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Stunt/Cut
영화 <12>와, 그 마지막 단편 <페르소나>의 주연을 연기한 이름 없는 배우는 한동안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수많은 이들이 이름 없는 배우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고, 심지어 팬카페까지 생기는 기염을 토했다.
이 소식은 당사자인 은율보다도 진환을 더 기쁘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보고 웃어? 기분 나쁘게.”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태블릿 패드를 들여다보던 진환이 고개를 돌렸다. 원목 데스크와 그 위의 ‘사장 김미경’이라고 적힌 기다란 명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데스크에서 일어난 중년 여인이 진환의 대각선에 있는 1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뱃갑과 지포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불을 붙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그녀가 힐끔 진환의 얼굴을 살폈다.
“저번에 말한 그 애?”
진환이 웃는 낯으로 태블릿 패드를 소파 앞 유리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화면에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미남이 큼직하게 떠 있었다.
미경은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입에 문 담배의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알싸한 연기가 속을 한차례 훑고 나서 그녀의 붉은 입술을 통해 유유히 흘러나왔다.
“정말 나한테도 안 알려 줄 거야? 원하면 바로 계약서 만들어 준다니까?”
“아직 허락을 못 받았어요.”
미경은 그 모습에 기가 찬 얼굴을 하며 태블릿 패드에 떠 있는 미남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비주얼 끝내주고 연기력 좋고 너 같은 뒷배까지 있는데 왜 결정을 못 지어?”
“걸리는 게 많은 거겠죠. 환경 문제도 있고, 여러모로 고민도 될 겁니다. 되도록 존중해 주고 싶어요.”
다른 이를 떠올릴 때와는 천지 차이에 가까울 정도였다. 미경은 차갑고 무심한 그의 얼굴을 이렇게까지 부드럽게 만든 그 당사자가 심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진환은 은율이 연기하고 싶다고 고백했던 그날로부터 며칠 뒤, 제 소속사에 연기자로 소속될 것을 제의했다. 지금 같은 화제성에다가 소속사의 대표 배우인 이진환이 보증해 준다면 계약은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무리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은율은 그렇게 하겠다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학업이었다. 그는 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하길 원했다. 재학 중에 뜬금없이 배우가 되어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준비하고 있는 자격증 시험이 12월 초였다. 은율은 그것을 치를 때까지는 정식으로 배우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진환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졸업반이니 학교야 적절히 취직을 핑계 대면 될 테고, 자격증 시험은 어차피 매년 있는 것이니 천천히 봐도 될 터였다. 차라리 그 시간에 배우로서의 길을 갈고 닦아 한시바삐 배역을 받아 작품을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은율은 그의 말을 들으며 쓰게 웃었다.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라며, 앞일을 모두 알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생활을 성실하게, 완벽하게 해 나가길 바랐다. 그리고 배우로 나섰다가 혹시라도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한다든지 일감이 없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보험도 필요했다. 진환은 은율을 보며, 지금의 화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다른 제시를 했다.
워낙 학점 관리가 좋았기에 2학기 때는 오전에만 잠깐 강의를 들으면 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배우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며 ‘이름 없는 배우’로서 연기 경험을 쌓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은율은 이에 동의했다.
연기를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기초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그렇게 ‘서은율’ 석 자를 밝히며 연기하는 것은 그가 무난하게 대학을 졸업한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대신 그는 방학을 맞아 주 3일 정도는 진환의 집에서 연기 지도를 받기로 했다.
진환은 은율을 위해 좋은 선생을 수배해 과외를 시켜 주려 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이 은율과 장시간 단둘이 있게 된다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진환은 은율의 연기 지도를 위해 자신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연기 교본을 집에 쌓아 두는 중이었다. 물론 완벽한 지도를 하기 위해 그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은율을 떠올린 진환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던 미경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연우가 한 말이 진짜인가 보네.”
진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경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담뱃재를 유리 탁자 위의 재떨이에 톡톡 털어 댔다.
“너 연애하려고 한다며.”
미경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쌍방 합의냐?”
거침없이 물어온다. 연우에게는 단순히 ‘형이 연애하려고 수 쓰고 있어요’라는 말만 들었지만, 미경은 그 날카로운 촉으로 알 수 있었다. 진환이 바로 이 ‘이름 없는 배우’에게 단단히 빠져 있다는 것을. 배우와 배우로서도, 사람과 사람으로서도.
여태껏 작은 스캔들 하나 터진 적 없던 진환이다. 심지어 생긴 것과 다르게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가 저리 돌변하니, 눈치를 못 챌 리 없었다.
진환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짝사랑입니다.”
“……뭐라고?”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같다. 미경은 제 손에 쥔 담배에서 담뱃재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헛웃음만 쳤다. 진환이 재떨이를 들어서 바닥에 떨어질 뻔한 재를 받아 내었다.
“짝사랑이라고요. 그 애는 절 그저 친한 형으로밖에 생각 안 합니다.”
어차피 그녀가 알 만큼 알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형’이라는 단어에 놀라지 않았다. 그저 ‘짝사랑’이라는 단어에만 심각한 표정을 지을 뿐.
“짝사랑이면 마음 접는 게 좋지 않겠어? 남녀 사이도 아니고 동성이잖아.”
“동성이면 뭐 어떻습니까. 제가 사랑한다는 게 중요하지.”
설마하니 이진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미경은 몇 번 빨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진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짝사랑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그거 관련해서 기사 뜨기라도 하면 너뿐만 아니라 그 애도 같이 타격 입어. 알잖아?”
“그런 기사가 뜨게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진환이 싸늘하게 말했다. 미경이 짧게 혀를 차며 ‘어련하시겠어, 아주’라고 내뱉었다.
이진환은 여태껏 나쁜 기사 한 번 난 적이 없었다. 거칠고 더럽기로 소문난 바닥에서 그 긴 시간 동안 연기하며 빌미를 주지 않았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백도 새삼 든든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 그 백이 알아서 처리해 주니 말이다.
표정을 푼 진환이 피식 웃었다.
“저도 언제까지고 짝사랑으로 남을 생각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려고? 네가 이렇게 티가 나는 데도 그저 친한 형이라고 생각할 정도면 둔해도 보통 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는 진환도 동의했다. 자신도 과거, 연애에 관련해선 참 둔감하다고 생각했는데, 은율을 보다 보면 자신 정도는 양호한 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애써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시간은 많습니다. 데뷔 전까진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
“그 둔한 애가 자주 보는 거로 네 마음을 알아챌까?”
“알아채게 해야죠.”
미경이 질린 얼굴을 했다.
“그래, 뭐……. 연기 생활에 지장만 없게 해.”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그 끝에 불을 붙이고서 아쉬웠던 한 모금을 빨고 나니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시나리오 중에 마음에 드는 건 있어?”
“몇 가지 솎아내고서 읽어 보는 중이에요. 결정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연말엔 알지? 레이먼드 감독 영화 들어가는 거.”
진환이 약간 어두워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초, 진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영국인 출신의 영화감독 레이먼드 윌슨에게서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다.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한 SF 블록버스터로, 남자주인공이 동양인인 만큼 이에 맞는 주연을 찾느라 레이먼드 윌슨 감독이 세계 일주라도 할 기세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진환을 보자마자 강렬한 러브콜을 보내 왔다.
세계적으로 더욱 인정받을 수 있는 더없는 기회였다. 진환도, 그의 소속사도 단번에 그 러브콜을 받아들였다.
“영화 들어가면 최소 반년은 해외에 있어야 할 테니까 미리 준비해 둬.”
진환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의를 받았을 당시에는 반년이든 1년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기간이 너무 길기만 했다.
* * *
“그럼 이 부분에선 이런 감정선이…….”
“지금 짚은 부분도 좋네. 그럼 여기에 이걸…….”
은율이 눈을 빛내며 펜으로 메모를 했다. 어느덧 대본 하나가 색색의 글씨로 꽉꽉 들어찼다. 진환은 은율의 뒤에 바짝 붙어 그가 적은 내용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글씨도 잘 쓰네.”
반듯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글씨가 참 그다웠다. 은율이 작게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요즘 이상한 데에서 칭찬이 후하신 것 같아요.”
“그런가?”
진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최근 들어 은율이 하는 모든 것이 그저 다 예뻐 보이긴 했다. 진환은 이런 게 콩깍지인가 싶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참, 형이 주연 맡으신 영화나 드라마 좀 봐도 됩니까?”
은율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환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너무 가까운 얼굴에 흠칫 놀랐다.
“어, 그…… 아무래도 형이 연기를 굉장히 잘하시니까……”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는 게 귀여웠다. 진환이 낮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버릇처럼 쓰다듬었다.
진환은 은율을 데리고 올라가 커다란 스크린과 고성능 홈시어터가 세팅된 방을 보여 주었다. 놀란 얼굴로 방을 훑는 은율을 스크린 앞 소파에 앉히고서, 그 앞 테이블에 DVD 수십 장을 케이스째로 나열해 주었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라고 말한 진환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마실 것을 준비했다. 무가당 주스 두 잔을 들고 올라오니, 은율이 진지한 얼굴로 DVD를 훑어보고 있었다.
은율이 여전히 DVD를 고르는 동안, 진환은 테이블에 주스를 내려놓고 그 뒤쪽 원목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첫 번째 서랍장에서 곱게 말려 있는 네이비 컬러의 담요 한 장과, 그 서랍장 위에 진열되어 있던 사각 쿠션을 챙겼다.
소파에 다가간 진환은 들고 있던 쿠션을 은율의 등과 소파 사이로 넣어 주고, 무릎에는 담요를 덮어 주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던지, 알아채지도 못한 것 같다.
은율이 DVD 하나를 골라 진환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소파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서 몸을 완전히 그에게로 돌린 채였다. 여태껏 제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조금 민망해졌다.
“그걸로 할래?”
짧게 물은 진환이 DVD 케이스의 포스터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의외네. 액션스릴러로 고를 줄 알았는데.”
“아예 접해 보지 못한 쪽을 보고 싶어서요.”
액션스릴러 장르는 아무래도 스턴트맨 일을 하다 보니 많이 접한 편이었다. 하지만 로맨스는 전혀 아니었다.
은율이 고른 DVD를 들고 홈시어터 기기로 다가간 진환이 능숙하게 영화를 세팅했다. 마지막으로 재생 버튼을 누른 그가 방의 불까지 끄고서 은율의 옆에 앉았다.
은율은 방 곳곳에 세팅된 서라운드 스피커의 입체 음향을 들으며, 커다랗고 선명한 스크린 속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새삼 진환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마치 상대 배우를 정말 절절히 사랑하는 것만 같았다.
작중 진환이 연기한 캐릭터는 굉장히 헌신적이고 다정한 남자였다. 반면 여주인공은 무뚝뚝하고 거침없이 털털했다. 그런 여주인공은 제게 헌신하는 남주인공에게 점점 마음을 열고, 여태껏 드러나지 않던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은율이 영상에 집중한 채로 물었다.
“형은 태생이 다정하신 분인가 봐요.”
“응?”
영상은 보지 않고 은율의 옆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던 진환이 눈을 깜빡였다.
“저한테 하시는 것도 그렇고, 연기하시는 것도 그렇고……. 본받아야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구는 줄 아나 보다. 어쩌면 업계에 퍼져 있는 자신의 무뚝뚝하고 도도한 이미지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진환이 은율의 옆에 조금 더 바짝 붙었다. 그는 본인 몫의 주스를 마시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붙들며 절절하게 사랑 고백을 하고 있었다. 은율은 그 연기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감탄했다.
-나한텐 너밖에 없어!
“나한텐 너밖에 없어.”
스피커의 격렬한 목소리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애타는 목소리가 얽혀들었다. 은율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바로 눈앞에 진환의 얼굴이 있었다.
“이렇게 해도 괜찮았지 않았을까 싶어.”
뒤늦게 진환이 웃으며 내뱉은 그 말이 연기라는 걸 알았다.
은율은 눈치 없이 심하게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음, 그러게요. 전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저런 고백을 듣는 당사자가 된다는 전제하에, 둘 중에서 선택한다면?”
은율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눈을 굴렸다.
“후자……이려나요.”
아무래도 격렬한 감정 충돌은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진환이 은율의 허리에 제 팔을 둘렀다. 그러고선 다른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사랑해.”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긴장한 것처럼 살짝 떨리는 것이, 왜인지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다.
은율이 딱딱하게 굳을 때쯤, 진환의 표정이 풀리며 씩 미소 지었다.
“어때?”
잔뜩 굳어 있던 은율이 입술을 삐죽이며 그의 손을 제 볼에서 떼어 냈다.
“놀리지 마십시오. 진짜인 줄 알겠습니다.”
진환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진짜야.”
은율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다 장난치지 말라며 그를 밀어냈다. 진환은 순순히 물러나 주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영화는 금세 막바지에 다다랐다. 감정에 둔하고 보기보다 겁이 많은 여주인공은 결국 남주인공의 사랑을 느끼며 그와 사귈 것을 약속했다.
남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줄 것처럼 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고, 여주인공 역시 그에게만은 솔직해졌다. 여주인공의 변화 및 둘의 연애 장면에선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러던 은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스크린에 두 사람의 알몸 일부가 드러났다. 은율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은율은 그제야 제가 고른 영화에 19금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진환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은율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일부러 모르는 척, 태연한 척했다. 은율이 곁눈질로 진환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민망해서…….”
순진하기는.
19금 로맨스 영화라고는 해도 상체 노출 정도만 있을 뿐, 전체 노출이나 야릇한 장면이 긴 것도 아니었다. 아래쪽은 아예 화면에 담기지도 않는데 노골적으로 부끄러워한다.
“나중에 영화를 찍다 보면 저런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해.”
그렇게 말하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팍 상했다. 은율이 다른 여자와 저런 장면을 찍는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렇겠네요.”
은율이 굳게 다짐한 듯 결연한 눈으로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두었다. 붉어졌던 얼굴도 조금씩 제 색을 되찾아 갔다. 은율은 이젠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영상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러던 은율이 진환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형은 역시 경험이 많은가 봐요.”
갑작스러운 말에 진환이 흠칫 놀랐다.
“저런 연기도 자연스럽게 하시고……. 역시 여자 친구가…….”
“그런 거 아니야.”
진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태 아무도 사귀어 본 적도 없고, 너 말고는……!”
아차, 하며 입을 꽉 다물었다. 은율이 고개를 갸웃하자 진환이 얼른 제 입을 가리며 시선을 돌렸다.
진환이 짧게 헛기침하는 사이, 은율은 다시 스크린에 집중했다. 영화에선 진환이 여주인공의 위에 올라타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은율은 괜히 제 속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약간 얼굴을 붉혔다. 왜 진환이 아닌 여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는 그때까지도 진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가 돼서야 고개를 돌린 은율은 그의 진지해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러세요?”
진환이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율아.”
“예?”
진환이 은율에게 바짝 밀착했다.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로맨스 연기도 잘하고 싶지?”
“물론이죠.”
“그럼, 내가 지금부터 스킨십을 할 건데, 되도록 허락해 줬으면 좋겠어.”
스킨십이라는 말에 은율이 흠칫 놀랐다.
근래 진환의 스킨십을 이상하리만치 신경 쓰게 되었다. 스킨십을 받고 나면 괜히 간질거리기도 하고 몸이 떨리기도 하는 것이, 뭔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했다.
은율이 그를 불안하게 흘겨보았다.
“뭘 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포옹? 아니면 손잡는 거?”
그런 생각밖에 못 하다니, 귀엽기 그지없다고 중얼거리며 진환이 작게 웃었다.
“지금부터 너한테 키스할 거야.”
“…!”
은율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가 입을 벙긋거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로맨스 연기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키스를 잘할 줄 알아야지.”
은율이 혼란스러운 눈을 굴리며 입을 다물었다. 진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로맨스 영화, 아니 로맨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영화에도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 ‘키스’다. 확실히 경험이 필요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얼마 전까지 첫 키스도 못 해 본 숙맥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남자끼리 키스라니…….’
은율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남자랑 키스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다른 남자면 상상도 하기 싫은데, 율이라면 괜찮아.”
그렇게 말한 진환이 태연하게 웃으면 덧붙였다.
“배우가 되기 위한 수업이라고 생각해.”
은율은 곧바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전에 비 오는 날, 진환과 키스했던 걸 떠올렸다. 당시 기분이 나쁘긴커녕 오히려 좋았었다. 사적으로 한다면 아무리 그래도 거부감이 들겠지만, 연기를 배우는 마당에 제게 선심 쓰는 진환을 무작정 밀어낼 수도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은율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저는 키스를 잘 모르니까……!”
허락의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진환이 못 참겠다는 듯 그의 입술을 덮쳤다. 은율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 뒤로 물러나려 하자, 진환의 단단한 팔이 그의 허리를 잡아 바짝 당겼다. 은율은 제 입술을 야릇하게 집어삼키는 진환의 눈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잡아먹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보였다. 그것은 여태껏 제게 보이던 온순한 눈이 아니어서, 은율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은율은 제 아랫입술을 진득하니 빨아 당기는 느낌에 흠칫 놀랐다. 진환이 부어오르는 살덩이를 간지럽히듯 할짝거렸다.
“하아, 율아…… 입 벌려 봐.”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에 은율이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진환의 굵고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진환은 은율의 입 안을 탐하며 그의 몸을 천천히 눕혔다. 은율은 제 몸이 소파에 눕는 것도 모르고서 입 안을 휘젓는 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진환은 자연스레 은율의 위에 올라탄 상태가 되었다. 마치 조금 전, 스크린에서 제가 침대에 여주인공을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던 것처럼.
진환은 은율의 혀를 깊이 빨아들이고 휘감아 핥으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흐응…! 읍…….”
부드럽게 할짝거릴 때보다, 의외로 강렬하게 빨고 잘근거릴 때 더 움찔거렸다.
진환은 제 손이 제멋대로 은율의 셔츠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깜짝 놀라며 얼른 손을 빼냈다. 지금이야 강한 키스에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알아챘다면 제 명치가 무사하지 못했을 터다.
진환은 아쉬운 마음으로 한 팔로는 은율의 허리를, 다른 팔은 은율의 뒤통수에 베개처럼 대어 주고 손끝으로 그의 옆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은율이 진환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은율은 진환의 혀 놀림에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맞대고 혀를 농락당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사람이 이리도 이상해질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저번 키스 때는 혀가 잠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은데, 이번은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숨이 모자라 헐떡거리면 그럴수록 심장박동이 심히 빨라졌다. 그 때문인지 몸이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몽롱해진다.
“하아, 자, 잠깐…… 환이 형…….”
은율이 바르르 떨며 어렵사리 말했지만, 진환은 그의 입술을 다시 제 입으로 막아 버렸다. 진환의 가슴팍을 잡은 은율의 두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전신의 힘이 빠지고 전신이 경련하듯 떨렸다. 몽롱하기만 하던 머릿속은 핑크빛으로 달달하게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았고, 제 혀도 소극적이긴 하지만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은율은 뒤늦게야, 이 몽롱함이 기분 좋은 느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은율이 거의 실신 직전이 되어서야, 진환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잔뜩 붉어져 있는 은율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진환이 제 입술에 묻은 타액을 혀로 핥으며 은율을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눈으로 달뜬 숨을 뱉고 있는 모습도, 입가에 길게 흘러내린 타액 한 줄기도 너무도 색정적이었다.
진환이 은율의 뜨거운 이마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진환의 입술이 가볍게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우리 율이, 키스 연습 많이 해야겠네.”
진환이 목으로 웃으며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숨을 쌕쌕거리는 게, 조금만 더 길게 했다가는 완전히 탈진할 것 같았다.
“키스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환이 순간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뭐?”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은율이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운 듯 얼굴을 돌린다.
“상대 배우에게…… 지금처럼 잡아먹히면 안 되잖아요…….”
진환의 눈꼬리가 꿈틀했다.
은율이 미래의 상대 배우와 키스할 걸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자신은 오로지 그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환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흉흉한 안광을 빛냈다.
“그거야 연습하면 늘지.”
“아, 역시…….”
진환의 안광을 보지 못한 은율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얼굴 앞에 진환이 바짝 다가갔다. 은율이 흠칫 놀라 진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왜 화가 난 것 같지…….’
진환이 화를 낼 만한 포인트가 없으니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흉흉하던 눈꼬리를 음흉하게 휘었다.
“연습, 할까?”
무시 못 할 기백에 눌려, 은율은 결국 제 입술을 내주고 말았다.
* * *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곤 하지만, 어째 진환과 있으면 해가 빨리 기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은율은 진환이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의 차량이든, 그 본인이든 원룸촌 안에 들어오면 튀어도 너무 튀었다.
결국 진환은 아쉬운 얼굴로 은율을 원룸촌 초입에 내려 주었다. 은율은 혹시 몰라, 차가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집으로 향했다.
약간 경사가 진 원룸촌 거리를 올라가다 보니,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확인해 보니 역시나 진환이다.
[잘 가고 있어?]
피식 웃으며 답장을 했다.
[걱정 마세요. 다 와 갑니다.]
[다행이네. 가는 동안 심심할 테니까 계속 메시지 보내 줄게.]
[안 그러셔도 돼요. 그보다 지금 운전 중 아닌가요?]
[근처에 주차하고 보내는 중이야.]
하긴, 그 바른 운전 사나이 이진환이 운전하면서 이렇게 바로바로 메시지를 보낼 리가 없다.
[키스하고 싶다.]
진환의 메시지에 은율이 얼굴을 붉혔다.
[요즘 만날 때마다 하고 있잖아요.]
처음 그에게 키스 강습을 받은 날로부터 2주가 지났다. 그동안 진환의 집에서 연기 교습과 함께 꼬박꼬박 받았던 것이 바로 키스 강습이다. 자신도 조금은 늘었나 싶었지만, 근래 진환의 키스가 더욱 농염해져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점점 길어지는 것도 같고…….’
초반엔 3분여 정도였는데, 지금은 거의 10분 넘게 하고 있다.
은율은 약간 부은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진환을 타박했다. 이러다 붕어 입술 되겠다고.
시답잖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제 원룸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길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 깜빡깜빡하고 있다.
골목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은율은 휴대폰에 시선을 둔 채 발을 내뻗었다.
낯선 발소리가 들린 것은, 은율이 집까지 고작 대여섯 걸음 남았을 때였다. 그는 이상한 발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는 걸음이었다. 은율은 이상함을 느끼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조심스러운 발소리는 점점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은율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몸을 긴장했다. 일부러 태연한 척 가만히 서서 진환과 메시지를 나누었다.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진환과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발소리는 어느덧 은율의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그는 겉으론 티 나지 않게 바짝 긴장했다.
착각이었을까.
검정 캡 모자를 깊이 눌러쓴 한 남자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은율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하며, 다시 발을 내뻗었다.
그때, 남자가 돌연 몸을 홱 돌리더니 순식간에 은율의 뒤로 돌아 왼팔로 은율의 목을 감아 조였다. 은율이 신음을 흘리며 그 충격에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서은율?”
은율이 제 목을 꽉 붙잡은 남자의 팔뚝을 두 손으로 잡으며 눈을 굴렸다.
“큿……, 뭡니까?”
“같이 좀 가 줘야겠어.”
남자가 평온한 어조로 속삭였다.
은율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자신을 납치하려다가 추돌 사고를 냈던 괴한들의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누가…… 보낸 겁니까?”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남자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건 가 보면 알 거라던데.”
남자도 상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가 보면 알아’가 아닌 ‘가 보면 알 거라던데’다.
이 차이는 크다.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고용된 사람.
“거절한다면……요…….”
팔의 힘이 상당해, 말을 잇기 힘들었다.
은율은 그를 방심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남자의 팔을 붙든 제 손의 힘을 뺐다.
“그럼 거칠게 끌고 가는 수밖에 없겠지?”
남자의 목소리에 조소가 담겼다. 은율은 그가 어떤 수를 써서든 자신을 데려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얌전히 끌려가 줄 수는 없었다.
은율은 겁먹은 척 얌전히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남자도 잔뜩 긴장하던 몸에서 약간 힘을 풀었다.
팔의 힘이 약간 느슨해진 것을 눈치챈 은율이 그제야 움직였다.
은율은 오른발을 들어 뒤꿈치로 남자의 발등을 거세게 찍어 내렸다. 남자가 윽 하며 몸을 움찔할 때, 오른팔을 굽혀 팔꿈치로 남자의 갈비뼈 부근을 가격했다. 상당한 통증에 남자가 휘청했고, 은율은 허술해진 팔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남자를 돌아보았다.
위아래 모두 시커먼 긴팔을 입고서 검은 모자까지 쓴 남자의 오른쪽 손목을 왼쪽 손으로 잡아 힘껏 꺾었다.
“악!”
손목이 꺾인 남자가 소리를 내며 왼쪽 주먹을 휘둘러 왔다. 은율은 몸을 젖혀 그것을 가볍게 피해 내었다. 남자의 손목을 잡은 채 은율이 바로 옆에 있는 오른쪽 벽을 왼발로 박차 몸을 기울였다. 그대로 오른발에 힘을 가해 남자의 왼쪽 옆얼굴을 강타했다.
“컥!”
남자가 옆으로 쓰러지며 또 한 번 손목이 꺾여 버렸다. 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은율이 안경 속에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남자가 몸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보냈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도 어차피 고용된 사람일 뿐이라 아는 것이 한정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모, 몰라. 우린 그냥 돈 받고 하는 일이야!”
탈골된 게 분명한 제 손목을 보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은율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잡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남자가 흐느낌 섞인 신음을 흘리며 반쯤 꺾여 돌아간 상태인 오른쪽 손목을 매만졌다.
“고용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봤을 것 아닙니까?”
“흐으…… 그냥, 그냥 평범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어…….”
은율이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바닥을 기어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 고용주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도 절 노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해야 제 발로 가든, 도망을 가든 할 것 아닙니까?”
“우리도 고용주에 대해선 잘 몰라. 그냥 돈 주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덜덜 떨며 말을 흐렸다. 남자는 통증이 심한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 은율이 더 바짝 다가가자, 남자는 이때다 싶어 왼팔을 휘둘렀다. 은율은 본능적으로 몸을 젖혀 그것을 피해 냈다. 남자의 손에 작은 버터플라이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남자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터라 피하긴 피했어도 목 옆쪽에 얇은 자상이 생겨 버렸다. 다행히 살짝 베인 수준이라 따끔하기만 했다.
은율은 몸을 뒤로 젖힌 상태로 두 팔을 뒤로해 바닥을 짚으며 오른발을 휘둘렀다. 남자의 손등을 매섭게 가격하자, 그 손에 들려 있던 버터플라이 나이프가 허공을 날았다.
“아악!”
강한 충격에 남자가 양손을 품으로 모아 웅크리곤 신음을 흘렸다. 은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왼쪽 목에 손을 대 보았다. 쓰라림이 느껴져 손을 떼어 보니, 약간 피가 배어 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골목에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익숙한 차량이라 은율이 깜짝 놀랐다. 그 차량이 바로 근처에 멈춰 섰다. 심각한 얼굴의 진환이 운전석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진환은 한달음에 은율에게 다가서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그러다 은율의 목에 난 자상을 보고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진환이 홱 돌아서서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남자가 어어, 하면서 그 손에 끌려 올라갔다. 상체가 반쯤 들린 남자의 얼굴을 향해 진환이 오른손으로 주먹을 날리려 했다.
“그만둬요!”
은율이 뒤에서 진환을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진환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주먹세례를 퍼부을 것 같던 진환의 팔이 우뚝 멈췄다. 그가 뒤로 몸을 돌리며 살벌한 시선을 보낸다. 은율은 일순 움찔했지만, 진환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형은……, 형은 때리지 마세요.”
주먹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때릴 때 자칫 본인이 더 다칠 수도 있었다. 은율로서는 진환의 손에 작은 생채기가 생기는 것조차 달갑지 않았다.
진환의 입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자, 남자가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진환이 화를 삭이며 물었다. 은율이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절 납치하려 했습니다.”
은율의 얼굴에 생긴 어둠을 보며 진환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짐작 가는 곳은 있어?”
“……확증은…… 없습니다.”
은율이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진환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도 자신처럼 과거의 그 일을 떠올렸겠지.
진환은 은율을 가볍게 끌어안아 주었다.
“차에 가 있어.”
“저 사람은…….”
“형이 알아서 할게. 나오라고 할 때까지는 얌전히 타고 있어. 근처에 한패가 있을지도 몰라.”
부드럽게 말하며 은율을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진환의 말대로 그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진환은 남자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상황을 봐서 도망가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있던 남자의 팔이 돌연 잡아당겨졌다. 진환은 꺾인 상태인 남자의 팔을 콘크리트 바닥에 대고는 제 무릎으로 그 손목을 내리찍어 버렸다.
“으아악!”
남자가 몸을 경련하며 비명을 질렀다. 진환은 무릎에 잔뜩 힘을 준 채 제 차로 시선을 주었다. 은율은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남자의 몸에 가려 손목을 짓이기는 부분은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닥치고 얌전히 있지 않으면 손가락 끝부터 꺾어 부러뜨려 줄 거야.”
진환이 제 무릎에 짓눌린 남자의 손가락 끝으로 손을 뻗었다. 남자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숨이 넘어갈 듯 끅끅거렸다. 목으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남자가 몸을 떨었다.
진환은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며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메시지가 가득한 메시지 대화창이 떠 있었다. 온통 제가 보낸 메시지로 도배가 되어 있다. 읽은 게 분명함에도 아무 대답도 없던 그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불안해했는지 모른다.
은율이 강하다는 것에 지금처럼 안도한 적이 또 있었던가.
만약 그가 제 한 몸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납치되고 말았을 거다. 어쩌면 저 목의 상처가 더 깊이 새겨져,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의 남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지를 갈가리 찢어 밟아 버리고 싶었다.
진환은 흥분한 속을 진정하며,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형사님, 접니다. 납치 및 살인미수범이 있으니 좀 와 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남자의 손목을 짓누르던 무릎에 강하게 힘을 주자,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에 힘을 뺐다. 진환은 그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며 상대에게 위치를 설명했다.
“최대한 빨리 와 주시죠. 이번 일,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니 꼭 깊이 수사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서 다른 곳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곧바로 전화를 받으며 반가운 내색을 한다.
“너무 오랜만에 연락드렸네요. 죄송해요. 그보다…… 아버지가 힘을 좀 써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환의 부친이 건너편에서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그가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겠다며, 말만 하라고 재촉해 온다.
“이 형사님께서 범인 인계해 가실 테니 꼭 배후에 대해 알아봐 주세요.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유일한 아들인 자신을 그 어느 것보다 끔찍이 아끼는 부친이었다. 이렇듯 굳이 전화까지 해서 단단히 당부를 했으니, 이 사건이 흐지부지 넘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진환이 전화를 끊었다. 남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진환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경찰이 오기 전에 잠깐 대화 좀 하지.”
진환의 손끝이 다시금 남자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사람 같지 않은 무시무시한 눈빛에, 남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 * *
은율은 진환의 도움으로, 원룸에서 급하게 몇 가지 물건과 옷을 챙겨 나왔다. 물건이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 않아서, 넓적한 쇼핑백 하나와 평소 쓰던 백팩에 꽉 들어찬 게 전부다.
습격했던 남자가 경찰의 손에 인계된 후, 은율은 남자의 배후가 밝혀질 때까지 자기 집에 머무르라는 진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처음에야 신세를 질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응하지 않으면 차라리 자신이 은율의 집에 머물며 지켜 주겠다기에, 결국 의견을 접고 말았다.
6평짜리 반지하 단칸방에는 도저히 재울 수 없는 사람이다. 진환이 괜찮아도, 자신이 괜찮지가 않았다.
진환은 차를 몰고 가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처럼 대화를 이어 갔다. 은율은 우울해지려는 기분이 진환 덕분에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아, 그에게 감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나 진환은 자신을 깍듯이 챙겨 준다.
근래 가슴이 간질거리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 진환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줄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리고 두근거렸다. 오늘만 해도 뭔가 이상하다 싶으니 한달음에 차를 몰고 달려와 주었다.
진환이 집 앞에 나타나 차에서 내릴 때, 은율은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리긴 했지만, 그가 자신을 생각해 화를 내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은율은 조수석에 앉아 운전석의 진환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든든한, 고마운 형이었다. 그렇게 정의하려고 보니, 뭔가가 허전했다. 중요한 게 빠진 것만 같았다.
대화를 나누던 은율은 문득 진환과 나누었던 메시지를 떠올리며 대화창을 열었다. 그곳에는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때에 온 것이 분명한 메시지들이 화면에 가득했다. 쾌활하던 내용들이 뒤로 갈수록 걱정이 가득했다. 은율은 또다시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심 당황하며 눈을 굴리는 와중에, 의자에 편안히 내려놓은 진환의 오른손이 보였다. 그 손과 진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환은 차선 변경을 위해 사이드미러에 시선을 둔 채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움찔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은율이 깜짝 놀랐다.
은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환의 오른손을 제 왼손으로 조심히 잡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은율은 놀란 얼굴을 한 채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다 얼른 제 손을 빼냈다. 그런 은율의 손을, 진환이 놓치지 않고 잡았다.
진환이 붉어진 얼굴로 말없이 정면을 주시했다. 그의 딱딱해진 얼굴을 보며 은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제 손을 도로 잡고 놔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딱히 기분 나빠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얼굴이 딱딱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은율은 저도 덩달아 얼굴을 붉히며 얌전히 왼손을 붙잡힌 채 고개만 푹 숙였다.
“율아.”
진환이 부르는 소리에 어깨를 파득 떨었다. 어느덧 차는 진환의 집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차의 시동이 꺼지고, 진환이 고개를 돌려 은율을 바라보았다. 은율은 고개를 숙인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율아, 형 좀 봐 줄래?”
진환이 다정하게 부탁했지만, 은율은 고개를 저었다. 정신없이 뛰는 심장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 어떻게 눈을 마주한단 말인가.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다, 진환이 제 손에 붙들린 은율의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읏!”
은율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환이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제 손목 안쪽에 입을 대고 있었다. 그 입 안에서 붉은 혀가 나오더니 손목 핏줄을 핥아 올렸다. 색스러운 그 행동에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보네.”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뭐 하는 거예요?”
“미안. 근데 어차피 단둘이잖아. 이 정도의 적당한 스킨십은 허용해 주는 거 아냐?”
이게 적당한 스킨십이 맞는지 가늠할 길이 없어, 은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율아, 형 손 왜 잡았는지 물어도 돼?”
진환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은율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홱 시선을 돌렸다.
“형 보고.”
손목에 살짝 입 맞추자 흠칫하며 결국 시선을 진환에게로 향했다. 은율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제멋대로 손이…….”
은율은 말하면서도 속으로 바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손에 다른 인격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제멋대로 움직였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환은 한참을 당황하는 은율의 모습을 보며 점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기대하게 된다.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을 참았다.
너도 조금쯤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거냐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다.
‘아직이야.’
섣불리 물을 수 없다. 그걸 계기로 은율이 거리를 두려고 할 수도 있다.
진환은 애타는 속내를 숨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난 네가 이렇게 먼저 스킨십해 주는 거 좋아.”
“……정말입니까?”
“그럼.”
은율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설마하니 손을 잡은 거로 자신이 기분 나빠할 줄 알았던 걸까.
진환은 은율의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후에야 그 손을 놔주었다. 그러고선 은율의 짐을 챙겨 앞서 걸었다. 얼른 따라붙은 은율이 제 짐은 제가 들겠다 했지만, 진환은 그저 웃기만 했다. 고집 센 진환 때문에 집 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은율의 짐은 그의 손에 있었다.
진환은 들고 있던 짐을 당연한 것처럼 제 방 침실에 가져다 놓았다.
“따로 잘 만한 방이 없으니 여기서 자.”
은율이 의아해하며 진환의 널따란 침실을 둘러보았다. 킹사이즈 침대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데다가 그 이외의 바닥 공간도 나름 넓으니 자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공간에서 자는 건 진환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불만 한 장 주시면 거실에서 자겠습니다.”
진환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불 여분이 없어.”
은율이 눈을 굴리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럼 베개만 빌리고 저번에 영화 볼 때 썼던 담요를 부탁해야겠다 싶었다.
“그럼 위층의 담요를…….”
진환이 손을 뻗어 킹사이즈 침대를 가리켰다.
“둘이 편하게 뻗어 자고도 굉장히 많이 남을 것 같은 사이즈처럼 보이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은율이 어색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한 침대에서 자면 형이 불편하시지 않을까 싶은데……. 전 계속 바닥에서 자서 아래쪽에서 자도 괜찮은데요.”
“안 돼. 어떻게 손님을 바닥에서 재워?”
진환이 워낙 단호해서 은율이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손만 잡고 잘게.”
“……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은율이 갸웃했다. 진환이 얼른 말을 이었다.
“난 내 집에 온 손님이 차가운 바닥에서 자는 꼴 못 봐. 차라리 내일 방 하나 비워서 침대 넣어 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여기서 같이 자자.”
“잠깐, 저 때문에 침대를 사겠다고요?”
은율이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돈 펑펑 쓰시면 안 돼요. 음, 그럼 형이 허락해 주시는 한에서 같이…… 자요.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하시고요.”
그제야 진환의 얼굴이 펴지고 미소가 감돌았다.
사실 이 커다란 집의 2층에는 침대가 있는 손님방이 셋이나 있다. 여분의 침구도 충분했다.
하지만 진환은 은율이 제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때부터 미리 그 방들을 단단히 잠가 둔 상태였다. 은율이 물어도 그저 창고라고만 둘러대었다. 그게 의도한 건 줄 모르는 은율은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실랑이가 지나고, 시간은 어느덧 11시에 다다르고 있었다.
얇은 반팔 티셔츠에 허벅지의 반까지밖에 오지 않는 반바지를 입은 은율이 이젠 익숙해진 진환의 집 욕실에서 양치를 시작했다. 안경 없는 맨얼굴로 세면대의 거울을 보며 양치를 하던 은율이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왜 진환의 손을 잡았던 건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떠올리고 보니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 손에 감돌던 진환의 단단하고 큰 손이 아른거렸다.
깜짝 놀라 얼른 도리질을 쳤다. 달아오른 얼굴 때문에 양치를 끝내고 찬물로 세수까지 한 번 더 했다.
욕실을 나오다가 진환과 마주쳤다. 그도 편안한 티에 긴 추리닝 바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진환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에 시선이 갔다.
은율의 시선을 의식한 진환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 경찰이 수사하고 있으니까 곧 가닥이 잡힐 거야. 그리고 서하진에겐…….”
“하진이에게 말했어요?!”
은율이 깜짝 놀라 물었다.
“하진이에겐, 동생들에겐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하진이 안다면 분명 난리가 날 거다. 그는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방학 동안 유명 사진작가의 보조로 일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 일을 알게 된다면 일을 팽개치고 달려올지도 모른다.
“안심해. 며칠간 연기 배우느라 내 집에 머물 거라고만 했으니까.”
은율이 그제야 안심했다.
진환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은율을 씁쓸히 바라보다 그의 목에 시선이 닿았다. 씻은 직후라 피가 배어 나오진 않았지만, 상처가 뼈아팠다. 진환이 은율의 목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할짝.
은율이 파드득 놀라며 제 목을 손으로 가렸다. 은율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진환이 장난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런 상처는 침 발라야지.”
“여, 연고 바르면 돼요.”
“내가 발라 줄게. 이리 와.”
진환이 은율의 손을 끌고 주방 옆 테이블로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선반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온 진환은 그 안에서 효과 좋은 연고와 밴드를 꺼내었다. 연고를 바르기 전, 탈지면 솜에 과산화수소수를 적셔 핀셋으로 그것을 은율의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대었다. 찌릿하는 통증에 은율이 움찔했다.
“조금만 젖혀 볼래?”
진환이 은율에게 바짝 붙어 그의 어깨를 한 팔로 둘러 붙잡았다. 은율이 목의 상처가 잘 보이도록 반대쪽으로 목을 젖혔다. 덕분에 새하얀 목가가 그대로 드러나, 진환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솜을 두드렸다. 건드릴 때마다 움찔하는 것이,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목이 약해서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연고를 꼼꼼히 바르고 밴드까지 붙여 놓고 나자 그제야 진환이 떨어졌다. 은율은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하며 밴드가 붙은 제 목을 매만졌다.
구급상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진환이 그에게 씩 웃어 보였다.
“이제 잘까?”
궂은일을 당해서인지 은율도 몸이 피곤한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하며 진환의 침실로 향했다.
진환은 제 침대에 머뭇거리며 올라가는 은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 침대에서 자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동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나니 얼굴이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진환은 속을 달래며 태연한 척 불을 끄고 그 옆에 누웠다. 큼직한 이불 속에 두 사람이 몸을 집어넣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은율이 약간 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환이 뭐라 말하려 할 때쯤, 그가 눈을 비비며 작게 미소 지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형.”
“……잘 자.”
곧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진환은 평온하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의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은율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모로 누워 그에게 약간 다가갔다. 어둠에 익어 가는 제 눈은 은율의 얼굴을 너무도 쉽사리 분석해 대고 있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눈으로 뜯어보고 있는데, 은율이 작은 신음을 흘리며 진환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갑자기 너무 가까워진 거리로 인해 진환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진환은 그렇게 한동안 은율을 내려다본 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은율은 오랜만에 푹 잔 느낌을 받으며 눈을 떴다. 딱딱한 바닥이 아닌 푹신한 고급 침대에서 잠을 청한 덕분인 듯했다.
흐릿한 눈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깜빡깜빡하고 있으니, 눈앞에 웬 사람 얼굴이 있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약간 핏발이 서 있다.
“형, 눈이…….”
은율은 약간 뻑뻑한 제 눈을 손으로 비비려 하다가 뭔가 묵직한 게 같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손이 진환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율이는 자고 일어나도 예쁘네.”
“예쁘다는 말 좀 그만 해요. 느끼하고 징그럽습니다.”
픽 웃으니 진환이 기분 좋게 웃는다. 그러다 은율이 그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역시 제가 옆에 있어서 불편하셨어요?”
“응?”
“눈에 핏발이……. 그리고 그새 다크서클이 좀…….”
은율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진환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하나도 안 불편했어. 그냥 일찍 눈이 떠져서 잠깐 보고 있었던 것뿐이야.”
잠을 설치긴 했지만 은율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둘러댔다.
은율은 그래도 얼굴을 풀지 않았다. 마치 진환이 일찍 눈을 뜬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그의 생각을 읽은 진환이 하얀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왔다.
“쓰다듬고 안아 주고 싶은데 해도 돼?”
평소 같았으면 왜냐고 물으며 의아해할 은율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얼굴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손잡는 건 물어보지도 않고 잡으셨잖아요.”
“난 어제 말했는데. 손만 잡고 잔다고.”
은율은 그제야 어제 진환이 흘리듯 말했던 그 문장을 떠올렸다. 그 말은 즉, 자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손을 잡았다는 걸까.
은율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했다. 그가 민망한 얼굴을 하며 웅얼거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환이 가까이 달라붙었다. 진환이 은율의 목 뒤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 주고선 그의 허리를 잡아 제 복부에 바짝 붙인다. 그렇게 제 품에 밀착시켜 놓고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준다.
은율은 처음에는 놀라서 몸을 굳혔지만, 이내 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리는 것처럼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환은 제 품에서 긴장을 풀고 나른하게 안겨 있는 은율을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다 큰 청년이 왜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진환이 작은 머리통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렇게 형 집에 와 있는 거, 잘한 것 같다.”
“예?”
은율이 고개를 들어 제 머리 위쪽에 있는 진환의 눈을 올려다본다.
“며칠 뒤면 장마잖아.”
은율이 흠칫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벌써 7월 초다. 언제 장마전선이 들이닥쳐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진환이 걱정 가득한 은율의 이마에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걱정 마. 비 오는 동안은 네 옆에 있을 테니까.”
은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제가 분명……!”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지금 찍는 건 야외 촬영 위주라 장마 때는 방법이 없어. 강제 휴식이야. 거기다 인터뷰나 다른 화보 촬영 같은 건 전부 7월 말로 예정되어 있고.”
“저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건 아니시죠?”
혹시나 하고 물었다. 진환이 씩 웃으며 그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약속한 게 있는데 설마 그러겠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진환은 애당초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눅눅하고 꿉꿉하고 질척거리고. 그래서 여름 장마 때는 되도록 일을 많이 잡지 않는 편이었다. 대부분의 오프가 여름으로 밀집되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진환은 이번 장마엔 다른 일 신경 쓰지 않고 은율과 함께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들뜨고 있었다.
‘아니, 들뜨면 안 되지.’
은율에겐 힘든 시간이 될 거다.
진환은 은율이 트라우마를 이겨 낼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줄 생각이었다. 배우 일을 한다면 평생 비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비가 오는 날도 연기를 해야 할 테고, 인공적으로 비가 오는 효과를 내는 촬영도 아무렇지 않게 해야 할 거다.
어떻게든 이번 장마 때 그의 트라우마를 없애 주고 싶었다.
은율은 이대로라면 너무도 기분 좋은 편안함 때문에 더 자게 될 것만 같아, 진환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진환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간단히 씻고 나온 은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조깅을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진환은 은율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그가 뭘 하는지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조깅용 추리닝을 꺼내 놓고 티셔츠를 벗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디 가려고?”
“조깅 다녀오려고요.”
진환이 반쯤 올라간 은율의 티셔츠를 얼른 잡아 내렸다. 가슴팍까지 드러나 있던 맨몸이 도로 가려졌다.
“어제 그런 일을 겪어 놓고 나가긴 어딜 나가? 한동안 집에만 있어.”
“하지만 조깅은 매일 하던 거고, 근처만 잠깐…….”
“안 된다면 안 돼.”
진환이 단호하게 말하자 은율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집에 신세를 지는 마당에 걱정까지 끼칠 수는 없겠다 싶었다.
“대신 가볍게 운동할 수 있는 방이 있어.”
은율의 눈이 빛났다.
진환은 1층 가장 구석에 위치한 방으로 은율을 안내했다. 그 안은 상당히 넓었는데, 헬스장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고가의 운동기구들이 가득 이었다. 은율이 감탄하며 기구들을 훑었다. 새것에 가깝지만 분명 사용감이 있는 기구들이었다.
“형도 여기서 운동하세요?”
은율은 진환의 몸이 상당히 좋다는 것을 상기하며 물었다. 진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구들은 써 봤어?”
“몇 가지밖에 몰라요. 헬스장을 따로 다녀 본 적은 없어서.”
진환이 안도했다. 만약 헬스장을 다녔다면 그의 맨얼굴과 알몸을 본 이들의 상당수가 그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환이 은율에게 다가서서 씩 웃었다.
“여기 기구들 쓰는 법, 알려 줄까? 나 없을 때도 언제든 쓸 수 있게.”
“그래도 돼요?”
은율이 들뜬 얼굴로 되물었다. 진환이 마주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운동을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은율은 알려 주는 운동 기구마다 어려움 없이 곧잘 해냈다. 그도 모자라 평균 이상 가는 신체 능력을 보여 주었다. 특히나 유연성은 두말할 게 없다.
문득 진환은 땀에 젖은 셔츠가 은율의 몸에 달라붙는 것을 보며,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달라붙는 옷도 옷이지만, 반바지 밑으로 보이는 허벅지 근육에 자꾸만 눈이 갔다.
어느덧 충분히 운동을 한 은율이 타월로 땀을 닦으며 다가와 밝게 웃었다.
“형 덕분에 정말 제대로 운동한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하던 은율이 진환의 얼굴을 보고서 그에게 바짝 붙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얼굴이 너무 붉은 것 같은데.”
은율에게서 느껴지는 후끈한 기운과 땀 냄새에 진환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남자 땀 냄새에서 왜 이리 단내가 나는 걸까.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진환은 은율을 욕실로 보내 놓고 그 문 옆에 우두커니 서서는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고 있었다. 은율이 제집에 아예 사는 것처럼 머물러 버리니, 머릿속이든 몸이든 도통 얌전하질 못했다.
샤워 소리가 그치고 욕실 문이 빠끔히 열렸다. 고개를 돌리던 진환이 그대로 흠칫하며 굳어 버렸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이 목에 붙어 있고, 그것에서 흐른 물방울이 물줄기가 되어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앞머리를 시원스레 올리고 그 머리 위에 흰 수건을 올려놓은 모양새가 마치 어여쁜 베일을 쓴 조각상 같았다. 그렇게 시선을 내리니, 타월 한 장으로 아래를 아슬아슬 가리고 있는 게 보였다.
은율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진환에게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갈아입을 옷을 안 가지고 들어가서…….”
진환이 워낙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통에 은율의 볼도 약간 달아올랐다. 진환은 제 옆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쳐 가는 은율을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 * *
진환의 수난은 며칠간 계속되었다.
은율은 진환의 마음도 모르고 너무도 태연하게 굴었고, 가끔 혼자 얼굴을 붉히는 것만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진환은 날이 갈수록 눈에 피로가 쌓여 갔다. 그건 너무도 두드러져 은율이 역시 따로 자겠다고 했지만, 진환은 그렇게 되면 자신도 바닥에서 함께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 버렸다. 결국 은율은 매일같이 진환의 침대에서 그와 함께 잠드는 수밖에 없었다.
장마는 예정보다 빨리 찾아왔다.
동쪽 해상을 지나던 태풍이 경로를 틀면서, 서울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바람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참 꺼려지는 날씨가 되어 빠르게 다가왔다.
그 탓에 진환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죽을 맛이었다. 연우를 재촉해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는 말했지만, 비바람 때문인지 차들이 굼벵이가 따로 없었다. 연우는 진환의 무시무시한 압박에 연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진환이 휴대폰을 꽉 잡은 채 초조한 낯을 했다.
낮까지만 해도 연락이 잘 되던 은율이, 비가 내리기 시작한 저녁 무렵부터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은율의 트라우마만 생각하더라도 걱정이 태산인데, 며칠 전 납치될 뻔했던 것을 생각하니 더 걱정이었다. 평소 때의 은율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을 터. 혹시나 또 같은 일이 생긴다면 이번엔 정말 납치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속으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경찰의 연락은 받았지만, 은율에겐 말하지 않았다.
경찰에선 은율을 습격한 남자가 흥신소와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남자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에게 의뢰를 했다던 젊은 남자도 잡았는데, 알고 보니 평범한 20대의 대학생이었다.
그는 학자금대출과 제 앞으로 된 은행 빚이 상당했는데, 누군가 그에게 흥신소에 대리 의뢰를 해 주면 100만 원을 주겠다고 접근해 왔다고 했다. 당장 이자 낼 돈이 급했던 청년은 그 말을 따랐다. 청년을 이용한 쪽은 미리 흥신소를 지정하고서 시간 맞춰 그쪽에 퀵서비스로 선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경찰들은 대학생 청년이 의뢰를 전달받았던 전화번호와 퀵서비스를 조사하며 범인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전화번호는 대포폰의 번호였고, 퀵서비스 쪽에 연락했던 다른 번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율에겐 비밀로 했지만, 이미 하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진환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케이가 움직이는 거라고.
그는 은율을 납치하기보다는 사실 은율의 실력, 그의 주변 환경,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가 될 것인가 등.
상대는 그것을 시험한 것 같았다.
그래서 진환은 은율을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쩌면 벌써 케이의 끄나풀이 진환의 집 근처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를 대비해 부친의 힘을 빌려 수시로 집 근처를 경찰이 순찰하게 하고, 집의 방범도 강화해 두었다.
진환은 몇 시간 전부터 은율이 제 메시지도 읽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는 것에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비에는 민감한 은율이니, 주룩주룩 내리지 않더라도 비구름이 바짝 다가와 있는 그때부터 트라우마가 깨어난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러길 바랐다.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만 아니라면, 당장 가서 그를 보듬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불안감에 몸서리치던 진환은 밖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하늘이 번쩍거리고 비바람이 불며, 굉음이 귀를 때렸다. 이것이 은율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갔을지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부터 진환의 집까지는 평소 때라면 10분이면 갈 거리다. 하지만 앞뒤로 꽉 막혀 움직이지 않는 지금, 그 몇 배는 소요될 것이다. 진환은 그 시간 동안 이런 차 안에 저 혼자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우야, 뛰어갈게. 넌 돌아가.”
“예?! 아니, 형! 지금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와이퍼를 잠시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또 쏟아지고 있었다. 거기다 천둥 번개까지 몰아치고 있는데, 우산도 없이 뛰어가겠다고 하니 연우가 호들갑을 떨 만도 했다.
하지만 진환은 연우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대로 차 문을 활짝 열어 버렸다.
3차선 안쪽에 서 있던 연예인 밴에서 돌연 늘씬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리자, 멈춰 서 있던 차량의 운전자들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눈을 크게 뜨며 진환을 알아보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보도를 향해 뛰었다.
마음이 급해 선글라스고 모자고 마스크고, 무엇 하나 챙기지 못했다. 그가 챙긴 것은 손 안의 휴대폰 하나. 방수가 되는 휴대폰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단번에 고장이 났을 정도로 격렬한 비바람이었다.
진환의 옷은 순식간에 속옷까지 젖어들었고, 단정하게 세팅해 올린 그의 머리카락은 잘게 흐트러져 얼굴에 자꾸만 붙어 댔다.
빗속을 달리면서도, 진환은 은율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부디 한 번이라도 받기를 바라며 애타게 걸고, 또 걸었다. 은율은 그가 집 앞에 도착한 그 순간까지도,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쿠르릉- 쾅!
하늘이 부서지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연신 울려 댔다. 진환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을 향해 창이 있는 방마다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심지어 거실도.
진환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하며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 없는 거실에 심장이 덜컥했다. 진환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율아.”
구두를 대충 벗어 놓고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의 불을 켜니, 자신이 집을 나설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풍경이 그를 맞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층의 방을 모두 뒤졌다. 바닥에는 질척한 발자국이 난무해졌고, 그의 입은 기계처럼 은율의 이름을 불러 댔다.
하지만 1층 어디에도, 은율은 없었다. 진환은 제 방 침대 위에 버려지듯 자리한 은율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연신 전화를 걸어 댔기에 분명 따뜻해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차가운 느낌이었다.
진환은 침실 협탁에 은율과 자신의 휴대폰을 올려 둔 채 신중한 걸음으로 2층을 향했다.
자꾸만 불안해져서 다리가 떨렸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이렇게 길었나 싶었다.
2층에 다다른 진환은 잠기지 않은 방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누구 하나 들어온 기색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그런 진환의 손이, 마지막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안에, 은율이 있었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커다란 스크린의 빛 덕분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진환과 한 여배우가 나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스크린을 보며, 소파에 무릎을 세워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은율이 보였다. 영화감상을 위한 헤드폰을 쓰고서는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전신의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진환이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고서 은율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은율이 고개를 돌려 진환을 바라본다. 그가 헤드폰을 벗어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소파에서 달려 나왔다.
“형!”
은율의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진환은 몇 번이나 애절하게 형을 부르며 제 목에 팔을 감고 안기는 은율을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 형이 많이 늦었지.”
“형……. 환이 형…….”
진환은 제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안겨 든 은율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래, 율아.”
진환은 긴장으로 부서질 것 같던 제 심장이 삽시간에 복구되는 것을 느끼며 은율의 머리에, 이마에, 볼에, 그 입술에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했다.
은율은 그의 스킨십을 얌전히 받으며 눈을 감았다.
무서웠다. 이 커다란 집에 자신 혼자 남겨진 트라우마를 견뎌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오금이 저리고 오한이 들었다. 진환의 기운이라도 느끼고자 그의 침실에 누워 보았지만, 평소와 달리 옆자리가 허전해서 더 두렵기만 했다.
그렇다고 약을 먹고 싶진 않았다. 이젠 약 없이도 오랜 트라우마를 견뎌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선택한 길을, 진환이 밀어주는 길을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직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자꾸만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그에겐 기괴한 웃음소리로 들렸다.
은율은 전신의 떨림을 느끼며 정신없이 바닥을 기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제멋대로 몸이 움직였다.
그의 몸이 향한 곳은 2층에 있는 영화감상용 방이었다.
은율은 그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왜 약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왔는지를 깨달았다.
이 방에는 진환이 가득했다.
진환이 나왔던 영화와 드라마들이 가득이다. 그가 없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은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무 DVD나 꺼내 틀어 버렸다. 그것은 연애 경험 없는 젊은 두 남녀가 다사다난한 일을 겪으며 풋풋한 사랑을 시작하는, 밝은 느낌의 로맨스 드라마였다.
은율은 DVD를 틀고 그 소리를 헤드폰에 연결해 들었다. 커다란 스크린과 시끄러울 정도의 음량 덕분일까. 환청도 환상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늘어지고 덜덜 떨리는 것만 아니었다면 지금 밖에 비가 오는지, 해가 쨍쨍한지도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은율은 몸을 웅크린 채 스크린과 헤드폰의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는 이상하게 뭉그러져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이야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그들의 언어처럼 뭉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스크린에 진환의 얼굴이 비쳤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맑아지고 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졌다. 신기할 정도로 그의 목소리, 그의 대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장난을 치고 다정하게 구는 모습이 나오면,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그가 눈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정말로 진환이 나타났다.
비에 완전히 젖어 몸이 잘게 떨리고 있음에도 진환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걱정에 찌든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제 얼굴을 확인하고는 한층 안도한 듯, 숨을 몰아쉰다.
은율은 헤드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도 모르게 진환에게 매달렸다. 드디어 저를 제대로 부르는 진짜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이에게 농담을 하고, 다른 이에게 장난을 치고, 다른 이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목소리가 아닌, 오로지 자신을 위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제게 키스를 퍼붓는 그가 너무도 좋았다.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과거의 기억이 아른거렸다.
여태껏 진환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진환을 만난 이후로 그는 제 삶에서 도저히 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가 함께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언제나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동생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가슴 깊이 새겨져 버렸다.
이렇게 아른거리는데.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사랑하는데.
‘아……. 난 형을…… 이미 사랑하고 있었구나…….’
은율이 덜덜 떨리는 입술로, 진환의 차가운 입술을 덮었다.
진환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분명 제 품에 있는 것은 은율이고, 이 감미로운 체향 역시 그였다. 그런 그가, 서툴지만 제게 입맞춤을 시도하고 있었다.
진환은 제 입술을 할짝거리며 입을 맞춰 대는 은율을 그대로 꽉 껴안았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대는 은율의 뒷머리를 손으로 단단히 붙들고, 이젠 그 주도권을 자신이 잡아 왔다.
두 사람의 거친 호흡이 엮이고, 진환은 안달이 난 모양새로 정신없이 은율의 입술을 탐했다. 탐스럽고 색스러운 입술이 자신으로 인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은율의 입 안에 혀를 넣어 헤집자, 그가 평소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진환은 이에 반응하듯 더 격하게 혀를 놀렸다.
“하으……. 혀……엉.”
은율이 신음만 흘려 대다가 어렵사리 형 소리를 냈다. 진환이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하며 그의 입술과 볼에 키스를 했다.
“하아……. 율아…….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해?”
진환의 목소리가 미친 듯이 떨렸다. 그가 손까지 떨며 은율의 몸을 꽉 붙잡아 안았다. 은율은 손을 뻗어, 비 내음이 가득한 진환의 등에 제 팔을 둘렀다.
“형……. 형……!”
주문을 외우듯 그저 형 소리밖에 안 한다. 진환은 애가 탔지만, 은율을 끌어안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제가…… 흑…….”
은율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진환이 깜짝 놀라 그를 품에서 떼어 내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제게서 묻은 게 분명한 빗물이 그의 머리끝을 적셔, 목 언저리에 섹시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윽…….”
진환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숨을 삼켰다. 진환이 아직도 떨리는 제 손으로 은율의 볼을 매만져 주었다. 은율이 볼을 매만지는 진환의 손등에 제 손을 얹고, 그 손바닥에 제 얼굴을 고양이처럼 비벼 댔다.
“어떻게 해요……. 저, 형이…….”
결국 은율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형이 좋습니다…….”
진환의 얼굴이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긴장 때문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은율의 눈에서는 눈물이 연신 흘러나왔다.
“형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진환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은율은 제가 붙잡고 있던 진환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지자, 어린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그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떨구었다.
“죄송……,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죄송……!”
연신 죄송하다고 하는 그를 진환이 확 끌어당겼다. 은율이 놀란 눈으로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형…….”
진환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은율은 진환이 왜 우는지 몰라 적잖이 당황했다. 연기를 할 때 외에는 그가 우는 것 자체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고백이 그만큼 충격이었던 걸까.
은율의 불안과 달리 진환은 물기 서린 눈으로 해사하게 웃어 주었다.
“나도…….”
“예……?”
진환이 은율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엄지로 슥 닦아 주었다.
“사랑해, 율아.”
진환의 목소리와 대사에 또 한 번 블랙아웃이 되었던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난 이미 예전부터 널 사랑하고 있었어.”
그제야 음주 후에 끊겼던 그 날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진환이 은율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대었다.
“사랑해…….”
떨리는 속삭임.
은율이 진환에게 그만큼이나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사랑합니다…….”
* * *
진환은 두 팔로 은율을 안아 들고는 그 입에 키스를 퍼부어 댔다. 그는 덜덜 떨며 진환에게 매달리면서도 그의 키스를 모두 받아 주었다. 키스는 점점 격렬해져 갔고, 진환은 잔뜩 흥분한 숨을 내쉬며 은율을 안아 든 채 계단을 내려왔다. 평소에 틈틈이 운동을 해 놓은 덕도 있었지만, 은율의 무게를 신경 쓸 정도로 정신이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은율은 진환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는 숨을 골랐다. 진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은율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형, 감기…… 걸리겠어요. 전 괜찮으니까 우선 씻으시는 게…….”
은율이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진환은 그 말에 그대로 우뚝 멈춰 서버렸다.
별 뜻 없이 그저 진환이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진환은 자꾸만 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진환이 옅게 미소를 띠며 눈가를 휘었다.
“형 때문에 율이도 젖은 것 같은데, 같이 씻을래?”
“같이……요?”
은율은 자신을 내버려 두고 씻으러 다녀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비 내음이 물씬 밴 옷을 입은 채 혼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던 은율은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환은 은율을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간이 의자를 끌어다 그 위에 은율을 앉히고서 곧바로 욕조에 물을 받았다. 콸콸콸 하고 울려 대는 소리가 두 사람의 심장까지 울려 대었다.
진환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젖은 옷을 벗어 문밖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가 순식간에 알몸이 되자, 은율이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율아, 옷 벗어야지. 감기 걸려.”
은율이 퍼뜩 놀라 고개를 들자, 탄탄한 근육을 가진 진환의 알몸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몸 좋다’라든지 ‘부럽다’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와 감정을 교류한 직후라서 얼굴이 미친 듯이 달아올랐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진환의 몸을 눈으로 훑게 된다.
그러다 진환의 아래쪽을 보고는 그대로 놀라 굳어 버렸다.
반쯤 발기한 상태인 진환의 성기는 얼핏 보더라도 제 것보다 컸다. 괜히 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 왜 서 있는 거야.’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진환이 약간 거친 숨을 쉬며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형이 벗겨 줄까?”
“……제가 벗을 수 있어요.”
은율이 의자에서 일어나 빗물에 젖은 티셔츠를 벗었다. 사타구니에 달라붙는 반바지를 벗고 속옷까지 벗어 내고 나니,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고개를 드니, 왜인지 긴장한 것 같은 진환이 보였다.
진환이 열에 들뜬 눈으로 은율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다가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지?”
진환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의 눈빛이 워낙 뜨거워서 슬쩍 눈을 피했다.
“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만…… 확인한 거잖아요.”
진환이 은율의 양어깨를 꽉 잡아챘다.
“그럼? 애인하기 싫어?”
흠칫하던 은율이 눈을 내리깔며 얼굴을 붉혔다.
“……싫지 않습니다. 저, 형 애인…… 하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하니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 같다.
진환은 그런 은율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참다못해 맨몸으로 그를 꼭 껴안아 버렸다.
“하아…… 율아……. 널 대체 어쩌면 좋냐…….”
속이 간질거려서 도저히 가만둘 수가 없다.
진환의 시선이 은율의 목에 가 닿았다. 베였던 상처에 새살이 돋아, 지금은 얇은 자국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머지않아 흉터도 남지 않고 완전히 없어지고 말 거다.
진환은 그 상처를 혀로 할짝 핥아 올렸다. 은율이 품속에서 파르르 떨었다. 그의 목에서 빗물의 약간 짭조름한 맛이 났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핥아 보았다. 그러다 입술을 묻고 쭉 빨아올리니, 은율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하읏…!”
예상대로 목이 약했다. 진환은 괜히 흥분해서는, 그 목에 아예 흡혈귀처럼 입술을 박고는 혀로 장난을 쳐 댔다. 핥고 빠는 걸로도 모자라, 제 혀끝으로 빠르게 원을 그리듯 굴려 본다.
“앗……. 형, 그만……! 흐읏……!”
은율은 목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감각에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하라고 밀어내야 하는데, 그의 등을 팔로 감아 매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아……. 율아…….”
진환이 뜨거운 숨을 은율의 귓가에 흘려 넣었다. 은율이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진환은 다시 은율의 목을 핥으며 은근슬쩍 그의 등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척추를 따라 손끝으로 살짝 긁듯이 내려오자 그의 허리가 살짝 휜다. 그렇게 내려온 손이 엉덩이골에 멈추고, 이내 탐스러운 엉덩이를 살짝 쥐었다.
“핫!”
은율이 놀라며 바르작거렸다. 진환은 은율의 볼에 뽀뽀를 해 주며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이고는, 손의 방향을 바꾸었다. 한 손은 은율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엉덩이에서 골반으로 향했다. 뼈가 도드라진 골반을 훑고 지나가니 격하게 반응한다. 진환의 손이 은율의 귀여운 복근을 훑어 올리고는 그대로 위로 올라갔다.
손이 멈춘 곳은 은율의 작은 유두였다. 은율에게 어울리는 연한 색의 작은 돌기가 너무도 귀여웠다. 그 끝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건드리니 은율이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형, 그만! 그, 그만해요!”
워낙 가까이 밀착해 있었던지라, 진환은 은율의 성기가 움찔하는 것을 그대로 느꼈다. 군침이 돌고 열감이 차올랐다.
“왜? 기분 좋은 것 같은데.”
짓궂게 말하며 유두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려 보았다.
“흐앗!”
은율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젖혔다. 그의 성기가 점점 발기하기 시작했다.
진환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은율의 왼쪽 유두에 제 입을 가져다 대었다.
“악!”
뜨끈하고 부드러운 혀가 유두를 괴롭히자, 은율의 다리가 크게 휘청거렸다. 진환은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지탱한 채 연신 혀를 놀렸다. 핥고 빨고 잘게 씹어도 보고 물어 당겨도 본다. 그럴 때마다 은율은 격렬하게 반응했고, 그와 비례해 그의 성기도 점점 부풀어 올랐다.
은율은 난생처음 겪는 야릇한 쾌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숨이 가팔라졌다. 몸은 열탕에 오래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붉게 변해 갔고, 입에서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은율은 어느덧, 자신이 간이 의자에 다시 앉은 채 그 등받이에 몸을 기대 늘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가엔 물기가 가득해, 진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진환이 발정기를 맞은 동물처럼 잔뜩 흥분한 얼굴로 간이 의자의 등받이에 두 팔을 뻗어 그 안에 은율을 가두었다.
“왜…… 왜 이런 걸…….”
은율이 헐떡이며 말했다. 진환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살짝 뽀뽀했다.
“연인들은 원래 다 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저흰 남자고…….”
“남자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 하나 사귀어 본 적도 없고 야동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은율이었지만, 기본적인 성교 관련 지식은 있었다. 하지만 그 기본 지식 어디에도 남자끼리 하는 법은 없었다.
의아한 얼굴의 은율을 보며 진환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은율이 괜히 겁먹은 얼굴로 몸을 떨었다.
“걱정하지 마. 오늘 끝까지 할 생각은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은율이 워낙 순진해서 끝까지 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 일단은 그를 달래며 조금씩 은율의 몸을 연구해 볼 생각이었다. 어떤 곳이 약한지, 어디를 어떻게 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지.
“형이 부탁 하나 하자.”
은율이 흐릿한 눈으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연인으로서’ 스킨십을 할 땐,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고 해 줘.”
이미 허락도 받지 않고 여기저기를 만져 댔으면서 굳이 부탁을 한다.
“뭐, 뭘 하려고……요……?”
은율이 불안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율이는 연인 간의 스킨십에 대해 잘 알아?”
은율이 곧바로 도리질을 쳤다. 진환이 씩 웃었다.
“형도 연인은 네가 처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기를 많이 해 봤으니 율이보다는 많이 알겠지?”
은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선 좀 더 아는 게 많은 형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하나 율이에게 허락을 받다 보면 흐름도 끊기고 형도 소극적이 되지 않겠어?”
“그런……가요?”
틀린 말은 아니다 싶었다. 은율은 결국 진환의 말에 넘어가 이를 허락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진환이 은율에게 키스를 해 대며 그의 몸을 일으켰다. 혀를 쭉쭉 빨아 당겨 주자, 은율이 신음했다. 진환은 은율의 허리를 잡아 키스를 나누며 욕실 구석의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우선…… 씻을까?”
은율의 이마, 눈꺼풀, 광대뼈, 콧등, 볼, 입술, 턱, 목까지 키스세례를 퍼붓는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따끈한 물을 맞으며 진환이 은율의 귀를 잘근 깨물었다. 은율이 흠칫 놀란다. 귓바퀴를 따라 혀를 놀리니, 귀에서 찌걱찌걱하는 소리가 울려 댔다. 은율은 진환에게 매달려 바르르 떨었다.
어째 민감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이런 스킨십 자체가 처음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은율은 사람의 성욕을 미친 듯이 돋우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진환은 은율이 춥지 않도록 따뜻한 물줄기의 방향을 그에게로 향해 주며 다시금 키스했다. 바짝 붙어 그의 다리 사이로 제 무릎을 넣어 보니, 단단한 성기와 말랑한 고환이 느껴졌다.
“하아…… 율아……. 율아……. 우리 율이…….”
진환이 신음하며 은율의 귓가에 속삭였다. 은율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몽롱한 눈으로 은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율아, 같이…… 할까……?”
은율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진환의 손이 은율의 성기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핫!”
은율이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라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바로 뒤에는 샤워부스 유리가 있었다. 피할 곳도 없이 등에는 샤워부스 유리가, 앞에는 진환이, 제 다리 사이에는 그의 튼실한 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 보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있는 진환의 성기가 보였다. 그 상당한 크기에 입이 벌어져선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은율의 것보다 확연히 컸다.
진환이 완전히 밀착하고는 그 큰 손으로 자기 성기와 은율의 성기를 함께 붙잡았다. 은율은 제 성기에서 느껴지는 뜨끈하고 단단한 진환의 것을 보며 기겁했다.
“뭐, 뭐 하는……!”
“같이 하자.”
진환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속삭여 왔다. 은율이 놀라 굳어 버린 사이, 두 성기를 붙잡은 진환의 손이 움직였다. 위아래로 슥슥 훑는 것뿐인데도 엄청난 느낌이다. 은율이 입을 벌리고 연신 신음을 흘려 대다, 손을 뻗어 진환의 손목을 붙잡았다.
“혀, 형, 그만. 이거 이, 이상해요.”
새빨갛게 붉어져 있는 은율의 얼굴을 보며, 진환은 넋을 놓을 것만 같았다. 섹시해도 너무 섹시했다. 미쳤다, 이건.
진환은 은율의 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한다. 안달 난 듯, 괴로운 듯, 기분 좋은 듯, 다양한 표정이 지나갔다. 진환은 문득, 제 것이 바로 그 은율의 것과 맞닿은 채 비벼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젠장, 쌀 것 같아.’
곧바로 신호가 왔다. 단지 상기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손 하나 대지 않고 절정을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은율이 울상이 되어 진환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혀엉, 이러다간……. 안 돼, 형…….”
생소한 쾌락에 들떠 울먹이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진환이 비어 있는 한 손으로 은율의 두 손목을 한 번에 잡았다. 그러고선 은율의 두 손을 그대로 그의 머리 위로 올려 결박했다. 샤워부스 유리에 기댄 채, 진환의 커다란 한 손에 단단히 결박당한 은율의 두 손이 움찔움찔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율아. 기분 좋을 거야.”
“시, 싫어요, 형. 이상해……!”
“괜찮아. 걱정하지 마.”
속삭이며 달래 본다. 잔뜩 긴장한 은율의 몸이 약간 풀리는 듯했다. 진환은 이때다 싶어 두 성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상태로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뜨끈한 물이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 주어, 그의 손은 아주 부드럽게 두 성기를 흥분시켰다.
“악! 혀, 형! 아, 안 돼, 형! 손……!”
“괜찮아, 싸도 돼, 율아. 형이랑……, 읏, 같이 싸자.”
“시, 싫어……! 이상, 이상해!”
은율이 도리질을 쳤다. 얼굴 한가득 혼란에 휩싸여서는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진환은 점점 차오르는 절정을 체감하며 은율에게 키스했다. 뜨끈한 혀를 그대로 집어넣어 잘게 떨리는 은율의 혓바닥을 휘감아 빨아들였다.
“으읍!”
은율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성기가 크게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너무도 짜릿해, 진환의 성기도 절정을 맞았다.
“흣, 읍! 하악!”
입술을 놓아주자마자 청량한 교성이 들렸다. 진환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그의 목소리에 또 한 번 절정을 맛보았다. 진하고 뜨거운 두 줄기의 정액이 진환의 손과 두 사람의 배에 튀었다. 그것들은 곧바로 샤워기의 따뜻한 물에 휩쓸려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진환은 은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여태까지 맛본 그 어느 절정보다도 이번 것이 최고라 단언할 수 있었다. 몸을 섞은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손에 두 명분의 성기를 쥐고 함께 절정을 맞은 것뿐임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가슴속이 한가득 충족되었다.
진환이 결박했던 은율의 손을 풀어 주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은율은 절정에 취해 있는 것인지, 약간 멍한 상태로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율아……. 하아…….”
은율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목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형이 너무 괴롭혔나?”
진환이 은율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싫다고 했는데…….”
은율이 힘없이 울먹거렸다. 그가 민망함에 가득 달아오른 얼굴을 진환의 어깨에 비벼 댔다. 그게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아서, 진환은 다시금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정말……. 오늘 끝까지 하면 무조건 미움받을 텐데……. 좀 봐주라…….”
진환이 행복한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은율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느릿하게 깜빡였다. 진환이 웃으면서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고선 그 이마에 연신 입을 맞춰 댔다.
이제까지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간지러운 입맞춤이 이제는 묘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설레다’라는 감정이라는 걸 깨달은 건 금방이었다.
은율은 진환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도 자신처럼 설레고 있는 걸까.
자신과 그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