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Actor/Marketing
감기가 낫는 데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진환과 칼의 극진한 간호 덕분인지 은율은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이전만큼이나 건강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촬영이 다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준수 감독의 이 크랭크 업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고, 진환과 은율에게는 곧바로 갖은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은 둘이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진환 앞으로는 너무도 많은 차기작 시나리오가 쌓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잡힌 일정만 해도 워낙 빠듯한지라 그걸 모두 읽어 볼 시간도 없어 보였다.
차기작 시나리오가 들어오는 건 은율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은율이 참여한 작품들이 많지 않고, 그중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에어윈드>와 이 아직 개봉 전이라서 그런지 어중간한 조연 위주로만 제의받고 있었다. 그런 캐릭터들은 은율이 보기에도 특색이 없어서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자잘한 조연과 인터뷰, 화보 촬영 등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던 어느 날 은율 앞으로 한 가지 제의가 들어왔다.
“……예능……이요?”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프로그램 이름은 이야. 이번에 에 참여한 주연들이 게스트로 참여했으면 한다고 제의해 왔어.”
칼의 말에 은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이 말한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국민 예능 프로였기 때문이다.
은 주말 저녁 안방을 책임지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그 인지도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드라마 개봉 전에 홍보차 배우들을 섭외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곤 했다. 고정 연예인 5명과 게스트가 팀을 나눠 갖가지 경쟁을 벌이는 이 프로그램에 일단 참여만 해도 홍보가 된다. 그래서 보통은 감독과 스태프들이 나서서 이런 프로에 참여해 달라고 미리 언질을 주기도 했다.
“영화 개봉 전에 홍보도 하고 얼굴도 알릴 겸 나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맞은편에 앉은 칼의 말을 들으며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야 하고 싶지만…… 진환이 형은 이런 거 안 나가잖아요.”
주연이라면 자신과 진환이 아니던가. 하지만 진환이 여태껏 예능에 나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영화사에서 아무리 권해도 관심 없다며 거절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칼이 피식 웃었다. 이미 진환과는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은율이 네가 나가겠다고 하면 본인도 하겠다고 했어.”
예능이라는 게 어색하고 어려울 순 있어도 분명 얼굴을 알리고 영화를 홍보하는 데엔 도움이 된다. 예전의 진환이었다면 굳이 자신이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시간에 대본을 보겠다며 칼같이 거절했을 테지만, 은율이 함께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두 주연 중 한 명이 빠져 버리면 주연 한 명으로 게스트를 세울 순 없으니 이야기가 무산되고 말 것이다. 그걸 생각한 진환은 은율이 하고 싶어 한다면 자신도 당연히 참여하겠다고 말해 왔다.
은율의 대답은 뻔했다.
“하겠어요.”
영화 홍보도 되고 얼굴도 알릴 수 있는 기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사실 은율은 단순했다. 예능 프로 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던 은율은 진환과 함께 참여해 그걸 즐기고 싶었다. TV에서만 보던 예능 프로그램에 자신이 참여하게 된다는 것도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그 자리에 진환까지 함께한다면 분명 추억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진환이 형한테 전해 주세요. 같이 해 보자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은율을 보며 칼이 웃는 낯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진환에게 바로 말해서 스케줄을 잡아야겠다.
칼이 휴대폰에 시선을 둔 채로 옆에 두고 있던 태블릿 PC를 은율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은율과 진환이 참여할 경우, 예능 프로 에서 어떤 컨셉과 스타일로 진행할 건지가 상세히 나와 있었다. 그걸 받아 든 은율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이진환 씨, 그 예능, 합시다.”
칼의 다짜고짜 건네진 말에 건너편에서 곧바로 승낙의 말이 들려왔다.
* * *
예능 프로그램 촬영 당일.
은율은 예정된 집합 시간보다 먼저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여름방학을 맞은 한 고등학교 건물로, 촬영을 위해 통째로 빌린 모양이었다.
학교 내의 주차장에 밴을 세워 두고 그 안에서 내리자마자, 스태프로 보이는 한 청년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서은율 씨죠?”
반짝거리는 눈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넨 청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 막내 작가인 박경태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목소리도 크고 한없이 밝은 청년이었다. 그는 천진한 얼굴로 은율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은율은 그 손을 맞잡아 주며 마주 웃어 보였다.
“서은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박 작가님.”
손을 맞잡은 경태가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은율을 빤히 바라보았다. 손을 빼려던 은율은 그의 단단한 힘에 붙들려 그대로 악수를 한 채로 고개만 갸웃했다.
“실제로 보니까 진짜 넋 놓을 정도로 예쁘시네요.”
“……예?”
은율의 음성에 화들짝 놀란 경태가 얼른 손을 놔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한 대로 바로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아, 예쁘시다는 건 남자 같지 않다거나 귀엽다는 게 아니라, 어, 음, 그러니까…….”
예쁘다는 말을 어떻게든 해명하려고 당황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은율이 웃는 낯으로 경태를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아하하…….”
뒷머리를 긁적이던 경태는 밴에서 내린 승주와 한 번 악수를 나눈 후에야 두 사람을 안내했다. 오프닝 준비가 한창인 학교 건물로 향하며 경태가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리 전달받으셨겠지만, 오늘 컨셉이 선생님과 학생이거든요. 어떤 거로 결정될지 몰라서 의상 두 벌 다 준비해뒀어요.”
경태의 말대로, 이번 의 컨셉은 학교가 배경인 만큼 선생과 학생으로 잡혀 있었다. 오프닝에서는 간단한 소개와 영화에 대한 짧은 언급, 그리고 사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이어질 거다. 이후에는 게스트를 포함한 전원이 반으로 나뉘어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다.
문제는 인원을 나눌 때였다. 사전에 협의를 보지 않고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촬영 도중에 랜덤으로 배역 뽑기를 한다. 그래서 은율을 포함한 모든 출연자가 자신이 어느 팀으로 들어가게 될지, 그 팀에는 누가 있는지 당장 알 수가 없었다.
‘기왕이면 형이랑 같은 팀이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웃었다.
추격전의 배경은 아주 간단했다. 필사적으로 땡땡이치려는 학생들과 그들을 잡아다가 교실에 앉혀 두려는 선생들이라는 내용이다. 즉, 학생들이 쫓기는 쪽이고 선생들이 쫓는 쪽이었다. 은율은 어느 쪽이 되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들뜨고 말았다.
경태의 안내를 받아 정문 쪽으로 다가간 은율은 주변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미리 도착해 있던 두 명의 남자 출연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서은율 씨. 어서 오세요.”
“예능은 처음이죠? 마음 편히 즐기다 가요.”
워낙 많은 게스트들이 왔다 가는 데다가 편한 분위기의 리얼리티성 예능이라 그런지 둘 다 밝은 얼굴로 은율을 맞아 주었다. 그들 모두 30대 초반의 배우였는데, 한 명은 명품 조연이라 불리는 익살스러운 인상의 이성준이었고, 다른 한 명은 최근 한 드라마에서 주조연으로 활동 중인 준수한 얼굴의 윤승현이었다. 그들은 이 프로의 꽤 오랜 고정 출연자였기에 은율도 단박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두 선배님 모두 이렇게 뵈니까 너무 신기하네요.”
스턴트 일을 하면서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연예인들에 대한 환상이라든가 만나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 은율의 입장에서는 그들도 모두 다 같은 사람일 뿐이고 직업이 다른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예능 프로그램 에 출연하는 출연진에게는 은율도 흥미가 많은 편이었다. 은 추격전이나 갖가지 게임을 메인으로 내세운 버라이어티쇼였고, 기본 틀 외에는 거의 대본 없이 즉흥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재밌는 포인트였다. 그걸 회차마다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소화해 내는 출연진들이 대단해 보였다.
거기다 고정 출연진 5인 중에서 원래 예능을 하던 방송인은 둘뿐이었다. 다른 3명 중 2명은 배우였고, 마지막 1명은 현직 아이돌이었다. 이렇듯 출신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들 모두 예능 프로에 특화된 사람처럼 적응한 모습을 보여 주니 신기하고 대단해 보일 수밖에.
“저희도 신기해요. 서은율 씨처럼 엄청난 신인 배우를 예능에서 만날 줄이야.”
이성준이 나서서 친근하게 감탄의 말을 건네 오니, 은율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엄청나다니, 말도 안 됩니다. 그냥 신인이에요. 제가 어떻게…….”
“에이, 저희 얘기 다 들었어요. 데뷔하기 전부터 유명하셨던데요?”
윤승현도 이성준의 말을 거들며 씩 웃었다. 예능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두 사람이라 그런지 장난기 담아 웃는 모습도 어째 형제처럼 닮아 보였다.
은율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유명할 리가 없습니다.”
“겸손하시기는. 스턴트맨으로 날렸다면서요. 감독님들이 서은율 씨를 스턴트맨으로 쓰려고 안달하셨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런 얘기를 대체 누가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렇게 날릴 정도까지는…….”
대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기에 이러는 걸까?
은율이 의아해하던 찰나, 범인이 나타났다.
“저기 오네요. 서은율 씨의 오랜 팬.”
윤승현이 특유의 익살스러운 얼굴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팬?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가리킨 곳에 시선을 두었다.
“은율이 형-!”
익숙한 목소리와 낯익은 얼굴에 은율의 얼굴에도 미소가 서렸다. 한달음에 달려온 젊은 남자가 대뜸 은율을 끌어안았다.
“형! 이게 얼마 만이에요!”
진심으로 은율을 반가워하던 BLESS의 멤버 김현우는 그를 안은 채 발을 동동 굴러 댔다. 은율이 첫 영화의 대역 스턴트맨을 했던 것과 뮤직비디오 촬영을 인연으로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은율은 현우에게 끌어안긴 채로 진정하라고 말하면서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걸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도 귀엽게 느껴진다.
윤승현과 이성준이 달려들어 잔뜩 흥분한 현우를 떼어 놓은 후에야 은율이 기분 좋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여전히 밝으시네요, 김현우 선배님은.”
“으엑! 선배님이 뭐예요?!”
“저보다 연기를 먼저 시작하셨으니 선배님이죠.”
“말도 안 돼요! 그러지 말아요, 형! 선배님 빼고 불러 줘요, 네?”
현우가 시무룩한 얼굴로 애교 부리는 듯한 눈을 했다. 다 큰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구는데도 동생 같아서 그런지 귀엽기만 하다. 결국 은율은 그의 요청대로 예전처럼 ‘현우 씨’라고 불러 주기로 했다.
의 출연진 중 유일한 아이돌 출신이자 막내인 현우는 작년부터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합류한 상태였다. 초반 회차에서는 처음으로 뛰어든 고정 예능답게 어색해하고 어려워했지만, 특유의 넉살과 친화력을 발휘해 금세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숨겨진 예능감까지 발휘하고 있어서 세간에서도 꽤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아이처럼 제 팔을 붙잡은 채 호들갑스러운 얼굴을 한 현우에게 은율이 부탁의 말을 건넸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이 처음이라 걱정이 많습니다. 현우 씨가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딱딱했기에, 현우가 입을 삐죽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형, 말투 좀 편하게 써 주면 안 돼요? 동생처럼 생각하신다더니…….”
제 말이 많이 딱딱했나 싶긴 했지만, 미안하다는 표정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진환과 칼 외의 사람들에겐 습관적으로 딱딱한 존대만 흘러나왔으니까.
“다행이네요. 기왕이면 친한 분이 같이 있어야 촬영이 편하거든요.”
얌전히 있던 막내 작가 경태가 끼어들자, 현우가 은율을 보란 듯이 껴안으며 씩 웃었다.
“저희 친해요! 엄청!”
은율이 못내 웃어 보였다.
때마침 저 멀리 운동장에 검은 밴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그게 진환의 밴이라는 것을 알아챈 은율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약간 당황한 채 현우를 떼어놓았다.
“다른 분이 도착했나 봐요.”
일부러 모르는 척하니, 현우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밴을 노려보았다. 밴이 낯선 것으로 보아 게스트의 것이 분명했다.
곧 밴의 문이 열리고, 진환이 바닥을 밟았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단번에 은율과 시선을 맞췄다.
‘설마 본 건 아니겠지?’
거리가 좀 있는 데다가 주변에 스태프들이 워낙 많으니 못 보지 않았을까? 현우가 끌어안은 걸 봤다면 진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안 그래도 둘이 그리 친하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다 문득, 진환이 내리자마자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자신을 곧바로 찾아낸 게 떠올랐다.
‘……들켰네.’
현우를 바로 떼어 내거나 막아 내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진환에게 남몰래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은율을 향해 진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옆에서 들려온 긴장한 목소리에 은율이 깜짝 놀랐다. 이성준과 윤승현은 어느새 진환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반면 진환은 그들에게 힐끗 시선을 준 채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허리를 편 이성준과 윤승현은 눈까지 반짝여 가며 진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악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진환은 벽을 두는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과 악수를 나눠 주었다. 어딘지 감격한 것 같은 두 사람을 뒤로한 진환이 은율의 곁에 있는 현우에게 시선을 두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냉기가 흘렀다. 눈에 힘을 바짝 준 채 진환을 노려보는 현우의 옆구리에 이성준의 손날이 박혔다.
“현우야, 뭐 하는 거야? 인사 안 드려?”
“윽!”
현우가 옆구리를 짚으며 이성준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성준과 윤승현은 긴장 가득한 얼굴로 현우를 으름장 놓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현우는 겁을 상실한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직 아이돌이라고는 하지만 배우로서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던 적이 있으니 현우에게 있어 진환은 까마득한 선배인 거다. 심지어 <메아리>에서 함께 주연으로 참여했지 않던가.
현우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른 데에 시선을 둔 채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진환이 태연하게 인사를 받으며 다른 이들과 그러했듯 악수를 하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현우가 그 손을 잡으니, 갑자기 강한 악력이 느껴져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러게요. 오늘 잘 부탁합니다, 김현우 씨.”
정작 현우의 손을 부러뜨릴 듯 가득 힘을 준 진환은 감흥 없는 목소리로 가볍게 인사를 건네었다. 자존심 때문에 아프다는 내색은 못 하고 애써 눈에 힘을 바짝 주고서 진환을 바라보니, 그의 입꼬리가 비웃듯 살짝 올라갔다가 금세 내려간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보자마자 잡아먹으려고 해?!’
그렇다고 대놓고 난리를 필 수도 없었다. 옆에는 이진환을 실물로 보고서 눈을 반짝이는 후배 배우가 둘이나 있었고, 무엇보다 은율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현우가 불퉁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니, 그제야 손이 거두어진다.
현우에게 묵언의 경고를 보낸 진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은율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먼저 와 있었네. 같이 가자니까.”
진환이 혹여 현우에게 표독스럽게 굴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은율은 그의 부드러운 말에 흠칫했다. 얼른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이성준과 윤승현이 놀란 눈으로 은율과 진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는 진환이 은율에게 친근하게 반말을 한다는 걸 예전 촬영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때 비해 한층 부드러워진 말투에 놀랐다. 거기다 눈길도 한없이 따뜻하다.
‘다른 촬영도 같이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질투 나게…….’
현우가 불편한 얼굴로 입을 삐죽이려던 찰나, 진환과 시선이 마주쳤다. 진환의 눈꼬리가 보란 듯이 휘는 것을 본 현우는 그가 일부러 더 그러고 있다는 걸 알아채곤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떴다.
괜한 질투심이 차오른 현우가 볼멘소리라도 내뱉으려던 찰나, 다른 이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게임도 참여하지만 MC 역할도 하는 40대의 남자 예능인 연성호와, 최근 토크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장신의 20대 여성 예능인 한태린은 오자마자 진환과 은율에게 인사를 건네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환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와 위압감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어서는 은율의 외모를 보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 댔다.
고정 출연진 5명과 모두 인사를 나누고 나자, 막내 작가인 박경태가 진환과 은율을 향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곧 오프닝 시작할게요. 그리고 깜짝 게스트도 섭외해 둬서 이따 오프닝 중에 투입될 거예요. 시크릿 게스트라서 아직은 밝히지 않을게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한 바였다. 은 고정 출연진이 홀수이다 보니 게스트가 짝수일 경우 균등하게 팀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시크릿 게스트’라는 명목으로 깜짝 출연자가 등장해 인원수를 맞춰 주곤 했는데, 이번이 딱 그런 케이스인 모양이다.
뒤이어 도착한 메인 작가가 부랴부랴 촬영에 관한 브리핑을 하고, 이전에 지급받은 대본은 숙지하되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 왔다. 거듭 강조하길, 마음 편히 하라고.
은율은 브리핑 중에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어째 영화 촬영 때보다 더 심장이 뛰는 느낌이다.
진환이 그런 은율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하고선 작게 속삭였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작가님 말대로 마음 편히 해.”
“알고는 있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은율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대꾸했다. 영화와는 달리, 리얼티리를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편집을 하긴 해도 NG 사인을 줘 가며 재정비할 시간을 주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촬영과는 또 다른 압박감을 느끼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형도 예능은 처음이라면서 태연하네요.”
진환이 잔잔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형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 네…….”
“……지금 한심하게 본 거 맞지?”
“착각일걸요?”
“걸요?”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덕분에 한결 편해진 얼굴의 은율의 귓가에 진환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마음 편히 가지고, 놀러 왔다고 생각해. 다들 이 프로에 오래 몸담은 사람들이니까 알아서 진행해 줄 거야.”
진환의 말에 은율이 웃는 낯으로 화답했다.
고정 출연진들이 먼저 오프닝을 시작하고 도중에 게스트를 불러 세우는 거라서 진환과 은율은 스태프들 쪽에 있는 상태였다. 오프닝 리허설을 준비하던 출연진들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같은 소속사라더니 친하긴 친한가 봐. 이진환 선배님이 누구랑 저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 저도 이진환 선배님 무섭다는 소문 들었어요. 그래서 바짝 긴장하고 왔는데 소문보다 훨씬 부드러우신데요?”
“서은율 씨가 대단한 거 아닐까? 예능계에서도 이진환 씨 까다롭고 벽 치고 다니는 건 알 만한 사람들 다 알아.”
“영화 <메아리>에서 적잖이 친해졌나 봐요. 서은율 씨가 현우 스턴트맨이었으니까 둘이 같이 찍은 장면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치? 현…….”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한태린은 제 옆에 서 있던 현우에게 둘의 접점을 확인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현우는 다른 이들이 얘기하는 데에 신경도 쓰지 않고 진환과 은율을 보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현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진환과 얽혀 들었다. 진환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슬쩍 올라간다.
‘다른 팀 걸리기만 해봐. 실수인 척 발 걸어 버릴 거야!’
현우는 그런 못된 생각을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오프닝에서는 진환과 은율을 소개하면서 이번 영화 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영화의 재미 요소나 특징에 대해서는 꼭 짚어서 언급을 해 줬다.
예능 프로그램의 오프닝은 은율에게 있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 줬다. 분명 대본에는 자신들의 소개나 영화에 관한 내용만 간략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출연진의 애드리브와 개그가 툭툭 튀어나와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웃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아예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그럼 두 분이 함께 촬영한 건 세 번째인 거죠? 서은율 씨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페르소나>가 첫 번째고, 두 번째가 레이먼드 윌슨 감독의 <에어윈드>, 그리고 이번 작품인 까지.”
MC 역할의 연성호가 눈을 빛내며 말해 왔다.
“이야, 이렇게 보면 서은율 씨는 이진환 씨랑 진짜 연이 깊은가 봐요. 단기간에 벌써 세 작품째 함께하는 거네요.”
“저는 좋은데,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형한테 민폐 끼칠까 봐 매번 조마조마합니다.”
은율의 겸손한 말이 끝나자마자 진환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둘렀다.
“민폐라니, 말도 안 돼요. 은율이는 워낙 타고난 재능이 대단해서 매번 제가 도움받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진환이 형이 너무 띄워 주시는 거예요.”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칭찬은 보는 사람들마저 훈훈함을 느끼게 해 줬다. 거기다 저렇게나 친근한 모습이라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담당 PD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처음에 섭외 요청을 보낼 때만 해도 설마하니 이진환이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흔쾌히 응해 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무리 기를 써도 섭외가 불가능했던 인물인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영화가 잘 안될 것 같아서 홍보를 나온 건가?’
라는 생각도 해 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진환이 그런 걸 신경 쓸 사람도 아니거니와, 무려 이준수 감독의 작품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홍보를 하기 위해 주연 배우가 발로 뛸 만한 수준이 아니다.
PD의 눈이 은율에게 닿았다. 실제로 보니 소문보다 더 예의 바른 데다가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의 굉장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굉장한 연기력을 가진 게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차디찬 이진환과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그 말은 곧 서은율의 연기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PD는 이진환의 예상치 못한 새로운 모습과 신인 배우 서은율에 대한 흥미가 이번 회차 시청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 장담했다.
분위기가 훈훈하게 무르익어 가고 두 사람의 친근한 모습이 어느 정도 담겼을 무렵, 드디어 시크릿 게스트가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사실 이번 시크릿 게스트로 어떤 분을 모실까 하고 제작진의 고민이 많았습니다만! 딱 어울리는 한 분이 계셔서 간곡히 출연 요청을 드렸습니다.”
연성호가 씩 웃으며 오프닝 무대의 뒤쪽인 학교 건물 입구를 두 팔 뻗어 가리켰다.
“오늘 저희 과 함께해 주실 시크릿 게스트는 바로- 이 분입니다!”
일부러 소리 높인 연성호의 말에 잇따른 과장된 모션과 동시에 건물 입구 좌우에 세팅되어 있던 스모그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 냈다. 금세 연기로 뒤덮인 입구에서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
상대를 알아본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임소민 씨를 큰 박수로 맞아 주세요!”
연성호가 먼저 박수를 치며 소개하자, 출연진들이 저마다 놀란 표정으로 환호했다. 연성호를 제외하면 그들 역시 진환과 은율처럼 시크릿 게스트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 상태였기에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여름에 어울리는 푸른 시폰 원피스에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를 한쪽으로 단정히 땋아 내린 모습은 청초함 그 자체였다. 소민이 환하게 웃으며 수줍게 걸어 나왔다. 연성호는 그녀를 진환과 은율 사이로 안내해 서게 하고는 감탄 어린 높은 목소리를 내었다.
“이야, 진짜 한 떨기 꽃이네, 꽃.”
“와, 진짜 걸어 나오시는데 여신 그 자체! 크으-!”
“두 미남 사이에 있으니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고정 출연진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소민이 연성호의 말에 따라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영화 의 한주란 역을 맡은 임소민입니다. 예능은 처음이라 많이 떨리지만 잘 부탁드려요.”
출연진들의 환호가 쏟아지고, 진환과 은율 역시 그녀를 향해 박수를 쳤다.
“섭외에 응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임소민 씨도 그렇고 이진환 씨도 진짜 섭외에 응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저희 이 그만큼 인정받는 예능 프로그램이 된 것 같아 기쁘네요.”
“언제나 즐겁게 보고 있어요. 다른 프로그램은 몰라도 여긴 꼭 한번 나와 보고 싶었는데, 마침 연락 주셔서 어찌나 기뻤는지 몰라요.”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소민이 설레는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말하니 진심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게스트인 소민을 향한 자잘한 대화가 이어지고, 이내 꽤 민감한 질문이 던져졌다.
“임소민 씨는 함께 촬영해 보면서 이진환 씨와 서은율 씨 중에서 누가 더 좋던가요?”
“어머, 너무 노골적인 질문 아닌가요?”
소민이 놀란 얼굴로 당황하고, 출연진들은 대답을 원하듯 안달이 난 얼굴을 했다. 익살스러운 인상의 이성준이 끼어들어 질문을 이었다.
“그럼 선배님이 대답하기 쉽도록 상세한 질문을 드릴게요. 촬영할 때 편한 상대가 누구였나요? 역시 애인 역할의 이진환 씨?”
“아, 음…….”
소민이 곤란한 얼굴로 진환과 은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진환의 눈과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은율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서은율 씨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는 행동에 출연진들은 한층 난리가 났다. 은율이 분위기에 맞춰 일부러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며 ‘감사합니다, 선배님.’이라고 말하니 소민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오오, 두 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요?!”
“놀리지 말아요.”
소민이 당황하며 시선을 내렸다. 누가 봐도 소녀 같은 그 모습에 출연진 몇몇과 스태프들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평소 도도한 이미지가 강했던 그녀였거늘, 오늘은 청초한 소녀 컨셉으로 작정을 한 건지 남자들의 애간장을 유달리 녹여 댄다.
“그럼 혹시 두 분 중에서 한 분과 사귄다면?!”
잔뜩 흥분한 이성준이 특유의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소민은 기대감 어린 출연진들의 시선을 받으며 머뭇거리다가 또다시 은율의 팔을 붙잡았다.
“서, 서은율 씨요.”
완전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니 아주 난리가 났다. 출연진들이 함성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어 댔고, 소민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부끄러워했다.
‘이 여자가……!’
겉으로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진환의 속에서는 그야말로 용암이 끓고 있었다. 소민이 은율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중파 방송에 이렇듯 대놓고 추파를 던져 댈 줄이야. 아예 태연하게 말한다면 농담으로 알겠지만, 저렇게 생전 보이지도 않은 모습으로 얼굴을 붉히면 누가 보더라도 진심인 걸 알지 않겠는가.
본인의 장면이 아니니 편집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방송을 타면 시청자나 네티즌들이 또 얼마나 추측을 해 댈지.
‘아니, 오히려 그러는 게 율이에겐 도움이 되나.’
임소민이 여태 보여 주지 않은 모습으로 신인 배우를 칭찬하고 호감을 내비치니, 아마도 시청자와 네티즌들은 그가 누구인가에 관해 관심을 보일 거다. 영화 개봉 전에 은율의 주가를 올리기 좋은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끓어오르는 속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이진환 선배님, 선택 못 받아서 속 쓰리신 건 아니죠?”
여태 리액션 위주로 반응하던 현우가 불쑥 물었다. 그가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며 진환과 시선을 맞댔다. 노골적이고 민감한 질문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당황하며 일부러 웃어 보였다.
하지만 진환은 현우가 일부러 자신을 긁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걸 알아채고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뇨, 예상해서 그런지 그다지 쓰리진 않네요.”
그런 진환의 시선이 은율에게 닿았다.
“제가 소민 씨 입장이었어도 은율 씨를 선택했을 것 같거든요.”
그 말과 함께 다정한 눈빛이 닿자, 은율의 얼굴이 금세 상기되었다. 방송 중에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가슴팍이라도 때려 주고 싶었지만, 다행히 진환이 재치 있게 질문을 넘겼다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환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일부러 소민과 현우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은율 씨가 평소에는 단정하고 멋있는데, 가끔 귀여운 모습도 보이고 애교도 부릴 때면……!”
“잠깐, 형!”
은율이 당황하며 진환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능 첫 출연답지 않게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이던 은율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출연진들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서은율 씨가 애교 부리는 모습이 보고 싶네요!”
“맞아요! 예능 첫 출연 기념으로 한 번 보여 주시죠!”
출연진들의 말에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환에게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애교인데, 그걸 공중파 방송에서 하라니.
은율이 머뭇거리며 어찌할 줄 모르는데, 진환이 그를 제 뒤로 숨겨 버렸다.
“죄송한데 그 애교는 저만 볼 수 있어요.”
진환이 싱긋 웃어 보였다. 은율은 방송에서 이렇게 굴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노골적인 게 아닌가.
“아앗!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희도 보고 싶습니다!”
“보여 주세요!”
“너무합니다!”
출연진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즐거운 원성을 내질렀다.
“보고 싶으시면 저희 소속사로 오세요. 소속사 사람만 볼 수 있는 귀한 애교입니다.”
“으아-! 너무해요!”
실망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그들은 그걸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딱딱하고 고압적이기만 할 줄 알았던 진환이 나름대로 장난을 치면서 예능에 참여해 주려는 줄 알고 안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은율의 애교에 관한 부분은 자연스레 넘어가고, 이내 오프닝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팀을 나눌 때가 되었다.
출연진 앞으로 검은 벨벳으로 만들어진 주머니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두 종류의 탁구공이 8개 들어 있었는데, 같은 색을 뽑은 이들이 한 팀이 되는 구조였다. 붉은색은 학생, 푸른색은 선생이 되어 추격전을 펼치게 될 거다.
연성호의 주도하에 가장 먼저 진환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푸른색의 공이었다. 진환이 쫓는 역할이 되었다는 것에 출연진들이 긴장 어린 소리를 내었다. 그에게 쫓긴다면 어마어마하게 무서울 거라며, 제발 그와 같은 팀이 되게 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다음은 소민의 차례였다. 그녀는 진환의 바람이 닿기라도 한 듯, 붉은색의 공을 뽑았다.
이쯤 되자 은율의 공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다들 긴장과 흥미 가득한 눈을 빛내며 은율의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안을 뒤적거리던 은율이 이내 공 하나를 집어 꺼내 들었다.
은율의 손에 들린 공이 카메라에 비치고, 진환과 소민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오오!”
카메라에 비친 공의 색상은 다름 아닌 붉은색이었다.
“와아! 앗…….”
저도 모르게 기분 좋게 소리친 소민이 후다닥 제 입을 막았다. 출연진들은 너무 본심이 나온 거 아니냐며 웃어 댔고, 소민은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은율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은율 역시 그녀에게 마주 인사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왕이면 같은 팀이었으면 했는데…….’
아쉽게 생각하며 고개를 드니, 진환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눈과 딱 마주쳤다. 그저 예능 프로그램일 뿐인데 저 혼자 진지하게 한 팀이 되길 원했나 싶어 민망해졌다.
‘그래. 같이 즐긴다는 게 어디야.’
비록 다른 팀이지만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진환이 잡으러 온다고 생각하니 짜릿하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 같다.
“다음은 우리 막내 갑시다! 과연 어느 팀이 될지?!”
아쉬운 얼굴로 진환의 옆에 서니, 때마침 현우가 주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서 은율과 진환을 한번 보더니 주머니 안으로 팔을 쑥 집어넣었다.
“아오!”
꺼낸 공의 색을 확인한 현우가 참다못해 한숨 섞은 소리를 내었다. 그의 손에는 진환과 같은 팀이라는 뜻의 푸른색 공이 들려 있었다. 옆에서 다른 출연진들이 현우의 노골적인 얼굴을 보며 웃어 댔다.
“아니, 소민 씨랑 다른 팀 된 게 그렇게 아쉬워?”
진환과 같은 팀인 데다가 은율과 떨어지게 된 탓인데, 다른 출연진들은 전혀 상관없는 소민을 들먹이며 오해를 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나온 본심을 얼른 숨기며 일부러 진지한 얼굴을 했다.
“당연하죠. 최고의 미모를 가진 선배 배우님과 한 팀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으으, 다시 뽑으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출연진과 스태프들까지 웃어 댔다. 소민은 ‘최고의 미모를 가진 선배 배우님’이라는 대목에서 놀리지 말라며 잔뜩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모두를 둘러본 현우는 제 연기가 그새 늘었다고 생각하며 뿌듯해 하다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공을 쥔 채 물러나며 한숨을 푹 내쉬자, 그의 어깨를 은율이 툭툭 두드리며 귓속말했다.
“처음이니까 살살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현우가 깜짝 놀라 은율을 돌아보다가 금세 헤실거리는 미소를 띠었다.
‘선생님……, 선생님이래, 우와…….’
은율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다른 팀이 된 건 아쉽지만 은율이 학생팀이라는 게 너무도 기분 좋은 나머지, 진환과 같은 팀이라는 걸 잊고 말았다.
* * *
“게스트 분들은 여기서 갈아입으시면 돼요.”
진환과 은율은 막내 작가 박경태의 안내를 받아 한 교실에 들어갔다. 게스트분들이라고는 했지만 진환과 은율 둘뿐이었다. 소민은 다른 교실을 임태린과 함께 쓰고 있었다. 그 외 고정 출연진들 역시 한데 모여 탈의 중이었다. 게스트들에게 별도의 공간을 주는 것은 제작진 나름의 배려로, 혹시 어색해하고 불편할까 싶어 준비해 둔 것이었다.
“이건 두 분 사이즈에 맞춘 의상이고요.”
박경태는 투명한 비닐팩에 들어 있는 두 벌의 의상을 각각 진환과 은율에게 내밀었다. 진환의 것은 단정한 정장이었기에 사실상 평상복과 별다를 것 없이 느껴졌지만, 은율의 것은 달랐다. 연하늘색 반팔 와이셔츠에 네이비 타이, 거기에 짙은 남색 체크바지까지 더해진 남학생용 교복이었다.
“그럼 천천히 갈아입고 쉬시다가 삼십 분 후에 진행할게요!”
그 말을 남긴 박경태가 떠나고, 교실에는 진환과 은율만 남아 있었다. 은율의 어깨로 진환의 팔이 다정하게 얹어졌다.
“예쁘겠다. 빨리 입어 봐.”
진환의 말에 은율이 피식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예쁘긴요. 이제 와서 또 교복 입으려니까 민망한데.”
“난 너무 좋은데.”
진환이 교실 문을 잠그고서 은율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형?!”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 교실 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은 모두 커튼으로 인해 가려져 있었다.
은율을 들어 뒤쪽 책상에 앉힌 진환이 그의 입가에 살짝 입을 맞췄다.
“우리 율이 교복 입은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이참에 원 없이 보게 생겼네.”
“봐서 뭐해요.”
“예쁘잖아.”
“예쁘다는 말 좀 하지 말아요. 민망해 죽겠어.”
은율이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돌리자, 진환은 그것마저 마음에 드는지 볼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 댔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은율의 셔츠 단추를 향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은율이 펄쩍 뛰었다.
“형!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율이 옷 갈아입혀 주려고 그러지.”
“내가 입을 수 있어요!”
문도 잠겼고 커튼 때문에 아무도 안을 보지 못한다고는 하나, 촬영장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진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형이 도와주면 안 돼? 어차피 아무도 못 보는데.”
“불순한 마음먹었을까 봐 걱정돼서 안 돼요.”
“그런 마음 안 먹을게. 순수하게 내가 직접 교복 입혀 주고 싶어서 그래.”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환을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다. 싸늘하고 위압감 넘치는 눈은 어디 가고, 사람이 두근거릴 정도로 애정 가득한 기운을 담아 부탁하니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은율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짓 절대…… 하면 안 돼요.”
“물론이지.”
또렷하게 대답한 진환이 눈가를 휘며 은율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갔다. 하나하나 톡톡 풀어내니 곧바로 은율의 새하얀 가슴팍이 드러난다. ‘물론이지’라고 대답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벌써 마음이 흔들리려 한다.
은율의 셔츠를 벗겨 내니 균형 잡힌 늘씬한 상체가 드러났다. 눈가를 찌푸린 채 그 몸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은율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왜 그래요?”
새하얀 몸과 새까맣고 맑은 눈동자를 함께 내려다보고 있으니 몸이 멋대로 반응할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은율을 가만두고 싶지가 않아졌다.
진환의 팔이 은율의 허리를 휘감고, 그의 뒷머리를 살포시 잡아 고정했다. 곧바로 진환의 입술이 그의 붉은 입술에 내리눌러졌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은율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환의 말캉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입 안을 간지럽히듯 부드럽게 휘젓고, 입술을 몇 번이나 할짝이다 빨길 반복했다. 이에 휘말린 은율이 당황하며 진환의 팔을 두드려 댔다.
“형, 여기선……! 흐읍……, 형……, 잠깐……, 읍!”
“하아……, 조금만……. 조금만 할게, 율아.”
은율이 진환을 밀어내려고 그의 가슴팍을 붙잡았으나, 평소와 달리 애가 탈 정도로 간지러운 키스에 금세 힘이 빠졌다. 어느새 은율은 저도 모르게 진환의 안달 난 혀를 붙잡아 대고 있었다.
진환은 아래에 피가 몰리는 느낌에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마음 같아서는 거칠게 몰아붙이다 못해 눕혀서 덮치고 싶은데 촬영장에서 그랬다간 은율이 제대로 토라질 것 같다.
아쉬운 듯 은율의 붉은 입술을 사탕 핥듯 핥아 대니 그가 숨을 몰아쉬며 눈을 흘겼다.
“안 된다니까……. 나빴어.”
“미안. 그래도 좋았잖아.”
호응한 것만 봐도 알 만했다. 은율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그거야…… 형이 키스하는데 어떻게 안 좋을 수가…….”
그 말을 들은 진환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질 뻔했다. 진환이 이를 꽉 물며 은율의 부드러운 어깨에 눈을 묻어 비벼 댔다.
“좀 봐주라. 형의 인내심 한계를 시험하는 거라면 집에서만 해 줘. 지금 하면 미워할 거잖아.”
“……? 무슨 소리예요?”
하여튼 천연인 데다가 둔하기는.
진환이 피식 웃으며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 마저 옷 갈아입혀 줄게.”
벗긴 셔츠를 의자에 걸어 둔 진환의 손이 은율의 벨트로 향했다. 벨트를 풀어내고 버클을 푼 진환이 느릿하게 바지 지퍼를 내려 주었다. 그 얼굴이 쓸데없이 진지해서 민망할 지경이다.
바지를 벗기기 위해 은율의 허리를 한쪽 팔로 둘러서 붙잡은 진환이 그를 제게 기대게 하고는 엉덩이를 약간 띄웠다. 진환의 양어깨에 손을 짚은 은율이 자세로 인한 민망함에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내가 해도 되는데……. 앗, 어딜 만져요!”
진환의 손이 바지와 속옷 사이의 엉덩이골로 들어오자 은율이 화들짝 놀랐다. 정작 바지는 벗겨 내지도 않고 깊이 들어오기만 하니 놀랄 수밖에.
반면 진환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순수하게 바지 벗겨 주려는 거야.”
“왜 엉덩이 쪽에 손을 넣고 벗기는데요?”
“바지를 벗기려면 당연한 거 아냐?”
“엉덩이를 더듬는 게 당연한 거예요? 잠깐, 왜 더 깊이 들어와요?”
“착각이야. 그게 아니라…….”
“착각 아니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손 빼요!”
귓가로 아쉽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엉덩이를 더듬던 진환의 손이 빠져나갔다.
“변태.”
은율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진환의 얼굴이 단박에 충격으로 물들었다.
은율은 진환의 손을 걷어 내고서 스스로 옷을 입었다. 그러면서도 ‘변태’라는 두 글자에 충격받은 진환에게 보고만 있지 말고 빨리 갈아입으라며 타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정히 차려입은 교복을 내려다보며 새삼 신기하게 생각하던 은율이 몸을 돌려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지를 먼저 갈아입은 채 상의를 입고 있었다. 흰 반팔 와이셔츠에 팔을 끼워 넣으며 그걸 가볍게 걸치는 모습이 마치 CF 광고를 보는 것만 같았다.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근육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은율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건지, 진환은 막힘없는 동작으로 셔츠의 단추를 채워 나갔다. 그러고선 셔츠를 바지 속에 넣어 벨트를 띠고, 풀어져 있는 소매 역시 단추를 채웠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엔 짙은 남색의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집어 들어 능숙하게 매었다.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묶인 넥타이를 모양까지 잡아 주니, 나무랄 데 없이 단정하고 멋들어진 모습이 된다.
그제야 은율의 시선을 눈치챈 진환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은율을 보자마자 숨을 삼켰다.
여태껏 연기를 해 오면서 본인이 교복을 입어 본 적도 있었고, 주변 배우들이 입은 걸 본 적도 많았다. 예쁘고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이들이 교복을 입어도 아무 감흥 없던 진환이었지만, 이번만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마성의 미모를 가진 은율의 고등학생 모습이라니.
뭔가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이상야릇한 페티시에 관심이 생길 것 같다.
진환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던 찰나, 은율이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오늘따라 형이 왜 이리 멋있어 보이는 걸까요?”
밖에서 옷을 갈아입는 게 처음도 아닌데 와이셔츠를 입는 진환의 모습이 자꾸만 은율의 시선을 잡아 둔다.
진환이 피식 웃으며 은율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허리를 당겨 끌어안았다.
“우리 율이는 오늘따라 왜 이리 귀엽고 예쁠까. 교복 입어서 그런가?”
진환의 손이 은율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다가 셔츠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은율이 깜짝 놀라며 제 등을 쓰다듬는 진환의 손을 잡아뗐다.
“신성한 학교에서 어딜……. 안 돼요!”
엄한 얼굴로 혼내듯 말하더니만 도리어 두 팔로 진환의 허리를 꽉 껴안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은율의 때 아닌 애교에 진환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신성한 학교라며?”
“……그러니까 야한 짓은 하면 안 돼요. 이렇게 안는 건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점점 기어들어 가는 은율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환이 그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문득 은율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 떠올랐다.
그때는 ‘친구’라는 단어에 상당한 집착을 했다. 은율과 친구가 될 날을 하루하루 센다든지, 일 관련해서가 아니면 누구와 연락 한 번 하지 않던 자신이 그의 답장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노려본다든지. 심지어 그의 친구에게 질투하며 왜 자신은 그 반열에 끼워 주지 않는지 어린애처럼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 이전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거듭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해도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는데, 당시에는 그런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연기 이외에 유일하게 자신을 뒤흔들어 놨던 게 은율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은율이 제 품에 안겨 있다는 게 너무도 신기했다. 그가 진심으로 애정표현을 해 줄 때마다 그야말로 꿈을 꾸는 것 같다.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이렇듯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이어져 있다니. 실로 영화 같은 일이었다.
은율의 온기를 가득 느끼며 진환이 그에게 다정히 말을 건넸다.
“오늘은 재미있게, 마음 편히 즐기자. 어차피 나중에 모니터링할 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편집해 버리면 되니까 부담 없이 해.”
진환 역시 예능은 처음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는 게 좋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시청자를 웃기는 거나 진행은 고정 출연진들이 알아서 할 테니 게스트는 그저 주어진 대로 즐기면 된다.
“그래도 긴장되네요. 거기다 몸으로 뛰어야 하는 거잖아요. 형한테 쫓기는 추격전이라니,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무서워요.”
진환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쫓아오는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무섭다.
그런 은율을 품에서 떼어낸 진환이 씩 웃어 보였다.
“율아, 우리 내기할까?”
진환의 말에 은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쫓기는 쪽은 한 명만이라도 잡히지 않고 도망치면 이길 테지만, 쫓는 쪽은 전원을 잡아야만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긴 팀의 전원에게는 프로그램에서 준비한 부상이 주어질 거다. 진환은 그 외에 다른 걸 상품으로 거는 내기를 하자고 하는 걸까?
“내기라니요?”
“제한 시간 안에 내게 잡히지 않으면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대신 나한테 잡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줘.”
‘원하는 대로’라는 말이 걸렸지만, 은율에게는 부상보다 더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좋아요. 형이 원하는 건 뭐예요?”
“먼저 말해 봐.”
은율이 꽤 심각한 얼굴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진환은 자신의 제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그를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대체 자신에게 뭘 원하길래 이렇게 고민까지 하는 걸까.
곧 은율이 생각을 마친 얼굴로 싱긋 웃었다.
“정했어요.”
그가 진환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은율이 원하는 승리 상품을 들은 진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의 귓가에서 떨어진 은율의 얼굴이 어느새 상기되어 있다.
“정말 그거면 돼?”
은율이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진환은 그런 은율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서 참지 못하고 그의 볼을 두 손으로 잡아 들고는 입술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귀엽기는.”
“그게 뭐가 귀여워요.”
부끄러워하며 불퉁거리는 것마저 귀여워 한 번 더 짧게 입맞춤을 한 진환이 짙은 미소를 띠었다. 은율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가 했던 것처럼 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진환의 말을 들은 은율의 얼굴이 마치 야릇한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삽시간에 붉어졌다. 진환이 달아오른 은율의 볼을 손으로 매만지며 매력적으로 눈가를 휘었다.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요? 이……!”
목소리를 높이려던 은율이 숨을 고르며 진정했다. 그가 진환을 다소 매섭게 노려보았다.
“반드시……, 반드시 이길 거예요.”
호승심 담긴 눈으로 진환을 마주 봤지만,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진환 역시 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도 이길 거야. 꼭.”
진환의 힘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은율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환이 ‘원하는 것’은 은율에게 있어 꼭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둘 사이에 묘한 스파크 같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곧 시작할게요! 준비해 주세요!”
막내 작가 박경태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곧 촬영이 시작된다는 걸 알리고는 출연진들을 모아 다시금 룰을 설명했다.
주어진 시간은 2시간. 쫓는 쪽인 선생팀은 학생팀을 붙잡아 그들의 손바닥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이 도장이라는 게 각 반 교실을 제외한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기에 이를 먼저 찾아야 했다.
거기다 각 도장은 문양이 모두 다른데, 같은 문양의 와펜을 차고 있는 학생의 손바닥에 찍어야만 효력을 발휘했다. 단, 와펜을 착용하지 않은 학생에게는 어떤 도장이든 찍어서 탈락시킬 수 있었다.
쫓기는 쪽인 학생팀은 미션 포인트에서 와펜을 얻어야만 무분별한 도장 세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불어 학생팀의 클리어 조건은 주어진 시간 동안 생존하는 것.
그런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시간 단축을 위한 쪽지시험이다. 건물 안에 있는 몇몇 특정 교실에는 시험지가 숨겨져 있었는데, 난이도는 천차만별이었다. 상식부터 시작해 갖가지 문제가 가득한 쪽지시험을 통과하면 시험지에 적힌 상중하 난이도에 따라 각각 30분부터 10분까지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단, 한 문제라도 틀릴 경우 그 시간만큼 도리어 버텨야 할 시간이 늘어난다.
은율은 박경태의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새겨들었다. 어떻게든 진환을 이기고 싶었다. 자신의 소원은 둘째치고 그가 원한 것은 은율로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설명이 끝나고, 출연진들은 각 팀끼리 모여서 약간 거리를 둔 채 섰다. 카메라를 보며 연성호가 나서서 룰을 차근히 설명해 줄 거고, 출연진들은 그에게 자잘하게 묻고 답하는 형태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울 거다. 게스트들은 적당히 놀라는 모습이라든지 호응 정도만 적절히 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은율이 선생팀끼리 모인 곳을 바라보자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진환이 눈을 마주쳐왔다. 그는 작게 웃어 보였지만, 은율은 꼭 그를 이기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강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꼭 이길 거야.’
어느새 은율은 이게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승부욕에 불타고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