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고요한 미로(2권) (7/14)

사일런트 하울링

Silent Howling

2권

7. 고요한 미로

63구역 보안관과 임시 부관 둘. 총 세 사람이 다언의 집 앞에 긴장된 기색으로 도착했다. 4번가 구석에 자리한 낡은 이층집이었다. 벽 군데군데가 부식된 듯 갈라져 있었다.

다언은 이곳 꼭대기 다락방에 세를 들어 살았다. 다락에는 가스도 수도도 연결되지 않아, 늘 광장까지 걸어가 공용 시설을 이용해야 했다.

공장에서 살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공장이 나았다. 그곳에서는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여러 잡일거리를 빠르게 구할 수 있었으니.

그래도 다언으로서는 악착같이 마련한 최선의 보금자리였다. 공장에서 쫓겨나면 대부분 길거리에 나앉고는 했다. 사회 기여도 최하층에, 시티 홀에서 정식으로 직업 등록도 안 해 준 이들이기에, 공장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밥벌이가 끊겼다.

다언은 직접 잡일거리를 찾아다니며 야무진 손으로 돈을 벌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지 맡았다. 길거리에서 동생을 재울 수는 없다는 일념 하나로.

구역 사람들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받을 걸 알면서 부관직을 지원한 것도,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제 일신은 어떻든 상관없었다. 혼자서라면 어디에 떨어져도 굶어 죽지 않을 자신 있었다. 문제는 딸린 입이 있단 거다. 그것도 병이 들어 있는 어린애다.

그 애가 없어졌다. 다언은 동생의 부드러운 피부와 달큼한 땀내를 떠올렸다. 웃으면 윗입술이 들리면서 드러나는 자그마한 덧니 두 개도.

나즈까지 없어지면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다언은 무심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나즈까지 잃으면, 그냥 그대로 끝낼래. 주먹 쥔 손이 작게 떨렸다.

탄은 굳게 다물린 다언의 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주변부터 빠르게 살펴보자.”

“……네.”

“애쉬. 넌 집 밖 둘러보고 있어.”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탄은 남들보다 훨씬 발달한 애쉬의 오감이 무언가를 포착해 주기를 바랐다.

탄은 다언과 함께 다락으로 올라갔다. 아침이었는데도 다락은 어둑어둑했다. 창문은 두 뼘 크기의 자그마한 것 하나가 전부였다. 창을 통과해 들어온 햇빛이 다락 바닥에 얇은 선을 새겨 놓았다.

탄은 외근 혁대에서 휴대용 랜턴을 꺼내 들었다. 플래시를 켜고 다락 구석구석을 신속하게 훑었다. 그 어느 곳에도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심지어 나즈가 잠들었던 이부자리는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언은 낡은 서랍을 뒤져 보더니 말했다.

“평소 먹던 진통제가 하나도 없어요. 다 없어졌어요.”

탄이 입가에 힘을 주었다. 없어진 약. 정리된 이부자리. 침입 혹은 저항의 흔적 없음. 자발적 가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몸이 아픈 열두 살이 제 발로 언니를 떠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다언. 동생 발 사이즈가 어떻게 되지?”

“아. 잠시만요. ……여기, 나즈 신발이에요. 저번 겨울에 신었던 건데, 그사이 몸이 자라질 않아서. 발 크기도 거의 똑같을 거예요.”

탄이 인조 털신을 집어 들었다. 가볍고 작고 마감이 투박했다. 밑창은 너덜거렸다.

“오늘은 뭘 신고 나갔을까?”

“배급으로 받은 운동화일 거예요. 나즈는 신발이 두 개뿐이거든요.”

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급 운동화라면 어떤 모양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밑창 무늬에 털신과 비슷한 발 크기. 족적이 남아 있다면 좋을 텐데. 문제는 새벽에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4번가는 도로가 닦인 곳이 아니었다. 죄다 울퉁불퉁한 흙길이었다. 어린애의 발자국이 약하게 찍혔더라도 빗물에 쓸려 내려갔을 가능성이 컸다.

우웅, 우웅. 그때 무형의 파동이 탄을 덮쳤다. 탄은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손바닥으로 귀를 덮었다. 큰 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소음에서 벗어나려는 양.

두개골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낯선 감각은 아니었다. 애쉬와 접촉했을 때, 텔레파시가 유독 강하게 흘러들어 오면 이런 어지러움이 들고는 했다.

애쉬가 날 부르고 있어. 탄은 번뜩 그렇게 생각했다.

“다언, 아래로 가자.”

탄은 다급히 다락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낡은 공동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그림자가 탄을 감쌌다. 애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된 얼굴로 팔을 내뻗고 있었다. 그가 마침 문을 열려고 할 때 탄이 나온 것이다.

애쉬가 덥석 탄의 손을 움켜잡았다. 와르르, 탄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탄. 탄. 뭔가 봤어요. 발자국입니다. 작은 발자국.』

“어디?”

애쉬가 탄을 이끌고 갔다. 타박타박. 앞장서는 걸음걸이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여기. 여기요.』

건물 옆 구석진 응달에서 애쉬가 멈추었다. 탄은 애쉬의 손끝만 붙든 채로 쪼그려 앉았다. 애쉬가 탄 쪽으로 기우뚱거리다가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높이를 맞추었다.

탄은 유심히 땅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집 근처에서 이곳만 비에 젖지 않았다. 비대칭으로 얹어 놓은 슬레이트 지붕의 끝자락이 살짝 튀어나와 빗줄기를 막아 준 덕분이었다.

자그마한 응달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놓치기 쉬운 곳인데 다행히도 애쉬가 예리하게 흔적을 잡아냈다. 다락에서 들고 온 털신과 대조해 보니 족적이 똑같았다.

빗물이 스미진 않았지만, 땅은 평소보다 습기를 품고 있었다. 질퍽하고 연약했다. 조금만 발을 끌어도 땅에 고스란히 그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즈의 발자국은 깔끔했고 보폭도 일정했다. 다급하게 뛰어갔거나 누군가에게 이끌려 간 게 아니란 증거였다. 나즈는 정신이 말똥한 상태에서 스스로 걸어갔다.

발자국은 총총 이어져 낡은 건물 사이 골목길로 이어졌다. 울퉁불퉁한 흙길. 거기서부터는 빗물이 땅을 완전히 더럽게 헤집어 놓았다. 얼핏 살펴도 발자국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탄이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섰다. 애쉬가 탄의 동작에 맞게 허리를 다시 폈다.

『저 도움이 됐어요?』

“아주.”

탄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던 다언을 바라보았다. 다언은 걱정과 혼란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맞붙은 두 남자의 손에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아.”

그제야 탄이 애쉬의 손을 놓았다. 다언에게는 기이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갑자기 탄 혼자서 떠들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애쉬와는 말이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남자 둘이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였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가 중요했다. 다언은 초조하게 물었다.

“애쉬가 뭔가 찾은 건가요?”

“응. 나즈 발자국인데. 이걸 보니까…….”

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진중했다. 일부러 평소보다 톤을 낮추었다. 음성에 안정감과 신뢰를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다언이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일 게 분명하니까.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아마도 나즈는 제 발로 가출했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나 다언은 당황하며 말했다.

“가출요? 그럴 리 없어요. 진통제도 얼마 안 남았는걸요. 어떻게 혼자 나가겠어요? 고작 열두 살에 가진 돈도 없는데. 지금까지 그런 기미도 보인 적 없고요. 저희는, 저희는 항상 사이가 좋았…….”

다언이 평정심을 잃었다. 탄이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끊으며 끼어들었다.

“알아. 가출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하는 게 좋으니까. 우선 이 골목부터 살펴보자. 여기에서 이어지는 길이 있나?”

다언은 마른침을 삼키고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네. 막힌 길은 아니에요.”

“그래? 지도 보면서 알려 줄래?”

탄이 홀로그램 워치를 품에서 꺼냈다. 상위 구역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동형 홀로그램 기기였다. 소형화되면서 성능이 간편화되었으나, 통신과 정보 검색 정도는 제한 없이 할 수 있었다.

탄의 왼쪽 손목에 워치를 착용했다. 곧이어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허공에서 탄의 손가락이 몇 번 움직이자, 63구역의 지도가 펼쳐졌다.

다언은 홀로그램 화면으로 바짝 다가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빠르게 길을 살피다가 멈칫하며 말했다.

“……보안관님. 지도에 아예 이 골목길이 없는데요.”

탄이 작게 혀를 찼다. 시티 홀에서 63구역의 지도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만들고자 애쓰는 사람은 없었겠지.

“아니, 이 길뿐만이 아니에요. 다 뭉뚱그려 표시해 놨어요. 주택 번호도 안 적혀 있고요. 여기 있는 이 건물도 10년 전에 허물어진 건데…….”

“지도를 믿고 다닐 수가 없겠네.”

“우선은 대충 알려 드릴게요. 저희가 지금 정확히 여기고요. 4번가 사잇길은 엄청 좁고 복잡해요. 주택 밀집 지역이라서요. 그래도 잘만 다니면 다른 도로로 가장 빠르게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죠.”

다언의 손가락이 홀로그램 지도 위의 포인트를 집어냈다. 그러면 탄이 곧바로 다언이 찍은 지점을 터치하여 홀로그램 지도 위에 표식을 남겨 놓았다.

“여기, 여기, 여기. 이쪽은 막혀 있어요. 여기로 나가면 1번가 대로가 나오고, 이쪽이 3번가 대로요.”

“나즈가 4번가 사잇길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아니요. 길눈 좋은 사람들도 여기선 헤매요.”

“그런데 왜 여기로 들어갔을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즈는 길치라서, 분명히 중간에서 길을 잃었을 텐데.”

“누군가 길잡이 역할을 해 줬거나, 아니면 사잇길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었거나. 4번가 어딘가가 목적지였을 수도 있지. 우선 대로변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따라서 흔적을 찾아보고, 집마다 탐문 수사 진행하고…….”

탄은 경비대에 있을 때처럼 명령조로 말을 늘어놓다가 잠시 입술을 멈추었다. 젠장. 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여태껏 통솔해 왔던 집단과 다르게, 이곳엔 단 셋뿐이었다. 나뉘어 움직여야 조금이라도 빨리 단서를 찾을 텐데.

탄은 초조함을 느끼며 눈썹을 찡그렸다. 다언의 말대로 열두 살 아이가 새벽에 저 혼자 가출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일어났다. 이례성은 대개 위험의 신호다. 위험을 방지하거나 적어도 최소화하려면, 재빠르게 돌아가는 분담 체계가 필요했다.

탄이 빙빙 돌아가던 생각을 멈추고 결정을 내렸다.

“찢어져서 다니자. 애쉬, 다언. 너희 둘은 4번가 사잇길을 꼼꼼하게 수색해. 나는 따로 움직일 테니까.”

구역의 지리를 완전히 꿰뚫고 있는 다언. 누구보다 오감이 발달해 있어 흔적을 놓치지 않을 애쉬. 수색 업무에는 두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게 가장 효율이 높았다.

탐문 수사는 권위가 있는 자가 진행해야 한다. 여기선 보안관 배지를 달고 있는 탄뿐이었다. 그 권위라는 게, 63구역에서는 자주 흐릿해지곤 했지만.

“보안관님은 혼자 다니시게요?”

다언의 옆에서 애쉬도 수어로 만류했다.

「혼자, 위험합니다.」

“위험할 것 없어. 총도 있고. 너희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무전 쳐.”

다언과 애쉬가 동시에 입술을 뻐끔거렸다. 탄이 손을 휘휘 흔들었다.

“얼른 움직여. 얼른.”

“하지만…….”

“보안관을 믿읍시다. 응?”

탄은 애쉬에게는 따로 눈짓까지 했다. 잔뜩 겁에 질리고 불안해하는 애쉬의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져서다. 단순히 표정과 몸짓 등으로 알아낸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느낌’이었다. 접촉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가이딩할 때처럼 감정이 동화되었다.

“난 걱정하지 말고. 가.”

애쉬는 입술을 잘근거렸으나, 탄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곧 다언과 함께 4번가 사잇길로 뛰어들었다.

탄은 둘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생각해 둔 목적지로 향했다. 파트너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혼자 돌아다녀 봤자, 주민들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있으니.

권위자가 필요했다. 시티 홀에서 달아 준 보안관 배지 같은 허울 좋은 권위 말고, 여기서 살아오며 쌓아 온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자.

그런 이들 중에 자신을 선뜻 도와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고 판단했다. 마에. 63구역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발소의 주인장.

탄은 이발소를 향해 뛰어갔다. 막 도착했을 때, 마에는 마침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새벽에 비가 내리면서 반지하 이발소 창문에 튄 진흙을 닦아 내기 위함이었다. 마에가 마른걸레를 손에 든 채로 탄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보안관 나리께서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

“선생님.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나즈가 없어져서요.”

“뭐?”

“다언이 동생요.”

“그건 나도 알지. 그 애가 없어졌다고?”

“예. 이곳 지리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탄은 평소보다 공손한 어투를 사용하며 마에를 바라보았다. 마에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훨씬 수사가 수월해질 것이다.

마에는 머리가 새치로 얼룩덜룩 물들 때까지, 수십 년간 이곳에서 뿌리내리며 살아온 토박이였다. 이 구역에서 마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63구역에서 예순을 넘긴 사람은 손에 꼽았다. 장수가 경애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땅이었다.

탄의 긴장한 얼굴이 무색하게, 마에는 마른걸레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뭐. 하루 정도는 영업 쉰다고 큰일 안 나지.”

“아, 선생님.”

탄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부관들 앞에서는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꾹꾹 눌러 왔던 한숨이었다.

“앞장서. 무슨 일인지는 가면서 더 자세히 들을 테니까.”

* * *

탄이 다행히도 조력자를 찾았을 무렵. 다언과 애쉬는 기민하게 골목을 쏘다니고 있었다. 낡은 주택가 사이사이. 존재하되 시티 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미로 같은 공간.

다언은 끊기거나 막힌 길을 정확하게 피해 다녔다. 한 번 갔던 곳은 웬만해서는 잊어버리지 않는 길눈이 도움이 되었다.

다언의 뒤로는 애쉬가 바짝 따라붙었다. 그의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였다. 일반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정보량을 동시에 흡수하여 처리하는 중이었다.

불법 증축되어 기괴한 모습을 띤 건물들. 중간에 튀어나온 창틀. 옥상으로 연결되는 녹슨 사다리. 지붕 곳곳에 쌓였던 먼지가 빗물과 만나 구정물이 되어 뚝뚝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주택의 뒤편에 존재하는 흉물스러운 광경이다.

스산했다. 비 오는 새벽에 아이 혼자가 나다닐 길은 아니었다. 일상이 시작되기도 전인 이른 시각. 아직은 사람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즈의 흔적도 마찬가지였다.

애쉬가 모든 사물을 고도의 집중력으로 훑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탄이 실망할 거야. 그의 사고 회로는 그렇게 돌아갔다. 나즈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나즈가 보호받아야 할 아이여서가 아니다. 보안소 부관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의무라서가 아니다. 탄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탄이 지시했기에.

편협하고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사고 체계. 애쉬에게는 당연했고, 어느 날 문제라고 지적당한다고 하더라도 고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탁. 애쉬가 잠깐 멈춰 서서 앞장서던 다언을 붙잡았다. 이런 방식으로는 나즈를 빠르게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언이 뒤를 돌아 애쉬를 바라보았다.

“뭐 발견했어?”

도리도리. 애쉬가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어디에도 발자국이 안 보여. 뒷문, 쪽문, 벽. 다 살폈는데. 흙이 묻은 곳도 없고. 아, 혹시나 창문을 통해 어딘가로 들어갔을까 싶어서 창틀도 봤어. 발을 디디다 보면 바닥이 조금이라도 파였을 텐데 너무 매끈해. 안 되겠어. 이대로 가다가는 탄이 실망할 거야. 혹시 나즈의 냄새가 묻은 뭔가가 있다면…….』

무심코 탄에게 하던 것처럼 생각을 전이하던 애쉬가 멈칫했다. 손목이 붙들려 있는 다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이다. 애쉬는 새삼 깨달았다.

다른 이들은 탄과는 다르다. 탄만이 내 생각을 들을 수 있다. 그에게만 나를 어떠한 제약도 없이 전달할 수 있다. 그만이. 오로지. 유일성을 품은 단어들이 달콤하게 울린다.

애쉬는 마른침을 삼키며 점프 수트 앞주머니를 뒤졌다. 자그마한 수첩과 연필을 꺼내 들었다. 그간 짬짬이 탄에게 글을 배워 왔다. 학습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그사이 필담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정도였다.

사각. 애쉬가 연필로 종이에 단어를 써 내려갔다. 최대한 짧은 단어만 사용해서 정보를 압축해 전달했다. 다언은 애쉬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수첩을 바라보았다.

[시각 정보 없음. 후각 정보 필요. 동생 냄새.]

글씨 끝에는 물음표 하나를 붙였다. 다언은 빤히 애쉬의 필체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즈의 냄새로 행방을 찾기라도 하겠단 거야?”

끄덕끄덕.

“그게 가능해?”

[여러 방법 씀. 시간 없음. 시도. 많이.]

다언은 쉬이 믿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후각으로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나. 강해. 특별함. 믿어.]

“그건 알아. 아까 보안관님이랑도…….”

다언은 아까 전 목격한 광경을 곱씹었다. 애쉬가 63구역에 등장했을 때부터 특이한 사람이라 여겼지만, 공장을 나온 이후로는 종종 기이하게까지 여겨졌다. 엄청난 힘과 체력, 암산 속도……. 눈앞의 필담도 하나의 증거였다.

“애쉬. 넌 진짜 이상해.”

[믿음 없음?]

“믿지 않지만 믿어 보려고 할게.”

다언도 지금 방식으로는 나즈를 찾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시간을 끌수록 나즈의 상태는 장담하지 못할 터였다. 자발적인 가출일 리가 없어. 다언은 확신했다. 무언가가, 아주 나쁜 무언가가 동생을 꾀어낸 게 틀림없었다.

다언은 입고 있던 재킷 주머니를 뒤졌다. 나즈가 위험해질 때를 대비하여 늘 상비하고 다니던 물건들을 꺼냈다. 호흡 보조기와 여러 번 삶아 쓰다가 이제는 반쯤 해져 버린 손수건.

“이거로 될까? 아니면 내가 지금 집에 가서 뭐라도 갖고 나올까.”

애쉬는 다언이 내민 물건을 냉큼 받아 들었다. 코를 바짝 갖다 대고 숨을 들이켰다. 다언의 체취에 파묻혀 있던 냄새가 분리되어 독립된 정보 값으로 인식된다.

“어때? 뭔가 느껴져?”

다언이 초조하게 물었다. 애쉬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온 신경이 비강 쪽으로 쏠리는 듯했다. 머릿속에는 아스라이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희미한 음성이 윙윙댔다.

우리는 선택받은 아이들입니다. 진보하고, 진화합니다.

온몸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나무뿌리처럼 퍼져 있는 혈관의 위치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종말 이후 변화된 대기 물질이 육체와 공명한다. 물질은 애쉬의 몸속에서 에너지로 치환된다.

애쉬가 가슴팍을 들썩거렸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저 먼 허공을 응시했다. 평소보다 눈동자에 초록빛이 선명해졌다. 동공이 수축되더니 아몬드 모양과 흡사해졌다.

흡. 다언은 숨을 들이켰다.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기분이다. 얕게 소름이 돋았다. 비자연스러운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드는, 거북한 이질감이었다.

그때 우뚝 서 있던 애쉬가 팔을 서남쪽으로 쭉 뻗었다. 동공은 금세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다언이 애쉬의 손끝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쪽으로 가자고?”

끄덕끄덕. 애쉬는 고갯짓하고 노트에 빠르게 글씨를 적었다.

[비슷한 냄새.]

“……저쪽에서 나즈의 냄새가 나?”

다언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높은 확률. 나즈 있음. 가능성.]

애쉬의 필체는 인쇄한 것처럼 반듯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모르겠다. 우선 가 보자. 보안관님한테는 내가 무전으로 알릴게.”

끄덕.

“그럼, 그, 지금부터는 네가 앞장서.”

애쉬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서남쪽으로 발을 디뎠다. 희미하지만 나즈의 체취가 느껴졌다. 비릿한 물 냄새와 젖은 흙냄새 사이로. 싸구려 진통제 특유의 알싸함과 아이의 땀내. 손수건에도 배어 있는 땀 냄새다.

해가 뜨지 않아 쌀쌀했을 그 새벽에, 나즈는 땀을 흠뻑 흘렸던 거다. 긴장했거나 아프거나. 온몸의 혈류가 솟구칠 만큼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렸거나. 나즈의 체취를 쫓아 뛰어가는 애쉬의 콧잔등이 움찔거렸다.

* * *

탄은 마에의 도움을 받아 주변을 돌아다니며 탐문하고 있었다. 63구역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마에의 인망이 예상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탄을 봤을 때는 긴장하거나 떨떠름하게 굴던 사람들이 마에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그만큼 이방인에게 날이 서 있는 지역이란 방증이기도 했다. 그간 탄이 꾸준히 순찰했음에도, 구역 주민들의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탄은 아직은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 63구역에 더 파고들어야만 한다. 오늘 마에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수사가 훨씬 더뎠을 것이다.

“새벽에 잠깐 깨서 밖을 보니까 애가 혼자 걸어가고 있더라니까요.”

보안관을 불신하는 중년 남성에게 이런 목격담을 얻어 내지도 못했을 테니.

“저쪽으로 갔어요.”

허름한 다세대 주택의 2층. 창문이 사잇길 쪽으로 나 있는 집이었다. 마침 이 부근에서 길이 양방향으로 갈라진다. 갈림길에 나즈의 흔적은 없었지만, 대신 나즈를 목격한 눈이 있었다.

탄은 목격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음성은 각이 져 있고 권위적으로 들렸다.

“그게 대략 몇 시였지?”

“새벽 4시, 뭐, 그쯤입니다.”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팔다리는 가느다란데 아랫배만 볼록하게 나온 체형이었다. 몸을 움츠리자 남자는 더 왜소하게 보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마에에게 바짝 다가가면서 웅얼거렸다.

“어두워서 잘은 안 보였고…… 그렇지만 열 살 정도 먹은 애 같긴 했습니다.”

“아이 주변에 다른 이는 없었나? 아니면 그 전후로 이쪽을 지나간 사람이 또 있었다든가.”

“30분 정도 깨어 있었는데 그동안 제가 본 건 그 애 하나뿐이었습니다.”

“착장은?”

“워낙 어두워서 옷차림은 잘…….”

“특별하게 생각나는 점도 없고?”

“예, 예에.”

탄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허리를 숙였다. 몸을 아무리 비틀어도 어깨가 빠져나올 수 없는 작은 창이다. 고개만 밖으로 내빼고서, 나즈가 걸어갔다는 방향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의 증언으로 상황이 조금 더 명료해졌다. 애초의 추측대로, 나즈는 혼자서 제 발로 집을 나갔다. 시각은 새벽 4시쯤. 어두컴컴해서 시야 확보도 잘 안 되는 때였다.

이곳의 소시민들은 절대 그 시각에 밖을 혼자 나돌아다니지 않았다.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시민권이 박탈되어 도망 온 범법자들이 지천으로 깔린 게 63구역이었다.

어른들도 겁내 하는 시각에, 그 어린애가 혼자서. 왜? 다언과 사이도 좋았다던데. 가출의 목적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불길한 예감만 들었다.

스스로 사라지는 아이. 스스로 어둠 속에 몸을 내던지는 아이. 이런 아이를 일전에도 본 적 있었다. 제 존재가 실수고 폐해라고 생각하는 어리고 무른 뇌.

<제가 문제예요. 제가 아주아주 나쁜 짓을 했어요.>

문득 몇 년 전에 들었던 여린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대대장을 달기 전의 일이었다. 걔가 몇 살이었지. 전투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으니, 여덟 살 아래였을 것이다. 여덟 살치고는 덩치가 꽤 컸지만.

지나치게 각성이 빨랐던, 불안정한 에스퍼였다. 최근 들어 드물게 그런 애들이 태어나곤 했다. 징집될 나이가 아닌데도, 가이딩 없이는 버티지 못할 만큼 형질이 강한.

아직 몸이 미숙하여, 가이딩이 오히려 몸에 무리가 되기도 했다. 능숙한 가이드가 섬세하게 봐주어야 하는 인재들이었다. 캐슬 시티를 위한 봉사 개념으로, 경비대원들이 차출되어 가이딩을 해 주곤 했다.

탄도 봉사자였다. 남자애 하나를 담당했다. 대대장으로 진급해 봉사자에서 면제되면서, 중간에 연이 끊겼지만. 그래서 유독 마음에 걸렸다.

강함이 축복으로 여겨지는 시대인데도 늘 의기소침하게 굴던 애였다. 너무 유약한 성격이라 걱정될 정도였다. 낯을 너무 가려 첫마디 트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죄송해요.>

심지어 첫마디가 사과였다.

전투 학교에 무사히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면 좋았을 텐데. 완벽히 책임지지 못한 대상을 향한 회한은 탄의 버릇 같은 감정이었다. 가장 그의 근간을 이루는 면이기도 했다.

대강 그 애의 지금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제 사춘기는 지났을까.

안쓰러운 애들을 떠올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탄이 창문을 탁 닫아 내고 한숨을 삼켰다. 감상에 잠기기보다는 몸을 움직일 때였다. 또 한 명의 어린아이, 나즈를 찾기 위해서.

“더 생각나는 게 있으면 보안소 통신 채널로 연락해.”

탄은 남자에게 다소 강압적인 투로 얘기하고서는, 마에와 함께 그 집을 나왔다.

* * *

탄은 남자가 가르쳐 준 샛길로 들어가며 마에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큰 도움이 되네요. 감사해요.”

“별거 아냐. 그런데 그 선생님이란 호칭 좀 그만해라. 의사 면허증 없어진 지 한참 됐는데.”

“음, 그러면 마에라고 불러요?”

탄이 애교스럽게 눈가를 찡긋했다. 목격자를 진지하게 압박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는 일부러 더 그래야만 했다. 너무 강압적으로 굴지 않되, 만만하게 보여서도 안 되었다. 시티 홀의 하찮은 개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나한테 하는 거랑 다른 사람들한테 하는 거랑 너무 달라서 적응이 안 되네.”

“좀 어리광 부려도, 마에는 날 무시하지 않을 거잖아요.”

“다리 뻗을 자리를 잘 알긴 하네.”

“살아남기 위해 갈고 닦은 감이랄까요.”

“그래, 감 좋다는 건 인정.”

마에가 잠시 우뚝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구름이 다시금 뭉치려 했다. 평소에는 보랏빛으로 빛나던 대기에 흐릿한 회색이 섞여 들어갔다. 또 비가 내리면, 나즈를 더 찾기 힘들어질 것이다.

“서쪽으로 빨리 훑어보자.”

두 사람은 남자의 증언을 토대로 갈림길에서 서쪽을 택했다.

“여기만 지나면 당분간은 갈림길이 없을 거야. 쭉 일방통행이지.”

마에도 다언처럼 구역의 지리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길잡이였다. 두 사람은 길에 접어들고 나서는 입을 다물고 빠르게 움직였다.

탄은 아까와는 다르게 진중한 표정이 되어 나즈의 흔적을 찾았다. 아주 자그마한 단서라도 좋다. 꼭 발자국이 아니어도 된다. 나즈가 떨어뜨릴 만한 어떤 것…….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던 탄이 급하게 멈추어 섰다. 급정지하느라 뒤꿈치가 질퍽한 흙길에 파인 자국을 남겼다.

“마에. 잠깐만요.”

“왜?”

탄이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비가 와서 흐트러진 흙길 사이, 이질적인 인공물의 조각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마에도 탄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그를 지켜보았다.

탄은 흙에 파묻혀 있던 것을 쓱 뽑아 들었다. 찢어진 약봉지. 끄트머리만 보였던지라,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놓쳤을 터였다.

탄은 소매 끝으로 작은 약봉지를 쓱쓱 닦아 냈다. 따로 약 이름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진통제야.”

옆에서 살피던 마에가 입을 열었다.

“돈 없는 대기병 환자들은 진통제로 대충 버티지. 이건 마약형 진통제인데 의존성도 강하고 부작용이 심해서, 부자들 구역에서는 잘 안 쓰여. 여기 사람들이야 뭐, 이거라도 갖고 있으면 다행이니까.”

“나즈가 먹은 걸까요?”

급하게 봉지를 뜯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걷다가 갑자기 통증이 와서 진통제를 하나 먹었고, 봉지는 여기에 버리고 다시 걸어갔다…….”

탄은 중얼거리면서 나즈의 행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마치 홀로그램 무대처럼 장면이 막힘없이 이어졌다. 이내 탄이 벌떡 일어섰다.

“이 방향으로 간 건 확실한가 보네요. 더 빨리 움직이죠.”

탄은 조급했다. 평소처럼 웃음기 넘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마에는 다시금 탄의 길잡이 노릇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필사적이네.”

“치안 유지가 제 임무이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걱정도 되고요. 어린애들이 다치는 건 싫어서요.”

“제정신 박힌 보안관이라니 희귀종이야. 시티 홀에 충성하는 사람 중에 제정신인 놈이 별로 없잖아.”

“선생님.”

탄은 당황해서 무심코 옛 호칭을 다시 입에 올렸다.

“이런 말 어디 가서 하고 다니진 않으시죠?”

반사회적 인물로 찍히기 딱 좋은 말이었다. 이곳에 탄이 아닌 다른 보안관이 있었다면, 무조건 즉시 체포당해 시티 홀에 붙잡혀 갔을 것이다.

애써 재건한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자. 악랄하게 평화를 위협하는 자. 반동죄라는 명목으로 처벌이 가능했다. 정의가 두루뭉술하고 매번 잣대가 왔다 갔다 하는 법이었지만.

마에는 탄을 돌아보지도 않고 무감하게 답했다.

“왜.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시티 홀에 고발이라도 하게?”

“아뇨. 설마요. 위험한 말인 건 아시나 해서.”

“알지. 나도 다리 뻗을 자리 보고 뻗는 거다.”

“절 믿어 준다니. 그건 다행인데요.”

“뭐, 고발당해도 괜찮아. 이미 살 만큼 살았고. 잡아가려면 잡아가라지. 내일 죽어도 아쉬울 거 없다, 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살아서 무슨 더러운 꼴을 더 보라고.”

“더러운 꼴만 있습니까? 여기 젊고 파릇파릇한 보안관도 있는데.”

“말은 잘해.”

“진심입니다. 오래오래 사세요.”

그때 지직, 지직, 무전이 울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멈추어 섰다. 탄이 다급히 혁대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 보안관님.

무전기 너머에서 평소보다 거친 다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뭐 찾았어?”

- 말로 옮기려니 조금 미친 얘기 같기는 한데요. 그, 애쉬가 알 것 같대요. 나즈가 어디 있는지. 냄새로요.

다언은 뛰고 있는지 중간중간 호흡이 뚝뚝 끊겼다.

“뭐? 냄새?”

- 네. 냄새요. 냄새 따라서 가고 있어요. 서쪽으로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하는 다언도, 듣고 있는 탄도 당황했다. 체취로 사람을 쫓는다니.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깨어난 S급 에스퍼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에스퍼는 아직 미지의 존재였다. 어떤 법칙으로 형질이 발현하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각기 지닌 힘의 양상도 조금씩 달랐다. 오감이 예민해지거나, 근력이 몇 배로 강화되거나, 혹은 지능이 고도로 발휘되기도 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인간의 한계를 한참 뛰어넘었다는 것. 구세계를 멸망시켰던 대기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힘의 원천이었다. 제대로 된 가이딩만 받는다면, 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그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애쉬는 그간 꾸준히 S급 가이드에게 관리를 받아 왔다. 힘이 안정되고 정교해지는 건 당연했지만, 이건 예상 범위 밖이었다.

탄은 무전기 버튼을 꾹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야?”

- 계속 이동하는 중인데요. 어, 지금은, 그, 3층짜리 녹색 슬레이트 지붕 있는 집 끼고 돌아서 가는 길인데. 이렇게 말하면 모르시겠죠?

탄이 옆에 서 있던 마에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에는 고민 없이 재빠르게 속삭였다.

“어딘지 알아. 거기서 서쪽으로 오고 있다면, 길이 하나야.”

“저희도 그쪽으로 가면 중간에서 만나게 되겠네요.”

“그렇겠지.”

탄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무전기에 대고 다시 말했다.

“우선 애쉬 따라서 와. 우리도 그쪽으로 갈 테니까.”

- 찾아오실 수 있어요?

“옆에 마에가 있어.”

- 혼자 돌아다니시는 줄 알았더니. 최고의 길잡이를 구하셨네요. 다행, 허억, 애쉬. 잠깐만, 좀 천천히……!

다언의 거친 숨소리가 무전기를 울렸다.

- 근데 보안관님은 별로 안 놀라시네요. 저는 이 상황이 지금 기괴해 죽겠거든요. 애쉬, 쟤 뭐예요? 따라가도 돼요?

“애쉬를 믿어 봐. 상황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까. 중간에서 만나자.”

탄이 무전기를 다시 혁대에 끼워 고정했다. 마에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어느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둘은 말없이 눈짓으로만 소통한 뒤, 동시에 진흙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 * *

“애쉬!”

좁은 샛길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마자, 탄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다언은?”

“저 여기 있어요.”

거구에 가려져 있던 다언이 옆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정신없이 뛰었던지라, 다언의 옆머리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반면 애쉬는 보송보송했다. 숨소리도 평온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눈동자뿐이었다. 동공이 미세하게 세로로 좁아져 있어,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마치 인간 외적인 존재인 것만 같은 신비함.

하지만 탄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애쉬는 으레 그 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걸음걸이로 탄에게 쪼르륵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탄은 물음과 동시에 애쉬의 손을 붙잡았다. 곧바로 날뛰는 듯한 생각 덩어리들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탄! 탄! 탄!』

“응. 천천히 얘기해 봐.”

다언과 마에에게는 어리둥절한 광경일 테다. 이걸 나중에 어찌 설명해야 하나, 탄은 잠시 아뜩해졌으나 말 그대로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나즈의 행방이었다.

『나즈의 냄새, 따라왔어요. 이쪽으로 올수록 점점 더 짙어집니다.』

“여기. 나즈가 쓴 것 같은 약봉지도 발견했는데.”

킁. 애쉬가 숨을 들이켜더니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나즈. 맞습니다.』

“계속 추적할 수 있겠어?”

애쉬가 잠잠히 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위로 눈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잿빛 속눈썹은 작게 요동쳤다.

잠시 후 애쉬가 고개를 젖히고 두리번거렸다.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가 원래 크기로 돌아오기를 두세 번 반복했다. 곧 들뜬 텔레파시가 탄에게 꽂혔다.

『탄, 탄.』

순수하게 신난 어린애 같은 목소리였다. 애쉬는 나즈에 대한 걱정이 아닌, 탄을 향한 경애로 움직이고 있었다.

『애쉬, 도움 줄 수 있어요. 당신에게.』

“방향을 알 것 같아? 네가 앞장서.”

탄이 다급히 사무적으로만 답하자 애쉬가 움찔했다.

『칭찬…….』

“넌 정말 훌륭한 부관이야. 아주 멋있어. 최고야.”

『감사합니다.』

그제야 애쉬가 만족한 듯 몸을 돌리고 발을 내뻗었다. 탁, 탁. 바닥을 딛는 걸음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불법으로 이리저리 증축된 낡은 건물 사잇길. 폭이 좁아, 한 명씩 줄지어 애쉬의 뒤를 따라갔다. 애쉬, 다언, 마에, 탄 순서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마에가 힐끗 탄을 돌아보며 웅얼거렸다.

“애쉬 뭐 하는 애야?”

탄은 애매한 눈짓으로만 답했다. 탄조차도 정확히 답을 모르는 문제였다. 마에의 의문에 확신을 줄 수가 없었다. 마에는 더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애쉬는 머뭇거림 없이 저벅저벅 나아갔다. 걸음이 빨라 다른 사람들이 종종 처지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우뚝 서서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했다.

그러다 애쉬가 멈춘 곳은, 지극히 평범한 샛길 중간. 근처에 있는 건물로 들어갈 통로마저 딱히 보이지 않는, 그저 맨 길이었다.

애쉬는 우뚝 서서 고개를 휘휘 돌렸다. 목을 꺾어 보랏빛 하늘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벽을 더듬거렸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아직 몇 미터 뒤에서 뛰어오고 있는 세 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탄은 멀리서 큰 소리로 외쳐 물었다.

“왜 멈췄어?”

애쉬가 안절부절못하며 벽돌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눈매가 아래로 처졌다.

“냄새가 끊겼어? 더 안 나?”

도리도리.

“그러면 왜……. 잠깐만. 금방 갈게.”

탄이 몸을 비틀어 마에와 다언을 지나쳐 가려는 순간. 이목구비가 간신히 분간될 거리에 있는 애쉬에게서 선명한 음성이 전달되었다. 탄이 눈을 찡그리며 멈추었다.

『이상해. 분명히 여긴데. 아무것도 없어.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어, 어, 어떡하지?』

접촉도 하지 않았는데 텔레파시가 들렸다. 긴장과 불안에 휩싸인 애쉬는 강력한 파장을 발산하고 있었다.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은 환청이라 치부했지만, 반복되니 무시하지 못할 사실로 다가왔다. 애쉬는 그 어떠한 에스퍼와도 달랐다. 가이드와 떨어진 채로도 제 생각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었으며, 탄이 본 에스퍼 중에 가장 신체 감각이 뛰어났다.

신인류 중에서도 돌연변이. 혹은 진화종.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

탄의 피부에 얕게 소름이 돋았다. 저 멀리에서 빛나는 애쉬의 눈동자가 유달리 선명하고 날카롭게 보였다. 지금은 안절부절못하는 순한 얼굴이었지만, 방심하는 사이 시선에 꿰뚫릴 것만 같았다. 생경하고 이유 모를 긴장감이 들었다.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지금 뭐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앞에서 마에의 물음이 들렸다. 순간 어찔해졌던 탄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 뛰느라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말했다.

“저쪽에 나즈 냄새가 난대요. 주변에 뭐가 딱히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자랑하더니. 저놈이 보통이 아니긴 하구나.”

“네. 우리 애쉬 천재라니까요. ……다음에 설명드릴게요. 모른 척해 주세요, 지금은.”

셋은 뒤늦게 애쉬가 멈춰 선 곳에 도착했다. 애쉬가 손으로 매만지고 있는 건물은 낡은 단층 주택이었다.

경사진 곳에 있어 정확히는 1.5층에 가까웠다. 창문은 작았고 창틀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거주자가 그리 깔끔한 성격은 아닌 듯했다. 혹은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버려진 공간이라거나.

붉은색을 띤 벽돌은 탁해 보였고, 건물 전체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탄의 마음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거의 평생을 전투 요원으로 살아오다 보니 발달한 직감이다. 이곳은 썩 안전하지 않다고, 몸이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애쉬는 울상을 짓더니 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탄. 저 이제 도움 안 되는 인간 됐습니다. 여기서 끝이에요. 건물 안쪽에서 나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고,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탄이 바들거리는 애쉬의 손을 다독여 주고서는 말했다.

“이 건물을 수색해 봐야겠습니다. 보안관 명령으로 강제 집행 가능하니, 길을 돌아서 건물 현관 쪽으로 가죠.”

탄은 무작정 보안관 배지를 들이밀고서 건물을 들쑤실 작정이었다. 빠르게 결정하고 움직이려는데, 마에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탄을 붙들었다.

“잠깐. 현관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

“예? 여길 알아요?”

“안다고 해야겠지. 따라와. 이 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으니까.”

여태껏 탄이 들어 본 마에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음산하고 우울했다.

* * *

앞장서는 길잡이가 마에로 바뀌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이동하면서 마에의 설명을 들었다. 마에를 따르는 발걸음은 조심스럽고 조용했다. 그 위로 마에의 나지막한 음성이 덮였다.

“4번가 72-1번지야. 한때 리베라단의 접선지였고. 30년도 더 된 이야기라 너희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밝혀진 적도 없지. 시티 홀이 은폐했으니까.”

마에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기억을 곱씹는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뒤에서 따르던 탄이 물었다.

“리베라단요?”

“우리끼리 부르던 명칭이야. 시티 홀은 그냥 테러 단체라고 불렀지만. 우린 캐슬의 제도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어. 그놈의 사회 기여도로 인생이 결정되는데, 측정 기준은 모호하고 변덕스럽잖아.”

시티 홀의 정책에 반감을 품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탄도 알음알음 전해 듣곤 했다. 여태껏 가시화되지 못했을 뿐. 반동죄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손쉽게 제압하고 묻어 버릴 수 있었다.

인권과 자유, 불평등. 이런 단어 따위를 입에 올리는 순간, 무지한 인간 취급을 받았다. 시티 홀은 이렇게 주창했다.

아직도 성벽 밖에는 괴물들이 날뛰고 있다. 종말이 고작 몇 세기 전의 일이다.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제야 평화가 찾아왔는데.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릴 생각인가. 전투라고는 모르는 무른 놈들이 복에 겨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성벽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축복의 세대다. 그렇지 않은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간종에 대한 반동이다. 또다시 종말을 불러일으키고자 작정한 놈들이다.

종말은 모든 반대의 언어를 잠재울 수 있는, 효과적인 선전 단어였다. 외부의 위기는 내부의 고통을 납작하게 짓눌러 버렸다.

“리베라단이 파괴되고 나서, 72-1번지도 폐쇄됐어. 시티 홀이 접근 불가 지역으로 지정해 버렸지. 현관도 잠겨 있어. 시티 홀 승인 코드가 있어야 열릴 거야.”

“그런데 나즈가 저기에 있다면…….”

“30여 년 만에 현관이 열렸거나, 혹은 지하 통로를 통해 들어갔을 수도.”

“다른 통로가 있군요.”

“문제는 지하 통로를 아는 민간인은 이제 나뿐이란 거지. 나만 운 좋아서 살아남았고, 나머진 다 죽었어. 시티 홀 말고는 이 건물을 활성화시킬 사람이 없어.”

마에는 어깨를 살짝 떨고서는 중얼거렸다.

“기어코 시티 홀이 돌아온 거야. 그놈들이 나즈를 데려간 거야.”

다언이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시티 홀이 왜요? 뭐 하겠다고 그 애를 데려가요?”

“그놈들 속셈은 아무도 모른다.”

탄은 침착하게 말했다.

“나즈가 저 안에 있다고 아직 확신할 순 없어요. 너무 단정 짓지 말고, 찬찬히 살펴보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탄은 내심 불안했다. 정말로 시티 홀이 끼어든 거라면. 일부러 여길 방치해 놓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들이, 왜. 시티 홀과 엮여서 인생 좆 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한데.

몇 분 지나지 않아, 탄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접선지로 들어가는 지하 통로 근처에 진통제 한 알이 떨어져 있었다. 나즈가 격통이 몰려와 약을 먹으려다가 떨어뜨린 것이다.

“……아무래도 나즈가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 같네요.”

탄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건 단순 가출이 아니다. 간단하게 끝날 일 또한 아니다. 연루된 사람들이 모두 다칠지도 모른다.

“우선은 접선지에 저 혼자 들어갑니다. 추가 연락이 있을 때까지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 위험도가 높아 보입니다. 마에, 들어가는 방법만 설명해 주시면…….”

마에가 헛웃음을 흘렸다.

“너 혼자 가겠다고?”

“시티 홀과 관련될지도 모른다면서요. 다들 엮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은 기다리세요.”

멍하니 서 있던 다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보안관님. 저, 저는요? 저도 여기 있어야 하나요? 보안관님 혼자서 어떻게…….”

“나? 혼자서 뭐, 잘하지. 아주 잘하지. 이래 봬도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내가. 무전으로 상황 공유도 할 거고. 대신 30분 이상 연락이 없으면, 그땐…….”

탄이 마른침을 삼켰다. 탐탁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기댈 데는 한 사람뿐이었다.

“공장으로 가서 아혼에게 도움을 요청해.”

동요하는 셋과 달리, 탄은 사무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차선책이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시티 홀과 엮이지 않는 게 중요해. 모르는 척, 못 본 척해. 엮이는 순간, 너희 안전은 장담할 수 없어. 지금 상황도 어디 급하게 발설할 생각 하지 말고. 내가 30분 이상 연락이 안 되면, 그때. 알겠지?”

팩! 갑자기 신발 앞부분으로 흙을 파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애쉬였다.

애쉬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서 탄을 노려보았다. 온 미세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잘난 이목구비 덕분에, 떼를 쓰는 애처럼 밉게 보이지는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흐르고 슬레이트 지붕에 가려져 어둑한 샛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육체노동자들이 흔히 입는 군청색 점프 수트 차림은 단출했지만, 그래서 애쉬의 짙고 화려한 얼굴이 더 부각되었다.

애쉬가 인상을 쓰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턱 근육이 단단하게 일어섰다. 단순한 투정이나 불만을 넘어서, 화가 난 듯했다. 탄도, 1년 가까이 알고 지냈던 다언도, 처음 보는 애쉬의 얼굴이었다.

애쉬가 뜨거운 숨을 크게 내쉬고 쿵, 다시 발로 바닥을 쳤다. 굵은 손가락이 거칠게 움직이며 수어를 만들어 냈다.

「따라갑니다.」

탄이 작게 한숨 쉬었다.

「저 강합니다.」

“알아.”

「혼자서는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애쉬의 가공할 힘은 분명히 위기 상황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다루자니 겁이 나는 전력이었다. 제대로 전투 훈련을 받은 적도 없지 않은가.

탄이 고민하며 쉽사리 답을 못하는 동안, 애쉬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따라갑니다. 따라갑니다.」

수어뿐만 아니라, 텔레파시까지 탄에게 꽂히기 시작했다. 강한 상념에 사로잡히면, 이젠 접촉 없이도 생각을 전이할 수 있는 건가. 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릿속 소동을 버텨 냈다.

『말도 안 돼. 따라갈 거야.』

팩, 팩! 애쉬는 성이 나서 계속 신발로 흙을 찼다.

『공장에서도 그랬지만, 탄은 겁이 없어.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따라갑니다.」

팩!

『근데 나 너무 버릇없이 구나? 하, 하지만 이, 이, 이번에는 탄이 자, 잘, 잘못, 한 건데! 미, 미움받으면…… 어쩔 수 없어! 탄이 다치는 것보단 나아.』

「죄송합니다. 따라갑니다.」

현란한 수어와 발길질과 텔레파시에 동시에 시달리던 탄이 기어코 두 손을 들었다.

“아이고, 두야. 알겠어. 알겠다고. 데려갈게. 애쉬까지만 나랑 같이 움직이는 거로.”

부루퉁하던 애쉬의 얼굴이 곧바로 밝아졌다. 이렇게 보면 참 단순해, 쟤도. 탄은 작게 혀를 찼다. 탄의 결정이 떨어지자마자, 이번에는 다언과 마에가 득달같이 외쳤다.

“나는?”

“저는요?”

“아니. 두 사람까지 왜 이럽니까. 애쉬는, 뭐, 아까 봤으니 대충 짐작하겠지만, 보통 놈이 아니라서요.”

마에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도 보통 놈은 아닌데. 내가 필요할걸? 나 없이 통로를 어떻게 돌아다니려고?”

“위치만 알려 주시면 되죠.”

“거기 완전히 미로야. 게다가 둘 다 심하게 다치기라도 하면? 나즈가 만약 응급 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면? 누가 치료할 건데.”

마에의 조곤조곤한 말에는 일리가 넘치고 흘렀다. 탄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 쉬었다.

“아, 젠장. 알겠습니다. 염치없지만, 마에. 한 번 더 부탁할게요. 도와줘요.”

그러자 다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는요?”

“너는 안 돼.”

“제, 제 동생 일인데요.”

“그러니 더더욱 안 돼.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아혼에게 도움을 요청할 예비 인원이 하나는 필요해. 그게 너고.”

“…….”

“우리 넷에게 모두 문제가 생기면, 그땐 끝이야. 네가 유능한 건 알아. 63구역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몸놀림도 재빠르고 칼도 제법 휘두를 줄 알겠지. 겁? 당연히 없을 거고. 그래도 안 돼. 널 걱정해서가 아니야. 유사시를 위해 밖에서 대기할 인원이 필요해. 거기에 가장 합리적으로 들어맞는 건, 너고. 알겠어?”

차분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탄이 말을 내뱉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타당한 논리가 담겨 있는 명령이었다.

다언은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체했다. 억울하지만, 탄의 말이 맞았다. 넷 중에서 예비 인원으로 빼놓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자신이란 걸 알았다. 아무리 몸놀림이 재빠르다고는 하나, 애쉬와 탄에 비하지는 못한다. 마에처럼 전문 지식이 있지도 않다.

그래도 분하고 속상했다. 이성으로 깨닫는 것과 마음이 움직이는 건 다른 일이었다. 탄은 다언의 어깨를 도닥이면서 말했다.

“자. 이제 정리됐으니 움직입시다. 마에, 통로가 어느 쪽이에요? 여기 뭐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에 존재하는 잉여 공간. 아무리 둘러봐도 지하로 통하는 길은 없었다. 낡은 쓰레기통 하나만 덜렁 벽 옆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에가 그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야.”

금속 소재로 된 원형의 쓰레기통. 오가며 사람들이 간간이 버린 쓰레기로 반 정도 차 있었다.

샛길에 있는 쓰레기통까지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이는 없었다. 대로변에 있는 것들만 아혼의 지휘 아래 겨우 관리가 되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안에 고여 있던 쓰레기에서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

쓰레기. 더럽고 피하고 싶은 것. 눈앞에서 당장 치워 버려야만 하는 것. 게다가 쓰레기 구역에 존재하는 쓰레기통이라면. 이보다 하찮은 것은 없을 테다.

하지만 그만큼 무언가를 숨겨 놓기도 좋은 장소였다. 밑바닥에 깔린 오물과 악취를 걷어 내려면 의지가 필요했다. 혹은 관성적 익숙함이라든지. 늘 쓰레기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조금 더 거침없이 쓰레기 안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가끔은, 그 안에 반짝이는 게 있다.

마에가 턱짓으로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이걸 치워야 해.”

탄은 바로 팔을 뻗어 쓰레기통을 붙잡았다. 그대로 들어 올리려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만큼 힘을 써도 소용없었다. 마치 쓰레기통이 바닥에 단단히 접합이라도 된 듯했다.

“이거 왜 이런대요. 애쉬, 네가 좀…….”

“힘써서 되는 게 아니야.”

탄이 악취에 코끝을 찡그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마에는 쓰레기통 앞에 쪼그려 앉더니, 흙바닥을 손끝으로 긁어 조금 파냈다. 쓰레기통의 가장 아랫부분이 밖에 드러났다. 매끄럽지 않은 금속 면이었다. 마치 버튼처럼 볼록하게 올라온 곳이 있는가 하면, 오목하게 파여 있기도 했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네모난 블록들이 쓰레기통 가장 아래를 빙 두르고 있었다.

“이게 맞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마에는 이마를 찡그리며 블록을 더듬었다. 어떤 것은 누르고, 어떤 것은 그대로 두고. 자물쇠의 번호를 맞추듯이.

“이거, 장치였군요.”

탄이 중얼거렸다.

탁, 탁. 낡은 금속끼리 맞물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몇 번의 손짓 끝에, 우웅 울림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했다.

“됐다.”

마에가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는, 쓰레기통을 쓱 손으로 밀었다. 아까 탄이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던 것이 너무 가볍게 움직였다. 끼긱. 대지 아래에서,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쓰레기통이 옆으로 밀리자, 그 아래에 있던 새까만 구덩이가 드러났다. 지하 통로로 내려가는 입구. 성인 남성 한 명 정도가 드나들 만한 폭이었다.

쓰레기통이 문인 셈이었다. 정해진 규칙대로 연결부를 조작하면, 통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있던 걸쇠들이 탁탁 풀린다. 꽤 정교한 장치였다. 입구가 무너지지 않게끔 철재로 된 지지대가 떠받치고 있었다.

“이걸 누가 만든 겁니까?”

탄은 새까만 입구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견고해 보였다. 소규모 테러리스트들이 만들 만한 시설은 아니었다. 생소하기 그지없는 리베라단이란 단체는 탄의 예상보다 더 거대하고 조직적이었다.

“이런 게 63구역에 있었다니.”

“아직도 작동할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여길 통해 쭉 걸어가면, 아까 그 접선지 건물 지하실로 이어져.”

마에는 지하로 들어가기 전에 다언에게 조작법을 알려 주었다. 지하 통로의 문을 열 수 있는 블록의 배열들. 다언은 빠르게 받아 적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생겨 지원군을 부를 때, 다언이 이곳을 다시 개방해야만 했다.

다언을 제외한 셋은 입구에 달린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탄이 마지막으로 사다리에 발을 디뎠다. 내려가기 직전, 입구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다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즈를 찾아올 테니까. 연락이 끊길 시, 침착하게, 아혼에게 가는 거야. 알겠지.”

다언이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탄이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쓰레기통과 이어진 걸쇠를 잡아당겼다. 쓰레기통이 저절로 움직이면서 서서히 입구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언의 얼굴도 사라져 갔다. 오래된 기계 장치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맞물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탕. 이윽고 입구가 닫혔고 지하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탄이 곧장 왼손에 들고 있던 랜턴을 켰다. 어둡던 지하에 빛이 스몄다. 이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기다리고 있는 애쉬와 마에가 보였다.

휙, 휙. 랜턴을 휘둘러 보았다. 칙칙한 시멘트로 급히 마감한 벽. 방공호 같은 통로를 불빛이 가로지른다. 타박. 애쉬가 사다리 아래로 바짝 다가와 팔을 뻗었다. 제 손을 잡으라는 듯이.

이깟 사다리 내려가는 거야 일도 아닌데. 애쉬가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저 순한 눈동자를 실망감으로 물들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이 사다리를 세 단 정도 내려간 다음, 애쉬의 손을 붙들며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가자.”

애쉬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맞잡은 손바닥이 뜨겁다.

『탄. 지킵니다.』

“어유, 든든하네.”

『최우선 임무.』

“최우선 임무는 나즈를 찾는 거고, 인마.”

『저한테는 탄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요. 기특해서 눈물이 다 납니다.”

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면서도 손끝을 꼼지락거려 애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애쉬가 흘려보낸 텔레파시에는 날것의 감정이 진득하게 섞여 있었다. 너무 생생하고 격렬했다.

이상한데. 탄이 마른침을 삼키고 거친 목을 가다듬었다. 애쉬의 행동을 그저 에스퍼의 본능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데에 슬슬 한계가 왔다. 갈수록 이상 집착이 줄어들기는커녕, 강도가 높아지기만 한다. 판단이 흔들리고 의아함이 샘솟기 시작했다.

……혹시 쟤 진짜 나 좋아하나. 저렇게 귀엽고 잘생기고 어린 애가? 나를? 아니지. 어차피 받아 주지도 못할 거면서, 이런 생각은 왜 하냐? 진짜 좋아하면, 뭐, 뭐 어쩌려고. 저 순둥이랑. 키스하는 것조차 상상이 안 되는데. 귀여우니까 볼 뽀뽀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뽀뽀야 다 하는 거니까? 가족끼리도 하고. 친구랑도 하고. 그렇지 않나…….

퍽! 탄이 제 안을 맴도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멈추기 위해, 이마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마에와 애쉬가 깜짝 놀라 탄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그냥 평범한 기합입니다. 지하라 아주 으슬으슬하네요. 빨리 움직입시다.”

탄이 머리를 가볍게 털어 냈다. 63구역으로 밀려나 언제 목숨이 위험해질지 모르는 처지에다, 30여 년 전 쓰였던 비밀 통로에 들어온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애쉬의 감정이 너무나도 확연하게 들리는 탓이다. 무시하고 싶어도, 제 마음 편한 대로 곡해를 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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