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5. 회색 여우 (19/33)

외전 5. 회색 여우

“후우…….”

긴장한 낯으로 다시금 제 모습을 점검했다. 구김 하나 없이 각 잡혀 다려진 암녹색의 특전사 정복, 새하얀 셔츠와 비뚤어짐 하나 없는 검정 넥타이, 그리고 단정하게 모양새를 잡은 검정 베레모. 빈틈없는 모양새에 조금 안도했다.

손에 들린 쇼핑백 속 값비싼 고급 양주를 힐끔 내려다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니만큼 마음에 들길 바랐다.

한 번 더 심호흡한 후, 결연한 표정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조금 기다리자, 초인종 옆 스피커에서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다. 부인은 작년에 러시아에서 변을 당해 사망했다고 들었으니,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일 거다. 애처가라고 소문이 날 만큼 부인을 열렬히 사랑하던 사람이니 그새 새 부인을 들였을 리도 없다.

“서유건 중사입니다. 사령관님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사적인 자리에서 만날 강천우 특전사령관을 떠올리니 한층 긴장된다.

-에구, 지금 집에 안 계시는데 어쩌죠?

유건이 당황하며 다급히 물었다.

“어디 가셨습니까? 오늘 자택에 계실 거라고 들었는데요.”

-1시간 전쯤에 도련님하고 같이 체육관 가신다고 나가셨어요. 한발 늦으셨네.

유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늦게 본 아들이 있다고 했던가.

“혹시 그 체육관 위치 좀 알 수 있습니까?”

-가까워요. 요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체육관 간판 내건 곳 있으니 거기로 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유건은 얼른 인사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렇게 찾아가는 게 실례일 수도 있지만, 강천우 특전사령관이 직접 보자고 말해 왔던 만큼 빨리 그를 만나고 싶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이가 특별히 휴가까지 맞춰 자택에 초대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긴 했지만, 그보다도 그가 자신을 직접 초대했다는 게 더 중요했다.

유건은 묵직한 쇼핑백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을 느끼며, 얼른 체육관으로 향했다.

가정부의 말대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자 체육관 간판이 걸린 2층 계단을 발견했다. 시끄러운 당구장 건물 바로 위층이 체육관인 모양이었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마자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하앗-!”

어린 목소리였지만 기백이 상당했다.

문을 닫으며 내부를 훑었다. 곳곳에 매트가 깔려 있고, 한쪽 구석에는 갖은 운동기구와 샌드백이 걸려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권투나 레슬링을 할 수 있는 링이 있었는데, 그 링 중 한 곳에 두 남자가 대련을 하고 있었다.

“우앗!”

아까 기합 소리를 냈던 이가 링 위에 서 있는 두 명 중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나 보다. 상대의 노련한 기술에 당해 빠르게 엎어진 그가 짧게 놀란 소리를 내었다.

“아직 한참 멀었어.”

상대가 낮게 웃으며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픈 등을 매만지며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난 소년이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유건은 그 소년의 얼굴을 보며 일순 멈칫했다.

소년은 어딜 봐도 한국인이 아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진회색 머리카락, 그와 어울리는 어두운 회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그러다 하얀 대리석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미형의 얼굴이 눈을 어지럽히고, 꽤 늘씬하고 훤칠한 몸매가 그 황홀한 외견을 완성해 눈에 박혀 들어왔다.

저렇게 넋을 놓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자신과 같은 남자에 10대 후반의 어린애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성별과 관계없이 그저 아름다웠다. 유건이 얼굴을 붉히고 넋을 놓을 정도로.

‘사람 맞아?’

그런 황당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멍하니 입구에 서 있는데, 그 어두운 회색 눈동자가 유건을 바라보았다. 뾰로통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경계심을 담은 싸늘한 눈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 댔다.

소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리던 그의 상대가 유건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사람 좋게 웃는 낯으로 알은체를 했다.

“서유건 중사, 어서 오게.”

강천우의 반가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유건이 그에게 얼른 거수경례를 해 보였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이쪽에 계신다고 해서…….”

“미안하네. 내가 시간을 착각한 모양이야.”

인자한 미소를 띠며 그가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유건이 경례했던 팔을 내리고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강천우는 얇은 면티에 편한 추리닝을 입은 차림이었는데, 언제나 군복 아니면 정복을 갖춰 입고 한껏 위압감을 뽐내던 모습만 봤던 터라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땀에 젖은 얇은 면티가 달라붙어 강천우의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50대 초반이지만 한껏 좋은 근육을 갖춘 터라 그 나이대 특유의 뱃살이나 살뿐인 자리가 없어 보기 좋았다.

거기다 카리스마 넘치는 차가운 얼굴이 아닌 따뜻하고 인자한 얼굴이라니. 강천우의 새로운 모습에 유건은 가슴까지 두근거릴 정도였다.

강천우는 유건에게 자기 앞에 서 있는 회색 머리 소년을 소개했다.

“처음 보지? 내 아들 칼이라고 하네.”

유건은 그제야 강천우에게 러시아 국적을 가진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꽤 늦은 결혼 때문에 출산이 늦긴 했지만, 올해로 얼핏 15세가 된다고 들었던 듯하다. 그의 부인이 러시아인에 상당한 미인이라는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다.

새삼 소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혼혈이라서 그런 걸까. 범접할 수 없는 미모가 보는 이의 시선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미모에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유건이 씩 웃어 보이며 링 위의 칼과 시선을 마주했다.

“서유건이라고 해. 반갑다.”

칼은 대답 없이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를 평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동자가 다소 예리하게 빛나고 있다.

“……당신 싸움 잘해?”

능숙한 한국어와 유려한 발음에 놀란 것도 잠시, 유건이 강천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이 녀석이 워낙 무술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네. 사실 자네에게 들러 달라고 부탁한 게 이 녀석 때문이거든.”

유건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강천우가 링에 팔을 기대며 링 밖의 유건에게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 녀석이 하도 나 말고 다른 사람과 대련하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자기 엄마 닮아서 어찌나 고집이 센지 몰라.”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유건은 강천우의 이런 모습이 생소하기도 하고, 말투에 워낙 장난기가 가득해 살짝 웃고 말았다.

“싸움 잘하냐고.”

대답을 해 주지 않자 칼이라고 불린 소년이 팔짱을 끼고서 시건방지게 다시 물어왔다.

“말하는 꼬라지 봐라. 아빠가 말 그런 식으로 하면 밉보인다고 했지?”

짐짓 엄하게 말했지만, 칼은 강천우의 말도 듣지 않고 유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천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유건을 보았다.

“미안하네. 아직 존댓말을 잘 못 써서 말이야.”

저렇게 한국어가 유창한데 과연?

유건은 팔이 안으로 굽은 것 같은 강천우를 보며 새삼 그 역시 한 명의 ‘아버지’라는 것을 느꼈다.

유건은 강천우에게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이번엔 웃는 낯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유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령관님만큼은 아니지만, 몸은 꽤 쓸 줄 알아.”

강천우는 군대 내에서도 맨몸으로 맞붙으면 절대 이길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유건도 우연한 기회에 그와 대련을 한 적이 있었지만, 삽시간에 나가떨어져 허탈하기만 했었다.

그래도 나름 오래도록 갖은 무술을 배워 왔고 그 실력은 특전사 부대 내에서도 발군이었다.

“그럼 한판 붙어 줘.”

그러한 유건이었으니, 무려 9살 차이의 어린애가 저리 자신 있게 말한다 해도 주눅이 들 리 없었다. 허락을 구하듯 강천우를 바라보니, 그가 미안한 듯 웃었다.

“괜찮으면 이 녀석과 한번 붙어 봐 주겠나? 자기 실력이 가늠이 안 된다고 해서 말이지.”

극한의 강함을 가진 강천우와 맞붙으니 자신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유건은 양주가 들어 있는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강천우가 유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링에서 내려왔다. 유건은 그가 두드린 어깨에 손을 살짝 얹고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 칼과 눈이 마주쳐, 다시금 그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뭔가 심기를 건드린 걸까. 칼이 미간을 찌푸려 눈을 흘기고는 링 끝에 가서 섰다.

유건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고 있던 정복 재킷을 벗어 행어에 걸었다. 풀어낸 넥타이도 함께 걸어 놓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는 와중에도 따가운 시선은 계속 따라붙었다.

링 위에 올라가자 칼의 따가운 시선은 한층 기세를 더해 갔다. 그러면서도 정복 안에 감춰져 있던 상체 라인을 눈여겨보며 바짝 경계한다.

팔짱을 풀고 자세를 잡은 칼이 유건과 대치했다. 링 아래에 서서 느긋한 얼굴로 구경 중인 강천우를 힐끗 본 유건이 간단히 허리를 돌리고 팔을 이리저리 꺾어 스트레칭을 했다.

“얼굴 가격은 금지. 승패는 어떻게 할래?”

여유로운 유건의 말에 칼이 미간을 찌푸렸다.

“등이 먼저 땅에 닿는 사람이 지는 거로.”

“그래. 바로 시작할까?”

싱긋 웃으며 말하자마자 칼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휘두른 것은 다리였다. 칼의 긴 다리가 유건의 옆구리를 노리며 휘둘러졌다. 제법 단조로운 공격에 유건이 그것을 무리 없이 팔로 막았고, 다른 손으로 그의 발목을 잡아 크게 한 바퀴를 돌렸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칼의 가벼운 몸이 허공에 뜬 채로 다리와 함께 공중회전을 했다.

칼은 유연하게도 등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반대쪽 다리로 바닥을 밟고 무릎을 굽혔다. 곧바로 무릎을 펴며 그 반동으로 몸을 한 번 더 띄워 유건의 복부를 차 버렸다. 알아채서 뒤로 몸을 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을 정도의 굉장한 위력이었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몸을 뒤로 빼느라, 칼의 다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바닥을 손으로 짚어 얼른 일어난 칼이 전광석화처럼 유건에게 달려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유건이 몸을 추스르자마자 그의 명치에 주먹이 꽂혀 들었다. 유건이 재빨리 한 손으로 막지 않았다면 제대로 명치를 맞았을 것이다.

‘무시무시한데.’

어린애답지 않은 기백에 빠른 속도, 막은 손이 저릿할 정도의 강한 힘, 거기다 숙달된 몸놀림까지. 과연 강천우의 아들답다 싶었다.

옆을 힐끗 보니, 흐뭇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는 강천우가 보였다. 분명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성장을 기분 좋게 바라보는 것일 텐데, 왜 질투가 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일찍이 돌아가신 제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일까.

유건은 제 앞에서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는 칼을 보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냈다.

‘사령관님이 보고 계시는데 역시 허투루 할 수는 없지.’

존경해 마지않는 특전사령관 강천우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응대해야 하나 망설였는데, 이제 좀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렁설렁 봐주면서 했다가는 강천우가 금세 알아챌 테지만, 그보다도 상대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에 호승심이 생기기도 했다.

‘제대로 상대해 볼까.’

순간 유건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유건은 칼의 주먹을 한 손으로 그러쥐고서 그 팔을 뒤로 홱 빼 버렸다. 당연히 칼의 몸이 앞으로 쏠려 따라왔고, 유건은 그의 하얀 목을 한 손으로 콱 붙잡았다.

“큭!”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칼이 놀란 눈을 하며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유건은 그의 허리 벨트와 목을 붙잡아 허공에 붕 띄웠다. 그러고선 레슬링 기술처럼 그 몸을 등부터 떨어지도록 해서 바닥에 내리꽂았다.

“우앗-!”

칼의 입에서 놀란 비명이 터지고, 그가 눈을 꾹 감았다. 곧 닥쳐 올 등과 머리의 큰 충격을 상상하며 이까지 악물었다.

하지만 정작 바닥에 닿기 직전, 그의 목을 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가 뒷머리를 받쳤다. 그렇게 머리가 먼저 뭔가에 살짝 부딪치는 느낌이 들더니, 그 허리가 덜컥 멈췄다. 살짝 눈을 떠서 허리 쪽을 내려다보니, 유건이 벨트를 잡아 든 채 칼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칼은 유건 덕분에 등이 바닥에 닿지 않은 채였다.

“뭐야, 봐주는 거야?”

순간적으로 욱한 칼이 표독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유건이 씩 웃으며 그대로 벨트를 놓았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등과 엉덩이가 바닥에 쿵 닿았다.

“윽!”

비록 제대로 기술을 당한 것보다야 훨씬 덜 아팠지만, 그래도 짧게 신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유건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칼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단지 아직 성장기의 어린애인데 너무 험하게 하면 안 되잖아.”

“그게 봐주는 거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은 칼이 분한 얼굴로 유건을 노려보았다.

“한 번 더 해!”

예쁘게 위로 치켜뜬 눈이 의외로 귀엽다고 생각한 유건이 고개를 돌려 강천우를 보았다. 그는 흥미진진한 시합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네만 괜찮다면 몇 번 더 어울려 줄 수 있겠나?”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다치기라도 하면…….”

“보기보다 튼튼한 녀석이니 걱정하지 말게.”

강천우가 작게 웃으며 칼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부탁 좀 하지.”

‘저게 즐거워하는 얼굴인가?’

유건 눈에는 칼이 그저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뜬 거로 보였지만, 아버지인 강천우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몸을 일으킨 칼이 다가와 유건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번엔 안 져. 다시 해.”

유건은 칼의 치뜬 눈을 보며 자꾸만 뭔가 생각나려 했다.

‘뭘 닮은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와중에도 칼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꾸만 한 판 더 붙자고 떼를 쓰고 있었다.

*  *  *

“악!”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미 셔츠 단추를 2개나 풀어 놓고 소매는 위쪽 팔뚝까지 걷어붙인 상태였다. 땀에 젖은 와이셔츠가 자꾸만 몸에 달라붙어서 찝찝했다.

앞머리를 시원하게 쓸어 올린 유건이 바닥을 뒹굴며 허리에 손을 대고 있는 칼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그만할까?”

“싫어!”

칼이 얼른 상체를 일으키며 인상을 썼다. 분명 격렬하게 움직인 건 둘 다인데 어째 칼은 땀도 잘 흘리지 않았다. 원래 땀이 별로 없는 체질인지, 그리 움직여 놓고 얼굴에 이슬 좀 맺힌 게 전부다.

‘부럽네.’

남자의 얼굴에 맺힌 땀이 이슬처럼 보이긴 또 처음이다. 이래서 혼혈들이 그리 예쁘다고 하나 보다.

유건이 한숨을 내쉬는 찰나, 바닥에 두 팔을 짚은 칼이 유건의 다리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방심하고 있다가 그 발에 걸려 허공에 살짝 뜬 유건의 몸이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안 되지, 안 돼.’

바짝 긴장하며 얼른 몸을 틀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그 반동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유건이 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건이라면 그 등이 땅에 닿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 이미 일어나 있던 칼이 그의 무릎 뒤를 노려 발차기를 했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다리가 휘청였다. 그 틈을 타 칼의 다른 쪽 다리가 유건의 목을 노렸다.

‘위험해!’

몸의 자세가 무너지던 찰나의 공격이었지만 목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칼의 다리를 잡아챘다. 그 순간 칼이 몸을 반대로 홱 돌려, 바닥을 밟고 있던 다리로 유건의 목덜미를 노렸다. 유건이 팔을 어깨 뒤로 접듯이 꺾어 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갈수록 공격이 다양해지고 예리해진다.

허공에 뜬 몸의 상체가 바닥에 닿기 직전, 칼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다리를 비보이들의 윈드밀처럼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그 바람에 잡혀 있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칼은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긴장 하나 풀지 않은 칼은 특유의 어두운 회색 눈동자를 빛내더니만 몸을 낮춰 유건에게 달려들었다. 칼이 제 허리를 붙잡아 넘어뜨리려는 것을 알아챈 유건이 얼른 옆으로 피했다. 그러고선 칼의 허리 벨트를 위에서부터 두 손으로 붙잡아 바닥에 패대기치듯 돌려 떨어뜨렸다. 그 순간 칼이 유건의 목에 제 팔을 두르고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윽!”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칼의 등이 바닥에 아프게 떨어지고, 그 위로 유건의 묵직한 몸이 그를 짓눌렀다.

“미안, 괜찮아?!”

유건이 화들짝 놀라서 칼의 얼굴 좌우 바닥을 손으로 짚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껏 찡그리고 있던 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유건의 당황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우와…….’

순수하게 감탄했다. 바로 눈앞에서 내려다본 칼의 얼굴은 제 시선을 잡아끌어 놓아주질 않았고, 그의 올라간 입꼬리는 같은 남자임에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홀린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던가.

유건이 넋을 놓은 찰나, 그의 허리를 감고 있던 칼의 다리가 한층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칼이 유건의 오른팔을 한 손으로 붙잡고 안쪽 팔꿈치를 다른 손으로 빠르게 가격했다. 방심하던 차였기에 유건의 오른팔이 맥없이 구부러져 오른 팔꿈치가 바닥에 닿았다.

칼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가 세게 반동을 주어 몸을 왼쪽으로 굴렸다. 그에게 단단히 옭매인 유건의 몸이 반 바퀴 굴러 바닥에 닿았다. 유건과 칼의 몸이 순식간에 반전된 꼴이 되었다.

“……엇?!”

자기가 당해 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사람 얼굴에 홀려 역공당할 줄이야.

유건의 몸 위에 올라타 있던 칼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이겼어.”

유건은 순간 칼의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치는 줄 알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쳐지니 넋을 놓기 싫어도 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구미호냐.’

홀리긴 더럽게 홀려요.

옛 설화 속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수십 번의 짧은 대련 끝에 겨우 한 번 이긴 것이었지만, 칼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굉장히 좋은 모양이었다.

유건의 몸에 올라탄 채로 칼이 고개를 돌려 강천우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봤어?”

“봤어, 봤어. 우리 아들 장하네.”

“애 취급하지 말고. 기술 어땠냐고.”

“기술은 모르겠고 미인계 하나는 타고 났어. 역시 내 마누라 아들이야.”

“누가 미인계를 썼다고 그래?!”

칼이 잔뜩 심통 난 얼굴을 하며 유건의 몸에서 내려왔다. 어른스러워 보여도 역시 아직 사춘기 어린애라는 생각을 하며 유건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그의 앞으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유건은 제게 내민 손과 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칼이 시선을 돌리며 손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일어나서 한 판 더 해. 아버지가 미인계가 어쩌고 해서 안 되겠어.”

옆에서 강천우가 달래듯 말을 걸었다.

“칼, 슬슬 돌아가야지.”

“제대로 한 번 더 이기기 전까진 안 가.”

단호하게 말하며 유건을 내려다보았다. 칼의 눈이 길고 예쁘게 휘었다.

“당신도 협조 좀 해 줘.”

유건이 웃는 낯으로 칼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지 뭐.”

칼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자리 잡았고, 유건이 그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당신 이름이 뭐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유건이 키득거리며 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과 비슷한 신장의 칼이었지만 얼굴은 한참 어려 보였다.

“서유건. 그냥 형이라고 불러.”

장난기를 섞어 말했지만, 칼은 의외로 순순히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주었다.

“좋아, 유건이 형. 한 번 더 해. 이번엔 꼭 제대로 이길 거야.”

이름을 부르게 되면서 친근감이라도 생긴 걸까. 칼이 꽤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잡았다. 그 눈이 또 한 번 휘어진다.

‘그만 좀 웃어.’

심장 고장 나겠어.

하여간 홀리기는 엄청 홀려 댄다.

‘완전 여우네, 여우.’

유건의 머릿속에 꼬리 아홉 달린 회색 여우가 요염하게 자리 잡았다. 그 유혹적인 구미호의 얼굴과 칼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 여우는 홀릴 듯한 어두운 회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여우에게 제대로 홀려 버린 유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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