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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아빠라고 불러 줘 (15/33)

외전 1. 아빠라고 불러 줘

그것은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단순히 ‘아빠’라는 호칭이 어색해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썼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25년간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아빠’라고 불러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쉬이 불러 줄 수가 있겠는가. 이를 피력하며 좀 더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그 ‘아빠’라는 호칭을 듣고 싶은 사람이 준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그날은 개강 후 며칠 뒤 일요일이었다.

“자, 시간은 줄 만큼 준 것 같은데.”

칼이 싱긋 웃으며 몸을 반쯤 돌려 다가왔다. 달리는 차 안이라서 도망갈 구멍도 없는지라 은율은 애꿎은 문에 몸을 바짝 기댔다.

“고작 십 분 준 게 무슨 줄 만큼 줬다는 겁니까? 최소한 며칠의 시간은 주셔야…….”

“안. 돼.”

칼이 단호하게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데 또 기다리라고? 말도 안 돼. 아빠 그러다 죽어.”

“죽기는 왜 죽습니까? 한창 팔팔하신 분이.”

어이없는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칼이 바짝 다가왔다. 그가 좌석의 가운데에 앉아 버리니 은율은 피할 곳 없이 그와 엉덩이를 가까이 대고 앉은 꼴이 되었다.

칼이 은율의 어깨로 팔을 둘렀다. 그러고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은율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꽉 잡았다.

“아빠라고 불러 줄 때까지 안 놔줄 거야.”

“예? 아니, 잠깐…….”

몸을 움직여 봤지만 완전히 꽉 붙잡힌 상태였다. 어깨를 잡은 손에도, 두 손목을 결박한 손에도 상당한 힘이 들어가 있다. 은율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칼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다. 그의 진회색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자, 아빠 해 봐. 아빠.”

은율이 눈만 깜빡이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사이, 차량은 으리으리한 높이를 가진 빌딩 앞에 다다랐다. 마침 회사를 구경시켜 주기로 약속한 날인지라, 최종 목적지의 위치는 ‘케이트레이딩’ 본사였다. 그 회사 앞에 차를 세워 놓고 지금 이게 뭐 하는 건지.

은율이 눈을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채 백미러를 보고 있던 니콜라이의 선글라스에 눈이 닿았다. 선글라스 안에서 은율을 보고 있었던 걸까. 눈이 마주쳤나 싶은 그때, 야속하게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완전히 붙잡힌 채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칼이 그렇게도 원하는 호칭을 불러 주는 것이었지만, 아직까진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그리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나 차분히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은율이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픈데…….”

“응? 어디가? 어디가 아파?”

칼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깨랑 손목이…….”

“미안. 아빠가 너무 세게 잡았니? 미안해, 힘 조절을 못했나 봐.”

정색하며 사과를 해 오니, 은율은 되레 미안해졌다. 사실 칼은 결박을 단단히 했을 뿐,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그의 손을 떨어뜨릴 요량으로 엄살을 부린 거다.

예상대로 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은율은 이때다 싶어 칼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차에서 내렸다.

“은율이, 너!”

칼이 그답지 않게 약간 뾰로통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이렇게 보면 전혀 40대 중반으로 보이지 않는다.

칼이 따라 내려서더니 은율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약간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아빠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어?”

은율이 움찔했다. 이런 얼굴에는 약한데.

“그건 아니고…… 그냥 아직 어색해서 그럽니다. 천천히 불러 드릴게요.”

칼이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팔짱을 척 꼈다. 이대로는 평생 가도 아빠 소리는 못 들을 것 같다.

잠시 생각하던 칼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내기 하나 하자.”

“내기요?”

두 사람이 빌딩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안에서 검정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나와서 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기다렸다는 듯 운전석 문이 열리고 니콜라이가 내린다. 그가 두 남자 중 한 명에게 차키를 건네주고는 칼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니콜, 가서 대련장 좀 쓴다고 해. 금방 갈게.}

{예, 알겠습니다.}

니콜라이가 칼의 명령을 받고 빌딩 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은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자, 칼이 씩 웃었다.

“무술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우리 아들 실력도 볼 겸, 아빠랑 대련 한번 하자.”

다짜고짜 대련이라니. 그런 걸 왜 해야 하냐고 반박하려는 은율에게 칼이 덧붙여 말했다.

“아들이 이기면 앞으로 호칭에 대해 집요하게 굴지 않을게. 덧붙여서 이진환 씨에게도 거리감 없이 대해 주겠어.”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칭은 둘째 치고, 진환에게 친근하게 대해 주겠다는 말은 제법 솔깃했다. 안 그래도 칼의 스위트룸에서 은율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던 그날 이후, 그들은 거의 맞부딪치질 않았다. 단순히 티격태격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서로 거리를 두고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역시 두 사람이 친근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둘 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은율에게 칼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신 아빠가 이기면, 이긴 직후부터 ‘아빠’라고 부르는 거야. 알았지?”

칼의 박력 있는 눈동자가 은율을 집어삼킬 듯 응시했다. 은율은 그 눈동자에 마치 홀린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칼의 매서운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좋아. 건물 안에 경호팀 전용의 대련장이 있으니까 거길 쓰자.”

그렇게 말하며 친근하게 은율의 어깨를 팔로 둘렀다. 칼이 은율을 붙든 채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빌딩 입구와 그 내부에 배치되어 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칼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로비를 지나니,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여자 직원들과 다른 직원들 역시 칼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해 보였다. 칼은 그것이 당연한 듯 신경도 쓰지 않고 걸었고, 은율은 호기심 어린 그들의 눈빛에 괜히 머쓱해했다.

빌딩 안에 있던 이들은 칼이 다정하게 데리고 들어온 은율에게 갖은 흥미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언제나 냉기를 동반한 카리스마를 철철 넘치게 뿜어 대던 젊은 회장님이 돌연 세상 달달한 남자가 되어 있으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리 매력적인 미소를 만면에 띤 회장님은 처음 보았다.

거기다 은율의 외모가 워낙 화려하고 매력적이니 시선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었다. 칼의 외모도 ‘사기적’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데, 그 옆에 선 은율도 그에 뒤지지 않는 상당한 외모다. 빌딩 전체가 화사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칼과 은율이 걸어갈 때마다, 그들과 맞닥뜨린 이들이 인사와 동시에 넋을 놓았다.

은율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 괜히 신경 쓰였다.

“허리 펴고 당당히 있어.”

칼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가 은율의 어깨를 두른 손으로 툭툭 다독인다.

“언젠가 네 사람들이 될지도 모르니까.”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은율은, 아직 칼의 아들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그래서 칼은 더욱 ‘아빠’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혈연, 그리고 친근한 부자간을 나타내는 그 호칭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얼마 되지 않아 칼이 누른 층에 다다랐다. 문이 열리자마자 은율은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 문을 기점으로 좌우에 검은 운동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크게 외친 것이 아님에도 남자들이 여러 명이다 보니 그 소리가 귀를 울릴 만큼 우렁찼다.

은율이 놀라서 몸을 움츠리니, 칼이 남자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애 겁먹으니까 저리 비켜서 있어요.”

어린애를 놀라게 해 울린 사람 같은 취급을 받은 남자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칼은 은율을 데리고 그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지나갔다. 등 뒤로 따라붙는 사람들의 흥미 가득한 시선이 따가웠다.

대련장은 은율의 예상보다 상당히 컸다. 마치 액션스쿨의 대련장을 보는 것만 같았다.

“회사 안에 이런 곳도 있었습니까?”

은율이 신기해하자, 칼이 다정하게 웃는 낯을 했다.

“회사가 크면 전담 경호팀도 있어야 해. 그리고 매일 적당한 수련을 할 수 있도록 대련장과 헬스장이 있으면 감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은율은 학생 때 다니던 도장 같기도 하고 액션스쿨 같기도 한 그 공간을 보며 짧게 감탄했다.

어느새 먼저 올라와 있던 니콜라이가 다가왔다. 칼은 정장 재킷을 벗어 그에게 건네며 한 손으로는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바닥에 등이 닿으면 지는 거로. 어때?”

은율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쇄골 라인까지 풀며 웃었다.

“좋습니다.”

가슴이 기분 좋게 뛰는 것을 느끼며 은율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칼과 은율은 각각 신발을 벗고서 매트 위에 올라섰다. 어느새 주변엔 경호팀 전용의 운동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은 경호팀 팀장도 이기지 못한다는 칼바노아 회장이 웬 젊은 청년과 대련을 한다는 소식에 눈을 반짝였다. 칼이 누군가와 대련을 하는 장면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대의 외견 때문도 있었다. 운동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늘씬한 체형의 은율이다. 그런 그가 과연 칼을 상대로 몇 초나 버티겠나 싶었다.

칼이 손목을 돌려 보며 웃었다.

“언제든 시작해.”

마치 제 아들과 즐거운 놀이를 하려는 사람 같았다. 은율이 싱긋 웃더니, 이내 낯빛이 홱 바뀌었다. 순간적으로 몰아치는 위압감에 칼조차 일순 움찔할 정도였다.

은율은 가장 먼저 칼의 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순식간에 파고들어 간 은율은 곧바로 몸을 낮게 숙여 그의 발을 걸었다.

그 빠른 몸놀림에도 칼은 당황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답게 가볍게 몸을 띄워 그것을 피해 냈고,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은율에게로 팔을 뻗었다. 왼손으로는 은율의 오른팔을, 오른손으로는 왼팔을 붙잡아 바닥을 향해 내리누르고서 제 다리로 그의 다리를 걸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은 은율이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져 등이 땅에 닿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은율은 단숨에 땅에 등을 댈 수밖에 없는 그 상황임에도 패배를 예감하지 않았다. 그는 붙잡힌 두 팔을 굽혀 바닥을 단단히 짚었고,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대었다.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상태가 된 은율이 곧바로 다리를 뻗어 자신을 누르고 있는 칼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예상대로 칼은 몸을 뒤로 빼며 그 발차기를 피해 냈고, 그 바람에 은율의 팔을 붙잡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은율은 곧바로 칼의 팔을 붙잡아 당겨서는 몸을 휘돌려 그를 깔아 버리려 했다. 예리한 칼은 그의 속내를 알고서 그 팔을 떨쳐 내고 뒤로 물러섰다. 은율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칼의 셔츠 앞섶을 잡기 위해 오른팔을 내뻗었다.

그 손이 셔츠에 닿기 직전, 칼이 왼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상태로 오히려 칼이 오른팔을 뻗어 은율의 셔츠 앞섶을 잡으려 했다. 은율이 그 손을 쳐 내고서는 붙잡혀 있는 제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워낙 단단히 잡고 있어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

은율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칼의 복부를 향해 무릎을 굽혀 니킥을 날렸다. 칼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빼 그것을 피해 내니, 이번엔 왼발로 옆구리를 향해 발차기를 시도한다. 칼이 은율의 손을 잡지 않은 오른손으로 그 발차기를 막아 내었다. 은율이 이번엔 반대쪽 옆구리를 향해 오른쪽 다리를 휘둘렀다. 그 빠른 동작 변환과 속도에 내심 놀란 칼이 역시나 그 공격을 오른손으로 막아 내었다.

왼손으로 은율의 오른팔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는 왼쪽으로 날아오는 발차기를 막아 내니, 오른쪽이 텅 비었다. 은율은 노렸던 대로 그의 비어 있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대로 칼의 등 뒤로 돌아가, 오른쪽 손목을 잡힌 그대로 칼의 목을 팔로 반쯤 조르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덤으로 뒤에서 포옹하듯 안은 채 왼손을 앞으로 뻗어 제 손목을 붙잡은 칼의 손목을 역으로 붙들었다.

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 데다가, 꼼짝없이 잡힌 모양새를 반대로 이용해 우위를 점했다.

‘잘 컸네.’

그리 생각하며 칼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양한 무술을 접했다더니, 생각보다 더 실력이 좋다.

칼과 은율의 대련을 보고 있던 다른 이들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칼이 제 실력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쉬이 알 수 있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예사 움직임이 아니다. 그런 칼을 상대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서슴없이 공격을 해 댈 뿐 아니라 목을 조르는 수준까지 보이다니, 실로 대단했다.

칼이 제 손목을 붙들고 있는 은율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쓰게 웃는다.

“우리 은율이, 봐주지를 않네. 그렇게 아빠라고 부르기 싫었어? 좀 슬픈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질 것 같아서요. 그리고…… 환이 형하고 친하게 지내셨으면 하거든요.”

아, 그런 이유였구나.

칼은 은율의 말을 듣고서야 제대로 웃을 수 있었다. 은율은 칼을 아빠라고 부르기 싫은 게 아니라 오로지 진환과 그의 관계에 대한 게 우선순위이기 때문에 이기려는 거다.

“미안하지만…….”

칼이 제 손목을 붙든 은율의 손목을 오른팔로 붙잡았다. 두 사람의 팔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손목을 잡은 형태가 되었다.

“아빠도 질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몸을 앞으로 훅 구부렸다. 은율의 두 다리가 허공에 살짝 뜨자마자 그 몸이 허공을 돌았다. 양팔을 붙잡힌 채 속절없이 엎어치기를 당하게 된 은율이 방심한 자신을 자책하며 눈을 꾹 감았다. 곧 바닥에 등이 닿으며 쿵 소리와 함께 그 충격이 닥쳐 올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등이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이 지탱되어 둥실 떠 있는 느낌에 눈을 떴다. 은율은 엎어치기를 당하며 저도 모르게 칼의 손목을 놓아 버린 상태였다. 칼은 그대로 은율의 등을 두 손으로 단단히 지탱해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은율은 마치 침대에 조심스레 눕혀지듯, 칼에 의해 매트에 등을 대게 되었다. 은율의 동그란 눈이 자신을 거꾸로 내려다보고 있는 칼의 진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칼의 눈꼬리가 예쁘게 휜다.

“이제 아빠라고 불러 줄 거지?”

그렇게 말하며 은율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한다. 그제야 제 패배를 자각한 은율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아빠.”

그리도 원하던 호칭을 들은 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 역시 은율만큼이나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래, 우리 아들, 우리 은율이.”

은율이 그 달달한 음성에 눈을 돌리니, 칼의 행복한 표정이 눈앞에 멈춰 있다. 은율도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럼 그 아들의 부탁입니다. 환이 형이랑 친하게 지내 주세요. ……아빠.”

“으음, 우리 아들이 아빠라고 백 번쯤 불러 주면 생각해 볼게.”

장난치듯 말했지만, 은율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입니까? 그럼 진짜 백 번 부릅니다?”

“아, 말을 잘못했어. 천 번.”

“백 번이라면서요.”

“아빠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그래.”

“아니, 여태껏 한국말 잘해 오셨으면서! 아빠가 돼서 그렇게 아들한테 거짓말하셔도 되는 겁니까? 실망인데요.”

“알았어, 만 번.”

“왜 더 올라갑니까?!”

한 명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고, 한 명은 누운 이의 머리맡에 앉아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좌중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칼의 저런 모습도 생소했지만, 아들? 아빠와 아들이라고?

두 사람을 보던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경악한다.

미친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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