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Actor/Action (23/33)

12. Actor/Action

“크으!”

보는 사람마저 목구멍에 쌉싸름한 소주가 왈칵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늦은 저녁, 촬영장에 모인 이들은 엑스트라들이 가득한 고깃집 내부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두 배우의 연기에 집중했다.

빈 소주잔을 내려놓자마자 이진환이 연기하는 강현태의 시선이 곧바로 그 손에 들린 휴대폰에 닿았다. 마주 앉아 있던 강현태의 애인 한주란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평소에는 도도하고 아름다운 임소민이었지만, 그녀가 연기하는 한주란에게선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털털하고 할 말 다 하는 시원시원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인간아, 박살 내기 전에 눈 떼고 좀 처먹어.”

입이 좀 거칠긴 하지만.

“잘 처먹고 있어. 그리고 이거 박살 내면 재물손괴죄야.”

강현태는 여전히 눈도 떼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한주란 역시 성격으로는 전혀 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널 박살 낸다고, 널.”

“그건 폭행……!”

“아, 시끄러워!”

다른 죄목을 들어 대꾸하던 강현태의 입에 강제로 삼겹살 한 조각을 우겨 넣었다. 입을 우물거리며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태연한 강현태의 모습에 한주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게로 긴 삼겹살을 들고서 가위로 먹기 좋게 자르던 그녀의 입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나왔다.

“야, 내가 오늘 왜 외식하자고 했을 것 같아?”

“고기 먹고 싶다며. 먹고 싶으니까 외식하자고 했겠지.”

강현태가 소주로 제 잔을 채우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에 울화통이 터져 한 소리 크게 내뱉으려던 한주란은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됐다, 됐어. 너랑 뭔 얘길 하겠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씁쓸한 중얼거림에도 강현태의 시선은 여전히 휴대폰에 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주는 잘도 마셔 댄다.

“혼자 뭘 그렇게 궁시렁거려. 고기 타잖아.”

“예, 예. 안 타게 아주- 맛있게 구워 드릴게요.”

이를 꽉 문 채로 한주란의 고기 뒤집기는 멈출 줄 몰랐다. 일그러뜨린 얼굴을 극한의 인내심으로 누그러뜨린 그녀는 강현태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 주목했다.

“이번엔 또 무슨 사건인데?”

강현태가 힐끔 시선을 주고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이었지만, 한주란은 그의 눈이 보기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요즘 내가 쫓는 사건이 하나밖에 더 있나.”

강현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한주란은 더 이상 그를 타박할 수가 없었다. 오늘이 두 사람 사이의 중요한 날인 건 맞지만, 강현태의 머릿속엔 그보다 더 중요한 ‘그 사건’으로 꽉 들어차 있을 거다.

“곧 잡히겠지?”

“잡을 거야. 반드시.”

명확한 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질문임에도 강한 힘을 담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한주란이 눈을 내리깔았다. 몇 달 전, 그의 동생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범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뭐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빨리 잡히면 좋겠네.”

그것은 강현태에게 위로로 건넨 말이 아니었다. 그의 동생과 얼굴 보고 지낸 지 수년이었으니 한주란 역시 그 사건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강현태의 동생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평생 제 형 챙기는 것밖에 모르던 착한 청년이었다. 그런 사람이 무자비한 연쇄살인에 의해 숨을 거둔 것이니, 한주란으로서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강현태를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고기 냄새가 밴 겉옷에 서로 탈취제를 뿌려 주며 가게를 나섰다. 강현태는 그때까지도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뭐라고 하기도 지쳤는지, 한주란이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몸을 돌렸다.

“나 간다.”

목소리엔 약간의 짜증과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 한 발 내딛는데, 뒤에서 바짝 다가온 강현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주란아.”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자, 강현태의 따뜻한 손이 머리에 톡 얹어졌다. 그가 자상하게 웃으며 한주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까 말하는 거 잊었는데, 앞머리 자르니까 예쁘다.”

그 말에 한주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잔뜩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볼에는 금세 홍조가 피었다.

“……알아챘으면 진즉 말해.”

얼마 자르지도 않았는데 잘도 알아챈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볼 건 또 다 보고 있나 보다.

강현태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리더니, 그가 돌연 한주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한주란의 입에서 짧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럼 간다.”

짧게 말한 강현태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뾰로통하게 바라보고 있던 한주란이 피식 웃으며 제 갈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넣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액세서리 상자였다. 내용물을 꺼내 본 한주란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저 멀리 걸어가는 강현태의 등을 눈에 담았다.

“기억……하고 있었네.”

새초롬한 얼굴로 작게 미소를 띤 한주란이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진 상자 안에는 꽤 고급스러운 귀걸이 한 쌍이 들어 있었다.

한편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걸어가던 강현태는 액정에 뜬 알림을 보고서 피식 웃었다. 그것에는 <5주년>이라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연달아 진동하는 알림을 끄고서 다시금 걸음을 옮기던 강현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휴대폰에는 제 동생이 당했던 것처럼 목에 긴 자상을 입은 여러 시체 사진이 담겨 있었다. 시간 날 때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건 없을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전화가 걸려 왔다. 강현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예, 반장님. ……알아요, 알아. 지금 안 그래도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답지 않게 힘없는 목소리다. 그러다 상대의 말에 울컥했는지 언성을 약간 높였다.

“말했잖아요, 오늘 나 기념일이라 꼭 쉬어야 한다고! 못 쉬게 했으면 몇 시간 짬은 내게 해 줘야죠. 너무하시네, 정말. ……아, 그러니까 지금 들어간다니까요!”

신경질을 부리며 전화를 확 꺼 버렸다. 이내 분을 못 이겨 고개를 푹 숙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탓에 앞에서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청년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어깨가 살짝 부딪치고, 청년이 비틀거렸다. 강현태는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아 주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 탓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미처 못 봤네요.”

강현태가 먼저 사과하자, 선한 눈매를 가진 젊은 청년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되레 사과했다.

“아뇨, 저야말로 죄송해요. 휴대폰 어떡하죠?”

미안해하며 휴대폰을 대신 주워 준다. 그의 시선이 일순 액정 화면에 닿았지만,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그것을 강현태에게 건넸다. 받아들고는 앞뒤로 돌려보던 그가 씩 웃었다.

“아주 멀쩡하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아. 어서 가던 길 가세요.”

사람 좋게 웃는 강현태를 보며 머뭇거리던 청년은 결국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돌아섰다. 청년의 뒷모습을 보던 강현태 역시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강현태가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그 화면에는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살인사건에 관한 인터넷 기사가 떠 있었다.

새벽 귀가 도중, 인적 드문 골목에서 누군가에게 습격당한 젊은 여인은 이전의 연쇄살인과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했다. 상처의 방향으로 보아 뒤에서 끌어안긴 상태로 단칼에 목이 베였고, 그 주변에는 범인이 허공에 칼을 휘둘러 턴 흔적으로 보이는 핏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인터넷 기사에서도 그 점을 주목하며 이번 사건이 연쇄살인의 일환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기사를 보던 찰나,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상대에게 큰 소리를 내었다.

“반장님, 오늘 또 사모님하고 싸웠죠?! 왜 이렇게 갈궈요! 지금 서로 돌아가고 있다니까요?!”

목청 좋게 따지니 건너편에서 별의별 쌍욕이 다 들려온다.

몇 발자국 못 간 청년이 그 소리에 뒤를 힐끔 보았다. 그의 선한 눈매는 어느새 보는 사람을 움찔하게 할 만큼 싸늘해져 있었고, 얼굴에도 표정 하나 없다.

청년은 멀어져 가는 강현태의 등을 제 눈에 새기며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컷!”

깔끔한 컷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준수가 웃는 낯으로 ‘오케이’를 외쳤다. 멀찍이 걸어가던 진환이 되돌아오고, 고깃집 안에 있던 엑스트라들이 옷을 챙겨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 스태프들이 조감독의 지휘에 따라 장비를 옮기기 시작했다. 분주한 스태프들 사이를 뚫고 다가온 승주가 얼른 은율에게 작은 생수 한 통과 대본을 건넸다. 웃는 낯으로 고마움을 표현한 은율은 생수를 입을 대고서 벌컥 들이켰다. 그의 목울대가 두 번 크게 움직일 때쯤, 진환이 옆에 다가섰다.

물을 입에서 떼자마자 진환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춥진 않아?”

언제나 당연하게 듣던 목소리였던 터라 별다른 의식 없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형은요?”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어째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다. 주변에서 장비를 나르던 이들도 멈칫해서는 힐끔 돌아보질 않나, 조금 전 진환과 함께 연기했던 소민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분명 시끌시끌했던 것 같은데 TV 볼륨을 줄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가 작아졌다. 아무렇지 않은 건 제 뒤에 선 진환과 옆에서 은율의 생수를 받아 든 승주뿐이다.

은율이 아차 싶은 얼굴로 진환을 돌아보았다. 너무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형’이라고 불러 버려서 혹여 그게 진환에게 민폐가 된 건 아닌가 싶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세계에도 먹히는 톱배우, 자신은 신인 중의 신인이었으니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진환이 먼저 손을 뻗어 은율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둘렀다. 친분을 과시하는 듯한 그 친근한 행동에 주변인들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혹시 그가 아직도 여자친구 한주란의 머리를 쓰다듬던 강현태를 연기 중인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다정하기까지 했다.

“나도 괜찮아. 오늘 밤공기가 차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진환이 그렇게 말해 주니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주변 시선이 있다 보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챈 진환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같은 소속사인 거 알 사람은 알아. 친한 선후배로밖에 안 보일 테니까 긴장하지 마.”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살짝 미소 짓는다.

진환은 여전히 은율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그의 손에 들린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읽어 보려고 한 건지, 반듯반듯한 자필 글씨가 가득한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그 내용을 잠시 들여다본 진환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네.”

“네? 아…….”

은율의 시선도 진환을 따라 대본에 닿았다. 대사는 없고 지문만 가득한 신이다. 진환이 그리도 질색하던 은율의 샤워 신 촬영이 바로 오늘이었던 거다.

“그래도 감독님이 배려해 주셔서 남자 스태프들 몇 명만 들어갈 거예요.”

“그게 더 위험한 것 같은데.”

“사람이 더 많은 게 나아요?”

“아니, 밀폐된 공간에 남자들이 널 둘러싸고 있다는 게 위험하다는 거야.”

진지했지만 농담처럼 받아들인 은율이 피식 웃었다. 그런 그에게 진환이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들어가면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죠. 형이 제일 위험한데.”

어깨에 올라와 있는 진환의 팔이 움찔한다. 그래도 자각은 있나 보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건 여전해 보여서 덧붙여 말했다.

“어차피 승주 씨도 같이 들어가잖아요. 컷 사인 떨어지자마자 가운 입을게요.”

진환의 시선이 힐끔 승주에게 닿았다. 그가 맑은 눈동자를 들어 살짝 웃어 보였다.

승주는 진환과 은율이 어떤 사이인지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굉장히 친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환이 선배이자 친한 형으로서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은율의 전체 탈의 신은 처음이니까.

“걱정하시지 않도록 제가 옆에 딱 붙어 있을게요.”

진환의 예리한 눈이 승주를 훑었다. 딱히 사심 가득한 얼굴도 아닌 데다가 칼이 직접 선별해서 붙여 준 노련한 매니저이니 믿을 만하지 않을까 했다.

“……잘 부탁해요.”

진환의 탐탁지 않은 대답이 떨어지고, 승주는 그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가운데 낀 은율이 진환에게 얼굴 좀 풀라고 속삭이려던 찰나, 이준수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율 씨, 바로 들어가죠.”

말은 은율에게 건넸는데 시선은 진환에게 향해 있다. 준수의 눈이 흥미로운 빛을 띠더니만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은율을 잡아당겨 진환의 팔 안에서 탈출시켜 주었다. 예상대로 맞대 오던 시선이 꿈틀한다.

“갑시다.”

“아, 예.”

은율이 손에 든 대본을 승주에게 건네려고 팔을 뻗는데, 그걸 진환이 붙잡고는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안에서 누가 이상한 짓 하면 소리 질러. 형이 뛰어들어 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대본을 대신 받아간다. 은율이 작게 웃으며 마찬가지로 그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그러기도 전에 상대 명치가 남아나지 않을 거예요.”

진심을 담은 농담을 남기며 준수의 팔에 이끌려 갔다. 뒤에서 진환이 만족스럽게 미소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둘이 너무 사이좋은 거 아닙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묻는 말에 은율이 피식 웃었다.

“친한 선후배 사이니까요.”

“뭐, 은율 씨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율의 미소 띤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낯빛을 바꿨다. 덕분에 눈치 빠른 준수마저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빨리 시작하죠.”

준수의 목소리가 들떴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장면은 이서우가 처음으로 그의 불안한 감정을 표출하는 부분이었으니까. 거기다 그걸 연기하는 게 이서우의 깊은 감정까지 알아 버린 서은율이다. 첫 촬영 때 이서우에게 동조한 그가 물기 서린 눈동자까지 보여 줬으니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율의 말처럼 이서우의 원룸에는 준수와 조감독을 포함한 소수의 남자 스탭들만 들어갔다. 승주는 미리 준비해 둔 흰 가운과 타월 몇 개를 챙겨 들고서 그 뒤를 따랐고, 이내 촬영 준비를 위해 현관문을 닫았다.

조금 떨어져서 원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진환은 아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누구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무표정에다가 눈에는 날카로움이 가득 담겨 있다. 심기가 불편하기라도 한 건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한층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진환의 매니저 연우가 다음 날에 있을 그의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한 뒤에 밴으로 돌아가자,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소민이 사뿐히 걸어 그 곁에 다가섰다. 다른 이들은 분위기에 눌려 근처에 가지도 못하는 것에 반해 그녀는 꽤 강심장이 틀림없어 보였다.

“서은율 씨랑 친하신가 봐요.”

팔짱 낀 채로 건물만 노려보고 있던 진환이 힐끔 시선을 돌려 소민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어깨만큼밖에 오지 않는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진환에겐 그저 한 명의 지나가는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자꾸만 은율을 신경 쓰는 게 사실은 그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소민을 잠시 바라보던 진환은 다시 그 시선을 건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똑똑히 들으라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친합니다.”

짧고 분명한 말이었지만, 소민에게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벽이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같은 소속사이셨죠? 요즘은 소속사가 같아도 배우끼리 친한 경우가 드문데, 두 분은 어쩌다 가까워지신 거예요? 대본 리딩 때 보니까 보통 사이가 아니신 것 같았는데.”

뭐 이리 관심이 많지.

진환은 소민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다, 정작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이진환 씨가 친근하게 대하는 젊은 배우는 서은율 씨가 처음 아닌가요?”

보통은 나이 지긋한 베테랑 배우들하고만 친분이 있지 않던가. 그가 인정하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에 한해서만 말이다. 아무리 같은 소속사라곤 해도 그가 선뜻 반말까지 하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모습은 처음 봤다. 부러울 정도로 친해 보여서 멋대로 질투하게 된다.

진환의 차가운 눈동자가 다시금 소민을 향했다. 그 시선을 마주했음에도 소민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같은 소속사 후배이기도 하고, 워낙 재능 있는 친구라서 계속 옆에 두고 싶네요.”

진환의 말을 들은 소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다시 질투가 일었다. 그래서인지 맑고 나긋하던 목소리가 약간 비아냥거림을 담아 버렸다.

“에이, 그래도 이진환 씨만 하겠나요. 그래 봐야 이제 막 업계에 발 들인 새파란 신인인데.”

은율을 깎는 발언에 진환의 눈꼬리가 움찔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향해 거친 말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아직 촬영 초기이다. 벌써부터 괜한 문제는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만 있는 게 아니라 은율까지 함께 출연한 중요한 영화이니만큼 되도록 잡음 따윈 없었으면 했다.

끓는 속을 삭이며 변화 없는 톤으로 소민의 말을 받아쳤다.

“얼마 안 가서 저도 잡아먹을 친구입니다. 얕보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소민이 제게 마음이 있다는 것쯤은 진즉 알고 있었다. 평소 때라면 모르는 척 무시하고 말았을 테지만, 감히 은율을 깎아내리는 것만은 그냥 흘려 넘길 수가 없어서 말을 덧붙였다.

“재능이 워낙 대단해서 평생 같이 연기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촬영장의 그 어떤 배우보다 더욱요.”

진환이 내뱉은 ‘그 어떤 배우보다 더욱’이라는 부분에서 소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그러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질투심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사그라지긴 했지만, 진환의 예리한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끓던 속이 조금 기분 좋게 가라앉았다.

소민이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었다.

“겸손하시네요. 제가 보기엔 이진환 씨가 서은율 씨보다 훨씬 대단하신데요. 물론 서은율 씨가 신인치고 연기력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저 정도는 감히 이진환 씨나 저한테 비교할 게 못 되죠.”

그 말에 주변 공기가 훅 바뀌었다. 그건 여태 무감각해 보이던 소민마저 깜짝 놀라서 움찔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진환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눈은 눈앞의 소민을 깔아뭉개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눈빛만으로도 갈가리 찢기는 느낌을 받은 소민이 어깨를 떨며 뒤로 반보 물러났다.

진환이 허리를 숙여 소민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누가 보면 혹시 연애라도 하나 싶을 만큼 다정해 보였지만, 실상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무서운 기운을 담고 있었다.

“임소민 씨 연기력이야말로 감히 은율 씨에게 비교할 만한 게 아닐 텐데요.”

“……!”

소민이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귓가에 매력적인 저음이 울려 퍼졌다.

“둘이서 연기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것 같네요. 연기에 재능 있는 베테랑 연기자라고 자부하는데, 신인한테 대놓고 짓이겨지면 우습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물러난 진환의 얼굴에는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만 그 눈빛은 심히 냉랭하면서도 살벌했다. 그를 마주하고 있던 소민은 겁에 질려 있다가 돌연 얼굴을 와락 구겼다. 진환 앞에서만큼은 어떻게든 웃고 있으려 했건만, 능욕도 이런 능욕이 없다.

거기에 진환은 확인사살까지 했다.

“촬영 다 끝나셨으면 얼른 돌아가서 연기 연습이라도 하세요. 아까 보니까 느낌이 영 안 살던데.”

“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소민이 이를 악물며 뭐라 한마디 하려 할 때였다.

“촬영 시작합니다! 다들 조용히 해 주세요!”

원룸 밖을 향해 외치는 조감독의 목소리에 소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건물을 바라보는 진환을 노려보다 몸을 홱 돌렸다.

자신의 밴으로 성난 발걸음을 내뻗던 소민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프로는 프로인지라 상처가 날 정도로 깨물진 않았지만, 화를 억누르고 정신을 다잡을 정도는 되었다.

밴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소민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건물에 시선을 박고 있는 진환이 보였다.

‘이진환……!’

이를 갈았지만, 제아무리 그녀라도 진환을 적으로 삼을 순 없었다. 업계에 몸담은 그 어떤 사람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이름난 톱배우였으니까.

애꿎은 화살은 진환이 끼고 도는 은율에게 닿았다. 소민은 진환이 보는 앞에서 은율을 연기로 당당히 찍어 눌러 주리라 다짐하며 밴에 올라탔다.

*  *  *

좁은 원룸 안에서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은율은 충분히 연구해 왔던 이서우를 꺼내 들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한 사람으로서의 감각이 몰아치고, 그의 복잡한 내면을 직접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빛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카메라가 이쪽을 비추고 있다는 인식이 단번에 사라졌다. 좁은 원룸에는 오로지 단 한 명, 이서우만이 남아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이서우는 현관문을 닫으며 내부를 잠시 훑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심히 고요하기만 한 작은 원룸이다. 내부에는 딱 필요한 가구 몇 개만 자리한 채 잡다한 물건이나 그 흔한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홀로 자취하는 청년의 원룸답지 않게 너무도 깔끔하고 휑한 내부는 나갈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안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발을 들였다. 겉옷을 벗어서 행거에 가지런히 걸린 빈 옷걸이 중 하나에 걸었다. 좌우를 맞추고 최대한 비뚤어지지 않도록 조정한 후에야 그의 발이 떨어졌다.

곧바로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변기와 세면대, 스탠딩 샤워기만 있는 단출한 사이즈다. 조금 전에 벗어 둔 신발처럼 가지런히 있는 욕실화를 신고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물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거울에 이서우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검은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드러난 얼굴이 유달리 하얗게 보였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찬찬히 눈으로 좇다가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흐르는 물에 손을 몇 번 마주 비볐다가, 세면대에 비치해 둔 손 세정제까지 꾹 짜서 꼼꼼히 씻어 낸다.

이서우의 손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동자의 초점이 약간 흐려졌다.

조금 전 어깨를 부딪쳤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휴대폰에 떠 있던 연쇄살인 기사, 그리고 그가 통화하면서 내뱉은 ‘반장님’이라는 호칭.

생각을 떨치려는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라 있던 남자의 얼굴이 금세 사라졌다.

머리를 비우고서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얼굴을 씻으려는 순간, 이서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시선은 오른쪽 팔 안쪽의 붉은 자국에 닿아 있었다. 그것은 팔에 튄 붉은 액체를 엉성하게 씻어 내고 남은 듯한 형태였다.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만, 이내 혼란스럽게 요동쳤다.

피.

피가 남아 있어.

완벽히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이서우의 굳은 얼굴에 혼란과 당황이 서렸다. 그가 손을 뻗어 붉은 자국이 있는 부분에 세정제를 몇 번이나 짜냈다. 그 부위를 살갗이 벗겨지도록 아프게 문질러 대고서 흐르는 물에 씻어 보았다. 흐릿하게 남아 있던 붉은 자국은 사라졌지만, 너무 과하게 문질러 댄 탓에 주변이 새빨개져 있었다.

눈이 부릅떠지고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액체의 흔적은 지워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붉은 자국이 마치 선명한 피처럼 보였다. 세정제로도 모자라 이번엔 비누와 바디클렌저까지 써서 그 자리를 북북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 내도 자국은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이서우의 눈에는 그게 붉은 피가 번지는 것처럼 보였다.

호흡이 가빠지고 눈에서 점점 초점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오한이 찾아와 견딜 수가 없었다.

온통 붉어진 제 팔뚝을 내려다보던 이서우가 갑자기 옷을 다급히 벗기 시작했다. 뭐가 묻더라도 전혀 티 나지 않을 것 같은 검은 와이셔츠와 바지, 양말, 심지어 속옷까지 벗어서는 욕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우악스럽게 처넣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알몸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군살 없는 늘씬한 몸일 뿐, 뭐 하나 이상한 게 없다.

숨넘어갈 것처럼 가쁘게 호흡하던 그가 눈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 거울에도 역시나 새하얀 몸이 비칠 뿐이다. 순간, 전등이 힘없이 깜빡인 것처럼 주변이 훅 어두워졌다 돌아왔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우의 눈이 한층 크게 떠졌다.

거울에 비친 이서우에게는 팔의 붉어진 부분을 포함해 전신 여기저기에 피가 튄 흔적이 가득했다.

시선을 내려 제 몸을 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새하얀 몸이었다.

눈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청년이 잔뜩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다시 시선을 내렸다. 보이는 건 새하얀 피부였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어렵사리 눈을 들었다. 다행히 거울에는 깨끗한 모습의 청년이 비쳤다. 혼란스럽던 눈을 내리깔고서 한 손으로 거울을 짚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내리뜬 눈을 든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거울 속에 비친 청년은 무엇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상태였지만, 거울을 짚은 손은 달랐다. 온통 붉은 피가 묻어 있을 뿐만 아니라 뚝뚝 세면대에까지 떨어져 내렸다. 덜덜 떨면서 제 몸을 내려다보니, 거울에만 비치던 붉은 피가 어느새 전신에 퍼져 있다.

손을 떼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깨끗하던 거울에 붉고 선명한 손자국이 버젓이 찍혀 있다.

피가 잔뜩 묻은 두 손바닥을 혼란스럽게 바라보다가 급한 동작으로 샤워기 앞에 섰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물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렸다. 주변에 금세 더운 기운이 차올랐다.

피칠갑이 된 몸에 뜨거운 물이 닿고, 핏물이 조금씩 흘러나갔다. 눈을 한 번 깜빡이니 핏물이 아닌 맑은 물이 새하얀 몸을 데우고 있었고, 또 한 번 깜빡이니 진한 핏물이 흘러내려 배수구 입구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변하는 시야에, 겁먹은 숨이 미친 듯 흔들렸다.

손으로 몸을 벅벅 문질렀다. 한 번 문질렀음에도 곧바로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아프게.

그럼에도 핏물의 환영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몇 번이나 몸을 씻고 문질러 대도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피가 자꾸만 흘러나와 물을 더럽혔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존재하지 않는 피를 자꾸만 씻어 내는 이서우의 모습은 실로 정신병자나 다름없었다. 심한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온몸을 씻어 대고, 눈은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렇게 이서우는 깨끗하기만 한 몸을 한동안 뜨거운 물로 거칠게 씻어 대었다. 피가 흐르는 환상이 사라질 때까지.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연기가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감독도, 스태프들도, 심지어 배우마저 ‘이서우’에게 심취해 있었다. 이게 연기라는 걸 잊을 정도로.

은율의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준수가 뒤늦게 컷 사인을 보냈다.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피부가 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뜨거운 물 아래에서 전신을 미친 듯 씻어 대는 그의 모습은 준수를 포함한 주변 스태프 전원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사인을 기다리고 있던 승주가 욕실로 단숨에 뛰어들어 가서 물부터 잠갔다. 거친 샤워로 인해 여기저기 붉게 변한 은율의 몸에 커다란 타월을 걸쳐 주었다. 힘이 빠진 듯한 은율은 벌게진 눈가를 살풋 휘었다. 짧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은율이 그 타월로 몸을 닦는 동안, 승주가 직접 그의 몸에 가운을 걸쳐 몸을 가려 주었다.

“괜찮아요?”

승주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한 신을 끝낸 것뿐임에도 잔뜩 지쳐 버린 은율이 힘없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쓰러질 것 같아서 가운까지 여며 주려는데 은율이 만류하며 직접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 와중에도 첫 촬영 때 준수가 제게 스킨십 했던 걸 유난히 질투했던 진환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비록 진환이 보고 있진 않지만 되도록 자신 쪽에서 조심하고 싶었다.

타월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말 없는 준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감독님, 추가 촬영이 필요할까요?”

온 힘을 쏟아 연기했던 만큼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영화 촬영 시에는 일부 NG 요소나 연기에 아쉬움이 남아서 재촬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외에도 더 좋은 감정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촬영 장면을 보존하고 한 번 더 같은 방법으로 찍어 보는, 이른바 킵(Keep) 촬영이 빈번하기에 은율 역시 한 번 더 물어본 것이다.

준수는 여전히 말없이 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컷 사인만 내리고 오케이인지 재촬영인지 사인을 주지 않아 괜히 조마조마했다. 혹여 이서우의 감정 표출이 부족했거나, CG로 피를 입힐 것을 가늠해 추가 촬영이 필요한 걸까. 지쳤긴 해도 다시금 찍어 볼 의향은 충분히 있었기에 준수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재촬영을 예상하는 은율과 달리, 준수는 입꼬리를 올려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준수가 보기에 은율의 몰입감 넘치는 연기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CG를 입히기 전임에도 촬영장의 모두가 선명한 피를 본 것처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서우의 공포, 충동, 정신적인 혼란이 그대로 느껴져 누구 하나 섣부른 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번 더 찍었다간 쓰러지겠어.’

방금 촬영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딱히 재촬영하자고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은율이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감정을 확실하게 넣어야 할 부분에서 짧고 굵게 기력을 모두 쏟아붓는 스타일이었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는 아마도 한 시간 내내 달리는 것보다 10분간 감정을 호소하는 연기에 더 많은 체력을 잡아먹힐 거다.

은율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창백한 하얀 얼굴에 살짝 혈색이 돌았다.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원룸을 나선 은율은 건물 밖에서 이쪽을 보고 서 있는 진환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한달음에 다가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우선 열부터 쟀다. 이마는 차가운데 어째 안색은 좋지가 않다.

“아픈 데 없어요. 그냥 뭔가 연기하다 보니 기가 빨려서…….”

멋쩍게 웃어 보이는 그를 보고서 진환이 한시름 놓은 얼굴을 했다. 진환 역시 너무 몰입해서 연기하다가 하루 내내 늘어져 있던 경험이 있었다. 지금이야 그런 부분에서의 기력 조절이 가능하기에 장시간 촬영도 끄떡없었지만, 아직 연기 경험이 적은 은율은 활활 타오르다가 단숨에 꺼진 불씨의 아지랑이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뒤따라 건물에서 나온 승주가 은율의 어깨에 담요를 걸쳐 주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오늘 촬영 분량은 다 끝났으니까 바로 돌아갈까요?”

한시라도 빨리 쉬게 해 주고 싶어서 승주가 더 안달이다.

“모니터링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있다 가겠습니다.”

“그래도…….”

승주는 여전히 걱정 어린 얼굴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진환이 끼어들었다.

“율아, 오늘 형 집으로 가자.”

뜬금없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진환을 향했다. 진환이 은율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승주를 바라보았다.

“승주 씨는 돌아가서 쉬어요. 내가 율이 챙겨서 들어갈게요. 어차피 내일 밤 촬영도 같이 찍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배우를 남겨 놓고 매니저 혼자 돌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승주가 머뭇거리자 은율이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요, 오늘은 형 집에서 자고 내일 같이 나올게요. 승주 씨도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시죠.”

은율까지 그리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은율이 진환의 집에 자주 가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는 걸 알기에 괜찮지 않을까 했다. 진환이 워낙 그를 애지중지한다는 것도 아니까.

승주가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간 후, 은율은 준수를 따라 조금 전 원룸에서의 촬영분을 모니터로 돌려보았다. 알몸으로 촬영한 부분이다 보니 준수와 조감독, 그리고 은율과 진환만이 보기로 했다. 사실 진환도 빠져야 맞는데, 은율의 연기를 보고 싶다고 극구 피력한 덕에 함께 볼 수 있었다. 사실은 은율의 몸이 어느 정도 촬영되었는지 보기 위해서였지만.

모니터에 뜬 영상 속 이서우가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하자 진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준수와 조감독이 너무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안대를 씌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진환은 그런 사심 가득한 생각이 아닌 배우 이진환으로서 눈을 빛내게 되었다. 모니터에 비친 은율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눈짓, 손짓, 그 외 모든 것이 진환의 오감을 자극했다. 그것은 알몸이 된 제 연인 서은율이 누군가를 연기하는 게 아닌, 한 명의 ‘이서우’의 행동으로 보였다.

은율이 촬영한 원룸 신을 모두 체크하고 나자 진환은 그제야 제 속이 근질거린다는 걸 알았다. 모니터에 비친 은율의 연기가 묘한 호승심을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그와 감정을 부딪치는 장면을 찍고 싶어 안달이 났다.

“형.”

가까이 다가온 은율은 가만히 서서 진지한 눈을 하고 있는 진환을 불렀다. 그의 시선이 부름을 따라 은율을 향하자 일순 움찔했다. 눈빛이 왜 저리 강렬한지 모르겠다.

은율을 잠시 바라본 진환은 저 멀리 떨어져서 이쪽을 보고 있는 매니저 연우에게 손짓해 보였다. 그가 얼른 달려와 무슨 일이냐며 눈을 깜빡거렸다.

“율아, 형 찍고 올 동안 밴에서 눈 좀 붙이고 있어.”

“아, 네…….”

뭔가 느낌이 달랐다. 왜 분위기가 바뀌었나 싶어 머리를 굴려 보니, 진환이 자신의 촬영분을 본 직후이다. 설마 알몸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나 질색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진환이 속삭인 말 때문에 그 생각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나도 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진지하지만 호승심에 들뜬 목소리를 듣고 나니 작게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진환도 배우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율은 진환의 연기를 보며 수많은 것을 깨달았고, 그에 버금가는 연기를 펼치기 위해 한시도 대본을 떼어 놓지 않았다. 그와 감정적으로 부딪치는 신을 상상하며 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연기할 때마다 진환을 상기하며 기합 넣길 여러 번이었다.

진환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두근거렸다. 그 말은 자신이 여태껏 으레 그래 왔듯, 이번에는 자신의 연기가 그에게 제대로 자극을 줬다는 말이니까.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은율은 연우의 손에 이끌려 진환의 밴에 올라탔다. 연우는 손수 의자를 조정해 눕혀 주고 목 베개까지 챙겨 주며 귀엽게 웃었다.

“많이 피곤하죠?”

담요를 덮어 주니, 은율이 예쁘게 눈을 휘었다.

“조금요.”

괜찮다고 할 줄 알았더니 꽤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촬영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갔다.

거기다 이번 장면은 베테랑 연기자도 소화하기 까다로운 부분이었다고 들었다. 어떤 신이었는지 대강 알고 있었지만, 은율이 연기했을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진환이 인정할 정도의 연기력을 가진 은율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대단한 연기를 했겠지.

벌써부터 얼른 영화가 나오길 기대하던 연우가 은율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뭐라도 마실래요?”

“괜찮습니다. 챙겨 줘서 고마워요.”

은율이 뻐근한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고마워했다. 푹신한 좌석에 몸을 눕히고 있으니 저절로 잠이 쏟아졌다.

밴 밖으로 나간 연우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전 나가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푹 주무시고 계세요. 근처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부르고요.”

마치 연우가 제 매니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장에서 연우는 승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 언제나 진환 챙기듯 은율을 챙겨 주곤 했다. 같은 소속사의 매니저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진환의 영향일 거라 생각했다.

한 번 더 고맙단 말을 건네니 곧 밴의 문이 닫혔다. 밖에서 흘러들어 오던 빛이 사라지고, 은율은 눈을 스르르 감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뭔가 신기한 느낌이다. 제 몸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가 나간 것 같은 그런 느낌.

기계적으로 누군가를 연기한 게 아니라 분석해 둔 이서우가 제멋대로 걸어 나왔던 것만 같다. 이서우는 그렇게 몸을 빌려, 실제로 그 상황에 놓인 사람처럼 행동했다. 은율은 그 모습을 이서우의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별다른 CG 없이도 두 눈에 피가 선명히 보이는 것만 같았고, 이서우가 그것에 공포와 혼란을 느꼈듯 은율 본인 역시 그러했다. 각인된 대본대로였음에도 마치 그 행동이 당연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서우와 하나가 된 것처럼.

카메라가 돌던 그 순간에 빙의라도 되었던 걸까. 괜히 오싹하다.

‘신기하다…….’

어둠 속에서 아까의 촬영 장면을 되뇌던 은율은 얼마 가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촬영이 끝난 진환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곧바로 제 밴으로 다가갔다. 성큼성큼 시원하게 걷던 보폭과 달리, 밴의 문을 여는 진환의 동작은 느릿하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문을 여니, 밖의 조명에 의해 은율의 긴 다리가 가장 먼저 드러나 보였다. 좌석을 뒤로 완전히 젖힌 채 곤히 잠들어서는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있다. 여러모로 피곤했던 모양이다.

“은율 씨는 아직 자요?”

뒤에서 연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얼른 고개를 돌려 제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그것만으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연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최대한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하지만 차 문을 완전히 닫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약간 힘이 가해져 소리가 좀 났더니만 은율이 작은 신음을 내며 뒤척였다. 운전석에서 흘러나오는 얕은 빛에 의지한 채 은율의 옆자리에 앉은 진환이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살살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다시금 아기처럼 새근거리는,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차 뒤쪽의 상황을 룸미러로 힐끔 보고 있던 연우는 진환의 빨리 출발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고 후다닥 차의 시동을 걸었다. 차의 진동이 은율의 발끝을 타고 느껴졌지만, 진환의 토닥임 덕분인지 깊이 잠든 그대로였다.

차가 출발한 후에도 진환은 은율의 얼굴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몸을 반쯤 비튼 상태로 팔걸이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는 그 손에 턱을 괴었다. 어느새 진환의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런 진환의 머릿속에 멋대로 ‘이서우’가 나타났다. 모니터를 통해 본 것뿐이지만, 은율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연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이서우’ 본인이 카메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홀로 환상을 보며 겁에 질린 것만 같았다. 그 덕분에 보는 사람 모두가 숨을 멈춘 채 과할 정도로 깊이 몰입해 버렸다. 상황을 지휘하던 이준수 감독과 작은 모니터 너머로 연기 장면을 본 진환마저도.

은율의 연기를 본 순간 단전이 멋대로 저릿거리는 걸 느꼈다. 긴장과 호승심으로 안달이 나기 시작한 진환은 이후의 장면에서 NG 한번 없이 좌중을 압도하는 연기를 펼쳤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작은 단서에도 흥분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진짜 ‘강현태’처럼 보였다.

이준수 감독은 열띤 투톱의 연기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내일 있을 촬영도 기대한다며 진환에게 새삼 악수를 청할 정도였으니까.

진환은 오늘 했던 연기가 오롯이 제 덕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혼신을 다한 연기를 내보인 은율에게 강한 자극을 받았기에 자신 역시 한층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거다.

은율은 그의 어머니 덕인지, 예전부터 연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것은 스턴트맨을 뛰면서도 거침없이 발휘되었고, 이내 진환의 눈에까지 박혀 들었다.

진환은 굳이 따지자면 은율의 재능을 갈고닦아 준 선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저 두 명의 주연 배우일 뿐이었다. 서로에게 자극받으며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런 좋은 의미의 투톱이었다.

‘평생 함께 연기하고 싶다.’

예전부터 몇 번이고 생각해 왔던 말이자, 은율에게 수시로 속삭이던 달콤한 프러포즈였다. 이렇게 대등한 주연으로서 함께 연기하다 보면 자꾸만 그 말을 되뇌게 된다. 이 기분 좋은 자극과 충만함을 평생 느끼고 싶었다. 연인으로서든, 연기자로서든.

은율의 얼굴을 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그들이 탄 차량은 진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를 멈춰 세운 연우가 뒤를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형, 은율 씨 깨워야 하는 거 아녜요?”

진환이 말없이 고개를 저어 보이며 턱짓으로 차 문을 가리켰다. 연우 역시 입을 다문 채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사이, 진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율의 상체를 한쪽 팔로 받쳐 들었다. 그의 목에 있던 목 베개를 떼어 주고서 몸을 제게 기대게 하는 그 순간까지도 은율은 깊이 잠들어 깨지 않았다.

담요를 목까지 빈틈없이 덮어 줄 무렵, 연우가 밖에서부터 문을 열어 주었다. 진환이 은율을 안아 든 채 밴에서 내리자 연우의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형, 내일 밤에 올게요. 푹 쉬시고 은율 씨 혹사하면 안 돼요.”

그러고선 장난스럽게 눈가를 휘며 웃는다. 진환이 눈을 부라리니 그제야 표정을 바꾸며 얼른 운전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밴이 떠나는 소리를 뒤로하며 은율을 데리고 집에 들어온 진환은 일단 그를 푹신한 침대에 눕혔다. 담요를 걷어 내고 겉옷을 벗길 때까지도 은율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완전히 늘어져 버린 그를 내려다보며 진환이 피식 웃었다.

“음…….”

돌연 은율이 뒤척이기 시작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진환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리더니만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서 작게 미소 지었다.

천진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왜 자꾸 아래쪽이 뻐근한지 모르겠다.

*  *  *

찰박-

물을 떠내는 듯한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린 직후엔 목 언저리나 가슴팍에 따뜻한 물이 닿았다. 향긋한 라벤더 향에 기분 좋은 온수가 몸을 데우니 피로가 싹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르르 눈을 뜬 은율의 시야에 연보랏빛 물이 담겼다. 몇 번 눈을 깜빡여서 초점을 맞춘 후에야 자신이 큼직한 욕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다 자신이 반쯤 눕다시피 누군가에게 기대어 있다는 것도. 그 누군가는 물 밖으로 노출된 제 몸에 따뜻한 물을 연신 손으로 떠서 뿌려 주고 있었다.

“……형?”

익숙한 크기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 손이 다른 한쪽 팔과 함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유달리 달콤하다. 은율이 고개를 약간 젖혀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물기 젖은 머리를 시원하게 올린 채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다디단 향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잠깐 잔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깨우지 그랬어요.”

진환이 은율의 머리에 몇 번이나 입을 묻으며 웃었다.

“기력을 너무 썼나 봐. 푹 자길래 안 깨웠어.”

“형도 피곤할 텐데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은율이 미안해하자 그를 꽉 안고는 그 어깨에 애교 부리듯 얼굴을 비벼 댔다.

“고생은 무슨. 형한텐 이게 힐링인데.”

어깨에 닿는, 기분 좋은 간지러움에 은율이 작게 웃었다. 이준수 감독 집에서 열흘 가까이 지내다가 온 이후로 어째 애교가 많아진 것 같다. 남들이 보면 경악할 노릇이지만, 은율에게는 이미 익숙한 상황이었다.

몸에 들어간 힘을 풀고 진환에게 편히 기대었다. 향긋한 라벤더 향과 기분 좋은 온수, 거기다 진환과 살결이 맞닿아 있다는 것에 깊은 안도감과 나른함이 찾아왔다. 진환이 물 밖으로 드러난 은율의 몸이 식지 않도록 그의 가슴에 손으로 뜬 따뜻한 물을 몇 번이나 뿌려 주었다.

“좀 더 잘래?”

은율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 졸리지는 않은데 몸에 힘이 없고 좀 나른해요.”

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이상하죠. 하루 종일 스턴트 액션을 찍을 때도 지금처럼 피곤하고 나른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진환이 은율의 물기 묻은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그의 뒷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원래 감정 표현하는 신에 몰입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기가 빨리기 마련이야. 그 정도로 굉장히 몰입했으니 피곤할 만도 해.”

베테랑다운 말에 은근히 의지가 된다. 은율이 진환에게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약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도 이런 적 있어요?”

“굉장히 많았지. 특히 신인 때.”

의외의 말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환의 신인 때라니, 상상도 안 간다. 왠지 신인 때도 지금처럼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완벽한 배우였을 것만 같다.

시선을 내리깐 채 연예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를 떠올린 진환이 작게 웃었다.

“누구나 신인 때는 실수도 하고 부족한 점이 많기 마련인데, 난 그런 것 하나 없이 완벽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 그래서 날이 새도록 혼자 연습을 거듭하고 완벽해지려고 했어. 그러다 보니 촬영 때마다 신인답지 않은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고 칭찬받은 반면에 과몰입으로 인한 후유증이 상당했지. 어떨 때는 며칠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던 적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환영을 보거나 악몽을 꿀 때도 있었어.”

어느새 진환의 손이 은율의 손을 덮어 깍지를 꼈다. 그 상태로 품에 가두듯 팔을 교차해 꽉 끌어안았다.

“지금이야 그렇게까지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너도 나 때처럼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매니저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가 매 순간 함께해 줄 순 없었다. 매니저를 제외하면 당시 진환의 곁엔 아무도 없었기에 과몰입의 후유증은 그가 혼자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그걸 이겨 내지 못하면 다음 촬영에 지장이 가기 때문에 싫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혹시라도 겉으로 티를 내면 ‘이래서 신인들은’ 하고 혀를 차는 소리라든지, ‘요즘 어린애들은 의지가 약해’라는 늙은이 푸념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전 별로 걱정되지 않는데요.”

은율이 사르르 웃으며 진환의 목에 짧게 입맞춤했다.

“대선배이자 연인인 형이 옆에 있는데 왜 걱정하겠어요.”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공격에 진환이 얼굴을 굳히며 미간을 모았다. 그와 동시에 은율이 몸을 움찔했다. 그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가 제 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진환의 아래쪽을 투시하듯 응시했다.

“……형, 대체 어느 대목에서 반응한 거예요?”

등을 찌르는 딱딱함에 은율의 미간 역시 살짝 찌푸려졌다.

진환이 은율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는 살짝 핥아 주었다. 그러자 예상대로 몸이 흠칫하더니 숨소리가 달라진다.

“깜빡이 없이 들어와서 형 흥분했잖아.”

진환의 손이 은율의 가슴을 매만졌다. 그 손끝이 작은 유두에 닿자마자 어깨가 움츠러든다.

“읏……, 잠깐만, 형…….”

“쉬…….”

진정하라는 듯 바람 소리를 내어 주며 다른 한 손을 은율의 사타구니 쪽으로 옮겼다.

“흡……!”

말랑한 성기를 한 손에 그러쥐자 은율이 몸을 떨며 기대왔다. 그의 열기 띤 목소리가 진환을 자극했다.

“하아……, 형, 나 오늘은 힘들어요…….”

“편히 있어. 넣진 않고 그냥 기분 좋게 해 주려는 거니까.”

은율의 목을 혀끝으로 핥아 주며 손에 쥔 성기를 가볍게 쓸어 댔다. 가슴을 만져 대던 손길 역시 멈추지 않고 그의 유두를 괴롭혔다. 꼬집듯이 잡아서는 살짝 당겼다 놓아주기도 하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살살 돌려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은율의 허리가 조금씩 휘기 시작하고 그 잇새로 색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응……. 하, 앗……!”

몸은 피로했지만 성기는 건강한 상태였다. 금세 부풀어 오른 성기가 제법 단단해졌고, 진환이 부드럽게 쓸어 댈 때마다 흠칫거리며 그 크기를 더해 갔다.

성기를 잡은 진환의 손길이 약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뿌리에서부터 귀두까지 올라갈 때는 약간 아플 정도로 꽉 쥐어 올렸고, 그러다 귀두에 다다라서는 손을 살짝 주먹 쥐듯 모아 두어 번 빙글거리며 매만져 주었다. 은율의 신음이 교성이 될 뻔한 그 순간, 다시 기둥 위에서부터 뿌리까지 간지럽히듯 살며시 내려왔다.

애를 태우는 듯한 그 손길에 은율의 머릿속은 금세 엉망진창이 되었다. 따끈한 온수에 담긴 노곤한 몸은 진환의 손에 착실히 반응해 나갔고, 마치 극상의 마사지라도 받는 것처럼 그 손길에 취해 갔다. 진환에게 기대어 늘어진 몸은 성기와 가슴에서 느껴지는 쾌감으로 인해 저절로 뻣뻣해져 갔다.

“흣……, 흐응! 형, 잠……, 하아, 잠깐만……!”

벌써 성기가 잔뜩 부풀어서 사정감이 몰려왔다. 몇 번 더 매만지면 그대로 파정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욕조 물이 더러워질 거라는 생각에 진환을 말렸다.

“나 금방……, 흣, 금방 나올 것 같아요……. 으, 흐응!”

“그냥 해도 돼. 괜찮아.”

은율이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래도…… 물이……. 흐읏…….”

모처럼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입욕제까지 풀어 둔 건데 금방 더럽히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환은 은율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그럼 물 더럽히지 않고 갈 수 있게끔 해 줄게.”

그 말과 함께 유두를 지분거리던 손이 은율의 성기를 지나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 손끝이 작은 구멍에 닿은 순간, 은율이 놀라 흠칫했다.

“거긴 왜…….”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린 은율이 의아한 시선을 진환에게 보냈다. 안 넣을 거라더니 왜 거길 만지는 걸까.

“괜찮아, 안 넣어. 다리 벌려 봐, 율아.”

진환이 나긋하게 말하며 은율의 귀를 아프지 않게 잘근 씹었다. 귀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느낌에 몸을 한차례 떤 은율이 그의 말대로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진환의 중지가 안쪽으로 쑥 들어왔다.

“흣!”

갑작스러운 침투에 놀란 내벽이 진환의 중지를 감싸 물었다. 은율은 등에 닿아 있는 진환의 딱딱한 것이 크게 꿈틀한 것을 느끼며 제 안쪽을 휘젓는 손가락에 감각을 집중했다.

마주 보면서 넣었다면 은율이 느끼는 부위를 금세 찾았을 텐데, 그를 뒤에서 안은 채 감각으로 더듬어 찾으려니 조금 시간이 걸렸다.

“흡……, 읏, 으……. 하읏!”

작게 신음을 흘리던 은율이 이내 허리를 움찔하며 고개를 젖혔다. 그의 반응에 진환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아, 하읏! 하! 으응-!”

진환의 손가락은 방금 찾은 은율의 전립선을 몇 번이나 깊이 찔러 대었다. 은율의 상체가 들썩이고 벌린 다리가 움찔거리며 모여들었다.

“율아, 두 손으로 다리 잡아.”

“흣! 으흑! 그치만……! 하응!”

“자꾸 오므리면 율이가 좋아하는 부분을 건드릴 수가 없어. 자, 빨리.”

한층 낮은 목소리로 자극하듯 말하자 은율이 머뭇거리며 두 손으로 제 양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잘했어’라고 짧게 칭찬한 진환이 돌연 은율의 성기를 꽉 붙들었다. 그러고선 엄지로 그의 요도 부분을 꾹 눌러 막았다.

사정감이 가득해서 언제 내보낼지 모르는데 입구가 틀어막혔다. 거기다 아까처럼 성기를 쓸어 자극하지도 않았다. 진환의 손은 은율의 성기를 쥐고 입구를 막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손이 바빠졌다.

“잠……! 하악-!”

욕실의 불을 누군가 껐다 켰다 하는 것처럼 눈앞이 쉴 새 없이 점멸했다. 이미 파악해 낸 예민한 부위는 한 개 더 늘어난 진환의 손가락에 의해 사정없이 자극당했다. 저절로 상체가 비틀렸지만 두 다리를 꽉 잡고 있었기에 진환의 손가락이 안쪽을 쑤셔 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하읏! 잠깐, 혀엉-! 흑! 나 갈 것 같은데……! 하아!”

진환이 은율의 목덜미와 그 얼굴에 연달아 입술을 묻고 혀로 간지럽히듯 핥아 주었다.

“가도 돼.”

“흐윽! 손……! 아, 으응-! 손 놔줘어……! 하아!”

성기가 꽉 붙들려 있었기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진환은 안쪽을 자극하는 손을 거두거나 성기를 풀어 주지 않았다.

“이대로는……! 흐읏! 이대로는 못 가잖아……, 아, 응!”

“갈 수 있어.”

“어떻……! 흐윽!”

“긴장 풀어. 괜찮으니까.”

은율이 진환의 어깨에 뒷머리를 댄 채 열기로 가득한 눈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형, 그만……, 그만 놔줘……. 흑!”

“물 더럽히기 싫다며.”

“흐읏……! 하으…….”

진환이 혀끝을 세워 은율의 귀를 핥아 주었다. 귓바퀴를 따라 들려오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마치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래쪽이 쑤셔질 때마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함께하니 강한 자극이 되어 성기에 열이 몰려들었다. 그럼에도 사정이 되질 않아 안달이 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성기 안쪽의 깊은 곳이 전기라도 온 것처럼 찌릿거렸다. 그걸 알아채자마자 어떻게도 막을 수 없는 강한 쾌감이 단전을 뚫고 나오듯 휘몰아쳤다.

폭풍과도 같은 그 쾌감의 중심을 진환의 손가락이 안쪽에서부터 푹 찔러 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막혔던 혈이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쾌감의 파도가 봇물 터지듯 삽시간에 퍼져 뇌까지 다다랐다.

“하아악-! 아아-!”

허리가 강하게 휘고 전신이 벌벌 떨렸다. 발끝은 멋대로 곱아들었고 허벅지를 잡은 두 손은 살점을 쥐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꽉 붙들어선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허벅지만큼이나 진환의 손에 단단히 붙들린 성기는 몇 번이나 크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막혀 있는 그 성기의 입술에선 아무거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허윽……! 하아아…….”

일반적인 사정을 할 때보다 몇 배에 달하는 쾌감과 긴 후희를 느꼈다. 몇 번 움찔대던 은율의 몸이 이내 진환에게 완전히 기대어 늘어지고,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이 욕조 바닥에 힘없이 툭 떨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은율의 눈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잡고 있던 성기를 놓아주고 움찔대는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낸 진환이 쾌감에 취한 은율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좋았어?”

낯선 드라이 오르가즘으로 인해 힘이 쭉 빠져 버린 은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하기 전까지는 막힌 쾌감으로 인해 괴롭기도 했지만, 그것이 터질 때의 느낌은 일반적인 사정감과는 꽤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그 느낌은 일반적인 사정감의 세 배는 족히 될 법한 강렬한 쾌감이었다.

숨을 몰아쉰 은율이 진환을 향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제 엉덩이 근처로 손을 뻗어 뭔가를 덥석 잡았다.

“읏.”

진환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나왔다. 은율은 제 엉덩이를 자꾸 찌르던 진환의 커다란 것을 손으로 감싸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형도 이거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뜨거운 성기가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잔뜩 부풀어 있다. 거기다 사정을 참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 번 움찔하며 꺼덕거렸다.

“아냐, 난 따로 빼면 돼.”

진환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힘든데 무리시키고 싶지 않아.”

진환의 다정한 말에 잠시 고민이 됐다. 하지만 그 고민은 지극히 짧게 끝났다. 진환의 잔뜩 발기한 성기를 그러쥔 것만으로도 단전 깊은 곳이 뻐근해지는 것을 보니, 피곤하긴 해도 아직 체력이 남은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율이 진환을 마주 보는 형태로 욕조 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그는 곧바로 진환의 입에 제 입술을 대었다. 자동 반응이 입력된 로봇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바로 혀가 튀어나와 은율의 입 안을 침범했다. 한쪽 팔로 은율의 허리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뒷머리를 받쳐 깊이 키스했다. 달콤한 사탕으로 만들어진 듯한 작은 동굴은 그렇게 여기저기 탐해지며 옅은 신음을 흩뿌렸다.

어느새 진환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키스에 심취해 있던 은율이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짜 맞추기라도 한 듯 같은 눈을 했다.

“나……, 이제 물 더럽혀도…… 될 것 같은데…….”

붉은 얼굴로 수줍은 듯 소곤거리는 그 모습이 어찌나 예뻐 보이는지.

진환은 연애의 주도권에 한해서는 평생 은율의 손에서 가져올 수 없을 거라 장담하며 그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읏…….”

엉덩이를 가볍게 주무르자 은율의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드라이 오르가즘을 느꼈다곤 하나 사정한 게 아니다 보니 아직 성기가 빳빳한 상태였다. 진환은 물 밖으로 나올락 말락 한 은율의 귀두를 내려다보며 제 입술을 혀로 핥았다.

진환의 입술이 곧바로 은율의 가슴에 닿았다. 자그마한 분홍빛 유두를 입에 머금고서 혀끝으로 빠르게 치대니 부드러운 몸이 바르르 떨어 댔다.

온수에 들어가 있던 탓에 한껏 뜨거워진 몸을 제게 바짝 당긴 진환은 은율의 양 엉덩이를 잡고 있던 손의 끄트머리를 그의 구멍에 가져갔다.

“흑!”

양손의 중지가 동시에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손의 두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은율의 엉덩이가 바짝 긴장했다. 그러다가도 가슴이 빨리고 핥아지는 감각에 금세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노려 진환의 두 중지가 은율의 안쪽을 깊이 파고들었다.

“읏, 아……!”

동시에 들어오던 두 손가락이 안쪽 내벽을 좌우로 눌러 벌렸다. 뜨거운 물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느낌에 은율이 진환의 양어깨를 잡으며 미간을 모았다.

“으, 뜨거워요…….”

“더 뜨거운 것도 들어갈 건데 이 정도로 뜨거워하면 어떻게 해.”

장난스럽게 말하며 두 개의 검지로 안쪽을 번갈아 가며 쑤셔 댔다. 한 손가락이 손톱 부근까지 빠져나오고, 다시 그게 깊이 들어가 예민한 부위를 찌르면 다른 손가락이 빠져나가며 내벽을 누르며 간지럽혔다. 그렇게 번갈아 쑤시는 데다가 속도까지 빨라지자 은율의 몸이 진환에게로 점점 쏠려 갔다.

“하읏, 응, 으으……!”

“안쪽 미끌거려, 율아. 물 때문일까, 아니면 율이가 흥분해서 그런 걸까?”

“읏, 몰라……. 흐응!”

벌써 눈가가 촉촉해져서는 야하디야한 얼굴로 사람 애간장을 녹인다. 견디지 못한 진환이 손가락을 빼내고는 그의 엉덩이를 잡아, 제 성기의 귀두에 구멍을 맞췄다. 손가락으로 쑤셔 댄 덕에 약간 벌어져 있던 구멍이 무리 없이 진환의 귀두를 삼켰다.

“힉……, 흐아……!”

안쪽의 체액과 물기가 섞여 윤활제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귀두 이상은 쉽게 들어가질 않았다. 욕조 바닥에 무릎을 대고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은율이 진환의 어깨를 붙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진환은 눈앞에 다가온 여린 목에 입술을 묻었다.

“흐…….”

은율이 움찔하는 것과 동시에 아래쪽이 꽉 조여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진한 자국을 남겨 놓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 내며 그 목을 천천히 핥아 올렸다. 얕은 신음과 함께 아래쪽이 나른하게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를 노려 은율의 엉덩이를 좌우로 벌리고는 단숨에 퍽 소리가 나도록 박아 버렸다.

“하악!”

은율이 고개를 젖힌 채 눈을 크게 떴다. 뜨거운 살덩이에 놀란 내벽이 꿈틀거리더니 그것을 잘라 버릴 것처럼 꽉 조여 댔다. 진환은 은율의 안을 파고든 제 것이 기분 좋게 주물러지는 것을 느끼며 달뜬 숨을 흘렸다.

은율의 허리를 붙잡아 제게 기대게 한 진환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힘겹게 호흡하는 은율의 귀를 잘근 깨물었다. 바르르 떠는 몸을 단단히 껴안은 채 혀끝을 세워 귓바퀴를 따라 핥아 주니, 뻣뻣하게 긴장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진환은 늘어진 몸의 엉덩이를 붙잡고는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몸이 들리면서 제 안을 가득 채우던, 굵은 게 스르르 빠져나가자 은율이 열띤 신음을 흘려 댔다.

“하으……, 아. 흐으……!”

자꾸만 전립선을 간지럽히듯 긁으며 빠져나가니 엉덩이가 잘게 떨렸다. 눈이 풀린, 야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율을 올려다보며 진환은 저도 모르게 극상의 진미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다.

귀두만 남기고 빠져나갔다 싶을 즈음, 진환이 은율의 엉덩이를 확 내렸다. 물이 튀고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높은 소리가 터졌다.

“하아-!”

전립선을 정확히 푹 찌르고 미끄러지듯 들어간 성기가 안쪽 벽을 아릿하게 눌러 왔다. 은율의 눈에 금세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형, 읏……, 이거 너무…….”

“아파?”

진환이 은율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춰 주며 물었다. 은율이 헐떡이면서도 살짝 혀를 내밀어 진환의 입술을 핥았다. 완전히 풀려 버린 눈동자가 진환의 눈을 마주했다.

“너무 느껴서…… 힘들어…….”

신음 섞인 색스러운 목소리에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렸을 때는 저도 모르게 은율의 엉덩이를 잡아 안쪽 깊이 빠르게 쑤셔 대고 있었다. 은율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입에서는 새된 교성이 터져 나왔다.

“하으-! 아, 히윽! 흐응!”

추삽질을 해 댈 때마다 안으로 물이 흘러들어 왔다가 빠지길 반복했다. 그 탓에 진환의 것이 들어온 실제 깊이보다 더 안쪽까지 꾹 눌려서 아랫배가 아릿해졌다. 깊이 쑤셔지는 느낌에 통증과 쾌감이 함께 어우러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흐윽! 깊……어, 흣! 형, 잠깐……! 하악-!”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시야가 흐트러졌다. 안쪽을 사정없이 쑤시는 느낌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견디다 못한 은율이 진환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눈을 묻었다. 그럼에도 어깨가 들썩이고 신음이 멈추질 않았다.

욕실에는 첨벙거리는 소리와 은율의 야한 교성, 그리고 진환의 열띤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하……, 율아, 고개 들어 봐.”

은율이 느끼는 부분을 사정없이 꾹 눌러 지나가며 속삭였다. 어깨를 움츠린 채 부르르 떤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지친 상태에서 너무 느껴 버린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지금처럼 진환에게 몸을 기대는 게 최선인 상태였다.

‘느끼는 표정 보고 싶은데.’

진환이 아쉬운 얼굴을 하다가 돌연 동작을 멈췄다. 안을 꽉 채운 채 정지하자 은율이 힘겹게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호흡할 때마다 굵은 살덩이에 전립선이 눌려서 자꾸만 아래쪽이 찌릿거렸다. 진환은 그런 은율의 등에 두 팔을 둘러 안은 채 몸을 숙였다.

“……!”

침대에 눕는 것처럼 은율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놀라서 진환의 목에 팔을 둘러 꽉 안겨 들다가 아래쪽에 힘이 가해지는 바람에 두 사람이 동시에 흠칫거렸다. 그럼에도 진환은 은율을 천천히 눕히려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진환은 은율의 등의 반이 물에 담가질 즈음,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치며 속삭였다.

“형 믿고 팔 풀어도 돼.”

“그렇…지만…….”

이대로 팔을 풀면 상체가 물에 푹 빠질 것 같았다. 벌써 45도쯤 뒤로 누워 있는 것 같은데, 안고 있는 자세를 풀면 진환의 팔에만 의지해야 한다. 그를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찾아오는 두려움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괜찮으니까 형 믿어.”

은율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팔을 풀었다. 진환은 그런 은율의 등과 머리를 받친 채 느릿하게 몸을 눕혀 주었다. 어느새 은율의 몸은 가슴팍까지 물에 잠긴 채 뒤로 누운 상태가 되었다. 따뜻한 물이 가슴까지 차 있으니 답답하면서도 벅찬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진환이 지탱 중인 팔이 풀리면 그대로 넘어져 물에 잠길 거라는 약간의 불안함까지 있었다.

자신을 믿고 몸에 힘을 뺀 은율을 내려다보며 진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읏!”

지척에서 물이 첨벙하는 소리가 났다. 진환은 그 자세 그대로 제 것을 쑤셔 대기 시작했다. 은율은 물속에 늘어뜨리고 있던 손으로 진환의 팔뚝을 붙잡았다. 움직일 때마다 가슴을 반쯤 덮고 있던 물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빠지길 반복했다.

진환이 추삽질을 시작하자마자 불안함이 더 강하게 엄습해 왔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 들리는 물소리, 가슴을 압박하는 물, 눈앞에서 튀는 물방울. 의지할 거라고는 진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긴장해 버린 몸은 진환의 것을 꽉 잡아 물었고, 진환은 이에 부응하듯 더 강하게 안을 쳐 댔다. 그러면서도 은율이 눈을 크게 뜬 채 움찔대는 얼굴을 황홀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아! 하읏! 형, 이거……! 아!”

아래에서 쑤시는 감각은 비슷한데 어째 더 과하게 느끼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에 의해 압박된 심장이 훨씬 묵직하고 강하게 뛰어 댔고, 약간 답답해진 호흡은 정신을 한층 더 몽롱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진환밖에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더해지자 온 신경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은율은 안을 이리저리 쑤셔져 흔들리면서도 그 시선을 진환에게서 떼지 않았다. 자신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진환이 한계가 온 것처럼 미간을 찌푸릴 때는 저도 모르게 아래를 꽉 조여 버렸다. 진환의 얼굴이 조금 변하는 것만으로도 그게 온통 제 몸을 찌르는 자극이 되는 것만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흣……, 율아……, 좋아?”

진환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물음에 미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요하게 전립선을 눌러 댈 때마다 제어할 수 없는 신음이 터지고, 간간이 ‘좋아’를 연발했다. 아플 정도로 깊이 쑤셔 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윽! 좋아……, 흑! 아! 좋아, 흣, 형……!”

“나도……, 읏, 나도 좋아, 율아.”

상대방이 자신으로 인해 기분 좋아진다는 사실은 서로에게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을 가져다 주었다. 호흡을 맞추듯 두 사람의 성기가 점차 터질 듯 부풀어 갔다.

“하읏! 나 쌀 것…… 같………! 하아!”

너무 느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 대던 은율이 진환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는 은율을 단단히 받쳐 든 상태로 막판 스퍼트를 냈다. 미칠 듯한 쾌감이 단전과 성기 깊숙한 곳을 맴돌며 폭발할 것처럼 날뛰어 댔다.

“아, 아악-! 하읏-! 아!”

“율아. 흣, 율아…….”

진환이 주문처럼 연신 은율의 이름을 불러 댔고, 그가 부를 때마다 은율의 내벽이 진환의 것을 꽉꽉 물어 댔다. 자극을 견디다 못한 진환이 결국 은율의 안에 울컥 토정했다. 토정하는 순간에 가득 부풀었다가 뜨거운 것을 깊이 쏟아 내니, 그것을 느낀 은율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호흡을 멈추며 사정했다.

“하……아아-!”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고 진환의 팔을 잡았던 손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힘을 가득 실어 버렸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리다 움찔거리고, 그럴 때마다 은율의 성기뿐 아니라 진환의 것까지 연달아 정액을 뱉어 냈다.

이윽고 힘이 빠진 은율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진환의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져 물소리가 났고, 사정의 후희에 빠져 있던 진환이 그제야 은율을 들어 올렸다. 물에 담가져 있던 몸이 힘없이 들려 나와 진환에게 기대었다.

“율아, 괜찮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은율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진환은 은율을 품에 꽉 끌어안은 채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 정도로 잠들어 버리다니, 어지간히 녹초 상태이긴 했나 보다.

무리하게 만든 건 미안했지만, 어째 그의 안에 넣어 둔 제 것을 빼고 싶지가 않다.

‘한 번 더 하면…… 많이 힘들겠지.’

솟구치는 성욕을 자제하며 씁쓸히 웃었다. 은율의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기세 좋게 열이 몰리는 통에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싶어 난감해졌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발기할 것 같아서 빼긴 빼야겠는데 생각과 달리 아래가 멋대로 구멍 안을 들락날락하려고 한다.

“으음…….”

은율의 미간이 꿈틀하더니 여태 힘이 빠져 있던 안쪽이 다시 움직이며 쫀득하게 달라붙어 왔다.

‘아, 빼기 싫다.’

눈앞에 보이는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진환은 어느새 그의 신음을 귀에 담으며 조심스러운 추삽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그래도 무리를 시킬 수는 없었기에 안타까운 얼굴로 제 것을 천천히 빼내었다. 언제 사정했냐는 듯 단단해진 성기가 스르르 빠져나오자 은율이 얕은 신음을 흘렸다.

움찔거리는 등을 토닥이던 진환은 한 손으로 제 것을 쥔 채 은율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전혀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것은 은율의 체향을 맡는 족족 꺼덕거리며 자기주장을 펼쳐 댔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더운 공기 사이로 맑은 체향이 흘러들어 왔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충족감이 느껴지고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진환은 그렇게 은율을 안은 채 가라앉지 않는 제 것을 홀로 달래야만 했다.

*  *  *

까득- 까득-.

손톱 물어뜯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깜짝 놀라 손을 뻗어 왔다.

“언니! 이거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손톱이 물어뜯기던 손을 붙잡아 떼어 내니, 소민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잘근 씹힌 흔적이 있는 제 손톱에 시선을 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 나으신 줄 알았더니 또 그러시네.”

스타일리스트가 투덜거리며 제 가방에서 손톱용 버퍼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손톱을 부드럽게 갈아 흔적을 지우는 동안, 소민은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그 화면에는 SNS에 올라온 은율의 사진이 떠 있었다. K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스타일리스트가 최근 밴에서 찍은 것 같은 은율의 사진을 SNS에 올려 뒀는데, 어찌나 손가락 아프도록 찬양의 글을 써 놨는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누가 보면 열렬한 골수팬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소민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뷔와 동시에 독보적인 추세로 이름과 얼굴을 알렸을진 몰라도, 소민에게 있어 그는 흔하디흔한 신인 배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업계에 있으면서 은율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대박 신인을 몇 번 본 적 있다. 그때마다 그들은 세간에서 추켜세우는 게 오롯이 자기 능력 덕인 것처럼 기세등등했고, 그들을 눈여겨보던 감독이나 연출자의 제안으로 차기작의 주연을 맡곤 했다.

문제는 그 주연을 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재능은 있을지언정 경험이 지극히 부족한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설치다가 그 작품이 세간의 질타를 받으면서부터 급격히 무너져 내린다. 배우들의 연기력 논란은 물론이거니와, 대형 신인의 첫 주연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작품마저 한없이 싸늘한 눈총을 받기 마련이다.

고등학생 때 CF모델로 데뷔한 소민은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꾸며 차근차근 연기 실력을 키워 온 수재였다. 단역부터 시작해 수많은 조연을 거치며 갖은 경험을 쌓았고, 그렇게 몇 년에 걸쳐 필모그래피를 쌓은 후에야 본격적으로 주연을 맡기 시작한 케이스였다. 어떤 캐릭터든 능숙하게 표현해 보이는 탄탄한 연기 실력과 더불어, 질리지 않는 예쁘장한 외모 덕분에 아직도 지속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소민 역시 신인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업계에 오래 있게 되면서부터는 이제 막 배우 타이틀을 단 이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게 되었다. 별다른 노력도 없이 반짝 떠서는 그게 모두 제 실력인 줄 알고 겁도 없이 주연 자리에 선다는 것부터 납득할 수 없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경험이 없으면 그 능력의 십 분의 일도 제대로 발휘 못 하고 사라지는 게 이 업계다. 처음에는 대형 신인이라 추켜세워 줄진 몰라도, 섣불리 발들인 주연 자리는 그들에게 독이 되고 만다.

‘그리고 나한테도 독이야.’

신인이 연기력 논란에 휩싸여서 작품이 매몰찬 시선을 받게 되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긴다. 연기력 논란이 생긴다는 건, 그만큼 그가 맡은 캐릭터의 매력이 발휘되지 못했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작품성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쁜 흥행 성적을 거두는 데에 일조할 확률이 높다.

그나마 영화면 다행이지, 드라마에서 그렇게 난리가 난다면 빠른 시청률 하락과 더불어 종영 날까지 좋지 못한 구설에 항시 오르게 될 거다.

어느 배우나 자신이 참여한 작품이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작품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갈 요소는 질색할 수밖에.

소민은 스타일리스트가 정리해 준 손톱을 매만지며 은율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자마자 시선을 빼앗길 정도의 압도적인 외모에 솔직히 연기력도 아주 좋은 편이었다. 냉정히 따져 보자면, 조금이라도 더 경험이 붙을 경우 절대 얕볼 수 없는 배우가 될 게 분명했다.

거기다 몸에 밴 성실함과 겸손함만 보더라도 갑작스러운 관심에 무작정 콧대가 높아진 케이스는 아닌 것 같았다. 뭐든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모양새라, 예전이었다면 조금쯤 온화한 눈으로 봐 줬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진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금 손톱을 물어뜯고 싶어졌다.

진환이 은율을 특별히 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를 지금처럼 고깝게 보지는 않았을 거다. 조금 틱틱대긴 해도 작품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게 되었겠지.

연기력을 기준으로 사람 대하는 게 다르다던 이진환이다. 그런 그가 살갑게 말을 놓고 챙길 정도의 신인이라니. 다른 이들에겐 딱딱한 눈빛만 보이던 그였는데 어째 은율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을 한다.

진환의 반응으로부터 귀결되는 건 결국 은율의 ‘연기력’이다. 같은 소속사 배우라고 해서 무작정 그런 눈빛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잘해. 잘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은율이 연기를 잘하긴 한다. 그가 출연했던 단편 영화와 뮤직비디오도 보고 심지어 진환과 함께 찍은 화보까지 찾아봤다. 그 모든 게 은율의 연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연기를 잘하긴 해도 주연을 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워낙 주변에 연기 잘하는 이들이 많다 보니 눈이 높아진 것도 있긴 했지만, 고작 5분 내외의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한 게 다였다. 듣자 하니 해외에서 블록버스터 영화의 조연으로 참여했다던데 그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연기했는지를 모르는 이상 실력을 가늠할 요소는 그 짧은 작품들이 다였다.

이름을 알리지도 못한 뭣 모르는 신인 시절에는 참여한 작품에 온 힘을 다하기 마련이다. 연기 인생의 시작점이 어떠하냐에 따라 앞으로의 일이 결정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작품들이 잘되고 대형 신인 취급을 받게 되면 금세 해이해진다. 초심을 잃고 자신감과 의욕만 앞서던 그들은 결국 경험 부족으로 쓴맛을 보곤 했다.

은율 역시 그렇게 될 거다. 소민이 보기에 그는 외모가 특출 날 뿐인 흔한 ‘대형 신인’이었다. 그 와중에 진환이 은율의 연기력을 극찬하는 듯한 말을 하며 자신을 깎아내리니 자존심이 크게 상할 수밖에.

‘둘이서 연기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것 같네요. 연기에 재능 있는 베테랑 연기자라고 자부하는데, 신인한테 대놓고 짓이겨지면 우습잖아요.’

진환의 말을 상기하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그녀의 얼굴을 보며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내가 짓이겨진다고? 웃기지 마.’

이래 봬도 12년차 베테랑이다. 그깟 신인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자신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런 신인 따위 아예 박살을 내 주겠어. 두고 봐, 이진환.’

오늘은 신인 배우 서은율과 함께 찍는 장면뿐이니 보란 듯이 연기로 눌러 주겠노라 다짐했다. 진환이 자신을 다시 보게 되는 모습을 상상하니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그때가 되면 진환에게 ‘어쩌죠, 그렇게 추켜세우시는 신인을 짓이겨 버려서’라고 말하며 한껏 환한 미소를 지어 주리라.

소민이 속으로 이를 가는 사이, 어느덧 그녀의 밴은 촬영 스튜디오 앞에 다다랐다. 옆자리의 스타일리스트가 분주해지고, 운전석에 타 있던 30대의 남자 매니저가 먼저 내려섰다. 그는 얼른 뒷자리로 돌아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소민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제 옷매무새를 가볍게 점검하며 밴에서 내려섰다.

봄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연핑크 원피스에 흰색 가디건을 걸친 소민이 화사하게 웃는 낯으로 촬영장에 발을 들였다. ‘한주란’의 의상을 들고 뒤를 따르는 스타일리스트도, 앞장서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한 매니저도 소민의 얼굴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밴에서 그렇게나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심각한 얼굴을 하던 여인은 어디 가고, 당당함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여배우만 남아 있었다.

“어, 임소민 씨, 어서 오세요!”

한 스태프가 알아보자 주변 스태프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녀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소민은 일일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으세요.”

스태프들은 저마다 웃는 낯으로 소민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한 명도 빠짐없이 성실히 응대했다. 12년차 베테랑 연기자임에도 뻗대는 것 하나 없이 상냥하게 인사하는 모습은 스태프들에게 호감을 주기 충분했다.

‘스태프들한텐 이미지 관리해야지.’

이 바닥이 워낙 좁고 소문이 잘 돌다 보니 이 정도의 이미지 메이킹은 필수였다.

배우들이나 감독 정도 되는 사람들이야 제 본성을 안다고 한들 누구에게 섣불리 누설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스태프들은 다르다. 그들은 이직과 퇴직, 파견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니 언제 어디서 입을 열지 모른다.

오히려 배우나 감독은 주목을 받는 이들인 만큼 ‘타인을 험담하는 사람’ 취급을 받아선 안 되기에, 누군가의 치부를 알더라도 되도록 모르는 척하기 마련이다. 잘못 입을 열면 그들도 구설에 오른다는 걸 알다 보니 제 얼굴에 침 뱉기를 하려는 이들은 거의 없을 수밖에 없다.

스태프들 사이를 지나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소민의 눈에 들어온 건 온통 녹색으로 뒤덮인 세트였다. 아무리 눈을 돌려 봐도 녹색 벽밖에 보이지 않는 공간 가운데, 거의 5m는 되어 보이는 높다란 나무 세트가 보였다. 겉보기엔 단순한 절벽이나 다름없었지만, 크로마키를 이용해 ‘한주란’이 거주하는 옥탑처럼 보이게 할 예정이었다.

‘높긴 높네.’

원래 ‘한주란’이 거주하는 옥탑은 3층 위에 있는 곳으로, 높이로 따지자면 8M 정도여야 했다. 합성할 예정이라서 높이를 줄이긴 했다지만, 그래도 기왕 할 거라면 더 낮춰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주란’은 ‘이서우’를 수상하게 생각하며 대화하다, 신 말미에 저 위에서 떨어져야 했으니까.

괜히 긴장된 마음에 크로마키 세트 주변에 있는 투박한 기계들과 와이어 장비에 시선을 두었다. 그쪽에는 자신의 스타일리스트가 들고 있는 ‘한주란’의 의상과 동일한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아마도 저 대신 옥상에서 효과적으로 떨어지는 역할을 할 스턴트우먼인 모양이었다.

스턴트우먼이 대신 뛰어내려 준다고 해도 소민 역시 와이어 장비를 차야 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떨어지는 순간의 제 표정과 연기가 카메라에 잡혀야 하니까 말이다. 와이어를 이용한 촬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내디딜 땅이 없는 허공에서 연기를 피력하는 건 아직도 적응되질 않았다.

자신이 뛰어내리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해 본 소민이 약간 긴장한 얼굴을 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곧 그녀의 눈에 스태프들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던 두 인물이 보였다.

미리 몇 대의 모니터를 세팅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이준수 감독이 가장 먼저 보였고, 그 직후에 눈에 띈 게 다름 아닌 서은율이었다. 그는 건방지게도, 감독 옆자리에 앉아서 웃는 낯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미간이 꿈틀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멀리서 여성 스태프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상기된 얼굴로 은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팬들처럼 꺅꺅거리고 있다. 거리가 있어서 대화가 완벽히 들리진 않았지만, 은율의 외모와 인성을 칭찬하는 중이라는 건 몇몇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까다롭다던 감독마저 은율에게 옆자리를 내어 주고 그와 기분 좋은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득 은율을 싫어하는 건 자신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 주연 자리에 앉은 은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조연이나 단역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업계에서 몇 년을 굴러도 얻을 수 없었던 주연의 자리를 신인이 꿰찬 것에 대한 질투일 뿐이지 않던가.

소민은 자신이 은율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과 작품에 누를 끼칠 거라 예상하기 때문에 싫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민은 은율이 진환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다는 부분에 과할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걸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서.

은율과 준수를 보며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를 건 채 그들에게 다리를 쭉쭉 뻗어 다가갔다. 먼저 기척을 느낀 은율이 소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자리에서 일어난 은율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예의 바른 인사를 보였다. 소민은 각 잡힌 ‘오셨습니까’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청초하게 웃어 보였다.

“먼저 와 있었네요.”

가볍게 인사를 받아 준 소민은 옆의 이준수 감독에게 친근한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그래요. 소민 씨는 알아서 잘하니까 걱정할 게 없네요.”

얼핏 칭찬처럼 들렸지만, 그건 준수의 상투적인 말이었다. 제게 향한 그의 눈빛만큼이나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쯤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그저 스태프 중 한 명을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가 웬만한 배우에게는 그렇게 대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은율 씨, 다시 앉아 봐요. 그래서 그 부분의 어디가 마음에 걸렸던 거예요?”

바로 저것 때문에 말이다. 제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돌려서는 은율에게 꽤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 게 아닌가. 누가 보면 연인과 대화하는 줄 알겠다.

“아, 거기서 이서우가…….”

은율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눈을 반짝였다. 아마도 ‘이서우’의 연기 중 일부를 그와 의논 중인 것 같았지만, 소민에겐 그저 감독과 희희낙락하는 거로만 보였다.

소민은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걸 어렵사리 참아 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느낀 감정 역시 ‘질투’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준수의 온도차에 기분이 상한 소민은 제 눈치를 보고 있는 스타일리스트를 데리고 세트장의 대기실로 향했다. 매니저가 미리 대기실의 위치를 알아봐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소민이 제 목소리 톤이 달라진 것도 모르고 스태프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그녀의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채고서 이리저리 눈을 굴려 댔다. 뭐 때문인지 물어도 도통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 답답하기만 했다.

매니저는 근처에서 커피를 사 오겠다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고, 스타일리스트만 소민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옷을 준비하던 스타일리스트는 소민이 또다시 엄지를 입에 가져가는 걸 보며 기겁했다.

“언니! 곧 촬영인데 손톱 상하면 어쩌시려고!”

“이 정도쯤 뭐 어때!”

소민이 빽 소리치자 스타일리스트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밴에서도 날카로워 보이긴 했지만, 어째 촬영장에 와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 이유를 모르는 그녀로서는 속으로 소민의 손톱이 조금이라도 덜 씹히길 바라며 말없이 옷을 건넸다.

스타일리스트의 손에서 옷을 빼앗듯 든 소민이 짧은 엄지손톱 끝을 잘근 깨물었다. 어차피 ‘한주란’은 네일아트 같은 걸 하지도, 손톱을 예쁘게 가꾸지도 않으니 까짓것 조금쯤 깨물면 어떠하랴 싶었다. 지금 소민에게는 손톱을 물어뜯는 것밖에는 심란한 마음을 안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서은율, 서은율, 서은율!’

은율의 이름을 되뇌며 그의 화사한 미소를 떠올렸다. 제게는 그저 아무 감흥도 줄 수 없는, 오히려 기분만 나빠지는 미소였다. 머릿속에서 멋대로 은율의 미소를 일그러뜨려,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빨리 깔아뭉개고 싶다.

오늘 촬영할 신에 분명 ‘한주란’이 ‘이서우’를 말로 몰아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서의 제 연기에 압도당해 휘둘리는 은율의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 후 겁먹은 얼굴로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그 입에서 저절로 감탄이 터지게 만들고 말리라.

은율의 놀란 얼굴을 상상하며 엄지손톱을 이빨로 문 채 씩 웃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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