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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아버님이라고 불러 줘 (16/33)

외전 2. 아버님이라고 불러 줘

경찰청장 이영환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눈가에 있는 잔주름이 멋대로 씰룩였다. 그뿐 아니라 근엄하게 다물고 있는 입꼬리도 자꾸만 험하게 일그러지려 한다.

사랑하는 아들인 진환 앞에서는 차마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연애와는 아예 담을 쌓은 제 아들이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너무도 좋았다.

그래, 내 아들도 여느 애들과 다름없이 풋풋한 사랑도 할 줄 아는 그런 녀석이었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일에만 몰두하느라 제 아내의 암 투병 중에도 그녀와 제대로 함께해 주질 못했고 지켜 주지도 못했다. 이에 좌절한 그를 말없이 품어 주고 이해해 주던 게 아들 진환이었다. 그런 아들만은 어떻게든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도 제 자식처럼 대하며 품어 주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 다짐을 실현해야 할 때가 왔다.

‘근데…… 남자잖아!’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에 관심도 없던 게 아니라 남자가 취향이었던 걸까.

드디어 손주를 보겠구나 하고 흥에 겨워 엉덩이를 들썩였던 게 민망할 정도였다.

‘하필 왜 남자냐, 진환아…….’

속으로 아들을 탓했지만 이내 도리질 쳤다.

그래, 아들이 문제인 게 아냐. 아들은 그저 흔히들 말하는 순정남인 거다.

어쩌다 남자에게 빠져서 그렇지, 첫사랑이다 보니 그저 헌신적인 거라 생각했다.

사실 영환에게 있어 아들의 상대가 남자라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결코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아들만 좋다면야 남자를 사랑하든 할머니, 할아버지를 사랑하든 다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게 더 문제였다. 제 아들이 상처받는 것만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진환이 사랑하고 있다던 남자에 대해서는 아랫사람을 통해 내용을 들은 바가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진로를 바꾸고, 휴학을 2년이나 냈다. 거기다 아직 군대도 가지 않았다. 스턴트맨을 전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 형태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두 동생들은 각각 학교 기숙사에 보내 놓고, 본인은 떡하니 원룸을 잡아서 홀로 지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 내용만으로 다다른 결론은, ‘불성실함’이었다.

영환은 아직 직접 만난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지만 진환의 상대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진환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내 줄 정도의 사람이길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기본은 되어야지!

‘진환이를 붙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잠깐만, 생각해 보니 벌써 휘둘렀잖아?!’

외국인들이 끼어 있는 일대 사건에 진환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가. 영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 사건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일부러 진환에게 꼬리를 친 건 아닐까? 자신이 경찰청장이라는 걸 알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진환과 자신, 둘 다 호구로 본 게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진환의 집에 들어앉아 있다던데, 한시바삐 끄집어내야겠다.

‘그래, 담판을 지어야겠어. 하루라도 빨리 진환이에게서 떼어 놔야 해.’

제 아들이 외간 남자의 손아귀에서 호구가 되어 휘둘리느니, 차라리 평생 독신으로 살길 바랐다. 영환의 머릿속에서 사악한 뱀 꼬리를 달고 입에 꽃을 문 괴상망측한 남자가 그에게 윙크를 날렸다.

그렇게 영환은 진환의 집 앞에 서서 그 괴상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깊이 심호흡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그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십니까?

초인종 아래에 있는 스피커에서 한 남자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음, 목소리는 나쁘지 않…… 아니, 이게 아니고.

“흠흠, 진환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상대가 당황하며 대문의 잠금쇠를 풀었다. 영환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벌써 가까이까지 뛰어온 한 남자가 보였다.

영환은 대문을 밀어 연 상태로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왜 눈이 부신 것 같지.’

이상하다. 햇빛을 등지고 있는데도 눈이 부시다.

영환은 제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숙였던 허리가 올라오고 환하게 미소 지은 얼굴이 보였다.

어우, 내가 이상한 건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커흠흠, 그…… 혹시 진환이와 같이 산다고 했던…….”

“예, 서은율이라고 합니다. 형 통해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아들이 제 이야기를 많이 했다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환이 괜히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진환이는 몇 시에 온다고 했죠?”

“출발했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아, 이건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은율이 사근사근 웃는 낯으로 영환의 손에 있는 묵직한 쇼핑백을 대신 들었다. 그 안에는 일전에 진환이 그리도 좋아하던 비싼 와인이 네 병이나 들어 있었다. 영환은 여차하면 그의 집에 눌러앉은 은율을 내쫓고 와인을 마시며 진지하게 독대를 할 요량이었다.

앞서 걷는 은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키도 크고 늘씬해서 그런지 연예인 같다. 물론 제 아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외모다.

영환은 집에 들어설 때까지도 은율을 주시하는 부리부리한 눈을 거두지 않았다.

은율은 주방의 간이 테이블에 쇼핑백을 올려놓고서 미리 준비해 둔 따끈한 로열 밀크티를 찻잔에 담았다. 그렇게 두 잔을 준비한 은율이, 먼저 주방 옆 식탁의 의자를 빼어 앉은 영환에게 다가갔다. 찻잔의 내용물을 본 영환의 눈이 반짝였다.

“로열 밀크티를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준비해 봤습니다만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영환은 제 앞에 놓인 차를 내려다보다 그대로 들어 한 모금을 머금었다.

‘어쭈, 제법…….’

맛을 보니 시판되는 인스턴트가 아니라 직접 비율을 조합해 만든 모양이다. 거기다 향도 좋은 것이, 싸구려 홍차 티백을 쓴 것 같지도 않다. 진환의 집에 들르겠다고 통보한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그사이에 제 취향에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을 것을 생각하니 기특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눈앞의 남자는 제 아들을 호구처럼 부려 먹는 데다가, 보기와 달리 성실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다.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지.

풀리려는 얼굴을 근엄하게 유지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주 앉은 은율의 미소 띤 얼굴을 보며 영환이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진환이랑 사귄……다고요?”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으나 최대한 감정을 죽여 물었다. 은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의 눈이 떨궈지고 긴장을 담아 다물린 입술이 애처롭다.

“많이 불쾌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 주제에 형처럼 과분한 분을…….”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말해 오니 영환이 되레 당황했다. 영환이 상상했던 건 당당한 얼굴로 눈웃음이나 치는 다소 얄미운 인상의 청년이었는데.

“아니, 아니에요. 애가 좋다는데 그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어요.”

말을 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우울해하는 걸 달래 준답시고 마치 두 사람의 사이를 허락한다는 투로 말해 버렸다. 이게 아닌데.

은율이 약간 밝아진 얼굴로 눈을 들었다.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형은 참 좋은 분을 아버지로 두셨네요.”

그 얼굴이 어찌나 선하고 예뻐 보이는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영환이 오갈 데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애꿎은 찻잔만 기울였다.

‘말려들면 안 돼! 정신 차려야지.’

따끈한 차가 목구멍을 넘어가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금융학과 학생이라던데, 원래 학과를 그쪽으로 가려고 했던 건가요?”

속내를 들춰내기 위해 하나씩 차분히 쑤셔 보기로 했다. 은율이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로 가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셨던 거고, 저도 그쪽이 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은율의 아버지가 특전사 육군 중령이었다는 건 영환도 알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살아생전에 꽤 차가운 면모를 가진 실력자였다고 한다. 개중에는 그의 실력과 카리스마 있는 성품에 반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그런데 왜 금융학과로 갔어요?”

영환의 물음에 은율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지만…… 돈이 필요했습니다.”

영환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버지가 육군 중령이었으면 유족연금도 상당할 테고 사망보험금도 있었을 텐데, 돈 때문에 아예 다른 진로를 선택했다니?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실 때 그 안에 저도 함께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한동안 큰 액수의 치료비가 들었고, 친척분들의 어려운 일에도 돈이 들어갔습니다. 남은 돈은 얼마 없었고, 동생들이 원하는 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선 상당한 돈이 있어야 했죠.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진로를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은율의 눈동자가 씁쓸한 빛을 띠었다. 영환은 저도 모르게 제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는 대신 괜히 차만 들이켰다.

‘왜 내 코끝이 찡해지는 거야.’

딱딱하게 다듬어 놨던 머릿속이 점점 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영환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랬군요. 힘들었겠어요. 동생들과는 같이 살 생각이 없었나요? 혼자 이 집에 와 있는 걸 보면 따로 사는 것 같은데.”

은율이 민망한 얼굴을 했다.

“그게…… 돈을 최대한 적게 들여서 살 만한 곳을 찾다 보니 구할 수 있는 게 허름한 반지하방뿐이었습니다. 저는 괜찮지만 동생들까지 그 좁고 어두운 곳에서 어렵게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행히 동생들의 학교 기숙사를 가 보니 제 방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기에 그쪽에서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환이 형이 너무 위험하다고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 집에서 이렇게 호사를 누리며 사는 게 동생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목소리에 약간의 물기까지 섞여 있었다. 영환은 은율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틈을 타, 한 손으로 제 입을 막고서 소리 없는 신음을 뱉었다.

‘흡…… 그 원룸이라는 게 반지하였어……. 괜히 미안하잖아.’

목이 바싹바싹 타는 느낌에 남은 찻물을 완전히 들이켜 버렸다. 뜨끈한 액체가 목구멍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이가 스물다섯이라던데, 군대는 다녀왔어요?”

마음을 독하게 잡고 다른 걸 물었다. 고개를 든 은율이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돌렸다.

“그게…….”

은율이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전 부모님의 사고의 영향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군대를 면제……받아서요.”

“많이 심한가요? 웬만해선 면제되지 않을 건데.”

영환이 날카롭게 물었다. 은율은 고민 끝에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정신병자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진환의 아버지다. 언젠가는 말해야 할 거다.

은율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영환의 시선이 그 떨리는 손에 닿았다.

“비가 오는 날엔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심할 땐 환청과 환영도 보는 수준입니다.”

영환의 눈이 커지고, 은율의 눈은 깊이 침잠했다.

“그럴 때 부모님을 뵙는 걸 보면 제가 그분들을 많이 그리워하는구나 싶어서 괜히 우울해질 때도 있습니다.”

영환이 입을 꾹 다물고 작게 숨을 삼켰다. 왜인지 눈에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그럼…… 비가 올 때마다 그래요?”

괜히 조심스럽다. 영환의 질문에 은율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지근해진 찻잔의 표면을 두 손으로 보듬듯 잡았다.

“……예. 그래서 학교 다니면서도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출근해서 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거든요.”

영환은 그제야 이해했다. 은율이 아르바이트로 위험한 스턴트 일을 위주로 해 왔던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 상태에 맞춰 일하되 어느 정도 넉넉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은율이 돌연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영환을 마주 보았다.

“그래도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환이 형 덕분이에요.”

은율의 눈동자에 이 자리에는 없는 진환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형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제 꿈이 뭔지도 모른 채였을 거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이겨 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자, 영환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은율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영환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형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아버님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영환이 저도 모르게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약간 붉어진 눈가를 한 채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힘들었겠어요. 어떻게 이렇게 착하게 컸지.”

영환의 눈가가 돌연 촉촉해지더니, 두 팔을 뻗어 은율을 품에 꽉 안았다. 영환에게 안긴 채 당황한 낯을 한 은율이 어리둥절해 했다.

“어…… 저…….”

“아버님이라고 불러요.”

영환의 단단한 손이 은율의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내가 자주 올게요.”

“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영환이 은율을 떼어 그의 양팔을 붙잡아 바라보았다. 은율의 선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그 맑고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

영환이 촉촉한 눈가를 휘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 해 봐요. 아버님.”

“예, 예?”

은율이 당황했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른다. 영환은 그의 입에서 꼭 그 말이 나오는 걸 들어야겠다는 듯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은율이 입을 달싹였다.

“아, 아버님…….”

“아이구, 이뻐라.”

갑자기 손주 보는 할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사르르 웃어 보이며 은율을 다시 꼭 껴안았다.

“친아버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해요. 말도 편히 하고요.”

“아뇨, 제가 어떻게 아버님께 감히…….”

“괜찮아요. 아버님 소리 참 듣기 좋네. 또 불러 봐요.”

“예……?”

은율이 적잖이 당황하고 있던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율이 고개를 돌리니,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들어오던 진환이 주방 근처 복도에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진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은율과 영환을 떼어 놓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진환이 낮게 으르렁대며 은율을 제 뒤로 숨겼다. 영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보는 제 친아들을 마주했다.

“우리 새아기 좀 안아 봤을 뿐인데 호들갑은.”

‘새아기’라는 표현에 은율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진환이 두 팔을 뒤로 뻗어 은율을 등에 찰싹 붙이더니, 그대로 등허리에 제 손을 깍지 껴 속박한다.

“안 됩니다. 제 거예요. 저만 안아 볼 수 있습니다.”

“형!”

은율이 당황해 소리쳤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쩨쩨하기는. 닳는 것도 아닌데.”

“닳아요. 그리고 율이한테 무슨 얘기 하셨어요? 이상한 소리 하신 건 아니겠죠?”

진환의 추궁에 영환이 움찔했다. 은율이 진환의 등을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그런 일 없었습니다. 아버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거 봐라, 우리 새아기가 아니라고 하잖니.”

“그거야 모르죠. 아버지가 주책 부리시는 것도 한두 번이……, 악!”

보다 못한 은율이 진환의 발뒤꿈치를 제 발끝으로 아프게 가격했다. 진환의 몸이 흐트러지고 팔에서 힘이 빠지자, 은율이 어렵지 않게 그 팔을 벗어나 영환에게 얼른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이 일 때문에 많이 힘들었나 봐요. 평소엔 이렇지 않은데…….”

영환은 은율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예의도 바르고 말도 예쁘게 하고 성품도 좋은데, 거기다 외견마저 매력적이다. 덧붙여 제 아들을 저리 옹호하는 모습이라니.

영환이 은율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맞춰 왔다.

“우리 진환이가 가끔 철없이 굴어도 잘 좀 봐 줘요. 워낙 애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와서 사람 간의 교류도 잘 모르고…….”

“아버지!”

진환이 어이없는 얼굴로 영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저리 말한 적이 없는데,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율에게 험담을 하다니.

은율이 영환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많이 부족해서…….”

“무슨 말이에요. 우리 서은율 씨는…… 음, 나도 율이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말씀도 편히 하세요.”

진환이 불쑥 끼어들었다.

“안 됩니다. 그 호칭은 저만 쓰는 거예요.”

“형, 좀!”

은율이 눈을 부라렸다.

영환이 씩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기분 좋은 듯 흔들어 댔다.

“율이 씨 부담될 테니까 말은 천천히 놓을게요. 여하튼 우리 진환이 잘 부탁하고, 앞으로 나랑 자주 봐요.”

“예, 언제든 불러 주시면 가겠습니다.”

진환이 또 끼어든다.

“아뇨, 부르지 말아요. 율이 바쁩니다.”

“형!”

“그럼 내가 만나러 오면 되지. 그쵸, 율이 씨?”

“물론이죠, 아버님.”

은율은 진환과 영환 사이에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지경이었다. 영환이 붙잡고 있던 은율의 손을 토닥이듯 두드렸다.

“아버님이란 호칭이 참 좋네요. 더 불러 봐요.”

“예, 예? ……아버님.”

“좋네, 좋아. 이대로 한 백 번만 불러 줘 볼래요?”

순간 머릿속에 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들은 원래 다들 이런 건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환이 은율의 손에서 영환의 손을 거칠게 떼어 놓았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겁니까?!”

“아, 왜! 백 번 듣고 놔주려고 했는데!”

“아버지!”

“왜, 이 자식아!”

진환과 영환이 서로 눈을 부라렸다. 은율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영환이 가져온 와인 쇼핑백에 눈이 닿았다.

이럴 때를 두고 술이 당긴다고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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