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3 / Black Rose
환한 빛이 가득 들어찬 공간.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늘씬한 남자라는 실루엣일 뿐, 강한 후광에 가려져 있어 모습을 또렷하게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의 네게 내 진심이 닿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널 떠올려.’
검은 뿔테안경의 남자가 화면에 잡혔다. 그가 있는 곳은 삼각과 사각으로 된 물건들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방이 온통 날 선 느낌이고, 배치된 색상도 검정과 진회색, 회색뿐이라 분위기마저 탁해 보였다.
그 공간 한가운데에 선 올백의 남자가 정면을 바라보며 강렬한 눈을 했다.
‘내게만 유독 차갑고 무심한 너.’
그런 남자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며 공간 깊이 걸어 들어갔다.
‘널 변하게 만든 게 나라서 후회가 돼.’
격렬하게 흔들리던 화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너도 변하지 않을 텐데.’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커다란 창문 앞에 선 다른 청년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아침 햇살만큼이나 따스한 너의 품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어.’
화면이 폭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환했던 조명은 어디 가고, 어둑하고 음침한 기운이 가득해졌다.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상관없어.’
‘너라서 그냥 다 좋은 거야.’
사방으로 메마른 꽃잎이 폭풍처럼 휘날렸고, 그 끝에서 처음에 나왔던 남자의 실루엣이 점차 가까워져 갔다. 그에 맞춰 한 번씩 화면이 격하게 흔들렸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이 너라서 좋아.’
남자를 비추고 있던 화면이 사람의 시선처럼 내려가 그대로 아래를 비췄다. 거친 나무 덩굴에 어지럽게 얽혀 있는 한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이렇게 날 잡고 놓지 말아 줘.’
‘도망가지 말아 줘.’
시선이 다시 들어 올려지고, 사방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뿔테안경의 남자가 있던 공간이 일그러져, 각지기만 했던 공간의 물건들이 전부 뭉툭해지고 곳곳이 기묘하게 휘어졌다.
이번엔 해사한 미소의 청년이 다가서 있던 창문이 산산이 깨졌다. 깨진 유리 파편이 청년을 피해 슬로우 모션 상태로 공중을 날았다.
화면이 다시 점멸하며, 배경이 바뀐다.
‘내게 상처받아 무기력해진 너에게 다가가.’
‘내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어.’
검정 가죽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베이지색 롱가디건의 청년이 보였다. 왼쪽으로 앞머리를 모으고 오른쪽 옆머리에는 흰색 실핀이 ‘X’ 자로 몇 개 교차되어 달려 있었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상처가 곪아 크나큰 흉터가 되고.’
‘이미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한쪽만 비치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스르르 감겼다. 그에 맞춰 소파 끝에 힘없이 올라가 있던 팔 하나가 아래로 툭 떨궈졌다.
‘아프다고, 너무 아프다고 외치는 게 안쓰러워.’
화면 위에 곳곳이 찢긴 침실이 오버랩되었다.
아름다웠을 게 분명한 공간이 너덜너덜했다. 침대 시트와 얇은 이불, 베개, 심지어 창문의 커튼까지 산산이 찢겨 있다. 화면이 순간순간 흑백으로 변했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 한가운데에 붉은 정장을 차려입고 검정 셔츠에 와인 색 넥타이를 맨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는 군데군데 붉게 염색된 부분이 있고, 젤로 앞머리 일부분이 거친 형태로 세팅되어 있다. 남자의 양팔에 숄처럼 감긴 풍성한 검정 털 트리밍이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잘게 움직였다.
‘날 비난해도 좋아.’
남자의 매서운 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라인을 길게 뺀 요염한 눈초리가 유혹하듯 휘어졌다.
‘날 무너뜨려도 좋아.’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 입술에 오른손 엄지를 대었다.
‘그렇게라도 날 바라봐 줘, 제발.’
남자가 엄지로 입술 라인을 따라 옆으로 길게 그었다. 엄지에 붉은 립스틱이 묻어 있었던 것처럼 선명한 붉은 라인이 입술을 물들였다. 그도 모자라 옆으로 그러데이션처럼 입가 옆까지 길게 뻗어 나가 흩어졌다.
화면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어둑하고 음침한 기운이 가득한 화면에, 또다시 메마른 꽃잎이 휘몰아쳤다.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상관없어.’
‘너라서 그냥 다 좋은 거야.’
화면에 빛의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남자의 실루엣이 잡혔다. 이젠 한층 가까워져서 화면에 그 키가 온전히 담겼다. 그럼에도 빛이 너무 강해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이 너라서 좋아.’
화면이 시선이 되어 이번에도 그 아래를 비췄다. 역시나 나무 덩굴에 얽혀 있는 한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조금 다른 점은, 나무 덩굴에 검은 장미가 봉오리 상태로 군데군데 얽혀 있다는 것이다.
‘날 잡고 놓지 말아 줘.’
‘도망가지 말아 줘.’
앞의 부분처럼 시선이 다시 들어 올려지고, 화면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이전에 검정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있던 남자는 갈가리 찢어진 그 소파에 다리를 약간 벌린 채 앉아 있었다. 그 상태로 두 무릎에 양 팔꿈치를 대고 깍지 낀 손에 제 입을 묻고 있다.
이번엔 난잡하게 찢어진 방의 붉은 정장 남자를 비췄다. 그 찢어진 방 곳곳에 붉은 잉크가 튄 자국이 선명하다.
붉은 정장의 남자가 찢어진 침대에 거꾸로 누워 머리만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립스틱이 번진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섬뜩하게 끌어 올려졌다.
화면이 일순 크게 흔들리고, 노이즈가 낀 예전 VHS 테이프처럼 화면에 몇 개의 줄이 위로 지나다녔다. 그것과 동시에 화면이 변화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됐어.’
실루엣만 있던 빛 속의 남자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그가 이쪽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널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왔다고.’
‘널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고.’
가까워질수록, 그의 왼쪽 가슴에 생겨나기 시작한 검은 장미가 활짝 피어올랐다.
‘오직 너만이 내 심장이야.’
남자는 제 왼쪽 가슴에 생겨난 검은 장미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가 왼손을 허공에 내뻗었다. 손을 내뻗은 그곳에는 망가져 버린 각진 세계 속의 검은 뿔테안경의 남자가 서 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맞잡자, 곧 그 몸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대신 검은 장미를 단 남자의 얼굴에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그 뿔테안경이 자리 잡았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곳은 허공에 튄 유리 파편이 멈춰 있는 세계였다. 그 세계 속 해사한 미소의 청년이 손을 잡았다. 청년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남자의 에메랄드빛 셔츠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어서 대각선 왼쪽으로 손을 뻗자, 베이지색 롱가디건을 팔뚝까지 늘어뜨린 나른한 남자가 느릿하게 걸어왔다. 그가 긴 소매에 반쯤 가려진 가느다란 손을 남자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그가 사라지자, 흰 셔츠에 바지 차림이던 남자가 마치 원래부터 입고 있었던 것처럼 긴 가디건을 입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른손을 대각선 오른쪽으로 내밀었다. 그곳은 갈가리 찢긴 배경에 붉은 잉크가 잔뜩 튄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다가온 붉은 정장의 남자가 비릿하게 웃는 낯으로 손등을 잡아 키스했다. 그 역시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남자의 팔에는 기다란 검은 털 트리밍이 두어 번 휘감겼다.
‘네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너에게.’
‘내 온전한 사랑을 줄게.’
남자가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바짝 다가왔다.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얼굴이 화면에 가득 담겼다.
‘그러니 제발.’
입 한 번 열지 않았던 남자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날 두고 가지 마.’
가사를 그대로 소리 없이 읊었다. 남자의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화면에는 점차 검은 장미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남자의 얼굴은 칠흑의 장미에 가려져 갔다.
이윽고 전체를 비추는 화면이 되어, 검은 장미로 만발한 공허한 공간만이 담겼다.
그 위에 ‘Black Rose’라는 단어가 필기체로 휘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