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Quick (33/33)

외전 3. Quick

빵빵-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에 맞춰 승주의 속은 점점 타들어 갔다.

촬영지 이동을 위해 불가피하게 올림픽대로에 올랐건만 하필 저 멀리에서 사고가 크게 터졌다. 요란한 추돌사고의 여파로 그나마 한가하던 대로 위에 금세 차가 꽉 들어찼다. 옴짝달싹 못 하고 차들 사이에 갇혀 버린 판국에도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흘러갔다.

여유롭게 출발했음에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저 앞이 뚫리려면 한참 걸릴 것 같은데 그렇다고 대로 한복판에서 구할 수 있는 다른 교통수단이 있을 리도 없다.

다른 스케줄도 늦으면 안 되는 게 당연했지만, 이번은 특히나 더 중요했다. K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칼바노아 알리예프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기대주 서은율의 합동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K엔터 대표는 이미 인터뷰 장소에 거의 다다랐을 거다.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새까만 신인 배우가 늦는 바람에 소속사 대표가 함께하는 인터뷰까지 지연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어두운 낯으로 시계를 자꾸 확인하던 승주가 룸 미러로 힐끔 은율을 보았다. 그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인지 휴대폰을 수시로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중간중간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진환 씨인가.’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은율이 연락하는 상대는 다른 사람이었다.

은율이 화색을 띠며 룸 미러를 통해 승주를 바라보았다.

“승주 씨, 대표님이 사람 보냈다고 하십니다.”

“예? 사람이요?”

갑자기 무슨 사람을 보낸다고? 그것도 올림픽대로 한복판에?

안전벨트를 풀고 겉옷을 챙겨 입는 은율을 보며 승주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사람을 보낸다고 해도 이렇게 꽉 막힌 곳에서 뭘 어떻게…….”

“믿을 만한 퀵서비스 기사 한 분 보내셨대요. 그분 오토바이 타고 이동하겠습니다.”

“예?!”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표와 문자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퀵서비스 기사? 오토바이? 승주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은율 씨. 오토바이라니,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렇다고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죠. 중요한 인터뷰이고 이거 다음에도 스케줄 있어서 절대 딜레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건 나르고 배송하는 그런 퀵서비스 기사의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고? 승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던 찰나, 밖에서 누군가 밴 창문을 똑똑 노크했다. 은율이 밴의 창문을 열자, 오토바이를 탄 채 검은 헬멧을 쓴 남자가 보였다. 그가 선팅 된 헬멧 실드를 올리며 은율을 바라보았다.

“여기 뚫고 가셔야 하는 분이죠?”

담담하게 묻는다. 승주와 은율은 생각보다 젊은 남자의 눈매와 미성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퀵서비스 기사라기에 적어도 30대는 될 줄 알았는데.

“얘기 들으셨겠지만 그쪽 대표님이 보내셨어요. 얼른 가죠.”

‘배송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봤음에도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창문으로 헬멧을 넣어 주었다. 은율은 그 헬멧을 받아 쓰며 승주를 돌아보았다.

“승주 씨,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정말 가려고요?”

“물론이죠. 이따 봐요.”

가볍게 대답하며 밴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퀵서비스 기사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늘씬한 몸매에, 검은 라이더 재킷과 검은 무광 가죽 바지를 입은 그는 퀵서비스 기사라기보다는 오토바이 모델에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얼굴 중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스크린 속의 눈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준수한 외모의 젊은 청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런 사람이 왜 퀵서비스 일이나 하고 있는지 심히 의문이 들 때, 은율이 차에서 내려서며 문을 닫았다. 더 말려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당황하는 사이, 은율을 뒤에 태운 오토바이가 벌써 시원한 배기음을 내며 달려 나갔다.

꽉 들어찬 차들 사이를 파고들어 빠르게 달려 나가는 오토바이를 눈에 담은 승주가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얼른 정신을 차려 K엔터 대표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금방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지금 은율 씨가 웬 오토바이를 타고……!”

-진정해, 승주 씨.

목소리를 듣자마자 흥분한 걸 알아챈 칼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승주는 좀처럼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판 알지도 못하는 퀵서비스 기사의 오토바이에 은율 씨를 태울 수가 있습니까?!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진정하라니까.

칼의 목소리가 훅 가라앉은 다음에야 승주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답지 않게 과하게 흥분하긴 했으나 칼도 그의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 실력도 좋고 입도 무거워.

“그래도 대표님…….”

-아니면 승주 씨가 생각하기에 은율이가 제때 여기 올 방법이라도 있나?

“…….”

-난 단 한 번도 늦은 적 없다는 은율이의 성실한 이미지에 금이 가게 하고 싶지 않아. 이 바닥에서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지?

할 말이 없다. 은율이 원래 성실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신 역시 그의 매니저로 들어갈 때 칼에게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들었다. 은율의 성실한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스케줄은 반드시 여유 시간을 두고 잡을 것, 그리고 어떤 스케줄이든 천재지변에 휘말린 게 아닌 이상 절대 늦지 말 것.

오늘 같은 일도 천재지변에 속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칼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쪽에 기자들도 있으니 은율이의 성실함을 더 어필할 기회야.

“예? 어필이라뇨?”

-그쪽에 난 사고 때문에 올림픽대로의 정체가 길어지고 있다는 건 이미 뉴스까지 떴어. 그 상황에 정체 구간에 갇힌 배우가 스케줄 맞추려고 퀵서비스 기사 오토바이까지 얻어 탔다는 게 알려지면 어떨 것 같아?

그제야 칼의 말이 이해가 갔다. 요컨대 이 상황을 이용해 은율의 ‘성실맨’ 이미지를 부각하겠다는 거다.

역시 급성장 중인 거대 엔터테인먼트 대표라고 해야 할까. 상황을 쓸모 있게 이용할 줄 안다.

-그러니 승주 씨는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와. 은율이 도착하면 연락 넣을 테니까.

“하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래도 역시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대표가 어떻게 그 퀵서비스 기사를 믿는 건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한들 사고가 안 날 거란 보장도 없다. 부디 은율이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무사히 인터뷰 장소에 도착하길 바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속도 좀 높여도 돼요?”

“물론입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며 퀵서비스 기사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은율 역시 허리둘레가 얇은 편에 속하지만 어째 이 퀵서비스 기사 쪽이 더 얇은 것 같다.

은율의 허락이 떨어지자 퀵서비스 기사가 더욱 속력을 높였다. 빼곡한 차들 사이를 빠르게 누비는 오토바이 주행은 묘기에 가까웠다. 차에 탄 이들이 모두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를 주목할 정도였다. 꽉 막힌 대로를 평평한 도로 달리듯 나아가는 오토바이의 존재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은율은 젊은 퀵서비스 기사의 운전 실력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스턴트맨 일을 할 때 오토바이 타는 법뿐만 아니라 바이크 액션까지 배웠던 은율로서는 지금 이 순간이 그 당시의 액션을 재현하는 것만 같아서 신기했다. 고작 몇 cm 여분만 두고 차들 사이를 뚫고 나가면서 가속도까지 붙이고 있다. 자칫 각 차의 사이드 미러에 부딪힐 수 있음에도 그는 그것마저 미리 계산하고 달리는 것처럼 깔끔하면서 아슬아슬한 주행을 펼치고 있었다.

과연 칼이 믿고 보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대로를 빠져나와 도로에 접어들었다. 퀵서비스 기사가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선팅 된 실드 너머로 그와 은율의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요? 제가 너무 막 달린 거 같은데.”

퀵서비스 기사의 말에 은율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일찍 도착하겠네요.”

신호에 걸려 잠시 오토바이를 세운 퀵서비스 기사는 내심 궁금했는지 질문을 던져 왔다.

“근데 연예인들은 다들 그래요?”

“뭐가 말입니까?”

“차 막히면 스케줄 맞추려고 대로 한복판에서 오토바이 올라타고 그러나 해서요.”

거침없는 말에 은율이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 버렸다. 퀵서비스 기사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얼른 덧붙였다.

“아, 그냥 대단해서 그런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스케줄도 약속이니까 되도록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되물었다.

“그건 퀵서비스 기사님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예에, 뭐…….”

“그런 점에서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타인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도와주기 위해 택배보다 더 빠른 운송 수단이 되어 주시는 거잖아요. 덕분에 저도 스케줄에 늦지 않을 것 같고요.”

퀵서비스 기사가 어깨를 흠칫하며 은율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 잘해요?”

“오글거렸나요? 진심인데.”

실드 너머로도 전해지는 순순한 눈빛에, 퀵서비스 기사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뭐, 칭찬은 칭찬이니 감사히 받죠.”

한층 편안해진 목소리를 낸 퀵서비스 기사가 헬멧 속에서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  *  *

안전 운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단 한 번의 사고나 마찰 없이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퀵서비스 기사가 입구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제야 내려선 은율이 헬멧을 벗어 들었다. 약간 눌린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그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토바이에 앉은 채 헬멧을 받아 뒷자리에 매어 둔 퀵서비스 기사가 소매를 걷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명품에 관심 없는 은율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상당히 고가의 손목시계였다.

“예상 시간보다 빠르긴 했네요. 쉬시다가 촬영 들어가시면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업체명이나 기사님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나중에 퀵서비스 이용할 일이 있으면 꼭 기사님께 부탁드리고 싶네요.”

단순한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오토바이 운전 실력도 발군이고 칼이 직접 보낼 정도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더불어 왜인지 친근한 느낌까지 들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퀵서비스 기사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 멈칫하며 손을 멈췄다.

“아, 번호 따면 안 되는 거죠? 그냥 제 개인 번호 알려 드릴게요. 필요하시면 그쪽으로 연락 주세요. 업체로 연락하시면 저 지정하셔도 아마 싸이코 하나가 훼방 놓을 거라서.”

“싸이코요?”

“뭐, VIP긴 한데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요.”

고개를 갸웃하던 은율이 웃는 낯으로 그에게 제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연락처에 제 번호를 찍기만 하고 돌려주니, 은율이 번호를 저장하며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지윤성이요.”

“지윤성 기사님…….”

이름을 저장하기 위해 키패드를 누르자 윤성이 한숨처럼 당부했다.

“죄송한데 기사님이라는 호칭은 빼 주세요. 뭔가 민망하네요.”

“그럼 윤성 씨라고 부를게요.”

은율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윤성의 휴대폰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에 휴대폰을 들여다본 그가 피식 웃었다.

처음 보는 번호로 도착한 메시지에는 [안녕하세요, 서은율입니다. 저장해주세요 윤성 씨^ㅡ^]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은율의 예상치 못한 귀여움에 윤성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윤성 씨에게는 번호 드려도 될 것 같아요. 혹시라도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으시면 어떻게 해요.”

“신기하네요. 살면서 연예인 번호를 다 따 보네.”

“제가 윤성 씨 번호를 딴 거죠.”

넉살 좋게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곧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인터뷰 장소인 촬영 스튜디오 건물 안에 들어간 은율은 칼과 만나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아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2층 계단에 나타난 칼이 밝은 얼굴로 한달음에 다가왔다.

“오느라 고생했어. 다친 데는 없고?”

칼이 눈으로 은율을 훑는 동안 니콜라이가 뒤따라와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에게 마주 인사한 은율이 자신을 끌어안는 칼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예, 윤성 씨 덕분에 빠르고 안전하게 왔어요.”

“다행이네.”

안고 있던 몸을 뗀 칼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2층으로 은율을 끌어 안내했다.

“사업차 안면 있던 대표님 통해서 알았는데 윤성 씨가 착하고 일도 잘해. 사려 깊어서 일정 선은 지키려 들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가끔 그 대표가 심할 정도로 집착해서 문제긴 하지만.”

은율은 퀵서비스 기사에게 기업 대표가 집착할 게 있을까 싶긴 했지만 굳이 깊이 묻진 않았다.

곧 두 사람은 리포터와 인사를 나누고서 인터뷰 준비에 들어갔다.

*  *  *

인터뷰를 포함해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나자 어느덧 자정이 훌쩍 넘어 버렸다. 조금 피곤한 얼굴로 집에 가는 동안 밴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은율은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음, 여보세요.”

-미안, 깨웠나 보다.

조금 소란스러운 건너편에서 진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에 은율이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데 형은 어디예요?”

-뒤풀이. 오늘이 종방 날이거든.

“아, 맞다……. 미안해요, 오늘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요.”

은율이 미안할 일은 아니었지만, 진환은 그의 스케줄을 대부분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다 보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아냐, 괜찮아. 정신없을 만했던데, 뭐.

왜인지 목소리에 투덜거림이 섞여 있다. 스케줄 자체는 딱히 특별하달 게 없어서, 승주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낮에 시간 맞추느라 고생했겠더라. 근데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아니야.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뒤풀이 좀 늦게까지 할 것 같아. 다 끝나고 집에 가서 연락할게.

“예? 예…….”

뭔가 석연치 않게 통화가 끝났다. 은율은 진환이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묵묵히 운전 중이던 승주가 룸 미러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방금 통화, 이진환 씨죠? 무슨 일 있었어요?”

“뒤풀이 중이라는데 형이 좀 이상하네요. 기분도 처져 있는 거 같고…….”

곰곰이 생각하던 은율이 룸 미러로 승주와 시선을 맞대며 물었다.

“혹시 진환이 형한테 낮에 있었던 일 전해 줄 때 별말 없었어요?”

“오늘은 이진환 씨 측과 연락 나눈 적 없는데요.”

“예? 형은 그 일 알고 있던데…….”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면 진환은 어떻게 낮에 있었던 일을 아는 걸까?

“아, SNS로 보신 거 아닐까요?”

승주의 말에 은율이 흠칫했다. 휴대폰으로 얼른 인터넷 창을 띄우고서 제 이름을 검색해 본 은율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SNS에 꽤 많은 게시글과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올림픽대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라든지 도로에서 찍힌 것도 있었고, 인터뷰 장소 입구에 서 있는 둘의 사진도 있었다.

그중 꽤 가까운 거리에서 찍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얼굴을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자신과 오토바이 위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윤성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사진과 함께 적힌 내용을 보며 은율은 이걸 진환이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길가다가 서은율 봄!!! 나중에 알았는데 여기서 인터뷰 있었대! 올림픽대로 사고 때문에 이때 엄청 막혔다고 하더니 스케줄 맞추려고 친구 오토바이 얻어타고 왔나 봄~ 둘이 ㅈㄴ 친해 보임 서은율 실물깡패ㅇㅈ! 친구도 존섹이네ㅋㅋ 허리랑 뒤태 봐라ㅋㅋ」

┖ 이거 친구 아니라 퀵서비스 기사라던데? 퀵서비스 기사가 사람까지 배달해주는 건 몰랐음ㅋㅋ 그렇게 해서라도 스케줄 맞춘 서은율 레알 대단쓰~

┖ 뭐야 이진환 ㅇㄷ? 서은율이 외간남자 허리 붙들고 오토바이타게 냅둬도 되는 거임? 배신 아니냐?

┖ 저 정도면 난 인정해줌. 오토바이맨 얼굴 보고 싶은데 사진 더 없음?

┖┖ ㅇㅇ 아직까지 도는 사진 중에는 얼굴 깐 거 없음. 아쉽.

SNS에 뜬 게시물과 그 아래 연이어 달린 대화를 보며 은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도치 않게 윤성의 사진까지 돌게 되었으니 사과를 해야겠지만, 진환도 문제였다. 이런 게시글을 봤다면 그 역시 오해를 하거나 기분이 나빴을 수 있겠다 싶었다.

먼저 윤성에게 메시지로 정중히 사과하자 곧바로 신경 쓰지 말라는 답장이 왔다. 그 역시 SNS에 떠도는 사진과 게시글을 본 건지, 얼굴이 노출된 것도 아니어서 괜찮다는 말을 한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은 장문을 적어 보낸 은율이 이번엔 진환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뒤풀이 중이라고 하니 전화가 방해되진 않을까.

메시지를 보내 통화가 가능한지를 먼저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한창 뒤풀이 중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윤성과의 일을 상세히 풀어 적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 변명 같기도 해서 모두 지우고는, 고심 끝에 ‘퀵서비스 기사님 덕분에 스케줄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정도로만 적어 넣었다.

한동안 답장을 기다리며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지만 오피스텔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도 연락은 없었다. 이런 적이 워낙 드문지라 점점 초조해졌다. 올림픽대로가 막혀서 인터뷰 장소에 제때 도착할 수 없을지 모르던 때보다 지금이 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진환이 윤성과 자신을 오해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서로 질투는 하되 오해는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기분이라는 건 그것과 별개일 수밖에 없다. 사정을 알기에 대놓고 투덜댈 수도 없는 답답함도 알 만하다. 자신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런 심정이었을 것 같다.

은율이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승주는 그를 내려 주기 위해 오피스텔의 지하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승주 씨, 잠깐만요.”

은율의 말에 승주가 속도를 줄이며 룸 미러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율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정말 미안한데 차 돌려서 진환이 형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지금요?”

“어차피 내일 스케줄은 저녁때부터니까 그때까진 진환이 형 집에 있을게요.”

“상관은 없는데…… 이진환 씨 지금 뒤풀이 중 아니에요? 한참 뒤에나 돌아오지 않을까요?”

“상관없어요.”

은율이 씁쓸히 웃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못 잘 것 같아요.”

*  *  *

그날 밤, 진환은 상당히 늦은 귀가를 했다. 해가 뜰락 말락 할 무렵에 집에 도착한 진환은 비틀거리며 대문을 지났다. 커다랗기만 하고 썰렁한 집을 향해 걸어가며 깊이 숨을 내쉬니 새벽 공기 사이로 진한 술 냄새가 퍼졌다.

‘얼마나 마셨더라.’

최근 몇 년간 오늘처럼 뒤풀이 자리에서 달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덕분에 잘 취하지 않는데도 오늘은 정신이 몽롱하다.

노곤한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은율의 모습이 선명했다. 검은 옷의 퀵서비스 기사를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으며 대화하던 얼굴이 너무 또렷해서 미치겠다. 연우가 SNS에 뜬 사진과 오늘의 일화를 알려 주며 은율에 대한 칭찬을 줄줄 읊어 댔지만 보이는 건 오로지 은율의 웃는 얼굴뿐이었다.

상대는 헬멧을 쓰고 있음에도 늘씬한 몸을 가진 젊은 남자였는데, 퀵서비스 기사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고가의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질투는 하되 오해는 하지 말자 했다.

그래, 그 말대로 오해는 하지 않을 거다. 은율을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불시에 훅 들어오는 질투심은 쉽사리 자제되질 않았다. SNS에서 버젓이 제 이름을 거론하며 베스트 커플이 이렇게 바람 피워도 되냐는 둥, 이진환은 어디서 뭘 하고 있냐는 둥 장난식 게시글이 속속 떠오르다 보니 진환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장난인 게 분명하지만 어째 둘 사이를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애같이 굴지 말자. 안 그래도 은율이 요즘 바쁜데 나까지 신경 쓰게 하면 안 되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터덜거리며 들어간 진환은 신발을 건성으로 벗어두고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응?”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보았다. 방금 벗은 제 구두만 있어야 할 곳에 낯익은 타인의 신발이 놓여 있다. 그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챈 진환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침실에 도착한 진환은 제 침대에 누워 있는 은율을 보며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여튼 착해…….’

자신을 달래 주기 위함이 분명한 행동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러면 서운함이든 질투심이든 다 사라져 버리잖아. 영악하기는.

곤히 잠든 은율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내려다보던 진환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리 나지 않게 주의하며 술에 찌든 옷을 모두 벗어 낸 진환은 속옷만 입은 채로 느릿하게 은율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음…….”

은율이 작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돌아 누우려는 그를 조심스레 잡아당겨 제 품으로 향하게 하자 온기를 찾는 것처럼 알아서 파고들어 왔다. 몸을 휘감은 은율의 살결을 느끼며 그의 머리에 몇 번 입을 맞추자 간지러운지 배시시 웃으며 볼을 비벼 댄다. 그 귀여움에 아래가 불끈했지만, 차마 잠든 은율을 덮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눈을 꾹 감으며 잠을 청했다.

진환의 머릿속에서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낮의 일은 어느덧 모두 잊혀 가고 있었다.

진환이 눈을 뜬 건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눈을 뜬 진환은 비어 있는 제 옆자리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침대 주변에 허물 벗듯 대충 던져 뒀던 옷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훑던 진환은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방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웬 좋은 냄새가 났다. 그게 주방에서 난다는 걸 깨달은 진환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빠르게 발을 내뻗었다.

“일어났어요?”

주방에 선 은율을 본 진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편한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채 있는 줄도 몰랐던 앞치마를 챙겨 입은 은율은 국자를 한 손에 든 채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명백히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씻고 와요. 같이 밥 먹어요.”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심장을 퍽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혼을 연상케 하는 은율의 모습에 진환은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진환이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기왕이면 앞치마만 입어 주지…….”

“네? 뭐라고 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기특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부드럽게 웃어 보인 진환은 굉장한 스피드로 샤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은율이 직접 요리를 해 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준비를 끝낸 채 주방으로 가자 어느새 식탁 위엔 갖가지 반찬과 따뜻한 밥, 그리고 직접 끓인 게 분명한 콩나물국이 있었다.

사료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식탁에 얌전히 앉아 있던 진환은 눈앞에 차려진 화려한 밥상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건 어떻게 준비했어? 집에 재료도 없었을 텐데.”

“여기 앞 사거리 쪽에 24시간 마트가 있잖아요. 거기서 사 와서 준비했죠. 아, 반찬은 사 온 거예요. 밥이랑 콩나물국 하는 것도 버거워서…….”

그렇게 말하며 어째 자꾸만 눈치를 본다. 그런 은율의 얼굴을 살피던 진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뭐가 이상해?”

“음, 그게…….”

은율이 머뭇거렸다. 그가 멋쩍은 얼굴을 하며 볼을 긁적였다.

“사실 요리를 정말…… 못 해요. 그래서 좀 걱정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냄새만 맡아 봐도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어 보인다. 예전에도 요리를 못 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현재까지는 그게 모두 거짓말이 아닐까 할 정도로 겉보기엔 합격점이다.

“맛있겠는데, 뭐. 잘 먹겠습니다.”

진환이 호기롭게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숟가락 펐다.

질척.

숟가락에 의해 가득 떠진 밥알들이 끈적하게 늘어져 툭 떨어지더니 반 정도가 밥그릇에 담겼다. 잠시 흠칫하던 진환은 힐끗 은율을 보더니, 애써 웃어 보이며 밥을 단번에 입에 머금었다.

분명 죽은 아닌 것 같은데 씹을 때마다 질게 퍼져서 알아서 꿀떡 넘어갔다.

이야, 우리 율이, 형이 급하게 먹어서 체할까 봐 소화하기 쉽게 만들어 줬구나. 역시 배려심이 깊어.

진환은 연기의 황제답게 굉장히 맛있는 밥을 먹는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며 콩나물국으로 숟가락을 뻗었다. 일단 국물이 들어가면 쓸려 내려가듯 목구멍을 타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읍……!’

따뜻한 국물을 입에 머금자마자 자칫 정색할 뻔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입 안에 국물을 밀어 넣고 나서야 콩나물 특유의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더불어 소금으로 간을 한 것 같긴 한데 심심한 수준을 넘어서 거의 무(無)맛에 가까웠다.

은율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굉장히 맛있는 척 또 한 번 연기했다. 그러자 은율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다.

“형이 맛있게 먹어 주니까 너무 좋네요. 이 맛에 다들 요리하는 건가 봐요.”

그래,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식감과 맛이 무슨 필요야.

진환은 은율의 얼굴을 보며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낮부터 저렇게 웃어 주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진환을 따라 숟가락을 들던 은율이 문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는 미안해요.”

“응?”

입 안에 있던 밥을 겨우 씹어 넘긴 진환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사진이 도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형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아는데, 정말 별일 없었어요.”

“대표님이 보낸 믿을 만한 퀵서비스 기사라며. 스케줄 맞추려고 했을 뿐이라는 거 알아.”

사실은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질투가 휘몰아쳤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았던 척했다. 게다가 은율이 불시에 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질투가 사그라져서 민망할 정도였다.

“형은 정말 대단하네요. 나였으면 엄청 질투했을 것 같아요.”

SNS에서 어떤 게시글이 도는지 봤던 은율 입장에서는 진환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자신이었다면 하루 종일 신경 쓰면서 끙끙댔을 것 같다.

은율의 말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질투했을 거라는 말이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질투했지. 그래도 우리 율이를 믿으니까 질투도 금방 사라지더라.”

질투에 사무쳐 술을 몇 병이나 들이켠 주제에 짐짓 어른스럽게 말했다. 은율이 눈을 반짝이며 웃어 준다.

“오늘은 저녁 촬영이었지? 나도 그러니까 같이 푹 쉬다가 나가자.”

“그럴게요. 아, 혹시 형만 괜찮으면 오늘 밤에 촬영하는 부분을 좀 봐 줄 수 있어요? 대사가 입에 붙질 않아서 같이 리딩 해 줬으면 좋겠는데…….”

“당연히 되지. 대본은 있어?”

“네, 있……. 앗!”

은율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밤에 있을 촬영의 대본이 하필 오피스텔 집에 있는 상태였다. 진환과 대본 리딩을 해 보기 위해선 대본이 필수였기에 어떻게 할까 하다가 눈을 번뜩이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집에 하진이가 있으니까 대본 좀 준비해 달라고 해야겠어요.”

“서하진한테 가져다 달라고 하게?”

“아뇨, 가지러 갈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고요.”

다른 사람이라는 말에 진환은 승주를 말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율이 전화를 건 인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윤성 씨. 혹시 지금 퀵서비스 돼요?”

“……어째서 서로 번호까지 있는 거야?”

진환의 얼굴이 보란 듯이 일그러졌다.

그날 진환은 은율에게 대본을 가져다주던 젊은 퀵서비스 기사를 떠올리며 또다시 질투의 늪에 빠져들었다.

-스턴트 2부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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