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Stunt/Dissolve
사건 관련 조서를 작성하는 일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은율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성실하게 답했고, 옆에 있던 진환도 함께 조서를 작성했다. 진환은 은율을 데리고 나오면서도 담당 형사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맨발인 은율에게 급한 대로 운동화를 하나 사 신겨 집으로 돌아온 진환은, 현관에 그대로 못 박혀 버렸다. 얇은 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담요를 걸치고 있던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옆을 지나려던 은율이 아차하며 진환에게 미안해했다.
“저, 그게…….”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집 안 꼴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현관 앞은 갖은 흙 발자국으로 가득했고, 넓은 거실에는 유리 파편이 정신없이 흩뿌려져 있었다. 현관에서 보이는 계단 쪽은 층계에 움푹 파인 곳도 있어서, 당시 얼마나 격렬한 싸움이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은율은 집 안 꼴이 엉망이 된 게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을 납치하기 위해 왔던 게 아닌가. 진환이 제게 화를 내고 탓해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진환이 돌연 몸을 돌려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은율을 껴안았다. 그가 한 팔로는 은율의 허리를 꽉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들어가지 말자.”
진환의 목소리는 낮게 떨리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은율보다도 그가 더 질색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진환의 품에 안겨 눈만 굴리던 은율이 그의 어깨 너머로 집 안을 바라보았다. 입구에서부터 진입이 어려울 지경이니 치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해 두어야 밤에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진환이 제 품에서 은율을 떼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은 사람 시켜서 치우게 할게. 오늘은 다른 데서 자자.”
은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여러모로 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진환의 셔츠 앞을 잡았다.
“……미안해요.”
“그런 말 하지 마.”
진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 위를 제 손으로 덮었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환은 그렇게 말하며 애써 웃었다. 그가 돌아서서는 현관 선반에 있던 은율의 안경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진환은 한 손에는 그것들을, 다른 한 손으로는 은율의 손을 잡으며 그대로 집을 나섰다.
은율을 차에 태우고 호텔로 향하며 진환은 곳곳에 전화를 돌렸다. 저택 담당 청소업체에 연락해서 대대적인 청소를 의뢰했고, 경비업체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안 점검 및 보수를 요청했다. 또한 이전에 은율을 ‘이유건’으로 만들기 위해 들렀던 호텔에 전화를 걸어 급히 스위트룸을 예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한 진환은 은율에게 담요 대신 자신의 재킷을 입히고는 그대로 키를 받아 곧장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 그 와중에 은율의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맨다리에 자꾸만 수많은 시선이 닿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스위트룸에 다다른 진환은 은율의 팔을 잡아 얼른 안으로 끌어당기고는 문을 닫았다.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놀란 은율이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진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은율을 번쩍 안아 들더니 그대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은율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진환은 익숙한 구조의 거실을 지나 침실에 다다랐다. 은율을 그대로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진환이 곧장 은율의 입술에 제 입을 가져갔다.
“형…! 흡…….”
오는 내내 말도 없고 가라앉은 분위기만 자꾸 풍겨 와 괜히 주눅 들어 있던 은율은, 잔뜩 흥분한 진환의 혀가 제 입 안을 탐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진환은 은율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의 양 손목을 두 손으로 꽉 잡아 누른 채 정신없이 혀를 놀렸다.
입 안의 어느 한 곳 그 혀가 닿지 못한 곳이 없었다. 입 안 곳곳을 핥고 빨고 흡입하면서도 진환의 열감 어린 눈은 오롯이 은율의 눈동자를 담고 있었다.
진환이 은율의 혀를 쭉 빨아 들이다 놓아주며 그 입술에 몇 번이고 짧게 입을 맞췄다. 마치 꿀을 발라 놓기라도 한 것처럼 은율의 입가를 핥고 또 핥았다.
“흐읏…….”
은율이 숨을 헐떡이며 달뜬 눈으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진환은 어딘가 괴로워 보였다.
“왜…… 그러세요?”
손을 뻗어 진환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지만 두 손이 단단히 짓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은율이 눈만 깜빡이며 진환의 얼굴을 살폈다.
“율아…….”
“예, 형.”
진환이 은율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형이…… 미안해.”
“형이 왜 미안해합니까?”
은율의 손목을 잡은 진환의 두 손이 잘게 떨렸다.
“형이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어. 위험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게 왜 형 탓이에요?”
진환이 은율의 손을 풀어주며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은율은 진환의 등에 제 팔을 둘러 토닥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마 제가 원래 살던 집이었다면 반항도 제대로 못 해 보고 바로 붙잡혀 갔을 겁니다. 형이 그 집에서 살도록 해 줬기 때문에 저도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냐, 내가 좀 더 신경 썼더라면……!”
“그래도 변한 건 없었을 겁니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은율은 자신이 미안하다고 해야 할 부분에서 진환 스스로가 미안해하니 어떻게 달래야 할지를 몰랐다. 차분하게 달래고는 있지만, 진환은 도무지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형, 얼굴 들어 봐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은율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환이 형.”
다정하게 부르니, 진환이 움찔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잡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올려다보며, 은율이 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전 형이 이런 얼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형 혼자서 뭐든 다 책임지려 하지 말고, 자책하지 마세요.”
진환은 말없이 은율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일은 순전히 제 일입니다.”
진환의 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찾아왔다. 은율이 혹여 자신의 일이니 상관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것을 빌미로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착한 은율이라면 자기 때문에 진환까지 위험해질까 봐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은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형 혼자 생각하지 말고, 저도 함께 생각할 순 없겠습니까?”
그가 내뱉은 말은 진환의 걱정을 단번에 날려 주었다. 홀로 자책하고 홀로 고민하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잠시나마 은율이 위험하다며 벽을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진환이 표정을 서서히 풀더니 이내 작게 웃었다.
“미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은율이 진환의 목에 팔을 둘렀다.
“괜찮습니다. 형의 이기심은 언제나 절 위한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진환이 은율을 품에 끌어안았다.
진환의 재킷을 입고 있어서인지 은율에게선 그의 향긋한 체취와 자신의 향수 냄새가 함께 풍겨 왔다. 그 묘한 향기에, 진환의 긴장 어린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 * *
“흐읏…!”
은율이 달뜬 숨을 삼켰다. 두 손으로 짚고 있는 통유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함과 달리 몸은 점점 달아오르기만 했다.
룸서비스로 저녁을 먹고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나온 후였다. 그대로 순백의 가운을 입은 채 거실 통유리 앞에서 야경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같은 가운을 입은 진환이 뒤에서 덥석 안아 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기에 노곤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뒤에서 안아 오는 감촉이 기분 좋아 나른한 얼굴을 했더니만, 유리에 비친 그 얼굴을 보고는 진환이 돌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지금 이 상태다.
“핫!”
진환이 한 팔로 은율의 허리를 감아 붙든 채 다른 한 손을 가운 안에 집어넣어 그의 핑크빛 유두를 매만졌다. 은율은 그 감촉에 자꾸만 전신이 찌릿거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두 손으로 유리창을 짚고서 제 허리를 붙든 진환의 단단한 팔에 매달린 채 작은 신음만 흘려 댔다.
진환이 은율의 새하얀 목 뒤를 혀끝으로 살짝 핥아 올렸다.
“하으-!”
몸을 바르르 떠는 게 귀여워, 진환은 제 입을 묻고는 살짝 빨아 올렸다. 은율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젖히며 본능적으로 목덜미에 힘을 주었다.
약간 붉게 달아오른 자리에 뜨거운 바람을 후 불어넣으니,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부르르 떨어 댔다. 진환은 은율의 반응 하나하나에 만족하며 유두를 만지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힉!”
은율이 퍼뜩 놀랐다. 진환의 약간 차가운 손이 가운 안에서 그의 성기에 닿은 것이다. 그 손이 약간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성기를 매만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 고환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그것만으로도 은율은 크게 움찔하며 휘청거렸다.
“율아, 넘어지겠어. 잘 잡고 있어야지.”
진환이 귓가에 낮게 속삭이며 손으로는 은율의 고환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흐……읏…… 형이 자꾸…… 흣…….”
“형이 뭘?”
은율이 입술을 떨며 유리창에 비친 진환을 노려보았다. 장난스럽게 휘어진 눈이 얄밉기만 했다. 그러다 깜짝 놀라 당황한 얼굴을 한다.
“형, 바, 밖에서 보면 어떻게 해요?”
워낙 고층에 자리한 스위트룸이라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높다란 빌딩 꼭대기들뿐이었지만, 이 오밤중에 혹여 사람이 남아 있진 않을까 해서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 여기 유리 외부 코팅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이쪽 제대로 안 보여.”
“그래도…….”
“왜? 다른 사람이 볼까 봐 흥분돼?”
진환이 또 장난스럽게 말했다. 은율이 진환에게 붙들린 채 그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형은 또……! 읍……!”
새빨간 입술이 돌아보니 참을 수가 없어, 진환은 그대로 키스했다. 은율의 입 안에 혀를 깊이 넣으니, 자동으로 그의 혀가 얽혀 왔다. 진환은 그것에 나름 보람까지 느끼며 키스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은율의 고환을 잡았던 손을 미끄러뜨리듯 올려 그의 성기를 잡았다.
은율이 크게 들썩였다. 진환은 한 손에 부드럽게 잡힌 은율의 것을 달래듯 만져 대었다. 키스에 빠진 은율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그 몸이 기분 좋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아…… 율아……. 금세 커졌어…….”
진환이 입술을 섹시하게 핥아 올리며 은율을 바라보았다. 은율은 진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아래에서 느껴지는 열감에 힘겹게 헐떡였다.
“형이 자꾸…… 만지니까……. 흐응…….”
이제는 꽤 단단해진 그것을 한 손에 느끼고 있노라니, 진환의 것도 점점 성을 내기 시작했다.
“율아, 이대로 숙여 봐.”
진환이 은율을 붙잡고 있던 두 손을 떼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 은율은 두 손으로 유리를 짚은 채 의문을 담아 뒤로 돌아보았다. 진환은 한 손으로는 그의 허리를 잡아당기고 한 손으로는 그 등을 살짝 눌렀다. 은율은 그저 진환의 손길대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허리를 내린 후 두 손으로 유리를 짚었다.
진환은 은율의 엉덩이를 가린 가운을 들춰냈다. 탐스럽고 탄력 있는 엉덩이가 두 눈에 들어차니 극도의 흥분이 휘몰아쳤다. 은율은 제 엉덩이가 서늘하게 드러난 것을 느끼고는 당황하며 돌아보았다. 그때는 이미 진환이 두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얼굴을 엉덩이 앞에 가져간 후였다.
“혀…! 흐앗-!”
진환을 말리려던 은율이 고개를 홱 젖히며 교성을 토했다. 은율의 엉덩이를 좌우로 벌려 구멍에 입을 맞춘 진환이 그 안으로 혀를 빳빳이 세워 집어넣었다.
듣기 민망한 소리가 자꾸만 은율의 귀를 자극했고, 구멍 입구에서 느껴지는 질척함에 몸이 멋대로 파르르 떨렸다. 진환의 혀가 핥아 댈 때마다 전신을 울려 대는 기분 좋은 저릿함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리를 짚은 손이 덜덜 떨렸다. 은율은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아 내며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두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혀엉…… 그만…… 흣…….”
진환의 타액으로 범벅이 된 제 구멍을 느끼며 은율이 짧게 신음했다. 진환이 그 구멍을 한차례 핥아 올리고는 입을 대어 쪽 흡입했다.
“흐응!”
강한 흡입에 입구가 살짝 딸려 간 상태로 그 안이 질척한 혀에 유린당했다.
“하으! 흣! 혀엉-!”
세워진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엉덩이 살이 경련했다. 저 안쪽에 있는 전립선까지 찌릿함이 퍼져 자꾸만 아래쪽에서 감각이 사라져 갔다. 그저 묘한 쾌감만이 빙글빙글 맴도는 것만 같았다.
진환이 입을 떼고는 작은 구멍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잔뜩 젖어서 움찔대고 있는 구멍을 보고 있노라니 극도의 흥분이 몰려와, 아랫도리가 성을 냈다.
구멍 안이 약간 벌어져 입을 오물거리니 뭐라도 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제 것을 처박고 싶었지만, 아직은 좀 더 풀어 줘야 한다고 생각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검지로 입구를 문지르다 천천히 안으로 넣었다.
내벽을 밀어내며 들어오는 이물감에 입구가 순간적으로 꽉 조였지만 이내 편안히 받아들였다. 두어 번 왔다 갔다 해 보고는 손가락을 하나 더 넣으니 구멍 안이 움찔거렸다. 진환은 제 두 손가락이 안을 깊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홀린 듯이 보다가 그 안 깊숙이 자리한 은밀한 곳을 푹 찔렀다.
“하앗-!”
은율의 몸이 경직되고 저절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안의 내벽이 사정없이 두 손가락을 꽉 물었다. 진환은 꽉 잡힌 제 손가락으로 그곳을 몇 번이고 찔러 대며 동그란 엉덩이 곳곳을 핥아 댔다.
“흐응! 하아…… 아흥…! 하악-!”
구멍을 찔러 대며 다른 손을 은율의 앞으로 가져가 만져 보니, 이미 그의 물건은 빳빳이 서서 당장이라도 토정할 것만 같았다. 이젠 뒤로 너무 잘 느껴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진환은 질척해진 손가락을 빼내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창을 짚은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은율의 양 골반을 잡고는 제 성난 것을 둔덕에 살살 문질렀다.
그것을 느낀 은율이 움찔하며 유리창을 통해 진환을 바라보았다. 가운 사이로 훤히 드러난 진환의 가슴 근육과 흥분에 젖은 얼굴이 유달리 섹시해 보였다.
“율아…… 콘돔 없는데…… 넣어도 돼?”
유리창으로 진환이 은율과 눈을 맞추며 유혹하듯 물었다. 은율은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저도 흥분하는 것을 느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이 만족스럽게 웃는 낯으로 제 것의 끝을 은율의 입구에 맞추더니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흣…… 아아-!”
입구를 벌리던 그 커다란 것이 제 안을 채우는 느낌은 언제나 생소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이 안을 완전히 점령하고 움찔거릴 때면 이상한 포만감까지 느껴져 자신이 이상한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진환의 것이 뿌리까지 완전히 들어차 버렸다. 진환은 안쪽 내벽이 제 것을 야무지게 감싸는 것을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만 같았다.
“율아, 움직인다…?”
안쪽을 꽉 채운 느낌을 온전히 느끼며 숨을 몰아쉬던 은율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 잠깐만, 형……. 하아……. 움직이지……! 흐읏!”
진환이 제 것을 스르르 빼내기 시작하니 은율이 크게 움찔하며 구멍 입구에 힘을 꽉 주었다. 진환은 제 것을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꽉 무는 그 느낌에 전율하며, 귀두만 남기고 뽑아내었던 제 것을 안으로 단숨에 박아 넣었다.
“하악-!”
은율이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휘었다. 치고 들어온 그 끝이 은율의 전립선을 정확히 때려 댔다. 진환이 유리창에 비친 은율의 놀란 얼굴을 보며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제 골반과 은율의 엉덩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거실 안에 색스럽게 울려 퍼졌다.
“하읏! 흐응-! 혀엉, 너무 세…! 하아앗-!”
빠르게 퍽퍽 박아 대니, 은율이 눈물 담은 눈으로 유리창에 비친 진환을 바라보았다. 진환은 너무 세다는 그 말에도 강약을 조절하지 않았다. 정작 은율의 깊은 곳을 좋아 죽을 정도로 느끼게 해 주려면 세게, 깊이 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해 줘?”
다정하게 물었다. 은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환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거짓말쟁이.”
“히앗-!”
진환이 좀 더 속도를 냈다. 은율은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꿰뚫리고 있는 것은 아래쪽인데, 정작 머릿속이 달콤한 초콜릿으로 치대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율이는, 후우…… 이렇게 세게 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닛…! 흐아아-! 하악! 아니야아…! 흐읏!”
“여긴 당장이라도 쌀 것 같은데?”
손을 앞으로 뻗어 은율의 단단한 성기를 꽉 쥐니 어깨를 퍼득거리며 반응한다.
“한 번 먼저 갈래?”
은근히 물으니 은율이 왜인지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힘겹게 제 뒤에 선 진환과 눈을 맞추었다.
“형이랑…… 같이…… 하읏…….”
진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는, 한 팔로 은율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제 품에 밀착시켰다. 그대로 앞으로 조금 다가서서는 은율이 선 채로 유리창을 짚게끔 했다.
갑자기 일으켜진 은율은 제 안에서 진환의 것이 휘어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 이상한 감각에 몸이 절로 경직되었다. 진환과 유리창 사이에 갇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진환은 은율의 목덜미를 핥아 올리며 아래에 속도를 더했다. 유리창에 비친 은율은 가운의 넉넉한 소매가 팔 중간쯤에 걸쳐져 그 옷이 어깨뼈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앞을 모두 열어 둔 채 알몸을 여실히 보이고 있으니, 흥분은 배가 되었다.
진환의 것이 은율 안에서 그 부피를 더해 갔다.
“흐앗…! 형…… 거어…… 커졌…! 하읏!”
진환은 은율의 성기를 살살 어루만지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율아, 유리창 밖에서 누군가 우릴 보고 있다고 생각해 봐.”
진환이 그 말을 하자마자, 은율은 깜짝 놀랐다. 그가 크게 흔들리는 눈으로 창밖의 건물들을 훑어보았다. 거리상으로도 그렇지만, 외부 코팅 때문에 이쪽이 보일 리 없음에도, 진환의 말을 떠올리자마자 순식간에 부끄러움과 흥분감이 확 치고 들어왔다.
“읏…… 너무 조이는데?”
제 것을 꽉 물고 떨어 대는 내벽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흥분했어?”
진환은 낮게 속삭이며 세게 안쪽을 팍 쳐 주었다.
“하아아-!”
유달리 높은 교성이 진환을 고양해 주었다. 그 교성 하나만 갖고도 몇 번이고 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환이 애써 아래쪽을 진정하며 은율에게 물었다.
“형이랑…… 하아, 같이 갈 거야?”
은율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게 너무 귀엽고 기특해, 그의 귓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선 은율의 성기를 꽉 잡고 귀두 끝을 엄지로 막아 버렸다.
“핫!”
“못 참아서 싸 버리는 일이 없도록 꽉 잡아 줄게.”
은율이 숨을 몰아쉬며 약간 원망이 담긴 눈으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은율의 성기를 쥔 손에 힘을 더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은율의 가슴팍을 붙잡고 유두를 간질였다.
“아앗-! 거긴……! 흐응!”
가슴을 울리는 찌르르한 쾌감에 아래쪽의 거친 쾌감까지 치고 올라오니 자꾸만 입이 벌어지고 교성이 터져 나왔다. 생리적인 눈물과 함께 입가에서 흘러내린 타액이 턱 선을 타고 내려갔다. 진환은 그것을 혀끝으로 핥아 주며 아래쪽에 바짝 힘을 주었다. 점점 사정감이 진환의 눈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율아, 흣…… 밖에…… 쌀게.”
여차하면 제 것을 뽑아낼 수 있도록 은율의 가슴을 붙든 손을 풀고 뒤로 조금 물러나려 했다. 은율이 풀어지려는 진환의 손을 붙들고는 고개를 저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유리창에 비친 진환을 마주 보았다. 그가 진환의 손등 위를 덮은 제 손으로 깍지를 끼웠다.
“안에…… 형 거…… 내 안에…….”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기분 좋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움직여 댔다.
“하으으-! 하앗! 아아-!”
“율아, 흣, 너무 좋아, 율아.”
사정감이 몰려옴과 동시에 제 것의 움직임을 더 빠르게 했다. 은율의 느끼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퍽퍽 쳐 대니, 그의 것이 진환의 손에서 몇 번이고 움찔했다.
그리고 이내, 진환은 자신의 것이 크게 부풀며 토정하는 순간에 맞춰 은율의 것을 놓아주었다. 은율이 몸을 크게 젖히며 절정에 달한 교성을 내질렀다.
“하아아-!”
“읏…!”
두 사람의 것이 하나라도 된 것처럼 함께 정액을 뱉어냈다. 진환과 은율의 몸이 바짝 밀착한 채 움찔댔다.
진환은 은율을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그의 것이 유리창을 향해 뱉어 내는 말간 액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제 것이 내뱉은 액이 은율의 성기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는 것 같은 묘한 황홀감을 가져다주었다.
진환이 제 품에 반쯤 늘어진 은율의 얼굴 여기저기에 버드키스를 해 대며 속삭였다.
“좋았어?”
은율이 풀린 눈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때마다 이런 걸 물어보면 꼭 좋았다고 표현을 해 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정을 담아 짧게 키스했다. 늘어진 은율의 혀가 움직이려 애쓰는 게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입술을 떼고서 은율에게서 제 것을 천천히 빼내었다. 은율이 유리창을 두 손으로 짚으며 파르르 떨었다. 질척한 정액이 가득 묻은 진환의 것이 빠져나가자, 벌어진 구멍에서 그의 것이 꿀렁 뱉어졌다. 그것은 은율의 사타구니를 따라 허벅지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를 본 진환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죽어 가던 그의 것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숨을 몰아쉬며 이제 유리창에서 떨어지려던 은율이 창에 비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상태를 본 은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엉덩이를 살짝 내밀어 주니, 진환이 유리창에 비친 은율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사실은 서서 해 본 적이 처음이라 진이 빠진 참이었다. 하지만 진환의 것을 보니, 잔뜩 고민하고 있을 그를 생각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환은 잔뜩 고민하더니 갑자기 은율을 뒤에서부터 꽉 끌어안았다.
“우리 율이…… 너무 좋아…….”
“저도……! 하아-!”
또다시 두 사람의 치대는 소리가 스위트룸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은율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에게 팔베개를 해 준 채 끌어안고 있던 진환이 은율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무슨 생각 해?”
손을 들어 은율의 약간 상기된 볼을 쓰다듬어 주니, 기분 좋은 듯 눈을 스르르 감는다.
“하진이는…… 괜찮겠죠?”
역시나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괜찮아. 금방 연락 올 거야.”
은율에게는 하진의 휴대폰이 도로에서 발견된 것도, 그가 납치되었을지 모른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은율이야말로 납치될 뻔했다가 겨우 빠져나온 상태였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꽤 피곤할 것이다. 그런 그에게 신경 쓸 일을 만들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진환이 은율의 머리를 쓸어 주며 그를 꼭 안아 주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자.”
포근한 가슴팍에 살을 맞대고 고개를 끄덕인 은율이 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직전에 수하 씨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분명 제 연락처를 알 리가 없는데도…….”
그 말에 진환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수하? 이수하?”
“예. 스턴트팀에서는 제 연락처를 준 적이 없다는데…… 뭔가 일부러 불러내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진이가 집에 있으라고 당부한 후라서 거절하긴 했는데 좀 마음에 걸리네요.”
진환이 수하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굴렸다. 은율이 한 말처럼 진환 역시 수하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은율에게 관심을 가진 게 과연 우연일까?
진환이 말이 없자, 은율이 눈을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약간 찌푸린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진환이 얼른 웃는 낯을 했다.
“형이 알아볼게. 별일 아닐 거야.”
일단은 안심시키고 재우기로 했다. 진환은 제 몸에 밀착해 있는 은율의 등을 쓸어 주며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점점 잠이 쏟아지는지, 은율이 곧 눈을 감았다.
진환은 은율이 곤히 잠든 것을 보며 다시 얼굴을 굳혔다.
‘이수하…….’
수하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뿌득 갈았다. 그가 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면 절대 멀쩡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진환은 은율의 머리를 살짝 받쳐 들고는 조심스레 그 밑에 베개를 대어 주었다. 이불을 끌어와 그런 은율의 몸을 덮어 주려 할 때, 그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스턴건 때문에 생긴 붉은 반점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납치되던 과정에 대해서는 경찰 조서를 작성할 때 이미 한차례 들었기에 그가 반항하다 스턴건을 맞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작긴 하지만 이렇게 흉터까지 생겨 버렸다.
진환은 그 상처를 손끝으로 살짝 매만지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은율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바로 옆에 있지 못했다는 게 너무도 한스러웠다.
진환은 손을 거두고서 은율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포근한 이불에 싸여 고른 숨을 내뱉는 은율의 볼에 짧게 키스하고는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알몸 위에 흰 가운을 걸치고 침실을 나온 진환은 방 안으로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러고선 거실에 나와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의 신호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접니다.”
건너편에서 평소와 달리 다소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안 그래도 그 건 때문에요. 아무래도 관련자가 아닐까 싶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 형사님 통해서 조사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진환이 침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본인 말로는 그 일이 있기 직전에 연락처도 알려 주지 않은 사람이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불러내려고 했다는데……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겠네요.”
* * *
“헉…… 헉…….”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왔더니 숨이 차서 호흡이 턱턱 막혔다.
숨을 몰아쉬며 호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수하는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누른 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구석에 몸을 기댔다.
올라가는 도중에 숨을 고르며 이제까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반팔 재킷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안에 있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꼭대기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하는 그 층에 단 하나뿐인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건장한 외국인 두 명이 열중쉬어 자세를 한 채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수하를 알아본 두 남자가 잠시 기다리라는 듯 눈짓하고는 문을 두 번 노크했다. 문 너머에서 한 남자가 굵직한 목소리로 뭐라 말하자, 보초를 서던 외국인 하나가 대답했다.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진 건지, 곧 문을 열어 주었다.
수하는 긴장한 낯으로 안에 들어갔다가, 입구 근처에 서 있던 스킨헤드의 남자를 보고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그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는, 그의 손짓을 따라 그대로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 다다른 수하는 걸음을 멈추었다. 거실에는 1인용 소파에 앉은 어두운 회색 머리의 외국인 남자 한 명과, 그 오른쪽 대각선의 3인용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한국인 청년이 있었다.
검은 셔츠에 검정 바지만 갖춰 입은 복장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어두운 회색 머리의 남자가 수하를 바라보았다. 남자와 대화 중이던 한국인 청년도 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이수하?”
청년이 놀란 얼굴로 회색 머리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왜 연예인이 여기 있어?”
수하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지금, 저 남자에게 반말한 거야?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수하는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정렬해 있는 검은 정장남들이 혹시라도 소음기 달린 총이라도 꺼내는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오히려 웃는 낯으로 한 팔로 제 턱을 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잠깐 날 좀 돕고 있어. 마침 은율이가 그의 대역을 하고 있다고 해서 말이야.”
수하는 K, 아니 칼의 말을 들으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도 은율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인가?
칼이 손끝으로 하진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이수하 씨.”
그의 말에 수하가 어정쩡하게 다가가서는 하진과 약간 떨어져 앉았다. 칼이 다리를 꼬고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이수하 씨는 은율이에게 별로 신뢰가 없나 봐요?”
수하가 움찔했다.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은율이가 이수하 씨 대역배우라서 친한 줄 알았더니만.”
“그게…… 은율 씨가 경계심이 좀 많더라고요.”
볼을 긁적이며 말하자, 칼이 작게 웃었다. 그것은 비웃거나 기분 나쁨을 표현하는 웃음이 아니라, 뿌듯해하는 웃음이었다.
“우리 은율이는 참 야무지기도 하지.”
수하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칼의 눈치를 살피며 수하가 눈을 굴렸다. 그는 대체 왜 서은율이라는 스턴트맨에게 집착하는 걸까?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인 거지? 하나하나 캐묻고 싶었지만, 자신의 무시무시한 스폰서에게 차마 그런 것까지 물을 수는 없었다.
칼바노아 알리예프와 수하가 계약관계가 된 것은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은율이 대역을 뛰어 주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시켜 그와 은밀하게 접촉한 칼은 고액의 스폰을 제시했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남자가 남자 배우를 스폰 하는 경우는 심심찮게 있었지만 보통은 그 경우 동경, 애정, 혹은 성관계를 위함이다. 그와 달리 칼은 수하에게 아주 간단한 조건을 내걸었다.
대역 스턴트맨 서은율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그와 친해질 것.
또한 서은율과 관련된 모든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
나중에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하나 싶어 처음에는 잔뜩 긴장했지만, 막상 손을 잡고 보니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개런티의 좋은 배역을 가져다줌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출연하는 영화에는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수하의 통장에 매달 거액의 돈을 꽂아 주니, 이제는 고작 그 정도 일에 이만한 보수를 받아도 되는 게 맞는지 걱정될 정도였다.
한동안은 은율에 대해 다방면으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건진 것은 별로 없었다. 정식 스턴트맨으로 액션스쿨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었고, 스턴트팀에서도 그는 알바생이라 언제나 함께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스턴트팀이나 액션스쿨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는 게 어렵게 되어 답답하던 차, 문득 이진환이 떠올랐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은율이 아닌 그에 관해 묻고 다니다 보니, 예상외의 수확이 있었다.
그가 스턴트맨 서은율을 굉장히 아끼며, 그에게 유달리 다정하게 구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는 것이었다.
간혹 여자 스태프들은 두 사람이 사귀는 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기도 했다지만, 워낙 연애와는 담을 쌓은 남자로 정평이 나 있는 이진환인지라 그 소문은 금세 사그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수하는 생각이 달랐다. 진환이 은율을 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두 사람을 그저 친한 대역배우, 친한 동생 사이라고만 추측했을 것이다.
은율은 몰라도 진환은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비교해 대는 통에 싫어도 이진환을 신경 쓸 수밖에 없던 수하는 그의 변화에 적잖이 놀랐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수하의 눈에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예상대로 칼은 진환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은율의 주변을 맴도는 진환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이내 은율이 그의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칼은 한국에 입국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수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니 은율을 전화로 불러내어 보호하고 있으라는 연락이었다.
미리 그에게 은율의 휴대폰 번호를 받아 놨던 덕에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영화감독의 이름을 팔아도 집 밖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칼에게 이를 보고하니, 우선 그의 집으로 가 보라고 명했다. 차를 끌고서 이전에 조사해 둔 진환의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니 웬 경찰차와 경호업체 차량 몇 대가 버젓이 서 있었다. 진환의 집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저 멀리 현관 쪽에는 결창이 검은 정장의 이들을 포박해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수하는 그대로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와서는 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심각한 목소리로 알겠다고만 대답하며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후 다음 연락을 받은 게 바로 조금 전이었고, 수하는 부랴부랴 선글라스만 챙겨 차를 몰아 이곳에 도착했다.
수하는 칼을 힐끔 보았다. 진환의 집을 지나쳐서 보고했을 때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심각하고 무서울 정도였기에 뭔가 큰일이 벌어졌구나 했는데, 지금은 평온한 표정을 한 채 은율의 이야기 하나로 따뜻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당최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수하 씨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하자면, 은율이를 노리는 자들이 있어요. 이번에 한발 늦긴 했는데, 워낙 대단한 아이다 보니 알아서 잘 대처한 모양입니다.”
칼이 기뻐하는 낯으로 싱긋 웃었다. 수하는 그 미소에 일순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끼면서도, 의아했다.
‘뭐지, 이 팔불출이 아들 자랑하는 것 같은 느낌은?’
수하는 칼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은율과는 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이렇게 관심과 집착을 보이는 것인지, 왜 자신에게 거금까지 들여가면서 은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애당초 칼이 은율에 관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미리 못 박아 둔 탓에 캐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칼이 돌연 싸늘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수하에게 향한 게 아니라,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들이 만일 내가 생각한 이유 때문에 그 아이를 노리는 거라면, 이대로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누구 짓인지 짐작하고 계신 겁니까?”
수하가 물었다. 칼이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내리떴다.
“심증만 있죠.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아무래도 당시 처리하던 부하들 중에 스파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칼의 눈동자에서 흉흉한 빛이 새어 나왔다.
“정말 그 사람이라면 이번에야말로…….”
공기의 압박감이 달라졌다.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수하는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칼이 고개를 들더니 싱긋 웃었다.
“뭐, 이 이상은 이수하 씨가 굳이 알 것 없습니다. 오늘 부른 건, 이수하 씨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예요.”
수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칼이 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우 이진환이 은율이와 무슨 관계인지, 어떤 영향력을 가졌는지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수하는 칼의 시선을 통해 그 대답을 내놓은 것이 제 옆에 앉은 청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자신보다는 더 사적으로 은율이나 진환과 알고 지내는 사이이리라.
칼의 시선이 이번엔 수하에게 향했다.
“하지만 난 그 이진환이란 사람의 객관적인 평가도 필요해요. 이수하 씨, 당신은 이진환을 어떻게 생각하죠?”
수하가 눈을 깜빡이다 신중하게 물었다.
“제가 뭔가를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습니까?”
제 옆에 앉은 청년에게서 충분히 말을 들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이죠. 업계에서 객관적으로 그를 봐 오고 평가했던 당신이라면 내게 필요한 대답을 해 줄 수 있겠죠.”
칼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당신의 대답에 따라 은율이 곁에서 이진환을 치워 낼지, 그대로 둘지를 결정할까 해요.”
* * *
이른 오전, 은율은 잠에서 깨어 제 옆을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허전함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워낙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보낸 탓인지 온몸의 근육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은율은 침대에서 내려서며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었다. 전날 밤의 일이 떠올라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침실에 연결된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올 때까지도 진환은 방에 돌아오질 않았다. 은율은 젖은 머리를 대충 털고 흰 가운을 챙겨 입고서 방을 나섰다.
스위트룸에는 은율 혼자였다. 언제 나간 것인지, 진환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은율은 약간 서운한 느낌이 들어 한숨을 내쉬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 소파 앞 유리 테이블에는 자신의 휴대폰과 안경이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8통이나 와 있었다. 누군가 싶어 확인하려 할 때, 때마침 전화가 왔다.
선명하게 뜬 ‘이모님’이라는 세 글자.
은율은 잔뜩 긴장한 낯으로 심호흡을 하며 그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받자마자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은율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움찔했다.
-지금 어디니? 집이니?
“아뇨, 밖입니다.”
-위치 불러. 데리러 갈 테니까.
가영의 말에 은율이 움찔했다. 가영을 직접 만나는 것도 그렇지만, 데리러 온다고 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거기다 자신이 나영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해 준 후 처음 연락받는 것이었다. 어떤 얼굴로 그녀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저, 무슨…… 일이신지 여쭤도 될까요?”
조심스레 물었다. 건너편에서 가영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네가 이유를 묻고 나왔어?
은율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여태껏 나영이 죽은 것이 제 탓이라고 생각해 왔던 은율로서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영에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른 이의 자식을 키워 준 것도 모자라, 피 한 방울 이어지지 않은 자신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다. 죄책감이 배가 되어 은율을 덮쳐 왔다.
-하진이와 지희에 대한 중요한 일이야. 잔말 말고 나와.
인심 썼다는 듯 말을 툭 던진다. 은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애들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
하진과 연락이 안 된다는 것 때문에도 불안감이 치솟던 중이었다. 혹여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가영이 연락한 것은 아닐까.
-만나서 이야기하자. 위치는?
차가운 물음에 은율이 움찔하며 고민하다가, 결국 호텔 근처에 있던 빌딩 하나를 대신 알려 주었다.
-30분 걸릴 거다. 준비하고 있다가 전화하면 바로 나와.
그 말만을 남기고는 전화를 툭 끊었다.
은율은 전화가 끊어진 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영이 하진과 지희의 일로 자신을 굳이 만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가늠해 보았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자신과 그 아이들이 실은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것까지 밝힌 가영이다. 분명 더 이상은 아이들을 은율에게 맡겨 두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겠지.
거기다 은율을 납치하려는 게 그녀가 말했던 ‘K’라는 사람의 소행이라면, 하진과 지희까지 말려들지 않도록 하라며 윽박지르겠지. 어쩌면 강제로라도 두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하진은 이미 그녀와 함께 있는 게 아닐까? 그녀의 지시로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는다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정신이 한없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하진이 그럴 리도 없거니와, 연락이 되지 않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건대 자신의 추측이 틀렸을 게 분명함에도 한 번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은 쉽게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은율은 손으로 짚은 제 이마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 그러다 머리를 두어 번 내젓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곧바로 진환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가던 도중,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십니까?”
얼른 물었다. 그때 마침 스위트룸의 현관문이 카드키를 인식하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한 손에 쇼핑백을 든 진환이 전화를 귀에서 떼며 대답했다.
“여기.”
진환이 살짝 웃어 보였다. 은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진환의 뒤로 웬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 * *
은율이 알려 준 빌딩 근처에 다다른 가영은 차를 몰던 기사에게 그 빌딩 앞에 차를 대라 일렀다. 예상대로 은율은 빌딩 입구에 서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영은 차량이 그의 앞에 멈춰 설 때까지 은율을 가만히 관찰했다.
여느 때처럼 동그란 안경에 답답할 정도로 긴 앞머리를 내린 은율은 평소와 달리 눈에 띄는 편이었다. 심플하지만 값나가 보이는 흰색 반팔 와이셔츠와 블랙진을 제 몸에 딱 맞춰 입은 덕이 분명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왼손에는 그가 차고 다니기엔 조금 고가로 보이는 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영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칼의 손에 회사까지 잃고 나니 이젠 그 불똥이 칼과 그의 아들 은율에게 간 것은 당연지사였다. 칼이 제 회사를 앗아 간 이유도 은율 때문이었고.
그런데 그 은율은 저리 보란 듯이 잘만 지내고 있었다. 자신은 매일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은데.
근래에는 자꾸만 나영의 얼굴이 꿈에 나왔다. 안치실에서 보았던 창백하기 그지없는 나영의 얼굴은 가영의 꿈속에서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저 서글프게 울기만 할 뿐,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붙잡으려 해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한창 그러다 깨고 나면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고, 머릿속에선 은율이 아른거렸다. 가영은 그것이 은율에 대한 나영의 원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모든 걸 알고 그리도 멀리했던 나영이가 몸 바쳐 구하려 했을 리가 없어. 저 애를 부탁한다는 말도 그저 마음이 여려서 했던 말일 거야.’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시체가 된 나영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저절로 이가 갈리고 은율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너만 없었어도…….’
속이 뒤틀렸다. 은율만 아니었다면 나영이 죽었을 리도, 칼바노아 알리예프가 제 회사를 앗아 갈 리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 원흉은 칼의 아들, 서은율이다.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은율의 머리채를 잡아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가영은 세르게이와의 거래를 떠올리며 화를 삭였다.
은율에 대해 티끌만큼이나마 남아 있던 애정은 제 회사를 칼에게 빼앗길 때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그와 칼에 대한 증오, 그리고 나영의 자식들에 대한 집착뿐이었다.
은율을 빌미로 칼에게서 회사를 되찾고 그를 해외로 보내 버린다면 하진과 지희를 회유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아니, 굳이 자신의 양자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기댈 곳은 이제 그녀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들이 이 한국에서 멀쩡히 꿈을 이루며 살아가려면 가영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뒷바라지를 해 주던 은율은 이제 다신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될 테니까.
붉은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가영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이내 비릿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녀의 미소는 차를 향해 다가오는 은율에게 닿아 있었다.
은율은 아무것도 모르는 낯으로 차 문을 열더니 안에 타고 있던 가영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가영은 인상을 쓰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얼른 타거라.”
은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곧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차가 출발했다.
가영은 차창에 비친 제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꾸며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휴대폰은 꺼 둬. 이야기하는데 방해받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예, 이모님.”
은율이 순순히 대답하며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가영은 그것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하며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는 잘 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충격받고 쓰러지기라도 했나 싶었는데.”
은율이 고개를 숙인 채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조금은 죄책감이 드니?”
은율의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떨렸다.
“네가 생판 남인 내 여동생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말이야. 그러고 보니 함께 죽인 서유건 그 인간도 네 아비가 아니구나?”
가영의 혀가 독기를 품었다.
“너 때문에 하진이와 지희가 부모 없는 애들이 된 거야. 알긴 아는 거니?”
그 말에 은율이 크게 움찔했다. 그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을 본 가영이 조소를 담아 말했다.
“그런 널 볼 때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알아? 너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불행해지는데! 나까지 휘말렸는데! 어떻게 화가 나지 않겠어?!”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은율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죄인인 양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가영은 은율의 그 모습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가영의 손이 은율의 머리를 향해 내뻗어졌다. 그녀는 은율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홱 젖혔다. 그의 파리한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
은율은 거칠게 잡힌 머리카락이 송두리째 뽑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차분히 물었다.
“하진이와 지희에 대한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뭡니까?”
그 질문에 가영이 코웃음을 쳤다. 남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제 동생들은 여전히 끔찍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가 찼다.
가영이 그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신경질적으로 빼내었다. 은율은 약간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가영을 바라보았다.
가영은 가지고 있던 클러치 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은율의 무릎 위에 던졌다. 은율은 그것을 받아 들며 의아한 눈으로 가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가운 눈을 한 채 은율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거부터 차. 이야기는 그다음이야.”
은율이 당황한 얼굴로 가영의 얼굴과 그녀가 준 물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은율의 무릎 위에 던져진 것은 경찰들이나 쓸 법한 단단한 수갑이었다.
“이걸 왜…….”
당연한 의문이었다.
가영이 인상을 팍 썼다.
“하진이가 납치된 건 아니?”
은율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금세 사색이 되어서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무슨…….”
가영은 은율을 보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 역시나 세르게이가 말한 것처럼 그는 아직 하진의 행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세르게이는 칼의 측근 중 하나와 오래도록 연이 닿아 있었다. 그 측근은 칼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르게이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현재 칼이 하진을 납치해 데리고 있으며, 아직 그와 함께 호텔에 머무르는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진의 휴대폰은 납치할 당시 도로에 버려진 탓에 은율은 그와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칼은 전날에 사람을 써서 은율의 휴대폰을 위치 추적해, 그가 있는 장소를 알아 두었다고 했다. 그 위치로 현재 하진과 함께 이동 중이라는 보고 역시 들어와 있었다.
현재로서는 은율의 휴대폰을 꺼 두었기에 위치도 잡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진이가 그 케이라는 놈한테 납치되어 있어. 널 데려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해 왔다.”
은율이 안경 너머에서 정신없이 눈을 굴려 댔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가영이 수갑을 턱짓했다.
“얌전히 차. 그게 그쪽 지시야.”
은율이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수갑을 손에 들었다. 곧바로 차지는 못하고 머뭇거리며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가영이 혀를 찼다.
“넌 하진이가 어떻게 되어도 좋은 거냐?”
은율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입술을 굳게 사리물고서는 이내 수갑을 제 손에 채웠다. 가영은 그가 스스로 수갑을 차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은율은 수갑을 찬 후 가영에게 어렵사리 물었다.
“하진이는 무사한 겁니까……?”
“그래. 지금은 무사해.”
칼은 은율 때문이라도 하진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가영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칼이 하진을 납치해서 데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나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은율에게 목을 매는 그 남자라면 하진을 인질로 삼는 것마저 할 수 없을 테지.
가영이 은율의 귀에 제 붉은 입술을 가져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하진이가 잘못되면 전부 네 탓이야.”
은율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가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바로 했다.
차가 이동하는 동안, 은율은 고개만 푹 숙인 채 전신의 힘이 다 빠진 사람처럼 차 문에 기대어 있었다. 가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고선 작게 미소 지었다.
도착한 곳은 주변에 건물 하나 없는 휑한 공터에 버려진 작은 상가 건물이었다. 3층 건물인 그것은 불이라도 났던 것인지 2층과 3층이 복구 불가할 정도로 크게 그을려 있었다. 그 아래 1층은 유리창도, 문도 부서진 채 철거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가영이 앞장서고, 운전사가 수갑을 찬 은율의 뒤에 섰다. 운전사는 은율이 도망가지 못하게 바짝 붙어서는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아 제 품에 갈무리했다. 그러면서 은율의 등을 밀어 걸음을 재촉했다.
가영은 습한 냄새가 가득한 1층에 들어서며 클러치 백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제 코와 입을 가렸다. 그 상태로 1층에 들어간 가영은 곧바로 아래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그녀의 발소리가 그 아래 깊은 곳까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가영은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듯,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어둑한 지하의 복도를 걸었다. 그 중 가장 끝에 있는 문 앞에 다다른 가영이 문을 열기 전, 은율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것 같은 그 모습에 가영이 비릿하게 웃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가득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한국 사람이었지만, 간간이 건장한 외국인도 끼어 있었다.
그들의 가운데에는 진갈색 머리의 외국인 남자가 의자를 두고 앉아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는데, 한쪽 눈에 안대를 한 탓인지 꽤 어두운 분위기를 가진 자였다.
안대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선 가영을 보며 씩 웃었다.
“잘 데려왔나 보네, 정 여사.”
남자가 친근하게 부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가영의 뒤에 서 있는 은율에게 닿았다.
“저 꼬맹이 실력이 그렇게 좋다지?”
세르게이 모로조프가 반쯤 피운 담배를 바닥에 툭 버리고는 은율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세르게이는 은율의 바로 앞에 제 얼굴을 가져간 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앞머리를 확 들추고는 안경을 벗겨 내었다. 세르게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주름진 눈꼬리를 휘었다.
“이야, 그놈 젊었을 때보다 더 잘생긴 것 같네. 확실히 그놈 자식이야.”
그 말에 은율이 놀란 눈으로 세르게이를 바라보았다. 세르게이가 능글맞은 얼굴을 돌려 가영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정 여사는 가도 돼.”
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나도 있겠어.”
“뭐 하러?”
가영이 시선을 돌려 은율의 맨얼굴을 바라보았다. 보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 둘 정도로 매력적인 얼굴이었지만, 가영에게는 그저 원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영은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않고서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놈이 지 아들놈 구한답시고 무릎 꿇는 모습은 봐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말에 은율이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아들……이라뇨?”
가영은 짙은 가학심을 느끼며 은율의 귓가에 속삭였다.
“널 쫓아다니던 놈. 그놈이 네 친아버지야.”
은율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부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 사람은…… 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 사고를…….”
“그래, 그놈은 네 친아버지이자 나영이와 서유건을 죽인 살인마야.”
갑작스러운 충격에 은율이 몸을 떨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사색이 되어서는 몸을 비틀거렸다. 그런 은율을 세르게이가 얼른 붙잡아 안았다.
“아직 그렇게 괴롭히지 말라고.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말이야.”
가영이 코웃음을 쳤다.
세르게이는 은율을 한 팔로 부축한 채 자신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그를 앉혔다. 주변에 서 있던 정장남들 중 하나가 다른 의자를 가져와 은율의 맞은편에 놓아 주었다. 세르게이는 그 의자에 앉아 은율의 안경을 흔들며 씩 웃었다.
“이름이 서은율, 맞지?”
은율이 수갑을 낀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긴 앞머리 사이로 세르게이를 마주 보았다.
“……하진이는요?”
세르게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영을 돌아보았다.
“하진이가 누구야?”
“동생.”
가영이 짧게 대답했다. 그제야 세르게이는 알아들었다.
“아, 칼 녀석이 데리고 있다는 그놈?”
은율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세르게이와 가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하진이는 그럼…….”
“동생은 칼바노아가 안전하게 데리고 있을 거다.”
세르게이가 손을 뻗어 은율의 답답한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얼굴이라 생각하며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너희들이 케이라고 이니셜 따서 부르던 놈에게 내가 원한이 좀 많거든. 그래서 놈이 안달하는 널 좀 이용하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제 아버지라고요?”
은율의 머리를 쓸어 주던 손을 내려 그의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 네 친아버지이자 케이트레이딩의 대주주, 그리고 러시아 거대 마피아 조직의 보스.”
은율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혼란이 극에 달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묘한 열감이 올라오는 것 같다.
세르게이는 은율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고 싶었다. 그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8년 전 그때, 네 양부모를 죽게 만든 건 나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은율보다 가영이 먼저 반응했다.
“뭐?!”
가영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가 하이힐을 신은 다리를 쭉쭉 내뻗어 세르게이에게 다가왔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이 죽게 만들었다니?!”
“아. 우리 정 여사가 아직 있었지, 참.”
세르게이가 빈정대며 가영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칼 때문에 죽은 줄 알고 있었겠네?”
천연덕스럽게 볼을 긁적이며 일어선 세르게이는 제 바로 옆에 다가서 있는 가영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나도 설마 그렇게까지 우릴 떨어뜨리려는 줄은 몰랐어. 덕분에 얌전히 아들놈만 납치해 오려 했던 우리 부하들도 큰일 날 뻔했잖아. 뭐, 결국 그때 그 사건을 뒤집어쓴 건 우릴 막으려 했던 칼의 부하들이었지만.”
가영이 멍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여태껏 그 사건의 주범이 칼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은, 사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일부가 경찰 조사 결과 칼의 부하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유건의 차를 왜 쫓았는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칼이 유건을 마피아와 결부시키지 않기 위한 조치였지만, 가영은 은율을 납치하려 했던 걸 숨기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이……!”
가영이 분에 못 이겨 손에 들고 있던 클러치 백을 높이 쳐들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가영이 그것을 세르게이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아악!”
그런 그녀의 머리채가 굵직한 손아귀에 잡혀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단정하게 올렸던 머리가 풀어헤쳐지고 그녀의 클러치 백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가영이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눈을 치떴다.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댕이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운전사였다. 가영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안경을 내던진 세르게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가영의 앞에 쭈그려 앉아서는 싱긋 웃었다.
짝-!
“악!”
가영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세르게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 그녀의 얼굴을 왼손으로 잡아 돌리고는 따귀를 한 대 더 올려붙였다.
짝-!
“그러게 내가 가도 된다고 했잖아.”
짝-!
“뭐 하러 쓸데없이 남아서 몰라도 될 이야기를 주워듣고 그래.”
일부러 가영이 들으라고 했던 이야기면서, 괜히 그녀를 탓했다. 어차피 이미 원하던 바는 달성했기에 모든 걸 잃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그녀는 그저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가영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가 벌벌 떨면서도 눈을 매섭게 치떠 세르게이를 노려보았다. 세르게이가 픽 웃으며 또 한 번 오른손을 들었다. 한 대 더 따귀를 치려던 세르게이의 오른손이 누군가에게 턱 붙잡혔다.
“그만하십시오.”
그 목소리를 들은 세르게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제 오른손을 붙든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쏟아진 앞머리에 가려 얼굴의 반이 보이질 않았다. 세르게이는 그에게 오른손을 붙들린 채 일어나 왼손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앞머리가 옆으로 흘러내리며 그 사이로 은율의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왜? 널 거리낌 없이 팔아넘기려 했던 여잔데, 정이라도 남아 있어?”
은율은 대답 없이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세르게이의 손을 놓은 은율이 제 턱을 잡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 옆을 지나쳐 가영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어앉고서 그녀를 향해 수갑 찬 두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가영이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은율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복잡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눈은 조금 전의 혼란스럽던 은율만큼이나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영이 이를 악물더니 은율의 손을 쳐 내고는 스스로 바닥을 짚어 일어섰다. 그녀가 불타는 듯한 눈으로 세르게이를 노려보았다.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세르게이가 씩 웃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은율의 옆에 선 세르게이가 그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고는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고선 은율의 하얀 볼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으며 가영을 비웃었다.
“그보다 애한테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사고 후에 죄 없는 칼을 악착같이 막아 내던 게 누구였더라.”
가영이 움찔했다.
표면적으로는 위험한 스토커에게서 은율과 하진, 지희를 지키기 위해 그의 한국 진입을 방해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하진도 그녀의 힘이 약해져 칼이 한국에 발을 들이게 될까 봐 전전긍긍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과거 사건의 주범인 칼이 은율을 데리고 가려는 과정에서 하진과 지희가 그 부모처럼 사고라도 당할까 봐 가영이 막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칼을 막는 내내, 하진과 지희를 제 호적에 올려 칼이 그들에게 섣불리 손대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저 자신은, 무엇보다도 칼이 그렇게도 원하는 은율을 그의 손에 순순히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거라면, 절대 넘기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넘기더라도 멀쩡하게 넘기진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사고 직후, 분노에 찬 가영이 선택한 것은 은율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어린 녀석이 아무 원조도 받지 못한 채 과연 두 동생을 뒷바라지할 수 있을까?
이미 유건의 친인척들은 그들에게 아무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그나마 연락할 수 있는 대상이 가영 자신이니, 곧 은율이 먼저 달려와 원조를 요청하며 애걸복걸할 것이라 예상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그 집안의 사망보험금도 일부 가로챈 탓에 은율의 생활은 빠듯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가영을 찾아오지 않았다. 생활이 힘들 테니 하진과 지희를 제게 보내라고 해도 그는 꿋꿋이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 말하며 웃었다.
기다리다 못한 가영이 직접 나서서 협박도 해 보고 돈을 빌미로 하진과 지희를 내놓으라며 난리를 쳐 보았다.
은율이라면 협박과 돈에 못 이겨 동생들을 팔아 버렸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하게 될 것이다.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심한 PTSD까지 갖고 있으니, 어쩌면 폐인이 되어 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되면 그때 칼에게 넘겨줘야지. 네가 한 짓 때문에 네 아들이 이 꼴이 된 거라고 그의 눈앞에 들이밀어 줘야지.
하지만 하진과 지희가 나서서 그녀를 은율에게서 떼어 놓았다. 두 아이는 피도 이어지지 않은 은율을 친형제처럼 아꼈고, 도리어 가영을 멀리하고 미워했다.
가영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웬만해선 은율을 건들지 않고, 하진과 지희에게만 연락하며 꾸준히 그들을 설득했다. 그들이 있으면 은율에게 짐만 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주지시켰다.
어차피 은율은 제 동생들이 없어지면 그들만을 보고 살아왔던 날이 길었던 만큼 좌절도 클 터였다.
좌절해. 절망해.
네가 무너져야, 나도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어.
하지만 칼은 예상보다 빠르게 제 회사를 집어삼켜 버렸다. 가영은 회사까지 빼앗아 간 칼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비가 쏟아지던 날, 술을 마시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은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PTSD의 영향으로 전화고 뭐고 받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은율은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이전의 비 오는 날과 달리 안정적인 톤이라, 더 열이 뻗쳤다.
어째서.
칼도, 너도, 어째서 그렇게 멀쩡한 거야.
난 이렇게 괴로워 죽겠는데.
그날, 제 여동생이 유건과 결혼하면서 당부했던 약속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은율에게 그가 유건과 나영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동생들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것도 모두 말해 주었다. 더불어 동생들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숨겨 왔다는 것까지.
다 쏟아내고서 미친 듯 웃어 대고 있는데, 예전부터 틈틈이 접촉해 왔던 세르게이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를 되찾고 칼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냐고.
삶의 의욕까지 꺾이려 했던 순간에 내민 그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가영은 이를 갈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칼이 그 사고의 주범이든 아니든, 모든 불화는 은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칼이든 세르게이든 은율을 노리는 바람에 그 사고가 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자꾸만 그 생각이 무너졌다.
은율은 그저 아무 죄 없는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치고 올라왔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위에 갈 곳 없는 분노를 덮어 애써 가리고 살았을 뿐.
“그동안 애를 참 못살게 굴었던데.”
마치 그간 가영이 은율에게 한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가영의 의아한 얼굴을 보고 있던 세르게이가 은율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어루만졌다.
“이런 착한 애를 솔선해서 수갑까지 채워 데려오고 말이야.”
세르게이가 친근한 얼굴로 은율에게 속삭였다.
“내가 죽여 줄까?”
은율이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쌓인 게 많았을 거 아냐. 그동안 참느라 힘들었지?”
세르게이의 눈가가 사악하게 휘어졌다. 품에서 돌연 총을 꺼내 들더니, 그것을 가영의 얼굴에 겨누었다. 은율이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바로 앞에 다가서 있는 세르게이의 진갈색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말만 해. 바로 죽여 줄게.”
은율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으며 총을 든 세르게이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왜? 대신 죽여 준다니까? 네가 죽이는 게 아니야, 내가 죽이는 거지.”
“싫습니다. 하지 마세요.”
은율이 빠르게 말하며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냥…… 그냥 보내 주세요.”
세르게이가 고개를 기울인 채 흥미롭다는 듯 은율을 바라보았다.
“너 여기까지 꾀어서 데려온 게 저 여자야. 너한테 괜히 분풀이하던 것도, 동생들 빼앗아 가려고 했던 것도, 아들이 친아버지를 원수로 알게끔 한 것도 저 여자라고.”
“당신이 필요한 건 저 아닙니까? 이모님은 상관없으니 그만 보내 주세요.”
세르게이가 기가 차 웃음을 터뜨렸다. 가영은 멍하니 서서 그런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은율은 세르게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총을 쥔 그의 팔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세르게이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며 웃었다.
“아, 정말…….”
그가 외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착해서 좀 짜증 나네.”
은율의 손에서 제 팔을 확 빼내더니 총을 든 손으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흣!”
은율이 숨을 삼키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콜록거렸다. 세르게이가 총을 든 채 몸을 돌리고는 의자를 향해 홀로 걸어갔다.
{그 새끼 여기 데려다 앉혀. 여자는 구석에 묶어 놔.}
그의 러시아어를 들은 건장한 백인 남자 둘이 은율과 가영을 향해 다가왔다. 한 명은 은율의 팔을 잡아 일으키고, 다른 한 명은 가영의 팔을 붙들어 끌고 갔다. 멍하니 있던 가영이 앙칼지게 외쳤다.
“놔! 놓으라고!”
백인 남자에게 잡혀 발버둥 치는 그녀에게 운전사가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는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
“조용히 입 다무시죠.”
“너! 대체 언제부터……!”
짝!
운전사의 단단한 손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가영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뱉었다.
“이제 네 뒤나 닦는 일도 다 끝났다고.”
그간 가영의 히스테리를 참아 오던 운전사는 애당초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세르게이가 붙여 놓았던 끄나풀이었다. 덕분에 세르게이는 그녀가 은율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 동생들을 차에 불러들여 뭐라 이야기했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가영은 살면서 맞아 본 적 없던 따귀를, 그것도 건장한 남자의 손에 연달아 맞은 탓에 골이 흔들리는 경험을 맛보았다. 그녀는 백인 남자의 손에 힘없이 끌려가 구석에 있는 의자에 묶이며 눈을 내리떴다.
그녀가 물기 섞인 눈을 들어 저 멀리 의자에 앉혀지는 은율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밝혀졌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세르게이는 그런 가영의 시선을 느끼며 웃는 낯으로 은율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가 위협적으로 총을 들이댄 채 빙긋 웃었다.
“자, 이젠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세르게이가 총구를 은율의 이마에 툭 댔다.
“내가 되도록 그놈을 미치게 만들고 싶거든? 널 어떻게 만들어야 그놈이 바닥을 설설 길까?”
총구가 은율의 이마를 지나 미간으로 내려왔다. 그 상태로 점점 왼쪽 눈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은율의 왼쪽 눈동자 바로 앞에 총구를 대며, 세르게이가 제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눈을 못 쓰게 만들어 놓으면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칼의 절망에 찬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은율은 제 눈앞에 있는 총을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처럼 세르게이의 얼굴에 똑바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왜…… 그 사고를 일으켰습니까?”
세르게이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숙여 웃었다.
“뭐 이리 담담해.”
세르게이는 여전히 총을 은율의 눈에 겨눈 채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까지 큰 사고를 일으키려던 건 아니었어. 적당히 차를 세우게 해서 너만 납치할 생각이었는데, 빗길이라 그런지 차들끼리 부딪치고 난리가 났더군.”
세르게이가 나이에 맞지 않게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다행히도 가장 중요한 넌 살아남았다기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의 눈이 돌연 싸늘하게 식었다.
“다시 널 납치하려고 병원으로 향하다 죽을 뻔했지만 말이야.”
자신의 대역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물러나야 했지만 어떻게든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세르게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은율이 천천히 눈을 감고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떨림도 들어있지 않았다.
“세르게이 모로조프 씨.”
세르게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오는 도중에 가영이 말했을 리도 없거니와, 이곳에 들어와서도 그의 이름은 한 번도 불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순간, 은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수갑 찬 두 손을 뻗어 제 눈을 겨누고 있던 총의 윗부분을 한 손으로 꽉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총의 안전장치를 채웠다. 그대로 총을 꽉 잡아 아래로 빠르게 내리치듯 세게 떨구니, 세르게이의 손에서 총이 빠져나왔다.
은율은 그것을 오른손으로 붙잡고서 세르게이의 다리 사이 공간에 제 한쪽 무릎을 댄 채 몸을 붙였다. 그의 왼손이 숙달된 사람의 그것처럼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장전했다. 그 상태로 세르게이의 멱살을 왼손으로 틀어쥐고 오른손의 총이 그의 턱 밑을 겨누었다. 한동안 총잡이 킬러의 스턴트 액션을 했던 경험 덕에, 그 동작은 모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근처에 포진해 있던 남자들이 움찔한 채 멈춰 섰다. 은율은 담담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세르게이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한국인 청년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세르게이는 제 턱에 닿아 있는 총을 힐끔 내려다보다 웃는 낯으로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어린애가 가지고 놀 만한 물건이 아닌데.”
“걱정 마십시오.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은율이 싸늘하게 말했다. 세르게이는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쏘지도 못할 텐데.”
은율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의 매력적인 미소가 세르게이를 비웃었다.
“정말 못 쏠 거라고 생각합니까?”
세르게이는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며,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 * *
대략 1시간 전.
은율은 호텔 방으로 돌아온 진환에게 달려가다, 그 뒤에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뒤에는 스킨헤드에 선글라스를 낀 외국인이 떡하니 서 있었다.
은율이 긴장한 낯으로 멈춰 서자, 진환이 문 옆으로 비켜서서 제 뒤에 선 남자에게 길을 양보했다. 스킨헤드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은율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은율은 당황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가 왜 이리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는지 모르겠다.
은율이 그와 진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환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는 은율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옷부터 갈아입자.”
들어오자마자 은율의 가운 차림이 신경 쓰였던 진환이었다. 그는 은율의 팔을 붙잡은 채 고개만 돌려 스킨헤드의 남자에게 말했다.
{적당히 앉아 계시죠. 금방 나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은율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온 은율은 진환의 손에서 제 팔을 빼고는 그에게 다급히 물었다.
“누구예요?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천천히 설명해 줄게. 일단 옷부터……!”
“환이 형!”
은율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답한 듯 말했다.
“저 지금 진짜……. 하진이도 납치되었다고 하고……. 대체 뭐가 뭔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는 은율을 진환이 꼭 안아 주었다.
“형 믿어. 다 괜찮을 거니까.”
그 말이 뭐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답답하게 쿵쿵거리던 심장이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심장 소리가 차분해지고 난 후, 은율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진환이 작게 웃으며 은율의 머리카락을 들어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은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환이 내민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진환은 셔츠와 바지를 깔끔히 갖춰 입은 은율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거실 소파 근처에 가만히 서 있던 스킨헤드의 남자가 그를 보고는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은율은 그가 왜 자신에게 저리 공손히 인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가늠하질 못했다.
진환은 은율의 손을 잡아끌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가 스킨헤드의 남자에게 건너편 소파를 권했다.
{일단 앉아요. 애가 불편해하니까.}
그제야 남자가 움직여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은율은 남자의 눈이 선글라스 속에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긴장한 은율의 손을 옆에서 진환이 부드럽게 잡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정면의 남자를 향해 있었다.
{아까 그거, 율이한테도 들려줘요.}
진환의 말에 스킨헤드의 남자가 품에서 휴대폰을 하나 꺼냈다. 그는 그것을 터치해 조작하더니, 곧바로 재생 버튼을 누른 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 *
진환이 남자를 만난 건 조금 전, 은율이 일어나기 전에 그를 위한 옷을 사러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이미 주로 이용하는 백화점의 총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어 오픈 예정 시간보다 좀 더 빠른 오픈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해당 백화점의 VVIP인 진환은 그렇게 홀로 백화점에 들어가 은율의 옷을 몇 벌 골라냈다. 그중 가장 무난해 보이는 한 벌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택으로 배송을 요청해 두었다.
쇼핑백 하나를 든 채 백화점을 나서서 주차장으로 향한 진환은 제 차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스킨헤드의 남자를 만났다. 진환은 전날의 납치범들과 한패인가 싶어 잔뜩 긴장했지만, 그는 오히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말없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 휴대폰을 의아한 얼굴로 받아 든 진환은 액정 화면에 녹음된 파일 하나가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를 한 번 바라보고는 그 파일을 재생했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진환은 깜짝 놀랐다.
녹음된 음성의 주인은 실종되었다던 하진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형하고 함께 있다고.’
진환이 스킨헤드의 남자를 바라보며 가만히 그 음성을 들었다.
‘난 무사해. 그리고 이걸 전달해 준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안심해도 되고.’
차분한 목소리의 하진이 사뭇 진지하게 이어 말한다.
‘이렇게 음성을 녹음해서 다른 사람을 보낸 건, 이쪽에 스파이가 있어서야. 섣불리 움직였다간 상대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자칫 도망치거나 다른 일을 벌일 위험이 있어.’
스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말에 진환이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게 있었어. 나도 혼란스럽지만, 형은 충격이 더 클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먼저 들어 줘. 형에게 들려주는 건 그다음이야.’
하진이 깊이 심호흡한다.
‘사실은…….’
* * *
은율의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진환이 옆에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휴대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하진의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어. 결국 그 사고를 일으킨 건 세르게이 모로조프야. 그 후 그 사람은 죽은 거로 되어 있지만, 이 사람 말로는 아마도 대역을 세워 죽은 척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고 해. 어제 형을 납치하려 한 것도 그 사람일 확률이 커.’
은율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납치되었다고 생각했던 하진은 오히려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머물고 있다고 했다. 8년 전의 사고를 일으킨 범인이라고 들었던 케이가 실은 은율의 친아버지였으며, 진짜 범인은 사실 은율을 납치해 케이를 협박하려 했던 이들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 후 죽었다던 남자가 실은 죽지 않고 때를 노리고 있었고, 어제의 납치 사건도 그의 짓이라는 얘기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오래도록 믿어 왔던 게 송두리째 거짓으로 다가왔고, 생각지도 못한 게 진실로 다가왔다.
가장 큰 혼란은 여태껏 왜 자신을 노리는지도 몰랐던 케이가 친아버지였다는 사실이었다.
녹음한 내용에는 케이라고 불리던 칼바노아 알리예프가 은율을 지키기 위해 친우이자 친형 같았던 유건에게 그를 맡겼다는 것, 그리고 8년 전, 은율이 전라도까지 가서 만날 뻔했던 이가 바로 그였다는 것 정도만 들어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은율의 머릿속은 심하게 복잡해져 버렸다.
‘형,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알아.’
은율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하진이 돌연 그를 불렀다.
‘곧 이 사람하고 같이 만나러 갈게.’
은율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제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당신도 뭐라고 말해 봐.’
‘음?’
낮은 목소리가 약간 멀리서 들려왔다.
‘형 불안하지 않게 뭐라고 말 좀 해 보라고.’
하진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내가 뭐라도 말하면…… 은율이가 안심해 줄까?’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은율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자, 말해 봐.’
‘어, 음…….’
하진과 함께 있는 남자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연다.
‘은율아.’
은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눈동자가 휴대폰에 닿은 채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아빠가 곧…… 만나러 갈게.’
얼른 입을 막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단어가 되지 못한 말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단지 제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그가 본인을 ‘아빠’라고 지칭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일까.
은율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남자가 물러났는지, 조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하진이 말한다.
‘형, 아마 지금쯤이면 그 여자, 아니 이모에게 전화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모는 세르게이로 추정되는 남자와 손을 잡고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 있는 남자에게 들으면 돼.’
하진이 잠시 뜸을 들인다.
‘……이모와 그자를 제대로 잡으려면 형이 도와줘야 해. 하지만 위험해서 난 반대야. 이 사람도 막상 제시하긴 했지만 다른 방법도 찾아보고 있어. 그러니까 이야기 들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말해 줘.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무리하지 마.’
그 말이 끝이었다.
진환은 은율의 눈가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 닦아 주었다. 숨을 참듯 눈물을 흘려 대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괜히 가슴이 시큰거렸다.
은율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 내며 스킨헤드의 남자를 마주 보며 영어로 물었다.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휴대폰을 품에 갈무리한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니콜라이 스미르노프. 니콜이라고 부르십시오.}
{니콜, 말해 주세요. 그 세르게이라는 사람을 잡으려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니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번엔 시계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위험한 일입니다. 들어 보시고 정 위험하다 싶으시면…….}
은율이 결연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세르게이는 분위기만으로도 자신을 내리누르는 젊은 한국인 청년을 노려보며 그 얼굴 위에 오버랩 되는 남자를 향해 이를 갈았다.
‘칼바노아!’
자신의 탄탄대로를 망친 남자.
자신의 눈을 도려낸 남자.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가려 했던 남자.
그 증오스러운 남자의 얼굴과 눈앞 청년의 얼굴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세르게이가 이를 악물며 제 턱에 겨눠진 총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방아쇠, 반쯤 당겨져 있습니다.”
그 말에 손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은율의 무감정한 눈동자가 세르게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그의 손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은율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것은 눈앞의 세르게이에게나 들릴 법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세르게이뿐만이 아니었다.
쾅-!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전원 손 들어!”
굵직한 음성과 함께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모두 하나같이 검은 복장에 보호구를 착용한 경찰특공대원들이었다. 열댓 명의 그들은 저마다 총기를 들어 당황한 정장남들을 향해 겨누었다. 다급히 품에 손을 집어넣던 그들이 낭패한 얼굴로 하나둘 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세르게이가 놀란 얼굴을 했다. 분명 건물 외부와 각 층마다 제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다. 한국의 경찰특공대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그들 모두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텐데.
거기다 밖을 망보던 이들 중에는 실력자가 상당한 데다, 각자 총도 갖고 있었다. 총소리 한 번, 소란 한 번 나지 않고 전원 제압되었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은율과 시선을 맞댔다. 분명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자신을 농락하고, 자신을 통해 모든 진실을 듣기 위해 그 처량한 모습을 연기한 거다.
그의 시선이 은율의 시계에 닿았다. 분명 그 안에 도청기가 들어 있을 것이다. 휴대폰을 끄게 했는데도 이곳을 찾아낸 것을 보면 GPS 역시 들어 있으리라 짐작됐다.
이가 갈렸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이, 너무도 생생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얼굴과 그 얼굴은 도무지 같은 사람의 그것처럼 보이질 않았다.
연기?
아까의 그 모습이 연기였다고?
오한이 들었다.
절망 어린 얼굴, 좌절하는 얼굴, 괴로운 얼굴, 분노한 얼굴, 그 수많은 얼굴을 마주해 왔던 세르게이다. 그럼에도 제 이름이 불리는 그 순간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전까지 보여 준 은율의 모습이 연기였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세르게이의 눈에,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는 스킨헤드의 남자가 보였다. 낯익은 얼굴에 세르게이의 얼굴은 한없이 일그러졌다.
{니콜라이…!}
이를 갈듯 상대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큰 의문 하나가 어이없이 풀려 버렸다.
그는 칼의 행동대장이자 암습에 뛰어난 남자였다. 그가 부리는 암습의 달인들과 함께라면 굳이 총을 쓰지 않더라도 한 명 한 명 제거해 나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어떻게? 칼은 제 측근들 중 누가 스파이인지 모르고 있었을 텐데.
은율을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스파이의 보고는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칼은 은율을 만나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행동거지에 관한 보고는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기에 믿을 만했다. 거기다 스파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칼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선 니콜라이가 은율의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은율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곁으로 특공대원 둘이 다가와 세르게이의 두 손을 앞으로 해서 손목에 수갑을 단단히 채웠다.
“이 사람이 주범인 겁니까?”
“예, 맞습니다.”
짤막하게 대답하며 은율이 총에 안전장치를 채웠다. 그 총을 특공대원에게 내밀어 건네주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총입니다.”
특공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들고는 은율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웬만한 이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수준의 실력자라고는 들었지만 분명 민간인이었다. 그럼에도 총을 든 사람을 수갑 찬 손으로 제압하다니. 특공대원보다 더 특공대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콜라이가 다가와 은율을 살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예, 멀쩡합니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답했다. 니콜라이 역시 작게 미소 지어 주고는 옆을 지나는 특공대원에게 말했다.
{수갑 열쇠는 아마도 저 여자가 가지고 있을 겁니다.}
특공대원은 니콜라이의 영어를 완벽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은율의 수갑과 가영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가 다른 특공대원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고 있는 가영에게 달려가 뭐라 말을 걸었다. 가영이 멀리서 은율을 바라보다가 클러치 백에서 작은 수갑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받아 든 특공대원이 도로 달려와 수갑을 풀어줄 때까지, 은율 역시 가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은율은 가영에게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약간 빨갛게 부어오른 제 손목을 매만졌다.
“율아!”
반가운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파리한 낯빛의 진환이 은율에게로 달려왔다. 은율이 알은체를 하기도 전에 진환이 달려들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젠장, 젠장, 젠장!”
진환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은율은 자신보다도 진환이 더 긴장했구나 하는 생각에 그의 등을 작게 토닥여 주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이런 거 다시는 하지 말자.”
“다시 할 일도 없습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세르게이가 은율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칼을 가장 효과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을 버려 가면서까지 그를 상처 입히려 할 리가 없었다.
다만 겉으로는 상처 입히지 않는다 해도 그 전의를 상실시킬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세르게이는 은율의 정신을 흔들기 위해 그간의 오해를 잘도 말해 주었고, 거기에 가영까지 가세해 졸지에 모든 의문을 풀어 주는 꼴이 되었다.
은율의 시계 속에 장치된 도청장치를 통해 모든 내용은 특공대 차량의 작은 본부석까지 생생히 전달되었고, 예정대로 모든 내용을 녹음했다.
물론 특공대의 원활한 개입을 위해, 니콜라이가 먼저 시계 속 GPS를 따라 빠르게 건물 근처에 도착했다. 그는 제 부하들을 데리고 마취 저격총 및 수면가스를 이용해 각 층의 이들을 미리 제압해 두었다. 그 덕에 뒤늦게 도착한 경찰특공대는 무리 없이 지하로 잠입할 수 있었다.
세르게이의 부하들이 섞여 있다지만, 대부분 부하로 삼은 지 오래되지 않은 한국인들이 상대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경찰특공대의 등장에 당황하며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진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문을 특공대가 총까지 든 채 막고 있으니, 제아무리 세르게이의 부하들이라 할지라도 맥없이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둘러보던 은율은 새삼 진환에게 고마웠다.
사실 이것은 진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리 단시간 내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칼의 부하들이 나서서 직접 세르게이의 무리들을 상대했을 테고, 그랬다면 이렇듯 무난하게 끝날 리가 없었다. 위험은 한층 높아지고, 자칫 누군가는 피를 보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칼도, 그의 부하들도 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진환은 니콜라이가 가져온 계획을 듣자마자 곧장 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의 심각성과, 급한 사안임을 감안해 진환의 아버지이자 경찰청장 이영환이 직접 지시를 내려 급하게 특공대의 힘을 빌리게 된 것이었다.
은율은 웃는 낯으로 진환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직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진환이 어째 자신보다 더 위태로워 보였다.
은율은, 급히 달려온 탓에 약간 흐트러진 진환의 앞머리를 손수 정돈해 주며 말했다.
“배고프네요. 가서 식사나 하죠.”
마치 공원을 산책하며 나누는 대화 같은, 평온한 말투였다.
너무도 태연한 말에, 진환은 헛웃음까지 나왔다. 진환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러자.”
그렇게 말한 진환이 은율의 손을 잡으려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눈에 은율의 붉게 부어오른 손목이 들어왔다. 진환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리며 두 손으로 그의 양 손목을 어루만졌다.
“병원부터 가야겠다.”
“이 정도로 무슨 병원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던 은율의 눈에, 특공대원이 방심한 틈을 타 그를 밀어뜨리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세르게이가 보였다.
{으아아-!}
이성을 잃은 듯한 얼굴로 무섭게 달려오는 그를 보며, 은율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환의 왼쪽 어깨에 왼손을 올렸다.
“이대로 가만히 계세요.”
세르게이의 목소리를 듣고서 몸을 돌리려던 진환이 그대로 우뚝 섰다. 은율은 그의 어깨를 잡은 왼손에 힘을 가득 싣고서 바닥을 박차 몸을 띄웠다. 그 상태로 허공에서 왼발을 아래로 훅 내리고 오른쪽 다리를 높이 띄워 그대로 옆차기를 날렸다. 그의 오른쪽 발등이 달려오는 세르게이의 왼쪽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크헉!}
두개골이 흔들리는 느낌에 세르게이가 맥없이 쓰러졌다.
은율은 허공에 뜬 몸을 공중에서 살짝 비틀어, 진환의 대각선 뒤에 사뿐히 착지했다. 진환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그저 눈만 깜빡이며 은율을 돌아보았다. 그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특공대원들과 세르게이의 부하들 역시 놀란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은율이 작게 웃었다.
“갈까요?”
무슨 일이 있긴 했냐는 듯한 얼굴이다. 진환이 픽 웃으며 은율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가던 두 사람은 마침 특공대원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걷는 가영과 그대로 맞닥뜨렸다. 은율이 웃음기를 지운 채 가영을 마주 보았다.
“이모님…….”
은율이 가라앉은 눈으로 어렵사리 입을 뗐다.
가영의 차에 탄 이후의 모든 대화 내용은 전부 노출되었다. 이로써 그녀 역시 그간의 일에 대해 경찰의 수사와 법적인 처벌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가영이 은율을 바라보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가죠.”
가영이 특공대원에게 짧게 말하며 앞서 걸었다. 그녀는 은율을 다시 돌아보지 않은 채 그곳을 나섰다.
가만히 서 있는 은율의 어깨를 진환이 가볍게 두드렸다. 은율이 쓰게 웃으며 제 어깨에 올라와 있는 따뜻한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은율은 곧바로 진환의 차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옆에는 고급스러운 검정 외제차 한 대가 서 있었는데, 놀랍게도 뒷좌석 문을 열고 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
은율이 하진을 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곧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이곳까지 와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진아!”
은율이 진환의 팔에서 벗어나 하진에게로 뛰어갔다. 진환이 아쉬운 얼굴로 팔을 내리더니 은율의 뒷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하진은 조금 전 진환이 그랬던 것처럼, 은율을 제 품에 꽉 안았다.
“무서웠지? 다치진 않았어?”
하진이 몸을 떼어 내고는 은율의 몸을 살폈다. 진환이 둘이나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은율이 작게 웃음을 보였다.
“괜찮아.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은율이 두 손으로 하진의 얼굴을 감싸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생했나 봐. 얼굴이 그새 삭았어.”
“그 많은 표현 중에 삭았다니.”
하진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은율이 얼굴을 풀고서 다정하게 그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다행이야. 정말 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
하진이 씩 웃었다.
“내가 우리 형을 두고 잘못될 리가 없잖아.”
그러더니 쓴웃음을 보이며 은율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알면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해.”
하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은율의 뒤에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진환을 한차례 보더니 은율의 손을 끌고 검은 차량을 향해 걸어갔다. 워낙 선팅이 심하게 되어 있어, 차량 내부는 도통 보이질 않았다.
“밖에서 저 사람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이야기하고 나와.”
“뭘?”
차량의 뒷좌석 앞에 선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진이 은율에게 작은 미소를 보이며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순간 은율이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뒷좌석 안쪽에 타고 있던 이가 은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의 주인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안으로 들어와 달라는 듯, 그 손을 잡아 달라는 듯 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은율이 하진을 돌아보았다. 그가 작게 웃어 주었다.
은율은 조금 머뭇거리다, 이내 내밀어진 손을 잡은 채 차 안에 몸을 실었다. 완전히 들어가 앉으니 하진이 손수 문을 닫아 주었다.
차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은율은 시선을 내린 채 제 손을 타고 넘어오는 상대의 온기를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상대의 손이, 그의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원망하진 않니?”
휴대폰에 녹음된 것보다 좀 더 낮고 또렷한 음성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너무…… 늦었지.”
물기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이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은율아.”
감미롭게 울리는 제 이름에 왜인지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 이름이 뭐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손을 잡은 이를 바라보았다.
유창한 한국어와 달리 그는 외국인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제 부친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젊어 보이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져서인지, 아니면 제 부친이라는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율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진회색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그 볼을 타고 흘러내려 뚝뚝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칼은 뿌연 시야에 담긴 은율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숨을 멈췄다.
만나면 하고 싶었던 게 너무도 많았다.
우선 손을 붙잡고 아빠답게 진중한 모습으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주려 했다.
그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얼마나 미안해했는지도 빠짐없이 말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준비해 왔던 말과 행동,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지고 하염없이 눈물만 자꾸 흘러내렸다.
혹시라도 원망의 말을 쏟아 내면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을 책망하는 말을 듣게 되면 도무지 태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견디자고 다짐했는데, 무슨 말을 들어도 무너지지 말자 마음먹었는데.
그저 눈물만 떨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너무도 미안해서.
그런 칼의 얼굴로 은율의 새하얀 손이 내뻗어졌다. 그 손이 칼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은율이 울면 그리하자 생각했던 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왜 울어요.”
오히려 은율이 더 태연했다.
아니, 사실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 주는 그의 손은 칼만큼이나 떨리고 있었으니까.
칼이 아랫입술을 꽉 문 채 두 손을 뻗어 은율을 품에 안았다. 입에서는 오로지 은율의 이름만 흘러나왔다.
“은율아…… 우리 은율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디 가고, 그저 이름밖에 부를 수가 없었다.
칼이 한 손으로 은율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너무도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은율은 칼의 품에 안겨 그의 등을 제 팔로 감싸 안았다. 그의 눈에서도 이내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읏……. 정말…… 정말로…… 제 아버지……인 거예요…?”
이미 하진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역시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이 손길이 따뜻한 것만은 알겠다.
“그래…… 아빠야……. 아빠야, 은율아……. 내 아들……. 사랑하는 내 아들…….”
품에 안은 제 아이를 이제 다신 홀로 두지 않으리라.
칼과 은율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한동안 숨죽여 울기만 했다.
* * *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서 검은 외제차를 바라보고 있던 진환에게 하진이 다가왔다. 진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아직은 몰라. 하지만 뭐……, 한창 울고 있지 않을까.”
하진이 녹음했던 내용에는 칼에 대한 이야기 역시 대략적으로 들어 있었다. 그가 아는 은율이라면 칼이 왜 이리 오래, 멀리 돌아왔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 여린 제 형은 몰아치는 복잡한 감정에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려 대겠지.
진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초조한 듯 팔짱을 낀 채 손가락만 연신 까딱거렸다.
그런 진환에게 한 특공대원이 달려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아까 그 청년의 소지품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건넨 것은 은율의 꺼진 휴대폰과 한쪽 알에 금이 간 동그란 안경이었다.
진환은 그것을 받아 든 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특공대원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진환이 하진에게 물었다.
“이제 이 안경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은율이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것은 그의 외모가 워낙 튀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가 노출되어 세르게이와 같은 이들에게 쉬이 노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이젠 그 세력도 모두 잡아내었고, 한국에 발을 들인 칼도 이후 은율을 지켜 낼 테니 굳이 예전처럼 얼굴을 가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형이 결정할 일이지.”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검은 외제차로 향했다.
* * *
눈을 뜨려는데 눈꺼풀이 유달리 뻑뻑했다. 눈을 비비며 어렵사리 눈을 뜨자, 바로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니?”
평소에 듣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위를 올려다보니, 어두운 회색 머리의 남자가 눈을 맞춰 오며 싱긋 웃어 주었다.
“어……?”
구도가 이상해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내리니,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들어 올려져 안긴 채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 어……, 내, 내려 주십시오.”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왔으니까.”
은율은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커다란 건물의 지하주차장이었는데, 아마도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율이 시선을 돌리다 곧 얼굴을 붉혔다.
칼의 바로 옆에는 니콜라이가 따라붙어 있었고, 그의 뒤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외국인들이 우르르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는 통에, 은율은 바짝 긴장했다.
칼은 은율을 안아 든 채 엘리베이터가 있는 작은 로비에 다다랐다. 앞서 달려간 니콜라이가 얼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었다.
열린 엘리베이터에 칼이 먼저 몸을 실었고, 뒤이어 니콜라이가 따라 들어갔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엘리베이터 밖에 선 정장 입은 외국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칼은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고,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시선을 내린 칼이 작게 웃었다.
“왜 그러고 있어?”
은율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저기, 진짜…… 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칼이 또다시 웃었다. 그가 순순히 은율의 다리를 내려 땅을 밟게 해 주었다. 그제야 은율의 손이 떨어져 민망해하는 얼굴이 드러났다.
칼은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말투에 남아 있는 유건의 흔적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보다 신뢰했던 친우이자 친형제 같았던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흔적만은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칼이 은율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볼을 어루만졌다. 은율이 불안정한 눈을 굴리며 물었다.
“제가…… 잠들었습니까?”
인식하지 못했다. 분명 그를 부둥켜안고 한동안 울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로 기억이 없었다.
칼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은율과 눈을 맞췄다.
“어제오늘 많은 일이 있었으니 지쳤을 만도 하지. 오늘은 아빠랑 푹 쉬고 내일 같이 나가자.”
‘아빠’라는 단어에 은율의 얼굴이 또 한 번 확 달아올랐다. 칼이 은율의 오밀조밀한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눈으로 뜯어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은율이, 이제 얼굴 가릴 필요도 없으니까 머리도 예쁘게 자르고, 좋은 옷도 입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자.”
은율은 시선을 내리뜬 채 두근거리는 제 심장을 진정하려 애썼다. 그것은 진환에게 느끼는 두근거림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여태껏 자신이 알던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라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눈빛과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부모로서 자신을 사랑하고 위한다는 게 느껴졌다. 건조하기만 하던 유건과 나영과는 판이한 애정 표현에,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최상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가 안내음성과 함께 문을 열었다. 칼은 은율의 어깨를 둘러 잡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장 복도를 걸었다.
은율은 복도에 있는 창문을 보고 나서야 지금이 늦은 오후라는 것을 알았다. 햇빛 사이로 노을빛이 들이쳤다.
은율은 칼의 손에 이끌려 걷다가 건장한 외국인 남자 둘이 지키고 서 있는 문 앞에 다다랐다. 지하주차장에서 다른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 남자 역시 칼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드넓은 스위트룸 안에 들어가자, 뒤따라 붙은 니콜라이가 문을 닫아 주며 말했다.
{그럼 제 방에 있을 테니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러시아어로 말하니 칼이 고개를 끄덕인다. 니콜라이는 성실하게도 칼과 은율에게 각각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스위트룸에 있는 다른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칼이 싱긋 웃어 보이며 은율을 안으로 들였다.
“배고프진 않니?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 줘.”
은율이 주춤하며 눈을 굴렸다.
“저, 하진이랑 진환이 형은…….”
칼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손을 잡고서 눈을 맞췄다.
“아빠랑 있는 게 불편해?”
은율이 움찔했다. 아직 ‘아빠’라는 단어는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유건에게도 ‘아버지’라고만 불러 봤으니까.
은율의 불안한 얼굴을 보며 칼은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하긴, 떨어져 있던 세월이 얼마인데 그리 쉽게 마음을 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부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았다. 불안한 얼굴로 다른 이의 행방을 찾는 게 가슴 아팠지만, 자신이 감내해야 할 문제였다.
“너랑 할 이야기가 많아서 두 사람은 내일 만나기로 했어.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내게 시간을 줬으면 좋겠는데.”
은율이 상기된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그런 그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행동이 진환을 떠올리게 해서, 은율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흔들림 없는 은율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칼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조금 전과 달리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은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 진짜 부모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요.”
칼의 눈가가 예쁘게 휘었다.
힘들면서도 행복했던 예나와의 추억. 그녀를 보내고 오로지 제 아들만 생각하며 가까스로 버텨 왔던 지난날.
이제야 그 모든 이야기를 제 아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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