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형, 잠깐만!”
은율은 급하게 뛰어나가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얼른 멈춰 서서 뒤로 돌아보았다. 어느새 오피스텔 현관에서 슬리퍼만 신고 달려 나온 하진이 제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손수 씌워 주었다.
“이젠 가리고 다녀야 한다니까. 모자만 쓴다고 될 게 아니란 말이야. 마스크는? 여차하면 그것도 써야지.”
“챙겼어.”
은율이 입고 있던 재킷 주머니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씩 웃어 보였다. 하진이 반쯤 걱정 어린 얼굴로 쓰게 웃었다.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삼촌은 허락했고?”
그가 말하는 ‘삼촌’이란 바로 칼이었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하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보디가드 열댓 명은 붙일 줄 알았더니 의외네.”
“갈 때는 니콜이 함께 가 주실 거고, 그쪽에 사람들 미리 대기하고 있어.”
하진이 ‘그럼 그렇지’라고 중얼거렸다. 그 팔불출 삼촌이 은율을 홀로 움직이게 할 리 없었다.
하진이 손을 뻗어 약간 틀어진 모자를 바로 잡아 주었다.
“조심히 다녀오고, 올 때 꼭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지희나 잘 데리고 있어.”
모처럼 은율과 동생들을 위해 칼이 얻어 준 오피스텔이다. 셋이서 살기에도 너무 넓지 않나 싶을 정도로 널따란 오피스텔이었지만, 칼은 그것도 불만족스럽다며 더 큰 집을 알아봐 주겠다고 난리였다. 은율이 한사코 말리지 않았다면 방이 셋이나 있는 지금의 오피스텔보다 2배는 큰 집을 구해 줬을지도 모른다.
은율은 하진에게 얼른 들어가라고 말했지만, 나온 김에 대기 중인 차량까지 함께 가겠다며 결국 그의 캐리어를 직접 끌어 주었다.
오피스텔 밖으로 조금 나오자, 고급스러운 검정 외제 차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차 옆에는 스킨헤드의 니콜라이가 약간 미소를 띤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은율과 하진이 가까이 다가가자, 니콜라이가 허리를 공손히 숙여 보이며 캐리어를 가져갔다. 하루 이틀 있다가 오는 게 아닌지라 무게가 좀 나갈 텐데도 니콜라이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그것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니콜라이가 빠르게 다가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자, 은율이 안에 올라타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걱정 어린 얼굴이었다.
“얼굴 풀어. 좋은 일로 가는 건데 왜 그래.”
“형 해외는 처음이잖아. 진짜 괜찮아? 역시 삼촌에게…….”
“괜찮다니까. 걱정하지 마. 형이 그렇게 못 미더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
은율이 차분한 얼굴로 하진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알아듣고 하진이 얼굴을 가져가자, 은율이 이마에 차지게 딱밤을 날린다.
“악!”
하진이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감쌌다. 살집도 별로 없는 손가락이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대단했다.
“적당히 해. 그럼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닫아 버렸다. 때마침 니콜라이도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은율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이내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와 함께 그에게서 점차 멀어져 갔다.
은율은 좌석에 편안하게 등을 기댄 채 니콜라이에게 미안한 투로 말했다.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모셔야죠.}
니콜라이가 백미러로 은율과 눈을 마주치며 살짝 눈꼬리를 휘었다. 은율도 거울을 통해 마주 웃어 주며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휴대폰의 액정 화면에 자리한 진환의 사진을 내려다보던 은율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을 만난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본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어느덧 차량은 서울 시내를 지나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 있었다.
창밖에 시선을 두고서 빠르게 달리는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달리는 그 차량들은 은율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매일 연락하면 괜찮을 줄 알았어요. 못 보더라도 목소리만 들으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어요.』
인천공항에 도착한 은율은 니콜라이의 도움을 받아 캐리어를 접수하고 나서 다시금 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지어 주던 진환의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휴대폰으로 그를 찍었더랬다. 이젠 하루라도 이 사진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건 줄 처음 알았습니다.』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니, 니콜라이가 다가와 따뜻한 코트를 단단히 여며 주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그는 잘 다녀오라 말하며 은율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려 했다. 은율은 만류하며 두 손을 뻗어 가볍게 그를 끌어안았다.
{다녀올 동안 아빠 잘 부탁드릴게요.}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니콜라이가 따뜻한 눈으로 은율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사람들의 수많은 시선을 받을 때마다 형이 떠올랐어요. 형이 아니었다면 전 그런 시선도 받지 못했겠죠.』
비행기에 올라 스튜어디스의 공손한 안내를 받았다. 그녀를 따라 퍼스트클래스 좌석에 다다른 은율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칼이 직접 항공권을 준비했다더니, 예상대로 가장 좋은 좌석을 잡아 주었다. 칼의 걱정 어린 얼굴을 떠올리던 은율은 픽 웃으며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저…….”
스튜어디스가 반짝이는 눈으로 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 마스크까지 쓰고 있던 은율이 좌석에 앉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될까요?”
볼을 붉힌 채 그녀가 물어 왔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퍼스트클래스 전담 스튜어디스이니만큼 탑승객의 정보를 미리 숙지하고 있었을 거다.
은율이 선글라스를 벗고 예쁘게 웃어 보이며 승낙했다. 다소 흥분한 스튜어디스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휴대폰으로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휴대폰 속 사진을 확인하며 한껏 들뜬 얼굴로 연신 감사를 표하며 돌아갔다.
『형을 만난 이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느낌입니다. 아무 감흥 없던 세상이 지금은 한없이 활기차고 더없이 밝게 보여요.』
전원을 끄기 위해 꺼낸 휴대폰 화면에 일순 메시지가 나타났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기언이었다.
[야! 시험 합격했다는 말 왜 안 했어!]
은율이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기언이나 강희는 이제야 국제 자격증 시험을 볼 준비 중인데, 자신이 버젓이 시험에 합격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괜한 부러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서 말하지 않았건만, 아무래도 하진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곧바로 메시지가 하나 더 날아왔다.
[지금 미국 가고 있다며? 조심히 다녀오고 너, 나중에 보자. 강희도 벼르고 있어.]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다. 강희의 살벌하게 부라리는 눈을 생각하니 그저 어색한 웃음만 나왔다. 은율이 미소 띤 얼굴로 키패드를 두드렸다.
[미안. 잘 갔다 올게.]
[그래, 한국 오면 연락하고.]
그것을 끝으로, 액정 화면 속 진환의 사진을 한차례 눈에 담고 곧바로 전원을 껐다.
『이젠 형의 눈에 비친 세상을 같이 보고 싶어요.』
12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는데도 미국은 대낮이었다. 은율은 시차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걸음을 옮겼다.
캐리어를 찾아 게이트를 나오니, 상당히 많은 사람이 늘어서 있었다. 곳곳에 여러 언어로 적힌 피켓을 든 이들이 상당했다.
그런 은율의 눈에 한 남자가 보였다. 자신과 같은 검은 모자, 검은 선글라스를 쓴 키가 큰 남자.
은율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남자 역시 은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수많은 사람을 사이에 두고 은율과 남자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서로 긴 다리를 내뻗어 거의 같은 속도로 사람들 무리를 지났다.
『형이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지, 형이 있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직접 느끼고 싶습니다.』
이내 사람들 무리를 완전히 지나친 두 사람이 완전히 가까워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은율이 선글라스 안에서 싱긋 웃으며 영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에어윈드>의 주인공 ‘유재한’의 동생, ‘유은호’로 뒤늦게 함께하게 된 서은율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부드럽게 마주 웃어 준다. 은율이 악수를 청하듯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남자가 손을 내뻗어 은율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당겨 제 품에 은율을 껴안았다. 주변에는 워낙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서로 얼싸안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잘 부탁해.}
“그리고…… 보고 싶었어.”
은율은 자신을 끌어안은 진환의 등을 차분히 쓸어 주었다.
“저도 너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고 날아와 버렸습니다.”
『이젠 제가 한 발 가까이 들어갈게요.』
“사랑해, 율아.”
작게 속삭이는 그 말이 어찌나 달콤한지.
은율 역시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형이 있는 세상으로.』
“저도 사랑합니다.”
-STUNT 1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