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Actor/Crank In (22/33)

11. Actor/Crank In

이준수 감독의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으리으리했다. 높다란 오피스텔의 꼭대기에 자리한 펜트하우스는 진환의 화려한 단독 주택만큼이나 넓고 호화로워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없는 게 없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다양한 고가 기기들이 즐비하고, 여러 예술가의 다양한 장식품이 이곳저곳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게 결코 과하다거나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영화감독의 집이 아니라, 잘나가는 유명 아티스트의 집을 보는 느낌이었다.

낯선 집에 발을 들인 채 현관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집주인이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요.”

세련된 검은 추리닝 차림의 이준수 감독을 마주한 은율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요?”

준수가 은율의 손에 들린 캐리어 가방을 가져가며 물었다. 은율은 어차피 매니저가 데려다줘서 힘들 건 없었다고 답하며 앞서 걷는 준수를 뒤따랐다. 무거울 테니 자신이 들겠다고 했지만, 그는 못 들은 것처럼 고집스러웠다.

“당분간 이 방에서 지내면 돼요.”

준수가 안내한 방은 널찍하고, 깔끔하고도 정갈한 느낌이었다. 혼자 쓰기에는 너무 크지 않나 싶은 침대와 어두운 와인 색상의 원목 옷장,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협탁과 스탠드, 그리고 1인용 소파에 책장까지 있는 방이었다. 벽에는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넋을 놓을 법한 크고 아름다운 유화도 걸려 있어서 한층 분위기를 더했다.

방에 들어와서야 캐리어를 손에서 놓은 준수가 은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간단히 짐 정리한 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요. 커피 한잔 내줄게요.”

“예, 감사합니다.”

준수가 나가고, 은율은 방을 두리번거리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걱정하고 있을 진환에게 곧바로 메시지를 적어 보낼 생각이었지만,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형, 잘 있다가 오고, 혹시 그 감독이 이상한 짓 하면 거시기를 차 버려!]

[오빠 돌아올 때 알려 줘~! 올 때 맞춰서 오빠가 좋아하는 카레 해 놓을게! 그리고 감독이란 사람이 허튼짓하면…… 알지?^-^]

두 동생의 달콤살벌(?)한 메시지를 읽으며 피식 웃었다.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나니 이번엔 칼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며칠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이 아빠가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은데, 꼭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가? 그 감독이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감히 우리 아들한테 손대면 이쪽 판에 더 이상 발도 못 들이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길고 길다.

메시지 하나로 휴대폰 화면을 꽉 채운 장황한 내용에 은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이리 절절히 걱정해 주는 칼이 고마워, 그에게 정성껏 답장을 적어 보냈다.

고작 며칠간 감독의 집에 머문다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함께 촬영할 감독이라고는 해도 첫 만남 때 자신의 집에 들어와 연기 공부를 할 것을 제의하니, 의아해하고 경계할 만도 했다. 그래도 은율은 그와 했던 짧은 대화와 그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제게 절대 사심이 있어서 제의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애당초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제게 흑심을 품을 리도 없고 말이다.

답장을 모두 보낸 은율은 드디어 진환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제 연락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보이지 않아도 저절로 그려지는 그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잘 도착했어요.]

짤막한 메시지였지만, 진환이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답장을 보내 왔다.

[괜찮아? 무슨 일 안 당했지? 감독은 뭐래? 그 사람 막 수상한 짓 하는 건 아니지?]

묻는 내용이 뭐 이래.

진환의 극단적인 걱정을 보며 역시나 그도 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요. 아주 신사적이시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직 촬영 중이죠? 또 연락할 테니 촬영 집중하세요.]

굳은 얼굴을 한 채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진환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이렇게나 제게 온 정신을 쏟으면서도 모든 일을 차질 없이 완벽하게 해내니 후배로서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예, 그럴게요.]

짤막하게 말을 끊으려는데, 곧바로 메시지가 온다.

[사랑해.]

고작 세 글자를 속으로 되뇌어 읽었을 뿐임에도 얼굴이 홧홧해진다. 마치 진환이 제 귀에 대고 낮게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도 사랑해요.]

답장을 보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진환의 얼굴을 그렸다. 차갑기만 하던 무표정이 사르르 허물어지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을 그 얼굴이.

한창 메시지를 보내고서 뒤늦게 편한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은율은 문을 열자마자 진한 커피 향이 훅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예사롭지 않은 깊고도 감미로운 향에 이끌리듯,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다. 마침 양손에 찻잔을 든 준수와 눈이 마주쳤다.

“설탕은 얼마나 넣을까요?”

주방 선반에 놓여 있는 작은 각설탕 바구니를 눈짓하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원래 달지 않게 마셔서요.”

“나랑 같네요.”

준수가 눈꼬리를 휘며 제 손에 들린 찻잔 하나를 은율에게 건네었다. 들린 찻잔을 받아들자마자 한층 진한 커피 향이 코를 간질였다.

“이쪽으로 와요.”

준수가 거실로 앞장섰다. 그가 길고 푹신한 거실 소파에 앉으며 제 옆자리를 권했다. 뒤따라 앉아 찻잔의 커피를 살짝 맛본 은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굉장히 맛있네요.”

은율의 가감 없는 심플한 말에 준수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카페인 중독이라서 커피 없으면 못 살다 보니 맛 좋은 원두를 많이 찾게 되더군요.”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던 준수가 앞에 있는 유리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두를 장황하게 푸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준수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은율의 얼굴을 훑었다. 금세 딱딱해진 공기를 느끼며 은율 역시 커피가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은율 씨는 연기를 공부한 지 얼마나 됐죠?”

“연기 학원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아는 선배님께 지도를 받은 지는 1년 반 정도 됐습니다.”

데뷔하기 전부터 진환이 지도해 준 걸 포함하면 그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정식으로 공부하려 해도, 연기 학원을 다닐 시간도 없을 만큼 데뷔 때부터 바쁘기 그지없었다. 그중 반년은 해외에 있었고 말이다.

다만 진환이 붙어 있으면서 수시로 연기 공부를 시켜 주고 그때그때 실전처럼 대본 리딩을 해 준 덕분에 그나마 실력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바였다. 그게 얼추 1년 반이다.

준수가 눈을 반짝이며 조금 놀란 목소리를 뱉었다.

“정식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라면 정말 대단한 재능이네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은율의 겸손한 말에 준수가 턱을 손등에 괸 채 그를 분석하듯 들여다보았다.

“빈말이 아니에요. 서은율 씨 재능 있어요. 나도 그걸 알아봤으니 지금 이 자리에 서은율 씨를 부른 겁니다.”

진심 어린 칭찬을 들어서인지 괜히 쑥스러워졌다.

“서은율 씨가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습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소한 것도 상관없으니 뭐든 말해 봐요.”

그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은율의 일과는 단순했다. 촬영이든 인터뷰든, 일이 있다면 성실히 임하고 남는 시간에는 언제나 대본집을 손에 들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 촬영할 대본이 아니더라도 진환에게 배역이 간 영화나 드라마라면 내용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암기하며 캐릭터를 분석하곤 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공부도 될 뿐더러 진환과의 대본 리딩까지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 외의 시간에는 진환과 칼의 막대한 자산 중 일부를 은율이 개인적으로 운용해 주며 관리하느라 노트북을 붙들고 있는 게 다였다. 기실 매일매일 관리할 필요는 없었기에 일부러 감독과 함께 캐릭터 만들기에 집중하려고 노트북도 두고 왔다.

그렇다 보니,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라고는 진환과 연락하는 거나 대본을 읽는 것뿐이었다.

“굳이 제가 촬영하지 않는 작품이더라도 공부를 위해 항시 대본을 보는 편입니다.”

고민 끝에 대답하니, 준수가 은율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참 열심이긴 한데 재미없는 사람이네요.”

“그렇습니까?”

딱히 비하하는 투는 아니었기에 작게 웃기만 했다.

“또 뭐가 있죠?”

“음…….”

은율이 눈을 굴렸다.

“해외 경제 관련 뉴스를 자주 봅니다.”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네.”

이번엔 좀 많이 진심이다. 은율이 어색하게 웃으니, 준수가 물어 왔다.

“혹시 애인은 없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물음에 은율이 움찔하긴 했지만, 일찍부터 연습해 온 대로 즉답했다.

“없습니다.”

“아쉽네요.”

애인이 있다면 좀 더 도움이 될 텐데.

‘가장 효과적일 테고.’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던 준수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매일 연락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족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질문을 받자마자 머릿속에 진환과 칼이 떠올랐다. 두 동생이야 저와 함께 살고 있으니 매일 연락하진 않고 직접 본다지만, 진환과 칼은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게 당연했다. 오늘만 해도 저녁때 두 사람과 각각 통화를 해 줘야 할 판이다.

“제게 연기를 지도해 주신 선배님, 그리고 아……, 음, 삼촌과 매일 연락하고 있습니다.”

순간 아빠라고 할 뻔했다. 대외적으로 서은율의 부모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칼은 삼촌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짓고 말았다.

“좋네요.”

준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흥미로운 게임을 앞둔 사람처럼 약간 흥분한 얼굴을 했다.

“그럼 오늘부터 촬영 전날까지 두 사람과의 연락을 끊읍시다.”

“……예?”

청천벽력 같은 말에 눈이 커다래졌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장장 10시간에 걸친 야외 촬영이 드디어 끝이 났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서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나누고, 매니저들은 자신의 배우를 케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고하셨어요, 이진환 씨.”

조금 전까지 애틋한 포옹을 나눴던 상대 여배우가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 그녀는 컷 소리가 나자마자 떨어지는 진환을 보며 씁쓸해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연예계에서 미모라면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으리라 자부하는 그녀였다. 그런 자신도 진환의 철벽을 말랑하게 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런데도 기분 나쁘진 않았다. 이런 남자가 어디 흔하던가.

‘이런 남자일수록 자기 여자한텐 한없이 다정하던데.’

톱배우 이진환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철벽을 두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 철벽을 녹이고 그 안에 들어가 안길 여인을 생각하니 벌써 부러워진다. 그리고 그 여인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혹시 애인 있는지……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일단 오늘 시간 좀 내줄 수 있냐고 용기 내어 물어볼까. 연기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니 상대 배역으로서 감정선에 대해 의논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응해 주지 않으려나.

“저기.”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진환을 불러 세웠다. 귀여운 인상의 매니저 연우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든 그가 무표정하게 돌아본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는 것 같았지만, 요 며칠간 자주 봤던 모습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혹시 이 뒤에 촬영 있으신가요?”

진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입니다.”

“잘됐네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식사를 요청해도 될까요? 내일 촬영할 부분의 감정선을 좀 다듬고 싶어서요.”

여인이 수줍게 웃으며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우아하게 뒤로 넘겼다.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한 장면 같고 청초한 아름다움이 넘치게 흘러나왔지만, 진환의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싶군요. 내일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등을 돌리려는데, 여인이 두 손으로 진환의 손목을 덥석 잡아 왔다.

“저기, 이진환 씨!”

진환이 고개를 홱 돌리며 강렬한 눈빛을 쏘아 댔다.

“촬영 때가 아니라면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제가 타인의 접촉에 굉. 장. 히. 민감해서요.”

싸늘한 말에 움찔한 여인이 얼른 손을 떼었다. 순간적으로 목에 칼이 겨눠진 것만 같은 살벌한 기운에 그녀가 한차례 몸을 떨었다.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바짝 얼어 있는 여배우를 뒤로 한 채 촬영장을 나섰다. 그 뒤를 걱정스러운 얼굴의 매니저 연우가 얼른 뒤따랐다.

진환은 긴 다리를 뻗어 밴이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제 손에 들린 휴대폰에 닿아 있었다.

새로운 메시지도, 전화가 온 흔적도 없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속이 타들어 가서 울컥하는 바람에 그 휴대폰을 던져 버릴까 싶은 충동도 들었으나, 어떻게든 참아 냈다.

은율의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사흘이다.

이준수 감독의 집으로 향했던 그 날, 은율은 도착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제게 전화를 걸었다. 빠른 연락에 기뻤던 나머지 한창 촬영 중임에도 10분만 쉬겠다고 말하며 그의 전화를 받았다. 진환이 버젓이 촬영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화를 했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으나, 무작정 은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들뜬 목소리의 진환에게 은율은 담담히 말했다.

-나, 촬영 시작하는 날까진 형한테 연락 못 할 것 같아요.

뜬금없는 말에 진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이서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답답했다. 만나지 못하는 건 그렇다 쳐도 연락도 못 한다니? 전화도 문자도 할 수 없다니? 그게 이서우를 이해하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이라고는 꼭 그래야만 하냐는 말뿐이었다.

-더 통화하고 싶은데……. 미안해요, 형. ……사랑해요.

그 말이 끝이었다. 마치 더 길게 통화했다간 결심이 흔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아쉬움을 남긴 채 먼저 전화를 끊었다. 진환은 그 후 쉬기로 했던 10분을 넘어서까지 멍하니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사흘 전 그때를 떠올리니 속에서부터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해외 촬영이 있을 때마저 아무리 바빠도 연락을 나누지 못한 날이 없었거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밴에 올라탄 진환은 은율에게 보낸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율아,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 좀 해 줘.]

[만나서 얘기하자. 만나서 형 보고 다시 얘기해.]

[형 미칠 것 같아. 대체 무슨 일인 거야? 괜찮은 거지?]

그 외에도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읽었다는 표시가 없다. 전화를 걸어 봐도 휴대폰은 언제나 꺼져 있었고, 촬영 도중에는 연우를 시켜서까지 수시로 전화를 걸게 했지만 단 한 번도 신호가 간 적이 없다.

한숨을 푹 내쉬며 메시지 화면을 닫았다. 빼곡히 자리한 메시지만큼이나 그의 머릿속 역시 갖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날 촬영이 끝나자마자 칼을 찾아갔다. 은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사장실을 쳐들어갔더니, 의외로 태연한 낯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건가 싶어 입을 열려는데, 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당분간 은율이한테 연락이 가지 않더라도 참아요. 그게 애를 도와주는 거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촬영 전까지 연락 한 통 할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초조하게 소리치자, 칼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은율이가 결정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우리가 참자는 거예요.’

의문을 담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진환을 보며 칼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촬영 당일에 만나서 들어야 할 것 같으니,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요. 혹시라도 직접 찾아갈 생각은 말죠. 내가 말릴 거니까.’

마지막에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이준수 감독 집에서 열흘 가까이 있는 동안 아무 연락도 할 수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캐릭터 만들기를 그렇게 해요?!’

답답한 마음에 초조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칼은 의외로 담담했다.

‘내 아들이 그렇게 약해 빠진 녀석으로 보입니까?’

그가 진환의 어깨를 다독이듯 두드렸다.

‘난 그 애가 선택한 일에 왈가왈부할 생각 없어요. 그게 최선이니까 그리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칼의 말에 진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자신만큼이나 은율의 안위를 걱정하고 목을 매는 사람이거늘, 눈빛이 너무나 차분했다. 칼의 어두운 회색 눈동자를 마주한 진환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율이도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럴 거야.

내가 믿고 기다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휴대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머릿속에는 진즉에 외워 버린 이준수 감독의 자택 주소가 맴돌고 있었다.

칼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던 진환에게 운전석의 연우가 말을 걸었다.

“오늘은 바로 자택으로 가실 거죠, 형?”

그제야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진환이 지친 듯 눈을 감으며 좌석 깊이 몸을 묻었다.

“그래. 내일 촬영 전까지 연락하지 마. 내내 잘 거니까.”

깨어 있어 봐야 은율에 대한 생각만 가득할 거다. 그 때문인지 근래 식욕도 의욕도 없이 피곤하기만 해서 그냥 깊이 자 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연우는 백미러를 통해 진환을 힐끔거렸다. 완전히 녹초라도 된 것처럼 늘어진 그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간 잠도 못 자고 촬영을 감행해도 쌩쌩하기만 하던 철인 이진환은 어디 갔단 말인가. 여태껏 저리 지친 모습은 보지 못했거늘, 새삼 은율의 존재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저러다 며칠 못 버틸 것 같은데…….’

지쳤을 뿐 아니라 신경도 예민해져 있고 매사 날이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영양제를 챙겨 주고 있긴 하지만 식사도 최소한으로 하는지라 혹여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프로 중의 프로이니 덜컥 쓰러질 정도로 자신을 몰아세우진 않겠지만, 은율이 관련된 일에는 워낙 온 신경을 쏟는 진환이라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추면서도 연우의 머릿속은 진환만큼이나 복잡해졌다.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

칼의 당부가 떠올랐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말해 주도록 해요. 하지만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게 베스트입니다. 알죠?’

‘예, 알죠. 아는데…….’

다시금 백미러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새 눈을 뜬 진환이 다시 휴대폰을 노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저 머릿속엔 은율에 대한 갖은 생각이 가득하겠지.

고민하던 연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저기, 형.”

조심스레 불러 보았다. 피곤함 묻은 진환의 눈이 백미러를 통해 연우와 눈을 맞춰 왔다.

“한 달에 한 번 대학로 쪽에서 영화 관련 강연 있는 거 아세요?”

모를 리가 없다. 연예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강연으로, 한국 콘텐츠 진흥원이 주관하는 꽤 큰 행사였다. 매번 이름 있는 감독들이 강연할 뿐만 아니라 간혹 유명 배우들이 마이크를 잡는 예도 있어서 관심도가 상당했다. 과거 진환은 그 강연 제의를 거절했지만, 은율의 데뷔작을 찍었던 곽철민 감독은 두 달 전에 강연한 바가 있었다.

진환은 연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왜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하냐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찔끔한 연우가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운전대를 꽉 잡았다.

“이틀 후가 강연 날인데, 이번엔 그게 이준수 감독님 강연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준수 감독의 이름이 나오자 진환의 눈꼬리가 꿈틀했다.

“마침 그날은 새벽 촬영뿐이니까…….”

연우가 눈을 굴리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그렇다고요. 하……, 하하…….”

웃음을 흘리며 백미러를 힐끔 보니, 진환이 다소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다.

진환은 손에 든 휴대폰에 이준수 감독의 번호를 띄워 놓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이준수 감독에게 연락하려고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일이 있을 때 외에는 집에만 박혀 있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 말인즉슨 은율과 하루 내내 함께 있을 거라는 뜻이다. 감독은 자신과 은율의 관계를 모르고 있으니, 같은 소속사 선배로서 은율의 안부를 묻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혹시 이준수 감독에게 연락한 게 은율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실망하지 않을까. 자신이 부족해서 진환을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우울해할 수도 있다.

은율이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 충분히 알고 있지만, 최소한 좋은 기분은 아닐 거다. 그래서 진환은 이준수 감독의 집을 뻔히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외부에 혼자 나와 있다면 접근하기 쉬울 텐데 말이다.

진환의 머릿속에 강연 날짜와 위치가 멋대로 재생되었다. 강연 제의가 왔을 때 이미 상세 위치는 외워 둔 상태였다.

그를 만나면 확실히 답을 얻을 수 있겠지.

이준수 감독이란 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의도로 은율을 제집에 가둬 둔 것인지, 그리고 그는 잘 있는지.

진환은 시도 때도 없이 아른거리는 은율의 얼굴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  *  *

“여러분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단상에 서서 마이크를 잡은 채 좌중을 훑으며 물었다. 300명 수용 가능한 강연장 내부는 이미 수많은 사람으로 인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고, 그들 모두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쪽에 주목하고 있었다.

좌중 어느 한 곳에서 짤막하게 ‘스토리’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를 알아들은 이준수 감독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스토리. 시나리오. 그렇죠, 시나리오는 굉장히 중요해요.”

그 와중에 다른 쪽에서 ‘연출’이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준수는 그것 역시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출도 중요하죠. 맞는 말이에요.”

한 손에 마이크를 들고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모습으로 단상을 좌우로 두어 걸음 걸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자신이 할 말을 정리하는 듯했다.

“스토리와 연출력이 없으면 어떤 영화든 망해요. 시작도 못 하고 주저앉을걸요?”

준수가 무표정하던 얼굴에 작게 미소를 걸었다.

“근데 말이죠.”

준수는 경청하는 좌중을 향해 그 또렷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주연, 조연, 단역, 전부요.”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확신이 들어 있었다.

“스토리가 아무리 좋고 연출력이 대단해도 캐릭터가 매력적이지 않으면 기억에 남지도 않아요. 금방 잊히죠.”

준수의 깊은 눈동자가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쳐 주려는 것처럼 좌중을 세세히 훑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아니면 뉴스든, 어떤 경로로든 한 배우를 접하면 모든 사람이 그가 누구인지 기억할까요? 자동으로 이름이 튀어나오고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 모든 배우를 줄줄이 꿰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보통은 이렇게들 말하죠. 어느 영화의 어떤 배역으로 나왔던 사람이다. 어느 드라마에서 무슨 연기를 했다.”

준수의 그 말에는 좌중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배우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 사람이 낯익다는 건, 어떤 매체에 출연해 얼굴을 비쳤기 때문이다. 그걸 본인이 두 눈으로 봤던 것이고.

“영화에서 캐릭터가 약하고 매력적이지 않으면 스토리와 연출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기억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건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에요. 소설도 마찬가지고 게임도 마찬가지죠. 우린 그 캐릭터를 통해 감정 이입을 하고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는 겁니다. 스토리가 산으로 가고 바다에서 허우적대도 캐릭터가 분명하고 매력적이면 그 하나 때문에도 생기가 돌죠. 보통 그런 걸 두고 멱살 잡혀 끌려간다고 표현하더군요.”

거침없는 말에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준수 역시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리며 눈가를 휘었다.

“그만큼 캐릭터는 중요합니다.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받쳐 주는 조연과 단역 모두가 중요해요.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그 부분이 특히 부각돼 보이기 때문에 전체 흐름이 망가지죠. 그래서 캐릭터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들 역시 굉장히 중요합니다.”

문득 준수의 시선이 좌중의 정면 가장 뒷자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검은 세미 정장 차림에 검은 모자까지 눌러쓰고, 심지어 검은 선글라스까지 낀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서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준수에게 따가울 만큼 강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쯤은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전 캐릭터를 굉장히 중요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완벽한 스토리와 최상의 연출력을 준비하되, 그에 걸맞은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우를 찾아다녀요. 사실 배우를 선정하는 게 제일 오래 걸릴 겁니다. 그만큼 제가 아주 까다롭거든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검은 옷의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다리를 꼰 채 손등에 턱을 괴고서 이쪽을 바라보는 것뿐임에도 그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준수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완벽히 구현해 줄 수 있는 배우는 얼마 없어요. 그게 가능한 배우를 찾으면 무릎걸음으로 기어가서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수 있어요. 정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강렬하면서도 진중했다. 그만큼 진심이었고, 강연장의 사람들 역시 그걸 알아챘다.

“문제는 그런 배우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내 의견을 따라 줄지는 직접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예요. 배우가 자기 자존심과 사생활까지 다 버려 가면서 내가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줄 각오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가득하죠. 그 사람들이 나만큼이나 캐릭터의 중요성을 이해해 주고 빠져들어 주길 바라는 건 어찌 보면 일종의 아집이에요.”

졸고 있는 사람 하나 없이 완벽히 집중하고 있는 좌중을 둘러보며 준수가 진심 어린 목소리를 뱉었다.

“그런 날 이해해 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서라도 완벽한 캐릭터를 만들려고 하는 배우가 나타난다면…….”

준수의 눈이 다시금 검은 옷의 남자에게 향했다. 저 멀리 앉아 있음에도 마치 그와 지척에서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빼앗는, 굉장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모습에 한 톱배우의 얼굴이 겹쳐졌다.

“난 아마 그 배우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순간이지만, 검은 옷의 남자에게서 흉흉한 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강연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예상보다 일찍 끝내 버리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질문 시간을 가져 버렸지만, 덕분에 강연이 끝났는데도 줄줄이 붙잡히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깨끗한 백지를 내밀고서 눈을 빛내는 이들에게는 손목이 뻐근해질 만큼 사인을 해 줘야 했지만 말이다.

강연장 밖으로 나온 준수는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6시가 다 되어 간다. 주인 없는 집에서 머물고 있을 한 사람을 떠올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오늘 저녁은 뭘 시켜 먹을까 하는 고민이 앞섰다.

“이준수 감독님.”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건 멈추고 싶어서 멈췄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우뚝 서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있던 준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강연장에서 보았던 검은 옷의 남자가 서 있었다. 강연 내내 싸늘한 무표정만 짓고 있더니, 이번엔 웬일로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푹 눌러쓴 모자에 가려져 얼굴의 반 가까이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강연 잘 들었습니다.”

모자챙을 약간 들어 올리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목소리는 분명…….

“인상적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준수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이런 강연에도 흥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남자가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의 강렬하고 선명한 눈동자가 준수를 마주했다.

“사실 강연 자체에는 관심 없었지만, 감독님께는 제가 좀 흥미가 많아서요.”

“톱배우님이 그리 말해 주니 기분 좋네요.”

너스레를 떠는 준수를 향해 진환이 작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눈은 웃고 있질 않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진환의 물음에 준수의 시선이 자동으로 휴대폰에 닿았다. 집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계산해본 준수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짧게만 가능할 것 같군요. 제가 집에 좀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진환의 눈에 순간적인 예기가 감돌았다.

“혼자 사신다고 알고 있는데, 집에 누가 있나요?”

“예, 같이 식사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싱긋 웃는 낯에서 튀어나온 즉답에 진환의 눈꼬리가 꿈틀했다. 결국 참다못해 묻고야 말았다.

“그 식사할 사람이라는 게 서은율 씨입니까?”

준수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래졌다. 그러다 금세 가라앉아서는 진환을 이채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같은 소속사였죠?”

호기심을 담은 예리한 눈동자가 진환을 분석하듯 훑어보았다. 그가 곧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달로 휘었다.

“진환 씨였군요? 은율 씨 연기 지도한 선배님이라는 게.”

진환은 은율이 그리 말했을 거라 짐작했다. 애당초 걱정 많은 은율에게 앞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누가 묻는다면 그렇게 대답하라 말했다. 그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거늘, 이렇게 타인의 입에서 저 말을 들으니 속이 쓰리다.

“예, 함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걱정된 마음에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군요?”

준수가 다시금 시간을 체크하며 씩 웃었다.

“이진환 씨가 제 강연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는 것쯤은 진즉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곤 해도 분위기가 워낙 살벌해서 말이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기함과 흥미를 담은 눈동자는 자꾸만 진환을 담아냈다.

이진환이 선후배 사이라고 해서 누군가를 신경 쓸 위인이던가. 이전에 몸담았던 소속사의 내로라하는 배우들마저 그와 달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 거로 아는데, 신인 배우 서은율은 왜 이리도 신경 쓰는 걸까.

‘첫 데뷔작에 카메오로 출연해서? 아니면 화보에 함께 실려서? 그도 아니라면 <에어윈드> 촬영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하던 준수가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굴렸다.

사실은 그 모든 게 후순이었던 건 아닐까. 두 사람은 그보다 먼저 만났고, 그때부터 이진환이 서은율을 마음에 들였던 거라면?

그 생각이 들자마자 오싹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었다. 이진환이 아직 원석 수준이었던 서은율을 인정해 발굴했고, 그를 위해 빠른 길을 닦아 줬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의 이진환이 왜?

이진환이 눈여겨볼 만큼 서은율의 잠재력과 연기력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난 게 아닐까.

당장 집에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은율을 붙잡고 날이 새도록 연기를 시키고 싶었다. 자꾸만 안달이 나서 속이 저릿할 지경이다.

그러던 찰나, 준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찍힌 번호는 다름 아닌 제집 유선 전화번호였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진환을 똑바로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예, 은율 씨.”

준수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진환의 눈이 부릅떠졌다. 준수는 그 눈빛마저 즐기며 한가로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끝났어요. 곧 들어갈 겁니다.”

“율아!”

저도 모르게 다급히 애칭을 부르며 한발 다가섰다. 준수는 그런 진환에게 한쪽 팔을 뻗어, 그를 막으며 통화를 이어 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방 갈게요. 뭐 먹을지 생각해 놔요.”

준수답지 않게 꽤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환은 자신을 막은 준수의 팔을 쳐내고서 당장이라도 그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흥분했다 해도 곧 있을 촬영 감독에게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격한 감정을 이성으로 억눌러 대며 애써 분을 참았다.

준수는 그런 진환을 보며 마치 저 홀로 흥미로운 드라마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겐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이진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부터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들어가는 길에 한 번 더 연락할게요. 이따 봐요.”

말이 이어질수록 진환은 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일부러 제 속을 긁으려는 게 분명한 저 태도가 특히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준수가 히죽거리며 진환을 들쑤셨다.

“이진환 씨 지금 얼굴 굉장하네요.”

준수의 예리한 눈은 진환이 나름 갈무리한 가면을 너무도 쉽게 간파해 버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환의 눈에선 이미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으니까.

“서은율 씨와는 정말 선후배 사이이기만 합니까?”

“……아끼는 동생입니다.”

그 말이 사실일까? 아니, 사실이라 하더라도…… 과연 그것뿐일까?

“서은율 씨는 잘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준수의 말에 진환의 눈가가 잘게 일그러졌다. 정말 잘 있는지, 어디 아프거나 힘든 건 없는지 직접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은율 씨를 만나게 해 주세요.”

“안 됩니다.”

준수가 낯빛을 바꾸며 진지하게 못을 박았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예요.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진환 씨라면 더더욱 안 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서 더 안 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일까?

속이 탄 진환이 한층 언성을 높였다.

“왜입니까? 못 만나게 하는 정확한 이유라도 알려 주시죠.”

“서은율 씨가 ‘이서우’를 완성하려면 이진환 씨와 거리를 둬야 해요. 그게 정확한 이유입니다.”

더더욱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멱살을 잡아채 잔말 말고 은율을 만나게 해 달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사실 그의 집 주소까지 이미 다 파악해 둔 상태였기에 직접 가려면 못 갈 것도 없지만, 준수의 허락 없이는 은율이 제 발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더 그의 허락이 필요한 건데, 자꾸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만 해 댄다.

“이진환 씨는 워낙 연기에 도가 튼 사람이니 나중에 서은율 씨를 마주하기만 해도 뭐가 달라졌는지 알 겁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불어넣고 싶은 게 뭐였는지.”

진환은 아직도 준수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은율이 다른 이들과의 연락을 강제로 끊어야만 했던 것일까. 대화하면 할수록 의문만 가중되었다.

돌연 진환에게 바짝 다가선 준수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이진환 씨……, 지금 굉장히 이상한 거 압니까?”

준수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마치 애인과 연락 두절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군요.”

속으로는 흠칫 놀랐으나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준수를 마주할 뿐. 그러나 그의 얼굴도 뒤에 이어진 말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정작 은율 씨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이제 보니 매일 연락했다던 게 사실은 이진환 씨가 연락을 강요했기 때문인가 보군요. 아닙니까?”

진환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를 꽉 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과 꽉 쥔 두 주먹이 준수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진환을 유심히 바라보던 준수가 피식 웃으며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뭐, 내가 너무 많이 나간 것 같긴 한데, 아끼는 후배이고 도와주고 싶은 게 분명하다면 촬영 당일까지 차분히 기다려 줬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준수는 몸을 돌렸다.

“그럼 촬영 당일에 봅시다.”

싱긋 웃으며 떠나는 그 뒷모습을 눈에 담은 진환은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함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미 준수의 모습은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으나, 진환은 그 자리에 망부석인 양 서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환의 머릿속에선 조금 전, 감독의 다정한 통화가 멋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은율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완벽한 ‘이서우’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고, 절대 준수에게 애정을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진환이 답답한 건, 왜 자신은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연기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라 자부하고 있었고, 그것은 은율도 인정하는 바였다. 은율이 준수의 집으로 향하겠다고 처음 말했던 그때는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최대한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은율도 고심 끝에 꺼낸 말일 거고, 그럴 필요성이 충분하기에 결정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내지 않는 건데.’

두 주먹이 힘을 견디다 못해 잘게 떨려 왔다. 차라리 더 강하게 붙들고서 자신이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할 것을.

‘정작 은율 씨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이제 보니 매일 연락했다던 게 사실은 이진환 씨가 연락을 강요했기 때문인가 보군요. 아닙니까?’

준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쉴 틈 없이 매일 메시지를 보내며 연락하던 것도 자신이었고, 전화를 먼저 하는 것도 언제나 자신이었다. 만약 자신이 먼저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은율이 먼저 연락해 줬을까? 왜 자꾸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지?

평소에는 전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던 것이 이제 와서 속을 쓰리게 만들었다. 사실은 그 모든 게 은율에겐 ‘강요’처럼 느껴졌던 걸까.

‘율이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모르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은율에 관해선 뭐든 그렇다와 아니다를 답할 수 있었거늘, 지금은…… 정말 모르겠다.

*  *  *

첫 촬영 당일, 진환의 얼굴은 참으로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흉흉하다 못해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살벌한 얼굴은 그의 오랜 매니저 생활에 익숙해진 연우마저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분명 무표정했지만,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살기인가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날이 서 있었다.

야외 촬영지에 도착해 밴을 세운 그때까지도 진환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프로답게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색을 감췄고, 태연한 낯으로 촬영장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첫 촬영은 깊은 밤이었다. 좁은 길에 간간이 가로등만 서 있는 을씨년스러운 골목이었고, 주변은 이미 촬영을 위해 통제된 상태였다. 봄이긴 했어도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늦은 밤에, 달빛도 잘 닿지 않는 곳이다 보니 으슬으슬한 기운이 감돌았다.

진환은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를 알아본 이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인사를 건넸지만, 진환은 가볍게 고개만 까딱여 보일 뿐 입 한 번 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누군가를 찾듯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진환의 눈에 저 멀리 혼자 빛나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그에게만 달빛이 오롯이 내리기라도 한 듯 홀로 대낮처럼 환하다. 검은 후드집업에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블랙진을 입고서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모습이 왜 저리 예쁘게만 보이는 걸까.

오랜만에 은율을 봐서 그런지 거리가 꽤 있음에도 그의 상태가 한눈에 보였다. 웃는 낯으로 여성 스태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꽤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약간 마른 것도 같다. 감독이 밥도 잘 안 챙겨 주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강연 직후에 감독이 직접 전화를 걸어 먹고 싶은 걸 물을 만큼 둘이 여간 친밀한 게 아니던데, 끼니도 챙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가 말라 보이는 건 그저 제 착각이리라.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기분이 안 좋아졌다. 못 본 동안 독점욕만 더 심해진 건지, 당장이라도 은율을 붙잡아 제 밴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다. 아무도 그를 볼 수 없게 짙게 선팅된 밴 안에 처박아 넣고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키스를 해 댔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대체 뭐 때문에 연락을 끊었던 거냐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넌 괜찮았냐고, 나만 죽을 것 같았냐고 물어야겠다. 그는 뭐라고 답해 줄까.

가까이 다가가는데 누군가가 팔을 덥석 붙잡아 왔다.

“오셨어요, 이진환 씨!”

밝은 목소리의 여인이 진환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눈웃음을 보였다. 진환은 그녀가 대본 리딩 직후에도 제게 친한 척 말을 걸어 왔던 여배우 임소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연기하는 강현태의 여자친구 역할이었다. 오늘 자신과 합을 맞추는 부분은 없을 텐데 왜 여기 와 있는 걸까?

“안녕하세요, 임소민 씨. 오늘 소민 씨 분량은 없는 거로 아는데요.”

무덤덤하게 말하자 소민이 아이처럼 진환의 팔을 좌우로 살살 흔들어 대며 배시시 웃었다.

“첫 촬영 날이라기에 구경하러 왔어요.”

그러고 보니 연기하러 온 차림새는 아니다. 편한 원피스에 카디건 정도만 걸친 차림으로, 예쁘게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어서 넘긴 상태였다.

“이진환 씨 연기도 보고 싶었고, 그리고…….”

소민이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서 있는 은율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침 그의 눈이 이쪽을 향했고, 그가 순간 멈칫하는가 싶더니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해 왔다.

“아무래도 직접 연기하는 걸 보고 싶어서요.”

소민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탐탁지 않았다.

이번 첫 촬영은 사실 굉장히 중요했다. 관중을 얼마나 몰입시키느냐는 이 첫 촬영이자 인트로 부분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작은 ‘이서우’가 어두운 골목에서 한 여자를 뒤쫓아 가는 데에서부터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지만, 골목을 지나면 지날수록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간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여인이 걸음에 속도를 붙여 보지만, 다음 모퉁이를 돌 때 그녀는 이서우에게 붙잡혀 단칼에 목을 베이고 만다.

이서우가 자리를 떠나고 조금 뒤, 시체를 발견한 한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간다. 뒤이어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강현태와 동료 경찰들이 분노에 찬 얼굴을 하며 이를 악무는 모습이 잡힌다.

“첫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데, 잘하려나 모르겠네요. 연기는 괜찮은데 아무래도 신인이다 보니 걱정이……!”

“임소민 씨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처럼 오신 김에 잘 보다 들어가세요. 공부가 될 테니까.”

싸늘하게 말하며 소민의 손을 제 팔에서 떼어 냈다. 연기 중이라면 모를까, 그 외에 누가 이렇듯 들러붙는 건 질색이다. 제 소문을 충분히 들었을 텐데도 소민은 아랑곳하지 않는가 보다.

강제로 손이 떼어 내진 소민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었다.

“그럼요. 진환 씨와 선배님들에게 많이 배우고 갈게요.”

“후배님에게도 배워야 할 겁니다.”

“예?”

소민의 의아한 얼굴에 한소리 더 해 주려는 찰나, 이번엔 누군가가 제 어깨에 친한 척 팔을 둘러 왔다.

“어서 와, 이 배우.”

친근하고도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 보니, 작중 강력반 반장 하준열 역의 강주원이 씩 웃고 있다. 이전 대본 리딩 때는 스케줄 때문에 간단히 인사만 하고 떠났던 주원이었지만, 오늘은 본인의 촬영 날짜도 아닌데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나온 모양이다. 진환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가볍게 인사했다.

털털하게 웃으며 진환의 인사를 받은 주원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소민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주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도 진환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로 봤을 때 더 말을 이어 나가기 힘들겠다 싶었는지 그녀는 “오늘 잘 배우고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종종걸음으로 제 밴을 향했다.

“표정 좀 풀어.”

주원이 어깨에 얹은 손을 툭툭 두드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환이 연기로 인정하는 배우 중 하나이자 여태껏 여러 번 합을 맞춰 왔던 상대인지라, 그가 친근하게 굴어도 가만히 받아 주었다.

“너 때문에 촬영장 공기가 다 얼어붙는 것 같다.”

그가 오버를 좀 하긴 했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근처의 몇몇 스태프들은 자꾸만 진환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게 보였다.

“소민 씨한테도 쇼맨십 좀 하지, 쌀쌀맞게 그게 뭐야.”

“굳이 쇼맨십을 해야 합니까?”

불퉁하게 대답하니 주원이 손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배우 정도 되면 안 해도 되겠지만, 그래도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촬영 끝나면 곧 잊을 사람인데 뭐 하러 그럽니까? 내 사람한테 신경 쓸 시간도 모자라는데.”

“아무리 그래도……, 뭐?!”

주원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 사람?!’

이진환이 ‘내 사람’이라고 칭할 만한 상대가 있던가? 아니, 그전에, 그런 호칭은 보통 애인이 있을 때나…….

“그나저나 강 선배님은 오늘 웬일입니까? 첫 촬영이더라도 본인 촬영 분량이 아니면 얼굴도 안 비치는 분이.”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달싹거리던 주원은 말을 돌리는 듯한 진환을 유심히 바라보다, 그의 말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안 넘어가 주면 저 부리부리한 눈으로 달려들 것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이후에 그와 합 맞추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50줄 나이로 후배에게 대놓고 잡아먹히고 싶진 않았다.

주원의 시선이 은율에게 향했다. 촬영 전담 분장사가 달라붙어 메이크업을 고쳐 주고 있었는데, 뭐가 그리 즐거운지 두 사람은 서로 연신 웃는 낯이었다.

“재능 있어 보이는 우리 후배님 연기 좀 감상하러 왔지.”

진환의 이마에 살짝 실핏줄이 돋았다. 다행히 날이 어둡기도 하고 일부러 내린 앞머리가 커튼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주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대본 리딩할 때 보니까 연기도 발성도 괜찮던데. 잘만 다듬으면 몇 년 안에 따라잡힐 수도 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진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것은 본인의 연기가 따라잡힌다는 것보다도, 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진환의 자리마저 위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그것은 진환 역시 동감하는 바였다.

‘과연 몇 년이나 걸릴까?’

새삼 은율을 보며 그의 연기력에 대해 냉정히 분석해 보았다. 은율이 연기를 공부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감안한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 제 옆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새 메이크업 수정이 끝났는지, 분장사가 수줍게 웃으며 물러났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은율이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잠잠해지려던 머릿속이 금세 복잡해졌다. 연기고 나발이고 일단 얘기라도 좀 해야겠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주원을 떨어내고는 긴 다리를 쭉쭉 내뻗어 은율에게 향했다. 그 역시 웃는 낯으로 진환에게 다가섰다.

“오셨어요, 선배님.”

가까이 다가선 은율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인사하자 진환의 미간이 움푹 파였다. 가까이에 스태프들이 가득하고 이쪽을 주시하는 시선들도 있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인사였지만, 진환에겐 그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고민했다. 그를 붙잡아 일단 밴으로 끌고 갈까. 아니면 은율의 말에 얌전히 어울려 줄까.

일단은 후자를 택했다.

“오랜만이네요, 은율 씨.”

도저히 미소까진 나오질 않는다. 그가 하는 것처럼 웃어 주고 싶은데, 그것까진 연기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엉망인 심기를 깨달아 주길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은율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그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던 그때,

“먼저 와 있었네요. 같이 가자니까.”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진환의 눈이 한층 싸늘해졌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먼저 와서 동선 좀 체크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은율이 진환의 뒤쪽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진환이 제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리니, 역시나 이준수 감독이 서 있다.

“스턴트맨 시절의 습관인가 봐요? 어차피 복잡한 동선도 아니어서 몇 시간이나 일찍 나올 필요는 없었는데.”

진환을 지나쳐 은율의 옆에 선 준수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준수의 손이 은율의 눈 아래를 가볍게 문질렀다.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다크서클이 좀 있던데, 다행히 메이크업으로 가려지네요.”

“저도 걱정했었는데 메이크업해 주시는 분이 실력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돌아가자마자 잠부터 푹 자요. 좋은 향초 하나 구해 놨으니까 그거라도 피워 줄게요.”

두 사람의 친근한 대화를 듣고 있던 진환이 은율의 눈가를 매만지던 준수의 손목을 덥석 잡아뗐다. 진환의 이글거리는 듯한 눈이 준수의 차분한 눈을 마주했다.

“오늘도 그쪽 집에 가서 잡니까?”

진환의 날 선 말에 은율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손목을 아플 정도로 꽉 잡혔지만, 준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아마 촬영 진행하는 동안은 그렇게 될 것 같은데요.”

진환이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확인하듯 은율을 보았다. 단박에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째 그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준수의 말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환의 팔을 붙잡아 준수의 팔을 놔주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뭐야, 이게.

진환은 은율과 준수를 번갈아 바라보다,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그러더니 이번엔 은율의 손목을 잡아채 그의 귓가에 으르렁거리듯 낮게 속삭였다.

“따라와.”

“잠깐, 혀, 아니, 선배님…!”

은율이 당황하자 준수가 나서서 진환을 만류했다.

“이진환 씨, 얘기도 좋지만 일단 촬영부터 끝내고 하지 않겠습니까? 곧 촬영 개시인데 이대로 둘이 사라져 버리면 왠지 제때 돌아오지 않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며 직접 진환의 손을 은율에게서 떼어 놓는다.

“프로라면 촬영이 먼저. 그렇죠?”

준수의 미소를 보며 진환은 진심으로 그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웃는 낯으로 사람 속을 참 잘도 긁어 댄다.

“자, 은율 씨는 곧바로 촬영 준비. 이진환 씨는 전용 좌석 마련해 뒀으니까 대기하고 있어요.”

더 말을 섞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준수가 은율의 등을 밀며 자리를 떠났다. 은율이 몇 번이나 진환을 돌아봤지만, 결국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한 채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진환은 조감독에게 촬영 준비 현황을 보고받는 준수의 등을 보며 한층 흉흉한 기색을 내뿜었다.

*  *  *

또각- 또각-.

여인의 구두 굽 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좁은 골목에 어둑한 밤이라 그런지 굽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린다.

제집을 향해 걸으며 어깨에 멘 숄더백을 올려 메는데, 문득 등 뒤에 으슥한 기운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노란 가로등 빛만 무성할 뿐, 고양이 하나 지나가질 않는 텅 빈 골목이다.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정면을 보고 걸어 나갔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저 멀리 흙을 밟아 비빈 듯한 소리가 들렸다. 괜히 무서워져서 고개를 돌려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퉁이를 돌아 발길을 재촉하는데, 뒤에서 또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좀 더 분명한 소리다. 굽이 없는 운동화 같은 것으로 바닥을 밟아 걷는, 그런 소리다. 발소리라고 칭하기 충분한 흙 짓이겨지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려왔다.

걸음을 재촉하며 슬쩍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빛을 받고 있음에도 저 혼자에게 빛 하나 들이치지 않는 것 같은 남자였다. 그는 검은 후드집업을 입고서 그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있었다. 약간 마른 듯한 다리는 짙은 블랙진을 입고 있었고 운동화 역시 어디 하나 다른 색이 섞여 있지 않은 검정이었다. 검은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그런지, 유일하게 검은색이 아닌 부분이라고는 얼핏 보이는 입가 정도였다.

덜컥 무서워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어느새 그림자라도 되는 것처럼 웬 남자가 따라붙어 있다.

골목 여기저기에 낡은 현관문들이 있긴 했으니 소리 소문 없이 집에서 나온 이웃 주민인 걸까.

여인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며 발걸음에 좀 더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어째 흙을 밟는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빠른 걸음을 옮기던 여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정면의 길 외에도 좌측으로 꺾는 길이 있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면 얼마 가지 않아 제집이 나온다. 한시름 놓은 얼굴을 한 여인이 모퉁이를 돌아 왼쪽 길로 향했다.

모퉁이를 도는 그 순간,

타다닥-!

갑자기 들려온 소름 끼치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얼어 버렸다. 단거리를 굉장한 속도로 달린 발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우뚝 멈췄다. 흙을 밟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귀를 때렸다. 그리고 한 남자의 숨소리도.

얼어서 움직이질 못하는 여자의 얼굴 앞에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스르르 나타나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이 부릅뜬 눈으로 그 손을 떼어내려고 몸을 움직일 때였다. 목의 여린 살을 가르는 느낌과 함께 끔찍한 고통이 몰려와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입에서는 비명이 되지 못한 억눌린 신음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드러난 입술이 작게 달싹이며 뭐라 말을 뱉어 냈다. 그 말이 끝날 무렵, 여인은 목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피로 가슴 앞섶을 빨갛게 물들인 채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남자는 죽은 여인을 뒤에서 끌어안은 듯한 상태로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흙바닥에 여인을 눕혀 주고서 그녀의 목에서 울컥 터져 나오는 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남자의 시선이 부릅뜬 눈에 닿았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그 눈꺼풀을 천천히 감겨 주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어두운 밤인 데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그 표정이 완전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남자는 분명 웃고 있었다.

피 묻은 나이프를 든 채 그 피를 털어 내듯 허공에 한 번 크게 휘두르고서는 그것을 접어 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남자는 그렇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두 손을 후드집업 주머니에 꽂아 넣고서 여인을 지나쳐 걸어갔다.

여인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한 골목 바닥에 누워 일어나질 못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주변이 약간 밝아졌다. 어둡기만 하던 벽은 금이 간 게 어렴풋이 보일 정도였고, 가로등 빛은 살짝 약해진 느낌이다.

근처에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지나 싶더니, 한 남자의 비명과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목소리.

또다시 조금의 시간이 지났다. 주변이 한층 느릿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 저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이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지척에서 소리가 멎었다. 몇 개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여인의 시체 위로 여러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인을 내려다보는 것은 세 명의 남자였다. 그들은 각각 사복이었는데, 그들 뒤로 경찰차 한 대와 사이렌 버튼을 달고 있는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좁은 골목을 채우고 있는 게 보였다. 세 남자의 뒤로 가까이 다가오는 순경 한 명이 사색이 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이 골목에 CCTV는 있습니까?”

사복형사 세 명 중 가운데 서 있던 남자가 순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순경은 말을 더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후미지고 오래된 골목이다 보니 CCTV의 보급이 상당히 늦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미 시체가 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깔끔하게 횡으로 베인 목의 상처에 남자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가 두 손을 꽉 쥔 채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얘지도록 가득 힘을 주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두 남자 역시 분을 주체하지 못해 작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  *  *

첫 촬영 부분은 무사히 끝이 났다. 컷을 나눈 부분이 워낙 많다 보니 NG가 한 번도 없었음에도 장장 5시간이 꼬박 걸렸다. 다행히 마지막 컷은 딱히 시간대 조정이나 CG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한 밝기에서 성공적으로 촬영되었다.

촬영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두 눈으로 은율의 연기를 지켜보았고, 일부 장면은 촬영용 모니터를 통해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도저히 신인 배우라고는 할 수 없을 대단한 기백에 촬영지의 이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연기를 보던 배우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신인 배우는 대사 한마디 없이 그저 묵묵히 연기를 이어 나갔다. 내딛는 걸음마다 소름 끼치는 공포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고, 사람들은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치 죽는 역할의 여인에게 빙의라도 된 것처럼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제 목을 손으로 쓸었다. 그가 시체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릴 땐 등줄기를 훑는 오한까지 느껴야 했다.

진환은 놀란 눈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짧다고는 하나 은율의 연기를 바로 눈앞에서 봤으니, 그가 진심으로 연기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조금쯤 알게 됐겠지.

은율과 바톤터치를 하듯 뒤이어 짧게나마 카메라에 얼굴을 내비친 진환은 ‘컷’ 소리와 OK사인을 확인한 후, 곧바로 은율을 찾았다. 그는 모니터 앞에 서서 오늘 촬영분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는데, 왜인지 후드를 걷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안색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모니터 앞에 의자를 두고 앉은 준수와 뭐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후드 안을 본 준수가 그 안으로 손을 뻗었다. 아마도 눈가 근처에 손을 뻗은 것 같은데, 왜 자꾸 스킨십을 하는 건가 싶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참다못한 진환이 모니터링 하는 은율의 옆에 다가서서 웃는 낯으로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은율의 어깨가 흠칫하고, 준수의 시선이 진환을 향했다.

“촬영 끝났으면 잠시 서은율 씨 좀 데려가겠습니다.”

준수가 진환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뭐라 말하려 입을 열려 했다. 가만히 있던 은율이 준수의 팔을 잡으며 그에게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말을 들어 주던 준수가 탐탁잖은 얼굴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은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은율이 귓속말까지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걸까.

“간단히 얘기 끝내고 바로 와요. 같이 들어가게.”

작은 소리였지만 진환은 분명하게 들었다. 그는 결국 참다못해 웃는 낯으로 이를 갈 듯 말했다.

“금방 안 끝날 겁니다. 혼자 돌아가시죠.”

그 말만 남기고는 은율을 붙들고 냉큼 걸음을 옮겼다. 준수의 시선이 등에 꽂히고 은율이 후드 속에서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기, 형, 이것 좀 놓고……!”

“율아, 미안한데 형이 지금 너 둘러메서 끌고 가고 싶은 거 참는 중이거든.”

한없이 낮은 목소리에 은율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제게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건 처음 본다.

은율의 팔을 잡고 끌면서 밴으로 향하니 연우가 얼른 달려왔다.

“형.”

“차 열어.”

연우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그에게 차갑게 지시했다. 섬뜩한 기운에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던 연우는 결국 밴의 잠금을 풀고 직접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진환은 그 안에 은율을 밀어 넣고는 자신도 올라타 문을 쾅 닫았다. 짙게 선팅된 밴의 창문을 잠시 바라보던 연우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보초를 서듯 조금 떨어져 섰다.

은율을 의자에 앉히고는 두 팔 안에 그를 가뒀다. 오른쪽 다리를 무릎 세워 은율의 다리 사이 공간에 넣어 시트를 눌렀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서는 은율의 입술에 깊은 키스를 시도했다.

“흡!”

갑작스러운 키스에 은율이 놀란 눈을 했다. 진환은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그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아릿한 통증에 은율의 입술 사이가 저절로 벌어지고, 진환의 뜨거운 혀가 입 안을 침범했다. 거칠게 들어온 살덩이는 은율의 혀를 휘감아 아플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였고, 달래듯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길 반복했다.

다만 진환의 혀가 워낙 깊이 들어온 데다 빠르게 당기고 치대는 것을 반복하는 탓에 숨 쉴 틈이 없었다. 호흡이 금세 급박해지고, 진환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던 손에 힘이 빠졌다. 어느새 은율은 진환의 재킷을 붙잡은 채 매달린 꼴이 되어 있었다.

은율이 뒤늦게 벗어나려 했지만, 진환은 은율의 후드 쓴 뒷머리를 받치듯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힘들다는 의미로 가슴팍을 아프지 않게 툭툭 두드렸지만, 역시나 진환은 놔주지 않았다.

숨이 달려서 반쯤 늘어질 때쯤 되어서야 진환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나른하게 감겨가는 은율의 몽롱한 눈을 들여다본 진환이 최대한 화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해 봐. 지금 이 상황이 뭔지.”

하나하나 다 짚어서 묻고 싶었다. 아무리 이서우를 더 완성도 높게 만들고 싶어서라지만, 여태껏 연락 한 번 안 할 줄이야. 거기다 촬영 끝나고 감독과 함께 들어간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촬영 전까지만 감독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게 아니었나? 그리고 감독의 그 친밀한 행동은 뭐고?

하지만 묻다 보면 버럭 화를 내 버리고 말 것 같아서 최대한 속을 억눌렀다. 우선은 차근차근 은율의 말을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상외로 은율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답답한 후드를 벗기고서 은율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약간 상기된 보드라운 볼이 제 손에 폭 담기는 느낌이 너무도 오랜만이다.

“아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형 집에 가서 얘기해.”

“아뇨, 나 안 들……!”

“은율아.”

은율의 말을 막으며 진환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 눈빛에 은율마저 움츠러들고 말았다.

“네가 왜 그 감독한테 그렇게 붙들려 있는지 모르겠어. 뭔가 네 약점이라도 잡고 있는 거라면, 지금 말해.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약점 잡힌 거 없고, 그럴 분 아니세요.”

준수를 옹호하는 말에 진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제 앞에서 단호한 눈으로 다른 남자를 감싸는 모습을 보고 나자, 진환은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그 남자가 다른 마음 품고 널 집에 들인 거면 어떻게 할 거야? 감독이 배우한테 캐릭터 만들어 줄 테니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하는 게 정상이야? 그것도 주변 연락 다 끊게 하고!”

“진정해요, 형.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은율이 미간을 찌푸리며 진환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유? 무슨 이유! 그 빌어먹을 이유가 대체 뭐길래 연락 다 끊고 자기하고만 연락하게 하는데?! 그 새끼 분명 너한테 사심 있는 거야!”

은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은 진환의 거친 언사 때문이 아닌, ‘사심’이라고 말한 부분 때문이었다. 흥분한 진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면, 설마 그 새끼가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어? 남자가 사심 갖고 스킨십 하는데도 가만히 있고, 그 새끼 집에 며칠 있어 보더니 당연한 것처럼 그쪽으로 가려고 하고.”

은율은 진환이 준수를 질투한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당황한 은율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형,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진환이 은율의 양어깨를 덥석 잡았다. 힘이 바짝 들어가 있어서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질 만큼 아팠다. 그럼에도 진환은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뭐냐고, 그러니까! 연락은 왜 안 했어?! 그 새끼가 손대는 건 왜 가만히 있고! 그 집은 왜 또 들어가려는 건데!”

반복되는 ‘왜’에 당황한 은율을 붙잡아 흔들었다.

“나만 너 못 봐서 안달 나고, 나만 네 목소리 못 들어서 죽을 것 같았던 거야? 그런 거야? 넌 편안히 잘만 지냈는데 나만 병신같이 속앓이하면서 지낸 거냐고!”

은율은 진환의 무너지는 얼굴을 보며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잔뜩 흥분해 있던 진환은 그제야 언성을 한 톤 낮췄다.

“너랑 연락 못 한 며칠 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던 줄 알아?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건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아픈 데는 없는지……. 매일 틈날 때마다 네 걱정만 했어. 그러다 어쩔 땐 네가 사실은 나한테 질려 버린 건 아닌가 하고…….”

자괴감 섞인 말에 은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난 형밖에 없는데!”

“나도 그런 생각 따위 하고 싶지 않았어. 네가 어련히 잘 생각해서 결정 내린 거니까 믿고 기다리자고 마음먹었지만, 아직 납득할 수가 없어.”

다정하게 말하며 은율의 볼을 쓸어 주었다. 고민하는 눈동자를 보며 진환이 한 번 더 나긋하게 달랬다.

“내가 오해하는 거라면 제대로 설명해 줘, 율아. 네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면 난 저 감독을 끌어다가 묻는 수밖에 없어.”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진심이었기에 은율도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은율은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  *  *

준수의 집에 처음 발을 들였던 그날, 은율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전원을 끄고 배터리를 빼놓은 상태의 휴대폰을 받아 든 준수가 조금 흥분한 얼굴을 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이긴 했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락하던 두 사람과 연락을 뚝 끊으려니 속이 쓰리고 벌써 그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칼은 한동안 연락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난리를 피웠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며 당장 찾아오겠다고 성화였다. 덧붙여 감독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은율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러시아어로 길고 긴 욕까지 해 댔다. 은율은 준수가 왜 연락을 끊으라고 권유했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칼을 설득했고, 이내 아프지 말고 잘 지내다 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은율은 제 의사를 존중해 주는 칼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문제는 진환이었다. 칼에게도 부탁을 해 두긴 했지만, 혹시라도 그가 준수의 집까지 찾아올까 봐 걱정이었다. 촬영 당일까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절대 만나선 안 됐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고, 반가움 반과 걱정 반이 섞인 목소리로 은율을 맞았다. 일순 머뭇거렸지만, 결국 생각한 대로 말을 뱉었다.

“나, 촬영 시작하는 날까진 형한테 연락 못 할 것 같아요.”

역시나 진환은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잔뜩 흥분했다. 그 말에 솔직하게 다 답해 주고 싶었지만, 일부러 꾹 참아 냈다. 그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능한 만큼만 말해 주었다.

“내가 이서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진환이 답답해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꼭 그래야만 하냐고 물어왔다. 답해 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더 통화하고 싶은데……. 미안해요, 형. …사랑해요.”

그 말만 남기고서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더 길게 통화했다간 그를 붙잡고 다 털어놓게 될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지, 왜 전부 다 말할 수 없는지.

마음이 흔들리게 되기 전에 전원을 끄려는 순간, 진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걸다가 지치길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보고 있으니, 1분이 되어 신호가 끊어졌다. 그러자 이번엔 연달아 메시지가 날아왔다. 액정 상단에 미리 보기 형태로 지나가는 내용만 보더라도 진환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속으로 미안하다고 되뇌며 전원을 껐다. 아마도 이 휴대폰의 전원은 촬영 당일까지 켜지지 않을 것이다.

은율은 혹시라도 자신이 흔들릴까 싶어 휴대폰의 배터리까지 분리했다. 그러고선 본체는 아예 준수에게 맡긴 것이다.

준수는 그새 안색이 안 좋아진 은율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은율이 매일 연락하던 두 사람과 연락을 끊은 것만으로도 손쉽게 ‘이서우’의 감정에 다가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K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자 서은율의 삼촌, 그리고 선배 배우라는 사람이 은율의 마음속을 차지하는 비중은 제 생각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은율이 진환에게 세세히 털어놓지 못한 건 준수의 말 때문이었다.

“이유를 설명하지 말아요. 은율 씨가 말할 수 있는 허용 범위는 ‘이서우를 이해하기 위해서다’까지입니다. 두 사람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 줄 필요 없어요.”

준수의 말에 은율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두 사람이 오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을까요?”

“은율 씨는 그 두 사람이 그럴 거라고 확신하고 있죠?”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 주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다. 자세히 말해 줘도 걱정할 게 뻔한데 내용 설명이 없다면 분명 난리가 날 거다.

“난 은율 씨의 그 마음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준수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만난 아이처럼 익살스럽게 웃었다.

“은율 씨는 그 두 사람이 본인을 걱정할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을까요? 연락해서 걱정을 덜어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유를 말할 순 없더라도 최소한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라도 전하고 싶겠죠.”

당연한 말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 준수가 한층 짙게 미소 지었다.

“내가 ‘이서우’로서 원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아주 사소한 거지만, 분명한 욕구. 당신을 안달 나게 만드는 그 욕구가 내가 원하는 거라고요.”

은율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것과 그들을 걱정하게 만드는 거로 어떻게 준수가 원하는 ‘이서우’가 될 수 있다는 걸까.

“이서우의 살인 충동은 그것과 닮아 있어요. 어떻게든 참아보지만, 자꾸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인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죠. 어느 날 갑자기 확 닥쳐오는 충동이 아니에요. 최대한 억누르고 참아도 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이 닥쳐오면서 결국 참지 못해 살인을 저지르는 겁니다.”

준수는 은율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번엔 그의 상황을 연결해 말했다.

“두 사람을 걱정하게 만든 상태로 은율 씨는 그들과의 연락을 단절했죠.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사람들이 계속 걱정하고 있을 걸 알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연락해 주고 싶겠죠. 그쪽은 어떤지 안부도 묻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은율 씨는 그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 주지도, 안부를 전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겠죠.”

흥분한 준수의 말이 빠르게 이어질수록 은율의 낯빛은 어두워져만 갔다. 반면 준수의 얼굴은 한층 밝아졌다.

“그렇게 욕구가 쌓이면 촬영 당일에 한해서 잠시 풀어 주도록 합시다. 그날 촬영 후에 휴대폰을 돌려줄게요.”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연락을 돌리고 나면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오죠. 그 날 은율 씨가 느낀 감정에 관해서도 얘기해 보고, 필요하다면 연락을 좀 더 끊는 방식으로 이서우를 다듬어 보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연락을 끊고 감독님 자택에 머무는 건 촬영 당일까지만이라고…….”

“그건 은율 씨 하기 나름입니다. 틀이 덜 잡힌다면 모든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머물러야죠.”

그 말과 함께 준수가 눈을 반짝였다.

*  *  *

“결국… 난 감독님 말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어요. 이서우를 만들기 위해.”

은율이 준수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은 진환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불안하고 안달이 났다.

그러면서도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전화는 고사하고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마저 머뭇거렸다. 자신의 연락엔 곧바로 답을 하려고 하는 진환이니, 혹여 촬영 중이면 그의 일을 방해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휴대폰을 들었다 놓길 반복했다. 배우로서의 이진환은 은율이 보기에도 너무나 큰 존재였기에 감히 그의 일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진환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기다림이 괴롭지 않았다는 거다. 진환이 연락할 거란 확신이 있는 상태로 기다리는 거라 그런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다리는 동안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가 그와 나눴던 메시지를 훑어보며 기분 좋게 웃기도 했다. 문득 진환의 얼굴이 아른거려 보고 싶어지면 그가 남겨둔 음성 메시지로 속을 달래었다.

은율에게 있어 진환은 그 정도로 크나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과 연락이 끊긴 데다가 걱정할 게 뻔한데도 해명 하나 할 수가 없다. 그간 은율은 진환에게 연락하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억누르다 식욕까지 떨어질 지경이 되었다.

성향은 다르지만, 이서우가 느끼는 ‘충동’이라는 게 뭔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정말 단순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충동, 그게 이서우에게는 ‘살인’이었던 거다. 그 충동이 일반인과 비교하면 심각할 정도로 과했다는 게 문제지만.

은율은 진환과의 연락을 단절함으로써 그 충동의 괴로움을 이해했다. 자신만 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일반인의 몇 배나 강한 충동을 가진 이서우는 어땠을까.

눈을 내리깔고 있던 은율은 씁쓸함을 담아 진환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가 이야기를 듣기 전보다 어째 더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형이 얼마나 걱정했을지 알면서도……. 정말 미안해요.”

“아냐.”

진환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삽시간에 누그러졌다. 그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은율의 볼에 손을 대었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볼이 안타깝다.

“…….”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은율은 자신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자신의 마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이서우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애정을 가득 주고 있는데, 정작 은율에게선 그만한 애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에게 자신과 동일한 크기의 애정표현을 원한다는 것부터가 어린애 같은 생각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은율의 애정에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은율은 자신을 생각하긴 하는 걸까. 이쪽은 은율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도 힘든데, 그는 자신 없이도 잘만 지내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뒤늦게야 그것이 극도의 불안감이란 걸 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너무도 바보 같았다. 은율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을 내어 주고 있었는데, 준수의 말과 행동에 놀아나 그의 마음을 의심해 버렸다.

씁쓸했다. 은율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빌어먹을 캐릭터 만들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찾아왔다는 게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정할 수 없는 건, 그간의 괴로움 덕분에 오늘 은율이 보여 준 이서우가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무작정 준수를 찾아가 화낼 수도 없다.

진환이 한숨을 내쉬며 은율을 품에 안았다. 긴장 때문인지 체온이 훅 내려간 은율이 얌전히 안겨 온다.

“…화내서 미안해.”

진환의 사과에 은율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아니에요. 내가…, 내가 미안해요. 그리고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마지막 말이 잘게 떨려 왔다. 진환은 은율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율아.”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안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은율의 옆자리에 앉아 그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한 채 손을 깍지 끼던 진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내가 방해한 꼴이 됐네.”

과정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서우를 만들기 위한 은율의 선택이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듣고 나서는 분하게도 납득하고 말았다. 그것을 중간에 훼방 놓았다는 생각이 들자 자연스레 미안해졌다.

하지만 은율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고마워요. 촬영 끝날 때까지 참아 줘서.”

마음 같아서는 촬영장에서 자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야기부터 듣고 싶었을 거다. 그걸 촬영 끝날 때까지 억누르고 참아 준 것만 해도 고마워할 일이다.

고개를 돌리니 진환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애꿎은 은율의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 괜찮다니까요. 얼굴 풀어요.”

손을 뻗어 진환의 구겨진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었다.

“감독님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일을 방해한 게 됐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갈등 중이다. 은율이 다시 그 집에 들어가도록 놔둬야 할지.

진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은율이 씩 웃었다.

“아뇨, 내가 말할게요. 그리고 오늘 형이랑 같이 돌아갈 거예요.”

그 말에 진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결연한 눈을 한 은율과 눈이 딱 마주쳤다.

“끝나고 감독이랑 같이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물론 같이 돌아가도록 둘 생각 따윈 없었지만, 감독이 직접 말을 꺼낸 것이니만큼 감정을 다듬기 위해서라도 그와 함께 가겠다 할 줄 알았다.

은율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그러려고 했어요. 사실 오늘 감독님 집에서 짐 챙겨서 나올 생각이었거든요. 미안하지만 승주 씨한테 부탁해야겠어요.”

맑은 눈동자에 그새 자신감이 가득 들어찼다.

“이제 이서우의 감정과 충동이란 게 어떤 건지 확실히 알 것 같거든요.”

준수는 은율이 그 선배라는 사람과 삼촌에게 잠시 연락을 취하는 것으로 충동 해소의 감각을 느껴 주길 바랐지만, 이젠 그보다 더 큰 감각을 알아 버렸다. 진환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그를 마주 안아 보니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격한 충동을 완전히 풀고 해소했을 때의 그 마음을.

“그래요, 그럼.”

예상외로 준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대로 대신 짐 싸서 매니저한테 전해 줄 테니까 은율 씨는 바로 가서 쉬어요.”

태연하게 말하니 은율이 되레 미안해져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멋대로 다 털어놔 버려서…….”

“상관없어요.”

오히려 기분 좋은 음색이라 고개를 들어 준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촬영 때와 같은 진지하면서도 이채 띤 눈으로 은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서야 어찌 되었든, 내가 원하던 그림이 만들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준수가 기분 좋은 미소를 걸었다.

“오늘 촬영으로 확신했어요. 이미 내가 생각한 이서우는 은율 씨 안에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율은 이서우의 감정에 한 발 크게 다가서 있었다. 그것은 촬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고, 촬영 직후 그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기묘한 희열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그런데다가 지금은 자신감까지 담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준수는 충분히 만족했다.

“연락을 단절하고 있던 때와 오늘 느낀 감각을 완벽히 흡수해 주기만 한다면 내가 더 바랄 건 없어요.”

그 이상을 표현해 내는 것은 은율이 하기 나름이니까.

“그리고 사실은 더 머물라고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준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으로 은율의 눈 밑쪽을 쓸었다. 화장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그 아래에는 스트레스와 불면증으로 인한 다크서클이 자리하고 있을 거다.

“일주일만 더 해도 쓰러지겠더라고.”

은율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럼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 집에서 머물게 될 거라고 하신 건……?”

그 발언 때문에도 진환이 화를 내지 않았던가. 준수가 저 멀리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진환에게 시선을 던졌다.

“뭐 좀 테스트해 보려고 했던 거예요. 반쯤 장난이었달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준수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기만 했다.

“근데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요.”

은율의 얼굴에서 손을 내린 준수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가 시선은 진환에게 둔 채로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까는 왜 울었던 겁니까?”

저 멀리서 진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준수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진환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정작 묻는 내용은 그것과 하등 관련이 없었음에도.

은율이 반보 물러서서 거리를 벌리고는 멋쩍게 웃었다.

“그게…….”

촬영 직후,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음에도 준수에게는 들키고 말았다. 후드에 의해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어서 카메라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가만 비쳤지만, 사실 은율은 그때 울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그럼에도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은율은 그 이상했던 모습에 대해 쓴웃음을 보이며 설명했다.

“충동 해소는 분명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이서우는 살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잖습니까. 살인에 무감각한 것도 아니고……. 사실은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지만, 쌓이고 쌓인 충동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그래서 그 순간엔 희열과 자괴감이 함께 찾아왔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감각에 동조해서 눈물을 보였다는 겁니까?”

“제 해석이 잘못된 거라면…….”

“아뇨, 전혀.”

준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이 은율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이서우 역을 은율 씨에게 준 게 정답이었네요.”

그 말은 배우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은율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고마워할 일인데요. 그럼 이틀 뒤 촬영장에서 봐요.”

웃는 낯으로 인사를 나눈 은율은 얼른 진환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장비를 정리하는 스태프들에게 한 명 한 명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준수는 은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촬영 직후 제게 가까이 다가온 은율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기에 그 후드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었다. 입가는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눈가는 우수에 젖기라도 한 것처럼 촉촉한 상태였다.

그걸 보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머릿속에서만 굴려 왔던 이서우가 은율의 얼굴을 빌려 나타난 것만 같아 희열까지 느껴졌다. 거기다 방금 은율의 입을 통해 들은 대답은 한순간 준수를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준수는 내일 이어질 촬영을 기대하며, 은율이 진환의 밴에 올라타는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  *  *

“흐윽!”

몸이 앞뒤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뒤로 당겨진 두 팔이 진환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어서 앞으로 고꾸라지지도 못하고 두 무릎으로 어렵사리 자세를 유지했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그 사이로 은율의 교성과 진환의 거친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거기다 추삽질로 인한 질척한 소리마저 야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은율은 제 속을 갈라 버릴 것처럼 격렬하게 박아 대는 진환의 추삽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의식이 혼탁해지고 자꾸만 찾아드는 쾌감에 몇 번을 움찔댔는지 셀 수가 없다.

“하읏, 형, 이제 그만……! 읏-!”

“아직이야. 하아…, 아직이야, 율아.”

연이은 쾌감에 못 이겨 그만을 외쳤지만, 진환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느끼는 부분만을 집요하게 누르고 비벼 대며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오니 미칠 지경이었다. 뿌리 끝까지 처넣었다가 귀두만 남기고 쑥 빼더니 그대로 또 깊이 박아 댄다. 그걸 굉장한 속도로 반복한 탓에 은율의 성기는 사그라질 틈이 없었다.

“하으윽-!”

벌써 몇 번이던가. 잔뜩 부풀어 있던 은율의 것이 결국 참다못해 또 한 번 사정했다. 미리 깔아 둔 두툼한 이불에 뜨거운 정액이 울컥 토해졌다. 그 근처엔 이미 몇 번이나 토정한 흔적이 가득했다.

은율이 눈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질했다.

“하읏! 형, 나, 읏! 나 가고 있는데……! 하앗…!”

진환이 빠르게 쳐 댈 때마다 자꾸만 정액이 픽픽 토해졌다. 절정에 다다라 쾌감에 찌들었던 몸이 이젠 전기라도 흐르는 것처럼 찌릿거렸다. 그에 맞춰 은율의 뜨거운 내벽이 진환의 것에 쫀득하게 달라붙었다. 거기다 작은 구멍은 성기를 잘라 버릴 것처럼 꽉 조여들어 쾌감을 더했다.

“읏…, 율아, 힘 빼. 찢어지겠어.”

속도를 조금 늦추며 열기 담은 목소리로 은율을 달래니, 그가 울먹이며 힘겹게 돌아본다.

“흐윽! 아, 윽! 그럼 그만하면……! 하앗-!”

잔뜩 울어 버린 얼굴로 투정을 부리는 걸 봤을 뿐인데도 성기가 멋대로 부풀어 버렸다. 게다가 미친 듯 박아 대지 않으면 자신이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윽! 으-, 아아!”

충분한 양의 정액을 뱉어 냈음에도 사정감의 여파는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다. 눈앞이 번쩍거릴 정도로 격한 쾌감이 다시금 찾아와 성기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자꾸만 사정감을 닮은 묘한 감각이 아래를 배회했다.

“형, 나……! 하읏, 나 이거, 윽!”

예전에 한 번 경험해 본 감각이었다. 은율이 당황 섞인 눈을 한 채 고개를 뒤로 돌려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홀린 듯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등줄기에 오한이 들었다.

“괜찮아, 율아.”

진환이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아 보이며 색스럽게 미소 지었다. 은율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울먹거렸다.

“아, 안 괜찮……! 아, 흐응…!”

진환은 일부러 방향을 약간 틀어서 은율의 전립선 자리를 귀두 끝으로 쿡쿡 찔러 댔다. 눌려서 문질러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한 자극에 은율의 허리가 비틀렸다. 엉덩이를 쳐든 채 고개를 뒤로 바짝 젖혀서는 한층 농도 짙은 신음을 흘려 댔다. 상체가 자꾸만 앞으로 쏟아지려 했지만, 진환이 그의 팔을 뒤에서 꽉 잡고 있었기에 은율의 몸은 허공에서 흔들려 댈 수밖에 없었다.

“하윽! 흐으응-! 하악!”

은율의 하체가 떠는 게 구멍을 통해서도 여실히 전해졌다. 그뿐 아니라 조여드는 내벽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아악-! 으응-!”

강한 쾌감이 이어지다 이내 그것이 모조리 성기로 압축되었다. 눈앞이 하얘지는 느낌과 함께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던 또 하나의 사정감이 아래에 몰려 터져 나갔다.

투두둑- 투둑-.

정액이 튀었던 것과는 달리 분명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은율의 것에서 맑은 물이 찍 새어 나왔다. 그것은 정액이 퍼져 있는 이불을 조금씩 적셔 나갔고, 그것을 본 진환은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 집요하게 박아 대었다. 전립선을 가차 없이 누를 때마다 바닥에 맑은 물이 튀는 것을 보다 보니 기묘한 충족감이 들어 미칠 것 같았다.

“하앗-! 형, 그만……, 히윽! 제발 그만……! 아-!”

쾌감과 수치심이 몰려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은율이 애원하며 뒤를 돌아보자, 진환이 돌연 한쪽 팔로 그의 상체를 앞으로 둘러 일으켰다.

“읏-!”

박힌 상태로 상체를 세우게 된 은율은 제 등에 닿은 진환의 빠른 심장 박동을 느끼며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성욕에 지배당한 진환의 짐승 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진환은 왼팔로 은율의 가슴을 둘러 뒤로 감싸 안고는 오른손으로 그의 성기를 붙잡았다. 한껏 예민해진 성기에 진환의 손이 닿자, 은율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진환의 손은 은율이 그의 팔을 붙잡아 떼기도 전에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흑-! 아!”

이제 막 사그라지기 시작한 성기를 붙잡아 흔들어 대고, 뒤에서는 또 사정없이 박아 댄다. 자세가 약간 바뀐 것만으로도 진환의 성기가 쑤시는 부분이 미묘하게 달라져서 그런지 몸이 질리지도 않고 느껴 댔다. 눈물 때문만이 아니라 머릿속이 몇 번이나 뒤집어엎어지는 듯한 기괴한 느낌에 시야가 확보되질 않았다. 그 와중에 진환이 성기를 대놓고 문질러 대니 도저히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흐윽-! 으응-! 아, 흐앗-!”

이미 정액뿐 아니라 이상한 물까지 나오던 터라 젤도 필요 없었다. 미끌거리는 성기를 진환의 손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문질러 댔다. 그것만으로도 전신을 강타하는 괴로운 쾌감이 몰아쳐 자꾸만 시야가 블랙아웃 되는 느낌이었다.

성기에서 자꾸만 쿨럭쿨럭 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진환의 손바닥과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흑…, 형, 아…! 대체 언제……, 흐윽, 언제까지……! 흣!”

은율은 괴로움과 쾌감 섞인 이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려면 진환이 사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간 벼르고 별렀던 것처럼 자신은 도통 가질 않고 은율만 몇 번이나 싸게 만들 뿐이었다.

진환의 은율의 귀를 잘근 깨물고는 제 혀를 세워 그 귓바퀴를 핥아 대었다.

“아직이야. 아직…….”

“하아…! 형, 제발 이제……! 흐응-!”

아직 모자라.

진환은 이미 아래에 꽉 찬 사정감을 모조리 분출하고 싶었지만, 그러고 나면 은율이 지쳐 쓰러질 걸 알고 있었다. 지금도 지쳐 있긴 매한가지였지만, 벌써 끝내고 싶진 않았다.

은율이 잔뜩 느껴서 사정할 때마다 몰아쳐 오는 충족감이 너무도 짜릿했다. 거의 강제로 떨어져 있다가 몸을 섞었기 때문인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이대로 더 강하게 느껴 주길 바라며 자꾸만 그 안쪽 깊은 곳을 찔러 댔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던 은율이 힘겨운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뒷머리가 진환의 어깨에 기대어지고 새하얀 목선이 매력적으로 드러났다.

그 목에 당장이라도 이를 박아 넣고 싶었다. 박고 빨고 핥아서 제 흔적을 선명하게 남기고 싶다. 하지만 은율이 시작 전에 그에게 어떠한 자국도 남기지 않길 부탁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갈급해진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도록 은율이 오롯이 제 것이라는 흔적을 온몸에 새겨 넣고 싶었다. 하지만 촬영 때문에 그런 흔적마저 새길 수 없다는 게 너무도 불만이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한 몸이 되면 괜찮은데, 그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했다. 이전까지는 애써 모르는 척 흘려 넘겼지만, 이번에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열흘가량 떨어져 있어 보니 불안이 극에 달해 미칠 것 같았다. 이준수 감독도 그랬지만, 누군가 은율에게 감히 손을 댄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연장에서 준수를 만났던 그날은 은율에 대한 생각으로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그가 준수와 너무도 태연하게 잘 지내고 있을까 봐, 자신 따위 신경도 쓰고 있지 않을까 봐.

불안함에 지쳐 은율을 믿지 못했었다. 그가 어떤 심경으로 지내고 있을지 가늠해 보지도 못한 채 무작정 제 감정만 앞세워 그를 타박하기도 했다. 그게 너무도 미안했고, 또 기뻤다. 그가 이서우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게 자신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은율의 이서우는 고작 한 씬만으로도 촬영장에 있던 모두를 소름 돋게 했으니까.

“하윽! 흐윽-!”

귓가에 은율의 물기 서린 신음이 울렸다. 그가 이렇게 신음할 수 있는 상대가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과 소유욕이 일었다. 가득 부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성기가 은율의 안에서 연달아 움찔거렸다. 그게 자극이 된 건지, 은율의 것이 울컥, 한 번 더 사정했다.

“흑! 혀엉…!”

은율이 애원하는 눈으로 진환과 시선을 맞춰왔다. 이미 그의 얼굴은 잔뜩 엉망이 되어 있었고, 더는 버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애처로운 얼굴을 보며 진환이 미소 띤 얼굴로 입을 맞췄다.

“율아….”

은율의 가슴을 붙든 팔에 한층 힘이 들어가고, 그의 성기를 잡은 손이 멈추지 않고 움직여 댔다. 사정하는 와중에 성기를 계속 괴롭혀 대니 몸이 멋대로 비틀리고 휘어진다. 진환의 팔에 괴롭게 매달린 은율이 본능적으로 그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흐으…! 형…! 으응-!”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마냥 할짝대는 게 너무도 귀여웠다. 의도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란 걸 알기에 더 자극이 되었다. 진환은 은율과 더 이어져 있고 싶었지만, 그의 애원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내 진환은 제 아래에 몰려 있던 열기를 은율의 안쪽 깊이 단숨에 내뱉어 버렸다.

*  *  *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것 같다.

눈을 떠 보니 방은 깜깜하기 그지없다. 이른 아침에 돌아와 한바탕 얽혔다가 지쳐 잠들었으니 늦은 밤이거나 새벽이지 않을까.

멍하니 누워 있다가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바닥에 내려앉은 손은 차갑기만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서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 사람 누울 정도로 여유 있는 옆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서 굳은 얼굴로 황급히 시선을 돌리던 그때, 반대쪽 옆자리에 누운 한 사람이 보였다. 어둠 속이라 선명히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과 고른 숨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환은 다시 상체를 눕히고서 잠든 은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쪽을 향하며 옆으로 누워 잠든 그는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수록 은율의 얼굴은 선명해지고, 그를 바라보는 진환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손을 뻗어 은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오랜만에 매만지는 머릿결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의식하기도 전에 얼굴이 가까이 다가갔다. 곤히 잠든 그 볼에 입술을 내리니, 약간 따뜻한 피부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에 심취하다 보니 어느새 두 손으로 얼굴을 잡아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음….”

은율은 얼굴을 간질이는 느낌에 못 이겨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운 배경 안에 이글거리는 눈동자 한 쌍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어서 순간 깜짝 놀랐다. 잠시 숨을 멈추고 눈을 깜빡여본 후에야 그것이 진환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둠 속에 있던 진환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일어났어?”

다정하게 물으며 다시금 얼굴 여기저기에 간지러운 입맞춤을 해 대었다. 은율이 힘없이 웃으며 진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나 힘들어서 못 해요.”

잘 잤냐는 인사보다 먼저 튀어나온 거로 보아, 잠들기 전까지 시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모양이다. 진환이 웃는 낯으로 나긋하게 속삭였다.

“아침에 그렇게 무리시켰는데 또 하겠어?”

“형이라면 충분히.”

“너무하네.”

은율의 칼 같은 즉답에 진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찔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웃는 낯으로 진환을 밀어낸 은율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어둠 속에서 제 알몸을 내려다보던 은율은 아직 뻑뻑한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진환에게 물었다.

“자국 안 남겼죠?”

“안 남겼어. 며칠 뒤에 샤워하는 장면 있다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마음 같아서는 전신을 온통 제가 남긴 자국으로 뒤덮고 싶었거늘, 은율은 작중 샤워씬이 있다며 그것을 극구 만류했다. 불만스럽긴 했지만 진환 역시 업계 프로인지라 당연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입술이 붓도록 키스를 퍼부어 댔으니 그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진환이 따라 일어나며 은율을 품에 안았다. 맨살이 닿으니 포근한 온기가 서로를 넘나드는 것만 같았다.

“그 장면 빼면 안 되나?”

진환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상체만 벗는 게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촬영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진환이 달가워할 리가 없다.

어린애 같은 투정에 은율이 피식 웃었다. 맥락상 그 부분을 빼고 다른 부분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지만, 은율이 보기에 그 장면은 꽤 중요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와 옷가지 사이로 튀어 버린 피를 세면대에서 벅벅 씻어 대던 이서우는 이내 못 참겠다는 얼굴로 옷을 벗어 던지며 샤워를 시작한다. 피가 묻지 않은 전신을 뜨거운 물로 씻다가 문득 김이 서려 가는 세면대 거울을 보게 된다. 거울에 비친 이서우는 뜨거운 김 때문에 점점 흐려져 가지만, 그 입가에는 분명한 미소가 떠 있었다. 실제로는 웃고 있지 않았음에도 이서우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거다.

이 부분은 이서우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장면이라 은율 역시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했다. 대사 없이 표정으로 모든 걸 드러내야 하기에 걱정이 좀 있었지만.

“충분히 필요한 장면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불만스럽다. 진환은 정말 어린애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은율을 안은 채 그의 목에 애교라도 부리듯 얼굴을 비벼 댔다. 그 간지러움에 은율이 몸을 움츠리며 작게 웃었다.

“그거 찍고 나면 옷에 가려지는 곳엔 남겨도 되니까 조금 참아요.”

“…알았어. 아주 다 뜯어놓을 거야.”

어찌나 살벌한지, 목소리만으로도 뜯어 먹히는 느낌이다.

은율은 진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진짜 보고 싶었어요.”

한 달도, 일 년도 아니고 고작 열흘 못 본 것뿐임에도 서로가 이렇게 살을 맞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만족감으로 다가왔다. 이전과는 또 다른 애착이 들어, 도저히 떨어지고 싶지가 않다.

진환이 은율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이런 거 다시는 하지 말자. 형 죽어.”

힘 빠진 진환의 목소리에 은율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말투 너무 어린애 같아요.”

평소에는 너무나 어른스럽고 당당한 데다가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법한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그였다. 그 무엇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만 같은 그가 제게만 보여 주는 이런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자꾸만 안아 주고 싶어진다.

진환은 은율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처럼 단박에 수긍한다.

“네 앞에선 언제나 어린애가 되는 것 같아.”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게 되고, 한없이 집착하게 되고, 이쪽을 보지 않으면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자신에 비하면 애정 표현이 소극적인 것도 불안하고, 작은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에도 예민해진다. 거기다 워낙 질투심이 강해서 누군가 그를 건드리는 것만 봐도 울컥 화가 올라온다.

‘이런 속마음을 다 풀어놨다간 질려 버릴지도 몰라.’

그것만은 안 될 일이라 최대한 자신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를 너무 윽박지른 것 같아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은율은 진환의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이제 안 그럴게요.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거든.”

은율 역시 이번 일로 인해 제 안을 차지하는 진환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진환의 자리가 어느 정도 되는 크기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이서우의 감정을 끌어내며 그의 충동에 제 것을 넣어 보니 단순히 큰 정도가 아니란 걸 알았다.

연락을 끊은 지 하루 만에 불면증이 찾아왔고, 어디서 작은 소리만 나도 그게 휴대폰 진동이 아닌가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길 반복했다. 하루 종일 진환에 대한 생각과 걱정으로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칼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차분히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들어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에 반해 진환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어마어마한 데다가 집착과 질투가 여간 심한 게 아니니 걱정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을 지내면서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은, 진환만큼이나 자신도 그에게 절절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당분간 볼 수 없다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불안증에 시달릴 정도로.

무서워졌다. 고작 며칠 연락 안 되고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일부가 무너지고 깎여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도한 불안증세로 인해 자주 속이 저렸고, 순간순간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던 적도 있었다.

이제 그 괴로운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이전엔 당연하게만 느껴지던 진환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한동안 지금처럼 꽉 끌어안고서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은율을 으스러지게 안고 있던 진환이 그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그 감독, 우리 율이한테 마음 있는 건 아니겠지?”

작은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은율이 진환을 마주 보며 확인했다.

“이준수 감독님요?”

“응. 자꾸 너한테 스킨십하잖아.”

또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린다.

은율이 소리 없이 웃으며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얼핏 보이는 불퉁한 얼굴이 금세 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런 분이 뭐하러 저 같은 걸 마음에 두겠어요?”

“저 같은 거?”

진환의 입에서 허탈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은율을 몸에서 떼고는 손을 뻗어 침대 옆 스탠드의 불을 켰다. 밝은 빛이 갑자기 눈을 때리는 바람에 저절로 눈살이 살풋 찡그려졌다. 진환은 그런 은율의 모습을 눈에 차근히 담아 보았다.

자고 일어난 직후를 컨셉으로 잡은 일류 모델처럼, 흐트러진 머리와 나른한 눈매가 단숨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칠흑을 닮은 짙고 깊은 눈동자엔 보는 사람을 통째로 빨아들일 것 같은 마력이 담겨 있고, 그 눈동자에서 시선을 내리면 솜씨 좋은 조각가가 빚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오뚝한 코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꾸만 만지고 싶게 만드는 생기 있는 볼과 언제나 핏기 가득한 붉은 입술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 번쯤 그를 향해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그 아래로 내려오면 어떻던가.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예쁜 목선과 도드라진 쇄골만 보더라도 자체적인 색기가 물씬 풍긴다. 거기다 무엇 하나 걸치지 않아,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딱히 자신이 은율을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그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눈으로 외견을 훑는 것만으로도 아래에 열이 몰리는 느낌인데, 한 집에 열흘 남짓 함께했던 준수는 오죽할까.

진환이 팔짱을 척 끼며 은율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런 널 보고 그 사람이 어떻게 멀쩡해.”

“아니, 내가 무슨 홀딱 다 벗고 다닌 것도 아니고…….”

뜨거운 시선이 부끄러워서 괜히 이불을 끌어와 목까지 두르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형이 잘못 봤어요. 감독님, 자기 애인한테 일편단심이에요.”

“뭐? 애인?”

진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준수 감독에게 애인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안 그래도 그의 행보에 수많은 이목이 쏠려 있는 상태다. 애인이 있었다면 여태 드러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  *  *

낯선 준수의 집에 머문 지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준수의 집을 찾아온 의 시나리오 작가 신주아는 양손 가득 챙겨온 큼직한 쇼핑백을 주방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집주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인간아, 왜 사냐?”

상상도 못 한 말에 움찔했다. 대본 리딩 현장에서 봤던 도도하고 딱딱해 보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얼굴을 있는 힘껏 일그러뜨린 그녀가 눈앞에 선 준수에게 가차 없이 발길질했다. 옆구리를 걷어차인 준수가 일순 얼굴을 찡그렸으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다.

“미안하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주아의 시선이 뻘쭘하게 서 있는 은율에게 닿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가를 휘며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이 인간이 사람이 덜돼서 이런 방법밖에 몰라요. 대신 사과할게요.”

주아가 사과하자 은율이 얼른 그녀를 만류했다.

“아뇨, 제가 동의하고 선택한 일입니다. 감독님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긴 하지만…….”

약간 상기된 얼굴로 주아가 미안해하고 있는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준수가 깜짝 놀라며 그들을 멀찍이 떼어 놓았다.

“잠깐, 자기, 설마 은율 씨 보고 다른 마음 품은 건 아니지?”

“뭔 개소리야!”

주아가 당황하며 다시금 발길질했다. 아까 맞은 자리를 한 번 더 얻어맞은 준수가 억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주아가 콧방귀를 뀌며 주방으로 향했다. 은율이 준수의 집에 며칠간 머물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음식을 해 온 참이었다. 한 손으로 옆구리를 짚은 준수가 어정쩡한 걸음으로 주아에게 다가갔다.

“안 온다고 욕하더니 그래도 왔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은율은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능글맞은 목소리였다. 주아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쇼핑백에서 큼직한 반찬통을 여럿 꺼내었다.

“당신은 나 없으면 밥도 못 해 먹는 사람이잖아. 당신이야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그만이지만, 은율 씨 굶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설마 내가 그러겠어?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배달 어플도 깔아 놨다고.”

“머무는 내내 시켜 먹기만 하면 은율 씨 몸 상해.”

“아, 너무해, 정말. 나도 걱정해 달라고.”

어째 준수의 투정 부리는 모습에 진환이 겹쳐 보이는 것 같다. 흐뭇하면서도 진환이 생각나 씁쓸해졌다.

반찬통을 거의 텅 빈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워 넣은 주아가 은율을 향해 상냥히 미소 지었다.

“이 화상의 얼토당토않은 일에 어울려 줘서 고마워요. 혹시라도 이상한 짓 하면 언제든 연락해 줘요.”

그 말을 하며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은율이 자신을 살뜰히 신경 써 주는 주아를 향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준수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따뜻한 눈빛을 보낸 주아가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그 뒤를 준수가 어린아이처럼 졸졸 따라갔다.

“오늘 고마워. 자기 덕분에 포식하겠네.”

“은율 씨 잘 챙겨. 다음번에 만났을 때 은율 씨 살 빠졌으면 죽을 줄 알아.”

“걱정하지 마. 내가 바래다줄까?”

“집주인이 손님 두고 어딜 나가. 얌전히 붙어 있어.”

으르렁대더니 은율과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웃는다.

“그럼 필요할 때 연락하고, 내 집이라 생각하면서 편히 지내요. 조만간 또 봐요.”

“예, 조심히 가세요, 작가님.”

주아는 그렇게 은율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떠나갔고, 그 후 한동안 준수의 애인 자랑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만 했다.

이야기를 들은 진환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듯,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웃는 낯으로 은율을 꽉 끌어안았다.

어찌 되었든, 준수는 자기 애인에게 푹 빠져서 다른 사람에게 눈독 들일 틈이 없다는 것 아닌가.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다행이다. 그 감독이 혹시라도 너한테 마음 있으면 어떻게 하나 했어.”

촬영을 뒤엎을 수도 없고.

은율이 웃는 낯으로 진환을 토닥거렸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걸 직접 본 그로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할 땐 두 분 다 프로셔서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괜히 시끄러워질까 봐.”

그 말을 하면서도 괜히 쓴웃음이 난다. 자신과 진환 사이가 떠올라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연인이라 밝힐 수 없다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라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지 때문에 애인이 있다는 것 자체를 숨겨야만 했다. 그 부분에 대해 세뇌하듯 미리 거짓말로 채워 넣지 않았다면 준수의 애인 있냐는 물음에 일순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랬다간 워낙 눈치 빠른 사람이니 애인 있음을 단박에 간파해 냈을지 모른다.

준수와 주아가 버젓이 드러내놓고 사귀는 것도 아닌데 괜히 그들이 부러워진다. 그래도 투정 하나 할 수가 없다. 이게 진환이 걸어왔던 길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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