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Actor/Release
며칠 후 진환과 은율, 소민 세 사람은 한 방송국 근처 카페에 모였다.
영화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인터뷰를 위해 미리 섭외해 둔 곳이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진환과 은율만 불렸어야 할 테지만, 며칠 전 방송을 탄 에서 세 사람의 캐미가 돋보였기에 소민도 함께 초대되었다.
“그럼 세 분이 연기하실 때 가장 힘들었던 게 뭔가요?”
“아무래도 서로 격렬한 감정을 부딪치는 부분이…….”
카메라와 조명, 반사판에 둘러싸인 채 활발히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예 뉴스로 나가는 인터뷰라서 그런지 리포터도 굉장한 베테랑인 데다가 질문 목록 또한 깔끔했다.
“정성 어린 답변 너무 감사했습니다.”
인터뷰 대본을 내린 리포터 여인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왜인지 흥미가 섞여 있었다.
“여기부터는 영화 관련이 아닌 다른 이야기인데 괜찮으실까요?”
보통 인터뷰를 진행할 땐 사전에 대답을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질문 목록을 전달하곤 한다. 세 사람 역시 질문 목록을 받았고, 80% 정도는 영화 에 관한 소개나 비하인드 스토리 위주였다. 그리고 나머지 20%는 세 사람이 함께 출연했던 에 관해서였다.
에 관한 인터뷰는 사실 예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며칠 전 방영 당시 워낙 히트를 친 덕에 급하게 끼워 넣어진 것에 불과했다. 이런 일이 흔치는 않았으나,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진환을 필두로 세 사람 모두 추가 인터뷰를 수락했다.
사실 진환 정도 되는 톱 배우라면 굳이 예능 관련 인터뷰까지 응할 필요가 없었으나 그가 고개를 끄덕인 건 전적으로 은율을 위해서였다. 신인이라면 영화든 예능이든 인터뷰든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때 해 둬야 한다는 게 진환이 업계에서 배운 기본이었다.
두 사람이 수락해서인지 소민도 별말 없이 추가 인터뷰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에 대한 짧은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세 분이 함께 출연하셨던 예능 프로그램 으로 난리가 났었죠.”
보통은 ‘예능 프로그램’이라고만 칭할 뿐, 정확한 프로그램명까지 언급하진 않으나 같은 방송사라서 그런지 거침이 없다. 이 또한 같은 방송사의 프로그램과 상부상조하는 격이라 긍정적인 이야기일 때는 일부러 더 언급하기도 한다.
“당시에 세 분이 실시간 검색어에 나란히 오르셨던 건 알고 계시나요?”
진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먼저 답했다.
“소식은 들었는데 검색해 보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왜 뜬 건지 모르겠네요.”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리포터가 직접 자세히 언급해 줘야 더 화제가 될 테니까.
“이진환 씨와 서은율 씨가 그렇게 친근한 사이이실 줄은 몰랐어요. 두 분 투 샷 사진이 어마어마하게 돌아다니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은율이 흠칫 놀랐다. 불현듯 진환과 함께했던 길거리 데이트가 생각났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당시 얼굴을 충분히 가렸던 데다가 밖에서 이렇다 할 애정 행각을 한 것도 아니어서 찍힌다 한들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런데도 괜히 움찔하게 된다.
다행히 리포터가 언급한 투 샷 사진이란 건 의 캡처 사진을 말한 것이었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니, 너무 잘 어울리더라고요. 예능이라서 친한 척하신 건 아니죠?”
리포터의 장난기 어린 말에 세 사람이 작게 웃어 보였다.
“같은 소속사이기도 하고 서은율 씨와는 진작부터 형 동생 하던 사이였습니다.”
“안 그래도 에서 그 부분 이야기를 듣고 두 분께 흥미가 돋았어요. 확실히 겉으로만 친한 게 아니신 것 같더라고요.”
진환이 능숙하게 답하는 동안 은율은 부드럽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리포터가 그런 은율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특히나 서은율 씨에 관한 기사가 줄을 잇고 있다는 걸 아시나요? 이진환 씨와 함께 예능에서 액션 영화를 찍었다고 세간의 관심이 아주 대단해요. 저도 에서 서은율 씨가 날아다니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율이 예의 바르게 웃자 리포터의 얼굴이 약간 붉게 변했다. 그녀의 흥미 가득한 눈이 반짝거렸다.
“스턴트맨 출신이라고 하셨죠? 대역으로 참여했던 주요 작품을 몇 가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은율은 리포터의 예고 없는 질문에도 성실히 답해 주었다. 그가 대역을 했던 작품과 캐릭터를 말하자 카메라 근처에 서 있던 작가가 그걸 열심히 받아 적었다. 차후 방송에 나갈 때 은율이 대역으로 참여했던 참고 자료를 준비할 셈이었다.
은율의 스턴트맨 시절 이야기가 지나간 후, 리포터의 시선은 소민을 향했다.
“추격전 막바지에 서은율 씨가 임소민 씨를 지키는 모습 보니까 전 설레서 잠도 안 오더라고요. 임소민 씨는 어땠어요?”
소민이 은율을 힐끔 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저도 당연히 설렜죠. 동화 속 백마 탄 왕자님이 이런 건가 싶었어요.”
“어머, 솔직하셔라. 그러고 보니 오프닝 때 이진환 씨보다 서은율 씨가 더 좋다고 하셨던데, 혹시 진심이실까요?”
“예?!”
소민이 화들짝 놀라며 은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얼른 고개를 돌린 소민이 짓궂다는 듯 리포터를 바라보았다.
“좋다는 그런 게 아니라…… 사귄다면 둘 중 누구냐는 질문이었잖아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사실은 두 분 벌써 좋은 분위기이시라든지…….”
리포터의 은근한 말에 진환이 갑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
“이 부분은 편집합시다. 괜찮죠?”
그렇게 말한 진환이 소민을 바라보았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눈빛이 매섭다. 움찔한 소민이 억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갔네요.”
진환의 제지를 받은 후에야 아차 하는 얼굴을 한 리포터가 사과의 말을 건네 왔다. 세 사람은 괜찮다며 웃는 낯으로 다음 질문을 받았다.
인터뷰가 끝난 후, 자리를 뜰 준비를 하는 은율에게 진환이 작게 속삭였다.
“오늘 스케줄은 이게 마지막이지?”
은율의 스케줄을 모두 꿰고 있던 진환이 친근하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끝나고 우리 집으로 가 있어. 작품 때문에 만나기로 한 감독님이 계셔서 그분만 만나고 갈게.”
“오늘 밤에 하진이 돌아올 건데…….”
“형이 맛있는 거 해 줄게. 밥만 먹고 가. 형 못 믿어?”
고개를 돌리니 최대한 순수해 보이려고 애쓰는 진환의 눈이 보였다. 은율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못 믿긴 하지만 그러죠, 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같이 돌아가게 끝나고 전화해 줘요.”
진환이 은율의 머리를 한차례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은율은 진환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를 바라보고 있던 소민과 시선이 마주쳤다. 또렷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친한 형 동생 사이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않나 싶어 태연한 척했다. 은율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소민이 눈가를 휘며 웃는다.
가까이 다가온 소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은율 씨, 혹시 지금부터 시간 괜찮아요?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이라면 괜찮지만 무슨 일이신가요?”
“여기서는 얘기하기가 좀 그렇고……, 방송국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갈래요?”
어차피 진환을 기다려야 하는 데다가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무슨 얘기일까 싶어 자꾸만 궁금증이 일었다.
은율과 소민은 당연하지만, 각각 매니저를 대동한 채 방송국 내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하지만 소민은 워낙 긴밀한 이야기라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며 두 매니저와 거리를 벌려 앉았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아온 은율이 하나를 소민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눈웃음을 보이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마치 물을 마시듯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금세 반이 사라진 거로 봐선 상당히 목이 탔던 모양이다.
마주 앉은 은율은 소민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뭔가 긴장감 도는 분위기다.
“후우…….”
소민이 깊이 숨을 내쉬었다.
뭐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머릿속에서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동자의 진환이 은율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장면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은율 역시 진환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고 그를 대하는 말투도 묘하게 다른 이들과 달랐다. 질투가 날 정도로.
소민이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그녀의 두 눈에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은율의 얼굴이 담겼다.
“서은율 씨,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요?”
“……예?”
너무도 직설적인 질문에 은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얼른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일하기도 바쁜데…….”
“그럼 내가 본 건 뭐죠?”
소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은율의 말을 부수듯 파고들었다.
“사실은 이진환 씨와 사귀고 있잖아요? 내 말이 틀려요?”
은율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했지만 이어진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키스하는 거 봤어요.”
소민이 두 손을 모아 쥔 채 눈가를 찌푸렸다.
“저번에 마지막 촬영이 있던 날 회식 자리에서…… 은율 씨가 취했잖아요. 직후에 이진환 씨가 데리고 나가는 거 보고 걱정돼서 따라 나가니까 골목에서…….”
말끝을 흐린 소민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늦은 밤, 골목에서 이뤄진 진환과 은율의 진한 키스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땐 이진환 씨가 은율 씨 술버릇이라고 해서 넘어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아요.”
은율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가를 떨었다. 당시 취했다는 것만 들었지, 밖에서 진환과 키스를 했다거나 소민에게 들켰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진환 딴에는 당시의 일을 잘 넘겼기도 했고 은율이 걱정할까 봐서 말을 아낀 것이겠지만, 정작 둘러댄 대상인 소민이 제대로 의심해 버렸다.
은율은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 그게……. 제 술버릇이 과도한 스킨십이라서 그랬던 거 같습니다. 취해서 기억하진 못하지만 오해하시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둘러댈 거 없어요. 오해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요.”
확신하는 듯한 말에 은율의 어깨가 흠칫했다.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조금씩 어색해진다.
“ 촬영 때 구름다리로 가는 문 앞에서…… 둘이 끌어안고 목에 키스도 하고 뽀뽀도 했잖아요.”
은율의 머릿속은 금세 충격으로 가득 찼다. 술자리가 있었던 그날의 일뿐이라면 얼마든 술을 핑계로 둘러대면 그만이었지만, 예능 프로그램 촬영장에서 있었던 스킨십까지 모두 봤다면 반박이 여의치 않다. 대화까지 듣지는 못했더라도 분위기와 스킨십만으로도 둘 사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소민이 본인의 확신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고 있다면 어떻게든 대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그냥…… 장난이었습니다. 형에게 붙잡힌 상태라서 도망치려고 일부러 놀라게…….”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소민이 눈가를 찌푸리다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율 씨 탓이 아닐 거라는 거 알아요. 이진환 씨가 협박했다거나 강요한 거 아니에요?”
“……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얼빠진 소리만 흘러나왔다. 은율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사이, 그녀가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업계 대선배인 데다가 같은 소속사의 메인 간판이잖아요. 은율 씨가 맥없이 휘둘리는 것도 이해가 가요.”
“잠깐만요, 선배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들을수록 황당하기만 했다. 소민은 은율이 진환에게 맥없이 휘둘려 강제로 연인이 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은율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소민은 은율의 반응도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말을 이어갔다.
“이진환 씨가 은율 씨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임소민 선배님.”
떨리는 목소리에 분노가 차기 시작하자 은율이 얼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진환이 형과 전…….”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 말이 왜 이리 내뱉기 힘든 걸까.
거듭 부정하려 할 때마다 속이 아프고 가슴이 저릿거렸다. 차라리 당당하게 사귀고 있노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은율이 입을 다물며 속에서 뒷말을 굴리다가 한숨처럼 다른 말을 뱉었다.
“……그냥 장난 좀 치는 선후배일 뿐이에요.”
소민의 눈초리가 의심을 담았다. 그녀는 은율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를 눈여겨보다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사귀어요.”
여태까지는 분노를 담은 찬바람처럼 굴더니만 이제는 봄날에 핀 수줍은 꽃처럼 얼굴을 붉힌다. 급격한 온도 차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내뱉어진 말까지 놀라워 은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정말 둘이 사귀는 게 아니라면 나랑 사귀자고요.”
말문이 막힌 은율이 눈을 크게 뜬 채 소민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패기 넘치는 눈으로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나, 은율 씨한테 마음 있어요.”
그러더니 삽시간에 볼을 붉힌다.
“고백……하는 거라고요.”
막상 내뱉고 나니 가슴 떨려 죽을 것 같다. 소민은 한 손으로 제 왼쪽 가슴을 꾹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은 한껏 분위기를 잡은 후에나 고백할 셈이었지만, 은율이 진환에게 휘둘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잔뜩 흥분해 버렸다. 그 탓에 조급하게 고백해 버렸지만, 차라리 지금처럼 말해 버리니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은율 씨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새 긴장해 버려서 목이 칼칼했다. 바닥이 보이기 직전까지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켜는데, 그때까지도 은율의 입에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은율에게 부담을 줘 버렸다는 생각에 두어 번 헛기침한 소민이 붉어진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고백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진심이에요.”
그녀가 눈을 들어 은율의 무표정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랑 사귀어요. 그럼 이진환 씨가 은율 씨한테 집적대는 것도 어느 정도는…….”
“죄송합니다.”
은율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과했다.
“선배님과는 사귈 수 없습니다.”
“왜, 왜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소민이 다급하게 묻자 은율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제게 있어 선배님은 감탄스러운 연기뿐 아니라 본받을 점이 아주 많은 좋은 분이세요. 선배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쁘고 감사합니다.”
칭찬은 칭찬이었지만 어딘지 벽이 느껴졌다.
“하지만 연애 상대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좋은 선배님으로 남아 주세요.”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해 주셨다고 해도 제 대답은 같았을 겁니다.”
은율이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환이 형이 절 억지로 휘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남긴 은율은 입도 대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손에 든 채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남자랑 키스했다고 소문낼 거예요.”
소민의 말이 은율의 발목을 잡았다. 소민이 미간을 확 찌푸린 채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머릿속에서는 당장 입 다물라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 메아리쳤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거 정상 아닌 거 알죠? 나랑 사귀어 주면 입 다물고 모르는 척해 줄게요.”
은율은 제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화가 난다는 건 이런 기분인 거구나.
“소문내고 싶으면 내셔도 됩니다.”
담담하게 말한 은율이 그답지 않은 싸늘한 눈으로 소민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소민은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대신 소문내시려면 저에 한해서만 내 주세요. 제 술버릇이 형편없어서 남자여도 가리지 않고 키스하더라고, 그렇게 소문내 주셔야 합니다.”
소민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일어서기 시작한 신인 배우에게 그런 소문이 돈다고 한들 좋을 리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어 앞으로의 배우 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은율은 당당하고도 태연했다.
“진환이 형은 오히려 제게 휘말린 것뿐이에요. 전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단, 진환이 형까지 엮여서 이상한 소문이 난다면…….”
은율의 눈매가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소민이 숨을 멈추고 몸을 웅크릴 정도로 무서웠다. 그것은 과거, 진환이 은율을 옹호할 때처럼 흉흉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선배님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짧게 묵례한 은율이 자리를 벗어났다. 소민은 은율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둔 채 딱딱해진 얼굴을 도무지 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소민의 눈동자에 갖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짜증, 답답함, 민망함, 두려움, 미안함.
여러 감정이 몰려든 눈동자가 눈꺼풀 안으로 사라졌다. 소민은 굳게 눈을 감은 채 여태껏 찌그러져 있던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내가 대체 뭘 한 거람.’
아무리 감정적이었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 말하다니,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조급함과 불안함으로 둘러싸여 있던 가슴이 욱신거린다.
어떻게든 은율에게 자신의 철없는 행동을 사과하고 다시 진지하게 말해 봐야겠다.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였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뜨던 그때, 은율이 앉았던 의자가 살짝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서 눈을 드니 은율이 아닌 의외의 사람이 서 있다.
“잠깐 얘기 좀 나누죠, 임소민 씨.”
기척도 없이 다가와 의자에 앉은 진환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차디찬 눈이 소민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이, 이진환 씨?”
당황한 소민이 굳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스케줄 때문에 먼저 나갔던 거로 아는데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진환의 복장이 아까와 다르다. 아까는 인터뷰를 위해 확실히 갖춰 입었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간소하게 겉옷 없이 검은 와이셔츠와 바지만 입은 차림새였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마주 앉자 소민이 바짝 긴장했다.
‘들었을까?’
카페테리아가 방송국 안에 있다 보니 이곳에서 방송 관계자나 연예계 사람들도 자주 미팅을 가지는 편이었다. 설마 진환의 스케줄이라는 게 여기서 누굴 만나는 거였나?
그렇게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진환에 대한 험담을 섞어 은율에게 억지로 고백을 했고 협박까지 해 버렸다. 심지어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선배인 톱 배우였다. 만약 들은 거라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요.”
진환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소민의 얼굴이 금세 파리하게 질렸다.
역시 들었구나.
큰일이었다. 좀 더 조심할 걸.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해요……. 전 은율 씨가 이진환 씨한테 협박……, 아니, 휘둘리고 있는 줄 알고…….”
“지금 임소민 씨가 사과해야 할 게 그겁니까?”
소민의 말끝이 흐려지자마자 진환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화내는 건 날 그딴 식으로 생각해서가 아니에요.”
소민이 어깨를 흠칫하며 눈을 굴렸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두 손으로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가렸다.
“……죄송해요. 제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진짜 소문낼 생각은 없었어요.”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진환은 쏘아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소민은 그와 시선을 맞대지 않았음에도 주변 공기가 답답해진 것을 느꼈다. 과한 압박감에 머릿속이 금세 엉망진창이 되었다.
“두 분이 사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질투가 났어요. 은율 씨는 아니라고 했지만 회식이 있었던 그날도 그렇고 촬영할 때 구름다리 앞에서도…….”
소민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떼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물기 서린 눈동자가 무표정한 진환을 바라보았다.
“전 두 분이 사귀진 않더라도 최소한 이진환 씨는 은율 씨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은율을 바라볼 때의 진환에게선 애정이 넘쳐흘렀다.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후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선배 정도로 보이겠지만, 두 사람 사이를 다르게 가정하면 보는 시각 또한 달라졌다. 진환이 은율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의 특별한 시선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그걸 깨달은 소민은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도 이진환 씨만큼 은율 씨 좋아해 줄 자신 있었어요. 근데 왜 난 안 되는 건가 하고 생각하니까 너무 답답해져서…….”
소민의 눈가가 일그러지고 물기가 더욱 차오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처음부터 두 사람에게 관련된 이상한 소문을 낼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소민에게 불쑥 뭔가가 내밀어졌다. 그것은 진환의 검은색 손수건이었다.
“이런 곳에서 눈물 보이지 마요.”
한껏 누그러진 진환의 목소리를 듣자 더욱 눈물이 났다. 호의를 받아들여 진환의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찍어 눌렀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눈가를 닦던 소민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녀가 고장 난 인형처럼 멍한 얼굴로 진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굳었다.
진환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알겠습니다.”
소민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입을 뻐끔거렸다. 진환은 마치 아예 내용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진환 씨……, 듣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진환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들었다고는 말 안 했는데요.”
소민의 입이 벌어지고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럼 다짜고짜 실망이라는 말을 했던 건…….”
“은율이를 화나게 한 게 보였으니까요.”
은율과 소민이 오기 전, 진환은 작품에 관한 짧은 미팅을 위해 이미 카페테리아에 도착해 있던 상태였다. 두 사람이 도착했던 건 한창 미팅 중일 때였다.
카페테리아 구석의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미팅 중이던 진환은 그의 위치에서 보이는 은율의 얼굴에 주목했다. 소민의 말을 경청하는 은율의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진환마저 몇 번 보지 못했던 싸늘한 표정이 드러났다.
두 사람이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슬리는데 소민이 은율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은율이 화낼 만한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다 아는 척 다가가서는 운을 뗐다. 역시나 소민은 진환의 분위기와 그의 표정만 보고도 모두 들어 버린 거라 착각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대략적인 대화 내용이 흘러나왔다.
진환이 파악한 것은 간단했다. 은율을 마음에 둔 소민이 자신을 깎으며 그에게 고백을 시도했고, 당연하게도 거절당했다. 울컥한 소민은 의 뒤풀이 때 있었던 두 사람의 키스와 촬영 때 몰래 봤던 구름다리 앞에서의 스킨십을 빌미로 될 리 없는 떼를 썼을 거다.
그 결과 은율이 크게 화가 난 게 틀림없다.
“마지막에 은율이는 뭐라고 하면서 화를 내던가요?”
새삼 은율이 진지하게 내뱉었을 말이 뭘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진지하게 화를 내며 입에 담은 말이란, 무엇일까.
소민이 진환을 가만히 바라보며 은율이 마지막에 내뱉던 말들을 떠올렸다.
‘소문내고 싶으면 내셔도 됩니다.’
‘대신 소문내시려면 저에 한해서만 내 주세요. 제 술버릇이 형편없어서 남자여도 가리지 않고 키스하더라고, 그렇게 소문내 주셔야 합니다.’
‘진환이 형은 오히려 제게 휘말린 것뿐이에요. 전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단, 진환이 형까지 엮여서 이상한 소문이 난다면…….’
‘선배님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머릿속에 생생히 떠오르는 은율의 날 선 목소리에 씁쓸한 얼굴을 한 소민이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소문내도 된다고 했어요.”
진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문이 나면 자신은 상관없어도 은율에겐 큰 피해가 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소문내도 된다고 대답했다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신 자신에 관한 것만 내 달래요. 자기 술버릇이 고약해서 마구 스킨십 하는 거고, 이진환 씨는 자기한테 휘말린 것뿐이라고.”
소민이 눈을 내리깔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에 대해선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이진환 씨까지 엮여서 이상한 소문이 나면 저 보고 각오하라더군요.”
이젠 제법 담담해진 소민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제 눈가를 닦은 손수건을 진환에게 내밀었다.
“좋겠어요, 이진환 씨는.”
소민의 부러움 담긴 목소리가 진환을 자극했다.
“은율 씨가 정말 좋아하나 봐요.”
은율도 같은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진환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웃어 주고 상냥하게 대해 주는 그였지만 분명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건 진환 앞에서만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부러웠다.
“은율이 말대로 할 겁니까?”
진환이 담담히 물었다. 소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은율 씨에게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걸요.”
이제 막 제대로 날개를 펴려는 순간인데 이럴 때 이상한 소문이 돌면 그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한창 신인일 때는 모든 것에 조심, 또 조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이 업계다. 제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한, 보기 드문 연기력의 은율에게 그렇게까지 타격을 줄 생각은 없었다.
진환의 손수건을 두 손에 꼭 쥔 채 입을 꾹 다물었던 소민이 애써 미소 지으며 그것을 돌려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본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다행이네요.”
손수건을 받아 든 진환이 웃는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연기력을 가진 여배우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나도 좀 아깝다고 생각했거든요.”
섬뜩한 말에 소민이 어깨를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진환이 눈꼬리를 휘었다.
“나에 대해선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소문을 퍼뜨리든 상관없어요. 그런 거로 치명타를 입을 시기도 지났고 기사화되지도 않을 테니까.”
진환의 눈에서 일순 살벌한 빛이 흘렀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은율이 앞길에 방해물 생기는 건 철저히 막을 겁니다.”
그 말을 남긴 진환이 선글라스를 쓰며 몸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진환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소민이 긴장이 풀린 것처럼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뭐야, 둘이 완전히 똑같잖아…….”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소민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서로가 저렇게나 닮아 있는데 자신이 끼어들 틈이 있을 리가 없었다.
* * *
방송국을 나온 진환은 은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과 함께 가기로 했으니 벌써 집으로 가 버린 건 아닐 터였다.
-예, 형.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일 끝났어. 어디야, 율아? 승주 씨랑 같이 있어?”
-아, 승주 씨는 먼저 보냈는데……. 음…….
은율이 머뭇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진환은 은율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아무리 은율이더라도 꽤 충격이었을 거다. 타인에게 두 사람의 키스 장면과 스킨십 하는 모습을 들켰다는데 어떻게 담담할 수 있을까.
진환은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
은율이 입을 다물었다. 진환은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길 기다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소음을 봐선 밖에 있는 게 분명했다.
-형, 나 오늘은 그냥 집으로 갈게요.
“왜? 무슨 일인데?”
뭐 때문인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근처에 멈춰서 있던 차들 사이로 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앞차가 제때 출발하지 않아서 참다못한 뒤차가 경적을 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전화 너머에서도 들려왔다.
‘근처에 있네.’
청각을 곤두세운 진환은 은율이 아직 방송국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택시 타고 먼저 들어갈게요.
목소리가 차분했다. 걸으면서 통화하는 거라면 작은 떨림이라도 있을 텐데 그게 없다.
마스크를 썼다고는 해도 연예인이었다. 은율의 성격상 길거리나 사람 눈에 잘 띄는 곳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추측할 수 있을 만한 곳은 방송국 근처의 흡연을 위한 공간, 혹은 벤치가 있는 작은 쉼터 정도였다. 담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은율이니 아마도 벤치 쪽이지 않을까.
“율아, 전화로는 말하기 힘든 일이야?”
차분하게 물으며 예상한 곳으로 향했다. 곧 그의 눈에 구석진 벤치에 앉아 있는 검은 마스크의 남자가 보였다.
은율은 눈을 내리깐 채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그를 안아 주고 싶어졌다.
“지금 어딘지 말해 주면 형이 갈게.”
-아뇨, 아니에요.
은율이 곧바로 거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시선을 내리깐 채 걸음을 옮겼다. 벤치를 지나서 길거리로 나가는 화단 옆 길을 걸었다. 진환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그의 뒤를 밟았다.
-지금 집 가고 있어요.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애써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어깨는 평소보다 처져 있었다. 은율을 지켜보며 따라가고 있는 진환에겐 그 모습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럼 너희 집으로 갈게. 걱정되니까 얼굴이라도 보여 줘.”
-안 돼요.
“왜?”
-지금 좀……. 여하튼 안 돼요.
아무리 둘러대도 진환이 물러나지 않기 때문인지 답답한 한숨 소리가 섞여 들렸다. 진환은 모르는 척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은율은 머릿속도 복잡한데 전화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진환이 기척을 죽이며 다가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따가 전화할게요.
“그럼 다시 전화할 때는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
은율이 길거리로 나가는 출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던 은율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럴게요.
“거짓말.”
은율은 제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목이 뒤에서부터 붙잡히고, 어깨가 강제로 돌려졌다. 은율의 커다란 눈에 선글라스를 낀 진환의 얼굴이 담겼다.
“……형?!”
너무 놀라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진환은 은율의 팔을 붙잡아 화단 길 안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인적 없는 벽에 은율을 몰아세운 진환이 선글라스를 벗어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놀란 눈의 은율을 마주했다.
“말해 줄 생각 없잖아.”
“…….”
은율이 눈을 내리깐 채 시선을 피했다. 진환이 미간을 모으며 그의 마스크를 벗겨 내자 딱딱하게 굳어서는 파리해진 얼굴이 드러난다.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말해 줘.”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답을 요구했다. 진환의 손이 은율의 창백한 볼을 쓰다듬었다.
“형한테는 숨기지 마. 무슨 일인지 몰라도 뭐든 도와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기만 해.”
은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마 소민과의 일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또한 솔직하게 말한다면 소민이 했던 말들도 모두 들려줘야 하는데 그 때문에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혹시라도 진환과 소민의 사이가 틀어져서 불화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은율이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은 형하고 스킨십 했던 걸 다른 사람에게 들켜 버렸어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기도 하고 입술을 꾹 닫기도 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걸 빌미로 사귀자……는 말을 들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소문내겠다고.”
“그래서? 사귀겠다고 했어?”
일부러 심각한 얼굴을 하며 묻자 은율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소문내라고 했어요. 내가 어떻게 형 말고 다른 사람을…….”
눈가를 떨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지친 것처럼 진환의 어깨에 이마를 툭 대었다.
“미안해요. 형은 그냥 휘말린 거니까 퍼트릴 거라면 나에 대해서만 하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 줄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정작 소문내라고 말해 버리긴 했지만, 진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는 확언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죄송해요. 조만간 그분하고 다시 얘기해서 형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함구하게끔 약속받아 낼 테니까…….”
“필요 없어.”
진환의 말에 은율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소문내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
“형!”
“너 혼자 다 감당하게 할 생각 없어.”
진환의 진지한 눈동자가 은율을 눈에 담았다.
“만약에 내가 같은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일방적으로 나한테 휘둘린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문제 있는 거라고 소문내라고 하면?”
“그건……!”
당연히 자신을 팔아서라도 말릴 생각이었다. 진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견디지 못할 거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진환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아챘다.
“네가 날 지키기 위해 나선다고 한들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어?”
차가운 목소리에 은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환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화가 담겨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네가 피해 보면 내가 어떻게 견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요. 둘 다 피해 보느니 차라리 내가…….”
“이건 우리 둘 모두의 문제야, 율아.”
진환이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문제 생기면 나도 못 견뎌. 너도 마찬가지잖아. 차라리 이런 일이 있으면 날 불러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같이 상의했으면 했어. 누구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연인인 우리 두 사람의 문제니까.”
그 말을 들은 은율이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진환은 두 사람의 문제를 은율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서 짊어지려 했다는 것에 화를 내고 있는 거였다. 반대로 진환이 그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자 자신이 한참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연인 사이에 상대를 위한답시고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희생한다고 한들, 그가 좋아해 줄 리가 없는데. 오히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서 합의점을 찾는 걸 원할 텐데.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은율이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보던 진환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진환이 은율을 끌어 품에 안았다. 바깥 공기가 차가운 것도 아닌데 그새 싸늘해진 은율의 몸을 따뜻하게 품어 주니 그가 편안히 안겨 든다.
“이번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 소문낼 만한 사람 아니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가만히 안겨 있던 은율이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환에게 물었다.
“근데 소문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누굴 만났는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실은 카페에 임소민 씨와 둘이 앉아 있는 걸 봤어. 거기서 미팅 중이었거든.”
“……전혀 몰랐어요.”
다 지켜보고 있었다면 숨긴 의미가 없다.
“그런데 말이야.”
진환의 팔에 갑자기 힘이 바짝 들어갔다. 꽉 끌어안긴 은율이 흠칫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과 단둘이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니, 너무한 거 아냐? 지켜보면서 얼마나 질투했는데.”
진환의 말에 은율이 픽 웃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날 혼낸 건 아니겠죠?”
“…….”
“…형.”
차마 아니라곤 말을 못 하겠다.
* * *
진환의 말대로 소민은 얌전했다.
은율은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 사이트와 SNS를 자주 들락거렸지만 자신과 진환에 대해선 에서의 활약상 위주의 긍정적인 글들뿐이었다.
대신 프로그램에서 진환과 겨루다가 붙잡히고 끌어안기곤 했던 모습들이 짧은 영상이나 캡처본으로 편집되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거기에 붙은 내용이 둘이 잘 어울린다던가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이라 은율로서는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둘이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장면까지 캡처되어 올라온 걸 봤을 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마른세수를 해야 했다.
‘조심해야겠다.’
사진만 봐도 서로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니 이러다가 정말 들키는 건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해진다.
잠도 제대로 못 이루며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평온한 며칠이 금세 지나갔다.
소민을 다시 만난 건 약 3주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정식 개봉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서울 강남의 한 영화관에서 영화 의 언론 시사회가 있었다. 사전 기사화를 위해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하는 시사회이자, 방송용 인터뷰까지 준비된 자리였다.
호평을 받으며 시사회를 끝낸 직후, 소민이 갑자기 은율을 불러 세웠다.
“저기, 은율 씨.”
얼굴 맞대기가 껄끄럽던 찰나에 불러 세워진 은율이 저도 모르게 굳은 얼굴을 했다. 기자들 앞에서는 서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쇼맨십이 쉽지가 않다.
은율의 긴장 어린 얼굴을 본 소민이 애써 웃어 보였다.
“죄송한데 잠깐…… 시간 좀 내줘요.”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직도 은율의 머릿속에는 일전에 그녀가 몰아붙이듯 내뱉었던 말이 생생했다.
머뭇거리다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진환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가 은율을 숨기듯 제 뒤로 보내고는 차가운 얼굴로 소민을 마주했다.
“무슨 일입니까?”
난입한 진환을 보고 움찔하던 소민이 눈을 내리깔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곧 결심한 얼굴로 진환과 그의 뒤에 있는 은율에게 시선을 맞췄다.
“괜찮으시면 두 분 다 같이 얘기를 좀 나눴으면 해요.”
“……그러죠.”
애당초 은율을 그녀와 단둘이 보낼 생각이 없었던 진환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나 싶긴 했지만 어차피 여기서 거절해도 또 붙잡아 올 것 같았다. 차라리 깔끔하게 얘기하고 끝내는 게 낫다.
소민이 대화를 요청한 이유는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날의 일에 관한 것일 거라 생각한 진환이 은율을 데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소민을 따라 자리를 옮긴 곳은 근처의 룸 카페였다. 각 자리가 불투명한 문으로 가려져 있어서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편히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각자의 매니저들을 모아 다른 룸에서 대기시켜 둔 세 사람은 테이블을 하나 둔 채 마주 앉았다.
소민은 자신의 앞에 나란히 앉은 진환과 은율을 보며 깊이 심호흡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보인다.
“두 분한텐 정말 죄송했어요.”
소민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은율이 놀란 눈을 했다. 반면에 진환은 이런 패턴도 예상했던 것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바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생각을 정리하느라 너무 오래 걸려 버렸어요.”
진심을 담은 사과에 은율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면 됐습니다.”
팔짱을 낀 채 소민을 바라본 진환이 여전히 싸늘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은율이를 협박한 건 쉽게 넘어가기 힘들군요.”
소민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은율이 당황하며 진환의 팔을 붙잡았다.
“형, 그래도…….”
“이진환 씨 말이 맞아요.”
소민이 인정하며 은율에게 미안함을 가득 담아 바라보았다.
“내가 그날 너무 감정적이고 생각이 짧았어요. 정말 협박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은율 씨한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해요. ……죄송해요, 은율 씨.”
또다시 고개를 숙이려 하기에 은율이 어정쩡하게 일어나 그녀를 말렸다.
“선배님, 이러지 마세요.”
은율의 만류로 고개를 숙이지 못하자 소민이 눈을 내리깔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두 분에 관한 일을 누군가에게 발설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진환은 소민의 저의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녀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파문 하나 없는 또렷하고 결연한 눈동자가 진환을 마주했다.
그날 이후, 소민은 하루하루를 한숨으로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은율에게 야비한 짓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 진환과 사귀는 게 아니라면 자신과 사귀자니, 어린애 같은 유치한 요구를 하고 말았다.
그래서 서로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오늘은 꼭 은율에게 그날 미안했다고 말하고자 했다. 물론 진환 역시 제삼자가 아니니 그에게도 진심을 담아 사과할 셈이었다.
소민의 진심이 통했는지, 진환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임소민 씨 말대로라면 앞으로 그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겠군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진환이 그녀를 향한 시선에 바짝 힘을 주었다.
“단, 조금이라도 이상한 말이 나돌았다간…….”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확신을 담은 말에 진환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가 은율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얘기 끝났으니까 가자.”
은율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소민이 그런 은율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사과, 받아 주는 거죠?”
“물론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얼른 대답했다. 그날 소민에게 실망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완전히 나쁘게 보거나 싫어하게 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에 있어서는 본받을 점이 많은 좋은 선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이가 어색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과하고 감사받는 건 처음이네요.”
소민이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은율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아 끌어당겼다. 은율의 상체가 딸려 오고 그의 얼굴이 지척에 다다랐다.
소민이 웃는 낯으로 은율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가 먼저 고백한 거예요?”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그녀의 질문은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은율의 다른 팔을 붙잡아서 그를 제 품으로 끌어당긴 진환이 눈을 부라렸다.
“보면 모릅니까?”
당황하는 은율의 어깨를 팔로 둘러 안았다. 그새 편안한 얼굴이 된 소민이 질투 때문에 딱딱해진 진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진환 씨가 그런 눈빛을 하는 건 처음 봤거든요.”
은율을 알기 전에는 진환에게 강한 호감을 가졌던 소민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평소 눈빛과 은율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젠 알 것 같았다.
“두 분 평생 가세요. 둘 다 제가 이성으로서 굉장히 좋아했던 사람들이니까요.”
진심을 담은 소민의 말에 그제야 은율의 굳은 얼굴이 사르르 풀려 버렸다.
* * *
속에 걸렸던 일이 풀려서인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의 개봉을 기다릴 수 있었다. 시간은 하루하루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이 사람들에게 선보이게 된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영화는 대호평이었다. 각본과 연출력은 물론이거니와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갖은 칭찬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주연인 진환과 은율의 연기에 관해선 극찬이 쏟아졌다. 진환은 워낙 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보니 당연하다는 반응도 상당했지만, 은율은 한마디로 말해서 난리가 났다. 그의 데뷔작을 포함한 전작들까지 화두에 오르며 갖은 찬사가 쏟아졌다.
연기로 호평을 받은 건 소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평은 작중 이서우의 팔을 붙잡다가 떨어지는 장면이 주를 이루었다. 실제로 공포에 질린 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떨어지고 마는, 그런 사실적인 느낌의 연기 장면에 대부분의 이들이 오싹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 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연기에 있어서까지 갖은 칭찬을 쓸어 담았다.
그런데 영화로 인해 화제가 된 건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예능 프로그램 에서 폭발적인 케미를 보여 준 진환과 은율을 묶은, 다양한 영화 캡처본 또한 떠돌았다. 영화에서 두 사람의 브로맨스를 끌어낼 만한 장면을 모아 이것저것 이어 붙인 것도 있었고, 아예 팬픽을 쓴 것도 있었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두 사람을 공식 커플로 몰아 지지하는 사람들까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연인 사이인 두 사람으로서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이 상황이 그저 웃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오히려 에서 소민의 발언과 은율이 그녀를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던 장면들로 인해 추측성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진환과 은율의 케미가 그런 부분까지 덮어 버릴 정도로 강렬했던 모양이다. 거기다 소민이 다른 작품 관련해서 단독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적에, 을 언급하며 은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거기서 그녀가 ‘동생 삼고 싶은 성실한 신인 배우’라고 딱 잘라 발언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진환과 은율을 두고서 보기 좋은 브로맨스 커플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할 무렵, 은 천만 관객을 동원한 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사흘 후.
레이먼드 윌슨 감독의 SF 블록버스터 영화 <에어윈드>가 한국에 상륙을 예고했다.
* * *
서울의 한 유명 한식당.
그곳에 도착한 진환과 은율은 VIP룸의 문을 열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감독님!}
은율이 밝게 웃는 얼굴로 얼른 룸 안에 들어갔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서 양반다리를 한 채 기다리고 있던 나이 지긋한 백발의 외국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게. 둘 다 오느라 고생했어.}
{저희보다도 미국에서 날아오신 감독님이 더 고생하셨죠.}
{오지 산간 다 돌아다녀 본 나인데 이 정도가 뭐가 고생이겠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레이먼드 윌슨 감독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에어윈드>의 개봉을 앞두고 한국에서 특별시사회를 하게 된 윌슨 감독은 영화 인터뷰를 위해 한데 모이기 전날, 따로 진환과 은율을 만났으면 했다. 그래서 예정보다 하루 일찍 한국에 도착해 두 사람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기된 얼굴의 은율과 인사차 따뜻하게 포옹한 윌슨 감독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아이구, 어째 한국에 있는 동안 살이 더 빠진 것 같나.}
탄탄하지만 마른 등을 토닥이며 혀를 차는데, 옆에서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웃는 얼굴의 진환이 미간을 꿈틀거리고 있다.
{하여튼 질투가 하늘을 찌르는구먼.}
호탕하게 웃은 윌슨 감독이 그제야 은율을 놓아주었다. 진환과는 가볍게 악수를 나눈 그가 두 사람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하며 먼저 앉았다.
호화로운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세 사람은 서로 가볍게 안부를 물으며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윌슨 감독이 눈을 빛내며 영화 을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둘이서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꽤 괜찮던데.}
{보셨습니까?}
윌슨 감독의 술잔을 채워 주던 진환이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봤고말고. <에어윈드>에서도 느꼈지만, 둘이 아주 잘 어울렸어. 호흡이 좋아.}
{그럼요.}
진환이 제 옆에 앉은 은율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당겼다. 그를 제 곁에 바짝 밀착시킨 진환이 보란 듯이 웃었다.
{지금도 이렇게 잘 어울리잖습니까.}
{형, 감독님 앞에서……!}
{하하, 그래, 맞는 말이야.}
은율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리고, 윌슨 감독은 그저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은율을 자신의 손주 바라보듯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이번에 은율이가 아주 연기를 잘하더구나. 그새 성장했어.}
{이준수 감독님과 진환이 형 덕분입니다. 저 혼자였다면 절대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눈을 내리깔며 겸손하게 말하자 윌슨 감독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면 볼수록 예쁘고 착하단 말이지.
진환이 쓰다듬을 받은 은율이 기분 좋게 웃는 것을 보며 눈꼬리를 꿈틀했다. 그걸 알아챈 윌슨 감독이 너털웃음을 보이며 손을 거두었다.
{하여튼 질투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다니까.}
일부러 들으란 듯이 혀를 찬 윌슨 감독이 진환과 눈을 맞댔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환이 먼저 운을 떼었다.
{단순히 저희와 한잔하려고 부르신 것 같지는 않은데, 다른 하실 말씀이 있는 것 아닙니까?}
딱딱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윌슨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진환으로서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인자하고 정이 넘치지만, 일 외에 사적으로 굳이 자리를 가져서 안부를 물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심지어 시사회와 인터뷰 때문에 내일 공식적으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 잡혀 있었고 말이다.
예상대로 윌슨 감독은 단순히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물으러 온 게 아니었다.
{사실은 동양인 두 사람을 투 톱으로 내세운 영화를 하나 기획 중이라네.}
진환과 은율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씩 웃었다.
{장르는 액션. 두 주인공은 서로 대립하는 구도이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나중에는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되지. 주연 자리 외에는 이미 다 채워져 있고, 크랭크 인은 연말로 생각 중이야.}
윌슨 감독의 눈빛이 일순 희번덕거렸다.
{어때, 생각 있나?}
진환과 은율이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듯 눈을 마주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 * *
영화 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서 상영관에서 모두 내려간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에어윈드>가 개봉되었다.
올해 최고 상영관 수를 확보한 <에어윈드>는 블록버스터답게 화려한 비주얼의 예고편을 몇 달 전부터 미리 공개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둔 상태였다. 개봉하기 며칠 전, 주연들을 대동한 레이먼드 윌슨 감독의 내한 인터뷰와 특별시사회 덕에 사람들의 관심은 에서 <에어윈드>로 자연스럽게 넘어갔고, 성황리에 상영을 시작했다.
결과는 극찬이었다.
레이먼드 윌슨 감독 특유의 화려함과 SF 느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고, 시나리오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람이 안드로이드를 지배하던 세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지배 관계가 뒤틀리고 사람이 오히려 안드로이드에게 사육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에게 지배당하던 안드로이드들은 어느 날부턴가 자신들의 지배자를 꾀기 시작했다. 높다란 벽을 세우고 하늘을 가리며 기계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답답한 세상을 만들면서 그것이 합리적 판단에 의한 결과물인 양 사람들을 속였다. 그러고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람의 오감을 지배하며 주도권을 빼앗아 갔다.
안드로이드와 갖은 기계에 둘러싸인 채 그것들 없이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진 사람들은 이대로는 도태되다 못해 백치가 되고 말 거라는 생각에 반란을 준비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계 벽에 가로막히지 않은 맑은 하늘, 그리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 즉 자유였다. 다양한 계층의 갖가지 사람들이 모여 안드로이드와 맞서 싸우다 이내 자유를 쟁취하는, 그런 영화였다.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화려하지만 어딘가 답답하고 삭막한 미래 세계를 보며 영화 속 사람들에게 점차 공감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어딘지 모를 시원함과 여운에 서로서로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해외에서 극찬을 받은 만큼 한국에서도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특히나 이진환이 연기한 ‘유재한’은 안드로이드들이 효율적인 인간 사육을 위해 세뇌된 클론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연구원으로, 미래를 위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는 반란군의 리더 격 인물이었다. 딱딱하고 냉정한 사람이지만 제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인간적인 면까지 가진 사람이라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기가 상당했다. 연기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대단했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주목을 받은 건 한국인 주연 배우 이진환뿐만이 아니었다. 작중 ‘유재한’의 동생 ‘유은호’를 연기한 신인 배우 서은율을 <에어윈드> 촬영 초기에 레이먼드 윌슨 감독이 직접 섭외 요청해 추가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했다. 당시에는 왜일까 하는 의문만 있었는데, 영화가 개봉된 후에야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유은호의 분량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는 유재한이 반란군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 사랑하는 동생이 머무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무게 중심이었다. 유재한을 명확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존재가 유은호였고, 그를 인상 깊고 매력적으로 연기한 게 서은율이었다.
그렇게 이진환과 서은율은 영화 에 이어 <에어윈드>에서까지 찰떡 호흡을 보이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에어윈드>가 에 버금가는 관람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하고 막을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레이먼드 윌슨 감독은 야심차게 준비한 차기작의 배우가 모두 준비되었음을 발표했다.
제목은 .
제목 그대로 투 톱 주연을 내세운 작품으로, 레이먼드 윌슨 감독답게 화려한 액션이 예정된 블록버스터였다.
영화는 미국 경찰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과 수완 좋은 거대 흥신소를 운영하는 젊은 한국인이 우연히 한 사건에 휘말리며 얽히게 되는 내용이었다. 사건을 풀어 나가다가 이 뒤에 어떤 음모가 있다는 걸 알아챈 두 사람이 서로 자신들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협력해서 일을 해결하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액션물이다 보니 시원시원한 액션과 상당한 특수 효과까지 기대해 볼 수 있었다.
특히나 근래 액션물에도 종종 출연해서 대역 없이 무술까지 선보였다던 톱 배우 이진환과 스턴트맨 출신으로 화려한 액션을 무리 없이 소화한다는 신인 배우 서은율이 함께 주연을 맡았다. 영화 과 <에어윈드>에서도 호흡을 맞췄던 두 배우는 레이먼드 윌슨 감독이 직접 그들을 만나 러브콜을 한 거로 알려져 더욱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이 함께 연기하는 모습이나 예능 프로그램 에서의 친근한 모습이 영상과 캡처본으로 일파만파 퍼져 있는 가운데, 에서의 호흡과 케미가 어떨지 세간의 귀추가 주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