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매니저의 하루 <승주편> (31/33)

외전 1. 매니저의 하루 <승주편>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동일하다.

집에서 미리 상자째 사다 놓은 에너지 드링크와 피로회복제, 500ml 생수병 몇 개를 갖고 나와 밴에 채워 넣었다. 케어 하는 배우를 위해 미리 가습기를 틀고 차량 내부의 온도에 각별히 신경 쓴 후에야 차를 출발했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장맛비는, 어느새 빗발이 거세져 있다. 그럼에도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막힘없이 달려 나갈 수 있었다. 덕분에 제 배우에게 줄 샌드위치까지 샀음에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예정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높다란 오피스텔을 힐끗 올려다보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목을 신경 써서 일부러 주차가 가장 적은 지하 4층 끝까지 내려가 엘리베이터 옆 빈자리에 주차했다.

시간을 체크하며 휴대폰을 꺼내 오늘의 스케줄을 꼼꼼히 눈에 새겼다. 한창 바빠지긴 했지만 대표님이 워낙 극성이라 너무 하드한 일정은 아니었다. 하루 내내 일이 있어도 쉬는 시간은 반드시 넉넉하게 넣었고 몸에 무리가 갈만 한 스케줄은 절대 잡지 않았다. 대표님은 다른 배우들에게는 이렇지 않으면서 유독 이 배우에겐 각별하다.

‘하긴, 얼마나 아끼면 아빠라고 부르라 하실까.’

차갑고 무표정하던 얼굴도 금세 풀어지고 말이야.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배우다. 바르고 착한 인성으로도 업계에 호평이 자자할 정도다. 물론 그 호평에는 베테랑 배우들마저 한 수 접어 줄 정도로 대단한 연기력도 한몫했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여태껏 여러 배우의 매니저를 해 왔지만 이 배우만큼 자신에게 예의 바르게 군 적이 없다. 그뿐이랴. 언제나 자기 때문에 고생한다며 세심한 인사말을 건네는 사람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누구 아들인지 몰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참 잘 컸다 싶다.

작은 미소가 어느덧 훈훈한 아빠 미소로 바뀔 즈음, 그의 휴대폰이 낭랑한 벨 소리를 내며 울렸다. 반사적으로 빠르게 전화를 드니, 기다리고 있는 배우의 남동생 이름이 버젓이 떠 있다.

“예, 하진 씨.”

-승주 씨, 제가 지금 나가 봐야 해서 그러는데 형 좀 부탁해도 될까요?

그 말에 눈이 번쩍 떠지고 몸이 바짝 긴장했다.

“은율 씨한테 무슨 일 있습니까?”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요 며칠 계속 비가 와서 그런지 형이 좀 많이 힘들어 하네요. 오늘 무리하지 않도록 신경 좀 많이 써 주세요.

그러고 보니 은율 씨는 과거 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빗줄기 속에서도 태연하게 연기할 정도이긴 했지만, 비에 과하게 노출되어 있거나 지금처럼 며칠 내리쏟아지면 눈에 띄게 힘들어 하긴 했다. 바보같이 그걸 잊고 있었다니 매니저 실격이다, 안승주.

“지금 주차장에 차 대고 있는데 올라갈까요?”

-예, 부탁드릴게요.

하진 씨의 목소리에는 형에 대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우애가 깊은 사이이니 상태가 좋지 않은 형을 두고 외출하기가 쉽지 않을 거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올라가는 와중에도 은율 씨에 대한 걱정이 일었다. 휴대폰을 꺼내 스케줄을 훑어보며 혹시 미룰 수 있는 일정이 있나 체크해 봤지만 마땅한 게 없다.

정 안 되면 며칠 뒤에 있을 오프를 차라리 내일부터로 어떻게든 앞당길 수는 없을까. 은율 씨에 대한 일은 뭐든지 자신에게 상의하라던 대표님에게 이따 시간을 내어 연락해 봐야겠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은율 씨의 집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하진 씨가 튀어나왔다. 급하긴 급했는지 겉옷에 카메라 가방까지 멘 채 초조한 얼굴로 반겨 온다.

“안에 형 있으니까 잘 부탁드릴게요. 오늘 절대 무리시키시면 안 되고 본인이 고집 부려도 중간중간 꼭 쉬게 해 주셔야 해요. 저러다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신신당부하며 엘리베이터로 뛰어가려던 하진 씨가 멈칫하더니 얼른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혹시 너무 안 좋으면 진환이 형한테 연락해 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가 버렸지만 여기서 톱 배우 이진환이 왜 나오는지는 알 만했다. 은율 씨에게는 그만한 영양제도 없지. 엄청 바쁜 사람만 아니었으면 서브 매니저라도 시키고 싶을 정도다.

집 안으로 들어가며 은율 씨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방에서 얼핏 기척이 느껴지기에 가까이 다가가 문을 열었다.

“은율 씨, 괜찮……!”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은율 씨는 바닥에 앉은 채로 침대에 얼굴을 묻은 상태였다. 매일 건강하고 기운 넘치던 활력소 서은율은 어디 가고, 지금은 물먹은 솜처럼 잔뜩 늘어져 버린 지친 청년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얼른 다가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괜찮아요? 정신 차려 봐요, 은율 씨.”

“음……, 오셨어요……?”

눈가를 파르르 떨며, 눈을 반쯤 뜨고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오늘 상태 너무 안 좋은데요? 어떻게든 스케줄을…….”

“아뇨,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며 살짝 웃어 보이지만 미소에 힘이 하나도 없다. 진짜 괜찮으려나.

하진 씨가 도와줬는지 말끔히 씻은 채였던지라 옷만 갈아입으면 되겠다 싶었다. 힘없는 은율 씨를 이끌어 대충 적당한 옷을 골라 입혔다. 어차피 이동하면 촬영지에서 옷을 갈아입을 테니 아무거나 입혀서 데리고 나가야겠다 싶었는데 이 와중에도 잘 어울린다, 부럽게.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른하게 셔츠 단추를 채우는 은율 씨를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셔츠 단추를 채우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사람 넋을 빼놓다니, 하여튼 마성이다.

은율 씨가 셔츠 단추를 채우는 동안 빗을 들고 와서 그의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스킨로션도 발라 줘야 하나 했지만 어제 스타일리스트인 연지 씨가 눈에 힘을 주며 으름장 놓던 장면을 떠올렸다.

‘절대 아-무것도 손대지 마. 뭘 발라 주든 세팅하든 내가 할 거야.’

원래 그런 경향이 있긴 했지만, 유독 은율 씨에 한해서는 더 심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 손으로 다 꾸며 주려는 욕심이 과하다 싶기도 하다.

‘그래도 솜씨는 좋으니까.’

연지 씨는 K엔터 소속 스타일리스트 중에서 가장 실력자다. 그래서 대표님이 그녀를 은율 씨에게 붙인 거기도 하고.

알면 알수록 편애가 참 대단한 수준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긴 했지만.

옷을 갖춰 입은 은율 씨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하는 은율 씨를 부축해 엘리베이터를 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벽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 보니 다행히 열은 없다.

“괜찮겠어요?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거 같은데, 병원이라도 갈까요?”

“병원 가도 소용없는 거라서……. 그냥 짬짬이 눈 좀 붙일게요.”

“그래요. 너무 힘들면 꼭 말해 줘야 해요.”

걱정스럽게 말하며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서늘한 온도가 그대로 느껴져서 한층 걱정됐다.

밴에 올라탄 후에도 은율 씨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처럼 힘없이 늘어져서는 눈만 꼭 감고 있었다. 빈속이 분명했지만 도저히 뭔가를 먹을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미리 준비해 둔 샌드위치를 권했지만 역시나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거절당했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내내 룸 미러로 은율 씨를 연신 힐끗거렸다. 거의 몇 백 번은 힐끗거린 거 같은데 그사이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푹 잠든 거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한 번씩 미간이 찌푸려지거나 바르작거리는 거 봐서는 잠도 못 자는 모양이다.

‘트라우마라는 건 정말 힘든 거구나.’

거의 다 나았는데도 저 정도면 그전엔 대체 얼마나 심했던 걸까.

새삼 은율 씨가 대단해 보였다.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까지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사고를 당해 부모님을 잃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것 때문에 제대로 된 일도 못 하다가 스턴트 일을 하게 됐던 거라던데, 그간 홀로 두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기 꿈이 뭔지도 몰랐다고 하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지금이야 우연한 기회에 이진환 씨와 만나서 트라우마도 이겨 내고 연기자의 길이라는 꿈도 얻게 되었다지만 그전까진 얼마나 힘들었을까. 대견하다, 대견해.

내겐 나이 차이 있는 누나만 한 명 있다 보니 은율 씨처럼 형제를 뒷바라지해 본 적이 없었다. 대신 배우들을 서포트 하며 나름 챙겨 주곤 했는데, 은율 씨만큼은 의무가 아닌 진심으로 제 동생 챙기듯 살뜰하게 챙기고 싶었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은율 씨가 장마에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측은했다. 작년 여름엔 장마가 온 줄도 모를 정도로 비가 적게 내려서 인식하지 못했는데, 은율 씨를 보다 보니 이번 여름은 이제 막 장마가 시작했을 뿐인데 내려도 너무 내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애꿎은 빗줄기를 사납게 노려보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촬영장에 도착해 버렸다. 그나마 지붕 있는 주차장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운전석에서 얼른 내려섰다. 뒷좌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은율 씨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진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촬영장에 도착하면 연락한다던 연지 씨에게서도 아직 연락이 없다. 잠시 시간이 되겠구나 싶어서 피로회복제부터 꺼내 들었다.

“은율 씨, 우선 이거부터 마셔요.”

흐릿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내민 피로회복제를 바라보던 은율 씨의 눈이 날 바라보며 나른하게 깜빡인다.

이런 곳에서 색기 흘리면 안 돼요, 은율 씨.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켜 넣었다.

두근대려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직접 뚜껑을 열어 주었다. 그걸 건네며 힘내라는 의미로 활짝 웃어 보였다.

“피로회복제예요. 조금은 도움이 될 거예요.”

“아……, 고마워요.”

애써 웃으며 받아 든 은율 씨가 느릿하게 병을 기울였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봐도 적응하기 어렵단 말이지.

피로회복제 덕분이라고 하긴 뭐했지만, 은율 씨는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하기만 했다. 트라우마는 전혀 없는 사람처럼 또렷한 눈으로 감독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최상의 컨디션인 것처럼 최적의 연기를 뽑아냈다. 불안해하며 바라보던 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일 지경이다.

괜한 걱정이었나?

하지만 은율 씨가 멀쩡하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밴에 올라타기만 하면 녹초가 돼서는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꾹 감았다.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병원에 가자고 말해 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자꾸만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스스로가 답답하고 한심해졌다.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이런 주제에 뭐가 베테랑 매니저야.’

8년간 갖은 칭찬을 들으며 매니저 일을 했다. 새끼 매니저 때부터 특유의 센스를 발휘해 눈치껏 행동했고, 제 배우의 얼굴만 봐도 어떤 상태인지 단박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눈썰미를 길렀다.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에 임할 수 있도록 배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케어 했고 나중에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직접 말하지 않아도 텔레파시라도 받은 것처럼 척척 응대했다. 어찌나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지 매니저들의 귀감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걸 믿고 K엔터의 대표님이 넉넉한 연봉을 줘 가며 자신을 스카우트한 건데, 정말이지 면목이 없다.

그런 자신이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역시 스케줄을 조정하는 거겠지? 쓴소리를 좀 듣겠지만 은율 씨 몸이 우선이니까……. 하지만 은율 씨가 극구 반대할 텐데.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와중에 문득 하진 씨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너무 안 좋으면 진환이 형한테 연락해 주세요.’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휴대폰을 다급히 꺼내 들었다. 곧바로 이진환 씨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슬쩍 룸미러로 뒷좌석의 은율 씨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눈을 꾹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은율 씨가 들으면 이진환 씨에게 폐가 된다고 극구 말리려 들 거다. 바쁜 사람이고 한창 촬영 중일 테니 그의 말도 맞지만, 하진 씨의 당부도 있고 하니 역시 연락해 보는 게 좋겠다.

조심스레 차 밖으로 나와 우산을 든 채 연락처를 뒤졌다. 이진환 씨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는 있지만 역시 대뜸 연락하는 것보다는 매니저에게 상황을 묻는 게 먼저다.

우산에 닿는 빗줄기가 꽤 굵다는 생각을 하며 상대가 전화 받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승주 씨. 무슨 일이에요?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며칠 전 이진환 씨의 자택으로 은율 씨를 데리러 갔을 때 만났던 매니저 김연우 씨가 반가운 듯 물었다. 이쪽도 반갑게 인사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혹시 이진환 씨 지금 많이 바쁘신가요?”

-촬영 중이긴 한데……. 혹시 은율 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귀신같이 알아채고 놀란 듯 물어온다. 자신이 그에게 전화를 할 일은 한정되어 있으니 추측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만한 건 아니었다.

“장마 때문에 힘들어 하셔서요. 이쪽은 다음 스케줄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 시간이 있는데, 같은 서울이라면 잠깐 뵈러 가도 될까요?”

-어, 음, 근데 짬이 날지는……. 어?

건너편에서 덜컥하는 소리와 누군가의 목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 같더니, 연우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은율 씨에 대한 애칭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딱딱한 목소리에 흠칫하면서도 얼른 대답했다.

“하진 씨 말로는 장마 때문에 은율 씨가 힘들어 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저희 쪽 스케줄 사이에 텀이 좀 있는데, 집으로 보내 쉬시게 하는 것보다는 이진환 씨를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연우 편으로 위치 알려 드릴 테니 바로 오세요. 거의 다 오실 때쯤 알려 주시면 시간 내겠습니다.

“가능하세요? 촬영 중이시라고 들었는데.”

-없어도 내야죠.

담담하지만 애정 넘치는 말이었다.

곧바로 연우 씨가 촬영장 위치를 문자로 보내 주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거리다.

빗길을 조심하며 최대한 빨리 내달렸다. 이진환 씨를 만나면 은율 씨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액셀을 열심히 밟았다.

“승주 씨, 어디 가는 거예요?”

뒷좌석에서 들린 힘없는 목소리에 뜨끔했다. 은율 씨도 다음 촬영까지 시간이 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진환 씨한테 가고 있어요.”

“……예?”

룸 미러에 비친 은율 씨의 눈동자가 단숨에 커졌다.

“형은 왜요?”

“은율 씨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싶어서요.”

당황한 빛이 역력한 은율 씨가 허둥지둥하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승주 씨, 신경 써 준 건 고마운데 차 돌려 주세요. 형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에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했지만 이번만은 고집을 부리기로 했다.

“죄송해요.”

“승주 씨…….”

“이미 다 왔어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차 돌려 주세요. 차에서 잠깐 눈 감고 있으면 멀쩡하다니까요.”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말이었지만 일부러 무시한 채 촬영장 근처에 차를 세웠다. 야외 촬영이었던 건지 저 멀리에 사람이 꽤 몰려 있다.

안절부절못하는 은율 씨를 힐끗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우 씨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뒷좌석 창문을 누군가 밖에서 똑똑 노크했다. 은율 씨가 흠칫 놀라더니만 창문을 가리고 있던 작은 커튼을 들췄다. 짙게 선팅 된 창문 너머로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우산을 쓰고 있는 건장한 남자가 보였다.

은율 씨가 숨을 삼킨 채 얼어 버렸다. 그를 대신해 뒷좌석 잠금쇠를 풀어 주니, 소리를 들은 남자가 얼른 문을 열었다.

“율아, 괜찮아?”

문을 열자마자 이진환 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비 냄새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젖은 우산을 밖에 내던지며 안으로 들어온 이진환 씨는 곧바로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서 은율 씨의 안색부터 살폈다.

“형, 나 괜찮은데…….”

“어디가 괜찮아, 이렇게 창백한데.”

“아니, 정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은율 씨의 목소리가 달라진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리고 또래다운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가 흘러나왔다.

역시 씁쓸하긴 하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컨디션 난조일 때는 애인만큼 확실한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사귀고 있다는 걸 알아챈 반년 전쯤부터 자주 느껴 온 거지만 이럴 때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차에서 내려서는 우산을 든 채 길가로 걸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서 가만히 밴에 시선을 고정했다.

짙게 선팅 되어 있어서 안을 볼 수는 없지만, 왜인지 저 문이 열렸을 땐 한결 나아진 은율 씨가 보일 것만 같다.

생각보다 내가 은율 씨에게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챙겨 주는 것쯤이야 다른 매니저들도 다들 하는 일이다. 센스 있게 구는 것은 배우에게 한결 편하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요소 중 하나이지만 오늘 같은 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만 한참 한 것 같다. 그럴 시간에 일찌감치 이진환 씨에게 연락도 하고 은율 씨가 고집 부려도 일을 쉬게 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옆에 다가선 연우 씨가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어요. 은율 씨도 고집 있어서 오는 동안 실랑이 좀 하지 않았어요?”

“예? 예, 뭐…….”

속을 읽은 듯한 말에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은율 씨는 특히 남한테 폐 끼치는 거 엄청 싫어하잖아요. 아파도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쓸까 봐 아프다고 말도 안 하고 태연한 척할 사람이에요.”

“……그렇긴 하죠.”

“우리가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거 같아요.”

연우 씨가 확신에 찬 얼굴로 눈을 또렷하게 뜬다.

“배우가 쓸데없는 고집을 꺾고 내게 온전히 기댈 수 있게 하는 거.”

그렇게 말한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가능하면 일류 매니저겠죠?”

작은 목소리로 ‘딴 건 몰라도 사람 고집이 그렇게 쉽게 픽픽 꺾이겠나’라며 투덜거린다.

왜인지 그의 확신에 찬 말을 알 것도 같다. 아니, 사실 충분히 알고 있다. 베테랑 매니저들마저 어려워하는 게 그런 부분이지 않을까.

밀접한 관계라 할지언정 엄연한 타인이다. 거기다 갑을 관계로 보자면 배우가 갑이다. 그런 사람들이 고집을 꺾고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매니저에게 온전히 기댄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 아닐까.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은율 씨에게 난 정말 기댈 만한 매니저일까.

생각이 많아서인지 이후 스케줄을 어떻게 소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진환 씨를 만나고 나서 눈에 띄게 좋아진 은율 씨는 좋은 컨디션으로 스케줄을 착착 진행해 나갔지만, 정작 난 멍하니 끌려다니기만 한 느낌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은율 씨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다다랐다.

은율 씨를 밴에서 내려 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내일 일정은 모두 조정해 뒀으니까 하루 푹 쉬어요.”

“알겠습니다.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은율 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몸을 돌려 로비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그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걸 본 뒤에야 출발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로비로 발을 들이려던 은율 씨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러더니 얼른 몸을 돌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조수석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 몸을 쭉 빼서 은율 씨와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 있어요?”

조수석에 바짝 다가선 은율 씨가 입 안에서 말을 굴리다가 갑자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승주 씨가 아니었으면 저 혼자 끙끙대다가 쓰러졌을지도 몰라요.”

예상치 못한 감사 인사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자꾸 괜찮다고만 해서 답답하셨을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이번엔 사과를 한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알면 됐어요.”

은율 씨를 향해 그만큼이나 밝게 웃어 보였다.

“이진환 씨가 없을 땐 언제든 기대 주세요. 전 은율 씨를 든든히 지탱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든 은율 씨의 주변엔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가득하다. 그리고 나도 그 무리에 들어가고 싶고, 연우 씨가 했던 말대로 은율 씨가 고집을 꺾고 제게 기댈 정도가 됐으면 한다.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이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은율 씨가 해사한 얼굴로 창문을 통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그 손을 단번에 맞잡았다.

이진환 씨만큼은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은율 씨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 배우 서은율에게 꼭 필요한 매니저가.

“저야말로 오래오래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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