿속에 되뇌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켰다.

*  *  *

“영화 시작 몇 시였지?”

대학 로고가 박힌 검정 점퍼를 입은 남학생이 동일한 점퍼를 입은 다른 남학생에게 물었다.

“곧 시작해. 얘들아! ‘12’ 입장한다!”

그 남학생은 근처의 같은 점퍼를 입은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그들 중 몇몇이 남학생을 따라나섰다. 들어가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학 과복을 입은 이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우르르 들어가는 무리들을 뒤에서 지켜보던 은율이 심호흡을 했다. 그런 그의 어깨 위로 팔이 하나 걸쳐지려다 아래로 내려간다.

진환은 긴장하는 은율을 보며 선글라스 안에서 눈꼬리를 휘었다. 당장이라도 저 어깨를 안아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데, 그 망할 ‘3번’이 문제였다.

대신 은율의 귓가에 마스크 쓴 입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긴장 풀어, 율아.”

“그러고 싶은데…… 자꾸 긴장돼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귀여워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들어가자.”

진환이 앞서 들어갔다. 은율은 그의 뒤를 따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예매한 자리는 영상을 보기 딱 좋은 한가운데 자리였다. 유명 영화감독들이 모여 만든 영화이다 보니 순식간에 매진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용케도 이런 좋은 자리를 잡았다.

은율은 주변의 시끌시끌한 소리를 들으며 두근거리는 제 심장을 어찌할 줄 몰랐다. 진환이 그 모습을 마스크 속에서 웃으며 보고 있다가 몇 번이나 진정하라고,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고, 이내 불이 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진환은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벗어 제 무릎 위에 두고는 몸을 약간 틀어 아예 대놓고 은율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자꾸 보세요?”

“예뻐서.”

은율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장난하십니까?”

“장난이겠어?”

진환이 씩 웃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느껴졌다. 은율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간 진환이 속삭였다.

“아직도 긴장돼?”

이제 막 <12>의 첫 번째 단편이 시작된 상태였고, <페르소나>는 영화의 가장 마지막, 열두 번째였다. 이렇게 잔뜩 긴장을 했다가는 68분 째부터 시작하는 <페르소나>를 제대로 볼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긴장 푸는 법 같은 것 없을까요? 아무리 심호흡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잘 안 되네요.”

은율이 절박한 표정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진환은 당장이라도 꽉 끌어안고 토닥여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소리 없이 명치를 맞을지도 몰랐기에 얌전히 있었다. 그 대신 살짝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스킨십해도 돼?”

은율이 움찔했다.

“스킨십이 긴장을 완화해 준다는 건 알고 있어?”

“누가 그래요?”

“내가.”

은율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을 멈췄다.

“정말이야. 적절한 스킨십은 긴장을 푸는데 효과적이지.”

은율이 눈을 굴렸다. 확실히 혼자 긴장하며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 정도라면…….”

그렇게 말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영화 집중하느라 아무도 몰라. 불도 어둡고.”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괜찮지 않을까.

“그럼 손잡는 건 허락한 거다?”

은율이 대답도 하기 전에 진환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은율은 움찔했지만, 쳐내지 않고 허락했다.

진환은 팔걸이에 올려 둔 은율의 부드러운 손등에 제 손을 올리고는 스크린으로 몸을 돌렸다. 은율 역시 좌석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스크린에 시선을 두었다.

손에 느껴지는 온기 덕분일까.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영화만 아니라면 이대로 나른하게 잠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환은 은율의 부드러운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느끼며, 흐뭇한 얼굴을 했다. 가끔 엄지로 그 손등을 쓸어 보지만, 어느덧 영화에 집중한 은율은 이를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진환은 만면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그 역시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준 높은 단편영화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은율과 진환은 새삼 유명 영화감독들이 괜히 이름값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같이 뇌리에 무언가를 심어 주는 영화들이었기에 가슴이 기분 좋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마지막 영화만을 남겨 두었다. 진환은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은율의 손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스크린에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진환은 은율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그의 떨림이 하나하나 전해져, 왜인지 진환의 가슴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웃고 있던 진환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진환이 스크린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스크린 속 ‘정한서’가 살아 움직였다.

*  *  *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고작 7분여의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은율은 마치 정지된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정한서’의 이름 옆에, 있어야 할 이름이 없다. 그 바로 밑, ‘윤지석’의 이름 옆엔 ‘이진환’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는데도.

영상을 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편집의 실수인가 싶어 저희끼리 속닥거리고 휴대폰으로 영화제 관련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주연 정한서의 이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은율은 사방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진환이 자신의 어깨를 흔들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진환이 물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는 어느새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전부 장착한 채 걱정스럽게 묻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일어났다.

진환은 은율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반쯤 멍하니 움직였다. 그의 이런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 어째 불안하기도 했다.

은율은 진환의 차로 돌아오고 나서야 조심히 입을 열었다.

“형…….”

진환이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가렸던 것들을 벗고서 몸을 돌렸다. 은율은 눈을 내리뜬 채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괜찮아?”

걱정을 담아 물으며 은율의 양어깨를 잡아 운전석의 제 쪽으로 몸을 틀게 했다. 초점이 뚜렷하지 않던 은율의 눈동자가 진환의 얼굴을 담았다.

넋이 나가 있던 얼굴은 금세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은율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잘게 어깨를 떨었다.

진환이 당황하며 은율의 등을 토닥이듯 쓸어 주었다.

“율아, 왜 그래?”

그는 얼굴을 가린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 들고 형 좀 봐 봐.”

진환은 은율의 이상한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은율의 손을 떼어 내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 조심스레 들었다. 잔뜩 붉어져 있는 얼굴이 촉촉한 눈으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형…….”

“그래.”

“저……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요.”

은율이 진심을 담아 제 속에 있던 말을 끄집어냈다.

“연기를 하는 것도, 연기한 영상을 보는 것도 다 너무 좋습니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환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떨리고 술이라도 잔뜩 마신 것처럼 기분이 붕 뜬 느낌이었다. 입꼬리는 제멋대로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못했고, 후끈한 열기가 곧바로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은율의 얼굴을 잡은 진환의 손끝도 그만큼이나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래…….”

진환의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떨림이 담겼다.

“그래, 율아. ……연기하자.”

은율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 진환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형이 연기할 수 있게 해 줄게.”

그 말에 안심한 듯, 은율도 그 못지않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12명의 유명 감독이 모여 만든 영화 ‘12’는 그야말로 굉장한 화제가 되었다. 내로라하는 유명 감독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것만도 대단한데, 그중 단연 화제가 된 것은 <12>의 마지막을 책임 진 였다.

독립영화에, 심지어 단편에 조연으로 나선 것이 무려 톱배우 이진환이었다. 심지어 그는 노개런티로 출연해 주연을 단단히 떠받쳐 주었다. 업계에서 어마어마한 개런티를 받는 이진환이 독립영화에 노개런티로 출연한 것도 경악할 일인데, 주연만 꿰차던 그가 조연이라니.

하지만 그런 이진환의 화젯거리마저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현재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달하는 ‘정한서’에 있었다.

<페르소나>의 감독 곽철민에 의하면,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이를 쓴 것도 아니고 일반인을 데려다 주연을 시킨 거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몸매가 좋은 더벅머리 남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제 앞머리를 가위로 잘라 내고 그 화려한 얼굴을 드러낸 순간, 스크린을 보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도저히 동일인물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이전과 다른 새하얀 셔츠를 입고 등장했을 때에는 보는 이들 모두가 벅찬 표정을 지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보기만 해도 설레고,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거기다 그의 연기는 흡인력이 상당했다.

대사, 행동, 시선 처리, 그 어떤 것 하나 시선을 잡아끌지 않는 게 없었다. 그의 숨소리, 손끝 떨림 하나하나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들어갔다. 그것은 가히 신들린 연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더욱이 그가 화제가 된 것은,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름 없는 배우’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열기가 SNS를 뜨겁게 달구었다. 포털사이트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 ‘정한서’가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고, 기자들은 앞다투어 그를 찾고자 영화 <12>의 관계자들에게 끊임없이 연락을 취했다.

특히나 휴대폰에 불이 난 것은 단연 곽철민 감독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그에게 주연 배우의 정체에 대해 물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저 낄낄거리는 이상한 웃음소리뿐이었다. 아무리 애걸복걸해 봐도 철민은 그들에게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철민에게서 답을 듣기를 포기한 기자들이 선택한 다음 타깃은 촬영 스태프들이었다. 그들 역시 입막음을 당한 것인지, 도통 말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는 촬영 스태프들 중에서 저 홀로 20대인 막내였다. 업계에 오래 있지 않았던 터라 기자들의 갖은 회유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가 밝힌 사실은 이내 기사화되어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지하철 미남이 바로 그 주연 배우의 정체였다. 스태프는 그 주연 배우가 일반인인 데다가 말수가 극히 적어서 이름마저 듣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곽철민 감독 역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일부러 촬영장의 누구에게도 그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작은 소스였지만,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사람들은 지하철 미남이 <페르소나>의 주연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그 일반인이 비주얼뿐만 아니라 연기력까지 출중하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영화를 본 이들은 그가 언젠가 톱배우의 자리에 서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 보았다. 실제로 그는 비록 짧긴 했어도 톱배우 이진환과 연기할 때 전혀 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이름 없는 배우’는, 영화제가 이어지는 내내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  *  *

제41회 ○○국제영화제 폐막, 화제의 중심에 선 작품 <12>

(사진=영화 <12>의 열두 번째 에피소드 의 곽철민 감독)

제41회 ○○국제영화제가 지난 27일 오후 8시 만남의광장에서 올해 경쟁 부문의 수상작을 발표하는 폐막식을 개최하고 그 화려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번 영화제에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작품은 단연 <12>였다. 영화 <12>는 12명의 국내 유명 감독 곽철민, 김희연, 김채헌, 노지명, 서우민, 송주희, 양덕준, 이장훈, 이연지, 장이명, 한지아, 홍표진이 각각 단편영화를 제작해 모아 만든 옴니버스 영화이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감독들의 작품답게 각 편마다 호평 일색이다.

그중에서도 영화 <12>의 마지막을 장식한 는 가히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강력한 임팩트를 선사했다. 정신분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초반부터 강렬한 연출로 수많은 관객의 오감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화제가 된 것은 연출뿐만이 아니었다.

조연 ‘윤지석’ 역을 맡은 유명배우 이진환(29)은 세계를 뒤흔드는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노개런티로 영화에 참여했다. 그는 독립영화의 주연 자리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배우다. 오히려 아무리 대단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배우가 아깝다’는 소리를 들을 것은 감안해야 할 일이다.

이진환이 조연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였지만, 또 하나의 화젯거리가 있다.

주인공 ‘정한서’를 연기한 배우는 저 홀로 두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선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진환과 호흡을 맞췄음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연기를 보였으며, 후반에는 가려 두었던 화려한 얼굴을 공개해 수많은 이들을 전율케 했다.

의 곽철민 감독은 주연 배우의 요청으로 엔딩 크레디트에 그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주연 배우의 이름이 없었기에 관객들은 더욱 호기심을 가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한때 인터넷을 달구었던 일명 ‘지하철 미남’이라는 것과 일반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 촬영 스태프 중 한 명이 공개한 내용으로,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영화보다 더 화제가 된 이름 없는 배우의 정체가 무엇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영화 <12>는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오는 6월 15일부터 일주일간 나우시네마에서 추가 개봉할 예정이다.

[선데이 스타뉴스 이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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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수 783

hewr****

정한서를 연기한 배우는 진짜 일반인이라면 천재가 틀림없다... 영화제 때 봤는데 개소름

└답글 182

honh****

정한서 했던 애가 지하철 미남 맞긴 맞냐? 느낌 다른데?

└답글 145

jinn****

솔까 이진환보다 더 눈에 들어왔다 손//

└답글 139

mans****

존나 이쁘게 생겼드만 남자 맞냐? ㅅㅂ 열라 섹시하네^^

└답글 122

qorr****

그게 일반인? 누굴 호구로 아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디서 모델을 데려다 약을 팔아?

└답글 107

kyso****

마스크 존섹이다

....................남잔데 꼴린 거 나뿐이냐?

└답글 95

cost****

영화 재개봉하면 보러 가야겠다! 근데 그렇게 연기 잘하나? 이진환이 연기 괴물인데 더해?

└답글 72

jins****

왜 이름이 없냐? 뭐가 찔려서 이름공개도 못 함? 범죄자임?

└답글 59

song****

영화 잘 만들었고 재밌었음! 재탕각

└답글 31

jojo****

지하철미남 사진 폰에 다운받아져 있는데 영화보다가 식겁했다... 동일인물 비주얼이 맞긴 한데 진짜 못 알아보겠음... 21세기 천의 얼굴이냣

└답글 28

awmo****

심장폭행당한 거 나뿐임? 영화 끝나고 옆사람이 나한테 팝콘 엎어주지 않았으면 끝난 줄도 몰라서 직원이 끌어냈을 뻔ㅋㅋ

└답글 17

fant****

신비주의 컨셉인가??? 노렸다면 성공했다

└답글 9

*  *  *

「제목 : 지하철에서 남신님 본 사람 있냐?

작성자 : 잔망고딩

제일 많이 떠도는 지하철 미남 샷 초근거리 사진... 이몸 거다... 갠소용인데 같이 찍은 미친 친구냔이 단체방에 올려서 퍼져버림...

참고로 난 그 남신님한테 허리 잡히고 머리 톡톡당한 운빨 지리는 뇬이닷ㅋㅋ 부러운 냔들은 그냥 부러워해~~~~ 응~ 너희들한텐 어차피 남신님이 손댈 일 없어~ㅋㅋ 나같은 지지리 운좋은 사람이나 남신님 만나고 그러는 거임ㅋㅋㅋㅋㅋㅋ

와나 지금 난리난 영화 주연이 남신님이었다며? 아씨, 망할 고삼이라서 보지도 못했다... 쓰붕...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야야, 예견 하나할까? 아마 관객 80프로는 여자일 거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신님 보배로운 얼굴 보려고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예견 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게, 기사 보니까 댓글 중에 남잔데도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신님한테 꼴린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남신님 실물 개섹시 존잘인데ㅋㅋ 망할ㅋㅋㅋㅋ

내 라이벌은 여자들뿐만이 아닌 거임?ㅋㅋㅋㅋㅋㅋㅋ

갠차늠... 난 굴하지 않앗!

뭐라 해도 난 남신님께 머리 톡톡당한 대단한 냔이니까!」

덧글 822

-으아니 그 사진 잔망고딩님이 찍은거였음? 큰절 올리니 받아주시오소서...

-와나 머리톡톡짤 자기 전에 매일 보는데 그 당사자가 님이었음? 아씨 난 왜 그 지하철에 없었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금 많이 좋아해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신님은 신상 뜨는 즉시 내거가 될거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 미친 스토커냔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할 소리를 왜 님이 함?

  └스토커냔 하나 더 추가요!

   └솔직해집시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남신님 안 갖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음?

    └맞는 말씀...

-와... 그 머리 톡톡 고딩이................ 님은 ㅅㅂ 전생에 논개쯤 됐나봄.....

-영화제에서 봤는데 진짜 동일인물인 거 모르겠더라...... 연기 개잘해...

└ㅇㅇ 나도 봤는데 아예 다른 사람 같음... 이중인격, 아니, 삼중인격 아님??

 └뭔 소리임? 영화가 이중인격자 얘기임?

  └비슷함. 근데 영화 처음부분 연기한 거랑 마지막이랑 지하철에서 찍은거랑 이미지 전혀 다르고 성격도 완전 달라 보임... 저걸 누가 동일인물이라고 봄?

   └스태프가 입 안 털었으면 아무도 몰랐을 듯

-와씨 오늘 지하철 탔는데... 왜 내가 탄 칸에는 남신님 없냐...?

└내가 한 일주일간 남신님 출현하셨던 시간에 같은 칸 타봤는데 안 계심... 천상계 올라가신 듯...

 └시간하고 번호 공유 좀

  └저두여!

   └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다 국내 필수 관광지 될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폭주의※ 남신출몰지역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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