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활기찬 폐발전소 (3/14)

3. 활기찬 폐발전소

애쉬는 미동 없이 시체처럼 자고 있다가 번쩍 눈을 떴다. 이리저리 뻗친 연회색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으며 벌떡 일어섰다. 완벽한 알몸이었다.

천장에 정수리를 들이박지 않도록 마지막에는 허리를 살짝 굽혔다. 애쉬에게 주어진 공간은 그의 큰 덩치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폐쇄된 발전 공장에 불법 개조와 증축을 거듭한 지 수십 년. 공장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공동 주택이 되었다. 캐슬 시티에서 가장 번잡한 수직 슬럼가.

휑하던 공장이 지금은 빼곡하게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계단 난간을 수시로 튼튼하게 손보고, 지붕을 고치고, 벽을 세웠다. 처음에는 널빤지로 각자 자는 공간을 분리해 두는 정도였는데, 그게 점차 발전했다.

애쉬가 머무는 곳은 2층 구석에 박혀 있는 1인용 실이었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허술했다. 그가 누우면 꽉 차는 데다 천장도 낮았다. 심지어 문도 없어서 입구에 가림막을 달아 놓았다.

애쉬는 벽에 걸어 놓았던 점프 수트를 집어 들며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늦장 부릴 시간이 없다. 옷을 아래에서 위로 한 번에 끌어 올려 입었다.

커다란 손이 가림막을 휙 젖혔다. 그제야 애쉬의 허리가 곧게 펴진다. 애쉬가 1층을 향해 저벅저벅 말없이 걸어갔다.

‘4번가로 배달. 세탁소 청소. 3층 29호실 의뢰. 쓰레기 수거.’

일정을 곱씹던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쓰레기 수거 경로는 보안관 사무소 앞을 포함한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찼다.

63구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잘생기고 깔끔한 남자. 앞머리를 뒤로 말끔하게 넘겼고, 피부는 반들거렸다. 좋은 냄새가 났다.

‘까만 머리, 까만 눈.’

애쉬는 어느새 탄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쌍꺼풀 없이 큰 눈이었다. 남자는 웃음이 많았다. 탄이 웃는 순간, 그의 눈가 옆에 살짝 파이던 눈주름과 입가 근처의 볼우물을 떠올렸다.

탄에게 손목을 붙잡혔을 때 온몸에 몰아치던 알 수 없는 감각도 곱씹어 보았다. 아주 좋고, 아주 이상했다.

탄과 만난 이후로 몸이 달라진 듯했다. 특히 탄과 접촉했던 당일은 몇 배로 힘이 넘쳐흘렀다. 수레에 산처럼 쌓인 쓰레기를 단 한 개도 떨어뜨리지 않고 운반했다.

‘오늘도 쓰레기…… 있을까.’

사무소 앞이 말끔하면 근처에 서성거릴 명분이 없어진다. 그러면 보안관도 보지 못한다.

그건 어쩐지 싫다. 우뚝 서 있는 애쉬의 얼굴에 시무룩한 기운이 슬며시 번졌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가 힘없이 처지려 했다.

아냐. 이럴 때가 아니지. 애쉬는 고개를 탈탈 흔들었다. 오늘은 바쁘다. 할 게 많다.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에서 쓰레기, 보안관 사무소, 탄 등등을 몰아낸 후에 다시 움직였다. 공용 공간인 1층에 도착하자, 지나가는 사람마다 애쉬에게 알은체를 했다.

“잘 잤냐?”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

“애쉬. 내 심부름 안 잊었지?”

꾸벅, 꾸벅, 끄덕, 꾸벅. 애쉬의 고개는 좀처럼 쉬지 못했다.

애쉬는 공장에서 가장 인기 많은 심부름꾼 중 하나였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궂은일도 덤덤하고 재빠르게 해내기로 유명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은 청소부로 살고 있다. 아혼에게서 받은 정기 의뢰였다. 62구역(혹은 61구역일 때도 있었다) 소각장 직원에게 쓰레기를 맡기고 나면, 아혼이 돈을 줬다. 그 외의 시간은 공장 사람들에게 받은 잡일을 처리했다.

기억도 없고 제 이름도 모르고 말도 못 하지만, 애쉬는 무척 영리했다. 따로 메모해 두지도 않아도, 의뢰 내용을 헷갈리거나 까먹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서둘렀다. 공용 수돗가로 가서 큰 몸을 쭈그리고 앉았다. 63구역 주택가에 매립된 수도관을 공장까지 끌어온 것도 벌써 10년 전 일이다.

관리인이 수돗가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물을 지나치게 낭비하거나, 한 사람이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애쉬는 물을 틀기 전에 관리인을 슬쩍 바라보며 꾸벅 인사했다. 그러고서야 버튼을 꾹 눌렀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눈곱을 떼고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점프 수트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구강 세척액을 꺼내 입 속에 잠시 머금고 있다가 퉤 뱉었다. 코에 알싸한 기운이 가득했다.

킁. 아침 세수를 마친 애쉬가 코를 한 번 들이켜며 일어섰다. 기다란 앞머리가 물에 젖어 살짝 갈라졌다. 얼굴에서 뚝뚝 흘러내린 물방울은 대충 옷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세수했고. 다음. 그다음은…….’

머릿속에 빼곡하게 새겨 둔 일정표를 확인하던 도중. 입구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웬만하면 4층에 머무는 아혼이 계단을 다급히 뛰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뭐야? 보안관이 여길 왜 찾아와.”

아혼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보안관?’

애쉬는 무심히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몸을 끽 멈추었다.

‘보안관!’

그 남자를 말하는 걸 테다. 까만 머리, 까만 눈.

애쉬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기계처럼 일정표대로 움직이던 몸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 애쉬가 우뚝 서서 아혼과 입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장 간부 하나가 아혼에게 뛰어와 사정을 설명했다.

“막무가내인데요. 무조건 들여보내 달라고 난리입니다. 그래도 시티 홀 보안관인데…… 그냥 처리해 버리면 안 될 것 같지 말입니다.”

애쉬는 아혼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거기서 오가는 대화를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평균을 훨씬 웃도는 예민한 청각이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그런데 보안관 옆에 다언도 같이 있습니다.”

“다언이?”

아혼은 혀를 한 번 찼다. 그녀가 이마를 확 찌푸리더니, 펑퍼짐하게 퍼져 있던 검은 곱슬머리를 한데 모았다. 평소처럼 머리를 높다랗게 묶고 나서야, 그녀가 턱짓했다.

“우선 들여보내.”

애쉬는 손으로 옷자락을 꽈악 쥐었다가 놓았다. 쿵, 쿵.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꾹 덮었다.

‘왜? 왜 여기에?’

이마에서 땀이 날 것 같다. 체온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제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또렷하게 인지되었다.

잠시 후 공장의 입구가 열렸다. 탄과 다언이 안으로 들어왔다. 탄은 보안관 제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단추 하나 비뚤어진 곳이 없었으며, 포마드 스타일은 완벽했다.

잔뜩 긴장한 다언 하나만 데리고 공장 한복판에 들어왔는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미끈한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넘쳤다.

탄은 찬찬히 공장을 훑어보다가, 곧 망설임 없이 아혼에게로 다가갔다. 여기의 리더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본 거다.

일직선으로 걸어가던 탄이 잠시 시선을 돌려 애쉬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애쉬는 바닥에 못 박힌 듯이 서 있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봤다.

눈이 마주쳤다. 체온이 아까보다 더 상승하고 있다. 애쉬는 긴장된 육체를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미세 근육에 힘을 풀고 심호흡하려 애썼다. 그러나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아혼 앞으로 다가온 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혼이구나?”

“어째서 다언을 데리고 있지?”

다언은 탄과 멀찍이 떨어져서는 후드를 눌러쓰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어느 쪽에도 엮이기 싫다는 듯이.

“내 부관이니까.”

“뭐라는 거야. 여긴 왜 왔어.”

“얘기 좀 하려고. 인사도 나눌 겸. 내가 며칠 전에 이리로 이사 온 건 알고 있나?”

오가는 대화는 거칠고 거침없었다. 아혼은 시티 홀 보안관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탄도 그보다 적어도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아혼에게 망설임 없이 하대했다.

아혼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매섭게 생긴 인상이 더 사나워졌다.

“도대체 캐슬 새끼들은 뭔 생각 하는지를 모르겠어.”

“어, 그래? 나도 몰라. 난 캐슬 새끼들 대표로 온 게 아니거든. 거기 입장 대변하려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이야기 나누러 온 거야. 당신이랑.”

“그런 표정 좀 안 지으면 안 되나? 갖다 치웠으면 좋겠는데.”

“지금 내 표정이 어떤데.”

“실실거리며 재수 없는 표정.”

“이상하네. 경비대에서는 매력적인 미소라고 칭찬 많이 받았는데.”

“시끄러워. 의뭉스럽게 굴지 말고 본 목적부터 말해. 시간 없어.”

아혼은 신경질 내면서 고개를 미세하게 옆으로 기울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만한 고갯짓이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조용한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아혼의 수족들이 움직였다. 불가피한 상황에 대비하여 전투태세를 갖춘 거다. 다들 은밀하고 재빨랐다.

하지만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애쉬는 그들의 기척을 정확히 포착해 냈고, 몹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위험해.’

보안관이 위험하다.

애쉬에게 탄은 사지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먹잇감처럼 보였다. 왜 저러는 걸까. 보안관은 금세 찢기고 말 거다.

아혼의 수족들은 죄다 무기를 갖고 있었다. 불법으로 제작되어 흉흉하게 개조된 무기들.

‘다칠 거야.’

그건 싫다. 왜지? 어쩐지 싫다. 공장을 좋아하고 아혼도 좋아하지만, 검은 머리 보안관이 다치는 것은 좋지 않다.

애쉬가 안절부절못하다가 무심코 탄 쪽으로 발을 내뻗으려 할 때, 탄이 입을 열었다.

“좋아. 뭐, 본 목적부터 빠르게 갈게.”

“…….”

“쟤 좀 나한테 줄 수 있을까?”

탄의 시선은 정확하게 애쉬에게 꽂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끅. 애쉬가 그답지 않게 신체를 제어하지 못하고 딸꾹질을 내뱉었다.

‘나? 왜?’

끅. 거대한 몸이 들썩였다. 젖어서 갈라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녹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끄윽.

아혼은 당황한 채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쟤라니. 애쉬 말하는 거야?”

“응. 지금 딸꾹질하고 있는 애.”

끅. 끄윽. 딸꾹.

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공장 4층, 아혼의 사무실. 새로운 보안관과 공장의 리더가 독대하는 중이었다.

“애쉬는 안 돼.”

아혼의 음성이 단호하게 떨어졌다. 탄은 차분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아혼이 갖다 치웠으면 좋겠다고 표현한 바로 그 표정이다.

“왜? 애쉬가 여기서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야? 그냥 심부름꾼이라던데.”

사실 탄의 자신감은 객기라기보다는 신중함에 근거했다. 며칠간 그는 야간 순찰이란 명목하에 거리를 슬렁슬렁 지나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좋았다. 애쉬란 남자에 관한 것이면.

쉽지는 않았다. 다들 아혼의 말을 의식한 듯 탄을 피하기 바빴다. 공장 밖 사람들도 그랬다. 63구역에서는 형편이 좋은 축이고, 아혼에게 매인 몸도 아닌데도. 그들은 아혼을 존경하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오가는 말에서 애쉬에 대한 힌트를 몇 가지 얻을 수 있었다.

<빠릿빠릿하고 힘 좋은 놈이죠.>

<공장 안팎을 나다니면서 이것저것 심부름을 해 줘요. 보수도 비싸게 안 받고.>

<좀 맹하지만 막 모자란 녀석은 아니고요. 어, 음. 인사성도 밝고. 예.>

다들 탄의 질문에 한두 마디 빠르게 대답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몇 가지 유의미한 추론을 할 수 있었다.

63구역 사람들에게 애쉬는 그저 순진한 심부름꾼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 힘이 좋은 청년이지만, 그 힘이 기이할 정도는 아닌. 즉, 애쉬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 없이 적당히 섞여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탄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애쉬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전이시키는 이능력. 민간인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

탄은 어쩌면 애쉬의 기이한 힘을 목격한 건 자신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혼은 어떨까. 애쉬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쓸 만한 아이여서 아끼는 것뿐일까.

탄은 아혼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원하면 돈도 줄 수 있어. 스카우트 비용? 뭐 그런 셈 치고.”

“도대체 왜 애쉬에게 집착하는 거지?”

“걔가 마음에 들었거든.”

아혼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내가 포주인 줄 알아? 난 사람 사고파는 짓은 안 해.”

“포주라니.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었는데? 날 뭐로 보고. 뭐, 애쉬가 매끈하니 잘생기긴 했다만.”

탄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다리를 꼬았다. 예상보다 아혼이 강경하게 나왔다. 그 점이 탄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애쉬가 당신 소유물이라도 돼? 여기 간부급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애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잖아. 당신이 무작정 반대해도 되는 거야?”

“애쉬는 너 따라가기 싫어할걸. 순진한 녀석 부려 먹을 생각 하지 마.”

“어떻게 알아. 직접 물어봐. 애 의견도 들어 봐야지. 엄마랑 아빠 중에서 누구랑 같이 살고 싶은지.”

“그쯤하고 입 다물지?”

아혼은 탄에게 덤벼들 듯이 쏘아보았다. 왼손에서 굴리던 작은 나이프를 금세라도 탄의 얼굴에 꽂아 넣을 기세였다.

탄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반듯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도발은 적당히.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을 듯 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아혼같이 카리스마형 리더를 상대할 때는 더더욱.

“농담입니다, 농담.”

“이거 봐. 캐슬의 개새끼들은 다 재수가 없어. 뭘 믿고 그 밑으로 애쉬를 보내?”

탄은 아혼의 어투에서 그녀가 애쉬를 어린아이처럼 여긴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애쉬가 정말로 걱정되어 공장 밖으로 내보내기 싫은 것 같았다.

아혼은 63구역을 제패한 사람치고는 투명했다. 표정이 휙휙 바뀌었고, 감정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억센 다혈질에다 힘으로 승부 보려는 타입. 본연의 카리스마와 분위기로 사람들을 규합했을 것이다. 단순하기에 단단하고, 그만큼 불같은 여자다. 늘 가식적인 얼굴로 서로를 경계하는 상위 구역 주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탄은 무릎 위에 얹어 둔 손끝을 까딱이며 생각했다. 아혼도 애쉬를 제대로 모르는 게 아닐까. 저 여자가 애쉬의 특별함을 일찌감치 알아챘다면, 아마도 그 녀석을 심부름꾼으로만 쓰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돌아갈 수도 있겠다. 상대가 애쉬의 가치를 모를수록 협상은 쉬워질 테니. 탄은 미소 섞인 얼굴로 말했다.

“캐슬의 개새끼라니 말이 심하시네. 내가 저 성벽 밖에서 날뛰는 놈들만큼 험하진 않거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하나는 있을 텐데. 얼굴이라든지?”

“이런 점. 이렇게 능글대는 게 별로라고.”

“이런 거 싫어하시는구나. 접수. 그런데 당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애쉬를 꼭 데려가야겠다면?”

“목숨이 여러 개인가 보지.”

“뭐, 보안관을 죽이기라도 하려고?”

“못 할 것 같아? 가이드라는 양반이 63구역에 처박힌 것만 봐도 뻔해. 시티 홀에서 버림받았지?”

“그런 것 같아?”

탄은 아혼의 거친 시선을 받아 냈다. 뻔뻔하고 능글맞은 투로 거짓말을 술술 읊어 나갔다.

“오해가 좀 있으신가 본데. 내가 그냥 가이드가 아니라 S급이거든요? 신분증 보여 드릴까?”

아혼은 믿지 않는 표정으로 탄을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 시티 홀이 보안관 정보를 아무렇게나 흘려 줬을 리는 없을 테니.”

아혼이 혀로 입 안쪽을 느리게 훑었다. 잔뜩 심기가 비틀린 얼굴이었다.

“S급인데 뭐 어쩌라고. 여기선 그런 거 상관없어. 네 잘난 척 받아 줄 사람도 없고.”

“잘난 척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경고를 해 주는 건데. 나는 제법 귀한 몸이니 마음대로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자신감이 넘치시네.”

“시티 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가이드라서 그렇죠, 뭐.”

탄이 눈가를 한껏 둥글게 접고서는 말을 이었다.

“보안관으로 발령받은 것도 시티 홀이 날 아낀다는 증거인데. 지금 단단히 오해한 거야. 아까운 정보지만,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 하나 알려 줄게. 사실은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사람 하나를 죽였거든.”

아혼의 손에서 핑글핑글 돌아가던 나이프가 우뚝 멈추었다.

“S급한테 차마 추방형이나 사형을 때릴 순 없으니까. 아예 없었던 일인 양 넘어가기도 좀 그렇고. 잠잠해질 때까지 보안관 일이나 하라고 잠깐 여기로 빼 줬지.”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냐?”

“맹세하는데 거짓말이라고는 요만큼도 하질 않았네요. 의심스러우면 정보상 활용해서 최근 경비대에 죽었다는 애 있나 알아보시고. 그 정도 정보력은 되지?”

아혼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네가 대단하신 분이라고 치고. 하필이면 왜 63구역에 오셨대? 더 좋은 구역도 많잖아?”

“아, 여기가 내 고향이거든. 이왕 하는 일, 동향 사람들 도우면 더 좋겠다 싶어서.”

“네가 여기 출신이라고?”

탄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혼은 손장난하던 나이프를 툭 책상에 내려놓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시선이 진득하게 탄을 훑어 내렸다.

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되레 이 기회에 아혼을 하나하나씩 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아혼의 눈가에는 검은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눈꼬리를 더 길고 사납게 보이기 위함이다. 목 빗근과 손가락 위에도 자잘한 타투가 있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방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로를 샅샅이 탐색하는 신경전이 막을 내린 건, 아혼의 나지막한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 너였구나?”

아혼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여나의 아들이었어. 맞지? 이제야 기억이 나네.”

여나라는 이름에 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비뚤어졌다.

“여기야 경비대와 워낙 동떨어져 있다 보니, 그쪽 일은 잊고 살게 되거든. 이야. 너 때문에 참 난리가 났었지. 우리 구역에서 가이드가 나오다니. 그냥 가이드도 아니고 최상위급!”

형질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진 법칙은 없었다. S급은 부모 둘 중 하나가 형질 보유자라는, 경험적 데이터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156년의 역사 중에 단 세 번의 예외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탄이었다.

탄은 입매를 다시 바르게 했다. 63구역 출신인 걸 밝히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 정도까지는 예상했다. 무려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때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형질 검사로 팔자 제대로 폈지. 근데 날 알아? 난 당신이 기억 안 나는데.”

“그렇겠지, 꼬마야. 꼬마가 뭔 기억을 하겠니?”

“꼬마?”

허허. 탄이 웃었다. 그렇게 불린 게 너무 오랜만이라, 짜증이 나기보다는 황당했다.

“네가 여덟 살에 찔찔 울면서 여길 떠날 때 난 이미 성인이었단다.”

“나 안 울었거든요?”

“울었을걸?”

“아니, 안 울었…… 됐고. 당신 나이가 그렇게 많았어? 놀라운데. 난 우리가 동년배일 줄 알았거든.”

“쓸데없는 빈말은 집어치워. 도대체 그 입 놀리는 건 누구를 닮은 거냐? 여나는 이렇지 않았는데. 도망갔다는 아비 쪽인가?”

“내 가정사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텐데.”

엄마의 이름에 아버지 이야기까지. 이건 예상 범주 밖이다. 탄은 방에 들어오고서 처음으로 표정을 제어하는 데에 실패했다. 느긋하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인공적인 미소는 가시고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여태껏 탄이 야금야금 끌어모은 대화의 흐름이 아혼에게 넘어가려 했다.

“여나랑 꽤 가까웠으니까.”

“우리 모친이랑 친하셨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 기억에는 당신이 없는데.”

“그 무렵 한창 먹고살기 바빴어. 20대 초반이었다고. 몇 번 널 보기야 했지만, 특별히 같이 뭘 한 적이 없었으니 기억 못 하겠지. 내가 꼬맹이한테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거든.”

“무정하셨네. 그래도 친한 친구의 아들인데. 신경도 안 썼다니.”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냐? 여나 장례식에도 안 온 놈이.”

“왜 아픈 데를 건드리고 그럽니까.”

슥, 스윽. 탄이 마른 손바닥으로 입가와 턱을 문질렀다. 굳어 있는 입꼬리를 몰래 꿈틀거리며 힘을 빼려 애썼다. 다시 손을 치웠을 때는 탄은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귀향했잖아. 불효자는 웁니다, 하면서.”

“이제야? 여나가 널 얼마나…….”

“그만 혼내시고. 이 이야기는 이쯤 하죠. 결론은, 난 좋은 마음으로 여기에 왔다는 거. 그거나 믿어 달라는 거야.”

“난 내 사람 아니면 안 믿어.”

“그래? 안 믿으면 곤란할 텐데.”

탄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제복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호스가 달린 자그마한 병이었다. 병 안에는 초록색 액체의 찌꺼기가 소량 남아 있었다. 호스는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돌려쓴 듯 낡고 해졌다.

탄은 테이블 한중간에 이 미심쩍고 더러운 물건을 올려 두며 말했다.

“내가 요 며칠 구역 미화를 위해 쓰레기를 좀 줍고 다녔는데, 골목에 이런 게 버려져 있더라고.”

실은, 줍고 다닌 게 아니라 샅샅이 파헤치고 다녔다.

63구역에는 시티 홀 청소부가 없다. 어떠한 감시도 받지 않은 채, 사람들은 거리 곳곳에 아무렇게나 생활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 거리의 쓰레기만큼 이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건 없었다.

탄은 보안관에게 딱히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 쓰레기 더미 하나를 뒤지는 쪽이 더 많은 정보를 얻으리라 판단했다. 며칠 내내 구석에 버려진 쓰레기를 마음껏 파헤쳤다. 그 누구도 경비대 출신 보안관이 쓰레기를 뒤지고 다닐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방심 속에 거리로 내던져진 생활의 흔적들. 탄에게는 귀한 광물처럼 보였다. 역하고 더럽고 고된 채굴 작업을 거쳐야 했지만 말이다.

다행히 노력은 탄을 배신하지 않았다. 탄은 엊그제 쓰레기 사이에서 수상한 약병 하나를 건져 올렸다. 이제 그놈이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 그를 기쁘게 해 줄 때였다.

탄은 또렷하게 말했다.

“이거 불법 마약이지?”

아혼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물끄러미 약병을 바라보았다.

캐슬에서는 마약이 금지되어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시티 홀이 나서서 직접 개발하고 판매한다. 악독할 정도로 비싼 값이지만.

시티 홀은 합법 마약이 인체에 무해하며 중독성이 낮다고 홍보했다. 상위 구역의 모임에 가면 심심찮게 마약을 들이마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이 제조한 마약은 모두 불법이었다. 개인끼리 약을 거래하는 것도 안 된다. 모두 중죄로 다루어지는 일이었다.

탄은 한때 여러 상류층 모임에 이리저리 불려 나갔다. 덕분에 마약이라면 꽤 알고 있었다. 권유에 못 이겨 직접 몇 번 해 보기도 했다.

그 귀찮았던 경험이 이렇게 쓰이다니. 탄은 파티 때마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마약을 건넸던,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2구역 도련님에게 잠깐 감사 인사를 보냈다. 고맙다. 너 같은 쓰레기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탄이 아는 바로는, 합법 마약 중에 초록색 액체로 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아혼을 추궁했다.

“이거 만들어서 어디에 파시나? 63구역 수요만으로는 돈벌이가 안 될 테고. 다른 구역에도 팔겠지? 이런 불법적인 사치를 적당한 가성비로 즐기고 싶은 사람들한테.”

30구역 아래로만 내려가도 잠깐의 유흥을 위해 합법 마약을 사는 건 지나친 사치였다. 그런 이들에게 불법 마약은 유혹적인 대체재였을 것이다.

아혼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것도 처음 보고.”

“그러면 내가 이거 시티 홀에 보고해도 돼?”

“해 보든가.”

“지금까지는 시티 홀이 63구역을 그냥 내버려 뒀지만…… 내가 정식으로 이걸 보고하면, 그쪽도 조사를 안 하고 넘어갈 순 없어.”

시티 홀은 63구역을 버렸다. 이 안에서 구세계 신화 속 소돔과 고모라가 재현되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 한 번에 몰아넣고 구역 출입구를 닫아 버리는 쪽을 택하겠지.

하지만 63구역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온 것이 다른 구역을 오염시키는 건 좌시하지 않을 터였다.

“당신네 돈줄 맞잖아, 이거.”

탄은 거의 확신했다.

63구역에 할당된 배급품은 극도로 적었다. 다른 구역과의 왕래도 자유롭지 못하다. 돈이 유통되는 경로가 한정적이니 당연히 구역 내 시장은 갈수록 위축된다. 가난의 고리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런 곳에서 이들은 수십 년간 살아남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발전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여전히 하찮을지라도.

공장에는 그럴싸한 공용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자재들은 어디서 났을까. 다른 곳에서 사 왔을 것이다. 그걸 사기 위해 지불했을 돈. 그건 어디서 흘러들어 온 걸까.

돈의 통로를 만든 이가 63구역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이곳을 지배할 것이다. 마약 제조법을 독점했거나, 밀거래가 잘 이뤄지도록 다른 구역과 연줄이 닿아 있는 자.

하위 구역에서 형성된 암시장의 중심에 서 있을 인물.

탄은 그 사람이 눈앞의 아혼이라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추론이 이어지고 상상이 떠올랐다. 아혼이 암시장에서 돈을 번다. 그 돈으로 생활필수품과 식량을 잔뜩 사들여 63구역으로 갖고 온다. 시티 홀 대신 아혼이 배급품을 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혼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도 모두 이해가 된다. 그녀가 63구역 전체를 먹여 살리고 있으니. 벌어들인 돈으로 여기를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아혼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이곳의 유일한 생명 줄이 되기를 택했다.

아혼은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탄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시선이 팽팽하다. 최대치로 아슬아슬하게 늘어난 듯한 고무줄을 끊어 낸 건 아혼이었다.

“협박해? 난 모른다니까.”

“협박이라니. 동맹을 제안하는 건데?”

탄이 나긋하게 말했다. 애초에 아혼을 칠 생각은 없었다. 약점을 하나라도 쥐어 억지로 그녀와 손잡으려는 것뿐이었다. 63구역에서 자리 잡기 위하여.

아혼이 시티 홀의 규율을 여겼다 한들, 그게 중요하겠는가. 탄은 캐슬을 향한 충성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모른 척 입 다물게. 공급책, 유통책, 어디까지 관련되어 있는지 전혀 터치 안 한다고.”

“…….”

“대신 사람들한테 나 무시하라고 했던 말 취소해 줘. 다들 날 병균 취급 하더라고. 보통 곤란한 게 아니야. 아, 그리고 애쉬도 나 주고.”

탄이 아혼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혼은 작게 헛웃음 쳤다.

“이봐요, 손이 민망하잖아.”

탄은 허공에 붕 떠 있는 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재촉했다.

“치워.”

아혼의 차가운 대응에도 탄은 여유로웠다. 어차피 아혼은 이 손을 잡게 될 것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시티 홀에 알려지면, 께름칙한 소동도 한바탕 벌어질 테다.

“왜. 나랑 친구 해 주면 안 돼?”

“친구? 나이도 한참 어린 게.”

“그러면 누님이라고 부를까?”

“꺼져.”

“너무 경계하지 마. 섭섭하네.”

아혼이 도톰한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으며 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애쉬 말이야. 내 옆에 붙여 두는 게 당신도 더 좋지 않겠어? 여차하면 그놈한테 날 감시하라고 해. 난 떳떳하니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탄은 여전히 허공에서 빈손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혼이 타투가 새겨진 매서운 눈매로 탄을 노려보다가 악수하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찰싹.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건 세찬 마찰음이었다. 아혼이 힘주어 탄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야.”

탄이 손목을 털털 털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아혼의 손맛은 매웠다. 맞은 살갗이 벌써 빨개졌으나, 탄의 미소는 진해졌다.

아혼이 뾰족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부터 나랑 친하게 지내려면 내 앞에서 능글대지 마.”

맵찬 손길에 담긴 뜻은 거절이 아닌 동의였다. 악수는 거부당했어도 동맹은 성공한 셈이다. 탄은 입꼬리를 최대치로 말아 올렸다.

“그냥 타고난 말투가 이런 건데.”

“토 달지도 말고.”

“너무하네. 독재자야?”

아혼이 피곤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탄의 물음은 가볍게 무시하고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애쉬 좀 들어오라고 해!”

곧바로 문이 열리고 연회색 머리카락이 빼꼼 튀어나왔다. 애쉬는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테이블 중간에 우뚝 서서는 아혼과 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래로 내려 맞잡은 손이 공손했다.

“안녕, 애쉬.”

탄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인 양 살갑게 말을 건넸다. 미소는 발랄했다. 애쉬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곧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참 예의도 바르지. 너 혹시 나랑 같이 우리 집에 안 갈…….”

“애쉬.”

아혼이 탄의 말을 중간에서 싹둑 끊어 내며 끼어들었다.

“대충 밖에서 상황 전달받았지? 널 부관으로 데려가고 싶다네. 여기에 계속 있을래, 아니면 저 뺀질이 따라갈래?”

탄이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쿡 찌르며 어이없어했다.

“뺀질이라니. 나 말하는 건가. 아니, 나한테 애쉬를 주는 쪽으로 결론 난 거 아니었어?”

“그래도 애 의견은 들어 봐야지. 애쉬, 너 어떡할래? 빨리 말해.”

“날 어필할 기회라도 주든가요.”

애쉬는 중간에서 초조하게 손끝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자꾸 치솟는 제 체온을 의식하며. 밖에서 다언에게 전해 들은 여러 이야기가 희미해졌다. 부관 월급이라든지, 맡게 될 일이라든지.

하나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검은 머리 보안관의 이름이 탄이라는 것. 애쉬가 그의 이름을 듣게 된 건 처음이었다. 탄, 탄, 탄. 이름, 탄. 오로지 탄이라는 글자만이 애쉬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애쉬는 덥수룩하게 자란 앞머리 틈새로 탄을 힐끔거렸다.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얼굴.

그러다가 갑자기 탄이 애쉬의 손끝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로서는 습관적인 살가움의 표시였지만, 행동의 여파는 컸다.

둘의 피부가 맞닿은 순간. 애쉬는 커다란 몸을 흠칫 떨었고, 탄의 머릿속에는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탄, 탄, 탄, 탄, 이름. 탄, 탄, 탄…….』

“응?”

제 이름만 반복해 부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성을 듣는다면 어떠할까. 당연히 놀랍고 기이할 것이다. 하지만 탄은 그보다는 호기심을 더 강렬히 느꼈다.

역시 이상한 놈이잖아. 저번에 들은 게 환청이 아니었다. 이 자식, 내가 필시 데려가야만 한다. 옆에 끼고 조목조목 살펴봐야지.

기이한 음성은 오래가지 않고 끊겼다. 당황한 애쉬가 손을 제 등 뒤로 숨긴 탓이었다. 소리가 말끔하게 사라지면서 방 안도, 탄의 머릿속도 고요해졌다.

탄은 흥분과 동요를 숨긴 채 침착하게 말했다.

“애쉬. 나 보기보다 다정해. 사무소도 깨끗하게 치우면 둘이 살기엔 충분할걸. 월급도 넉넉할 거고. 내가 진짜 잘해 줄게.”

아이 달래는 것처럼 상냥하게 굴었는데, 애쉬의 허리는 점점 더 굽어지기만 했다. 고개까지 푹 숙인 채로 절절맸다.

아혼은 신경질적으로 탄을 쏘아보며 말했다.

“애 괴롭히지 마.”

“내가 지금 애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 어이없네.”

실제로도 애쉬는 겁먹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속으로 이렇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따라가고 싶다. 검은 머리 보안관을. 탄, 탄, 이름, 탄을. 하지만 그래도 될까? 내가? 탄은 왜 나를 데려가려는 거지? 나는 왜 따라가고 싶지? 모르겠어. 그런데 아까 또 손을 잡았지. 뜨거워. 기묘한 기분이 들었어. 아랫배도 뜨거워. 체온이 너무 높아. 열이 아래로 쏠려. 아픈 걸지도 몰라. 내가 지금 병에 걸려서 이상한 생각만 나는 걸지도.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겉은 고요했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시끄러웠다. 애쉬가 침묵하는 사이, 앉아 있는 둘 사이에 말이 빠르게 오갔다.

“애쉬는 사람 대하는 걸 어려워해.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고.”

“그럼 더더욱 나랑 맞겠다. 내가 경비대에서 그런 소심한 녀석들 다루기 전문이었거든.”

탄은 짝짝 시원하게 손뼉을 쳤다.

“자, 우리끼리 언쟁은 그만두고. 애쉬한테 물어봅시다. 아빠랑 살 건지, 엄마랑 살 건지.”

“그런 농담 좀 그만해. 너랑 내가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져서 기분 좆같으니까.”

“왜, 난 당신이랑 잘 맞을 거 같은데? 곧 진정한 친구가 될 듯한 느낌? 마음에 들어.”

이것만은 진심이었다. 탄은 아혼 같은 부류가 좋았다. 거칠고 솔직하면서도 중요할 때는 실리를 챙길 줄 아는 사람.

아혼의 외모까지 취향이기도 했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는 건강해 보였고,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게다가 연상. 탄이 여태껏 교제해 왔던 여자들 대부분이 그보다 연상이었다.

아혼은 벼락같은 목소리로 애쉬를 다그쳤다.

“애쉬, 너 어떻게 할 거야!”

애쉬의 눈망울이 울렁거렸다.

“싫으면 거절해도 돼.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데려가지는 않겠지?”

아혼의 날카로운 눈빛이 탄에게 박혔다. 탄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유, 당연하지. 뭐 약간의 앙심을 품고서 공장 사람들을 괴롭힐 수는 있겠지만. 섭섭하잖아. 날 거절하다니.”

“뭘 어떻게 괴롭힐 건데?”

“그냥 해 본 말이지. 애기야, 농담이다. 응? 나 나쁜 사람 아니야.”

하지만 누가 들어도 진담이 일정량 포함된 듯한 목소리였다. 탄이 그렇게 들리도록 유도했으니. 그는 원하는 걸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어떻게든 얻어 낸다. 하나의 선택지뿐이다. 포기하느니 부서질 거다. 그리고 적어도 경비대에 들어오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는, 탄은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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