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따분한 나선형 계단 위
“자, 여기가 네 책상이 될 거고…….”
탄은 사무소 안을 휘저으며 이곳저곳 손짓했다. 애쉬는 휙휙 머리를 돌리면서 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애쉬의 헤이즐넛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반짝이고 생기 있어 보였다. 사무실 천장에 달려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전등 때문이었다.
밖에는 서서히 해가 지는 중이었다. 보랏빛 하늘이 물러갈 때가 오면, 63구역 사람들은 대부분 집 안으로 바삐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는 적막과 어둠이 같이 찾아온다. 거리에 변변한 가로등 하나 없다. 전구를 밝히는 사치를 부릴 만한 가정집은 몇 손가락 안에 꼽았다.
애쉬가 여태껏 아는 바로는, 밤은 고독한 시간이었다. 몸을 웅크려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는, 하루의 공백.
이곳은 다르다. 반짝. 1층에만 전등이 무려 세 개나 달려 있었다. 탄은 마침 전등 바로 아래에 서 있었다. 탄의 윤곽을 따라 빛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높이 솟은 콧날이 한층 더 도드라졌다. 입술의 선도 뚜렷했다. 빛이 얹힌 속눈썹은 올올이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애쉬는 잠시 넋을 놓고 탄을 응시했다.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돼. 탄이 조금 전 했던 말을 곱씹었다. 자꾸만 심장이 부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토록이나 기분이 좋을까. 행복 속에는 편안함 외에 긴장감도 섞여 있었다. 처음 겪어 보는 상태였다. 설렘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좀 더 명확하게 알 것 같다.
애쉬는 땀이 나는 양손을 맞잡았다. 부산스럽게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감정을 죽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해. 목소리가 찰나에 스쳐 지나갔다. 애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재빠른 속도로 그의 의식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애쉬의 얼굴 근육이 수축했다.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외피를 단단하게 만들어 속살을 보호하려는 뮤턴트처럼.
탄은 애쉬의 머릿속에서 어떠한 격변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빠르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전원 코어가 교체돼서 이제 관리 서버도 제대로 작동할 거야. 너는 임시 부관이라 관리 권한은 없지만, 내 개인 서버랑 통신은 가능하거든. 그거 통해서 내가 전달하는 일 처리만 도와주면…… 아니다, 이건 내일 다언이 오면 더 자세하게 알려 주는 게 좋겠네. ……애쉬, 듣고 있어?”
탄이 한참을 떠들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매가 가늘어졌다. 애쉬의 고갯짓이 한참 동안 멈춰 있었다.
“애쉬.”
이름을 두 번 호명하고 나서야, 애쉬가 반응했다. 파드득 어깨를 떨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짜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끄덕끄덕.
정신이 빠져 있던 건 맞지만, 탄의 설명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딱히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머릿속에 정보가 입력되었다. 애쉬의 뇌는 다중 작업에 뛰어났으며, 그 모든 것을 오래 정확하게 기억했다.
탄은 불퉁한 표정으로 애쉬를 응시했다.
“내가 부관 배지는 어디에 있다고 했지?”
망설임 없이 애쉬의 손끝이 왼쪽 끝 수납장으로 향했다. 탄이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기억하네? 그러면 애쉬 네 자리는?”
애쉬가 문과 가장 가까운 책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탄은 괜스레 헛기침했다. 훈계가 무안하게 애쉬는 족족 모든 질문에 정답을 내놓았다.
“됐다. 그러면 사무실 소개는 이쯤하고 위로 올라가자. 2층이 숙소야.”
끄덕, 끄덕. 애쉬는 순순히 탄의 옆에 따라붙어 2층으로 향했다. 탄은 계단 난간에 올려 둔 랜턴을 집어 들었다.
“시티 홀이 쪼잔하게 1층에만 전기 설치를 해 놨더라고. 2층에서는 충전형 랜턴을 써야 할 것 같아. 내일은 네가 쓸 랜턴도 충전해 놓을게. 전등에 비할 건 아니지만.”
애쉬의 눈에는 이동형 랜턴 불빛도 충분히 크고 밝았다. 공장에서 야간 순찰 때 쓰이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탄이 랜턴을 쥔 손을 쭉 뻗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나선형 계단 위는 암흑에 잠겨 있었다. 랜턴 불빛이 길을 터 주었다.
“수도는 고쳐 놨어. 온수는 한참 틀어 놔야 나오니까 참고하고.”
끄덕끄덕.
“근데, 애쉬. 내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고개 안 끄덕여도 돼. 목 아프겠다. 잘 듣고 있는 거 이제 알겠으니까.”
애쉬는 습관적으로 고갯짓을 하려다가 중간에 어색하게 멈추었다. 탄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난방은…… 아직 겨울이 오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그때 가서 생각하고. 아, 1층에 있는 전기는 마음껏 써도 돼. 시티 홀이 그 정도는 해 주시더라고.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지. 너도 이것저것 충전형 물품 다 갖고 와서 전기 털어먹어.”
2층으로 올라온 탄은 탁자 위에 랜턴을 올려 두었다. 랜턴 반경 1m까지 빛이 원 모양으로 퍼져 나갔다.
“여긴 거실 겸 주방. 가스선은 연결되어 있어. 1층에는 간이 냉장고도 있고. 간단하게 뭐 해 먹을 순 있을 것 같아. 너 요리할 줄 알아?”
도리도리…….
“뭐, 그럼 요리 담당은 내가 하는 거로.”
탄이 거실 양쪽으로 나 있는 방을 각각 가리키며 말했다.
“오른쪽 큰 방이 내 거. 나이도 더 많고 상사니까 내가 큰 방 쓴다. 불만 없지?”
탄의 기세 넘치는 질문에 애쉬가 바짝 긴장한 채 고개를 연달아 세 번 끄덕거렸다.
“한 번만 대답해도 된다니까. 왼쪽 방은 네가 쓰면 돼. 아, 저기가 욕실.”
탄의 방보다 조금 더 들어간 쪽에 욕실이 있었다. 욕실은 좁았지만 쓸 만했다. 탄이 며칠간 수도관을 고치고 깨진 타일도 부지런히 교체한 덕분이었다.
“대충 됐지? 지내다가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하고. 이제 앉아서 공부하자.”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설명이 끝나자마자, 탄은 훈육 모드에 접어들었다. 애쉬가 멍하니 머뭇거리는 사이, 탄은 좌식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아 눈빛으로 애쉬를 재촉했다.
애쉬가 커다란 몸을 웅크리며 탄의 맞은편에 앉았다. 격한 바람이 머릿속을 뒤흔들고 지나간 것 같았다.
랜턴이 탁자 주위를 둥글게 비추고 있었다. 탄은 오늘 사 온 물건들이 가득 담긴 꾸러미에서 주섬주섬 책 한 권을 꺼냈다. 손가락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낯설었다. 중위 구역만 가도 이제는 보기 힘든 것이 종이책이었다.
[우리 아이 캐슬 공용어 첫걸음마! 1권]
표지 디자인도 요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종이는 노랗게 변해 있었다.
이 시리즈가 63구역 잡화점에 흘러들어 온 건 20년 전쯤이다. 대략 열 세트 정도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지금껏 기적적으로 네 세트가 팔렸고, 탄이 영광의 다섯 번째 주인이 된 참이었다.
톡, 톡. 탄이 책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게 앞으로 네가 공부할 책이야.”
애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탄을 바라보았다.
“업무 외 시간에 내가 짬짬이 가르쳐 줄게. 캐슬어 말고도 기본적인 수어 몇 개도 알려 줄 거야. 우선은 나랑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는 게 중요하니까. 순찰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고.”
애쉬는 쏟아지는 말에 난감한 기색 하나 없이 순순하게 듣고 있었다. 탄은 그 얌전함이 마음에 들었다. 벌써 모범생의 기질이 엿보이는 것이, 가르칠 맛이 날 것 같았다.
“오늘 이리저리 다니느라 피곤했을 테니, 공부는 짧게만 하고 자러 가자.”
쉰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배움에는 끊김이 없어야 한다는 게 탄의 지론이었다. 경비대 시절에도 살살 웃으면서 훈련은 제일 고되게 시키는 대장으로 유명했다.
어린놈들 가르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지. 탄은 오래간만에 샘솟는 의욕을 느끼며 쾌활하게 말했다.
“자, 자. 맞은편에 앉지 말고 더 가까이 붙어. 옆으로. 그래야 책을 같이 보지.”
애쉬는 움찔하더니, 무릎으로 바닥을 짚어 살금살금 탄의 옆으로 기어 왔다. 탄은 잔뜩 오그라든 애쉬의 어깨를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팍 내리쳤다.
“쫄지 말고. 누가 잡아먹는댔어? 공부하자고 했지. 왜 겁을 먹고 그래.”
애쉬는 힐끗 탄을 바라봤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겁먹은 건 아닌데.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저 탄이 신기하고 낯설 뿐이었다.
킁. 애쉬가 괜스레 코를 들이켰다. 비강에 스며드는 냄새가 향기로웠다. 63구역에서 눈을 뜬 이후로, 탄처럼 좋은 냄새가 나는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 탄이 손에 펜을 쥔 채 애쉬에게 몸을 기울였다. 애쉬는 무릎 위에 손바닥을 얹어 놓고 마른침을 삼켰다. 쿵. 제 심장이 귓바퀴 위에서 팔딱이는 듯했다.
공장 사람들이 공부란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였는데. 아,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가슴이 뻑적지근했다. 애쉬는 고개를 좌우로 털어 냈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글을 빨리 익히면, 탄이 기특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장점도 많다는 걸 탄에게 꾸준히 어필하고 싶었다. 탄의 기대에 부응하여, 옆에 두어도 될 만한 존재로 인식되게끔.
탄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열심히 배우자. 이 논리에 다다르자, 엄청난 의욕이 샘솟았다. 애쉬는 먼저 손을 뻗어 책 표지를 건드려 보았다. 합성지 특유의 질김과 거침이 느껴졌다. 종이를 손끝으로 붙잡아 살그머니 옆으로 넘겼다.
불빛이 합성지 위에 인쇄된 글자를 비춘다. 공용어 모음이 빛줄기에 따라 살짝 흔들리는 듯한 착시가 들었다.
글자의 모양 자체는 애쉬에게 익숙했다. 애쉬는 자모음의 모양을 정확히 따라 그릴 수 있었다. 오며 가며 숱하게 봐 왔으니까. 다만 그 모양에 담긴 뜻을 모르는 게 문제였다.
탄은 인쇄된 글자를 살살 쓰다듬는 애쉬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애쉬는 집중한 채 도톰한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탄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스몄다. 말 잘 듣고 성실한 데다 외관도 어느 한구석 모난 곳이 없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나이도 아마 저보다 일고여덟 살 정도 어려 보인다.
애쉬를 예뻐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테다. 다만 탄의 감정 뒤에는 명확한 조건이 따라붙었다. ‘부하 직원이자 동생으로서’. 기특하다고 엉덩이는 두들길 수 있어도, 키스는 상상조차 못 하는. 온유하고 담백한 애정을 잔뜩 담아, 탄이 애쉬에게 펜을 건넸다.
“여기. 이거는 네 거.”
애쉬가 뻣뻣하게 펜을 붙잡았다. 모양새가 영 어색해 보였다. 탄이 피식 웃고서는 직접 애쉬의 손을 붙들었다. 맨살끼리 닿았는데도, 이번에는 텔레파시가 들리지 않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제 마음대로 이능력이 발현되고 있었다.
이제 놀랍지도 않다. 탄은 태연하게 애쉬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쭈물거리며 펜을 똑바로 쥐게 했다. 그동안 애쉬는 숨을 참은 채로 교재 귀퉁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됐다. 이렇게 잡아야 손이 피곤하지 않아.”
애쉬가 탄과 손이 떨어지자마자 두 팔을 앉은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심장이 몸속에서 움직이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손끝으로 내려온 걸까. 온 신경이 손가락에 쏠렸고, 그 부근에 자리한 핏줄이 느껴졌다.
뜨겁다. 팔딱이는 맥이 느껴진다. 탄과 닿았던 곳이 급소로 변한 것 같았다. 너무 예민해져서 그 부근을 쿡 찌르기만 해도 정신이 나가 버릴 것이다.
긴장한 애쉬와 다르게, 탄은 여유롭게 펜을 손으로 돌리며 웅얼거렸다.
“나도 펜 쓰는 건 오랜만이네.”
다른 구역에서는 수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고루하고 아날로그적 유물이라 여겨졌다. 63구역만 달랐다.
63구역은 캐슬 성벽 안에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캐슬에 속하지 않은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이곳의 시간만 몇십 배는 느린 속도로 흐르고 있다. 오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탄은 그 느림을 완벽히 체감했다.
주요 거래 수단이 아직도 실물 주화였다. 타 구역에서는 모든 거래가 디지털화되어 있었다. 홀로그램 기기가 신분증을 스캔만 하면 끝. 1초 만에 자동으로 개인 계좌에서 코인이 빠져나갔다.
탄은 손바닥 가득히 쥔 동그란 코인을 가게 주인에게 내밀었던 순간 들었던 기묘한 감정을 곱씹었다. 어색하면서도 익숙했다. 반사적으로 어린 날 여나의 심부름을 할 때가 떠올랐다. 기억은 오감으로 찾아왔다. 비릿한 코인의 냄새. 살갗에 닿던 합성 금속의 촉감.
과거의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현재의 시공간 위를 뒤덮었다. 63구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곳곳의 모든 요소가 강제적으로라도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탄은 수면 위로 올라온 여러 심상을 능숙하게 내리눌렀다. 앞으로 이렇게 감정을 제어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다행히도 능청스러운 가장에는 자신 있었다. 금세 쾌활해진 목소리로 탄이 말했다.
“아, 맞다. 애쉬. 숫자는 알아?”
끄덕.
애쉬가 여전히 두 팔을 다리 사이에 끼워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차 있는 커다란 덩치가 옆으로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계산할 줄도 알고?”
끄덕끄덕.
애쉬는 안으로 살짝 말려 있던 어깨를 폈다. 날갯죽지 부근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탄이 내가 잘하는 걸 물어봤어! 몸을 들썩이고픈 기분이었다. 아니면 지금 당장 암산이 얼마나 빠른지 증명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기야 심부름꾼 일을 하려면 대금 장부도 써야 했을 테니. 숫자는 누가 알려 줬어? 아니면 원래 알고 있던 거야?”
애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다. 구불거리고 부풀어 있는 머리카락을 표현하기 위해 손끝을 구부렸다가 폈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누군가를 흉내 내려는 듯이 표정을 꾸며냈다.
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지켜보다가 말했다.
“정답. 아혼?”
끄덕끄덕!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따라 팔랑거렸다.
“숫자는 아혼이 가르쳐 줬다는 거지?”
애쉬는 주억거리면서도 초조해졌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냥 계산할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암산이 빠르다고. 공장에서도 칭찬을 잔뜩 받았다고.
애쉬는 구애를 위해 몸을 치장하는 수컷처럼, 탄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화려한 깃털을 하나라도 더 주워 몸에 꽂아 놓고 싶었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다정하게 대해 주는 탄이니, 제 쓸모가 늘어나면 훨씬 더 예뻐해 줄지도 몰랐다.
애쉬는 책 귀퉁이에 숫자를 자그맣게 끄적였다. 3, 4……. 아라비아 숫자는 종말 속에서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무사히 캐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탄은 피식 웃으며 애쉬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잘 쓰네. 좋아, 좋아. 더 안 써도 돼.”
이게 아닌데. 애쉬는 입술을 몇 번 뻐끔거렸다. 단순히 숫자를 쓰려는 의도가 아니라, 암산 실력을 자랑하려던 거였다. 가령 34567 곱하기 891011 같은 것 말이다. 숫자를 떠올리자마자 바로 머릿속에서 답이 나왔다.
“이제 글이랑 수어 몇 개만 배우면 완벽해지겠네. 역시 부관으로 데려오길 잘했어.”
어찌 되었든 탄의 마음에 찬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넌 머리도 좋으니까 금방 배우겠지. 자, 오늘은 자모음 따라 쓰기만 하자.”
애쉬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재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매에 잔뜩 힘이 들어가자 순식간에 날카롭고 신중한 인상으로 변했다. 영아용 교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관이었다.
캐슬 공용어, 줄여서 캐슬어는 음소 문자였다. 종말 이전 구세계의 라틴 문자나 한글처럼. 그러나 문명이 한 번 뒤집히는 과정에서, 언어에도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캐슬은 몹시 폐쇄적이면서도 그 구성원은 다채로운 사회였다. 다인종이 한꺼번에 뭉쳐 살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가 사라지거나 뭉쳐지고 새로 생겨났다.
로마자에 알파벳 몇 개가 추가되고, 그 모양이 변화하기도 했다. 발음은 빠르게 달라졌다. 이전보다 각이 지고 거친 소리를 냈다. 대과거 시제 사용이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는 거의 사어가 되었다.
언어에는 몇 세기에 걸친 종말, 소생, 변화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탄은 그것들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애쉬에게 설명해 주고, 예시 단어를 몇 개 읊기도 했다. 애쉬는 눈을 반짝이며 탄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종말, 소생, 변화.
사실은 애쉬도 그런 과정을 겪어 나가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뜬 후 지금까지. 과거의 인격은 종말을 맞이했으나, 그는 애쉬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탄과 만난 이후로는 변화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애쉬는 변하고 있었다. 본인도, 변화를 촉발한 탄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채. 느릿하지만, 끊임없이.
* * *
탄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번쩍 떴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뒷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몸이 매트에 눌어붙은 것만 같았다. 가위에 걸렸을 때처럼 사지가 무거웠다.
뻑뻑한 눈만 수어 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방 안에 깔린 어둠이 그리 짙지 않은 걸 보니, 일출 직전이다.
“으…….”
사람을 죽여 놓고 멀쩡하게 살 줄 알았어?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파고들었다. 언젠가 탄이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그에게로 돌아와 꽂혔다.
지긋지긋하다.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가끔 나쁜 꿈을 꾸곤 했다. 한동안 뜸하더니 오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생생했다.
꿈은 꿈일 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을 행했을 뿐이다. 그날에도, 얼마 전 우고가 죽어 갈 때도. 탄은 빠르게 자신을 안정시키는 말을 속으로 외웠다.
부정적인 감정에 오랫동안 잠겨 있지 않을 것.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탄은 깨달았다. 감정을 갈무리하고서 끄응, 얕은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시야 가득히 무언가가 들어왔다.
거대한 덩어리.
탄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덩어리의 정체를 깨닫고 간신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우.”
탄은 솟아올랐던 어깨에 힘을 풀며 눈을 찡그렸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하고 시커먼 것. 애쉬였다.
“쟤는 왜 저러고 자는 거야.”
탄이 아침이라 낮게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쭈그러져 있는 애쉬는 완벽한 알몸이었다. 다리는 접어서 가슴께까지 올렸고, 등허리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쌕, 쌕. 숨을 쉴 때마다 몸이 살짝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동거 첫날부터 별꼴을 다 본다. 애쉬가 입었던 옷이 여기저기 휙휙 날아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옷을 벗어 던지는 게 잠버릇인 모양이었다.
“어후…….”
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내놈 나체야 경비대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차고 넘치게 봤기에, 큰 충격은 없었다. 갑자기 맨피부를 마주하여 잠시 당황했을 뿐.
탄은 빠르게 평온을 되찾고 애쉬를 살폈다. 몸살이 났을까 봐 걱정되었다. 매트에서 같이 자자니까, 왜 자기 혼자 구석으로 굴러가서 홀딱 벗고 저러고 있는지. 맨바닥은 춥고 딱딱할 텐데.
어제는 동거인을 들인 첫날이었기에 준비가 미흡했다. 수면 매트가 한 장밖에 없었다. 다행히 몸을 웅크리면 남자 둘이서 같이 쓸 정도로 너비가 컸다.
어젯밤에 탄이 떠올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지는 하나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확했다. 매트에서 둘이 같이 자면 된다.
하지만 애쉬는 매트를 같이 쓰자는 말에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입매를 쭈우욱 내린 채 안절부절못하길래, 반쯤 억지로 매트에 눕혔다. 그러니 또 고분고분하게 차렷 자세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 분명히 분명히 잠들 때까지만 해도 옆에서 얌전하게 잘 누워 있던 애인데. 지금은 왜 저 꼴이지.
탄이 혀를 차며 굼뜨게 일어섰다. 덮고 잤던 이불을 들고서 살금살금 애쉬에게로 다가갔다. 곧 아침인데 이제야 매트에서 재우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이불이라도 덮어 줄 요량이었다.
애쉬가 몸을 잔뜩 웅크린 덕분에 민망한 부위가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었다. 온몸에 옹골차게 들어찬 근육은 적나라하게 잘 보였지만. 몸 끝내주게 좋네. 부럽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숨만 쉬어도 근육이 붙고……. 탄은 흘러가듯이 생각하며 애쉬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탄은 바로 일어나지 않고 잠든 애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사로잡혔다. 무심코 손을 뻗어 애쉬의 뺨을 살짝 건드리기도 했다. 분명히 덩치 큰 남자인데도 예쁘게 보였다.
그렇게 한참 애쉬를 구경하던 탄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귀 바로 뒤쪽, 평소에는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남은 흉이 있었다. 엄지만 한 크기였다. 어쩌다 저기에 흉터가 남았을까, 빤히 들여다보다가 위화감이 솟구쳤다.
저 작은 흉터 빼고는 애쉬의 피부는 완벽했다. 지나치게 완벽했다. 마치 인조 피부처럼. 인간이라면 생길 법한, 관절이 접히는 부위의 옅은 착색. 미세한 주름. 약간의 비대칭. 그런 걸 찾아볼 수 없었다.
탄이 의아해하며 애쉬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미동도 없이 자던 애쉬가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꺼져 있던 전원 코어에 전기가 들어온 듯이.
애쉬의 눈빛도 금세 말똥해졌다. 도통 알몸으로 찬 바닥에서 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어났네?”
탄이 나긋하게 말했다. 애쉬는 눈을 두 번 깜빡인 후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시야 가득히 탄이 들어찼다. 낡고 낮은 공장 천장이 아닌, 탄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하루. 낯설고 얼떨떨한 풍경이었다. 애쉬가 잠깐 넋이 나간 사이, 탄이 장난기 섞인 어투로 말했다.
“안 추워?”
탄이 턱짓으로 애쉬의 몸을 가리켰다. 애쉬는 그제야 시선을 내려 제 꼴을 확인했다.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얼굴 근육이 수축하면서 붉은 기가 확 감돌았다.
알몸. 알몸이다. 분명히 어제는 옷을 입고 잤는데. 허둥지둥 급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는 때, 탄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눈높이를 맞추겠다고 애쉬 옆에 훅 쪼그려 앉은 거다. 잠에서 막 깬 탄의 냄새가 애쉬의 후각을 사로잡았다.
아. 애쉬는 순식간에 팔꿈치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언제나 뛰어난 기능을 자랑하던 신체가 이상해졌다. 망가진 것만 같았다. 그대로 상체를 바둥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쿵! 바닥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뭐야. 괜찮아?”
이 정도 충격에 머릿속이 둔해질 만큼 나약한 육체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괜찮지 않았다. 애쉬가 마른침을 삼켰다. 열띤 몽롱함이 드는 가운데, 탄의 체향과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깜빡, 깜빡. 애쉬는 벌러덩 뒤로 나자빠진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탄이 덮어 주었던 이불은 흘러내려 사타구니 근처만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기가 막힌 위치 선정이었으나, 외설적이고 민망한 꼴임은 여전했다. 맨살이 공기에 노출되는 것만 막았을 뿐. 천 너머로도 중심부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건강하구나, 건강해. 아주 그냥 우뚝……. 탄은 짧게 혀를 차며 방바닥에 나뒹구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옷 벗고 자는 게 버릇이야?”
툭. 모아 온 옷을 애쉬에게 떨구고서는 종알거렸다.
“매트에서 자자니까 왜 구석에 가 있어? 일어나서 얼마나 놀란 줄 아냐. 어후, 너무 놀라서 내 거는 그냥 오그라들어 버렸네.”
탄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흐읍, 하아. 애쉬는 엇박자로 힘겹게 긴 숨을 내쉬었다. 차츰 머릿속이 정돈되는 듯했지만, 여전히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개중 제일 이상하다 여겨지는 곳으로 손이 무심코 향했다.
불뚝 튀어나온 중심부. 수치. 잘못. 이런 단어가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숨겨야 한다. 애쉬는 본능적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탄과 시선을 마주하기가 겁났다.
“건강하면 좋은 거지.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욘 없고. 얼른 옷 입고 밖으로 나오기나 해. 아침 먹고 출근하게. 알겠지?”
낯선 혼란에 잠겨 눈가가 시큰해진 애쉬와는 달리, 탄은 느릿하게 하품하면서 털레털레 방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애쉬 홀로 남았다.
애쉬는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가 폈다. 주름이 질 정도로 꽉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흰자위가 붉다. 킁. 얼얼한 콧잔등을 움찔거리며, 조심스레 이불과 옷가지를 들춰 보았다. 안쪽 상황을 마주하자마자, 애쉬의 얼굴은 완전히 울상으로 변했다.
또…… 또 오줌 나오는 곳이 이상해졌어!
어제 식당에서처럼, 그리고 잠들기 직전처럼.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땡땡 부풀어 있었다. 금세라도 터질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왜. 왜 그대로지? 내 몸에 하자가 생긴 건 아닐까. 애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어젯밤 탄의 옆에 누워 불안에 떨던 때를 떠올렸다.
탄은 앞머리를 내린 채 곱게 잠들어 있었다. 베개에 뒤통수를 대자마자 잠에 빠져들더니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동안인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밖에서는 늘 고집하던 포마드 스타일은 사라지고, 앞머리가 자연스레 흩어지며 이마를 덮었다.
탄의 머리는 새까맣고 적당한 굵기의 직모였다. 푸슬푸슬한 애쉬의 잿빛 머리카락과는 모든 게 달랐다. 서른여섯 해를 살았으니 평소 표정이 이목구비에 묻어날 때였다. 잠든 탄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휘어져 있다. 웃을 때처럼.
낮과는 다른 모습이 신기해서, 그렇게 잠시 바라봤을 뿐이었다. 옆에 누워서 가만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몸이 서서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면서 열이 올랐다. 허리 아래쪽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온 살갗이 예민해져 작은 자극에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과 닿은 곳은 욱신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신체 조직 중 하나가 눈에 띄게 변화를 보였다. 소변이 나오는 곳. 그것이 바지 아래에서 부풀었다. 아예 천을 찢고 나가려는 기세였다. 애쉬는 행여나 탄을 깨울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끝만 애타게 꾸물거렸다.
여태껏, 적어도 애쉬가 기억하는 1년 남짓한 생 동안에는, 한 번도 성감을 느끼지 못했던 몸이었다. 성 지식이 없는 아이가 처음 2차 성징의 징후를 맞이한 것처럼, 혼란과 공포를 느꼈다.
애쉬는 울음을 참으며 슬금슬금 탄에게서 멀어졌다. 찬 기운이 가득한 바닥에 뺨을 기대고 몸을 웅크렸다. 살갗에 냉기가 들어오니 그나마 체온이 가라앉는 듯했다.
험난한 새벽이었다. 탄이 누운 쪽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점점 더 벽으로 다가가기만 했다. 그럼에도 열이 다 식지 않아, 습관적으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냉기에 휩싸인 채 자고 일어나면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도 이 꼴이라니. 애쉬는 우뚝 일어선 제 것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체 일부분이 거대하게 팽창한다는 사실 자체가 괴이하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갑자기 팔 길이만큼 쭉 늘어난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너무 크고, 징그러워……. 애쉬가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움츠렸다.
이걸 보고도 탄은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그렇다면 나쁜 일은 아니란 건가? 하지만 징그러운데…….
애쉬는 손끝으로 제 것을 톡 건드렸다가 황급히 팔을 등 뒤로 숨겼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끈적해. 끈적한 게 묻었어! 탄에게 뭔지 물어볼까? 아냐, 아니야. 탄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면 안 돼…….
애쉬는 안절부절못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급히 머릿속을 여기저기 뒤져 보았다. 흘려들었던 대화. 스쳐 지나갔던 여러 장면. 지금까지 공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빠짐없이 훑었다. 기억이 이미지처럼 빠르게 휘리릭 펼쳐졌다.
그러다 일시 정지. 애쉬는 공용 욕탕에서 남자들끼리 저를 보며 대화하던 장면에 멈추었다.
<이야, 물건이 상당한데. 저거 커지면 장난 아니겠지?>
<형씨. 애한테 왜 그래.>
<뭐 애쉬가 애야? 다 컸는데.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커.>
<그렇긴 한데. 뭔가 애쉬 앞에서는 이런 말 하면 안 될 것 같지 않냐?>
<순진해 보여서? 네가 순진하다, 이 녀석아. 요즘 공장 여자들 사이에서 온통 저놈 이야기뿐이야. 저러고 다니면서 우리 모르게 이미 누구랑 떡 쳤을 수도 있다고.>
<설마.>
다시 휘리릭. 그리고 일시 정지.
애쉬의 머릿속은 일련의 작업을 여러 번 반복했다.
<여기서 섹스하지 말라고 했지!>
<아유, 대장! 말 한번 잘하셨습니다. 이놈들 혼쭐을 내 주십쇼. 창고에서 뭐 하는 짓인지. 시끄러워서 일을 못 하겠습니다!>
<야. 너는 뭐 깨끗한 줄 아냐? 너 요즘 야한 화보집 빌려주면서 돈 받는다며. 이 새끼가.>
<대, 대장.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눈치껏 어린애들은 못 보게 해. 좆 대가리 납작해지기 싫으면.>
휘리릭. 정지.
<야, 야, 애쉬. 너도 이리 좀 와 봐. 이거 빌려 갈래? 넌 처음이니까 대여비 얼마 안 받을게.>
<쟤 얼굴 보면 모르겠냐? 이런 거 보고 딸 잡겠냐고.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쌓일 틈도 없겠어.>
<그 뭐, 소문만 무성하지. 딱 봐도 숙맥인데? 어이, 애쉬. 관심 없어?>
빼곡하게 머릿속 어딘가 저장해 둔 기억을 헤집다가, 새로운 통찰을 획득한 직후. 탁! 애쉬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애쉬의 훌륭한 물건은 도대체 누구에게 쓰였을까. 1년간 공장을 떠돌던 거대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진실은 맥 빠지게 단순했다. 한 번도 쓴 적 없었다. 탄을 만나기 전까지는.
성, 섹스, 오르가슴 등. 지금까지 한 번도 관심 가지지 않았고, 아예 의식조차 못 했던 영역이었다. 애쉬의 감각은 내내 굳게 닫혀 있었다. 무디고 불투명하게만 작동했다.
그러나 탄과의 접촉을 기점으로 감각을 덮고 있던 불투명한 막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오감이 예민해지고, 완력이 늘어나며, 이제는 성욕까지.
애쉬가 다시 찬찬히 제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낯설었지만, 이제 무섭지는 않았다. 어떤 현상인지 그 원리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했으므로.
섹스. 짝짓기. 번식 행위. 애쉬의 머리가 핑핑 돈다. 여러 단어 사이에 관계망이 생기고 의미가 이어진다. 흥분. 성감. 발기. 애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제 것을 슬쩍 움켜쥐었다.
이건, 흥분한 거구나.
“으…….”
뭉개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 흥분한 거지? 번식하고 싶어서? 갑자기? 누구와?
머리는 백지와 다름없었으나, 몸은 본능적으로 답을 알고 있었다. 애쉬가 탄이 누워 있던 매트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탄의 체취가 아직 남아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의식적으로 후각에 집중을 쏟아붓자, 탄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에게서 나는, 옅고 포근한 땀내까지 선명하게 맡아졌다.
애쉬는 어정쩡하게 제 것을 붙들고만 있었다. 그러다 이제는 눈을 완전히 떠서 탄이 누웠던 자리를 구석구석 훑어 내렸다. 꿈틀. 아랫배와 성기 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기둥이 움찔거리며 요동쳤다.
애쉬는 망설이다가 서툴게 손을 움직여 보았다. 자위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어설픈 동작이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가 풀기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온몸을 배배 꼬고 싶어지고, 간지러움이 들어 아무 데나 몸을 치대야만 할 것 같았다.
애쉬는 완연한 어른의 몸을 지녔음에도, 성적으로는 무지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애 수준만도 못했다. 이제야 막 성기에 호기심이 생긴 남근기 아이 정도였다. 원초적인 성감을 갓 인지하기 시작한 상태.
꾸욱, 꾹. 손바닥에 힘을 주며 성기를 압박했다. 저릿한 쾌감이 몸을 덮쳤다. 몸이 끊임없는, 아니, 더 큰 쾌락을 원했다.
번식, 번식, 번식…….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채로 애쉬는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애쉬가 쇳소리를 작게 흘리며 무릎걸음으로 바닥을 기었다. 도착한 곳은 탄이 잤던 매트 위. 그대로 허리를 숙여 매트에 코를 박았다. 흡,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동그랗게 말린 상체가 경련했다. 하체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갔고, 엉덩이에 보조개가 파였다.
끄윽, 킁, 끙. 인간의 신음이라기에는 다소 어눌하고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쉬가 눈을 꽉 감았다. 자위행위는 손바닥으로 성기를 압박하던 것에서 조금씩 발전했다. 손으로 붙잡고 기둥을 살짝 흔들기 시작했다.
이 쾌락의 끝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만 사정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손을 꾸물거리면서 집요하게 성기에만 온 신경을 쏟아부을 뿐이었다.
쉼 없이 탄의 체취를 들이켰다. 눈을 감고서 후각에만 집중하니, 탄에게 둘러싸인 듯한 환상이 들었다.
내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 같아. 애쉬는 탄에게 집어삼켜지고 흡수되어 그와 하나 되는 상상을 했다. 세계에서 애쉬라는 인간은 소거되고 탄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거다. 두려움은커녕 기쁨만이 느껴졌다.
“으…… 끄으…… 읏…….”
애쉬의 성기 끝에서 묽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쿡. 귀두로 매트를 찔렀다. 영역 표시를 한 거다. 투명한 쿠퍼액을 묻힌 순간, 애쉬는 엄청난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꾸욱. 더 힘주어 매트에 성기를 밀착시켰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골반을 약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더 흥분되는 방법을 몸이 빠르게 찾아내고 있었다.
허억, 흐윽, 끅, 흡. 애쉬의 입술 새로 여러 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골반이 점점 더 격하게 움직였다. 퍽, 퍽. 이제는 얼추 매트를 범하는 것 같은 꼴이었다.
두루뭉술하던 쾌감이 날카롭고 선명해졌다. 실체를 지닌 무언가가 되어 몸을 일직선으로 꿰뚫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랫배 근육이 확 조여들면서 사타구니가 뜨거워졌다. 분출 욕구가 거세게 들었다.
절정에 다다르려는 그때. 찌이잉. 애쉬는 격렬한 두통을 느꼈다. 잠시 쾌감을 잊을 만한, 격통이었다.
애쉬가 비틀거리면서 코를 박고 있던 매트에서 떨어졌다. 상체가 덜덜 떨렸다. 비스듬히 바닥에 쓰러져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가에서 물기가 새어 나왔다.
안 돼.
머릿속에서 갑자기 호통이 들려왔다.
안 돼.
조금 전까지는 쾌락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자리를 수치심이 대신하려 했다. 애쉬가 더듬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제 옷을 집었다. 안 돼. 자신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안 돼. 욕구를 따라가는 건 나쁜 일이야.
마음속 혼잣말인 줄 알았으나, 점차 그 위로 다른 음성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욕구에 집어삼켜진 아이는 괴물입니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욕구는 악입니다. 나쁜 아이가 되지 않으려면 참아야 합니다. 나쁜 아이가 되지 않으려면…….
반복되는 목소리.
욕망이 인류를 망쳤습니다. 우리는 거세해야 합니다. 우리는 욕망을 거세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애쉬는 거센 두통을 참으면서 옷을 입었다. 머리는 아프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여전히 사타구니는 뜨거웠다. 분출 욕구가 완전히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소변 나오는 곳에서 자꾸만 소변이 아닌 무언가가 나오려고 했다.
애쉬는 도망가는 사람처럼 방을 뛰쳐나왔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욕실로 향했다. 허겁지겁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뮤턴트 같았다.
편안함은 죄악입니다.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욕구를 잘라 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가장 강합니다. 우리는 모두 강합니다. 그 누구도 성욕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식욕에 사로잡혀 음식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단 한 명도 울지 않습니다.
낯선 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애쉬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기이하게 익숙했다. 음절 하나하나에 온몸이 반응했다.
쿵. 애쉬가 비틀거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주방에서 요리에 집중하던 탄은 다행히도 애쉬를 보지 못했다. 우당탕 큰 소리를 듣고서 애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애쉬는 손바닥으로 제 귀를 때리고 있었다. 퍽.
그 무엇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극상의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비로소 진보하고, 진화합니다.
퍽, 퍽.
우리는 선택받은 아이들입니다. 지극히 행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 행운에 감사합니다.
퍽, 퍽, 퍽.
우리는 바라는 것이 없으니 고요합니다. 우리는 침묵 그 자체입니다.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퍽! 귀가 얼얼해져서 둔탁한 이명이 들릴 때가 되어서야, 속삭임이 멈추었다.
애쉬의 눈두덩이 파들파들 떨렸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작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과 마주쳤다. 공장의 목욕 시설과는 비교되지 않는 깔끔한 타일로 둘러싸인 곳. 안전한 공간이었으나, 애쉬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공포감을 느꼈다.
지끈거리는 이마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여러 신체 정보와 감각이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돋아난 신경. 울렁거리는 속. 등에 고인 식은땀. 잘게 떨리는 목의 근육.
귀가 아팠다. 겨우 쫓아낸 목소리가 금세라도 돌아와 귓구멍을 통과해 뇌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이 목소리는 뭘까. 잃어버린 기억 중 하나일까. 애쉬는 제 과거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는 기억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적당히 쓸모 있는 일을 하며 규칙적으로 하루를 채워 나가는 것. 그 정도의 욕구만으로 살아왔다.
머릿속에서 기묘한 어투로 울려 퍼졌던 여러 구절을 곰곰이 되짚었다. 문장들 사이에서 연결 고리를 찾으려 애쓰는 순간. 찌이잉. 또다시 두통이 밀려오면서 이마에 열이 났다.
그만. 누군가의 경고 어린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애쉬는 두려움과 안락함, 역겨움과 경건함, 애정과 증오 등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극단에 놓인 감정끼리 충돌하며 뒤섞였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다. 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잊고 싶다. 나는 잊어야 한다.
글자의 획 하나하나가 차가운 날붙이가 되어 몸속을 후벼 판다. 가쁘게 숨이 차오르더니 시야가 부옇게 물들었다. 애쉬의 몸이 무너지듯이 앞으로 기울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면대를 와락 붙잡았다.
그때 문밖에서 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쉬?”
애쉬가 흠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탄이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닫힌 문틈으로 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한참 안 나오길래. 뭐 문제 있어? 괜찮으면 문 한번 두드려 봐.”
한없이 격해지기만 하던 애쉬의 숨이 살짝 가라앉았다. 애쉬는 홀린 듯이 비척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살포시 몸을 문에 기대고 호흡을 내뱉었다.
두피가 벗겨질 것처럼 극심한 두통이 약간 사그라들었다. 끝이 붉어진 손가락 하나를 뻗어 문을 매만지다가, 톡, 소심하게 노크했다.
바로 앞에서 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괜찮은 거 맞지?”
톡. 애쉬가 노크로 다시 대답했다. 나무 문 너머에서 탄이 한숨 쉬듯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탄은 애쉬를 따라 문을 손등으로 콩 두드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밥 다 했으니까 얼른 나와. 먹고 출근 준비하게.”
탄이 타박타박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애쉬는 왼쪽 뺨을 문에 찰싹 맞댔다. 귓바퀴가 문에 눌려 구겨졌다. 끔벅. 느릿하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탄의 소리를 좇으니, 통증과 두려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 자리를 열기가 되찾았다.
아. 애쉬가 문에서 후다닥 떨어지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지 중앙 부분이 다시 불룩해져 있었다. 문 너머 탄의 소리에 집중하면 할수록 열기가 심해졌다. 최대한 문에서 멀리 떨어져 타일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등에 냉기가 스몄다.
이 상태로는 탄을 볼 수 없는데. 애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까 방에서 하던 것처럼 조심스레 제 성기를 손에 쥐었다.
킁, 코를 한 번 들이켰다. 눈을 꾹 감고서 성기를 손으로 문지르고 훑었다. 쾌감과 죄악감이 동시에 진해졌다. 생식기가 불결하게 느껴지고, 그걸 문지르며 흥분을 좇는 자신은 갱생도 못 할 나쁜 사람 같았다.
머릿속 속삭임이 다시금 제 음량을 키우려 했다. 콩. 그때마다 애쉬는 탄이 문을 두드렸을 때 났던 경쾌한 소리를 생각했다. 그것으로 속삭임을 밀어내기 위해.
콩. 특별하지 않은 노크 소리였지만, 애쉬에게는 특별했다. 콩. 욕실 안에서 잠깐 메아리쳤던 소리.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욕구를 잘라 내는 법을 배워야…….
콩.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가장…….
콩.
탄의 노크 소리에 어두운 중얼거림이 끊겨 나갔다. 속삭임은 방해 공작을 이기지 못한 듯 차츰 줄어들더니 아예 사라졌다.
이제 애쉬의 머릿속은 오롯이 탄으로 가득해졌다. 탄의 이미지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헤집고 다녔다. 동시에 성기를 문지르는 손짓은 점점 거칠고 빨라졌다.
“흐읍.”
짐승의 서툰 험핑이나 다름없었던 행위에서, 얼추 자위행위 같은 꼴을 갖추게 되었다. 손을 흔들며 본능적으로 절정을 향해 성감을 이끌고 나가려 했다.
성적 쾌락에 면역이라고는 전혀 없는 몸. 애쉬는 금세 무자비한 쾌락을 느꼈다. 잠깐 사그라들었던 분출 욕구가 다시금 강하게 들었다. 생애 첫 사정이었다.
애쉬가 다급하게 변기 앞으로 다가갔다. 투둑. 툭. 무언가가 나왔다. 소변 같은 물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끈적거리고 점성 높은 하얀색 액체. 냄새가 비릿했다.
애쉬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변기 물을 내렸다. 쿠르륵. 물소리를 듣자 차차 제정신이 돌아왔다. 사정 직후의 노곤함도 잠시.
몰래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낯이 화끈거리고 숨고 싶어졌다. 피부에 들러붙은 정액을 씻기 위해 손을 여러 번 박박 문질러 닦았다. 찬물에 손이 얼어 갈수록 애쉬의 얼굴은 울상으로 변했다.
탄이 싫어할 거야. 알아챌 거야. 내가 이상한 짓을 했다는 걸. 나쁜 아이가 되었다고 혼내면 어떡하지? 아니야, 탄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이런 건 나쁜 짓…….
생각이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애쉬는 큰 덩치로 안절부절못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탄이 문 열리는 소리에 곧장 고개를 돌렸다.
“안에서 뭐 하느라 그렇게 오래 있었어? 샤워하나 싶었는데 물소리도 거의 안 들리고.”
애쉬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우뚝 선 채로 발끝만 꼼지락거렸다. 들켰나? 탄에게 혼나게 될까? 세뇌와 반복 학습이 만들어 낸 반사적인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탄은 태평하게 채소 통조림이나 까서 그릇에 옮겨 담다가, 뒤늦게 이상함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애쉬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애쉬의 얼굴은 시뻘겠고 눈두덩은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오그라든 어깨, 일그러진 입술, 힘이 들어가 주름이 잡힌 턱. 큰 덩치가 무색하게, 가련해 보이는 꼴이었다.
애쉬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기까지 했다. 얘가 갑자기 왜 저래. 탄은 통조림 캔을 옆에 내려놓으며 당황한 눈길로 애쉬를 훑었다.
“풀이 팍 죽었는데? 이리 와 봐.”
탄이 애쉬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애쉬는 어벙한 얼굴로 바라볼 뿐 선뜻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얼른.”
하지만 나긋한 재촉에는 견뎌 낼 수 없었다. 애쉬는 고개를 애매하게 떨군 채로 걸어갔다. 거실에 놓인 앉은뱅이 식탁 앞에 푹 무릎을 꿇었다. 양손은 무릎에 올려놓고서 단단히 주먹 쥐었다.
“무슨 일 있지?”
도리도리.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근데 왜 이상하게 굴어.”
애쉬가 흠칫거렸다.
“나 이렇게 찝찝하게 넘어가는 거 싫어하거든. 바로바로 풀어야 뒤탈이 없어. 솔직하게 굴어. 한동안 같이 살 텐데 서로 잘 알아야지.”
애쉬는 탄의 말에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아 넣었다.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다. 솔직하게 굴라니? 그렇다면 욕실에서 저지른 일에 대해서 낱낱이 밝혀야 한다는 뜻인가?
하지만 되짚어 볼수록 온통 나쁜 짓만 한 것 같았다. 허락 없이 함부로 탄의 냄새를 맡았고 탄이 누웠던 곳에 코를 처박았다. 욕실에서는 오줌 구멍에서 끈적한 것도 나왔는데……. 남들도 다 겪는 생리 현상 중 하나겠지만, 냄새가 역한 걸 보니 썩 좋은 일 같진 않다. 아무래도 숨기는 쪽이 나을 것이다.
애쉬가 아랫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어젯밤 탄이 가르쳐 준 수어를 떠올렸다. 기초적인 의사 표현 몇 개만 우선 익혔다. 기억을 되짚으며 손을 움직였다. 탁, 손날로 손바닥을 쳤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턱을 톡톡 건드렸다.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냥 졸려서 그렇다고 설명하려다가 멈칫했다. 어제 배운 수어로는 또렷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없었다. 이럴 땐 공장에서 유용하게 쓰던 방식이 있다. 몸짓으로 행동 묘사를 하면, 대체로 뜻이 통하곤 했다.
애쉬가 두 손을 모아 얼굴 옆에 기대며 자는 척했다가 입을 벌려 가짜로 하품했다. 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애쉬를 흘겨보다가 말했다.
“졸려서 그런 거라고?”
끄덕끄덕.
“안 믿기는데.”
탄은 찝찝했으나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애쉬가 손짓과 표정 연기까지 하면서 변명하니, 그게 귀여워서라도 한발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추궁 대신에 칭찬으로 애쉬의 굳은 얼굴을 풀어 주려 했다.
“근데 수어를 그새 외웠어? 어제는 맛보기로 소개만 해 준 거였고, 오늘 다시 알려 주려고 했더니만.”
애쉬가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바짝 굳어 있던 볼이 풀어지고 광대가 살짝 솟아올랐다.
“애기가 기특해, 아주. 모범생이야.”
탄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손바닥으로 애쉬의 뺨을 툭 두드렸다.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간 스킨십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머릿속에 굵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애기, 애기, 애기……?』
어, 들린다. 내가 애기라고 불러서 놀랐나.
애쉬의 당황한 감정이 고스란히 탄에게 전달되었다. 텔레파시가 딱 좋은 타이밍에 돌아왔다. 안 그래도 조만간 애쉬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탄은 애쉬의 뺨에서 손을 떼려다가 오히려 완전히 감싸 버렸다. 살갗이 찰싹 맞붙었다. 평생을 전투 훈련을 받으며 살아온 탄의 손바닥은 탄탄했다. 관리를 꾸준히 한 피부였으나, 요철 하나 없이 미끈한 애쉬의 것에 비하면 거칠었다.
“피부도 뭐 아가처럼 말랑말랑하네.”
애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조용히 있었지만, 머릿속은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조금 전 욕실에서 배출하지 않았다면, 아마 중심부가 다시 우뚝 서 버렸을 테다.
『나, 나는 어른이라고 했는데. 몸이 다 컸다고. 아가? 왜……?』
“싫어?”
도리도리.
『아이들은 귀중한…… 자원이니까 아가라고 불리는 것도 조, 좋은 거겠지. 탄. 손. 뜨겁다.』
탄은 애쉬의 텔레파시에 웃지 않기 위해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그럼 좋은 거지. 귀여워서 애기라고 부르는 거야.”
『귀엽다? 어떻게 해야 귀여울 수 있지? 귀엽기……? 귀엽기.』
“그 얼굴이면 숨만 쉬어도 귀엽지.”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 다행인…… 어?』
탄의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흐읍. 애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얼이 빠져 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속마음이 읽힌 듯이 대화가 이어지는 중이란 걸.
『뭐……지? 뭐야? 탄? 탄?』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텔레파시가 부르르 진동했다. 탄은 제 골도 같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진정해, 진정. 설명해 줄게.”
『설명? 뭘? 지금…… 게 어떻…….』
텔레파시가 점차 끊기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전파 신호처럼. 잠시 후 굵은 음성이 탄의 머릿속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갔다.
탄은 애쉬의 뺨을 느릿하게 놓아주면서 중얼거렸다.
“접촉한다고 생각이 계속 들리는 건 아니네. 역시 한계치가 있나 봐.”
애쉬는 도톰한 입술을 톡 벌리고 있었다.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 온몸의 관절이 고장 난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겠다. 늘 재빨리 돌아가던 머릿속이 지금은 엉켜서 멈추어 있다. 아니, 탄과 마주하고 있을 때는 자주 이러했다. 규칙에 따라 배열된 생각 회로가 갑자기 제자리를 이탈하곤 했다.
탄은 애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입을 열었다.
“애쉬. 겁먹지 말고. 차분하게 내 말 들어 봐.”
끄덕…….
“텔레파시 알아?”
도리도리.
“그러면 너 가이드랑 에스퍼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아?”
도리도리…….
갈 길이 멀군. 탄은 형질 보유자에 대한 기초 설명부터 시작했다. 애쉬는 멍한 얼굴로 간간이 고개만 끄덕이며 경청했다.
“……가이딩할 때 가끔 에스퍼와 감정이 동기화될 때가 있거든. 텔레파시 연구는 거기서 착안한 거야. 연구는 실패했지만. 뭐, 경비대의 능력을 갈고닦아서 정말 그런 게 가능해진다면 써먹을 데가 많겠지? 내가 이런 말을 길게 한 이유는.”
애쉬가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텔레파시를 쓸 줄 아는 것 같아서.”
흐읍. 애쉬가 바짝 어깨를 세우며 숨을 들이켰다.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였고, 눈가 주변의 살이 진동했다.
“너랑 접촉하면 네 생각이 들려. 매번 그러는 건 아니고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하는데…….”
애쉬는 수어도 고갯짓도 하지 않은 채 입술만 뻐끔거렸다.
“이상하지? 나도 처음 겪어 보는 일이라 이게 뭘까 싶네. 너 전에 이런 적 있어?”
애쉬는 돌처럼 멈추어 있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평소와 달리 목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뻣뻣했다.
“가이딩할 때랑 미묘하게 비슷한 느낌도 들거든.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이게 대체 뭘까?”
탄은 혼잣말하듯 질문을 던져 놓고는 생각에 빠졌다. 절인 채소 조각 하나를 입 안에 넣어 우물거리면서 턱을 매만졌다. 애쉬에 관한 정보를 머릿속에서 일렬로 늘어놓았다.
애쉬. 63구역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된 남자. 기억 상실자. 에스퍼가 아니지만, 에스퍼와 닮은 기운. 텔레파시. 강한 힘.
애쉬가 어디서 온 존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에는 시티 홀과 관련되리란 추론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시티 홀이 애쉬를 발견한다면, 이 기이한 존재를 여기에 가만히 놔둘 리 없을 테니.
다른 방향의 가정도 가능했다. 애쉬가 애초에 시티 홀의 사람인 경우. 그렇다면 시티 홀은 왜 애쉬를 살려 둔 채 여기에 버려뒀을까. 우고와 라함의 건만 봐도, 그들은 증거를 절멸하는 쪽을 선호했다. 애쉬에게는 아직 이용 가치가 남아 있어서?
어느 쪽이든 애쉬는 시티 홀과의 연결 고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단순히 귀엽기만 한 녀석이 아니었다. 시티 홀에 대항하여 그들을 파헤칠 때, 애쉬는 분명히 유용한 패일 테니. 애쉬에게 느끼는 정을 제치고서라도, 애쉬는 옆에 둘 가치가 차고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에서 애쉬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여기서 도망쳐야, 아니, 사라져야 하나.
애쉬는 충격에 빠져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내 생각이 들렸다니. 큰일이다. 탄과 함께할 땐 죄다 이상한 생각만 한 것 같아서다. 그러면 내가 화장실에서 한 나쁜 짓도 알까? 지금은 몰라도 다음번엔 알게 될지도 모르지. 아니! 아니!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하겠다는 거야? 난 용서받지 못할 거야. 울고 싶어, 울고 싶어, 울고 싶…….
“그래서 말인데.”
애쉬의 요란한 상념을 뚝 끊어 내며 탄이 끼어들었다.
“제대로 시험해 보는 게 좋겠어. 너의, 그, 이상한 힘에 관해서. 확실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텔레파시라고 부르자. 매일 생각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기록하는 거지. 여러 상황적 조건을 변화시키면서 테스트도 하고.”
여전히 넋을 놓은 애쉬는 탄의 말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시험, 테스트 같은 단어가 안개처럼 흩어져 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만 느릿하게 끄덕였다.
“어때? 협조할 마음 있어?”
끄덕. 습관적인 고갯짓이 이어졌다.
“좋아. 그러면 바로 오늘부터 테스트 시작하자.”
탄이 활기차게 톤을 높여 말했다. 애쉬는 그 테스트란 게 뭔지도 모르면서, 제 상관이 신나 보이니 냉큼 수어로 화답했다.
「알겠습니다.」
“한두 시간 후쯤에 다시 접촉하자. 아, 혹시 접촉 면적을 넓히는 것도 괜찮나?”
접촉 면적? 애쉬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손잡는 거 말고 포옹이나, 뭐. 딱 달라붙는다든지. 그럴 땐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보려고.”
손잡아? 포옹? 애쉬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야 탄이 내뱉는 말이 하나하나 명료하게 머릿속에 박혔다. 어제 공장에서처럼 딸꾹질이 올라오려 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눌러 내렸다.
그러니까, 테스트라는 게…….
애쉬는 본인에게 닥친 상황을 또렷하게 깨달았다. 멍하니 흘려들었던 탄의 설명을 정신을 되감아 복습했다. 그래, 탄과 접촉해야 하는 거구나. 그런 거였어. 게다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시간 간격을 두고 계속. 손잡는 것 말고도 다른, 다른 것도……?
딱 달라붙어 있는 건 뭐지? 그러면 탄의 냄새가 더 짙게 날 텐데! 또 이상한 기분이 들고, 나쁜 짓을 하게 되고…… 아아.
애쉬는 탄이 눈앞에서 손을 휘휘 휘둘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충격에 깊이 빠져 있었다. 탄은 유심히 애쉬를 들여다보며 코끝을 찡긋거렸다.
“애쉬!”
단호한 부름에 애쉬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 잡아먹냐? 왜 이렇게 겁먹은 표정이야.”
차라리 잡아먹히고 싶어, 애쉬는 생각했다. 그렇게 탄의 몸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면, 탄에게서 버림받을 일도 없으니까.
“하기 싫어?”
싫었다. 탄과 손잡는 건 무척이나 기분 좋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무서웠다. 그러나 애쉬는 저에게 떨어진 요구를 거절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특히나 그 대상이 주인이라면.
애쉬가 파들거리는 손으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끄덕끄덕.
“그러면 이제 밥 좀 먹자. 기껏 빵 데워 놨는데 다 식었네. 오늘부터 근무 시작이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툭. 탄이 애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애쉬는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진정하려 애썼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자. 아무렇지 않은 척……이 될 리가 없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애쉬의 머릿속에서는 요란한 경고등이 한참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