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Actor/Debut
오전부터 시작한 뮤직비디오 촬영은 근 10시간이 꼬박 걸렸다.
촬영장 주변은 벌써 어둑해졌고, 주변에선 지친 스태프들의 음성이 난무했다. 그들이 다 같이 ‘수고하셨습니다’를 연발했다.
은율 역시 검은 뿔테안경을 벗어 들고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었다. 그가 인사를 건넬 때마다 스태프들은 깜짝깜짝 놀라며 얼른 마주 인사했다. 은율의 예의 바르고 공손한 모습에 촬영 스태프들이 하나둘 훈훈한 미소를 띠었다.
인사를 끝마친 은율은 대기실로 걸어가며 몸에 매달린 장미 장식을 떼어 내었다.
그가 대기실에 들어가 문을 닫자, 어느새 그곳으로 다가선 스킨헤드의 키 큰 외국인이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열중쉬어 자세로 문 옆에 선다. 그 때문에 대기실에 들어가 은율을 도와줄까 싶었던 현우도 꼬리를 내리고 돌아섰다.
촬영 스태프들이 웃는 낯으로 소곤거렸다. 상당한 시간이 걸린 촬영이었지만, 스태프들은 오히려 하루 꼬박 걸릴 촬영이 빨리 끝났다며 좋아했다. 거기다 분명 굉장한 뮤직비디오가 나올 거라며 잔뜩 흥분했다.
촬영에 걸린 10시간 중 절반은 은율이 옷을 갈아입으며 분장 혹은 화장을 하느라 지체된 시간이었다. 진환이 보는 앞에서 몇 번이고 연습한 덕에 연기 자체에서 감독이 NG를 외치는 경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은율이 제 감정을 곱씹어 보고 재촬영을 부탁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그렇게 다시 찍은 장면은 감독마저 감탄할 정도의 분위기가 나왔다. 그 열정적인 모습에 감독도, 스태프들도, 그리고 현우와 태휘마저 놀랐다.
사실 그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그가 구현한 캐릭터였다. 설마하니 세간을 놀라게 했던 ‘이름 없는 배우’도, ‘이름 없는 모델’도 전부 은율이었을 줄이야. 정작 은율의 연기력에 감탄해 그를 뮤직비디오 주연으로 밀어주었던 현우마저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촬영 스태프들은 그제야 이진환의 요구를 이해했다.
배우 이진환은 서은율의 대리인으로 유능한 변호사까지 고용해 협상을 해 왔다. 뮤직비디오가 공개되는 그날까지 촬영 내용과 주연 배우에 대해선 절대 함구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상당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뮤직비디오 공개를 불허한다는 내용이었다.
촬영 스태프들은 한 명 한 명 모두 그 계약서에 사인한 후에야 스태프 명단에 제 이름을 올릴 수가 있었다.
대신 촬영에 대한 모든 비용은 진환이 부담하며, 배우 역시 노개런티로 참여하기로 했다. 물론 진환은 정상적으로 개런티가 지급된 척하며 은율의 통장에 그만큼의 돈을 넣어 줄 생각이다.
처음에는 그저 이진환의 괴짜 놀음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흘러넘치는구나 싶었고, 서은율이라는 스턴트맨 출신의 연기 초짜가 그의 친인척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진환이 저런 제의를 할 리가 없지 않나.
그런 촬영 스태프들의 볼멘소리는 은율을 처음 보았을 때 쑥 들어갔다. 서로 은율 몰래 숙덕이면서 저런 비주얼이 왜 스턴트맨이나 하고 있었나 의심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번 뮤직비디오에서는 비주얼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연기력이 가장 우선이었다.
홀로 5명의 남자를 구현해야 했다. 4분도 채 되지 않는 뮤직비디오 안에서 다섯 남자 모두가 각각 다른 사람이 연기한 것처럼 느껴져야 했다. 촬영 콘티가 이미 나와 있긴 했지만, 그 콘티 안엔 주연 배우의 구체적인 의상과 느낌이 정확히 구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촬영 스태프들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 저 초짜 배우가 촬영을 시작하자마자 갈피를 못 잡고 헤매면 촬영이 상당히 더뎌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답이 없다. 각 공간을 차지할 캐릭터의 느낌을 아는 것은 주연 배우가 유일했다. 그가 캐릭터를 못 잡는다면, 그 누구도 잡아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촬영 스태프들의 우려는 금세 사라졌다.
은율이 홀로 대기실에 들어가 문을 굳게 잠그고 한참 있다가 나올 때면, 저 안에 다른 사람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같은 얼굴을 가진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훅훅 바뀔 수 있는 걸까. 거기다 그의 달라진 모습은 세간에서도 한창 난리가 났던 모습인 만큼, 촬영 스태프들의 흥분만 더해 갔다.
달라진 은율이 말없이 제 연기를 해냈다. 눈빛만으로 가사를 읊고 행동만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렇게 은율은, 촬영장을 완벽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
은율이 들어간 대기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우가 종종걸음으로 태휘에게 뛰어갔다. 그는 촬영하는 공간이 잘 보이는 자리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태휘는 넋을 놓은 채 차츰 정리되어 가는 네 종류의 공간을 한눈에 담았다. 현우가 태휘의 옆에 있는 빈 의자에 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너도 대박 놀랐지? 그 인터넷에 난리 났던 이름 없는 배우며, 모델이며, 그거 다 은율이 형이었던 거잖아!”
“……어.”
태휘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엉성한 그의 대답에 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 뭔 반응이 이리 시큰둥해? 왜? 촬영 별로였어? 편집해 놓으면 진짜 끝내줄 것 같은데.”
현우 역시 태휘와 함께 촬영 콘티를 꼼꼼히 봐 둔 상태였다.
6인조 아이돌 그룹 BLESS 내에서도 유일한 동갑내기이자 절친인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현우는 유독 태휘의 일에 신경을 많이 써 주곤 했다. 지금처럼 태휘와 관련된 중요한 일에는 자신의 오프 시간까지 쪼개서 올 정도라, 두 사람이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금세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현우는 아직도 넋을 놓고 있는 태휘의 눈앞에서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 보였다. 촬영 때는 워낙 무섭게 집중하고 있으니 건들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야!”
“시끄러워.”
현우가 소리를 높이자, 태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타박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 좋은 분 섭외해 온 건 칭찬해 줄게. 수고했다.”
“얼씨구. 그게 칭찬하는 사람의 말투냐?”
일부러 이죽거려 봤지만 태휘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뮤직비디오는 걱정 없을 것 같네.”
“그치? 거 봐, 내가 뭐랬어.”
현우가 의기양양해 하다가 은근슬쩍 옆구리를 찔렀다.
“어때? 반할 뻔했지? 그치?”
그 말에 현우를 무표정하게 빤히 바라보고 있던 태휘가 그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악!”
“생각하는 꼬라지 봐라.”
“아, 왜!”
현우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연기 잘하고 비주얼 좋은 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더니 휴대폰을 꺼내 잠금 화면에 나타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드물게 눈가가 휘어지며 작게 미소 짓는다.
태휘는 곧바로 잠금 화면 속 상대에게 전화를 걸며 자리를 피했다.
“어, 서윤아. 지금 끝났는데 혹시…….”
분위기가 훅 달라진 것을 느끼며 현우가 진저리를 쳤다.
‘솔로 서러워서 살겠나.’
괜히 코가 시큰해졌다.
그런 현우의 눈에, 촬영장 건물 입구에 들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촬영 장비를 정리하던 스태프들이 그에게 일제히 시선을 모았다. 감독이 얼른 달려가 그에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시는 줄 몰랐네요.”
촬영장 안을 쓱 둘러보던 진환이 마주 웃어 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촬영은 다 끝난 겁니까?”
“예, 지금 막 끝났습니다. 어유, 은율 씨가 워낙 연기를 잘해서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요. 완성본은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감독이 연신 웃으며 말했다. 다른 촬영 스태프들은 감독의 모습에 혀를 찼지만, 그를 이해했다. 진환이 이번 뮤직비디오의 스폰서나 다름없었으니까.
잡았던 손을 놓으며 진환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율 씨는 어디 있습니까?”
“아, 지금 대기실에서 옷 갈아입고 있을 겁니다.”
감독이 대기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진환은 감독에게 한차례 웃어 준 후 긴 다리를 뻗어 대기실로 향했다. 굳이 감독이 알려 주지 않았더라도, 문을 지키듯 서 있는 니콜라이를 보고서 그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가 지키는 문 안에 은율이 있을 거라는 생각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진환이 가까이 다가가자, 니콜라이가 자세를 풀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율이, 안에 있죠?}
진환이 영어로 물었다. 니콜라이가 입을 달싹이려는 찰나, 굳게 잠겨 있던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반쯤 풀어헤친 흰 셔츠가 눈에 훅 들어왔다. 진환이 은율과 눈을 맞추며 깜짝 놀랐다.
“율아, 너…!”
은율이 돌연 진환의 손목을 붙잡고 대기실 안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진환의 몸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고 철컥,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이가 작게 미소 지으며 다시 보초 서듯 자세를 잡았다.
대기실 안에 끌려 들어간 진환이 당황한 얼굴로 은율을 훑었다. 청바지에 흰색 와이셔츠 차림이었는데, 촬영 때의 화장은 다 지워 낸 것인지 원래의 뽀얀 얼굴에 약간의 홍조만 띠고 있었다.
단추를 3개쯤 풀어헤친 앞섶을 저도 모르게 노려보고 있는데, 은율이 갑자기 덥석 안아 왔다. 진환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서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주었다.
“촬영 잘했어?”
아이 달래듯 속삭여 주니, 은율이 진환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너무 늦게 왔지. 미안해. 더 일찍 와서 네가 연기하는 거 봤어야 했는데.”
은율은 그저 말없이 진환을 끌어안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진환은 오늘따라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왜 말 한마디 없을까. 촬영하면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진환이 은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율아, 왜 그래? 힘들어서 그래? 아니면 형한테 삐졌나?”
은율이 이번엔 고개를 붕붕 내젓는다. 그러면서도 입은 꾹 다문 채다.
걱정되어 은율의 양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레 떼어 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팔에 힘을 주더니, 이내 떨어진다. 진환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은율의 푹 숙인 얼굴을 보려고 애썼다.
“걱정되게 왜 그래. 형 좀 봐 봐.”
그제야 은율이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던 진환이 잠시 놀라다가, 사르르 웃었다.
“그렇게 좋았어?”
붉게 상기된 얼굴엔 벅참으로 인한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입가는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진환도 마주 웃어 버렸다.
지금 은율의 머릿속에는 오늘 했던 촬영만이 가득해 보였다.
“형, 저…… 아…….”
은율이 뭐라 말하려다 입을 오물거리며 자꾸만 눈을 굴렸다. 진환이 그의 말을 가만히 기다려 주자, 한층 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막……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 같고……. 뭔가…… 음…….”
횡설수설하는 게 귀여워 진환이 은율의 머리를 연신 쓸어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미끄러뜨려 볼에 가져다 대자, 애교를 부리듯 제 따뜻한 볼을 비벼 댔다. 딴에는 시원한 그 손이 기분 좋아서 그랬을 터이지만, 덕분에 진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버렸다.
진환이 은율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율아, 키스해도 돼?”
은율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까지 잠가 뒀으면서 저도 모르게 주변을 휘휘 살폈다. 그러더니 빠르게 진환의 입술에 촉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나중에 집에 가서 해 드릴게요.”
수줍게 웃는 모습에 진환이 그를 덥석 껴안았다.
“아, 문 열고 나가면 집이었으면 좋겠다.”
은율이 그의 품에서 작게 웃었다. 진환이 은율의 머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다, 문득 메이크업 테이블 구석에 자리한 뭔가를 발견했다.
“점심은?”
시간상 저녁을 먹어야 할 타이밍이지만, 진환은 점심 식사 여부를 물었다. 은율이 그에게 안긴 채로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은율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진환이 엄한 표정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깔끔한 상태의 도시락과 음료수 병을 보니, 연기에 집중한다고 배도 채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기를 제대로 하려면 몸부터 신경 써야지. 최소한 끼니는 거르면 안 돼. 이건 배우로서의 기본이야.”
은율이 당황한 얼굴로 진환의 얼굴과 도시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그러니까.”
은율의 말을 끊으며 진환이 씩 웃었다.
“점심 못 먹은 만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가 은율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 마르면 안 돼. 살 좀 찌워야지 안 되겠어.”
은율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배시시 웃었다.
“찌워서 뭐 하려고 그러세요?”
진환이 그의 따끈한 이마에 제 서늘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우리 율이 잡아먹게.”
진환이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뮤직비디오 촬영 이후 은율은 오로지 졸업 논문과 국제 자격증 공부에만 매진했다. 물론 진환이 돌아오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덮었지만, 반대로 진환이 없으면 책상에 붙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사이 진환은 일이 많아져, 새벽녘에 들어오거나 아예 외박을 하고 오는 경우도 더러 생겼다. 진환은 집에 혼자 있을 은율을 걱정해, 자신이 집에 없을 때는 칼의 곁에 있도록 신신당부했다.
은율이 대학에 나가거나 칼의 집으로 갈 때면 진환은 꼭 제 차로 태워다 주었고, 일이 끝나면 칼이 머무는 스위트룸에 들러 그를 픽업해 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은율은 스스로 움직이겠다고 했으나, 진환이 미안한 낯으로 부탁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은율은 오늘도 칼의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스위트룸 앞에 서니 낯익은 외국인 2명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 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니콜라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예. 안에 계시죠?}
니콜라이가 웃는 낯으로 은율을 안내했다.
이 스위트룸은 칼이 아예 업무용이자 임시 자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그의 집이 버젓이 있다고는 하나, 한국에서 잠깐 머물다 갈 것도 아닌지라 괜찮은 집을 따로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은율이 니콜라이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자, 무테안경을 낀 채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칼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안경을 벗어서는 서류와 함께 원목 데스크 위에 올려두고 한달음에 다가와 은율을 품에 안았다.
“어서 와, 아들.”
언제나 얼굴만 비쳐도 행복한 낯으로 끌어안아 주니 괜히 가슴이 간지러웠다. 은율이 그의 등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이 시간까지 일하십니까?”
진환이 밤 촬영 스케줄이었던 터라 함께 저녁을 먹고 이동한 참이었다. 시간이 9시가 넘었는데도 칼이 서류와 한창 씨름 중이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칼이 은율의 볼에 제 볼을 비벼 댔다.
“이제 우리 아들 왔으니까 접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은율의 뒤에 서 있는 니콜라이를 바라보자,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데스크로 걸어갔다. 그가 조금 전까지 난잡하게 늘어져 있던 서류를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칼이 품에서 은율을 조심스레 떼어 내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칼은 은율을 만날 때면 지금처럼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것은 이내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제 아들이 정말 눈앞에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행복해하는 그 얼굴은, 은율로선 다소 민망하긴 했지만 수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칼이 어떻게 살아왔고, 얼마나 자신을 찾기 위해 힘든 세월을 보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걸 떠올리면 지금 칼이 하는 행동에 가슴이 뭉클해질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느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통 이야기하는 건 거의 은율이었고, 칼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은율은 칼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해 주었다. 칼은 그런 은율을 보며 행복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비록 충분히 장성한 아들이었지만, 제 아이가 눈앞에서 조잘대고 있으니 여간 사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가만히 말을 잇던 은율이 돌연 어두운 낯을 했다. 칼이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낯을 하며 은율의 한 손을 그러쥐었다.
“왜 그래? 걱정거리라도 있니?”
칼의 목소리를 들은 은율이 그제야 퍼뜩 얼굴을 풀었다. 저도 모르게 또 우울한 생각이 들었나 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해요.”
“말해 봐. 아빠 걱정되잖아.”
은율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붕붕 내저었지만, 칼의 예리한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은율이 눈을 굴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불안합니다.”
은율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막연히 다 불안해요. 지금처럼 사랑받으며 살아도 되는 걸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을 해도 되는 걸까…….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이전에 찍은 뮤직비디오 공개 일자가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도 많은 사람을 만났다.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가 가장 많이 변해 버려서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또한 그 기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잃었던 친아버지까지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았다.
“환이 형을 만난 거라든지 아빠를 만난 것 모두……, 사실은 그저 꿈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칼이 미간을 모으며 은율의 손을 더 꽉 그러쥐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칼이 잡고 있던 은율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넌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하고 싶은 모든 걸 누려도 돼. 그런 생각 하지 마.”
은율이 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칼의 진회색 눈동자가 한없이 깊게 느껴졌다.
“네가 이루고 싶었던 것, 네가 하고 싶은 모든 일……, 아빠가 다 도와줄게. 뭐든 할 수 있게 해 줄게.”
칼의 다른 손이 은율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따스한 손길을 느끼고 있으니,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지금도 꿈같아? 아빠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은율이 볼을 쓰다듬는 칼의 손등에 제 손을 얹으며 웃었다.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나 봅니다.”
“그러게. 그럼 아빠가 우리 아들 외로움 타지 않게 꼭 안고 자 줄게.”
은율이 작게 웃었다. 이렇게 칼이 어린아이 다루듯 대해 줄 때면 더 응석을 부리고 싶어졌다.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다.
* * *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은율은 칼의 침실에 있는 옷장에서 헐렁한 라운드 셔츠와 추리닝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이젠 칼의 침실 옷장의 절반가량이 제 옷으로 들어차 있는 것을 보며, 근래 이곳에서 잠을 청한 횟수가 상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또 불안함이 몰려들었다.
은율은 휴대폰을 든 채 널따란 침대에 올랐다. 휴대폰 액정에 불을 켜니, 깨끗한 잠금화면만 눈에 들어왔다. 진환에게 연락이 없는 것에 아쉬워하며 휴대폰의 불을 끄고는 베개 옆에 두었다.
그사이 다른 방에서 샤워를 마치고 들어선 칼이 은율의 곁으로 다가와 옆에 걸터앉았다.
“기분은 좀 어때?”
칼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은율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괜찮습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야. 더 걱정 끼쳐도 되니까 뭔가 힘들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아빠한테 다 말해 줘.”
은율이 작게 웃었다.
칼은 은율의 옆자리에 누워 그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칼의 팔에 머리를 누인 은율이 눈을 떠 칼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칼이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아빠.”
이젠 입에 붙어 버린 그 호칭을 곱씹듯 읊었다. 칼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계속 곁에…… 계실 거죠?”
칼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떨리는 물음에 칼이 입술을 꾹 다물더니,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은율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래. 이제 다시는 우리 아들 두고 멀리 안 가.”
은율이 작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진환의 품만큼이나 따뜻한 온기가 은율을 감쌌다. 칼의 심장박동이 자장가처럼 들려와, 그는 금세 잠에 빠졌다.
칼은 잠든 은율의 등을 쓸어 주며 그의 머리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아들의 체온과 향기가 느껴졌다.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은율이 지금처럼 응석을 부리고 제 온기를 찾을 때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칼은 은율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를 꼼꼼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엄마인 예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옆으로 쏟아진 은율의 앞머리를 세심한 손으로 정리해 주었다. 잠을 청한 이상 어차피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저 제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만지고 쓸어 주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누군가 이대로 아들의 얼굴만 보고 평생을 지내라 한다면 충분히 그러겠다고 답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칼의 눈빛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그는 은율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쳐 들어서 팔베개를 했던 제 팔 대신 폭신한 베개를 끼워 넣어 주었다.
은율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칭얼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이 같아, 칼은 저도 모르게 사르르 웃어 버렸다.
침대에서 내려선 건 은율의 등을 쓸어 주고 그의 목까지 이불을 꼭 덮어 준 후였다.
기척을 죽인 걸음으로 전등을 끈 후 방 밖으로 나왔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문을 닫은 칼이 밖에 대기하고 있던 니콜라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니콜라이가 손 위에 그의 휴대폰을 올려 주었다.
칼이 휴대폰을 든 채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조작하며 니콜라이에게 손을 들어 보이려 했다. 그러다 아차 하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담배를 핀다면 한 침대에서 제 아들을 끌어안아 주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칼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상대가 곧 전화를 받았다.
“많이 바쁩니까?”
인사도 없이 물었다.
-잠깐이라면 괜찮습니다. 율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진환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칼은 소파에 몸을 깊이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은율이에게 그 얘기 안 했죠?”
-……예, 아직입니다.
그럼 그렇지.
칼은 은율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좀 더 정확히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일이 잘 풀리고 원하던 일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들뜬 반면, 겁도 날 것이다. 그런 상황에 진환의 일이 바빠져 은율과 함께 있는 시간이 예전보다 대폭 줄어 버렸다. 이젠 진환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칼의 스위트룸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을 정도다.
이렇게 은율이 겁낼 때야말로 연인인 진환이 다독이며 안심시켜 줘야 하는데.
“언제쯤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 달 말까지 끝내겠습니다.
다음 달 말이면 곧 12월이다. 날짜를 가늠해 보던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12월에는 얘기했던 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율이에겐 아직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의 말에는 일부 동감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전화를 끊은 칼이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애가 모를 수 있다면…… 말이지.”
* * *
“오빠, 오빠! 저기! 저거 타자!”
신이 난 외침에, 은율은 손이 붙잡힌 채 그대로 끌려갔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연신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다.
“야, 서지희! 너 자꾸 멋대로 할 거야?!”
“아, 뭐어-! 오늘은 내 맘대로 하라며!”
지희가 옆에 따라붙은 하진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진도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지희에게 지지 않고 눈을 치떴다.
“그래도 그렇지, 형 피곤하게…!”
“하진아, 괜찮아. 오늘은 지희 하자는 대로 하자.”
은율이 웃는 낯으로 말하니 하진도 뭐라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희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얄밉기만 했다.
올해 하반기에 열린 국제 학생 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한 지희는 곧바로 은율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제 일이 바빴던 탓도 있지만, 지희가 일부러 콩쿠르에 대해 숨기고 있었던지라 소식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콩쿠르에 나가 본선에 오른 것만 해도 대단한데 2등이라니.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박을 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숨겼느냐고.
지희는 괜히 기대하게 했다가 콩쿠르에서 떨어지면 쪽팔려서 그랬다고 답했다. 열심히 지원해 줬는데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면 미안해서 어떻게 하냐고도 했다.
하지만 그 진짜 속내 정도는 은율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갖은 일을 겪은 은율에게 괜히 자기 이야기로 부담감을 주기 싫었던 거다. 신경 써야 할 일이 태산일 텐데 콩쿠르네 뭐네 해서 신경을 분산시키고 싶진 않았다.
지희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도 고마웠다. 그래서 그저 다음엔 이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꼭 알려 달라고 타이르고서 말을 끊었다.
대신 지희의 콩쿠르 관련해서 이미 알고 있던 하진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 핀잔을 주었다. 마지막엔 자신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괜히 울적해져서 시무룩해 했더니, 그날 저녁에 지희까지 데리고서 칼과 은율이 있는 호텔에 찾아왔다.
당황해하던 은율과 달리, 칼은 천연덕스럽게 그들을 데리고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지희는 일이 종결된 후에 칼을 한 번 만났던 적도 있었고 하진은 그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눴음에도 둘 다 상당히 어려워했다.
다행히 칼은 그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던지,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호화로운 만찬을 대접하며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나 지희는 워낙 쾌활한 성격이라, 이젠 칼을 아무렇지도 않게 ‘삼촌’이라고 부르며 농담까지 건넬 정도가 되었다. 칼도 그런 지희가 마음에 들었는지 잘 웃어 주고 부드럽게 말도 섞어 주었다.
그날 저녁, 칼은 셋이서 오붓하게 쉬라는 의미로 호텔의 스위트룸 하나를 제공했다. 하진과 지희는 처음 보는 스위트룸의 으리으리한 내부에 금세 넋을 놓았고, 은율은 부담스러운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생들과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잘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칼은 하진과 지희를 보며 유건을 추억했다. 친형제처럼 제겐 둘도 없는 형이었고, 사랑하는 아들을 맡길 수 있었던 유일한 벗이었다. 그런 유건의 아이들이라 생각하니 남 같지가 않았다.
세르게이와 가영이 잡혀 들어간 후부터는 직접 나서서 그들에게 갖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진에겐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뿐 아니라, 그의 카메라 장비 역시 최고급으로 바꿔 주었다. 지희에겐 빈에서부터 초청한 실력 좋은 레슨 선생이 붙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해외 유학을 보낼 준비까지 마쳐 두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달라며 직접 그들의 휴대폰에 제 번호를 저장해 주기까지 했다.
은율은 동생들까지 살뜰히 챙겨 주는 칼의 모습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자신이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대신 척척 이뤄 주고 힘을 실어 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이젠 다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삶의 가장 큰 목표가 사라져 버려서 속이 뻥 뚫린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지희가 팔에 달라붙으며 애교 섞인 얼굴을 했다. 오빠들과 유원지에 놀러 가 보고 싶었다며, 함께 가자고 성화였다.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었던 터라, 은율도 하진도 흔쾌히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오늘, 세 사람은 복작거리는 인파로 가득한 유원지에 발을 들였다.
사실 은율과 하진은 유원지에 오는 게 처음이었다. 지희는 학교 동아리를 통해 한 번 와 본 적이 있다며, 두 사람을 잘도 끌고 다녔다.
오늘의 주인공은 지희이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지만, 문제는 끌고 다녀도 너무 끌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놀이기구 하나를 타고 나면 다음 놀이기구로 곧바로 달려갔고, 그걸 타고 나면 그다음 놀이기구로 두 사람을 끌고 갔다. 나름 체력이 좋은 은율과 하진도 이쯤 되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하진은 척 보기에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 롤러코스터 앞에서 지희를 막아섰다.
“저건 너 혼자 타고 와.”
“왜애! 같이 타자! 나 이거 꼭 타 보고 싶었단 말이야!”
지희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볼멘소리를 하자, 그녀의 귀에 하진이 속삭였다.
“형 얼굴 보고도 그 말이 나오냐?”
그제야 지희가 제게 붙잡혀 끌려오던 은율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있지만, 낯빛이 파리한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하긴, 연달아 격렬한 것만 타긴 했지.
이젠 은율이 그동안 스턴트맨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스턴트 액션과 격렬한 놀이기구는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그나마 하진은 중간에 몇 번 빠져나가기라도 했지, 은율은 그저 지희가 타자는 대로 곧이곧대로 탔다가 한층 낯빛이 안 좋아지곤 했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바보같이.’
하진이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은율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형이랑 잠깐 쉬고 있을 테니까 기다렸다가 타고 나서 전화해.”
“으음, 알았어.”
결국, 지희가 은율의 손을 놓았다. 지희는 은율에게 혼자 타고 오겠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은율은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혼자 보냈고, 하진은 그런 그를 데리고 쉴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쉴 만한 벤치에는 죄다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하진의 눈에 띈 것은 줄이 거의 없는 관람차였다. 어차피 지희가 선 줄의 길이가 상당했으니 관람차가 한 바퀴 돌 정도의 시간은 있겠거니 싶었다.
“형, 저거 타자.”
하진이 가리킨 관람차를 보며 은율이 머뭇거렸다.
“남자끼리 타도 되나?”
TV에서 관람차는 연인들의 필수 코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놀이기구를 남자 둘이서 타도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에 반해 하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뭐 어때, 형제끼린데.”
그에게 끌려 막상 관람차 가까이로 가니, 남학생들 넷이 타서는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막상 자유 이용 패스권을 검사하는 직원도 그저 영업용 미소만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관람차에 올라탔다. 약간 흔들리는 것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진 않아서 금세 적응했다.
관람차에 탄 은율은 점차 높아져 가는 시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이고 곳곳에선 놀이기구의 화려한 움직임이 눈을 어지럽혔다.
신기한 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은율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앉아 작게 웃는 낯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진이 보였다.
“구경 안 해?”
“하고 있잖아. 형 구경.”
은율이 밖을 바라보던 몸을 바로 하며 하진과 시선을 맞췄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웃는 거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너무 좋다.”
은율은 그제야 자신이 미소를 걸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진이 손을 뻗어 은율의 한 손을 잡았다.
손가락도 길고 살집도 별로 없는 손을 가만히 어루만지니, 곳곳에 작은 굳은살이 느껴졌다.
몇 년 전엔 한동안 더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자꾸만 물집이 생기고 몸에 상처가 생기느냐고, 다른 일을 알아보라며 반쯤 화를 내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은율은 그저 웃어 보이며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했었다.
무작정 그런 일은 그만두라고 말했다. 차라리 자신이 일을 하겠다 했더니, 은율이 정색하며 하진을 말렸었다.
그 후로는 은율이 다치는 일도 거의 없어졌기에 좀 더 나은 일을 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 다치더라도 동생들이 일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숨기고 다녔던 거지만.
그런 은율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진은 애써 눈을 깜빡여 물기를 삼키고는 시선을 내려 물었다.
“그 여자는……, 이모는 만나 봤어?”
막상 묻기는 했지만, 괜한 말을 꺼냈나 싶었다.
가영은 그간 세르게이에게 이용당해 온 것도,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 숨기는 것 없이 모두 자백했다. 그 후 구치소에 수감된 채 얌전히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율이 쓴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만나 주질 않으셔.”
가영은 제 변호사 외에는 누구와도 만남을 갖지 않았다. 은율이 몇 번이고 찾아갔지만, 언제나 헛걸음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가영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해 주고 싶은 이야기도 너무나 많은데.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이대로 가영은 그 누구도 만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하진이 은율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은율이 언제까지고 저를 만나 주지 않는 가영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잊어, 형. 이모도, 세르게이라는 그 남자도, 전부 잊어.”
은율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진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였다.
“형이 이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았으면 해. 매일 밝게 웃었으면 좋겠고, 매일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진이 은율의 손을 어루만지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형은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이제껏 자기 일보다 동생들의 일이 우선이었던 은율이다. 이젠 사랑하는 그가 진정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다른 무엇보다 본인을 우선시했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은율은 그런 하진을 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친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왜인지 과거에 하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엔 그저 이모의 반협박식의 양자 권유에 화도 나고 마음도 약해져서 뭐라도 붙잡고 싶었던 게 아닐까 했다. 어딘가 아픈 것 같은 얼굴로 사랑한다고 절절하게 고백하던 말은, 그저 마음 여린 동생이 부모님 대신 제게 매달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희가 내 동생으로 있어 줬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어.’
다독이며 했던 그 말이 오히려 하진을 더 울게 만들었다. 말없이 저를 붙들고 오열하던 그의 등을 쓸어 주며 한참을 곤란해했었다.
친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은율과 친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던 하진, 그가 그날 제게 했던 고백은 과연 ‘동생’으로서 했던 말인 걸까.
은율은 눈을 내리깐 채 제 손을 붙든 하진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하진아, 혹시 그때 했던 말……!”
뭔가를 묻고자 하는 은율을, 하진이 몸을 일으켜 끌어안았다.
“내가 형 동생이라는 게 너무 다행이야. 평생…… 내 형으로 있어 줘.”
하진의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런 하진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래.”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은율은 약간 촉촉해진 눈을 감으며 하진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 * *
가을의 끄트머리에 성큼 다가온 겨울 때문인지 11월 초임에도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은율은 며칠간의 지방 로케이션 촬영을 끝내고 올라오는 진환을 위해 뭐라도 준비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촬영은 진환이 열연 중인 드라마의 종방 촬영이었다. 그쪽에서 종방 파티를 작게나마 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따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선물을 주자니 워낙 고가품으로 몸을 두른 진환인지라, 차라리 정성 어린 먹거리가 어떨까 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차마 제 손으로 괴생물체를 만들어 먹일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케이크라도 하나 사 오자 마음먹었다.
단것을 못 먹는 탓에 케이크와는 인연이 없었던 은율은 기언과 강희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취업 준비 때문에 워낙 바빴기에 차마 말도 꺼낼 수가 없었고, 결국 은율은 케이크 전문점에 홀로 들어서게 되었다.
평일 한낮이라서 그런지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안에는 은은한 음악 대신 한가로운 TV 소리만 들리고 있었고, 그것에 심취해 있던 젊은 여자 점원이 깜짝 놀란 채 엉성하게 “어서 오세요.”라고 말했다. 은율은 점원에게 고개를 까딱해 마주 인사해 주고는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케이크부터 크고 화려한 케이크까지 종류가 다양한 진열장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달달해지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가게 안에 꽉 찬 달달한 향이 벌써부터 목을 메이게 했다.
빨리 골라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은율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은율이 들어온 순간부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점원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가장 크고 화려한 거로 하나 포장해 주세요.”
“앗, 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약간 하이 톤으로 대답한 점원이 후다닥 움직여 진열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은율은 그녀가 진열장에서 꺼내는 큼직한 케이크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다음은 한류스타 이진환 씨의 소식입니다.’
점원이 켜 둔 TV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카운터에 가까이 다가서 있었던 덕에 안쪽에 있는 TV 화면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TV 화면에 들어찬 진환의 멋들어진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진환 씨가 할리우드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요. 결국, 그 러브콜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12월 말부터 크랭크인 하는 레이먼드 윌슨 감독의 SF 블록버스터에 주연으로 참여하게 된 이진환 씨는 근 반년간 한국을 떠나 해외 촬영에 전념하기로…!’
은율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느새 케이크를 예쁘장한 케이스에 담아 가져온 점원이 웃는 낯으로 그것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초는 몇 개 준비해 드릴까요?”
질문했으나 답은 들리지 않았다. 점원이 의아한 눈으로 은율을 재차 불렀다.
“손님?”
은율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TV 화면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화면에는 최근 모든 촬영을 마쳤던 또 다른 영화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진환의 촬영 종료 소감 인터뷰 장면이.
* * *
자택에 돌아온 진환은 가장 먼저 은율부터 찾았다. 집에 미리 들어와 있다는 연락을 받았던 터라 애꿎은 연우를 타박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렇게 현관문을 열자마자 진환은 다급하게 구두를 벗어 던지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주방에 있던 은율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다 진환에게 허리를 붙잡혀 들어 올려졌다.
“율아, 보고 싶었어.”
그 어떤 초콜릿보다도 달달한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며 그대로 키스했다. 은율은 당황한 것도 잠시, 곧바로 입 안을 탐닉하는 진환의 혀에 제 혀를 섞어 빨아들였다.
농도 짙은 키스가 잠시 이어지고, 이내 은율이 먼저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 거리를 벌렸다.
“오자마자 격렬하시네요.”
“당연한 거 아냐? 못 본 지 이틀하고도 6시간이야.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진환이 능글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은율의 볼에 키스를 남발했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그의 손에 제 손을 깍지 껴 끌었다.
“잠깐 이쪽 좀 와 보세요.”
약간 들뜬 목소리의 은율이 그를 데리고 주방 쪽으로 향했다.
주방 옆 테이블에는 겉보기에도 화려하고 달달한 생크림 케이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은율은 진환의 겉옷을 벗기고서 그를 의자에 앉혔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얼른 방에 들어가 그의 겉옷을 걸어 두고 다시 얼른 뛰어나와 주방에서 접시와 포크를 2개씩 준비했다.
은율이 연신 웃는 낯으로 그와 자신의 자리에 각각 그것들을 내려놓자, 진환이 마주 웃어 주었다.
“형 종방 촬영했다고 기념 케이크 사 온 거야?”
은율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 자꾸만 미소가 걸렸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으며 케이크용 초를 꺼냈다. 은율은 각각 색깔이 다른 4개의 초를 보기 좋게 꽂았다.
“다른 기념입니다.”
이번엔 성냥을 꺼내 들어 불을 붙였다.
“형의 네 번째 할리우드 영화 촬영 기념.”
진환의 미소가 단번에 사라졌다.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 은율을 바라보았다. 은율은 성냥으로 초에 불을 붙이느라 시선을 내리고 있는 상태였다.
“율아…….”
“왜 말 안 했습니까? 축하할 일이잖아요.”
은율이 태연하게 웃으며 가볍게 타박했다. 4개의 초에 모두 불을 붙인 은율이 성냥의 불을 끄고 그것을 내려놓았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레이먼드 윌슨이면 엄청 유명한 감독님이시잖습니까. 거기다 SF 영화 주연이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율아, 잠깐만…….”
“비록 반년 동안 거의 만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율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환이 제 시선을 피한 채 말하던 은율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형 말 좀 들어 봐. 그건…….”
은율이 그제야 진환의 눈을 보고 싱긋 웃어 보였다.
“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얌전히 잘 지내고 있겠습니다.”
은율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연기 공부했던 게 조금쯤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가끔 뵈러 가고 싶은데, 역시 민폐겠죠? 촬영 바쁘실 텐데…….”
목소리, 떨리진 않았겠지?
형이 알아채면 안 되는데.
“아, 혹시 요즘 바쁘신 이유가, 해외 나가기 전에 국내 일을 모두 마무리하려고 그러셨던 겁니까?”
한창 바빴던 게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이유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던 진환이 야속했다. 진환은 자신에 대해 뭐든 알고 있으면서, 그는 세세한 내막에 대해선 도통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진환에게 자신이 이리도 못 미더운 존재였나 싶어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은율은 진환이 신경 쓸까 봐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환이 은율의 눈을 마주 보며 미간을 모았다.
“율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형 그거 안 할 거야.”
가만히 깜빡이고 있던 은율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환이 은율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주연 자리, 내놨어.”
“잠깐만요. 그 영화를…… 포기하시겠다고요? 이미 여러 매체에서 형이 레이먼드 윌슨 감독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인제 와서 포기라니…….”
진환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렇게 숨겨 왔는데 은율이 어떻게 알게 되었나 했더니만 저도 모르는 사이 보도가 나간 모양이었다.
소속사 사장에게 그렇게나 철저히 숨기라고 말했거늘. 이젠 굳이 숨겨 줄 의리도 없다, 이거지.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할 때 길길이 날뛰더니만 기어이 일을 냈군.
은율이 진환을 떼어 내고서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입니까? 정말 안 하실 거예요?”
“그래. 이미 거절한다고 연락도 넣어 놨어. 너 두고는 못 가.”
그렇다고 은율을 데리고 가자니, 반년 간 해외에 그를 하릴없이 묶어 두는 꼴이었다. 그의 삶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얼마 후 세상에 공개될 그를 혼자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칼이 붙어 있다고는 하나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진환은 하루라도 은율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은율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진환을 밀어냈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진환을 쏘아보았다.
“저 때문인 거네요?”
은율의 목소리가 결국 억누르고 있던 떨림을 그대로 담아냈다.
“제가 형에게 방해가 되고 있는 거예요.”
“아냐, 율아. 그런 뜻이 아니라…….”
진환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은율은 그 손을 쳐 내 버렸다. 진환이 당황한 얼굴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과거, 진환이 그에게 연기자의 길을 처음 권했을 때 보여 주었던 싸늘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형이 그랬죠. 형의 집착이 제 꿈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스스로 곁을 떠나겠다고…….”
불길함에 진환의 등이 서늘해졌다.
더 말할 수 없도록 막아야 하는데, 몸이 뭔가에 묶인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은율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형의 꿈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진환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가 가는 길에 자신이 걸림돌에 지나지 않는다면…… 물러나야 했다.
“제가 떠나겠습니다.”
그 말은 진환을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은율은 멍하니 서 있는 진환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방에 들어가 자신의 백팩을 메고 나왔다. 당장이라도 짐을 정리할까 했지만 조금 더 있다가는 도저히 이 집에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도 발이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그래, 이게 맞는 거야.’
애써 속을 다스리며 냉정해지려 했다.
자신이 그를 따라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진환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제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고 서은율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후, 그가 돌연 반년 이상 해외에 나가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자신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지고 말 거다. 진환은 크게 화제가 될 자신이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안정적인 데뷔를 하길 원하고 있었다.
진환은 이미 그 기회에서 시작될 시나리오를 세세히 짜 둔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그가 ‘배우 서은율’의 반년을 버려야 할 촬영길에 함께 데려가 줄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의 최우선에 자신을 두었기에, 진환이 그의 길 하나를 포기한 것이다.
그 사실이 은율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헤어진다거나 하는 거창한 걸 생각한 게 아니었다. 그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자신이 곁에 있음으로써 일에 지장이 가고 그의 커리어에 해악을 끼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헤어진다는 생각 따위, 절대 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가방을 메고 나와서 아직도 가만히 서 있는 진환의 옆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려 했다. 진환이 그런 은율의 팔을 붙잡아 돌렸다.
“이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거 놓으라고 말하려던 은율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 때문도 아니었고, 그 손이 차갑게 식어 떨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황망한 얼굴을 한 채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진환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율아…….”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은율을 부른 진환이 몸을 휘청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 은율의 손을 붙잡았다.
진환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처럼 변해 버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남은 것은 은율의 떠나겠다는 말뿐이었다. 그의 말이 머릿속을 아프게 울려 댔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다리가 풀렸다. 자꾸만 눈앞이 어지럽고, 시야에 들어오는 건 은율의 놀란 얼굴뿐이었다.
진환이 은율의 손을 붙잡아 제 볼에 가져갔다. 그새 차가워진 피부의 감촉에 은율이 움찔했다. 그의 손을 타고 진환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너 없으면 안 돼…….”
그 말이 은율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망설여졌다. 지금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버리면 이후에도 자신 때문에 그가 곤란해질 일이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저 때문에 형이 뭔가를 포기하고 사람들에게 질타받는 게 싫습니다. 사람들이 형에게 건 기대가 저라는 사람 하나 때문에 무너지는 게 싫어요.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제가 떠나는 게 맞아요.”
그 말을 내뱉는 은율의 가슴도 진환만큼이나 아프게 아렸다.
진환의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달싹이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형이……, 형이 다 잘못했어.”
고된 일로 힘이 빠진 사람처럼 생기 없이 말해 왔다. 고작 몇 분 사이의 일이었음에도 온몸의 기가 다 빠져 버린 듯한 모습이다. 처음 보는 진환의 모습에 은율이 적잖이 당황했다.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니까…….”
진환의 얼굴이 애처롭게 변해 갔다.
“떠나겠다는 말만은 하지 마…….”
은율의 가슴이 아프게 찌릿했다. 거칠게 제 사랑을 속삭이던 때와는 달리,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한 애달픈 목소리였다.
진환이 흐릿한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다, 그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마음이 약해진 은율이 이내 가만히 끌려가 바닥에 함께 주저앉았다.
진환은 그런 은율을 마치 부서질까,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은율의 몸을 품은 그의 팔이 잘게 떨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끌어안긴 은율의 얼굴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자신만 보는 사람을.
은율이 한숨을 내쉬며 이내 진환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럼 정말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시는 겁니다?”
진환이 은율을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거절한 거…… 철회 가능하면 다시 한다고 하세요.”
진환이 머뭇거렸지만, 결국 끄덕거렸다. 은율은 아이처럼 변한 진환의 머리를 그가 제게 했듯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반년이면 어떻고 1년이면 어때요?”
은율이 애써 웃었다.
“형이 못 오면 제가 가면 되죠.”
은율이 품에서 진환을 떼어 내고는 멍하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제 손으로 닦아 주었다.
“민폐라고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생긋 웃어 보이니, 그제야 진환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진환이 두 손으로 은율의 볼을 붙잡고 그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 * *
진환과의 섹스는 언제나 격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였다.
“흐응…….”
은율은 식탁 끝에 엉덩이를 댄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손으로 식탁을 붙잡아 몸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진환이 은율의 두 허벅지를 붙잡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앞뒤로 움직이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하…… 으으…… 혀엉…….”
은율이 달뜬 눈을 내리깔아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진환을 바라보았다. 은율만큼이나 열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무어라고 이리도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지.
은율은 앞섶을 풀어 헤친 와이셔츠 한 장만 걸친 차림으로 숨을 헐떡거렸다. 은율의 것을 소중하게 입에 머금고 있던 진환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팽팽하게 발기한 은율의 성기가 가볍게 튕기고,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집에 돌아왔던 차림 그대로 입고 있는 진환과 입고 있던 모든 옷이 벗겨져 와이셔츠 한 장 차림이 된 은율은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은율은 붉어진 얼굴로 식탁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지탱하고 있던 두 손도 떼려 하니, 몸이 휘청거렸다. 진환이 그런 은율을 붙들어 품에 안았다.
진환의 품에 기댄 채 숨을 고르던 은율의 눈에, 식탁에 방치된 케이크가 보였다. 나름 단내의 고역도 이겨 내며 겨우 사 온 케이크인데, 초의 불을 뒤늦게 끄는 바람에 군데군데 촛농이 묻어난 게 안타까웠다.
“아…… 케이크…….”
은율의 아쉬운 시선이 케이크에 닿아 있는 것을 알아챈 진환이 그의 귀에 소곤거렸다.
“먹어도 되지?”
은율이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이 한 팔로 은율을 안은 채, 다른 한 팔을 뻗어 손끝으로 케이크를 살짝 긁어냈다. 그의 손가락 끝마다 새하얀 생크림이 가득 묻어났다.
진환이 작게 웃는 낯으로 생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은율의 유두로 가져갔다. 차가운 감촉에 움찔한 은율이 잔뜩 당황했다.
“형, 잠깐. 뭐 하는 거예요? 읏-!”
양쪽 유두에 생크림을 묻힌 손가락이 그대로 은율의 명치와 배꼽, 단전으로 내려오더니 이내 은율의 잔뜩 부푼 성기를 그러쥐었다.
“핫-!”
은율이 크게 떨었다. 진환이 은율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어 깊게 키스하더니 그의 입술, 턱, 목선, 그리고 쇄골을 따라 점차 내려왔다. 그의 입술이 이내 생크림이 발린 유두에 다다랐다.
“잘 먹을게.”
진환의 입술이 단번에 은율의 작은 유두를 삼켜 버렸다. 은율의 목이 젖혀지고 그의 입에서 흥분 가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두에 묻은 생크림 덩이를 단번에 먹지 않고 혀로 살살 굴려 유륜에 묻혀 댔다. 그러면서도 작은 유두를 아프지 않게 잘근 씹어 대며 혀로 강하게 퉁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읏!”
강한 반응을 즐기며, 진환은 몇 번이고 은율의 유두와 유륜을 핥아 주었다. 이젠 그곳에 묻은 생크림이 모두 사라지자, 반대쪽 유두를 부드럽게 지분거려 주었다.
몸을 떨며 느끼는 은율이 넘어지지 않도록 한 팔로 그의 몸을 단단히 지탱하며, 생크림이 묻은 다른 손으론 그의 성기를 매만졌다.
차갑던 생크림이 성기의 열기에 녹아 이내 끈적거리면서도 부드럽게 변했다. 미끈거리는 성기를 만져 주며 유두를 잔뜩 괴롭혀 주니, 은율의 몸이 덜덜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으으……. 혀엉…… 힘……들어요……. 흣!”
은율이 물기 어린 눈을 하며 매달렸다. 진환이 그제야 그의 유두에서 입을 떼며 제 입에 옮겨 온 생크림을 섹시하게 핥아 냈다.
진환은 은율의 성기를 만지던 손을 마치 유혹하듯 쪽쪽 빨아 대고는 곧바로 은율을 번쩍 들어 올려 침실로 향했다. 은율은 그의 팔에 편하게 몸을 맡기면서도 묘한 느낌에 가만히 눈을 굴렸다.
은율을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은 진환은 곧바로 은율의 다리를 벌려 그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은율이 의아한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니, 진환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에 꼿꼿한 성기를 한가득 머금었다.
“하으으!”
은율의 눈이 커지고, 그가 두 손을 뻗어 진환의 머리를 살짝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진환은 멈추지 않고 은율의 것을 목구멍 깊이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정성 들여 혀를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깊고 부드러운 펠라에 은율의 눈이 크게 떠지고, 진환을 밀어내려 했던 두 손은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하윽! 흣! 형, 그만! 핫!”
은율의 몸이 가볍게 비틀리고 그의 허리가 들썩였다. 엉덩이와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은율이 진환의 머리를 자꾸만 밀어내려 애썼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던 쾌감이 점차 그 강세를 더해 가며 은율의 머릿속을 점령해 나갔다. 이대로는 사정하고 말 거다.
“혀엉, 아, 안 돼……. 나올…… 흐읏…….”
은율이 아랫입술을 물며 몸을 떨었다. 진환은 그의 손이 힘 하나 없이 제 머리를 밀어내려 함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은율의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팽팽해지고 그의 온몸에 열꽃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펠라의 속도를 더했다.
“하읏! 핫! 형! 그만-! 하아…!”
은율의 것이 당장이라도 토정할 것처럼 부풀었다. 진환은 숨을 멈춘 채 제 입 안을 가득 채운 그것을 단번에 목구멍 입구까지 밀어 넣었다.
“흐아아-!”
허리가 튕기고 다리가 굽어지더니 이내 몸이 격하게 경련했다. 구부린 다리 끝의 발이 꼿꼿하게 서서는 침대 시트를 꾹 눌렀다. 잔뜩 힘을 받은 근육이 움찔거리고, 그때마다 은율의 입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환의 머리를 밀어내던 은율의 손은 저도 모르는 사이 그의 머리를 애처롭게 붙잡고 있었다.
“하…… 으으…….”
진환의 목구멍 깊이 토정한 은율의 몸이 이내 힘없이 늘어졌다. 진환의 머리를 붙들고 있던 손이 침대 바닥에 떨어지자, 진환의 입이 느릿하게 은율의 것을 놓아주었다. 그의 입가에 정액인지 생크림인지 모를 말간 것이 묻어 있었다.
진환은 엄지로 제 입술에 묻은 말간 것을 닦아 내더니, 그것을 보란 듯이 혀로 핥아 먹었다. 은율의 멍한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담았다.
“잘 먹었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은율이 잘게 전율했다. 은율의 위에 올라탄 진환이 그의 얼굴 곳곳을 핥고 입을 맞췄다. 그 행위가 어찌나 부드럽고 다정한지, 괜스레 아랫도리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형은…… 안 벗어요……?”
은율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진환이 그의 목덜미를 탐스러운 과일을 핥듯 핥아 대며 대답했다.
“오늘은 형 안 해도 되니까 그냥 편안하게 느껴 주면 돼.”
진환의 정성 어린 애무에 다시금 아래에 열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형하고 같이…… 기분 좋아지고 싶은데…….”
자신만 일방적으로 받으니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게 다 자신이 떠나겠다고 말했던 것 때문인가 싶었다.
진환이 은율의 목에서 얼굴을 떼고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은율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진환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율아.”
진환의 목소리가 돌연 떨려 왔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 품에 은율을 담는다. 무겁지 않게 내리누르며 안는 진환의 온기를 느끼며, 은율이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형…… 떠나지 마…….”
진환이 구애하듯, 품에 안은 은율의 귀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은율은 그가 심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에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떠난다는 말의 힘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구나.
새삼 느꼈다.
만약 그가 자신을 떠나겠다고 말해 왔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진환이 얼마나 불안했을지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다.
은율이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형과 함께 있을 거예요.”
진환이 몸을 조금 일으켜 제 아래에 있는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맑고 진한 눈동자, 손으로 쓸어 보고 싶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 적당히 날카로운 예쁜 콧날, 틴트라도 바른 것 같은 붉은 입술, 잡티 없는 부드러운 피부.
처음 그에게 홀린 듯 입을 맞췄던 그 날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제 심장이 이리도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가 자신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봐 주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숨결 하나, 그의 말 하나에 자신의 심장박동마저 달라져 버리기 때문일까.
황홀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환의 얼굴을, 은율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안아 주세요.”
수줍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뱉었다.
진환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은율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했다. 조심스럽게 침투한 그의 혀가 은율의 것과 얽히고, 그것을 애원하듯 빨아들였다. 입천장을 훑어 주며 은율의 혀를 노크하듯 톡톡 쳐 대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휘감아 당겼다.
은율의 눈동자가 농염한 키스가 가져다준 쾌감에 젖어 몽롱해졌다. 그사이, 진환의 손이 은율의 아래로 향했다. 펠라로 인한 진환의 타액이 성기에서부터 회음부까지 이어져 있었다. 회음부를 쓸어 제 타액을 손가락에 묻힌 채 그것을 은율의 구멍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흐응!”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언제나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아래의 감각에, 은율은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혀는 진환의 것을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자꾸만 휘감아 댔다.
하나였던 손가락이 2개로 늘어나고, 아래에서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야하게 들려왔다. 진환의 손가락이 구멍 안쪽의 약간 부푼 감이 있는 부분을 눌러 댔다.
“흡! 흐읏!”
역시나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격하게 반응했다. 은율이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쥐며 뜨거운 혀를 뻗어 진환의 입 속을 탐했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입천장을 쓸고 고른 치열을 더듬으며 이내 혀를 얽었다.
“하아…… 율아…….”
진환의 눈동자 역시 열에 들떠 몽롱하게 변했다. 그가 은율의 느끼는 곳을 몇 번이고 눌러 주며 구멍을 넓혀 갔다. 은율이 헐떡이며 그때그때 느껴 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지 앞섶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진환은 한 손으로 은율의 구멍을 깊이 찔러 대며 다른 한 손으로는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앞섶을 열고 드로어즈를 내려 드러낸 그의 성기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은율의 구멍에서 진환의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감각에 짧게 몸서리친 은율이 곧 제 몸을 채울 진환의 것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진환은 은율의 안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침대 옆 협탁 서랍에 들어 있는 콘돔을 가져오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서려 했다.
그런 진환을 달뜬 목소리가 붙잡았다.
“형……. 넣어…… 줘요…….”
“잠깐만. 오늘은 콘돔을…….”
은율이 상체를 조금 일으켜 진환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열기 가득한 시선이 진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형이…… 안에 해 주는 거…… 좋아…….”
제 안을 차지한 그의 것이 사정할 때 느껴지는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부에 오롯이 퍼지는 그의 것을 느끼고 있노라면, 그 무엇보다 강한 충족감이 열띤 쾌감으로 다가왔다. 이 남자가 자신의 것이라는, 그런 쾌감이.
진환은 은율의 몽롱한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은율을 바로 눕히고 그의 두 다리를 세운 진환이 곧 제 것을 그의 구멍에 비벼 댔다.
“부드럽게 할게.”
“흐…… 아앗-!”
진환이 질척하게 풀린 구멍에 제 것의 귀두를 밀어 넣었다. 오늘따라 특히 뜨거운 것 같은 진환의 것이 은율의 안을 점차 가득 채워 나갔다.
“하윽…….”
진환은 뜨거운 안쪽에 제 것을 모두 넣고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배가 가득 찬 느낌에 숨을 고르던 은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율과 시선을 마주한 진환이 아래를 천천히 움직였다.
“흣…… 아앗…!”
움직이면서 내부의 전립선을 건드리니 은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소 격하게 쳐 대던 감각과 달리, 은근하게 퍼지는 쾌감이 전신의 힘을 빼앗아 갔다. 아래가 간질거리고 몸에는 기분 좋은 잔떨림이 가득했다.
느릿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진환에게 은율이 손을 뻗었다. 진환이 그 손을 붙잡아 주었다.
“으응…… 혀엉…….”
진환이 떨리는 은율의 손등에 키스해 주었다.
“그래, 율아. 형 여기 있어.”
은율의 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진환을 담았다.
“더 세게……. 더 깊이…….”
잔잔한 쾌감에 점령당한 머릿속은 자꾸만 진환을 원했다.
좀 더, 좀 더 당신을 나에게 줘.
“내가 형만 생각할 수 있도록…….”
진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담겼다. 그가 제 손에 붙잡힌 은율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네가 원한다면.”
그와 동시에 진환의 것이 은율의 안을 단번에 깊이 쳐올렸다.
“하악-!”
은율의 눈이 커지고, 진환에게 붙잡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환은 몸을 기울여 은율의 두 손에 제 손을 깍지 껴 내리눌렀다.
“하읏! 하아-! 앗, 흐앗-!”
눈앞이 번쩍거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진환의 얼굴뿐이었다. 은율의 손이 점점 굽어져서는 제 손을 단단히 속박한 진환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아래에서 퍽퍽 쳐 대는 추삽질에 전신이 격하게 움찔했다. 시야가 흔들리고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만 봐.”
흔들리던 시야가 어렵사리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독점력 강한 눈동자가 은율의 시선을 붙잡고 놓질 않았다.
“흣! 혀엉! 하아-! 아! 으으-!”
밀어닥치는 쾌감에 발작하듯 신음하면서도 진환의 말대로 그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그 눈동자에 오롯이 담았다.
“평생 네가 원하는 대로, 흣…… 해 줄 테니까…… 형 떠나지 마. 형은 너 없으면 못 살아, 율아.”
쾌감과는 또 다른 감각이 가슴을 울려 댔다. 아직도 그에겐 자신이 떠나겠다는 말이 큰 상처가 되어 자리하고 있었다.
“흐응! 떠나지…… 않을…! 하읏! 하아!”
질퍽한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은율의 것이 단단히 부풀어 올랐다. 언제 토정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으읏! 갈 것…… 흐앗! 갈 것 같아아……. 혀엉, 핫-!”
“가도 돼, 율아. 몇 번이든 가도 돼.”
은율의 두 손을 속박해 내리누른 채, 진환은 눈을 맹수처럼 번뜩였다. 은율이 느끼는 얼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있던 그가 욕망 어린 얼굴로 낮게 읊었다.
“사랑해.”
그 말을 듣자마자 은율의 것이 참지 못하고 진한 우윳빛 정액을 토해 냈다.
“흣…… 하아앗-!”
은율이 토정하며 몸에 잔뜩 힘을 주자, 그 여파로 진환의 것 역시 그의 안에서 격하게 사정했다.
“크……윽…!”
덮쳐 오는 쾌감에 미간을 찌푸리며 크게 떨었다. 맞추기라도 한 듯 은율도 경련했다.
은율은 내부에 퍼지는 뜨거운 액체의 감각, 그리고 몇 번이나 크게 움찔거리는 진환의 것을 느끼며 쾌감에 젖은 숨을 토해 냈다.
한동안 움찔대던 진환의 것이 몸에서 점차 빠져나갔다. 귀두 직전까지 빠져나간 그것이 빠르게 안을 퍽 쳐올렸다.
“햐악-!”
끝난 줄 알고 힘을 빼고 있던 은율이 돌연 찾아온 격한 쾌감에 입을 크게 벌리고 신음을 쏟았다. 진환의 것은 한 번 토정했음에도 크기가 여전했다. 오히려 한층 부피가 커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은율이 제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진환의 것이 아주 빠른 속도로 내부를 쳐 댔다. 전립선이 강하게 문질러지며, 은율은 아직 채 발기하지 않은 제 것에 자꾸만 사정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읏! 핫! 형, 그만-! 아악-! 나, 나 또…… 아! 아앗-!”
“율아…… 율아…….”
진환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그는 은율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계속 안을 쳐 댔다. 빠른 속도에 은율의 몸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진환의 손에 눌려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연신 지독한 쾌감을 느껴 대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하으읏-! 또 가아-! 아앗! 아-!”
반밖에 발기하지 않은 은율의 것에서 말간 액체가 자꾸만 흘러나왔다. 그것을 배출할 때마다 몸 안에서부터 심한 파도가 요동치는 것 같은 쾌감이 느껴져 색스러운 교성을 질러 댔다.
“아아-! 앗! 계속…… 나와아! 하으-! 앗…!”
“더……. 율아, 더…….”
은율의 것에서 나온 액체가 제 옷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진환은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은율의 안을 쑤셔 댔다.
“사랑해, 율아. 사랑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 말만 반복하며 은율의 안에 또 한 차례 파정했다. 하지만 진환은 제가 사정한 것도 인지하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안을 쳐 댔다. 아래에서는 질척하게 찌걱대는 소리가 울려 대고, 위에서는 은율의 쾌감에 젖은 교성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한 몸처럼 이어진 채 떨어지지 않았다.
* * *
“예?!”
은율이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 뽀얀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다 갑자기 덮쳐 온 허리의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은율이 한 손으로 제 허리를 붙잡자, 진환이 얼른 그를 바르게 눕혔다.
은율은 허리의 통증 때문에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럼 여태까지 바빴던 게 할리우드 영화 촬영 때문이 아니라 소속사를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말예요?”
제 옆에 누워 한 팔로 머리를 괸 채 바라보던 진환이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지금의 소속사와 계약되어 있던 것들을 모두 앞당겨 촬영한 거야. 내년까지 넘어가 있던 것의 일부는 위약금을 지불했고.”
“그래도 돼요?”
연예인과 소속사 간의 일에 대해선 거의 무지하다 싶은 은율이었지만, 위약금을 지불할 정도라면 다소 얼굴 붉힐 일이 아닌가 싶었다.
진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원래 12월까지가 계약 기간이었어. 그 이후의 일은 그쪽에서 당연히 계약 연장이겠거니 하고 멋대로 잡은 거라 나도 할 말은 있었지. 위약금은 이제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대신 물어 준 것뿐이야.”
진환이 손을 뻗어 은율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은율은 진환의 품에 쏙 들어가 안긴 채 자연스레 그의 탄탄한 팔에 머리를 대었다. 진환이 은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었다.
“걱정할 것 없어. 레이먼드 감독의 영화는 새 기획사 통해서 다시 하겠다고 연락할 거야.”
그 영화를 다시 하겠다고 하니, 한시름 놓였다. 그러고 보니 새 기획사를 어디로 할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오랫동안 몸담은 현 기획사를 버리고 다른 기획사로 가겠다니, 그곳은 어딜까? 이진환 정도라면 어느 기획사건 굉장한 계약 조건을 들고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은율이 순진하게 뜬 눈으로 물었다.
“그럼 그 새 기획사는 어디예요?”
진환이 작게 웃었다.
“궁금해?”
“당연하죠.”
진환이 씩 웃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내 은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 *
‘연예계 특종만 쏙쏙 골라 보내 드리는 <특종! 연예계 속으로>의 첫 번째 소식입니다! 한류스타 이진환 씨가 레이먼드 윌슨 감독의 SF 블록버스터에 주연으로 출연한다고 화제인데요. 이와 더불어 그간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K.M.K와 계약 만료로 인한 결별을 선언하고 새 기획사로 옮긴다는 소식입니다.’
‘아니, K.M.K는 우리나라 3대 연예기획사가 아닙니까? 그럼 그곳을 제외한 다른 두 기획사 중 한 곳으로 간다는 건가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무려 이번에 설립된 신생 기획사 K엔터테인먼트로 옮긴다고 합니다.’
‘K엔터테인먼트라면 외국 기업 케이트레이딩이 설립한 한국 연예기획사잖아요?’
‘예, 맞습니다. 이제 막 설립된 K엔터테인먼트와 이진환 씨의 관계에 대한 갖은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데요. 소문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야, 얼마나 좋은 조건이기에 이제껏 몸담아 왔던 대형 기획사를 차 버린 걸까요? 궁금합니다!’
흐린 눈을 한 채 가만히 라디오를 듣고 있던 연우가 헛웃음을 보였다.
“좋은 조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환이 형한텐 좋은 조건이라면 좋은 조건이지.”
연우가 작게 웃으며 운전석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CF 촬영까지 모두 마친 진환이 선글라스에 검은 롱코트를 입은 채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애인하고 같은 소속사에 몸담게 되었는데, 아무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와 함께 소속사를 옮기게 된 연우 역시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 * *
은율은 제 앞에 내밀어진 두 뭉치의 서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두 뭉치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다.
“형식적인 거니까 훑어보고 사인 해.”
마주 앉은 칼이 싱긋 웃어 보였다.
은율은 그가 준 서류를 들어 몇 번이고 읽어 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칼이 쓰게 웃었다.
“설마 아빠가 우리 아들한테 안 좋게 하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은율이 당황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몇 번을 읽어도 자신에게 오는 수익이 너무 많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칼이 건넨 계약서이니만큼 흔히들 알던 노예계약이니 뭐니 하는 것까지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이전에 진환에게 들었던 ‘신인으로서 정당한 수준의 계약서’일 줄 알았다.
“이진환 씨도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할 거니까 오해하지 마. 우리 아들만 혜택 주는 거 아니니까.”
은율은 기겁했다. 아직 정식 데뷔를 했다고 하기도 뭐한 신인과 한류스타가 같은 계약서라니. 말도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제가 환이 형하고 같은 계약서를 써요. 조건이 너무 후합니다.”
“아빤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칼이 소파에 몸을 기대 다리를 꼬고는 두 손을 깍지 껴 그 위에 올렸다. 그가 싱긋 웃으며 은율을 마주 보았다.
“네가 연기한 영상은 전부 다 가지고 있고 몇 번이나 돌려 봤어. 그게 정식으로 연기한 거든, 스턴트 액션이든 뭐든.”
칼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무리 나라도 앞이 보이지 않는 것에 투자하는 취미는 없어. 확실하게 이득 볼 수 있는 것에 투자를 하는 거지.”
그것은 여태껏 칼이 기업을 키우며 보여 준 수완을 뒷받침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칼이 작게나마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든 것은 고작 제 아들을 키워 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명백히 그로 인해 얻어질 게 보였고, 진환까지도 힘을 보태겠다고 한 이상 투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은율은, 칼이 사업가의 눈으로 냉정히 보아도 충분히 될성부른 나무였다.
“내 눈에는 서은율이라는 사람이 이진환만큼이나 클 수 있다고 보이는데, 자신 없는 거니?”
은율이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입을 오물거렸다.
“그게…….”
그가 두 손을 맞잡고서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기대하신 것에 비해 재능이 없어서…… 제가 아빠나 환이 형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됩니다.”
진환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의 대단함을 구구절절 읊어 줬을 터였다.
칼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율이 앉은 소파에 함께 앉았다. 그가 은율의 두 손을 잡아 어루만졌다.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와 이진환 씨의 안목을 믿어 봐. 넌 분명 잘 해낼 거야.”
그제야 은율의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다.
칼이 그의 손에 손수 펜을 쥐여 주었다. 은율이 계약서에 제 사인을 남기려던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환 씨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낯익은 러시아어에 고개가 돌아갔다.
{들여보내.}
칼이 짤막하게 말하자, 문이 열리고 진환과 니콜라이가 보였다. 니콜라이는 문을 열어 준 채 비켜섰고, 진환이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좀 늦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은 은율을 담고 있었다. 그 서늘하던 눈가가 사르르 풀린다.
“괜찮아요. 와서 앉죠.”
칼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니콜라이에게 눈짓했다. 문을 닫고 들어온 니콜라이가 칼의 집무 데스크에 올려두었던 서류를 가져와 진환에게 건네었다. 그것은 은율에게 건네진 것과 동일한 계약서였으나, 서명란의 이름은 진환의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은 채 은율의 옆에 앉은 진환이 계약서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진환은 각각 5장에 달하는 서류 두 뭉치를 전부 훑어보더니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것으로 두 뭉치의 계약서 서명란에 각각 멋들어진 사인을 남기고, 계약서 두 뭉치를 좌우로 바짝 붙여 2장에 걸쳐 같은 위치에 사인했다.
그 익숙한 행동을 은율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여러 번의 사인을 끝마친 진환이 눈을 맞추며 웃었다.
“사인했어?”
그의 물음에 은율이 고개를 돌려 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진환이 사인할 때 흘끔 보긴 했지만, 역시나 조건이 동일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마치 재촉하듯 진환과 칼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은율은 자신의 이름 석 자 옆에 어색하게나마 사인을 남겼고, 진환이 했던 것처럼 두 뭉치의 서류를 겹쳐 각 장마다 사인했다. 서류 중 하나를 칼에게 건네고 나니, 은율의 서류 옆에는 반쪽짜리 사인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앞의 칼을 바라보니, 그는 은율과 진환이 건넨 서류 속 사인을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웃는 낯으로 은율과 진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정식으로 K엔터테인먼트의 배우예요.”
그 말이 무어라고, 은율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은율은 조금 상기된 낯으로 제 손에 들린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배우라는 두 글자.
그것의 힘이 이리도 크던가.
가슴이 뛰고 얼굴이 상기될 뿐만 아니라 구름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도 자꾸만 머리를 들었다.
은율이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앉아 있는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배우의 꿈은, 아니 그보다도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에게 꿈을 준 사람, 그리고 그것을 이루게 해 준 사람.
누구보다 사랑하고,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이번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칼을 마주했다. 그의 진회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자신을 담고 있었다.
제게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이자, 자신을 그리도 애절하게 찾아 헤맨 사람.
둘도 없는…… 사랑하는 아버지.
두 사람을 보며, 은율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 보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언제까지고, 영원히.
함께해 주세요.
* * *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날, 연예계는 돌풍에 휩싸였다.
4년차 아이돌 그룹 BLESS가 화려하게 복귀 무대를 가진 것과 동시에, 그 리더이자 메인 보컬인 진태휘의 솔로곡 뮤직비디오가 발표되었다. 다른 곡의 뮤직비디오는 일찌감치 풀렸던 것과 달리 솔로곡의 뮤직비디오는 복귀 무대가 있었던 12월 25일에 맞춰 공개되었다.
다소 몽환적이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그 곡의 뮤직비디오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처음에는 각각 다른 남자 다섯이 연기한 것처럼 보였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른 느낌, 다른 인상이었고, 심지어 그들은 이미 이름 없는 배우와 이름 없는 모델로 잘 알려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끄트머리에 등장한 남자로 인해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 뮤직비디오의 출연자는 ‘서은율’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한 명뿐이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들의 눈에 모두 다른 인물로 보이던 이가 다름 아닌 한 사람이라는 것도 놀랐지만, 정식 연기자가 아닌 스턴트맨이라는 것에 더 큰 난리가 났다.
뒤늦게 그가 대역했던 영화나 드라마들이 속속 떠오르면서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때아닌 영상물 관련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다. 물론 그 1위를 ‘서은율’이라는 이름 석 자가 차지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세간의 관심은 ‘서은율’이라는 인물에게 몰려들었다. 그 어느 신인보다도 화려하게 데뷔한 서은율은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생성된 팬카페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서은율에 대한 정보는 금세 퍼져 나갔다.
사고로 부모를 여읜 후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진로를 변경한 데다, 그 사고의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어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스턴트맨이었고, 학업 때문에 전업으로 참여할 수 없는 만큼 위험수당이 많이 붙은 스턴트 액션을 도맡아 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던 중, 먼 친척인 케이트레이딩의 대표 칼바노아 알리예프를 만나게 되어 이제야 그의 진정한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트라우마 역시 주변의 도움으로 완전히 떨쳐 낸 상태라고 알려져, 그를 안타까워하던 많은 이가 안도할 수 있었다.
칼바노아 알리예프는 이전부터 연예기획사 설립에 관심을 두었다고 알려졌던 만큼, 이번에 기획사를 설립해 대표 배우 1호로 서은율을 올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업계에서도 서은율과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진 이진환이 타 기획사의 극진한 러브콜을 거부하고 그곳에 몸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당연히 한류스타 이진환이 몸담게 된 K엔터테인먼트에도 수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세계에 영향력 있는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는 케이트레이딩의 대표 칼바노아 알리예프.
한국에 정착하는 것뿐 아니라 대배우 이진환과 세간을 몇 번이나 떠들썩하게 만든 신인 배우 서은율을 앞세워 그 위용을 드러낸 K엔터테인먼트.
한동안 각종 매체와 포털사이트, SNS에서는 그들의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