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Stunt/Fade In(2)
바뀐 로케 장소는 서울 외곽의 거대 놀이공원이었다. 부지만 해도 어마어마한 그 놀이공원은 평일임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방학을 맞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대부분이라,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촬영은 그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즐기다 회전목마 앞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고백하는, 어쩌면 뻔하다 할 수 있는 장면이다. 다만 드라마의 주된 내용을 생각해 본다면 나름 긴장되는 장면이다.
여자주인공은 작중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대인기피증이 심한 사람이었고, 남자주인공은 그런 그녀에게 고용된 일종의 도우미였다.
여자주인공은 자신의 대인기피증을 고치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넷에 ‘뭐든 도와드립니다’라는 수상한 간판을 내세운 업체로 전화를 건다. 그 연락을 받고 그녀를 찾아온 게 남자주인공이었다.
말수가 적고 언제나 살기등등한 얼굴의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의 요청으로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남자주인공의 도움으로, 여자주인공은 작은 것에서부터 조금씩 사람과의 접촉을 해내 왔다. 그 결과 상태는 급속도로 호전되었고, 남자주인공이 함께 있다면 이제 사람 많은 카페에서 1시간 이상 머무는 것도 가능했다.
여자주인공은 더 큰 도전을 하길 원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놀이공원이었다. 그리고 그날, 남자주인공은 묵묵히 키워 왔던 제 마음을 그녀에게 고백하고자 한다.
대강의 내용을 들은 은율은 진환의 대본을 펴들고 열심히 내용을 읽고 있었다. 진환은 메이크업을 고치는 내내 그런 은율을 힐끔거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성실하게도, 은율은 여자주인공의 캐릭터를 분석하기 위해 아예 첫 장부터 빠르게 읽어 나가는 중이었다. 내용이 궁금한 것보다는, 자신이 캐릭터를 제대로 잡아야 진환의 대본 리딩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환 역시 그의 마음을 알기에 자꾸만 미소가 피어났다.
약 2달 전부터 진환의 스타일리스트가 된 혜영은 진환의 얼굴을 점검하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자신 이전의 스타일리스트는 진환에게 잘못 찍혔다가 못 견디고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것도 기분 좋을 때 찍혔다고 했었다.
‘조심해야지…….’
그가 왜 기분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촬영 로케로 가는 길 중간에 합류한 그녀는 뭔가 스튜디오에서 좋은 일이 있었나 하고 지레짐작만 했다. 혹은 옆자리에서 뭔가를 읽고 있는 처음 보는 사람 때문인가?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전 스타일리스트처럼 찍히지 않게끔 조심해야 했다.
이진환의 스타일리스트였다는 커리어는 엄청나다. 하지만 두어 달 일한 거로는 커리어가 되지 않는다. 1년은 족히 버텨야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자신의 커리어를 입증할 수 있다.
혜영이 보기에 이진환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TV보다 실물이 훨씬 위압감 넘치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다. 작품 중에는 그가 부드럽고 자상하게 나오는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세련되고 우아한 캐릭터가 많았다.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진환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다른 동년배 배우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고,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 포스라는 것은 사람들을 충분히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평범하고 부드러운 캐릭터보다는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를 맡아야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이진환의 스타일리스트가 되었다고 좋아하긴 했지만, 언제나 무뚝뚝하고 위압감 가득한 진환과 함께하려니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너무 긴장하나 싶기도 했지만, 긴장하지 않으면 여기서 멀쩡히 스타일리스트나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진환이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거지만…….
‘일단 너무 잘생겼어.’
그것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였다. 긴장을 풀면 제 눈앞에서 가만히 얼굴을 내주고 있는 남자를, 소위 말해 ‘덕질’할 것 같아서. 심지어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표정에 살짝 미소도 짓고 있다.
‘긴장돼…….’
혜영은 얼굴을 붉힌 채 속을 끓였다.
마침 그때, 밖에서 밴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을 열고 연우가 얼굴을 들이민다.
“형, 30분 뒤에 촬영 들어간대요.”
“알았어.”
진환이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연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카메오로 이수하 씨 들어가신답니다.”
“뭐?”
진환이 좌석에서 상체를 벌떡 세우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살벌하게 바뀐 표정 때문에 그 앞에서 메이크업을 해 주던 혜영이 어깨를 떨며 동작을 멈췄다.
“그놈이 갑자기 왜?”
“이수하 씨 쪽 드라마도 오전에 여기서 촬영했나 봐요. 촬영 감독님이 이수하 씨한테 부탁했다던데요.”
진환이 못마땅한 듯 짧게 혀를 찼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대본에서 눈을 뗀 은율이 뒤늦게 물었다. 진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연우에게 말할 때와는 천지 차이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은율이 잘못 봤나 하고는 다시 대본에 눈을 떨궜다. 혜영이 그런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그녀야말로 지금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이진환은 설마…… 이중인격인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훅 바뀌지?
혜영의 시선이 다시 대본에 집중한 은율에게 향했다. 답답한 앞머리와 커다란 안경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존재감도 적어서 길 가다가 만났으면 분명 못 알아보고 스쳐 지나갈 느낌이다.
이런 사람이 톱스타 이진환의 밴에 올라타 있는 이유가 뭘까? 손에 대본을 들고 있으니 연기자인가? 엑스트라?
‘에이, 설마.’
엑스트라라면 톱스타 밴에 올라타 대본을 읽고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혜영은 진심으로 은율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던 중, 연우가 열고 있던 문 너머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에 입가에 띤 미소가 매력적인 남자, 바로 이수하였다. 환한 배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화사하고 시원한 이미지였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진환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 바람에 혜영이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인상 한 번 썼을 뿐인데 분위기가 무시무시하게 바뀌었다.
수하가 연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그 옆에서 얼굴을 디밀어 진환을 바라본다.
“왔냐?”
“남의 차엔 무슨 볼일이야?”
태연자약하게 웃는 수하에게 진환은 가차 없이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나 카메오 들어가는 건 아냐?”
“그래. 얼른 찍고 좀 꺼져 주면 좋겠군.”
“쌀쌀맞기는.”
수하는 진환의 속을 긁고 싶었지만, 다른 이들이 셋이나 있는데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진환이야 원래 싸가지 없이 말해도 그러려니 할 인상이지만, 자신은 바르고 단정한 이미지를 밀고 있었다.
수하는 눈웃음을 치다가 진환에게서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은율을 발견했다. 그는 수하가 온 것도 모르고 제 손에 들린 대본에 푹 빠져 있는 상태였다.
“서은율 씨 맞죠?”
이름이 불린 은율이 그제야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은율은 뒤늦게 대본을 접어 손에 들고 약간 상체를 일으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집중하는 걸 내가 방해했네요. 은율 씨한테 대역 촬영 관련해서 부탁할 게 좀 있었는데 잘됐네요. 잠깐 시간 좀 내줄래요?”
대역 촬영 관련이라는 말에 은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환은 차 문을 활짝 열고 아예 밖으로 나가서는 수하와 마주 섰다. 그 사이에 낀 연우가 후다닥 물러났다.
“네가 왜 율이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애칭? 귀엽네. 그냥 은율 씨가 내 대역을 해 주고 있으니 스턴트 액션 관련해서 도움받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촬영 날짜는 꽤 남은 거로 아는데?”
수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말하는 투를 보니 그 뒤에 같이 촬영한 적 없다는 것까지 아네? 스케줄 관리도 해?”
진환은 저를 살살 긁는 수하에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평소처럼 긁는 거였다면 상관없었겠지만, 그 안에 은율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니 자꾸만 머리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은율이 앉아 있던 좌석에 대본을 내려놓고 차 밖으로 나오다가, 험악한 인상의 진환을 보고 움찔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안에선 들리지 않았다. 내용을 모르고 진환의 얼굴을 보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스럽기만 했다.
진환이 얼른 표정을 풀고서 은율의 팔을 당겨 제 곁에 세웠다.
“왜 나왔어? 안에 있지.”
“그거야 수하 씨가 보자고 하셨으니…….”
“저딴 놈은 볼 필요도, 대화할 필요도 없어.”
진환의 단호한 말에 은율이 그의 손을 떼며 수하의 눈치를 살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면서 수하의 눈치를 살폈다. 눈이 마주친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서은율 씨, 시간 괜찮죠?”
“물론입니다.”
은율이 살짝 웃으며 대답하자, 진환이 그의 양어깨를 잡아 제게로 돌렸다.
“안 돼.”
“형은 마저 준비하세요.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얘기해.”
진환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하가 다가와 그의 한쪽 손목을 잡아 은율에게서 떼었다.
“여기선 불편해서 내가 싫은데. 율이 씨도 허락했잖아.”
“뭐? 율이 씨?”
진환이 눈가를 꿈틀하며 노려보았다. 수하는 태연하게 웃으며 은율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러도 되죠?”
“아뇨, 안 됩니다.”
당연히 상관없다고 말할 줄 알았더니, 부정의 말로 즉답한다.
수하가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이자, 진환이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거칠게 털어 냈다. 그러면서 은율의 어깨를 둘러 안고는 비웃듯이 턱을 살짝 들어 보였다.
“너 따위가 불러도 될 애칭 아니야.”
옆에서 은율이 덧붙였다.
“애칭이고 뭐고, 느낌 이상해요.”
“그럼 형은 왜 허락해 준 건데?”
“그거야…….”
은율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을 피했다. 여동생 지희가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진환을 통해 듣다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진환은 그 모습을 보며 제 얼굴이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채 인식하지 못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수하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서은율 씨. 그럼 지금 잠깐 얘기 좀 할래요? 이후에 있을 대역 관련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좀 있어요. 시원한 커피 한잔하면서 얘기해요.”
“알겠습니다.”
수하를 따라나서려는 은율을 진환이 다시금 말렸다.
“율아, 굳이 얘기할 것 없어.”
은율이 진환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사적인 게 아니라 제 일과 관련된 거잖아요. 형은 제가 하는 일 전부를 통제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여기서는 잘 다녀오라는 한 마디면 되는 겁니다. 걱정 그만하고요.”
진환이 입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제 곁에만 붙어 있으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수하가 눈앞에 있으니 섣불리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진환은 쓰게 웃으며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어. 대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멀리 가지 말고, 일 얘기 외에는 귀담아듣지 말고, 또…….”
당부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걸 보고 있던 수하는 질린 얼굴로 헛웃음만 내뱉었다.
‘누가 잡아먹는다고 했나.’
이쯤 되면 은율이 진환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이진환이 안달 난 얼굴로 부모처럼 신신당부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은율이 제 손에 휴대폰을 쥐고는 진환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자, 지금처럼 휴대폰 꼭 쥐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진환이 싱긋 웃으며 또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뾰로통해질 법도 하건만, 이젠 적응이 되었는지 은율도 웃으며 받아 주었다.
불안하긴 했지만 당장 몇 분 뒤면 진환 역시 촬영을 시작해야 했다. 언제까지고 붙들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은율은 차에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제 등을 바라보는 진환이 신경 쓰여,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분명 손짓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진환은 여전히 시선을 이쪽에 둔 채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것이 절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웃음이 났다.
“둘이 사이가 참 좋네요.”
옆에서 걷던 수하가 웃으며 말을 걸어 왔다. 그제야 은율이 진환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을 보며 걸었다.
“절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셨죠.”
수하가 은율의 귀에 속삭였다.
“저도 많이 도와드리면 애칭 부를 수 있게 해 주시려나요?”
은율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됩니다.”
“단호하시네.”
이미 은율이 그리 대답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수하 역시 마주 웃었다.
저 멀리 한 체인점 카페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봐도 사람이 가득하다.
“아, 제 밴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카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을 것 같네요.”
안 그래도 카페에 사람 수가 상당한데, 그런 곳에 배우 이수하가 나타난다면 당연히 더 북적이게 될 터였다. 은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이동했다.
수하의 밴은 널따란 공영주차장의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워낙 주차장 부지가 넓어, 진환의 밴에서부터 한참을 걸어야 했다.
진환의 밴과 비슷한 디자인의 검정 밴 앞에 선 수하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은율은 밴에 올라타서 창가 자리에 바짝 앉았다. 뒤이어 수하가 올라타서는 뒷좌석에 놔두었던 아이스박스에서 얼음이 담긴 일회용 컵 하나를 꺼냈다.
“은율 씨는 커피 취향이 어떻게 돼요?”
“블랙입니다.”
“시럽은요?”
“없이 부탁드립니다.”
수하가 블랙커피가 든 플라스틱 병을 기울여 일회용 컵에 커피를 담아냈다. 진한 갈색의 액체가 서로 엉겨 붙어 있던 얼음덩이들을 녹여 갔다. 수하는 커피를 가득 담고서 뚜껑을 닫고는 빨대까지 꽂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 들은 은율이 감사를 표했다. 수하가 그의 옆자리이자 문 가까이 있는 좌석에 앉아 아예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다음에 만나는 게 보름 뒤였죠?”
수하는 자신의 액션을 대신해 줄 은율이 그때 출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에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덕분에 좋은 샷이 나왔어요. 고마워요.”
수하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은율은 그의 손을 스스럼없이 잡았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잡힌 손을 빼려 하자, 맞잡은 수하의 손이 그걸 꽉 붙잡았다.
“근데 진환이랑은 무슨 사이예요?”
“친한 형 동생 사이입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하지만 수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진환이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이던데.”
수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난 또 둘이 연애하나 했죠.”
뜨끔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은율은 흔들림 없는 태연한 모습으로 수하의 눈을 바라보았다.
“둘 다 남자인데 어떻게 연애를 합니까?”
말하면서도 가슴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반응하지 않으면 그가 알아챌지도 몰랐다. 그로 인해 진환이 피해를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수하는 은율의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보며 그를 관찰했다. 이렇다 할 의문점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감을 잘못 잡았나?’
그래도 둘이 사귀진 않더라도 진환이 그를 꽤 친근하게 여기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진환은 은율을 보통의 동생 이상으로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애칭을 부를 리도, 걱정을 해 댈 리도 없다.
수하는 은율의 손을 놓아주며 싱긋 웃었다.
“혹시 내일 액션스쿨 나올 수 있어요?”
수하의 말에 은율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하는 액션스쿨이 제 예상대로라면, 자신이 함께하는 스턴트팀이 소속된 곳일 것이다.
“합 맞추러 가시는 건가요?”
“다음 신에서는 엉성하게라도 액션을 좀 해 보려고요. 은율 씨의 액션은 굉장히 좋은데 제가 따로 찍은 것과 합해 보니 뭐랄까……,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다고 하지만, 제가 연기한 당사자라서 그런지 만족스럽지가 않아요.”
수하가 시선을 내리며 쓰게 웃었다.
실제로 대역 스턴트맨의 액션과 본인의 것을 합해 놓은 것을 보며 어색함을 느끼는 배우들은 많다.
시청자는 그것이 한 사람의 액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촬영한 이들은 그것이 명백히 두 사람의 액션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보게 된다. 그렇다 보니 필연적으로 어색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보통은 당사자라 해도 그런 부분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그런데 수하는 더 자연스럽게 하고자 직접 액션스쿨까지 시간을 내 찾아가겠다고 하니, 은율로서는 그런 수하를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순수하게 감탄하며 칭찬했다.
“스케줄도 바쁘실 텐데 따로 시간까지 내시고.”
은율은 수하가 진환만큼이나 바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엔 진환이 일을 바쁘지 않게 잡고 있기에, 오히려 수하가 더할 것이다. 그 와중에도 합을 맞추고 연습을 하겠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들이 액션 합을 맞추는 건 보통 촬영 당일에 이루어진다. 바쁜 배우들이 직접 액션스쿨을 방문하는 경우는 그들이 직접 액션을 소화할 때다. 해당 신의 액션 동작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방문하는 배우들은 많아도, 액션 대역을 내세운 배우들이 연습을 위해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수하가 곤란한 듯 웃었다.
“기왕이면 은율 씨가 직접 눈앞에서 액션을 해 주고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부탁해도 될까요?”
은율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 일이라면 도와드려야죠.”
“고마워요. 은율 씨 덕분에 다음 촬영은 걱정 없겠네요.”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시원한 커피를 쪽 빨아 먹었다. 수하는 저도 모르게 그 붉은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동그란 안경과 긴 앞머리를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앞머리, 불편하지 않아요?”
은율이 입에서 빨대를 떼었다.
“적응돼서 괜찮습니다.”
“적응됐다고 하는 걸 보니, 좋아서 그러고 다니는 게 아닌 거로군요?”
수하가 예리하게 떠본다.
“그럼 왜 앞을 가리고 다니죠? 취향이어서……는 아니겠고. 혹시 얼굴을 가리려고 그러는 걸까요?”
은율이 가만히 수하를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갈라진 앞머리와 안경을 뚫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경도 혹시 그런 이유입니까?”
은율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의도적으로 가리려고 한다기보다는, 습관입니다. 안경도 마찬가지고요.”
“얼굴을 가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거로군요. 어떻게 자라 왔는지 궁금하네요.”
수하가 관심을 보이며 은율에게로 얼굴을 좀 더 내밀었다. 웃는 낯이었던 은율이 표정을 바꾸었다. 말에서 의중을 떠보고 그 속을 추리하는 타입의 사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적인 이야기는 서로 자제하죠.”
순식간에 세운 벽에, 수하의 눈이 이채를 띤다.
“되도록 일 관련된 이야기만 하죠.”
“그건 진환이 때문인가요? 아니면 본인 생각?”
수하가 눈웃음을 치며 커피를 들고 있는 은율의 손을 잡았다. 그 상태로 제게 가까이 끌고 와 빨대에 입을 댔다. 은율이 입을 댔던 빨대가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커피를 전달해 주었다. 평소 달달한 커피만 마시던 수하였던지라 씁쓸한 맛이 입 안에서 겉도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마셔 버렸다.
“환이 형은 관련 없습니다. 딱히 사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요.”
“차갑네요. 난 은율 씨와 친구하고 싶은 건데.”
은율이 수하의 손을 잡아 그의 손에 제가 들고 있던 커피를 건네주었다. 그가 입을 댄 커피는 왜인지 더는 마시고 싶지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누구와 쉽게 친구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좌석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럼 말씀은 끝나신 것 같으니 실례하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은율은 미련 없이 차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수하는 은율이 건넨 커피를 손에 든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율은 수하의 인사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은 채 가 버렸다.
수하는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피식 웃었다.
“그렇단 말이지…….”
수하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무의식중에 빨대를 흡입했더니 쓰디쓴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눈살을 찌푸리던 그가 뒷좌석에 있던 쇼핑백을 더듬어 작은 시럽 캡슐을 꺼냈다. 뚜껑 부분을 떼어 내고 내용물을 커피 안에 흘려 넣었다.
은율이 진환을 칭한 호칭이 마음에 걸렸다.
“환이 형이라…….”
그 역시도 진환을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재미있네.”
점점 더 은율에게 관심이 갔다.
블랙커피에 투하된 연한 갈색의 시럽이 아지랑이처럼 움직여 댔다. 수하는 좌석에 등을 기댄 채 그것을 빨대로 휘휘 저었다. 시럽은 금세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하가 완벽히 섞인 블랙커피를 빨대로 빨아들여 본다. 한층 달달해진 커피가 나름 먹을 만했다.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 * *
“하앗!”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은 셔츠의 남자가 엎어치기를 당했다.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다고는 하나, 충격이 상당한지 얼굴을 와락 구긴다. 엎어치기를 한 남자가 그를 토닥이며 손수 일으켜 주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선 앳된 얼굴을 한 30명의 대학생이 앞에 선 남자의 구령에 맞춰 한 명 한 명 백텀블링을 도전하는 중이다. 대부분 성공하긴 하나, 그 액션이 아직 엉성했다. 지도하던 액션스쿨 교수 두 명이 그들 앞에서 깔끔한 백텀블링을 선보이며 자세에 대해 주의를 시켰다.
그 이외의 공간에서는 액션스쿨 소속의 스턴트맨들이 몇 명 모여 연기 합을 짜거나 대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액션스쿨 입구로 이곳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맑은 목소리로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며 인사한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고개를 홱 돌리며 그에게 주목했다. 학생들에게 액션을 지도하던 교수들마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학생들의 고개도 자연스레 돌아갔다.
입구에 들어선 것은 몸에 비해 넉넉한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 답답할 정도로 긴 앞머리와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험악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 은율이,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여?”
“일이 좀 많았습니다.”
은율이 밝게 대답했다.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와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시간 넉넉한 거야? 이따가 대련 부탁해도 돼?”
우락부락한 남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덩치로 보자면 은율의 2배는 될 법한 남자가 태연하게 대련을 언급해 댔다.
“시간 남으면 그럴게요. 혹시 이수하 씨 오셨습니까?”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수하 씨? 배우 이수하? 오늘 오기로 했어? 원래 액션 연습하는 배우 아니잖아.”
“액션신 도움받고 싶다고 하셔서 오늘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까 팀장님이 이수하 씨 오고 있다고 했어.”
다가와 있던 다른 남자가 끼어들어 대답해 주었다. 어깨동무를 한 우락부락한 남자가 씩 웃었다.
“그럼 그동안 얼른 옷 갈아입고 한판 붙자. 응?”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은율이 웃으면서 대답하니 그제야 남자가 팔을 풀어 주었다. 은율은 탈의실로 가는 도중에 자꾸만 인사를 건네는 이들 때문에 한참을 꾸벅거려야 했다. 그들 중 몇 명은 은율에게 대련 요청을 하기도 했다.
탈의실에 들어선 은율은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났다. 그는 은율이 자주 함께하는 스턴트팀 소속으로,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 형 오셨어요?”
청년이 반가운 내색을 보이며 은율에게 다가갔다.
“대련 신청해도 돼요?”
액션스쿨 사람들은 왜 다들 저랑 대련을 못 해서 안달일까.
“너까지 하면 대련 신청자가 열 명은 되겠다.”
“으왓, 그렇게 대기자가 많아요?”
청년이 질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은율이 웃으며 캐비닛 쪽으로 다가갔다. 그중 가장 왼쪽 끝에 있는 캐비닛을 여니 열쇠도 없이 쉬이 열렸다. 안에 곱게 개인 검정 추리닝 바지 몇 개와, 다양한 사이즈의 검정 티셔츠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은율은 그 안에서 사이즈를 확인하고는 브이넥 셔츠 하나와 검정 추리닝 바지를 꺼냈다.
셔츠와 바지를 캐비닛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셔츠를 벗으려던 은율이 잠깐 움찔했다. 그가 옷을 벗으려던 동작을 멈추고서 돌아보았다. 청년이 문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계속 그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형 기다려 주는 건데요.”
청년이 씩 웃었다. 은율은 손을 내저어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됐어. 먼저 나가 봐. 금방 갈아입고 나갈 테니까.”
“옙, 알겠습니다.”
청년이 장난스럽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탈의실을 나갔다.
혼자가 된 은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문으로 다가가 잠금 고리를 돌렸다. 그러고 돌아와서야 셔츠를 벗었다.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도 진환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사람이 있든 없든 훌렁훌렁 벗어젖혔을 텐데.
조금 밀착된 얇은 브이넥 셔츠와 통이 얇은 검정 추리닝 바지를 입은 은율이 제 옷가지를 고이 개서 테이블 구석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탈의실을 나섰다.
밖에서 다른 이들과 대화 중이던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바로 할래?”
그의 뒤를 살폈으나, 아직 수하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련은 길지 않으니 괜찮겠다 싶었다.
“좋습니다. 자리 잡죠.”
근육 가득한 남자가 싱글거리는 낯으로 앞서 걸었다. 은율은 그를 따라 홀 구석의 매트가 깔린 자리로 이동했다. 근처에서 대련하던 이들이 손을 멈추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은율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련을 기대하며 바라보았고, 그를 모르는 이들은 의아해했다. 그만큼 체급 차이가 상당했다.
두 사람이 매트 한가운데에 대치하고 서자, 그 근처를 많은 이들이 빙 둘러쌌다. 은율은 그들을 훑어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못 보던 얼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액션연기과 대학생들을 지도하던 두 명의 액션스쿨 교수는 학생들에게 오늘 배운 부분에 대해 30분간의 자율 연습을 지시했다. 그러고선 짜기라도 한 듯 은율과 근육남의 대련을 보러 이동했다.
자연스레 학생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율 연습을 하면서도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대련 구역을 힐끔거렸다.
대강의 스트레칭을 끝낸 은율이 안경을 벗었다. 그러자 조금 전 탈의실에서 마주친 청년이 얼른 나와서 그의 안경을 받아 들었다. 앞머리 사이로 눈이 마주쳐, 싱긋 웃어 주었다.
“고마워. 잠깐만 부탁해.”
“옙.”
청년도 마주 웃으며 얼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의 동년배 친구들이 와서는 뭐라고 장난스럽게 소곤거리거나 옆구리를 콕콕 찌르기도 했다.
은율이 가볍게 몸을 풀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등이 먼저 땅에 닿는 사람이 지는 거, 맞죠?”
은율의 훤히 드러난 얼굴을 본 남자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시작하기 전부터 그렇게 공격하기 있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은율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남자가 당황을 담아 그 얼굴을 가리켰다.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그런 거.”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희들 판정 잘 해라. 오늘이야말로 내가 은율이 눕혀 버릴 거니까.”
그 말에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장난 어린 소리를 뱉었다.
“형, 너무 노골적인 것 아닙니까?”
“말하는 거 봐라. 눕혀서 뭘 하려고?”
“아유, 저 호색한.”
“야! 말이 그렇다고, 말이! 아니, 등이 땅에 닿으면 지는 게임인데 눕혀야 할 것 아냐!”
얼굴을 붉히며 말해 보지만, 이미 주변의 놀림감이 된 다음이었다.
“아, 빨리 시작해! 미적거리면 내가 먼저 대련할 거야!”
은율과의 대련을 기대하고 있던 다른 이가 소리쳤다. 남자가 그를 향해 위협적으로 주먹을 올리며 쓰읍, 하는 소리를 냈다.
남자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자세를 잡았다. 은율도 가볍게 자세를 잡으며 그를 마주했다.
“시작할까?”
“언제든지요.”
은율이 눈꼬리를 휘며 생긋 웃었다.
먼저 공격을 건 쪽은 남자였다. 그는 엎어치기라도 시도할 것처럼 은율의 셔츠 앞섶을 노렸고, 은율은 그 손이 제 멱살을 잡기 전에 그대로 손목을 잡고 몸을 빙글 돌려 그 팔을 꺾었다. 남자는 꺾인 팔 아래로 숙여 단숨에 몸을 돌려 그것을 풀어내었고, 아직 제 손목을 붙잡은 은율의 팔을 잡아 그대로 엎어치기를 시도했다.
은율의 몸이 붕 떠서 그대로 엎어뜨리나 했더니, 공중에서 다리에 힘을 주어 등이 땅에 닿기도 전에 두 발을 바닥에 댄다. 그 상태로 허리에 힘을 주어 몸을 세운 후 남자를 돌아보았다. 은율의 가슴팍을 향해 그의 두꺼운 주먹이 내질러지고, 은율은 몸을 재빨리 숙여 피해 냈다. 그 상태로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남자의 발목을 향해 다리걸기를 위한 발차기를 한다.
남자가 ‘어이쿠’ 하며 바닥에 쓰러지지만, 꽤 몸놀림이 좋은 그는 제 등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옆으로 쓰러진 후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은율이 그의 머리 부분을 겨냥하며 돌려차기를 했다. 남자가 두 팔뚝을 들어 그것을 막아 냈지만, 어찌나 강하게 찬 건지 팔이 저릿했다.
남자가 팔을 내뻗어 은율을 붙잡으려 했다. 그 팔을 잡아 옆으로 밀어낸 은율이 남자의 가슴팍을 무릎으로 가격했다.
“컥!”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지며 은율의 무릎에 가격당한 가슴의 격통에 밭은기침 같은 것을 토했다. 은율은 아슬아슬 등이 닿지 않은 그에게 올라타 무릎으로 가슴팍을 꾹 눌렀다.
무릎에서 힘을 뺀 건 남자의 등이 완전히 바닥에 닿은 후였다. 그걸 확인한 은율이 다리를 편하게 풀었다. 그러면서 제 밑에 깔려 있는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등, 대셨습니다.”
남자가 작게 웃으며 누운 채로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오냐. 항복이다.”
그 말을 들은 은율이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본 남자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 그거 하지 말라니까?!”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은율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남자의 몸에서 내려왔다.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주니, 주변에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이들이 저마다 손을 들기 시작했다.
“다음은 나! 나!”
“내가 먼저 예약했어!”
“형, 저도요!”
순식간에 끝난 대련 때문에 오히려 불이 붙어 버렸다. 부리부리하게 눈을 빛내며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파닥거렸다.
곤란한 얼굴을 하던 은율의 눈에, 어느새 사람들 뒤에 서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수하가 보였다. 편한 반팔 셔츠와 바지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가 생소해 보였다.
수하를 알아본 은율이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어…… 그러니까…….”
수하가 갸웃하며 은율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맡아 둔 청년이 얼른 다가와 은율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형, 이거요.”
“고마워.”
작게 웃어 주니, 청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며 돌아갔다.
은율이 특유의 커다란 안경을 쓰며 수하를 올려다보자,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서……은율 씨?”
“예, 맞습니다.”
수하가 멍한 얼굴을 했다.
액션스쿨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수많은 시선을 강탈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기껏해야 한가해 보이는 대학생 몇 명만이 눈을 빛내고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기분이 상한 수하는 얼마 안 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련장에 시선을 두었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기에, 그들의 한가운데에서 대치하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수하 도 볼 수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수하는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고, 대련은 시작되었다. 덩치로 봐도 2배는 차이나 보이는 체급이었다. 덩치만 보자면 근육 가득한 남자가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늘씬한 남자 쪽이 근육 남자를 눕혀 버렸다. 겉으로만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희낙락이었다. 그러면서 자신과 대련해 달라 손을 들어 신청을 해 댔다.
수하는 그 남자가 늘씬한 몸매에 비해 굉장한 실력을 가진 무술사범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서은율이었을 줄이야.
그야말로 놀랄 노 자다. 스턴트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던 유약해 보이는 남자가 우락부락한 근육의 거구를 쉽게 쓰러뜨린 것이다.
몸에 살짝 붙는 브이넥 셔츠에 통이 작은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으니 그 몸매가 그나마 좀 드러나는 것 같았다. 평소 입고 다니던 옷은 워낙 넉넉한 품인지라 그저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마른 체형으로 보이기만 했지, 지금처럼 밸런스 좋게 늘씬해 보이진 않았다.
“은율 씨, 옷 사 줄까요?”
수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예? 옷이요?”
은율이 되물었다. 수하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못 들은 거로 해요. 그보다, 지금 뭐예요? 내가 잘못 봤나?”
수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은율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 은율 씨 얼굴이 내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거든요?”
기껏해야 평범하거나 조금 귀여운 수준이겠지 싶었더니만, 조금 전에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 얼굴은 누구라도 넋을 놓을 얼굴이었다. 앞머리에 부분 부분이 가려 완전히 보이지 않았던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은율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어떤 얼굴을 상상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일단 수하 씨 옷부터 갈아입고 오시죠.”
수하가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나름 편한 반팔 티에 편한 면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이걸로는 안 됩니까?”
은율이 수하를 훑어보더니 그 시선을 바지에 두었다.
“그 바지로는 발차기 잘못하면 가랑이 찢어져요. 돌아가실 때 추리닝 바지 빌려서 가실 것 아니면 갈아입으세요.”
그 말을 들으니 필히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추리닝 바지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은율의 말처럼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탈의실로 안내해 줄래요?”
“예, 따라오세요.”
은율이 앞장서고 수하가 그를 뒤따랐다. 이동하는 와중에 수하를 알아본 이들이 너도나도 알은체하며 찬사를 아끼질 않았다. 수하는 예의 바른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에게 대강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이 은율에게 붙어 이것저것 얘기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존재감 없고 허약해 보이던 사람인데…….’
지금 보니 액션스쿨 사람들 중에서 은율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를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이 꼬이는 타입은 카리스마와 매력을 겸비한 경우다. 평소의 옷차림에 안경과 앞머리로 얼굴을 가렸을 때는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꽤 없었는데.
‘옷차림은 그렇다 쳐도…… 역시 얼굴이…….’
스턴트 액션을 할 때는 안경을 쓸 수 없을뿐더러 배우와 헤어스타일을 얼추 맞춰야 하니 그 얼굴이 여실히 드러날 거다. 당연히 그와 함께 스턴트 액션을 했던 이들은 맨얼굴을 봤을 테고, 배우를 따라 잘 차려입은 모습까지 더해져 호감이 생겼을 것이다.
수하는 은율의 뒤를 따르며, 그의 작은 뒤통수에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탈의실에 도착한 은율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분의 옷이 들어 있는 캐비닛을 열어 그 안을 수하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셔츠와 바지가 있으니까 사이즈 맞는 거로 골라 입으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수하가 싱긋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어 들었다. 은율이 테이블 아랫바닥에 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선글라스는 이 안에 네임태그 붙여서 넣어 두세요.”
은율이 내민 상자에 수하가 순순히 제 선글라스를 넣었다. 그 상태로 상자 뚜껑을 덮으려던 은율의 손목을, 수하가 단단히 붙잡았다.
“은율 씨도 안경 벗어야 하지 않아요?”
수하의 눈이 빛나는 것만 같았다.
은율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떼어 냈다.
“액션 할 때만 잠깐 벗을 겁니다.”
“왜요? 이유라도 있어요?”
은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웃고 있질 않았다.
“꼭 말해야 하나요?”
“음, 아니에요.”
분위기를 파악한 수하는 안경에 대해 파고드는 건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캐비닛을 뒤져 제게 맞는 사이즈의 셔츠와 바지를 찾아낸 수하가 제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하의 선글라스가 든 상자 뚜껑의 포스트잇 부분에 ‘이수하’라고 적고는 그것을 테이블 아래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선 수하 옆에 있는 테이블에 붙어 손을 모아 뭔가를 했다. 힐끔 보니, 자기 옷가지 사이에 넣어 둔 휴대폰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은율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휴대폰을 두드려 상대의 메시지에 답장했다.
수하가 입고 있던 셔츠를 훌렁 벗으며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웃어요?”
“애인이요.”
“아, 애인……! 예?”
은율이 놀란 얼굴의 수하를 어깨너머로 힐끔 보았다. 수하는 셔츠를 벗어 손에 든 채 멍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수하가 얼른 고개를 돌려 제 셔츠를 테이블 위에 던지고선 골라 둔 셔츠를 입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리는 멈추지 않았다.
‘애인이 있었단 말이야? 이진환도 알고 있는 건가?’
설마하니 애인이 있는 사람한테 작업을 걸고 있었던 건가.
속으로 혀를 찼다. 뭐가 모자라서 애인까지 있는 평범한 남자를…….
그렇게 생각하며 은율의 등을 힐끔 보았다. 몸에 약간 붙는 옷을 입혀 놓으니 뒤태가 확실히 달랐다. 핏감 제대로 들어간 옷을 입혀 놓으면 모르긴 몰라도 모델인가 싶을 듯했다.
‘평범……하진 않구나.’
자신이 스치듯 보았던 그 얼굴, 이 늘씬한 몸매, 거기다 거구를 단숨에 쓰러뜨리는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남자. 결코 평범함의 범주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수하는 바지까지 갈아입고 나서 은율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도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수하가 씩 웃으며 그의 뒤에 바짝 다가섰다. 애인과는 대체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하는 걸까?
그런 수하의 명치 부분에 뭔가가 툭 닿았다. 내려다보니, 몸을 약간 튼 은율의 왼쪽 주먹이 명치에 닿아 있었다.
‘뭐지, 맞은 게 아닌데 맞은 것 같은 이 기분은?’
건들 듯이 툭 닿은 것뿐이지만 왜인지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가깝네요.”
은율이 오른손에 든 휴대폰 전원을 끄며 수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수하가 웃는 낯으로 반보 물러섰다.
은율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의 제 옷가지 사이에 쑤셔 넣어 둔 후 앞서 걸었다. 그 뒤를 따라 수하가 탈의실을 나섰다.
은율이 대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게 뭡니까?”
“보름 뒤에 있을 액션 합 좀 봐 줘요. 그 맞대결하는 장면.”
작중 조직폭력배의 행동대장 격인 인물과 화려한 맞대결을 펼치는 장면이다. 물론 촬영 당일엔 은율이 화려한 액션을, 수하는 마치 자신이 액션을 취한 것처럼 멋들어진 표정 연기를 보여 줘야 할 것이다.
“되도록 그 장면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역시 직접 액션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와줄 거죠?”
은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러기 위해 여기 와 있는 거니까요.”
그의 말에 수하 또한 마주 웃어 주었다.
은율은 대련장 근처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아까 탈의실에서 만났던 청년에게 물었다.
“훈석이 형 오늘 안 왔어?”
“좀 늦게 오신대요. 왜요?”
“아니야. 됐어, 그럼.”
은율이 쉽사리 물러났다. 청년이 그의 팔에 매달려 눈을 빛냈다.
“형, 형. 대련하시게요?”
은율이 청년의 이마를 두 손가락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합 맞추고 동작 잡아 드리려고.”
“어? 형이 이수하 씨 대역 아니에요?”
은율이 이수하의 대역을 맡고 있다는 것은 액션스쿨 내의 같은 스턴트팀 소속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은율이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어 그를 완전히 떼어 냈다.
“내가 대역은 맞는데, 상대역이 훈석이 형이었어. 안 계시니 어쩔 수 없이 내가 훈석이 형 역할을 해야지.”
훈석은 스턴트맨치고 꽤 준수한 데다 몸이 탄탄해서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 얼굴을 직접적으로 내보이는 스턴트맨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액션을 위해 등장하는 ‘조직폭력배 행동대장’ 역할 같은 것을 맡아서 말이다.
청년이 두 손을 펴서 은율에게 내밀었다.
“안경 맡아 드리겠습니다, 형님.”
청년의 장난스러운 말에 은율이 피식 웃었다.
“너도 연습해야지. 이번에 처음으로 드라마에서 액션 들어간다며.”
“안경 맡아 두는 대신에 형 액션 보면서 공부하면 되죠.”
그러면서 빨리 달라는 듯 두 손을 재차 내민다. 은율은 그런 청년이 귀여워, 그대로 안경을 벗어 올려놓았다. 청년이 조심조심 안경다리를 접어 손에 살짝 쥐어 잡고는 조금 떨어졌다. 그러고는 그대로 매트 바닥에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은율을 주시했다.
안경이 사라져서인지 앞머리가 자꾸만 콧등을 간질였다. 은율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제 앞에 선 수하를 바라보았다.
“일단 스트레칭부터 하시죠. 무작정 했다가는 몸 상해요. 저 따라 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댄다. 마치 팔로 날개라도 만든 듯한 동작으로 목을 앞으로 당기며 두 팔꿈치를 가운데로 모은다. 스트레칭 1단계를 해 보이며 눈을 드니, 수하가 멀뚱히 서서는 좀체 따라하질 않고 있었다.
“이수하 씨, 스트레칭 하셔야 합니다.”
“어…… 그래요. 해야죠…….”
그제야 수하가 엉성하게 대답하며 은율의 동작을 따라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은율의 얼굴에 닿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수하의 멍한 행동은 은율이 스트레칭을 끝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스트레칭을 마친 은율이 수하에게 물었다.
“합은 전부 기억하고 계십니까?”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보통 액션의 합은 배우에게 미리 알려 준다고 한들 완벽히 외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바쁘디바쁜 배우가 합을 복습할 리도 없고, 그들 본인이 어차피 당일에 흉내만 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실히 임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수하 역시 며칠 전에 훈석과 함께 합을 맞췄을 테지만, 하루 맞춘 거로 완벽히 기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몸이 따라 줄지는 미지수지만.”
은율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그럼 합을 가볍게 맞춰 봐도 될까요? 제가 훈석이 형 배역을 하겠습니다.”
수하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는 어떻게 할까요?”
익숙하지도 않은데 처음부터 무작정 촬영 당시의 속도로 합을 맞췄다간 조금만 틀어져도 부상을 입기 십상이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느리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은율과 달리, 수하는 자신만만했다.
“저도 연습을 좀 해 왔으니 촬영할 때처럼 가죠.”
“알겠습니다.”
은율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뒤 자세를 잡았다. 수하 역시 긴장한 낯으로 몸을 살짝 낮춰 자세를 잡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첫 부분에 명치 맞는 장면이 있죠? 맞춘 대로 하지 않으면 진짜 맞습니다. 조심하세요.”
은율의 말을 들은 수하는 왜인지 오싹함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시작하죠.”
그 말을 남기고, 은율의 눈빛이 훅 변했다. 수하는 순간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서은율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다른 느낌, 다른 분위기였다. 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마치 상대역인 훈석이 제 앞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연신 깜빡이기만 하던 그때, 은율이 단숨에 뛰어들었다. 그는 수하를 향해 권투를 하듯 오른쪽 주먹을 날렸고, 수하는 얼른 고개를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다음은 왼쪽 주먹이 날아왔다. 그것도 퍼뜩 피하고 나니 명치가 오싹했다.
순서를 되새김질하던 수하가 반 박자 늦게 몸을 뒤로 젖혔다. 아니나 다를까, 명치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져 몸을 웅크렸다.
“콜록, 콜록!”
기침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합에 맞춰 피하고는 맞은 척을 해야 하는 대목이거늘, 정말 맞아 버렸다. 비록 맞기 직전에 힘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른기침이 터졌다.
은율이 자세를 풀고 수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습니까?”
“콜록, 괘, 괜찮…… 콜록, 콜록!”
“죄송합니다. 이전 것도 피하시기에 이것도 당연히 피하실 줄 알았어요.”
수하가 애써 웃는 낯으로 은율에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후우…… 그래도 주먹이 꽤 맵네요?”
은율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일단은 단련했으니까요. 속도를 좀 느리게 해 보고, 끝까지 완벽히 해 보고 나면 그때 다시 원래대로 하죠.”
“알았어요. 은율 씨 말 들을게요.”
명치까지 아릿한 마당이니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은율은 다시 속도를 조절해, 서로의 합 부분을 점검했다. 중간중간 수하의 동작을 좀 더 역동적이게 손봐 주고, 상황에 따라서는 표정 연기에 대한 논의까지 했다.
수하는 은율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은율은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스턴트맨인 정도가 아니라, 캐릭터 연구와 상황 연구까지 완벽히 해낸 사람이었다. 어떤 부분에선 자신보다 더 심도 있게 연구한 티가 나기도 했다.
“이 부분에선 급소를 맞아 굉장히 아플 겁니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자존심 때문에도 아픈 걸 티 내지 않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아파도 그걸 티 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캐릭터 성격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리얼리티가 떨어져 보일까 봐서요. 긴장감도 적어지고요. 차라리 담담한 척하려고 아픈 걸 참는 얼굴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눈빛은 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면 더 극적일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은율이 수하의 아랫배 약간 아래쪽에 있는 단전을 바라보았다.
“한 번 맞아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 같은데, 맞아 보시겠습니까? 굉장히 아픈 부위거든요, 이게.”
수하는 조금 전 맞았던 명치가 다시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은율 씨 말대로 그렇게 아픈 급소라면, 확실히 너무 담담한 것도 이상하겠네요.”
“예. 자칫 시청자가 연기인 게 티 난다고 할 수도 있어요. 제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액션신이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저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 그 총상은 신경도 쓰지 않고 팔을 움직인다든지, 아픈 기색이 전혀 없다든지 말이다.
은율은 실제로 그런 총상을 입어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얼마나 아픈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었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은 자칫 뼈가 총알 때문에 부서졌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운 좋게 뼈를 피했다고 하더라도, 어깨에 총상을 입으면 팔을 제대로 가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 보니, 총을 맞아도 태연하게 구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몰입감이 떨어지고 의아해지기만 했다.
은율의 말을 들은 수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자신의 캐릭터를 떠올리며 골똘해지는 수하의 모습을 본 은율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괜히 훈수를 뒀네요. 수하 씨는 워낙 연기를 잘하시니 제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실 텐데.”
수하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전 제가 연기 잘하는 거 잘 모르겠던데.”
“직접 연기하신 드라마도 몇 가지 봤지만, 함께 촬영장에 있어 봐서 압니다. 수하 씨가 얼마나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대단한 열정을 가졌는지 다 보이는걸요. 지금도 직접 액션 연습까지 하고 계시잖아요.”
수하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은율의 칭찬에는 가식이나 아부, 그 무엇 하나 느껴지질 않았다. 순수하게 칭찬하는 거였다. 듣는 사람이 그걸 깨달을 수밖에 없게 만들다니, 이 정도면 대단할 지경이다.
“고마워요. 은율 씨 덕에 힘이 나네요.”
그러다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근데, 내가 나온 드라마를 봤다고요? 얼마나? 뭐뭐 봤는데요?”
그것은 진환이 모아 둔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다. 마침 수하의 액션 대역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당연히 그에게 관심이 갔다. 대역으로서 성향을 참고할까 싶어 봤더니만,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기에 적잖이 놀랐다.
그 후로도 그가 찍은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 액션이 있는 것들 위주로 찾아서 시청해 보았다. 덕분에 그의 연기를 보며 감탄한 횟수가 적지 않았다.
은율이 몇 가지의 제목을 대자, 수하가 마치 팬을 만나 감격한 사람처럼 안달을 했다.
“와, 진짜요? 그럼 혹시 어제 개봉한 영화도 봤습니까?”
“아, <새크리파이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직 못 봤습니다.”
뉴스를 통해 접한 적은 있었다.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액션스릴러 영화로 이수하, 신유리 주연의 영화였다.
수하가 은율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거 티켓 구해 줄 테니까 은율 씨가 보고 감상 좀 말해 줄래요? 그것도 대역을 쓰긴 했지만 직접 액션 연기를 한 부분도 있어요.”
은율이 잡혀 있는 손을 빼내려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 감상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빠져나가려는 손을 수하가 다시 덥석 잡았다.
“그럴 리가요. 아, 혼자 가기 뭣하면 저랑 같이 보러 갈래요? 마침 이틀 뒤에 오프……!”
갑자기 수하가 입을 딱 다물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당장 손부터 떼지?”
험악한 얼굴의 이진환이 당장이라도 제게 주먹질을 할 것처럼 서 있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검은색으로만 갖춰 입었기 때문인지, 더 살벌했다.
수하는 이때 난생처음, 살기라는 것을 느꼈다.
진환은 수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더니, 그의 손을 거칠게 떼어 내었다. 은율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숨기고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수하를 마주했다.
수하는 진환에 의해 떼어진 제 두 손을 허공에 탈탈 털며 웃었다.
“뭘 그렇게 정색해? 손잡은 게 뭐 대수인가?”
“대수지. 네가 하면 대수야.”
진환이 팔짱을 끼며 수하를 노려보았다.
“액션신 합 맞추는 것 때문에 만난 거라고 들었는데, 이건 무슨 수작이야?”
“매일 연락하나 봐?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수하가 능글거리는 웃음을 띠었다.
“거기다 그 바쁜 와중에 직접 만나러 오기도 하네.”
수하가 진환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은율 씨가 나랑 잘될까 봐 걱정했나?”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무슨 소리냐며 정색을 할까?
두 예측 모두 빗나갔다.
진환은 가까이 다가온 수하의 머리를 손끝으로 밀어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네놈이 아무리 수작 부려 봐야 안 넘어갈 사람이야. 그런 생각 하는 거라면 꿈 깨라.”
진환은 은율을 믿고 있었다. 그는 워낙 성실하고 단정한 사람이라 절대 다른 사람에게 한눈팔 사람도 아니고, 바람이라든지 양다리라든지 그런 걸 생각할 사람도 절대 아니었다. 수하가 작정하고 작업을 건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딴 녀석보다 몇 배는 더 잘났다. 비교할 거리도 되지 않았다.
수하가 눈에 이채를 보이며 묘한 얼굴을 했다. 그때 진환의 뒤에 서 있던 은율이 옆으로 나와서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분명 오지 마시라고 했는데.”
진환이 웃는 낯을 했다.
“무술감독님 좀 만나러 왔어.”
은율이 눈을 깜빡였다.
“감독님을요? 크랭크인 한 작품 중에 액션신 있는 건 없지 않습니까?”
“오늘 사무실로 연락 온 시나리오가 액션스릴러인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액션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은율이 활짝 웃었다.
“형이라면 분명 잘 해내실 거예요. 워낙 몸도 좋으시니까.”
진환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일 팽개치고 놀러 온 거 아냐. 나도 일 때문에 온 거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액션스쿨의 무술감독과 급하게 약속을 잡느라 전화기를 계속 붙들고 있었더랬다. 은율이 수하의 수작질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집적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무술감독과 당장 만나자고 설득을 했다.
수하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더니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빨리 일이나 보러 가지? 나 아직 은율 씨랑 합 더 맞춰 봐야 하거든?”
진환이 표정을 바꿔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뭐라 하려다가, 은율이 진환의 셔츠 자락을 당기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무술감독님이라면 안쪽 사무실에 계실 거예요. 전 수하 씨와 마저 하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은율이 천진하게 웃으며 말한다. 진환은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면서도 수하를 한차례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 얄미운 얼굴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도 많고 은율도 있으니 참기로 했다.
벗어나려는데, 근처에 앉아서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수하만으로도 연예인 보는 맛이 난다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진환까지 한 자리에 모이니 이게 웬일이야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이에 껴 있는 은율이 새삼 한 미모 하는구나 싶었다. 어째 톱스타 둘 사이에 있는데도 전혀 꿀리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환이 제 앞에 쭈그려 앉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넋을 놓았더니, 진환이 싱긋 웃으며 그의 손에 있던 은율의 안경을 쏙 빼 갔다.
“이건 제가 갖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에서 은율의 안경을 빼앗겼음에도 청년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웃고 있었지만 분명 그 눈은 살기등등했다.
진환은 은율의 안경을 한 손에 쥐고는 짜증 섞인 얼굴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무술감독과 차라리 나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든지,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말해야겠다. 은율과 수하가 신경 쓰여서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은율이 수하에게 뭔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동작을 알려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율의 말을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수하가 진환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갑자기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수하가 은율에게 배운 대로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오른 다리로 그에게 다리걸기를 시도했다. 굉장히 깔끔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히 해 보였고, 은율은 그 다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액션을 취하며 바닥에 넘어졌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수하가 은율의 긴 다리 끝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하필 넘어져도 은율의 위에 엎어지다니.
아니,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 주려고 그런 거겠지.
진환은 제 손에 들린 게 은율의 안경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부러뜨릴 뻔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은율과 수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은율은 제 위로 엎어진 수하의 등을 오른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괜찮으십니까?”
수하가 괜찮다 말하며 은율의 얼굴 옆 양쪽 바닥에 두 손을 짚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꼬여 있던 다리를 가까스로 풀어 몸을 떼어 내자, 때마침 은율이 작게 기침했다.
수하는 그 순간,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은율을 내려다보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며 기침을 하는 모습이 이렇게 자극적일 수도 있나 싶었다. 기침을 하느라 살짝 찌푸린 미간마저 예뻐 보였다.
‘이건 이진환만 이상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수하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마스크가 이렇게 달아.
수하의 몸이 순간적으로 압박한 탓에 기침을 하던 은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가만히 보기만 하고 비키질 않는 건지 모르겠다. 은율은 수하에게 가둬진 것만 같아서 답답했다.
그런 수하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훅 들어왔다.
“비켜.”
진환의 싸늘한 말과 함께 수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진환은 그의 뒷덜미 옷자락을 잡아 내팽개치고는 은율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괜찮아?”
진환은 은율의 등에 팔을 넣어 그를 일으켜 주었다. 은율이 고개를 끄덕이다 바닥을 뒹구는 수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쓰러진 채로 신음을 흘리며 제 목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콜록, 저 무식하게 힘만 센 새끼.”
뒤에서 당겨지는 바람에 목의 앞쪽이 옷에 압박당해 기침이 절로 나왔다. 그 탓에 평소 누가 있을 때는 욕 한 번 하지 않던 수하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은율이 수하에게 다가가 그 옆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상태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많이 아파요?”
은율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진환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은율이 둔하디둔한 게 너무도 싫었다.
진환은 은율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은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잔뜩 굳은 얼굴로 그를 끌며 걸어갔다. 은율이 당황한 얼굴로 연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은율은 진환이 대체 왜 이러나 싶음에도 그의 손을 떨쳐 내진 않았다.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액션스쿨의 탈의실이었다.
진환은 빈 탈의실 안에 은율을 밀어 넣고는 그대로 문을 잠갔다. 탈의실의 테이블 위에 은율의 안경을 내려놓은 진환이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은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런 은율을 진환이 꽉 껴안았다. 더운 날씨와 연이은 합 맞추기 때문에 분명 땀이 났을 텐데도 진환은 거리낌 없이 그를 안았다.
진환이 은율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놈 분명히 일부러 그런 거야.”
“예?”
“나한테 보란 듯이 네 위로 넘어진 거라고.”
“설마 그랬을까요. 잘못 보신 거겠죠. 그리고 일부러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품속의 은율은 참 어지간히도 눈치가 없었다.
진환이 제 팔 안의 은율을 더 꽉 끌어안았다.
“하아, 마음 같아서는 진짜 어디 가둬 두고 싶다. 아무도 못 보고 아무도 손댈 수 없었으면 좋겠어.”
소유욕 짙은 말이 은율의 귓가를 간질였다.
은율은 당황했지만, 이내 수줍게 웃었다. 사귀고 난 뒤에 겪는 그의 질투와 집착은 나름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그만큼 사랑해 주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떨리고 머릿속이 절로 핑크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은율은 저를 꽉 끌어 안고 있는 진환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형은 제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집에만 갇혀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솔직히 말해도 되나?”
“예.”
“……응. 그럼 나만 볼 수 있잖아.”
은율이 낮게 웃었다.
“그럼 형이랑 연기할 수 없게 되는데도요?”
진환이 은율의 어깨에 제 눈을 비볐다.
“음, 역시 연기도 같이 하고 싶어.”
“저도 그렇습니다. 형이랑 같이 연기하고, 형이랑 같이 연기한 영상을 보고, 형이랑 같이 피드백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저도 제 일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게 다 경험이 되고 실력이 되는 거잖아요.”
전부 맞는 말이라, 진환은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수하는 나름대로 모난 데 하나 없이 균형 잡힌 연기를 해내는 배우다. 어떤 연기자와도 순탄히 호흡을 맞추며, 타인의 조언도 그것이 모두 자신의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남자다. 기본 성격은 둘째 치고서라도 배우로서 연기에 임하는 자세 자체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진환이 수하를 특히나 경계하고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친근하게 접근해 상대를 떠보며 그 속내를 들추기 좋아하고, 상황에 따라 그때에 얻은 정보를 자신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사용하는 남자였다. 타인의 마음을 들추어 그걸 붙잡고 흔들기 좋아하는 수하는 진환이 굉장히 싫어하는 부류였다.
그 때문에 은율이 수하와 같이 있는 게 더 꺼려졌다. 혹시라도 수하 때문에 은율이 상처받게 되는 날이 올까 봐 걱정되었다.
“알았어. 대신 녀석하고 너무 몸 비비지 말고, 손잡게 놔두지 말고, 이상한 말 하면 무시하고, 열 받게 하면 명치 때려 버리고…….”
하여튼 그놈의 명치.
은율이 웃으며 진환을 떼어 내었다. 진환이 순순히 떨어져 은율을 바라보았다.
“끝나고 또 일 있으시죠?”
“여유 좀 있어.”
“그럼 저 다 끝나면 같이 식사하러 가요.”
방긋 웃으니 빛이 나는 느낌이다. 진환은 웬일로 들뜬 은율이 귀여워, 그의 양 볼을 붙잡고선 그 입술에 짧게 뽀뽀했다.
“그래, 가자. 우리 율이,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가끔은 제가 사 드릴게요.”
은율은 마침 액션스쿨 근처에 있는 유명한 맛집을 떠올렸다. 가격도 나쁘지 않고 맛도 좋은 한식집이었다. 매번 신세만 지는 게 미안했던 터라 식사 정도는 자신이 사고 싶었다.
저를 사 주고 싶다는 말에, 진환이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대로 제 입술을 맞대었다.
자연스레 벌려진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고 안을 휘저어, 깜짝 놀란 작은 혀를 감아 빨아 당겼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그 작은 혀도 귀엽게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젠 제법 진환의 도톰한 혀도 빨아 당길 줄도 알고 잘근잘근 물어 볼 줄도 안다. 그것이 기특해, 진환은 은율의 뒤통수를 한 손에 잡고 허리를 끌어당겨 더 깊이 키스했다.
“음…… 흐읍…….”
작은 신음마저 귀엽다. 키스만 했다 하면 금세 붉어지는 얼굴도 귀엽다. 몽롱해지는 눈동자도 귀엽다. 부끄러운 듯 몸을 움찔거리는 것도 귀엽다.
진환이 보기에, 은율은 뭘 하든 다 귀여웠다.
‘이대로 잡아먹고 싶다…….’
자제할 자신이 없어, 결국 제 혀를 회수하고 은율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거칠고 깊었던 키스에 지쳐 헐떡이는 은율을 제 품에 기대게 했다. 그의 머리가 자연스레 진환의 어깨에 기댔고, 그의 달뜬 숨이 목에 닿았다.
‘자제……해야지…….’
자꾸만 은율을 데리고 당장 차로 가고 싶었다. 그랬다간 제 명치가 남아나질 않겠지만.
숨을 고른 은율이 진환의 품을 벗어났다. 그는 제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가끔은 예고 좀 하고 하십시오.”
“미안. 형이 잘못했으니까 밥 사 줄게.”
“제가 사고 싶다니까요.”
“넌 그거 말고 다른 거 해 줘.”
진환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거 할 때 형 위에서……! 흡!”
진환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제 명치를 붙들고 주저앉았다. 은율이 싸늘한 낯으로 주먹을 쥐어 내민 상태로 웃었다.
“제가 지금 신성한 액션스쿨 탈의실에서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미안,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진환이 진지한 얼굴로 깍듯이 용서를 빌었고, 그 모습에 결국 은율은 얼굴을 풀고 웃어 버렸다.
은율이 도와주려는 듯 손을 뻗자, 진환이 한 손으로는 저릿한 명치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내밀어진 팔을 끌어당겼다. 끌려온 은율을 붙잡아, 그대로 입술에 짧게 입맞춤했다. 은율이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좋게 웃었다.
* * *
수하와 합을 맞추는 것은 예상외로 빨리 끝났다.
탈의실에서 나와 수하에게 갔더니, 그 자리엔 훈석이 와 있었다. 때마침 도착한 그 덕분에 진환이 우려하던 스킨십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율은 수하와 맞대결하는 식의 합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옆에서 그의 동작을 교정해 주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무술감독과 빠르게 이야기를 끝낸 진환은 견학이라는 이유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수하는 따끔거릴 정도로 거슬리는 진환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와 말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느덧 그들은 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액션스쿨에는 발도 들인 적 없던 톱스타 이수하와, 그의 라이벌 격인 톱스타 이진환이 있었다. 거기다 액션스쿨 내에서는 그 실력과 미모로 유명한 서은율까지 함께 있으니, 주목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호기심과 흥미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은율, 수하, 훈석의 합 맞추기 교정은 끝이 났다. 그러자 진환이 벌떡 일어나 은율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그는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얼른 옷을 갈아입고 액션스쿨을 나섰다.
사이좋게 걸어가는 진환과 은율의 뒷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부러운 눈을 했다. 자기들은 언제 저런 톱스타와 형 동생 하면서 친해져 보나 하는 그런 눈이었다.
수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홀로 탈의실로 향했다. 가는 와중에도 제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들어갔다.
제 옷가지를 개어 놓은 곳에 다가가 그 안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하며 탈의실의 문을 잠갔다.
이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이수하입니다. 방금 헤어졌습니다.”
상대가 뭐라 물어온다. 수하가 작게 웃었다.
“정말 미인이던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건너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런데 옆에 좀 사나운 경비견이 하나 있습니다. 어딜 가든 따라붙는 것 같네요.”
진환을 떠올리며 말했다. 상대는 그에 대해 흥미를 내비쳤다.
“예, 그럼 그에 대해서도…….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 뒤에 보고 차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수하는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길 기다렸다. 상대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도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스폰서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일개 스턴트맨 서은율과 그의 주변에 대해 어지간히도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