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하울링
Silent Howling
1권
1. 번영한 도시
“빨리, 그냥…… 죽여 주세요.”
탄은 우고를 바라본다. 기괴한 각도로 꺾인 우고의 팔다리. 우고는 회색빛 흙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온몸을 비틀며 경련하고 있다.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쏟아진다.
“제발, 대장…….”
우고가 경련하는 손으로 탄의 어깨를 붙들었다. 우스울 정도로 미약한 힘이다. 금세 손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탄은 사납게 쏘아붙였지만, 이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과폭주다. 더는 가이딩이 통하지 않는 상태.
우고는 신입 에스퍼였다. 탄이 대장을 맡은 경비대 3대대 소속 156기 대원.
나이는 열여덟. 마음이 약해서 전투 때 유난히 굼뜨곤 했다. 평범하고도 죄 없는 소년. 그저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던 아이.
“대장. 저 아파, 너무, 아파요…….”
생명력을 빼앗긴 대지는 건조하고 하늘은 메스꺼운 보라색이다. 우고가 쏟아 낸 핏물 때문에 공기의 냄새는 비릿하다.
탄은 턱을 바르르 떨며 계속해서 가이딩을 시도했다. S급 가이드가 온 힘을 쏟아붓는데도 우고의 경련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미 끝이다. 내심으로는 알고 있다. 왜 이렇게 됐지? 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우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잘못인가? 내가 뭔가를 놓쳤나?
과폭주에 다다르기 전에 전조 증상이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모든 건 갑자기 시작되었다. 2인 1조로 성 밖을 순찰하던 도중, 우고가 쓰러졌다. 곧 광폭한 뮤턴트처럼 울부짖으며 온몸을 비틀어 댔다.
우고의 경련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엄청난 고통이 그의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죽음이 안식처럼 느껴질 만한 고통이.
“으, 아…….”
우고가 비뚜름하게 뒤틀린 입술을 애처롭게 달싹였다. 이제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
탄은 바짝 다가가 우고가 내뱉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혀까지 꼬였는지 발음은 어눌했고 숨은 거칠었다. 그래도 우고는 어떻게든 말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탄은 들었다.
계속해서, 미동 없이, 들었다. 온몸이 정지된 채 눈가 주위만 붉게 달아올랐다.
이건 우고의 유언이다. 우고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으려는 진실이다.
“……알겠어.”
탄의 자그마한 속삭임에 우고의 눈빛이 더욱 진해졌다. 생명이 꺼져 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눈빛만은 여느 때보다 생생하게 타올랐다.
탄은 실핏줄이 터진 우고의 눈에서 처절함을 읽었다. 그가 아끼던 부하이자 동생이다. 그토록 순하던 얼굴이 이런 표정을, 처절하고 울분에 차 있고 죽음으로도 막지 못할 염원에 시달리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영영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윽고 우고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탄은 떨리는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덮으며 속삭였다.
“그래, 그래. 알겠어. 이제 괜찮아…….”
끄, 으윽. 끅. 우고가 희미하게 신음했다.
“괜찮아. 내가 할게, 내가 할 테니까…….”
탄의 속삭임에 차츰 우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애써 부릅뜨고 있던 눈가가 파들거리면서 닫혔다. 축축한 물기가 속눈썹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와 탄의 살갗을 적셨다.
탄은 입술을 짓씹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멈출 길이 없는 고통에서 우고를 해방해 줄 때였다.
실패에는 책임이 따른다. 대장으로서 대원을 지켰어야 하는 책무. 가이드로서 에스퍼를 진정시켰어야 하는 의무. 모두 실패했다. 탄은 우고의 죽음을 짊어지고 갈 작정이다.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재빠르게 끝내야 한다. 다른 대원들이 오기 전에.
탄은 우고의 몸을 붙잡고 손을 휘둘렀다. 잘 벼려진 나이프가 정확히 우고의 목 빗근 위, 경동맥이 흐르는 부위를 찔렀다. 순식간에 칼날은 살갗을 파고들어 경동맥을 끊어 냈다.
얼마 후, 기괴하게 꺾여 있던 우고의 팔다리가 완전히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빠르고 정확한 살인. 피가 많이 튀지도 않았다. 탄은 피 묻은 나이프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탄이 살인을 한 건 처음이 아니다.
탄은 울지 않는다. 울지 않으려 한다.
다른 방향으로 순찰을 나갔던 대원들이 하나둘씩 돌아오면, 엄청난 소란이 일 것이다. 경비대에서 죽음은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으니.
적어도 요즘 시대에는 그렇다. 무료하고 평화로운 시기. 모든 것이 안정된 듯한 시기.
종말에서 살아남은 신인류가 뭉쳐 마지막 도시를 세웠고 문명을 재건했다. 다시금 인류 번영의 빛줄기 한 자락이 보이려 한다. 예전에 비하면 그 빛이란 게 턱없이 희미할지라도.
씨발, 평화의 시대는 무슨.
하지만 탄은 애초에 평화라는 수식어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우고의 유언을 들은 지금.
이제는 무척이나 기괴하다고 생각한다.
* * *
“직급은 대대장. S급 가이드. 이름은 탄. 나이 36세. 맞습니까?”
“예.”
탄은 시티 홀에서 나온 조사관과 마주 앉았다. 탄의 미끈한 얼굴에서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민간인을 살해했던 전적이 있군요. 당시 30대 중반의 남성이었고요.”
“거, 자료 보면 다 적혀 있는데. 안 읽고 오셨습니까? 왜 다시 읊어 주지? 모두 적힌 대로입니다.”
조사관은 탄의 거들먹거리는 말투에도 일말의 동요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데다 캐슬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점이 참작되어, 처벌을 거의 받지 않고 넘어갔네요. 아니, 사건을 의도적으로 묻었다고 봐야 하겠군요.”
“누가 묻어 달라고 했나? 시티 홀이 알아서 해 주던데.”
조사관은 협조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탄을 앞에 두고도 준비해 온 질문을 성실하게 던졌다.
“원래부터 자주 살인 충동을 느꼈습니까?”
“아니요.”
“평소에 분노를 조절하기 힘들다거나 현재 시스템에 반발심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뭐, 그건 몇 번.”
“우고를 살해한 당시, 대원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2인 1조로 순찰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일부러 이때를 노린 겁니까? 계획된 살인이었습니까?”
“글쎄요.”
“우고는 왜 죽였습니까.”
“그 자식이 먼저 나에게 덤볐다니까. 정당 방어였습니다.”
“피해자가 당신한테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난들 압니까. 평소에 내가 너무 굴려서 앙심을 품었나? 갑자기 흥분하면서 가이딩을 거부하고 달려드는데. 가이드인 내가 뭐 어쩌란 말입니까. 나도 살아야지.”
“가이딩을 거부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고작 C급 에스퍼가 S급의 가이딩을 뿌리칠 수 있다고요?”
“그러게요. 안 되는 줄 알았는데 되더라고. 내 생각엔 내가 슬슬 가이딩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오래 했잖아요. 은퇴 시기가 남들보다 좀 빠르게 오려나?”
탄은 유들유들하게 받아쳤다. 여유로운 어조는 얼핏 들으면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조사관은 한숨을 쉬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죠. 5년 넘게 경비대에서 아무런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거.”
“그렇겠지요. 평화의 시대니까요.”
“시장님께서는 이 사건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현 시국에 좋지 않습니다.”
“예에.”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굴면 당신한테 불리해지기만 할 거고요.”
“걱정해 주는 건가? 다정도 해라.”
“……조서 작성 계속하겠습니다.”
조사관은 몇십 분 더 의미 없는 입씨름만 하다가 나갔고, 탄은 곧장 격리실로 이동되었다.
탄은 격리실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혀로 입 안을 쓸었다.
죄다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네. 지저분하고 이리저리 헝클어진 앞머리부터 어떻게 좀 하고 싶다.
탄은 아침마다 제 새까만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겨 손질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는 객관적으로 미남이었고, 본인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살아가는 데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점이다. 그 이점을 최대한 가꾸고 유지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늘 각을 살려 입었던 경비대 근무복도 그립다. 시티 홀에서 대충 던져 준 티셔츠는 소재가 거칠고 색깔도 기분 나쁘게 우중충했다.
특수살인죄로 붙잡혀 들어온 지 이틀째. 끊임없이 거짓말을 반복하려니 슬슬 지치기도 했다.
탄은 허공으로 한숨을 쏘아 올리며 팔뚝으로 눈가를 가렸다. 시야를 까맣게 물들인 채, 이틀 전 비릿한 풍경을 곱씹었다.
우고. 바로 몇 분 전 일인 것처럼 또렷하다.
<라함…….>
우고는 죽어 가면서 그 이름을 읊었다. A급 에스퍼, 라함. 1년 전에 죽은 우고의 동기이자 그가 가장 아꼈던 친구였다.
형질 검사에서 에스퍼나 가이드로 판정받으면, 여덟 살에 전투 학교로 소집된다. 열여덟 살까지 혹독한 교육 과정을 겪은 후에는 경비대에 들어갈 수 있다. 캐슬의 경비대원은 명예와 부를 동시에 누렸다.
하지만 라함은 열여덟 살이 되기 직전에 자살했다. 창창한 앞길이 보장되어 있는 A급 에스퍼의 자살. 세간에 공개된다면 다들 의아해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갖가지 추측으로 입방아를 찧다 보면,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 나갈 것이다.
결국 사건은 시민들에게 발표되지 않고 조용히 묻혔다. 라함이 아직 경비대원이 아닌, 훈련생 위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라함의 출신지는 저 멀리 떨어진 하위 구역. 가족도 없었다.
라함의 죽음에 분개하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라고는 우고뿐이었다. 라함의 친구, 유약한 C급 에스퍼.
하지만 열여덟 살인 예비 경비대원의 말에는 널리 뻗어 나갈 힘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하고 스러졌다.
라함이란 이름이 빠르게 잊혀 가는 도중에, 우고는 경비대에 입단했다. 탄이 지휘하는 3대대 소속 대원으로.
늘 멍해 보이는 애. 탄이 우고를 보자마자 받은 첫인상은 그러했다. 우고는 전투 중에도 동료들의 발목을 붙잡기 일쑤였다.
신입이니 그럴 수 있다. 원래 신입 때는 다들 얼이 빠져 있는 법이다. 하지만 우고는 그런 신입과는 조금 달랐다.
눈이 죽어 있었다. 차라리 두려움에 젖어 있는 편이 낫다. 처음 뮤턴트를 상대할 땐 다들 겁을 먹기 마련이니.
그런데 우고의 눈빛에 담긴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체념, 증오, 끝없는 우울.
탄은 우고를 따로 불러 물었다.
<힘든 게 있으면 말을 해.>
<아니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처음에는 입을 꾹 다물던 애가, 몇 번 어르고 다그치니 차츰 울음과 함께 이런저런 말을 뱉어 냈다. 우고도 내심 기댈 곳을 늘 갈망했던 거다.
<자살일 리가 없어요. 절대 자살할 애가 아니거든요. 절대로…….>
탄은 그때 자신이 위로라고 건넨 말이 잘못되었나, 근 이틀간 수백 번 정도 생각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잊고 사는 게 현명해.>
사실은 탄이 자신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자기 대원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챙기는 탄이었지만, 우고에게는 유독 신경을 썼다. 증오와 우울로 가득 차 있던 그 눈동자가 몹시도 익숙했기에. 너무나 잘 아는 눈이다.
탄은 어느샌가 우고에게 자신을 겹쳐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붙잡고 있던, 어린 탄을.
미련하게 한참을 매달려야만, 그렇게 자신을 온통 조각내고 나서야만, 떠나보낼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탄이 이미 지독하게 겪어 본 과정이다.
우고는 자신처럼 조각나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탄은 그 애가 더 망가지지 않게끔 옆에 끼고 다녔다. 세심히 보살피고, 웃게 했다. 애정을 주었다. 어린 탄에게도 필요했지만, 그는 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고는 조금씩 밝아졌다. 눈에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훈련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탄은 모든 게 잘되어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우고는 그렇게 되찾은 의지력을 다른 데에 야금야금 쓰고 있었다. 남들 몰래 라함의 죽음을 끊임없이 조사하고 다녔던 거다.
이틀 전의 우고는 죽어 가며 말했다.
<라함…… 시티 홀, 시티 홀에서…….>
그 미련한 애가 기어코 뭔가를 알아냈던 모양이다. 알아내서는 안 되었던 것을.
<자살…… 아니에요……. 복수해야…….>
온몸이 찢기고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내뱉으려 했던 진실. 이것이 우고의 유언이었다.
복수라는 단어를 읊는 우고의 눈빛이 익숙했다. 어린 탄을 닮았다. 분노로 일렁이는 눈을 바라보며 탄은 생각했다.
너도 기어코 조각났구나. 내가 막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복수의 끝이라도 대신 맺어 줘야겠지.
탄은 신음 하나 내뱉지 못할 만큼 구강 구조가 뒤틀려 버린 우고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할게, 내가 할 테니까…….>
시티 홀. 우고는 분명히 시티 홀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마지막 도시, 캐슬 시티를 다스리는 곳.
시티 홀이 우고와 라함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면, 이제는 지도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탄이 시티 홀에서 나온 조사관에게 곧이곧대로 정황을 밝히지 않은 이유다.
백 년 동안 해 봐라. 내가 입을 여나. 이런 배짱으로 버텼다. 미심쩍기 그지없는 진술을 꾸며내며.
시티 홀 너희들이 아무리 답답하더라도, 어차피 당장은 날 어떻게 못 할 테니까. 뭐, 사형이라도 시킬 거야? 탄의 이러한 자신감은 꽤 합리적인 이유와 추론에 근거했다.
사형이나 추방형을 당했다고 치자. 라함의 죽음만으로도 난감한데, 사건이 이렇게 커지면 분명히 캐슬에 혼란이 일 것이다. 요즘 한껏 애를 써서 평화를 선전하는 시티 홀에서 그런 구설수를 원할 리 없다.
게다가 탄은 상위 구역 시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하나였다. S급은 흔하지 않았다. 어딜 가나 주목받았고, 그를 추앙하는 무리도 있었다. 처리하기에는 지나치게 관심을 많이 받는 인물이다.
물론 모든 관심이 탄에게서 떠난 다음에는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때까지는 목숨줄이 간당간당하게라도 붙어 있을 테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려면, 우고와 관련된 사건을 모른 척해야 했다.
기이하게 빨랐던 과폭주라든가, 라함의 자살이 꾸며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들.
탄은 연막을 치고 의뭉스럽게 굴었다. 제 목숨을 조금이라도 오래 지켜 내고, 그렇게 시간을 벌어, 시티 홀이 했던 짓을 밝혀내기 위해서.
시티 홀과 맞붙는 일은, 사실상 자살 행위다.
탄도 알고 있다. 우고의 몸에 칼을 꽂아 넣은 순간부터 각오했다. 피를 본 뒤로 삶은 비틀리게 되어 있다.
어차피 우고의 기이한 죽음을 목격한 이상, 피할 수도 없다. 시티 홀은 무언가를 알지도 모를, 찝찝한 목격자를 순순히 놔둘 곳이 아니다. 탄을 안전하게 제거할 기회만 온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상관없었다. 탄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캐슬의 지도층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이제는 마땅한 명분까지 생겼다.
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싸움판이 벌어졌지만, 그는 흔쾌히 그 위에 발을 딛고 섰다. 뒷걸음쳐 내려가진 않을 것이다.
여태껏 탄은 전투 중에 단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었다.
* * *
내 이럴 줄 알았지. 탄은 실실 웃으며 경비대 총감인 다이온을 바라보았다.
“63구역의 보안관으로 발령 날 거다.”
격리실에 갇히고 일주일 만에 탄은 자신의 처벌 수위를 전해 들었다. 역시나, 추방도 사형도 아니다. 경비대 직위 해제 후 좌천이나 다름없는 소속 변경.
어쨌든 지금은 목숨을 부지했으니 된 거다. 예상이 맞았다. 탄은 괜히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잘 붙어 있다. 단단하게.
개인 소지품을 돌려받고 다이온과 함께 시티 홀을 나서면서, 탄은 우고를 생각했다. 핏빛으로 물든 머릿속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여유로운 미소로 뒤덮여 있었다.
탄은 속내를 숨기는 데에 능숙했다. 더러운 거리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기술 중 하나였다.
다이온이 짧게 혀를 차며 탄에게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냐?”
“뭐, 봉급은 반 토막 나겠죠. 으음. 세 토막인가? 어쩌겠습니까. 야, 오랜만에 하늘 보니 좋네.”
탄은 시티 홀 밖으로 나와 고개를 살짝 꺾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몽롱한 보랏빛. 종말 이후 대기에 새로운 화학 작용이 연달아 터지면서, 하늘색의 정의가 달라졌다. 캐슬의 아이들은 하늘색이라 하면 보랏빛부터 떠올린다.
다이온이 탄에게 에너지바를 툭 건네며 말했다.
“1년 정도만 거기 처박혀 있다가 와. 그동안 직위 해제 상태니, 설치지 말고.”
“그러면 저 1년 동안은 시티 홀 소속인 거네요?”
“그런 셈이지.”
시티 홀은 캐슬을 지배한다. 공식적으로 국가 체제를 선언한 적은 없었지만, 돌아가는 꼴은 종말 이전 구인류의 전체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캐슬과 분리되어 독립된 권력으로 존재하는 곳이 경비대였다. 귀한 에스퍼와 가이드로 구성된 조직.
아직도 캐슬의 두꺼운 성벽 너머에는, 인간을 사냥하고자 안달 난 변이종이 가득했다. 종말 후 지구의 모든 생태계에 변화가 일었다. 경비대가 주기적으로 캐슬 밖으로 나가 뮤턴트를 처리해야만 했다.
시티 홀에게 경비대는 가장 거슬리는 존재였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독립된 권력체.
경비대가 캐슬 밖에서 싸운다면, 캐슬 내부의 치안은 시티 홀 보안국에서 담당했다. 기초 행정 구역을 나누고, 구역마다 보안관을 배치했다. 보안관은 각 구역에 퍼져 있는, 시티 홀의 개다.
탄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서, 에너지바를 한입에 구겨 넣었다. 우적우적 씹어 넘긴 후에 살짝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볼모나 다름없네.”
“1년 동안 자기들 아래에 두고 널 지켜보겠다는 얘기지.”
“근데 63구역이면 최악 중에서도 최악 아닙니까?”
캐슬의 조치에는 악의가 담겨 있었다. 63구역이 탄이 태어난 곳이며, 탄이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곳임을 생각한다면, 유치함마저 느껴졌다.
63구역은 가장 외곽에 있는 무법 지대다. 일부러 시티 홀이 제도의 바깥으로 밀어 놓고 버려둔 곳.
쓰레기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모아 두고서는 모른 척하는 셈이다. 그러면 적어도 대다수의 다른 곳은 깨끗하게 보이니까.
63구역에서는 온갖 범법이 횡행했다. 다른 구역 사람들은 그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른다. 외부와의 소통이 거의 단절되어 있었다. 캐슬 안에 존재하지만, 망망대해 위 섬처럼 고립된 곳이다.
“그냥 뭐, 저 좆 돼 보라는 거네요.”
모두의 시선에서 비껴가 있는 외지에 몰아넣었다가 나중에 조용히 처리하려는 걸까. 전형적이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탄이 상위 구역 유명 인사지만, 저 멀리 구석에 처박혀 있다 보면 존재감은 차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렇게 탄의 존재가 거의 잊힐 때, 그의 부재가 별다른 소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때.
탄은 자신에게도 죽음이 다가오리란 것을 직감했다. 물론,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탄이 무상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시티 홀도 참 너무하네. 내 가이딩 능력에 잠시 문제가 생겨서 보안관으로 좌천했다고 발표했다면서요? 거기다가 63구역? 날 무슨 뒷방 늙은이 취급 하네. 존심 상하게.”
탄이 우고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극비였다. 경비대 내에서부터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키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우고의 죽음은 그저 안타까운 사고사였다. 몇 년에 한 번꼴로, 아주 이례적으로 벌어지는. 평화라는 표어는 견고했다.
“그래서 저한테 부관은 붙여 준답니까?”
“기대하지 마라. 애초에 그 구역 보안관 사무소가 텅 비게 된 지 20년은 넘었어.”
“뭐요?”
“아예 보안관을 배정하지 않았다고. 버려진 곳이야.”
“그 정도로 방치된 줄은 몰랐는데. 재미있네요. 나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뭐, 재개발이라도 하라는 건가? 고향에 대한 의리로? 내가 평생 싸움만 배운 놈이라, 그런 쪽은 자신이 없는데.”
“재개발은 무슨. 그냥 가만히 있어. 그래야 살아. 그 구역 주민이랑은 절대 엮이지 말고. 알겠어?”
가만히 수그리고 있으면, 정말 살려 주긴 한답니까. 탄은 날카로운 말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시장님 눈치 봐서 조금만 버텨. 때 되면 네 능력 멀쩡히 복구됐다고 하고 다시 경비대로 부를 테니까.”
다이온의 말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스며 있었다. 탄은 입술을 비뚜름하게 튼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총감이 한숨 쉬며 탄의 어깨를 슬쩍 붙잡았다.
“탄. 나한테도 아무 말 안 할 거냐.”
다이온은 그나마 탄이 의지하는 어른 중 하나였다. 다이온이 아직 전투에 참여하던 현역 시절, 그는 탄의 직속상관이었다.
누군가가 탄에게 다이온을 아끼느냐고 물으면, 탄은 머뭇거림 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신뢰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특히나 지금처럼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는.
탄은 아무에게도 제 목숨을 맡기지 않는다. 그건 아무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단 소리다. 설령 그게 거의 평생을 함께해 온 다이온일지라도.
탄은 실없이 웃으며 답했다.
“총감님도 제 말을 안 믿으시나 보네. 섭섭하게. 우고는 원래 좀 불안정했어요. 아시잖아요. 제가 부하를 이유 없이 죽일 만큼 미친놈처럼 보여요?”
“그런 게 아니라…… 하여간 꼬여서는. 속사정이 더 있나 싶어서 걱정하는 거지. 시티 홀 놈들이 무슨 짓 한 거 아니고?”
“전혀요.”
“말할 생각 없구나.”
“다 말한 거라니까요?”
“경비대에 아직 네 편이 많아. 네가 갇혀 있는 동안 진정서만 30건이 들어왔다.”
“…….”
“절대 이유 없이 부하를 죽일 사람은 아니라고, 다들 널 옹호하더라. 대장님 돌려 달라고.”
“아이고, 자식들. 내가 인생 헛살지는 않았네.”
“그러니까, 도울 일 있으면 말하란 거야. 알겠어? 그게 뭐든. 넌 경비대 사람이잖아.”
탄은 다이온의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다이온을 믿는다 치자. 하지만 다른 경비대 간부들도 믿을 만할까. 결국엔 간부들에게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게 될 텐데.
전투 일선에서 은퇴한 경비대원은 대부분 교관이나 간부가 되지만, 일부는 시티 홀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쪽이 대우가 더 좋으니까. 보안관 중에도 경비대 출신이 더러 있었다.
초창기에 경비대는 시티 홀과 완벽하게 분리된 기관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느새 조금씩 서로 스며들어 있었다. 경비대원이라고 다 믿을 수는 없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진실을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탄은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 경비대 사람이지.”
탄은 경비대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렇기에 더욱 철저해질 수밖에 없었다. 두 소년이 죽었다. 심지어 하나는 그가 품고 지냈던 아이다.
확실히 파헤쳐 끝장을 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복잡한 사건에 엮인 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 이러지 말고 저 밥이나 좀 사 주시죠. 1구역에 있는 근사한 데서. 며칠간 영 시원찮은 것만 먹어서.”
탄은 싱글싱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황폐해졌을 고향으로 곧 돌아갈 사람답지 않게. 다이온은 더는 탄을 몰아붙이지 못했다.
탄은 가장과 속임수에 능했다. 언제 어디서든 유한 미소를 꾸며낼 수 있었다.
기만을 이용한 생존법. 고향이 탄에게 선사한 유일한 가르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