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최첨단 사무소 (6/14)

6. 최첨단 사무소

63구역 보안관 사무소에 세 명이 모두 출근한 첫날이다.

탄은 시티 홀에서 받은 보안관 제복을 갖추어 입었다. 위아래로 군청색이었으며 왼쪽 가슴 부분에 시티 홀의 엠블럼이 크게 달려 있다. 뱅글뱅글 소용돌이처럼 원을 그리는 선들. 동심원이다. 가장 중앙에는 간단하게 도식화된 인간의 눈 모양이 박혀 있다.

캐슬을 공중에서 지켜보면 이 엠블럼과 비슷한 형상일 테다. 가장 바깥을 두르고 있는 성벽. 그리고 그 안을 메우는 여러 개의 동그라미는 구역을 나누는 철조망이었다.

중심에는 시티 홀이 있다. 탄은 엠블럼을 볼 때마다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시티 홀 자기들이 캐슬의 눈이라는 거야 뭐야. 정작 성벽 밖으로는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는 놈들이.

원래라면 전투 순번이 돌아와 성벽 밖으로 나가 있을 시기. 한 달 전만 해도 보안관 제복을 입고 63구역에 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탄은 씁쓰름한 표정으로 엠블럼 배지를 다언과 애쉬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자. 너희들은 사복에 달고 다녀.”

공식 부관이 아니니 제복을 입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시티 홀과 함께 일하는 자라는 뜻으로 엠블럼을 부착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둘 다 옷핀으로 엠블럼을 매달고 나자, 보안관 사무소가 이제야 정식 개관을 한 기분이었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너저분했지만.

“박수나 한번 칠까.”

탄이 실없이 한 말을 다언은 무시했고, 애쉬만 열심히 손뼉을 짝짝짝 두드렸다.

“좋아. 힘이 넘치네. 애들아, 참고로 할 게 많다.”

“많아 보이네요. 우선 좀 치워야겠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끝내주는 청소부 출신 부관이 있으니까. 애쉬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끄덕끄덕. 애쉬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언은 따로 할 일이 있어. 음. 조금 귀찮고 번거로운 작업일 건데. 되도록 빨리 끝내 보자.”

“네. 뭘 하면 될까요.”

“저기 저, 먼지에 쌓여 있던 문서들을 정리해서 관리 서버에 올려 두는 일. 네가 글자를 알아서 다행이야. 나 혼자 했으면, 결국엔 토하면서 창문 깨고 바닥이랑 키스했겠지.”

“여기 1층입니다.”

“아무튼. 문서에 적힌 정보를 그대로 옮겨 적으면 돼.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로 변환한다, 이거야. 간단하지? 기밀 정보는 내가 직접 해야 하지만. 그 외에 너도 열람 가능한 행정 문서들이 있거든. 그걸 네가 맡으면 돼.”

“딱 듣기에는 상당히 번거로운 단순 노동 같은데요…….”

“맞아. 그러니까 전임도 나 몰라라 했겠지. 20년 전쯤에 여기서 일했던 보안관 말이야.”

옛날 자료 중에서 관리 서버에 없는 게 태반이었다. 무언가 하나 찾으려면 낡은 서류철을 한참 뒤적여야 했다. 이렇게 비효율적일 수가 없었다.

“내 후임이 이 꼬라지를 본다면 얼마나 당황하겠냐. 나도 지금 당황스럽거든. 이참에 내가 싹 정리해 놓으려고.”

“……그런데 여기에 보안관이 또 배치될 일이 있을까요?”

“인생은 종잡을 수 없는 거니까.”

이 자리에 탄이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전 홀로그래피나 기술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상위 구역은 완전히 딴 세계라고 들었어요. 엄청나게 디지털화되어 있다고요. 시스템이 알아서 글씨를 인식해서 저장하는, 뭐, 그런 기술은 없나요?”

“으응. 나도 잘 모르겠다.”

있다. 당연히 있다. 63구역의 홀로그램 변조기에는 없을 뿐이었다. 20여 년 전, 이곳은 막 홀로그램 기술이 보급되던 시절의 구식 설비에 머물러 있었다.

신분증과 안면 스캔 정도만 지원되는 기종이라니. 이런 고물로는 제대로 된 행정 업무를 할 수 없다. 탄은 시티 홀에 기기 교체를 요청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핑계는 자원 부족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제 문서 스캔 기능은 소형 홀로그램 워치에도 달려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기술이었다. 그냥 엿 먹으라는 소리다.

탄은 마음 같아서는 다언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말해 봤자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다. 다언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다. 탄은 산더미 같은 단순 노동에 순응하기로 했다.

“힘내서 해 보자!”

탄이 손뼉을 두드리며 발랄하게 말했다.

“네.”

“힘없는 목소린데? 애쉬를 본받자고. 저걸 봐. 벌써 자기 일에 성실하잖아.”

애쉬는 어느새 조용히 구석에 있는 먼지를 싹싹 닦고 있었다. 역시 부관으로 데려오길 잘했다니까. 탄은 공장에 쳐들어갔던 제 결단력을 자찬했다.

며칠간 탄이 제 나름대로 청소해 보았으나, 사무소는 여전히 더럽고 난잡한 구석이 많았다. 정리 정돈은 탄의 특기가 아니었다. 청소하라고 애들을 들들 볶는 건 자신 있었지만.

다언은 건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출근했는데 벌써 집에 가고 싶은 눈빛이다.

“다언! 정신 차려야지! 눈에 초점 다시 맞추고.”

“넵.”

“시스템 사용법 자세히 알려 줄게. 애쉬가 글을 다 익힐 때까지는, 행정 관련 업무는 거의 네 전담일 거야. 홀로그래피 다뤄 본 적은 있나?”

다언이 대답 없이 물끄러미 탄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물어볼 걸 물어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좋아. 오늘 그러면 새로운 경험 하나를 하게 되는 거네. 신나지 않니?”

“신나진 않고요. 하지만 이렇게 의욕을 북돋으려 하시지 않아도 열심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돈 받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거든요.”

“멋진 자세야.”

탄은 다언이 담백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애쉬를 보면 사사건건 걱정되고 챙겨줘야 할 것 같은데, 다언은 혼자 놔두어도 알아서 잘하리란 믿음이 들었다. 덩치는 애쉬 쪽이 훨씬 커다란데도 말이다.

다언과 탄은 산적해 있는 서류를 해결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사무소는 태만의 잔해로 가득했다. 공간을 짓누르는 무기력한 기운을 털기 위한 고난이 시작되었다.

* * *

슬슬 해가 질 무렵, 사무소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

다언은 허공에 뜬 홀로그램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이곳저곳 터치했다. 손이 워낙 빨라 원활하게 작업 중이었으나, 이제 슬슬 손가락과 팔이 뻐근했다.

퇴근. 퇴근. 퇴근……. 다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거에 멈추어 있던 자료를 현재 행정 서식에 맞추어 입력하는 일은 까다로우면서도 지루했다. 이걸 왜 해야 하는가. 그런 의문은 머릿속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기계처럼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다언은 새로운 직장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이 정도 일에 그 봉급이라니. 공장 사람들에게서 받는 따가운 시선만 무시하면, 횡재였다. 게다가 오늘 점심도 탄이 63구역에서 가장 비싼 식당, <다크>에 데려가 밥을 사 주었다.

우당탕. 그때 조용하던 사무소 문이 열리면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애쉬였다.

“으응, 고생했네.”

탄은 냉큼 책상에서 일어나 애쉬에게로 다가갔다. 애쉬가 다 구부러져 못 쓰게 된 선반을 고쳐 왔다. 오전에는 벤치형 의자도 하나 뚝딱 만들었다. 행여나 사무소에 주민이 여럿 찾아올 때를 고려한 대기석이었다. 과연 그 벤치가 쓰이게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애쉬의 손길이 닿은 사무소는 하루 만에 놀랍도록 깔끔해졌다. 애쉬는 묵은 때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자국을 능숙하게 지워 냈다. 살짝 비뚤어져 있던 천장의 전등도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도록 손보았다.

“이리 줘. 내가 들게.”

탄은 애쉬가 들고 온 선반을 건네받으려 했다. 애쉬가 고개를 내저으며 씩씩하게 걸어가 선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탄을 돌아보는 눈동자는 뿌듯함으로 가득 차 반짝이고 있었다.

“수고했어. 기특하네.”

애쉬의 광대가 솟아올랐다. 얕게 배어 있던 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미세하게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칭찬을 더 바라는 듯한 기색이라, 탄이 애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을 때였다.

탁! 다언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벌떡 일어섰다. 18:00. 정확히 퇴근할 시각이었다. 탄은 애쉬에게로 향했던 팔을 거두며 다언을 돌아보았다. 애쉬는 잠깐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가는 거야?”

“네. 집에 할 일이 많아서요. 가도 되나요? 정시 퇴근 원칙이라고 하셨는데.”

다언은 물 흐르듯이 조곤조곤하게 말하면서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어어. 가 봐. 일해 놓은 거는 내가 이따가 서버 들어가서 확인해 볼 테니까.”

“감사합니다.”

다언은 잽싸게 홀로그램 단말기 전원을 껐다. 깍듯하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순식간에 사무소 밖으로 쌩하니 사라졌다. 침착한 어투와는 다르게,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다급한 뒷모습이었다.

“날쌔네…….”

탄이 중얼거렸다. 첫날이니까 저녁을 함께하며 팀의 화목을 다지면 좋았겠지만, 다언을 억지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급한 일도 있어 보였고.

어린 여동생이랑 둘이 산다고 그랬나. 탄은 다언의 신상 정보를 머릿속으로 훑으며 쭈욱 기지개를 켰다. 뻐근하던 어깨가 시원하게 늘어났다. 민원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찾아온 적 없었지만, 온종일 내도록 전산 작업으로 바빴다.

탄이 고개를 뚜둑 돌리면서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는 탄의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마치 탄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오른쪽 뺨에는 검댕을 묻힌 채였다.

“어디서 이런 걸 묻혀 왔어.”

애쉬는 제 꼴이 어떤지 모르는지 눈만 말똥거렸다. 탄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슥, 슥, 검댕을 엄지로 가볍게 문질러 털어 냈다. 볼따구니가 아주 말랑하네, 따위의 감상이나 속으로 읊으며 뺨에서 손을 뗀 순간. 뒤늦게 두 소리가 겹쳐 울려 퍼졌다.

“어.”

“……끅.”

이것 또한 접촉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탄의 음성. 그리고 애쉬의 자그마한 딸꾹질이었다.

“이번엔 또 안 들리네.”

탄은 오늘 계획적으로 애쉬를 만졌다. 직장 내 불순 행위 같은 표현이나, 실제로는 건전했다. 적어도 탄의 관점에서는 그랬다.

탄은 애쉬와 두 시간 간격으로 접촉하며 기이한 능력을 살폈다. 오전 동안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가, 점심 직후에 다시 텔레파시가 잠깐 통했다. 지금은 또 먹통이었다.

탄이 곰곰이 오늘을 되짚어 볼 동안, 애쉬는 커다란 덩치를 파드득 떨었다.

“히끅.”

얼굴부터 목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연갈색 피부라 대번에 티가 확 나지는 않았지만.

“뭐야. 딸꾹질해?”

“끄…….”

“웬 딸꾹질? 몸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라도 들었어?”

애쉬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숨을 꾹 참으면서 딸꾹질을 멈추려 애썼다.

탄의 물음에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다만 순수한 걱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애쉬도 알았다. 손을 잡거나 뺨을 문지르거나, 종종 찾아왔던 따뜻한 접촉도 그저 테스트일 뿐임을. 그 모든 걸 명확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무언가를 알수록 혼란스럽다니. 이상한 일이다. 대개는 머릿속이 명료해지기 마련인데. 애쉬는 저를 향한 탄의 감정이 형제애나 다름없단 걸 깨달을수록 울적해졌다. 머릿속이 진창이 된 것만 같았다. 왜일까. 끅. 딸꾹질을 삼키며 생각했다. 왜지.

“고강도 가이딩할 때처럼 접촉 면적을 넓히면 좀 다르려나. 애쉬, 잠깐 이리 와 봐.”

탄이 애쉬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애쉬가 빳빳하게 굳은 채로 호흡했다. 침을 잘못 삼켜 간신히 잦아들던 딸꾹질이 다시 심해질 뻔했다.

“잠깐만 좀 안아 보자.”

애쉬는 물끄러미 탄을 내려다보며 그의 품을 눈으로 어림짐작했다. 상체를 잔뜩 구부려야 저 안에 간신히 파묻힐 테다. 처음으로 탄이 저보다 작다는 게 실감 났다.

멋있고 대단한 사람, 감히 넘봐서는 안 될 주인 같은 존재. 하지만 지금은 순종 사이로 낯선 충동이 불쑥 솟아올랐다. 탄은 나보다 작아. 이대로 팔을 잡아당긴다면 나에게 딸려 올 거야. 손쉽게.

그를 안아도 돼. 당연히 포옹해도 돼. 왜냐하면 그는 오랫동안 나의…….

애쉬는 두개골이 깨질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탄은 나긋하게 웃으면서 애쉬에게 다가왔다. 애쉬의 맥박이 거세게 요동쳤다. 손끝이 꿈질거렸다. 충동을 참지 말고 탄을 거세게 붙들라고, 뇌가 신체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애쉬, 싫어?”

바로 앞에서 나지막한 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애쉬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붕붕 털어 냈다. 그제야 제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잠깐 스쳐 지나간 충동이라 할지라도, 탄에게 나쁜 짓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니. 탄에게 이쁨받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인정받고 싶었던 거 아니었냐고. 나쁜 놈. 나쁜 놈!

애쉬는 열망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자책했다. 두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퍽퍽 두들기기라도 하고 싶었다.

탄은 파르르 떠는 애쉬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그에게 팔을 둘렀다. 애쉬는 종종 가련한 얼굴로 바뀔 때가 있었다.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매섭게 혼이 난 것처럼 풀 죽은 모습을 한다.

탄이 작게 혀를 찼다. 잿빛 머리통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단편적으로만 알 뿐이었다. 덩치는 큰 주제에 왜 소심하고 순진한 어린애처럼 굴까.

대형 뮤턴트도 새끼 때는 다 귀엽다. 어린것은 공격성이 적어 종종 경비대 앞에서 배를 까뒤집고 구르기도 하였다. 동족으로 오인하고서 애교를 부리는 놈에게는 도통 살생 욕구가 들지 않았다.

뮤턴트여도 그러한데, 애쉬에게 마음이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탄이 애쉬의 푸슬푸슬한 뒤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받쳐 제 어깨로 끌어당겼다.

애쉬는 움찔거렸으나 저항은 하지 못했다. 그대로 애쉬의 붉은 얼굴이 탄의 목덜미에 파묻혔다.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생각. 나쁜…….』

이번에는 텔레파시가 들렸다. 몸을 더 밀착하자 이능력이 발휘되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딩할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접촉 면적을 넓히면 텔레파시가 강해진다. 탄은 신뢰도 높은 정보 하나를 획득하여 좋았지만, 텔레파시의 내용은 영 께름칙했다.

『나빠, 나빠, 나빠, 나빠…….』

“응?”

애쉬의 감정이 뭉텅이로 탄에게 침투했다. 의미를 지닌 언어라기보다는 울렁이는 사념에 가까웠다.

탄은 자기보다 한참 큰 애쉬를 끌어안은 채 멈칫했다. 구부러진 애쉬의 뒷덜미를 토닥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뭐가 나빠? 나?”

『……들렸나?』

꾸깃꾸깃 몸을 접어 탄에게 안겨 있던 애쉬가 움찔거렸다.

“응. 지금은 또 들리네. 나한테 할 말 있으면 해. 욕해도 돼.”

『아, 아. 탄.』

“그래.”

『나, 나쁜 놈 아니에요. 당신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쁜데?”

『애쉬…….』

“너?”

애쉬가 탄에게 머리통을 기댄 채로 주억거렸다. 뺨을 어깨에 비비적거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체온을 쫓아 본능적으로 달라붙는 몸짓이 아이 같았다. 거구가 무게를 실어 기대는데도 탄은 흔들림 없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계속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텔레파시가 흔들렸다. 저음에 담겨 있던 울림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애쉬?”

『그건…… 그건, 아버지이자 주인께서 알려, 주셨는데…….』

텔레파시가 뾰족해지고 군데군데 거친 잡음이 섞여 들어갔다. 온전한 의식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허억, 애쉬가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기어코 텔레파시가 뚝 끊겼다. 애쉬는 두툼한 등을 바르르 떨더니, 고개를 휙 쳐들었다.

탄은 애쉬의 상기된 얼굴을 응시했다. 아버지? 주인? 애쉬의 텔레파시에 섞여 있던 말을 곱씹었다. 일상적인 흐름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아니었다.

지워진 기억 일부분이겠지. 이능력이 차츰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기억도 한 조각씩 돌아오고 있는 걸까. 이러한 조각 하나하나를 모아 완성한 애쉬의 과거는 썩 유쾌하지 않을 것만 같다.

처음 63구역에서 발견된 정황으로만 미루어 보았을 때도, 애쉬가 평온하게 살아왔을 리는 없었다. 상상보다 훨씬 더 심한 일을 겪었을까 걱정이었다.

탄은 미간을 찡그리며 애처롭게 떠는 애쉬를 빤히 보았다. 움츠러들고 불안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큰 덩치를 구기고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까지 취하고 있었다. 언제든 저에게 폭력이 쏟아지리라 예상하는 것처럼.

저것은 학습된 공포다.

탄의 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럴수록 얼굴은 서늘하게 굳었다. 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던 눈매에 각이 졌다. 애쉬를 데리고 있던 놈이 누구든, 쓰레기인 건 확실했다.

탄은 제가 떠올릴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욕설을 속으로 읊으며 애쉬의 어깨를 붙들었다.

“애쉬, 배고프지 않아? 저녁 먹고 위에서 쉴래?”

탄은 평소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돌아왔다. 더는 텔레파시에 관해 애쉬에게 캐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연한 색의 속눈썹이 물기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애쉬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응? 어떻게 할까.”

탄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러자 애쉬의 떨림이 찬찬히 잦아들었고,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던 동공에도 심지가 섰다. 애쉬가 마침내 손을 움직여 수어로 답했다.

「밥을 먹어요.」

“그래. <다크> 가서 맛있는 거 잔뜩 먹자. 오늘 야간 순찰은 나 혼자 돌게.”

다른 보안관 사무소에서는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야간 순찰을 맡았다. 2인 1조 순찰이 기본 원칙이었지만, 63구역에서는 원칙 하나하나 지키다가는 사무소 운영이 불가능했다. 그만한 인력이 없었다.

탄은 혼자서 매일 심야까지 초과 근무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쉬나 다언은 가끔만 데리고 나가고. 애들까지 쥐어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타닥. 그러나 애쉬는 다급하게 탄 쪽으로 한 발짝 다가오며 고개를 붕 내저었다.

“왜.”

「같이. 같이. 같이.」

애쉬가 똑같은 수어를 세 번 반복했다.

“야간 순찰 같이 가자고?”

끄덕끄덕.

“너 피곤해 보이길래.”

「괜찮습니다.」

애쉬는 몸이 피곤한 것보다 탄과 떨어지는 게 더 꺼려졌다. 이곳에 혼자 남는 상상을 하니 오한까지 들었다. 공장에서는 비좁은 1인실에서 잘만 지내 놓고서 왜 이러는지, 애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탄은 입 안쪽 연한 살을 혀로 훑다가 말했다.

“그래, 그럼. 같이 나가자.”

그제야 애쉬가 희미하게 웃었다. 순하고 맑은 미소였다. 어떨 땐 기이하게 힘이 세고 영리하면서, 또 어떨 때는 때 묻지 않은 아이 같음을 보여 준다.

애쉬는 여덟 살에 전투 학교로 징집되어 훈련받는 형질 보유자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힘의 양상은 놀랍도록 에스퍼와 닮아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한계가 있는 이능력. 몇 번 사용하고 나면, 능력은 약해졌다. 충분히 휴식하거나, 가이딩을 받아 일시적으로 힘을 끌어올려야 했다.

에스퍼는 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무적의 존재가 아니었다. 가끔은 이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몸이 상하기도 한다. 그들을 관리하는 게 가이드의 임무였다.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는 안정적으로 생존하지 못했다. 아무리 폭주 위험도가 낮은 에스퍼라 할지라도,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했다.

애쉬가 63구역에서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된 지는 이제 1년. 에스퍼가 1년이나 가이드 없이 살아남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폭주가 몇 번은 일어났어야 했다. 그런데 애쉬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에스퍼이되 에스퍼이지 않은 자. 탄은 애쉬를 러프하게 정의 내렸다.

애쉬는 걸어 다니는 폭탄이었다. 아직은 터지지 않았지만, 언제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그 뇌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심지어 애쉬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63구역 4번가. 새 보안관이 부임한 지도 어느덧 열흘이 넘어간 시기였다.

길에는 가로등도, 번쩍이는 네온사인도 없었다. 그나마 전기 배급량이 많은 집에서는 자그마한 전구 하나를 틀어 놓기도 했지만, 창문을 뚫고 길가를 비출 만큼 밝은 빛은 아니었다.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위태롭게 뒤엉켜 산적해 있었다. 애쉬가 공장을 나간 후 새로 발탁된 청소부는 전임보다 꼼꼼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큰 것들만 치우다 보니, 길은 언제나 쓰레기로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더러운 어둠, 음울한 적막이 길을 가득 메웠다. 그러다 오르막길 끝에서 노란빛이 조금씩 일렁이더니, 이윽고 랜턴이 지평선을 넘어와 어둠에 흠을 냈다.

애쉬가 높이 들고 있는 랜턴은 밝고 선명했다. 이 길과는 이질적이었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멀끔한 보안관도 그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윤이 나고 완벽한 남자. 대다수 63구역 사람들에게 재수 없다는 평을 듣고 있는 탄이다.

사람들은 어두운 집 안에 숨어서 창밖의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야간 순찰이라는 이상한 짓을 매일 성실하게 하는 놈들.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 중에는 나이 든 이발사의 것도 섞여 있었다.

마에가 자신의 반지하 이발소 창문 너머로 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길가의 목소리가 창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 골목길 좀 비춰 봐.”

해가 진 후의 63구역은 적막했다. 소리 하나하나가 경고음처럼 크게 들렸다. 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애쉬는 신속하게 명령을 따랐다.

마에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열심이네. 충견까지 하나 데리고 다니면서.”

더는 캐슬 시티 내에서 애완견을 볼 수 없지만, 충견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관용어로 남아 있었다.

“며칠하고 그만둘 줄 알았더니.”

마에의 시선이 탄과 애쉬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아혼의 기피 명령이 거둬지면서 노골적으로 탄을 배척하는 이는 없었지만, 호의적인 이도 없었다. 보안관 정복을 입고 가슴팍에 시티 홀의 엠블럼을 붙이고 다니는 남자. 63구역에 그런 이를 좋아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래도 탄은 꿋꿋했다.

여태껏 63구역의 밤은 공백이었다. 다들 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나 마치 없는 것처럼 대했다. 어둠이 깔린 골목에서 일어난 일은 해가 뜨면 없었던 것이 된다.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기에 63구역의 밤보다 좋은 곳은 없다.

아혼은 공장 외부에서 일어난 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멀쩡한 방 한 칸 얻을 수 없어 공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우선 챙겼다.

탄은 아혼이 제 손아귀에서 흘려보낸 63구역의 밤을 냉큼 주워 갔다. 어떻게든 보안관다운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권위를 획득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시티 홀이 바라는 대로 외곽에 처박혀 유령처럼 살다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목이 잘려 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사람들은 탄을 아니꼽게 보면서도, 그가 시티 홀의 보안관임을 인지했고 그 권력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탄이 원하던 바였다.

야간 순찰 때 구역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도 몇 번 했다. 골목길에 쓰러진 주취자를 챙긴다거나, 몰래 집을 빠져나와 위험한 짓거리를 하려던 애들 뒷덜미를 잡아 집에다 데려다준다거나.

여러 집을 방문하여 별일은 없는지 일일이 묻기도 했다. 특히나, 탄은 마에의 이발소를 자주 찾았다.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접니다, 선생님.”

닫힌 이발소 문 너머로 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에는 느릿하게 걸어가 문을 반쯤 열고서 탄과 마주했다. 옆에 있는 거대한 애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별일 없으시죠?”

“나야 언제나 같지.”

“뭐 요즘 주변에 특별한 일은 없고요?”

“나를 아주 정보통으로 써먹으려 드는구나.”

“이 구역을 잘 알면서 절 좋아하는 사람이 흔치 않다 보니. 선생님께 좀 의지하게 되네요.”

마에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6번가 쪽으로 가 봐. 낡은 목조 건물 하나 있어. 1층짜리. 그 집에 아비 혼자 애 둘을 키우고 있는데, 술 마시면 종종 손찌검하는 것 같더라고. 아까 술 취한 채 걸어가던데. 한번 살펴봐.”

“좋은 제보 감사합니다. 바로 가 볼게요.”

“그런데 애쉬는 왜 맨날 매달고 다녀?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냐?”

마에가 회색빛 미남을 힐끗거렸다. 애쉬는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고, 탄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유능한 친구라서요.”

탄의 말이 이어질수록 애쉬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푹 내려갔다.

“선생님, 그거 아셨어요? 애쉬 이 녀석 놀랍도록 똑똑해요. 요새 글을 가르쳐 주는데 배우는 속도가 뭐 아주 엄청납니다. 한번 배운 거는 까먹지도 않고요.”

“머리 잘 굴러가는 놈이란 건 알고 있었지.”

“그냥 똑똑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다니까요.”

“공장에서 빼내 가더니 이젠 아주 제 새끼처럼 핥아 주네.”

여유롭게 웃는 탄과 달리, 애쉬는 어깨를 둥그렇게 만 채 땅만 바라보았다. 귀는 새빨갛고 손끝은 움찔거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마에는 멀어지는 두 남자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애쉬의 옆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상기된 광대 주변의 피부. 솟아오른 눈 아래의 애교살. 탄을 살피느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눈동자.

저런. 마에가 작게 혀를 찼다.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말없이도 눈에 보이고 읽히는 감정이 있었다.

제 엄마처럼 사람이 꼬일 것 같더니. 마에는 여나를 마음속으로 그렸다. 탄은 엄마인 여나를 많이 닮았다. 여나는 세상을 늘 따스하게 보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다. 63구역으로 도망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남을 미워하는 법이라곤 몰랐다.

63구역은 상위 구역의 꾸며진 천국과는 달랐다. 세상은 별로 아름답지 않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추했다. 여나는 허기와 공포가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보았다. 인간이 타인에게 내뿜는 악의를 비로소 느꼈다.

그럼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 여나의 타고난 천성이 그러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여러 번 당해 놓고서도 제 곁에 선뜻 사람을 들이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가장 빛났고 그 가치가 돋보였다. 지금의 탄처럼.

탄을 보면 저절로 여나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에는 애써 덮어 두었던 기억이 순식간에 의식의 전면에 떠오르는 걸 느꼈다. 곱씹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오래전 일이었다. 쓸데없는 감상을 걷어 내려 애쓸 때, 영업을 끝낸 이발소에 또 다른 방문객이 찾아왔다.

<다크>의 주방장 겐즈였다. 겐즈가 활기차게 들어오며 말했다.

“음식이 조금 남아서 들고 왔어요.”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까.”

마에는 겐즈를 안으로 들이며 한숨 쉬었다. 겐즈는 왜소한 몸집에 비해 팔이 길었다. 긴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져온 음식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겁니다, 예?”

마에는 입씨름하기 싫어서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겐즈가 마에를 따라다니며 일방적인 호의를 베푼 지는 꽤 오래되었다. 마에의 첫 기억 속 겐즈는 그녀보다 자그마한 소년이었다. 비쩍 마르고 겁에 질린 아이.

눈앞의 겐즈는 어느덧 50대의 중년이 되었다. 얇은 입술 옆에 잔주름이 잡혀 있었고 피부는 얇아졌다. 마에는 흘러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세월이 빨라.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됐어.”

겐즈가 손을 멈칫하며 말했다.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아깝죠. 그래서 후회할 일을 남겨 두고 싶지가 않네. 마에 씨, 나 다시 한번 정식으로 말할게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겐즈가 손을 심장 부근에 얹으며 웅장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지만, 마에가 망설임 없이 잘라 냈다.

“요즘 장사는 잘되나? 타 구역 사람들이 안 오는 기간이잖아. 자기 식당은 구역 내 장사만으로는 유지가 힘들다며.”

“요즘 단골이 하나 생겨서 괜찮아요. 그보다, 제 말을.”

“하지 마.”

“잔인하셔라. 수십 년을 기다려도 여지조차 주지를 않으니.”

“염병한다. 결혼까지 한 번 하고 온 놈이.”

“그건 잠깐의 방황…….”

마에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딴 얘기 해.”

“…….”

“억지로 시무룩한 표정 쥐어짜 내지 말고.”

“억지 아닙니다.”

“사람이 다 늙어 가지고 이러는 거 아니야.”

겐즈가 챙겨 온 통조림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려다, 막판에 힘을 조절해서 톡 내려놓고 말했다.

“그런데 아까 보니 보안관이 또 여기 들렀더라고.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순찰 도는 거지.”

“여기만 유달리 자주 오니까.”

“혼자 사는 할머니라서 그래.”

“에이. 할머니라기에는 너무 아리따운…….”

“하지 마.”

“아, 알겠어요. 한 대 치시겠네. 근데 보안관 그 사람, 참 성실하긴 하던데요. 난 마음에 들어요.”

“네가 누구 보고 마음에 든다고 하는 건 오랜만이네. 식당 단골이라 좋은 건 아니고?”

“물론 그 이유도 좀 있죠. 마에 씨는 그 보안관 어때요?”

“뭘 어때. 그냥 보안관이구나 하는 거지.”

“그래요? 근데 좀 이상하게 낯이 익지 않아요?”

겐즈의 말에 마에가 눈두덩을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다행히도 이발소 안이 어두워 표정을 감추기에는 좋았다. 중앙 테이블에 놓인 자그마한 촛불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빛은 겐즈의 얼굴 반쪽만 비추고 있었다.

마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튀어나온 잔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난 잘 모르겠던데?”

“그, 왜. 예전에 여기에도 탄이란 꼬마애 하나 있었잖아요.”

“뭐, 그랬겠지. 특이한 이름도 아니고. 내가 아는 탄만 몇 명인지.”

“아니…… 여나 아들 말입니다. 그 애를 좀 닮은 것도 같아서…….”

겐즈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여나라는 이름은 암묵적으로 금기어처럼 취급당했다. 이젠 여나를 아는 사람들이 몇 없었지만, 남겨진 이들 사이엔 아직도 그런 분위기가 맴돌았다.

여나의 지인은 모두 그녀를 아꼈다. 그녀의 죽음은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분화구를 만들고 갔다. 깊숙이 파여 있고 당장은 잠잠하지만,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거대한 구멍.

마에는 겐즈의 시선을 스리슬쩍 피하며 말했다.

“그게 몇십 년 전 일인데. 지금이면 걔가 몇 살이야. 세상에. 바로 눈앞에 있어도 못 알아볼걸.”

“그런가. 가까운 사이였던 마에 씨가 못 알아보는 거 보면…… 뭐 아니겠죠?”

“그 탄이면 내가 바로 알았지.”

“하긴.”

겐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만약에 여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더 반겼을까요?”

“모르지. 더 경계했을지도.”

“아무래도 여나가 그렇게, 갔으니까요.”

두 사람의 목소리 사이에 움푹 공백이 파인다. 그 위로 적막이 쌓였다. 한참 동안.

* * *

끄응, 끄응. 애쉬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제 방인데도 구석에 박혀서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있었다. 등과 벽이 찰싹 맞붙었다. 차가운 기운이 벽을 타고 살갗에 스며들었다.

끄으, 끅.

팔에 핏줄이 불뚝 불거져 나올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억세게 주먹 쥔 손은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손톱이 손바닥 살갗을 꿰뚫으려는 듯이 짓이겼다.

창밖은 어둑어둑했다. 해가 뜨려면 한참 남았지만, 애쉬는 요즘 일부러 이 시간에 일어났다. 창백하고 애매한 새벽에.

탄과 접촉 시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몸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이 짓거리는 은밀해야 하므로, 탄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재빠르게 해치울 필요가 있었다. 행여나 들키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파르르. 애쉬가 눈꺼풀을 떨며 고개를 내려 제 사타구니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중심이 단단해져 있었다.

“으…….”

애쉬가 탄의 부관으로서 지낸 지도 보름이 넘었다. 매일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탄과 접촉하여 가이딩 비슷한 걸 받았다. 그렇게 닫혀 있던 감각이 차츰 개방되고, 이능력이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텔레파시 지속 시간이 길어졌다. 이전보다 정교하게 자신이 원하는 의미만 담아 보낼 수도 있었다.

육체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는 돌덩이 여러 개를 몸에 매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문제는, 성감도 같이 깨어났다는 거다. 하루라도 분출하지 않으면, 억눌린 욕구가 곧바로 몽정으로 찾아왔다. 늦게 배운 성욕은 무서웠다.

팔 굽혀 펴기도 하고 심호흡으로도 가라앉히려 해 보았지만, 좀처럼 통하지 않았다. 매번 이불에 실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에는 탄 몰래 나쁜 짓을 저질러야만 했다.

비밀스러운 짓거리. 뜨겁게 부푼 살덩이를 손으로 감싸 쥐고 흔드는 행위. 탄을 생각하면서.

저 너머 다른 방에서 자고 있을 탄을 생각하면 언제나 죄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빠르게 자위를 끝마치기 위해서는 탄이 필요했다. 그로 머릿속을 뒤덮어야만 했다.

애쉬는 탄으로 인해 성감이 깨어났다. 처음으로 성욕을 느낀 대상도 탄이었다. 탄 외의 인간에게 흥분하는 법은 배운 적 없었다. 아니, 배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따끔거리면서도.

탄이면 충분했고 탄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었다. 어찔하게 피어오르는 열락. 이 성욕의 세계는 오롯이 탄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나쁜 놈. 못된 짓. 애쉬는 자조하면서 오늘도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얼굴은 잔뜩 울상이고 차가운 벽에 대고 있는 이마에서는 열이 났다.

저절로 머릿속이 탄의 이미지로 가득해졌다. 이제 위험한 상상 속으로 능숙하고도 재빠르게 빠져들 수 있었다. 탄과 접촉했던 장면을 곱씹기만 하면 된다.

손끝만 스칠 때. 팔을 움켜잡을 때. 그와 포옹할 때. 마치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 이미지를 보듯이 생생했다.

물론 그런 접촉들은 음란함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마음대로 왜곡하여 흥분을 돋우는 재료로 쓰는 것뿐이었다.

탄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애쉬의 상태를 살피는 데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가이딩 횟수를 기록하고, 그로 인한 텔레파시와 몸의 변화도 체크했다.

그러나 애쉬는 탄이 매일 읊어 주는 기록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가이딩이니 이능력이니. 정체 모를 힘이 강해지는 것보다는, 느릿하게 다가오는 탄의 손끝이 더 중요했다.

저를 편안하게 안아 주는 팔뚝의 움직임이, 예민해진 코에 밀려 들어오는 탄의 체취가, 어린 동생 대하듯 다정하게 웃을 때 접히는 눈주름이, 더 중요했다.

“흐, 윽. 끄으…….”

애쉬가 애처롭게 앓는 소리를 냈다. 손이 빠르게 제 것을 잡고 흔들었다. 처음 발기했을 때처럼 헤매지는 않았다. 지금은 이 행위의 과정과 결말을 알았다.

그런데 하나에 적응이 되고 나자, 슬슬 그 너머가 궁금해졌다. 아무리 궁금증을 지워 보려 애써도, 절정에 다다르는 중이면 이미지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늘 애쉬는 탄을 뒤에서 덮쳐 누르는 자신을 보았다. 탄이 바둥거렸다. 동시에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는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가장 강합니다. 우리는 모두 강합니다. 그 누구도 성욕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진화의 순리를 거부하는 탕아, 나약한 패배자, 쓰레기, 쓸모없는 것, 쓸모없는 것, 쓸모없는 것.

하지만 이제 머릿속 속삭임은 애쉬를 온전히 저지하지 못했다. 여러 상상에 밀려, 빠르게 잦아들곤 했다. 오늘도 애쉬는 금세 제 상상에 몰입했다.

짐승 두 마리가 흘레붙는 듯한 모습이었다. 순연한 본능이 만들어 낸 이미지였다. 탄의 뒷덜미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콱 붙잡아 누르고 골반만 들게 했다. 등허리를 팔뚝으로 단단히 감쌌다.

자위행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애쉬는 눈을 꾹 감았다. 눈꺼풀 아래의 어둠 속에서 요란한 빛이 터지는 것만 같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번식 방법이 새겨져 있었다. 애쉬의 상상은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현실의 번식 행위와 얼추 닮았다. 뒤에 매달려 허리를 흔드는 수컷. 요란하게 살이 부딪히는 소리들.

탄, 탄, 탄…….

애쉬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탄, 탄, 탄.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요란했지만.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 하나가 되고 싶어. 내 것, 내 소유, 내 가이드.

그렇게 절정에 다다르려는 찰나였다.

‘탄……!’

애쉬의 생각이 형체를 띠고 퍼져 나갔다.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정신없이 성기를 흔들던 애쉬가 잠시 멈칫했다.

갑자기 성감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 끼어들었다. 마치 탄과 접촉해서 텔레파시를 보낼 때처럼, 몸이 대기와 반응하고 배 안쪽이 꿀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탁. 때마침 저 건너 탄이 자는 방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이 일어나서 바닥을 발로 디디는 소리…….

애쉬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탄이 깨어난 것이다. 이 시간에 갑자기? 어째서? 텔레파시를 듣고? 그럴 리 없다. 텔레파시는 탄과 접촉해야만 발현되는 능력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다른 방에 있는 탄에게 생각이 전달될 리가…….

타박, 타박. 탄의 방문이 열리고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기운이 묻어 있어 느리고 희미한 발소리였다.

애쉬는 다급하게 사정 직전에 멈춘 성기를 바지 안에 쑤셔 넣고 매트에 쓰러지듯 누웠다. 가까스로 이불로 제 몸을 덮어 가렸을 때, 탄이 방문 앞에 도착했다.

애쉬는 두 손바닥으로 사타구니를 꽉 짓누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엉성하게나마 자는 척을 마치자, 끼익, 애쉬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 틈새로 탄이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바라보았다.

“뭐야. 자고 있네.”

탄이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무슨 소리가 들렸던 거 같은데. 꿈인가.”

탄은 웅얼거리더니 살금살금 애쉬의 방 안으로 진입했다. 애쉬는 숨을 꾹 참았다. 고환이 아팠다. 배출 직전에 어정쩡하게 멈춘 데다가, 탄이 같은 공간에 있으니 흥분이 가라앉을 리 없었다.

스르륵. 탄은 애쉬의 옆에 쪼그려 앉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쉬는 눈두덩을 꼴사납게 떨지 않으려 애썼다. 목이 탔다. 입매가 어색하게 굳은 것만 같았다. 한번 의식하자 입술 주변의 모든 미세 근육이 땅기고 불편했다.

탄의 냄새가 난다. 탄의 시선이 느껴진다. 심장이 격렬하게 빨리 뛰었다. 잿빛 앞머리 아래로 식은땀이 고였다. 애쉬의 불안과 달리, 이어 나온 탄의 혼잣말은 온유하기 그지없었다.

“잘 때도 잘생겼네.”

한참 어린애를 귀여워하는 말투였다.

“땀은 왜 났대. 아픈가?”

탄이 중얼거리면서 애쉬의 앞머리를 슬쩍 건드렸다. 땀이 밴 촉촉한 살갗과 탄의 손톱 밑 둥그런 살덩이가 맞닿았다.

애쉬는 꼴사납게 온몸을 펄떡일 뻔했다.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는 그곳이 움찔거리며 난동을 피웠다. 신체는 가까스로 제어했다만, 문제는 정신이었다.

『따뜻해. 탄의 손가락. 단단해. 더…….』

“음? 너 깼어?”

망했다. 애쉬는 다급히 중간에 생각을 끊어 냈다. 온몸이 싸하게 굳었다.

애써서 이능력을 억눌렀다. 탄의 가이딩을 꾸준히 받은 이후, 조금씩 제 의지로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짱짱한 고무 밴드로 머리통을 둘러 묶는 느낌이 났다. 이마와 두개골 부근이 지끈거렸다. 다행히 더는 텔레파시가 흘러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 처음부터 이능력을 제어해야 했는데. 탄이 갑자기 이마를 매만질 줄은 몰라서 방심했다. 애쉬는 눈을 더 세게 감았다. 눈 주변 근육이 인위적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자는 척이 한결 어설퍼졌다.

톡, 톡. 탄이 애쉬의 이마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야, 왜 자는 척하고 있어.”

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애쉬가 한쪽 눈만 슬며시 떴다. 긴장과 두려움을 얹어 놓은 속눈썹 끝이 흔들렸다. 뭐라고 해야 하지. 들킨 건 아니겠지? 애쉬가 이불 속에서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손끝은 힘주어 사타구니를 더 강하게 붙들었다.

탄은 아직 몽롱하고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애쉬의 매트에 풀썩 옆으로 누웠다. 애쉬가 화들짝 놀라면서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근데 지금 몇 시냐. 평소보다 한두 시간은 일찍 깬 거 같은데.”

애쉬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탄은 졸음이 묻어 살짝 어눌해진 투로 중얼거렸다.

“근데 네가 아까 뭐라 했지? 내 손가락이 뭐, 어쩌고…….”

탄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풀썩 내려놓았다.

애쉬는 입에 꾸욱 힘을 주었다. 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탄의 손가락에 감탄하고, 그와의 접촉에 울렁이는 마음을 담은 텔레파시를 들었음에도. 안도감과 함께 기묘한 따끔거림이 심장을 맴돌았다.

탄은, 아무렇지도 않구나.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내 옆에 눕는 거야. 나에겐 특별한 순간이 탄에게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애쉬는 강렬한 감정에 몸이 잠식되었다. 턱과 아랫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코끝에 알싸한 감각이 맴돌았다. 심장은 누군가 쥐어짜는 것처럼 빠듯하게 아픈 느낌이 들었다. 흉부가 답답해서 호흡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에는 주로 억울함, 서러움, 그리고 짝사랑이란 단어가 붙는다. 애쉬는 배운 적 없으므로 알지 못한다. 그의 머릿속 데이터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애쉬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낯선 열감에 시달리다가 무심코 옆에 누운 탄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탄은 가물가물 잠기운에 취해 있다가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가 탄의 머릿속으로 텔레파시를 흘려보냈다.

『탄은 여기서 잡니까?』

“좀 누워 있다가 일어나게. 출근까지 시간 남았잖아.”

『네. 맞아요. 그렇지만 왜 여기입니까?』

왜 당신은 아무렇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나처럼 매일 아침 열에 시달리지 않아요? 왜 지금도 편안하게 웃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어요? 지금 나는 왜 이러는 거예요?

애쉬는 집중력을 발휘해 위의 생각들은 머릿속 뒤편에 숨겼다. 탄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아씨, 또 일어나기 귀찮은데. 나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거냐? 알겠다, 알겠어. 내 방으로 갈게.”

탄이 코를 찡긋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꽈악, 애쉬는 탄의 손목을 붙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놓아주기 싫다는 본능이 앞선 움직임이었다. 그 억센 힘에 탄이 상체를 어정쩡하게 일으켜 세우다가 멈추었다.

“인마, 이거 놔야 일어나지.”

“…….”

“애쉬?”

탄이 의아한 시선으로 애쉬를 훑었다. 팔을 비틀어 보았으나 애쉬의 손아귀를 떨쳐 내지 못했다. 아마도 살갗에 붉게 자국이 남을 것이다.

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애쉬를 살폈다. 가쁘게 내쉬는 숨과 붉어진 눈가. 탁해진 눈빛. 애쉬와 보름 넘게 거의 한시도 빠짐없이 붙어 다녔는데, 이런 모습은 본 적 없었다. 접촉하고 있으니 텔레파시도 들려야 했지만, 우웅우웅 간간이 낮은 주파수의 진동만 들려올 뿐 조용했다.

애쉬가 의도적으로 텔레파시를 끊어 내고 있었다. 탄은 잠기운에 몽롱하던 정신을 바로 붙잡았다. 애쉬가 어딘가 달라졌다. 평소와 다르다. 날카로운 눈으로 애쉬를 훑어보던 탄이 멈칫했다.

애쉬의 사타구니 부근이 이상했다. 이불에 가려져 명확하게 볼 순 없었지만, 그 부분만 융기되어 있었다.

“아.”

탄이 짧게 한숨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어떤 상황인지 바로 파악되었다. 그래, 얘도 에스퍼였지. 그것도 아주 미숙한.

탄은 어정쩡하게 상체를 일으킨 채 애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 요란하게 날뛰는 숨. 그리고 발기한 생식기.

탄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경비대에서 여러 번 겪고 목격했던 모습이었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본능적으로 집착과 애착을 느끼는 일은 흔했다. 아니, 사실상 모든 에스퍼가 한 번쯤은 거쳐 가는 과정이었다. 각기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애쉬, 잠깐만.”

탄이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하며 애쉬의 손가락을 떼어 내려 했다. 흐읍. 흐. 애쉬는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꽈악. 탄의 만류에도 그를 놓아주기는커녕, 아예 두 손을 써서 탄의 팔뚝을 끌어안았다. 매달리듯이.

탄에게 찰싹 달라붙은 애쉬는 고개를 탄의 어깨에 파묻었다. 뒷덜미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체온은 평시보다 훨씬 높았다.

『내 가이드…….』

애쉬의 제어력이 옅어졌고, 기어코 탄의 머릿속으로 텔레파시가 흘러들었다.

『내, 내 가이드. 나의…….』

소유욕이 절절하게 깔린 상념이었다. 이것 또한 탄에게는 익숙했다. 첫 가이드를 향한 비이성적인 열망. 여러 번 컨트롤해 봤다.

탄은 당황하지 않고 찬찬히 애쉬를 살폈다. 애쉬는 온몸으로 탄의 팔뚝을 붙들고 등을 구부정하게 말고 있었다. 끓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이건 사랑과는 다르다. 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에스퍼로서의 본능이다. 이 격동의 감정이 결국에는 이성으로 제어되고 가라앉는 것을 숱하게 확인했다.

탄은 드문 S급 가이드였고, 그에게 달라붙는 에스퍼는 꽤 많았다. 가이딩이 잘 통하는 상대일수록 에스퍼가 애착을 느낄 확률도 높았다. 평생 여자만 좋아해 왔던 대원도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리기도 했다.

복잡한 치정 싸움을 피하고자 부대를 성별에 따라 철저히 나누었으나, 동성 간에도 염문설은 종종 불거졌다.

에스퍼의 비이성적인 상태를 제어하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까지 모두 가이드의 역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공사 구분 없이 뒤섞여 경비대는 진즉에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에스퍼 또한 경력이 쌓일수록 가이딩과 연애 감정을 분리해 내는 데 능숙해진다.

애쉬는 에스퍼라기엔 기이한 존재고, 아직 미숙하기에 가이딩 시 솟구치는 감정에 면역이 없는 것뿐이다. 탄은 여태껏 십수 년간 겪어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그에게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진정 좀 하자. 응?”

탄은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힘으로 에스퍼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애쉬에게 붙들린 팔을 빼내는 건 진즉에 포기했다. 아예 몸에서 힘을 쭉 풀어 버렸다.

“애쉬.”

나지막이 호명하자, 탄의 어깨에 얼굴을 숨기고 있던 애쉬가 움찔거렸다. 날카로운 콧날을 비비적거리며 치댔다.

탄은 애쉬의 둥그런 정수리를 비스듬히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꼴이냐. 어깨 빠지겠다. 손목에도 자국이 남았을 거고.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애쉬가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요령 없이 제 팔에 붙들어 매달리는 것밖에 못 하는 애쉬가 안쓰러웠다. 다른 에스퍼라면 이미 청소년기나 경비대 신입 시절에 극복했을, 불안정한 욕망이었다. 애쉬는 그걸 뒤늦게 겪을 뿐이라고, 그저 가엾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쉬.”

다시 한번 부르자 그제야 애쉬가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탄의 어깨를 묵직하게 짓누르던 얼굴이 공기와 맞닿았다. 애쉬는 겁먹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여전히 흥분에 젖어 있었다.

애쉬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선 것일지라도, 탄에게는 아니었다. 탄은 곧장 손바닥으로 애쉬의 뺨을 감쌌다. 흐으. 애쉬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탄이 가이딩을 진행했다.

『탄, 탄, 타안, 탄…….』

절박하고 시끄러운 텔레파시가 머릿속을 덮쳤지만, 탄은 애쉬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불처럼 뜨겁던 애쉬의 뺨이 차츰 식어 갔다.

애쉬는 몸이 안정되는 걸 느끼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모난 돌멩이 하나가 심장 부근을 돌아다니는 듯했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싫, 싫어. 싫어. 싫어.』

“가만히.”

『아, 아니에요. 아니야…….』

애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체온이 식고 근육이 느슨해졌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며 혈류가 모여 있던 사타구니도 가라앉았다.

이게 아닌데. 애쉬가 울상 지었다. 탄에게 더 붙어 있고 싶었다. 지금 느끼는 열띤 감정을 이대로 흘려보내기 싫었다. 감정이 육체에서 점점 분리되고 있었다.

가이딩을 받으면 대개 심리 상태도 함께 안정된다. 탄이 여러 번 겪었던 에스퍼의 이상 애착 행동도 가이딩이 끝나면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애쉬는 그렇지 않았다. 위화적인 평온이 몸에 느껴질수록 두려움이 짙어졌다. 가이딩이 거절의 언어로 다가왔다. 네 감정은 지워질 거야, 탄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심박 수가 안정된 상태였으나 공포스러웠다. 애쉬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탄의 팔을 놓아 버렸다. 꾸물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차가운 벽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탄은 중간에 끊긴 가이딩에 미간을 찡그렸다.

“괜찮아?”

분명히 가이딩은 완벽했다. 애쉬의 힘은 순식간에 원래의 궤도를 찾아갔다. 그러나 텔레파시에 가득 담긴 감정 덩어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탄은 웅크린 애쉬를 빤히 바라보았다. 혼란이 가득한 눈빛과 마주했다. 어떻게든 현 상황을 애쉬에게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려 애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종종 있는 일이야. 어린 에스퍼들은 가이드한테 집착을 느끼기도 하거든.”

애쉬가 흠칫거리며 탄을 바라보았다.

“……그 집착이 흥분으로 이어질 때도 있고. 그런데 대부분 일시적이야.”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럴 때는 직설적으로 때려 붓고 상황을 알려 주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평생을 교육받았고 경비대에서도 문제없이 대처해 왔다.

에스퍼의 감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 양쪽 모두 괴로워진다. 이상 애착 행동이 더 심해지기만 할 뿐이다. 실제로 좋지 않은 사례를 몇 번 목격했다.

가이드 또한 그 에스퍼에게 빠진 게 아니 이상,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고 끊어 내야만 했다. 어정쩡하게 희망 고문을 이어 나가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매정하다 싶을 만큼 선을 긋는 게 나았다.

합리적인 사고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미숙한 에스퍼를 잘 구슬리면 된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내가 너의 첫 가이드니까. 그럴 땐 다들 착각하게 돼.”

하지만 지금은 가슴 한구석이 기묘하게 따끔거렸다. 애쉬의 멍한 얼굴이 가련해서일까. 착각이란 단어를 들은 애쉬의 눈가가 확 달아올라서일까.

탄은 그답지 않게 마음의 테두리가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어린 에스퍼라면 누구든 아끼곤 했지만, 유달리 애쉬 앞에서는 더 물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봤자 애한테 좋을 것도 없을 텐데.

탄은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힘에 익숙해질수록 감정도 자연히 잦아들어. 너무 당황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놔둬.”

잠시 불규칙한 호흡 소리만 교차할 뿐, 침묵이 이어졌다.

애쉬는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아 넣은 채 생각에 잠겼다. 탄에게 들은 말이 어지럽게 귓가를 떠돌았다. 당사자에게 흥분한 걸 들켰는데도 혼나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받았다. 기뻐야 정상일 텐데, 기쁘지 않았다.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감히 주인에게 부정의 말을 내뱉고 싶어졌다.

탄과 접촉할 때마다 드는 기이한 감각, 아침마다 그를 생각하며 피어오르는 열기. 그리고 지금,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통증. 이 모든 것이 일시적인 착각이라니.

애쉬는 늘 제 의견일랑 없이 타인을 따라왔다. 처음으로 반항적인 마음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팍이 씨근덕거렸다. 체온이 다시금 솟구치기 시작했다.

“애쉬?”

탄은 이상함을 직감하고 애쉬를 관찰했다. 분명히 조금 전 가이딩을 마쳤는데, 애쉬가 또 자제력을 잃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에스퍼 앞에서는 절대로 약자처럼 굴면 안 된다. 탄은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숨 쉬고. 이리 와.”

탄은 애쉬를 향해 부드럽게 손을 까딱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시…… 윽.”

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애쉬의 거대한 몸뚱이가 움직였다. 이성을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튀어 나간 몸짓이었다.

애쉬가 단단한 손바닥으로 탄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곧바로 탄을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거칠게 요동치는 상념이 텔레파시가 되어 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아니야. 아니야. 착각 아니야…….』

이런. 탄이 속으로 탄식했다. 애쉬가 뿜어내는 날것의 감정이 거칠게 몸을 헤집었다. 억울하고 서러우면서도 탐욕스러운. 갓 깨어난 에스퍼는 몹시도 뜨거웠다.

탄은 거구가 자신을 짓누르는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부드럽게 애쉬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애쉬. 미안한데…… 만약에 착각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해 줄 게 없어. 난 남자는 안 되거든.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바라본 적이 없어.”

『남자…….』

“그렇지. 애쉬는 남자잖아.”

때마침 다시 부푼 애쉬의 남성이 탄의 복부를 꾸욱 찔렀다.

『싫어, 싫어요…….』

“싫어도 어떡하겠어.”

꽈악. 탄을 짓누르던 애쉬의 손목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탄이 나긋하고 차분히 말했다.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

애쉬가 굳어 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이고, 첫사랑도 아직인 애가…….”

애쉬는 멍하니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사전적 뜻은 알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바다랑 비슷했다. 캐슬 시티의 시민들은 모두 바다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다. 성벽 너머 저 먼 곳에 바다가 실존한다는 사실도.

하지만 아무도 직접 바다를 보지는 못했다. 상상에는 한계가 있다. 몇 안 남은 구세계 디지털 자료 속 바다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알고 있되 알지 못하는 것. 애쉬에게 사랑이 그러했다. 탄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제 안에서 시끄럽게 날뛰는 감정을 그 단어의 틀에 집어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애쉬. 우선 가이딩에 익숙해지고 나서, 다시 생각하자. 그때 너도 네 감정을 찬찬히 살펴봐.”

탄은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논리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말을 내뱉고서 침을 삼켰다. 타액이 넘어가는 목구멍이 갑갑했다.

들러붙는 에스퍼를 이토록 내치기 힘든 적은 처음이었다. 젠장. 애쉬의 저 커다란 눈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죄책감을 쓸데없이 잘 자극했다. 우람한 사내놈 같은 외관과 다르게, 수줍은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 탓이라거나.

애쉬가 같은 남자라기보다는 보호해야 할 어린애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비논리적인 사고였다. 탄은 스스로 채찍질했다. 누가 누굴 보호해. 힘에 못 이겨 벌러덩 깔린 쪽은 오히려 나인데. 정신 차리자.

탄은 일부러 과장하여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아무튼, 착각인 편이 우리 모두에게 좋아. 내 취향은 너랑 거리가 멀다니까. 난 연상의 여자가 좋거든. 화끈한 성격이면 더 좋고. 뭐, 네가 아는 사람 중에 꼽자면…… 아혼?”

익숙한 이름에 애쉬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심장이 거세게 벌떡여 버티기가 힘들었다. 쐐기가 제대로 박혀 들어갔다. 애쉬는 비틀거리며 탄의 몸에서 비켜났다.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연상의 여자라니. 아혼이라니. 어설프게 흉내 낼 수도 없는 부류였다. 애쉬는 절망했다. 시무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고, 탄은 어른이야. 맞아. 탄의 말이 다 맞겠지. 탄은 똑똑하니까……. 속으로 웅얼거리며 진정하려 해도, 자꾸만 울컥 뜨거운 감정이 치솟았다. 기어코 바르르 떨면서 수어를 했다. 며칠 사이 수어를 금세 익혀, 이제 꽤 많은 뜻을 표현할 수 있었다.

「리더는 안 됩니다.」

탄이 작게 앓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아혼이랑 뭐 해 볼 생각은 전혀 없거든? 굳이 따지자면 그런 사람이 취향이라는 거지.”

「리더는.」

파르르. 애쉬의 손끝이 진동했다.

「연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겠어, 알겠다고. 그냥 해 본 소리라니까.”

애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탄을 쏘아보려다가, 그럴 깜냥까지는 되지 않아 소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 어느 때보다, 애쉬가 부정적인 언어를 많이 쓰는 날이었다. 늘 긍정과 순종밖에 모르던, 그럼으로써 제 실용성을 증명하려던 모습과는 달랐다. 애쉬만의 생각과 언어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탄은 불퉁하게 앉아 있는 애쉬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난 나갈게. 누워서 더 자. 아니면 뭐…… 그걸 좀 어떻게 하든가.”

탄은 애쉬의 그곳을 곁눈질했다. 애쉬가 후다닥 손바닥으로 자기 사타구니를 짓눌렀다.

이쯤이면 알아들었겠지. 탄이 긴장 섞인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저런 꼴을 보고도 기분이 더러워지기는커녕,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경비대에서 이랬다면, 한 놈만 편애한다고 욕 좀 먹었을 것이다.

“출근 시간에 맞춰서 나와.”

애쉬는 몸을 벽 쪽으로 튼 채로 고개만 엉성하게 끄덕였다. 탄의 말을 경청하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탄이 완전히 방을 나설 때까지 애쉬는 묵묵히 벽만 노려보았다.

탄이 남기고 간 말을 수없이 곱씹었다. 매정하리만치 선명하게 그어진 선. 너는 이 안쪽으로 넘어올 수 없다는 단언. 탄은 다정했지만 단호했다.

하지만. 애쉬는 속으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내 가이드인데.

생경한 소유욕이 몸을 빠듯하게 채웠다. 애쉬의 안에서 불안이 꿈틀거렸다. 탄의 손목 감촉을 곱씹었다. 마치 네가 사랑을 알긴 하느냐면서 아이 다루듯 말하던 탄의 음성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모른다. 애쉬가 지금 명확히 아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탄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실재한다는 것. 모른 척하거나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욕망을 거세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욕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야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더럽지 아니하고…….

깊숙한 정신 어딘가에서 예전에 들었던 음성이 메아리쳤다.

욕망은 거세되지 못하였다.

* * *

며칠 후. 탄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사무소 1층으로 내려가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뒤따라오던 애쉬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애쉬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헤이즐넛 빛깔의 눈동자가 허공을 애매하게 응시했다.

또 저러네. 탄은 혀를 차고 싶은 걸 참았다. 며칠 내도록 애쉬가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 가끔 턱에 힘을 잔뜩 준 채로 뚱하게 있기도 했고, 불러도 못 듣는 때도 있었다.

누가 봐도 잔뜩 풀이 죽은 꼴이었다. 탄은 그런 애쉬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사소한 거부만 당해도 상실감을 느꼈다. 본능이었다. 그러나 본능은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다. 계속해서 연습하고 훈련하면 된다.

저 녀석은 언제까지 저러려나. 탄이 물끄러미 애쉬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위 계단에 서 있는 애쉬가 평소보다 더 거대해 보였다. 쏟아지는 그림자에는 위압감이 넘쳤다.

모른 척 내버려 두면 조금씩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애쉬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기만 했다. 매번 밥도 남겼다. 오늘따라 애쉬의 머리카락은 더 부스스하게 일어나 있었다. 항상 탄력 넘치던 피부도 비교적 푸석했다.

탄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버림받은 애처럼 온종일 꽁해 있는 걸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다. 보다 못한 탄이 나지막이 말했다.

“애쉬.”

탄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애쉬가 끼긱,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화났냐? 섭섭해?”

도리도리.

“아니긴 뭐가. 글 가르쳐 줄 때도 데면데면하게 굴더니만.”

애쉬가 아랫입술을 오물거렸다.

“오늘 아침은 가이딩도 안 받았잖아.”

“…….”

“이대로 괜찮겠어? 아휴. 얘기 좀 하자.”

탄이 애쉬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톱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고, 손가락은 길고 곧게 뻗어 있었다.

애쉬는 저보다 옅고 투명한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탄의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그의 핏줄이 흐르는 모양을 눈으로 그렸다. 저기를 통해서 피가 돌고, 그 피는 심장에 닿겠지. 탄의 심장 박동을 상상했다. 소리에도 온도가 있다면, 그것은 무척 따뜻할 것이다.

탄은 다정했다. 그 대상이 한 명이 아니라서 문제였다. 갑자기 애쉬는 눈물이 핑 돌았다. 코가 화끈거렸다.

“가이딩 안 받으면 답답할 텐데.”

애쉬는 여전히 탄이 저를 아낀다는 사실에 울컥하면서도, 모순된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탄은 언제나 변함없이 따뜻했다. 며칠 전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말이다. 그건 즉, 자신에게는 탄을 뒤흔들 만한 힘이 없다는 증거같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탄으로 인해 재구성되고 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일차원적이고 어수룩한 생각에서 맴돌 뿐이었다.

나를 봐 줬으면 좋겠어. 나를 의식했으면. 탄, 탄, 탄. 애쉬가 속으로 웅얼거렸다.

“네가 좀 어색하고 불편해하는 건 이해하지만, 할 건 하자.”

애쉬는 감정이 격렬해지면서 온몸이 지끈거렸다. 아침 시간대의 가이딩을 거른 결과가 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동공이 확장되었으며 심장은 인간의 한계치를 뛰어넘어 빠르게 팔딱였다.

점점 이성이 아닌 감각에만 온 신경이 쏠렸다. 탄, 탄, 탄. 맥이 뛰고 있을 저 손목을 낚아채고 싶다. 살갗을 통해 그의 박동을 전해 듣고 싶다. 애쉬는 물기 어려 있으나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탄을 훑었다.

“계속 이대로 지낼 수는 없…….”

결국에는 또 충동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안정화되지 않은 에스퍼는 제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직은 자제를 모르는 아이나 다름없었다.

타닥. 애쉬가 한 번에 계단 두 개를 내려가, 순식간에 탄 바로 위에 섰다. 그대로 탄의 손바닥을 휙 낚아채 당겼다. 힘을 못 이기고 딸려 간 탄의 뒤꿈치가 들렸다.

꽈악. 애쉬가 무작정 탄을 끌어안았다.

이 모든 게 탄이 짧은 탄식 한마디를 내뱉기도 전에 끝났다. 탄의 육안은 애쉬를 따라가지 못했다. 탄의 관점에서는, 찰나의 잔상만 보이다가 눈 한 번 깜빡이니 자신이 애쉬의 가슴팍에 처박혀 있는 상황이었다.

탄은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올가미처럼 저를 두르고 있는 팔뚝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무리 평생 몸을 갈고 닦았어도 에스퍼의 신체 능력을 이기지는 못했다.

탄은 잠시 아뜩해졌다. 안 그래도 키 차이가 나는데, 계단 위아래에 서 있다 보니 머리통이 애쉬의 가슴팍 부근에 자리했다. 한참 어린놈한테 이런 식으로 안겨 있는 게 유쾌할 리는 없었다.

단단한 가슴골 사이에 묻힌 콧대. 온몸으로 느껴지는 열기. 콧속을 가득 채우는 체 향. 정수리에 떨어지는 짙고 뜨거운 숨결. 자극이 과했다. 온전히 애쉬의 팔심에 의지하여 들려 있는 발뒤꿈치가 근질거렸다.

“놔. 이러면 가이딩 안 해 준다.”

탄이 단호하게 말해 보았으나, 음성은 애쉬의 가슴팍에 부딪혀 죄다 뭉개졌다. 웅얼거림처럼 들렸다.

“애쉬!”

큰소리를 내 보아도, 돌처럼 단단한 애쉬의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팔뚝 힘이 무서울 정도로 억셌다.

“하아…….”

애쉬는 탁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뜨거운 숨이 탄의 정수리에 닿았다. 탄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놈 봐라. 야. 이 자식이.”

버둥거려도 소용없었다. 꾸욱. 탄은 제 배를 찔러 오는 무언가에 흠칫했다. 묵직한 부피감. 열기를 간직한 살덩이가 천 너머에 있음이 느껴졌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탄은 꿍얼거리며 손끝을 꿈틀거렸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지만, 몸은 교육받은 대로 착실히 대응책을 실행했다.

에스퍼로서의 본능과 감정을 헷갈려서 날뛰는 신입이 어디 한둘이던가. 이런 경우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가이딩. 적은 면적이라도 맨 살갗을 맞대어 가이딩을 시도해야만 했다. 스르륵. 탄이 팔을 올려 애쉬의 목덜미를 감쌌다.

흡, 애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요동치던 생각 덩어리들이 어떠한 여과도 없이 탄의 정신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탄. 탄. 탄. 만지고 싶어. 냄새가 너무 좋아. 뒷덜미 냄새. 여기를 깨물고…….』

탄은 적나라한 본능의 언어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애쉬와 접촉한 부분에 감각을 온통 집중했다. 손가락 끝에서 애쉬의 맥박이 팔딱이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이드와의 접촉에 에스퍼의 신체는 극도로 민감해졌다. 한참 갈증을 느끼다가 물을 접한 것처럼, 게걸스럽게 가이드가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탄이 좋아. 탄이랑 계속 붙어 있고 싶어. 탄의 온몸을 보고 싶어. 탄, 타, 탄이랑…….』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이딩 중에 에스퍼의 감정이 동기화된 적은 많았다. 그걸 다스리면서 가이딩을 신속하게 마치는 게 그의 임무였다. 탄은 언제나 그런 쪽에서는 최고였다.

『탄이랑 교미할래. 자연 번식은 나쁜 일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지만 지금은 탄의 숨이 간간이 흐트러졌다. 두루뭉술한 감정이 아니라 적나라한 언어가 꽂히고 있으므로. 질척거리는 정염에 온통 젖어 있는 말들. 이런 건 베테랑 가이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아, 하…….”

애쉬는 있는 힘껏 탄을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해 왔다. 탄의 정수리 부근에 얼굴을 처박고 뺨을 비비적거렸다. 바짝 선 살덩이가 무자비하게 윗배를 콱콱 찔러 왔다.

“……야.”

탄이 탄식 같은 음성을 냈다. 애쉬는 본능적으로 허리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덩이가 꿈틀거리며 위아래로 까딱였다. 이 자식 날 자위 기구처럼 쓰겠단 건가. 탄이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가이딩을 끊지 않고 이어 나갔다.

애쉬는 신인류 중에서도 특수성이 많은 존재였다. 그 사실 하나로, 탄은 애쉬의 많은 부분을 감내하고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수리에 헐떡이는 숨이 떨어지고, 거시기가 제 배를 찌른다고 하더라도.

탄은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며 가이딩을 계속했다. 무질서하게 헤집고 날뛰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힘의 방향도 뒤죽박죽 엉망으로 흘렀다. 이걸 차분하게 안정시켜야만 했다.

머릿속에는 정제되지 않은 애쉬의 생각이 쉼 없이 웅웅댔다. 욕정과 설움이 한데 뒤섞인 음성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탄이랑 버, 번식하려면…….』

참다못한 탄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남자끼리는 번식 못 해, 인마.”

『못 해?』

“당연히 못 하지!”

이 녀석은 기억 잃기 전에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기초적인 성교육조차 받지 못한 건가. 탄이 경악하고 있을 때, 애쉬의 텔레파시 또한 충격으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못 해? 못 해……. 맞아……. 탄이랑 못 해. 난 탄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맞아, 그랬지. 나는 아무것도…….』

“그건 또 뭔 소리야.”

『모, 몰라요.』

“대답할 정신이 있기는 하나 보네? 그러면 나 좀 놔주든가.”

『……놔? ……탄은 애쉬를 싫어해요?』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네가 왜 싫어?”

콱. 탄이 주먹을 말아 애쉬의 등을 내리쳤다. 애쉬가 잠깐 멈칫할 정도는 되는 힘이었다. 애쉬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오르락내리락하더니, 굼뜨게 허리가 펴졌다. 탄의 정수리에 처박고 있던 고개도 느릿하게 올라갔다.

그렇게 애쉬와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친 탄은 뒷덜미에 얕게 소름이 돋아났다. 애쉬의 눈꺼풀이 풀려 있었다. 완전히 맛이 가 버린 눈빛이었다.

경비대에서 몇 번 보았다. 폭주 상태에 빠지기 직전인 에스퍼와 비슷했다. 하지만 눈빛만 그럴 뿐, 애쉬의 몸 자체는 정상 궤도로 천천히 진입하고 있었다.

『……싫지 않아? 탄은 애쉬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고장 난 것처럼 텔레파시가 삐거덕거리다가, 곧이어 속사포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탄은 언제나 아무렇지 않아요. 당신도 나 때문에 생식기가 커져요? 매일 아침? 만지지 않으면 안 돼요?』

“당황스럽네.”

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침마다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고? 그건 몰랐는데. 아무리 에스퍼의 초기 본능이라 할지라도, 저에게 일상적으로 흥분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이드치고는 커다랗고 탄탄한 몸에, 누가 봐도 남자 같은 생김새인데. 도대체 왜.

탄은 제 편견을 살짝 뒤틀어 보았다. 애쉬는 원래 남자한테 끌리는 쪽일지도 몰랐다. 경비대원 중 동성애자가 없지는 않았으나, 당당하게 드러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인구 안정을 지난 세대 최고 가치로 여겼던 캐슬 시티에서는 이성애와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이 ‘보통’의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이러한 ‘정상성’에서 빗겨 나간 자들은 사회 기여도에서 최하점을 받고는 했다. 압도적인 재력 등을 갖추지 않고서야, 바로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탄은 경비대라는 엘리트 조직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남들보다 본디 유연한 성격이었지만, 그의 무의식에도 조직과 사회가 주입한 정상성이란 개념은 존재했다.

그 결과 탄은 남자를 한 번도 성적 대상으로 본 적 없었다. 동성 에스퍼의 집착은 특수하고 일시적인 것이리라 여겼다. 사랑이 아니라. 아무튼,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일. 자신의 시야가 닿지 않는 세계.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공들여 생각하지도 않았다.

곤란한데. 탄은 혼란스러움을 애써 꾹꾹 눌렀다. 애쉬가 동성애자라고 치자. 그래서 달라질 게 있는가? 없다. 어차피 받아 주지 못할 테다. 이 애랑 연애를? 섹스도? 말이 되나?

“애쉬. 생식기는 원래 매일 아침 커져. 건강한 남자라면 다 그래.”

탄은 차분히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확언을 읊었다. 나는 S급 가이드고 3대대 대장까지 했던 사람이다.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남자 성기가 배를 찌르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가이딩할 수 있다. 다행히도 애쉬의 몸 안에서 날뛰던 힘이 거의 정방향으로 돌아왔다.

『탄도?』

“나? 당연하지. 아직 아침 발기가 안 될 나이는 아니거든.”

『탄도…… 만져요?』

“애기라서 뭘 모르나 본데. 꼭 만지지 않아도 돼. 아침에 선 거는 좀 놔두면 금방 가라앉아.”

『아니요.』

“뭐가 아니야.”

애쉬가 눈가를 찡그리며 반박했다.

『틀려요. 가라앉지 않습니다.』

“기분 탓이겠지.”

『믿어 주세요. 진지해요.』

“어, 진지하게 듣고는 있어.”

『나쁜 짓 해야만 가라앉습니다. 안 그러면 계속 계속 생각이 나요. 탄을 쓰러뜨리고 교미하는 생각이…….』

탄은 반사적으로 올라오려는 헛기침을 간신히 눌러 냈다.

“나쁜 짓이라고 생각해?”

『……네. 나쁜 짓, 나쁜 짓.』

“실행하지만 않으면 돼. 그러면 나쁜 짓 아니야. 알겠지?”

애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텔레파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탄의 머릿속에 스며드는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속삭임처럼 은밀하게 들렸다.

『만약에. 조금. 조금만 실행하면?』

“실행하면 실행하는 거지. 조금만 실행하는 건 뭐야? 넣다 마는 거냐? 어이가 없네.”

『죄송해요.』

텔레파시가 급격히 얇아졌다.

“상황에 따라 뭐, 참작의 여지는 있을 수 있겠다만. 조금만 실행하는 것도 안 돼.”

『그러면? 애쉬는 버려져요? 거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쉬가, 내가, 그런 나쁜 애라서…….』

흐윽. 머릿속이 아니라 실제로 애쉬가 뱉어 낸 소리였다. 서글프게 앓는 소리. 거세게 흔들리던 텔레파시가 기어코 뚝 끊겼다. 힘이 한계치를 넘어선 거다.

애쉬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이때다. 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애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막혀 있던 숨을 몰아 내쉬며, 흐트러졌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에 옅게 땀이 배어 있었다.

“아까부터 자꾸 뭐래! 내가 널 왜 버려?”

이능력을 몰아 쓴 애쉬는 멍한 얼굴로 탄을 내려다보았다. 가이딩으로 몸이 안정되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그럴수록 얼굴에는 두려움이 번져 갔다.

윽. 애쉬가 희미한 소리를 내면서 팔을 내려 제 사타구니를 가렸다. 앞뒤 가리지 않고 또 탄에게 치댔다. 뒤늦게 걱정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탄은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밀어내도 꼼짝하지 않던 거대한 덩치가 가련하게 보였다. 미숙한 에스퍼에게는 금세 안쓰러움과 책임감을 느끼는 직업병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말기가 아닌가. 진지하게 자기반성을 하며 말했다.

“앞으로는 가이딩 꼬박꼬박 받아. 나한테 심상했다고 거르지 말고. 안 그러면 또 지금처럼 이성 잃는다.”

애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세라니. 뭔 소리야? 그 훌륭한 물건을. 나중에 예쁜 아가씨랑…… 아니, 뭐. 아가씨 아니고 잘생긴 총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런 사람이랑 같이 써야지.”

말을 듣던 애쉬가 다급하게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울어?”

도리도리. 애쉬는 정수리 근처 잔머리가 붕 떠오를 만큼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지만, 눈가와 코끝이 욱신거리는 건 사실이었다. 까득. 감정을 억누르려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턱 근육이 불뚝 일어섰다.

쟤를 어떡하지. 탄은 반복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퍼라면 한 번쯤 거치는 일이라지만, 애쉬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그저 이상 애착 행동이 아니라, 혹시…….

탄이 의구심을 품을 때, 사무소 1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보안관님!”

다언의 외침이었다. 늘 정시에 딱 맞추어 출근하던 다언이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 음성에는 초조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탄은 의아해하며 재빨리 몸을 돌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넋을 놓고 있던 애쉬도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려 탄을 따라 1층으로 향했다.

사무소까지 뛰어온 다언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일자로 깔끔하게 잘린 단발 끝에는 땀방울이 고여 있었다. 다언이 휘청거리는 상체를 간신히 바로 펴며 탄을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아무렇게나 벅벅 닦으며 말했다.

“보안관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저 좀, 저…… 좀 도와주세요.”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다언은 입에 꾹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에 주름이 잡혔고 얇아진 입술에는 경련이 잘게 일어났다. 터지려는 울음을 내리누르는 표정이었다.

“나즈…… 나즈가 없어진 것 같아요.”

“나즈? 네 여동생?”

언제나 차분하고 냉소적이던 다언의 모습은 사라졌다. 다언은 사무소로 오기 전에 이미 이곳저곳 쏘다니며 동생을 한참 찾았지만, 흔적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과 불안이 엄습했다. 기댈 곳이라고는 이제 탄뿐이었다.

탄은 다언을 안정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더 차분하게 물었다. 그까지 흥분해 봤자 좋을 것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부터 안 보였어?”

“모르, 모르겠어요. 분명히, 어젯밤까지만 해도…….”

다언이 중간중간 헐떡였다. 흐읍, 크게 심호흡하더니 제 뺨을 약하게 내리쳤다.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잡고서 상황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집에 있었어요. 제가 잠드는 것까지 확인했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애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혼자 나갈 애는 절대 아닌데…… 절대로요.”

다언은 평소에 동생을 유별나게 챙겼다. 남은 혈육이라고는 동생뿐이었기에. 탄도 다언의 책임감을 알기에 진지하게 이 문제를 대했다. 다언이 이렇게 흥분할 정도면,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63구역이었다. 늦은 밤과 일출 사이에 어린애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했다.

“바로 다 같이 수색해 보자. 사무소 문 닫고.”

실종이나 가출 사건은 시간 싸움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즈의 행방을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탄은 다언의 굽은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손아귀에 잡힌 어깨가 너무 가늘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금방 찾을 거야.”

탄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서랍장을 열었다. 모든 움직임이 신속했다. 여러 장비와 무기를 꺼내고 용도에 맞게 나누어 지급했다.

“우선 다언은 이거 갖고.”

탄이 테이저건과 주머니가 달린 벨트를 다언에게 건넸다. 다언은 긴장된 얼굴로 받아 들었다.

“저번에 사용법 가르쳐 주긴 했는데, 기억하나?”

다언이 탄의 말에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 나가면서 한 번 더 설명해 줄게.”

다언은 어색한 손짓으로 사복 위에 벨트를 둘렀다. 테이저건은 왼쪽 허리춤에 넣어 두었다.

애쉬는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와 행동을 관찰하다가, 어느샌가 말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알아서 총집이 달린 혁대를 찼다. 서랍을 슬쩍 뒤져 나이프 몇 개를 챙기기도 했다. 혁대 주머니에 하나, 나머지는 점프 수트 주머니에 넣었다.

나이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애쉬는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63구역에서는 여태껏 한 번도 칼을 휘두른 적 없었음에도.

다언은 테이저건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안관님, 다른 무기는 더 없나요?”

“원하는 거 있으면 챙겨. 권총 빼고.”

실탄이 든 대인 살상용 총은 허가증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었다. 탄은 권총을 왼쪽 허리춤에 달아 놓았다. 오랜만에 대인용 무기를 손에 잡는 거였다. 경비대에서 뮤턴트를 상대할 때는 특수 무기를 썼다. 뮤턴트에게 일반 권총 수백 수천 방을 쏘면 죽기야 하겠지만, 그 전에 사람이 당한다. 수 세기 동안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뮤턴트를 죽이려면 역설적으로 뮤턴트가 필요했다. 뮤턴트 뼛가루를 넣어 만든 총알만이 그들의 가죽을 뚫고 상처를 입혔다. 신체 강화 쪽으로 이능력이 발달한 에스퍼들이 전방에서 싸울 동안, 가이드인 탄은 후방에서 특수 무기로 그들을 지원했다.

탄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대인용 권총에서 손을 떼고 부관들을 훑어보았다. 다언을 신경 쓰느라 챙기지 못했는데도, 애쉬는 외근할 준비를 말끔히 마친 채였다.

“혼자서도 잘하네.”

탄이 나지막이 말하자 애쉬가 어색하게 움찔거렸다. 몇 분 전 계단에서 벌어진 일을 의식한 탓이다. 탄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사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 등을 애써 밀어내며, 테이저건을 애쉬에게 건넸다.

“너도 이거 하나 챙겨. 다 준비된 것 같으니까 가자.”

탄이 사무소 밖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애쉬는 탄에게 받은 총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탄의 살갗이 닿았던 총신을 손가락 끝으로 쓱 문질렀다.

탄은 밖으로 나와 사무소 문부터 걸어 잠갔다. 내근과 외근 직원을 나눌 형편이 안 되니, 오늘은 사무소를 닫아야만 했다. 어차피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만. 나즈의 실종이 첫 번째 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은 다언의 집 근처를 수색해 보기로 했다. 탄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다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나즈가 갈 만한 곳 있나?”

“아뇨.”

“이렇게 사라진 것도 처음이고?”

“네. 아직 열두 살인걸요. 거기다가 대기병까지 앓고 있어서…….”

종말 이후에 새로이 생겨난 병들을 싸잡아 대기병이라고 불렀다. 현 인류는 변화된 대기 물질에 적응 진화한 개체였지만, 간간이 관련 면역 체계가 약한 자들이 태어나곤 했다. 대부분 기관지에 문제가 생겼다.

이전 구세계 인류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병증을 앓았다. 그들처럼 단숨에 호흡 곤란을 겪으며 죽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늘 폐와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최근에 완치 약이 개발되었으나, 중위 구역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비쌌다. 하위 구역 사람들은 값싼 진통제로 버티며 야외 활동을 자제하는 게 최선이었다.

나즈도 하루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냈다. 외출할 때는 늘 다언과 함께였고, 진통제와 안정제를 넉넉히 챙겨야만 했다.

“큰일은 아닐 거야.”

말은 이렇게 했으나, 탄은 싸한 감각을 느꼈다. 어린 대기병 환자가 혼자 사라졌다니. 경비대에서 전투를 나갈 때처럼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손끝으로 권총이 담긴 홀스터를 매만졌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위험할 수도 있다. 63구역이니까. 그땐 대인 전투에 가장 능할 내가 나서야겠지. 탄은 여러 상황을 그리면서도,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습관처럼 주변 사람을 안정시키려는 말을 차분하게 읊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게.”

“그, 혹시라도 나즈가 불법적인 일에 휘말렸다면…… 처벌받을 수도 있을까요?”

다언이 불안한 눈빛을 내비쳤다. 시티 홀은 어린애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사회에서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존재면 모를까.

탄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즈의 신변을 안전히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지.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어떤 상황이든 나즈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게 할 거야. 난 어린애한테는 관대하거든.”

조용히 탄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걷던 애쉬가 멈칫했다. 난 어린애한테는 관대하거든. 그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작은 불씨가 살갗에 달라붙은 듯이.

난 어린애한테는 관대하거든.

머릿속에 격통이 일기 시작했다. 탄이 정확히 저렇게 말한 걸 언젠가 들어 본 것만 같았다.

어른이…… 뇌가 하나하나 조각나고.

……애 보고 나쁘다고 하는 건 그렇게 생긴 균열 틈으로. ……비겁하니까.

단편적인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온몸이 아파. 다친 데를 긁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흉터가 질 거야. 그러면, 그러면 또 주사를 맞아야 하니까. 몸이 이상해. 멍이 들어서 징그러워. 안 예쁘게 생겼어. 하지만 그럴 만했어. 내가 나쁘게 굴었으니까. 아버지가 비스킷을 딱 두 개만 먹으라고 했는데. 하나를 더 먹어 버렸잖아.

“야, 준비하고 나와.”

그래도 선생님이 옷을 주시네! 다행이야. 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도, 특별 수업은 들을 수 있구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얼른 옷을 입고 나가자. 이번에도 그 형이 올까? 그랬으면 좋겠다.

형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는데, 꼭 잡고 있으면 너무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 사방의 벽이 말랑해져. 벽이 막 흐물흐물 쏟아져 내리고, 부드러운 이불로 변해서 나를 감싸 주는 것 같아. 형이 왔다가 가면 몸이 하나도 안 아파. 다른 형이나 누나는 안 그랬는데. 그 형만 꼭 그러잖아. 왜지? 아마도 형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럴 거야. 거기다가 엄청나게 예쁘게 생겼고! 나는 지금 못생겼는데. 옷을 잘 여며야 해. 흉한 걸 보이면 안 되니까. 혐오스러워, 혐오스러워.

급작스레 떠오른 이미지가 애쉬의 정신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우뚝. 묵묵히 탄을 잘 따라가던 애쉬가 발을 멈추었다. 정수리부터 척추까지 뜨끔하며 찌릿한 통각이 들었다. 원천을 알 수 없는, 지독한 그리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낯선 기억이 머릿속을 이어 덮쳤다.

“발화 금지. 교육받은 것 외의 행동 금지. 나쁜 짓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이미 아침에 벌점을 받았다고 들었어.”

“죄송해요, 죄송해요.”

“모범적으로 굴자. 아버지가 실망하셔. 그리고 특별 수업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형도, 형도 다쳐요……!”

“잘 알고 있네. 나쁜 아이 때문에 착한 사람까지 벌을 받으면 안 되겠지?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러 와 준 분인데.”

“네, 절대. 절대로 안 돼요.”

끔찍해. 상상도 하기 싫어. 눈물 날 것 같아. 나 때문에 형이 다치면 나는 너무 아파서 견디지 못할 거야. 그대로 도태돼서 다시 쓰레기장 루로 돌아가는 게 나아! 안에 들어가면 얌전하게 굴 거야. 기억하자. 조용하게 예의 바르게 웃기.

헉. 문이 열린다. 어떡하지. 아냐, 아냐. 바보야. 두 손을 모아서 배 앞에 놔야지. 아야. 팔꿈치랑 옷이랑 쓸렸나 봐. 얼마나 추한 꼴이면 이렇게 아플까.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해. 우, 우선 선생님 뒤에 숨어 있자! 아. 공기에서 벌써 그 형 냄새가 나네.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경비대 일로도 바쁘실 텐데. 애가 좀 아프다고 해서요.”

“이런. 루는 괜찮나요? 전 다음에 다시 와도 됩니다. 아직 불안정한 아이인데, 가이딩이 오히려 무리가 될까 봐 걱정이네요.”

“괜찮을 겁니다. 대원님 보는 날이라고 아침부터 얼마나 들떴는데요. 그렇지, 루?”

천천히. 천천히. 예의 바르게. 선생님 뒤에서 나와서 형에게 인사하는 거야. 착한 아이처럼. 내가 오늘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건 절대 모르게끔. 웃으면 돼. 응! 심호흡 한 번 하고.

“안녕, 루.”

꾸벅. 인사, 예쁘게 잘했겠지?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탄 대원님.”

…….

애쉬가 멍하니 손을 쥐었다가 폈다. 아.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한숨이 퍼졌다. 머릿속 잔상이 흐릿하게 흩어져 간다. 냄새. 기억의 냄새. 숨을 크게 들이켜자, 현실에서 비슷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탄이다. 앞서가고 있는 탄의 냄새다.

“애쉬?”

탄은 애쉬가 뒤처지자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애쉬에게 팔을 내뻗었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 그 위로 그려진 여러 손금이 요동쳤다. 애쉬는 유달리 손금의 모양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였다.

“뭐 하고 있어?”

애쉬가 숨을 참았다. 본 적 있어. 저 손을 조심스레 만진 적 있어. 예전에. 맞아, 나…….

탄을 만난 적 있어.

아니야. 아니야. 애쉬가 머리를 빠르게 털어 냈다. 곱슬머리가 공중에서 팔랑거렸다. 아니야. 내 망상일 수도 있어. 네가 어떻게 알아, 루? 네가 뭘 알아!

조금 전 떠오른 장면을 곱씹고 파고들수록,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오한이 들고 몸이 덜덜 떨렸다. 닫힌 정신에 막 생긴 균열을 잡아 벌리고 싶어도, 본능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속삭였다.

탄은 애쉬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몇 발짝 다가왔다. 아예 애쉬의 손을 꼭 붙들고 잡아끌었다.

“얼른 움직여야지. 괜찮은 거야? 가이딩이 부족했나.”

귓가에 꽂히는 음성과 살갗으로 스미는 체온에, 애쉬는 정신이 들었다. 탄과 닿아 있자, 몸을 잠식하던 공포감이 차츰 가라앉았다. 분명히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는데.

애쉬가 화끈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저를 붙든 탄과 그 너머에 초조하게 서 있는 다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탄 말대로 얼른 움직여야만 했다.

애쉬는 고개를 빠르게 내젓고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탄이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옅은 미소를 꾸며내어 답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끄덕끄덕.

애쉬가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예의 바르고 얌전하고 예쁘게. 착한 아이처럼.

『사일런트 하울링』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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