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매니저의 하루 <연우편> (32/33)

외전 2. 매니저의 하루 <연우편>

“흐아암-.”

졸린 눈을 비비며 애써 부리부리한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저 신호만 바뀌면 부리나케 튀어 나가야 했다.

신호등의 색이 바뀌자마자 빠르게 출발해 액셀을 밟았다.

남은 시간은 5분. 과연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도착해야지!’

안 그러면 형이 날 죽일걸.

꼭두새벽부터 움직이는 것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따로 있었다. 1분이라도 지각했다간 진환이 형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하루 종일 받아 내야 한다는 거다. 예정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는 까치집이어도 사정없이 달리면 어찌어찌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미쳤지. 알람 맞춰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오전 오후도 구분을 못 하다니.’

어제 스케줄 때문에 늦게 자긴 했지만, 어지간히 비몽사몽이었나 보다. 자칫 오후 5시에 일어날 뻔했다.

새벽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금 더 늦은 시간이었으면 출근 시간에 걸려 무조건 지각했을 거다.

“머리에 폭탄 맞았어? 좀 빗고 다니자, 연우야.”

밴에 올라타자마자 은율 씨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느라 휴대폰에서 눈도 안 뗀 진환이 형이 혀를 차며 말한다. 내 잘못이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괜히 야속하다.

운전하는 내내 손으로 머리를 빗으며 곧바로 촬영지로 향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빡빡한 촬영 스케줄임에도 진환이 형은 전혀 피곤한 내색 없이 연기를 펼쳤다.

특히나 다정한 연인 연기를 펼칠 때는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대 여배우가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반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눈을 반짝였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란 건 저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여배우를 은율 씨라고 생각하니까 가능한 거겠지?’

은율 씨와 사귀기 전까지는 저 정도로 다디단 눈을 한 적이 없었다. 다정한 연기를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진환이 형과 오래 붙어 있었던 난 알 수 있었다.

진환이 형의 연기력이 제대로 폭발하기 시작했다고 느꼈던 건 은율 씨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전에도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이었던 건 맞지만 지금에 비한다면 조금 떨어지지 않을까. 특히 ‘연인’ 역할을 할 때 말이다.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진환이 형의 눈에 깃들어 있던 꿀 같은 다정함이 훅 사라졌다. 언제 부드럽게 웃었냐는 것처럼 차갑게 변한 진환이 형이 미련 없이 여배우 앞을 떠났다. 여배우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하긴, 저렇게나 여지를 주지 않으니 스캔들이 나고 싶어도 날 수가 없지.

다른 매니저들은 자기네 배우들이 스캔들 날까 봐 언제나 조심하고 노심초사한다는데, 그런 점에서 진환이 형은 걱정이 없다. 만약 이상한 스캔들이 날 뻔한다 해도 형의 뒷배라면 기사화되기 전에 얼마든지 묻어 버릴 수 있고 말이다.

‘은율 씨 외에는 스캔들이 날 리가 없지.’

진환이 형은 일편단심 은율 씨니까.

휴대폰을 꺼내 들어 잠금 화면에 버젓이 떠 있는 귀여운 여자를 바라보았다. 청초하면서도 귀여운 이미지가 있는 사랑스러운 여자다.

‘나도 우리 지선이만 일편단심이야.’

여자 친구 지선이가 유학길에 오른 지도 어언 3년.

그간 오매불망 기다려 온 만큼 곧 돌아올 그녀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지선이를 향한 내 사랑은 진환이 형이 은율 씨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커다랬다.

“뭐 해? 휴대폰에 입술 내밀고.”

지척에서 들려온 진환이 형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 속 지선이에게 키스할 것처럼 입술을 내밀었던 모양이다. 습관적인 행동이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고 있는데 형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게 뭘 뜻하는지 단박에 알아챈 내가 형의 휴대폰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진환이 형이 휴대폰에 찍힌 문자 메시지들을 확인하더니 눈을 반짝인다. 곧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딱딱하던 얼굴에 밝은 미소를 걸었다.

“어, 율아. 형 지금 촬영 끝났는데.”

그럼 그렇지.

밝은 미소가 걸렸을 때부터 은율 씨일 거라 예상했다.

다음 촬영지로 이동하기 위해 밴의 운전석에 앉으니 진환이 형 역시 전화를 하며 뒷좌석에 올라탄다. 밴의 시동을 걸 때쯤에 형이 전화를 끊으며 급하게 말을 꺼냈다.

“연우야, 우리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 있지?”

“예, 다음 로케까지 거리상으로 가늠해 보면 한 시간 정도 비어요.”

이동 시간을 고려해도 1시간이나 되는 여유 시간이 남는다. 진환이 형이라면 그런 시간에 아마도 다른 대본을 읽거나 잠시 눈을 붙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율이한테 가자.”

그래, 저거.

예상한 말이 나오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뒷좌석 쪽으로 몸을 돌리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진환이 형이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어 주었다.

“여기가 율이 촬영지인데 이십 분 거리밖에 안 되더라.”

“……형, 여기 저희 촬영지랑은 반대 방향이라서 오가는 이동 시간 생각하면 십 분 볼까 말까인데요?”

“알아. 그러니까 빨리 출발해. 일 분이라도 더 봐야 하니까.”

당당한 말에 어이가 없다. 그러면서도 애써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고 해도 나에겐 선택권이 없을뿐더러 형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만 해도 지선이가 잠깐 한국에 왔을 때 고작 5분 만나자고 딱지 떼여 가며 액셀 밟은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할 일은 진환이 형의 컨디션 증강을 위해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액셀을 밟는 것이다. 더불어 형의 안광에 죽기 싫었다.

경이로운 수준으로 밟아 댄 덕에 여유 시간을 5분 더 확보했다. 은율 씨의 촬영장 근처에 주차하며 숨을 고르자, 진환이 형이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뿌듯하다.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서 밴에서 내린 진환이 형은 은율 씨에게 전화하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시간은 철저하니만큼 알아서 제때 돌아올 거라 생각하며 지금까지 긴장하고 있던 몸을 늘어뜨렸다.

정확히 15분 후, 진환이 형이 돌아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약간 상기된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렇게 좋을까, 부럽게.

의욕이 가득한 진환이 형을 룸 미러로 힐끔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보충 제대로 하셨나 봐요.”

“그럼. 손만 잡아도 충전되는걸.”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손만 잡진 않았을 것 같지만 말이다.

“끝나는 대로 집으로 오겠대. 율이를 빈집에서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 빨리 끝내고 미리 가 있자.”

진환이 형의 말을 들으며 확신했다. 다음 촬영부터는 살벌하겠네.

아니나 다를까, NG 한 번에도 눈에 불을 켠다. 진환이 형이 NG를 낼 일은 어지간해선 있을 수가 없지만, 상대 여배우나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의 사정은 달랐다. 형의 살벌한 눈빛 때문인지, 이후 바짝 긴장한 배우들이 NG를 내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게 보였다.

덕분에 촬영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마지막 스케줄은 인터뷰였는데,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리허설 없이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리허설이 필요 없을 만하다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척척 대답하는 진환이 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찌나 각이 잡혀 있는지 리포터가 섣불리 애드리브도 못 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진환이 형이 한 일은 내게서 자신의 휴대폰을 뺏어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마침 인터뷰 도중에 은율 씨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진환이 형은 다급하게 날 끌어 운전석에 밀어 넣고는 빠른 출발을 요구했다. 아무래도 은율 씨 쪽 촬영이 끝난 모양이다.

이번에도 역시 아슬아슬 딱지 끊지 않을 정도로 밟아서 진환이 형의 집 앞에 도착했다.

밴 운전 대회가 있다면 내가 무조건 1등 먹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이 덩치 큰 밴으로 딱지 안 떼고 빠르게 이리저리 달릴 수 있을까 계산하는 건 아마 날 따라올 자가 없을 거다.

밴에서 진환이 형이 내리자마자 저 멀리 골목 끝에서 차가 한 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율 씨의 밴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진환이 형은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은율 씨의 밴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형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진다.

“형, 지금 온 거예요?”

밴에서 내린 은율 씨가 곧장 진환이 형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운전석에 있는 날 알아본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솔직히 지선이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예쁘다. 그래, 아주 조금…….

가슴이 쿡쿡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은율 씨에게 마주 웃어 주고는 저쪽 밴의 운전석에 타고 있는 승주 씨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 역시 따라서 인사를 건네더니 반가운 듯 손까지 흔들어 준다. 보면 볼수록 친근감 드는 매니저님이란 말이지.

“오늘 수고했다, 연우야.”

“예, 들어가세요, 형. 수고하셨어요.”

가볍게 인사를 나눈 진환이 형이 은율 씨를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렴풋이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웃으며 밴을 몰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진환이 형의 일과는 어찌 보면 뻔하디뻔하다. 하루 내내 오로지 은율 씨와 연기만 생각하는 게 빤히 보였다. 은율 씨에게 안부를 물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촬영 도중에도 시간만 있으면 그에게 연락을 남기느라 정신이 없다.

어쩌다 시간이 맞아서 전화를 하거나 잠깐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면 컨디션이 확 좋아진다. 그러다 스케줄이 끝나면 다정함을 응축해 만든 것 같은 목소리로 오늘 하루 어땠는지를 나누거나 이렇듯 만나서 함께 집에 들어가곤 한다.

그리고 난 그런 하루하루가 깨지지 않도록 지켜보고 서포트 해야 한다. 서은율이라는 활력소를 얻은 이진환이라는 톱 배우의 하루를 말이다.

아마 내일도 똑같은 일과가 계속되리라 장담하며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난 언제 저렇게 매일 붙어 있어 보냐.

왜인지 눈가가 시큰해진다.

지선아, 오빠 외로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