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Actor/Crank up (25/33)

14. Actor/Crank up

마지막 촬영 당일. 크랭크 업을 앞둔 마당에 몸 상태가 이상했다.

“콜록.”

또 기침이 튀어나왔다. 잔병치레도 거의 해 본 적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이러니 난감하기만 했다.

진환과의 격렬한 섹스 이후 그대로 기절했던 은율은 하루 내내 꼬박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목이 칼칼한 것과 몸에 열감이 있는 것은 섹스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했고, 진환과 몸을 맞댄 채 푹 쉬면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지금은 목에 돌이라도 걸린 것 같았고, 침을 삼키는 것조차 귓속이 아프게 당겨서 저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거기다 몸에 오른 열은 도통 사그라지지 않아서 머릿속까지 어질어질했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후 거울 앞에 서 있으니, 평소보다 한껏 달아올라 있는 제 몸이 보였다. 마치 진환이 전신에 걸쳐 키스 마크라도 찍어 놓은 것만 같은 붉은 몸이다.

가운을 걸쳐 입는데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진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아, 괜찮아?”

사실 은율의 몸 상태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진환이었다. 그는 은율이 잠결에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고, 정신을 차린 그가 여전히 열기 띤 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준수에게 연락해 촬영을 미루고 병원으로 향하자고 말했지만, 은율이 고개를 내저으며 극구 만류했다.

안 그래도 신인이라 조금만 잘못 보여도 구설에 오르기에 십상이다. 그로 인해 자신을 믿어 주고 격려해 준 준수와 스태프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진 않았다.

진환 역시 신인일 시절에 은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랬기에 은율을 끌고 무작정 병원을 찾을 수도 없었다. 병원에 들락거리다 혹시라도 사진이 찍히게 되어 기사가 뜬다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기사 하나 막는 것쯤이야 진환에겐 일도 아니었지만, 그 일 때문에 은율이 매사에 조심하고 신경 쓰게 되면 나름 스트레스가 되고 말 거다.

결국 진환은 차마 은율을 혼자 둘 수는 없어서 연우에게 약국에 다녀오라 말했다. 감기약을 포함한 각종 영양제까지 준비해서 먹이긴 했으나 그다지 차도가 없어 보였다.

은율이 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며 진환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을 그렇게 맞았는데 인정사정없이 해 댔으니…….’

은율에게 미안해졌다. 전날 촬영 당시에 찬 공기 가득한 밤중에 물을 계속 맞고 있었으니 체온이 현저히 낮아졌을 거다. 그런 상태로 하루 내내 박아 대며 무리를 시켰으니 제아무리 은율이라도 몸 상태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몰상식한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어요.”

어느새 문을 연 은율이 진환의 볼을 쓰다듬었다. 샤워 가운을 걸친 은율의 몸이 아직도 붉은 것을 보며 진환이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은율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그의 뜨거운 온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겠어? 촬영하다가 쓰러지는 거 아냐?”

“괜찮……, 콜록, 콜록!”

목이 칼칼해서 기침을 하니 진환의 낯빛이 한결 안 좋아진다.

“역시 안 되겠어. 기침도 하고 목소리도 잠겼잖아.”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촬영하는 부분에선 대사 없잖아요.”

은율의 말대로였다. 마지막 촬영인 오늘은 총에 맞아 쓰러진 이서우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면으로, 영화 말미에 눈을 뜨긴 하지만 대사 하나 없이 거기서 끝이 날 거다. 가끔 터지는 기침만 참아 낸다면 무리 없이 촬영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다 악화되면 어떻게 해? 촬영 끝나고 몸져누우면……!”

“그렇게 되면 형이 간호해 줘요.”

은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나 이번 영화 끝까지 잘하고 싶어요. 다른 분들한테 피해 주고 싶지도 않고요.”

나긋하게 말한 은율이 진환의 어두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건 자업자득이에요. 아직 팔 다친 것도 낫지 않았는데 그때 반성해 놓고도 내가 내 몸 상태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형이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내가 잘못한 거지.”

“내 탓이라니까요. 형은 그저 내가 촬영 잘 끝내거든 따뜻하게 안아 주면 되는 거예요.”

착하기만 한 은율이 배시시 웃으며 진환을 끌어안았다. 그의 등을 쓸어 주는 진환의 얼굴은 아직도 어둡기만 했다.

*  *  *

로케로 잡아 둔 병원 세트장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된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서 거울 앞에 서니, 의도치 않게 해쓱해진 얼굴이 잘만 어울렸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 보았다. 어째 약을 먹었는데도 나아진 기색도 없이 열만 높아지는 느낌이다.

똑똑-

“은율 씨, 들어가도 돼요?”

승주의 목소리에 은율이 얼른 문으로 다가가 잠갔던 문을 직접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승주와 그의 뒤에 서 있는 젊은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은율 씨, 얼굴이 아까보다 더 빨개졌어요. 괜찮은 거 맞아요?”

은율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열이 더 오르긴 했지만, 어지러워서 픽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여인이 메이크업 박스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은율의 얼굴을 살폈다.

“낯빛이 너무 안 좋아서 메이크업도 필요 없겠는데요? 지금 딱 환자예요, 환자.”

여인이 짧게 혀를 차며 말하자 승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병원을…….”

“안 돼요. 가더라도 촬영 끝난 후에 몰래 가겠습니다.”

은율의 고집에 승주도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여태껏 여러 배우를 케어해 본 경험이 있던 승주인지라 은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을 찬찬히 살펴보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은율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열 때문에 얼굴이 너무 붉은 것 같아서 그것만이라도 좀 커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인이 은율의 얼굴을 마주하며 숨을 들이켰다. 열기 담은 눈동자에 자신을 비추고는 간절하게 부탁해 오니 괜히 얼굴이 홧홧해졌다. 저런 얼굴로 말하는데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흠흠, 알겠어요.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을 거예요.”

얼굴을 붉히면서도 프로답게 얼른 화장 도구들을 꺼내 들었다. 조금이라도 열을 식힐 수 있게 시원한 알로에 성분이 들어 있는 기초 화장품부터 창백한 안색을 만들기 위한 갖가지 것들까지 모두 끄집어내고는 은율을 의자에 앉힌 채 화장을 시작했다.

확실히 여인의 실력이 좋아서인지 은율의 얼굴은 창백하다는 생각만 들뿐, 딱히 열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대신 핏기 없는 얼굴에 해쓱한 느낌을 많이 준 탓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긴 했다.

옆에서 보던 승주가 불안한 얼굴을 했다.

“은율 씨, 진짜 괜찮은 거죠?”

“괜찮습니다.”

은율이 살짝 웃어 보였다. 그것마저 힘없는 미소처럼 보여서 어째 더 불안하다.

“혹시라도 촬영 중에 힘들면 바로 말해 줘요. 티 나지 않게 휴식 받아 올게요.”

승주가 연신 걱정 어린 말을 내뱉자 은율이 좀 더 입꼬리를 끌어올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고마워요. 폐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폐라니…….”

이럴 때 보면 은율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착하고 성실한 것도 어지간히 해야지.

쓴웃음을 보인 승주가 도구들을 정리하는 여인에게 신신당부했다.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비밀입니다. 아무래도 은율 씨가 신인이다 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모두가 그러진 않겠지만, 자칫 일부 사람들이 은율의 상태를 알게 된다면 ‘몸 관리도 못 하는 걸 보니 역시 신인이네’라는 말과 함께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낼지도 모른다. 뭐만 까딱 잘못해도 ‘역시 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버리니, 그럴 일은 사전에 방지하는 게 좋다.

“물론이죠. 그리고 서은율 씨는 오늘 촬영 끝나면 진짜 푹 쉬어요. 그간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겠던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웃으니 여인이 붉어진 볼을 긁적였다. 오늘도 촬영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 대기실을 나가려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은율이 들어오라고 허락하자 문이 빠끔히 열리고 작은 머리통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서은율 씨.”

머리만 내밀고서 씩 웃는 소민을 보고서 은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겼다.

“임소민 선배님, 어서 오세요.”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은율에게 얼른 다가온 소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안색이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메이크업해서 그런 겁니다. 일단은 병석에 누운 환자니까요.”

태연하게 대답하자 그제야 소민이 안도하며 표정을 풀었다.

“어디 아픈 줄 알고 놀랐잖아요.”

다정하게 말한 소민이 덧붙여 오늘 촬영 기대한다고, 열심히 구경하고 있을 테니 뒤풀이에 꼭 참석하라는 말을 건넸다. 은율은 선배님이 부르시는데 어떻게 안 갈 수 있겠냐는 말을 건네며 훈훈한 공기를 만들어 냈다.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나가려던 여인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더니 승주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두 사람, 썸 타?”

승주가 화들짝 놀라서는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절대, 절대 아니에요.”

“에이, 승주 씨 너무 정색한다. 뭐 어때, 잘 어울리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진짜.”

신인 배우에게 있어 스캔들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익히 알고 있는 승주로서는 필사적으로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기반에는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썸’이라고 할 만한 게 둘 사이에 전혀 없었기 때문도 있다.

하지만 여인에게는 이런 소재가 굉장히 흥미로운 모양이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얼른 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여인의 등을 떠밀며 얼른 대기실 밖으로 내보냈다. 이대로 두다가는 머릿속에서 갖가지 망상을 하느라 자리를 펴고 눌러앉을 것 같다.

여인을 내보내고서 얕은 한숨과 함께 은율을 돌아보았다. 그렇게나 기가 센 소민이 대기실까지 먼저 찾아와 친근하게 말을 건넬 줄이야. 신인에게는 그렇게나 차갑다던 임소민이 말이다.

‘대단한 사람이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민과는 사이가 가까워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와 이렇게까지 친해진 신인은 그가 처음이지 않을까.

‘썸이라…….’

승주의 머릿속에 저절로 진환의 얼굴이 떠올랐다.

‘굳이 썸이라고 따지자면 진환 씨가 더…….’

그간 진환이 은율을 아끼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같은 소속사에 워낙 친한 선후배 사이이니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했거늘, 가만히 따져 보자면 웬만한 연인만큼이나 서로를 살뜰히 챙겨 준다. 게다가 함께 촬영이 끝난 날에는 대부분 진환을 따라 그의 집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다음 날 촬영장에 올 때도 함께 왔고 말이다.

승주는 은율과 소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째 소민 대신 그 자리에 진환이 있으면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끝났어요.”

그 말이 들리자마자 진환이 눈을 떴다. 눈앞의 거울에 비친 것은 평소의 진환이 아닌, 은율과 같은 병원복을 입은 강현태였다. 화장기 거의 없는 얼굴에 약간 피곤한 듯한 안색이 잘 드러나 있다.

강현태로서 거울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은율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도.

‘아쉽긴 하네.’

카메라 없이 은율과 연기를 맞춰 본 적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촬영장에서 카메라를 두고 연기하는 순간은 결코 그것과 비견될 수 없는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에어윈드> 때도 그랬지만, 이번 에서는 서로가 주연이라서 그런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매일 매일 촬영하고 싶었다. 늦은 시간까지 촬영을 거듭하고 은율과 함께 연기를 맞부딪히는 하루하루가 그리워질 것 같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버렸나 해서 아쉬움이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아쉬움 때문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 빠져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은율에게 상당한 러브콜이 몰려들 거고, 두 사람이 함께 연기할 기회는 점점 늘어나게 될 거다. 그리 생각하면 아쉬움만 남는 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환이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당연한 듯 휴대폰이 얹어졌다.

시간을 체크해 보니 아직 30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었다.

“연우야, 아까 사 오라고 했던 거.”

휴대폰에 시선을 둔 채 다시금 손을 내미니, 이번엔 카페에서나 쓰는 테이크아웃 종이컵을 쥐여 준다. 그것은 조금 전 연우가 부리나케 달려가 사 온 따끈한 생강차였다.

편의점이나 마트 같은 곳에서 파는 건 조금이나마 설탕이 섞여 있었기에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뒤져 근처 전통찻집을 찾아냈다. 설탕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기에 맛과 향이 너무 독할까 싶어 물의 양까지 일일이 조절해 온 그것은 아직도 상당히 따끈했다.

연우에게 다시 휴대폰을 맡긴 진환은 한 손에 생강차가 있는 컵을 든 채 곧바로 대기실을 나섰다. 은율의 대기실로 쓰는 곳은 바로 옆방이었다. 그 앞에 서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문이 열리고 승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셨어요?”

왜인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승주가 의아했지만, 곧바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그 너머의 은율을 바라보았다.

“어, 이진환 씨!”

은율보다도 먼저 이쪽을 알은체하는 소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촬영 분량이 다 끝나서 뒤풀이할 때나 오겠다던 소민이 왜 은율의 대기실에서 그와 친근하게 붙어 있는 걸까.

“일찍 왔네요, 임소민 씨.”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은율의 대기실로 들어가 소민을 마주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앞의 스케줄이 빨리 끝나서 일찍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진환의 태연한 연기가 먹힌 건지, 아니면 소민이 눈치가 없는 건지.

소민의 말을 듣던 진환이 은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분장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오늘 은율의 몸이 안 좋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 진환인지라 어째 그가 위태롭게만 보였다. 눈이 마주친 은율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두 분 다 오늘 마지막 촬영도 힘내세요. 뒤풀이 빠지지 말고요.”

다행히도 소민은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하러 가려는 듯, 금세 자리를 벗어났다. 소민이 나가고 나니 대기실에는 은율과 진환, 승주만 남게 되었다.

승주는 본능적으로 볼을 긁적이며 대기실 문을 바라보았다.

‘왜 나가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지?’

스스로가 의아할 지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환이 승주에게 웃는 낯으로 양해를 구했다.

“승주 씨, 은율이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시간도 남았으니 좀 재우다가 나갈게요. 옆방에 연우 있으니까 승주 씨도 거기서 좀 쉬고 있어요.”

“예, 알겠어요.”

왜인지 자기가 자리를 지키겠다고 하면 무서운 시선이 쏟아질 것만 같다.

“은율 씨, 혹시라도 뭐 필요한 거 있거나 상태 안 좋으면 바로 연락해요.”

“고마워요, 승주 씨. 그렇게 할게요.”

은율의 고마워하는 눈길을 받으며 승주가 대기실을 나섰다. 그러자마자 진환이 문을 철컥 잠갔다. 은율과 단둘이 있는 공간을 누가 벌컥벌컥 여는 건 질색이다.

“우선 이거부터 마셔, 율아.”

진환이 은율에게 생강차를 건네었다. 안 그래도 은근한 생강 향이 코를 간질인다 싶었던 은율은 따끈한 종이컵을 받아들고는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지었다.

“역시 날 제일 챙겨 주는 건 환이 형이네요.”

그렇다고 승주가 허투루 챙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진환의 모든 행동이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더 기분이 좋았다. 이런 말을 해 주면 자신을 따라 하듯 다정하게 미소 지어 주는 저 얼굴도 좋고.

진환의 서늘한 손등이 은율의 볼에 닿았다. 미소 짓던 진환의 눈가가 여지없이 찌푸려진다.

“아직도 열이 있네. 그거 마시고 눈 좀 붙이자.”

딱히 졸린 건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쉬어 주는 게 나을 것 같긴 했다. 마지막 촬영이라는 생각에 여느 때보다 더 긴장해서 그런지 벌써 피곤함이 몰려왔다.

은율의 팔을 끌어 3인용 소파에 앉힌 진환이 그 옆에 앉아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다 마시면 이리 누워. 시간 되면 깨워 줄게.”

“아, 근데 지금 화장해 둬서…….”

이대로 얼굴을 대고 자 버리면 진환의 바지에 화장품이 묻고 말 거다. 당분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칼칼한 생강차를 마시며 잠시 고민하던 은율이 갑자기 눈꼬리를 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잠근 건 알지만 저도 모르게 문가를 한 번 바라보게 된다.

“왜?”

진환이 묻자, 은율이 반쯤 마신 생강차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갑자기 그를 마주 본 상태로 허벅지에 올라탔다. 그러고선 두 무릎을 진환의 허벅지 바깥쪽에 둔 채 바짝 밀착한다. 은율의 엉덩이가 진환의 사타구니 가까이에 안착하고 그의 두 팔이 목을 둘렀다.

은율의 적극적인 접촉에 진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와 반대로 은율은 싱글거리며 여유로운 표정을 보였다.

“난 이 자세가 더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진환과 가슴을 맞대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진환의 청량한 향수 냄새와 체취가 스며들어 폐부를 달래 주는 느낌이 들었다.

“좋다…….”

은율의 입술 사이로 평온한 그 말이 흘러나오자 진환이 이를 악물었다.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기분 좋았지만, 자칫 아래쪽이 반응할까 봐 걱정될 수준이었다.

맞대어진 가슴을 통해 서로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은율의 느릿하고 편한 박동과 달리 진환의 심장은 자꾸만 더 빠르게 뛰어 댔다.

은율의 허리를 한쪽 팔로 단단히 안고는 다른 손으로 그 등을 느릿하게 토닥여 주었다. 귓가를 간질이던 은율의 숨소리가 점차 차분해지고, 곧 잠에 빠진 듯 골라졌다.

진환은 제 품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기라도 한 것처럼 안심하고 잠들어 버린 은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은율 특유의 향긋한 체취가 진환의 속을 애타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눕힌 채 깊은 키스를 나누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진환은 그렇게 꼬박 30분간 뜬눈으로 행복한 고문을 맛봐야 했다.

*  *  *

그다지 길진 않았어도 한숨 잔 덕분인지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열이 아예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피부 분장에 가까운 화장 덕분에 다행히 겉으로 티가 나진 않았다.

지정된 병실에 들어선 은율은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심호흡했다. 이게 마지막 촬영이라고 생각하니 흠 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과 긴장이 동시에 몰아쳐 왔다. 어수선한 가운데,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며 오늘 촬영해야 할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강현태와 빗속에서 실랑이하던 이서우는 그를 찌르고 자신 역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일부러 급소를 비켜서 찔렀기에 강현태는 별다른 장기 손상 없이 눈을 뜰 수 있었지만, 이서우는 그렇지 않았다. 총에 맞아 쓰러진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혼수상태였다. 같은 병원에 입원한 강현태는 그런 이서우의 병실을 매일같이 방문하며 상태를 보다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역시나 이서우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강현태는 불쑥 찾아온 경찰 동료들을 맞이하기 위해 일찍 병실을 나섰고, 그 직후 이서우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영화는 열린 결말을 암시하며 그렇게 끝이 난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던가. 은율은 마지막 장면이 주는 메시지가 자신과 진환의 연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누운 채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 보았다. 평소보다 한층 빠르게 뛰는 심장은 긴장해서인지 불규칙하기까지 하다.

고개를 돌려 촬영 준비를 하는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모두가 진지했다. 누구 하나 가벼운 얼굴을 한 이가 없었고, 다른 날보다 훨씬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병원복 차림의 진환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그는 진즉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시선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진환은 같은 병원복 차림이긴 했지만, 상의의 앞섶을 풀어헤쳐 둔 채 복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였다. 워낙 몸이 좋아서 그런 모습만으로도 그림이 된다.

‘형도 긴장하고 있을까.’

워낙 베테랑이니 자신과 달리 평온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자기 혼자만 긴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좀 억울한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일뿐더러 다른 사람도 아닌 진환과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장면의 촬영이 끝나면 이제 에서는 더 이상 진환과 카메라 앞에 설 일이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이 더 긴장을 부추기는가 보다.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고.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진환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촬영 준비에 한창인지라 그런 두 사람에게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침대 옆에 선 진환이 은율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긴장돼?”

“당연하죠.”

뭘 묻냐는 듯 즉답했다. 진환이 피식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끝이 이불 밖으로 드러난 은율의 손바닥을 살짝 건드렸다. 다른 이들이 있는 위치에서는 제 등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 편히 은율의 손을 어루만지듯 쓸었다.

“나도 긴장돼.”

진환의 말에 은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야. 할 수만 있으면 내 가슴에 손 좀 대 보라고 했을 거야. 지금 긴장돼서 가슴 터질 것 같거든.”

은율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태연한데 제 손바닥을 쓸어 주는 그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것도 같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왜 벌써 마지막 촬영인 거지.”

어린아이 같은 말투에 은율이 작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거의 3개월에 달하는 촬영 일정이었다. 3개월 내내 촬영한 건 아니었기에 정작 촬영에 쏟은 일수만 모아 보자면 그 기간의 반밖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SF 블록버스터였던 <에어윈드>는 촬영 기간을 타이트하게 잡은 게 반년이었기에 더 짧게 느껴지는가 보다. 물론 은율은 중간부터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연이었기에 그 시간을 온전히 함께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은율이 제 손을 쓸어 주는 진환의 손끝을 살포시 그러쥐었다.

“마지막 촬영이 형과 함께라서 다행이에요. 아니었으면 분명히 NG 낼 것 같아요.”

진환이 둘만 있을 때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말은 이번 촬영에 NG 없이 OK 사인을 받을 자신이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맞아요.”

은율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눈가를 휘었다.

“잊은 건 아니죠? 이번 신에서 내가 할 일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가 눈뜨는 것뿐이에요. 대사와 표정 연기가 중요한 건 형 쪽이라고요.”

그 말대로였다.

“설마 형이 긴장해서 NG를 내진 않겠죠? 나도 안 낼 건데.”

은율의 도발에 진환이 짧게 헛웃음을 보였다.

“내가 긴장해서 NG 낼 사람으로 보여?”

“그거야 모를 일이죠. 촬영해 봐야 아는 거 아닌가요?”

“……율아, 너 진짜…….”

장난이라는 걸 알기에 일부러 정색해 보였다. 은율 역시 진환의 딱딱한 표정이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이전에 진환이 이런 장면에서 NG를 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긴장은 좀 풀렸어요? 난 다 풀린 것 같은데.”

은율의 말마따나 두 사람의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던 심장은 어느새 차분해진 상태였다. 둘이서 소소하게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긴장이 모두 사라지니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슛 가겠습니다! 스탠바이 해 주세요!”

스태프들 무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진환이 아쉬운 듯 은율의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촬영하다가 혹시라도 몸 안 좋으면 바로 말해야 해.”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끝까지 자신을 챙겨 주는 진환에게 진심을 담아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은율의 손을 놓아준 진환이 그의 머리를 차분하게 쓰다듬었다.

은율의 얼굴은 진환의 몸에 가려져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 행위는 웬만한 스태프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진환의 다정한 모습에 몇몇 스태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은 소속사의 친한 선후배 관계라고는 들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다정하다.

“다들 집중하세요.”

스태프들이 소곤거리려는 찰나, 준수가 짧게 말했다. 그 덕에 스태프들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차분해 보였지만, 진환과 은율을 바라보는 준수의 눈빛에는 묘한 흥미가 감돌고 있었다.

*  *  *

삑- 삑-

심전도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균일하게 울려 퍼졌다.

새하얀 병실에 유일하게 자리한 침대에는 이서우가 죽은 듯 잠들어 있었고, 그 곁에는 한 여자 간호사가 그의 바이털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다. 침대 옆에 작은 협탁과 함께 있는 심전도 모니터는 60 내외의 일정한 심박수를 나타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이털 체크를 마친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병실을 나서려 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싶더니만 병원복을 입은 강현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퀴가 달린 링거 스탠드에 제 몫의 투명한 링거를 걸어 놓고는 그대로 끌고 온 모양이다.

“어머, 또 오셨네요.”

간호사가 강현태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환자분도 몸이 성치 않으신데 이렇게 자주 돌아다니시면 안 좋아요.”

“알고 있습니다. 금방 돌아갈게요.”

힘없이 웃어 보이는 강현태를 보며 간호사가 고개를 살짝 꾸벅여 보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적막만 남은 공간. 심전도 모니터가 내는 기계음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강현태가 한 손으로 링거 스탠드를 잡은 채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해쓱해진 이서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서우는 도통 일어나질 못했다. 응급실에서 수술을 받은 후 곧바로 깨어난 강현태와 달리, 이서우는 아직까지 눈을 뜨지 못한 채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이서우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장기를 다쳐서 한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수술이 잘 끝난 덕에 생명에 지장 없을 거라 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왜 눈도 안 뜨냐, 이 새끼야.”

힘없는 타박을 내뱉었다. 분명 수술은 잘 끝났다는데 어째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차라리 반대였으면 좋았을까. 이서우가 깨어나고 자신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면, 그랬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거듭했다.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먼저 깨어난 이서우가 멀리 도망가고, 뒤늦게 눈을 뜬 자신이 그를 놓친 걸 한탄하는 처지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속이 타들어 가듯 괴롭진 않았을 텐데. 마음 편히 원망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냐?”

담담하지만 떨리는 음색이 입술 사이를 비집어 흘러나왔다.

이서우는 여태껏 살인하면서 급소인 목과 왼쪽 가슴 외에는 칼을 댄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강현태를 상대할 때는 복부를 노렸다. 그간의 살인 경험과 의대 재학생인 점을 감안하면 복부이더라도 어디를 찔러야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급소를 피해서 찔렀다. 마치 강현태는 죽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이서우를 복잡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강현태가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은 볼이 차갑다. 마치 시체라도 되는 것처럼.

희미한 온기는 남아 있었지만 자신의 체온보다 현저히 서늘했다. 차가움에 손끝을 움찔하다가 좀 더 뻗어 그 손에 이서우의 볼을 담았다.

“서우야.”

마치 자신의 친동생을 부르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다. 강현태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왜 그랬어, 진짜.”

그 말에는 이서우를 향한 갖은 비난이 들어 있었다.

이서우가 충동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살인은 바로 그 충동 장애 때문이었는데, 예전에 이서우가 드나들었던 정신과 담당의는 살인에 대한 것인지는 몰랐지만 정신병 때문에 극히 힘들어했다고 전해 왔다.

그러면서도 살인 충동이 극한까지 달했을 때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여야만 미칠 듯한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해외 사례를 언급해 주었다. 이서우도 같았을 거라고.

하지만 이서우는 강현태의 급소를 노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지식을 토대로 급소를 정확히 피해서 칼을 찔렀다. 그렇다면 그때 이서우는 살인 충동이 없었던 때였을까. 아니면 강현태만은 죽이고 싶지 않아서 충동을 이겨 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강현태는 이서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은 마치 자신에게 죽길 바랐던 것처럼 보였으니까.

“……넌 진짜 개새끼야.”

그가 정말 자신의 손에 죽었더라면 제아무리 동생과 연인을 죽인 원수라고 해도 절대 마음 편할 수가 없었을 거다. 오히려 다 잃은 것처럼 허탈한 좌절감만 맛봤겠지.

이서우도 지쳤던 걸까. 그라면 자신을 죽인 후 강현태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그의 손에 죽길 바랐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살인 충동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소중한 두 사람을 죽인 대가를 치르기 위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일전에 이서우의 딱딱하고 차가운 사고방식을 타박했던 적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너무도 차갑게 보고 있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마저 냉소적이었다. 가끔은 정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강현태는 그런 이서우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 평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의 정을 많이 못 받고 커 와서 사람 간의 소통이 어렵고 서툴 뿐이라고 말해 줬다. 앞으로 조금씩 사고방식을 바꿔 가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피곤하고 외롭게 살지 말라고 했던 게 강현태였다. 이서우는 그 말을 들으며 조금은 그 나잇대에 어울리는 밝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노력해 보겠다고.

‘노력한 결과가 이거냐.’

어디까지 서툴 셈이야.

이서우의 볼을 매만지는 강현태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표정 변화 없이 그저 눈물이 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조금씩, 또 조금씩 배어 나왔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려던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몇 명의 남자들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간간이 ‘반장님’이라든지 ‘범인’, 혹은 ‘승진’ 등의 단어가 들려왔다.

이서우에게서 손을 뗀 강현태가 눈가를 손등으로 북북 문질러 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물기 하나 없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서우를 잠시 바라보던 강현태가 몸을 돌려 링거 스탠드를 끌고 입구로 걸어갔다. 문의 손잡이에 손을 얹고는 강현태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눈에 비친 이서우는 오늘도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한숨을 삼킨 강현태가 병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시끄러워, 새끼들아! 병원에선 조용히 몰라?!”

강현태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네가 더 시끄럽다는 둥, 몸은 어떻냐는 둥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강현태와 동료 경찰들의 대화는 점점 멀어져, 이내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적막만이 가득한 병실에 남은 것은 심전도 모니터가 내는 균일한 소리뿐이었다. 모니터에는 여전히 60 내외의 심박수가 표시되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삑- 삑삑-

점점 소리가 빨라졌다. 60 내외를 드나들던 심박수는 어느새 70이 넘었고, 곧 80 가까이 올라갔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던 이서우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한 번 꿈틀한 손가락은 연이어 몇 번을 더 까딱거렸다. 곧이어 이서우의 굳게 닫힌 눈꺼풀이 잘게 경련하는 듯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조금씩 느릿하게 들어 올려졌다.

초점 없는 이서우의 눈동자가 이내, 생기를 담았다.

*  *  *

성황리에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나니, 여태껏 그 어떤 좋은 장면이 나와도 무덤덤하던 이들조차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3개월간의 촬영은 드디어 모두 끝이 났고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촬영 종료를 기뻐했다.

곧바로 뒤풀이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지막 촬영에 참여하지 않은 출연진이나 스태프들까지 모두 호출했기에, 뒤풀이 자리로 선택한 고깃집은 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수고했어요, 은율 씨. 덕분에 대박 날 것 같은 예감이네요.”

상석에 앉은 준수가 은율의 소주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두 손으로 술을 받아 든 은율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대박이 난다면 다른 분들 덕분이죠. 그간 감사했습니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데요.”

은율이 고마움을 담은 얼굴로 준수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준수의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신주아 작가가 그를 홉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작작 먹어. 가는 길에 개 되지 말고.”

“알겠어요, 마님.”

이미 경험이 있는지, 주아가 날카롭게 경고하고 준수가 넉살 좋게 받아들이는 게 꽤 자연스럽다. 워낙 주변이 시끄러운 데다가 그들의 테이블에는 세 사람과 진환만 앉아 있었다. 자리가 연결되어 있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에게 들릴 위험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진환 역시 은율을 통해 주아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 터라 딱히 놀라진 않았다.

“이제 곧 둘 다 바빠지겠네요. 뭐, 이진환 씨는 지금도 많이 바쁘겠지만.”

준수도 업계에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들이 많았다. 주워들을 때마다 이진환은 중후한 아저씨가 되더라도 안 바쁜 날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저보다 은율 씨가 바쁜 날이 더 많아질 겁니다.”

진환이 눈가를 휘며 제 옆자리의 은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은율이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요? 형이 워낙 잘나가서 가망 없어 보이는데.”

“은율 씨처럼 파릇파릇하고 재능 있는 신인들이 치고 올라올 때가 제일 무서워요. 나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걸요.”

진환의 다정한 말에 준수가 피식 웃었다.

“이진환 씨, 그거 다른 배우들이 들었으면 기겁합니다. 이진환 씨 정도라는 게 업계 톱클래스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죠?”

“앞에 전제조건이 붙었잖습니까. 파릇파릇하고 ‘재능 있는’ 신인들이라고. 제 기준에 그런 신인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는 게 문제지만요.”

“아, 내가 이진환 씨의 커트라인을 얕보고 있었군요.”

웃는 낯으로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은율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서우 캐릭터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 준수의 집에서 머물다 나왔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이 저렇듯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역시 프로들인가 보다.

‘아니, 어른들이라 그런가.’

새삼 사회생활의 힘이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 은율의 오른쪽 허리에 뭔가가 닿아 깜짝 놀랐다. 정면에 앉아 있던 준수가 은율이 놀라는 걸 보고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왜 그래요?”

은율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술을 좀 많이 마신 것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열 잔을 넘었죠? 보기보다 잘 마시네요.”

태연하게 대화하면서도 은율의 신경은 오른쪽 허리에 닿아 있었다. 힐끔 허리 쪽을 보니 셔츠 안에서 꿈틀거리는 뭔가가 보였다. 은율의 오른쪽은 바로 벽이었고, 테이블의 위치 때문에 허리가 보일 일은 없으니 괜찮지만, 아무리 그래도…….

은율이 제 등을 지나 오른쪽 옆구리를 더듬고 있는 진환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 손이 움찔하더니만, 다시 태연하게 더듬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다 보니 은율은 애써 웃는 낯으로 진환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변태.”

눈이 마주치자 진환이 눈가를 휘며 웃었다. 그가 얼굴을 기울여 은율에게 마찬가지로 속삭여 주었다.

“우리 율이 열나는지 체크해 보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마사지하듯 누르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은율이 움찔했다.

“형, 취했어요?”

“전혀. 몸이 너무 뜨거운데 술 그만 마셔야 하지 않겠어? 몸도 안 좋으면서.”

진환의 손이 은율의 바지 옆쪽으로 스륵 내려갔다. 한층 뜨거운 열기가 진환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은율이 그런 진환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 붙잡았다.

“이거 체크해 보는 거 맞아요? 손길이 너무 불손한데.”

“착각이야.”

그렇게 티격대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이 워낙 태연하고 자연스러웠기에 정면에 앉은 준수와 주아마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둘이 귓속말을 나눌 정도로 친하긴 친하구나 하고 생각할 뿐.

은율의 몸을 옷 속에서 간지럽히듯 더듬던 진환이 힐끗 은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주잔에 물을 담아 마시고 있는 것 같은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감기 때문인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얼굴에 열이 올라 있다.

‘열이 너무 많은데.’

평소의 은율이라면 이 정도 마신 거로 얼굴이 붉어질 리는 없다. 역시나 감기까지 겹쳐서 금방 열이 오르는 듯하다.

“콜록.”

마침 은율이 짧게 기침했다. 진환이 은율의 몸에서 손을 떼며, 술이 든 소주잔을 드는 그를 만류했다.

“율아, 그만 마시고 들어가자.”

“괜찮아요, 딱히 취기가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자꾸 열이 나잖아. 지금도 얼굴 빨개. 그만 마셔.”

짐짓 엄하게 말하며 은율의 손에서 소주잔을 가져가 버리자, 맞은편의 준수가 픽 웃으며 눈을 흘겼다.

“얼마나 마셨다고 벌써 못 마시게 합니까? 은율 씨 잘 마시는데 좀 더 마시게 두죠?”

진환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써 웃는 낯을 했다.

“이러다 취해서 실수라도 하면 감독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은율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진환을 노려봤다. 이온 음료를 마시지 않으면 얼마를 마시든 멀쩡하다는 걸 진환도 알고 있을 텐데.

물론 그건 진환도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은율을 부추기는 준수를 만류하는 게 우선이었다.

“은율 씨 앞길 창창해서 실수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약간 붉어진 얼굴의 준수가 빈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불만스러운 투로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실수해서 인간미 있다고 화제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죠.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은율 씨 취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너무 티 났나요? 근데 굳이 취한 걸 보고 싶다기보다는 이런 자리에서의 흥 때문이죠. 혼자만 술 안 먹는 것도 힘든 일이에요.”

“그거야 감독님 혼자만의 생각이시죠.”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누가 그럽니까?”

진환과 준수의 차분한 말싸움이 이어졌다. 은율이 멋쩍은 얼굴로 주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아예 한숨을 내쉬며 고개도 돌린 채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 볼에 손을 댄 은율은 확실히 열이 많이 올랐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로 세수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니 진환이 얼른 이 틈에 가자고 귓속말을 해 왔다. 하지만 아직 한창 무르익은 분위기라서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달래 주었다.

화장실에서 세면대 앞에 선 은율은 자신의 붉은 얼굴을 보며 진환이 걱정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상태에서 눈만 약간 풀리면 취해서 몸도 못 가눌 것 같은 느낌이다.

찬물로 몇 번 세수를 하니 얼굴의 열이 조금 내려간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붉다. 사흘간은 잡힌 스케줄이 없으니 꼼짝하지 않고 푹 쉬어야겠다.

“콜록, 콜록.”

작게 기침하며, 화장실을 나가 테이블로 향했다. 자제하면서 마시다가 진환 말대로 상황 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도중, 옆에서 누가 팔을 덥석 잡았다.

“서은율 씨, 괜찮아요?”

고개를 돌려 보니 걱정스러운 얼굴의 소민이 바짝 붙어 있다. 혹시라도 진환이 오해할까 봐서 그녀에게로 몸을 돌려 느릿하게 팔을 빼내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자연스러운 동작에 다행히 소민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괜찮습니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잠깐만 있어 봐요!”

은율의 붉은 얼굴을 보고는 술을 과하게 마셨다고 생각한 걸까. 소민이 얼른 제 자리로 뛰어가더니 투명한 액체를 담은 컵을 가져왔다.

“이거 마셔요.”

“물인가요?”

일단 컵을 받긴 받았는데 물 치고는 은은한 나무 향 같은 게 났다.

“음료수인데 술 마실 때 안 취하게 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술 마실 때마다 이거 사서 같이 마시곤 해요.”

“아…, 제가 단걸 아예 못 먹어서…….”

미안해하니 소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알아요. 예전에 인터뷰 중에 시럽 들어간 아메리카노 먹었다가 정색했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한창 BLESS의 뮤직비디오가 히트를 칠 때였다. 사방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은율은 하루에도 몇 명이나 기자들을 만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때 하루는 카페에서 꽤 큰 연예뉴스 프로그램 리포터와 인터뷰를 했는데, 아메리카노를 요청했더니 시럽을 넣은 거로 잘못 나오고 말았다. 목을 축이기 위해 마셨다가 저도 모르게 정색해 버렸더니 리포터도 촬영팀도 갑자기 긴장했던 일화가 있었다.

뉴스에 나오진 않아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텐데, 소민은 그걸 잘도 알고 있다. 베테랑들은 원래 업계 일에 훤한 건가.

“걱정하지 말고 마셔요. 당분 전혀 없는 거라서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얼른 마시라는 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다. 머뭇거리던 은율은 소민의 눈빛에 못 이겨 조심스레 입을 대었다. 혹시라도 장난삼아 다디단 음료라든지, 그도 아니라면 사실은 술을 건네 준 것이 아닌지 잠깐 의심을 해 보았다. 그래도 설마하니 소민이 그런 장난을 하겠나 싶어서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보았다.

소민의 말대로였다. 단맛이 전혀 없어서 그냥 은은한 향이 나는 생수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시원한 음료를 한 번에 다 마셔 버리자, 소민이 은율의 손에서 빈 컵을 받아 들었다.

“어때요? 괜찮죠?”

“예, 그냥 향이 좋은 물 같아요.”

“원래 이건 맛으로 먹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따 취할 것 같으면 말해요. 이거 더 줄게요.”

배시시 웃은 소민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소민은 은율이 마시던 컵에 곧바로 제 음료를 꺼내어 붓다가 일순 멈칫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은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소민 씨, 뭐해?”

옆자리에 있던 형사반장 역의 강주원이 술잔을 기울이며 물어 왔다. 화들짝 놀란 소민이 저도 모르게 음료를 컵에 가득 부어 버렸다.

“어어!”

넘치려던 순간, 소민이 얼른 컵에 입을 대어 호로록 마셔 버렸다. 그 덕분에 다행히 넘치진 않았지만, 소민의 얼굴이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신 것처럼 삽시간에 붉어졌다.

소민이 얼굴을 붉히며 음료수 잔을 기울이는 동안, 자리에 돌아온 은율은 곧바로 준수에게 술을 받았다. 진환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준수를 노려보니, 그새 약간 취기가 오른 그가 실실 웃는다.

“뭐 어떱니까? 은율 씨 취한 것 좀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그렇게 쉽게 취하는 사람 아닙니다. 저랑 대작할 정도예요.”

“그럼 엄청난데요? 진환 씨 술 안 취하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렇게 말한 준수가 두 잔째 받아 마시는 은율을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근데 은율 씨는 아닌 것 같은데요?”

준수의 말에 화들짝 놀란 진환이 은율의 팔을 잡아 돌려 얼굴을 살폈다. 얼굴은 붉어도 또렷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어느새 몽롱해져 있다.

“율아, 아니, 은율 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째 불안하다.

“어디서 술 말고 뭐 받아 마신 거 있어요?”

“음, 아까 임소민 선배님이 주신 음료 하나 마셨는데…….”

고개를 홱 돌려 소민이 있는 테이블을 보니, 웬 음료수 페트병 하나가 올라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이온 음료다.

‘좋아해 주려야 좋아해 줄 수가 없네.’

소민과는 뭐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고 생각한 진환이 은율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니, 벌써 간다고요? 이제 시작인데?”

“죄송합니다. 나중에 연락하죠.”

다급해 보이는 진환을 준수가 붙잡으려 들었다.

“그럼 차라리 은율 씨는 택시 태워서 보내고 우린 더…….”

그 말에 진환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누가 납치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납치라니…….”

무슨 비약이 그리 심하냐고 말하려던 준수는 진환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환의 뭔가를 건드린 듯한 느낌이었다.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한 주아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나랑 둘이서 마시긴 싫은가 보다?”

일부러 삐진 척, 준수를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실상 다른 테이블도 다 연결되어 있어서 둘만 마시는 게 아님에도 주아의 발언은 효과적이었다.

“에이, 설마. 나야 우리 자기랑 둘이 있으면 좋지.”

“그럼 바쁜 사람들 뭐하러 잡아다 앉혀 두는데? 둘이 있기 싫은 거 맞네.”

“아냐, 자기야, 진짜 오해야.”

답지 않게 토라진 표정의 주아를 달래며 준수가 얼른 진환을 부추겼다.

“어서 들어가 보세요. 은율 씨 좀 잘 데려다주고요.”

“감사합니다.”

말은 준수에게 했지만, 진환의 눈은 주아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한 진환은 얼른 은율을 데리고 가게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어? 벌써 가세요?”

“이제 시작인데 어디 가요?”

“두 주연이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와서 앉으세요!”

“못 가요! 오늘 3차까진 달리셔야죠!”

사방에서 두 주연이 빠져나가려는 걸 말리려 들었다. 진환은 거의 난리가 난 주변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갖고 양해를 구했다.

주변에서 하도 잡아 대니 은율이 걸음을 멈췄다.

“더 마실 수 있는데…….”

“은율 씨 지금 취했어요. 빨리 집으로 가죠.”

진환이 다시 끌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은율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왜 은율 씨라고 불러요? 평소처럼 불러 주지…….”

취하긴 확실히 취했나 보다. 아무리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도 잘 안 들릴 정도라지만,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애칭을 불러 달라고 보채다니.

진환이 은율에게만 들릴 정도로 소곤거렸다.

“그만 가자, 율아.”

애칭을 불러 준 게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은율이 진환을 향해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가게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진환이 은율의 미소를 보고 넋이 나간 그때.

“어머 어머, 은율 씨 취했나 봐!”

“웃는 거 사기적이야!”

“은율 씨, 사진, 사진 찍어도 돼요?!”

언제 조용했냐는 듯 스태프고 배우고 할 것 없이 아주 난리가 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환이 얼른 은율의 어깨를 팔로 감싸 끌었다.

“죄송합니다. 은율 씨랑 전 먼저 갈 테니 즐기다 가세요.”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가는 사람들 손에 앉혀지는 것도 모자라 갖가지 사진까지 찍힐 판이다.

은율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진환은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 금요일 밤이라서 택시를 잡기가 힘드니, 급한 대로 콜택시라도 불러야겠다.

휴대폰을 들고 택시 호출 앱을 켠 진환은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서 일단 가게 옆의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은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택시 호출을 하기 위해 현재 위치를 잡고 있었다. 갑자기 은율의 눈빛이 돌변했다. 제 어깨를 감싼 진환의 팔을 단번에 뿌리치고는 그를 벽에 밀어붙였다.

“……?!”

진환이 깜짝 놀라서 은율을 바라보니, 나름 부리부리하게 뜬다고 떴지만 눈빛이 풀려 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은율이 휴대폰을 들고 있는 진환의 손목을 잡아 벽에 눌러 고정했다.

“잠깐만, 왜 이러……!”

“형 나빴어요.”

은율의 미간이 일그러지더니, 귀엽게 투덜거린다.

“왜 또 은율 씨라고 불러요? 너무해.”

“아니, 그거야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지.”

“형은 사람들 앞에서 날 애칭으로 부르는 게 싫어요? 그런 거예요?”

어깨가 축 늘어지고 눈꼬리가 내려간 은율의 모습을 본 진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애칭을 부르면 언제나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며, 다른 사람들 있을 때는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게 은율이다.

그런데 자기 애칭을 안 불렀다고 투덜대는 모습이라니.

은율의 이런 모습 하나로 마치 거나하게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술로도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진환이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 싫은 게 아니라 난 좋은데…….”

“그럼 불러 줘요……. 응? 환이 형.”

말꼬리까지 늘이며 귀엽게 보채 오니 진환이 당해 낼 수가 없다. 그가 얼굴에서 손을 떼며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은율이 그렇게 원하던 애칭을 불러 줬다.

“그래, 우리 율이가 불러 달라면 불러 줘야지.”

은율의 내려갔던 눈꼬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올라가며 보기 좋은 반달을 만들었다.

“더 불러 줘요.”

은율이 진환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촉한다.

“아직 모자라. 형이 오늘 은율 씨라고 부른 게 몇 번인지 알아요? 한 번 부르는 거로는 용서가 안 돼.”

반말과 존대가 섞이기 시작한 걸 보면 확실히 취하긴 제대로 취했다.

진환이 은율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를 토닥이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 앱에 자신의 집 위치를 적어 넣고 있었다.

“그래, 그래. 우리 율이, 집에 가서 형이 아침 해 뜰 때까지 불러 줄게.”

은율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진환이 자꾸만 휴대폰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환은 그것도 모르고 은율을 달래느라 입으로만 그를 불러 대고 있다.

참다못한 은율이 진환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취기가 도는 와중에도 진환이 예전에 제게 했던 자세를 떠올리고는 그의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워 넣었다. 호출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은율이 진환에게 달려들었다.

“……읍?!”

진환의 입술이 은율에 의해 삼켜졌다.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어 버린 진환은 제 입 안으로 들어오는 말캉한 살덩이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밖에서 은율이 먼저 키스를 시도해 올 줄이야. 어찌나 놀랐는지 휴대폰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잠, 율아, 잠깐……!”

어두운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밖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진환은 은율을 품에서 떼어 내려 했으나, 그는 팔에 힘을 가득 주고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는 가지런한 치열을 안쪽에서부터 쓸며 입천장을 간질였다. 진환이 주도하는 키스가 시작부터 혀를 휘감아 빨아 대는 자극적인 방식이라면, 은율은 입 안을 간질이며 안달 나게 하다가 가장 나중에 메인을 공략하는 스타일이었다. 보통은 진환이 기다리다 못해 삽시간에 주도권을 가져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도권을 가져올 겨를이 없었다. 야외에서 은율이 자진해서 시도하는 키스는 그만큼 자극적이고 충격이었다.

거의 패닉 수준으로 당황해 버린 진환은 이대로 은율을 덮치고 싶긴 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은율의 팔을 붙잡아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한 진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은율을 달랬다.

“율아, 지금 많이 취했어. 일단 집에 가서…….”

그렇게 말하며 문득 눈을 돌리는데, 문득 골목 입구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등줄기를 스치는 오싹한 느낌에 얼른 고개를 돌리니, 놀라서 굳어 버린 낯익은 여인이 보였다. 그녀를 알아본 진환이 눈가를 찌푸렸다.

“아……, 그……, 저…….”

눈이 마주친 소민이 삽시간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달싹여 댔다. 하지만 워낙 당황해서 그런지 입에서 나온 소리가 문장이 되질 않는다.

소민을 알아보고서 적잖이 당황하긴 했지만, 진환은 애써 태연한 척 도움을 요청했다.

“임소민 씨, 잠깐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예? 아, 예!”

당황해서 높은 소리로 대답한 소민이 얼른 진환에게 다가갔다. 그가 소민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거기 호출 버튼 누르고 잠깐만 들고 있어 주세요.”

“이, 이거 파란 버튼 누르면 되는 거죠? 해, 했어요.”

아직도 당황한 건지 자꾸만 말을 더듬고 얼굴을 붉히고 있다. 진환이 비몽사몽 안겨 드는 은율을 제게 기대도록 자세를 바꾸며 벽에서 등을 뗐다. 한 팔로 은율의 허리를 감싸 단단히 지탱해 안고서 그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취한 탓에 졸린 건지, 은율은 별다른 반항 없이 편하게 기대었다.

그제야 소민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든 진환이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가타부타 말도 없고 너무나 태연하니, 소민은 오히려 자신이 이상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해 묻긴 물어야겠는데, 어떻게 질문을 던져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이다.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진환이 눈을 마주쳐 온다.

“놀랐죠?”

소민이 흠칫 놀라며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안긴 채 어깨에 얼굴을 기댄 은율의 등을 토닥거리며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은율 씨가 취하면 스킨십하고 키스하는 버릇이 좀 있어요.”

“어……, 그런 거예요?”

주사가 진한 스킨십인 사람도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봤지만, 설마하니 은율이 그런 케이스일 줄이야.

“원래 잘 취하지 않는데, 오늘 좀 무리했나 봅니다. 이럴까 봐 빨리 데리고 나온 건데…….”

쓴웃음을 보이던 진환이 돌연 냉기를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는 그대로인데, 눈빛에서는 콕콕 찌르는 듯한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임소민 씨, 입 무겁죠?”

무겁지 않더라도 무거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소민이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걸 본 진환의 눈매가 묘하게 휘어진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눈매다.

“이런 주사는 알려져서 좋을 거 없으니 기왕이면 잊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은율 씨도 술 깨면 기억 못 하니까, 본인에게도 비밀로 해 주세요.”

“우음……, 내가 뭘 기억 못 한다고……?”

은율이 고개를 들더니 눈을 느릿하게 뜨며 입을 삐죽였다. 진환이 그런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시 제게 기대게 하니, 웃는 낯으로 볼을 비벼 댄다. 누가 봐도 취해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었다.

“부탁, 드렸습니다.”

일부러 힘주어 말하니, 은율의 애교를 보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소민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제대로 웃어 보인 진환이 은율을 부축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마침 호출된 택시가 근처에 거의 도착했다.

골목을 나가야 했기에 보란 듯이 안은 채로 이동할 수는 없어서 은율을 품에서 떼어 냈다. 은율이 아이처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진환이 은율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집에 가면 애칭을 더 많이 불러 주겠다고 하니,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봐요.”

“예, 들어가세요…….”

진환이 은율의 어깨를 감싸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곧 대로변에 도착한 택시에 함께 몸을 실었고, 소민은 골목 입구에서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주사가 저렇게…….”

귀엽냐.

붉어진 얼굴로,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 말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머릿속에 은율이 귀엽게 웃는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터질 것처럼 붉은 낯을 한 소민이 제 얼굴에 한참 동안 손부채질을 했다.

*  *  *

“콜록, 콜록!”

다음 날, 은율의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고된 촬영에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회식, 거기다 술까지 마셔서 면역력이 더 떨어졌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따뜻한 도라지 차를 준비해 온 진환이 안쓰러운 얼굴로 침대 옆 협탁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은율의 상체를 안아 제게 기대게 하고는 머그잔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율아, 이거 마셔 봐.”

감기 때문에 눈가가 촉촉해진 은율이 제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차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워낙 쌉싸름해서 미간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다행히 3분의 1정도는 마실 수 있었다.

“흡, 콜록!”

머그잔을 입에서 떼며 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진환은 그런 은율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상체를 숙인 채 기침을 해 대던 은율이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괜찮아요.”

은율이 기침 때문에 가빠진 숨을 고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형만 고생하네요.”

“무슨 소리야, 고생이라니.”

은율의 등을 받쳐서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혀 준 진환이 그의 땀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은율은 그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곧 나가 봐야 하죠? 걱정 말고 다녀와요.”

“……미안.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게.”

한 달 전부터 잡혀 있던 스케줄이라서 미룰 수가 없다는 게 너무도 답답했다. 은율이 이렇게 아플 때 함께 있을 수 없다니.

“서하진한테라도 전화할까?”

은율의 여동생 서지희는 학과 동기들과 프라하에서 열리는 국제음악축제에 가 있는 터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었지만, 남동생 서하진은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은율은 누운 채로 나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하진이 지금…… 모처럼 스튜디오 들어가서 적응하느라 정신없어요. 이번에 촬영 때문에 지방까지 내려간 모양인데…… 나 때문에 억지로 올라오게 하고 싶진 않아요.”

두 동생이 신경 쓸까 봐 어제가 마지막 촬영이라는 말도 일부러 하지 않았다. 축하한답시고 자기들 일까지 내팽개칠 두 사람이니, 몸까지 안 좋다는 말을 했다가는 당장에 달려올 게 뻔했다.

“난 진짜 괜찮으니까 다녀와요. 잘 자고 있을게요.”

“……그래도 불안한데…….”

마음 같아서는 병간호할 사람이라도 고용해서 붙여 주고 싶지만, 알지도 못 하는 사람에게 은율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두 동생이 가장 믿을 만한데 정작 그들을 부를 수도 없으니 애가 탔다.

은율이 진환의 서늘한 손을 꼭 잡으며 작게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시간 다 됐으니까 얼른 다녀와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나가지 않으면 은율이 잠들지 못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뗐다.

“그럼 다녀올 테니까 푹 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야 해. 알았지?”

은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진환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입고 있던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매니저 연우의 이름이 떠 있다.

-형, 지금 차 대기 중이에요. 바로 출발하셔야 안 늦어요.

연우의 조심스러운 재촉이 들려왔다. 은율이 아파서 여태 간호 중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 아무래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는 모양이다. 아픈 은율을 홀로 두고 스케줄을 가야 한다는 것에 적잖이 짜증을 냈었으니까.

그래도 프로는 프로라서 스케줄을 펑크낸다거나 막무가내로 미루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했다가는 은율이가 얼마나 자책할지 보이니까.’

씁쓸한 얼굴로 한 번 더 은율이 있는 방문을 바라보다가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연우와 전화를 끊자마자 연락처를 뒤졌다.

‘승주 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연락해 둬야겠다.’

케어하는 배우가 사흘간 쉬는 만큼 그 역시 마음 편히 휴식을 만끽하는 중이겠지만, 그래도 현 상황에 은율을 옆에서 간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휴대폰에서 승주의 연락처를 찾아내 그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진환이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감기라는 게 이렇게나 힘든 거였던가.

워낙 오랜만에 걸려 본 감기라서 그런지 더 적응하기가 힘들다. 열 때문에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몽롱한데 몸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서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서 목이 따끔거리고, 전신은 스턴트 액션을 3일 내내 찍기라도 한 것처럼 근육통이 찾아왔다. 하진이나 지희가 감기 걸렸을 때 왜 그렇게 힘들어하고 끙끙댔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감기 걸렸던 게 언제더라…….’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때는 양부모님이라고 불러야 할 서유건과 정나영이 살아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끙끙대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다가온 유건이 말없이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재 주었고, 나영은 그를 위해 말간 죽을 몇 번이나 끓여 주었다. 기력이 빠져서 잠들었다가 얼핏 눈을 떠 보면, 어느새 제 침대 옆에 걸터앉아 수십 개의 감기약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유건을 볼 수 있었다. 일일이 설명서까지 읽어 보며 신중히 약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기분 좋은 미소가 걸리곤 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후로는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잔병치레 한 번 한 적이 없다.

지켜야 할 두 동생이 있었고, 그들의 버팀목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두 동생이 근심 걱정 없이 자신들의 꿈을 위해 나아가길 바랐기에, 그런 요소도 무엇 하나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악착같이 살아야 했기에 아플 겨를도 없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유건의 따뜻한 손길이 떠올랐다. 아플 때면 묵묵히 제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 주던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사실은 그저…… 그 커다랗고 따뜻한 손을 다신 느낄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버릴까 봐, 그래서 무서웠던 게 아닐까.

“콜록, 콜록.”

잠결에 기침이 터져 나와 머릿속을 흔들어 댔다. 잠에서 끌려 나와 뇌가 지끈거리는 감각을 여실히 느끼게 되어 불쾌했다.

기침으로 인한 가쁜 숨을 토하는데, 머리에 닿아 오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환이 형인가……?’

잠결이긴 했지만, 진환이 일 때문에 나간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일하다 중간에 나온 건 아니겠지.

방에 불이 꺼져 있는 통에, 흐릿한 눈을 들어 보아도 상대의 실루엣만 보일 뿐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입이 멋대로 작게 달싹여졌다.

“아버……지……?”

유건과 너무도 똑같은 손길에 목소리가 떨려 왔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우뚝 멈췄다. 은율이 몽롱한 눈으로 상대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아빠라고 해야지.”

어둠 속에서 낯익은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이가 친부인 칼이라는 걸 알았다. 유건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잠깐, 속에서 뭔가 울컥한 게 올라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라는 사람들의 손길은 전부 이런 걸까.

이렇게나 따뜻하고 커다란 걸까.

깨달아 버렸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아픈 건 자신을 묵묵히 간호해 주던 유건과 나영이 아니더라도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있어서였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곁을 지켜 주며 끌어안아 줄 사람들이 있었기에…….

꿈도 무엇도 없이, 그저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 주고 곁에 남아 주는 미래 같은 건 그려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제 곁에는 자신을 지탱해 주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 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꿈을 찾아주고 이뤄 줬으며,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갖은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은율이 제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뺨으로 가져왔다. 진환의 손이 그랬듯, 칼의 손 역시 기분 좋게 서늘했다. 얼굴에 가득 차 있던 열기가 그 손에 녹아 들어갔다. 칼의 체온이 느껴지는 손등에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뺨을 문질러 댔다.

“우리 아들이 애교 부리니까 좋네.”

‘우리 아들’이라는 말이 찌르르 가슴을 울렸다. 마치 진환이 ‘우리 율이’라고 부를 때처럼 애정이 꾹꾹 담기다 못해 흘러넘치는 것 같은 단어였다.

말없이 칼의 손을 꼭 쥐었다. 유건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결국 잡지 못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그가 절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마치 아이가 되어 포근한 인형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기분 좋게 안심해 버린 은율은 곧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꽤 오래 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제 몸을 감싼 기분 좋은 따뜻함과 편안함 때문에 눈을 뜨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더 잘까…….’

몸이 안 좋을 때는 잠이 보약이라던가.

은율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잠을 청하기로 했다. 자신을 감싼 포근한 느낌에 몸을 기대며 그 안으로 한층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 포근함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분명 자신은 진환의 집에서 잠들었고, 그는 스케줄 때문에 꽤 긴 시간 동안 귀가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진환의 침대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건 누구지?

그 생각이 들자 천근처럼 무겁던 눈꺼풀이 단번에 들어 올려졌다. 뻑뻑하고 답답하기만 하던 눈가가 일순 시큰하긴 했으나, 눈을 뜨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장시간 눈을 붙이고 있었던 터라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주변이 다소 어둡긴 했지만, 이른 아침인지 남향의 커튼 사이로 은은하게 빛이 들이쳤다. 덕분에 눈의 초점이 맞자마자 자신을 인형처럼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어두운 회색 눈동자가 방에 들이친 햇빛처럼 은은한 눈빛을 보냈다.

은율을 안은 채 누워 있던 칼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일어났어?”

간지러운 버드키스에 은율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왜 칼이 여기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어……, 아빠가 왜 여기…….”

“기억 안 나? 어제 왔는데.”

어제?

은율이 둔해진 머릿속을 뒤져 보았다. 생각해 보니 밤늦게 한 번 깼을 때, 어둠 속에서 칼을 봤던 것도 같다. 그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유건과 너무도 비슷해서 울컥하기도 했고, 그의 존재에 고마워하기도 했다. 그러고선 제 옆에 있어 달라고 칭얼대기라도 하듯, 칼의 손을 붙잡고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살짝 떨었던 것도 같다. 마지막엔 손을 꼭 잡고서 다시 잠에 빠졌었지.

단숨에 떠오른 간밤의 일이 결코 꿈이 아니었다는 건 눈앞의 칼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어찌 된 건지 아직도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니, 이번엔 칼이 먼저 잡아 온다. 은율의 손을 붙잡고서 그 손가락과 손등에 사랑스럽다는 듯 입을 맞춘 칼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몸은 좀 어때?”

“아……, 지금은 좀 괜찮습니다. 근데 저 때문에 오신 건가요? 바쁘실 텐데 죄송하게…….”

칼이 얼마나 바쁜지는 은율도 알고 있다. 그런 그가 간밤에 시간을 내어 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시간까지 제 옆을 지키고 있었을 줄이야.

칼이 미간을 모으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다니. 아들 아프다는데 달려오는 게 당연하지.”

왜인지 그 말이 뭉클해서 눈가를 떨고 있으니, 칼이 두 눈두덩이에 짧게 입을 맞추며 등을 쓸어 주었다.

“좀 더 잘까? 아니면 일어날래?”

지금이 만약 오전이라면 거의 15시간 이상은 잤을 것이다. 몸이 아프면 참 많이도 자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칼이 얼른 등을 제 팔로 받쳐서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피가 도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며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니, 어깨에 따뜻한 팔이 둘리고 몸이 옆으로 기운다.

“아직도 열이 높네.”

은율을 제 품에 기대게 한 채로 이마를 짚어 본 칼이 짧게 혀를 찼다.

“우선 식사부터 하고 약 먹자.”

“아빠……는요?”

자신을 챙기는 은율이 기특한지, 그의 볼에 애정을 담아 입을 맞춘다.

“아빠는 먹었어. 죽 끓여 놨으니까 우리 아들은 그거 먹자.”

칼에게 머리를 기대려던 은율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는 해도 그의 입맛은 확실히 러시아인이었다. 아직 한식 중에 입에 맞지 않는 게 대부분이란 걸 아는데, 그런 그가 직접 한식 레시피로 죽을 끓이고 간을 봤다고?

{밖에 있어?}

문을 바라본 칼이 영어로 상대를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덩치 큰 누군가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스킨헤드의 니콜라이는 은율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실내라서 그런지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는데, 평소 딱딱하고 차가워 보이던 눈동자에 얼핏 걱정이 서려 있다.

{준비해 둔 죽 좀 데워서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니콜라이가 짧게 대답하며 은율을 한차례 눈에 담고 나갔다.

칼이 끓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니콜라이의 솜씨인가 보다.

니콜라이는 거칠고 주방을 가까이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외관과 달리, 요리 실력이 좋았다. 러시아에 있을 때도 칼의 식사 대부분을 책임졌다더니, 한국에 와서는 한식을 한국인보다 더 잘 해내는 통에 은율도 놀라고 말았다. 이후 니콜라이가 주기적으로 반찬과 찌개 같은 걸 해다가 은율 남매의 집으로 가져다준 덕분에 인스턴트 음식을 끊기도 수월했다.

그런 니콜라이의 죽이라면 맛보지 않아도 상당히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은율이 순간적으로 밭은기침을 토했다. 칼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며 은율의 등을 쓸어 주며 토닥였다. 고작 감기일 뿐인데 칼의 얼굴만 보면 마치 은율이 죽을병에 걸린 것만 같다.

칼을 걱정시켰다는 생각에 한없이 미안해지던 찰나, 니콜라이가 문을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든 1인용의 작은 좌식 테이블에는 죽 한 그릇과 시원한 동치미 한 그릇, 그리고 숟가락이 하나 세팅되어 있었다. 니콜라이는 그것을 가져다가, 은율의 이불 덮은 허벅지 위에 놓아 주며 숟가락을 내밀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웃는 낯으로 고마움을 표하니, 니콜라이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내민 숟가락을 받아 들려는데, 은율을 안고 있던 칼이 대신 가져간다.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아빠가 먹여 줄게.”

“……예?”

니콜라이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낸 칼이 한쪽 팔로 은율의 어깨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둘러 안아 고정했다. 니콜라이가 방을 나설 때쯤엔, 죽에 숟가락을 넣은 칼이 그것을 깊이 뜨고 있었다.

“제가 먹겠습니다.”

“그냥 가만히 받아먹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프다고는 해도 다 큰 청년이다. 누가 밥을 먹여 줄 나이는 까마득히 지났음에도 칼은 막무가내였다.

“아들 아프다는데 아빠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서 그래.”

어울리지 않게 잔뜩 시무룩한 표정으로 애절하게 바라봐 온다.

“……안 돼?”

저런 얼굴에 어떻게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을까.

은율은 안 그래도 열이 오른 얼굴에 민망함으로 인한 열까지 더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냉랭한 분위기를 가진 평소의 칼은 제 앞에서만 이렇듯 팔불출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게 아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 저 깊은 곳이 저릿거리고 알 수 없는 울컥함이 밀려오곤 한다.

칼은 숟가락에 오른 죽을 어린애에게 주듯이, 후후 불어다가 그걸 은율의 입가로 가져갔다. 머뭇거리던 은율은 반짝이는 칼의 눈동자를 보며 그것을 한 입 받아먹었다.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입 안에 퍼지고 부드러운 식감의 전복 조각이 씹혔다.

유건과 나영이 죽고 삼남매만 남아 버린 이후로는 시중에서 파는 죽만 먹어 왔는데, 직접 만든 죽이 이렇게나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정확히는 니콜라이의 실력이 대단한 거겠지만.

“어때? 맛있어?”

마치 자기가 한 요리의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긴장한 얼굴을 한다. 은율은 입에 머금은 죽을 꿀꺽 삼키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맛있어요.”

그제야 얼굴이 풀린 칼이 이번엔 동치미를 한술 떠서 입에 넣어 준다. 따뜻한 죽 때문에 얼굴만큼이나 열이 올라 있던 입 안이 삽시간에 시원해졌다. 감칠맛과 약간 톡 쏘는, 시원한 맛이 가미된 동치미는 은율마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맛이 굉장했다.

“이것도 니콜이 직접 만든 건가요? 실력이 보통이 아닌데요.”

“그렇지? 한식 자격증인가 그거 딸까 생각하던데. 뭐든 딸 수 있는 거면 따 둬야 한다고.”

한국에 1년가량 있더니 생각마저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니콜라이의 실력에 감탄하던 은율이 이젠 아예 몸에 힘을 뺀 채 편안하게 칼의 수발을 받고 있었다. 문득 든 생각에 식사를 하다말고 칼을 바라보았다.

“환이 형이 연락한 거죠? 그런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입구가 지문 인식 장치로 되어 있어서 들어오실 수가 없었을 텐데.”

진환의 집은 워낙 보안이 철저한 데다가 잠금은 죄다 지문 인식 장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진환이 칼을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 주고 간 걸까. 스케줄 때문에 바로 출발해야 할 때가 되어서야 방을 나갔으니 시간상 그러긴 어려웠을 텐데.

은율의 질문에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의미를 내포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남의 집 보안을 아무렇지 않게 뚫어 버린 칼에게 한소리 하려던 은율은 아무리 그래도 진환과 얘기는 했겠지 하고 입을 다물었다.

식사 후 상을 내가자, 칼은 뒤에서부터 안은 것 같은 자세로 은율을 제게 기대어 앉게 했다. 진환과 자주 하던 포즈라서 뜨끔했지만 등을 타고 느껴지는 그와 닮은 심장박동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칼은 은율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복부 앞에서 손을 깍지 낀 채 몸을 밀착했다. 제 아들과 이렇게 몸을 대고 있는 것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대로 끌어안은 채 잠들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칼이 은율의 어깨에 턱을 댄 채 아이한테 하듯 말했다.

“식후 30분이라고 했으니까 이대로 기다렸다가 약 먹자.”

“예, 그럴게요.”

순순히 대답한 은율은 그럼 30분간 이 자세로 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뭐 어때.’

아빠라서 그런지 몰라도 칼과 몸을 맞대고 있노라니 저절로 힘이 빠지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그러다 문득 걱정됐다.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걱정스럽게 묻자 칼이 은율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다 처리하고 왔으니까 우리 아들은 걱정하지 말아요.”

“……말투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일부러 진지하고 깍듯하게 말했다. 칼이 미간을 찌푸리며 싫은 내색을 했다.

“그런 말투 쓰지 말라니까.”

칼은 은율의 딱딱한 ‘다나까’로 끝나는 말을 싫어했다. 유건의 영향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런 친근감 없고 벽돌 같은 느낌은 사절이었다. 은율이 제게 한껏 어리광 부리길 바라는 칼인지라 지금처럼 딱딱한 말투에는 질색을 했다.

그나마 몇 달 전부터는 은율이 진환에게 하듯 편한 말투를 섞어 쓰기 시작했기에 그걸로 만족하고 있었다.

은율이 미소를 띤 채 뒷머리를 칼의 어깨에 기댔다. 열 때문에 약간 달아올라 있긴 했지만, 뭔가 긴장이 풀어진 듯한 얼굴이었다.

“촬영은 어땠어?”

촬영이 있는 날마다 들었던 질문이었다. 언제나 전화로 통화하면서 대답했지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다. 하루하루 촬영이 끝나고 그날의 감상을 말하는 것과 모든 촬영이 끝난 상태로 이전을 되짚어 보며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은율의 눈동자가 금세 아련해졌다. 머릿속에서 이제까지 했던 촬영을 되돌아보고 하나씩 되새겨 보았다.

“신기했어요.”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다른 영화 촬영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이번은 감회가 새로웠어요. 카메라 앞에만 서면 내 안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더라고요. 난 그걸 가장 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고요.”

은율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앞에 거울에 비치던 이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자신임에도 자신이 아니었던 모습이다. 머릿속에 그려진 이서우가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강현태’가 서 있었다.

“진환이 형과 연기하면 정말 신기해요.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연기하는 것 같거든요. 얼굴이 같은데도 형이라는 생각보다는 영화 속 본인을 실제로 만난 것 같았어요.”

그리고 진환은 그 모습으로 자신의 몸을 빌린 이서우와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감정을 부딪쳐 왔다. 은율마저 울컥할 정도로.

칼은 은율이 말하는 것을 애정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제야 그가 감았던 눈을 떴다.

“연기라는 건 정말 신기해요.”

누군가를 연기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들이 되어 말해 보고 그들의 감정을 느껴 보고 그들과 동화되어 간다. 그들은 그렇게 은율의 몸을 빌려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들이 담긴 영상은 스크린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은율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칼과 눈을 마주쳤다.

“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뭔가…….”

“말 안 해도 알아.”

칼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은율의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제 엄마를 쏙 빼닮은 눈동자에 그녀가 한때 보였던 감정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은율의 어머니인 한예나가 그의 얼굴 곳곳에 녹아 들어 있다. 심지어 예나와 눈빛마저 너무도 똑같다.

북받쳐 오른 듯한 은율을 꽉 끌어안으며 칼이 여태껏 계속 묻고 싶었던 말을 꺼내 들었다.

“행복하니?”

자신이 함께 있지 못했던 만큼, 힘들게 했던 만큼 어떻게든 보상해 주고 싶었다. 아들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줄 자신이 있었고, 그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궂은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거다.

오랜 세월 걸려 되찾은 아들이 유일한 꿈으로 잡은 게 연기였다. 제 엄마와 같은 길을 가겠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아내에게도 제대로 안겨 주지 못했던 행복을, 아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만큼 주고 싶다. 그 무엇보다 빛나는 제 아들이.

그게 칼이 은율의 곁에 있는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은율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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