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ake. 2 / Remembrance (9/33)

Take. 2 / Remembrance

{헙!}

한 남자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뒤로 훅 날아갔다. 그 날아가는 몸에 부딪힌 다른 남자가 함께 쓰러지며 신음을 토했다. 그들을 지나쳐 달려 나간 다른 남자가 상대의 깔끔한 뒤돌려차기에 얼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한 사람을 에워싼 채 주춤거리며, 검은 정장의 외국인 남자들이 저마다 식은땀을 흘렸다. 나름 육탄전에 소질 있다는 장정 열다섯이 이제 막 약관을 넘긴 청년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저마다 한두 군데씩 부상을 입은 데 반해, 상대는 숨을 조금 거칠게 쉴 뿐, 너무도 멀쩡했다. 괴물이 따로 없었다.

{거기까지 해라.}

나이 든 노인의 목소리에 장정들이 일제히 자세를 풀었다. 70세는 넘었을 법한 자글자글한 주름의 백발노인이 뒷짐을 지며 걸어왔다. 그의 뒤로 검은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외국인 남자 10명이 따라왔다. 청년과 대치하던 장정들은 그 자리에서 노인을 향해 일제히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노인이 장정들에게 둘러싸인 어두운 회색 머리의 청년을 바라보며 웃었다.

{실력이 아주 좋구나.}

{감사합니다, 보스.}

청년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살짝 웃었다. 노인이 청년을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보았다.

얼굴은 곱게 자란 왕자님처럼 예쁘장하고 몸은 힘 하나 못 쓸 것처럼 마른 주제에, 제 부하들을 간단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라니. 이제 막 20세가 되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타고난 무위에 실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노인이 평소 딱딱하고 엄한 모습과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그래, 아나스타샤는 건강하냐?}

아나스타샤는 노인이 유일하게 아끼는 친우의 딸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청년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돌아가셨습니다. 정확히는…… 살해당하셨습니다.}

{뭐?!}

노인이 깜짝 놀랐다. 아나스타샤는 친우의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살해당했다니.

하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과거, 제 조직의 행동대장으로 움직였던 남자였다. 그가 죽은 지금, 원한의 화살이 딸에게 향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노인이 어두운 얼굴을 했다.

{……조만간 자세히 이야기해 주려무나.}

{예, 보스.}

노인이 손을 뻗어 청년의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말라보이기만 한데, 나름 탄탄한 근육이 손에 감긴다.

{실력이 뛰어난데, 따로 수련을 한 것이냐?}

청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있는 동안 많은 무술을 배웠습니다.}

그의 아버지 강천우는 한국의 특전사령관 자리에 있었던 남자다. 지병 때문에 지금은 죽고 없지만, 그가 현역일 때는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직접 무술을 배웠으니, 실력이 이리 좋은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총은 잡아 본 적 있느냐?}

노인의 물음에 청년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적에 일찌감치 전수해 주셨죠. 할아버지께서 제게 명사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사격 실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늙었다고는 하지만 마피아 보스를 눈앞에 두고도 이리 당당히 말할 수 있다니, 그 배짱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그래. 이반 그 친구가 그리 말했다면 틀림없겠지. 그는 정말 명사수니까.}

괜히 행동대장으로 있던 자가 아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사람은 죽여 본 적이 있느냐?}

짐짓 엄한 눈으로 물으니, 청년이 너무도 태연하게 웃었다.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 필요하다면 죽일 것이고,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인이 씩 웃었다.

{좋은 대답이로구나.}

노인이 청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노인치고는 큰 키였지만, 그래도 180이 훌쩍 넘는 청년의 키에는 미치지 못해 그 팔이 사선으로 올라갔다.

{앞으로 네게 기대해 보겠다, 칼바노아. 아니, 칼.}

{감사합니다, 보스. 기대에 부응해 보이겠습니다.}

칼이 진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기세 좋게 대답했다.

*  *  *

-너 미쳤어?!

칼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얼른 전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렸다.

-기어코 마피아가 되었다고?! 진짜 미친 거 아냐?!

칼이 침대에 누운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국어로 상대에게 대답했다.

“미치지 않았고 멀쩡해. 알잖아,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내가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어.”

-왜 방법이 없어?! 차라리 한국으로 와!

“누굴 믿고 한국에 가? 내가 유일하게 믿을 만한 잘나신 분은 특전사라서 정작 해외로 돌고 도는데.”

상대가 말문이 막힌 듯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달래듯 말했다.

-칼, 아무리 그래도 마피아는 너무 위험해. 그러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면 우리 부대가 진압에 동원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설마 형 부대가 여기까지 오겠어? 그리고 여기 보스는 그런 분쟁 일으킬 만한 사람이 아니야.”

이야기만 듣고 실제로 만나 본 건 처음이었지만, 그는 상당히 인자한 노인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그리 인자하게 구는 데에는 모친과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테지만.

-갈 수도 있어, 인마. 지금 당장은 아닌데, 어쩌면 몇 달 뒤에 정말 러시아로 파견 갈지도 몰라.

그 말에 칼은 침대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 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있는 러시아에선 분쟁 요소에 대해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있는 특전사 부대가 러시아까지 파견될지도 모른다는 건, 뭔가 단단히 문제가 있다는 의미였다.

-저번에 K733편 하이잭 당해서 그 안의 사람들 죄다 실종된 건 알지?

“알지. 한 세 달 전쯤 있었던 큰 사건이잖아.”

하이잭을 당하긴 했는데, 정작 비행기는 숲에 버려지고 그 승객들은 전부 모종의 이동 수단을 통해 실종되어 버린 미스터리한 사건이었다. 이후 그 승객들은 단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배우 한예나가 며칠 전 러시아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칼이 눈을 크게 떴다.

한예나라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여배우가 아니던가. 청초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가녀린 몸매, 거기다 착한 인성과 신이 내린 연기력까지 겸비한 덕에 어딜 가든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 유명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하이잭 사건은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러시아에 나타났다고?

-흐린 사진 한 장과 확실치 않은 증언이긴 했지만, 그 사진 속 여자가 한예나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오고 있어. 만약 정말 한예나라면, 하이잭 사건의 범인들이 러시아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거기다 테러범일 가능성도 있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그들이 파견될 수도 있다.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사람이자 하이잭 사건의 가장 중요 인물로 짚이는 여인이 한국의 유명 여배우이니까.

칼은 픽 웃었다.

“뭐…… 정말 그렇게 되면 오랜만에 얼굴 볼 수도 있겠네, 서유건 대위님.”

-좋냐?! 그런 일로 얼굴 보는 게?!

“그럼 형은 싫어? 그렇게라도 얼굴 보는 게?”

-……새끼.

싫다고는 안 하네.

칼은 작게 웃었다.

-통화 중에 죄송합니다. 급한 건으로 대위님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전화 건너편에서 당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은 그 목소리가 꽤 익숙하다고 느꼈다.

유건이 목소리 톤과 말투를 싹 바꾸며 여인에게 딱딱하게 대답했다.

-잠깐 대기하도록. 칼,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그래, 다음에 다시 걸게.”

칼은 유건이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귀에 댄 수화기를 전화기 본체에 내려놓았다. 침대 옆 협탁 한가운데에 자리한 전화기를 바라보며 칼이 침대에 다시 널브러졌다.

“한예나…….”

그가 머릿속을 뒤적이며 한예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정말 러시아에 있을까?

칼의 의문은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어느 날, 그가 몸담은 마피아 조직의 보스 알렉산드르 모로조프가 동맹을 맺은 다른 마피아의 보스 미하일 보그다노프와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 알렉이 칼을 크게 키우기 위해 항시 옆에 끼고 다닌 덕분에 이번 만남의 자리에 그도 동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은, 그 자리에 와 있는 한예나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겉으로만 봐선 하이잭을 당해 실종되었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청초하고 아름답던 외모는 빛바랜 흔적 하나 없이 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고, 값비싼 옷을 입은 채 미하일 뒤에 얌전히 서 있는 모습은 고급스러운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극진한 대우를 받는 귀부인. 그것이 한예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어두웠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칼은 두 보스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알게 모르게 그녀를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한예나가 맞았다. 그녀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칼은 고민했다. 유건의 말처럼 정말 한예나는 러시아에 있었다. 그것도 거대 마피아 보스의 수중에.

그 이유가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이 사실을 유건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유건이, 아니 유건의 상관들이 이를 알게 되면 그들을 러시아로 파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건의 부대는 일개 테러단체가 아닌 거대 마피아 조직에게 그 총구를 들이밀게 된다. 마피아 조직에게 잘못 손을 대었다간 유건과 그의 부대가 무사하지 못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칼은 그날 한예나를 보았던 것을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 버렸다.

며칠 후, 칼은 제 눈앞에 나타난 한예나를 보며 그대로 멈춰 섰다. 정확히는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기보다 우연히 맞닥뜨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요깃거리를 사기 위해 나온 칼은 갓 구운 바게트 빵 2개가 담긴 크라프트 봉지를 품에 든 채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앞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저와 부딪칠 뻔한 여인이 바로 한예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맑은 검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까?”

유리 인형처럼 가녀린 그녀가 혹여 크게 놀란 걸까 싶어 한국어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예나가 돌연 칼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선 최대한 힘을 내어 그를 끌며 시장 사람들 사이로 쏙 들어갔다.

칼은 한 손으로 빵 봉지를 단단히 쥐고 다른 한 손은 예나에게 붙들린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붙잡힌 손을 떨쳐 내기엔, 그녀의 가녀린 손이 혹여 부러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칼은 일단 그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 주기로 했다.

예나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이리저리 돌더니 갑자기 낡아빠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칼은 그녀의 손에 붙들린 채 그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건물에 들어간 예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이 신고 있던 굽 낮은 하이힐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계단으로 향했다. 칼의 손목을 단단히 잡은 채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칼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계단을 올라가다, 그 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깨달았다. 체력이 약한 건지 예나가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구부렸다.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칼이 돌연 제 품의 빵 봉지를 내밀었다. 예나가 숨을 몰아쉬며 빵 봉지와 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들고 있어요. 데려다줄 테니까.”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그녀가 빵 봉지를 받아 들었다. 칼은 그녀의 품에 봉지를 안겨 주고는 단숨에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예나가 놀라며 몸을 칼의 가슴팍에 밀착했다.

칼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낡은 빌라였던 만큼 층수는 높지 않았다. 4층에 다다르니 그 계단 끝에 웬 철문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 선 칼이 예나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예나가 바닥에 발을 디딘 채 칼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옥상에 올라오려던 거 맞죠?”

“……어떻게 알았어요?”

목소리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맑고 가느다란 목소리이면서도 그 음성이 귀에 쏙쏙 꽂혔다.

“들어오기 전에 건물 꼭대기를 보는 걸 봤어요.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걸 모르는 걸 보니 처음 방문한 건물인 것 같았고, 계단을 무작정 오르는 거로 봐선 아는 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죠.”

예나가 눈을 깜빡이다 칼에게 제가 들고 있던 빵 봉지를 폭 안겨 준다.

“외국인이면서 한국말 잘하네요.”

“아버지가 한국인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며 칼은 한 손으로 옥상 철문을 열었다. 자물쇠가 없는 문고리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자연스레 문이 열렸다.

서늘한 바람이 훅 끼쳐 왔다.

옥상은 물건 하나 없이 휑했다. 예나는 옥상 한가운데까지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정돈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려 했다. 칼이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아 만류하고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바닥에 펼쳐 주었다. 예나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매너 있네요.”

칼도 마주 웃어 주었다. 예나는 칼이 펼쳐 준 손수건에 엉덩이를 붙여 앉으며 두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칼이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은 채 빵 봉지에서 바게트를 하나 꺼내어 반으로 갈랐다. 그 반쪽을 예나에게 내밀었다.

“먹을래요?”

예나가 자신에게 내민 바게트를 받아 들었다. 약간 미지근해진 바게트를 곱디고운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예나가, 이제 막 제 입으로 빵을 가져가던 칼에게 당돌하게 물었다.

“생크림은 없어요?”

“난 단 거 못 먹어서 생크림 없어요. 못 먹겠으면 내놔요.”

칼이 바게트 끝을 문 채 오물거리며 빵을 회수하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예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보이며 얼른 빵을 입에 물었다.

“누가 못 먹겠대요? 줘 놓고 뺏으려는 게 어디 있어요, 치사하게.”

TV에서는 청초하고 여신 같기만 하더니, 이제 보니 제법 어린 소녀 같은 느낌의 여인이었다.

칼은 시원시원하게 빵을 베어 먹으며 예나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빵을 잡은 채 그 끝을 작은 입술로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이 마치 다람쥐나 햄스터 같았다.

예나가 입 속의 빵 조각을 꿀꺽 삼키며 눈을 굴렸다.

“안 물어봐요?”

“뭘 말입니까?”

예나가 곁눈질로 칼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다짜고짜 끌고 왔잖아요.”

“그냥 내 빵이 맛있어 보여서 그랬다고 믿고 싶은데, 물어봐 주길 원해요?”

싱긋 웃어 보이니 예나가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사람.”

“외간남자를 이런 곳으로 무작정 끌고 온 사람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예나가 작게 웃으며 빵을 베어 물었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싶었어요. 매일 답답했거든요.”

“호위라는 명목으로 감시당하고 있죠?”

빵 조각을 꿀꺽 삼킨 예나가 눈을 빛내며 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예나가 돌연 울상을 지었다.

“여기 갑자기 끌려와서는 말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고…….”

칼은 예나의 작은 어깨를 살짝 끌어안으며 토닥여 주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그녀의 사연에 대해 물었다.

조금 주저하던 예나는 한숨처럼 그간 겪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할리우드 영화 촬영에 대한 브리핑을 받기 위해 해외로 가던 중, 테러범들에 의해 비행기가 하이잭 당했다. 그 후 비행기를 숲에 내린 테러범들은 미리 준비해 둔 토굴로 승객들을 유도했다. 토굴 안에서도 길이 여러 갈래였는데, 예나와 그녀의 매니저 그리고 몇 명의 여인들은 다른 이들과 다른 길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녹초가 될 때까지 걸어서 도착한 곳은 러시아의 한 숲속이었다. 겨울이나 매한가지인 추위에 몸을 떨었지만 테러범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추위에 떠는 예나와 여인들을 데리고 숲속 산장으로 향했다.

통나무로 지어진 산장 안에는 후끈한 열기가 가득했다. 그 산장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던 게 바로 미하일 보그다노프였다. 그는 암암리에 외국 여인들을 성매매 도구로 이용해 꽤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미하일은 예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그는 부인이 있음에도 그녀를 제 연인으로 곁에 두고자 했고, 예나는 어렵사리 그의 말을 알아듣고 이를 승낙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다른 여인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예나의 간청으로 미하일은 그녀의 매니저인 젊은 여인까지 제 조직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곧 그녀는 예나의 족쇄이자 인질이 되었다. 몇 년간 동고동락해 온 친밀한 사이인 데다, 예나는 워낙 정이 많은 편이었다. 매니저가 미하일의 수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은 예나를 자신의 부인보다 더 아끼고 예뻐하며 언제나 곁에 두었다. 그러다 갇혀 지내기만 하던 예나가 시름시름 앓기도 하고 잘 웃지도 않자 선심을 베풀어 가끔 바깥 쇼핑을 허락해 주었다.

오늘도 그의 허락을 받고 쇼핑을 나온 참이었다. 시장에서 쇼핑을 하고 싶다고 보디랭귀지를 했더니 다행히 미하일의 부하들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한데, 시장이 이리 붐빌 줄은 그들도 몰랐던 것 같았다.

막상 시장에 들어서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이 먼저 예나를 놓쳐 버렸다. 기분 전환 삼아 시장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예나는 문득 그를 따라오던 이들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시장 안을 마음껏 내달렸다.

‘이건 내가 도망간 게 아니야. 그들이 시장 사람들 때문에 내 호위를 수행하지 못한 것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다 점차 걸음이 느려졌다. 이대로 대사관까지 도망가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랬다간 잡혀 있는 매니저를 구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에 대해서라면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예나였지만, 그녀가 있던 미하일의 마피아 조직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매니저가 그들에게 잡혀 있다고 한들 그 말을 믿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우울해진 얼굴로 모퉁이를 돌던 그때, 칼과 마주쳤다.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라 누구였는지 금세 알아보았다. 분명 미하일을 따라 나갔던 자리에서 본, 다른 마피아 조직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유창한 한국어로 괜찮냐고 물어 왔다. 순간 시야가 밝아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시장의 다른 이들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그 사람의 팔을 붙잡고는 다짜고짜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사람 없고 조용한 곳에 가서 그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지리도 아예 모르는 그녀로서는 무작정 떠오른 게 옥상이었다. 낡은 건물의 옥상은 자물쇠가 없지 않을까 싶어 적당한 건물로 들어온 거였다.

“……그 뒤엔 당신이랑 이렇게 빵을 먹고 있죠.”

예나가 구름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칼은 예나의 짧은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굴렸다. 그녀의 상황이 측은하긴 하지만 칼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말단직에 발을 들인 게 최근이니 말이다.

그것도 동맹 마피아 조직 보스의 애인에게.

‘내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칼이 얼마 남지 않은 빵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상태로 빵 봉지를 챙겨 일어나려 했다.

“그 보스가 당신을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옆에 두려고 하니 내가 함께 있으면 안 되겠네요.”

“예? 왜요?”

“내가 당신의 애인으로 오해받으면 서로 큰일 아닙니까?”

예나가 한 손으로 칼의 팔을 붙들었다.

“가지 마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나 이렇게 하소연한 거 당신이 처음이란 말이에요!”

“당신과 있다가 총 맞아 죽으면 내가 더 불쌍하지 않겠어요?”

칼이 제 팔을 붙잡은 예나의 손을 떼어 내었다.

“비록 동맹 중이라곤 하지만 엄연히 다른 마피아 조직 사람입니다. 내가 참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이렇게 같이 있어서 좋을 것도 없어요.”

무심한 눈으로 일부러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면서 예상해 보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내보일까.

화를 낼까? 아니면 울까?

하지만 그녀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이걸 줄게요!”

예나가 먹던 빵을 두 손으로 내밀며 당당하게 외쳤다.

“그러니까…… 뭐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늘어졌다. 예나가 씩 웃었다.

“유명 여배우 한예나가 먹던 빵이에요. 어디 가서 못 구하는 귀한 아이템이라고요.”

“내가 줬던 빵이잖아요?”

“하지만 먹던 건 나잖아요!”

당당하다 못해 당돌하다. 칼이 헛웃음을 보이며 예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결국 칼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아가씨네요.”

“기왕이면 볼수록 매력 있다고 해 줄래요?”

예나가 장난스럽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그녀의 손에서 빵을 받아 들고는 빵 봉지에 들어 있는 말끔한 바게트를 꺼내 그대로 건네주었다.

“그럼 이것도 그 유명 여배우가 먹던 빵으로 만들어 줄래요?”

안 그래도 배가 덜 찼던 예나는 눈꼬리를 휘며 그 빵을 받아 들었다.

“어쩌면 안 남을지도 몰라요.”

예나가 히죽 웃으며 새로운 빵을 베어 물었다. 칼은 그녀의 옆에 도로 앉아서는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받은 빵을 입에 물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예나를 찾던 이들에게 그녀를 데려다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니, 미하일이 돌연 호의가 담긴 손을 내밀어 왔다. 그의 조직원 중에서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예나와 그녀의 매니저를 함께 두기에는, 자칫 못된 작당을 할까 염려되었다.

그 와중에 때마침 동맹 마피아 조직에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되었다 싶었다.

미하일은 알렉산드르 모로조프에게 칼을 주기적으로 제 조직에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날이 갈수록 우울해하던 예나에게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붙여 주면 그녀가 훨씬 밝아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예나는 칼을 만나는 족족 화색을 띠었고, 그들은 조직원들이 호위를 서고 있는 와중에도 거리낌 없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밀해졌고, 이내 서로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졌다. 그들은 비록 감시당하며 대화를 나누고 스킨십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그 애정은 깊어만 갔다.

여느 때처럼 예나의 말동무를 해 주던 어느 날, 그녀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나, 여길 나갈 거예요.”

그녀의 맑고 검은 눈동자가 칼의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깐, 지금 뭐라고요? 나간다고?”

칼이 티 나지 않게 주변을 훑으며 얼굴을 굳혔다. 방의 문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정장남과,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는 창가 쪽 두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이 칼과 예나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표정 관리라도 잘못했다가는 이상함을 눈치챌지도 몰랐다.

칼이 태연한 척 물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봅니까?”

예나 역시 유명 여배우답게 싱긋 웃는 얼굴로 찻잔을 들며 평소처럼 대답했다.

“당신은 신경 쓰지 말아요. 어떻게 나갈지는 이미 현주랑 얘기했으니까.”

그녀가 말한 ‘현주’라는 사람은 아마도 붙잡혀 있다는 매니저일 것이다. 그녀와 얘기했다니, 그걸 미하일이 허락했단 말인가?

그의 의문을 알아챈 듯, 예나가 입에 머금은 찻물을 삼키며 말했다.

“미하일도 이젠 날 꽤 믿는 눈치예요. 며칠 전에 현주와 만났는데 생각보다 대우도 잘 해 주고 부족함 없이 돌봐 주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왜 나가려 합니까?”

그러다 자칫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예나가 슬프게 웃었다.

“낯선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시받으며 지내본 적 있어요?”

있을 리가 없다.

예나는 칼의 대답을 바라지 않았기에, 말을 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들이 따라다녀요. 어디를 가든, 뭘 하든 전부. 내 시간, 내 생활이라고는 없죠. 그게 얼마나 답답하고 사람 피 말리는 건 줄 알아요?”

찻잔을 두 손으로 곱게 잡은 예나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와 상반되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인가요? 당신도 알다시피 거대 마피아예요. 내가 싫어도 누군가가 총 맞아 죽는 모습을 보게 되고, 험악한 사람들이 무섭게 몰려다니며 거래를 하죠. 미하일은 일부러 날 그런 곳에 데리고 다녀요. 난 아무렇지 않은 척 비위를 맞추며 그를 따라다녀야 하고요.”

미하일의 의중도 이해는 갔다. 예나의 미모라면 어느 남자가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거기다 유명 여배우다. 미모와 유명세만으로도 길 가던 남자 모두가 넋을 잃고 그녀에게 집적댈 것이다.

그것을 우려한 미하일은 일부러 암암리에 예나를 곁에 끼고 다녔다.

그 때문에 이미 러시아의 웬만한 곳에는 그녀가 거대 마피아 조직의 보스 미하일 보그다노프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거기다 어딜 가든 듬직한 감시원들이 여럿 따라붙어서 보좌하니, 인근의 이들 중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나가 픽 웃었다.

“그거 알아요? 내가 하이잭 사건의 실종자가 아니게 된 거?”

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하일이 손을 썼어요. 난 애당초 그 하이잭 사건에 연루된 것도 아니었고, 일부러 비밀리에 미하일과 결혼하기 위해 직접 러시아에 온 거라고…… 그렇게 꾸며 냈어요.”

칼이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상하긴 했다. 하이잭 사건에 연루된 실종자가 버젓이 돌아다니면 당연히 눈에 띄게 되고 대사관, 더 나아가서는 해당 인물의 국가에까지 소식이 전해진다. 그걸 모를 미하일이 아닌데도 예상외로 예나의 외출을 족족 허락해 주었다.

이제 보니 미하일은 예나를 대놓고 자기 것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미하일이 예나를 얼마나 탐내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 보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까지 날 붙인 거겠지.’

칼은 웃는 낯으로 제게 예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던 미하일을 떠올렸다. 그가 말한 ‘잘 부탁한다’의 뜻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도록 좋은 말벗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지만.

예나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이대로라면 난 한국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미하일의 첩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거예요. 그런 삶은 싫어요.”

사랑하지도 않는 나이 많은 남자의 애인으로 평생을 산다는 게 얼마나 괴로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저 가녀린 몸으로 쾌활하게 견뎌 온 것만 해도 대단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도 이제 한계가 온 거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예나가 찻잔에 든 찻물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녀가 후련한 얼굴로 소녀처럼 웃었다.

“만약 내가 한국에 멀쩡히 돌아가서 배우 일을 할 수 있게 되거든, 꼭 한 번 찾아와요. 아니, 무조건 와야 해요.”

예나가 찻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은근슬쩍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칼의 손등을 손끝으로 남몰래 건드렸다.

“결혼 안 하고 기다릴 테니까.”

예나의 볼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칼은 그녀의 얼굴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  *  *

폭우가 쏟아지던 날, 일을 끝마치고 향한 곳은 보스 알렉이 내준 안가가 아닌 제 자택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을 팔아야지, 하면서도 괜히 추억에 잠겨 차마 내놓지 못했던 집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한 번씩 주기적으로 들러서 상태를 점검하고 하룻밤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런 제집 앞에, 웬 검고 둥그런 물체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늦은 밤이고 가로등도 제 구실을 못할 정도의 어둠과 폭우였던지라, 그 물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바짝 다가간 후에야 그것이 검은 담요를 둘러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었다.

노숙자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며 그 어깨를 툭툭 쳤다.

{여긴 처마도 없어서 비도 못 피하는데 차라리 다른 건물로 가요.}

얼마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몸이 홀딱 다 젖어 있었다.

아무리 툭툭 두드려도 일어나질 않기에 어깨를 아예 잡고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힘없이 흔들리던 몸이 기우뚱하더니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머리를 덮고 있던 검은 담요가 흐트러지며 그 사이로 기다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웨이브가 들어간 기다란 머리카락이었다. 낯익은 머리카락은 비에 흠뻑 젖어 서로 굵직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우산을 든 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칼이 돌연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손을 뻗어 쓰러진 이의 머리에 둘린 검은 담요를 단숨에 치워 냈다. 그러자 시체 같은 안색의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칼이 놀란 얼굴로 우산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쓰러진 여인의 상체를 한 팔로 들어 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예나 씨! 예나 씨!”

불러 보았지만 미동도 없었다. 칼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의 코앞에 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미약하지만 뜨거운 숨이 닿았다.

칼은 예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비에 흠뻑 젖고 정신을 잃은 상태라 무게가 꽤 나갔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은 없었다. 얼마나 비를 맞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라면 위험했다. 일단은 비를 피하고 의사를 불러야 했다.

칼은 예나를 안고 들어가 한달음에 침실로 이동했다. 시트가 젖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곱게 눕히곤 다급히 욕실로 뛰어가 욕조에 뜨끈한 물을 받았다. 다시 침실로 돌아와 협탁에 있는 전화기로 병원에 전화해 왕진 의사를 요청했다.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깊은 밤이라, 아무리 빨리 와도 30, 4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칼은 우선 예나의 몸을 둘러싼 담요를 벗겨 내고 그녀의 푹 젖은 겉옷을 벗겨 냈다. 그러자 몸에 달라붙은 네이비색 벨벳 원피스가 눈에 들어 왔다. 예나의 몸에 달라붙어 그녀의 몸매 실루엣을 여실히 드러내 주니,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칼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어영부영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겨 내었다. 차마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길 자신은 없어, 입고 있던 옷만 벗긴 채 그녀의 싸늘한 몸을 안아 들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예나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예나를 안고 따뜻한 물이 어느 정도 차오른 욕조에 다가갔다. 한 팔로 어렵사리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은 욕조에 담가 온도를 체크했다. 적당한 온도를 맞추고 그녀를 욕조 안에 조심스레 넣었다.

따뜻한 물이 예나의 몸을 감쌌고, 그녀의 차디찬 몸은 점차 따스해져 갔다.

이쯤 되어서야, 칼은 겨우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욕조 테두리에 걸터앉아 예나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집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저번 대화 중에 우연히 나온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칼의 집은 제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안목 덕에 디자인이 좀 화려한 편이라, 지나치듯 묘사했던 말임에도 그 특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예나가 왜 자신의 집 앞에 있었는가에 대해선 아직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당연히 붙어 있어야 할 보디가드나 감시원도 없었고, 이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 비를 맞은 채 자신을 기다린 이유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예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녀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가며, 다소 멍한 상태의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정신이 들어요?”

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예나가 여전히 멍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으니 애가 탔다. 칼이 예나의 어깨를 조심히 잡은 채 그녀를 흔들었다.

“이봐요, 한예나 씨! 정신 차려요!”

잠시 흔들리던 예나가 돌연 눈을 크게 뜨고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잠, 예나 씨!”

비명을 질러 대며 몸부림을 쳐 대니 욕조의 물이 넘실거렸다. 예나는 칼을 알아보지 못한 채 비명만 질러 댔다.

칼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고민하다가 돌연 그녀를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큰 소리로, 하지만 무섭지 않게 외치며 끌어안자, 그제야 예나가 몸부림을 멈추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칼에게 안긴 채 커다란 눈을 깜빡여 댔다.

“……칼?”

“그래요, 나예요.”

안도하며 예나를 품에서 떨어뜨리려는데, 돌연 그녀가 가녀린 팔로 칼을 끌어안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요. 나, 나 너무 무서워서…….”

예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칼은 그녀의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했지만, 원하는 대로 조심스레 끌어안은 채 가만히 있어 주었다. 예나의 떨림이 조금 사그라지자, 달래듯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칼의 몸을 붙들고 있던 팔을 풀고는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예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칼은 제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야기는 천천히 하죠. 우선 몸을 좀 녹여요.”

“아뇨, 지금 들어 줘요.”

예나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파리해진 입술을 떨었다. 그녀가 입을 떼던 그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찌르르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며 칼이 긴장 어린 얼굴을 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소리 내지 말고요.”

칼은 예나를 욕조 안에 앉히고서 조용히 문을 닫고는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가까이 다가가니, 웬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러 댄다.

꺼림칙한 느낌이다.

칼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집 앞에서 잠시 폭우를 맞기도 했고, 물에 젖은 예나를 끌어안았던 탓에 몸이 잔뜩 젖어 있었다.

칼은 얼른 침실로 들어가 제 옷을 대충 바닥에 던져 놓고는 샤워 가운을 걸쳤다. 젖어서 볼품없이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려 이마를 훤히 드러내었다. 그렇게 하고 거울을 보니, 영락없이 샤워 직후의 모습이다.

세 번째 초인종이 울렸다. 칼은 혀를 차며 제 침실 서랍장을 열어 권총을 하나 꺼내 들었다. 권총을 등 뒤에 숨기고서는 그대로 현관으로 걸어가 문에 대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야, 로버트.}

로버트라면 같은 마피아 조직의 미국인이다. 칼은 눈을 굴리다가 그대로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앞에는 로버트 외에도 한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는 분명 미하일 보그다노프의 조직원 중 한 명이었다.

칼은 애써 태연한 척 나른한 얼굴로 웃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술 한잔하자고 오신 건 아닐 테고…….}

워낙 평소에도 매력적이지만 물에 촉촉이 젖은 채 나른한 얼굴로 샤워 가운 하나만 달랑 입고 있는 칼의 모습을 보니, 남자들은 저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비를 입은 두 남자는 저마다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갈색 머리의 로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도 한예나를 알고 있지? 보그다노프 씨의 한국인 애인 말이야.}

{물론이죠. 제가 주마다 말동무를 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칼의 심장박동은 점차 빨라져 갔다.

{그녀가 다른 한국인 여자와 함께 도망쳤어. 한국인 여자는 잡혔지만 아직 한예나가 도주 중인 모양이야. 혹시 자네에게 연락 온 건 없었나?}

칼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녀가 제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이 집에 들른 건 어디까지나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입니다. 이런 일 아니면 제집에 발도 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보스가 마련해 준 조직원 전용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오늘의 폭우는 어디까지나 갑자기 들이닥친 소나기 같은 거라, 그도 생각지 못하게 이 집에 들른 것이리라.

로버트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예리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이 그녀에게 뭔가 입김을 불어 넣은 건 아닌가? 혹여 그녀를 숨겨 주고 있다거나…….}

{설마요. 그렇게 되면 당장 두 조직 간에 전쟁이 일어날 걸 아는데 제가 그러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거대 마피아 조직 보스의 애인이다. 만약 그녀에게 탈출을 권고하거나 숨겨 준다면 두 조직 간에 거대한 항쟁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칼이 문에서 옆으로 비켜섰다.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수색해 보셔도 좋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칼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만약 정말 수색을 시작한다면 안타깝지만 이 두 사람의 목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가 뒤로 숨긴 총을 꽉 잡은 채 싱긋 웃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안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미하일 휘하의 남자가 불손한 눈빛을 거두었다.

{의심해서 미안하군. 혹시라도 그녀를 만나거나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지체 말고 우리에게 알려 주게.}

{알겠습니다.}

로버트가 손을 뻗어 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실례했어. 내일 보지.}

{예, 조심히 가십시오.}

칼이 웃는 낯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아니, 배웅하려 했다.

돌아서는 그들 앞에 왕진 가방과 우산을 든 채 허겁지겁 달려온 흰 가운의 노인이 멈춰 섰다.

{환자는 어디요?}

칼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로버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환자?}

{연락을 받고 왔소. 환자가 있으니 급히 와 달라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로버트와 함께 왔던 남자가 매서운 눈으로 칼을 돌아보았다.

{환자가 있다고?}

그가 칼을 위아래로 훑으며 조소했다. 아무리 봐도 칼은 어디 한 군데 다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친 곳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그가 칼에게 바짝 다가서서 위협적으로 말했다.

{혹시 집에 누구 다친 사람이 있나?}

칼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여태껏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앞으로 꺼냈다. 그 손은 총은커녕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엄지와 검지가 기괴하게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칼은 굽는 쪽과는 반대 방향으로 꺾인 제 엄지와 검지를 남자의 눈앞에 들이밀어 보였다.

{사실 민망해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곤 멋쩍게 웃었다.

{오는 길에 노숙자와 실랑이가 좀 있었는데, 몽둥이에 잘못 맞아서 이렇게 됐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이기도 하고, 노숙자에게 당했다고 하면 좀 쪽팔려서 말이죠. 빨리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에 비싸더라도 왕진 의사를 불렀습니다만, 안타깝게 들켜 버렸네요.}

남자가 한 발 물러서며 매서운 시선을 거두었다. 확실히 총을 자주 쓰는 마피아에게 있어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와 그 총을 받치는 엄지는 중요하다. 그런 손가락이 부러졌으니, 한시바삐 치료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그랬군. 빨리 쾌유하길 바라지.}

{감사합니다.}

칼이 싱긋 웃어 주며 손을 내렸다. 그러면서 멀쩡한 왼손으로는 허리띠를 꽉 붙든다. 그의 가운 뒤쪽 허리띠 라인에 권총이 아슬아슬 걸려 있었다.

로버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칼의 부러진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조심 좀 하지……. 내일 괜찮겠나?}

{이 정도로 뭘요. 그리고 바로 치료받으면 금세 나을 겁니다.}

칼의 태연함에 로버트가 혀를 내둘렀다. 어째 아픈 기색 하나 없냐, 괴물 같은 놈.

두 남자가 폭우 속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던 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얼른 제 손가락을 꺾지 않았다면, 미하일의 조직원은 확실히 의심했을 것이다.

칼이 얼른 안색을 바꿔 노인을 안에 들였다. 허둥지둥 들어온 노인이 우산을 접어 문가에 세워 두고는 칼의 오른손을 훑었다.

{아이고, 아팠겠구먼. 얼른 치료를 시작하지.}

{아뇨, 봐 주셔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우선 침실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응? 누가 더 있나? 아깐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니만.}

칼이 등 쪽 허리띠에 걸려 있던 총을 왼손으로 빼 들었다. 그가 총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비밀로 해 주십시오. 오늘 당신은 제 부러진 손가락 때문에 오셨고, 손가락만 치료하고 가신 겁니다. 알겠죠?}

총을 본 노인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칼이 그를 침실로 안내했다. 침실에 있는 소파에서 잠시 대기하라 하니 냉큼 앉아서는 왕진 가방을 품에 안고 열심히 눈만 굴려 댄다.

칼은 침실에 있던 여분의 흰 가운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그 앞에 선 칼이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조용하던 안쪽에서 참방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좁게 열린 문틈으로 예나의 겁먹은 눈동자가 보였다. 칼은 몸을 살짝 숙여 문틈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좀 진정됐어요?”

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갈 테니까 옷 좀…… 부탁해요.”

입고 있는 거라고는 물에 젖은 브래지어와 팬티뿐이었다. 칼은 팔에 걸쳐 두었던 가운을 문틈으로 건네주었다. 예나는 그것을 단숨에 낚아채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젖은 속옷을 모두 벗고 가운 한 장만을 몸에 걸친 예나가 걸어 나왔다. 순간 그녀가 현기증을 일으키며 휘청이자, 칼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뜨거운 욕탕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 몸이 따끈따끈했다. 칼은 그녀를 부축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들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를 단숨에 안아 들었다. 부러진 손가락이 욱신거렸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품에 안긴 예나가 놀라거나 내려 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칼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제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었다.

칼은 예나를 가뿐히 안아 든 채 침실로 향했다. 나갈 때와 똑같은 포즈로 앉아 있던 노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예나를 바라보았다.

예나를 침대에 조심히 눕힌 칼이 노인에게 눈짓했다. 그가 왕진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다가가 눈치를 살폈다. 칼은 예나의 몸에 도톰한 이불을 가슴까지 올려 주며 노인에게 말했다.

{비를 오래 맞았습니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녹이긴 했지만 기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서 걱정이 되네요.}

노인이 침대 옆 협탁에 왕진 가방을 놓고는 예나의 오른쪽 손목에 제 손을 얹어 맥을 짚었다.

칼은 침대에서 약간 떨어져, 노인이 예나를 진맥하고 살피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자한 인상이긴 했지만 잔뜩 긴장한 얼굴의 노인을 보며 예나도 덩달아 긴장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녀는 불안한 눈을 굴려 칼을 찾았고, 눈이 마주친 그는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예나가 어렵사리 마주 웃었다.

예나에게 주사를 놔 준 노인은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할 것과 몸을 차갑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겼다. 그는 칼의 부러진 손가락에 작은 부목을 대어 치료를 한 후에야 그곳을 벗어났다.

물론 칼은 의사에게 예나에 관한 일에 대해선 반드시 함구하라고 다시 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칼은 침대에 걸터앉아 멍한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예나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 주니, 갑자기 울상이 되어서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현주……, 현주 어떻게 하죠…?”

제 볼을 비비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절로 가슴이 떨렸다. 칼은 그녀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차분하게 말해 봐요.”

다정하게 속삭이듯 말하니, 예나가 한층 안정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여린 두 손은 칼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현주가 봐 둔 작은 지하통로가 있었어요. 미하일의 저택이 지어진 지 백 년이 넘는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그 당시 하인들이 바깥으로 오갈 때 주로 쓰던 지하통로가 있었던 거죠. 오래된 탓에 입구 부근이 반쯤 무너져서 웬만한 사람들은 오갈 수 없었지만, 저와 현주는 충분히 가능했어요.”

말을 이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지만, 예나는 눈을 꾹 감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욕실에서 목욕을 즐기는 척하며 그 안의 좁은 창문으로 빠져나왔어요. 좁긴 했지만 몇 번 연습도 했었기 때문에 몸을 요령껏 구부려 조용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죠. 현주도 화장실을 핑계로 창문을 통해 도망쳤어요.”

둘 다 예전처럼 감시가 심했다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워낙 함께 두든 혼자 두든 불손한 움직임이라고는 아예 보이지를 않으니 그 감시도 한층 누그러진 것이리라.

“우린 잘 빠져나왔어요. 그간 거리를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쇼핑했던 옷이나 물건의 일부를 그들 몰래 보관해 두기도 했죠.”

예나의 눈물 젖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물건을 사면서 알게 된 여자가 한 명 있었어요. 옷 가게의 종업원이었는데, 한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라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했죠.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봤고, 그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날 도와주고 싶다고 하기에 그 가게에 옷을 사러 들를 때마다 쪽지를 통해 내 상황을 알렸죠. 그녀는 내 탈출을 도와주기로 했어요.”

애써 담담한 척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하일은 모두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미하일이 심어 둔 사람이었던 건지, 아니면 뒤늦게 매수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를 준비해 두었다던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하일의 부하들 외에는.”

맑은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다시 도망치다가 현주가 총에 맞았어요. 날 쏘진 않았지만, 현주는 애당초 죽일 생각이었던가 봐요. 총에 맞은 현주는 금세 피를 토하며 쓰러져서 일어나질 않았어요. 난…… 난 무서워서…… 그런 현주를 그대로 두고 도망쳐 버렸어요.”

결국 예나는 눈물을 흘리며 잘게 흐느꼈다.

“흑흑……. 현주……, 흑……, 현주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었어요……. 피가 막…… 바닥에 가득하고…… 나, 나한테도 막…… 잔뜩 묻어서……. 도, 도망치면서도…… 피 냄새를 견딜 수가 없어서……. 흑흑…….”

칼이 달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느끼며 눈물이 가득한 예나가 칼을 바라보았다.

“나 어, 어떻게 해요……? 현주를…… 흑, 현주를 두고 왔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 내가…… 내가 잘못, 흑, 잘못해서…….”

“당신 탓이 아니에요.”

칼이 부드럽게 말하며 예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칼의 회색 눈동자가 마치 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날 믿어요.”

예나가 눈물을 삼키며 두 팔을 뻗어 칼의 목에 둘렀다. 칼은 그녀의 등을 팔로 받쳐 가만히 안아 주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까…… 당신 생각밖에 나질 않았어요……. 내가 있으면 분명히 피해가 갈 걸 알고 있는데도…… 흑, 어쩌면 이제 미하일 손에 잡히면…… 당신을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칼이 예나의 등을 쓸어 주며 그녀를 달랬다.

“난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내가 지켜 줄게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칼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녀린 여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던진 것일까. 아니면 본능이 그리해야 한다고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일까.

칼은 예나를 안은 채로 그녀를 눕혀 주었다. 가느다란 팔이 풀리는가 싶더니, 칼의 양팔을 붙들어 잡고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곁에…… 있어 줄 거죠……?”

눈을 마주친 칼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녀의 눈동자에 홀린 것처럼 그저 조심스레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예나는 물기 가득한 눈꺼풀을 사르르 내려 감으며 제 입술을 가만히 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어 버린 예나를 쓰다듬어 준 칼은 소리 없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흐트러진 가운을 정리하고 허리띠를 고쳐 매면서도 혹여 곤히 잠든 예나가 깰까 싶어 자꾸만 그녀를 힐끔거렸다.

방에서 나가려다, 옆으로 돌아누운 예나의 뽀얀 어깨가 신경 쓰여 돌아섰다. 그녀의 어깨까지 포근한 이불을 꼭꼭 덮어 준 후에야 안심하고 방을 나섰다.

잠든 예나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침실이 아닌 서재로 향했다. 책을 좋아하던 제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높다란 책장 가득 빼곡하게 채워 둔 책들이 시야를 기분 좋게 어지럽혔다.

서재에 마련된 푹신한 소파에 앉은 칼은 예나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녀는 현주라는 매니저 여자가 총에 맞아 죽은 줄로 알고 있지만, 칼의 생각은 달랐다. 로버트가 말하길, ‘한국인 여자는 잡혔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었다면 ‘죽였다’ 혹은 ‘처리했다’라는 말을 골랐을 것이다.

‘총에 맞았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건가.’

정 많고 마음 여린 그녀라면 매니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다시 돌아가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하일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그 불같은 성미에도 불구하고 붙잡힌 매니저를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칼은 예나에게 매니저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전하지 않기로 했다. 매니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저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미하일에게 다시 되돌려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되돌려 보낸다고 해도 미하일이라면 예나를 도망치게 도운 그 매니저를 가만히 살려 둘 리가 없었다. 최소한 예나가 돌아가지 않는 편이 그나마 매니저의 목숨을 연명시킬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인질의 가치라도 있으니까.

당장 예나를 안전히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미하일의 조직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데다, 동맹을 맺은 자신의 조직에까지 도움을 요청해 온 상태였다. 그들의 수색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이곳에 숨기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비밀 공간이 있었으니까.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0달의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미하일은 예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러시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이 잡듯 뒤져 댔다.

미하일이 예나를 데리고 가장 많은 접촉을 했던 조직은 알렉산드르 모로조프의 조직이었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알렉의 조직이자 칼이 몸담은 조직을 의심해 댔다. 혹여 큰 건수가 있을 때 자기 조직을 물러서게 하려는 목적으로 예나를 인질로 붙잡아 감금해 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더불어 그들은 칼 개인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다.

조직 간의 항쟁을 우려해 얌전히 수색에만 몰두하던 미하일의 조직은, 칼이 집에 없는 틈을 타 불시에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칼의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어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 소식을 뒤늦게 접한 칼은 사색이 되어 제집으로 달려갔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어디 하나 다치지 않은 예나가 제집에 버젓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비밀 문을 통해서만 오갈 수 있는 작은 다락방에 몸을 숨긴 채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자그마한 다락방은 어느덧 예나의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세계가 되어 있었다.

다락방 입구에 선 칼은 숨을 몰아쉬며 예나를 바라보았다.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일인용 소파에 편안히 앉아 책을 읽던 예나가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띤 채 그를 반겼다.

“일찍 왔네?”

예나가 책을 덮어 제 앞에 있던 작은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으로는 잔뜩 부풀어 오른 배를, 다른 한 손으로는 제 허리를 짚으며 약하게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칼이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니까 앉아 있어요.”

예나가 배시시 웃으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칼은 그녀의 의자 옆 바닥에 두 무릎을 대고 몸을 세워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예나가 칼의 어두운 회색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눈을 제 손으로 톡톡 털어 냈다.

“밖에 눈 와? 오전에 내다볼 땐 안 오던데.”

태연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칼이 어렵사리 웃어 보였다.

“조금씩 내리고 있어요.”

눈을 털어 내느라 약간 젖어 버린 예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 주었다. 촉촉한 물기가 두 사람의 손에 얽혀들었다.

“사람들이 왔었죠? 아무 일 없었어요?”

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아래층과는 달리 예나의 다락방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계단도, 문도 없는 다락방을 찾아내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방에서 쉬고 있을 때 왔다 갔어. 화장실이라도 급했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

웃는 낯으로 농담까지 섞어 말하고 있었지만, 칼은 그녀가 홀로 이 작은 공간에서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을지 떠올리며 어두운 낯을 했다.

칼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던 예나가 그에게 잡힌 제 손을 빼냈다. 그러고선 칼의 양 볼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차갑기만 하던 칼의 볼에는 온기가 스며들었고, 온기를 품고 있던 예나의 손에는 서늘함이 옮겨 들었다.

“얼굴 펴. 아무 일 없었잖아. 자꾸 그러면 우리 아이가 걱정한단 말이야.”

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예나의 잔뜩 부풀은 배에 닿았다. 언제 진통이 올지 모를 정도로 잔뜩 부풀어 있다. 애써 웃어 보였지만, 걱정은 한층 더 커졌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미하일은 예나를 찾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찾고 있었다. 이대로는 예나가 이 좁은 방 안에서 아이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칼이 예나의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로 손을 대려다, 밖의 찬 공기에 노출되어 아직 차갑기만 한 손을 차마 대지 못하고 내리려 했다.

예나가 씩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고는 자신의 손으로 매만진 후 따뜻한 입김을 호호 불어 주었다. 그의 손에서 찬 기운이 가시자, 예나가 그 손을 끌어 제 배에 올려놓았다.

칼은 홀린 듯한 눈으로 그녀의 배에 손을 얹은 채 중얼거렸다.

“우리 유리…… 곧 보겠네.”

칼이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읊으며 한없이 다정한 얼굴을 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예나의 배를 보물 대하듯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간지럽지만 기분이 좋아, 예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누구 닮았을까?”

칼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예나 닮았겠죠.”

“왜? 칼을 닮았을 수도 있지. 아니, 난 칼을 닮았으면 좋겠어.”

예나가 환하게 웃었다.

“남자애라고 했으니까, 칼을 닮아서 강하고 멋있었으면 좋겠거든.”

“난 예나 닮아서 예쁘고 당찼으면 좋겠는데요.”

“남자애인데?”

칼이 얼굴을 가져가 예나의 배에 짧게 입맞춤했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당신을 닮는 게 가장 좋아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예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야. 우리 아이는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당신하고 나랑 셋이서 평생 살 거야.”

이상하게도 그 말이 칼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요.”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칼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전화기 너머로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칼은 수화기를 붙든 채 유건이 자기 부하들에게 한창 명령을 내리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준비해! 곧 출발한다!

유건의 기백 가득한 목소리를 듣다 보니 절로 긴장되었다.

-이제 그쪽으로 갈 거야. 준비는 다 끝났어.

“이쪽에서 도와줄 건 없어?”

-집에 잘 붙어 있기나 해. 상황 봐서 전화할 테니까.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마.”

괜히 불안해져서 당부의 말을 전했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더니, 던지듯 대답했다.

-……너도 무리하지 마. 상황 정리될 때까지 예나 씨 잘 지키고 있고.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간 칼은 미하일을 피해 어떻게 예나를 한국에 돌려보낼지 고심했다.

러시아의 실권을 쥐고 있는 거대 조직 중 하나인 미하일의 패밀리는, 러시아 곳곳은 물론 한국에까지 예나에 대한 정보를 조작해 흘려 놓은 상태였다. 러시아까지 그의 손을 들어 주다 보니, 한국에서는 미심쩍지만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예나는 구속되지 않은 모습으로 미하일의 곁을 머물렀고, 그의 조직원을 대동한 채 수시로 쇼핑도 다녔다. 그런 모습이 여실히 노출되자, 그 누구도 그녀가 납치된 것이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칼은 예나의 증언을 토대로 미하일의 조직과 비밀리에 거래하는 인신매매 집단에 대해 조사했다. 그들은 미하일의 조직뿐 아니라 러시아에 산재한 수많은 조직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칼이 몸담은 알렉산드르의 조직은 인신매매에는 손을 대지 않는 곳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거대 마피아 조직에 몸담은 데다가 알렉산드르가 워낙 아끼다 보니 칼은 그를 따라 자연스레 갖가지 기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칼은 자료를 모으는 족족 유건에게 보냈고, 그는 자료를 정리해 상부에 올리며 러시아로의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다. 마피아를 상대로 하는 작전이라면 상부에서도 싫어하겠지만, 그 외의 범죄 조직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특히나 그 인신매매 범죄 조직에서 수많은 한국인을 팔아먹은 정황증거와 물증이 확실했다. 거기다 자발적으로 러시아에 갔다고 알려진 한예나가 사실은 그들의 손에 의해 마피아에 팔아넘겨졌다는 갖은 증언까지 들이밀어 주자, 한국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러시아의 국내 안보를 담당하는 특수부대와 한국에서 파견된 특수부대가 손을 잡고 외국인 인신매매를 주로 하는 단체를 모조리 색출, 제거하기로 했다.

한국의 특수부대를 이끌게 된 건 칼이 바라던 대로 그의 오랜 친우, 서유건 대위였다.

칼은 오랜만에 유건을 볼 수 있다는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들이 인신매매 단체를 모두 제압하고 나면 칼은 유건을 통해 예나를 한국에 보낼 예정이었다. 정상적인 경로로는 미하일이 나설지도 모르니, 그녀를 안전하게 한국에 보낼 방법은 지금으로선 그것뿐이었다.

예상보다 한국의 결단이 늦어진 탓에 예나가 벌써 만삭의 몸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미하일의 감시에 전전긍긍하며 이런 다락방에서, 그것도 산파도 없이 아이를 낳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유건을 통해 그녀를 한국으로 보내 안전하게 출산하게끔 해야 했다.

당장 제 곁을 떠나게 되는 건 가슴이 아프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  *  *

“젠장!”

육성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칠게 차를 몰았다. 마음이 급했다.

-그래, 지금 돌아가려는 중이니까 넌 걱정 말고……!

성공적으로 인신매매 단체를 제압한 후, 유건과 그의 부하 2명은 칼이 지정한 약속 장소에 나와 예정대로 예나를 인도받았다. 칼은 조만간 한국에 가겠다며 예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그녀는 칼이 걱정하지 않도록 밝은 얼굴로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전용 헬기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로 이동한 유건은 군용으로 보급된 무전기만 한 크기의 휴대폰으로 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돌아가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칼을 생각해 전화를 했지만, 얼마 말하지도 못하고 전화가 끊겼다. 총소리와 함께.

‘무사히 가는 걸 끝까지 봤어야 했어!’

칼은 자책하며 차를 몰았다.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을 탓했다.

인신매매 단체가 제압당한 사실이 생각보다 빠르게 미하일에게 닿았다. 그 내용엔 분명 한국의 특수부대가 파견된 이유가 있을 테고, 자연스레 예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예나가 아직 러시아에 있고, 그녀가 이때를 틈타 한국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알아챈 미하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발 빠르게 움직인 그들은 이내 헬기가 있는 곳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갑작스러운 총성이 수없이 빗발치진 않았겠지.

헬기가 대기하고 있던 자리는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총상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남자 군의관 둘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그들을 치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예나가 있기 때문에 폭탄까지 쓰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꽤 많은 인원이 왔다 간 모양이었다. 곳곳에 미하일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칼은 파리한 안색으로 사람들을 살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유건과 예나가 없었다.

예나를 데리러 왔던 유건의 부하 두 명 중 한 명이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칼은 얼른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유건이 형은, 아니 서유건 대위는 어디 있고, 예나 씨는요?!”

다행히 상대도 칼을 알아보았다. 그는 상처의 통증 때문에 자연스레 구겨진 얼굴로 칼에게 대답해 주었다.

“마피아로 보이는 이들이 갑자기 총을 난사하며 한예나 씨를 납치해 갔습니다. 대위님은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그 뒤를 쫓아…….”

칼은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예나를 납치한 이들이 어디로 갔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차를 몰아 미하일의 저택으로 가려던 칼은 잠시 생각하더니, 돌연 방향을 틀었다.

알렉산드르의 저택에 도착한 칼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조직원들마저 모여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어딘가와 전쟁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칼은 빠른 걸음으로 알렉산드르에게 향했다. 이제 막 중간 서열로 올라온 칼은 사실 마음대로 그를 만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지만, 워낙 보스의 총애를 받는지라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알렉산드르가 있는 위치를 물어 찾아가니, 그는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입에 시가를 물고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시가를 입에서 떼며 창백한 낯의 칼을 바라보았다.

{어서 준비해라.}

칼이 거친 숨을 고르며 물었다.

{준비라니요?}

{지금부터 미하일 보그다노프의 패밀리를 치러 간다.}

칼이 눈을 부릅떴다. 보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직을 탈퇴한 후, 곧바로 예나를 찾으러 가려 했던 칼이다. 무단 탈퇴에 대한 처벌은 받아야겠지만, 자신 때문에 아버지 같은 알렉산드르의 조직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찾아왔던 건데 알렉산드르는 타이밍 좋게 미하일의 조직을 치러 말했다.

입을 다문 채 칼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자, 알렉산드르가 입에 시가를 문 채 소파에서 일어섰다.

{놈은 우리 조직을 너무 들쑤셨어. 더 이상 내버려 둘 순 없지.}

언젠가 이 미지근한 동맹이 깨어질 줄은 알았지만, 온건하기로 소문난 알렉산드르가 먼저 일어설 줄은 몰랐다.

그간 미하일은 제 애인을 찾는다는 명목을 내세워 동맹이라는 것도 잊은 것처럼 알렉산드르의 조직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렇게 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알렉산드르는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를 살해한 범인을 알아냈다. 그간 계속 조사하고 있었지.}

갑자기 거론된 이름에 칼이 흠칫했다.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알아냈다니.

{미하일 보그다노프, 그놈 짓이었다.}

칼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아나스타샤의 죽음이 미심쩍어서 계속 조사를 해 왔다. 미하일 놈이 젊을 적부터 아나스타샤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넌 한국을 오가느라 몰랐겠지만, 네 할아버지가 죽은 후로는 미하일이 아나스타샤에게 집적거리는 일이 많아졌더구나. 그리고 오늘, 놈이 직접 그 아이를 쐈다는 증거를 입수했다.}

멍하니 서 있는 칼에게 다가선 알렉산드르가 미간을 모았다.

{놈은 제 것이라 생각한 여자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정신병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주저 없이 죽이고 말지.}

알렉산드르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놈에겐 그간 열두 명의 부인이 있었고, 전원 사고사로 사망했다. 하지만 전부 그놈 손에 죽은 거야.}

알렉산드르의 예리한 눈동자가 칼의 눈을 마주했다. 그가 칼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네 여인마저 아나스타샤처럼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느냐?}

그는 이미 예나가 칼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도, 그녀가 처한 상황도 모두 알고 있었다.

*  *  *

“아아악-!”

예나가 눈을 크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두 손목이 각각 침대 머리맡 끝에 로프로 묶인 채,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했다.

헬기에 타기 직전, 검은 정장을 입은 이들에 의해 납치된 예나는 그대로 미하일의 침대에 결박되었다. 그사이, 양수가 터지고 끔찍한 진통이 닥쳐왔다. 아래가 조금씩 열리는 느낌과 함께 전신이 벌벌 떨렸다.

퀭한 얼굴의 미하일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다급히 예나의 출산을 도울 준비를 했고, 미하일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히, 히히……. 드디어 내 손에…….}

예나의 곁에 다가선 미하일이 손을 뻗어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찾았잖아. 히히…….}

예나는 고통에 숨을 헐떡이며 미하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예전과 달리 총기 하나 없이 흐려진 상태였다.

예나는 그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런 눈동자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전 부인이 사라지고 새로운 부인이 들어왔다. 불길함에 소름이 돋았다.

미하일이 손을 뻗어 예나의 꿈틀거리는 배를 만졌다. 서늘한 손길이 징그럽기만 했다.

“만지지 마!”

예나가 기겁하며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더 큰 진통이 닥쳐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미하일은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자꾸만 히죽거렸다.

{내 아이……. 히히…….}

소름이 돋았다. 미하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진 못했으나, 제 배를 바라보는 그의 풀린 눈에 기괴할 정도로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당신 아이 아니야! 아니라고!”

미하일은 애당초 몸에 문제가 있어, 그 어떤 여인과 관계를 해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하일은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부정했고, 일정 기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자신의 짝이 아니라 생각해서 죽였다. 그리고 새로운 부인을 들이고, 또 죽이고, 또 새로운 부인을 들였다.

그렇게 죽인 부인만 열둘이었다. 그 외의 여인들까지 합하면 20명은 족히 될 것이다.

예나가 그의 손에 잡혀 온 뒤로도 그는 많은 시도를 했으나 역시나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예나가 도망치고 근 열 달.

미하일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것이 자신의 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예나는 미하일의 손을 피해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진통이 심해져 숨만 헉헉거렸다.

그때, 밖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한두 발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하일은 예나의 배에 손을 얹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미하일의 눈치를 살피며 예나의 다리를 구부려 세웠다. 총소리에 움찔거리면서도 미하일의 압박이 있었는지, 그들은 말없이 아이를 받을 준비를 했다.

예나는 눈물을 흘리며 고통에 가득 차 신음했다.

‘칼……. 칼……!’

*  *  *

날아오는 총알 세례에 저택 안으로 제대로 돌입할 수가 없었다.

유건은 두꺼운 건물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옆에는 고집을 부리며 따라온 여자 군의관 정나영이, 조금 떨어진 옆쪽의 굵직한 기둥에는 총을 든 채 긴장한 낯을 한 특전사 셋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대로는 앞으로 갈 수가 없어.’

유건이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나영을 바라보았다. 신체 능력이 좋고 사격 실력이 발군이라고는 하나, 그녀는 본디 군의관이다. 이렇게 위험한 장소에 직접 총을 들고 잠입해야 할 사람이 아니다.

어찌어찌 저택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더 위험할 게 분명했다. 돌아가길 거부하며 끝까지 제 곁에 있겠다고 말해 주는 건 고맙지만, 총을 든 마피아들이 저리 많은 와중에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했다.

“정나영, 넌 차로 가서 대기해.”

“싫습니다.”

나영이 고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한다. 그녀는 태연한 낯으로 총의 탄창을 꺼내 총알을 채워 넣고 있었다.

“명령이다.”

그제야 태연한 낯이 일그러졌다. 나영이 유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전 대위님 두고 못 갑니다.”

“명령이라고 했다.”

나영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번 임무 끝나고 돌아가면 그때 얼마든지 징계받겠습니다.”

“정나영!”

“당신 다치는 꼴 못 보겠다고!”

나영답지 않게 큰소리를 냈다. 때마침 그때 나영이 등을 기대고 있던 기둥의 모서리가 총에 맞아 파편이 튀었다. 유건이 재빨리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나영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얼굴을 붉혔다.

유건이 세 부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내가 미끼가 될 테니까 너희들은 저택 내부로 들어가! 김 중사는 정나영 데리고 후퇴해!”

그 소리에 나영이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대위님!”

“빨리 가! 나도 따돌리고 진입할 테니까!”

나영이 말릴 새도 없이 유건이 몸을 날려 저택 외곽을 뛰었다. 총질을 계속하며 가까이 다가오던 남자들이 그 총구를 유건에게 향했다.

*  *  *

미하일의 저택 부지 근처에 도착한 수많은 검은 승용차들이 열을 맞춰 멈췄다. 그 차에서 깔끔한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이들이 내려섰고, 그들은 저마다 자기 손에 들린 총의 상태와 탄창을 확인했다.

칼은 초조한 얼굴로 품속에 여분의 탄창을 넣은 후 제 손에 들린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안에서 여럿의 총소리가 들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들자, 옆에 다가온 알렉산드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주름진 얼굴로 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길을 만들어 줄 테니 곧바로 놈을 찾아라. 그 한국인 여자는 놈하고 같이 있을 게다.}

알렉산드르는 고개를 돌려, 옆 차량에서 내려선 스킨헤드의 젊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니콜, 함께 가 주거라.}

{예, 보스.}

알렉산드르가 아끼는 부하 중 하나인 니콜라이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칼의 옆에 섰다. 그가 품에서 총을 빼 들었다.

알렉산드르가 차량들의 앞으로 걸어 나와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 미하일 보그다노프의 저택 안에 돌입한다. 동양인을 제외한 다른 놈들은 모조리 죽여.}

짧은 명령이었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명령을 받은 수많은 남자들이 내부로 빠르게 돌입해 들어갔다. 칼은 조직원 넷이 호위하듯 둘러싼 알렉산드르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그 뒤를 따랐다.

저택 부지는 사방이 난장판이었다. 이전에 예나와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그때의 깔끔함과 화려함은 온데간데없이, 온갖 총상을 입은 벽과 기둥, 그리고 짓밟힌 화단만 보였다. 거기다 그 주변엔 총에 맞아 신음하는 남자들이 가득했다.

칼은 뒤따르는 니콜라이와 함께 익숙한 저택 안을 뛰어다녔다.

예나와 매번 만났던 응접실을 필두로 웬만한 방은 모두 뒤져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이 계속될수록 불안함도 한층 커졌다. 이렇게 돌아다닐 동안 예나와 미하일은 물론이거니와, 그녀를 쫓았던 유건도 보이질 않았다.

자꾸만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덮으려 할 때, 유건의 부하로 보이는 특전사 복장의 남자 둘이 복도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얼른 그들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한 명은 복부에, 한 명은 어깨에 총상이 있었지만, 다행히 급소는 피한 상태였다. 그들은 눈앞에 다가온 검은 정장에 놀라며 총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서유건 대위님은 어디 계십니까?”

칼이 한국어로 묻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복장이나 손에 쥔 권총으로 봐선 마피아가 확실한데 한국 사람처럼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도, 유건을 그 계급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긴장한 두 사람에게 칼이 다급히 덧붙였다.

“서유건 대위님의 친구이고, 한예나 씨를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그제야 그를 겨누던 총구가 내려갔다. 그들 역시 예나에 관해선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상태였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남자가 통증에 인상을 쓴 채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저쪽 끝 계단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칼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그가 바라본 복도 끝을 향해 달렸다. 가는 도중에 곳곳에 쓰러진 남자들이 보였다. 그들을 막으려는 이들이 나오질 않는 걸 보니, 모두 유건이 처리하며 올라간 모양이었다.

예나도 예나지만, 유건도 걱정되었다. 복도 끝 계단에서부터 마지막 층이자 그 바로 위층 복도까지 가는 데만 해도 10명은 족히 쓰러져 있었다. 유건이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복도를 뛰다 보니, 바닥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그 핏자국은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넓은 양문이 활짝 열린 한 방으로 이어졌다.

얼핏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멈칫하던 칼의 다리가 저절로 빨라졌다. 뒤따르던 니콜라이도 놀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방을 향해 내달렸다.

방 앞에 도착한 칼은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고서 우뚝 멈춰 섰다.

왼쪽 어깨에 맞은 총상에서 흐른 피가 유건의 왼팔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손끝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고, 그는 거친 숨을 쉬며 오른손에 든 총을 정면의 남자들에게 겨누고 있었다.

방 안에는 도합 여섯의 남자들이 일렬로 정렬해 각각 손에 총을 쥐고서 유건을 겨냥하고 있었다. 6개의 총구가 유건을 향해 있었으나, 그 일부가 문에 도착한 칼과 니콜라이를 겨누었다. 니콜라이는 총을 들어 마주 겨누었으나, 칼은 남자들의 뒤로 보이는 미하일과 예나의 모습을 눈에 담느라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예나는 양손이 결박된 채 힘들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 옆에는 퀭한 얼굴의 미하일이 한 팔에 작은 물체를 안은 채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물체가 꼼지락거리며 또 한 번 울음소리를 낸 덕에, 그제야 그것이 갓난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렬한 채 총을 앞으로 내밀고 있던 이들 중 미하일을 제 몸으로 가리고 있던 남자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한국 쪽 특수부대 대장으로 보입니다만…….}

예나를 납치할 때도 한국 특수부대원들은 부상만 입히고 죽이지는 않았다. 나라를 등에 입은 부대에서 사망자가 나오면 아무리 힘 있는 거대 마피아 조직이라 할지라도 그로 인한 불이익을 가늠하기 어렵다.

{죽여. 방해돼.}

미하일이 뭐가 문제냐는 투로 말했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토를 달았다.

{하지만 일개 부대원도 아니고 대장을…!}

탕-!

미하일이 겨눈 총부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에게 이의를 제기했던 부하의 머리 일부가 깨지고 피가 터졌다. 그의 몸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다른 다섯 남자들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대신 방아쇠 위에 올린 그들의 손가락이 일제히 꿈틀했다.

기색을 눈치챈 유건이 문밖으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의 눈에 멍하니 서 있는 칼이 보였다.

“칼!”

유건이 다친 팔의 통증을 애써 참아 내며 왼손으로 칼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문 밖 왼쪽으로, 니콜라이는 오른쪽으로 나가 그 벽을 등졌다.

타타타탕-!

동시에 발사된 총소리가 귀를 때렸다. 유건은 칼을 벽에 밀치고서 그를 지키듯 제 등을 보이며 섰다.

“정신 차려, 칼바노아!”

칼이 눈을 들어 제 앞에 선 유건의 등을 바라보았다.

“예나 씨랑 네 아들 구해야 할 것 아냐?!”

그 말에 시야가 맑아지고 귀가 열렸다. 따가운 총소리 사이로 제 아이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유건이 총을 든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총소리는 멈췄으나, 언제고 안을 향하려 하면 다시 총알 세례가 쏟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안을 향해 쐈다간 자칫 예나나 아이가 총에 맞을 수도 있었다. 최대한 그들을 밖으로 유인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건은 뒤로 돌아보았다. 칼이 두툼한 롱코트를 벗어 한 손에 그 끝을 잡고는, 검은 셔츠에 숄더 홀스터만 착용한 모습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내가 들어갈게.”

허무맹랑한 소리에 유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들어가자마자 벌집이 될 거야.”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형은 미하일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줘.”

칼이 문의 오른쪽 벽에 등을 댄 채 그를 주시하고 있는 니콜라이에게 입을 달싹여 ‘여자’라고 소리 없이 말했다. 니콜라이는 그 단어만으로도 무슨 뜻인지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을 고쳐 쥐었다.

칼은 심호흡을 하며 유건을 밀어내고는 당장이라도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려 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유건이 붙잡았다.

“정말 괜찮겠냐?”

목소리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칼이 고개를 돌려 살짝 웃어 보였다.

“……아이, 부탁할게.”

그 말을 남기곤, 칼이 왼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롱코트를 사람의 머리 높이 정도로 홱 집어 던졌다. 긴장하며 총을 겨누고 있던 방 안의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그 코트를 향해 총질을 했다. 칼은 그 틈을 타 몸을 낮게 숙인 채 안으로 빠르게 달려 들어갔다.

뒤늦게 칼의 존재를 알아챈 이들이 얼른 총구를 칼에게 향했지만, 그는 이미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뒤를 잡아 목을 팔로 휘감은 채 방패로 삼고 있었다. 칼이 남자의 오른손을 받쳐 들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눈앞에 있던 다른 남자의 오른쪽 어깨를 쏘았다. 그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총을 떨구었다.

다른 한 명의 남자도 같은 방법으로 어깨에 총상을 입힐 때, 남아 있던 두 명의 남자가 각각 좌우로 돌아 그 총구를 칼의 머리로 향했다.

칼은 남자의 총을 빼앗아 문밖으로 던져 버리고는 붙잡고 있던 그를 오른쪽의 남자에게 밀어 던져 버렸다. 그 틈에 왼쪽으로 돌아온 남자가 총을 겨누고 있는 오른쪽 손목을 붙잡고는 그 총구가 제 머리 옆을 향하도록 빠르게 밀었다.

탕!

짧은 총성이 귀를 때렸다. 칼은 그대로 남자의 손목을 홱 꺾었다.

{아악!}

갑작스러운 손목의 통증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총을 떨궜다. 칼은 떨어지는 그 총이 지면에 닿기 전에 발로 차 공중에 띄우고는, 그것을 허공에서 붙잡아 그대로 남자의 오른쪽 어깨 가까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끄아악-!}

남자가 더 크고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에서 피가 흩뿌려지는 상황이었지만, 칼은 매서운 눈으로 그의 팔을 거칠게 놓아준 후 뒤로 돌아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자신에게 넘어진 남자를 밀어내고 총구를 칼의 뒤통수에 겨누던 남자의 어깨에서 먼저 피가 튀었다. 쓰러지던 남자가 총을 떨구자, 칼이 그 총을 문밖으로 멀리 차 버렸다.

넘어졌던 남자가 다른 남자가 떨군 총을 들고는 그 끝을 칼에게 겨누려 했다. 칼은 시원한 발차기로 그 손을 올려 찼고, 허공을 날던 총을 왼손으로 붙잡아 역시나 그의 오른쪽 어깨에 총알을 박아 주었다.

순식간에 다섯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힌 칼이 숨을 골랐다.

그사이, 유건은 미하일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아이를 빼앗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미하일의 손에는 총이 있었지만, 유건은 총을 쓸 수 없었다. 자칫 아이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유건이 극적으로 총을 피해 내고 육탄전으로 몰고 가는 중에, 니콜라이가 얼른 예나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목을 결박한 로프를 풀어내었다. 예나가 그의 도움을 받아 상체를 일으키며 눈으로는 아이를 찾아 헤맸다.

“내, 내 아이…….”

눈물 젖은 얼굴로 자꾸만 미하일에게로 손을 내뻗었다. 니콜라이가 그녀를 안아서 막지 않았다면 그에게 총이 있는 것도 상관치 않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내 아이! 내놔!”

힘없는 팔을 허우적대며 예나가 소리를 질러 댔다. 눈물로 범벅된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어둡고 초췌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미하일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가 눈을 부릅뜨며 연사한 총알 중 하나가 유건의 오른팔을 꿰뚫었다.

“큭!”

근거리에서 맞은 탓에 유건의 몸이 살짝 떴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미하일은 제 부하들을 홀로 쓰러뜨리고서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칼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역시 네놈이었어……! 네놈이……!}

미하일이 광기에 젖은 얼굴로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때, 침대 위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던 예나가 니콜라이를 밀어내고는 맨발로 내달렸다. 그녀가 총을 든 채 내뻗은 미하일의 팔에 매달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피가 왈칵 흘러내렸다.

“안 돼!”

미하일은 그녀를 혐오감 어린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단숨에 팔을 흔들어 그녀를 떨어냈다. 미하일이 일그러진 얼굴로 총구를 바닥에 쓰러진 예나에게 향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칼이 눈을 크게 뜬 채 예나를 향해 내달렸다. 총구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예나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칼을 향했다.

탕-!

유달리 총성이 길게 들려왔다. 칼은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눈앞에 흩뿌려진 붉은 피.

힘없이 쓰러지는 가녀린 몸.

허물어지는 몸이 칼의 손끝을 지나쳐 바닥에 쓰러졌다.

“아…!”

허공에 손을 내민 채 멈춰선 칼이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 끝에는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은 예나의 얼굴이 있었다. 관자놀이를 관통당해 즉사한 예나의 창백한 얼굴이 바닥에 닿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감기다 만 눈에서는 더 이상 생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조금만 더 내뻗으면 그 얼굴을 만질 수 있는데, 만질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목구멍이 타오르고 속에 있는 뜨거운 무언가가 토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아아아-!”

칼이 소리를 내지르며 두 팔을 뻗어 예나의 몸을 안았다. 아무리 흔들어 대고 품에 보듬어 얼굴을 어루만져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반쯤 감긴 눈동자엔 그 무엇도 비치질 않았다. 관자놀이에서 흐른 피가 자꾸만 칼의 검정 셔츠를 적셔 갔다.

“예, 예나 씨……. 안 돼, 안 돼, 안 돼! 일어나요, 제발……!”

칼이 예나를 품에 안은 채 어찌할 줄을 모르며 눈물을 흘려 댔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예나의 생기 잃은 얼굴에 투두둑 떨어졌다.

해 줄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얼마나 많았는데…….

칼이 예나의 얼굴에 제 얼굴을 댄 채 슬프게 울부짖었다.

죽은 예나를 품에 안고 있는 칼을 보며 미하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총구가 칼을 향하자, 유건이 그의 옆구리를 몸으로 들이받았다.

들이받은 오른팔에 격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것을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미하일에게서 단숨에 알몸의 아이를 빼앗아 품에 안았다. 휘청거리던 미하일이 유건과 아이를 향해 총을 겨누자, 니콜라이가 달려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익! 저리 비켜!}

팔을 흔들어 니콜라이를 밀어내며 미하일이 유건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하필 유건의 부상당한 자리를 거세게 차 버리는 바람에 그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몇 번 바닥을 굴러가, 유건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유건이 얼른 몸을 일으켜 아이를 그 눈에 담았다. 바닥에서 꼼지락대는 아이가 크게 울어 젖혔다.

“대위님!”

저를 피신시키려던 김 중사를 떼어 내고 달려온 나영이 바닥에 쓰러진 유건을 보고 외쳤다. 하지만 유건을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나영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모든 이들의 신경이 미하일과 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니콜라이를 떨쳐 낸 미하일의 총구가 이번엔 바닥을 나뒹구는 아이를 향했다.

{너도! 너도 내 거가 아니었어!}

다른 색은 일절 섞인 기색 하나 없는 진하디진한 검정 머리카락. 그것이 미하일의 눈을 거슬리게 했다.

광기에 물든 미하일의 눈동자는 이미 정상인의 범주가 아니었다.

미하일의 총구가 연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총성은 하나가 아니었다.

{……윽!}

미하일의 몸이 크게 휘청했다. 그가 연기를 내뿜는 권총을 떨어뜨리며 뒤로 넘어졌다. 그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쿨럭 흘러나왔다.

칼은 한 팔에 예나를 안은 채, 미하일에게 겨눈 자신의 총을 내리지 않았다. 그가 흉흉한 안광을 내뿜으며,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몇 번이고 총을 난사했다. 그럴 때마다 미하일의 몸이 들썩이고, 그의 입에서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윽고 꿈틀대는 그의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칼의 총이 틱- 하는 소리를 내었다. 총알을 모두 소진했음에도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그의 손을 니콜라이가 붙잡았다.

{이미 죽었어.}

그제야 칼이 손에서 힘을 뺐다. 그의 팔이 힘없이 바닥에 떨궈지고, 총알 하나 없는 권총이 바닥을 굴렀다.

“크윽…!”

유건이 제 몸으로 아이를 감싼 모양새 그대로 신음을 흘렸다. 나영이 얼른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대위님! 괜찮으십니까?!”

나영의 눈이 유건의 다리를 향했다. 유건의 왼쪽 무릎 위에서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나영은 재빨리 그의 상처 부위의 옷을 찢어 내었다. 무릎뼈 바로 위에 총상을 입었다. 상처로 보아 총알이 다리뼈를 그대로 부수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자칫 다리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영이 울먹이는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식은땀과 피가 잔뜩 묻은 얼굴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품에 안은 아이는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듯, 팔의 상처도 잊고서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유건이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운 상태 그대로 나영을 올려다보았다. 나영은 제복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다리 상처를 묶어 주는 중이었다.

“너……, 윽……, 명령도 안 듣고…….”

나영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그럼 안 중요하냐…….”

유건이 픽 웃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상처마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제 품에 있는 작은 갓난아이의 상태만을 살필 뿐이었다. 아이는 울다 지쳤는지, 작은 소리로 칭얼대기만 할 뿐이었다.

유건이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예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칼과 함께 온 스킨헤드의 외국인은 그의 상태를 살피듯 옆에 말없이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미하일은 몸 곳곳에 총상을 입은 채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감지 못하고 부릅뜬 눈이 광기의 잔재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정나영, 어깨 좀 빌리자.”

나영이 재빨리 유건을 부축했다. 그는 오른팔은 나영의 어깨에, 왼팔은 아이를 단단히 붙들어 안은 채 칼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영은 유건이 왼쪽 다리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왼쪽 다리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벌써 손수건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나영의 부축을 받아 칼의 옆에 다다른 유건이 숨을 몰아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야, 정신 차려.”

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가득 찬 그의 눈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유건이 나영에게 눈짓하고는 칼의 옆에 주저앉았다. 다리의 통증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형…….”

칼의 눈에 걸려 있던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예나…… 씨가…….”

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 날에 보여 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유건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유건이 제 품에 있던 아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눈도 뜨지 못한 작은 생명체가 입을 오물대더니, 다시 작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칼의 흐릿하던 눈동자에 작은 아이가 가득 담겼다.

“다 잃은 것처럼 굴지 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유건의 호통을 들으며 칼이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갓난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에 닿았다. 다른 팔에 붙들린 차가운 예나의 몸과 달리, 이 갓난아이는 찌릿할 정도로 따뜻했다.

칼이 조심스레 아이를 받아 들었다. 홀린 듯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칼의 얼굴이 슬프게 구겨졌다.

한 팔에는 예나의 싸늘한 몸을, 한 팔에는 따뜻한 아이의 몸을 안은 채 그가 숨죽여 울었다.

*  *  *

“정말 괜찮겠냐?”

군용 헬기를 등진 채 나영의 부축을 받고 서 있던 유건이 물었다. 응급처치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다리의 상처 때문에 홀로는 서 있을 수 없는 상태였다.

단정한 검은 정장 차림으로 그의 앞에 서 있던 칼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

“그런 소리 하지 마. 유리는 걱정하지 말고, 항쟁 끝나는 대로 꼭 연락해.”

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떨궜다.

미하일의 잔당들이 꽤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보스 미하일 보그다노프를 죽인 공으로 알렉산드르 조직의 간부가 된 칼의 경우, 그 잔당들이 보스의 원수라며 목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갓난아이인 유리를 데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마워.”

항쟁이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다. 잔당을 모조리 소탕하고 미하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조직들까지 손을 대려면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유건이 칼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1년 기다려 줄게. 1년 지나면 유리는 내 아들로 호적에 올릴 거야.”

말없이 유건을 부축하고 있던 나영이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유건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언제까지고 애를 호적 없이 키울 수는 없어.”

나영이 이를 악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건을 마주 보고 있던 칼이 쓴웃음을 보였다.

“……형한테 너무 민폐인 것 같은데.”

“난 어차피 결혼할 생각도 없어. 독신으로 살다 죽을 거야. 그러니 호적에 아이 하나 올린다고 해도 문제 될 것 없잖아. 그리고!”

유건이 손을 들어 검지로 칼의 가슴팍을 콕콕 찔렀다.

“네가 빨리 정리하고 오면 아무 문제 없어. 알았냐?”

칼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연락할게. 우리 유리…… 잘 부탁해.”

*  *  *

알렉산드르 모로조프의 조직이 미하일 보그다노프의 조직과 그의 동맹 조직을 모두 정리하는 데에는 무려 7년의 세월이 걸렸다.

워낙 거대 조직을 괴멸하는 일이기도 했거니와, 그 잔당 세력이 손을 뻗쳐 둔 조직까지 합해 놓고 보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세간에선 알렉산드르의 조직이 되레 괴멸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돌기도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의 조직이 위험한 순간마다 그 조직의 젊은 간부가 나서기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칼바노아 알리예프.

아름답고 화려하며 조직의 그 누구보다도 강한 남자.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조직 내에서 알렉산드르 모로조프의 후계자였던 세르게이 모로조프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 냈다. 현 보스인 알렉산드르 역시 그를 제 외동아들 세르게이보다 더 아끼고 신뢰한다는 설이 돌 정도였다.

알렉산드르가 병석에 누운 지 1년이 넘은 지금, 그는 미하일의 잔당들과 그 연결 조직 모두를 처리한 칼바노아 알리예프에게 보스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알렉산드르가 곧바로 숨을 거둔 후, 그의 아들 세르게이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칼바노아에게 총을 들이대었으나 대패했다. 그 세력에 가담한 이들은 관례에 따라 전원 목숨을 잃었으나, 칼바노아는 존경하던 선대 보스를 생각해 그 아들인 세르게이의 한쪽 눈을 도려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세르게이는 조용히 사라져 러시아를 벗어났고, 칼바노아는 그렇게 조직의 젊은 보스가 되었다.

*  *  *

한국의 겨울은 러시아의 겨울에 비하면 굉장히 따뜻한 편이었다.

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마저 따뜻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새하얀 털 코트를 입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걷고 있는데, 저 끝에서 웬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작은 마을버스 크기의 새하얀 차량에는 ‘하랑 태권도’라는 한글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고, 글씨 옆에는 태권도 도복을 입은 호랑이가 발차기를 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칼은 그 차량이 한 단독주택 입구에 멈춰 서는 것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차량의 문이 열리고 한 중년 남자가 내리더니, 그가 차량 안쪽으로 손을 뻗어 한 아이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에 특이한 동그란 안경을 쓴 작은 남자아이였다. 이제 예닐곱 살처럼 보이는 그 아이는 안경 앞을 가린 기다란 앞머리 사이로 중년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아이가 공손하게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며 집 대문 앞에 섰다. 까치발을 들어 초인종을 누르고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학원 다녀왔습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그 작고 가녀린 소리 하나만이 귀를 파고들었다. 칼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그저 아이의 모습만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자, 아이가 다시금 뒤로 돌아 가만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중년 남자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아이는 여느 동년배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귀엽게 손을 흔들기보다는 어른에겐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그런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또박또박한 발음,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중년 남자는 그것이 일상인 듯, 인자하게 웃는 낯으로 두 번째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이가 안으로 들어가고, 태권도 학원 차량은 칼을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갔다. 칼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우는 것처럼도 보였고 웃는 것처럼도 보였다. 칼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갑고 아름다웠다.

천천히 발을 내뻗어 아이가 들어간 집 앞에 섰다. 촘촘히 가려진 검은 대문을 보며, 아이가 그러한 것처럼 초인종을 눌렀다.

누르고 말이 없자, 안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경계심 어린 목소리. 분명 인터폰을 통해 제 얼굴이 비치고 있을 것임에도,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렸다. 칼이 천천히 입을 뗐다.

“유리…… 만나러 왔습니다.”

인터폰 너머의 여인은 말이 없었다. 칼은 조급해하지 않고 가만히 그대로 서 있었다.

이내 대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딱딱한 목소리.

칼은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깔끔히 정돈된 채 흰 눈을 가득 맞은 마당을 지나 현관에 다가섰다. 들어오라는 듯 문이 열려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무표정한 얼굴의 나영이었다. 7년 전에 보았을 때에 비해 나이를 먹긴 했지만 여전히 20대처럼 젊어 보였다.

나영은 칼을 가만히 마주 보다 안으로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나영을 따라 4개의 방 중 한 곳에 다다랐다. 서재로 보이는 그 작은 방 안쪽에는 소파에 앉아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는 유건이 있었다.

그간 가장 많이 늙어 버린 것은 서유건이었나 보다. 20대 후반의 치기 어린 얼굴은 어디 가고, 지금은 진중하고 엄해 보이는 얼굴만 남아 있었다. 입가를 굳게 다문 채 책에 몰두한 그 모습이 꽤나 생소했다.

방에 들어온 칼의 기척을 느낀 유건이 책을 덮고 눈을 들었다. 그가 진중하던 얼굴에 살짝 미소를 보였다.

“왔냐?”

예전에 비해 한층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유건이 자신의 건너편에 있는 소파로 눈짓했다. 칼은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아 유건을 마주 보았다. 나영이 유건에게 다가가 책을 받아서 그 대신 책장에 꽂아 주었다.

“커피 두 잔 부탁해.”

유건의 말을 들은 나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유건이 칼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보스 되었다고 귀티는 좀 나는 것 같은데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유건이 팔을 뻗어 칼의 서늘한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가진 서늘함이 그의 손을 타고 넘어왔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부모라도 된 듯한 말투에 칼이 픽 웃었다.

“잘 먹고 다니니까 걱정 마.”

유건이 마주 웃으며 손을 내렸다. 때마침 나영이 따끈한 원두커피 두 잔을 가져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유리 테이블에 놓았다. 나영은 칼을 한차례 바라보다 그대로 방을 나가 문을 닫아 주었다.

칼은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가 잔 안에서 작게 찰랑이는 커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형은 요즘 좀 어때?”

“네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잖아.”

유건이 예리하게 말했다. 칼이 움찔하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은율이는 잘 지내.”

유건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건강하게 잘 컸고, 널 닮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체술 쪽에 재능이 발군이야. 지금은 태권도와 유도 학원을 다니고 있고, 사교성도 좋아서 어딜 가든 원만하게 잘 교류하는 편이지.”

유건이 얼마 마시지 않은 찻잔을 그대로 받침에 내려놓았다.

“혼혈이라 그런지 몰라도 과할 정도로 예쁘게 자랐어. 위험할까 봐 운동도 시키고 얼굴 좀 가리고 다니게 했다.”

“응, 봤어. ……그래도 예뻐.”

칼이 조금 전에 보았던 예닐곱 살의 작은 아이를 떠올렸다. 안경을 쓰고 앞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그래도 그 무엇보다 예쁘기만 한 아이였다. 칼이 찻잔을 두 손으로 꽉 쥐며 말했다.

“형, 많이 늦은 건 알지만, 나……!”

“안 돼.”

유건이 단호하게 말했다. 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지금은 안 돼.”

칼이 커피가 가득한 찻잔을 내려놓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형…….”

“이제 막 보스 자리에 앉았잖아. 어떻게 될지 몰라.”

칼이 손을 떨었다.

“안전하게 지킬 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러시아에 있는 동안 악귀처럼 버텨 왔다. 오직 은율 하나만 생각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곁에 두고 자라는 모습을 보기 위해, 부족함 하나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 주기 위해.

하지만 유건의 생각은 달랐다.

미하일의 잔당들이 죄다 정리되었다고 해도, 칼은 이제 막 보스의 자리에 오른 참이었다. 거기다 알렉산드르 모로조프의 보스 자리 인계 선언이 있었다지만, 후계로 지목되어 있던 세르게이 모로조프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암암리에 칼을 노리는 자가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특히나 다른 마피아 조직이 급습할 때를 노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유건은 은율을 떠올렸다.

정을 주지 않되 제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만들기 위해 엄하게만 굴었다. 나영은 유건이 한쪽 다리의 부상 후유증으로 뛸 수 없게 된 것 때문인지 은율에게 자꾸만 차갑게 대했다.

갓난아이였던 은율이 죽을 뻔한 걸 구하다 입은 부상이었다. 그것이 은율의 탓은 아님에도, 그녀는 자꾸만 그 아이를 냉대했다.

나영은 유건이 그녀와의 결혼을 약속할 때 내건 조건만큼만 수행하겠다는 것처럼, 은율을 챙기긴 챙기되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과 유건 사이에서 낳은 하진과 지희만 우선시했다. 그마저 유건이 타박할 수는 없어, 그것을 대신하듯 온 관심을 은율에게 쏟아부었다.

사람 간의 정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건은 자신의 아이만큼이나 은율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언젠가 칼에게 은율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최소한 그 아이의 안전이 보장될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유건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형!”

“안 된다면 안 돼!”

유건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두 사람의 찻잔이 흔들렸다.

“널 따라가면 위험하기만 할 뿐이야! 네가 거기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그 어린애 혼자 집이라도 보게 할 셈이야?! 아니면 네가 총질하는데 그 옆에 데리고 있으려고?!”

칼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마피아 조직의 손에 암살당했고, 한국에 있던 제 아버지는 암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알렉산드르 모로조프를 찾아가 그 휘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쩌다 순식간에 그 보스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어렸다. 고작해야 20대 후반의 나이였고,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나선다고 들었다.

칼이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환경을 무시할 순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 봐. 네가 어떻게 그 보스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겠어? 알렉산드르의 선언과 네 실력만으로 가능했다고 보는 거야? 너한테 약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 안 해 봤어?”

칼이 두 손을 모아 꽉 잡았다. 그가 제 두 손만을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최소한 너한테 약점이 생기더라도 지킬 수는 있게 되어야 할 것 아냐.”

칼은 반박할 수 없었다. 보스의 자리에 앉고 주변이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다짜고짜 한국에 날아왔다. 7년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은율의 갓난아이 적 모습이 아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유건이 손을 뻗어 칼의 꽉 쥔 두 손 위를 덮었다.

“네 마음 모르는 거 아니다. 하지만 은율이를 위험하게 만들지는 말아야지.”

타이르듯 어르는 말에, 칼은 그저 흔들리는 눈을 내리뜨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뜨끈하던 커피는 금세 식어 버렸다. 칼은 그것을 입도 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복잡한 얼굴은 한없이 어두웠다.

“형은…… 괜찮아…?”

느릿하게 물었다. 칼은 장갑을 끼며 유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서 빈 찻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뭐가?”

알면서 묻는다.

“은율이…….”

칼은 뒷말을 채 다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유건이 약간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난 은율이 내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다.”

칼이 쓰게 웃었다.

“……고마워.”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 칼의 팔을 유건이 굳게 붙들었다.

“난 네가 그런 위험한 일 정리하기 전까지는 은율이 못 보내.”

칼이 유건을 돌아보았다. 유건의 얼굴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총질만 하지 말고 차라리 기업화를 해. 조금이라도 더러운 일이 있다면 미련 없이 손 떼라고.”

암거래와 온갖 검은 일로 세력을 키우고 부를 축적하는 게 마피아다. 다른 나라의 마피아들 중에는 거대 기업으로 변모한 곳도 있다던데, 유건은 차라리 그렇게 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칼은 유건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대로 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피를 보여 주는 것은 너무도 가혹했다.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래, 자주 좀 연락하고. 그리고 이거 받아 가라.”

유건이 돌아서서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다리를 다친 후유증은 남아 있었지만, 뛰는 것과 일어날 때만 힘들 뿐, 걷는 것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칼은 죄책감이 밀려와, 그의 다리에 닿아 있던 제 시선을 얼른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유건이 책상에서 두꺼운 앨범을 꺼내 칼에게 건네주었다. 칼은 그 안을 펼쳐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가 약간 물기 어린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유건이 그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자주 찍어 둘 테니까 다음에 은율이 데려갈 때 같이 가져가. 늦어지면 내가 때때로 국제우편으로 보내 주마.”

칼은 목이 메어 차마 말은 못 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은율의 사진만 가득한 앨범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칼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오자, 거실에서 쾌활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 여자애가……!”

5살 정도의 검은 머리 남자아이가 끊임없이 조잘댔다. 아이는 제 눈앞에 쭈그려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는 나영에게 한창 말을 하다, 유건과 함께 방에서 나오는 칼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나영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남자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유건과 나영의 얼굴 일부분이 겹쳐 보였다. 보자마자 두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하진아, 왔어?”

작은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이내 끝 방에서 걸어 나온 은율이 거실에 다다랐다. 칼이 은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경을 벗고 앞머리를 올려 작은 집게 핀으로 고정한 은율이 동그란 눈으로 칼을 올려다보았다.

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것을 애써 참아 내며 한쪽 무릎을 꿇어 은율과 눈높이를 맞췄다. 은율이 돌연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쩜 이렇게 밝을까.

칼이 어렵사리 웃어 보였다.

표정, 괜찮은 건가? 무서워 보이거나 이상해 보이진 않겠지?

다행히 은율은 아무렇지 않게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처음 뵙는 분이네요. 아버지 친구분이세요?”

칼의 입가가 살짝 경련했다. 입을 달싹여 말하고 싶었다.

처음 만나는 게 아니라고. 내가…… 네 아버지라고.

하지만 말을 삼켰다.

참아야 했다. 이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혼란스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나영에게 붙어 있던 남자아이가 달려와 은율을 제 작은 몸으로 가려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은율의 머리는 그 위에 삐죽 나와 있었지만.

“우리 형 보지 마요!”

조그만 녀석이 당차기도 하다. 칼이 작게 미소 지었다.

“넌 이름이 어떻게 되니?”

남자아이가 제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리고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서하진이에요! 우리 형한테 집적대면 내가 때려 줄 거예요!”

작은 아이가 참 말도 잘한다 싶었다.

나영이 하진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하진을 제 등 뒤로 숨기고는 그녀가 칼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고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칼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한차례 은율을 바라보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말없이 나서는데, 뒤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서은율이라고 해요!”

몸이 우뚝 멈췄다. 칼은 자꾸만 돌아가려는 고개를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다.

“다음에 오실 땐 제대로 인사할게요!”

칼은 제 눈앞이 뿌옇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긴 다리를 내뻗었다. 한 손으로 품에 안은 도톰한 앨범이 이상하리만치 무겁기만 했다.

*  *  *

제대로 된 기업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연결되어 있던 어둠의 고리들을 하나하나 끊어 내는 데만도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반발하는 이들을 제압하고 한데 묶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이내 칼은 러시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을 세우는 데 성공했고, 이젠 암암리에 거래하는 일 없이도 충분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유건을 만났던 때부터 10년이나 걸려 버렸다.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가 때때로 보내 주는 은율의 사진들을 위안 삼으며 악착같이 버텼다.

이젠 정말, 직접 은율을 만날 때가 왔다.

하지만…….

*  *  *

유건은 안방에서 겉옷을 걸쳐 입으며 나영에게 말했다.

“아마도 밖의 저자들은 은율이가 칼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칼이 와 있는 지금밖에 없다는 거다. 일단은 러시아로 보내야 해. 저들에 대해선 그 후에 따로 조치해야겠어.”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이라면 위험하지 않겠어요? 칼바노아에게 앙심을 품고 있으니 어떤 방법을 쓸지 모른다고요.”

나영이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르게이 모로조프.

그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이가 며칠 전, 집 근처 CCTV에 잡혔다. 유건이 그가 동일인물이 맞는지 조사한 결과, 본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칼에게 총을 겨누었다가 대패한 뒤 홀연히 사라진 그가 왜 한국에, 그것도 유건의 집 주변을 떠돌았던 것일까.

집 밖의 심상찮은 차들을 보며, 그 이유는 쉬이 짐작이 갔다. 그들은 유건을 노린다기보다, 칼의 유일한 약점인 은율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마침 칼이 은율을 만나기 위해 군산공항에 전용기를 대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수도권에 있는 공항에는 비밀리에 전용기를 댈 수 없어, 부득이하게 그곳에 대기하고는 수하들 몇을 보내 놓은 상태였다. 실제로 그 수하들이 타고 있는 차량 2대가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든 뚫고 가야지. 중간에 칼의 수하들이 준비해 둔 똑같은 차량이 있으니, 그걸로 눈속임을 할 수 있을 거야.”

유건이 긴장한 얼굴로 나영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몰라. 은율이는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싶구나, 나영아.”

나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 같았다면 친자식도 아닌 은율을 저리도 아끼는 게 너무도 싫었지만, 지금은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밀어내고 그렇게 무관심하려 해도 자꾸만 온 신경을 빼앗는 아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아이.

이제야 제 마음을 열어 볼까 했거늘, 사랑해 줄까 했거늘 그만 보내 줘야 했다.

속이 쓰렸지만 나영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탓인지 은율이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뭘 주든 기뻐하며 받아먹는 사랑스러운 아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모두 이런 걸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사 보았던 코코아 가루를 꺼냈다. 사실은 몇 달 전부터 사 두었지만, 괜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부엌 선반 안에 방치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단단히 닫힌 포장지를 뜯어내니 달콤한 향이 훅 끼쳐 왔다. 은율이라면 밝은 얼굴로 좋아해 줄 거라 예상하며, 그 옆에 미리 준비해 둔 수면제 알약을 꺼내었다. 나영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칼은 휴대폰을 붙든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보좌관 니콜라이가 달려와 넋을 놓은 칼을 부축했다.

{보스, 왜 그러십니까?!}

칼은 대답 없이 몸을 떨기만 했다. 니콜라이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 들고는 급하게 다가온 두 명의 남자에게 지시했다.

{보스를 전용기 안으로 모셔.}

그들은 칼을 부축해 이륙 준비를 마친 전용기 안으로 데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이는 아직 통화 중인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귀에 가져갔다.

{니콜라이다. 나한테 다시 설명해.}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와 세찬 빗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쪽 군산공항은 먹구름만 끼었을 뿐, 아직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유건이 있는 곳으로 보냈던 조직원의 보고를 들은 니콜라이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전용기를 돌아보았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칼을 떠올리며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  *

탑승자 서유건, 정나영은 그 자리에서 즉사.

뒷좌석에 있던 서은율은 곧바로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칼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유건을 잃은 것뿐만 아니라, 제 사랑하는 아들까지 사경을 헤매게 되었으니 어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칼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은율을 다시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사건 때 유건의 차를 거칠게 추적하던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제거했다.

러시아에 머물며 일을 진행해야 했기에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그 일의 주범인 세르게이를 찾아내 죽여 없앴다는 보고를 받았다. 알렉산드르를 생각해, 차마 그 주범이 세르게이라고 조직 내에 공표할 수는 없어 비밀리에 처리를 지시했다.

일이 마무리되고, 이제야말로 은율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에 발을 들이려 했다.

은율의 이모인 정가영만 없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그녀는 칼과 그의 조직이 한국에 발을 들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러시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신생인 기업이었다. 한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회사를 가진 그녀의 힘과 인맥은 상상 이상이었다.

가영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하나뿐인 혈육이자 쌍둥이였던 여동생의 죽음이 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칼이 나영의 자식들 근처에 오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그리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나영의 원수나 다름없는 칼에게 어떻게든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은율과의 만남을 저지하는 거였다.

칼은 또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에 적잖이 분노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번에야말로 그 누구도 함부로 자신과 제 아들을 건들지 못하게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더는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직접 제 아이를 만지고, 안아 주고, 사랑한다 말해 주고 싶었다.

단 한시도 잊은 적 없었던 사랑하는 아들, 은율을 만나기 위해 마지막 8년의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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