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Actor/Variety
선생팀은 1층 교무실에, 학생팀은 건물 최상층인 3층 가장 끝에 있는 교실에 모였다. 교내에 수업 종이 울리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추격전이 시작될 거다.
교무실에 모인 진환과 현우, 그리고 연성호와 한태린은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연성호는 도장을 최대한 빨리 찾는 게 급선무라며, 모두가 산개해 각 사무실을 뒤질 것을 제안했다. 도장만 있으면 학생팀을 마음 놓고 쫓을 수 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도장을 못 찾았더라도 어디선가 학생팀 멤버를 발견하면 무전을 칩시다. 그쪽 팀의 행동반경과 진행 방향을 알아 두면 나중에 쫓기 편할 거예요.”
“오빠, 그럼 도장이 있는 사람은 학생팀 멤버를 발견하면 일단 쫓아갈까?”
한태린이 묻자 연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전 치면서 쫓아가자. 대신 혼자 무작정 덤비지는 말고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상황을 보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진환에게 말했다.
“저쪽 팀에 있는 승현이가 달리기도 굉장히 빠르고 힘도 좋아서 조심해야 할 거예요. 저쪽이 쫓기는 팀이긴 한데 승현이가 와펜 찾아서 먼저 달고 막아서면 맞는 도장이 없는 한 굉장히 귀찮게 될 거예요.”
준수한 얼굴과 좋은 몸매, 거기다 빠른 발과 강인한 힘까지 가진 학생팀의 윤승현은 의 에이스 중의 에이스이자 사기 캐릭터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연성호가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보며 강조했다.
“예상해 보건대, 저쪽은 승현이 혼자 발 빠르게 와펜 찾아다닐 거고, 나머지 세 명은 함께 움직일 거예요. 아무래도 쫓기는 쪽이고 승현이 외에는 딱히 발 빠른 사람이…….”
“있습니다.”
“있어요, 형.”
진환과 현우가 동시에 입을 뗐다. 연성호와 한태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진환이 먼저 은율에 대한 짤막한 정보를 제공했다.
“은율이는 전직 스턴트맨 출신입니다. 몸이 날렵하고 발도 빠르죠. 아마 은율이도 혼자 찾아다니지 않을까요?”
현우가 진환의 말에 동의하며 연성호와 한태린에게 말했다
“승현이 형처럼 은율이 형도 와펜 달기 전에 잡아야 해요. 와펜 달면 맞는 도장 아니면 잡을 수가 없잖아요.”
이야기를 들은 연성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그럼 누구든 도장을 찾는 즉시 무전을 해서 모입시다. 최우선으로 잡아야 할 사람은 승현이와 서은율 씨예요. 두 사람만 도장 찍어 잡으면 우리가 이길 겁니다.”
연성호가 씩 웃어 보였다.
“이긴 팀에겐 상금 천만 원이니까, 꼭 이겨서 한우도 배 터지게 먹고 2차까지 갑시다.”
“좋아!”
한태린이 눈을 빛내며 기합을 넣었다. 그녀를 따라 다른 이들 역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 * *
“대체 어디에 숨긴 거야?”
현우가 입을 삐죽이며 서랍을 여닫길 반복했다. 주먹만 한 큼직한 도장이라던데 어째 도통 보이질 않는다. 도장을 발견했다는 무전도 없고.
마지막 서랍을 닫은 현우가 행정실을 나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끝났으니까 그럼 3층인가.”
3층은 학생팀의 시작점이다. 그들도 각각 산개해서 와펜과 미션 포인트를 찾고 있을 테고 서로의 시작 위치를 아는 상태이니만큼 일찌감치 조사하고 자리를 떴을 거다. 3층에는 별관까지 드나들 수 있는 구름다리가 있으니 그쪽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잡히기 싫다면 말이다.
3층으로 올라간 현우는 썰렁한 복도를 보며 제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여긴 휴게실하고 시청각실만 있으니까…… 우선 휴게실부터…….”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만한 생각이었지만,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VJ의 카메라를 통해 시청자들에게도 생각한 바를 전달해야 했기에 일부러 중얼거렸다. 리얼리티성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머릿속으로 생각한 내용을 입 밖으로 읊어 주는 게 기본이자, 자신의 출연 분량을 늘리는 길이었다.
복도 초입에 자리한 휴게실은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보였다. 여러 대의 음료 자판기와 과자 자판기가 마련되어 있었고 휴게실의 가운데에는 6개의 테이블과 의자 세트가 배치되어 있었다.
현우는 음료와 과자가 나오는 자판기의 입구와 위쪽, 물건의 앞뒤, 창틀 할 것 없이 죄다 뒤지고 다녔다. 쓰레기통 안쪽만 뒤지지 않았다뿐이지 휴게실 전부를 들여다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테이블과 의자 밑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번째 테이블의 아래를 볼 때였다. 5cm가량의 폭이 넓은 투명 테이프가 테이블 밑창에 반만 붙은 채 늘어져 너덜거리고 있다. 누가 장난이라도 쳐 놓은 건가 하고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여긴 없나.”
혼잣말을 하며 휴게실을 나가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어……?”
현우가 일순 눈을 크게 뜨더니 후다닥 뒤로 돌아 테이블로 향했다. 그중 네 번째 테이블로 향해 밑창을 본 현우가 테이프를 확 뜯어냈다. 접착 면을 유심히 본 현우가 그 부분을 VJ의 카메라에 가까이 비춰 주었다.
“보여요? 글자.”
현우가 가리킨 접착 면에는 이물질이 묻은 부분과 아닌 부분이 있었다. 이물질이 묻지 않은 부분만 보니 RUN이라는 알파벳이 보인다.
“도장이야, 도장.”
이물질이 묻은 부분은 도장의 표면을 감쌌기 때문일 거고, 글씨에 이물질이 묻지 않은 건 아마도 글씨가 겉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 거다.
“난 또 이걸 기가 막히게 알아냈네.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못 보고 지나쳤을 건데.”
진지한 얼굴로 자화자찬하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누구 3층 휴게실 왔다 간 사람 있어요?”
물으면서도 팀원 중에서는 아무도 왔다 가지 않았을 거라 예상했다. 도장을 찾으면 서로 무전하기로 했으니까.
예상대로 3명 모두에게서 아니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 삼 층 휴게실인데 도장 붙여 둔 테이프를 찾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테이프만 찾았다고?
연성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현우가 일단 휴게실을 벗어나기 위해 입구로 향했다.
“테이프 보니까 알파벳까지 새겨져 있더라고요. 도장 붙였던 거 맞는 거 같은데 누가 가져간 것처럼…….”
드르륵-
문을 연 그 순간, 바로 옆의 시청각실 역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3층에는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해 혼자인 줄 알았던 현우가 흠칫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시청각실에서 뛰쳐나온 누군가가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
말을 멈춘 채 멍하니 있던 현우가 화들짝 놀라더니, 시청각실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향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내려가는 계단 앞에 멈춰 선 누군가는 연하늘색 반팔 셔츠에 넥타이를 맨 학생팀 멤버였다. VJ가 따라붙은 것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돌려 현우를 돌아보았다.
“은율이 형?”
아니, 형이 왜 거기서 나와?
학생팀은 와펜과 미션을 위해 일반 교실을 뒤져야 했다. 그런데 은율은 왜 시청각실에서 튀어나온 걸까?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은율이 손을 들어 인사하듯 흔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는 한 손을 꽉 채울 정도로 두께가 있는 원통형의 뭔가가 들려 있었다. 얼핏 음각된 RUN의 글자 일부가 보인다.
놀란 현우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은율은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제야 현우가 정신을 차리고서 경악한 얼굴을 했다.
“아앗-!”
얼른 계단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2층에 다다른 은율이 위를 올려다보더니 또다시 나무 도장을 든 손을 보란 듯이 흔들어 보이며 사라진다.
현우가 얼른 계단을 내려가며 무전을 쳤다.
“2층! 은율이 형 본관 2층으로 갔어요!”
-어차피 우리 도장 찾아 둔 게 없어서 못 잡아. 그냥 지나치고 도장이나 찾으러 가.
“지금 은율이 형이 도장 하나 갖고 있다고요!”
무전을 받아치던 연성호가 멈칫하다 현우를 타박했다.
-야, 넌 어쩌다가 도장을 뺏겨서……!
“아잇, 뺏긴 거 아니에요! 아까 말했잖아요, 도장 붙여 둔 테이프를 발견한 것 같다고!”
현우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은율이 형이 도장 찾으러 다니는 거라고요!”
-……뭐? 야, 그쪽 팀은 지금 자기들 와펜이랑 쪽지 시험지 찾아야 하는데 우리 팀 거 도장을 왜 찾아?
“왜 찾긴요! 우리 무기 줄이려는 거잖아요!”
현우가 계단을 내려가며 무전기에 대고 소리치자, 이번엔 진환의 무전이 들려왔다.
-도장을 뺏기면 뺏긴 것과 같은 문양의 와펜을 차고 있는 사람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저쪽 팀은 자기들이 찾아야 하는 물건뿐만 아니라 우리 것까지 찾아서 갖고 있으려는 거예요.
-그럼 위험한 거 아녜요? 우린 저쪽 팀 전원을 탈락시켜야 하는데 도장을 뺏기면 같은 문양의 와펜 착용자를 잡을 수가 없잖아요.
한태린이 다급하게 외쳤다. 도장 하나가 저쪽 팀에 있다는 건 팀의 승리 확률이 대폭 줄어든 셈이었다.
-김현우 씨, 은율이가 혹시 와펜을 차고 있던가요?
“예? 아뇨.”
학생팀은 와펜을 발견하면 왼쪽 가슴에 착용해야 했다. 그 이외의 부위에는 착용한다 해도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현우는 은율의 왼쪽 가슴이 비어 있던 것을 상기하며 진환의 물음에 답했다. 곧바로 진환의 담담한 무전이 들려왔다.
-그럼 아직 안 늦었어요.
초조하기만 하던 현우의 눈이 손에 든 작은 무전기로 향했다. 이미 도장 하나를 뺏겼는데 안 늦었다니?
-은율이가 와펜을 찾아서 착용하기 전에 우리가 탈락시키면 돼요.
진환의 목소리가 왜인지 기분 좋아 보인다.
-내가 본관 2층으로 가죠.
* * *
본관 2층의 도서실에 다다른 은율은 엄청난 양의 책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나무 도장이 꽤 두툼해서 설마하니 책 사이에 숨겨져 있진 않을 거라는 거다.
본관에서 선생팀의 도장이 있을 만한 곳은 각 층에 2곳씩이었다. 본관에 적은 대신 3층에서 구름다리로 넘어가거나 1층에서 외부로 나가 이동해야 하는 별관에는 그들이 뒤져야 할 교실이 절반 이상이다.
비율상 본관에서 도장을 하나 찾았으니 나머지 세 개는 별관에 있을 테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기에 은율 혼자 남아 본관을 뒤지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선생팀은 도장을 찾아내는 데에 주력하느라 별관에 가 있는 탓인지 여태껏 본관에서 만난 이가 현우 하나뿐이다.
‘형은 별관에 있는 건가.’
일부러 별관에 다른 팀원들을 모두 보내 놓고 혼자만 본관에 와 있는데, 그 탓에 진환과 마주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좀 아쉬웠다.
책장의 빈 곳을 빠르게 눈으로 훑는데, 소민의 무전이 들려왔다.
-별관 2층 교실에서 와펜 하나 찾았어요!
은율이 곧바로 무전하며 그녀를 칭찬했다.
“잘하셨어요, 선배님. 어떤 문양인가요?”
-코스모스예요.
약간 들뜬 소민의 목소리에 은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도장의 문양은 장미였다. 같은 문양이었다면 최소한 한 명은 절대 탈락하지 않는 무적을 만들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아쉬워하던 찰나, 은율처럼 홀로 도장을 찾고 있던 윤승현이 무전을 해 왔다.
-저쪽 팀은 도장을 얼마나 찾았을까요?
도서실을 찬찬히 훑어본 은율이 다음으로 이동할 교실을 떠올리며 밖으로 향했다. 그사이 이성준이 무전으로 대답했다.
-일단 하나는 우리가 갖고 있으니까 남은 건 3개지. 우린 그 3개가 전부 저쪽 팀한테 있다고 생각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무섭네요. 큼직한 도장 들고 뛰어올 거 생각하니까.
윤승현의 말에 은율이 조금 전 현우와 맞닥뜨렸던 장면을 떠올렸다. 시청각실을 먼저 조사하고 나중에 휴게실로 갔더라면 간발의 차로 현우에게 도장을 뺏길 뻔했다. 그랬다면 그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제게 도장을 찍으려 들었겠지.
‘그래도 현우 씨가 쫓아오는 건 좀 귀여운데.’
결코 체격이 작지 않은데도 은율에게 있어 현우는 그저 귀여운 동생 같을 뿐이었다.
-별관 삼 층 삼 학년 사 반 교실에서 쪽지 시험지 발견했어요!
그 와중에도 열심히 찾고 있는지, 소민이 또 다른 발견물을 보고했다.
-가까우니까 그쪽으로 갈게요. 난이도는요?
윤승현의 질문에 소민이 시험지를 훑는 듯 느릿하게 대답했다.
-어……, ‘상’이라고 적혀 있어요.
-문제는 어떤 거 같아요? 어려워 보여요?
세 종류의 난이도 중 가장 높으니 당연히 어려울 테지만, 윤승현은 그래도 어느 정도인가 싶어서 물음을 던진 듯했다.
-이게 시험지가 접혀 있는데, 펼치면 무조건 풀어야 한다고 되어 있네요. 못 풀면 삼십 분 연장…….
-으아, 그럼 문제 확인하고 못 풀면 버텨야 할 시간이 연장돼 버리니까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윤승현의 질린 목소리를 들으며 은율이 도서실을 나섰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룰은 없었으니까 문제 확인하고 무전하면 어떨까요?”
-미리 말해 두는데 난 도움 안 될 거예요.
이성준이 불쑥 말해 왔다. 그는 자신이 난이도 하 정도의 문제가 아니면 가망이 없다며 자조 섞인 말을 덧붙였다.
-어떻게 하죠? 이거 포기할까요? 십 분도 아니고 삼십 분 연장은 너무 긴데요.
소민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복도를 걸어 자료실로 향하던 은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의욕적인 목소리를 냈다.
“해 보죠. 시간 연장되더라도 난이도 파악한다고 생각하면 해 볼 만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나도 은율 씨 생각에 동의해요. 은율 씨 말대로 해 보죠, 소민 씨.
이성준도 은율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마침 윤승현이 소민이 있는 곳에 도착한 듯, 무전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율은 무전을 신경 쓰면서도 복도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분명 현우가 3층에서 자신을 알아본 데다가 도장을 갖고 있는 것도 봤을 텐데 쫓아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별관으로 넘어가는 상대 인원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미끼가 되어 그에게 자신을 노출했던 건데 저쪽은 그냥 무시하기로 한 걸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장이 학생팀에게 넘어가 있다는 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되찾으려 들 텐데 쫓아오지 않으니 불안하기까지 했다.
복도를 걸어 자료실로 향하는데, 뒤쪽 멀리에서 몇 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생팀은 은율을 무시하기로 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복도 끝에서 진환과 현우, 그리고 그들을 담당하는 VJ 두 사람이 보였다. 진환과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본관 이 층에 진환이 형과 현우 씨 있습니다. 별관에는 최대 두 명이 있다고 봐야겠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윤승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허당이니 그렇다 쳐도 이진환 선배님이면 위험하지 않겠어요? 피지컬 굉장하시다고 알고 있는데.
그의 말대로 진환의 신체 능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 악력만 하더라도 은율보다 월등히 셌다. 거기다 근 1년간 몸의 근육을 한층 탄탄히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스턴트맨 없이 격렬한 연기가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실제로 이번 에서는 진환이 연기하는 강현태가 강력반 형사이다 보니, 날렵한 액션을 선보여야 할 일이 몇 번 있었다. 진환은 며칠간 조금씩 짬을 내어 액션스쿨을 들른 것만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합을 보여 줬을 뿐만 아니라, 은율마저 감탄할 만큼 멋들어진 액션을 보여 줬다.
하지만 은율은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진환과 언제 대치해 보겠는가. 주먹질을 하고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그런 전투 같은 게 아니라, 잡아야 할 사람과 잡히지 말아야 할 사람 간의 맞붙음이다. 그 정도라면 서로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벌써부터 기분 좋은 긴장이 감돈다.
은율이 느릿하게 뒷걸음치며 자신을 걱정하는 윤승현에게 괜찮다는 말을 전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문제는 어때요?”
그에 반해 진환과 현우는 빠른 걸음과 큰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오픈할게요.
소민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윤승현의 질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제작진 이거 너무하네.
-왜? 답 모르겠어?
이성준이 불쑥 물었다.
-문제의 문장 자체가 너무 어려워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윤승현이 완전히 힘 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옆에서 소민의 것으로 추정되는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제를 세세히 읽으면서 읊어 보는 모양이다.
-……를 국제 통화로 사용할 때 그 나라의 국제 수지가…….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 거예요? 나만 이해 안 돼요?
소민의 답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어디가 경제 상식이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윤승현 역시 혀를 내둘렀다. 경제 상식 문제라곤 하지만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문제인가 보다.
그 와중에 벌써 지척까지 다가온 진환이 은율의 손에 들린 도장과 그의 비어 있는 왼쪽 가슴을 바라보았다.
“아직 와펜은 못 찾은 거야?”
“비밀이에요.”
싱긋 웃자 진환도 마주 웃어 보였다.
진환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자꾸만 목구멍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카메라가 있을 때 그렇게 웃으면 안 된다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홀리려고 저러지.
은율이 알았다면 질린 표정으로 눈을 흘길 만한 생각을 하며 그와 고작 1m 거리에 멈춰 섰다. 진환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넥타이를 약간 풀어냈다.
“이렇게 빨리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 현우도 함께 있었다. 두 명을 상대해야 할 뿐 아니라, 도장을 뺏기자마자 거의 확정적으로 탈락하게 될 거다. 와펜이 없는 이상 어떤 도장을 찍어도 아웃이었으니까.
“누가 떨어져 준대요?”
막다른 복도 끝을 등진 은율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막다른 길, 두 명의 건장한 남자, 거기다 그는 막거나 반격할 수 없는 쫓기는 팀의 멤버인 데다가 와펜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딜 봐도 한없이 불리했다. 그런데도 기세가 등등하다.
은율이 손에 든 도장을 도발하듯 흔들어 보였다.
“뺏어 갈 수 있겠어요?”
진환이 활동하기 쉽도록 정장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뺏어 가기만 하겠어?”
진환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의 눈은 의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연기할 때 이외에 저런 눈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은율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기왕 하는 거 첫 탈락자로 만들어 줄게.”
“글쎄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서로가 서로를 도발하며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 건 진환이었다. 그는 은율에게로 달려들며 도장을 들고 있는 오른손을 노렸다. 우선은 손목을 붙잡은 후 힘으로 뺏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쉽지 않았다. 은율은 오른손을 제 등 뒤로 감추며 옆으로 돌아 진환의 손을 피해 냈고, 이어서 달려든 현우를 보고는 뒤로 펄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신경이 잠깐 현우에게 쏠린 틈을 노려 진환이 은율의 허벅지를 한 번에 팔로 감아 들어 올렸다.
“……!”
진환의 어깨에 들쳐 메진 은율은 깜짝 놀라긴 했지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다리가 그의 가슴팍에 완전히 붙기 전에 무릎을 세웠다. 진환의 어깨를 잡아 몸이 그의 등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게 버티며 가슴팍을 무릎으로 아프지 않게 세게 미니 자세가 흐트러진다.
은율의 반격에 휘청하며 팔을 풀어 버린 진환은 혹시라도 그가 바닥에 잘못 떨어지는 건 아닌가 싶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날렵한 은율은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뿐 아니라 진환과 현우 사이의 틈을 노려 도망을 꾀하기까지 했다.
진환의 손이 은율의 팔을 낚아챘다. 강한 힘에 이끌려 몸이 휘청하자마자 진환이 그의 몸을 끌어안아 발을 걸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바닥에 넘어질 뻔한 은율은 등이 땅에 닿으면 꼼짝없이 붙잡히고 만다는 생각에 도장 든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 했다. 하지만 도장이 워낙 커서 그걸 쥔 손으로는 제대로 짚을 수도 없을뿐더러 옆의 현우가 가만히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은율이 넘어지기 직전, 도장을 하늘 높이 던져 띄웠다. 허공에 뜬 도장이 빠른 속도로 천장과 가까워져 가고 현우의 눈이 자동으로 도장을 향했다. 진환은 여전히 은율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다른 손으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대로 쓰러진다면 제아무리 은율이더라도 등이나 머리에 충격이 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탁-!
도장이 천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천장에 닿은 도장은 빠르게 추락했고 현우는 당연하게도 그 도장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 현우의 손 근처로 웬 발이 날아들었다.
“억!”
갑자기 튀어나온 발에 깜짝 놀란 현우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바닥을 한 손으로 짚자마자 반동으로 몸을 살짝 띄운 은율이 한쪽 다리를 들어 서머솔트 킥이라 불리는 공중제비 차기를 구현했다. 그 발끝은 현우의 손을 지나쳐 도장을 때렸고, 그것은 막다른 복도 벽을 향해 거의 직각으로 날아갔다.
현우가 놀라는 사이 은율의 몸은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착지하게 되었고, 그 탓에 진환의 손은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웅크린 상태로 바닥에 착지한 은율은 곧바로 도장이 날아간 쪽을 향해 바닥을 박찼다. 벽에 부딪혀 위쪽 사선으로 튕겨 나오는 도장을 허공에서 낚아챈 은율이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호흡은 약간 흐트러져 있었지만 힘든 내색 하나 없이 화려한 동작을 선보인 은율이 도장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그걸 본 현우가 혀를 내두르며 연이은 감탄을 내뱉었다.
“와……, 아니……, 우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놀라는 현우의 모습이 카메라에 여실히 담겼다. 진환 역시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은율의 실력도 알고 있고 그가 굉장히 날렵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던 진환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얕보고 있었나 보다. 은율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상대였다.
하지만 진환은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힘은 자신이 월등히 우위다.
진환이 제 옆에서 놀란 얼굴로 굳어 버린 현우를 힐끗 보았다. 그가 자신과 제 뒤의 VJ들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동시에 들어가죠.”
현우가 퍼뜩 정신을 차린 사이, 진환이 빠른 속도로 은율에게 달려들었다. 진환이 왼쪽으로, 그리고 뒤늦게 발을 뗀 현우가 오른쪽으로 덮쳐들었다. 은율은 바로 뒤가 벽이다 보니 도망치려면 그들 사이를 파고들어 나가야 했는데, 양쪽에서 달려드니 그도 일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있는 돌파구는, 현우가 진환보다 발이 느리다는 거다.
은율은 자신에게 달려든 진환을 피해 아예 현우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도리어 내달렸다. 현우는 제 앞으로 불쑥 뛰어든 은율을 보며 흠칫하고서는 그를 붙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은율은 몸을 숙여 그 팔을 쉽게 피해 냄과 동시에 빙글 돌아 바닥을 내달렸다.
이대로 비어 있는 복도를 빠르게 질주하기만 하면 되는 그 순간, 몸이 뒤로 훅 당겨졌다.
“아……!”
뒤에서부터 허리를 감아 당겨진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이번엔 아까처럼 바닥을 짚을 겨를도 없었다.
시야가 정면에서 천장으로 돌아가고 등이 바닥에 닿겠다 싶은 그 순간, 단단한 손이 은율의 머리 뒤를 받쳐 주었다. 은율은 상체가 아슬아슬 바닥에 닿지 않은 채 비스듬히 받쳐진 상태가 되었다. 마치 누워 있는 은율을 살짝 안아 머리와 허리를 들어 준 것처럼.
갑작스러운 포즈에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바닥에 내쳐지는 거라면 낙법을 쓰든 반격을 꾀하든 할 텐데, 다치지 않게 하려는 진환의 모습에 머리가 일순 굳어 버렸다.
은율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은율은 자신이 들고 있는 도장을 뺏으려 한다는 걸 상기하고는 그 역시 진환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진환이 싱긋 웃어 보였다.
“벌써 떨어뜨리는 게 너무 아깝긴 한데…….”
“아까우면 좀 봐주죠?”
“어떻게든 이기려면 우리 율이부터 떨어뜨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마이크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우리 율이’라는 말에 은율의 얼굴이 삽시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가 주변에 퍼져 촬영 중인 VJ들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율……! 잠……, 형!”
은율이 당황한 사이, 그 틈을 노린 진환이 은율의 손에서 도장을 빼앗아 냈다. 은율이 얼른 그것을 되찾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후다닥 달려온 현우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진환은 도장의 입구 부분을 찍기 위해 제 손목을 붙잡고 있던 은율의 손을 도리어 잡아챘다.
“미안해, 은율아.”
진환의 눈꼬리가 휘어지고, 그가 제게 잡힌 은율의 손바닥에 도장을 찍으려 했다. 은율이 현우에게 잡힌 제 손을 털어 내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쑥 넣었다. 그가 뭔가를 꺼내 제 가슴 쪽으로 가져가는 것과 진환이 도장을 찍으려고 움직이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앗!”
은율의 가슴팍을 본 현우가 큰 소리를 냈다. 은율의 손바닥에 거의 닿을 뻔한 도장이 우뚝 멈췄다. 진환이 현우의 시선을 따라 은율의 왼쪽 가슴을 바라보았다.
숨을 헐떡이는 은율의 왼쪽 가슴 부분에는 흰 국화가 그려진 와펜이 달려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진환은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눈이 마주친 은율이 싱긋 웃는다.
“국화 문양 도장, 없죠?”
대치해서 움직이는 동안 눈으로 파악해 봤지만, 진환과 현우 둘 다 큼직한 도장을 숨기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지금 진환에게 빼앗긴 도장과 다른 문양의 와펜을 착용한다면 완벽히 안전하다는 소리였다.
은율이 진환과 현우의 허탈한 얼굴을 보며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갑자기 몸을 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진환의 공세가 너무 강해서 바짝 긴장한 탓이었다.
진환이 피식 웃으며 제 손에 들린 도장을 현우에게 건네주었다. 도장을 받아 든 현우가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 진환은 은율의 등에 팔을 넣어 그를 일으켜 앉혀 주었다. 그러고선 머리와 등에 묻은 먼지를 손수 털어 주었다.
“가장 처음으로 탈락시키나 했는데, 아쉽네.”
“그렇게 쉽게 탈락하면 되나요.”
숨을 고르며 웃어 보인 은율이 진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우가 두 손으로 도장을 잡은 채 눈을 반짝였다.
“형, 진짜 대단해요.”
“뭐가 대단해요? 보란 듯이 뺏겼는데.”
은율은 진환과 함께 제 바지의 먼지를 털며 시무룩한 척을 했다. 현우는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상기된 얼굴로 은율을 칭찬하기에 여념 없었다.
“두 명을 혼자 상대한 거잖아요. 거기다 길도 막혀 있었고……. 진짜 대단해요, 형. 저였으면 일 분도 안 돼서 도장 뺏겼을걸요.”
현우의 칭찬을 멋쩍은 듯 받아 주던 은율이 진환에게 살짝 눈치를 줬다. 바지를 너무 정성 들여 털어 주고 있다.
“형, 이제 괜찮아요.”
제법 꼼꼼히 바지를 털어 준 진환이 은율의 가슴팍에 비뚜름하게 달린 와펜에 시선을 두었다.
와펜은 접착식으로 되어 있어서 쉽게 탈부착이 가능했지만, 만약 옷핀 형태였다면 한 손으로 달 수가 없으니 그 찰나에 도장이 먼저 찍혔을 거다. 아마도 은율은 아슬아슬할 때까지 와펜을 착용하지 않은 채 피해 다니려 했을 것이다. 한 번 착용하면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도 없거니와 빼고 다닐 수도 없게 된다.
즉, 은율은 ‘국화’ 문양의 도장으로만 탈락시킬 수 있다고 확정되어 버린 거다. 같은 문양의 도장이 없다면 탈락시킬 수 없는 사람이 된 거긴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선생팀에게 당연히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화 문양의 도장을 얻어 내기만 한다면 전원이 그를 노려 몰아세우고는 도장을 찍을 수도 있고 말이다.
진환은 은율의 가슴팍에 달린 와펜을 직접 반듯하게 고쳐 달아 주며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퍽 다정해 보이는 그 모습을 주변 VJ들 모두가 홀린 듯 담아냈다. 옆에서 도장을 든 채 멀뚱히 서 있던 현우는 자신 혼자 소외된 듯한 느낌에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은율은 현우를 포함해 주변의 VJ들을 힐끔거리며 진환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반칙이에요.”
“뭐가?”
진환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애칭 부르는 거요. 어떻게 카메라까지 버젓이 있는데 그걸 불러요?”
은율의 투덜거림에 진환이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선 귓가에 보란 듯이 입술을 가져가 간지럽히듯 속삭인다.
“우리 율이가 밖에서도 애칭 불러 달라고 해서 불러 주는 건데?”
아까만큼이나 작은 소리로 그 말을 남기고는 뒤로 물러선다. 은율이 금세 붉어진 얼굴로 진환을 노려본다. 술 취했을 때의 일은 기억도 못 하거늘, 그는 그날 이후 몇 번이나 저렇게 놀려 댄다.
심통이 난 은율이 진환의 옆구리를 손가락 끝으로 푹 찌르니, 그가 움찔하며 작게 웃어 댄다.
-은율 씨? 은율 씨!
무전기를 통해 은율을 부르는 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이서 난리를 피울 때 은율의 무전이 울리긴 했는데 서로에게 신경 쓰느라 제대로 듣질 못했다. 그래서인지 소민의 목소리가 상당히 초조하다.
진환은 은율이 빼 드는 무전기를 다소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성도 붙이지 않고 친근하게 부르는 소민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율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약간 땀이 배어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녀의 무전에 응답했다.
“예, 선배님.”
-괜찮아요? 탈락한 거 아니죠?
“탈락은 아닌데 역시 두 사람은 버겁네요. 와펜 달아서 살아남긴 했는데 도장은 뺏겨 버렸습니다. 죄송해요.”
-아뇨,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소민의 안도한 목소리에 살짝 미소 지었다. 은율은 자신을 걱정해 준 소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같이 출연한 게스트라서 신경 써 주는 걸까.
은율의 미소까지 본 진환은 속이 쥐어짜지는 듯한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팀이어도 조금 전처럼 서로 경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와 같은 팀이었어야 했다.
진환의 굳은 표정을 본 은율은 태연하게 눈을 돌렸다. 다행히 진환의 표정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각도였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옆구리를 한 번 더 푹 찔러 주자 그제야 그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뀐다.
-저기, 은율 씨. 아까 저희 문제 관련해서 얘기한 거 들었어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나요?”
소민의 축 처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다들 포기하자고 하고 있었어요. 이번엔 시험지를 펼쳐서 어쩔 수 없지만, 이후로 난이도 상 문제는 피해 갈까 생각하고 있어요.
버텨야 할 시간은 30분 늘어나겠지만, 문제의 유형이나 난이도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소민은 아쉬운 내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은율 씨도 동의하면 문제 포기할게요. 다른 분들은 동의하셨어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발을 내딛던 은율이 그녀에게 물었다.
“저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혹시 문제 내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 음, 잠시만요.
-내가 읽어 줄게요.
같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윤승현이 끼어들어 소민 대신 문제를 읊어 주었다.
-한 나라의 통화를 국제 통화로 사용할 때, 그 나라의 국제 수지가 흑자가 되면 타국에 대한 통화 공급이 막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세계 전체가 국제 유동성 부족을 겪게 될 우려가 있다. 반대로 그 나라의 국제 수지가 적자가 되면 국제 통화로서의 신뢰도를 해치게 된다. 이 모순을 말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아오, 다시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이성준이 몸서리를 치며 질린 듯한 무전을 쳤다. 은율은 그 와중에도 승현이 내준 문제를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었다.
-역시 이거 포기하고 그냥…….
“유동성 딜레마요.”
은율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어……, 예?
윤승현이 어색한 소리를 내뱉고, 은율은 한 번 더 답을 말해 주었다.
“지금 말씀해 주신 문제 답, 유동성 딜레마……라고 하는 경제 용어예요. 문제처럼 미국의 달러 같은 특정 국가의 통화를 국제 통화로 삼을 때는 이런 모순이 불가피하죠.”
은율의 대답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 무전도 들려오지 않았을 뿐이다.
옆에 따라붙은 현우가 눈을 반짝이며 은율을 바라보았다. 무전으로 문제를 들은 그 역시 얼마 듣지도 못하고 머리에 쥐가 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는데, 은율은 그걸 잘도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태연하게 답까지 말했다. 그가 말한 게 정말 답인 걸까?
-그거 확실한 거예요?
윤승현이 물어왔다. 은율이 어깨를 으쓱하며 확언했다.
“예, 확실합니다.”
은율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은 윤승현이 이번엔 다른 곳에 있을 이성준에게 물었다.
-성준이 형, 은율 씨가 말한 거로 적어 볼 건데 괜찮아요?
-적어, 적어. 은율 씨도 확신하고 있고, 만약 틀리더라도 어차피 포기하나 틀리나 삼십 분 연장은 매한가지야.
이성준이 시원하게 대답하고 나니 잠시 무전이 끊어졌다. 아마도 무전을 끈 채 문제지에 답을 적고 있을 거다.
-우와!
윤승현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각 VJ의 휴대폰이 단출한 벨소리를 냈다. 그것을 꺼내 들은 VJ들이 자신들에게 날아온 문자 메시지를 담당 출연자에게 보여 주었다.
[클리어 시간 30분 단축]
은율이 가볍게 웃어 보이고, 뒤에 서 있던 진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현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휴대폰의 메시지와 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박!”
육성으로 소리친 현우가 호들갑을 떨었다.
“형 완전 똑똑해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관련 학과를 나왔거든요.”
“대박! 진짜 대단해요!”
발을 동동 굴러 가며 칭찬하자 은율이 멋쩍게 웃었다. 무전기에서 현우만큼이나 호들갑스러운 윤승현과 이성준의 칭찬이 쏟아졌다.
-대단해요! 이걸 어떻게 알았지?
-와, 은율 씨 공부도 잘했구나. 사기다, 사기.
-아니, 형, 이게 공부 잘한다고 될 문제예요? 나도 꽤 좋은 대학 나왔는데 전혀 모르겠던데.
-넌 좋은 대학이긴 한데 체대잖아. 어디서 약을 팔아?
윤승현과 이성준의 실실거리는 투덕거림이 들려왔다. 어느새 옆에 선 진환이 은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역시 우리 율이는 대단해.”
“아……! 형, 진짜……!”
아주 작은 소리라서 이번 역시 알아들은 건 은율뿐이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선 미간을 찌푸린 채 진환의 발등을 뒷굽으로 콱 찍어 버린다.
“윽!”
“그만 놀립시다, 예?”
은율이 답지 않게 눈을 부라리며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때마침 소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은율 씨 덕분에 저희 삼십 분 단축됐어요! 은율 씨는 천재예요, 천재!
“과찬이세요. 혹시라도 난이도 상 문제가 또 있다면 일단 풀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특기 분야 문제가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은율 씨가 굉장히 똑똑하다는 걸 알았으니 그래도 될 것 같은데요? 이대로 난이도 상 문제를 두 개만 더 풀어도 최단 시간 클리어가 가능하겠어요.
윤승현마저 칭찬하자 은율이 민망한 듯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때, 이번엔 진환과 현우의 무전기가 동시에 소리를 냈다.
-찾았다!
한태린의 신난 소프라노에 현우가 얼른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뭘 찾았는데요?”
-도장!
“아, 저희도 은율이 형한테 도장 뺏었어요!”
-뭐?! 그럼 은율 씨 탈락이야? 탈락 얘기 없던데?
연성호가 끼어들어 다급히 물었다. 현우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은율을 힐끗 보았다.
“탈락은 아니에요. 뺏기 직전에 와펜을 붙였는데 도장에 있는 문양과는 다르더라고요.”
현우가 씁쓸히 말하며 제 손에 들린 도장의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장미 문양이 보인다.
-무슨 문양인데?
연성호가 묻자, 현우가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빼앗은 도장은 장미인데 은율이 형 와펜은 국화였어요.”
-어?
한태린이 짧게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잡아! 은율 씨 잡아!
“어? 왜요, 누나?”
한태린의 외침과 상황을 제일 빨리 파악한 은율이 복도를 내달린 것은 거의 한 끗 차이였다.
-내가 찾은 도장이 국화야!
“……아앗-!”
그제야 현우가 퍼뜩 고개를 들어 은율을 눈으로 찾았다. 이미 은율은 복도 끝에 다다라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고, 어느새 진환이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VJ들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한참 뒤처지고 있었다.
현우는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는 그들을 놓치고 말 거다.
“가, 같이 가요!”
뒤늦게 복도를 달려서는 은율을 추적하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그가 3층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한껏 지친 진환과 은율 담당의 VJ들만 헉헉대고 있었다. 그들 외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진환과 은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복도 끝 구름다리로 가는 문이 느릿하게 닫히고 있을 뿐.
* * *
‘형이 이렇게 빠른 줄 몰랐는데.’
잡힐 듯 말 듯 한 상황에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은율은 제 뒤를 바짝 쫓아오는 진환을 힐끔 돌아보면서도 빠른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구름다리의 끝에 다다라 별관 문을 열고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고, 닫혔던 문을 여는 동작에서 찰나의 시간을 빼앗겨 버렸기에 진환의 손에 붙잡히고야 말았다.
“앗!”
몸이 강하게 당겨져 휘청하는 순간,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진환의 단단한 가슴팍에 등이 세게 닿았다. 은율을 안은 진환의 등 역시 닫힌 문에 턱하니 닿는 느낌이 났다.
두 팔이 은율의 가슴과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뒤에서부터 은율을 안은 상태로 진환이 그의 귀에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잡았다.”
VJ들과 떨어졌으니 마이크에 소리가 잡힐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귓속말을 했다. 은율은 웃음기 담긴 속삭임에 피식 웃어 버렸다. 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아쉬움이 담겼다.
“아, 진짜…… 겨우 살았다고 좋아했더니…….”
은율이 투덜거리며 몸을 움직여댔다. 워낙 단단히 잡혀 있어서 꼼짝도 하질 않는다. 괴한이었다면 호신술을 쓰든 기술을 걸든 해서 빠져나오겠지만, 진환에게 그럴 수야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힘으로 팔을 풀어 보려고 끙끙대는 은율에게 진환이 또 한 번 속삭였다.
“키스해 주면 풀어 줄게.”
“뭐……! 형!”
은율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진환을 노려보았다.
“프로 맞아요?!”
“진정한 프로는 보는 눈이 없을 때 몰래 애정 행각도 할 수 있는 법이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당황하는 은율과 달리 진환은 실실 웃고만 있다. 그러면서도 안 그래도 단단한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가니 은율만 애가 탔다. 이대로는 곧 구름다리를 지나 현우가 올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도망도 못 치고 그대로 잡혀야 할 거다.
“사실 안 해 줘도 돼. 이대로 탈락해 주면 나야 좋지. 내기에 이기는 거니까.”
진환이 씩 웃자, 은율은 더욱 애가 탔다. 자신이 떨어진다고 해서 팀이 꼭 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직 와펜도 다 찾지 못한 상황에 한 명의 팀원이 사라진다는 건 그만큼 불리하다.
머릿속에 진환이 이기면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상기한 은율은 이를 꽉 물고서 어깨너머로 진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웃는 낯으로 눈을 마주쳐 온다. 오늘따라 그의 웃는 얼굴이 놀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은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면에는 복도가 있었고, 옆으로는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딱히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차례 진환을 째려본 은율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턱을 들었다. 은율의 입술이 진환에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진환의 예상과 달리 은율의 입술은 키스를 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진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윽!”
은율의 입술이 닿았다 싶은 그 순간, 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은율이 진환의 목을 이빨로 한 번 살짝 물고서는 그 목덜미를 혀로 핥아 올렸다. 따끔한 직후에 느껴지는 묘한 감각과 간지러움이 진환을 순간적으로 전율케 했다.
목의 감각 때문에 저도 모르게 팔의 힘이 약해졌고, 은율은 그때를 노려 진환의 팔을 강하게 떨쳐 냈다. 은율을 풀어 주고 만 진환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제 목을 손으로 감쌌다. 은율이 물었던 자리가 필요 이상으로 화끈거린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은율이 진환의 경직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안 했는데도 풀어 줬네요?”
“……너 반칙이야, 이거.”
“반칙이 어디 있어요? 형 조건이 더 반칙이지.”
보란 듯이 입을 삐죽인 은율이 냉큼 진환의 앞에 바짝 다가서서는 그의 입술에 소리 나지 않도록 살짝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게임 중이니까 이걸로 봐줘요.”
진환의 귀에 작게 속삭인 은율이 몸을 돌려 옆의 계단으로 향했다. 목에 손을 얹은 채 은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환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해 낼 수가 없네.
은율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사라지고, 그 직후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구름다리의 문이 벌컥 열렸다.
“헉, 헉. 어? 은율이 형은요?”
거친 숨을 몰아쉬던 현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은율의 흔적이 없다.
“워낙 빨라서요. 일단 우린 별관에서 도장이나 찾읍시다. 본관 3층에 있던 게 그 도장이죠?”
“예? 아, 예.”
현우가 진환이 눈짓한 도장을 들어 보였다. 선명한 장미 문양이 새겨진 도장을 보며 진환이 3층 복도로 향했다.
“본관 1층과 2층도 뒤져 봤는데 딱히 없었어요. 아마 나머지는 별관에 있을 겁니다. 빨리 찾아보죠.”
“예. ……근데 목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
진환이 목을 감싼 손을 치우지 않자 현우가 갸웃하며 물었다.
“뭐, 비슷합니다. 좀 치였다고 할까.”
피식 웃어 보인 진환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목을 감싼 손을 떼지 않는다.
현우보다 한발 늦게 다다른 VJ 세 명이 숨을 골랐다. 그중 한 VJ가 저 멀리 걸어가는 진환의 뒤를 후다닥 쫓았다.
남은 두 명의 VJ 중 은율을 담당하는 젊은 청년이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어디에도 은율이 없다. 그런 청년의 프로그램용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그걸 꺼내 확인하니 은율이 보낸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친절하게 알려 준 은율의 메시지를 보며 해당 VJ 역시 다급히 자리를 떴다.
은율의 VJ가 아래층으로 향하는 걸 본 현우가 자신도 2층으로 가려다가 발을 우뚝 멈췄다. 혼자 쫓으려니 왜인지 엄두가 안 난다. 은율의 화려한 개인기도 그렇지만, 분명히 잡을 거라 생각했던 진환마저 뿌리치고 갔다고 하니 자신 혼자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우가 아직도 쿵쾅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그가 자신의 VJ에게 힘없이 웃어 보였다.
“왠지 이따가 또 격렬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조금만 쉬죠.”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쉴 새 없이 떨리던 카메라가 고개를 끄덕이듯 위아래로 움직여 댔다.
* * *
“은율 씨! 괜찮아요?!”
은율을 발견한 윤승현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은율의 땀 젖은 앞머리를 보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를 눈으로 훑었다.
“어디 다친 거 아니죠?”
예능 첫 출연인 게스트들이 과도한 의욕을 보이다가 다치는 경우가 가끔 있었기에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상대는 젊은 피인 현우뿐 아니라 피지컬이 굉장한 진환까지 있지 않았던가. 도장을 뺏겼다고는 해도 탈락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예,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도장을 뺏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기서 어그로를 끌어 준 덕분에 별관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몇 번이나 잘했다고 격려해 준다. 은율은 웃는 낯으로 윤승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 소민 씨! 어디 갔다 오세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던 소민에게 윤승현이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얼른 가까이 다가온 소민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아하하, 그걸 왜 묻.고. 그.래.요.”
눈치 없다는 듯 강조하며 끊어 말하자, 그제야 윤승현이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제야 소민이 사라졌을 때 그녀의 VJ가 복도에서 멍하니 있던 걸 기억해 냈다. 여자 출연자를 찍기 위해 화장실까지 쫓아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VJ에게 맡겨 둔 마이크를 다시 허리에 착용한 소민이 은율의 얼굴을 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머, 땀 좀 봐. 괜찮아요?”
교복 치마 주머니에서 꽃문양이 곱게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 든 소민이 은율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 닦아 주었다. 은율이 괜찮다고 해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죠?”
“예, 괜찮습니다.”
윤승현과 같은 질문을 하는 소민에게 부드럽게 대답했다. 소민이 손수건을 거두며 싱긋 웃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시선은 은율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은율은 제게 시선을 박은 채 말이 없는 소민에게 의아함을 느꼈지만, 곧 이어진 이성준의 무전에 온 신경이 거기로 쏠렸다.
-일 층에서 와펜 발견했어!
윤승현이 활짝 웃는 낯을 했다.
“그럼 이제 한 개만 더 찾으면 다들 와펜 하나씩 찰 수 있겠네요. 무자비한 도장 공세에서 벗어나 쪽지 시험지 찾는 데에 주력할 수 있겠어요.”
“아직 덜 찾은 구역이 어딘지 알려 주시면 바로 가 보겠습니다.”
은율이 말하자 윤승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은율 씨랑 전 와펜 착용자니까 우리가 찾는 게 좋겠어요.”
윤승현이 고개를 돌려 소민을 바라보았다.
“소민 씨는 성준이 형하고 합류해서 둘이 같이 쪽지 시험지를 찾아 주세요.”
“네, 그럴게요.”
소민의 대답을 들은 윤승현이 은율과 함께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그에게 아직 못 찾은 교실을 전달해 주었다. 은율은 그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머릿속에 자신이 찾아야 할 교실을 하나둘 새기기 시작했다.
소민은 멀어져 가는 은율의 등을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 *
종료까지 앞으로 40분 남았을 무렵.
“아앗!”
세 개의 도장을 찾은 선생팀이 기어코 학생팀 한 명을 탈락시켰다. 장미 와펜을 착용한 이성준이 진환과 연성호의 협공에 맥없이 쓰러져 버리고, 그걸 목격한 코스모스 와펜의 윤승현이 다음 타겟이 되었다.
-내가 미끼가 될 테니까 두 사람은 빨리 시험지 찾아요!
발이 빠른 윤승현은 무전까지 하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선생팀은 학생팀 전원을 탈락시켜야 하기 때문에 늦든 빠르든 윤승현을 잡아야만 했으므로 그는 좋은 미끼가 되었다. 은율과 소민은 결국 윤승현을 도우러 가던 발걸음을 돌려 다른 교실로 향했다.
교실 이곳저곳을 함께 뒤지던 두 사람은 곧 윤승현이 탈락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은 거예요?”
교탁 밑을 뒤지던 소민이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문을 빠끔히 연 채 빈 복도를 둘러보던 은율이 씁쓸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네요.”
사실 두 사람은 굉장히 불리한 상태였다. 아직 도망쳐야 할 시간이 40분이나 남아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와펜이 드러난 상태였다.
국화 문양의 와펜을 착용한 은율이 소민의 가슴팍에 달린 튤립 와펜을 바라보았다. 학생팀이 파악한 바로는 선생팀이 가진 도장은 3개였고, 그들이 아직 찾지 못한 도장은 바로 튤립 문양이었다.
은율이 싱긋 웃어 보이며 소민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저희가 먼저 튤립 문양 도장을 찾아서 숨겨 두면 소민 선배님이 탈락할 위험은 없어질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제야 소민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미소를 띤다.
교실을 나선 두 사람은 곧바로 다음 교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을 때도 은율이 앞에 서서 걷고, 소민은 그의 뒤에 바짝 붙어서는 뒤쪽을 경계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며 옆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얼른 문을 닫고서 교탁으로 향했다.
“있어요!”
가장 먼저 교탁 아래를 본 소민이 화색을 띠며 작게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출석부 위에 시험지가 반으로 접혀 있다.
얼른 시험지를 꺼내 교탁에 올려놓으니 [난이도 상]이라는 문구가 가장 먼저 보였다. 이걸 풀면 30분이라는 시간이 단축된다는 생각에 은율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바로 풀어 보죠.”
소민이 머뭇거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사실 쪽지 시험을 통과해 시간을 단축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난이도 중 문제에서도 이성준이 한 번 틀린 경험이 있었다.
“괜찮겠죠? 틀리면…….”
“만약 틀린다고 하더라도 시도는 해 봐야죠.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고들 하잖아요.”
패기롭게 말하자, 소민이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 하에 시험지를 열자, 꽤 머리 아파 보이는 문제가 나타났다.
<똑같이 생긴 약통이 10개가 있다. 그중 9개는 10g짜리가, 1개는 9g짜리 알약들이 들어 있다. 무게 저울을 한 번만 써서 9g짜리 알약들이 들어 있는 약통을 찾아라.>
소민은 문제를 보자마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에 힘을 준 채 문제를 몇 번이나 노려봤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울을 한 번 쓰는 것만으로도 이걸 찾을 수가 있어요?”
소민이 복잡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답을 모르겠다.
반면 은율은 문제를 꼼꼼히 읽고 숙지하며 머릿속으로 갖은 방법을 써 보고 있었다. 곧 그가 교탁 밑에 함께 들어 있던 펜을 꺼내 들었다.
“답 알겠어요?”
소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은율이 작게 미소 지으며 문제에 대한 답을 서술해 나갔다.
<각 약통에 번호를 매긴 후, 3번은 3개, 8번은 8개처럼 번호만큼 알약을 꺼내 무게를 잰다. 각 알약이 10g이라면 1부터 10번까지의 번호만큼 빼놓은 알약을 모두 모았을 경우 550g이 되어야 하지만, 9g짜리 알약이 섞여 있기에 그만큼 무게가 적게 나가게 된다. 즉, 50g과 알약들의 총 무게 차액이 9g 알약 약통의 번호가 된다.>
그렇게 적은 은율이 시험지를 들어 VJ들의 카메라에 비추었다.
“이거 맞죠?”
은율의 답을 카메라에 담은 VJ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와!”
소민이 육성으로 감탄사를 크게 내뱉었다. 그녀로서는 문제를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세 저런 답을 생각한 은율이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아니, 이걸 어떻게 풀었어요? 대단하다, 진짜…….”
소민의 진심 어린 칭찬을 들은 은율이 멋쩍게 웃었다. 그 사이 VJ가 30분의 시간 단축을 알려 왔다.
“그럼 이제 십 분도 안 남았네요. 저희가 이길 것 같은데요?”
소민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은율은 아직 모를 일이니 긴장을 늦추지 말자고 말하던 순간,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율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학생팀에서 남은 사람은 은율과 소민뿐이었으며, 그들의 VJ 두 명도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렇다는 건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의 주인이 선생팀이라는 거다. 심지어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은율이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앞문으로 다가가 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사이로 미닫이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모든 교실을 확인하는 모양이다.
은율과 소민이 있는 곳은 막다른 복도 끝의 마지막 교실이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몰아 세워져 잡히고 말 거다.
은율이 앞문에 붙어 있는 창문을 통해 복도를 슬쩍 염탐했다. 창문이 사람 얼굴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벌써 상당히 가까이 다가와 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눈을 굴리던 은율의 눈에 맞은편 ‘과학실’이 보였다.
“선배님, 제가 문 열고 뛰쳐나가서 건너편 과학실로 사람들을 모을 거니까 상황 봐서 곧장 달리세요.”
그 말은 곧, 자신이 탈락할 걸 감수하고 소민을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버티기만 하면 되니 분명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소민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안 돼요. 은율 씨마저 없으면 저 무서워서 어떻게 버텨요.”
고작 게임일 뿐인데도 소민은 마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전장에 뛰어드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눈을 했다.
“같이 도망가요, 예? 둘이 같이 도망가면…….”
“그게 더 위험할 겁니다. 저쪽이 지금처럼 네 명 모두 모여 있을 때 한쪽이 시선을 끌면 다른 한 명은 도망칠 수 있어요. 만약 저쪽이 선배님이 도망치는 걸 알아채더라도 제가 몸으로 막겠습니다.”
은율의 헌신적인 말에 소민이 발만 동동 굴러 댔다. 아무리 그래도 은율을 버리고 혼자 도망간다는 건 쉽사리 그러겠다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미끼가 되고 은율 씨가 도망가면 더 승산 있지 않을까요?”
소민의 결연한 목소리를 들은 은율이 갑자기 진지한 눈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선배님을 지켜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을 들은 소민이 금세 붉어진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은율이 언제 진지했냐는 듯 싱긋 웃었다.
“오글거리지만 이런 대사 한번 쳐 보고 싶었어요.”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소민의 얼굴이 한층 붉어졌다. 훅 들어온 공격뿐 아니라 빠른 표정 변화로 사람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하기까지 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선배님을 지켜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 작위적이고 유치한 대사가 뭐라고 가슴이 미친 듯 콩닥거린다.
그러는 동안에서 선생팀 멤버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더 지체했다간 소민이 들킬 확률이 더 높아진다.
소민은 결국 은율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괜히 자신이 은율의 발목을 붙잡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소민이 문에서 조금 떨어진 복도 방향 창문의 아래쪽에 담당 VJ와 함께 몸을 웅크렸다. 그걸 확인한 은율이 깊이 심호흡했다.
바로 옆 교실을 여는 소리가 들릴 때, 문을 벌컥 연 은율이 복도를 향해 뛰쳐나갔다.
* * *
“이제 십 분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하죠?”
현우가 한숨을 내쉬며 운을 뗐다. 한태린이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선생팀 외에는 딱히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학생팀의 남은 두 명이 다른 층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태린이 초조한 얼굴로 앞서 걷는 연성호와 진환에게 말을 던졌다.
“우리 퍼져서 찾아보는 게 낫지 않아요? 일단 마지막 남은 도장을 찾아야 하잖아요.”
소민의 와펜에 새겨진 튤립 문양의 도장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은율은 어떻게든 탈락시킨다 해도 소민을 잡을 방법이 없다는 거다. 남은 시간이 고작 10분여밖에 되지 않아서 더욱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은 다 찾아봤잖아. 남은 건 이쪽 층뿐이니까 여기 도장이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돌아다닐 때 저쪽 팀 두 사람을 본 적 없는 거로 봐선 이쪽 층에서 쪽지 시험지를 찾고 있을 확률도 있어.”
연성호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다른 층을 모두 꼼꼼히 뒤졌다는 전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남은 교실은 이쪽 층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도장과 학생팀 멤버 모두 이쪽 층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팀 멤버가 점점 복도 안쪽으로 다가가면서 좌우에 있는 교실들의 문을 여닫길 반복했다. 복도 안쪽 가까이 다다른 한태린과 연성호가 가정실습실 안으로 도장을 찾기 위해 들어갔다. 다른 멤버인 진환과 현우는 그 옆이자 복도 끝에 있는 과학실로 향하고 있었다.
진혁은 문득 건너편 빈 교실이 신경 쓰였다.
“아직 들어가지 말죠.”
과학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현우를 만류하며 진환이 건너편에 있는 두 교실에 시선을 두었다. 진환이 가정실습실 맞은편에 있는 빈 교실을 가리켰다.
“현우 씨는 저기를 둘러봐 줘요. 난 이쪽을 살피고 나서 과학실로 가죠.”
“……알았어요.”
에서의 경험은 자신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진환의 지시에 묵묵히 따랐다. VJ들에 의해 속속들이 촬영되고 있을 땐 특히나 쇼맨십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현우가 가정실습실 맞은편 교실로 향했다. 그사이 진환은 과학실 맞은편 교실의 앞문을 향해 한 발을 내밀었다.
그때, 진환이 향하던 교실의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만 그 안에서 은율이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앞문을 열던 진환은 얼른 몸을 돌려 거의 반사적으로 바닥을 박찼다. 은율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곧바로 과학실의 문을 열어 안으로 뛰어들어 갔고, 진환이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은율은 책상을 돌고 뛰어넘길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밖에서 현우가 다른 이들을 부르며 은율을 발견했다는 말을 전했다. 선생팀 멤버에 VJ들까지 과학실에 들어차 꽤 북적이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은율은 자신을 가장 앞에서 마크하고 있는 진환을 보며 일부러 심통이 난 얼굴을 했다.
“진짜 이럴 거예요? 좀 봐주죠?”
“여기서 봐주면 우리 팀이 질 것 같은데?”
진환이 씩 웃으며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은율은 창가를 등진 채 과학실 내부를 훑어보았다. 다행히 선생팀 모두 안에 들어와 있다.
‘선배님은 도망가셨으려나.’
최대한 잡히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자신의 와펜 문양과 같은 도장을 가진 게 누군지 눈으로 찾아보았다. 다행히 선생팀에서 가장 힘이 약한 한태린이 갖고 있다.
국화 문양 도장의 위치를 파악한 은율이 슬금슬금 구석진 자리로 물러났다. 이젠 진환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 역시 지척에 다다랐다.
“태린 씨, 도장 이리로 줘요.”
진환이 뒤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 앗!”
태린이 진환에게 다급히 다가서다가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를 미처 보지 못하고 휘청했다. 그녀의 발에 걸린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옆에서 ‘조심 좀 하지.’라며 타박한 연성호가 의자를 세우느라 몸을 숙일 때였다.
“어?”
몸을 숙인 연성호의 눈에 바로 옆 책상 아래쪽이 보였다. 책상의 모서리 기둥에 거의 가려지다시피 붙어 있었지만, 여태껏 그리도 찾았던 도장임이 확실했다. 연성호는 쓰러진 의자를 세울 생각도 못 하고 기둥으로 바짝 다가가 그것을 잡아 뜯어냈다. 테이프가 뜯기는 소리가 들리고, 연성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찾았다!”
연성호의 외침에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테이프를 완전히 떼어내고서 보란 듯이 도장을 들어 보이는 연성호의 모습에 은율이 긴장한 빛을 띠었다.
결국 마지막 도장까지 상대팀에게 들어갔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6분 남짓. 이 시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구석에 몰아넣어져 포위까지 당했는데도 상대 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지만, 어떻게든 손바닥에 도장을 찍지 못하도록 반항해야겠다.
“한태린 씨, 연성호 씨.”
두 사람을 부른 진환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들에게 지시했다.
“아마 근처에 임소민 씨가 숨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지금쯤 도망가는 중인지도 모르고요.”
은율이 흠칫했다. 진환은 그런 은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리 막다른 복도였고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고 한들, 이런 교실로 들어와 스스로 포위당할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율이라면 차라리 복도를 뚫고 튀어나가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혼자라면, 말이다.
“지금 못 잡으면 우리가 져요.”
진환이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하자 그제야 한태린과 연성호가 움직였다. 한태린은 진환의 손에 도장을 건네주고서 빠르게 과학실 입구로 향했다.
은율이 눈가를 꿈틀하더니 갑자기 진환에게 달려들었다. 도망 다니거나 장애물을 이용해 시간을 끌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은율은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도장을 든 진환에게 파고든 은율은 몸을 숙여 그의 몸을 두 팔로 덥석 안았다. 그러고선 하체에 힘을 실어 그를 강하게 밀어냈다. 진환이 주춤하며 두어 걸음 물러서다 힘으로 버텨 냈다.
진환이 은율의 팔을 붙잡으려던 순간, 그가 팔을 풀고서 바로 옆에 있는 넓은 실습용 테이블에 몸을 눕혀 굴렀다. 이제 보니 진환을 밀어 앞으로 나간 이유가 그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에 몸을 굴려 빠져나가기 위함이었던 거다.
몸을 굴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착지하자 진환과 현우가 그것을 돌아 은율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유연하게 몸을 휘어 그 손길을 피해 낸 은율은 과학실의 입구를 노리고 있었다.
“앗! 복도에서 소민 씨 발견!”
우려했던 대로 소민이 발견되었다. 은율이 몰아넣어진 지 몇 분 되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소민은 사람들이 모두 과학실로 몰린 틈을 노려 교실을 몰래 뛰어나갔을 것이다.
‘하여튼 예리하긴.’
진환의 판단에 혀를 내두르며 입구로 달리는데, 뒤에서 팔이 쑥 뻗어 나와 허리를 휘감아 붙잡았다. 은율이 놀란 사이, 그를 꽉 붙든 채 오른쪽 손목까지 잡아 든 진환이 옆의 현우에게 다급히 지시했다.
“빨리 찍어요, 현우 씨.”
그새 도장을 현우에게 건네준 모양이었다. 은율은 허리와 손목을 붙잡힌 채 바둥거려 봤지만 진환의 힘이 어찌나 센지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섣불리 등을 보인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탈락할 순 없죠, 형.’
은율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는가 싶더니, 그가 갑자기 붙잡히지 않은 왼손을 뒤로 뻗어 진환의 목덜미를 휘감아 잡았다. 그러고선 하체에 힘을 준 채 몸을 앞으로 훅 숙였다. 예상치 못한 기술에 진환의 발이 허공에 붕 떴다.
시원한 엎어치기를 당하게 된 진환이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미 기술이 들어가 몸이 거의 뒤집혀 돌고 있었기에 방어해 낼 방법이 없었다. 속도로 보아 은율이 나름 조심하며 기술을 건 게 확실했지만, 그렇다 해도 엎어치기를 당해 바닥에 떨어지면 충격이 상당할 거라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채 등에 느껴질 강한 충격을 상상했다. 하지만 진환의 등은 예상보다 빨리 바닥에 닿았으나 충격은 거의 없었다. 눈을 떠보니 은율은 허리 언저리 높이의 테이블에 진환을 내려놓은 것이었고, 바닥과의 높낮이 차이로 인해 중력과 가속도가 별로 붙지 않았던 거다. 거기다 바닥에 닿기 직전에는 속도를 더 늦춰 주기까지 했다.
은율은 순식간에 기술을 걸어 메치면서도 진환이 조금도 다치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했다. 꼭 방송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진환을 다치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진환에게 작게 미소 지어 준 은율이 현우의 손을 피해 과학실 밖으로 나섰다.
“아앗-!”
소민은 다른 층으로 가는 계단에 다다르기 직전에 한태린과 연성호에게 붙잡혀 버렸다. 진심으로 겁먹은 듯한 얼굴로 바둥거리는 그녀를 보며 은율이 복도를 빠르게 내달렸다.
한태린은 소민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꽉 끌어안은 상태였고, 연성호는 손에 도장을 쥔 채 소민의 손끝을 그러쥐어 붙들고 있었다. 붙잡힌 손을 필사적으로 흔들어 대며 벗어나려 해 봤지만, 의외로 연성호의 힘이 강해서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강제로 펼쳐져 있는 그녀의 손에 도장이 가까워져 갔다.
그런 연성호의 손목을 불쑥 다가온 은율의 손이 강하게 붙잡았다.
“어?!”
갑자기 등장한 은율을 알아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곧 그의 손에 강하게 밀려져 뒷걸음질 쳤다.
은율의 등장에 깜짝 놀란 한태린의 팔이 느슨해진 찰나, 소민이 얼른 그녀의 팔을 풀어냈다. 그대로 계단을 향해 달리려는데, 그새 달려온 진환이 두 팔 벌려 소민의 앞길을 막아섰다. 소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렸다. 어떻게든 복도를 빠져나가 다른 층으로 도망치기라도 해야 하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소민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바짝 붙으려던 은율은 제 앞을 가로막는 현우와 연성호 때문에 걸음을 주춤해야 했다.
거리를 두고 따로 떨어져 있어 봐야 승산이 없다. 현우의 손에는 자신을 탈락시킬 수 있는 국화 문양 도장이, 진환과 함께 선 한태린에게는 소민을 공략할 튤립 문양 도장이 있었다. 상대가 둘씩 짝을 지어 각개격파 하듯 공격해 온다면 자신은 둘째치고 소민이 위험하다.
우선은 소민과 함께 있어야 했다.
은율은 제게로 달려드는 현우의 팔을 피해 내며 벽에 가까이 붙었다. 현우의 팔이 허리를 노리고 달려든 그때, 은율이 돌연 그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짚더니 하체에 힘을 실어 몸을 띄웠다. 그는 현우의 어깨를 버팀목 삼아 띄운 몸을 옆으로 틀어 벽을 밟았고, 마치 혼자만 중력을 거슬러 옆으로 뛰어가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였다. 벽을 빠르게 두 걸음 밟아 몸을 회전시킨 은율의 몸이 눈 깜짝할 사이 현우의 등 뒤에 착지했다.
액션 영화에서나 볼법한 벽 타기 기술에 경악한 현우와 연성호를 뒤로 한 은율이 재빨리 소민에게로 뛰어갔다. 그녀는 진환의 손에 붙잡히기 직전이었다.
은율의 손이 진환보다 먼저 소민의 팔을 잡아채 끌어당겼고, 그녀를 단숨에 품에 안아서 몸을 돌리고는 벽으로 몰았다. 소민이 벽을 등지게 한 채 그녀의 앞을 지키듯 몸으로 가로막은 은율이 약간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곧 있으면 시간 다 되니까 이대로 버티면 됩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소민을 위해 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 은율의 품에 안겼던 감각 때문에 그녀의 머릿속은 반쯤 백지가 되어 있었다.
두근- 두근-
소민이 빠르게 뛰는 가슴에 살짝 손을 올린 채 붉어진 얼굴을 푹 숙였다. 도망치느라 달렸기 때문도 아니고 상대 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기 때문도 아니었다. 조금 빠르게 뛰는구나 싶던 심장은 은율의 품에 안겼을 때 한층 거세게 박동했고, 지금처럼 자신을 지키고 있는 등을 봤을 때는 머리까지 울릴 정도로 심하게 뛰어 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계속되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소민의 상황을 모르고 있던 은율은 가까이 다가오는 선생팀 멤버들을 경계하며 뒤로 바짝 붙었다. 그 탓에 소민은 벽과 그의 등 사이에 끼어, 그야말로 얼굴이 활활 불타오르는 지경이 되었다. 두 손이 머뭇거리다 은율의 등을 짚었다.
은율은 두 팔을 바리케이드 치듯 뒤로 뻗어서 소민을 가두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다들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네요.”
네 명 모두가 이기고 말겠다는 얼굴로 은율과 소민을 압박해 다가왔다. 은율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그들을 막아야만 했다. 자신은 도장이 찍혀 탈락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소민은 살려야 했다. 그러려면…….
은율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던 순간, 연성호와 현우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일단 은율을 떼어 내기만 한다면 다른 두 명이 달려들어 소민을 붙잡아 줄 거라 생각했다.
연성호의 손이 은율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잡자마자 은율이 유연하게 팔을 놀려 손을 떨쳐 내었고 뒤이어 다가온 현우의 손을 오히려 꽉 붙잡았다.
“어?!”
도리어 붙잡힌 현우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끌려갔다. 은율은 현우를 잡아 제게로 끌어당기면서 그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도장을 향해 팔을 내뻗었다. 은율의 손끝이 현우가 잡고 있는 도장을 강하게 쳐올렸다. 의도한 대로 허공에 붕 떠 버린 도장을 향해 은율이 손을 뻗었다.
“……!”
은율의 손이 도장을 낚아채기 직전, 그보다 더 빠르게 뻗어 나온 손이 있었다. 허공에서 도장을 낚아챈 진환이 그것을 현우에게 다시 던져 주고는 단숨에 바짝 다가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은율을 정면에서 꽉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그를 소민의 곁에서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끌어안은 그대로 뒤로 물러서려 했다. 은율이 안간힘을 다해 버틴다.
“은율 씨!”
당황한 소민이 은율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일순 진환과 눈이 마주쳤다. 은율을 끌어안은 진환이 제법 매서운 눈으로 소민을 노려보았다. 흠칫하던 소민 역시 눈에 힘을 준 채 진환의 눈빛에 맞섰다.
진환이 미간을 확 찌푸리는가 싶더니, 은율의 몸을 끌어안은 채 옆으로 홱 돌려 눕히려 들었다. 은율이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려 했으나, 진환이 다리를 거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다리로 바닥을 단단히 밟은 채 상체의 힘으로 은율을 바닥에 눕힌 진환은 그가 다치지 않도록 팔에 잔뜩 힘을 주어 지탱해 내렸다. 눈 깜짝할 새에 바닥에 눕혀진 은율은 자신을 끌어안는 진환의 몸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진환이 은율의 양어깨를 잡아 바닥에 내리눌렀다.
“도장! 빨리!”
진환이 다급하게 외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현우가 얼른 은율에게 다가섰다. 그사이, 한태린과 연성호가 협공해 소민을 붙잡았다.
“앗-! 은율 씨!”
소민이 당황하며 은율을 불렀지만, 그는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진환에게 어깨를 짓눌려 있는 데다가 그가 제 위에 올라타 있기까지 했다. 차라리 괴한과 싸우듯 타격을 줄 수 있는 상대라면 어떻게든 빠져나오겠는데, 차마 카메라 앞에서 그럴 수도 없어서 열심히 머리만 굴릴 뿐이었다.
“형, 좀……! 아, 진짜 너무해!”
버둥거리던 은율이 심통 난 얼굴로 눈을 부라리자 진환이 씩 웃어 보인다.
“내가 이긴 것 같네.”
그새 은율의 옆에 다가온 현우가 은율의 손목을 꽉 붙잡아 당겼다. 도장을 찍지 못하게 하려고 주먹을 쥐어 봤지만 현우의 힘이 예상외로 세서 곧 펼쳐지고 만다.
“미안해요, 형.”
현우가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며 도장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 당해야 하나 싶은 생각과 함께 소민이 걱정되었다. 고개를 돌려 소민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한태린에게 포옹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옆에는 도장을 든 연성호가 소민의 팔을 잡아당겨 그녀의 손끝을 붙잡아 오므릴 수 없게 만들었다. 연성호 역시 소민의 손바닥에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다.
은율이 아랫입술을 살짝 짓씹더니, 매서운 눈으로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안 비키면 고자 될 줄 알아요.”
“뭐? ……읏?!”
진환이 불길함을 느낀 그때, 사타구니로 은율의 무릎이 파고들었다. 아래쪽을 꾹 누르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은율의 무릎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곤 얼른 옆으로 몸을 돌렸다. 직후에 은율의 무릎이 강하게 밀어낼 듯 차올려지다 멈추는 걸 목격했다. 제대로 맞았다면 아래쪽이 상당히 얼얼할 뻔했다.
‘아무리 지기 싫어도 그렇지.’
진환이 혀를 내두르던 그때, 은율이 한쪽 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현우가 도장을 찍으려던 손을 꽉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단번에 일어나서 소민을 구했을 것이다.
일어나려고 옆으로 몸을 돌렸던 은율의 상체를 그대로 내리누른 진환이 현우를 재촉했다.
“빨리 찍어요!”
은율이 벗어나고 다시 그를 붙잡아 도장을 찍으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닐 거다. 그사이 소민이 탈락하든 아니든 시간은 지나갈 거고, 곧 타임 오버를 알리는 벨소리가 들릴 거다.
현우가 안간힘을 써서 은율의 손을 붙잡아 도장을 찍으려던 순간이었다. 옆으로 누운 상태로 상체를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된 은율이 낭패한 표정으로 소민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몸부림을 치느라 아직 도장을 찍히진 않았지만, 그것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선배님! 앉아요!”
은율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소민이 의문을 담은 눈을 크게 떴다가 바둥거리던 팔 하나로 한태린을 마주 안고는 체중을 실어 바닥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한태린이 소민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탓에 소민의 붙들린 손이 위쪽을 향한 채 앉은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두 사람분의 무게감 때문에 연성호가 오히려 끌려 내려갔다. 엉거주춤하게 몸을 숙인 상태가 된 연성호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은율이 그때를 노려 다리를 크게 휘둘렀다. 그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연성호의 도장이었다. 서 있는 상태라면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사람 엉덩이 높이쯤이라면 충분히 발이 닿을 것이다.
쫙 펴진 소민의 손바닥에 도장이 내리눌러지기 직전이었다. 은율이 휘두른 발끝이 순식간에 연성호의 도장에 다다랐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도장을 놓쳐 버렸고, 그것은 복도의 저 멀리까지 날아가 떨어졌다. 연성호는 무시무시하게 빠른 발차기에 반쯤 얼이 빠져서는 도장이 날아갔다는 것도 제때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딩동-
교내에 추격전의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선생팀과 학생팀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지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까지 은율을 내리누르고 있던 진환이 허탈한 얼굴을 했다. 설마 이렇게 붙들린 상태에서 기지를 발휘해 소민을 기어코 구해 낼 줄이야.
진환이 아직 내리누르고 있던 은율의 귀에 씁쓸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아쉽네. 우리 율이 떨어뜨리고 싶었는데.”
“하하……. 어떻게든 이기긴 했네요.”
은율은 현우에게 시달려 있던 팔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 손을 진환에게로 가까이 가져가 보여 주었다. 진환의 눈이 은율의 손바닥에 닿았다. 거기엔 선명한 국화 문양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우리가 내기한 건 내가 형 손에 탈락하느냐 마느냐였죠? 벨소리가 들리기 직전에 현우 씨 손에 찍혀서 탈락은 맞는데 형도 같이 협공한 거니까……. 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제야 내기의 구체적인 내용이 떠올랐다. 진환이 피식 웃었다.
실상 내기대로라면 자신이 직접 도장을 찍어서 탈락시킨 게 아니었기에 진 셈이었지만, 착한 은율은 자신이 탈락하는 데에 진환이 크게 기여한 것을 고려해 물어 왔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겠냐고.
진환이 은율의 머리를 버릇처럼 쓰다듬어 줄 뻔했다. 때마침 다가온 소민이 아니었다면.
“은율 씨, 괜찮아요?!”
은율의 얼굴로 다가와 그 머리맡에 주저앉아서는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진환을 뾰로통하게 노려본다.
“이제 다 끝났죠?”
진환은 웃고 있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살벌한 빛을 띄웠다. 아주 찰나의 시간인지라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순순히 은율을 풀어 준 진환이 그의 등을 팔로 받쳐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소민이 눈꼬리를 축 내리며 은율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예, 전 멀쩡합니다.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나도 괜찮아요. 다행이에요, 안 다쳐서.”
소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기 좋은 미소를 걸었다. 은율 역시 그녀의 미소에 화답하듯 눈을 휘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에 진환은 속이 부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안 되겠다.
내기 결과 판정이 애매하니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려 했는데, 이 화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내기의 내용은 꼭 해야겠다.
진환이 은율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은 채 그의 귀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다가갔다. 그가 곁눈질로 소민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얘기를 듣던 은율이 화들짝 놀라며 붉어진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은율에게 다정히 속삭이는 진환을 바라보던 소민은 이내 불만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두 사람은 그런 소민의 눈빛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