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왁자지껄한 가게
“도대체 아혼을 어떻게 설득하신 거죠?”
다언이 종종걸음으로 탄의 옆에 붙으며 물었다. 탄은 이보다 더 해맑을 수는 없는 얼굴을 하고서 척척 걸어갔다. 그의 뒤꽁무니에는 거대한 덩치가 딸려 있었다. 애쉬다.
“다 방법이 있지. 거봐, 내가 큰일 안 날 거라고 했지. 다언 양은 상관에 대한 신뢰를 좀 더 키울 필요가 있겠어.”
애쉬는 결국 탄을 택했다. 탄은 자신의 계략이 통했음에 기뻐했고, 아혼은 짜증을 냈다.
둘의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애쉬는 고목처럼 조용히 서서는, 딱히 억지로 따라가는 거 아닌데, 멋쩍은 변명을 속으로만 읊었다.
보안관이 공장에 들어와 애쉬를 달라고 요구했을 때부터, 애쉬의 마음은 기묘하게 울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는 게 없었던 일도 아닌데. 공장 사람들 대부분은 유능한 심부름꾼 애쉬를 못 붙잡아 안달이었다.
하지만 탄의 자신을 향한 원함, 소망, 바람은(애쉬는 이런 단어를 감히 붙여도 될지 고민했지만 별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르게 다가왔다.
하하, 애쉬는 경쾌하게 웃는 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뒷머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살갗은 애쉬의 것보다 희었고 매끈했다.
저렇게 멋지고 특별해 보이는 사람이 왜 나를. 나는 힘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나는 텅 빈 사람인데.
애쉬는 오늘 탄과 손이 닿았을 때 재차 들었던 기묘한 감각을 곱씹었다. 탄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생각하게 되고,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니, 내내 머릿속에 탄이라는 이름이 남는다.
마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심부름 같다. 애쉬에게 그런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무언가를 미해결 상태로 놔두는 것. 그는 늘 해야 할 목록을 빽빽하게 채워 두고 기계적으로 항목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하지만 탄은 도통 지워지지 않았다. 늘 애쉬의 머릿속에서 굳건히 제자리를 지켰다. 며칠째 그랬고 아마도 한동안 그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속이 시끄러운 사람은 사무소 3인방 중에 애쉬뿐이었다. 다언은 놀람 반, 호기심 반이 뒤섞인 목소리로 계속해서 탄에게 질문했다. 평소보다 눈에 띄게 말수가 많아졌다.
“아혼은 시티 홀이라면 정말 질색하는데. 거의 증오하는 수준이거든요. 보안관님이랑 대화했다는 거 자체가 신기해요.”
“당한 게 있으니까 증오하겠지? 그렇다는 건, 시티 홀의 무서움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이란 뜻이고.”
“그런가요. 음, 네. 아혼은 오래 살았으니까요. 겪은 게 많겠지요.”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그쪽이 더 말이 잘 통하지.”
“뭔가 야비하게 들리기도 하는데요.”
탄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 쳤다.
“다언 양. 이 얼굴에 야비함이란 단어가 어울려? 아닐 텐데.”
“본인이 잘생겼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아니겠어? 나도 눈이 있어. 거울 매일 보거든?”
“보통은 아닌 척 겸손이라도 떨던데. 놀랍지는 않습니다.”
다언은 보안관님, 뻔뻔함도 그 정도면 죄라는 말은 삼켰다.
“그래도 잘생겼다는 말에 부정은 안 하네. 다언 양의 생각 잘 알겠어.”
애쉬는 뒤에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끼어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탄은 절대 야비해 보이지 않다든가, 자신도 탄이 잘생겼다고 생각한다든가.
애쉬가 마른침을 삼키고 괜히 목울대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답답하다. 둘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게. 저기, 하고 자연스레 말을 내뱉으며 끼어들 수 없는 것도.
그때 탄이 휙 돌아보며 애쉬와 마주했다. 애쉬는 마치 조금 전 속마음이 읽힌 듯하여 움찔했다. 급하고 엉성하게 걸음을 멈추려다 보니 몸이 잠시 기우뚱했다.
“애쉬.”
……끄덕.
“아침 먹었어?”
도리도리.
“오. 애들아, 그럼 우리 밥부터 먹을까? 슬슬 점심 먹을 시간인데.”
“저는 그냥 건너뛰어도 될까요? 요새 돈 나갈 데가 많아서요.”
“무슨 소리야. 내가 사는 건데. 식비는 걱정하지 마. 나랑 일하면서 점심을 건너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네. 역시 삼시 세끼 다 챙기는 편이 좋죠.”
“태세 전환 마음에 들어. 여기서 제일 잘하는 음식점으로 데려다줘.”
다언은 별 고민도 없이 목적지를 정했다. 63구역의 음식점은 몇 개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위생적인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탄은 고개를 살짝 틀어 애쉬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근데 넌 왜 계속 뒤에서 걸어? 이리 와.”
애쉬가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반 발짝 정도 탄에게 다가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거리는 움직임에 탄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낯가리는 거야?”
탄이 손을 쭉 뻗었다. 그대로 애쉬의 팔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지난 두 번의 접촉과 다르게, 이번에는 머릿속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왜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해. 이거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해야 하나. 탄이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골치 아프네.”
애쉬는 탄과 닿은 이후로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해 있었다. 탄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크게 움칫했다. 골치가 아프다니.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 건가? 내가 뭔가 실수한 건가?
애쉬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이 초록빛 위에 선명하게 어렸다. 호흡 하나하나 신경 쓰이기 시작하고, 탄에게 붙들린 곳은 뜨거웠다. 강한 아귀힘도 아니었는데 살갗이 아릿했다.
별거 아닌 한마디에도 여러 생각이 뻗쳐 나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탄에 의해 모든 신경이 뒤흔들렸다. 초조감이 급격하게 심장을 휘감아 조여 온다.
탄은 작게 혀를 차고는 애쉬의 팔을 놓아주었다. 툭. 등을 두들기며 내뱉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고 느긋했다.
“우선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화난 건 아닌가 보다. 비로소 애쉬는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끄덕끄덕끄덕.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탄의 뒤꽁무니에 따라붙었다. 내딛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아무튼, 옆으로 와.”
탄은 뒤에서 종종거리는 애쉬가 내심 신경 쓰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말하자, 애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아랫입술만 움찔거렸다. 기다란 앞머리 사이로 얼핏 드러난 눈동자에 당황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말은 곧장 잘 들었다. 애쉬가 타다닥 걸어와 탄의 옆에 붙어 섰다. 거대한 덩치가 위압감을 줄 법도 한데, 탄은 기묘한 향수에 빠졌다. 경비대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야무지게 자기 몫을 잘 챙기는 놈이면 모를까, 이렇게 순순하게 구는 놈을 보면 늘 마음이 쓰였다. 우고처럼. 성벽 밖에 내놓은 애 같다.
탄은 책임감 강하고 온정적인 리더였다. 말로는 투덜거리고 구박해도, 무리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까지 챙기려 노력했다.
넌 이게 문제야. 너무 감정적이라니까. 다른 대대장이나 경비대 간부들에게서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했다. 집단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약자를 배제하는 결단력도 필요하다고.
정말 나쁜 버릇일까. 내가 약자 중의 약자만 모여 사는 63구역 출신이라서 이런가. 가끔 이런 자조가 들기도 했다.
“씁. 걱정되는데.”
하지만 타고난 성정을 어쩌겠는가. 처음에는 수상한 녀석이라 옆에 두기로 한 건데, 막상 데리고 나오니 벌써 제 사람 같았다. 공장을 떠나게 한 책임도 져야만 했다.
탄은 다정함이 곧 미련이라면,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책임에 기반한 선의가 자기희생이라면, 어차피 여태껏 많은 걸 누린 삶이니 몇 조각 떼어 준다고 한들 티도 안 날 것이다.
“혹시 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말해.”
탄의 물음에 애쉬는 느릿하게 도리질했다. 돌아가는 고개에 주저함이 묻어 있었다. 애쉬는 탄의 살가움을 다르게 해석한 탓이다.
내가 괴롭힘당하는 애라면 거추장스러워할까? 애쉬는 불현듯 걱정에 빠졌다. 다시 공장으로 돌려보낼지도 모른다. 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애쉬의 어깨가 안쪽으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언제나 힘의 논리가 더 익숙했다. 보살핌받는 게 어색했다. 공장에도 친절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저 살기에도 급급한데 대가 없이 타인을 돕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느 날 갑자기 구역에 나타난 이방인은 자신의 필요를 공동체에 증명해야 했다. 일을 잘한다. 쓸모가 있다. 그것은 가치가 있다는 뜻이고, 비로소 다정함을 누릴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머릿속에 기억은 없어도, 이러한 논리는 자연스레 뿌리내려 있었다.
탄에게는 아직 쓸모를 다 보여 주지 못했다. 쓰레기 치워 준 게 끝이다. 보안관 사무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애쉬는 탄에게 자신이 썩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없으면 다행인데. 앞으로 누가 시티 홀이랑 엮였다고 시비 걸면 바로 나한테 말해. 이제 내가 네 보호자니까.”
보호자. 애쉬는 그 말을 곱씹으며 의아해했다. 아직 보호받을 만큼 훌륭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였는데.
탄은 이상하다. 1년 남짓한 기억을 뒤져 봤을 때, 탄처럼 반짝이고 멋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와 닿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도 든다. 이상해, 이상해…….
애쉬는 속으로 웅얼거리며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었다.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툭. 탄이 애쉬의 등을 치면서 말했다.
“어깨도 좀 쫙 펴고 다니고.”
쭈욱. 애쉬는 의아해하는 와중에도 고분고분하게 상체를 반듯하게 폈다.
“아이고, 가슴팍 한번 넓네. 가자.”
탄은 그제야 저 멀리서 뚱하니 기다리는 다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탄이 먼저 걸어갔고, 애쉬는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뒤가 아닌 옆에 꼭 따라붙었다. 탄이 슬쩍 웃으며 푸슬푸슬한 애쉬의 곱슬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애쉬는 아까 공장에서처럼 꼴사납게 딸꾹질하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다.
이상해. 이해가 안 돼……. 이마에서 열이 오른다.
쓸모없어도 아무것도 몰라도 증명하지 않아도, 호의를 받을 수 있다. 탄의 곁에 있어도 된다는 걸까?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 * *
다언은 지름길을 이용해 순식간에 식당 앞에 일행을 데려다 놓았다.
“여기예요.”
식당 이름은 <다크>였다. 네온사인 간판이 달려 있었다. 간판에 불을 밝힐 수 있을 만큼, 전기 할당량이 넉넉한 곳이란 증거였다.
63구역의 다른 가게들은 대개 그렇지 않다. 나무판이나 철판에 상호를 휘갈겨 달아 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시티 홀의 공용 자원은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매우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분배된다. 세세하게 마련된 기준에 따라 개개인의 사회 기여도를 측정하고, 그 점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공용 자원을 누릴 수 있다.
측정 기준에는 많은 항목이 존재했다. 세금, 나이, 직업, 주거 구역 등. 사회 기여도로 생활의 많은 것이 달라진다. 가장 가시적인 차이가 전기 사용량이었다.
63구역은 밤이 되면 골목이 어두컴컴하게 가라앉았다. 가끔가다 작은 네온사인이나 창가의 전등 빛이 반짝이는 게 전부다. 허공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전깃줄이 오히려 음산함을 더했다.
상위 구역은 늦은 새벽까지 네온사인이 꺼지는 법이 없다. 그들의 하루는 이곳보다 훨씬 길다.
“여기가 제일 맛있는 가게야?”
탄의 물음에 다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63구역 기준으로는요.”
셋은 <다크>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한낮이었는데도 벽에 달린 작은 조명 몇 개가 은은하게 빛났다.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딱히 장사가 잘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수로 전기를 펑펑 쓰는 걸까. 요리사는 시티 홀 기준에 따르면 사회 기여도 중하급 정도의 직업이었다.
탄은 느릿하게 가게 내부를 훑으며 자리에 앉았다. 셋이 모두 착석하고 나서야, 뒤늦게 주방 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세 명이십니까?”
마른 체형의 중년 남성이었다. 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주방장인가?”
“아아, 예. 주방장 겐즈입니다. 옷차림을 보니 그, 새로 왔다는 보안관이시군요.”
“홀 직원도 없고, 주방장 혼자 운영하나 봅니다.”
“평상시에는요. 좀 바쁜 날에는 사람을 쓰죠. 잠시만 기다리시면,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주문도 안 했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방장이 후다닥 안으로 사라졌다. 탄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내뱉자, 다언이 대신 그의 의아함을 풀어 주었다.
“보안관님, 여기는 메뉴가 따로 없어요. 그냥 그때그때 있는 재료로 주방장이 만들어요.”
“오늘의 주방장 특선, 이런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재료 수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요. 63구역에서는 신선 식품 구경하기가 힘들거든요.”
“아. 시티 홀이 여기엔 신선 식품 배급을 아예 안 한댔지? 그래도 시장에 드문드문 보이던데. 다른 구역에서 가져오는 건가? 누가?”
아혼이겠지. 탄은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떠보듯이 물었다. 다언은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잘 모르겠네요. 누군가 들여오겠지요.”
“애초에 63구역 밖으로 나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아혼 말고는 여기에 그럴 사람이 있나?”
“글쎄요.”
“그래애.”
탄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시장 답사를 해 본 결과, 신선 식품은 비싸기는 했지만 63구역 사람들이 감당 가능한 정도였다. 이런 품귀 현상 속에서 적정 가격을 유지하는 게 신기했다.
아혼이 마진을 최소화하면서 가격을 조정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63구역 사람들이 아혼과 공장에 바치는 충성심을 이해할 만했다. 공장에서 쫓겨나고서도 아혼에게 신의를 지키려는 다언의 모습도.
탄은 애쉬를 힐긋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뭐 들은 거 없어?”
도리도리. 애쉬가 그에게는 작아 보이는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만 흔들었다. 얘도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가, 진짜 모르는 걸까. 전자라면 조금은 속이 상할 것 같다. 둘 다 이제 아혼이 아니라 내 사람인데.
탄이 입술을 비죽거리고 있을 때, 겐즈가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실제 고기보다 퍼석한 합성육 스테이크. 푹 절여 놓은 채소를 얹은 볶음밥. 상큼한 향이 나는 소스가 뿌려진 튀김.
“자, 먹자.”
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했다.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었다. 제한된 재료로 만든 최선이었을 거다.
튀김은 에너지바를 갈아서 양념에 재워 놓은 것이었다. 놀랍게도 튀기면 그 메스꺼운 에너지바도 맛있어졌다.
애쉬도 묵묵히 음식을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탄은 음식으로 볼이 빵빵해진 애쉬를 툭 치며 물었다.
“애쉬, 맛있어?”
끄덕끄덕!
“그래. 천천히 먹어. 오늘 갈 데가 많아. 다언도.”
탄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은 스테이크 조각들을 다언과 애쉬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다언은 슬며시 포크로 하나를 집어 먹고서 말했다.
“사무소로 돌아가는 거 아니고요?”
“으음. 그럴까 했는데. 좀 더 급한 것부터 처리하고. 근처에 이발소 있나?”
“이발소라면 63구역 전체에 딱 하나밖에 없어요.”
“네 머리도 거기서 자른 거야? 실력은 크게 기대하면 안 되겠는데.”
다언은 삐죽삐죽한 단발 밑단을 매만졌다.
“아니요. 이건 제가 직접 자른 거예요. 그 이발사 실력은 믿으셔도 돼요.”
“그럼 됐다. 너나 애쉬나 이발소 좀 가자. 특히 애쉬. 앞머리가 답답해서 못 봐 주겠어. 눈이 훤히 보여야 뭐, 그, 서로 교감이란 게 될 거 아니야.”
애쉬가 오물오물 스테이크를 씹다가 멈칫하며 탄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저도 보안관님 의견에 동의해요.”
“너희들 옷도 좀 사자. 임시직이라 정복을 입을 필요는 없지만, 깔끔한 거 몇 벌 사 두면 좋잖아. 거기에 시티 홀 배지만 달고 다녀.”
“아. 옷이요? 전 이게 편한데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당연히 내가 사 주는 거야.”
“아. 옷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번부터 태세 전환이 빠르네.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탄은 애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점프 수트 차림이었다. 여기저기 해지고 실밥이 터져 있다. 옷매무새를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자연스레 애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 옷은 버리는 게 좋겠는데.”
탄이 덥석 애쉬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탁. 애쉬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신발코로 바닥을 쳤다. 탄에게 잡힌 팔이 움츠러들고 어깨가 비대칭적으로 솟아올랐다. 탄이 너무 가깝다.
“애쉬의 애착 옷인 것 같아요. 비슷한 게 세 벌이나 있던데요.”
“그래? 점프 수트가 편해서 좋나?”
애쉬는 바로 옆에서 오가는 탄과 다언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커다란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렁였다. 평소였다면 소심한 고갯짓으로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애쉬가 숨을 내쉬며 입술을 톡 벌렸다. 발끝이 계속 오므라든다. 아랫배와 사타구니 쪽에 낯선 열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무서운 감각이었다. 두렵다. 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때 다언이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서며 말했다.
“저 잠시만요. 겐즈한테 남은 튀김 좀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고 올게요.”
“동생 주려고?”
“네.”
“응, 다녀와. 다녀와.”
탄이 나긋하게 말했다. 부드럽게 굴러가는 음성이 애쉬의 귓가에 닿았다. 그런데 목소리 안에 담긴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다언은 총총거리며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탄과 단둘이 남게 되자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애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탄의 물음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릎만 붙잡았다.
애쉬는 공포 서린 눈빛으로 제 중심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게 생겼다! 아니, 원래 몸에 붙어 있던 신체 부위가 갑자기 커졌다. 평소보다 배로 두껍고 길어졌다. 병에 걸린 것 같다.
큰일이다. 쓸모가 마땅치 않더라도, 피해는 끼치면 안 된다. 아프면 짐 덩어리니까. 탄 또한 아픈 부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할 거다.
애쉬가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사타구니를 꾸욱, 꾹 손바닥으로 눌러 감추려 애썼다. 그러자 묘한 감각이 더 거세졌고,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렸다.
탄은 거대한 덩치가 저 혼자 움찔거리는 광경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뭐 해?”
애쉬가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왜 그러고 있어. 오줌 마려워?”
도리도리.
“아니면 뭐 민망한 타임이야?”
탄은 붉게 달아오르는 애쉬의 귓가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뭐 저리 수줍은가. 경비대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거기는 짐승 소굴이었다. 여성 부대와 남성 부대가 철저히 분리된 곳. 한창인 사내놈들끼리 부대끼며 살다 보면, 별별 이야기가 오가곤 했다. 딱히 성적 자극 없어도, 혈류가 아래로 쏠려 발기하는 거야 왕왕 목격할 수 있었다.
야, 너 고추 튀어나왔다. 짓궂은 대원은 손등으로 남 사타구니를 툭 치면서 웃고 지나가기도 했다. 다소 원초적이고 추잡한 곳이었다.
탄도 일평생을 군대 문화에 절여져 살았다. 성적인 농담 정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넘길 수 있었다. 그래도 개중에서는 얌전한 편이었지만. 같은 사내놈 거시기 치는 취미는 없었다.
“죄지은 것처럼 굴지 말고 고개 좀 들어 봐.”
발기가 뭐 특별한 일이라고. 아침마다 겪는 일일 텐데. 다언도 자리를 떴고 남자 둘이 있는 마당에, 수줍게 구는 애쉬가 신기했다.
애쉬는 바르르 뒷덜미를 떨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다란 앞머리 사이로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축축했다.
“어…….”
탄은 애쉬가 귀여워 장난스럽게 굴다가, 순간 멈칫했다.
“너, 설마 울어?”
애쉬의 눈매 주변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탄은 심장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성별 상관없이, 미인의 눈물은 위험하구나. 무슨 요구든 들어줘야만 할 것 같다.
남자를 보고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애쉬의 외모는 압도적이었다. 애쉬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있다면, 무조건 꽂혀서 들이댔을 것이다.
탄은 미안하고 괜히 멋쩍어져서 뺨을 긁적였다.
“미안. 창피하구나?”
탄의 짐작과 달리, 애쉬는 두려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1년 남짓한 기억 속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던 그곳이 부푼 건.
“요즘 쌓였나 보지. 그럴 수 있어. 뭐 이런 걸 가지고. 아이고, 내가 못 본 척할게. 고개 딱 돌리고 있을게요. 알겠지?”
탄이 아이 달래듯이 말하며 비스듬히 등을 돌려 앉았다.
“얼른 가라앉혀 봐.”
탄은 헛기침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탄의 태도에 애쉬의 두려움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몸이 잘못된 게 아닌가? 탄이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 큰일이 아니다. 버려지지 않는다. 폐기되지 않는다. 빠른 결론에 다다랐고, 그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열이 쏠렸던 아래도 다시 풀어졌다. 잠시 되살아났던 감각이 무뎌졌다. 여태껏, 탄을 만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애초에 최대치로 부푼 상태가 아니었기에 진정도 비교적 쉬웠다. 손바닥 아래에서 신체 조직이 말랑해지고 스르륵 작아지는 걸 느꼈다. 원래 알고 있던 익숙한 크기로 돌아왔다.
애쉬는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기현상의 원인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때마침 다언이 돌아왔다. 다언은 탄이 애쉬와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어색하게 구경하다가 말했다.
“애쉬랑 싸우셨어요?”
“응? 아니. 싸울 이유가 있나.”
하하. 탄이 경쾌하게 웃으며 애쉬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좋아, 빠르게 해결했군. 점프 수트 한중간이 비교적 멀쩡했다. 객관적으로 멀쩡하다고 하기에는 모호했다.
발기하지 않았을 때도 중심부가 묵직한 게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놓고 보면 살짝 민망해질 정도였다. 일부러 수납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탄은 애쉬가 자부심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저 크기면 이해는 되었다. 얼마나 자랑하고 싶을지. 옆에 고이 모셔 두지 않고 중앙에서 아무렇게나 휘휘 돌아다니게 놔둘 법도 하다.
나라도……. 탄은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털어 냈다. 남자 사타구니에 관해 집요하게 사색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탄이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 입을 열었다.
“애쉬는 공장에서는 주로 어떻게 의사소통했어?”
함께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애쉬의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답은 다언이 대신했다.
“몸짓으로요. 스무고개 하듯이 이것저것 물어보면 웬만한 건 해결됐어요.”
“수어는 써 본 적 없고?”
“수어가 뭐예요?”
“시티 홀에서 공식으로 만든 건데.”
“여기에는 그런 거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봐요.”
“애쉬도 배운 적 없고?”
끄덕끄덕.
탄은 수어를 몇 가지 쓸 줄 알았다. 경비대에서는 전투 신호 용도로 쓰였다. 성벽 밖에서는 전파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아, 수어가 여러모로 유용했다.
“음. 애쉬, 그러면 글은 어때? 읽고 쓸 수 있어?”
도리도리…….
애쉬는 급격히 풀이 죽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조용히 톡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어깨도 더 쪼그라들었다. 탄은 다급히 애쉬의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뭐라 하는 거 아냐. 이제부터 같이 배우면 되지. 내가 업무 외 시간에 가르쳐 줄게.”
다언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배울 거야. 나도 얼마 안 걸렸는걸. 별거 아냐. 넌 게다가 기억력이 좋잖아.”
애쉬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언. 넌 누구한테 글 배웠어?”
“아혼이 가르쳐 줬어요. 공립 학교가 폐쇄됐거든요. 대신 몇 년 전부터 아혼이 주말마다 어린애들 모아 놓고 수업을 했어요. 귀찮아서 안 듣는 애들이 더 많았지만요.”
“그 양반은 뭐 여기서 안 하는 게 없네. 충성할 만해.”
탄은 역시나 아혼에게 비비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63구역에서 아혼과 척지는 순간, 시티 홀 배지를 달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나 좀 도와줘. 보안관의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겠어.”
“네. 파이팅입니다.”
다언은 건조하게 답했다. 보안관 사무소의 위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다. 탄은 기죽지 않고 주먹 쥔 팔을 쭉 내밀었다.
“파이팅!”
쾌활한 구호에 응답해 준 이는 애쉬뿐이었다. 애쉬가 눈알을 도르륵 굴리다가 소심하게 탄과 주먹을 맞댔다. 툭.
탄이 소리 내어 활짝 웃었고, 애쉬는 황급히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붉게 달아오른 손끝이 꾸물꾸물 괜한 허공만 건드리고 있었다.
* * *
“이쯤이면 되겠지?”
탄은 옷 가게를 나오면서 다언과 애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새 옷이 가득 담긴 봉투를 양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흐뭇했다. 이 정도면 만족이다.
근무할 때 입을 옷을 사러 왔으나, 중간부터 지나치게 신이 나 버렸다. 이것저것 죄다 쓸어 담았다. 어차피 이제 딱히 돈 쓸 곳도 없었다. 죽고 나면 다 사라질 텐데.
대대장이면 사회 기여도 최상에 속하는 직군이었다. 탄은 절약이라는 걸 모르는 성격이었음에도, 쌓인 돈이 꽤 되었다.
오래간만에 거하게 소비하고 나니 속이 풀렸다. 좀 더 질 좋은 옷이면 좋았을 텐데. 싼값만큼이나 재질도 싸구려였다. 그래도 63구역에서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자, 이제 머리 깎으러 가자.”
탄이 다언과 애쉬의 등을 동시에 툭 쳤다. 다언은 옷 선물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평소보다 통통 튀는 걸음걸이로 길잡이를 했다.
이내 셋은 63구역의 유일한 이발소 앞에 도착했다. 허름한 2층 건물 반지하. 그런데 흔한 나무 간판조차 없었다.
“여기 영업하는 건 맞아?”
“네. 쉬는 날에는 쉰다고 밖에 써 붙여 둬요.”
탄은 영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반지하로 향했다.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낡고 비좁은 이발소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셋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벌써 공간이 꽉 차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이발사가 보이질 않는다. 탄은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맞은편 카운터 쪽에 삐죽 보이는 흰머리를 발견했다.
이발사는 낮고 자그마한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이는 여자였다. 체구는 다언과 비슷하게 작았지만, 연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옹골차게 딴딴한 느낌이었다.
하위 구역에서 저 나이까지 정정하게 살아남아 일하는 이는 드물었다. 하얗게 세 버린 머리카락이 도리어 그녀의 능력과 강인함을 증명했다. 느슨하게 땋아 옆으로 내린 머리가 고운 흰색이었다.
“아, 또 주무시고 계시네.”
다언이 카운터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에! 일어나요. 손님이야, 손님!”
마에.
“……마에?”
다언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공기를 울리는 순간, 탄은 뒷덜미에 작은 불씨가 붙은 듯 화끈함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마에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예고도 없이, 기시감이 폭력적으로 온몸을 뒤덮는다.
마에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잠에서 깨어났다. 피곤한 얼굴로 카운터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탄은 점점 가까워지는 마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묻혀 뒀던 기억이 고개를 든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두껍게 쌓인 시간의 흔적 사이로 예전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에가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다언에, 애쉬에, 모르는 놈 하나까지.”
마에의 시선이 탄에게 잠시 머물렀다. 탄은 혀로 볼 안쪽을 느릿하게 훑었다.
마에. 어릴 때 탄과 여나를 종종 챙겨 주던 집주인이었다. 여덟 살 때의 일이라 지금껏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기억을 막아 두던 벽이 허물어지자 여러 장면이 경쟁하듯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그때는 분명 이발사가 아니라 의사였는데. 마에는 63구역의 유일한 의사였다. 자신이 태어날 때 산파 역할을 한 것도 그녀라고 들었다.
마에의 이목구비를 훑을수록 옛날 얼굴이 더 진하게 겹쳐 보였다. 차이라고는 그땐 머리카락이 갈색이었고, 주름이 더 옅었다는 것 정도다.
탄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애들 머리 좀 다듬으려고요. 그리고 저는 모르는 놈이 아니라, 새로 온 보안관 놈입니다만.”
시끄러운 속과 달리, 그의 얼굴과 목소리는 여유를 담고 있었다.
“아하.”
탄은 우선 마에를 모른 척했다. 오래전 인연이었다. 상대가 먼저 언급하지 않는 이상, 구태여 끄집어 올릴 필요는 없었다. 여덟 살 꼬마와 성인인 현재 모습을 겹쳐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쉽지 않기를 바랐다. 마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탄은 피어오르는 초조함을 누르며 구석의 소파로 가 앉았다. 끼익. 소파가 신음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갈라진 인조 가죽 아래에 골조가 수명을 다해 가고 있었다.
마에는 탄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보안관께서는 머리 안 하시나?”
“저는 뭐, 보다시피 지금은 완벽해서. 지저분해지면 그때 찾아오죠.”
“그러시든가. 자. 다언부터 와서 앉아. 애쉬는 잠시 기다리고.”
다언은 거울 앞 의자에 발돋움해서 올라갔다. 가위 날이 다언의 삐뚤빼뚤한 머리카락 밑단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렇게 잘라 놔서 대칭이 엉망이야. 여기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상해 있어?”
“잠깐 불이 붙었나 그랬을걸요.”
“어이구. 상한 부분을 다 잘라 내면 많이 짧아질 텐데.”
“괜찮아요, 마에.”
사각, 사각. 가위 소리와 두 여자의 대화가 이발소 안을 채웠다. 애쉬는 어느새 탄이 앉은 소파 옆으로 쪼르륵 다가와 서 있었다. 큰 덩치가 그림자를 드리우는데도, 탄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기억이 그의 온정신을 헤집어 놓은 탓이다.
탄의 시선이 이발소 곳곳을 향했다. 잡동사니가 쌓인 공간. 반지하라 그런지 꿉꿉한 냄새가 은근히 풍겼다. 여기 있는 물건은 대체로 소파와 사정이 비슷했다. 오래되어 망가지기 직전이거나 다소 옛날 스타일이다.
날카롭게 공간을 파헤치던 탄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사진 액자. 디지털화되지 않은 사진을 몇 년 만에 보았다. 상위 구역에서는 다들 개인 홀로그램 서버에 이미지 데이터를 저장해 두었다.
아날로그에 낭만이 깃든다는 건 구세계에서나 통하던 사고방식이었다. 캐슬 시티는 물성이 있는 것을 께름칙하게 여겼다. 언젠가는 상하고 바래기 마련이니까. 쇠락, 부패, 변질. 한 번의 종말을 거친 신인류는 이런 단어들에 정신적인 알레르기가 있었다.
탄은 얕게 소름이 돋았다. 거북함을 이겨 내며 실눈을 떠 사진을 뚫어지게 살폈다. 세 명의 여자가 나란히 서 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40대의 마에였다.
그 옆에는 아혼이 잇몸까지 다 드러낸 채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아직 앳된 기색이 가득한 걸 보니, 10대 중후반쯤. 지금의 강렬한 인상과 달리, 이때는 굉장히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타투도 없었고, 풍성한 곱슬머리는 펑퍼짐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탄은 그 얼굴과 마주한 순간 불구덩이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숨이 드나드는 기도가 화끈거리면서 오그라들었다.
만삭의 임산부였다. 여나다. 탄이 기억하던 것보다 몇 년 더 젊은 모습의 엄마. 탄은 여나의 불룩한 배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 내가 있었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했을 거다. 안락한 어둠이 걷히고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을 기다리며.
그렇게 만날 세상이 끔찍한 줄도 모르고. 어떤 거대한 비통함과 악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탄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힘줄이 올라섰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사각, 사각. 조용한 가운데 가위 소리만이 울렸다. 다언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에 졸음이 밀려왔는지, 입술까지 톡 벌리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마에가 낮고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모른 척할 거니?”
자세히 기울여 듣지 않으면 바람처럼 흘러갈 것만 같은 나긋한 어조였다. 주어도 부름도 없었지만, 탄은 마에가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무슨 말씀인지.”
탄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다언 앞에 달린 거울 속에서 마에와 눈이 마주쳤다.
“날 알아본 것 같던데?”
“…….”
“탄.”
탄의 입술이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정확하게 호명까지 당했으니, 계속 연기하는 건 소용없었다. 더 구차해지기만 할 테다.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선생님도 아까는 저 알아본 척 안 하셨잖아요.”
“어린애가 먼저 인사하는 게 맞지.”
선생님. 어린 날 탄이 마에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마에는 현명했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어른이었다. 마음 약한 여나를 대신해서 간간이 탄을 혼내기도 했다. 탄은 마에를 잘 따르면서도 늘 조금은 무서워했다.
언어의 힘이란 대단해서, 예전 호칭을 입에 올리자 그때의 감정에 휩싸였다. 몸에 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훈육받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꼬장꼬장한 건 여전하시네요.”
“넌 어릴 때랑 많이 달라졌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계속 못 알아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탄은 고개를 비딱하게 숙였다. 이발소 내부의 공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편안하게 잠든 다언과 다르게, 애쉬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네가 그 탄인 걸 밝히기 싫은가 보지?”
“싫다기보다는, 뭐. 굳이 나서서 광고하고 다닐 필요까진 없으니까요.”
아혼이 떠들고 다니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겠지만, 되도록 그 시기를 늦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밝혀져도 나쁠 일은 없지 않나? 오히려 여기 출신이라고 하면 신뢰도가 늘어날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고. 여기를 떠나서 시티 홀 아래로 들어간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피곤해질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탄은 여나에 관한 화제를 피하고 싶었다. 여나의 아들임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죄다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들 테니까. 그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서.
넌 그때 무얼 했느냐고. 여나가 죄없이 살해당할 때, 넌 어디 있었느냐고. 그럴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탄은 확신에 찬 두려움을 느꼈다. 좀처럼 후퇴를 모르는 그에게도 도망치고 싶은 대상 하나쯤은 있었다. 여나, 여나의 죽음.
기억은 덧붙여진다. 과거의 것 위에 현재의 것이. 또한, 기억은 짓눌리며 뒤덮인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단단하고 무겁고 비통한 것에게.
그날 이후로, 여나를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핏빛이었다. 그것이 제일 강렬하며 무거웠으므로.
행복했던 날을 곱씹다가도 금세 기억 사이사이 그날의 핏빛이 스며들었다. 여나와 연결된 의식이 가 닿는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같았다.
추억은 오염되었다. 이제 여나를 떠올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마음 편히 진득하게 애도하지도 못했다.
왜 삶은 어떤 이에게는 무자비하고, 어떤 이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울까. 왜 고단함은 평등하게 일률적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1구역 사람들을 피해 간 고단함이, 대신 우리에게 흘러 내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탄은 이런 서러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자신이 어딘가 망가진 인간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그렇게 더는 여유로움을 연기해 낼 수 없을 때, 스스로 비루하다고 느꼈다.
마에는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물끄러미 탄을 바라보았다.
“네 얘기, 다른 사람들한테 하지 마?”
“굳이 퍼뜨리지 않겠다고 하시면, 저야 좋죠.”
“사실 딱히 떠들고 다닐 곳도 없다. 한참 전 일이라. 그때 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싶고.”
“그렇습니까?”
“여기 사람들은 빨리 죽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돌아온 거니? 경비대는 어쩌고.”
“이런저런 사정으로요. 선생님은 왜 의사 그만두시고 이발사를 하세요?”
“나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러면 피차 안 묻는 쪽으로 합의 볼까요.”
탄은 이발소에 들어온 후로 온몸을 메우던 긴장감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말투가 한결 가벼워졌다. 습관적인 미소가 피어오르고 눈꼬리가 곡선으로 접혔다.
“어릴 때랑 딴판이네. 그땐 말도 별로 없고 소심하더니만.”
“칭찬이시죠?”
“글쎄다.”
마에가 시큰둥하게 답하면서 미용 가위를 탁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다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언은 깨어난 직후 멍하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금세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잠들었나요?”
마에는 날랜 손짓으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요즘 피곤했나 보구나. 동생 돌보느라 힘드니?”
“아니요. 전혀, 그런 건 아닌데. 밖에서 잠든 게 조금 충격이라서요.”
“잠깐이었어. 그럴 수 있지.”
“그러면 안 되죠…….”
다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책하는 투로 웅얼거렸다. 어린 여자가 63구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늘 악착같이 굴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했다. 방심은 숨구멍을 조이는 목줄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온 세상을 향해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느라 집에서도 깊이 잠드는 법이 없었다.
“아무튼, 머리 감사해요. 깔끔해져서 마음에 들어요.”
“돈 받고 하는 건데 감사는 무슨.”
다언은 얼떨떨하게 의자에서 내려와 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미끈한 얼굴과 마주했다.
저 사람 때문이야. 저렇게 느물거리는 사람과 종일 있다 보니 마음이 풀어진 거겠지. 다언은 그리 생각하며 괜히 뒷덜미를 손끝으로 긁었다. 살갗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을 털어 냈다.
시티 홀 보안관을 냉큼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탄이 신뢰를 주는 사람인 건 사실이었다. 왠지 의지해도 괜찮을 것만 같다. 그의 보호 아래에서 마음을 내려놓아도 될 듯한, 안일함을 심어 준다.
다언은 내내 탄의 옆에 우뚝 서 있던 애쉬를 힐끔거렸다. 공장에서 자발적으로 겉돌았던 애쉬도 탄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으니까.
“자. 이제 애쉬도 머리 자르고 와.”
툭, 탄이 애쉬의 등을 치며 말했다. 다언은 그 사소한 스킨십에도 애쉬가 화들짝 놀리며 손을 움찔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눈은 탄을 향하고 있었다. 멍한 눈빛이었다.
“사장니임. 우리 애쉬 머리 좀 잘 부탁드려요.”
탄이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라는 단어에서 애쉬가 또 움찔거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미미하게 귀 끝까지 붉어졌다.
보면 안 될 걸 본 느낌인데. 다언은 애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는 성격이라, 비언어적 정보가 머릿속에 과도하게 들어오곤 했다.
애쉬는 평소보다 맥이 빠진 듯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탁탁, 탄은 소파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다언을 불렀다.
“자. 우리는 애쉬 꽃단장하는 거나 지켜보자. 놓칠 수 없지.”
“네.”
다언은 묵묵히 앉으며 생각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절대로 모른 척해야겠다고. 월급만 꼬박꼬박 받으면 그만. 성가신 일에 엮이는 건 질색이다.
탄처럼 삽시간에 주변을 헤집고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 곁에 있을 땐 특히나 더 조심해야 했다. 생존 본능에 기반한 예감이 들었다. 공장에서 원치 않게 삼각관계 사랑싸움에 휘말렸을 때와 비슷한 예감이었다. 새로운 직장에도 금세 피곤한 일이 발생할 것 같았다.
탄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보안관님, 너무 그렇게 웃지 마세요. 전 평화롭게 직장 생활 하고 싶으니까……. 다언은 속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언제든지 모른 척하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니.
* * *
“이만 퇴근!”
탄이 쾌활하게 외쳤다. 해가 아직 지지 않은 시각. 조기 퇴근이었다. 한 거라고는 공장에 들렀다가 밥 먹고 쇼핑한 게 전부다. 다언은 쏜살같이 집 쪽으로 사라졌고, 애쉬와 탄 둘이 남았다.
탄은 깔끔해진 애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마에의 이발 솜씨는 훌륭했다. 엉망으로 부풀어 있던 머리카락을 이곳저곳 쳐 내면서 교통정리를 말끔하게 끝마쳐 놓았다.
어깨에 닿을 듯하던 기장이 목덜미 절반을 덮는 정도로 짧아졌다.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포슬포슬하고 복슬복슬한 느낌이 났지만, 인상이 훨씬 깔끔해졌다.
애쉬의 눈동자가 온전히 보였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눈썹 근처 뼈, 짙은 눈썹, 유려한 눈매, 그리고 삼백안까지. 사나워 보일 수도 있는데, 애쉬는 달랐다.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만 더해졌다.
애쉬를 쭉 훑어보던 탄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참 잘생겼어.”
목을 슬쩍 뒤로 빼면서 다시 한번 애쉬의 얼굴을 요리조리 감상했다. 애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팍을 쿡, 조심스레 찔렀다.
“그래, 너 말하는 거야.”
도리도리. 애쉬는 다급히 부정하더니 공손히 두 손을 모아 탄을 가리켰다.
“뭐. 너 아니고 내가 잘생겼다고?”
끄덕끄덕.
“나도 내가 잘생긴 건 알거든.”
방긋. 애쉬가 입을 살짝 벌리며 웃었다. 쓸데없이 해맑고 귀엽다. 탄은 작게 혀를 찼다.
“근데 네가 더 잘생긴 것도 알거든. 종류가 좀 다르지. 나는 현실 가능성이 있는 잘생김.”
탄이 자기를 손끝으로 가리켰다가 애쉬에게로 방향을 바꿨다.
“너는 불가능함.”
애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쌍꺼풀이 진하게 드러났다가 속으로 들어가며 연해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나른하고 몽환적이었다. 현실을 잘 몰라서, 아직은 천진한 세계에 머무는 아이 같기도 했다.
“애쉬. 너는 네 얼굴의 가치를 좀 깨달을 필요가 있어.”
애쉬는 입 안쪽 연한 살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왠지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탄은 내 외모를 가치 있게 생각하는구나. 가치가 하나라도 있다니 그건 다행이었다.
애쉬가 살짝 떨리는 손끝으로 뺨을 더듬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곳이 없다. 앞머리가 짧아져 훤히 보이는 눈가가 신경 쓰였다. 초조함을 들킬 것만 같았다.
계속 잘생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외모를 가꾸는 방법은 전혀 몰랐다. 여태껏 그런 것 하나 배우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부지런히 심부름 일을 하며 근력만 키운 게 전부였다. 글도 모르고 수어도 모른다. 탄이 생김새를 두고 가치를 측정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제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애쉬의 습관이 도졌다. 상대가 내세운 잣대에 몸을 꾸겨서라도 맞추려는 게 그의 본능이었다. 등급이 매겨지고 시험대에 오르고 칭찬받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기억은 없어도, 뼈에 새겨져 있는 각인 같은 것이다.
칭찬을 받으면 오롯이 기쁘지 않고 초조함이 딸려 온다. 칭찬받은 만큼 더 잘하고, 뒤처지는 일 없게. 세계는 끊임없는 시험의 연속이다. 애쉬는 탄이 내는 시험이라면 기꺼이 뼈를 갈아서라도 합격하고 싶었다.
계속 예쁘면 좋겠다. 탄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칭찬을 반복해서 받아 점수를 쌓으면…… 도태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칭찬 스티커……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감사해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순간 낯선 장면과 단어들이 불꽃 터지듯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여러 목소리도. 찰나였다. 애쉬가 숨을 몰아쉬었다. 뇌 어딘가를 묵직한 무언가가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탄은 멍하니 서 있는 애쉬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거렸다.
“애쉬. 무슨 생각해?”
그제야 애쉬가 반쯤 정신을 차렸다. 풀려 있던 시선이 다시 탄에게로 향했다.
“우리도 집에 가야지. 숙소는 사무소 2층이야. 제법 커. 방도 두 개나 있고. 아직 휑하기는 하지만 하나씩 채워 나가면 되겠지. 그런데 혹시나 해서 다시 묻는 건데. 나랑 같이 사는 거 불편하진 않겠어?”
탄이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생각해 보니, 상사랑 한집에서 사는 게 좀 그럴 수도 있잖아? 거기다 일터랑 같은 공간이고. 네가 원하면 혼자 지낼 방 구해다 줄게.”
얼이 빠져 있던 애쉬가 ‘혼자’라는 단어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혼자는 싫어. 떨어지는 건 싫어. 원초적인 불안감에 애쉬가 손을 내뻗었다. 그대로 탄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손목을 휘감았다.
후욱. 그 순간 두 남자에게 동시에 신체 반응이 일어났다. 맨 살갗이 맞닿은 부위부터 기묘한 꿀렁임이 번져 나갔다. 애쉬는 제 심장 뛰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었다. 피가 흐르는 길이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깨어나고 배 쪽에는 묵직한 쾌감이 자리 잡았다.
반면 탄의 몸에는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히려 신체 감각이 둔해졌다. 몸 주변을 안개가 둘러싼 듯했다. 그 사이를 뚫고 단 하나만이 선명했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혼자는 싫어.』
탄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아혼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로는 아무리 접촉해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다시 돌아왔다.
『자, 잘해야 해. 예쁘게.』
울려 퍼지는 음성은 남성치고도 굵고 낮았다. 하지만 위협적이거나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탄은 오히려 저음이 가련하게도 들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같이…… 같이, 같이.』
“같이?”
탄은 머릿속에 들리는 것을 따라 읊었다. 애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랑 같이 있고 싶어?”
애쉬의 손끝이 탄의 살갗 위에서 미끄러졌다. 뺨에는 홍조가 감돌았다. 탄이 제 마음을 읊어 준 것이 기뻐, 고개를 빠르게 주억거렸다. 충동적으로 붙들었던 탄의 손목을 놓아주며 양손을 배 앞에 공손하게 모았다.
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확신했다. 쟨 모르는구나. 나한테 자기 생각이 들린다는 걸 몰라. 도대체 저 이능력은 뭘까.
순간, 탄의 머릿속에 스치듯이 들었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텔레파시. 구세계 환상 소설 속에서 종종 등장하던 개념.
과거에는 허구로 여겨지던 것들이 신세계에서 현실이 되곤 했다.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에스퍼들이 뿜어내는 초인적인 힘이 그러했다.
에스퍼는 기본적으로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다. 그 외에 다룰 수 있는 이능력의 개수와 범위는 개인마다 달랐다. 훈련으로 새로운 이능력을 끌어내기도 했다.
캐슬 시티는 꾸준히 에스퍼의 힘을 다양화하고자 애썼다. 인류는 아직 형질 보유자란 존재에 관해 모르는 게 더 많았다. 그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훈련으로 얼마큼 발달시킬 수 있는지.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다.
텔레파시도 그런 연구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가이딩할 때 에스퍼와 가이드의 감정이 동기화되는 현상에서 착안한 것이다.
단순한 감정 공유를 넘어서 생각까지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 나아가, 구세계 환상 소설 속에서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도 소통할 수 있다면. 통신이 불안정한 성벽 밖에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성과 보고는 없었다. 정신계 이능력을 지닌 에스퍼 자체가 드물어, 관련 연구가 더뎠다. 지금까지 탄이 아는 바로는 그러했다.
애쉬가 변종 에스퍼라면 말이 달라진다. 탄은 순진한 눈을 한 애쉬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워진 기억 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시티 홀은 이 녀석을 알고 있을까. 이 세상에서 의아하고 이상한 일은 대개 시티 홀에서 시작된다.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밝혀지는 순간 파란이 일 것이다. 탄의 미간이 좁아졌다. 애쉬를 꼭 옆에 두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탄이 단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같이 있어야지.”
애쉬는 모아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두근두근. 맥이 뛰는 곳에 손끝이 닿았다. 심장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언제든 어딜 가든,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돼. 알겠지?”
팔딱팔딱 뛰던 맥이 잠시 멎는 것 같았다. 애쉬는 머리카락이 나풀거릴 만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탄이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힘차서 좋네. 이제 집에 가자.”
애쉬가 후다닥 탄의 옆에 딱 붙어 섰다. 뒤로 걷지 말고 옆으로 오라던 말을 잊지 않고 따른 거다.
애쉬는 사무소로 걸어가는 내내 탄을 유심히 관찰했다. 탄의 보폭과 속도를 알아 두기 위함이었다. 그에 따라 제 걸음을 세심하게 조절했다. 언젠가부터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두 몸이 평행을 이루었다.
하지만 둘의 마음은 비딱하게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사람 사이의 모든 피곤한 일은 이럴 때 발생하기 마련이다. 다언의 감이 맞았다. 63구역 보안관 사무소는 무척 피곤해질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