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평화로운 외곽
부임 첫날, 탄은 63구역 보안관 사무소를 찾지 못해 잠깐 헤맸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 모습에 매우 큰 간극이 있었던 탓이다. 지금의 사무소 문 앞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시발…….”
간판도 없고, 시멘트 외벽만 휑하니 드러나 있는 초라한 2층 건물. 심지어 쓰레기를 치우기 전까지는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20년 넘게 방치되었다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왜 쓰레기통을 놔두고 여기에…….’라고 생각하다가 탄은 뒤늦게 깨달았다. 여기엔 시티 홀 소속의 청소부도 없겠구나.
거리의 쓰레기통에 고이 버려 봤자 수거해 갈 사람이 없으니, 골목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쌓아 둔 거다. 주인이 없어진 보안관 사무소는 무단 투기 장소로 쓰기에 알맞았다.
여기서 사람이 근무할 수는 있는 건가. 아니, 여기서 사람이 살 수는 있냐고.
탄은 잠시 얼굴을 굳히고 쓰레기 더미를 바라보았다. 시티 홀에서는 사무소 2층을 숙소로 쓰라고 하였다.
이걸 어찌할까. 답은 간단했다. 치워야지, 뭐.
탄은 살짝 아랫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제 옷을 바라보았다. 첫날이라고 보안관 제복에 각도 잡고 왔는데. 아쉽고 열받지만, 다른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짧은 고민을 끝내고, 바로 몸을 움직였다.
우선은 입구에 있는 쓰레기 더미를 옆으로 밀어 두기로 했다. 어떻게든 건물에 입성하는 게 첫 번째 목표다. 밀어 둔 쓰레기를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고.
“윽.”
탄은 쓰레기를 막무가내로 쑤셔 넣은 포대 자루 하나를 들어 올렸다. 훅 다가오는 역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릴 때였다.
덜커덕, 덜커덕. 바퀴가 울퉁불퉁한 흙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탄의 뒤에서 멈추었다.
탄은 포대 자루를 안아 든 채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엄청난 거구가 눈앞에 바로 우뚝 서 있었다.
탁한 군청색의 점프 수트를 입은 남자. 옷은 헐렁했고 살짝 해졌다. 커다란 마스크가 그의 눈 바로 아래까지 덮고 있었다. 그나마 노출된 눈가도 길게 내려온 앞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살짝 구불거렸다. 서로 엉키고 꼬여서 산만하게 붕 떠 있었다. 머리 기장도 뒷덜미를 다 덮을 만큼 길었다.
캐슬 밖을 돌아다니는 변이종 개 같다. 위협적일 만큼 커다랗고 머리털이 북슬북슬하다는 점이 특히 닮았다.
툭. 남자가 낡은 장갑을 낀 손으로 탄이 들고 있는 포대 자루를 건드렸다.
“……이거?”
탄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답했다. 뭐지, 이놈은.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포대 자루를 꾹 눌렀다가,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자기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마치 이 쓰레기가 본인 것이라는 양.
“달라고?”
끄덕끄덕.
남자가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흔들린 앞머리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온전히 드러났다가 다시 숨었다.
채도 낮은 초록색 눈. 갈색이 살짝 섞여 있다. 꼬질꼬질하면서 투박한 꼴과는 달리, 눈빛 자체는 강렬하고 또렷했다. 눈동자가 무척 크면서도 눈매는 옆으로 길게 뻗었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머리카락 색깔도 그에 한몫했다. 백색과 회색이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마치 잿가루가 뿌려져 있는 것처럼.
종말 이후에 태어난 신인류는 머리카락 색이 구인류보다 자유분방하고 다채로워진 편이지만, 저런 색깔은 처음 보았다.
탄은 남자의 어깨 너머를 힐끔거렸다. 낡은 철과 나무판자 여러 개를 대충 이어 붙여 만든 커다란 수레가 보였다. 구식 중의 구식이다. 그 안에는 이미 쓰레기 더미가 꽤 쌓여 있었다.
“청소부야?”
끄덕끄덕.
탄은 자연스럽게 남자를 자기 부하 대하듯이 하대했다. 이런 화법이 그에게는 익숙했다. 남자는 기분 나빠 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반응했다.
“시티 홀 소속?”
도리도리.
남자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붕 떠 있는 머리카락 층이 나풀거렸다.
구역 내에서 독자적으로 청소부 일을 하는 자가 있었나 보다. 하기야, 꾸준히 쓰레기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면 이미 구역 전체가 쓰레기로 뒤덮였을 것이다.
“그냥 네가 청소하러 다니는 거야? 왜?”
남자는 멈칫하더니 손가락을 말아 동그란 원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코인. 캐슬에서 화폐로 쓰이는 동그란 주화를 표현했다.
“돈 때문에? 이걸 모아서 갖다 주면 돈을 줘? 어디서. 소각장에서?”
남자는 도리도리하다가 다시 끄덕하다가, 멈칫하며 고개를 어중간하게 멈추었다.
탄은 남자의 몸짓 언어를 해석해 보려 애썼다. 소각장에 갖다 주면 돈을 받는데, 소각장에서 직접 지급하는 돈은 아니라는 뜻인가. 중간에서 받은 일 처리만 하는 용역?
“이름이 뭐야?”
남자는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끄덕이는 것도 도리질하는 것도 아니다. 탄이 손바닥을 펼쳐 남자 쪽으로 내밀었다.
“이름, 여기에 적어 봐.”
청소부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알려 주기 싫어?”
탄은 무심코 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안 알려 주는 게 아니라 못 알려 주는 걸 수도 있겠다고. 63구역의 문맹률은 50%에 육박했다.
청소부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탄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탄이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다음에 만나면 알려 줘. 쓰레기는 가져가고. 안 그래도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남자의 어깨가 살짝 솟아올랐다. 기뻐하는 듯했다.
탄은 팔짱을 끼고 서서, 남자가 사무소 앞에 쌓인 쓰레기를 익숙하게 척척 들어 수레에 싣는 모습을 구경했다.
힘이 꽤 좋다. 처음 든 감상은 그거였다. 남자의 덩치 또한 상당했다. 저 정도의 체격은 에스퍼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탄은 남자를 한껏 올려다봐야 했다. 전체적인 몸집이 탄을 1.5배 정도 늘여놓은 것 같았다. 탄도 평균을 훌쩍 넘길 정도로 큰 키에다, 중급 에스퍼와는 견줄 만큼 체격이 좋았음에도.
남자가 에스퍼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에스퍼가 이런 구역에 처박혀서 청소부 노릇을 할 리는 없겠지만. 아니면 혹시 범죄 조직에서 일하던 놈일까.
탄은 곰곰이 생각하며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허리를 숙여 쓰레기 더미를 들어 올릴 때마다, 점프 수트 위로 탄탄한 등 근육과 엉덩이 선이 드러났다.
탄은 유심히 남자의 몸을 훑었다. 불순한 의도가 아닌 그저 궁금증만이 담긴 시선이었다. 꾸준한 훈련 없이는 갖출 수 없는 몸인데 도대체 뭐 하는 놈일까.
남자는 순식간에 사무소 앞에 있던 쓰레기 산을 철거했다. 수레에 쓰레기 더미가 잔뜩 쌓였다. 수레를 끌고 가기 전에, 거대한 몸을 슬쩍 돌려 탄을 바라보았다.
꾸벅.
남자가 허리까지 푹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부스스하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부웅 흔들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야?”
끄덕끄덕.
앞머리 사이로 살짝 보이는 눈동자에서는 거짓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 일순 어린애처럼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쓰레기를 치워 줬으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의문이 잠시 들었으나, 먼저 인사를 하겠다는데 못 받아 줄 이유도 없었다.
뭐지. 좀 귀엽네. 덩치는 살벌하게 커다래서는, 마치 상위 구역에서 키우는 로봇 강아지처럼 조용하고 순순하게 군다.
“그래. 수고했어. 가 봐.”
끄덕.
남자가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 쓰레기가 산을 이루었다. 균형이 조금만 쏠려도 온통 와르르 쏟아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저걸 혼자서 갖고 갈 수 있나. 좀 도와줘야 하나. 탄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자연스레 아랫사람 챙기는 오지랖을 부리는 건, 대대장을 맡으면서 생긴 버릇이다.
마스크가 가리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탄은 청소부가 저보다 어릴 것이라 어림짐작했다. 살짝 드러난 눈가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탄이 찝찝함을 참지 못하고 청소부에게로 다가가 팔을 붙들었다.
“이봐.”
청소부가 커다란 등을 움찔거리며 탄을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탄을 휘감았다.
“윽…….”
꿀렁. 주변 공기가 찐득한 액체로 변한 듯했다. 점성이 있고 물컹한 것이 몸의 모든 구멍을 타고 꾸역꾸역 안으로 파고드는, 역한 감각.
숨구멍이 막히고 목 안이 가득 찬다. 무색무취의 무언가로. 아니, 실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현실적이다.
기이하면서도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감각이었다. 무리하게 가이딩을 시도했을 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몸의 곳곳을 무언가가 채우는 듯한.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도가 셌다. 청소부와 맞닿은 손끝에서부터 기이한 열기와 저릿함도 퍼져 나갔다.
버겁던 감각이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와 함께 끊겼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낮고 굵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탄이 멍하니 대답했을 때, 청소부가 탄의 팔을 쳐 냈다. 꽤 강한 힘이었다. 탁, 얻어맞은 손등이 아릿했다.
그렇게 청소부와 떨어지자마자, 온몸을 감싸던 꿀렁이는 감각도 멈추었다.
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혼몽하다. 정신과 육체가 한참 분리되어 있다가 애매하게 재결합한 것 같았다. 과도한 가이딩 후에 찾아오는 께름칙함보다 정도가 심했다.
탄은 목을 가다듬으며 눈앞의 남자를 쏘아보았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 뭐야.”
청소부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한 발짝 탄에게서 뒤로 물러섰다.
“방금 말했지?”
청소부가 당황스러워하며 도리질했다. 제 입술을 톡 건들고는 손까지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을 못 한다는 뜻 같았다.
“아니…… 근데 분명히…….”
뭔가 들렸는데. 탄은 웅얼거리면서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럽다. 탄은 제 몸을 헤집고 간 감각을 곰곰이 되짚어 보다가, 가능할 리 없어 보이는 가정을 입에 담았다.
“너 혹시 에스퍼야?”
청소부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스퍼라는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탄은 미간을 구겼다. 찝찌름하다. 지금껏 접해 봤던 에스퍼의 기운과는 달랐지만, 분명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지?”
청소부가 넓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탄은 더욱 바짝 다가가며 몰아붙이듯 말했다.
“마스크 좀 벗어 봐. 얼굴 보게.”
도리도리. 도리도리.
탄이 한숨을 내쉬고서 살짝은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화내는 거 아니고, 무서운 거 아니니까. 신변 확인차, 마스크만 벗어 보자.”
탄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애 어르듯이 대하는 데에 익숙했다. 경비대 신입 중에서는 몸만 커다랬지 속은 아직 어린애인 경우가 많았다. 우고도 그런 애였다.
그러고 보니 우고의 눈동자도 초록색이었는데. 탄은 청소부를 마주하며, 빛이 꺼져 가던 초록을 문득 떠올렸다.
청소부는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레 마스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스크는 새까맣고 단단한 소재였으며, 배기 밸브가 양쪽에 달려 있었다.
“얼른.”
달래듯이 한 번 더 재촉하자, 청소부가 마스크를 느리게 벗었다.
“…….”
청소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탄의 눈치를 살폈다.
탄은 청소부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잠시 숨을 참았다. 함께 숨죽이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남자의 외모에 순수하게 경탄한 것은 처음이다. 보랏빛 위로 노란색 노을이 스미는 하늘처럼, 자연스레 압도되는 아름다움이었다.
행여나 아는 얼굴인지 확인하려던 건데, 그것보다는 청소부의 흔치 않은 이목구비에 정신이 쏠렸다.
손질되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이 지저분할 뿐, 얼굴은 놀랍도록 잘생겼다. 더러운 63구역에서 사는데도 피부가 매끈했다.
살갗의 색깔은 까무잡잡했다. 연한 구릿빛. 그래서 더 건강하고 탄력 있어 보였다. 잡티 하나 없어, 인공 피부로 보일 정도다.
완전히 백발도 아니고 회색이 섞인 머리카락. 그것과 대조되는 짙은 피부. 이 흔치 않은 조합이 남자를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탄은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뭐 하던 애길래 이렇게 잘생겼어?”
청소부가 탄의 말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짙은 회색 눈썹이 애매하게 요동쳤다.
도리도리.
“겸손 떠네.”
녹갈색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며 탄의 시선을 피했다. 금세 뺨에 붉은 기가 확 돌았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끄으덕.
허허, 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닌데.”
남자의 턱선은 확실했고 콧대가 높았다. 광대 부근도 딱 잡혀 있어서, 전체적으로 단단하고도 우아하게 각이 져 있었다.
홍채 아래로 흰자가 살짝 보이는 삼백안이었다. 눈을 치켜뜨면 속쌍꺼풀이 안으로 사라져 서늘한 기운이 난다. 그러나 눈을 깜빡이거나 살짝만 내리깔아도 삼백안이 가라앉고 쌍꺼풀 라인이 드러나며 유해졌다.
탄은 남자의 첫인상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63구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
상위 구역에서 늘 좋은 것만 먹고 자란 부잣집 자제라 해도 믿겠다. 머리를 손보고 옷도 제대로 입혀 놓는다면 말이다. 나이는 끽해야 스물일고여덟 정도 될까.
“왜 청소 일을 해? 그 얼굴이면 더 편하게 먹고살 길 널렸겠는데. 63구역 탈출도 금방일걸. 아니면, 여기를 탈출하면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나?”
탄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모두 진심이었다. 마지막 물음에는 예리함도 섞여 있었다.
“형질 검사는 받아 봤어?”
청소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탄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 녀석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에스퍼 같은데. 외진 구역에 가이드 없이 저 혼자 떨어져 있다고? 말도 안 된다. 금세 폭주 상태에 접어들 테다.
혹시 옆에 가이드가 붙어 있나? 그렇다면 더더욱 미스터리다. 캐슬의 데이터에 잡히지 않은 형질 보유자가 둘이나 된다는 건 불가능했다.
시티 홀이 가장 공들이는 작업 중 하나가 형질 검사다. 형질 검사는 태어나서부터 여덟 살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 번 이루어졌다. 캐슬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었다.
검사를 거부하면, 곧바로 일가족 전체가 캐슬 밖으로 추방당한다. 캐슬의 벽 너머에는 종말의 흔적이 남아 있는 황야뿐이다. 연약한 인간 혼자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땅.
형질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다. 유전의 영향이 있는 듯하지만, 절대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매번 꼼꼼히 모든 아이를 검사대 위에 올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63구역 사람들이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아니, 거의 유일한 방법이 형질 검사다. 가이드나 에스퍼로 발현해서 이 구역을 뜨는 거다.
대표적인 예가 탄이었다. 탄은 여덟 살 마지막 교차 검사에서 뒤늦게 S급으로 판정받았다. S급치고 발현이 늦은 편이라 잠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여덟 살에도 늦었단 소리를 들었는데, 눈앞의 이 잘생긴 거구는 어떠한가. 20대 중후반은 되어 보인다. 당연히 발현되고도 남았고, 힘을 진정시키지 못했다면 폭주를 몇 번은 겪었어야 할 나이다.
“형질 검사는 받았을 거 아냐. 기억이 안 나?”
청소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건지, 알아듣지를 못한 건지, 멀거니 눈만 도르륵 굴려 댔다. 그때 뒤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쉬?”
청소부가 고개를 휙 돌려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커튼이 젖히듯 긴 앞머리가 흔들리며 단단한 이마를 잠시 보여 주었다.
눈썹까지 잘생겼네. 탄은 무심코 애쉬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저 덥수룩한 앞머리를 정돈한다면, 미모가 더 살아날 텐데. 아니다, 오만 시선이 다 끌려서 오히려 피곤하려나.
두 사람에게로 다가오는 이는 비쩍 마른 여자애였다. 서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팔다리가 가늘었다. 피부는 창백하며, 갈색 눈은 동그랗고 컸다. 얼굴에 살이 없어, 큰 눈이 더 부각되어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잘려 있었다. 목덜미를 반쯤 덮는 길이였는데, 밑단이 고르지 못하고 삐죽삐죽했다.
탄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봐?”
“……그런데요.”
허약한 외관과는 다르게, 여자애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소심한 게 아니라, 조심스럽고 깐깐해 보였다.
“애쉬라고 부르는 거 같던데.”
“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요?”
“여기 보안관.”
“아.”
여자애는 의미 모를 소리를 내며 탄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탄은 제 어깨까지밖에 안 오는 애의 당돌한 눈빛을 받아 냈다.
각 구역에서는 보안관의 말이 곧 법이었다. 즉시 체포, 즉시 처결권을 지녔기에. 보안관을 본 캐슬 시민이라면 죄다 겁부터 먹기 마련이었다.
여자애의 반응은 꽤 이색적이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탄은 권력을 내세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생각이라곤 일절 없었다. 그렇게 해서 질서가 잡혔다면, 애초에 63구역이 이 꼴이 나지도 않았을 거다.
“소문은 들었는데. 벌써 왔구나……. 그런데 애쉬는 왜요?”
“저 녀석 이름이 애쉬인 거지?”
“네, 뭐. 그냥 우리끼리 부르는 거예요.”
“별명으로?”
“아니요. 얘가 자기 이름을 모르길래. 우리끼리 대충 지었어요.”
수상한 청소부, 애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애 옆에 딱 붙어 서서는 간간이 탄을 힐끗댔다.
“자기 이름을 몰라? 왜?”
“기억 상실증에 걸렸대요. 저도 잘은 몰라요. 그냥 어느 날 보니까 구역 경계부에 쓰러져 있어서…….”
“언제쯤이지?”
“1년 전이던가. 말도 못 하고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하고. 우리가 데려가서 키웠죠.”
한참 작은 여자애가 애쉬를 키웠다고 말하니, 기묘하게 들렸다. 탄은 의식적으로 미소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네가 말하는 ‘우리’가 누구지?”
“공장 사람들요.”
“공장……. 공장이면 그 외곽에 있는 폐발전소 말하는 건가?”
탄이 63구역에서 살았던 기간은 고작 8년. 태어난 직후부터 여덟 살 때까지다. 그는 어린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공장, 공장…….
아, 구역 끄트머리에 있던, 소규모 화력 발전소였다. 캐슬이 태양광 발전 기술에 비약적인 진보를 이뤄 낸 후로 버려졌다.
탄이 어릴 때부터 낡고 부식된 곳이었다. 철근으로 이루어진 골자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가동을 멈춘 여러 기계 사이에는 녹이 슬었다.
하지만 발전 공장으로 쓰였던 곳이니만큼 건물의 기반 자체는 단단했다. 무엇보다도 비를 피할 지붕과 벽이 있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공장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곳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사실상 불법 점거였으나, 폐발전소였기에 시티 홀에서도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무판자로 구역을 나누었고, 그 작은 공간을 제집처럼 여겼다.
공장은 캐슬에서 가장 누추한 맨션이 되어 갔다. 사회 끄트머리로 밀려난 자들이 모여 사는.
범죄자, 살던 구역에서 쫓겨나 여기로 도망 온 자, 사회 기여도가 현저히 낮다고 판단되어 자원 배분이 끊긴 자들, 시민권이 없는 무명의 자들.
탄은 공장이 진즉에 철거되었으리라 예상했다. 그 옛날부터 보안관들이 공장에서 사람을 내쫓을 거란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으니까.
“공장이 아직도 있다고?”
여자애는 하늘이 보라색이 맞느냔 질문을 들은 애처럼 어처구니없어하며 답했다.
“당연하죠. 공장 없이는 63구역이 안 돌아가는걸요.”
고향을 떠난 사이 뭐가 변하긴 많이 변했구나. 탄은 여기서 이제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보안관 사무소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각오한 상황이긴 했다.
여자애가 입술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캐슬 사람들은 정말 우리 구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요.”
“넌 캐슬 시민이 아닌 것처럼 말하네.”
“시티 홀도 제가 시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요.”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다. 탄이 대답 대신 나지막한 물음으로 화제를 틀었다.
“그래서 네 이름은 뭐야?”
“다언이요.”
다언은 꼿꼿이 목을 세우며 답했다.
탄은 다언을 보며 생각했다. 저보다 한참 큰 데다 무기와 권력을 지닌 성인 앞에서 거리낌 없이 구는 아이. 대체로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아주 많아 겁을 모르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후자는 두려워도 그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제 몸집을 부풀리고 외피를 단단하게 만들어 온 뮤턴트처럼. 약해 보이면 잡아먹힌다. 도태되고 멸절된다.
탄은 다언에게서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읽었다. 잃을 게 없는 애는 위태로이 웃자란다.
“나이는?”
“말 안 하면 잡혀가나요?”
“뭐, 그런 건 아닌데.”
“더 캐물으실 거 없으면 이만 가도 될까요? 바쁜데요.”
“어, 그래. 뭐.”
“네. 애쉬, 잘 지내. 넌 오랜만에 보는데도 여전히 잘생겼네.”
다언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애쉬에게 인사했다. 애쉬도 다언을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커다랗고 짙은 손으로 여리고 무해해 보이는 손짓을 하는 것도 재주다. 탄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잠깐만. 같이 사는 거 아니야? 너희가 키웠다며.”
“아, 요즘엔 같이 안 살아요. 저만요. 사정이 좀 있어서. 아무튼, 애쉬는 이상한 애 아니니까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괴롭힌 적 없는데.”
“애가 잔뜩 쫄아 있는 거 같아서요.”
“애라고 부르기엔 좀 크지 않나 싶네.”
“뭔가 그냥, 하는 짓이 애 같잖아요. 그래도 착해요. 말썽 피운 적도 없고요. 예쁘기도 하고.”
예쁘긴 하지. 탄이 속으로 담담히 공감하는 사이, 다언은 낡고 헐렁한 후드를 뒤집어쓰고서 탄을 지나쳐 갔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다언의 발소리는 매우 작았다. 기척을 거의 내지 않고 움직이는 법을 배운 애다.
탄의 눈매가 미세하게 날카로워졌다. 다언은 외관처럼 그저 연약한 아이는 아닐 것이다. 63구역에서 청소년기까지 버텨서 생존한 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다언은 도도도 걸어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탄은 애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애쉬는 어느새 마스크를 다시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두 눈만 내놓은 채로 말똥말똥 탄을 바라보았다. 명령이라도 기다리는 듯, 얌전한 모양새였다.
애쉬는 어색하게 서서 탄의 시선을 받으며 가끔가다 고개를 까딱거렸다. 뭐지? 귀엽다. 저 얼굴을 하고서 순하기 쉽지 않을 텐데. 탄은 매끈한 이마를 손끝으로 긁적거렸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기는 한데, 여기서 애쉬를 붙잡고 더 떠들어 봐야 뭐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수상한 인물인 것만은 확실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채로 63구역에 버려진, 에스퍼의 기운을 풍기는 남자라니.
탄은 애쉬가 경비대 사람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20대 중후반 에스퍼 중에서 탄이 모르는 이는 없었다. 경비대에서 무조건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저게 쉽게 잊힐 이목구비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에스퍼? 애초에 에스퍼가 맞기는 한가? 애쉬, 애쉬, 애쉬……. 탄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두며 입을 열었다.
“애쉬.”
탄이 부르자 애쉬가 두툼한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까부터 왜 쫀 것처럼 구냐. 뭔데. 내가 너한테 뭐 했어?”
도리도리.
“내가 무서워?”
도리도리. 도리도리이…….
고개를 젓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귀 끝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딱히 부끄러워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애쉬는 낯을 지극히 가렸다.
“나보다 힘도 세게 생긴 놈이 소심하게. 하여튼 넌 지금 공장에 사는 거지?”
끄덕. 애쉬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팔랑거렸다.
폐허 같은 사무소를 복구하고 나면, 공장부터 들러야겠다. 탄은 우선순위를 머릿속에 정렬하고서 손을 휘저었다.
“이만 가 봐. ……아니다. 너 이거 혼자 끌고 갈 수 있겠어?”
그제야 애쉬를 불러 세웠던 애초의 목적이 기억났다. 수레가 너무 무거워 보이길래 도와주려던 거였는데.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애쉬와 접촉한 순간 울려 퍼진 목소리가 생생히 다시 떠올랐다.
환청은 아닐 테고. 저놈이 직접 말한 것 같지도 않다. 가이딩할 때 가끔 에스퍼의 감정과 동기화되곤 했지만, 목소리가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찝찝한데.”
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애쉬가 고개를 슬쩍 숙인 채 눈치를 살폈다.
“몰라. 이거나 끌자.”
탄이 수레로 다가가려 하자, 애쉬가 손을 흔들면서 동시에 고개까지 팍팍 내저었다.
“안 도와줘도 된다고?”
끄덕끄덕.
“혼자서 안 쏟고 가져갈 수 있겠어? 조금만 흔들려도 다 쓰러질 거 같은데.”
애쉬가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팍을 통통 두드렸다. 혼자서도 괜찮다는 뜻인가. 가슴 크다고 자랑하는 건가. 크기는 한데. 탄이 무심히 보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알겠어, 뭐. 그럼 가 봐.”
꾸벅.
애쉬가 잊지 않고 인사를 한 뒤 수레를 붙잡았다. 드르륵. 드르륵. 곧 한 치의 흐트러짐도 바퀴가 굴러갔다. 놀랍도록 균형 잡힌 힘이었다. 민간인이라기에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탄은 애쉬가 사라질 때까지 그를 가만히 뒤에서 바라보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 *
캐슬의 관리자이자 시티 홀의 수장, 폴이 있는 시장실.
“뭐야. 둘이 만났다고?”
“예.”
폴은 비서의 대답에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굽이치는 폴의 금발에 윤기가 흘렀다. 나이도 성별도 짐작하기 힘든 외관이었다. 여러 기술로 다듬어진 얼굴은 기묘했다.
폴은 피부가 은은하게 반짝이도록 시술을 받았다. 다른 광원과 닿을 때마다 그의 얼굴에서 번쩍번쩍 빛이 반사되었다. 눈썹 모양은 지그재그였다. 입술은 형광이 섞인 보라색.
폴은 유일무이함을 즐겼다.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을 것. 폴은 인공적으로 변형을 가한 제 얼굴을 좋아했다.
비서가 말했다.
“감시할 사람을 붙여 놓을까요?”
“지금처럼 가끔만 들여다봐.”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걔가? 어떻게?”
폴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생명체든지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버려진다. 애쉬. 폴은 63구역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에게 붙여 준 별칭을 떠올렸다. 타고 남은 재.
그 애와 어울렸다.
“뭔가 이상 반응이 나타나면 그건 그것대로 흥미로운 일이 되겠지. 이례적인 데이터값도 얻을 수 있고. 일단은 방목? 응, 그게 낫겠어.”
폴은 손끝으로 제 턱을 토독 두드렸다. 설렘이 담겨 있는 손짓이었다.
“그 탄이라는 S급 가이드가 일을 키울 것 같기도 해서요.”
“자기는 항상 너무 소심하고 조심스러워. 그래서 개혁적인 나랑 잘 맞는 거겠지만. 적당히 융화되면서 말이야. 그치?”
비서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일이 커진다고 해도 어차피 가이드야. 에스퍼도 아니고.”
가이드는 민간인보다야 여러 면에서 신체가 우수하고 전투 기술도 갖추었지만, 에스퍼 같은 초인은 아니었다. 제거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럴 수 있었다.
애쉬는 더 안전했다. 어차피 주인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이제는 이빨 빠진 개였다. 족쇄까지 여럿 채워 두었으니, 그 애가 뭘 하겠는가.
“우리 애…… 이제 애쉬라고 부를까? 그 이름 마음에 들었어. 내가 애쉬를 좀 아꼈잖아. 알지?”
“네. 그러셨죠.”
“후회할까 싶었는데 역시 살려 두길 잘한 거 같아. 애쉬는 폐기되고 나서도 나에게 여러모로 기쁨을 주네. 이게 사랑의 순기능인가? 오, 사랑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것. 큐피드는 귀머거리였지.”
폴은 종종 구세계의 문학 구절을 일부러 틀리게 인용하고는 했다. 예술가를 사회 기여도 최하층으로 취급하는 캐슬 시티의 철학을 녹여 낸 말장난이었다.
하지만 극소수 상류층 외에는 폴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했다. 종말 이전에 존재했던 많은 것들과 다름없이, 셰익스피어의 문장도 잊힌 지 오래였다.
미앙미앙.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는 강아지가 폴에게로 뛰어왔다. 폴은 강아지를 끌어안고, 37도로 설정된 은빛 몸체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렇지만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건 래빗이야. 우리 래빗은 망가지지 않고 도태되지 않지. 완벽해.”
미앙미앙. 로봇 강아지 래빗이 울었다.
구인류의 친구였던 개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성벽 밖 야생 개는 인간에게 극도의 공격성을 띠는 뮤턴트였다.
현세대에서 강아지의 울음소리를 직접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종말 직전의 디지털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성벽 밖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터였다.
미앙미앙. 이건 현세대가 상상으로 입력해 놓은 울음소리였다. 쪽, 쪽. 폴이 래빗의 정수리 부분에 입술을 문대면서 비서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2구역에서 열린 파티는 어떻게 됐어? 반체제 발언이 있었나?”
폴은 인류 최후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늘 경계심을 놓지 않으려 했다. 체제가 무너지면 다시 인류는 생태계의 약자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캐슬의 시스템은 현재로서 완벽하므로, 변화는 곧 몰락일 것이다. 전쟁과 굴욕의 시기로 돌아가는 건 순식간이다.
불과 3세기 전만 해도, 인간이 지구 전체를 지배하지 않았던가. 모든 종을 아래에 거느린 최상위 포식자였다. 방심과 오만이 불러온 종말이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놨다.
대기 오염이 역치를 한참 넘겼던 그때. 인류는 방심의 대가를 치렀다. 생태계를 돌려놓기 위하여, 신개발 합성 물질을 대량으로 살포했다. 대기가 정화되리라 믿었다. 오만이었다.
처음에는 효과를 본 듯하였으나, 몇 개월 만에 부작용이 일었다. 과학자들이 미처 예상치 못한, 새로운 화학 반응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순식간에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공중에 기묘한 안개가 떠다녔다. 그 안개를 들이마시면, 호흡 곤란을 호소하다가 얼마 후 폐가 석화된 채 죽었다.
생태계에 벌어진 대혼란. 1년 만에 지구의 생명체 80%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소수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달라진 환경에 면역이 생긴 자들. 일종의 돌연변이들. 어쩌면, 진화.
인간종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형질 보유자의 탄생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 죽음의 안개에 면역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가 새로운 대기와 작용하여 이능력을 발산해 내는 자들.
인간이 강해지는 동안, 다른 종들도 가만히 도태되지만은 않았다. 포유류의 몸집은 평균적으로 2.7배 커졌으며, 야생성과 공격성이 증가했다. 그들을 뮤턴트라고 불렀다.
인간은 자신들이 부리고 사육하고 사냥하던 동물에게 공격당했다. 육체적 힘만 따지면,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포유류 중 하나였다. 발톱은 얇고 부드러우며, 이빨은 자그마하다.
진화된 형질 보유자가 아니면, 뮤턴트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인간은 수십 년에 걸쳐 뮤턴트가 드문 지역으로 도망치다가 한곳에 정착했다.
성벽을 원형으로 높이 쌓아 스스로 그 안에 갇혔다. 기술을 되찾고 힘을 회복할 때, 이 벽을 부수고 다시 행성의 지배자가 되리라 다짐하며. 그렇게 인류 마지막 도시, 캐슬 시티가 세워진 지 156년째였다.
“다들 인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니까.”
폴은 보라색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이럴 때면 그는 10대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156년 동안 인류는 조금씩 발전했다. 뮤턴트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생성했고, 여러 과학 기술을 복원하거나 새로 개발했다. 아직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성장했다.
뮤턴트 사냥에서 5년간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게 고무적인 증거였다. 머지않아 다시 정복의 시대가 올 것이다.
로마, 몽골, 대영 제국. 폴은 띄엄띄엄 이어지는 구세계 기록 속 이름들을 떠올렸다. 인류의 역사는 상당 부분 구멍 나 있는 상태로, 구전 설화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폴은 제국이란 이름으로 세계를 정복했던, 그 찬란한 나라들을 자주 상상했다. 꿈에 젖은 듯한 얼굴로.
“어떤 과거는 반복되어야만 해. 개츠비가 그랬지. 닉은 멍청해.”
폴의 구세계 문학 틀리게 끌어다 쓰기 전법은 해학이 아니라 오류로 끝날 때도 있었다. 과거에 집착하던 개츠비의 말로가 어떠하였는지 폴은 정말로 몰랐기에.
위대한 개츠비의 원전이 소실되었다. 떠돌아다니는 여러 가지 버전 중에 폴은 왜곡된 결말을 믿었다. 그쪽이 더 그럴듯하고 마음에 들었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개츠비는 영원히 행복하고 부유하며, 그의 저택에서는 파티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폴은 캐슬 시티도 그와 같은 찬란함을 이루길 바랐다. 그러려면 중앙으로 응집된 힘, 체계화된 군대가 필요했다. 약간의 불가피한 희생들도.
겁쟁이들은 자꾸만 안주하려 한다. 더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성벽 안만 들여다보다가, 결국은 이곳을 갉아먹게 될 자들이다.
폴은 진심으로 자신이 박애주의자라고 믿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 모든 걸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하고 있노라고. 아주 헌신적으로.
비현실적인 그의 피부가 반짝거렸다.
* * *
- 구인 공고 -
63구역 보안관 사무소에서 임시 부관을 모집함.
기간 : 1년인데 더 길어질 수도 있음.
인원 : 되는 대로.
조건 : 나이, 성별, 학력 무관. 성실하고 보안관의 명령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됨.
급여 : 시티 홀에 소속된 부관들과 동일하게 지급.
문의는 보안관 사무소로. 간단하게 면접 볼 것.
* * *
구인 공고를 띄운 지 사흘째였다. 그간 지원자는 한 명도 없었다. 탄은 의아함에 빠졌다.
부관의 월급은 적지 않았다. 63구역의 평균적 생활 수준을 생각해 보았을 때, 누구나 탐을 낼 만한 금액이다. 돈을 준다는데도 왜 안 오는 걸까.
시티 홀에서 부관을 붙여 주지 않았으니,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했다. 탄은 사비로 부관을 고용할 계획이었다.
몇 년간 대대장을 맡으면서 모아 놓은 돈이 있었다. 계좌를 탈탈 털 각오를 마쳤는데, 사람이 오지를 않는다. 사무소는 맥이 빠질 정도로 한산했다.
일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혼자서 20년간 방치된 사무소를 쓸 만한 곳으로 개조하려면 한세월이 걸릴 것이다.
첫날 탄이 목격했던 사무소 내부는 끔찍하게 더러웠다. 20년간의 방치가 만들어 낸 부산물로 가득했다.
매캐한 먼지,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시멘트 가루, 거미줄, 벌레의 사체 등. 그간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드나든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버려진 공간은 거대한 사체 같았다. 너무 거대해서 아직도 다 분해되지 못한. 죽은 유기물은 고요하지 않았다. 부패 작용은 여러 악취를 뿜어내고 오물을 내뱉었다.
사무소는 요란한 죽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개인 숙소로 사용할 2층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가구도 없는 공간은 꽤 넓었다. 그 광활함이 탄을 더 막막하게 했다. 치워야 할 면적이 넓단 뜻이니.
감사하게도 화장실은 붙어 있었다. 배관이 벽 안에 마감되어 있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있는 구식이었지만. 부식된 배관은 금세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보였다.
사흘째 청소와 정리만 하는데도, 여전히 손볼 곳투성이였다.
“젠장…… 평생 할 청소를 여기서 다 하네.”
탄이 중얼거리며 선반에 쌓여 있는 먼지를 손걸레로 닦아 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무언가가 먼지에 들러붙어 있었다.
얼마 후 지친 탄은 손걸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간신히 쓸 만하게 손봐 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원자가 한 명도 없다니.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공고를 못 봤나? 그럴 리가. 63구역 채널에 요란하게 띄워 놨는데.
63구역에는 홀로그램 워치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도 길목 군데군데 구식의 공용 패널이 설치되어 있었다. 공용 패널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공문을 확인했다. 구세계 인류가 쓰던 공중전화와 비슷한 기능을 하나, 그보다 훨씬 자그마했다. 가로세로 두 뼘 정도 되는 얇은 정사각형 판이었다.
지나가다가 누군들 하나쯤은 분명히 공고문을 봤을 거다. 소문이 날 법도 했다. 그런데 사무소에 날벌레만 날아다니는 꼴을 보니, 모르는 사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벌써 해가 지면서 보랏빛 하늘에 노란색이 물들기 시작했다. 이러다 곧 캄캄하게 암전될 것이다. 63구역에 할당된 전기 공급량은 민망할 정도로 적었다.
탄은 새 구역에 적응하기 위하여 밤거리나 슬렁슬렁 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끽. 그때 사무소의 철문이 살짝 열렸다.
“저기요.”
익숙한 목소리가 문틈 새로 들려왔다. 탄은 멍하니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문 쪽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부관 지원자?”
다급하게 묻는 탄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담겨 있었다. 문틈 사이로 삐죽빼죽한 단발이 보였다.
“네. 공고를 봐서요.”
물끄러미 탄을 올려다보며 말한 이는, 다언이었다. 일전에 사무소 앞에서 마주쳤던, 공장 출신이라던 여자애다. 그때와 옷차림이 똑같았다. 벙벙한 후드티와 포켓이 유달리 많은 바지.
“어, 너 저번에. 그 청소부랑 같이 봤던 애구나.”
“기억하세요?”
“당연히 하지. 어어, 들어와, 들어와. 이름이…… 다언. 맞지?”
“이름까지 기억하시네요.”
“나 머리 좋아.”
첫 지원자다. 탄은 사회성을 듬뿍 끼얹은 미소를 지으며 웃으며 다언을 안으로 들였다. 다언은 사무소 안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작은 얼굴에 가득 찬 커다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탄은 멋쩍게 말했다.
“좀 더럽지?”
“좀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요.”
“그렇다고 뭘 또 바로 긍정을 하시나. 청소하는 중이야, 열심히. 우선 여기 앉아. 의자는 얼추 고쳐 놨으니까.”
탄은 1층 가장 뒤에 있는 보안관 데스크로 다언을 이끌었다. 다언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탄과 마주 앉았다. 탄은 신나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제복 앞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면접 봐도 되지?”
“네. 녹음하나요?”
다언이 물끄러미 녹음기를 바라보았다.
“어어. 구식이지만 녹음기 좀 쓸게.”
탄은 자기 책상 위에 놓인 홀로그램 변조기를 퍽 내리쳤다. 약간의 감정이 담긴 손짓이었다.
“이게 아직 작동을 안 해서.”
이곳에는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디지털 홀로그래피가 지금처럼 상용화되기 전에 문을 닫은 사무소였다. 여기 남아 있는 기기는 죄다 구식이었다. 게다가 시스템 코어 자체가 먹통이 되었다.
“뭐, 시티 홀에 말해 뒀으니 곧 고쳐지겠지. 응.”
안 되면 곤란했다. 탄은 아날로그에는 영 익숙지 않았다. 경비대에서 행정 문서를 처리할 때도 늘 홀로그래피에 기댔다.
사무소 안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탄은 시간의 틈새에 빠져 과거로 돌아온 기분을 종종 느꼈다. 도저히 캐슬력 156년 같지가 않다. 낡고 더러우며 수십 년 전에 작성된 종이 서류로 한쪽 벽면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이었다.
출생지는 63구역이었으나, 탄은 인생의 대부분을 상위 구역에서 보냈다.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 타지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이방인이고.
우고의 죽음에 관해 파헤치고 시티 홀과 상대하기 전에, 우선은 63구역에 적응해야만 했다. 여기서조차 입지가 위태로우면 바깥과 싸우지도 못한다. 그리고 미숙한 이방인에게는 똑똑한 현지인이 필요한 법이다.
탄은 다언이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면접 시작한다.”
“네.”
다언은 표정 변화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달칵. 탄이 녹음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름?”
“다언요.”
“나이는?”
“열여덟.”
캐슬에서 성인 취급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다. 우고와 동갑이기도 했다. 탄은 잠시 다언을 빤히 바라보았다.
열여덟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앳되었다. 놀랄 일도 아니다. 63구역 사람들의 영양 상태는 대개 좋지 않았다. 다언처럼 나이에 비해 덜 자란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하는 일은 주로 행정 업무일 거야. 그래도 간간이 2인 1조로 순찰할 수도 있거든. 이 구역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자신 있어요. 여기서 떠나 본 적 없으니까.”
“지금 거주지는?”
“4번가 13번 집이요. 맨 위층.”
“혼자 세 들어 살아?”
“아뇨. 여동생이랑 같이.”
“오, 여동생이 있구나.”
“여동생만 있어요.”
탄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가족 관계는 더 캐묻지 않았다. 63구역에는 다언처럼 부모 없이, 혹은 부모에게 버려져 아등바등 살아가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지원 동기는?”
“돈을 많이 주는 것 같길래요. 그런데…… 계약서도 쓰나요? 임시직이라던데.”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사기 칠 사람으로 보여?”
탄이 유려하게 웃으며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언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서 말했다.
“조금은요.”
“그런 말 난생처음 들어 보네.”
거짓말이다. 자주 들었다.
“이제라도 들으셨으니 됐죠.”
다언이 무뚝뚝하게 받아쳤고, 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충고 고마워. 내세울 특기 같은 건 좀 있나?”
“글쎄요.”
“아무거나 좋아. 아주 사소한 거라도.”
“음. 문을 잘 따요.”
“오…….”
“63구역에서 그거로는 제가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부관으로 일하면서 문을 강제로 딸 일이 그렇게 흔치는 않을 텐데.”
“사소한 거라도 말하라시길래.”
“뭐.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증거지. 또 다른 거는?”
“글씨를 읽을 줄 알아요.”
“좋은데?”
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건 확실한 장점이었다. 이곳에서는 흔치 않은 인재다. 63구역의 문맹률은 절반 가까이 되었다.
“또?”
“63구역의 지리라면 빠삭하게 알아요. 좁은 골목길 하나하나까지요. 아마 시티 홀의 공식 지도에는 없는 길들일 거고요.”
“이것도 아주 좋고. 재주가 많네. 이 정도면 되겠는데.”
사실 탄은 다언이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채용을 확정 짓고 있었다. 지원자 하나하나가 소중할 때. 다언이라면 탐이 나다 못해 고마운 인재였다. 무심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시선에는 독기가 어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꼭 너를 채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저 말고는 선택지가 딱히 없으실 거예요. 지원자 몇 명이나 왔어요? 혹시 제가 처음인가요?”
탄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달칵, 녹음기를 껐다. 사무소가 의아할 정도로 한산했던 이유를 다언은 아는 모양이었다.
“자, 공식 면접은 여기까지. 이다음은 비공식.”
“이렇게 금방 끝내도 되나요?”
“내 맘대로지. 내 사무소인데.”
탄이 어깨를 으쓱했고 다언은 묵묵히 있었다. 탄은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려 다언의 주의를 끌고는 말했다.
“다언. 지원자가 없는지는 어떻게 알았지?”
“다들 공장 눈치를 보니까요. 공장에서 새 보안관을 멀리하라고 했거든요.”
안 그래도 탄이 예전부터 캐내고 싶어 입술이 근질거리던 화제가 나왔다.
“도대체 공장이 뭐길래 그래?”
“아혼이 있는 곳이죠.”
“아혼?”
“공장의 리더요. 공장은 63구역의 시티 홀 같은 곳인데요. 진짜 시티 홀은 저희를 버렸으니까. 이곳은 공장 규칙에 따라 돌아가요.”
63구역을 장악한 조직체와 리더 아혼. 아혼이라……. 탄은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읊었다.
“좀 무서운 곳처럼 들리는데. 어때? 얼마 전까지 거기서 살았다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다언이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거리에 비하면 열악한 환경이지만, 집세랑 관리비를 안 내도 돼서 좋아요. 네. 좋은 곳이죠. 아혼이 책임자니까요. 아혼이 없었다면, 63구역은 지금보다 더 엉망진창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왜 공장에서 나왔어? 여기서는 공장에 줄을 대는 게 가장 먹고살기 좋은 길인 거 같은데.”
“사정이 있어서요.”
“무슨 사정?”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엄청.”
“……오빠가 아혼을 배신했어요. 그래도 아혼이 자비를 베풀어서 저랑 동생은 무사할 수 있었죠. 공장에서는 나와야 했지만요.”
탄은 다언에게 오빠는 어찌 되었느냐는 물음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금은 여동생과 단둘이 지낸다고 하니, 오빠의 말로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공장의 규율과 상벌 체계가 꽤 엄격한 모양이었다.
다언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면접은 합격이에요, 아니에요?”
“아. 그걸 말 안 했네. 합격. 당연히 합격이지.”
탄이 악수하기 위해 다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언은 가볍게 흔들거리는 탄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제 손을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색한 표정이었다.
“정말요? 이렇게 간단하게 되는 건가요? 너무 대충인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나 엄청 진지한데.”
“제가 공장 쪽 끄나풀이었으면 어쩌시려고.”
그럼 오히려 고맙지. 탄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아혼이 제 사람을 여기에 심으려 했다면, 역으로 그를 이용하면 그만이다. 일부러 거짓 정보를 전달하게 하거나, 먹음직한 미끼로 삼아도 된다. 활용법이야 무궁무진하다.
상대가 날 속이려 하면, 나도 상대를 속인다. 그게 탄의 방식이었다.
탄은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꾸며내며 말했다.
“너 끄나풀이냐? 그럼 곤란한데. 네가 예상한 대로 지원자가 너 하나뿐이거든.”
“끄나풀 아니에요. 동생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뭔가 인증 절차가 필요하시면 뭐든지…….”
“됐어, 이쯤이면 충분해.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도록.”
다언은 냉큼 기뻐하지 못하며 커다란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근데 정말 지원자가 저 하나예요? 저 한 명으로 돼요?”
“음. 힘들겠지.”
탄은 짧은 고민 끝에 말했다. 63구역이 만만치 않은 곳이라 짐작했지만, 다언과 대화하면서 그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비공식적인 조직이 암묵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땅. 시티 홀에서 온 보안관이 끼어들 자리라고는 없어 보였다. 아혼의 명령 하나로, 사무소에 며칠 내도록 날벌레만 날아다녔던 것이 증거다.
이대로는 안 된다.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외곽에서, 소리 소문 없이 개죽음당할지도 모른다. 힘과 아군이 필요했다. 우고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중앙에서 버려진 후 63구역은 배타적으로 변했다. 외부에서 보면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 공간 같다.
탄은 여기에 틈을 내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었다. 보안관으로서의 권위를 절반이라도 인정받는다면, 새로운 인맥을 만들고 정보를 채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내몰린 벼랑 끝. 이대로 추락하더라도, 그 벼랑을 지지대 삼아 기어오르는 힘을 배워야 한다.
탄은 입매에 힘을 꾸욱 주고서 말했다.
“부관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근데 내 예산이 아주 넉넉하지는 않아서. 한둘 정도 더 있으면 딱일 것 같은데.”
“저처럼 공장과 연이 끊긴 사람들이라면 이 일에 관심 보일 거예요. 지금은 아혼이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걸 테죠. 설득은 해 볼 수 있어요.”
“아니야. 내가 따로 생각해 둔 사람이 있어. 그 녀석이면 좋겠는데.”
탄은 거대하고 유순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엄청난 힘과 에스퍼를 닮은 기이한 기운도. 웬만하면 제 통제권 안에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애쉬.”
다언은 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누구요?”
“그 청소부 말이야. 떡대 하나는 필요할 것 같아서. 그놈이 딱이네. 우리 조합이 좋은걸.”
탄은 이미 애쉬가 부관이라도 된 양 상상했다. 당사자의 의견은 묻기도 전이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힘쓰는 일 맡기기도 좋고, 무엇보다 아주 고분고분했다.
“아니, 그. 저기요.”
다언이 입술을 파들거리며 탄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가 뭐냐. 이제 내가 상사인데 호칭 정도는 제대로 해 주지? 섭섭해.”
“……네, 보안관님. 그런데 애쉬는 안 될 텐데요.”
“왜?”
“공장 소속이니까요. 아혼이 순순히 애쉬를 공장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 그러면……. 우리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애쉬를 가져오자.”
“네?”
다언의 얼굴에는 감정이 고스란히 글자로 적혀 있는 것 같았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생각은 하고 사는 건가.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할 글자들.
“좋은 지적이었어. 너 제법 날카로운 구석이 있구나.”
“보안관님. 그러니까 제 말은.”
“아니, 아니야. 겸손 떨 필요 없어. 도움이 됐어. 내일 업무는 정해졌네. 공장으로 가서 애쉬 데려오기. 가는 길은 다언이 안내해 주고. 알겠지?”
“저, 아니, 보안관님.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가요?”
다언은 조곤조곤한 어투로 너 미친놈이냐는 말을 정제해서 내뱉었다.
“외부인이라서 잘 모르시나 본데, 그렇게 혼자 공장에 갔다가는 큰일이…….”
“나게 되면 뭐 어쩔 수 없고. 근데 안 날 거야.”
탄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의 미끈한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지금부터는 업무 시간 아니니까 이만 가 봐. 나는 정시 퇴근을 추구하는 편이라서. 수고했어.”
탄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다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다언은 눈가를 찡그리며 몸을 뒤쪽으로 슬쩍 물렀다.
“어떻게 되시든 저는 책임 못 져요. 상황이 이상해지면, 바로 보안관님한테서 돌아설지도 몰라요.”
“당연히 그러셔야지. 첫째도 둘째도 네 목숨이 제일 중요해. 너부터 챙겨, 무조건. 나 그런 거로 섭섭해할 사람 아니야.”
“…….”
“아무튼 나만 믿어.”
“원래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시나요? 언제나, 늘?”
“음. 조금 그런 편?”
탄이 싱그럽게 웃었고, 다언은 맥이 풀렸다. 이 남자와는 길게 입씨름해 봤자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애쉬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걔한테도 여러모로 나랑 일하는 게 훨씬 낫지 않나? 보수나 근로 환경이나. 애쉬를 위해서 억지로라도 우리 집으로 데려와야지.”
“아, 네.”
다언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신경을 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보통은 그런 걸 납치라고 부르지 않느냐는 물음도 넣어 두었다. 그래. 상사가 어떤 인간이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월급이나 꼬박꼬박 잘 주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