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Stunt/Fade Out
인천국제공항.
수많은 인파가 모여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렸다.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웬 남자 배우가 멋들어진 패션을 한 채 걸어 나왔다. 모여 있던 이들 중 절반가량이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자 배우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일종의 팬 서비스를 해 주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포진해 있던 보디가드들이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그런 남자 배우의 뒤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어두운 회색 머리를 가진 외국인이었다. 늘씬한 키에 검정 정장을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그는, 남자 배우보다도 더 많은 검은 옷의 사람들을 뒤에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보디가드라기보다는, 그의 수하들처럼 보였다.
워낙 검은 정장들이 우르르 걸어가니, 사람들의 시선은 남자 배우보다도 그쪽에 더 쏠리게 되었다. 어두운 회색 눈동자를 지닌 외국인 남자는 하얀 피부에 오뚝하게 선 콧날, 약간 붉은 입술이 특히나 눈길을 끌었다. 외국인을 기준으로 미남미녀를 구분 짓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범상치 않은 외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들을 무심하게 훑어본 외국인 남자가 다시 발을 내디뎠다. 멈춰 서 있던 검은 정장의 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국 공기는 최악이네.}
남자의 입에서 부드러운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가장 바짝 따라붙어 있던 스킨헤드의 남자가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반응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미세먼지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 5대가 보였다. 그 차의 운전자들은 각각 운전석 밖에 나와 차려 자세를 한 채 서 있었다. 그들이 남자를 보고는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남자는 5대의 차량 중 가장 앞에 있는 차로 다가갔다. 스킨헤드의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고, 남자는 당연하게 그 안에 탑승했다.
남자가 완전히 탑승한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아 준 후, 그는 보조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해당 차량의 운전자가 운전석에 탑승하고서 시동을 걸고 나니, 밖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검은 정장의 이들이 일제히 다른 차량에 나눠 탑승했다.
남자가 탄 차량이 출발하고 나니, 나머지 4대의 차량이 줄을 지어 따라붙었다.
남자는 푹신한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휴대폰의 사진 폴더에 보관된 사진들을 둘러보며, 매력적으로 미소 지었다.
{아까 알아채셨습니까?}
스킨헤드의 남자가 보조석에서 물어왔다. 회색 머리의 남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응. 끈덕지게 달라붙네.}
{따라오고 있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마지막 차량 뒤꽁무니에 붙어 오고 있을 거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귀찮은 듯 대꾸했다.
{내버려 둬. 그래 봐야 자기들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다 갑자기 눈을 든다. 그가 스킨헤드의 남자를 마주 보았다.
{같이 있던 젊은 놈, 낯이 익던데. 어디서 봤지?}
{잡아서 알아볼까요?}
회색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선을 휴대폰에 두었다.
{그래, 폐건물 하나 물색해서 잡아다 놔. 그놈, 단순히 기자 놈 조수 같지는 않았어.}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강하게 쏘아보던 청년을 떠올렸다. 눈매가 마음에 든 건 둘째 치고,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기억력과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힌 남자였지만,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를 봤나.’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으니, 다 성장하기 전의 모습을 봤던 건 아닐까 싶었다.
‘뭐, 잡아다 놓으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휴대폰 속 사진에 집중했다. 조수석에서 스킨헤드의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제 휴대폰 속에 담긴 한 청년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몇 장 되지 않는 사진을 이리저리 넘겨 보며 낮게 웃었다.
사진은 얼핏 보면 모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지하철에서 찍힌 사진은 동양인다운 피부색을 가진 카리스마 있는 미남자였고, 그다음 사진은 영화 <12>의 마지막 단편에 나온 ‘정한서’의 웃는 모습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그다음은 검은 정장을 입고 돌려차기를 하고 있는 긴 앞머리의 청년이었다.
그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진이 커다란 안경을 쓰고 긴 앞머리를 내린 평범한 청년의 사진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지막 사진 한 장만이 그 나이대가 달랐다.
고작 5살 남짓 되었을까.
커다란 눈에 새하얀 피부, 사랑스러운 얼굴과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누구라도 이 어린아이의 얼굴을 본다면 세상이 파스텔 톤으로 보이지 않을까. 절로 미소를 짓게 하고 머릿속을 꽃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은 어여쁜 남자아이였다.
남자는 한동안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아련하게 흔들렸다.
“드디어 만나겠네.”
남자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유창한 한국어를 뱉었다. 그가 휴대폰 화면에 뜬 남자아이의 한쪽 볼에 제 손끝을 대었다.
“우리 은율이.”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진환의 집에서 공부에 집중하고 있던 은율은, 휴대폰에 뜬 하진의 이름을 확인하며 작게 웃었다. 내일 보기로 했으니, 그 약속 시간을 잡으려는 건가 보다 하고 전화를 받았다.
-형, 지금 어디야?
왜인지 다급한 목소리다. 은율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 사이에 내려놓으며 의아하게 물었다.
“진환이 형 집이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럼 됐어.
이번엔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목소리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은율이 진환이 마련해 준 제 개인 방의 책상에서 벗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아냐, 아무것도. 일단 형은 오늘 거기서 나오지 마. 알았지?
은율이 심각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똑바로 말해. 뭐야?”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내 말 들어.
하진이 그 말만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은율은 불쑥 찾아오는 불안감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은율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하진이 이럴 때는 분명 자신과 관련된 뭔가가 있는 거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이 집에 꼭 붙어 있으라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혹시 모르니 진환에게 연락할까 했지만, 그는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서성거렸다. 이 상태로는 공부고 뭐고 손에 잡힐 턱이 없었다.
그러던 은율의 휴대폰이 작게 진동해 댔다. 하진인가 싶어 얼른 휴대폰을 확인하니,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실망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하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은율 씨, 안녕하세요. 저 이수하입니다.
건너편에서 수하가 쾌활하게 인사해 왔다.
-혹시 지금 바쁘세요?
“어…… 무슨 일이십니까?”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레 물었다.
-지금 최 감독님 뵈러 가는데, 은율 씨도 봤으면 한다고 하시네요. 아무래도 며칠 뒤에 있을 합 맞추는 액션신 때문인가 봐요.
수하가 말하는 액션신이란, 그가 며칠 전 액션스쿨에서 교정을 도와줬던 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스토리상 나름 중요한 장면이니 최 감독이 신경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내 차로 이동하고 있는데, 위치 알려 주면 데리러 갈게요.
“제가 지금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요.”
아무래도 하진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뭔가 위험을 감지했기에 제게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소리를 한 것일 터였다.
-많이 바빠요? 잠깐이면 될 것 같은데.
은율은 고민하며 서성거리다, 문득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 통유리의 커튼을 살짝 걷어 내고 밖을 보았다. 워낙 마당 부지가 넓긴 했으나 집 자체는 마당보다 높은 지대에 있었던 터라, 통유리 밖으로 집 주변의 길가 정도는 내다볼 수 있었다.
한적한 길가에는 검정 차량 3대가 띄엄띄엄 주차되어 있을 뿐, 별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은율이 움찔 놀라며 커튼을 닫았다.
-듣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감독님께는 양해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어, 은율 씨? 은……!
불길한 생각에 수하의 부름을 무시하며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은율이 휴대폰을 한 손에 쥔 채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주차된 3대가 모두 같은 차종이었다. 거기다 서로의 주차 거리가 각각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주차된 방향은 동일했다. 일방통행 골목이 아님에도.
거기다 진환의 집 주변에 있는 다른 집들 역시 워낙 부자들 집이다 보니, 저런 고급 세단이 밖에 주차되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들 차량 몇 대는 수용 가능한 개인 주차장을 갖고 있으니까.
괜한 걱정이라면 좋으련만, 불안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은율은 거실의 TV를 켜고는 리모컨을 조작해 외부입력으로 연결된 집 근처 CCTV를 출력했다. 8대의 외부 CCTV가 커다란 화면에 그대로 잡혔다.
CCTV는 정교하게 집 근처를 담아내고 있었지만, 그 안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CCTV 중 2대가 각도상 가장 가까이 주차되어 있는 1대의 차량 조수석과 뒷좌석 쪽을 비추고 있었다.
은율은 차량이 비친 화면을 가만히 주시했다.
몇 분 뒤, 은율의 눈썹이 꿈틀했다.
짙게 선팅이 되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조수석에서 순간적으로 미약한 불빛 같은 게 비쳤다 사라졌다.
은율은 그것이 라이터 불빛이라고 생각했다. CCTV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아마도 안에 사람이 타고 있고 이쪽에 보이지 않게끔 운전석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만 담배 연기를 내보낼 요량인 것 같았다. 제 추리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섣불리 창문에 붙어 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다. 혹여 자신이 눈치챈 게 드러나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은율은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전 수하가 전화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연락처에서 ‘강 팀장님’이라 쓰인 연락처를 터치해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나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은율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죄송한데, 혹시 최 감독님께 연락받으신 것 있습니까?”
은율은 수하와 함께 출연하는 영화의 촬영감독인 최병오 감독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은율은 언제나 자신이 속해 있는 스턴트팀의 강 팀장을 통해 연락을 받았고, 그를 통해 모든 걸 전달했다.
-아니, 없는데. 왜?
예상대로다.
“아닙니다. 그리고 혹시, 그쪽 최 감독님네 사람들에게 제 연락처 간 것 있습니까? 관련된 사람들이라든지요.”
-없을걸? 원래 스턴트맨 개인에게 연락하는 경우는 그 본인이 직접 연락처를 주지 않는 이상은 없잖아. 같은 팀이더라도 본인 허가 없이는 누설하지 않는 게 기본이고. 내가 알기로 그쪽 관련 사람들 중에 네 연락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건데.
“최 감독님도 모르시는 건가요?”
-그렇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팀장님이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다음 주 최 감독 쪽 액션신 때 보자고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은율이 굳은 얼굴로 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이수하는 어떻게 제 휴대폰 번호를 안 걸까?
굳이 스턴트팀이 아니더라도, 업계 사람들끼리는 서로 친밀한 관계이거나 직접 허락을 받은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연락처를 넘겨주지 않는다. 섣불리 그러다가는 상대에게 무슨 일이라도 터졌을 때 자칫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의 연락처 교류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수하와 친한 사람들 중에 제 연락처를 가진 사람이 있던가?
은율이 업계 사람들 중 제 연락처를 개인적으로 건네준 것은 진환, 그의 매니저 연우, 곽철민 감독, 그리고 현우뿐이었다.
진환은 수하를 싫어하니 당연히 그럴 리가 없고, 연우도 진환이 저리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제 연락처를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철민 역시 워낙 입도 무겁고 업계에 빠삭한 사람이라 제 연락처를 함부로 뿌릴 리 없었다.
그나마 의심스러운 건 현우였지만, 곧바로 도리질을 쳤다. 아이돌 활동을 오래하다가 이제야 연기에 발을 들인 사람인데 톱스타 이수하와 접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이수하는 어떻게 제 연락처를 가졌으며, 왜 최 감독을 팔아 저를 불러내려 한 걸까?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고 의심이 쌓여 갔다.
은율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진환에게 전화를 걸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혹여 방해가 될까 봐 메시지만 하나 보내 놓았다.
[메시지 확인하시면 전화 주세요.]
그렇게 보내 놓은 후 긴장한 얼굴로 연락처를 보다, 다시 하진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한참동안 신호가 갔지만, 역시나 받질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은 그때, 갑자기 TV 화면이 변화를 일으켰다. 8칸으로 나뉘어 바깥을 비추던 CCTV가 하나씩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꺼지던 화면에 얼핏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이내 모든 화면이 까맣게 꺼져 버렸다.
은율은 창가로 다가가 몸을 숙인 채, 2장의 커튼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대문 근처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다섯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갈색 머리의 백인 남자와 짧은 머리의 흑인도 섞여 있었다. 바깥 CCTV의 회로를 끊은 것으로 추정되는 4명의 남자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도합 9명이었다.
그들은 뭐라 대화를 하더니, 은율이 있는 진환의 집을 또렷이 올려다보았다. 그들 중 한 명이 태블릿 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에는 검은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끝을 대문의 인식기에 연결하고서 패드를 몇 번 두드려 댔다. 그러자 대문이 아무렇지 않게 열리는 게 아닌가.
은율은 바짝 긴장했다. 해커 같은 사람까지 껴 있다면, 현관의 문을 여는 것 정도는 조금 전처럼 금방 해낼 것이다.
은율은 그들이 노리는 게 자신일 거라 생각했다. 모든 정황이 그러했다.
은율은 그들에게 절대 순순히 끌려가진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은율은 현관으로 다가가 그 옆 벽에 붙어 있는 사각형의 흰색 플라스틱 덮개를 열었다. 손바닥만 한 그것을 열자 검은 바탕의 안쪽 한가운데에 붉고 동그란 버튼이 보였다. 은율은 그것을 3초 정도 꾹 누른 후 덮개를 도로 덮었다.
은율이 누른 버튼은 긴급신호가 되어 경호회사에 전달될 것이다. 해당 경호업체에서 발 빠르게 출발함은 물론이고 만약을 대비해 경찰까지 대동해 올 테니, 그 시간 동안만 버티면 된다.
새삼 진환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해 저런 시스템까지 만들어 준 것에 감사했다.
밖의 이들이 현관까지 다가왔는지, 현관 바로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율은 집 안쪽으로 열리는 현관문의 뒤쪽에 몸을 숨기고서 제 휴대폰을 붙박이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입고 있는 게 반팔 티에 추리닝 반바지이다 보니, 주머니에 넣고 움직였다가는 자칫 떨어뜨릴 위험이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동그란 안경도 벗어서 그 옆에 고이 올려 두었다.
현관문에서 돌연 삐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인식기가 정상 확인을 거쳤을 때에만 나는 소리였다. 상대는 역시나 거친 방법 대신 해킹을 통해 잠금장치를 열었다.
문고리가 소리 없이 돌아가며, 아주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반쯤 열렸을 때, 은율은 그 문에 발을 세게 내질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를 잡고 있던 이가 문에 머리를 박고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 밖에서 다른 이가 문을 홱 열어젖혔고, 은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문 뒤에서 빠져나와 그 상대의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어억!”
선글라스가 날아가고, 남자가 코를 잡으며 뒤로 물러섰다. 교대하듯 다른 이가 들어오려 했지만, 은율은 반쯤 열린 문을 붙잡은 채 그걸 지지대삼아 그의 턱을 올려 찼다. 그 후, 몸을 뒤틀어 다른 발로 뒤돌려차기를 먹여 주니 단박에 나가떨어졌다.
“컥!”
2명이 연이어 제대로 공격받자, 다른 이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문을 살짝 열어 둔 채 그 뒤에 숨어 흉흉한 안광을 발하는 은율을 마주 보았다.
은율은 문 뒤에 숨어 남자들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이렇다 할 만큼 거창한 무기는 없어 보였다. 자신이 공격에 나섰음에도 뭔가를 꺼내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상해를 입히지 않으려는 건가…….’
그들은 자신을 최대한 무사히 생포하려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작은 칼쯤은 꺼내 들었을 것이다.
은율이 흠칫 놀랐다. 문밖에 있는 남자들의 수는 일곱. 외국인 두 명이 보이질 않았다.
그걸 깨닫자, 곧바로 거실의 통유리에 굉음이 들렸다.
쿵-!
커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실루엣으로 봐선 뭔가로 창문을 부수려는 것 같았다.
문틈으로 남자들 중 하나가 손을 훅 뻗어 왔다. 그 손이 은율의 셔츠 소매를 잡는 순간, 은율이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아욱!”
팔이 문틈에 낀 남자가 셔츠 소매를 놓치며 손끝을 떨었다. 은율은 그 상태로 발로 한차례 문을 차 버렸다.
“으아악!”
어쩌면 팔이 부러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지금은 상대의 몸을 걱정해 줄 때가 아니었다. 은율은 그 상태로 몸을 돌려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 2층에 다다랐을 때, 아래층에서 남자들이 저를 찾아 분산되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 옆 벽에 등을 붙이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2층으로 올라오고 있는 건 4명. 은율은 심호흡을 하며 몸을 적당히 긴장시켰다.
가장 처음 계단 끝에 오른 남자에게 재빨리 달려들어 그의 명치에 온 힘을 다한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졌고, 바로 뒤에 붙어 있던 남자가 그에게 깔려 같이 계단을 굴렀다.
약간 비켜서 있던 다른 두 남자가 한달음에 올라와 은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몸을 틀어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은율이 몸을 숙인 채 남자의 몸을 들이받아 밀었다. 그가 계단을 굴렀고,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뻗어져 나온 손이 은율의 팔을 세게 잡았다.
어마어마한 악력에 은율이 이를 악물었다. 백인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팔을 붙잡고는 그대로 자기 쪽으로 당겼다. 은율은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잡히지 않은 팔을 뻗어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그 상태로 하체에 힘을 실어 남자의 오른쪽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자는 움찔하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그가 한 손으로 은율의 팔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을 뻗어 은율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워낙 센 힘에 은율이 난간을 놓치고 말았다. 은율은 백인 남자에게 허리를 붙들리고 다른 한 팔을 붙잡힌 채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움직이지 마.}
남자가 영어로 경고했다. 하지만 은율은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백인 남자의 두 팔은 각각 은율의 허리와 팔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잡히지 않은 한 팔이 자유로운 은율은 그 손을 칼처럼 세워 남자의 목젖을 가격했다.
남자가 비틀거리고, 팔의 힘이 조금 약해졌다. 은율은 한 손으로 그의 목젖 좌우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끅!}
순간적인 호흡 곤란에 남자가 이를 악물며 숨을 삼켰다. 은율은 잡혔던 팔을 크게 털어 남자의 손에서 벗어났고, 제 허리를 붙든 팔의 손목 안쪽을 꽉 눌러 걷어 내었다.
혈이 눌린 남자의 팔이 허리를 풀어주자마자 은율은 몸을 반 바퀴 돌려 그에게서 벗어났고, 잡고 있던 팔의 팔꿈치 바깥 부분을 제 팔꿈치로 온 힘을 다해 가격했다.
{크아악!}
백인 남자의 팔이 굽는 쪽과 반대로 홱 굽어졌다. 은율은 자신이 실제로 사람의 팔을 제대로 부러뜨렸다는 사실에 움찔했지만, 그런 것에 제대로 반응할 새도 없이 다른 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은율은 주저앉은 백인 남자의 턱을 주먹으로 올려쳐, 그를 넘어뜨렸다.
백인 남자의 커다란 몸이 계단을 굴러 내려갔고, 그를 피하느라 다른 이들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은율은 그사이 숨을 고르며 계단 가장 위쪽 칸에 머물렀다. 올라오던 3명의 남자들이 잠시 머뭇거리다 그대로 뛰어 올라왔다.
은율은 양손으로 계단 난간을 잡아 몸을 띄우고는 두 발로 가장 앞에 있던 남자의 가슴팍을 차 버렸다. 그가 뒤로 굴러 떨어졌고, 난간에 붙어 있던 두 남자가 좌우에서 각각 손을 뻗어 왔다. 은율은 계단을 박차 몸을 공중에 높이 띄우고는 두 발뒤꿈치로 두 남자의 정수리를 정확히 가격해 내리찍었다.
두 남자가 머리에 전해지는 통증에 주저앉자, 계단 바닥에 안착한 은율이 왼쪽 남자의 얼굴에 오른발로 발차기를 날렸고, 난간에 매달리는 그의 손등을 발뒤꿈치로 찍어 버렸다. 고통에 힘이 풀린 남자가 그대로 계단을 굴렀다.
은율은 왼쪽 난간을 두 손으로 짚고는 몸을 틀어 오른쪽 남자의 얼굴에 오른발 뒤돌려차기를 먹였다. 뒤돌려차기로 인해 몸이 그쪽으로 열리듯 돌아간 은율이 왼쪽 다리를 그의 얼굴에 빠르게 올려 차 버렸다. 그러자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은율이 거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웅크려 신음하는 남자의 수는 셋, 그리고 한쪽 팔이 부러진 백인 남자와 현관문에 끼어 팔이 부러진 남자 하나.
다소 멀쩡한 상태의 4명이 긴장한 얼굴로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은율은 벌써 땀에 젖어 버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다음은 누구입니까?”
4명의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체구가 큰 흑인 남자가 다른 이들에게 손을 뻗어 보이며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자기가 갈 테니 올라오지 말라는 제스처로 보였다.
가장 강해 보이고 위험해 보이는 남자가 앞서 올라오니, 은율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계단 아래로 던지고는 푸른 눈동자를 들어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영어 할 줄 아나?}
흑인이 낮은 음성으로 물어왔다. 은율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흑인이 다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되도록 얌전히 함께 가 줬으면 좋겠는데.}
{누구 명령입니까?}
{따라오면 알게 돼.}
역시나 바로 알려 주진 않았다.
{절 데려가려는 이유는요?}
{그것 역시 따라오면 알게 된다.}
이들은 은율에게 힌트도, 답도 알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은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반항 좀 해야겠는데요.}
{쓸데없는 짓을.}
짧게 말하며 그가 단번에 계단을 3칸씩 뛰어 올라왔다. 빠르게 가까워진 흑인 남자를 보며 은율이 바짝 긴장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가볍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나눈 진환이 연우에게 다가왔다. 그가 습관처럼 손을 내뻗었다. 연우는 그 손이 뭘 원하는지 익히 알고 있는 듯 주저 없이 휴대폰을 얹어 주었다.
진환은 제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진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그리고 은율의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은율의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메시지 확인하시면 전화 주세요.]
등줄기에 이상한 한기가 들었다. 앞뒤 없이 이런 메시지만 하나 보내 놓다니,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당장 은율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그는 안내음성이 나올 때까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 확인 후 전화를 달라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니, 이상했다.
진환은 하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케이가 입국했어.]
[형에겐 집에만 있으라고 경고했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은율의 메시지.
전화를 받지 않는 은율.
불길했다.
진환은 파리해진 안색으로 연우를 지나쳐 뛰어나갔다.
“바로 집으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예?! 형!”
연우가 말리려 했으나, 이미 진환은 촬영 세트장 밖으로 나간 직후였다.
“잡지 인터뷰 있는……데……. 예에, 뭐, 알아서 미루겠습니다.”
연우가 잡지 인터뷰는 뭐라고 하고 미뤄야 하나 고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환은 제 차를 가져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주차장에 주차해 둔 흰 외제 차에 올라탔다. 그 상태로 시동을 걸고 곧바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운전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진환은 은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이번엔 하진에게 걸었지만, 그도 받지 않았다.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에 진환은 난생처음으로 규정 속도를 위반해 차를 몰았다. 평소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운전이 아닌, 한없이 거칠고 다급한 운전이었다.
그때, 진환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얼른 휴대폰의 액정을 확인해보니, ‘KWG’라고 뜬다. 진환이 눈을 크게 뜨며 전화를 받았다.
“예,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자택에서 긴급신호가 들어와서요. 지금 출동 중입니다만, 혹시 밖입니까? 안에는 아무도 안 계세요?
진환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긴급신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와 은율뿐이다.
“안에……, 안에 한 사람 있을 겁니다.”
운전대와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진환은 은율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최대한 빨리 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지금 경찰분들과 함께 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도착합니다.
진환은 전화를 끊고는 그대로 운전대를 제 손으로 내리쳤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은율이 이상한 낌새를 느껴 메시지를 보냈던 걸 제때 확인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빨리 촬영을 끝냈더라도 바로 연락할 수 있었을 텐데.
메시지를 보낸 시간과 제 촬영이 끝난 시간의 공백은 10분 남짓이었다. 고작 그 공백 때문에 은율이 어떤 상황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진환이 화를 억누르며 액셀을 거세게 밟아 댔다. 그의 거친 주행에 몇몇 차량이 클랙슨을 울려 댔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정지하자 진환은 육성으로 거칠게 욕을 뱉었다. 그러다 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 은율도 걱정이었지만 하진도 문제였다. 그런 경고 문자를 보내고서 연락이 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진환은 휴대폰의 연락처를 뒤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오, 아들. 무슨 일이야? 일은?
다정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정중히 인사부터 해야 했지만, 진환은 마음이 너무 급했다.
“아버지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해 봐라. 힘닿는 데까지는 뭐든 도와주마.
이때만큼 아버지가 든든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실종으로 의심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치 추적 좀 부탁드려요.”
* * *
은율은 제게 바짝 다가온 흑인을 향해 얼른 오른쪽 다리를 휘둘렀다. 제법 매서운 발차기가 흑인 남자의 오른손에 턱하니 잡혔다. 은율은 제 발목을 단단히 잡은 팔에 안도하며 왼쪽 다리에 힘을 실어 몸을 붕 띄웠다. 남자가 오른쪽 발목을 흔들림 없이 잡아서 지탱해 준 덕분에 공중에서 몸을 틀어 왼 다리로 그의 얼굴을 가격할 수가 있었다.
{큿!}
고개가 홱 돌아가고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면서도 은율의 발목을 놓지 않았다.
발차기를 먹인 덕에 몸이 비틀리며 그의 머리 쪽이 바닥으로 향하게 되었다. 은율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붙잡힌 오른 다리는 통증이 생길 정도로 뒤틀렸지만, 왼 다리는 자유로웠다.
은율은 물구나무를 선 채로 왼 다리를 뒤로 홱 꺾었다가 허리와 엉덩이에 힘을 주어 반동을 일으켰다. 앞쪽, 즉 흑인 남자의 얼굴을 향해 은율의 발끝이 날아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젖혀 눈을 제대로 맞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왼쪽 어깨에 격한 통증을 느꼈다.
발목을 잡은 남자의 손이 움찔하며 약간 느슨해지자, 은율은 그때를 노려 박차듯 제 오른발을 빼냈다. 은율이 몸의 중심을 뒤로해 텀블링하듯 두 다리를 바닥에 안착했다. 그 상태로 재빨리 몸을 돌려 흑인 남자의 얼굴에 오른쪽 주먹을 내질렀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흑인 남자가 왼쪽 팔뚝을 들어 그 팔을 막아 내고는 은율의 멱살을 잡으려 오른팔을 내뻗었다. 은율은 몸을 단숨에 숙여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아랫배 약간 아래에 있을 단전에 온 힘을 실은 주먹을 박아 넣었다.
흑인 남자가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가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제법인데.}
은율이 그를 힐끔 보더니 이번엔 명치를 노렸다.
은율이 내지른 오른쪽 주먹이 흑인 남자의 명치에 닿기 직전, 남자가 왼 손바닥으로 그 주먹을 막고서 단숨에 손목을 그러쥐었다. 남자는 은율의 손목을 잡아 단숨에 팔을 꺾고서 그 뒤로 돌아섰다. 오른팔을 뒤로 꺾인 탓에 은율의 몸이 웅크려졌다.
은율은 재빨리 제 등을 남자의 품에 바짝 붙여 체중을 실었다. 계단 첫 번째 칸에 서 있던 그가 약간 휘청거리자, 때를 노려 왼팔을 굽혀 그 팔꿈치로 제 눈 정도 높이에 있을 남자의 턱을 노렸다.
빠각-!
{큭!}
턱을 옆에서 정통으로 맞은 흑인이 휘청거렸다. 발을 디딘 곳이라도 평지였다면 좋으련만, 계단이었던 탓에 한 발을 아래 칸에 디딘다. 남자의 몸이 움직이게 되면서 은율의 팔을 꺾었던 손아귀 힘이 약간 약해졌고, 남자와 꺾인 팔, 그리고 은율의 등 사이 곳곳에 공간이 생겼다.
이때를 노려 은율이 몸을 오른쪽으로 뱅그르르 돌리며 제 팔을 잡고 있는 흑인 남자의 팔뚝을 팔꿈치로 내리누르듯 가격했다. 부러지진 않았지만, 극심한 통증에 남자의 손아귀 힘이 풀렸다.
자유로워진 은율이 그 상태로 뒤돌려차기를 해 흑인 남자의 관자놀이를 제대로 공격했다. 뇌가 흔들리는 느낌에 남자는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아 몸을 지탱했다. 그가 난간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아주 날렵해.}
{칭찬 감사합니다.}
은율이 거친 숨을 고르며 곧바로 남자에게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남자의 얼굴로 주먹을 내지르는 그 순간, 남자가 몸을 푹 숙이더니 어깨로 은율의 복부를 들이받았다.
“흣!”
들이받혀 계단 앞 2층 바닥에 눕게 된 은율의 위로 흑인 남자가 올라타 그의 두 손을 제 손으로 붙잡아 내리눌렀다. 굉장한 힘에 은율은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흑인 남자가 숨을 고르며 씩 웃었다.
{드디어 잡았네, 예쁜이.}
‘예쁜이’라는 말에 은율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은율은 몸을 여기저기 움직여 봤지만, 흑인 남자의 몸에 내리눌린 몸은 자유가 완전히 막힌 상태였다.
은율이 차분한 얼굴로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다치지 않게 잡아 오라는 명령인가 봅니다?}
그런 명령이 없었다면 남자가 이렇듯 방어적으로만 반격할 리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이리 내리누른 후, 기절시킨다는 명목으로 주먹을 후려갈겨도 하등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
{데려가는 도중에 제가 가만히 있진 않을 것 같은데요.}
지금이야 몸에 짓눌려 얌전하다지만, 제 몸을 누르고 있는 어느 한 군데라도 떨어져 나간다면 단박에 이 결박을 깰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자가 뭔가를 꺼내기 위해 한 손을 떼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흑인 남자가 은율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계단 아래를 향해 외쳤다.
{이봐! 잡았으니까 올라와!}
아래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제가 손을 뗄 수가 없으니 아래에 있던 이들의 도움을 받을 셈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은율이 예상한 바였다.
주의가 분산된 틈을 타, 가만히 누워 있던 은율이 돌연 상체를 훅 일으키며 이마로 남자의 눈가를 노려 박치기를 했다.
{헉!}
같은 이마도 아니고 두 눈과 미간을 거세게 가격당한 흑인 남자의 손이 풀어졌다. 은율은 단숨에 두 손을 빼내어 맞잡아 깍지를 끼고는, 그렇게 쥔 두 손으로 남자의 관자놀이를 좌에서 우로 거세게 가격했다. 흑인 남자의 상체가 흔들리고, 은율이 그때를 노려 그의 목젖을 주먹으로 짧게 치고 빠졌다.
{커흡!}
흑인 남자가 제 목을 붙잡은 채 뒤로 넘어갔다. 순간적인 호흡곤란에 남자가 바닥에 넘어져 비틀거렸다. 은율은 그의 밑에서 빠져나와, 목을 붙잡고 숨을 헐떡이는 그 얼굴에 시원한 발차기를 날려 주었다.
제대로 맞은 건지, 흑인 남자가 뒤로 넘어져 그대로 기절했다. 때마침 아래에서 다른 이들이 올라오기에, 은율이 계단 가장 위 첫 칸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자세를 잡았다.
“당신들 뭐야!”
아래쪽에서 다수의 발소리가 들리며 한국어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들의 목소리나 분위기만 봐도 이들과 한패가 아니라는 것쯤은 쉬이 알 수 있었다.
“손들어!”
계단으로 올라오던 이들이 주춤하며 서로를 돌아보더니, 혀를 차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들은 집 안으로 들이닥친 경비업체 사람 다섯과 두 명의 경관을 두고서 대치한 상태였다.
은율은 이제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흐읏!”
제 목을 갑자기 꽉 조르는 굵은 팔뚝에 은율이 눈을 크게 떴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고 뇌가 정지했다. 급소를 정확히 압박해 누른 검은 팔뚝에 의해 은율이 눈을 크게 뜨고 몸에서 힘을 뺐다. 그를 압박한 흑인 남자가 이때다 싶어 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작은 주사기를 꺼내 은율의 목에 주사기의 바늘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몇 초간 버둥거리던 은율의 눈이 감기고, 그가 축 늘어졌다.
기절했다가 곧바로 깨어났던 흑인 남자는 일부러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때마침 경비업체 사람들이 들이닥치며 은율이 순간이나마 방심했고, 때를 노려 그의 목을 압박해 힘을 뺀 뒤 수면마취제를 혈관에 직접 주사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를 상처 하나 없이 납치하는 것은 실상 어려웠을 터였다.
흑인 남자는 은율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채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백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남자들이 얼른 눈을 질끈 감았다. 백인 남자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바닥에 내던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빛이 실내를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섬광탄에 눈을 그대로 노출한 꼴이 된 경호업체 직원들과 경관 2명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이들이 그 틈을 노려 그들을 때려눕히고, 테이저건을 빼앗아 그들에게 쏘아 댔다.
백인 남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선글라스를 집어 계단을 올라와 흑인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보스가 기다려. 가자.}
흑인 남자가 건네받은 선글라스를 쓰며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두 외국인 남자는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저들끼리 발을 빨리해 문을 나섰다.
이윽고 섬광탄의 빛이 사그라진 때를 노려, 경호업체 직원들과 경관 두 사람이 다시 몸을 추스르고는 부상 당한 상대들을 제압했다.
일곱의 정장 입은 남자들을 어찌어찌 제압해 묶어 놓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정작 외국인 2명이 은율을 데리고 가 버렸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경호업체 사람들이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미 두 외국인은 차에 몸을 실은 뒤였다.
두 외국인과 은율을 실은 검은 세단이 골목을 빠르게 주행해 나가고, 경호업체 사람들은 한발 늦게 뛰어나와 얼굴을 구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들어오기 전에 골목에 있던 모든 차량의 번호를 적어 두었다는 점이다.
뒷정리를 위해 2명의 경호원을 남기고서 다른 3명의 경호원들은 재빨리 8인승 차량에 탑승해 발 빠르게 차를 추적했다. 뒤를 쫓는 와중에, 경호원들 중 리더인 남자가 저희들 업체로 전화를 걸었다.
“일곱 명의 괴한을 제압했고, 지금 가택에 잡아 둔 상태다. 지원 보내서 처리해. 그리고 지금 부르는 차량 번호 조회하고, 바로 두 개 팀 붙여서 추적 시작해. 납치 사건이다.”
뒤늦게 뛰쳐나온 경관 2명도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업체에 보고한 리더는 운전석의 남자에게 상황을 물었다. 대로변으로 나와 교묘하게 운전을 하는 통에 도통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이대로는 놓칠지도 몰랐다.
마침 진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으니, 그가 곧바로 상황을 묻는다.
“다른 놈들은 잡았지만 두 명의 외국인이 안에 계시던 분을 납치해 도주 중입니다. 지금 뒤쫓는 중입니다.”
건너편에서 진환이 거세게 화를 내며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만도 했다. 눈앞에서 정작 중요한 이들을 놓친 꼴이니.
진환이 쫓고 있는 차량 번호를 내놓으라 하기에, 정중하게 그 번호와 차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지금 그 차 뒤라고요?”
어떻게 딱 그 차 뒤에 붙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한 대라도 그 차를 붙들고 있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그대로 따라가세요! 저희도 놓치지 않고 따라붙겠습니다! 사장님 차종과 번호도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진환의 차종과 번호까지 입수한 리더는 다시 업체 사무실로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진환이 그 차량의 뒤에 따라붙을 수 있었던 건, 반쯤은 우연이었다.
진환은 제 아버지에게 실종된 하진을 찾는 데에 힘을 보태어 달라 말했다. 이에 자초지종을 묻는 그에게, 저번의 납치 미수 사건과 관련된 일이라며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의 응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지난번의 납치 미수 사건이 무려 진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친 일이었던지라, 아버지 된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 그 ‘사랑하는 사람’이 진환의 집에 있다기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벌써부터 진환의 집에 발을 들일 정도라는 생각에 잔뜩 흥분한 것도 한몫 단단히 했다.
그렇게 경찰청장 이영환은 제 아들이 부탁하지도 않았음에도 그의 집 근처 길거리 CCTV를 통해 찍은 3대의 차량 사진을 보냈다. 짙게 선팅 된 같은 차종의 차량 3대는 진환이 보기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사진상의 차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의 자택이 있는 골목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골목에서 급하게 뛰쳐나오는 차량이 있었다. 짙은 선팅 때문에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그 검은 세단은, 분명 CCTV에 잡힌 그 차량들 중 하나였다.
불길한 마음에 곧바로 그 차에 따라붙으며 한 손으로는 차량 사진에 시선을 두었다. 아무리 봐도 같은 차량이었다. 하지만 길거리 CCTV로 찍힌 사진이다 보니 차량 번호가 선명하지 않았다.
진환은 이미 도착했을 경호업체 리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명을 놓쳤고, 그들이 은율을 납치해 갔다는 말에 분통이 터졌다. 그러다 혹시 하는 생각에 그 차량 번호를 불러 보라 했더니, 무려 자신이 쫓고 있는 차량과 동일한 게 아닌가.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진환이 이를 악물고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 하루 만에 난생처음 해 본 속도위반을 몇 번이나 해 대는지 모르겠지만, 은율을 되찾는 게 가장 시급했다.
진환은 빠르게 달리는 차에 바짝 따라붙어 그 옆 차선으로 차를 옮겼다. 선팅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영화에서 흔히 쓰는 방법으로 제 차를 들이받든 그 앞을 차로 막든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얼마든 다쳐도 상관없지만, 충돌로 인해 은율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애가 타서 이를 갈던 진환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 화면을 확인하니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진환은 휴대폰을 거치대에 단단히 꽂아 두고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를 켰다.
-진환아! 지금 어디냐?
아버지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애가 납치당해서 지금 바짝 쫓는 중입니다.”
-그래, 절대 섣불리 도발하지는 마. 자연스럽게 쫓기만 해. 지금 네 휴대폰을 위치 추적하고 있으니 곧 그쪽으로 경찰들이 갈 거다.
영환이 평소와 달리 진지한 톤으로 진환을 다독였다.
-조급해하면 안 돼. 그 율이라는 애는 무사히 구출될 거야.
“……예, 아버지.”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진환은 아버지가 보냈다던 경찰들이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차를 쫓았다.
선팅된 차 안에서 차를 몰던 백인 남자가 사이드미러를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남자 혼자 탄 흰 차량 한 대가 자꾸만 따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잭. 밖의 흰 차, 어떻게 생각해?}
뒷자리의 흑인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제 왼쪽 옆자리에 은율을 앉히고 그 몸을 제게 기대게 한 후 어깨를 꽉 붙들어 안고 있었다. 흑인 남자가 창밖을 힐끔 보았다.
{골목 나올 때부터 보이던 차 같은데. 이 정도 올 때까지 붙어 있다는 건 역시 알고 따라온 것 아닌가?}
{역시 그렇지? 어떻게 할까?}
{시끄럽게 만들지 말자. 그냥 밟아.}
흑인 남자의 말에 백인 남자가 힘껏 액셀을 밟았다. 차량이 한층 빠르게 주행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흔들거리는 은율의 몸을 흑인 남자가 두 팔로 붙들었다. 그러다 얌전히 기절해 있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마성의 외모로는 세상에 적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유일하게 한 사람 있나.’
먼발치에서 보았던 짙은 회색 머리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서릿발처럼 차가운 회색 눈동자까지 떠올리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게 호리호리한 몸으로 수많은 장정들을 맨손으로 때려눕히던 모습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 위로 그 남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차가 코너를 돌며 몸이 옆으로 홱 쏠렸다. 흑인 남자는 한 손으로는 문가를, 한 손으로는 은율의 어깨를 둘러 안아 꽉 붙들었다. 창밖을 보니 흰 차량은 아직도 따라붙고 있었다. 역시나 추적하고 있는 거다.
백인 남자가 한 손으로 열심히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이에 맞춰 그들이 탄 차는 다른 차들 사이사이를 빠르게 누볐다.
흑인 남자가 질기게 따라붙는 흰 차량을 보며 혀를 찼다.
{정 안 되면 중간에 박아서 떨궈 버려.}
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그러자 운전석의 백인 남자가 아닌, 그의 팔에 안겨 있던 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무서운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흑인 남자가 놀라서 눈을 돌리자,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이 보였다. 그 주먹은 정확히 흑인 남자의 높다란 콧대를 가격했다. 선글라스가 날아가고, 코에서 곧바로 피가 터졌다. 근거리였음에도 그 주먹의 힘은 상당한 것이었다.
{크읏!}
주먹을 맞은 탓에 그의 팔이 떨어져 나가자, 은율은 여태 제 어깨를 둘러 안고 있던 팔의 안쪽을 제 팔꿈치로 가격했다. 뾰족한 팔꿈치에 찍힌 그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은율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코피를 쏟아 내는 흑인 남자의 아래턱에 주먹을 쳐올렸다.
{컥!}
흑인 남자의 고개가 젖혀지며 짧게 비명을 토했다. 턱을 제대로 맞아서인지, 비틀거리던 흑은 남자가 반대쪽 창가에 등을 기댄 채 머리를 내저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다시금 주먹을 휘두르자, 아예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늘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백인 남자가 경악했다.
{너! 어떻게!}
앞좌석의 백인 남자가 놀란 음성을 토하며 백미러를 노려보았다.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친 은율이 왼팔로 그의 목을 좌석 등받이의 목 부분과 함께 감아쥐었다. 그러고선 오른손을 쭉 내뻗어 운전대를 잡았다. 그가 놀란 눈의 백인 남자에게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수면제와는 친한 사이라서요.}
수시로 먹던 수면제의 내성에 새삼 감사하게 되었다.
은율은 백인 남자의 목을 꽉 감아쥔 채로 핸들을 움직여 바로 앞 골목으로 쑥 들어갔다. 복잡한 대로변과 달리 한적한 골목에는 오가는 차의 수가 굉장히 적었다.
백인 남자는 은율의 팔을 풀려 했지만, 한 팔이 부러진 탓에 그도 쉽지 않았다. 그는 팔을 풀려는 것을 멈추고서 보조석 아래쪽의 글로브 박스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어렵사리 박스를 열고 그 안을 뒤적거리던 그가 뭔가를 꺼내 들고는 제 목을 감은 은율의 팔뚝에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흡!”
은율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췄다. 전신에 찌릿거리는 통증이 퍼지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율은 통증이 뇌까지 건드리는 기분을 느끼며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직전에 백인 남자가 차를 꺾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스턴건을 치우고 운전대를 잡았다. 남자의 목을 휘감았던 팔이 거둬지고, 은율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백인 남자가 콜록거리며 스턴건을 제 무릎에 올리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잭! 정신 차려!}
백인 남자가 기절한 흑인 남자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은율은 전신이 떨리고 저리는 것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스턴건이 이렇게 아픈 건 줄은 처음 알았다. 조금만 더 당했더라면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은율이 좌석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추스르려 할 때, 기절했던 흑인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근육 가득한 팔을 뻗어 은율의 두 팔을 한 손에 잡았다. 그러고선 한 손을 백인 남자에게로 내뻗었다.
{스턴건 내놔. 아예 제대로 기절시켜 버리게.}
백인 남자가 순순히 그에게 스턴건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본 은율이 움찔했다. 흑인 남자가 검은색 스턴건을 은율에게 찔러 넣으려 했다.
그 순간, 백인 남자가 핸들을 홱 꺾었다. 그 탓에 흑인 남자의 손에서 스턴건이 떨어져 차 바닥을 뒹굴었다.
{뭐야!}
{경찰이 따라붙었어!}
백인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흑인 남자가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옆 골목에서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경찰차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계속 뒤를 쫓던 흰 차량과 그 뒤로도 얼핏 경찰차가 보였다.
{왜 벌써?!}
대응이 너무 빨랐다. 경호업체 사람들과 맞닥뜨린 지 고작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몇 대의 경찰차가 따라붙다니.
당황하는 흑인 남자의 손에 두 손을 붙잡힌 은율은 창밖의 모습과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흑인 남자가 혀를 차며 한 손으로 차 바닥의 스턴건을 집어 들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은율은 그때를 노려 얼른 몸을 돌렸다. 그 상태로 오른쪽 다리는 좌석에 눕혀 몸을 지탱했고, 왼쪽 다리는 구부려서 무릎으로 흑인 남자의 옆얼굴을 가격했다.
{큭!}
관자놀이를 제대로 맞은 흑인 남자가 차 문에 쿵 부딪쳤다. 은율은 제 두 손목을 잡은 커다란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흑인 남자의 손을 떨쳐 내고는 그대로 남자의 관자놀이에 주먹을 날렸다. 몸을 세우려던 남자가 다시금 차 문에 부딪혔다.
은율은 그 틈에 얼른 바닥의 스턴건을 주워 들었다. 스위치의 위치를 확인한 은율은 그것을 가차 없이 흑인 남자의 가슴팍에 대고는 스위치를 켰다.
{커으윽!}
흑인 남자가 격렬히 몸을 떨며 눈을 홉떴다. 이내 그의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보며 스턴건의 스위치를 끄자, 흑인 남자의 몸이 차 문에 엉성히 기댄 채 늘어졌다.
은율은 처음 써 보는 스턴건에 긴장하면서도, 운전석의 백인 남자의 목에 그것을 대었다. 스위치를 켜자,
{크악!}
역시나 짧게 비명을 지르고는 곧 기절한다. 은율은 새삼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스턴건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순수하게 감탄하고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은율은 기절한 백인 남자 대신 한 팔을 뻗어 운전대를 잡았다. 그 상태로 백인 남자의 다리를 벌리게 해서 그 사이로 어렵사리 들어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지척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이내 골목 한가운데에 멈춰선 차 주위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은율은 이제 끝났다는 느낌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스턴건을 보조석에 던지고는 그대로 운전석 문을 열었다.
포위한 채 차를 대어 놓고 차 밖으로 나온 경찰들은 운전석 문이 열리자마자 잔뜩 긴장했다. 혹시라도 인질을 붙잡고 협박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저마다 손에 테이저건을 들어 겨누며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운전석에서 내린 것은 맨발에 편한 셔츠, 반바지 차림의 늘씬한 청년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지쳐 보이는 안색을 한 청년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 하나로도 긴장하던 이들이 저마다 넋을 놓았다.
“안에 납치범들이 기절해 있습니다. 깨어나기 전에 수갑이라도 채워 놓으셔야 할 것 같은데…….”
경찰들은 경악했다. 납치범들을 제 손으로 때려잡고 차까지 직접 멈춰 세우는 피해자라니.
경찰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차량으로 점점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보다 빠르게 달려와 은율에게 손을 내뻗은 것은 흰 차량에서 뛰쳐나온 진환이었다.
“율아!”
한달음에 달려온 진환이 은율을 꽉 끌어안았다. 폭 안긴 은율이 깜짝 놀란 눈을 하다가 작게 웃었다.
“따라붙는 차가 있는 건 알았지만 설마 형일 줄은 몰랐습니다.”
태연하게 말하며 진환의 등을 토닥였다. 은율의 목에 얼굴을 묻은 그가 잘게 떨었다.
은율은 진환의 떨림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찰들이 저마다 당황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찰들만큼이나 맹렬히 추격하던 차의 주인이 설마하니 톱스타 이진환이라니, 놀랄 노 자다. 그런 그가 납치될 뻔했던 청년을 끌어안고 놔주질 않으니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은율이 진환의 어깨를 붙잡아 떼어 냈다. 잔뜩 복잡해진 얼굴의 진환이 보였다. 그 얼굴에는 분노와 슬픔, 무력함, 자책까지 뒤섞여 있었다. 은율은 처음 보는 표정의 진환에게 작게 속삭였다.
“일단 차로 가요.”
진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율을 단숨에 안아 들었다.
“자, 잠깐만요!”
“맨발이잖아. 발 다치면 어떻게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데에서……!”
진환은 은율의 당황한 얼굴도 아랑곳하지 않고는 그대로 그를 안아 들어 제 차로 데려갔다.
보조석에 은율을 앉힌 진환은 뒷좌석 가운데의 콘솔 박스를 열어 담요를 한 장 꺼냈다. 그것을 펼쳐 은율의 맨다리 위에 세심히 덮어 주었다. 혹시 담요 때문에 더울까 봐 차의 에어컨도 켜고 바람 세기와 방향까지 조정해 주었다.
그렇게 하고는 은율의 손을 꼭 잡고서 작은 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은율은 웃는 얼굴로 형 탓이 아니라며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진환은 은율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곤 보조석의 문을 닫아 주었다. 그대로 납치 차량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땐, 경찰들이 벌써 그 안에서 두 외국인을 끄집어내 연행하고 있었다.
수갑을 채우고서 두 외국인을 차 밖으로 빼낸 경찰들은 각각 2명씩 붙어 팔을 붙든 채 경찰차로 향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걷던 흑인 남자의 앞을 진환이 막아섰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진환이 영어로 물었다. 흑인 남자가 진환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글쎄.}
{누가 시켰어?}
{노코멘트.}
진환이 흑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럼 서하진은 왜 납치했지?}
진환은 차를 쫓는 도중, 제 아버지로부터 하진에 관한 연락을 받았다. 하진의 휴대폰을 위치 추적해 본 결과, 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길 한 가운데에 떡하니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차밖에 지나다닐 수 없는 대로에 휴대폰이라니, 누군가 흘렸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고의적인 거였다.
하진이 탄 차량은 CCTV가 거의 없는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그 위치를 더 이상 캐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찍혔던 부분으로 봐선 고급스러운 검정 차량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진환은 그가 국내에 입국한 케이의 뒤를 쫓은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들켜서 납치되었을 거라 추측했다.
은율을 납치하려던 이 상황으로 봐선, 그들이 하진을 납치한 것도 어쩌면 계획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환의 예상과 달리, 흑인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납치 전문이 아니야. 아무나 납치하지 않는다고.}
진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들이 납치한 게 아니라고?}
{우린 저 청년 말고는 안중에도 없어.}
뭔가 꼬인 느낌이 났다.
* * *
폐건물의 높다란 꼭대기 층에는 바람이 꽤 세게 불어 댔다. 짓다 만 건물이라 콘크리트 기둥과 바닥, 천장 정도만 메워져 있을 뿐, 사방이 휑했다.
그 휑한 층의 한가운데, 2명의 남자가 철제 의자에 앉은 채 결박되어 있었다. 그들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묶인 상태라 완전히 고개를 돌려 볼 순 없었지만, 그 수가 여럿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진은 뒤로 묶인 손을 연신 흔들며 잡아 빼 보고 있었지만, 와이어로 어찌나 단단히 감아 놨는지 도통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거 억지로 풀려고 하면 더 아파. 가만히 있어.”
유창한 한국어에 멈칫했다. 어느새 바로 등 뒤에 다가온 짙은 회색 머리의 외국인 남자가 나른한 눈으로 하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엔 검은 정장 차림의 건장한 외국인들이 여럿 서 있었다.
외국인 남자는 하진의 옆을 지나 그 앞에 섰다. 남자는 하진이 조수로 붙어 따라다니던 중년의 남자 기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장 입은 남자들 중 한 명이 얼른 의자를 가져와 외국인 남자의 뒤에 조심스레 놓고 사라졌다. 회색 머리의 남자는 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자연스레 다리를 꼬았다. 기다란 다리가 우아하게 꼬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금속 담배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무니, 그의 뒤에 포진해 선 남자들 중 스킨헤드의 남자가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불이 붙은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후 느릿하게 연기를 뱉어냈다. 그 모습을 의자에 묶인 두 남자가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를 기자에게 두었다.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렇게 쫓아다녀서 뭘 어떻게 하려고?”
이미 안면이 있는 듯, 나름 친근하게 물어온다. 기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기를 든 정장남들 중 한 명이 그 사진들을 확인하고는 스킨헤드의 남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들은 스킨헤드의 남자는 회색 머리의 남자에게 몸을 숙여 속삭였다.
{며칠 전에 중국에서 리명과 거래하던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픽 웃었다.
{별걸 다 찍었네. 지워, 깔끔하게.}
{예, 보스.}
스킨헤드의 남자가 몸을 세워 카메라를 든 남자에게 눈짓하자, 그가 카메라를 조작해 안의 사진들을 전부 삭제했다. 그 모습을 본 기자가 초조한 낯을 했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바닥에 재를 떨구며 물었다.
“내 뒤를 캐고 다니는 이유라도 있나?”
기자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말을 아꼈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매력적인 얼굴로 싱긋 웃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한국에 발을 들인 이상 당신이 더 귀찮게 쫓아다닐 것은 뻔한 일이니 미리 처리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평온한 어투였지만, 그의 회색 눈동자는 너무도 날카로웠다. 기자가 움찔하며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때, 하진의 사진기를 들고 안의 사진을 차례차례 넘겨 보던 남자 중 한 명이 그것을 스킨헤드의 남자에게 건네었다. 사진을 들여다본 그가 눈을 크게 뜨며 회색 머리의 남자에게 얼른 사진기 속 사진을 보여 주었다.
{보스, 이것을…….}
사진을 본 회색 머리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 보았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이내 의아한 얼굴로 하진을 바라본다. 그의 서슬 퍼런 안광에 하진이 움찔했다.
“너…… 뭐야?”
회색 머리의 남자가 한 손에 사진기를 든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하진에게 다가갔다. 그가 사진기 속 사진을 하진에게 보여 주며 눈을 부라렸다.
“설마 네가 경비견이야?”
하진은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이내 이해했다. 그가 하진에게 들이민 사진은 과거, 지희의 학교 근처 카페에서 찍었던 은율의 맨얼굴 사진이었다.
“은율이 경비견은 배우 이진환이라고 들었는데.”
하진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리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의 입에서 은율의 이름이 나오자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회색 머리의 남자가 묘한 얼굴을 했다.
“혹시 어릴 때 날 만난 적이 있나?”
낯이 익지만 역시나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진은 그의 물음에 결국 씹어 뱉듯 말했다.
“만났지. 당신이 아버지와 형을 보러 집에 왔던 적이 있었으니까.”
회색 머리의 남자가 하진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한 손을 들어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이놈 풀어 줘. 상처 안 나게 조심하고.}
그렇게 말하고는 스킨헤드의 남자에게 손을 까딱했다. 스킨헤드의 남자가 의자를 가져와 그가 선 자리 바로 뒤에 배치해 주었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하진과 마주한 채 의자에 앉았다. 남자 한 명이 하진에게 붙어 그의 몸을 구속한 와이어를 예리한 나이프로 끊어 풀어주었다.
빠르게 몸의 자유를 되찾은 하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는 제 앞에 의자를 두고 앉은 채 사진기 속 은율의 사진 몇 장을 연신 돌려보는 회색 머리의 남자를 경계심 어린 얼굴로 노려보았다.
“이름이 서하진, 맞지?”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그의 이름이 서하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은율의 두 동생 중 남동생의 이름이 분명 그것이었으니까.
“오랜만이네. 많이 컸어. 처음 봤을 때가…… 다섯 살쯤 되었나. 설마하니 그 꼬마가 이리도 장성했을 줄이야.”
음성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다. 하진은 의아했지만,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당신은 별로 안 늙었네.”
얼핏 보면 3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징그러울 정도로 늙지 않는 남자다.
“칭찬 고맙군. 동안이란 소리 많이 들어.”
아주 태연하게 너스레까지 떨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아련한 미소까지 감돌고 있었다.
하진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케이, 칼바노아 알리예프는 러시아의 가장 큰 마피아 패밀리의 보스로서 그곳의 음지를 장악해 쥐락펴락하는 인물이었다. 그도 모자라 8년 전부터 돌연 양지로 나오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설립한 ‘케이트레이딩’은 급속도로 몸집을 불리더니, 이제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보이는 기업체가 되었다. 더불어 칼바노아 알리예프도 그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하진에게 있어 눈앞의 남자는 단순히 기업인의 탈을 쓴 마피아 보스만은 아니었다.
8년 전, 은율을 납치하려다 사고를 일으켜 부모님을 죽게 만든 남자였다. 은율에게 괴로운 트라우마를 안겨 준 것도 그이다. 그런 남자가 지금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추억이나 운운하며 제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냐며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진은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왜 아직도 형을 쫓는 거야?”
그는 하진의 사진기 속 은율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하진을 바라보았다.
“형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당신 때문에 형도 그때 죽을 뻔했어! 8년 전 사고 때문에 아직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단 말이야!”
하진이 분을 못 이겨 씩씩댔다.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던 은율을 떠올리니 속에서 천불이 나고 목구멍으로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칼바노아 알리예프는 깊이 잠긴 회색 눈동자로 하진의 흥분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뭔가 잘못 알고 있군.”
그가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스킨헤드의 남자가 그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그가 다리를 꼬고 두 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올렸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우수에 젖어 빛났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납치까지 해 가면서 위험에 처하게 할 이유가 있나?”
“……뭐?”
하진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
아들?
은율이 그의 아들이라고?
쉬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부드러운 회색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 짚었어. 그날, 은율이를 납치하려 했던 건 내가 아니야.”
* * *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남자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러시아어로 버럭 소리를 쳤다.
{그러니까 왜 빼낼 수가 없냐고! 경찰서장과 얘기돼 있었잖아?!}
전화 상대가 쩔쩔매며 같은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그게…… 이번 일에 경찰청장이 직접 개입해서…….}
{뭐?! 아니, 경찰청장이 왜?!}
그게 정말이라면 뒷돈으로 제 부하들을 빼내는 것은 무리에 가깝다. 하지만 경찰청장처럼 높은 직급을 가진 자가 어째서 이런 일반인 납치극에 손을 대는 것인가?
{아직 저희도 거기까진……. 다만 경찰청장이 제대로 들고 일어난 거로 봐서는 예사 관계가 아닌가 봅니다.}
상대의 말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라 말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남자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납치하려 했던 타깃은 예상보다 반항이 심했다. 아니, 반항이 심한 정도가 아니라 무슨 특전사라도 되는 줄 알았다.
타깃을 차에 태워 납치하던 백인 남자의 중간보고가 아니었다면 쉬이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대일로는 흑인 남자 잭마저 상대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방심한 틈을 타 허를 찌르지 않았다면 차에 태우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고를 받을 때도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보낸 9명 중 가장 실력 있는 두 사람이 타깃을 차에 태운 채 이동하다 돌연 덜미를 잡혔다. 타깃은 무사히 구출되고, 제 부하들은 모조리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만일을 대비해 유착 관계를 가져온 경찰서장은 하필 도움도 되질 않았다. 설마하니 경찰청장이 타깃을 비호하고 들 줄이야.
‘분명 그놈과 그놈 친인척들 누구도 경찰 관계자와 접점이 있는 사람은 없었는데…….’
타깃의 친인척에 관해선 ‘그 여자’에게 이미 일찌감치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도 호적상으로는 친인척이었기 때문에 주변인에 대해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내용의 신뢰도도 꽤 높았다.
하지만 그녀의 조사만을 믿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일을 벌이기 한 달 전쯤, 일부러 한국의 흥신소 직원을 이용해 기대 없이 납치 시도를 해 보았다. 멀리서 그 상황을 녹화하고 돌아온 부하 덕분에 그의 무술 실력이 꽤 높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톱배우 하나가 그를 상당히 싸고돈다는 것도.
당시에는 경찰들이 해당 사건을 깊이 파고드는 것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납치를 당할 뻔한 청년과 톱배우가 친분 있는 사이이니 당연히 일이 커지지 않도록 발 빠르게 수사를 해야 했을 것이다. 자칫 냄새를 맡은 매스컴에서 들고 일어나 버리면 경찰의 느림보 수사가 어쩌고 하며 난리를 피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이후 톱배우 이진환이 타깃을 제 집에 들이면서 예상보다 일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의 집을 알아내어 보안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거기다 도어록은 죄다 지문인식이나 홍채인식 같은 복잡한 것들인지라, 해외의 실력 있는 해커에게 꽤 값을 치른 후에야 그것을 뚫을 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한 후, 보스의 자리에 앉은 그 망할 놈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일을 해결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보다 빨리 입국했고,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그대로 납치를 시도했다. 납치만 성공했다면 그놈이 한국에 있든 없든 열쇠는 이쪽이 쥐는 상황이 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실패하게 될 줄이야.
‘혹시 그 배우가 손을 쓴 건가? 하지만 아무리 톱배우라도 경찰청장을 그리 단시간에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당시 SNS에 경찰차들이 검은 차량을 쫓는 추격전 사진이 올라왔다가 금세 삭제되었지만, 제 부하들의 빠른 파악으로 인해 그것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사진으로 봐선, 제 부하들의 차량을 쫓는 경찰차가 한두 대가 아니었다. 그만한 수의 경찰이 그런 단시간에 한데 모여 추격전을 벌인다? 이건 어딜 봐도 상당한 윗선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그 배우에 대해서도 더 조사해 봤어야 했는데.’
단순히 일 때문에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배우와 타깃과의 관계엔 뭔가가 더 있었다.
어둑한 사무실에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찰나, 밖에서 여자의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지만 힘이 실린 걸음으로 봐선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중년 여인이 앙칼진 목소리를 터뜨렸다.
“어떻게 된 거야?!”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매너가 없군.”
약간은 발음이 어색한 한국어를 내뱉었다.
“지금 매너 타령할 때야?! 일이 다 꼬였는데?!”
중년의 여인이 고급스러운 클러치백을 한 손에 든 채 기세 좋게 다가왔다. 그녀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진갈색 머리의 외국인 남자를 치켜뜬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그놈이 있어야 칼바노아와 거래가 될 거 아냐?!”
“시끄러우니까 목소리 좀 낮춰. 그리고 약속대로 어떻게든 잡아올 테니까 진정 좀 하지.”
“진정하게 생겼어?! 이미 놈은 한국에 있단 말이야! 서은율과 만나기 전에 수를 써야지!”
은율의 이모, 정가영은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와 그녀가 손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케이라고 부르던 칼바노아 알리예프의 파멸.
그것을 통해 눈앞의 남자는 오랜 기간 동안 염원하던 보스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고, 자신은 한선무역을 되찾을 것이다. 더불어 나영의 두 자식을 은율과 완전히 떨어뜨려 자신이 직접 거두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은율이 필요했다.
가영은 칼바노아 알리예프가 은율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은율에게도, 하진과 지희에게도 함구했다.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저 광적일 정도로 은율에게 집착하는 스토커라 일렀다.
칼바노아 알리예프는 러시아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그런 그와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게 은율이었고, 쿼터이기 때문인지 그의 외모는 확실히 독보적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한국인으로만 보였다. 그래서 그 누구도 러시아인처럼 보이는 칼바노아와 은율이 부자지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처음엔 칼바노아의 위험성을 인지시키고 하진과 지희를 양자로 들이기 위해서 그 둘의 부자지간 사실을 함구했던 것이다. 그런 위험한 자가 은율을 노리고 있다면 가장 가까이 있는 하진과 지희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한선무역이 강제로 인수합병을 당하고 은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조차도 다른 이유로 칼바노아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가영은 강제 인수합병으로 인해 칼바노아에게 온갖 악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쌓인 상태였다. 이 화살은 은율에게까지 돌아갔다. 그가 칼바노아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를 원망하게끔 만들고 싶었다. 그 상태로 칼바노아에게 내던져진다면 그의 얼굴이 아주 볼만하겠지.
오래도록 지켜 온 회사를 한순간에 빼앗기고 제 자리가 사라졌다. 그 증오는 칼바노아와 은율에게로 향했다.
칼바노아와 은율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제 동생을 죽였고, 제 피 같은 회사를 빼앗아 갔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탄하던 그때, 몇 년 전부터 접촉을 해 오던 인물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칼바노아가 보스가 되기 전까지 가장 유력한 차기 보스로 지목된 자였다. 그도 그럴 게, 선대 보스는 그의 아버지였으니까.
보스 쟁탈전에서 패배하고 칼바노아에 의해 눈 한쪽이 도려내진 남자.
그 후 숨어서 칼바노아에 대한 증오를 차곡차곡 쌓아 온 남자.
그것이 눈앞에 있는 세르게이 모로조프였다.
세르게이는 가영을 마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이 좀 도와야겠어.”
가영이 팔짱을 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르게이가 속으로 씩 웃었다.
멍청한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