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Actor/Ready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될 것도 안 된다 하던가.
특히나 저렇게 둔탁한 무기까지 든 덩치들 사이를 뚫어야 한다면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만큼 탁월한 자살 행위도 없을 것이다.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단단한 콘크리트 기둥에 몸을 숨기고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5명의 건장한 남자들은 바짝 경계하며 점점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숨어 있을 수도 없지만, 애당초 숨는 게 능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무실 한가운데 있는 기둥에 몸을 숨긴 채 바닥에 흩어져 있는 큼직한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검은 복면과 단출한 검정 캡을 푹 눌러쓴 제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손바닥보다 큰 그것으로 슬쩍 기둥 뒤를 비추었다.
유리에 비친 인물 크기로 가늠한 그들과의 거리는 고작 3m.
유리를 바닥에 내려놓고서 뒤로 손을 뻗어 메고 있던 백팩의 옆구리를 잡았다. 손에 잡힌 지퍼 고리를 붙잡아 내리고서 그 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단단하고 동그란 무언가가 잡혔다. 손아귀에 딱 들어가는 그것을 잡아서 그 가운데 튀어나온 버튼 같은 것을 엄지로 깊이 누른 후, 기둥 뒤로 데굴 굴려 보냈다.
동그래서 그런지 잘도 굴러간다.
그들이 멈칫하는 순간, 남자들에게로 빠르게 굴러가던 그것의 버튼이 들어간 부분에서부터 뿌연 연기가 왈칵 터져 나왔다. 남자들이 당황하며 그것을 잡아 들으려 했지만, 동그란 연막탄은 연기 속으로 굴러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연기가 자욱한 탓에 남자들은 가까이 있는 서로의 실루엣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매캐한 연기는 아니어서 얼굴을 가리거나 콜록거리진 않았지만, 서로의 모습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움직이려면 지금이다.
몸을 숙여 뛰쳐나와 남자들에게로 달려들었다. 무기라고는 고작 가죽 재질 반장갑을 낀 두 손뿐이었지만, 연막탄에 당황한 그들을 상대하기에는 맨손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곧바로 달려들어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실루엣의 손목을 붙잡아 등 뒤로 홱 꺾었다. 그 바람에 손에 쥐고 있던 쇠 파이프가 바닥에 떨어져 듣기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었고, 다른 남자들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남자가 사정없이 꺾인 팔의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숙였다. 그 너머로 다른 남자의 검은 실루엣이 다가서 있는 게 보였다. 팔을 꺾고 있던 남자의 몸을 두 팔로 꾹 눌러 거의 직각에 가깝게 숙이도록 했다.
꺾어져 등에 바짝 붙어 있던 팔을 한 손으로 꾹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등을 짚어 몸을 띄웠다. 두 팔에 체중을 실은 채, 등을 짚었던 팔을 빙글 돌려 허공에 뜬 제 몸을 비틀었다. 그 상태로 허리와 다리에 힘을 주어 횡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가까이 다가온 다른 남자의 얼굴에 그 발차기가 정확히 맞아 들었다.
“헉-!”
남자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옆으로 넘어져 쓰러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 착지하자마자 몸을 숙였다. 다른 남자가 휘두른 쇠 파이프가 머리 위를 훅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얼핏 보였던 실루엣이 연기를 가르는 것을 일찍 알아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머리의 일부가 찌그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팔을 꺾어 붙잡고 있던 남자의 얼굴 부분을 무릎으로 차올려 넘어뜨렸다. 그대로 몸을 바닥에 바짝 숙여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후, 제게 쇠 파이프로 공격했던 남자의 발목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다음 공격을 시도하려던 남자가 불시에 공격당해 쓰러졌다.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크억!”
연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눈을 부릅떴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거다.
“야압-!”
등 뒤에서 들려온 우렁찬 기합에 놀라 주저앉은 채 바닥을 굴러 옆으로 피했다. 곧바로 깡- 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파이진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로 귀를 아프게 하는 소리였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한 번 더 굴러 거리를 벌린 뒤에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연기 때문에 아군인지 적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어 주춤하던 그 찰나를 노려 어깨를 이용해 몸통 박치기를 했다. 상대와 체급 차이가 상당했던지라 그는 뒤로 한발 물러나기만 할 뿐, 즉시 쇠 파이프를 휘둘러 반격을 꾀했다.
얼른 몸을 옆으로 90도 돌리자 서슬 퍼런 쇠 파이프가 제 눈앞을 갈랐다. 허공에서 그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남자가 당황한 그 순간, 백팩을 멘 등을 그의 가슴팍에 딱 붙이고서 허리를 훅 숙였다. 헤비급에 달하는 남자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깔끔하게 엎어치기를 당했다. 하필 그 아래에 있던 게 아까 발차기에 차여 쓰러졌다가 이제 막 일어나려던 남자다.
“악!”
“컥-!”
두 남자가 십자가처럼 겹쳐졌다. 그 몰골을 보며 고개를 돌리던 그때.
“흡!”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서 있던 남자가 사무실 안에 있던 묵직한 의자를 두 손으로 들어 등을 후려갈긴 것이다.
백팩 덕분에 그나마 큰 부상은 피했지만, 충격 때문에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엎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려는데,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운 채로 바닥을 두어 번 굴러 옆으로 빠져나오니, 그 자리에 조금 전 제 등을 때렸던 의자가 내리쳐졌다. 쇠로 되어 있어 그런지 강한 힘에도 어디 하나 부러지는 다리가 없다.
몸을 벌떡 일으키자마자 의자가 얼굴을 향해 휘둘러졌다. 위압감은 대단했지만, 무게 때문에 동작이 커서 피하기는 쉬웠다.
연달아 휘둘러지는 의자를 아슬아슬 피해 내다가 옆으로 휙 돌아, 의자를 잡고 있던 남자의 팔꿈치를 발끝으로 퍽 때렸다. 남자가 짧게 악 소리를 내며 묵직한 의자를 떨어뜨렸다. 발판부터 바르게 떨어진 의자의 팔걸이를 잡고서 그것을 지지대 삼아 뒤돌려 차기를 먹였다. 가슴팍을 맞은 남자가 크게 비틀거리긴 했으나 나가떨어지진 않았다.
의자에 털썩 앉아 팔걸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쪽으로 달려드는 남자의 가슴팍을 한 번 더 노려 두 다리를 바르게 모아 거세게 찼다. 남자가 가슴팍을 손으로 짚으며 몸을 웅크리고, 이쪽은 반동 때문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쭉 밀려 나갔다. 맷집 좋은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뒤돌려 차기를 시도했으나, 남자가 두 팔을 들어 타이밍 좋게 막아 냈다. 그럴 걸 예상한 것처럼 곧바로 의자 뒤로 돌아가 그것을 발로 밀어 남자의 앞길을 막았다. 그가 주춤한 사이, 연기 속에서 실루엣 둘이 보였다. 쓰러져 있던 이들 중 둘이 몸을 추슬러 공격해 오려는 모양이다.
훈련받은 저들을 완벽히 제압하고 당당히 정문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연기도 곳곳에 열린 창문으로 인해 벌써 옅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그 순간, 몸을 돌려 곧바로 내달렸다.
남자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달려가는 방향이 입구와는 정반대이자, 고층 빌딩의 통유리 부분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기를 뚫고 내달려 바로 눈앞에 통유리가 보인 순간, 몸을 홱 돌리고 허리춤에 달려 있던 단단한 갈고리 모양의 와이어를 손으로 길게 뽑아내었다. 그러고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듯 웅크려 바닥을 박찼다.
쨍강-!
달려가던 가속도와 무게 실린 점프가 함께 맞물려 단박에 통유리를 박살 내 버렸다. 튀어나간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직전, 손에 쥐었던 갈고리를 던지듯 휘둘렀다. 통유리 근처의 얇은 기둥에 그것이 두어 번 감기더니, 고리까지 얽혀 제법 단단하게 묶여 버렸다.
두 손으로 허리의 와이어를 꽉 붙잡은 채 곧바로 아래로 추락했다.
고작 1초.
두 다리가 바닥에 닿기까지 걸린 추락 시간이었다.
푹신한 녹색 매트에 두 발을 대고 반듯하게 서자, 곧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컷! 오케이!”
그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무표정하던 얼굴에 온기가 돌았다. 눈가를 휘어 웃는 낯을 한 채 좌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연신 인사를 건네자, 눈이 마주친 사람마다 수고했다며 웃어 준다. 그러는 사이 2명의 청년 스태프가 다가와 허리에 연결되어 있던 와이어를 풀어 주고 등에 멘 백팩을 벗겨 주었다.
“아까 안 다쳤어요?”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2층 높이의 세트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주변을 감싼 선명한 그린 스크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다음에서야 조금 전 깨뜨렸던 통유리가 보였다.
깨진 통유리 사이로, 아까 의자로 등을 후려갈겼던 남자가 잔뜩 미안한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맞을 때 당시에 충격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백팩에 일부러 쿠션이 될 만한 천을 도톰하게 넣어 둔 덕분에 다친 곳 하나 없었다.
“멀쩡합니다.”
웃으면서 대답하니,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의 옆에 있던 검은 정장의 다른 남자들도 덩달아 안도한 얼굴을 했다.
“더 찍어 볼 것도 없겠어. 아주 만족스러워.”
가까이 다가온 중년 남자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감독님이 만족하실 만한 샷이 나왔다니 다행입니다.”
“모든 액션을 스턴트맨 없이 하겠다기에 정말 괜찮은 건가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전직 스턴트맨 출신이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나 액션을 잘 소화해 낼 줄은 몰랐다. 겉보기엔 간단한 액션 하나 구현할 수 없을 정도로 늘씬하고 유약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더니, 왠지 그 떠들썩함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이번 영화의 액션으로 극장가를 한바탕 뒤집어엎을 기세다.
‘레이먼드 윌슨 감독이 그리도 칭찬했다던데, 뜬소문은 아닌가 보군.’
예전에 칸 영화제 시상식에서 봤던 무시무시한 눈빛의 외국인 노장을 떠올려 보았다.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유명 감독 레이먼드 윌슨이 영화 <12>를 구성하는 단편 <페르소나>를 접한 것은 우연이었다.
촬영 도중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꽤 입지가 있는 톱배우이자 레이먼드 윌슨의 영화 주연인 이진환의 숙소에 들렀을 때, 마침 그가 DVD로 시청 중이던 영화가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해리성 인격 장애를 알게 되는 인물의 전과 후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보인 젊은 배우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배우 이진환이 맡은 주연 ‘유재한’의 동생 ‘유은호’가 급하게 추가되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주연들이 비교되겠네.’
결코 주연들의 연기가 모자라거나 임팩트가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저 신인 배우가 주연들마저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는 말이었다. 특히나 액션 느와르 영화이다 보니, 액션이 한몫한 것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감독은 밝은 얼굴의 신인 배우를 보며 그를 캐스팅하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 * *
촬영이 끝나고 공손히 인사를 돌리고 나자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한꺼번에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2월의 찬바람이 쌩쌩 불어 대서 얼굴이 시릴 지경이다.
서늘해진 손으로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며 익숙한 흰색 밴에 다가가자, 운전석에서 내린 인상 좋은 청년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수고하셨어요, 은율 씨. 히터 틀어 놨으니까 어서 들어가죠.”
싱긋 웃어 보이며 손수 밴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은율이 마주 웃어 주며 밴에 올라탔다.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진 밴에 몸을 실으니 차갑게 굳어 가던 몸이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매니저 안승주가 코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건네었다. 그것은 따뜻하게 데워진 핫 팩과 뜨끈한 캔 커피였다. 은율의 촬영이 끝날 때를 맞춰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온 참이다.
승주는 은율에게 그 두 가지를 쥐여 주고도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은율의 옆 의자에 올려 두었던 도톰한 무릎 담요를 집어 들어 그의 다리를 덮어 주었다. 아직 이런 대우가 익숙하지 않던 은율은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고마워했다.
“고맙습니다. 승주 형이 너무 고생하시네요.”
“무슨 소리예요. 내 배우는 내가 챙겨야죠.”
이전에 꽤 많은 배우의 매니저를 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챙기는 게 몸에 밴 걸까. 아니면 모든 매니저가 이렇게 살뜰한 걸까.
승주는 은율의 낯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조만간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오프라도 받아야겠네요. 이러다 쓰러지겠어요.”
“괜찮습니다. 아픈 곳도 없고 컨디션도 좋아요.”
피곤하긴 했지만,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잠이 조금 모자라긴 해도 아주 건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승주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누적돼서 쓰러지는 배우들 여럿 봤어요. 은율 씨 쓰러지면 사장님한테 저 죽어요. 알죠?”
은율은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의 안달 난 모습을 상상하며 멋쩍게 웃었다. 자신이 원해서 일을 계속 잡아 주고는 있지만, 그도 얼마나 걱정하던가. 무리하지 말라는 걱정 어린 전화를 받는 것도 이젠 일상이 되었다.
운전석에 올라탄 승주는 곧바로 차를 몰았다. 그러면서도 룸미러로 은율을 힐끔거리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은율은 그가 주었던 캔 커피를 따서 입에 한 모금을 머금었다. 알맞게 따뜻하면서도 설탕 하나 들어 있지 않은 쌉싸름한 커피가 맘에 들었는지,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걸 보며 승주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어윈드>는 개봉이 언제라고 했죠?”
승주의 물음에 은율이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아마 아직 반년은 더 있어야 할 거예요. CG작업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하긴, SF 블록버스터니 그럴 만도 하네요.”
<에어윈드>를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많이 떨리겠어요.”
승주가 은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떨리지 않는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단편 영화 <페르소나>를 통해 정극 연기를 처음 시도해 봤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독립 영화였다. 거기다 히트를 하긴 했으나 상영관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어윈드>는 다르다. 상영관에 단독으로 걸리는 장편 영화이자 명백한 상업 영화다. 비록 맡았던 캐릭터의 비중이 크진 않았어도 전 세계에 동시 개봉되는 블록버스터 대작인 만큼, 걱정 반 기대 반일 수밖에 없다. 대중들의 반응도 신경 쓰였고, 스크린에 비칠 자신의 모습도 궁금했다.
개봉까지 반년 가까이 남았음에도 벌써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는다.
그때, 은율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그가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서 작게 웃었다.
“네, 사장님.”
-딱딱해. 그냥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건너편에서 나이에 맞지 않는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되잖습니까.”
세간에는 은율이 그의 소속사 K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칼바노아 알리예프와 먼 친척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섣부른 ‘아빠’ 호칭은 쓸 수가 없다.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쉰 칼이 돌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 좀 있니?
“아, 잠시만요.”
은율이 룸미러로 이쪽을 보고 있던 승주와 시선을 맞췄다.
“승주 씨, 다음 스케줄이 몇 시죠?”
“일곱 시에 잡지 ‘Pride’의 인터뷰가 있어요.”
휴대폰 액정에 뜬 시간을 체크했다. 고작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중간에 시간을 내기는 역시 어려울 듯하다.
“인터뷰는 아마 한 시간쯤 걸릴 거예요. 오늘은 그게 마지막이고요.”
비록 내일 이른 아침에 또 촬영이 있지만 말이다.
“바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곱 시 인터뷰 스케줄이 마지막이라는데, 끝나고 들를까요?”
-그래. 끝나면 바로 와.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해진다. 어떤 소식이냐고 물으니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질 않았다.
칼이 말하는 좋아할 만한 소식이 대체 뭘까?
* * *
“그게 정말입니까?!”
칼은 은율의 커다래진 눈동자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은율은 제 손에 들린 시나리오 제본을 내려다보며 잔뜩 기대 어린 얼굴을 했다. 그 책자에는 이라는 제목이 필기체처럼 휘갈겨져 있었다.
“진환 씨는 이미 하겠다고 했어.”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한 달 전쯤이었던가. 진환은 한중 합작 드라마의 촬영 때문에 한동안 중국에 가 있는 상태였다. <에어윈드>의 촬영 이후, 레이먼드 윌슨 감독의 여파 덕분인지 진환을 향한 해외 러브콜은 도통 끊이질 않았다.
한 달 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진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진환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다니,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
“그래도 배역이 좀 걱정되긴 해.”
칼이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채 걱정 어린 눈을 했다.
“읽어 봤는데, 주연이긴 해도 악역이야. 아직 아무 이미지도 구축되지 않은 시점에, 이건 자칫 독이 될 수도 있어.”
어떠한 이미지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지금, 악역을 맡아 활약하면 오히려 그 이미지가 뿌리 깊게 남아 버릴 수가 있다. 그러다 비슷한 역할만 줄줄이 들어오면 결국 그 이미지가 대표 격이 되어 사람들 뇌리에 각인될 거다.
특히나 내용을 훑어보니, 이건 꽤나 강렬한 악역이다. 하지만 은율이 그런 이유로 이만한 기회를 차 버릴 것 같진 않았다.
은율은 시나리오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환이 형이 하겠다고 할 정도면 작품성은 확실한 것 같으니, 마음 편히 읽어 보겠습니다.”
“벌써 가려고?”
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은율을 막아섰다.
“좀 더 있다 가지.”
아쉬운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다. 다음 스케줄이 이른 아침이니 그 안에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벌써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다.
차마 매몰차게 밀어낼 수가 없어 머뭇거리는 은율을 보며 칼이 씁쓸하게 웃었다.
“알았어. 대신 조만간 아빠랑 식사라도 함께하자.”
“예,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은율이 밝게 웃어 보이며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칼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도 유명한 사람이고, 제작사도 믿을 만한 곳이다. 시나리오를 훑어보니 내용도 괜찮던데, 특히나 대립 구도의 두 주인공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의아한 것은, 그 두 주연 중에서 왜 하필 ‘악역’으로 은율을 캐스팅하려 하는가였다. 심지어 이진환에겐 별말 없더니만 은율을 꼭 쓰고 싶다고 구구절절한 러브콜까지 해 왔다.
‘악역이라…….’
은율이 악역이라고 해서 못 해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너무 잘할까 봐 걱정이다. 거기다 그렇게나 염원하던 이진환과 주연으로서 호흡을 맞추는 것이니만큼 대단한 연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마도 은율은 시나리오를 읽고서 금세 하겠다고 말해 올 거다.
과연 저 역할이 독이 될지, 아니면 신의 한 수가 될지…….
* * *
그야말로 밤을 새하얗게 불태웠다.
두 번에 걸쳐 깊이 읽어 본 결과, 이건 도저히 안 할 수가 없었다. 읽자마자 두 주인공에게 완전히 몰입해 버려, 당장이라도 역할 만들기에 돌입하고 싶었다.
애당초 선한 쪽의 주인공은 진환이 할 거라 생각하고 읽어서 그런지, 악한 쪽의 주인공에게 좀 더 감정 이입이 되었다.
장르는 스릴러물이었다. 악한 쪽 주인공 ‘이서우’는 3년간 주기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마였고, 선한 쪽 주인공 ‘강현태’는 그런 연쇄 살인마에게 남동생을 잃은 현직 강력반 형사였다.
일찍이 살인 충동이 있던 이서우는 주기적으로 사람을 죽여 왔다. 그러면서도 나름 철저한 편이라, 살인의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1년 전, 연쇄 살인마의 손에 남동생을 잃고 그 범인을 추적해 나가던 강현태는 최근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결정적 단서를 발견했다.
단서를 기반으로 한층 밀도 높은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선량해 보이는 의대 재학생 이서우를 만나게 된다. 남동생과 또래이면서도 웃는 모습까지 닮은 이서우가 자꾸만 눈에 밟히고, 그가 천애 고아로 홀로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를 친동생처럼 아끼기 시작했다. 반면에 이서우는 그에게 형이라 부르며 친밀하게 굴었지만, 그것은 자신을 추적하는 강현태의 동태를 가까이에서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어느 날, 근래 강현태가 이서우의 집에 자주 들르고 머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여자 친구 한주란이 찾아온다. 순간적으로 살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이서우는 그녀를 살해하게 되고,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처리한다.
실종된 한주란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강현태는 이내 그녀의 시신을 찾아낸다. 오열하던 그는 우연히 이서우가 범인임을 나타내는 물건을 발견하게 되고, 차마 동료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홀로 그를 찾아가 대치한다.
하늘에선 비가 쏟아지고,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건물 옥상에 서 있던 이서우는 태연한 낯으로 강현태를 맞이한다. 울부짖으며 왜 사람들을 죽였냐고 묻는 그에게, 이서우는 싸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있어 살인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 살인 역시, 자신에겐 당연한 거라고.
두 사람은 빗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이내 이서우의 칼이 강현태의 복부를 깊이 찔러 들어간다. 무기 없이 이서우를 붙잡으려 했던 강현태는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총을 꺼내 들었고, 그대로 발사한다. 쓰러지는 이서우의 차가운 얼굴에는 왜인지 미소가 감돌아 있다.
총에 맞은 이서우는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고, 강현태는 같은 병원에 입원해 거의 매일같이 그를 찾아간다. 의과 재학생인 데다가 여태껏 살인할 때 급소 외에는 손대지 않던 이서우가, 강현태를 찌를 때는 급소를 완벽히 피해서 찔렀다. 강현태는 깨어나지 않는 그에게 자신에겐 왜 그랬는지를 묻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경찰 동료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병실을 나서자, 굳게 닫혀 있던 이서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난다.
은율은 시나리오를 두 손에 든 채 침대에 널브러지듯 누웠다.
‘살인 충동이 있는 기분은 어떨까?’
주기적으로 살인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걸까.
앞부분만 봐서는 사이코패스라고 느꼈는데, 두 사람의 싸움과 마지막 장면을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복잡한 내면의 캐릭터라 연구를 깊이 해 봐야 할 듯싶다.
머릿속에 이서우라는 캐릭터를 상상하고 있던 그때, 침대 머리맡에 올려둔 은율의 휴대폰이 한 번 잘게 진동했다. 이 시간에 연락 올 곳이 없는데.
의아해하며 누운 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가 돌연 눈을 크게 뜨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자?]
단출한 메시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은율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답장을 보냈다.
[아직 안 자요. 촬영 끝났어요?]
촬영이 막바지라서 근래 들어 자주 연락을 나누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더 반가웠다.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 온다. 당황하긴 했지만, 곧바로 전화를 받아 귀에 대었다.
-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어?
아, 형이다.
진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은율이 눈을 사르르 감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바로 옆에서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시나리오 읽고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각 잡힌 존대가 나올 뻔했지만, 그래도 제법 익숙해진 덕인지 편안한 반존대가 흘러나왔다.
-이번에 들어온 거?
“네, 형도 한다고 들었어요.”
벌써 강현태의 캐릭터가 된 진환이 기대된다. 가까이 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붙잡아 앉혀 놓고 대사를 맞춰 보고 싶을 지경이다.
“나, 이서우 하고 싶어요.”
진환이 작게 웃었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복잡한 캐릭터 좋아하잖아.
“어……, 내가 그래요?”
본인도 모르는 걸 진환은 잘도 알고 있다.
-내면을 깊이 연구해야 하는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걸 또 잘 표현하지. 솔직히 놀랐어. 원래 사람 잘 보기로 유명한 감독인데 만나지도 않은 널 꿰뚫어 볼 줄이야.
칭찬에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이다.
“뭔가 민망하네요. 감독님 성에 안 차면 어떻게 하죠?”
-내가 보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거야 모를 일이죠.”
연기를 접하기 전에도 이번 의 감독을 맡은 이준수에 관한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어왔다.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찍는 족족 대박을 터뜨리는 젊은 감독인 데다, 흔한 소재도 그의 손을 타면 멋진 미장센을 가진 좋은 영화가 되었다. 그는 이미 충무로에서 알아주는 흥행 보증 수표나 다름없었다.
그런 감독과 함께 일하게 된다는 게 얼마나 감격할 만한 일인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필모그래피도 썰렁한 신인에게 이런 매력적인 주연을 내준다는 것 자체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귀한 기회를 받았는데 혹여 자신의 연기가 이준수 감독의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나 걱정부터 되었다.
-자신을 가져. 윌슨 감독님이 칭찬했던 거, 잊진 않았지?
엄격해 보이지만 카메라 밖에서는 한없이 인자하던 60대의 레이먼드 윌슨 감독을 떠올렸다. 그는 영화 촬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은율을 위해 조언과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개인 시간을 내어서까지 그를 찾아와 도와줄 정도였다. 은율에게 있어 그는 진환 다음가는 연기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윌슨 감독은 다른 것보다도, 은율의 유려한 발성과 표정 연기를 굉장히 칭찬했다. 거기다 캐릭터 분석력이 뛰어나, 윌슨 감독이 미처 캐치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심도 있게 표현해내 그를 몇 번이나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봤던 진환은 아무리 생각해도 은율이 이준수 감독 눈 밖에 나는 상황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형도 같이 있으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그 말이 가장 위안이 되었다. 은율은 불안해하던 심장이 평온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얼른 형하고 연기하고 싶어요.”
은율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워 웅크리고는, 그 위에 제 볼을 기대었다.
“빨리 와요. 보고 싶어 죽겠어.”
흔하지 않은 칭얼거림에 건너편의 진환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우리 율이 보고 싶어.
은율도 그와 닮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다른 방에 두 동생 하진과 지희가 자고 있지만, 혹시 몰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나긋하게 속삭이니, 건너편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의아해하는 순간, 그제야 진환의 안달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로 비행기 타면 어떻게든 한 시간 정도는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건너편에서 옷 쓸리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리자, 이에 질겁한 은율이 그를 극구 뜯어말렸다.
* * *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조연으로 활약했던 영화는 때마침 촬영이 끝났고, 미리 잡혀 있던 CF의 지방 로케와 장기 인터뷰도 모두 끝이 났다.
이제 신경 써야 하는 건 오로지 뿐이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라고는 해도 연예계에선 그저 신인일 뿐이었다. 처음에야 화제성 때문에 CF와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지금은 그냥 인지도 있는 신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표작으로 공개된 거라고는 단편 영화 <페르소나>와 BLESS의 뮤직비디오 뿐이니 연기력에 관해서도 지금은 매우 조용해진 편이었다.
쇄도하던 일감이 줄은 건 오히려 좋게 생각하고 있다. 오롯이 의 이서우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그걸 알고 칼이 일을 조정한 걸 수도 있다.
은율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본을 안고 밴에 올라탔다.
화창해진 봄철 날씨에 맞춰 옷차림도 간소해졌다. 가벼운 셔츠 차림에 얇은 간절기 재킷을 갖춰 입은 은율은 밴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대본을 펼쳐 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 승주는 그런 은율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가는 길에 연지 씨한테 들를게요.”
은율은 그가 말하는 ‘연지’라는 사람이 K엔터 소속 스타일리스트라는 것을 상기했다. 간단한 머리 손질이나 메이크업 등은 미용실에 들르지 않고 그녀의 손을 통해서 하곤 했다. 실력도 좋고 경력도 많아서 그녀에게 맡길 때면 은율도 한결 편안했다.
그런데 촬영도 아니고, 오늘 같은 날 굳이 케어를 받아야 하나 싶었다.
“그냥 대본 리딩 하러 가는 건데 연지 씨만 번거롭게 하는 거 아닐까요?”
“무슨 소리예요.”
승주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대본 리딩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배우들과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곳이라고요. 은율 씨가 기죽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힘주고 가야죠.”
다른 배우들의 매니저를 하면서 대본 리딩 현장을 꽤 많이 봐 왔던 승주였다. 단순한 대본 리딩이라고는 해도 모두가 한껏 힘을 주고 온다는 것쯤 익히 알고 있었다. 호흡을 맞추는 것도 맞지만, 서로의 연기력을 파악하고 견제하는 그런 자리이기도 했다. 어리숙하게 있다가는 그 자리에 모인 배우들에게 덥석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미용실까지 가서 호화롭게 꾸미다가는 겉멋으로 뻗대는 것처럼 보여 눈 밖에 날 수 있으니, 가볍게 손을 대는 정도가 적당했다. 몇 년에 걸쳐 매니저 일을 해 왔기에 그 정도 파악은 승주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은율은 이제까지 자신을 적절하고 살뜰하게 케어해 온 승주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아직 신인 티가 역력한지라 이럴 때는 그의 말을 듣는 게 정답이다.
얼마 가지 않아 한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엘리베이터 근처에 다가가니, 메이크업 박스를 든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30대 초반의 여인이 보였다. 밴을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은율은 여인을 위해 직접 밴의 문을 열어 주며 웃어 주었다.
“은율이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
밴에 올라탄 연지가 호들갑을 떨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며칠 만에 보는데도 어쩜 미모가 날이 갈수록 빛이 나네.”
매번 듣는 소리라서 손사래를 치지도 않고 가만히 웃어 주고만 있었다.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대어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을 시작했다. 메이크업은 원체 피부가 곱고 하얀 터라 별달리 크게 손댈 게 없어서 가볍게 마무리하고, 헤어 세팅에 주력했다. 뒷머리는 약간의 풍성함을 더하기 위해 롤 브러시와 무선 드라이기를 사용했다. 앞머리 쪽은 내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약간 웨이브를 주어 넘기고 젤을 발라 고정했다. 이마가 드러난 것뿐인데도 어린 티가 줄어들고 왠지 모를 카리스마까지 느껴졌다.
연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은율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도통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지 씨, 저희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얌전히 있던 승주가 은근슬쩍 바쁘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제야 연지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사진 한 장 찍으면 안 돼?”
“저희 바쁜데요.”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본 승주가 연지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불퉁한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한 장 정도는 괜찮잖아! 은율아, 한 장만!”
한소리하려는 승주를 만류하며 은율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가 K엔터 소속 스타일리스트라는 건 SNS에도 알려져 있었다. 같이 찍은 것도 아니고 독사진이라면 나름 괜찮지 않나 싶었다.
떠들썩하던 연지를 내려 주고 곧바로 대본 리딩을 위해 영화사 사무실을 찾았다. 미리 영화사 사무실의 지리를 익혀 둔 승주는 은율을 데리고 곧바로 대본 리딩실로 안내했다. 사무실 문에 붙은 <영화 Missing 대본 리딩 현장>이라 적힌 문구가 이상하게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약간 긴장한 은율을 보며 승주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긴장 풀어요. 대본 리딩 현장의 공기는 <에어윈드> 때가 더 심했을 테니까요.”
부정하진 못하겠다. 그 당시에는 진환이 곁에 있었다곤 하나,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호화로운 배우진들의 기세에 눌려 바짝 긴장했더랬다. 특히나 듣도 보도 못한 동양인 신인 배우였다 보니, 다소 몰지각한 시선도 따랐다. 하지만 대본 리딩이 시작되고, 진환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다듬어 왔던 연기를 피력하자 시선들이 단번에 바뀌었다.
“신인이니까 다른 배우분들에게 깍듯하긴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주눅 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연기력만 보자면 이미 은율 씨는 베테랑급이니까. 알겠죠?”
승주의 말을 들으며 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언제나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은율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진 걸 확인한 승주가 문을 열어 주었다.
공기부터가 달라진 느낌이다.
넓은 사무실의 가운데에는 타원을 닮은 테이블과 그것을 두르듯 배치된 푹신한 의자가 가득했다. 각 자리에는 배우의 이름이 적힌 플라스틱 명패가 있었고, 가장 끝에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것도 있었다. 사무실을 구성하는 벽에는 딱딱해 보이는 의자가 벽을 채우듯 나열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매니저나 스태프들을 위한 자리처럼 보였다.
가운데 테이블에는 낯익은 배우 4명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대본에 시선을 내린 채 이쪽에는 관심 하나 두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나름 배에 힘을 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청량하고 또렷한 목소리에 그들뿐 아니라 주변의 매니저들과 스태프들까지 은율을 주목했다.
은율은 반듯한 인사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가장 연배가 지긋한 남자 배우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자신의 배역과 이름을 밝혔다.
“이서우 역을 맡게 된 서은율이라고 합니다. 미흡하지만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행히도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 주었다.
“하준열 역의 강주원이라고 해요. 나도 잘 부탁합니다.”
부드러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50대 베테랑 배우 강주원이 은율에게 악수를 권했다. 그 손을 공손히 맞잡으며 한 번 더 고개를 숙이자, 주원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세 명의 배우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은율의 모습에 이채를 띠긴 했지만, 뭔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사도 마지못해 받아 주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승주는 매니저들을 위한 좌석에 앉으면서도 조금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저들은 꽤나 유망한 젊은 배우들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을 해 본 적도 있고, 조연이라고 해도 임팩트가 있는 배역 위주로 연기를 해 왔다. 그들로서는 커리어를 탄탄히 쌓아서 올라가는 자신들을 제치고 주연을 꿰차 버린 신인 배우가 영 달갑지 않을 것이다.
‘등쌀은 좀 있겠지만, 은율 씨라면 괜찮겠지.’
워낙 착하고 성실하니, 함께 촬영하다 보면 저들도 은율을 인정하게 될 날이 올 거다.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승주가 이제껏 봐 왔던 어떤 배우들과 견주어 봐도 절대 지지 않았다.
‘힘내요, 은율 씨!’
속으로 은율을 응원하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인사를 돌린 은율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대본을 펼쳐 들었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에 놓인 명패를 보았다. 흰 바탕의 명패에는 ‘주연 이서우 역/ 서은율’이라고 적혀 있었다. 은율은 선명하게 적힌 제 이름을 보며 가슴이 기분 좋게 뛰는 것을 느꼈다.
<에어윈드> 때에도 명패는 있었다. 다만 영어로 적혀 있어서 그런지 지금만큼 두근거리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주연이기 때문에 더 그런 건가.’
장편 영화이자 상업 영화의 주연이다.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진환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거다. 두근거리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형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대본 리딩 시작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오늘 오전에 마지막 중국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다고 들었는데 어째 연락이 없다. 최대한 시간 맞춰서 대본 리딩 현장으로 온다더니 아직 한국에 도착하지 못한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은 채 대본에 가만히 시선을 박았다.
이후 많은 배우가 들어와 자리를 채워 나갔다. 그때마다 은율은 직접 배우들에게 다가가 공손한 인사를 건네었고, 대부분의 이들은 그에게 격려와 함께 잘해 보자는 말을 해 주었다. <에어윈드> 대본 리딩 현장에선 대놓고 인사를 무시하는 예도 있었는데, 역시나 한국의 이들은 동방예의지국답게, 혹은 이미지 관리를 위해 겉으로나마 살가운 척을 해 준다.
어느덧 배우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진환의 것을 제외한 모두가 채워지고, 곧 예정된 시간이 다 되어 갔다. 고작 1분을 남긴 시점에,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함께 사무실에 들어왔다.
이준수 감독은 제법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키가 큰 30대 남자였는데, 그는 들어오자마자 깍듯이 인사하는 은율에게 잠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위아래를 훑어보는 듯한 느낌에 흠칫하기도 했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아 내었다. 그가 돌연 피식 웃더니, 시선을 거두고 제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 뒤를 따르는 비슷한 연배의 여인은 영화계에 적잖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어떤 감독과 만나더라도 평타 이상의 성적을 거두게 하는 밀도 높은 시나리오와 깊은 감정선이 시나리오 작가 신주아의 특징이었다. 세간에서는 이준수 감독과 신주아 작가가 만난 이상, 영화의 흥행은 따 놓은 당상이라 말하고 있었다.
감독과 작가까지 도착하자, 진환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환은 여태껏 대본 리딩이나 촬영 시에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설마하니 오늘 처음으로 지각하는 건 아니겠지.
은율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구와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며 초조한 낯을 했다.
59분이 00분으로 바뀌기 직전.
“안녕하십니까.”
문이 열리고, 진중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동으로 문에 닿았다. 은율은 대본 리딩 현장에 마지막으로 발을 들인 남자를 보며 안도의 미소를 띠었다.
문에 선 진환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가벼운 세미 정장 차림이었지만 보기만 해도 몸이 경직될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이 흘러나왔고, 차가운 눈빛에 미소 하나 없이 무표정한 얼굴은 누구도 쉽게 말을 걸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동작에선 언뜻 기품까지 엿보였다.
고개를 든 진환의 눈이 정면 저 멀리에 보이는 이준수 감독을 향했다. 잠시 시선을 맞대고 있던 이준수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 모두 모이신 것 같으니, 간단하게 서로 인사하고 바로 시작해 보도록 하죠.”
진환은 감독 옆, 비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주연 강현태 역/ 이진환’이라고 적힌 명패에 시선을 둔 채 그가 의자 뒤에 섰다. 그러면서도 신주아 작가의 옆자리이자 정면에 마주 앉은 은율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직접 만나는 건 무려 네 달 만이었다. 당장이라도 서로를 끌어안으며 달달한 말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둘 다 대본 리딩 후에는 시간이 비어 있으니 그때 함께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눈빛만으로 짧게 안부를 물은 진환은 자리에 바로 앉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짧게 인사했다.
“강현태 역의 이진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배우들을 포함한 장내의 모든 이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일부 배우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진환을 올려다보았고, 몇 명은 저희끼리 상기된 얼굴로 소곤거리기도 했다. 은율은 그들의 눈이 하나같이 동경과 호의를 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역시 형은 대단하구나.’
새삼 감탄했다. 유명 배우들이 저런 시선을 보낼 정도로 배우 이진환은 대단했다. 그의 행동거지와 말 하나하나에는 장내의 공기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한 영향력이 있었다.
<에어윈드> 대본 리딩 현장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 그 자리엔 세계적인 배우들이 가득했음에도 진환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압도할 만한 기백을 보여 주어 배우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분위기에 눌린 은율에게 기운을 북돋아 줄 만큼 여유로운 모습도 보였다.
은율은 절제된 동작으로 의자에 앉는 진환을 보며 실감했다. 대배우 이진환은 연기에 한해선 결코 자신이 쉽게 맞설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진환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동으로 두 번째 주연인 은율에게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율이 진환과 같은 내용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이서우 역의 서은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뀌었다. 일부 시선은 떨떠름했고, 대부분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들에게 있어 ‘서은율’이라는 배우는 아직 연기력 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신인 중의 신인이었다. 워낙 세간에서 떠들어 대고 몇 개의 CF로 화제도 되었던 터라 그를 아는 사람은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일부는 아이돌 출신이나 모델 출신 아니냐며 소곤거렸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신인에게 중요한 주연을 맡기다니, 감독 제정신인가?’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은율은 못 들은 척, 애써 태연한 낯으로 자리에 앉았다. 건너편에서 진환이 시선을 보내오는 게 느껴졌지만, 일부러 다음 차례의 배우에게 눈을 두며 모르는 척했다.
‘이게 형과 나의 차이…….’
직접 겪어 보니 뼈가 시릴 정도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버티는 게 다인데, 진환은 장내를 손아귀에 쥐고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아직 대본 리딩은 시작도 안 했는데 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한 승부욕이 솟구친다.
다른 배우들의 인사가 끝나니 그제야 이준수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영화의 감독을 맡은 이준수입니다. 다 같이 합심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봅시다.”
이준수 감독 역시 분위기만 보자면 진환에게 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비해 상당한 관록이 엿보였고, 눈빛도 한없이 깊고 묵직하다. 어지간한 이들은 그에게 섣불리 말을 거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까지 갖추고 있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역시 영화감독들은 그 특유의 통솔력과 카리스마가 남다르다.
감독이 자리에 앉고, 여태 차가운 얼굴로 무심하게 있던 신주아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나리오 작가 신주아입니다. 입에 맞지 않는 대사가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감정 하나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굉장히 새침한 우등생 느낌이라, 왜인지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강희랑 닮았네.’
펀드 매니저로 당당히 일하고 있는 커리어 우먼 김강희와 신주아 작가가 겹쳐 보였다. 분위기나 도도한 말투가 강희와 닮아, 왜인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배우들과 감독, 작가의 인사가 끝나고 나니 드디어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인사를 거치면서 감돌던 평온한 느낌은 금세 긴장 가득한 전쟁터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저절로 몸이 긴장되고 얼굴이 진지해졌다.
대본 리딩 현장의 분위기는 마치 열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작 두 명의 배우로 인해.
“괜찮다니까 뭐 이런 걸 사 오고 그래요?”
“알바 하느라 점심도 못 먹었다며. 내일은 형 비번이니까 맛있는 거나 사 먹으러 가자.”
“그렇다고 근무 중에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예요?”
“당연히 안 되지, 인마. 간다!”
“형! ……고마워요!”
은율이 머뭇거리던 눈을 들어 부드럽게 미소 짓자, 진환 역시 그와 시선을 맞댄 채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비유하자면,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봄날 같았다.
강현태는 다른 이들과 있을 땐 상스러운 소리도 곧잘 하는 거친 형사였지만, 남동생을 닮은 이서우와 함께일 땐 그 분위기가 판이했다. 친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챙기고 아껴 주는 것도 모자라 목소리마저 나긋할 정도였다. 아마도 경찰 동료들이 보았다면 그렇게 아끼던 친동생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강현태는 탐문 조사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이서우에게 들렀고, 점심을 못 먹었다던 그에게 따끈한 내장탕 한 그릇을 포장해 와서 직접 전해 주고 돌아갔다.
해맑게 웃던 은율의 눈이 어느새 싸늘하게 변했다. 웃고 있던 입꼬리는 느릿하게 내려가, 일자로 다문 입술이 되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웃어 본 적 없다는 양 무표정했다. 아름다운 인형처럼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시선은 수많은 펜글씨가 덧붙여 써진 대본에 향해 있었지만, 그는 괴이한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눈에 짙은 혐오감을 띠었다.
대사는 없었지만, 서릿발 같은 분위기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차디찬 눈동자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그가 진정 조금 전에 웃던 이와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은율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간단히 호흡을 맞춰 보는 대본 리딩 현장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 것은 톱배우 이진환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상대하면서도 눈길 하나, 대사 하나,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괴물 신인의 등장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동료 경찰 역의 몇 년 차 배우들마저 이진환이 상대일 땐 간간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거늘, 어째 가장 어리고 경험 적은 신인이 제일 여유로운 것 같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은율은 여태껏 진환과 가장 많은 호흡을 맞춰 보았다. 데뷔 전에 연기 지도를 받을 때도, 그리고 그 후에도 틈만 나면 진환과 대본을 들고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어떤 때는 순진한 청년이 되었고, 어떤 때는 다혈질 아저씨가 되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어 보기도 했다. 수시로 진환의 연기 상대를 했던 덕에 연기와 발성이 한층 다듬어지고, 그의 압도적인 연기에도 한 점 주눅 들지 않게 되었다.
몇몇 젊은 배우들은 은율이 보여 주는 연기에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쳐 댔다. 대본 리딩 현장에서 가끔 신인들이 놀랄 만한 연기를 보여 주는 경우가 있다.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신인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대 배우의 능숙한 리드에 휘둘렸을 뿐이다.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이 칠 대사와 상대 배우의 능숙한 리드에만 집중하는 것이니, 감각 있고 재능 좀 있다면 충분히 대단한 연기를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카메라 앞에서는 표정과 대사뿐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한다. 제아무리 연기 학원에서 다져진 발성으로 자연스럽게 대사를 친다 한들, 표정과 행동이 부자연스러우면 어색할 뿐이다. 그래서 대본 리딩 현장에서 좋은 연기력을 보여 준 신인들이 카메라 앞에만 서면 경험 적은 신인 티를 팍팍 내는 것이다. 대사는 능숙한데 표정과 행동이 따로 노니까.
그것은 몇 년 차 배우들에게서도 자주 보이는 현상이었다. 경험이 있기에 대사와 표정, 행동이 신인처럼 티 나게 어색하진 않지만, 뭔가 어우러지지 않는 그런 애매한 부자연스러움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랬기에 좌중의 젊은 배우들 대부분은 주연 서은율을 그저 ‘그럴듯한 척하는 신인 배우’라고 멋대로 단정 지어 버렸다. 그것은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듣는 이들 전원을 소름 돋게 만들 정도의 대단한 연기력을 피력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주연 이진환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좌중의 모든 이들에게 두 주연 중 누가 이 작품을 휘두르고 있는 것 같으냐 묻는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이진환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해외에서 연달아 기대작들을 찍고 오더니만, 한층 관록이 붙었다. 원래도 연기 천재 소리를 듣던 진환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상대 배우를 부드럽게 리드하면서 더욱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배우 이진환이 아니라, 강현태 형사 본인이 앉아 있는 느낌이다.
이진환의 입에서 강현태의 별 볼 일 없는 대사가 흘러나올 때마다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이 공간이 대본 리딩을 위한 곳이 아니라 경찰서 강력반 내부 같고, 허름한 이서우의 원룸 같았으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건물 옥상 같기도 했다. 그만큼 이진환은 육성 연기만으로도 머릿속에 주변 환경을 그려 줄 정도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가진 자였다.
좌중의 이들은 확신했다.
촬영이 시작되면 주연 서은율은 같은 주연 이진환에 의해 보기 좋게 깨질 것이다.
* * *
폭풍과도 같은 대본 리딩이 끝나고 나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깊은숨을 훅 내쉬었다. 스파크가 튈 것 같은 찌릿거리는 긴장감이 사라지고, 서로의 얼굴에는 전쟁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처럼 한결 편안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이준수 감독이 대본을 든 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 차 촬영 스케줄은 각자 받으셨을 테니, 조만간 촬영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감독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서로 편안하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한결 피로해진 얼굴을 하고 있던 은율은 제게 닿는 시선을 느껴 정면을 바라보았다. 건너편에서 진환이 작게 웃으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다.
‘수고했어.’
은율이 마주 웃어 주며 형도 수고했다고 소리 없이 말해 주려 할 때였다. 그의 어깨에 묵직한 손이 툭 얹어졌다.
“서은율 씨는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은율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는 다름 아닌 이준수 감독이었다.
“알겠습니다.”
당황하긴 했지만, 얼른 대답하며 대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걷는 이준수의 뒤를 따르려다 진환을 돌아보았다. 그는 감독을 싸늘하게 바라보다, 은율에게로 고개를 돌려 언제 그랬냐는 듯 눈가를 휘었다. 그것을 다녀오라는 뜻으로 이해한 은율은 결국 말도 한마디 걸지 못한 채 사무실을 나섰다.
이준수 감독은 대본을 옆구리에 낀 채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몇 개의 문을 지나쳐 복도 끝의 흡연실에 들어간 준수는 뒤에서 은율이 문을 닫는 소리가 나자, 입고 있던 재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됩니까?”
허락을 구하듯 묻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준수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후, 폐부에 가득 찬 매캐한 연기를 한숨 쉬듯 길게 내뱉었다. 다소 차가운 느낌이 드는 그의 눈동자가 은율의 손에 들린 대본으로 향했다.
“잠깐 봐도 될까요?”
은율은 그가 자신의 대본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채고서 두 손으로 그에게 공손히 건네주었다. 그러면서도 준수의 의중이 무엇일까 싶어 머리를 굴렸다. 혹시 캐릭터 분석이 잘못되었거나 연기력이 많이 부족한 걸까.
준수는 입에 담배를 문 채 은율의 대본 몇 장을 훑어보듯 빠르게 눈에 담았다. 모든 페이지마다 단정한 글씨로 각종 분석이 적혀 있고, 특히나 그의 등장 파트에는 적절한 표현을 위해 어떻게 연기하는 게 효과적인가에 대한 고뇌의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서은율 씨는 내가 생각한 그대로네요.”
대본을 돌려주며 준수가 반쯤 피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었다. 그의 차가우면서도 예리한 눈동자가 은율을 응시했다.
“본성은 성실하고 예의 바른 우등생. 연기자로서는 캐릭터 분석력도 뛰어나고, 표현도 적절합니다. 천부적인 재능도 있죠. 예전의 나라면 이것만으로도 아주 만족했을 거예요.”
칭찬이 분명했지만 ‘예전의 나’라는 표현 때문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지금의 준수에겐 은율이 불만족스럽다는 의미나 매한가지였다.
“서은율 씨는 이서우라는 인간이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합니까?”
“아뇨.”
즉답했다.
“그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그저 살인 충동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일반인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급소를 찔러 단번에 숨을 거두는 방식의 살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강현태는 급소가 아닌 부위를 찔렸어요.”
“그건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급소가 아닌 부위를 찔렀고,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낀 강현태가 총을 쏘게끔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은율은 흔들림 없이 자신이 분석한 바를 피력했다.
“이서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아 주길 바랐을 겁니다. 그 상대로 선택한 게 강현태였고요.”
강현태는 이서우가 충동대로 죽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강현태를 죽이는 상상과 그에게 웃어 주는 현실이 섞여 들었다. 강현태를 죽이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현실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그와 친근하게 지내는 게 흐릿한 망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서우는 끓어오르는 살인 충동을 억누르며 강현태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태연하게 굴었다.
담배를 피우며 은율의 말을 듣고 있던 준수가 피식 웃었다.
“서은율 씨가 분석한 게 맞습니다. 이서우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살인 충동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일 뿐이죠.”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가도록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준수가 그것을 재떨이 스탠드에 비벼 껐다.
“난 그걸 더 제대로 표현하고 싶어요.”
준수가 예리한 눈동자로 은율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이서우가 겉으로 만들어 낸 선량한 이미지, 그리고 살인 충동으로 점철된 본래의 내면. 그 둘을 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길 원합니다. 마치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죠.”
준수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서은율 씨라면 이서우의 양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 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가슴이 펄떡 뛰었다. 감독 한 명이 인정하고 믿어 준 것만으로도 전신에 기묘한 희열이 흘렀다. 은율은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사르르 웃는 낯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이 믿어 주신다니 더 의욕이 생기네요.”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네니, 준수가 눈을 반달로 휘며 웃었다.
“그쪽은 함부로 웃어 주고 다니면 안 되겠네요. 사람 여럿 설레게 하겠네.”
마성의 외모라더니, 확실히 실물이 웃어 주니 현실감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서은율 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페르소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돌려 보았다. 준수도 그 실력을 인정하는 곽철민 감독의 애정 어린 작품이니만큼 확실히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빛을 보게 만들어 준 것은 주연 배우의 힘이 분명했다.
출연 당시엔 제대로 연기를 배우지도 않은 일반인 상태였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완벽한 타인이 되어 또 다른 타인인 <페르소나>의 ‘정한서’를 연기했다. 거기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이름 없는 모델로 알려졌다. 그러다 돌연 그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BLESS 리더의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이에 준수는 또 한 번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걸 천의 얼굴이라 하던가.
“그래서 서은율 씨에게 제의하고 싶어요.”
아직 서은율의 진가를 모르는 다른 이들은 그저 연기 좀 잘하는 신인 배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준수는 아니었다. 그라면 자신이 생각해 온 ‘이서우’의 양면성을 완벽히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
“오늘부터 크랭크 인 전날까지, 내게 서은율 씨의 모든 시간을 투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서은율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한층 밀도 높은 ‘이서우’가 되기 위한 시간이.
* * *
대본 리딩 현장엔 이미 사람들 대부분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진환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은율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지네.’
대본 리딩 직후에 은율을 따로 빼서 데려간 것도 이상하지만, 30분 넘도록 돌아오질 않고 있다.
‘주연에게 깐깐하단 얘긴 들었지만…….’
작품과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로 소문난 감독이다. 은율이 오늘 보여 준 연기는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감독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대본 리딩 현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당장이라도 은율을 붙잡아 키스부터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죽을 판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두리번거릴 것도 없이 은율을 바로 찾아냈다. 그는 각양각색의 배우들 사이에서 저 혼자만 화사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화상 통화는 자주 했지만 역시나 실물이 월등히 예쁘다. 어떻게 그 존재만으로 한 사람의 희로애락을 이렇듯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간의 모든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지고 싸늘한 겨울 같던 공기는 단박에 제 계절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사랑하는 연인의 온기가.
은율을 찾으러 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시간이 더 걸린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감독을 찾아가 봐야겠다. 혹시라도 은율이 신인이라는 이유로 드잡이질을 당하고 있는 거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휴대폰만 쏘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늘이 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낯익은 젊은 여배우가 수줍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작중 강현태의 여자 친구로 나오는 여배우 임소민이었다. 근래 공중파 드라마에 주연으로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이번 영화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상당히 강한 어필을 해 왔던 모양이다.
소민이 맡은 배역 한주란은 강현태의 여자 친구라고는 하나 비중이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역 특성상 대부분의 호흡을 강현태와 맞춰야만 하는 캐릭터였고, 그 말은 즉, 그녀의 대표적인 상대역이 이진환이라는 소리였다.
소민은 톱배우 이진환의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 연기력으로 그와 견줄 수 있는 자가 손에 꼽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수없이 들어왔다. 연기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고, 호흡을 맞췄던 배우라 하더라도 그의 연기력 정도에 따라 사람을 기억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성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고 들었다. 상대 배우의 연기력이 한참 못 미치면 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독설을 날리고, 제멋대로 휘어잡아 연기를 끌고 간다는 소리도 있다. 그렇게 휘두르면 워낙에 좋은 연기가 끌려 나오니, 알 만한 감독들은 굳이 진환을 말리지 않는다고 한다.
소민은 그런 이진환에게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대본 리딩도 상당히 만족스러웠고, 카메라 앞에서는 워낙 표정과 행동의 표현력이 좋다고 칭찬을 받아 왔던 터라 충분히 자신 있었다.
연기력으로 배우를 판가름한다던 톱배우 이진환이 자신의 연기를 인정해 주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배역이 줄줄이 들어올 것은 분명하다.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갈 것이고, 기본 커리어가 있으니 대우도 달라질 거다. 그만큼 이진환이 연기로 인정해 준다는 것은 배우로서 충분한 화제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소민이 이진환의 얼굴을 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이진환이 연기력만 대단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를 눈빛 한 번에 홀려 버릴 정도로 대단한 비주얼을 가졌다는 소문은 직접 그를 마주한 소민이 절실히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눈앞에 앉은 남자는 일류 조각가의 예술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감독에게 불려 나간 신인 배우 역시 눈이 뒤집힐 만큼 엄청난 외모를 가지긴 했으나, 굳이 따지자면 남자다운 탄탄한 몸에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도도한 미남 이진환 쪽이 더 취향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촬영 날짜를 곱씹으며 바짝 긴장만 하고 있기엔, 눈앞의 톱배우가 당장 제 시선을 붙들고 놔주질 않는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뛴 탓인지,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배어 나왔다. 진환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시선을 거두어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은율의 연락이 온다면 진동이 올 테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만 보게 된다.
소민은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고서 진환의 옆자리에 앉아 의자를 그쪽으로 돌렸다. 어째 무표정한 옆모습도 이렇게 멋진가 싶어 홀린 듯 바라보았다.
“전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남아 있는 건데, 진환 씨도 그런가요?”
진환은 그녀를 힐끗 보다가 시선을 원위치 시켰다.
“누구 좀 기다립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는 건 좀 그러니까 건물 일 층에 있는 카페라도 가실래요? 제가 커피라도 한 잔 살게요.”
진환은 갑자기 들러붙은 여배우에게 짜증이 일었지만, 그녀가 자신과 호흡을 맞춰야 할 상대 배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무작정 면박을 주진 않았다.
“소민 씨한테 얻어먹을 이유 없습니다.”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소민은 그의 스타일에 대해 이미 충분한 이야기를 들어 왔기에 감정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진환이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는 것에 화색을 띠었다.
“어머, 제 이름 기억해 주셨네요?”
진환의 눈꼬리가 꿈틀했다.
진환 역시 자신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져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배우에 한해선 연기력으로 상대의 가치를 판가름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의 이름까지 모를까.
“기억해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으시다면 감사의 의미로…….”
“감사받을 만한 일은 아니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말을 끊으며 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소민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제가 진환 씨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안 될까요?”
소민이 눈가를 예쁘게 휘며 고개를 귀엽게 갸웃했다. 예쁜 외모에 가녀린 체구를 가진, 사랑스러운 외견의 여배우인지라 웬만한 남자들은 순간적으로라도 눈동자가 흔들리기 마련이거늘 진환은 그녀를 보면서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 감흥도 없는 건 아니었다.
‘아, 나중에 율이한테 저거 해 달라고 해야지.’
겉으로는 차디찬 조각상 같은데, 그 속은 은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소민이 보인 나름의 애교가 은율에게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
머릿속에 고개를 갸웃하며 눈가를 휘는 은율을 떠올리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말았다. 소민은 눈을 빛내며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넘어왔어!’
그럼 그렇지.
소민은 진환이 자신의 애교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거라 생각하며 약간 흥분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허락하신 거로 알고…….”
돌연 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말이 뚝 끊겼다. 그가 휴대폰을 재킷에 쑤셔 넣으며 소민의 옆을 지나쳐 갔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촬영 때 뵙죠.”
언제 웃어 줬냐는 듯 찬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이다. 소민이 황당한 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환을 돌아보는데, 그는 벌써 사무실 입구를 향해 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구엔 이서우를 연기할 신인 배우 서은율이 서 있었다. 진환은 이쪽에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중이라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기다린다는 사람이 저 신인 배우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소민이 눈가를 찡그리며 은율을 눈에 담았다. 그는 진환을 향해 소민마저 두근거리게 할 정도의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태껏 봐 왔던 그 어떤 연예인보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비주얼을 갖고 있다. 다소 말랐지만, 옷의 핏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모델급 몸매라인은 소민마저 부러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소민의 관심사는 오로지 진환이었다. 한창 분위기가 좋아지려는 판에 갑자기 끼어들어 초를 친 은율이 영 달갑지가 않다.
“미안해요, 형. 많이 기다렸어요?”
은율이 미안한 얼굴로 진환에게 사과했다.
“아냐, 괜찮아. 일단 출발하자. 가면서 얘기해.”
내용 자체만 두고 보자면 이렇다 할 게 없다. 하지만 소민은 조금 전, 자신을 대할 때의 음성과 판이하게 부드러워진 진환의 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냅다 달려가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진환의 목소리를 들은 은율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 말인즉슨, 평소에도 저런 말투를 쓴다는 소리다.
‘대체 둘이 무슨 관계이기에?’
이진환에게 연기력을 인정받기라도 한 걸까? 아니, 대체 어떻게? 신인이 무슨 재주로?
‘아씨,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작년에 워낙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신인치고는 인지도가 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아는 게 거의 없는지라 속만 답답했다.
소민의 부글대는 마음도 모르고, 진환은 은율의 어깨를 감싸고서 대본 리딩 현장을 떠났다.
“승주 씨는요?”
“먼저 보냈어.”
발걸음이 진환의 급한 대답만큼이나 빨라졌다. 은율은 제 어깨를 감싼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굴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화가 난 걸까?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하긴 한데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만 같다.
진환에게 붙들린 채 건물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온 은율은 그의 차에 다다르자마자 조수석에 태워졌다. 조수석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운전석에 들어와 앉은 진환은 안전벨트를 매던 은율의 팔을 붙잡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흡-!”
다짜고짜 끌어당겨져 입술이 통째로 진환에게 삼켜졌다. 그는 입술을 댄 채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은율의 입 안에 제 혀를 급하게 집어넣었다. 놀란 혀가 그대로 휘감겨 끌어당겨지고, 눈동자는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커다란 눈은 금세 사르르 감기고, 은율의 얌전하던 혀도 진환에게 호응해 질척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두 개의 혀가 농염한 궤적을 그리며 서로를 탐하고, 어느새 각자의 입 안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어렵사리 입술을 뗀 진환이 은율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춤하며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율아. 너무 보고 싶었어, 율아.”
애달프게 읊어 주는 제 이름이 가슴 깊은 곳을 저릿하게 들쑤셨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형.”
약간 상기된 얼굴로 싱긋 웃어 보이니 진환도 그제야 환하게 웃어 준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산만한 성격의 소유자라도 된 것처럼 몇 번이나 은율의 얼굴과 목에 입술을 묻었다.
“잠깐, 여기 밖이에요.”
아직 영화사 사무실의 지하 주차장이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 선팅되어 있어서 밖에선 안 보여.”
이럴 때를 대비해 선팅 하나는 확실하게 해 두었다. 그래도 은율은 불안한지 연신 창밖을 힐끔거렸다.
“그럼 형 집에 가서 마저 할까?”
진환이 낮은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하니 은율이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차, 차라리 그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환이 시동을 걸었다.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은율이 피식 웃으며 안전벨트를 마저 채우는 동안, 그들이 탄 차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를 몰던 진환은 웃는 낯으로 몇 번이나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눈이 마주친 은율이 민망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왜 자꾸 형 안 봐.”
일부러 불퉁하게 말했다. 은율이 진환을 힐끔거리더니, 또 시선을 피한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직 어색해서요.”
“어색해? 형이?”
이건 또 예상 못 한 말이다.
진환이 의아한 얼굴로 은율을 보니, 그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눈을 굴리고 있다.
“너무…… 딴 세상 사람 같았어요.”
“왜?”
은율의 머릿속엔 아직도 진환이 연기한 ‘강현태’가 생생했다. 감정의 완급 조절과 흐트러짐 없는 발성은 흠잡을 데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은율이 진환과 정식 대본 리딩을 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에어윈드> 때도 놀라긴 했지만, 그때는 영어를 구사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확실히 한국어로 정식 대본 리딩을 하는 건 더 생동감 넘치고 긴장감 가득했다.
진환과 둘이서 대본 리딩을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환이 중국에 가 있는 동안에도 화상 통화 등을 통해 빈번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때와 이번은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주변에 감독과 작가, 배우에 스태프들까지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실제 촬영 현장에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은율은 진환과 시선을 맞댄 채 자연스레 ‘이서우’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은율은 그게 진환 덕분이라 생각했다.
“저도 조금은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형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네요.”
눈을 내리뜨고 씁쓸히 웃는 은율을 보며 진환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연기할 때 사람들 눈 커지는 거 못 봤어? 내 리드와 상관없이 대단한 연기였어.”
진심이었다. 진환은 그조차 순간순간 놀랄 정도로 성장한 은율의 연기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더랬다.
연기를 리드하는 사람은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생생할 정도의 분위기를 대사에 녹여, 상대가 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대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곤 한다. 대부분의 노련한 배우들은 이걸 자유자재로 할 수 있기에 촬영 당시, 분위기의 주도권을 가진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같은 장면임에도 느낌이 달라지고 애드리브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신인 배우나 어쭙잖은 연기력의 배우들은 상대 배우의 리드에 끌려가기 마련이다. 그러는 편이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연기력 논란이 일기 일쑤다.
진환은 은율이 자신의 리드를 잘 따라 줄 거라 믿었고, 실제로 그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좋은 연기력을 피력했다.
하지만 은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진환이 없었다면 절대 오늘만큼 연기해 보일 수 없을 거라 장담했다.
자리에 모인 이들 대부분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 진환은 가히 최고라 부를 만했다.
더 깊은 뭔가가 필요했다.
진환만큼 연기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처럼 분위기를 단번에 휘어잡을 만큼의 리드가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준수 감독이 제의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오늘부터 크랭크 인 전날까지, 내게 서은율 씨의 모든 시간을 투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아질 수만 있다면…….’
욕심이 생겼다. 이대로라면 카메라 앞에서 언제나 진환에게 끌려다닐 것만 같았다. 그의 리드가 무작정 싫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카메라에는 동등하게 담길 수 있길 원했다. 감히 자신이 끌고 가겠다는 생각은 절대 못 하겠고 말이다.
감독에게는 생각해 보고 오늘 중으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은율의 시간을 오롯이 투자하길 원하며 괜찮다면 자신의 집에서 머물렀으면 했다. 그 때문에 아무래도 열흘 가까이 집을 비워야 하는 데다가 칼과 진환에게도 얘기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즉답하진 않았다.
감독은 그러라고 하며 은율을 위해 한마디를 남겼다.
‘그렇게 해 주기만 한다면 서은율 씨를 한층 완벽한 이서우로 만들어 드리죠.’
그 말을 도저히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은율이 감독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 동안, 어느새 진환의 차는 그의 집에 다다라 있었다.
차량이 주차장에 각이라도 잰 듯이 반듯하게 들어가 안착하자마자 진환의 손이 바빠졌다. 제 것의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나온 그는 곧바로 조수석의 문을 열어 아직도 뭔가를 계속 생각 중인 은율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이제 막 안전벨트를 풀자마자 그에게 끌려 나온 은율은 진환의 다급한 발걸음에 그제야 생각을 멈췄다.
익숙한 마당을 지나니 보이는, 몇 달 만에 오는 진환의 집은 그가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뒤늦게 설렘을 닮은 두근거림이 찾아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빠른 손동작으로 현관문을 연 진환은 은율을 끌고 들어가 제법 큰소리가 나도록 급하게 문을 닫았다. 그러고선 현관문에 은율을 밀어 등을 붙이게 하고는 거칠게 키스했다.
“읍, 흐-!”
혀가 뽑힐 듯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은율의 뒤통수가 딱딱한 문 때문에 아프지 않도록 한 손을 넣어 받쳤고, 다른 한쪽 팔로는 그의 굴곡진 허리를 가볍게 휘감아 안았다.
놀라서 바르작거리던 은율은 혀를 감아 빨아 오는 느낌에 금세 몽롱한 눈을 했다. 그의 두 팔이 어느새 진환의 목을 감아 안고, 휘둘리던 혀도 이젠 맞서듯 마주 응한다. 오랜만에 깊이 느껴 보는 서로의 타액이 꿀처럼 다디달다.
키스에 심취하며 진환이 그의 허벅지를 은율의 다리 사이에 넣고 꾹 눌렀다. 단단한 허벅지에 은율의 바지 속 물건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것을 자극하듯 허벅지로 누르고 쓸기를 반복했다. 키스 중인 은율의 입에서 그에 맞춘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읍……, 응……. 형, 잠깐…….”
맞물린 입술을 어렵사리 떼어 낸 은율이 진환을 밀어내려 애썼다.
“다, 다리…….”
은율이 한껏 붉어진 얼굴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진환은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바짝 안으며 목 언저리를 혀로 핥아 올렸다.
“흣-!”
은율이 크게 움찔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몸이 한층 예민하다. 깊은 키스와 진환의 허벅지에 문질러진 것만으로도 바지 속이 부풀어 불편하다.
진환의 손이 돌연 셔츠 속으로 쑥 들어왔다. 은율이 깜짝 놀라 당황한 얼굴을 했다.
“형, 여, 여기서요……? 아니, 그보다 씻어야…….”
“율아, 형 급해.”
열기를 가득 머금은 음성이 은율의 귓가를 자극했다. 진환은 뜨거운 숨을 뱉으며 여린 귓가를 아프지 않게 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혀를 꼿꼿이 세워 귓바퀴를 따라 핥아 대다가 그 작은 구멍을 추삽질하듯 몇 번이나 쑤셔 댔다. 거기다 셔츠 속에 들어온 손은 어느새 위로 올라와 부드럽고 탄탄한 가슴을 만져 대었다. 그 손이 작은 돌기에 닿자마자 은율의 입에서 참았던 신음이 터졌다.
“하으-!”
유두에 전기 충격이라도 가한 것처럼 찌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아래에선 진환의 허벅지가 자꾸만 앞뒤로 움직이며 간질여 댔고, 귀에선 기분 좋은 자극과 질척한 소리가 난무했다. 현관문에 등을 댄 상태고 진환의 다리가 지탱해 주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 만큼 나른하고 기분 좋았다.
“하아……, 형……, 잠깐만…….”
진환의 손이 닿는 곳 여기저기가 뜨겁고 간질거렸다. 이상한 현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잔뜩 당황한 얼굴을 했다. 벌써 바지 앞섶이 터질 듯 부풀어 있다.
그것을 알아챈 진환이 은율의 바지 버클을 풀고 단숨에 지퍼를 내렸다. 은율은 현관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긴 했지만 그를 밀어낼 수 있을 만큼 정신이 온전한 상태도 아니었다. 벌써 뇌가 말랑해진 느낌이다.
바지 안에 한껏 부풀어 있는 것을 속옷 겉에서부터 어루만지듯 쓸어 주었다.
“아……! 흐읏!”
은율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고 두 다리가 진환의 허벅지를 꽉 조인다. 고작 쓸어 준 것만으로도 하체에 힘이 쏠렸다.
진환은 은율의 것을 매만지다 이내 그의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날것을 그대로 쥐어 속옷 밖으로 꺼내니, 바짝 선 그 끝에서 벌써 말간 액이 방울져 흘러나오고 있다. 착실하게 반응하는 그것을 보니 진환도 아래에 피가 몰리고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바지 앞섶을 뚫고 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셔츠를 끌어 올려 은율의 입가에 가져갔다.
“이거 물고 있어. 떨어뜨리면 안 돼.”
나긋하게 말하며 셔츠 자락을 입에 물려 주었다. 덕분에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눈을 굴리며 부끄러운 낯을 하는 게 귀엽다.
진환은 한 손으로 은율의 것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가슴 한쪽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엄지로 손톱을 세워 긁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끼워 꼬집듯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러고선 비어 있는 다른 쪽엔 입을 가져갔다. 겨우 버티고 있던 은율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흐읏-! 흣, 으……!”
셔츠를 입에 문 상태라 차마 맘껏 신음을 내지 못했다. 두 손으로 진환의 어깨를 밀어내려는데 힘이 들어가질 않아,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도 가슴을 괴롭히는 손가락과 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특히나 작은 돌기를 빨아 대고 잘근거리다가, 찌릿거리는 그것을 빠르게 치댈 때는 몸에 진동기라도 댄 것처럼 보기 좋게 떨려 왔다.
그 와중에도 은율의 성기를 잡은 손은 점차 속도를 더해 갔다. 단순히 어루만지며 품어 주기만 하던 손은 어느새 완급을 조절해 가고 있었다. 쓸어 올릴 때는 힘 있게, 내려갈 때는 손바닥 표면으로 간지럽히듯 살살.
“흐으으……! 으, 흐응……!”
셔츠를 물고 있느라 신음이 자꾸만 잇새로 갈라지듯 흘러나왔다. 부자유스러운 자세와 제 몸 같지 않은 예민한 감각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야릇한 간지럼을 닮은 기분 좋은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그것은 곧 몸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자극적인 쾌감이 되었다.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단단하고 꼿꼿하게 튀어나오던 핑크빛 유두가 어느새 탐스러운 과실처럼 붉게 물들어 있다. 손가락과 혀가 그것을 톡톡 튕기니 자동으로 신음과 경련이 이어지는 게 자극적이다.
‘미치겠네.’
원래는 먼저 몇 번이나 보내 주고 천천히 풀어서 넣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버티겠다.
진환은 은율의 쿠퍼액이 묻어난 손을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은율의 눈이 부릅떠졌다.
“흐으-! 으응-!”
갑자기 닥쳐오는 급박한 사정감에 다리가 자동으로 모여들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단단해지고, 진환의 어깨를 짚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환은 그의 성기가 사정하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유두를 괴롭히는 손과 혀의 놀림을 더 빠르고 강하게 했다.
“흐으읏-!”
은율의 고개가 뒤로 꺾이고, 그의 바짝 선 성기에서 울컥 정액이 토해졌다. 진한 우윳빛의 정액이 진환의 허벅지와 그의 손에 몇 번이나 흔적을 남겼다.
진환은 제 허벅지와 손에 묻은, 뜨끈한 정액의 온기에 뜻 모를 희열감을 느꼈다. 제 손에 묻은 진한 정액을 엄지로 살짝 비벼 보니, 한동안 따로 빼지 않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셔츠를 당겨 입에서 빼 준 진환이 은율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뺀 게 언제야?”
문에 늘어지다시피 어렵게 서 있던 은율이 나른한 눈을 깜빡였다.
“안…… 뺐는데…….”
“형이랑 마지막으로 한 게 넉 달 전이잖아.”
설마 하며 물었다. 은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뺐어요…….”
진환의 얼굴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평소에 성욕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자신과 함께 있을 때만 흥분하고 잘 느낀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간 한 번도 자위하지 않았다는 건 같은 남자로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상생활에 지장은? 아무렇지도 않나?
난 못해도 사흘에 한 번은 빼야 했는데.
왜인지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그에게 흠뻑 빠져서 어딜 가든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데.
“형은 반찬거리도 안 되는 거야?”
불퉁하게 물으니 은율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러더니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하, 하면 계속…… 하게 될 것 같아서…….”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니, 은율이 이어 말했다.
“매일 형 생각하면서 할 것 같고…… 형만 더 보고 싶어질까 봐…….”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모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진환은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은 흥분감을 느꼈다. 자신을 반찬 삼아 자위하는 게 중독될 것 같고, 보고 싶어질까 봐 넉 달이나 안 했다니. 너무 순진해서 미련한 건가 싶다가도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
진환은 결국 못 참고 은율을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선 그의 정액이 묻어 있는 손을 은율의 탄탄한 엉덩이골로 가져갔다.
“읏!”
정확히 구멍을 짚어 오는 손길에 깜짝 놀랐다. 진환은 은율의 볼에 입맞춤하며 그 질척한 손으로 구멍 주변을 달래듯 문질러 댔다. 긴장해 있던 구멍이 조금 느슨해졌다 싶은 순간, 중지를 깊이 밀어 넣었다.
“아, 으으…….”
미끌미끌한 정액 덕분에 안으로 쉽게 침투한 손가락이 뜨거운 내벽을 더듬었다. 오랜만에 제 안을 헤집는 느낌에 은율이 진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등에 두른 그의 두 팔이 덜덜 떨려 왔다.
“하읏!”
내벽을 더듬던 손가락이 성기의 뒤쪽, 약간 단단한 부위를 쿡 찔렀다. 순간적으로 벼락이라도 맞은 듯 퍼덕거린 은율이 진환을 더 꽉 껴안아 왔다. 그 민감한 부위를 찌를 때마다 은율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 아아-! 흐, 아읏-!”
은율이 부들거리며 매달리는 사이,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와 안을 쑤셔 댔다. 안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쾌감의 충격에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아래에서는 흥분한 체액과 진한 정액이 뒤섞여 찌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가쁜 숨소리는 자꾸만 멋대로 야해졌다. 그걸 고스란히 듣고 있던 진환의 숨소리 역시 점차 거칠어져 갔다.
은율의 안쪽은 넉 달간 아무것도 침투하지 않아서인지 유달리 비좁고 뜨거웠다. 처음에는 미끌한 정액을 묻혔음에도 잘 들어가지 않아서 곤란할 정도였다. 특히나 지금처럼 서 있는 상태에서는 안쪽이 더 좁아지곤 했다.
손가락을 두 개째 넣을 때도 비좁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은율이 흥분함에 따라 안쪽의 체액과 정액이 손에 휘감겨 들자, 더 이상 얌전히 풀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안쪽을 약간 모자란 듯 풀어낸 진환은 이내 손을 거두고서 은율의 바지를 아래까지 완전히 내려 버렸다. 바지와 속옷을 벗겨 셔츠에 재킷만 입은 상태가 된 그를 다시 현관문에 밀어붙였다. 그러고선 몸을 약간 옆으로 비틀게 해 다리를 하나 번쩍 들었다. 길쭉하게 뻗은, 유연한 다리를 한 손으로 잡아 고정하니 그의 사타구니가 민망할 정도로 훤히 드러났다.
“뭐……! 하아-!”
민망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은율은 그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양물에 저절로 신음을 터뜨렸다. 다리가 활짝 벌어져 있었기에 그냥 서 있을 때 넣는 것보다야 한결 수월하게 들어갔지만, 이런 자세로 하는 건 처음이어서 그런지 느낌이 꽤 달랐다.
은율은 현관문을 손으로 짚은 채, 좁디좁은 제 안을 채워 가는 진환의 물건을 느끼고 있었다. 내벽을 버겁게 밀어내며 천천히 들어오고 있는 진환의 성기는 은율이 흠칫거리며 놀랄 정도로 그 크기가 상당했다.
못 본 새 어째 부피가 더 커진 것만 같다. 아래가 아프게 채워지는 느낌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힘겨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높은 산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숨쉬기마저 힘들다.
‘왜 이렇게 큰 것 같지……?’
오래도록 안 해서 제 안쪽이 좁은 상태 그대로인 건 생각도 못 하고 무작정 진환의 것이 커진 탓이라 여겼다. 굵고 단단한 것이 안쪽을 찢을 듯 밀고 들어왔다. 아픈 신음이 흘러나오던 그때.
“흐읏-!”
예민한 부분을 이전과는 다른 방향에서 찔러 들어온다. 틀어진 몸 때문에 진환의 성기 옆쪽이 전립선을 누르며 지나갔고, 그 방향 하나 달라진 것만으로도 안쪽이 꿈틀대며 놀라 버렸다. 그 바람에 반쯤 들어간 성기가 꽉 잡혀 버려서 그 이상 들어가질 않았다.
진환이 성기를 옥죄는 구멍의 조임에 미간을 찌푸렸다.
“읏……. 율아, 형 끊어져…….”
한 손으로 현관문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입을 틀어막고 있던 은율이 촉촉한 눈으로 진환을 돌아보았다. 얇은 재킷은 팔뚝까지 엉성하게 내려와 무방비함을 한껏 피력하고 있었고, 셔츠 밑으로 약간 드러난 아랫배 쪽엔 그의 정액이 묻은 흔적이 유달리 야해 보인다. 거기다 길게 뻗은 다리가 아래쪽 구멍의 움직임에 맞춰 약간씩 떨리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이대로 거칠게 박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낸 진환이 은율의 늘씬한 다리를 핥아 주고 입 맞춰 주며 달래었다.
“형……, 하아……, 형 거 너무…… 커요…….”
숨을 몰아쉬는 것만도 벌써 힘이 들었다. 크다는 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 진환은 은율의 성기를 살살 어루만지며 그의 무릎 뒷부분을 간지럽히듯 핥아 주었다. 은율의 전신이 펄떡이며 반응하고, 흥분감 덕에 아래쪽 구멍이 약간 풀어지는 걸 느꼈다.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밀고 들어가되 도톰한 전립선을 최대한 꾹 눌러 주었다.
“흐읍-! 읏-!”
은율이 입가를 손으로 막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반응했다. 그럴 때마다 내벽이 달라붙어 조여 대는 통에 자꾸만 사정감이 닥쳐왔다.
‘빨리 싸겠는데.’
아무렴 어때.
오늘 하루 내내 할 건데.
은율이 알면 기겁할 법한 생각을 하며 진환이 제 것을 뿌리까지 모두 박아 넣었다.
“하읏!”
배 속을 밀어 올리는 듯한 충격과 꾹 눌려 버린 전립선의 예민한 쾌감이 은율의 전신을 때렸다. 다리를 들고 사타구니를 활짝 벌린 상태에서 밀어 넣은 거라 그런지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진환이 제 입술을 뜨거운 혀로 핥아 대며 그대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 하아, 읏-!”
오랜만에 하는 거라 금방 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은율의 몸이 아직 놀라고 있는 게 느껴졌다. 거칠게 쑤셔 박다가 아파하면 안 되니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여 댔다. 안쪽에서 부드럽고 쫀득한 내벽이 진환의 것을 자꾸 내보내지 않으려고 붙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두어 번 움직이는 건데도 급하게 싸지 않기 위해 숨을 골라야만 했다.
“흐으……, 형…….”
은율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진환을 돌아보았다.
“아파? 더 천천히 할까?”
진환이 걱정스럽게 물으니, 아니라며 고개를 도리질한다. 은율이 머뭇거리며 제 입가를 가린 손을 내렸다. 한껏 붉은 입술이 진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더…… 빨리……. 더 세게…….”
진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진짜……!”
“아악-!”
모처럼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진환은 자제하던 이성을 날려 버리며 은율이 원하던 대로 빠르고 세게 안쪽을 쳐 대기 시작했다. 압박감과 격한 쾌감이 한꺼번에 닥쳐오는 바람에 은율의 입이 벌어지고 높은 교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은율은 눈앞에서 흰빛이 점멸하는 듯한 느낌과 몸 안에서 스파크가 튀어 돌아다니는 것만 같은 찌릿거림을 느꼈다. 진환의 것이 빠져나갈 때마다 내벽이 쓸려나가는 감각이 너무도 생생해 하체가 떨렸다. 이어서 깊이 쳐올리는 성기가 전립선을 강타하고 지나가니 전신을 빠르게 훑는 쾌감의 파도에 허리가 꺾이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읏! 하아-!”
신음 사이로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또렷이 들려왔다. 그것마저 두 사람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했다.
“흐읏……! 형……, 흣!”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몰리는 느낌 때문에 진환을 불렀다. 격렬한 피스톤질로 인해 전립선이 과하게 자극받아 그새 완전히 발기해서는 벌써 사정할 것만 같다.
은율의 신호를 알아챈 진환은 그의 다리와 골반을 단단히 붙잡고서 한층 거세게 밀어붙였다. 살과 뼈가 부딪히고 찌걱거리는 소리와 퍽퍽대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흐-, 아아-!”
주체 못 할 쾌감이 한계까지 다다르는 바람에 높은 교성이 터졌다 싶을 때, 발기한 성기에서 진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은율의 허리가 곡선으로 예쁘게 휘어지고, 가슴을 젖힌 탓에 그의 몸에 달라붙은 셔츠 겉으로 유두가 꼿꼿이 선 게 도드라져 보였다. 짙은 쾌감의 여파로 두 다리는 힘이 가득 들어갔고, 그것은 진환의 것을 물고 있는 내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통째로 잘라 버릴 것 같은 조임과 함께 극상의 쾌감을 느낀 진환 역시 짧은 신음과 함께 그의 안에 토정했다. 안을 채우는 뜨끈한 감각에 은율이 몇 번 더 크게 움찔했다.
은율의 안에 잔뜩 내보낸 진환은 은율의 허리를 한쪽 팔로 지탱해 주며 제 것을 천천히 빼내기 시작했다. 낮은 신음과 함께 내벽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정액이 묻은 제 것을 빼내고 그제야 은율의 다리를 내려 주니, 그가 전신에 힘이 빠진 듯 휘청거렸다. 얼른 그를 붙잡아 품에 안은 진환이 그 등을 토닥여 주었다.
“좋았어?”
은율이 숨을 고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네…….”
“그럼 우리 그간 못했던 만큼 좋은 거 더 잔뜩 하자?”
“……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묻던 은율은 그 길로 침대까지 옮겨져 다시금 몸을 떨어야만 했다.
* * *
진환은 제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은율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리해 주었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그가 평온한 표정으로 진환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은 천천히 내려와 말랑한 귀를 훑듯이 쓰다듬었고, 그러다 미끄러지듯 보드라운 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볼을 타고 내려와 손끝으로 수려한 턱선을 덧그리더니만, 이내 심장박동이 전해지는 목선을 간지럽히듯 쓸었다.
“……뭐 해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은율이 흐릿한 시야에 진환의 얼굴을 담았다. 기분 좋은 황홀경에 빠져 있던 진환의 입가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내 거 감상.”
은율이 픽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뻐근한 허리와 아릿한 골반이 동시에 아우성치는 바람에 그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잔근육이 얕게 붙은, 마르고 하얀 몸이 여실히 드러났다.
제 상체를 꼼꼼히 훑어보는 은율을 보며 진환이 불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일어나 앉아 은율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위에는 자국 안 남겼어.”
“위에는……?”
은율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은율의 몸을 끌어안은 진환의 손이 이불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자극하듯 쓸어 올렸다.
“안 보이는 데에 했어. 걱정하지 마.”
허벅지의 자극에 은율이 신음을 삼키며 노려보았다. 그것마저 예쁜지, 진환이 자신을 돌아보는 은율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아, 계속 이러고 있고 싶다.”
진환이 은율의 어깨에 얼굴을 비벼 댔다. 마치 커다란 도베르만이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라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촬영 잘 하고 왔어요?”
떨어져 있는 동안 인사처럼 매일 물었던 말이지만, 그래도 만나서 묻고 싶었다.
촬영은 어땠냐고, 음식은 입에 맞았냐고, 많이 힘들진 않았냐고, ……나 보고 싶지는 않았냐고.
거의 매일 통화하면서 같은 걸 묻고 같은 대답을 들었다.
“응, 잘 끝냈어.”
은율을 품에 안은 진환의 팔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밀착한 등을 타고 진환의 따뜻한 온기와 심장박동이 전해져 왔다.
“너무 힘들더라. ……너 보고 싶어서.”
작은 화상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서로의 모습은 매일 조금씩 달라졌고, 그 변화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볼 수 없다는 게 괜한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하루하루가 더디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은율은 앞으로 이번처럼 장기간 떨어져 있어야 할 일이 빈번하게 생길 거라 예상하면서도 그저 씁쓸히 웃으며 불만 하나 토로하지 않았다. 진환이 되었든 자신이 되었든, 배우 생활에 몸담은 이상 지방이나 해외 각지에 나갈 일이 더러 생길 거다. 하나하나 힘들어했다간 끝이 없을 테니 싫어도 적응해야만 했다.
‘정작 나도 열흘 가까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미 마음속에선 이준수 감독의 제의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이제야 만났는데 다시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곧바로 쓸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은율이 제 몸을 끌어안은 진환의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형, 저 말할 거 있어요.”
“뭔데?”
진환이 은율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그 체취를 빨아들였다. 몇 번이나 했는데도 또 아래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다.
“촬영 전날까지 아무래도 연기를 좀 다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형이 시간 되는 대로 도와줄게.”
진환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은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자신과 같은 샴푸 냄새가 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감독님께 도움을 좀 받으려고요.”
멈칫한 진환의 머릿속에 낮에 봤던 이준수 감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독? 이준수 감독?”
“네. 아마 촬영 전날까지 감독님 집에 머물면서 연기 연습을 하게 될 것 같아요.”
“뭐?!”
진환이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감독 집에서? 그 사람 집에서 아예 머문다고?”
“네. 거리도 있고, 효율적인 연습을 위해서 그게 나을 것 같다고…….”
“절대 안 돼!”
진환이 힘주어 말하며 은율의 눈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연기라면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형이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진환에게 연기로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나아질 게 아니다. 뭔가 근본적인 게 필요했고, 감독은 어떻게 하면 될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의 연기를 곱씹어 볼수록 보이지 않는 가시가 박힌 것 같은 거슬림이 있었다.
“……그리고 형도 바쁘잖아요.”
차마 솔직하게 말하진 못하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실제로 진환의 스케줄은 얼추 알고 있다. 그나마 그나마 시간의 여유가 있는 날도 하루의 절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에 반해 은율은 촬영 전까지 스케줄 하나 없이 비워진 상태였다.
“형 시간 될 때마다 도와줄게. 그럼 안 될까?”
“형도 쉬어야죠.”
“네가 없는데 어떻게 그래!”
진환이 은율을 끌어당겨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아까까지만 해도 황홀경에 젖어 있던 얼굴이 초조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다.
“그럼 형이 오고 갈 때 태워 줄게.”
“안 돼요. 감독님 자택이 인천인데 오가는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알아요? 형 스케줄에 지장 생겨요.”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결국, 큰 소리가 나왔다. 초조한 낯을 감추지 못한 진환이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걱정돼서 안 돼. 다른 사람 집에서 지내느니 차라리 형이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갈게.”
진환의 머릿속이 금세 패닉에 가까워졌다. 과거에 은율이 납치되었던 장면이 하나둘 떠오르자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은율에겐 내색하지 않았지만 정작 당사자보다 더 힘들어하던 게 진환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진환의 보호를 무작정 답답하다고 밀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은율은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기에, 그리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이서우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준수 감독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율이 손을 들어 진환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예전 같은 일도 없을 거고, 위험한 상황 만들지도 않을게요. 나 믿죠?”
“……널 못 믿는 게 아니야.”
그가 알아서 잘 처신할 거라는 생각은 진즉부터 하고 있었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다. 여태껏 뒤에서 나쁜 소리 한 번 나오지 않은 이준수 감독 같은 사람이 은율을 어떻게 해 볼 거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
그걸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넉 달간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거의 매일 은율에게 전화를 하고 자그마한 카메라로 그의 상태를 체크했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나빠 보이거나 힘들어하면 새벽 비행기를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은율이 제때 말리지 않았더라면 네 달 만에 만나는 게 아니라 최소 열흘에 한 번은 만났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촬영에는 지장이 생겼겠지.
은율과 또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머리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내가 날 못 믿겠어.”
그 감각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환이 제 밑에 깔린 하얀 몸을 끌어안았다.
“겨우 돌아왔는데 며칠간 널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가둬 놓고 촬영 전날까지 아무 곳도 못 가게 하고 싶어.”
진환의 한탄 섞인 목소리에 은율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가 진환의 등에 팔을 두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맞닿은 가슴이 찌르르 울려온다. 전류라도 흐르는 듯한 느낌이다.
진환의 집착 어린 말을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뛰었다.
이 사람이 정말 날 사랑하는구나. 이만큼이나 내 생각으로 꽉 차 있구나. 이렇게 될 정도로 나밖에 보이지 않는 거구나.
진환의 병적인 집착은 은율에게 있어 최고의 애정 표현으로 다가왔다.
은율의 귓가에 진환답지 않게 처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내가 너무 힘들게 하지.”
집착 심하고 까다로운 연인으로 낙인찍혔겠지. 아니, 이미 찍혀 있었나.
하지만 은율은 그의 등을 토닥여 주며 배시시 웃었다.
“아뇨, 전혀요. 난 좋은데요.”
은율의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없이 기분 좋게 울리고 있었다.
“잊지 않았죠? 집착해 달라고 했던 건 나예요. 진짜 기분 좋으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진환이 몸을 조금 떼어 은율을 내려다보았다. 지척에 있는 그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실렸다.
“근데 나 진짜 이번 거 잘해 보고 싶어요. 형이랑 드디어 투 톱으로 찍는 건데 맥없이 휘둘리고 싶진 않다고요.”
“네가 휘둘릴 리가 없잖아.”
은율이 씁쓸하게 웃었다.
“형이 과대평가하는 거예요. 대본 리딩 하면서 느꼈지만, 난 아직 형만큼 되려면 멀었어요.”
은율이 두 손으로 진환의 양 볼을 잡으며 그와 이마를 맞대었다.
“난 형에게 휘둘리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서우를 만들어 오고 싶어요. 그건 나 혼자선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양보해 줘요.”
눈을 감으며 이마를 통해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형과 떨어져 있기 싫어요. 하지만 형에게 못 미치는 연기를 하는 건 더 싫어요. 난 형과…… 최고의 연기를 하고 싶어요. 분명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촬영 날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안 될까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진환도 무작정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은율 역시 깊이 생각해 보고 말을 꺼냈을 거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의지하는지 알기에, 진환은 결국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매일 연락해야 해. 알지?”
“그럼요. 고마워요.”
고집을 꺾어 준 진환에게 고마워하며 은율이 그의 입술에 느릿하게 키스했다. 진환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제게 다가온 입술을 마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