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Stunt/Release(1부 4권) (11/33)

8. Stunt/Release

개강 직후의 강의실은 언제나 시끄럽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끼리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묻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새로운 강의를 들을 생각까지 하니 서로 푸념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 강의실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하나둘 말을 멈춘 채 시선을 박았다. 그 시선을 따라 다른 이들도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그들처럼 입만 쩍 벌린 채 놀란 얼굴을 했다.

가장 먼저 소리를 낸 건 여학생들이었다. 그마저도 자기들끼리 작은 소리로 쑥덕거렸다.

“야, 뭐야, 뭐야. 저 미친 훈남 뭐야!”

“우리 과에 저런 사람이 있었어?”

“연예인이나 모델 아냐?”

여학생들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강의실에 들어선 남자는 자신이 들어옴과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진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앞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가 지나가니 학생들의 반짝거리는 시선 역시 계속 따라붙었다.

강의실 자리 중 가장 첫줄 가운데에 앉은 은율이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카메라 어플을 켜서 제 얼굴을 비춰 보며 애꿎은 앞머리만 매만져 댔다.

‘이상한가…….’

사실 스스로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전과 달리 눈 바로 위까지 잘라 버린 앞머리에, 눈을 가리는 동그란 안경도 없다. 스턴트 액션을 할 때는 보통 앞머리를 위로 넘기거나 헤어 젤을 이용해 옆으로 넘겨 고정하는 방식을 썼고, 배우에게 맞춰 가발도 자주 썼다. 그래서인지 그런 방식 없이 제 눈이 훤히 드러나 있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생각해 보니 지금처럼 드러난 얼굴로 학교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이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차이가 극명하니 다른 학생들이 못 알아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 은율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너…….”

학생용 숄더백을 메고 한 팔로 전공 서적 두 권을 품에 안은 강희가 눈을 크게 뜨며 은율을 바라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그가 해사하게 웃는다.

“오랜만이네, 강희야.”

강희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그녀의 팔에서 힘이 빠져 두툼한 전공 서적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은율이 얼른 팔을 뻗어 그 두 권을 잡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 뻔했다.

“괜찮아?”

은율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제가 잡은 전공 서적을 내밀었다. 강희가 붉어진 얼굴로 그걸 받아 들고는 얼른 그의 옆자리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뒤이어 자신의 가방을 책상 위에 던지듯 놓고서 은율의 팔을 잡아당겼다.

“잠깐 좀 나와 봐.”

“하지만 곧 있으면 강의가…….”

“일단 나와 보라고!”

그녀의 성화에 은율이 등에 메고 있던 검정 백팩을 자기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대로 강희에게 끌려 강의실 밖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의실 내의 학생들이 이번엔 꽤 소란스럽게 쑥덕거렸다.

복도로 끌려 나온 은율은 그 층의 복도 끝에 자리한 휴게 공간에 다다랐다. 4개의 테이블 중 두 테이블에는 이미 몇 명의 학생들이 앉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다가 말소리를 낮춰 가며 연신 은율을 힐끔거렸다.

강희가 속으로 혀를 차며 은율을 테이블 중 한 자리에 강제로 앉혔다.

“어떻게 된 거야?”

강희가 얼른 맞은편에 앉으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정작 은율은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아, 어떻게 된 거냐고!”

강희가 벌게진 얼굴로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일부러 얼굴 가리고 다녔던 거 아니었어?”

작은 소리로 물으니 은율이 쓴웃음을 보였다.

“그랬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그게 무슨 말이야?”

은율이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됐어.”

강희가 한숨을 내쉬며 제 뜨뜻한 얼굴을 한 손으로 쓸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봐선 자세히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강희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은율이 볼을 긁적이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뭐 좀 마실래?”

“시원한 거 아무거나…….”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하니 은율이 곤란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다가 옆에 있는 자판기 앞에 섰다. 뒷주머니에서 고급스러운 지갑을 꺼내 들은 그가 지폐 2장을 꺼내 집어넣더니 곧바로 캔으로 된 블랙커피를 눌렀다. 그러고선 강희에게 줄 다른 한 종류는 나름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했다.

강희는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그런 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희는 남자 연예인을 볼 때 아무리 잘생기고 멋있어 봤자 자신과는 한참 멀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그녀도 눈앞에 있는 은율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석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멍하니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저쪽 테이블에 있던 학생들은 여전히 은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돌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은율이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뽑아 와 강희의 앞에 놓아 주었다. 강희는 짧게 고맙다 말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괜히 목이 타, 건네받은 주스의 뚜껑을 따고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 버렸다.

은율도 캔 뚜껑을 따고서 블랙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러다 피식 웃어 버렸다. 자신처럼 단것을 아예 입에 대지 못하던 칼이 떠올랐다.

‘부전자전…….’

피는 못 속인다더니.

괜히 칼의 얼굴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주스를 원샷 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희가 흠칫 놀라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은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등을 토닥이듯 쓸어 주었다.

“괜찮아?”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해대던 강희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이전에 사레가 들렸을 때도 은율이 이렇듯 등을 쓸어 주었지만, 지금과 그때는 분위기나 느낌 자체가 판이했다.

강희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괘, 괜찮으니까!”

강희가 그 말을 남기며 빠른 걸음으로 휴게 공간을 나섰다. 그러다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아야야, 김강희! 땅에 돈 떨궜냐?! 앞 좀 보고 다녀!”

휴게 공간으로 들어오던 기언이 소리쳤지만, 강희는 못 들은 척 빠르게 강의실로 향했다.

기언이 얼굴을 찌푸린 채 휴게 공간으로 들어오다, 한 손에 블랙커피 캔을 들고 있는 은율과 눈이 마주쳤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은율이 기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오네.”

눈을 깜빡이던 기언이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도 가만히 마주 보고 서 있으니, 기언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가까이에서 은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의아한 얼굴을 했다.

“누구세요?”

은율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방학이 길었다 해도 절친 하나 못 알아볼까.”

기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제야 은율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너 설마…… 서은율이냐?”

은율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언이 기겁하며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와……, 씨……, 이, 뭐……, 와…….”

기언은 자꾸만 입을 달싹이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질 못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은율은 괜히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나, 그렇게…… 이상해?”

“야, 이상한 게 아니라……. 아니, 이상하지……. 와……. 너 그 얼굴 어떻게 가리고 다닐 생각을 다 했냐?”

은율이 ‘오버하긴’이라고 중얼거리며 그제야 얼굴을 폈다. 기언은 그런 은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야…….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 된 이야기가 널 두고 하는 말이었네. 진짜 못 알아볼 만큼 멋있어졌어.”

“적당히 해. 민망해.”

칭찬이 맞긴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기언이 실실 웃으며 은율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꼼꼼히 살펴보았다.

“훨씬 보기 좋다, 야. 안경은 없어도 되는 거야?”

지금 모습이라면 그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을 써서 잘생김이 반감되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 같았다.

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 쓰기로 했어. 원래 눈은 좋았으니까.”

은율이 사정이 있어서 안경을 쓰고 다닌다는 것쯤은 기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친근하게 은율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씩 웃었다.

“좋아, 좋아. 아, 오늘 개강 기념으로 다른 과랑 미팅 있는데, 한번 가 볼래? 너 지금 비주얼로 가면 진짜 대박이다. 아마 너 혼자 여자애들 다 독차지하게 될걸?”

공부벌레 촌놈 이미지였던 은율이 이렇듯 화려해져서 돌아오니 기언이 더 신나 했다. 그는 이참에 괜찮은 미팅을 소개해 줄 요량으로 은근슬쩍 꼬드겨 보았다.

은율이 어깨에 둘린 기언의 팔을 부드럽게 빼내고는 몸을 돌려 쓰레기통을 향해 다가갔다. 다 마신 블랙커피 캔을 전혀 구겨지지 않은 온전한 모습으로 재활용 쓰레기통에 툭 떨어뜨렸다.

“나 애인 있어, 기언아.”

“……어, ……뭐?”

기언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은율이 그를 돌아보며 약간 수줍게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 생겼다고.”

멍하니 서 있던 기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더니,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강의가 모두 끝나고 나니 어느덧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은율의 좌우에 각각 앉아 있던 강희와 기언이 동시에 은율에게 물었다.

“오늘 알바 있어?”

“오늘 알바 가냐?”

은율이 좌우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 가.”

그가 대답하자마자 기언이 은율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럼 오늘은 함께 달려 주는 거냐? 치맥 콜?”

“달리긴 뭘 달려. 그리고 나 술 싫어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자, 기언이 입을 삐죽이며 시무룩해 했다. 강희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결연한 얼굴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저, 서은…!”

“아, 잠깐만. 전화 온다.”

은율이 강희에게 양해를 구하며 백팩을 멘 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보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휜다.

“예, 지금 끝났습니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은율이 먼저 간다고 손을 흔들어 보이며 강의실을 나섰다. 기언과 강희가 그런 은율을 게슴츠레 흘겨보더니 얼른 따라붙었다.

“아뇨, 위험하긴 왜 위험해요. 그냥 수업 들은 것뿐인데…….”

-그래도 걱정돼. 지금 모습으로는 학교 처음 간 거였잖아.

“걱정이 너무 많다는 거, 본인도 알고 있으시죠?”

진환의 걱정스러운 음성을 들으며 은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기언이 수상하다는 눈으로 은율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저거 봐라, 저거. 분명 애인이야.”

“뭐? 애인?!”

옆에서 강희가 눈을 부릅뜨며 기언을 붙잡았다. 기언이 그녀를 보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사랑하는 사람 생겼다면서 애인 있다고 하더라. 봐 봐, 통화하면서 저렇게 사람 홀릴 것처럼 웃고 있잖아.”

강희가 입을 뻐끔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기언이 속으로 혀를 차며 강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강적이다, 야. 슬슬 마음 접어.”

기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강희에게 안쓰러운 얼굴로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어 준 뒤 은율을 뒤따랐다. 강희는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도통 움직이지 못했다.

은율은 기언과 함께 학교 건물을 나와 캠퍼스 안을 걷는 중에도 휴대폰을 붙들고 놓질 못했다. 옆에 기언이 눈을 반짝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어서 적당히 끊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꾸만 귓가를 간질이는 말에 매몰차게 할 수가 없었다.

-……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무래도 오늘 촬영은 일찍 끝나게 될 것 같아. 오랜만에 같이 저녁 먹을 수 있겠다.

약간 들뜬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듣기 좋았다.

“예, 그럼 오늘은……, 응?”

걷다 보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양한 감탄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던 은율과 기언도 사람들과 같은 곳을 주목하게 됐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고급스러운 검정 승용차였는데, 한동안 한국에서도 떠들썩했던 고가의 외제 차였다. 금액대가 상당하다 보니 대기업 회장님이나 임원들이 타는 차로도 유명했다.

그런 차량이 대학 캠퍼스 안을 미끄러지듯 들어오니 신기할 수밖에.

학생들의 주목을 받으며 들어온 차량은 은율의 근처에 와서 속도를 점차 줄이다 이내 멈춰 섰다. 은율이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놀란 눈으로 차량을 바라보니, 뒷좌석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은율아, 타.”

낮고도 부드러운 음성에 깜짝 놀라 허리를 약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칼이 다리를 꼰 채 은율을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뭐야, 아는 사람?”

기언이 은율을 바라보며 묻다가 제멋대로 놀랐다.

“잠깐, 그럼 너 이렇게 화려해진 게……! 어쩐지 돈 팍팍 아끼던 네가 웬일로 메이커 중무장을 했나 했다!”

은율이 미간을 찌푸리며 기언의 옆구리를 손끝으로 푹 찔렀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나 먼저 간다.”

“야, 진짜 가? 누군데? 하진이는 알아?”

은율이 차에 타려 하자 기언이 후다닥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진이도 아는 사람이야.”

기언이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차 뒷좌석에 탄 칼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랄 만한 미인인 데다가 외국인이니 수상할 만도 했다.

“너 진짜지?”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했냐? 간다.”

은율이 기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아무렇지 않게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는 그대로 빙 돌아 캠퍼스를 벗어났고, 기언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형.

하진 역시 강의가 끝난 시점이었는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혹시 회색 머리 외국인 남자 알아? 방금 은율이 태우고 갔는데.”

-아……. 그 사람이라면 괜찮아요.

“정말이야? 처음 보는 사람인데 친해 보여서 깜짝 놀랐어. 그리고 오늘 서은율 말인데…….”

건너편에서 하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 형 잘생겼죠?

“그래, 잘생겼다, 인마. 근데 한동안 고생 좀 하겠더라. 하루 종일 난리여서 나랑 강희랑 내내 붙어 있었어.”

긴장이 풀린 듯 기언이 웃는 낯으로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학생들은 달라진 은율의 모습에 강의 시간이 끝날 때마다 몰려들어 질문 세례를 퍼부었고, 심지어 강의하던 교수까지도 중간중간 눈길을 주곤 했다. 거기다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제아무리 교수라 해도 시선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다.

“그래서, 그 사람은 누군데?”

하진이 씁쓸함을 담아 대답했다.

*  *  *

“저기…….”

“응?”

칼은 웃는 낯으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반응했다.

은율은 제 허리에 팔을 둘러 가까이 끌어당겨 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손수 정리해 주는 칼을 보며 눈을 굴렸다. 뭐라 말하려는 순간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진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아, 지금 어디야?

가라앉은 목소리에 은율이 얼른 대답했다.

“지금 아버……지 만났습니다.”

“아빠라고 부르랬잖아.”

칼이 불만스럽게 말하며 은율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진환 씨?”

은율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잠깐 줘 봐.”

“왜…….”

“괜찮으니까.”

싱긋 웃어 주니 은율이 머뭇거리다 휴대폰을 건넨다. 칼은 그것을 받아 들고서 여태껏 밝던 것과 달리 다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진환 씨, 오늘 은율이 호텔에서 재웁니다.”

-예? 잠깐……!

“그럼 그렇게 알고, 내일 내 쪽에서 전화하도록 하죠.”

그 말을 뱉고서 곧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은율이 당황한 얼굴로 휴대폰과 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휴대폰 전원을 끄고 그것을 제 품에 넣은 칼이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예쁘게 웃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 좋은 레스토랑 예약해 뒀어.”

은율이 눈을 굴리며 머뭇거렸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전화를 빼앗은 것과 멋대로 제 스케줄을 쥐락펴락하는 것에 불쾌함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물며 제 휴대폰 전원을 끄고 아예 가져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의 말에는 무조건 ‘예’로만 답해야 하는 줄 알았다. 제 의견보다는 부모의 의견이 먼저였고, 그것을 따르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래 돌고 돌아 만난 아버지라서 더 약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칼에게는 제 의견을 피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은율이 입을 다문 채 곤란한 얼굴만 하고 있자, 칼이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은율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며 말을 아꼈다.

*  *  *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에는 칼의 손에 이끌려 백화점 순회를 하고 다녔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칼은 자신이 더 신이 나서는 이것저것을 구매해 카드를 긁어 댔다. 쇼핑한 물건들 대부분을 칼이 머무는 호텔로 보내고, 일부는 운전사를 짐꾼으로 써서 직접 챙겼다.

오랜 쇼핑을 끝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차에 탑승한 은율은 한층 피곤해진 얼굴을 했다. 칼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많이 피곤해?”

“예, 조금…….”

칼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는 제게 기대게 했다. 칼의 어깨에 머리를 댄 은율은 제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깜빡거렸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은율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 그를 칼이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운전 중이던 외국인 남자가 품속의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그것을 꺼내 들었다. 곧 발신자를 확인하고서 전화를 받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남자가 백미러를 통해 칼을 보며 물었다.

{이진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칼은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방 안에 들여놔.}

그렇게 말하고선 제 품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바라본 칼이 픽 웃었다.

무음으로 해 둔 휴대폰은 예상대로 진환에게서 온 문자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로 가득했다. 은율의 휴대폰이 꺼진 것을 보고 제 연락처로 한참 연락한 모양이었다.

칼이 은율을 잠시 보다가 그대로 진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곧바로 상대가 받았다.

-어딥니까?

갖가지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차 안이에요.”

-은율이 좀 바꿔 주세요.

칼은 곤히 잠든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습니다. 피곤해해서 깨우고 싶지 않네요.”

-어디 안 좋기라도 한 건가요?

피곤해했다는 말에 진환의 목소리가 단번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렇진 않고 오래 돌아다녀서 그래요. 곧 호텔에 도착하니까 잠깐 대화 좀 하죠. 들여보내라고 했으니 안에서 기다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낸 칼은 잠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객관적으로 평하자면, 이진환은 대단한 남자였다. 러시아에서 기업을 키우느라 정신없던 칼도 그의 얼굴과 이름을 알 만큼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톱스타였다.

자신의 일에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실력 또한 발군이다. 거기다 경찰청장을 아버지로 둔 덕에 기자들이 작은 스캔들 하나도 제대로 못 터뜨릴 만큼 뒷배가 든든했다.

조사를 해 보니 여자관계도 깨끗했다. 이수하의 말을 보태자면, 업계에서는 그가 여자에게 사적으로 눈길도 준 적이 없거니와, 남자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기뿐이었는데, 그 이외에 관심을 둔 건 은율이 유일하다고 했다.

진환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번 세르게이 사건 때만 해도 은율을 위해 제 아버지의 권력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상시에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은율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재능 있고 든든한 배경까지 가진 남자가 헌신적이기까지 하니, 부모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둘 중 한 명이 여자였다면 말이다.

한국에서 동성연애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는 칼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한국의 환경상 다소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자칫 은율이 큰 상처를 받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거기다 진환은 은율에게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은율의 스케줄을 모두 꿰고 있고, 그에 대한 걸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했다. 수하와 하진의 말이 아니더라도 진환의 행동을 세세하게 관찰해 보면 그의 대부분이 은율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괜찮다 해도 시간이 흘렀을 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혹여 은율의 마음이 변해 그를 멀리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과연 이진환은 어떤 행동을 할까?

칼은 한 여인에게 미친 집착을 보이다 파멸한 중년의 러시아 남자를 떠올렸다.

이를 꽉 물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이진환이 그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람이 집착에 눈이 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음…….”

은율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칼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고는 다른 한 손으로 연신 머리를 쓸어 주었다. 칭얼거리는 신음을 흘리던 은율이 다시 곤히 잠들었다.

칼은 은율의 머리에 제 입을 묻은 채 예리한 눈을 번뜩였다.

제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아무리 이진환이라 해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  *  *

칼의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선 은율은 그대로 우뚝 서고 말았다. 문 앞에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진환과 눈이 마주쳤다.

“환이 형?”

왜 진환이 와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칼을 바라보니, 그가 웃는 낯으로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피곤할 텐데 씻고 잠깐 쉬고 있어.”

“하지만…….”

당황한 낯으로 진환에게 시선을 주자, 그 역시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과 이야기 끝나면 부르러 갈게.”

불안하긴 했지만 둘 다 그렇게 말하니 더 머뭇거릴 수도 없었다.

은율에게 자신의 침실을 가리키며 들어가 있으라 말한 칼이 그의 어깨를 둘러 안고는 볼에 입을 맞췄다. 보란 듯한 그 행동에 진환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은율이 아버지에게 질투하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을 게 뻔했다.

은율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나자, 두 사람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단숨에 사라졌다. 공기가 금세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죠.”

칼이 앞서 걸으며 정장 겉옷을 벗었다. 어느새 제 방에서 나와 있던 니콜라이가 다가가 그의 겉옷을 공손히 받아 들었다.

거실의 개인 소파에 앉은 칼이 대각선에 있는 넓은 소파를 진환에게 권했다. 진환이 앉자마자 칼이 다리를 멋들어지게 꼬고서 제 어깨 높이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니콜라이가 자연스레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 한 개비를 꽂아 주었다.

“담배, 피워도 되죠?”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칼이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무니, 니콜라이가 고급스러운 지포라이터를 꺼내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진환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무심코 영화 속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담배 피우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진환의 말에, 칼이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은율이 앞에서는 안 피워요. 간접흡연이 얼마나 안 좋은데.”

그 말은 나쁘게 들으면 은율 이외의 사람들은 간접흡연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진환에겐 그가 은율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까 봐 상당히 조심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칼이 반쯤 피운 담배를 손가락에 낀 채 진환을 또렷이 바라보았다.

“우리 은율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희 사이는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칼이 소파 앞 유리 테이블에 놓여 있는 유리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피식 웃었다.

“둘이 연인이라는 건 알고 있죠.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이진환 씨, 당신 개인의 생각을 묻는 겁니다.”

칼이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이 빨아들였다 내뱉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좋아요, 질문을 바꾸죠.”

칼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당신은 은율이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칼의 눈빛에 진환이 미간을 모았다. 그가 하는 질문은 너무도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답은 극명했다.

“제 목숨을 버리는 것 외에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진환의 말에 칼이 그를 노려보았다.

“예상외로군요. 거짓말로라도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할 줄 알았더니.”

“제가 죽어서 은율이가 운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거든요.”

“말은 잘하네요.”

칼은 싸늘하게 말하며 담배를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솔직히 난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은율이 곁에서 떼어 놓고 싶습니다.”

진환이 딱딱한 얼굴로 칼의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 진심으로 은율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보면 압니다. 하지만 집착이 너무 강하죠. 은율이가 당신에 대한 마음이 변하거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진환은 입을 다문 채 말을 아꼈다. 칼이 픽 웃었다.

“내가 보기엔 감금이라도 해서 그 옆에 두려 할 것 같은데.”

칼의 머릿속에 미하일 보그다노프의 퀭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예나에 대한 집착에 눈이 멀어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그의 마지막을 떠올리니, 그 말에 절로 힘이 실렸다.

“난 언젠가 당신이 은율이를 강제로 구속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됩니다. 집착이 너무 강하면 정신이 미쳐 버리고 인간 같지 않게 변해 버리죠.”

칼이 눈에 힘을 주며 경고했다.

“그러니 최소한 지금처럼 인간다울 때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가만히 말을 듣던 진환이 갑자기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칼이 미간을 모으며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진환이 한층 여유로운 모습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은 일견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가 은율이에게 집착하는 건 맞습니다. 여태껏 그 누구도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이 없었죠.”

추억이라도 되짚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련한 빛을 띤 눈동자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하루 종일 은율이 생각만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한시도 제 곁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요.”

진환의 맑은 눈동자가 칼의 진회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율이를 구속하거나 감금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의외의 말에 칼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은율이는 배우가 될 겁니다. 그 누구보다 빛나는 톱스타로 성장할 거예요. 은율이의 꿈을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길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도록 전력을 다할 겁니다.”

진환이 진심을 담은 미소를 띠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은율이에게 주목했으면 합니다. 그 아이의 재능은 진짜예요. 천재적이죠.”

진환이 시선을 살짝 내리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눈을 한다.

“은율이를 연인으로서도, 연기 파트너로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가 진정 원하는 꿈을 이루어 주고 싶습니다. 제 집착이 은율이의 꿈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진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 스스로 그 곁을 떠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칼의 어두운 회색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싸늘하게 진환을 노려보았다. 진환은 그 기백에 일순 눌리는 느낌을 받았으나, 마주한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 말, 진심입니까?”

“물론입니다.”

진환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의 올곧은 눈을 마주하던 칼이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그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그대로 유리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제 나와도 돼, 은율아.”

그 말에 진환이 놀란 눈으로 칼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 휴대폰 화면에는 10여 분의 시간 동안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진환의 고개가 칼의 침실 문으로 향했다. 침실 문을 천천히 열고 나온 은율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손에 쥔 휴대폰을 조작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눈을 굴려 댔다. 그 눈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처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진환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칼을 바라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당신의 진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걸 은율이도 들었으면 했고요.”

진환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일어나 은율에게 다가갔다.

“율아.”

진환의 손이 은율의 어깨에 닿았다. 그가 크게 움찔하며 고개를 들더니, 그 커다란 눈을 얼른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아, 저, 그게…….”

은율이 한층 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그가 돌연 진환의 가슴팍을 밀어내더니 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릴게요.”

“잠깐만, 율아.”

진환이 당황하며 은율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그가 진환의 손을 피해 내며 빠른 걸음으로 스위트룸 밖을 향했다. 진환이 은율의 뒤를 바짝 따르며 칼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그저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은율과 진환이 빠른 걸음으로 스위트룸을 나가버리자, 니콜라이가 물어왔다.

{도련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대화 내용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 니콜라이는, 은율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불쾌해한 건 아닐까 추측했다.

칼이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손을 어깨 위로 올렸다. 기계처럼 그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가 끼워진다.

{우리 아들은 부끄러움이 참 많은 모양이야.}

그렇게 말한 칼이 웃음기 가득한 입술로 담배를 물었다.

*  *  *

“율아, 기다려.”

은율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지하 1층을 누르고, 이어서 닫힘 버튼도 미친 듯이 눌렀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도 전에 진환이 오른손으로 은율의 왼 손목을 잡아채곤 얼른 그 안에 함께 탔다.

곧바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은율이 진환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힘이 상당해 도저히 빠지질 않았다. 진환은 은율을 엘리베이터 벽에 몰아세웠다. 은율이 왼쪽으로 빠져나가려 하자, 제 왼손으로 벽을 짚어 막았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래서 아예 그의 왼쪽 손을 벽에 붙여 제 손으로 꽉 눌렀다.

진환의 두 팔 사이에 갇혀 버린 은율이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 봐.”

진환이 불안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율아.”

애칭까지 부르고 나서야 은율이 머뭇거리며 그와 눈을 맞춰 왔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야기, 다 들었어?”

은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이 고민하는 얼굴로 말을 골랐다. 그는 은율이 마지막에 자신이 떠나겠다는 말 때문에 이리도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율아, 그건…… 절대로 널 떠나겠다는 게 아니라…….”

“압니다.”

은율이 다시 눈을 내리깔고 입을 오물거렸다.

“알아요. 전 그것보다도…….”

은율의 눈가가 촉촉해진 것을 보고 진환이 한층 더 당황했다.

“잠깐만, 율아. 그러니까…….”

“저는…….”

은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진환이 칼에게 했던 말들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는…… 형이 저한테 집착해 주시는 거……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 꿈을 이루어 주겠다고…….”

은율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그 얼굴을 보며 진환은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형이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죠. 제가 꿈을 꿔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형과 함께…… 꿈을 꾸면 되겠다고…….”

그것은 진환이 처음 은율에게 배우를 권할 때의 일이었다.

‘전 미래의 꿈 같은 건 꿔 본 적이 없습니다.’

‘잘됐네. 이제부터 나와 함께 꾸면 되겠어.’

은율이 촉촉해진 눈을 들어 진환과 눈을 맞췄다. 물기 젖은 그 눈이 너무도 아름다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형과 함께가 아니면……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아요.”

은율의 손이 진환의 가슴팍 셔츠를 붙잡았다. 그 손끝이 떨리는 게 가슴으로, 심장으로 전해져 왔다.

“더 집착해 주세요……. 더 사랑해 주세요……. 제가 더…… 꿈꿀 수 있게 해 주세요…….”

은율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그가 눈물 젖은 얼굴로 진환을 향해 사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형이 없으면…… 아무것도 꿈꿀 수 없을 것만 같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조용히 읊는다.

진환이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제 왼손으로 은율의 얼굴을 붙잡아 키스했다.

“흐읍…!”

은율이 일순 크게 놀라며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았다. 혹여 누군가의 눈에 이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인지라, 중간에 사람이 타거나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시름 놓았다.

키스에 빠져든 은율이 이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진환의 다급한 키스가 이어지고, 은율은 벽에 붙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진환의 가슴팍을 짚었다.

쿵- 쿵-.

거칠게 뛰는 심장박동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율아, 율아.”

진환이 키스하는 내내 은율을 불러 댔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다다랐다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그제야 진환이 입술을 떼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내가 더 잘할게. 절대 네게 방해가 되지 않을게. 그러니까…….”

진환 역시 촉촉해진 눈으로 은율과 눈을 맞췄다.

“네 꿈, 앞으로는 형과 같이 꾸자.”

은율의 눈동자가 파문이 일어난 맑은 호수의 표면처럼 잘게 떨렸다. 그가 진환의 가슴팍을 짚었던 손을 제 왼쪽 가슴에 대었다.

쿵- 쿵-

진환의 것과 똑같은 고동 소리가 그 손을 통해 전해졌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이렇게 두근거리고 행복한 거구나.

지하 1층에 도착하고, 지하주차장을 향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사람 하나 없는 어둑한 입구에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은율은 제 손을 뻗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곧 문이 닫히고, 밝고 작은 공간이 또다시 밀폐되었다.

은율이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고 행복한 얼굴로 진환에게 입을 맞췄다.

*  *  *

“흐읍…! 흣!”

진환의 위에 올라타 엎어진 채 키스를 하던 은율이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떼었다. 진환이 그런 은율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사랑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우리 율이, 오늘 적극적인데?”

진환이 은율의 젖은 입술을 제 혀로 살짝 핥아 올리자 은율이 잘게 떨었다.

“몸이 뭔가…… 이상해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진환이 급하게 잡은 호텔 방으로 바로 올라오자마자 두 사람은 키스를 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엔 오히려 은율이 더 매달려 키스를 요구했고, 진환은 적극적인 그의 행동에 자극받아 열심히 입을 맞대었다. 그 상태로 어떻게 침대까지 왔는지가 더 의문이었다.

은율을 제 몸 위에 올려두고 있던 진환이 그의 허리를 팔로 둘러 안고서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선 위에 올라타 상체를 세운 채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어 벗어 던졌다. 은율은 진환의 밑에 누운 채 멍한 눈으로 그의 탄탄한 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환이 은율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은율의 투 포켓 셔츠를 제 손으로 벗겨냈다. 은율은 그와의 키스에만 몰두하느라 제 셔츠가 벗겨지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셔츠가 침대 밖에 던져지고, 이어 2개의 바지도 그 근처에 떨어져 내렸다.

진환의 손이 은율의 툭 튀어나온 골반에 닿았고, 그대로 드로어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은율이 흠칫 놀라며 바닥에 내리고 있던 두 손을 꿈틀거렸다.

드로어즈를 벗겨 내니 반쯤 발기한 은율의 성기가 진환의 것에 닿았다. 진환은 그 느낌만으로도 아래에 열감이 훅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드로어즈 역시 벗어 던졌다. 두 사람의 발기한 성기가 나란히 몸을 맞댔다.

진환이 은율의 위에서 키스하며 아래를 살살 비볐다. 은율의 허벅지가 자연스레 모이고 몸이 움찔움찔했다.

진환이 입을 떼며 달뜬 숨을 내뱉는 은율의 귀를 살짝 핥아 댔다. 귓바퀴를 따라, 단단히 세운 혀끝을 굴려 핥아 대니 열띠기 시작한 몸이 움츠러들며 헐떡였다. 귀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찌걱거리는 소리에 자꾸만 민망해져, 은율이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저, 제가…….”

진환이 입을 떼고는 은율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은율이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붉혔다.

“평소에는 형이 다 해 주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진환은 지금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눈만 깜빡인 채 은율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진환과 눈을 마주했다. 은율이 머뭇거리더니 진환을 밀어 옆으로 눕혔다. 그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진환의 가슴팍을 짚은 그가 결연한 얼굴을 했다.

“제가, 제가 해 볼게요.”

가슴팍을 짚은 두 손과 진환의 아랫배에 살짝 앉은 은율의 엉덩이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딴에는 굉장한 용기를 낸 것이었다.

진환은 은율의 마음이 너무 고맙고 대견해, 그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은율이 작게 미소 지으며 그대로 상체를 내렸다.

처음 시작은 진환의 목에서부터였다.

서툰 혀 놀림으로 목을 핥고 입술을 살살 비벼 보기도 한다. 그러다 진환이 했던 것처럼 목의 여린 살을 살짝 빨아올려 혀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음…….”

진환의 입에서 작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이렇게…… 하는 건가?’

조금 자신감을 가진 은율이 진환의 목 여기저기를 핥아 대고 살살 빨아올렸다. 워낙 조심스러운 통에 자국이 남지는 않겠지만, 당하고 있는 진환은 차라리 세게 빨아 줬으면 하고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은율의 머리카락이 스치고, 그 혀가 스치고, 그 입술이 스친다.

진환이 목으로 웃었다.

‘아기 고양이가 할짝대는 것 같아.’

마치 목 언저리에 달라붙은 작은 고양이가 할짝이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은율을 눕히고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애무해 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은율이 이렇게 나서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희귀한 체험을 벌써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한참 목 언저리를 핥아 대던 은율은 진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쇄골을 핥았다. 역시나 살결이 여리고 뼈가 튀어나온 부분들은 대부분 예민한 것 같았다. 은율은 제 배에 닿은 진환의 그것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가 어디를 좋아하는지 열심히 학습했다.

탄탄한 가슴 근육을 핥다가 눈으로 유두를 내려다보았다.

‘형도 느낄까……?’

은율은 진환이 제 가슴을 핥아 댈 때마다 느껴지던 오묘한 쾌감을 상기했다. 약간 머뭇거리다 그대로 입을 아래로 내렸다.

“읏…….”

진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고 그의 입에서 작게 신음이 나왔다. 은율은 귀를 쫑긋하더니 그대도 유두를 할짝거렸다. 유륜을 따라 혀끝으로 원을 그리다 입술을 묻고 유두를 살살 빨아 당겼다. 역시나 진환의 성기가 연달아 움찔했다.

작은 자신감을 얻은 은율이 이번엔 반대쪽 유두를 할짝였다. 그러다 장난기가 돌아, 약간 단단해진 진환의 유두를 이 끝으로 아프지 않게 잘근거렸다.

“큿!”

이전까지와는 다른 신음에 은율이 움찔했다. 입에 유두를 머금은 채 눈만 위로 떠서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붉어진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진환이 은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율아……. 형 죽일 셈이야?”

은율이 깜짝 놀라 얼른 입을 뗐다.

“아팠……어요?”

진환이 두 팔로 은율의 허리를 꽉 붙들어 밀착시켰다.

“당장 덮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은율이 배시시 웃었다.

“기분 좋았습니까?”

“네가 해 주면 뭐든 좋아. 거기다 잘하기까지 하니까 좋아 죽겠어.”

매번 애무 당하면서 연구하기라도 한 걸까. 진환은 제가 가슴으로 느낀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은율이 제 가슴을 애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정감이 몰려올 줄은 몰랐다.

은율의 허리를 꽉 붙든 진환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냥 형이 하면 안 될까?”

은율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매번 형이 해 주셔서 저도 해 드리고 싶었던 건데…….”

게다가 시무룩해 하니,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진환이 졌다는 표정으로 은율의 허리를 잡았던 팔을 풀었다.

은율이 싱긋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진환의 양쪽 유두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혀끝을 세워 핥아 내려왔다. 단단한 식스팩을 군데군데 핥아 주며 아랫배에 다다르니, 진환의 커다란 것이 바로 눈앞에서 꺼덕거렸다.

은율은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조심히 감싸 붙잡고는 끝을 핥아 보았다.

“흣! 자, 잠깐만!”

진환이 화들짝 놀라며 제 아래를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은율이 저리 용기를 낼 줄은 몰랐던 터라 크게 당황했다.

은율은 진환의 놀란 얼굴을 마주한 채로 그의 것을 혀로 살살 핥아 댔다. 진환이 기겁한 얼굴을 했지만, 은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제 입에 진환의 것을 물었다.

“크윽!”

진환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뱉었다.

은율은 처음 물어보는 그것에 의외로 거부감이 일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진환의 것이라 그런 것일까. 뜨겁고 단단한 그것이 제 입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율아, 잠깐……. 그거 하지 마.”

진환이 진지하게 말했다. 은율은 진환의 것을 입에 머금은 채 눈만 깜빡여 그를 보았다. 진환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은율을 만류했다.

“안 해도 되니까 이리 와.”

달래듯 말했지만 은율은 귀엽게 눈만 깜빡일 뿐, 입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입 안에서 혀를 살짝 움직였다.

“흣!”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은율의 입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전신에 기분 좋은 찌릿함이 퍼졌다. 그것을 알아챈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잠깐, 율아……! 읏…….”

은율이 진환의 것을 입속 깊이 머금었다 빼는 것을 계속하며 혀를 살살 움직였다. 혹시라도 예민한 그것이 이에 닿아 아플까 봐서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환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억누른 신음을 흘렸다. 은율은 그가 기분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해, 좀 더 열심히 입과 혀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진환의 몸이 잘게 떨리고 근육이 움찔거렸다.

“율아, 그만, 그만해…….”

진환이 몽롱한 눈으로 은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잔뜩 부푼 그의 것이 은율의 입 안에서 전율했다. 이대로라면 바로 사정할 것만 같았다.

은율이 스스로 입을 떼지 않자, 진환이 상체를 일으켜 직접 그의 양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붉은 입술과 그의 성기 간에 이어진 긴 타액 줄기가 한층 야하게 보였다.

진환이 은율을 자기 허벅지 위에 마주 앉히고서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무리하지 마. 괜찮아?”

은율이 자진해서 나섰다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불쾌감을 느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은율은 제 볼을 감싼 두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며 웃었다.

“괜찮습니다. 저, 끝까지 할 수 있어요.”

의욕적으로 말하는 게 귀여워 진환마저 작게 웃어 버렸다. 그가 은율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번엔 형이 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제 허벅지 위에 올라탄 은율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은율의 뒷머리를 받쳤다. 그 상태로 은율이 했던 것처럼 그의 목에 입을 묻었다.

“흐응…!”

목을 혀로 핥아 대니 역시나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밖에 서지 않았던 은율의 성기가 조금씩 꺼덕거렸다.

목을 핥고 쇄골을 따라 입을 맞추니, 허리가 꺾인다. 그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농염하게 애무하니, 은율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지고 눈동자는 몽롱해진다.

진환의 혀가 가슴에 다다랐을 때는, 백옥 같던 몸이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두를 입에 머금고 세게 빨아들이니, 은율이 허리를 휘며 신음했다.

“흐앗…!”

민감한 가슴을 쪽쪽 빨아 주고 퉁겨 주니, 자꾸만 신음이 터졌다. 은율이 움찔대며 몸을 비틀자, 맞닿아 있던 2개의 성기가 함께 반응했다. 진환은 은율이 느끼며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것도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형…… 흣…….”

은율이 가슴에 집착하듯 빨아 대는 진환을 불렀다. 그가 은율의 가슴에 입을 묻은 채 올려다보았다.

은율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을 오물거렸다. 그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이다 고개를 숙였다. 진환이 웃는 낯으로 그를 제 품에 꼭 안았다.

“……넣어도 돼?”

진환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던 은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이 은율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은율의 엉덩이골로 가져갔다. 아직 젖지 않은 구멍의 부드러운 살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뭐라도 바를 것 가져올까? 이대로 넣으면 아파.”

은율이 진환의 몸을 팔로 둘러 끌어안았다.

“그냥…… 그냥 해요…….”

은율의 말에 진환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성미대로 했다간 분명 상처가 나고 말 터였다. 그렇다고 로션이든 뭐든 가지러 가려 하니, 은율이 코알라인 양 귀엽게 끌어안고서는 놔주려 하질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진환이 왼손으로 은율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럼…….”

진환의 오른손이 두 사람의 맞닿은 성기를 한 번에 잡았다.

“핫!”

밑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은율이 깜짝 놀랐다. 진환이 바짝 긴장한 은율의 귀에 입을 맞춰 주었다.

“일단 같이 한 번 빼자.”

나지막이 속삭이며 손을 움직였다.

“하…… 읏……!”

한 손에 붙잡힌 2개의 성기가 비벼지고 서로의 열감이 나누어진다. 은율은 진환과 처음 욕실에서 페팅했던 때의 감각을 상기했다. 어째 그때보다 더 예민해진 느낌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은율이 두 손으로 진환의 양어깨를 잡은 채 그의 목에 제 눈가를 비볐다. 마치 앙탈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에, 진환의 아랫도리가 한층 더 뻐근해졌다.

2개의 성기를 잡은 진환의 손이 점차 빨라지고, 두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으음……. 하아…….”

은율의 입에서 점점 달뜬 신음이 터졌다. 그가 얼굴을 들더니 먼저 진환에게 입을 맞춰 왔다. 오늘따라 잔뜩 흥분한 은율이 귀여워, 진환은 키스에 응하며 손을 더 빨리했다.

서로의 것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이 손의 움직임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 비벼지는 야한 소리와 함께 서로의 입속을 탐하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흐……으읍……!”

은율이 먼저 몸을 바짝 긴장하며 울컥, 사정했다. 그 움찔함과 떨림에 진환의 것도 곧바로 정액을 토했다. 두 사람의 맞닿은 성기와 복부에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정액이 질척하게 묻어났다.

진환이 은율의 입술에서 제 입을 떼고는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따 끝나고 씻겨 줄게.”

그렇게 말하며 두 성기를 붙잡았던 오른손을 은율의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었다. 정액이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구멍 주변을 매만지다가 중지를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으음…….”

은율이 움찔하며 엉덩이에서 힘을 뺐다. 진환도 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등을 연신 쓸어 주었다.

몇 번 들락날락하던 손가락이 2개가 되어 들어갔다. 질척한 정액 덕분에 손가락을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기다 은율도 그의 손가락을 받아들이기 위해 전신의 힘을 빼고 있는 상태였다.

“흣!”

진환의 손가락이 깊이 들어가더니, 은율이 느끼는 부위를 정확하게 찔러 댔다. 은율의 몸이 부르르 떨리자, 진환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하……! 흐으……! 읏!”

손가락으로 쑤시면 쑤실수록 점점 신음이 흘러나오고, 죽어 가던 성기가 조금씩 움직였다. 진환은 은율이 움찔거리고 신음을 뱉는 것만으로도 제 것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했다. 일단은 이 작은 구멍을 풀어 두는 게 중요했다.

“혀엉…….”

은율이 진환의 양어깨를 짚은 채 고개를 들었다. 물기 서린 몽롱한 눈이 진환을 마주했다.

“이제…….”

달아오른 얼굴로 유혹하듯 말해 오니, 제아무리 진환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진환의 손가락이 은율의 구멍에서 빠져나가자, 그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진환이 그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이대로 올라탈래?”

은율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시선을 내려 진환의 것을 바라보았다. 정액이 묻은 그의 것이 벌써 바짝 서 있었다.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킨 은율이 구부렸던 다리를 펴서 상체를 위로 일으키고는 진환의 것을 붙잡았다. 그 상태로 제 구멍 입구에 그의 귀두를 맞추고는 작게 심호흡했다. 최대한 긴장을 풀고 입구에 진환의 것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윽…….”

큼직한 진환의 것이 구멍을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자 입구가 화끈거렸다. 그나마 감질날 정도로 천천히 몸을 내려 넣으니, 어떻게 들어가긴 했다.

느릿한 동작 때문일까.

몸속에 뜨거운 것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전율했다. 이내 그것이 제 몸에 완전히 들어가자, 은율은 과식이라도 한 것처럼 배가 가득 찬 기분을 느꼈다.

진환은 제 것을 완전히 삼킨 은율의 양 엉덩이를 붙잡았다. 그대로 그가 움직이려 하니,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래요…….”

부끄러워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진환이 작게 웃으며 그의 엉덩이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은율이 진환의 양어깨를 단단히 잡은 채 저 스스로 조금씩 움직였다.

“흣!”

신음이 터진 것은 진환이 먼저였다. 그가 인상을 확 쓰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왜……요? 이상해요?”

은율이 숨을 헐떡이며 동작을 멈췄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진환이 달뜬 숨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은율은 그제야 진환이 좋은 쪽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바짝 긴장했던 그의 얼굴이 약간 펴진다.

은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작 느릿하게 한두 번 오갔을 뿐인데도, 은율은 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층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는 삽입 섹스에 대한 주도권이 진환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스스로 움직이고 보니, 뜻 모를 정복감과 쾌감이 함께 밀려왔다.

“흐응…….”

은율은 허리와 엉덩이를 움직여 자신 안쪽의 기분 좋은 곳에 진환의 것을 문댔다. 실금이라도 할 것 같은 아득하고 오묘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진환은 죽을 맛이었다. 자신이 삽입하고 움직이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당장이라도 은율의 몸을 붙잡아 격하게 움직이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은율의 야릇한 움직임에 아랫도리가 정신을 못 차리는 이 쾌락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미치겠다…….’

제 어깨를 붙잡고 스스로 허리와 엉덩이를 움직이는 은율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야릇했다. 붉게 달뜬 얼굴도, 기분 좋게 풀려 있는 눈동자도, 쾌감을 오롯이 느끼는 신음도, 모든 것이 농염했다.

은율이 조금 용기를 내어 진환의 것에 깊이 내려앉으며 제 안쪽을 찔렀다.

“하응!”

“흣!”

두 사람이 동시에 신음을 뱉었다. 은율이 숨을 몰아쉬며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율아……. 형…… 미쳐 죽을 것 같은데…….”

은율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른해 보이는 그 모습에 진환의 손이 움직였다. 그가 은율의 양 엉덩이를 꽉 틀어잡았다.

“하읏!”

엉덩이를 움켜쥔 손아귀의 힘에 구멍과 내벽이 훅 수축했다. 진환이 이성을 잃은 듯한 이글거리는 눈으로 은율과 시선을 맞췄다.

이윽고 진환의 양손이 은율의 엉덩이를 붙잡아 위아래로 움직이게 했다.

“하으으-!”

스스로 움직이던 것에 비해 빠르고 격하게 치대지는 느낌에, 은율이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이 흔들리자 진환이 으르렁거렸다.

“형에게서 눈 떼지 마.”

집착 가득한 목소리에, 은율은 아래쪽이 아닌 가슴이 기분 좋게 저릿한 것을 느꼈다. 그에 맞춰 안쪽 내벽이 진환의 것을 꽉 물었다.

진환이 맹수의 거친 숨소리 같은 것을 내며 은율을 붙잡고 허리를 퉁겼다.

“하읏!”

은율의 깊은 곳을 거세게 쳐올리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교성을 토했다. 진환이 제 입술을 색스럽게 핥아 대며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은율을 마주했다. 은율은 진환의 허리 놀림과 제 몸을 움직여 대는 손길에 정신을 반쯤 놓으면서도 그의 말대로 눈을 떼지 않았다.

“큿……! 율아……!”

진환이 낮게 신음하며 속도를 높였다. 은율은 안쪽 내벽이 쓸리는 느낌과 전립선을 자극해 대는 감각에 허리 아래로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래에서 퍼진 격한 쾌감은 끊임없이 전신을 쳐 댔다. 이대로 계속하며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없이 매달릴 것만 같았다.

“하으응! 아! 하아……아앗-!”

“율아, 너무 좋아.”

진환이 헐떡이며 생리적 눈물이 그렁그렁한 은율의 눈가를 혀로 핥았다. 그러자 금세 또 눈물이 차오른다.

“혀엉…….”

은율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진환을 부르더니, 그가 했던 것처럼 눈가를 핥아 주었다. 그리고 송골송골 땀이 맺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그 말이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저리게 할까.

은율의 혀가 핥고 지나간 자리,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가 화끈거렸다. 몰아치는 열감에 진환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흐앗-! 하아아-!”

“율아……! 읏!”

안쪽의 저릿거리는 부분을 퍽퍽 쳐 대며 진환이 은율의 목에 이를 세웠다. 그의 여린 목에 자신의 잇자국을 새기자, 은율이 그 자극에 목을 홱 젖히고 신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은율의 엉덩이를 잡고 있던 진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크윽-!”

여태껏 해 왔던 그 어느 섹스보다 더 자극적이고 거친 쾌감이 휘몰아쳤다. 잔뜩 부풀어 버린 진환의 그것이 은율의 안에 가득 토정했다. 은율은 제 몸에 퍼지는 뜨끈한 감각과 진환의 성기가 울컥거리는 것을 그대로 느끼며, 그 역시 말간 정액을 토했다.

“아아-!”

허리를 휘며 기분 좋은 교성을 길게 내지른 은율이 몸을 떨었다. 그의 것에서 토해진 정액이 진환의 복근에 그림을 그리듯 튀어 올랐다. 진환은 제 몸에 뿌려지는 은율의 것을 느끼며 한차례 전율했다.

이상할 정도로 긴 쾌감이 지속되고, 두 사람의 것은 끊어질 듯 말 듯 정액을 토해 냈다.

진환은 제 어깨를 짚고 있던 은율의 두 팔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가 뒤로 쓰러지려는 것을 잡아 제 품에 안았다. 잔뜩 늘어져 숨을 몰아쉬는 은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면서 그의 귓가에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사랑해.

사랑해, 율아.

진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헐떡이는 은율의 입에서도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해요, 형.

*  *  *

찢어진 검정 코트를 휘날리며 바닥을 박찼다. 딛고 있던 자리에 쇠파이프가 내리쳐졌다.

캉-!

곧바로 몸을 돌려 쇠파이프를 내리친 남자의 얼굴에 뒤돌려차기를 먹여 주었다. 허공에 날리는 코트 자락 덕에 더 시원시원하고 멋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컥!”

얼굴을 제대로 맞은 남자가 쇠파이프도 놓친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 그림자가 훅 드리워졌다. 얼른 바닥을 굴러 피해 내니, 날카로운 회칼이 휘둘러지는 게 눈에 보였다.

서슬 퍼런 칼이 이쪽으로 내질러졌다. 얼른 몸을 일으키고 뒤로 물러나 피해 냈지만, 검정 와이셔츠의 앞섶이 대각선으로 길게 잘렸다. 갈라진 사이로 옅게 피가 배어 나오는 자상이 눈에 띈다.

회칼이 다시금 가슴팍을 노리고 내질러졌고, 몸을 옆으로 돌리고서 그 상대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그대로 손목을 홱 꺾어 버리니, 상대가 짧은 비명과 함께 칼을 놓쳤다.

바닥에 칼이 나뒹굴고, 상대가 멀쩡한 다른 손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을 이쪽의 비어 있는 손으로 턱 하고 막아 내니, 상대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대로 복부에 무릎을 세워 가격하니, 상대의 몸이 절로 굽혀지고 머리가 앞으로 쏠렸다. 그때를 노려 다리를 내리며 반동으로 다른 쪽 무릎을 빠르게 차올렸다.

“허윽!”

얼굴을 제대로 맞은 남자의 두 손을 풀어 주자 그가 뒤로 넘어가 쓰러졌다.

숨을 고르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주먹을 불끈 쥐고 뒤로 돌아 그것을 날렸다. 하지만 주먹이 상대에게 그대로 잡혔다.

움찔하며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선 그대로 굳는다.

“컷-!”

우렁찬 컷 소리에 그제야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탁 풀렸다.

은율이 제 주먹을 붙잡고 있는 젊은 남자 배우에게서 손을 회수했다. 그가 미안한 낯으로 남자 배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좀 세게 쳤죠?”

조금 전에 날린 주먹이 리허설 때보다 좀 더 힘이 들어간 상태라 걱정스럽게 물었다. 상대 배우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뇨, 괜찮았습니다.”

그 말에, 은율은 그제야 얼굴을 펴고 살짝 웃어 보였다. 상대 배우가 움찔한 채 그대로 굳었다.

“죄송해요. 수고하셨습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다른 스턴트맨들과 스태프들에게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여기저기 ‘수고하셨습니다’를 연발하며 감독에게로 다가가니, 그 옆에 은율과 같은 코트를 입은 수하가 서 있었다.

가만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수하가 은율을 발견하고는 밝게 웃는 낯으로 알은체를 했다.

“수고했어요, 서은율 씨.”

“오셨습니까.”

은율도 마주 웃어 주고는 모니터에 시선을 두었다. 감독이 은율의 팔을 끌어당기고는 그의 등을 아프지 않게 팡팡 두드렸다.

“수고 많았어요. 오늘도 멋있었어!”

“감사합니다.”

은율이 약간 쑥스럽게 웃었다. 감독이 은율의 얼굴을 보며 싱글거렸다.

“서은율 씨, 나중에 기회 되면 단역으로라도 나와 볼 생각 없어요? 역시 비주얼도 그렇고 연기가 아주…… 크!”

일전에 다른 감독에게도 들었던 제의였다. 당시에는 연기를 제대로 해 볼 생각도 없었고, 재능이 있다는 생각도 없던 때라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말씀 감사합니다. 생각해 볼게요.”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감독이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럼 배역 줄 테니까 바로 해 볼래요?”

“예? 하지만…….”

은율이 당황해하자, 옆에서 수하가 끼어들었다. 그가 감독의 투박한 손을 잡아떼며 씩 웃었다.

“감독님, 은율 씨 피곤할 텐데 다음에 이야기하시죠.”

“아, 미안하네. 내가 조만간 연락할 테니까 연락처를……!”

“감독님.”

수하가 감독의 말을 끊으며 눈가를 휘었다. 그제야 감독이 말을 삼키며 멋쩍은 얼굴을 했다.

“흠흠, 강 팀장에게 말 전해 놓을 테니 언제든 말해 주게. 내가 서은율 씨 참 좋아하는 거 알지?”

은근슬쩍 말하며 눈을 빛냈다. 은율이 작게 웃어 주고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동하는 은율의 뒤로 수하가 따라붙었다.

“오늘로 제 대역 마지막이죠? 또 스턴트 뛰는 거 있어요?”

수하가 친근하게 물어 왔다. 은율이 겉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치며 대답했다.

“아뇨, 졸업 논문도 준비해야 해서 당분간은 안 할 것 같습니다.”

“아쉽네요. 은율 씨 액션신 더 보고 싶었는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은율이 픽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죠.”

은율의 미소가 약간 수줍게 변했다.

“배우 대 배우로.”

“예?”

수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율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탈의실로 향했다.

수하는 은율이 방금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것은 ‘배우’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이라도 진심이냐고 붙잡아 묻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칼에게라도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은율의 대사 연기는 보지 못했지만, 대역을 할 때의 동작 하나하나와 표정 연기, 그 기백만 보더라도 그의 연기력이 얼마나 출중한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사 연기까지 완벽하다면, 실로 엄청난 신인으로 추앙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신인이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한들 주목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딱 붙어 있는 톱스타 이진환의 인맥, 케이트레이딩의 대주주인 칼바노아 알리예프의 든든한 지원이 있다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신인이 될 것이다. 연기력만 받쳐 준다면 근시일 내에 주연을 꿰찰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수하의 입가가 경련하듯 올라갔다.

한편, 탈의실에 도착해 먼지 묻은 옷을 벗어 낸 은율은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제 옷을 하나둘 갖춰 입었다. 셔츠 앞 단추를 채우려는 찰나, 제 가슴팍에 길게 그어진 붉은 선이 눈에 띄었다.

사실 셔츠의 잘린 부분은 촬영 전에 미리 잘라 둔 것이었다. 그 잘린 부위를 얇은 투명 실로 듬성듬성 꿰매어 두고, 가짜 회칼에 베이는 찰나에 셔츠 끝을 남몰래 훅 당겨 투명 실을 끊어 내었다. 물론 잘린 단면으로 보이는 가슴팍에는 미리 가짜 피로 베인 것 같은 상처를 만들어 두었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정말 베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닦아 내기 위해 탈의실 선반에서 물티슈를 꺼내 들었다.

마침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발신자는 진환으로, 화상통화를 요청하고 있었다.

웃는 낯으로 전화를 받고는 휴대폰의 정면 카메라를 제 쪽으로 맞춰 손을 뻗었다. 화면 일부에 은율의 얼굴과 흉상이 담기고, 다른 공간에는 진환의 얼굴이 보였다.

앞머리를 자연스레 올리고 있던 진환이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은율을 반겼다.

-수고했어. 힘들었지? ……잠깐, 그 상처 뭐야?

진환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은율의 가슴팍을 보았다.

-괜찮아? 베인 거야? 누가 그랬어?

속사포처럼 물어 오는 말에 은율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거 분장이에요. 지워져요.”

그렇게 말하며 얼른 한 손으로 물티슈를 꺼내 들고 가슴팍을 북북 닦아 냈다. 가짜 피로 된 기다란 선은 사라졌지만, 하도 북북 문질러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지만, 그래도 걱정이 서려 있다.

-다른 곳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예, 멀쩡합니다.”

-심장 떨려 죽겠다, 정말.

진환의 걱정이 마냥 기분 좋은 은율은 밝게 웃었다. 진환도 마주 웃어 주며 왼손에 있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곧 그쪽에 도착할 것 같아. 같이 돌아가자.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다 끝나신 거예요? 스케줄 더 있는데 일부러 비우신 건 아니죠?”

-아니야. 그리고 내일부터 이틀간 오프니까 같이 있자. 학교 쉬지?

은율이 고개를 갸웃하다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진환이 왜 내일부터 이틀간 쉬기로 했는지 이해했다.

오늘 저녁부터 약 2, 3일간, 서울에 상당한 양의 비가 쏟아질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비가 올 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티 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 찰나의 변화를 진환은 귀신같이 잡아내었다.

진환이 안쓰러운 얼굴을 하며 걱정해 왔다.

-기분 안 좋으면 대기실에 있을래? 형이 찾아갈게.

은율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촬영장 입구에서 기다릴게요.”

진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최대한 빨리 갈게.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덧붙인다.

-사랑해.

은율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작게 대답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말하고 나니 얼굴이 더 확 달아올랐다. 진환이 기분 좋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챙겨 넣고 옷을 모두 갖춰 입은 은율은 백팩을 챙겨 메었다.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다름 아닌 가방의 무게였다.

이젠 성적보다도 목전에 다가온 자격증 시험과 졸업 논문 준비가 더 급선무였다. 무거운 전공 서적 대신 자격증 전용 교재, 그리고 논문에 쓸 내용을 메모하기 위한 노트 정도가 가방 속 내용물의 전부였다.

진환도, 칼도 이제 억지로 돈을 좇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애당초 금융학과를 간 것도, 국제 자격증 시험을 봐서 보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했던 것도 모두 돈 때문이었다.

이제 칼의 든든한 원조를 받게 된 이상, 돈만 좇을 필요성은 없어졌다.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그간 제 가방이 과할 정도로 묵직했던 것은 비단 전공 서적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 줄 지원도 충분하고 인맥까지 있는데, 굳이 국제 자격증에 열을 올려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은율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또렷하게 깨달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학교생활은 성실히, 졸업 논문은 좋은 평가를, 국제 자격증 시험은 꼭 합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의 지나온 날들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이자 성과가 될 터였다.

비록 꿈을 꾸기 위한 길은 아니었지만, 꿈을 이룬 후에 돌아보았을 때 그 시간이 헛되어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은율은 가방의 무게가 제법 가볍다는 것을 느끼며 대기실을 나섰다.

*  *  *

진환은 예고한 것처럼 곧 도착했다. 은율이 촬영장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돌리며 밖으로 나가니, 타이밍 좋게 진환의 밴이 나타났다. 검은 밴이 은율의 앞에 멈춰 서고, 그 문이 열리며 진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율아.”

진환이 활짝 웃어 보였다. 은율도 시원하게 드러난 얼굴로 마주 웃어 주며 밴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연우 씨. 잘 지냈어요?”

은율이 운전석에 앉은 연우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연우가 운전대에 손을 올린 채 고개만 뒤로 돌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은율 씨. 그렇게 하고 계시니까 정말 못 알아보겠어요.”

연우도 역시나 화사하고 깔끔하게 변한 은율의 모습에 놀랐다. 다른 무엇보다, 답답하던 앞머리를 자르고 안경을 벗으니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떨어지지 않는 눈을, 진환이 손수 치워 주었다.

“눈 떼라.”

진환이 낮게 말하며 연우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아 정면으로 돌려 주었다.

“예예, 운전이나 하겠습니다.”

연우가 한숨을 내쉬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진환은 은율을 옆자리에 앉히며 그의 백팩을 벗겨 뒷자리에 두었다. 그러고선 그 자리에서 뭔가를 꺼내 왔다.

“율아.”

진환이 은율의 손을 꼭 붙잡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문양의 작은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잡지를 받아 든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풀린 잡지야. 책갈피 꽂아 놓은 곳, 봐 봐.”

은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책갈피를 잡아 그 부분을 펼쳤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

은율이 눈만 깜빡이며, 말을 채 하지 못했다. 진환이 은율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 상태로 기분 좋은 미소를 연신 띠었다.

“잘 나왔지?”

은율이 잡지와 진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잡지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자신이 아닌 이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순백색의 와이셔츠에 어두운 스키니 청바지, 베이지색 롱가디건을 입은 청년이 진환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나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앞머리를 왼쪽으로 몰고 오른쪽 머리 부분엔 흰색 실핀 몇 개를 ‘X’ 자로 교차해 세팅한 머리가 특히나 눈에 띄었다.

은율은 그 사진을 보며 몸이 저릿저릿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정말…… 나라고?

자신이 보기에도 잡지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은 도무지 본인처럼 생각되질 않았다. 아예 다른 사람을 데려다 찍어 놓은 것만 같았다. 눈빛, 표정, 포즈, 헤어스타일, 거기다 화장까지 한 얼굴. 그 어떤 것에서도 지금의 은율을 연상해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 잡지 속에 있었다.

진환이 손을 뻗어 은율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제 좀 알겠어? 네가 얼마나 재능 있는지.”

은율이 얼떨떨한 얼굴로 진환을 마주 보았다.

“톱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배우는 자신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이야.”

진환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이 잡지 속 캐릭터에게서도, 영화 <페르소나>의 정한서에게서도, 네가 만들어 냈던 이유건에게서도 ‘서은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진환이 행복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것은 연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짓는 미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넌 최고의 배우가 될 거야.”

바라마지 않던 최고의 파트너를 눈앞에 둔 사람의 진실 된 미소가 은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남자를 만나고, 그와 연인이 되고, 언제나 그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기분 좋은 울컥함이 몰려왔다.

은율이 진심을 담아 해사하게 웃었다.

“꼭 그렇게 돼서 형 옆에 서겠습니다.”

*  *  *

잡지에 실린 진환과 은율의 화보는 또 한 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해당 잡지와 관련된 키워드가 상위에 랭크되고, 관련 기사가 밀물처럼 쏟아졌다. SNS에서는 ‘무슨 콘셉트든 잘 어울리는 이진환’이라며 치켜세우는 이들이 한가득이었고, 그의 열기에 못지않게 진환의 촬영 파트너 모델에게도 깊은 관심이 쏠렸다.

기자들은 당시 화보 촬영을 진행한 이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자 했지만, 실패나 다름없었다. 그는 진환이 급하게 데려온 모델이었으며, 신상에 관한 것은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당연히 기자들의 관심은 이진환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진환은 말할 수 없다고 단호히 못을 박았고, 그의 소속사는 기계처럼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다. 이러니 기자들만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인터넷에서는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이젠 네티즌들이 그들 특유의 수사를 시작했다.

먼저, 마른 듯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 비율로 봐서는 모델이 확실하다는 평이었다. 거기다 보는 사람을 순식간에 홀릴 만한 마성의 매력도 있었고, 사진 한 장에서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도 압도적이었다. 그런 사람이 일반인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해당 모델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네티즌들이 SNS를 달구며 서로 갖은 제보를 받고 정보를 공유했다. 그러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으니 더 난리였다. 마치 과거 ‘지하철 미남’이자 영화 <페르소나>의 이름 없는 배우를 찾을 때와 비슷했다.

이진환의 비주얼이 한 수 밀리는 느낌까지 드는 저런 미남이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름 없는 배우도 그렇고, 이름 없는 모델도 그렇고.

*  *  *

은은한 클래식을 틀어 놓았음에도 워낙 세차게 쏟아지는 통에 빗소리가 안 들릴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깬 은율은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머리 위에선 진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허리에 둘린 진환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 내며 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머릿속이 말랑말랑한 느낌이었다. 뭔가 몽롱하고 나른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몰려온다거나 한기가 드는 것은 아니었다. 비와 홀로 맞서던 예전과는 상당히 다른 증세였다.

은율은 이불이 덮인 제 무릎을 모아 세웠다. 그것을 두 팔로 끌어안고 멍하니 벽 한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물든 벽이 잘게 물결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율아.’

등줄기를 강타당한 것 같은 느낌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서유건의 목소리였다.

잔뜩 얼어 있던 은율이 눈가를 떨었다. 눈앞에 일렁이던 벽에서 뭔가가 스르르 걸어 나왔다. 어둠이 깊어서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어야 할 텐데, 마치 주변에 잔잔한 빛이 머무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선명히 눈에 담겼다.

그것은 분명, 죽은 유건이었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은율은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은 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사이 또 한 발, 또 한 발 내디딘다. 은율의 몸이 점점 떨리고, 무릎을 감싼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침대 가까이 다가온 유건이 은율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런 그의 뒤로, 또 다른 그림자가 보였다. 손끝이 덜덜 떨려 왔다.

‘은율아.’

그림자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입을 달싹였다. 그 얼굴이 차츰 선명해지고, 이내 양어머니였던 나영의 무표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은율은 두 사람의 환영을 보며 몸을 좀 더 웅크렸다. 눈에 물기가 차오르고 잘게 핏발이 섰다. 눈을 돌리고 싶지만, 돌아가질 않았다. 가위라도 눌린 사람처럼, 시선 하나 멋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침대 끝에 다다른 유건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뒤를 따르던 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은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찾아오신 거야?”

걱정이 담긴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맥없이 풀리며 숨이 트였다. 멈췄던 숨을 토하는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은율을, 진환이 뒤에서부터 안아 주었다. 그의 가슴팍에 닿은 등이 유난히 따뜻했다.

진환은 자신의 품에 은율을 끌어안은 채, 그가 보았던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무엇 하나 보이는 것 없는, 그저 새카만 허공이었다. 하지만 은율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그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진환이 은율의 허리를 감아 제게 밀착시켜 안았다. 은율이 아직도 잘게 떠는 게 느껴졌다.

은율의 시선이 닿아 있는 허공을 보며 진환이 말했다.

“이제 그만 찾아오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은율이는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은율이 그제야 눈을 돌려 진환을 돌아보았다. 달빛에 비친 진환의 얼굴은 극히 진지했다.

‘은율아.’

또다시 들려온 음성에, 은율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유건의 무표정한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멈춰 가던 떨림이 도로 극심해졌다. 진환의 팔을 붙들고 몸을 덜덜 떨었다.

눈앞에 있는 유건의 입술이 달싹였다.

‘잘됐구나.’

무미건조한 투의 짧은 말이었지만, 바짝 긴장하던 은율의 허를 찌른 말이기도 했다.

유건의 무표정한 얼굴이 작게 미소를 띠었다. 그 상태로 손을 들어 은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무 온기도 없고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지만, 괜스레 눈물이 났다.

‘이제 안심할 수 있겠어.’

그 말을 끝으로 유건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흩날렸다.

유건이 점차 사라져 가는 그 순간까지도 은율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평소처럼 무섭거나 끔찍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정말, 제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 같았다.

유건이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침대 끄트머리에 다가서 있는 나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은율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유건처럼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은율의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진환이 늘어진 그를 붙들고 안색을 살폈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희미한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반쯤 넋이 빠져 있었다.

“율아, 정신 차려. 괜찮아?”

진환이 은율의 볼을 쓸어 주며 눈가의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 주었다. 한 팔로 그의 상체를 받쳐 안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형…….”

은율이 멍하니 입을 달싹였다. 진환이 안달 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그래, 형 여기 있어.”

“형…….”

은율이 연신 진환을 불러 대며 손을 뻗었다. 그가 은율의 손을 붙잡아 제 볼에 가져다 대었다. 차갑던 손에 다른 이의 따스한 온기가 옮겨 갔다.

은율은 제 몸의 잔떨림이 점점 멎어 가는 것을 느끼며 진환의 품에 안겨 들었다. 말없이 안아 주는 그의 등에 팔을 단단히 둘렀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분명 빗소리는 세지고 있는데도, 그에 반해 몸의 떨림은 점차 멎어 갔다.

*  *  *

물속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머릿속이 한층 맑아지는 느낌이 났다.

세면대에 시원한 물을 가득 받고서 얼굴을 넣어 숨을 멈추고 있던 은율이 얼굴을 훅 들었다. 얼굴에서 시원한 물이 뚝뚝 떨어지고, 다급한 숨소리가 욕실 안을 울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한차례 문지른 은율이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다소 긴장한 안색의 은율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잘할 수 있을까…….’

한숨부터 나왔다.

곧 있으면 칼이 보낸 사람이 도착할 것이다. 한사코 진환이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그날 지방 로케 촬영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은율도 알고 있었다. 은율은 스케줄을 조정하겠다는 진환을 엄하게 바라보며 혼자 해 보이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당일이 되니 걱정부터 앞섰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꼼꼼히 닦아 낸 은율은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은율은 휴대폰과 지갑만 챙긴 단출한 모양새로 현관문을 열었다.

이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10월이었다. 검정 브이넥 셔츠에 얇은 재킷을 걸친 은율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문을 향해 걸었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고급스러운 검정 외제 차와 그 옆에 선 니콜라이가 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검정 정장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은율을 보자마자 허리를 깊이 숙여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모시러 왔습니다.}

은율이 얼떨떨한 얼굴로 얼른 허리를 굽혀 마주 인사하려 했다. 그런 은율의 어깨를 잡아 인사를 만류한 니콜라이가 차의 뒷문을 손수 열어 주었다. 은율이 머뭇거리다 올라타자, 최대한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던 은율이 백미러에 비친 니콜라이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오랜 시간 동안 칼의 오른팔을 담당해 왔고, 현재 역시 그렇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는 칼이 제 보좌를 맡길 정도로 믿을 만한 인물이다. 그렇다 보니 니콜라이 역시나 칼만큼이나 바쁜 것은 당연지사였다.

은율이 미안한 얼굴로 영어를 골라 말을 걸었다.

{바쁘실 텐데 직접 오셨네요.}

니콜라이가 선글라스를 벗어 정장 재킷의 가슴 포켓에 플라스틱 다리 한쪽을 걸쳐 걸었다. 그가 푸른 눈동자를 들어 백미러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보스에겐 도련님이 최우선입니다. 제가 모셔야죠.}

칼의 마음을 알 만했다.

그는 아직도 은율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비록 은율 본인도 절대 약하다 평할 사람이 아니고, 진환도 곁에 붙어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은율이 쓴웃음을 보이자, 니콜라이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해 버렸다.

{제가 불편하시면 다음부턴 다른 믿을 만한 부하를 보내겠습니다. 한국인이 좋겠죠?}

{아니, 불편한 게 아닙니다. 죄송해요.}

얼른 고개를 내저으니, 니콜라이의 눈가가 살짝 휘어진다. 평소 딱딱한 얼굴만 하거나 선글라스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아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에 반해 오늘은 은율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한층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만큼이나 부드럽게 출발한 차량은 과연 고가의 외제 차답게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은율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진환에게서 출발했냐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니콜라이가 데려다주러 왔다고 보고하자, 다행히 안심한 투의 메시지가 온다. 그 역시 니콜라이와 단둘이 만난 적도 있었고 이야기도 나누어 봤으니 어느 정도 신뢰가 있는 모양이었다.

작게 웃는 낯으로 끝나면 연락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아마 다음 연락은 한참 뒤에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율이 휴대폰을 쥔 상태로 깊이 심호흡했다.

오늘은 홀로 촬영 준비를 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카메라 앞에 서야만 했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인지 더 두근거렸다.

*  *  *

며칠 전, 은율은 뜻밖의 상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것은 은율이 얼결에 번호를 교환했던 현우였다.

곽철민 감독과 미리 계약되어 있던 대역 연기의 마지막 날, 집에 돌아가려는 은율을 붙잡고 현우가 들뜬 얼굴로 외쳤다.

“곧 전화 드릴게요! 안 받으시면 안 돼요!”

당시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했다. 그저 막연한 생각으로, 이제 당분간 볼 일이 없으니 연락을 주고받자는 말인가 싶었다. 진환이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질게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은율은 현우의 대역을 거듭하면서 그와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촬영장에 가면 가장 먼저 달려와 인사하고 살뜰히 챙겨 주는 모양새가 은율의 호감을 샀다. 마치 몸집 작은 하진을 보는 느낌에 은율도 나름 그를 챙기게 되었다. 물론 진환이 있으면 그것도 자제했지만.

딱히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친근한 동생 같은 현우였던지라, 그가 연락하겠다고 했을 때도 알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 사흘 후, 정말 현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 안녕하세요!

잔뜩 들뜬 활발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은율은 공부하던 교재를 덮고 의자에 등을 붙인 채 그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현우 씨. 정말 전화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연기를 함께할 때는 주연 배우와 그 배우의 대역 스턴트맨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지만, 이제 대역도 다 끝난 마당이라 자신은 일개 스턴트맨일 뿐이었다. 유명 아이돌 그룹 출신에 주연 배우로 거듭나기까지 한 현우와 자신의 높낮이는 명백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연락을 해 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저야말로 형이 전화 안 받아 주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현우가 실실 웃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저기, 형. 혹시 연기해 볼 생각 없으세요?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현우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어……, 대역 연기를 말하는 겁니까?”

-아뇨, 진짜 연기요!

현우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저희 그룹 정규 5집 준비 중이거든요. 원래는 뮤직비디오도 다 찍었는데, 수록곡 중 한 곡을 추가로 찍게 됐어요. 이게 분위기상 저희 멤버가 찍을 게 아니라 좀 더 연기력 좋은 분이 해야 맞을 것 같은데, 은율이 형은 어때요?

은율은 현우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저보다는 다른 연기력 좋은 배우분들도 있을 텐데…….”

-괜찮으시다면 꼭 형이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형 연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아니, 좋아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형은 연기를 잘하신다고요! 무엇보다, 그 곡 컨셉이랑 형이 너무 잘 어울려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르지 않고 쏟아 내는 현우의 칭찬이 당황스러웠다.

“그치만…….”

때마침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은율이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 휴대폰의 마이크를 음소거해 두었다.

역시나 현관에는 진환이 서 있었다. 촬영 후 곧바로 돌아온 것인지, 아직 세팅된 머리가 그대로였다.

“율아, 형 왔어.”

무표정하던 얼굴이 단번에 밝아지며 그가 두 손을 뻗어 왔다. 눈앞의 은율을 품에 폭 안은 진환이 그의 볼에 연신 입을 맞췄다. 은율이 대형견 같은 진환의 모습에 실소하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율이 보고 싶어서 빨리 왔어. 무슨 일 없었지? 집에 얌전히 있었어?”

“예, 얌전히 집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졸업반이다 보니 학교도 며칠 나가질 않았다. 강 팀장에게 스턴트 일까지 쉬겠다고 못 박아 둔 상태라, 지금은 오전에 조깅할 때를 빼놓고는 거의 집에만 붙어 있었다.

진환의 몸이 떨어져 나가자 은율이 머뭇거리다 그에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은…….”

은율이 현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에게 전달했다. 은율과 현우가 서로 어느 정도 친해졌고 번호까지 교환했다는 것에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현우가 뮤직비디오 출연을 제의해 온 부분을 들었을 땐 오히려 눈을 빛냈다.

진환의 눈이 은율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 닿았다.

“아직 통화 중이지? 잠깐 줘 볼래?”

“아…… 잠시만요.”

은율이 음소거를 풀고 일단 휴대폰을 제 귀에 가져갔다.

“현우 씨, 지금 이진환 씨랑 같이 있는데…….”

괜히 스스럼없는 호칭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이진환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예?! 이진환이라니…….

진환이 함께 있다는 말에 예상대로 적잖이 놀란다.

-왜 같이 있어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진환 씨가 이런 부분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 잠깐 바꿔 드려도 되겠습니까?”

현우가 건너편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게 눈에 선했다. 그는 여전히 진환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싫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현우는 은율의 말을 받아들였다.

-예, 상관없을 것 같아요. 여차하면 매니저 형 바꿔 드리죠, 뭐.

한숨 섞인 목소리다.

은율은 그제야 휴대폰을 진환에게 건넸다. 진환이 한 손에 휴대폰을 받아 들고 다른 한 팔로는 은율의 허리를 잡아 품에 안았다. 은율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냥 얌전히 있기로 했다.

“이진환입니다. 서은율 씨에게 말한 내용, 나한테도 다시 말해 주시죠.”

건너편에서 언뜻 현우가 불편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그는 최대한 자세히 내용을 전달했다.

“그럼 촬영 예정 날짜와 뮤직비디오가 풀리는 날짜는 각각 언제입니까?”

현우가 건너편에서 머뭇거린 모양이다.

“매니저분이나 담당자님을 바꿔 주세요. 그편이 이야기가 빠를 것 같군요.”

차가운 음성에 은율이 움찔하며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진환이 싱긋 웃으며 가만히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진환은 현우가 은율의 번호를 가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딴에는 이렇게 말로라도 현우를 괴롭히고 싶었던 거다.

현우가 도망치듯 제 휴대폰을 매니저에게 넘겼다. 건너편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그는 상당히 조리 있게 내용을 전달했다.

그 역시 현우를 따라다니며 평소의 은율과 연기할 때의 그를 눈여겨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번 뮤직비디오 컨셉의 틀이 잡힌 순간, 저도 모르게 은율을 떠올렸다고 말해 왔다.

진환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이야기를 모두 듣더니, 제 어깨에 옆얼굴을 댄 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은율에게 시선을 내렸다. 그가 매력적으로 미소 지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진환이 상대에게 그리 말하며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율아, 이거 해 볼래?”

은율이 고개를 들며 눈을 깜빡거렸다.

“뮤직비디오를요?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는데…….”

“괜찮아. 형이 이쪽하고 직접 협상도 하고 케어도 해 줄게. 어때?”

진환이 이리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뮤직비디오의 내용도,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진환이 제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율은 연기가 하고 싶었다.

“좋습니다.”

은율이 웃으며 승낙하자, 진환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하겠습니다. 단, 모든 케어와 협상은 제 쪽에서 위임받아 진행합니다. 그리고…….”

진환의 눈가가 휘어졌다.

“뮤직비디오의 내용 자체도 함께 의논했으면 합니다만.”

그 후 은율은 진환을 따라 현우의 기획사에 방문해 보기도 했고, 기본 컨셉을 기반으로 스토리를 손보는 데에도 참여했다. 진환이 직접 준비한 스토리보드를 들고 찾아간 날, 화등잔만 한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던 기획사 사장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완성된 콘티를 틈날 때마다 보고 또 봤다. 어떻게 하면 대사 없이도 효과적으로 연기를 선보일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진환은 부담 없이 하라고 말했지만,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진환이 봐 줬음에도 긴장이 되었다.

그가 촬영할 때 곁에 붙어 있어 준다면 이 긴장감도 반감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걸 진환에게 의지하려 하다니, 정신 상태가 해이해졌다.

예전에는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다 해내야만 했다. 동생들의 뒷바라지부터 학업과 진로에 관해, 이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결정 또한 오롯이 자신 혼자만의 몫이었다. 누구에게 상담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동생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라고만 생각했기에, 그들에겐 털끝만큼의 걱정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두 동생에겐 언제나 좋은 말만 골라서 했던 것 같다. 힘드냐고 물어 오면 괜찮다고 대답했고, 무슨 일 없느냐 물어 오면 좋은 일이 가득하다고 답했다.

제 속의 답답하고 힘든 말은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워도 매달릴 사람 하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힘든 일을 토로하면 등을 토닥여 주며 안아 줄 사람이 생겼고, 그 무엇보다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

사랑하는 사람과 친아버지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 지금으로선, 여태 어떻게 혼자 살아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벌써부터 진환과 칼이 보고 싶었다.

일이 다 끝나면 두 사람에게 꼭 전화해야지.

힘들진 않았냐고 걱정하는 소리도 들어 보고, 혼자서도 잘 해냈다는 칭찬도 듣고, 고생했다고 격려해 주는 말도 듣고 싶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어느새 평온한 기운에 둘러싸였다.

*  *  *

촬영장 세트에 도착한 은율은 눈을 깜빡이며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드넓은 창고형 스튜디오를 정확히 4등분 해서 각각 다르게 꾸며 놓았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도 판이했다.

이 공간을 모두 활용해서 촬영하되, 배우는 오로지 은율 혼자였다.

다시 긴장하기 시작한 은율에게 니콜라이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은율이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도련님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은율의 굳어 있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러다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니콜라이가 몸을 약간 숙여 은율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푸른 눈동자로 은율을 바라보며 그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정돈해 준다.

{오늘 하루는 매니저라고 생각하고 부려 주십시오. 집에 모셔다드릴 때까지 함께 있겠습니다.}

헌신적인 말에 은율이 작게 미소 지었다.

{니콜라이 씨가 저 때문에 고생하시네요.}

{당치도 않습니다.}

니콜라이가 이번엔 은율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말했다.

{편하게 니콜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생각해 보니 칼은 그를 니콜이라고 불렀다. 은율이 입을 오물거리다 다시 웃었다.

{그럼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니콜.}

그제야 니콜라이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은율이 형!”

갑자기 들린 활달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촬영장에 미리 와 있던 현우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엔 검정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훤칠한 미남이 천천히 걸어왔다.

지척에 다가온 현우가 니콜라이를 보고 흠칫 놀랐다. 큰 키에 푸른 눈을 가진 스킨헤드의 외국인이 떡하니 서 있으니 겁먹는 것도 이해가 갔다.

{촬영 시작하기 전까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니콜라이가 살짝 웃는 낯으로 공손히 인사했다. 그가 멀어지고 나자, 현우가 그제야 옆에 섰다.

“형, 형. 누구예요? 엄청 무섭게 생겼는데.”

은율에게 꼭 붙어서는 경계의 눈으로 니콜라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오늘 서포트해 주실 분이세요. 제가 아무래도 매니저가 없어서…….”

“저런 무서워 보이는 외국인을 임시 매니저로 쓰다니, 대단하세요!”

마지막엔 눈까지 빛내면서 감격한 얼굴을 한다. 은율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소개 안 해 줘?”

가까이 다가온 검은 코트의 미남이 미간을 찌푸리며 현우를 짧게 타박했다. 가까이서 보니 은율마저 놀랄 정도로 굉장히 잘생긴 청년이었다.

나이는 현우 또래쯤일까. 화려한 은발에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머리 색은 염색했다고 쳐도, 렌즈도 끼지 않은 눈동자가 선천적으로 붉은색인 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당초 아이돌 그룹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은율인지라, 얼굴로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 형이 내가 말했던 그 스턴트맨 서은율 씨. 말한 대로 엄청 잘생겼지? 연기 무지 잘하셔.”

현우가 들뜬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쪽 귀에 화려한 이어커프스와 십자가 귀걸이를 한 청년이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BLESS 리더 진태휘라고 합니다. 이번 뮤직비디오 곡이 제 솔로곡이에요. 그래서 직접 촬영 현장을 보러 왔는데, 괜찮죠?”

은율이 그의 손을 맞잡으며 싱긋 웃었다.

“노래 들었습니다. 아주 멋진 곡이던데요.”

빈말이 아니었다. 은율이 듣기에, 그의 곡은 참 감미로우면서도 짜릿한 카리스마가 곳곳에 만연한 신비한 곡이었다. 거기다 보컬의 목소리까지 좋으니 금상첨화였다. 듣고 있어도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중독성 있고 매력적인 곡이었다.

태휘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연기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이에 비해 뭔가 의젓하고 상당한 기백을 가진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돌 그룹의 리더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러던 태휘가 문득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 뜬 발신인을 확인한 그가 여태까지의 느낌과 전혀 다른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태휘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멀리 걸어가며 통화를 시작한 그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져 있다.

“저거, 저거…… 어휴.”

현우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은율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현우가 얼른 낯을 바꾸어 은율을 마주 보았다.

“형, 제가 대기실 안내해 드릴게요.”

현우가 신난 듯 은율의 팔을 잡고 앞서 걸었다.

순순히 끌려가 주던 은율이 피식 웃었다. 어째 자신보다 현우가 훨씬 들뜬 모양새다.

대기실로 향하며 주변을 훑었다. 점차 스태프들의 수가 늘어나고, 으리으리한 장비 또한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수많은 조명이 하나둘 빛을 내었고, 카메라와 조명 테스트를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은율은 저 조명과 카메라 사이에 홀로 설 생각을 하며 몸을 잘게 떨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은율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짜릿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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