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생명의 굴 (8/14)

8. 생명의 굴

셋은 말없이 걸었다. 랜턴 불빛으로 어둠을 걷어 내며.

지하 통로는 마에의 말대로 미로처럼 복잡했다. 갈림길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 개중 제대로 된 길은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죄다 꽝. 막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침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덫인 셈이다.

마에는 오랜만에 이곳에 들어왔음에도 거침없이 길을 안내했다. 한 번도 막다른 길에 다다르거나 방향을 헤매지 않았다.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15분여 만에 접선지로 쓰이던 건물 밑에 다다랐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 끝, 자그마한 문 하나가 보였다.

“저기로 들어가면 건물 지하실로 이어져.”

마에가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탄은 랜턴을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리베라단이 와해된 지 30년이 지났다. 그들만이 알던 통로였다.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먼지나 거미줄로 뒤덮여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계단이 비교적 매끈했다. 여러 사람이 오고 가며 먼지를 신발 밑창으로 걷어 낸 흔적들. 이곳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

괴멸된 리베라단이 아니면 누굴까. 그들 말고 이곳을 아는 자. 답은 하나였다. 시티 홀.

의아한 것은 왜 시티 홀이 이곳을 사용했을지다. 버린 땅 아니던가. 이 낡은 집에 무슨 쓸모가 있다고. 행여 쓸 일이 있었다 하면,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갔으면 될 일이다. 63구역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비밀리에 드나들 필요가 없다.

흡, 그때 뒤에서 애쉬의 숨소리가 들렸다. 탄이 몸을 돌려 애쉬가 있는 쪽에 불빛을 비추었다.

“애쉬. 뭔가 느껴져?”

애쉬가 손가락으로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수어로 의사를 전달했다.

「냄새. 많아집니다.」

“나즈의 냄새?”

끄덕끄덕.

나즈가 저 문 너머에 있는 걸까. 무슨 위험이 도사릴지 알 수 없었지만, 빠르게 안으로 진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수였다. 보기에는 평범한 철문이었다. 부식의 흔적인지, 가장자리가 살짝 우그러져 있는 것 외에는.

“닫혀 있으려나. 그러면 힘으로 문고리를 부숴서 진입…….”

“잠깐만. 뭔가 예전이랑 달라.”

그때 마에가 이마를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혼자서 계단 위를 반쯤 올라가 문 가까이 다가갔다.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이 문의 위쪽 모서리에 머물렀다.

“탄, 저기.”

탄이 랜턴 불빛을 마에가 가리킨 곳으로 쏘았다. 둥그런 모양의 기기가 문 끄트머리에 부착되어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크기라, 마에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다들 문에서 최대한 떨어져요.”

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것과 비슷한 기기를 경비대에서 사용한 적 있었다. 생체 전류에 반응하여 거센 충격파를 내뿜는 폭발 장치였다.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된 터라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크고 무거웠다. 실제 전투에 범용화되기에는 아직 불가능한 단계였다. 두세 번 정도 성벽 밖에서 시험적으로 써 본 게 전부였다.

경비대에서 썼던 것과 달리, 눈앞에 있는 폭발 장치는 자그마했다. 소형화된 버전 같았다.

탄이 마른침을 삼키며 홀로그램 워치를 조작했다. 관리 채널에 접속하자, 워치가 전자 신호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홀로그램 화면에 전자 기기 목록이 주르륵 뜬다. 개중 익숙한 이름을 읊었다.

“BP378-C…….”

경비대에 지급되었던 폭발 장치가 BP387. 거기서 소형 개량화가 진행되었으리라 추측했다.

탄은 일전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뮤턴트가 지나가는 길목에 덫처럼 BP387을 설치해 두었다. 생명체의 신호가 감지되자마자, 장치가 깨지면서 집약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쿵! 대형 뮤턴트가 몇 미터가량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육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대원들에게까지 그 진동이 전달되었다.

충격파로 대형 뮤턴트가 단번에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뮤턴트를 한동안 기절시킬 순 있었다.

쿵. 탄이 그때 들었던 소음을 되새김질했다. 인간이 저 장치에 걸린다면, 뼛조각이 모두 가루처럼 으스러질 것이다.

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폭발 장치입니다. 생체 전류를 감지해서 작동되는 방식이고요. 관리 채널에 뜨기는 하는데…… 보안 코드를 입력해야 장치가 해제될 겁니다.”

“코드를 알 방법은 없는 거야?”

“지금 상황으로서는요. 이걸 설치한 놈만 알겠죠.”

“……해킹 같은 거 못 하나?”

“제가 육체파다 보니.”

“시티 홀 놈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조종하고 그러던데. 너도 시티 홀 소속이긴 하잖아.”

“그건 짬 많이 차신 분들만.”

실제로 관리 채널을 통해 주변의 모든 기기를 일시적 불능 상태로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시장인 폴의 승인을 받지 않은 자가 그런 짓을 하면 여지없이 반동죄로 잡혀간다. 처형당하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구실이 없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현관뿐만 아니라 지하 통로에도 손을 써 뒀다니. 오랫동안 오간 사람도 없는 버려진 건물에는 과분한 보안 장치였다. 도대체 이 안에 뭐가 있길래.

그때 갑자기 애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터벅터벅 계단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탄이 깜짝 놀라 애쉬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만히 있어. 위험해.”

곧장 텔레파시가 흘러들어 왔다.

『제가 가야 합니다. BP378.』

“뭐?”

탄이 있는 힘껏 붙잡았음에도 애쉬는 아무렇지 않게 발을 옮겼다.

“어, 야. 애쉬!”

탄이 그대로 애쉬에게 질질 끌려갔다. 발꿈치에 힘을 주고 버티려 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끽. 끽. 바닥에 발이 끌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날 뿐, 애쉬의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자식이. 위험하다니까!”

탄이 버럭 소리 지르자, 애쉬가 잠시 우뚝 멈추어 섰다.

“힘은 더럽게 세서는. 갑자기 왜 이래?”

탄은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랜턴을 바닥에 떨구었다. 탕, 탕. 랜턴이 굴러가면서 불빛이 회색 벽에 어지러운 무늬를 만들어 냈다.

애쉬는 멍하니 탄을 바라보았다.

“내 말 못 들었어? 이대로 가면 다쳐.”

애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두덩은 움찔거리고 콧잔등도 씰룩였다. 눈빛은 슬퍼 보이면서도 화가 난 듯했다. 말을 내뱉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끊임없이 달싹였다. 발화 대신, 텔레파시가 탄에게로 흘러들어 왔다.

『해제할 수 있습니다.』

“……확실해?”

『해제에 실패하면 폭발하겠지만, 제가 충격을 다 흡수합니다. 탄은 괜찮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탄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애쉬는 태연하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제가 희생하면 그만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런 것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넌 죽겠다는 말을 뭐 그렇게 해. 혼나고 싶어?”

속이 탈 정도로 멀쩡하던 애쉬의 얼굴이 그제야 일그러졌다.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호, 혼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차선책으로…….』

“됐고. 어떻게 해제할 수 있는지 그것만 말해.”

『아, 그건.』

매끄럽게 이어지려던 텔레파시가 멈칫했다.

『그…… 그건…….』

애쉬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방법을 설명하려는데, 머릿속이 희뿌옇게 변하고 두통이 샘솟았다. 애쉬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탄과 BP378-3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탄과 맞닿아 있는 부분만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말하고 싶어. 선명한 욕구가 애쉬의 안에서 울려 퍼졌다.

말하고 싶어. 나를 설명하고 싶어. 탄에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애, 애쉬는 달라요.』

“너 갑자기 호흡이 빨라졌는데. 괜찮은 거야?”

탄이 다급하게 손바닥을 애쉬의 가슴팍에 얹었다. 살갗 너머로 거친 박동이 느껴졌다. 흉곽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애쉬는 땅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몸이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다. 온 세상이 어지러이 보이는데, 그 난장판 속에서 탄만이 또렷했다. 마에가 옆에 다가와 무어라 말하는 듯했지만, 그건 들리지 않았다.

『달라요. 하, 할 수 있어요. 해야 합니다. 지, 진화를 증명……하고, 그러, 그러려면 저, 전기, 전기 신호를.』

텔레파시 내용과 똑같은 말을 읊는 것처럼 입술이 움직였다. 뻐끔거리며 입 모양을 따라 했다.

『터, 터지면 쓰레기장으로 갑니다. 애쉬는 터지지 않았어요. 저는 계속…… 괜찮았…… 그러니까 34번째에도 괜찮았고. 아. 증명, 증명해야…….』

애쉬는 점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시선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손가락은 경련하기 시작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우선 심호흡부터…….”

『탄. 즈, 증명할게요.』

“애쉬!”

가이딩을 시도하려는 찰나, 애쉬가 튀어 나갔다. 탄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탄이 소리 지르며 애쉬를 붙잡으려 했지만, 너무 빨랐다. 탄의 손은 맥없이 허공만 갈랐다.

저 멍청이가. 애쉬의 등을 바라보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상상이 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BP378-3이 내뿜는 충격파에 떠밀려 벽에 처박히는 애쉬. 온몸이 으스러져서 형태를 잃어버린 애쉬. 팔다리 관절이 기괴하게 꺾이고 피를 흘리고…….

싸하게 몸이 식었다. 상상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끔찍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앞에서 죽어 가는 장면.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악감에 숨이 막히는 감각. 갈비뼈가 부풀어 오르고 무거워져 온몸의 내장을 짓누른다.

심장이 단숨에 몸을 통과해 발등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안 돼. 탄이 본능적으로 애쉬를 향해 도약했다. 하지만 그사이 애쉬는 이미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애쉬가 팔을 뻗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BP378-3을 움켜쥐려는 것이다. 탁. 애쉬의 손바닥이 문에 닿은 그 순간. 탄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쾅! 다음에 이어질 굉음과 끔찍한 장면들. 그리고…… 몰아닥칠 고통스러운 감정들에 대비했다.

하지만 사방이 고요했다.

탄의 현실감 넘치는 상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탄이 주먹을 꽉 쥔 채로 바들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애쉬가 보였다. 멀쩡하게,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서 있다. 철문 위에 달린 장치를 우악스럽게 손으로 쥐어뜯은 채로. 사지가 뒤틀리지도 온몸이 가루가 되지도 않았다.

“너……! 이…… 하아.”

애쉬는 멀쩡했다. 탄이 목이 메어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순간 몸이 극도로 긴장한 탓에, 근육이 뭉쳐 뒷덜미가 뻐근했다. 욱신거리는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붙들면서 애쉬에게로 곧장 뛰어갔다. 계단을 두 단씩 올라가 애쉬의 어깨를 콱 붙들어 잡았다.

“이 자식아, 너 뭐 하는 거야. 내가 분명히, 위험하다고……!”

『탄! 저, 해제했습니다. 이거…….』

칭찬해 달라는 듯이 쫑알거리는 텔레파시가 들리자마자, 탄은 말문이 막혔다. 이마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누군 숨이 멎을 뻔했는데. 얘는 아까와는 다르게 진정된 꼴이었다. 선물이라도 되는 양 폭발 장치를 내밀기까지 한다.

“……쟤 지금 저걸 손으로 뜯은 거냐?”

살짝 얼빠진 마에의 목소리가 고요한 지하를 울렸다. 마에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랜턴을 집어 들어 탄 쪽으로 걸어왔다.

“그런 것…… 같죠.”

『네. 맞습니다. 손으로 뜯었어요. 증명했어요, 탄.』

마에가 든 랜턴 불빛이 정확히 애쉬를 비추었다. 탄을 향한 눈동자는 순수했다. 어떠한 이물질도 섞이지 않은 무해함. 도저히 폭발 장치를 손으로 잡아 뜯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공황이라도 온 것처럼 바들바들 떨던 증세도 사라져 있었다.

“……누가 증명하래. 그런 거 필요 없거든. 너 지금 내 명령 어기고 뛰어나간 거야. 알아? 놀라서 죽을 뻔했네.”

『타, 탄…….』

애쉬가 시무룩해졌다.

“위험한 짓 하면 칭찬 안 해 줘.”

『하지만.』

“어쭈, 말대꾸.”

탄이 애쉬를 혼내는 동안, 마에가 조용히 다가와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다른 잠금장치는 없는 듯, 그대로 문고리가 순순히 돌아갔다.

마에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둘이 대화하는 건지, 혼자서 일인극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우선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탄이 숨을 몰아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가죠. ……그런데 마에가 보기엔 지금 저 좀 미친 사람 같아요?”

“약간.”

“……억울하네.”

탄이 웅얼거리면서 앞장섰다. 문을 열기 전에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다른 인기척이 들리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철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문틈으로 먼지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마에에게서 다시 랜턴을 건네받은 탄이 문 안쪽을 비추었다. 폭발 장치를 뜯어내고 진입한 곳은 겉으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지하실이었다.

여러 잡동사니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오랫동안 버려진 창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녹슨 철 선반 위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오른쪽 끝에는 건물 1층으로 이어지는 자그마한 나선형 계단이 보였다.

“누가 자주 드나든 곳 같지는 않은데.”

마에가 속삭였다.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음 하나 없었다.

“애쉬, 여기에서 나즈 냄새가 난다는 거지?”

끄덕끄덕.

“정확히 어느 쪽? 위로 올라가야 할까. 더 느껴지는 건 없고?”

다행히 당장 위험한 인물은 근처에 없는 듯했다. 그랬다면 애쉬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을 테다. 하지만 안전을 기하기 위해, 탄은 한 손을 권총집 위에 올려놓았다.

킁. 애쉬는 우뚝 서서 콧잔등을 움찔거렸다. 천천히 눈동자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눈동자의 초록빛이 조금 더 또렷해지면서 동공이 얇아졌다.

애쉬가 움찔거리면서 발끝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었다. 사삭. 신중하게 움직였다. 평소보다 보폭이 훨씬 좁았다. 기민하게 감각 정보를 분석하고 분류했다. 점점 애쉬가 지하실 벽 근처로 다가갔다.

벽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지 모를 잡동사니로 뒤덮여 있었다. 특별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애쉬의 발걸음은 정확히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건설 폐자재가 담긴 상자들 앞이었다.

상자 안에는 토사, 폐콘크리트, 녹슨 금속류 등이 가득했다. 여러 상자가 위태로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애쉬가 가장 위에 있는 상자 하나를 덥석 집어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게가 꽤 나가는 폐자재들이었음에도, 애쉬는 숨 한 번 거칠게 몰아쉬지 않았다.

“저 뒤에 뭔가 있는 거 같아?”

탄의 물음에 애쉬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앞에 있는 상자를 치운다. 목전의 임무가 생성되었고, 애쉬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상자 하나하나를 들어 올려 옆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탄은 애쉬 옆으로 다가가 랜턴으로 시야를 밝혀 주었다. 거의 천장까지 닿아 있던 상자의 탑이 허물어져 갔다. 그렇게 절반쯤 치우자, 벽이 드러나면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마에가 불길함을 직감하며 작은 소리를 냈다. 탄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실로 들어오면서부터 콧속을 찌르던 퀴퀴한 냄새가 더 심해졌다.

구멍의 윗부분이 보였다. 상자로 가려 놓은 벽 뒤에 또 다른 공간이 존재했다.

악취가 코끝을 휘어 감았다. 건강하지 못한 냄새. 고여 있는 땀내, 발진의 냄새.

애쉬가 상자를 다 치우자, 냄새의 근원지가 온전히 드러났다. 성인 남성이 허리를 숙여야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굴. 탄이 몸을 숙여 랜턴으로 굴 안을 비추었다. 그의 손이 떨리면서 불빛 또한 흔들거렸다.

비쩍 마른 채 축 늘어진 팔다리들.

굴 안에는 버려진 쓰레기처럼, 아무런 쓸모 없는 잡동사니처럼, 사람들이 포개져 있었다.

* * *

탄은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튀어 오르는 숨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죽었어.”

마에의 음성이 지하실 안을 울렸다. 탄이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굴에 있던 사람은 총 다섯이었다.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허겁지겁 밖으로 끄집어냈다. 탄에게는 다 낯선 얼굴이었다. 한 명 빼고. 나즈 또한 그 안에 있었다.

나머지의 신원은 마에가 확인해 주었다. 공장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체처럼 축 널브러져 있었다. 마에가 확인해 본 결과, 나즈를 제외하고는 이미 모두 숨이 멎은 상태였다.

“사인이 뭔지를 모르겠네. 사후 경직이 아직 안 왔어. 시반도 안 나타났고. 몸이 다 깨끗해.”

“그러면…… 죽은 지 한두 시간도 안 됐단 소리 아닙니까?”

“보통은 그렇게 판단할 텐데, 이거 봐. 각막이 혼탁해. 이건 또 사후 열 시간쯤은 지났단 건데.”

시체가 말해 주는 정보 값들이 서로 모순적이었다.

죽은 이들이나 나즈나,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어떠한 상처도 없었으며 피부도 말끔했다. 얼핏 보면 축 늘어져 잠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숨이 붙어 있는 건 오직 나즈뿐이었다. 다행히 나즈의 호흡은 꽤 안정적이었다.

굴에는 자그마한 산소 발생기가 놓여 있었다. 산소가 부족하지 않도록 신경 쓴 흔적이었다. 누가 이들을 여기에 숨겨 놓았는지는 몰라도,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거다. 보관 혹은 은폐가 목적이었지.

그러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살았고 누군가는 죽었을 뿐.

마에가 나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선 나즈를 빨리 내 집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아. 거기에 의료 기기가 더 있어.”

“애쉬, 네가 도와. 나즈랑 마에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줘.”

애쉬는 당황하면서 탄을 손으로 가리켰다.

「당신은요?」

“난 여길 더 살펴봐야겠어. 사람이 넷이나 죽었잖아.”

「위험.」

“위험하다고 쫄면 보안관 배지 내려놔야지. 지금은 나즈를 살리는 게 먼저야. 마에 혼자서 나즈를 업고 가게 할 수도 없고.”

마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솔직하게 얘기할게. 두세 살 어린애면 모르겠는데. 내가 열두 살짜리 애를 업고 오래 걷지는 못할 거다.”

“응, 들었지?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려야지.”

애쉬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움찔거렸다. 탄이 단호한 어투로 한마디 덧붙였다.

“명령이야. 아까처럼 또 명령을 어기진 않겠지?”

애쉬가 흠칫하더니 기어코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 나즈와 마에를 동시에 번쩍 안아 들었다. 한쪽 팔에 하나씩. 마에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 이러고 간다고?”

탄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고속 운송 방법이네요. 애쉬, 부탁해. 고맙다. 넌 역시 최고로 유능한 부관이야. 네가 자랑스러워.”

애쉬가 머뭇거릴까 봐, 탄은 쉴 새 없이 칭찬의 말을 퍼부었다. 애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얼추 파악했다. 인정해 주는 말을 하면, 그저 기쁘게 따른다. 역시나 애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탄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짧게만 바라보았다. 저들은 괜찮을 것이다. 애쉬가 안전하게 마에와 나즈를 집 안으로 데려다 놓으리라 믿었다.

이제 문제는 발치에 놓인 시체 네 구다.

공장에 사는 사람들이라 순찰하면서도 자주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혼은 이들이 죽은 걸 알고 있을까. 다 남자였는데, 나이대는 다양했다. 개중에는 갓 성인을 넘긴 듯 앳된 청년도 있었다.

누가, 왜. 이들을 여기로 끌고 들어왔나. 시체에는 어떠한 방어흔도 없었다. 순순히 누군가를 따라 움직였단 증거였다.

탄은 물끄러미 죽은 자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나도 아니고 넷. 담당 구역에서 네 명이 죽어 나갔다.

탄은 어두운 얼굴로 주변을 살펴 낡은 방수 천 하나를 발견해 냈다. 누워 있는 시체에 천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급하다 여겨질수록 탄의 머릿속은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탄은 위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남의 목숨까지 달려 있다면 긴장이라도 될 텐데. 다들 보내고 혼자 남자, 오히려 긴장도 두려움도 싹 사라졌다.

탄은 여기서 대기할 작정이었다. 단순 살인이 아니라, 누군가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사람들을 가둬 둔 사건이다.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그걸 이루기 위해, 범인은 이곳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시티 홀 사람이겠지. 시티 홀에서 하청을 받아 일하는 놈들이거나.

다 잡아 족친다. 붙잡아서 두들겨 패면 정보도 나올 것이다.

사람 몇 명을 상대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었다. 주로 뮤턴트와 싸우며 살아왔지만, 대인 전투도 평생에 걸쳐 익혔다. 에스퍼들과도 수시로 대련했는데, 비형질자쯤이야.

탁. 탄은 랜턴 불빛을 끄고 1층으로 연결되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힘을 주자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1층은 평범한 주택과 다를 바 없었다. 지하에 비하면 밝았다.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군데군데 틈새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랜턴 없이도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었다.

낡은 소파. 스툴 몇 개. 정사각형의 작은 냉장고. 중앙에 놓인 직사각형의 커다란 테이블.

지하에는 시체가 누워 있지만, 지상은 고요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공간처럼 보였다. 생활감이 없었고, 가구 위의 먼지는 방치되어 있었다.

탄은 권총을 꺼내 손에 쥔 채로 수색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들이닥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찾아내야 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꾸민 일인지. 일련의 상황 속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

낡은 공간이 무엇 하나라도 이야기해 주길 바라면서 탄이 발을 옮겼다.

* * *

“여기 눕혀.”

오늘은 영업을 쉬려 했던 이발소의 문이 열렸다. 마에는 옆에 딸린 생활 공간으로 애쉬를 안내했다. 애쉬의 품에는 나즈가, 뒤에는 턱에 주름이 잔뜩 진 다언이 따라붙었다.

애쉬는 사람 둘을 둘러업고 여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으나,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즈를 바닥에 눕히자마자 다언이 와락 달려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동생의 얼굴을 손으로 붙들었다.

“나즈, 나즈.”

꾹 눌러 왔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다언을 부드럽게 밀쳐 낸 건 마에였다.

“애 상태부터 살피자.”

다언이 힘없이 밀려나 털썩 주저앉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고여 있었다.

애쉬는 우뚝 서서 핏기가 가신 다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야무지고 단호하던 다언이 아니었다. 공포에 빠져 있었다. 마치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 같았다.

흐윽, 흑. 급기야 다언이 훌쩍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자, 연한 살갗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에. 나즈 어떡해요? 괜찮은 거예요?”

자신은 안전한데도, 타인이 죽을지 모른다는 이유 하나로 저렇게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구나. 타인의 목숨을 제 것과 동기화하여 생각하는 감정은 뭘까.

사랑. 애쉬는 문득 그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탄을 마음으로 그렸다.

뛰어오는 내내 머릿속을 장악한 생각은, ‘탄에게 얼른 돌아가야 한다’ 였다. 강렬한 불안감에 몸이 뜨거워졌다. 불안을 야기한 근원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다.

두려워서다. 혼자 있는 탄이 다칠까 봐, 그렇게 탄을 잃을까 봐. 탄이 소실되는 것이 제 죽음만큼이나, 아니, 그것과는 비견되지 않을 공포로 다가왔다.

애쉬의 심장이 엇박자로 빠르게 뛰었다. 돌아가야 해. 다시 접선지로 가기 위해, 애쉬가 몸을 돌릴 때였다.

오랫동안 구석에 숨겨 두었던 의료 장비를 하나둘씩 꺼내던 마에가 말했다.

“어디 가?”

애쉬가 잠시 눈을 끔벅거리다가, 사복에 달린 시티 홀 배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탄이 직접 달아 준 거였다. 마에는 금세 애쉬의 의도를 이해했다.

“탄에게 가려고?”

끄덕끄덕.

“탄을 놔두고 온 게 나도 걱정인데…… 너 혼자서 괜찮겠니? 아혼에게 연락을 해 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공장 사람들도 죽어 나갔으니, 분명히 도와줄 거다. 사람들을 모아서 같이 움직이는 게 안전할 텐데.”

도리도리.

애쉬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고서 손끝으로 제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혼자서도 괜찮다는 뜻이다. 자신이 꼭 있어야 했다, 탄의 곁에, 지금 당장. 그러고 싶었다.

훌쩍이던 다언은 코가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아혼에게는 제가 가 볼게요. 죽은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누구였죠?”

마에가 하나씩 이름을 읊어 주었다. 가만히 듣던 다언이 탄식했다.

“잠깐, 잠깐만요. 핀이랑 게럴드, 그리고…….”

죽은 자들의 이름을 읊던 다언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왜?”

“알 것 같아요. 죽은 사람들의 공통점.”

그들을 가로지르는 또렷한 공통점이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다른 넷을 한데에 묶어 놓는.

“다 대기병 환자들이었어. 나즈처럼.”

다언이 벌떡 일어서며 애쉬를 바라보았다.

“보안관님한테 가서 전해. 나는 아혼에게 갈게.”

끄덕끄덕.

“빨리 움직이자. 마에, 나즈를 부탁해요.”

63구역 부관들의 합이 처음으로 맞아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 * *

[신호 없음]

[감지된 생명체 없음]

[채널 연결 불가]

[신호 없음]

홀로그램 워치에서 문구가 주르륵 떠올랐다. 탄은 탐지 기능을 껐다.

리베라단의 접선지로 쓰였던 건물. 지하실을 비롯하여 그와 연결된 통로는 넓은 데 반해, 지상층은 협소한 편이었다. 통로와는 달리 내부에는 특별한 보안 장치도 없었다.

건물의 2층은 탄이 허리를 깊이 숙여야 할 만큼 층고가 낮았다. 독립된 층이라기보다는 다락처럼 딸린 공간이었다. 대체로 먼지가 보얗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간혹 최근에 먼지를 밀어내고 닦아 낸 흔적이 보였다.

탄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곳곳을 훑었다. 너무 낡아 쓰지 못하는 생필품이 대부분이다. 리베라단이 옛적에 나눠 쓰던 물품을 따로 치우지 않은 듯했다.

개중 먼지가 없는 곳을 더 자세히 살피다, 플라스틱 상자를 발견했다. 비닐로 개별 포장된 일회용 주사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바스락. 탄이 하나를 집어 들어 눈을 가늘게 뜨며 들여다보았다.

경비대에서 쓰던 것과 똑같았다. 시티 홀에서 지급하는 물품 중 하나였다. 63구역에 시티 홀의 물건이 쌓여 있다니. 모순적으로 느껴지고 기이했다. 이곳에서만 균열이 일어나 다른 차원의 세계가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타닥. 그때 멀리서 희미한 소음이 들렸다.

탄은 잠시 숨을 참고서 조심스레 움직였다. 소리 나지 않게 플라스틱 상자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고, 허리를 바짝 숙인 채 인기척 없이 걸었다. 좀 전까지 끼익, 끽, 신음하던 낡은 합판 마루가 조용해졌다.

탄은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반쯤 내려왔다.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총을 꽉 쥐었다.

탁, 탁. 다시금 또 소음이 났다. 근원지가 명확했다. 건물 현관 밖이다. 누군가가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다.

시티 홀 놈인가. 기다렸다, 개자식아. 탄은 호흡을 가다듬고 청각에 집중했다.

삑. 삐삐. 보안 장치가 해제되는 기계음에 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은 하나뿐. 만약 시티 홀이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챘다면, 한 명만 보냈을 리는 없었다. 쿵. 낯선 이가 현관문을 거칠게 닫았다. 탁, 탁. 마룻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묵직했다. 체격이 꽤 있는 남성. 그는 탄의 존재를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일대일 승부에다가 상대는 방심하고 있다. 탄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만 없다면 말이다.

탄은 그가 시야에 잡힐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내 남자가 계단 쪽으로 다가왔고, 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에 매달린 커다란 더플백. 63구역 사람치고는 단단하게 벌어진 흉곽. 그리고 드러난 얼굴은 눈에 익었다.

길거리를 오가며 몇 번 마주쳤던 것 같았다. 탄이 미간을 좁히며 제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가까스로 남자의 신상 정보를 기억해 냈다.

뮤턴트 무두장이의 아들이었다. 무두장이는 뮤턴트 가죽을 그 뼈로 흠집 내고 잘라서 가공하는 기술직이었다. 훈련이 필요한 직종임에도 시티 홀에서 높은 사회 기여도를 배정받지는 못했다.

상위 구역에서는 거의 사장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굳이 가공한 뮤턴트 가죽을 쓰지 않았다. 너무 질긴 데다가 께름칙한 기분도 드니까. 야생 가죽보다 부드러우면서도 내구도가 좋은 인조 가죽이 보급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직도 하위 구역에서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기술을 익혀 대를 이어 무두장이가 되곤 했다. 건물에 들어온 남자도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던 견습생이었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지라 팔뚝이 두툼했고, 뼈대도 컸다. 나이는 아마도 20대 중반. 이름은 기억나질 않았다. 기억할 만큼 특별한 일을 벌인 적 없던 놈이란 방증이었다.

탄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의문이었으나, 지금 남자의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티 홀의 보안 장치를 당당하게 통과해, 시체가 쌓여 있는 집에 들어온 자였다. 정황상 평범한 민간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생포해야만 했다. 과잉 대응이라고 할지언정, 확실하게. 탄은 숨을 더 죽이며 총신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완벽한 타이밍과 각도를 재다가, 탕, 방아쇠를 당겼다.

탄은 망설임 없이 남자를 향해 총을 쐈다. 소음기가 장착되어 있었으나, 탄환이 적막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악!”

총알은 정확히 남자의 허벅지 아랫부분에 박혔다. 남자는 예기치 못한 공격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꼴이 전투 훈련이라고는 전혀 받지 않은 자의 모습이었다.

“허, 허윽, 윽. 사, 살려 주세요.”

심지어 남자는 손바닥으로 제 허벅지를 붙들며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냈다. 고통을 호소하며 자꾸 허우적댔다. 탄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 쓰러진 남자를 제압했다.

“누, 누구……?”

양손에 수갑을 채운 후에 탄이 말을 이었다.

“울지 마. 안 죽어. 치료만 제때 잘 받는다면.”

“……보안관님?”

남자가 얼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여기에 왜, 끄윽, 보안관님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발버둥 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초, 초, 총을, 나한테, 초, 총…….”

남자는 총상에서 피어오르는 작열감에 몸부림쳤다. 탄은 벨트에서 지혈대를 꺼냈다. 응급 처치로 총상 윗부분을 압박하며 말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해. 그러면 살려 줄 테니까.”

남자가 입술을 벌벌 떨면서 눈알을 굴렸다. 여러 사람을 납치하고 죽일 만한 깜냥은 없어 보였다.

“여기 왜 왔지?”

“저, 저,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대답 잘하라고 했어.”

콱. 탄이 남자의 목덜미를 붙들어 지그시 압박했다.

“그냥, 끅! 시키는 대로 하, 한 거예요. 사, 사회 기여도를 높여 준다고 해서.”

“누가 뭘 시켰는지 정확하게 말해.”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눈알이 굴러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몰려드는 공포와 통증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 다들 도, 동의하에 하, 한 일입니다! 돈도 엄청 받는다고 들었어요. 어, 어차피 얼마 못 살 사람이잖아요. 저, 저렇게 가는 게 저 사람들한테도 더 이득…….”

남자는 두려움에 잠겨 말을 아무렇게나 쏟아 냈다. 탄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더 이득이라고 했나?”

“보안, 보안관님. 아니. 서, 선생님. 방금은 말, 말실수고요. 아무튼, 예, 동의서는 받았어요. 부작용으로 주, 죽을 확률이 70%인 것도 다, 다 고지했고. 다들 앓다가 죽느니 이, 이거라도 해 보겠다고…….”

“이거, 저거, 그거, 누군가. 이런 말 다 금지야. 똑바로 말해.”

탄이 총상 부근을 짓누르려는 듯 손짓하자,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임상! 임상 시험이었어요. 대기병에 조, 좋은 약이 나왔다고 해서…….”

“좋은 약이 부작용으로 죽을 확률이 70%겠냐?”

탄은 온 얼굴을 구기면서 훌쩍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짜증을 담아 머리통을 한 대 내리쳤다.

이제야 톱니바퀴 맞물리듯 사건들이 들어맞고 커다란 윤곽이 보였다. 대기병 신약이라니. 성의 없는 속임수다. 이미 완치 가능한 치료제가 있는 상태였다. 약값이 비싸서 상위 구역 사람들만 구경한다는 게 문제일 뿐.

더 싸게 공급 가능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시티 홀에서 추가 연구를 진행했을 확률은? 탄은 제로라고 생각했다. 민생에 그 정도로 신경 쓸 놈들이 아니었다.

단순한 치료제일 리가 없다. 대기병은 미끼일 것이다.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던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설령 결과가 죽음이더라도. 돈은 남으니까.

탄은 축 늘어져 있던 시체들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죽음을 건 도박을 시켰다. 선뜻 제 목숨을 담보로 내걸 만큼 절박한 사람들이 제일 많을 만한 구역에 와서, 그들을 실험용 배양 쥐처럼 썼다.

그런 사람들 중에 고작 열두 살인 나즈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제 생명을 값으로 치환하여 저울질하기에는 너무 여린 생명이었다.

나즈는 무사할까. 그 애의 몸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중인 걸까. 탄은 험악해진 얼굴로 남자를 추궁했다.

“그래서. 임상 시험에 동의한 사람들을 여기로 끌고 와서 뭘 한 거야? 왜 그 굴에 넣었지?”

“저, 저는 사람들을 옮기는 일만 맡았습니다. 제가 와, 왔을 땐 이미 다 기절해 있었어요. 중간에 깨서 도, 도망가면 안 되니까 잘 가둬 놓으래서……. 그냥…… 몇 시간마다 와서 화, 확인하고, 그런 것만 하라고…….”

“너 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는 알아?”

“…….”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볼 생각도 안 했겠지. 무서우니까.”

“저, 저, 저는…….”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넷이 죽었어. 네가 살인에 동참했다는 것만은 기억해. 이제 누가 시켰는지 불어.”

“사, 사설 불법 채널로 통신했고, 이, 익명이었어요. 의뢰인 신상에 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보, 보안관님…….”

“불법 채널로 통신했다고?”

“예에.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너무 아파요.”

남자가 눈물과 콧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무두장이로 살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가, 가업을 잇기 싫어서요. 여기서 탈출하고 싶었단 말입니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제도의 피해자…….”

“제도 때문에 피 본 사람이 한둘은 아닐 텐데. 다들 너 같은 선택을 하진 않지. 말도 안 되는 변명 집어치우고.”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탄이 미간을 좁혔다. 의뢰인의 정체를 모른다? 이곳이 시티 홀 명의인지도 몰랐다는 건가?

“현관 보안 코드는 어떻게 안 거야.”

“코, 코드요? 모, 모르는데요.”

“넌 뭐, 모른다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냐?”

탄은 벨트에 수납해 두었던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턱 끝에 갖다 댔다. 남자가 숨을 들이켜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히익, 그, 그러니까 제가 워치를 하나 받았거든요. 여기 드나들 때 이거 차고 있으면 된다고…….”

탄이 남자의 왼쪽 소매를 들추었다. 손목에 구형 홀로그램 워치가 채워져 있었다. 여기에 보안 해제 코드를 삽입해서 준 모양이었다.

“이걸 누가 어디서 줬지?”

“우, 우편으로 왔어요. 익명 우편으로……. 정말이에요. 저는, 다 말했어요. 보안관님.”

탄은 꿈틀거리며 흐느끼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이었다. 시티 홀이 엮여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비굴하게 목숨을 비는 꼴만은 진정성 있었다.

탄이 입술을 짓씹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꼬리를 잡긴 잡았는데, 이건 뭐 꼬리도 아니고 비루한 꼬리털 몇 가닥에 불과했다.

“보안관님, 흑, 보안관님…….”

남자는 죄책감보다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먼저였다. 공포와 자기 연민에 빠진 눈동자였다. 지혈대를 확 풀어 버릴까. 아니면 턱에 대고 있는 나이프를 힘주어 움직이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꼴 보기 싫어도 산 채로 데려가야 했다. 연락책이나 세부 정보를 더 캐내기 위해서는. 지질하지만 아직은 쓸모가 남은 녀석이었다.

우웅. 그때 어디선가 진동이 들려왔다.

“그만 좀 울고 입 닫고 있어 봐.”

“흐윽…….”

탄이 눈썹을 찡그리며 청각에 집중했다. 웅. 웅. 진동이 연달아 울려 퍼졌고, 그 세기가 강해졌다. 이내 진동의 발원지를 찾아냈다. 남자가 손목에 차고 있는, 홀로그램 워치였다.

워치에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홀로그램 기능을 켜자, 지직거리는 이미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경고]

[경고]

[자폭 모드가 발동됩니다.]

“뭐? 야, 이거 뭐야.”

[10]

[9]

“예, 예? 이, 이거 뭐예요?”

[8]

“이, 씨발! 그걸 네가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만 믿고 놔뒀을 리 없지. 익명의 의뢰인인지 뭔지가, 워치에 폭발 기능을 달아 놓은 것 같았다. 유사시에 자폭 모드를 발동하여 증거를 인멸할 수 있도록.

[7]

탄이 다급하게 남자의 손목에서 워치를 빼내려 했다. 연결부 버튼을 누르면 자연스럽게 워치가 풀려야 했는데, 틱, 틱, 요지부동이었다.

[잠금 해제 불가]

“아, 시발…….”

[6]

자폭 모드에 돌입하자마자, 워치에 잠금이 걸렸다. 사용자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고, 그의 주변을 확실히 초토화하기 위함이다.

[5]

“흐, 흐어엉…… 보안관님, 저 죽어요? 이거 폭발해요?”

“넌 죽어도 싸.”

[4]

[3]

남자의 손목을 잘라서 워치를 던져 버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남자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야 폭발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탄은 몸을 돌려 지하실 쪽으로 발을 내뻗었지만, 사실은 이미 죽음을 예감했다.

[2]

허벅지의 근육이 불뚝 올라섰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1]

이렇게 죽나? 시티 홀 씨발 개새끼들. 시발놈들. 안 되는 건가? 근데 내가 죽으면, 애쉬는 어떡하지? 이제 가이딩 없이 못 버틸 텐데.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죽음의 목전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그 잿빛 머리카락이었다.

[0]

쾅! 거센 폭발음이 건물을 휘감았다. 탄은 제 몸이 붕 떠서 날아가는 순간.

『탄!』

익숙한 음성이 머릿속에 꽂힌 것도 같았으나, 환청인지 실제인지 알지 못했다. 동시에 탄의 정신이 새까맣게 물든 탓이다. 그렇게 의식이 끊겼다.

* * *

직전, 지하 통로를 뛰어오던 애쉬는 심상치 않은 진동을 느꼈다. 탄에게 위험이 도래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달렸다. 무작정 달렸다.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힘을 쥐어짜 냈다.

탄이 위험해. 그 문장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초 만에 질주하여 지하 창고에 다다랐다.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에서 탄의 냄새가 났다.

탄이…… 위험해.

[2]

[1]

애쉬가 탄을 발견한 그 순간,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허공에서 위협적으로 지직거리는 붉은색의 숫자들. 애쉬는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논리적인 상황 파악보다 몸이 더 빨랐다. 무작정 탄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애쉬가 에스퍼로서의 신체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음에도 아슬아슬했다. 손끝이 탄에게 닿을락 말락 했다.

[0]

『탄!』

쾅!

워치가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며 열과 기체를 뿜어냈다. 워치를 차고 있던 남자의 몸은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거센 충격파가 공기를 덮치고 탄에게로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열기의 파도가 탄을 집어삼키려 할 때.

꽈악. 애쉬가 간신히 탄의 옷깃을 낚아챘다. 그대로 탄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온몸으로 탄을 보호하듯이 감쌌다. 최대한 날쌔게 움직였으나, 폭발의 피해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화르륵. 날름거리는 열기가 애쉬의 등에 따라붙었다. 충격파가 둘의 몸을 떠밀었다. 쿵! 그대로 두 사람의 몸은 허공을 날아 지하 창고 바닥에 처박혔다.

첫 번째 낙하의 충격은 애쉬가 온몸으로 받아 냈다. 엉켜 있는 둘은 두세 번 옆으로 굴러가다가 멈추었다.

“허억, 헉…….”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멈추고 애쉬는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을 온통 흡수하려 애쓴 흔적이 애쉬의 온몸 곳곳에 가득했다. 우선 등 전체에 화상을 입었다. 옷이 불타고 살갗은 너덜거렸다. 귓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한군데로 쏠렸다. 탄. 탄이 무사한가. 제대로 그를 보호했나. 그것만이 중요했다.

애쉬가 팔에 힘을 풀었다. 욱신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부연 시야에 탄이 들어왔다.

“흐…….”

탄은 애쉬의 아래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힘없이 처진 팔다리가 아까 본 시체를 떠올리게 했다. 애쉬가 끙끙거리며 다급하게 탄 위에서 내려왔다.

안 돼, 안 돼. 애쉬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탄의 머리카락을 더듬거렸다. 차마 세게 쥐지도 못했다.

탄의 팔뚝에서는 피가 흘렀다. 무언가의 파편에 맞아 피부가 찢긴 것 같았다. 바닥을 구르면서 곳곳에 자잘한 멍도 들었다. 온몸을 감싸서 탄을 지키려고 했으나, 피해를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멍청이, 멍청이. 애쉬는 자책하며 얼굴을 아이처럼 찡그렸다. 톡 치면 스러질 거품을 만지듯이 손끝으로 탄의 뺨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아직 따뜻했다. 이번에는 탄의 가슴팍에 귓가를 가져다 댔다. 콩, 콩. 심장이 뛰고 있었다.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 탄은 무사했다.

살았다. 탄이 살아 있다.

툭. 그 순간 애쉬의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후드득,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애쉬는 아까 나즈를 바라보던 다언을 떠올렸다. 그녀가 흘린 눈물과 그녀가 느꼈을 감정을,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런 거였다. 소중한 사람이 다친다는 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애쉬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흐느꼈다. 탄이 다시 한번 네가 사랑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그건 엄청 무서운 거예요, 라고.

누군가를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건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사랑함으로써만 얻게 되는 두려움이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이 있다. 자신과 타인을 동일시할 정도로 격렬한 사랑만이 선사하는, 생생한 고통.

탄이 다쳐서 너무나도 두렵고 슬픈데, 이렇게나 무서운데, 차라리 대신하여 죽고 싶은데, 아니, 사실은 그러려고 했는데. 이게 사랑이 아닐 리 없었다. 이번만은 탄이 틀렸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내 감정을 안다고.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나 착각이 아니라고. 애쉬가 애쉬를, 내가 애쉬를, 내가 나를, 알게 되었다고. 나는 탄을 좋아한다고 말이다.

애쉬의 눈동자에서 쉼 없이 물기가 떨어졌다. 탄이 숨 쉬는 건 확인했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탄이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다쳤을지도 모른다. 얼른 마에에게 데려가야 했다.

후드득. 1층에서 일어난 폭발이 지하에도 슬슬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천장이 흔들리고 벽의 파편이 떨어졌다.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애쉬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탄을 다시 품에 안아 들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으, 우으…….”

애쉬가 숨을 집어삼키며 풀썩 주저앉았다. 잊고 있던 통증이 이제야 몰려들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무릎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격통에 호흡조차 힘들었다. 누군가가 날카로운 칼끝으로 쉴 새 없이 피부를 찌르는 것만 같다.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애쉬가 통증을 참으려 턱에 힘을 주었다. 으극, 일부러 혀를 세게 짓씹어 화상의 통증을 잊어 보려 애썼다.

안 되는데. 얼른 일어나서, 탄을 마에에게 데려가야만 하는데…….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고 미웠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탄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부들부들 떨다가 탄의 어깨에 이마를 갖다 댔다. 일어나야 해. 스스로 질책했다. 눈물이 탄의 어깨를 적셨다.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나약해. 나약해. 애쉬가 한껏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으…….”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탄에게 치대던 애쉬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탄의 눈두덩과 미간이 떨렸다. 의식이 돌아오려는 것 같았다. 흐읍, 애쉬는 짓무르고 터진 손바닥으로 탄의 뺨을 감쌌다. 다친 것도 잊고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탄이 깨어나고 있어. 탄, 탄, 탄……. 굵은 손끝으로 애타게 탄의 살갗을 문질렀다. 탄의 감각이 조금이라도 빨리 깨어나길 바라며.

“아…….”

곧 탄이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간신히 실눈만 뜨고서 부옇게 물든 주변을 바라보았다. 맨 처음에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먼지였다. 그리고 먼지가 내려앉은, 먼지를 닮은 회색 머리카락.

“애……쉬?”

탄은 마른 목구멍을 쥐어짜 말을 내뱉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고, 제 부관의 얼굴이 또렷하게 인식되었다.

“너…….”

쿨럭. 애쉬를 보고 놀란 탄이 침을 잘못 삼켜 기침했다. 쿨럭. 잔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몸통이 쑤셨다. 그러나 죽음을 예감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멀쩡한 꼴이었다.

대신 갑자기 나타난 애쉬가 엉망진창이었다. 애쉬의 왼쪽 어깨가 너덜너덜했다. 천은 진즉에 타 버렸고, 드러난 맨 살갗은 인간의 것 같지가 않았다. 시뻘겋고 군데군데 폭발의 여파로 살이 터져 있었다.

탄이 숨을 들이켜자, 단백질 타는 냄새가 코끝을 훅 찔러 왔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하나둘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폭발은 제대로 일어났다. 최대한 워치에서 멀어지려 애썼으나, 지하로 몸을 숨기기 전에 폭발음이 귓가를 때렸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울리던 음성을 기억한다.

『탄!』

애쉬가 쏘아 보냈던 텔레파시.

탄은 의아하게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군데군데 약한 화상과 타박상이 생긴 게 전부였다. 반면 너덜너덜해진 애쉬의 꼴을 보자, 탄은 대강 상황을 짐작했다.

<탄. 지킵니다.>

저 미련한 녀석이 그 말을 기어코 온몸을 던져 수행했구나.

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근육통을 무시하면서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웠다. 몸이 쑤셨지만 운신은 가능한 상태였다. 문제는 애쉬였다.

“괜, 찮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얼마나 다친 거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애쉬의 몸을 훑으면 훑을수록 상황이 심각하단 걸 절감할 뿐.

툭, 투둑. 애쉬는 탄을 빤히 응시하며 소리 없이 울고만 있었다. 아프다고 끙끙대는 법도 없다.

애쉬는 탄이 깨어나 제 이름을 부르자마자, 또다시 통증을 망각했다. 심장만 뻐근해졌다. 그렇게 마음이 벅차오른다는 표현을 실감했다. 정말로 벅찼다. 심장 안에 무언가가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버겁다. 더는 몸이 이걸 담아내지 못할 만큼.

감정을 뱉어 내고 토해 내고 싶었다. 탄에게 말하고 싶었다.

“애쉬? 어떻게, 된 건지 좀…….”

평소였다면 애쉬는 시끄럽게 텔레파시를 쏘아 댔을 테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며 입을 뻐끔거리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애쉬가 어깨를 움츠리며 주먹을 심장 부근에 올려놓았다. 감정은, 사랑은, 형체가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몸 곳곳에 침투해 있던 감정이 빠듯하게 벅차올라서 제 부피를 키우고, 그렇게 몸을 터뜨리려 했다.

탄이 살아 있다. 탄이 부른 내 이름을 들을 수 있다. 이 사실이 온몸을 터져 나가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침묵은 미덕입니다.

그때 정신 저편에서 어두운 목소리가 속삭인다.

“아, 으…….”

“애쉬?”

애쉬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갑자기 입술이 간지러웠다. 부르튼 입술을 계속해서 달싹였다. 뭔가 내뱉고 싶어.

항상 조용히 굴라고 했지.

시끄럽게 굴고 싶어, 소리치고 싶어.

입 열지 마.

싫어, 싫어, 싫어…….

애쉬가 글썽거리는 눈으로 탄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하기 싫었다. 지금 온몸을 가득 채운 이것을 탄에게 전하고 싶었다. 이것. 무서울 정도로 부풀어 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텔레파시든 몸짓이든 목소리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가장 시끄럽게 굴고 싶었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은 다르다. 조용히 하고 싶지 않다.

루!

아니. 나는, 나는 애쉬야. 탄을 무서울 만큼 사랑해. 애쉬가 턱을 바들바들 떨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애쉬는 탄을 사랑해. 나는 애쉬야. 난…….

애쉬의 눈동자가 빠르게 이리저리 굴러갔다. 기절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보였다. 탄이 놀라서 애쉬의 뒷덜미를 감싸 안았다. 극심하게 손상된 피부와 가이드의 살갗이 맞닿은 순간.

달싹거리기만 하던 애쉬의 입술 사이에서 육성이 흘러나왔다.

“타…… 타안.”

애쉬로서 처음 내뱉은 말은 탄이라는 한 음절이었다. 목소리는 텔레파시보다 더 낮고 어른스러웠다. 목울대가 떨리면서 탄이라고 말한 순간. 애쉬는 생경한 감각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신을 장악하고 세뇌하던 목소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애쉬의 육성에 짓눌리기라도 하는 듯이. 엄청난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허억, 헉. 애쉬가 숨을 내쉬었다. 호흡이 이렇게 편한 거였던가. 온몸을 꽁꽁 둘러맸던 철사가 풀린 것 같았다. 여태껏 억눌려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 내내 단단히 박혀 있던 무언가가 확 빠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새로운 것이 메운다.

“애쉬, 너 지금 말한 거야?”

새로운 정보와 감각을 게걸스럽게 흡수한다. 모두 탄에 관한 것이다.

“아, 아…… 탄, 타안, 탄, 탄.”

한번 말문이 트이자 끊임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싶었다. 탄이란 이름을 내뱉을 때 목울대에 느껴지는 작은 진동마저 좋았다. 입천장을 톡 두드리고 가는 혀끝, 제 육성이 고막을 건드리는 감각 또한.

“그래, 나 여기 있어. 있는데, 너 어떻게 말을……. 야, 너 등은 또 왜 이래!”

“탄, 탄, 탄.”

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애쉬를 살폈다. 탄의 눈동자가 걱정과 불안으로 흔들렸다. 보기만 해도 몸이 오그라들 만큼 심한 상처였다. 제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러든 말든 애쉬는 빤히 탄을 들여다보면서 마음껏 말을 뱉어 내기 바빴다.

“이럴 때가 아니고 빨리 여길 나가야겠다.”

탄이 애쉬를 부축하여 일어서려 했지만, 애쉬가 휘청거리면서 다시 철퍼덕 주저앉았다.

“타안, 탄…….”

“많이 아파? 못 움직이겠어?”

탄의 음성이 떨렸다. 아무리 치유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난 에스퍼라지만 저 상태로 오래 둘 수는 없었다. 내가 애쉬를 업고 나갈까.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어떻게든 애쓰면 가능하지 않을까. 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자폭 모드가 작동된 걸 보니, 이 일을 꾸민 배후가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더더욱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타안.”

애쉬는 풀린 혀로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힘이 빠진 몸은 흐느적거렸다.

“응, 으응. 그래.”

탄은 달래듯이 대답하며 애쉬를 붙잡고 끌어 올렸다. 애쉬가 비틀거리면서 탄에게 기댔다. 묵직한 무게감에 탄이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다언에게 무전을 보내 지원 요청을 하고 싶었지만, 폭발의 여파로 무전기가 고장 났다. 남은 방법은 하나다. 애쉬를 등에 업고 움직이는 것. 중간에 쓰러지더라도, 애쉬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탄…….”

“움직이는 게 힘들겠지만, 내 등에 올라와 봐. 응? 정신 차리고. 얼른 나가야지.”

탄이 애쉬 앞에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애쉬는 비틀거리면서 입술만 달싹이다가, 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윽.”

다친 사람 같지 않게 억센 힘이었다. 탄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면서 손바닥으로는 애쉬의 옆구리를 다독였다.

“애쉬. 이렇게 하면 내가 널 업을 수가 없잖아.”

“애, 애쉬…….”

처음으로 탄이 아닌 다른 말이 나왔다. 탄을 옭아맨 팔심은 점점 더 강해졌다. 탄과 닿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애쉬의 눈동자 색이 평소보다 훨씬 선명하고 짙은 초록색으로 변해 갔다.

탄은 몸을 비틀어 애쉬를 떼어 내려 했지만, 머릿속과 공기를 동시에 울리는 음성들에 멈칫했다.

“아…… 아파요.”

『아파. 아파. 아파. 도와주세요.』

애쉬가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탄에게 직접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 탄은 울컥하며 말했다.

“그래. 도와줄게. 괜찮아질 거야.”

탄이 온몸에 힘을 주어 애쉬의 팔을 떨쳐 내고 등을 돌렸다. 애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순간. 탄은 제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잠시 숨을 참았다.

애쉬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육안으로 또렷하게 보일 만큼. 작은 생채기는 몇 초 만에 아물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심하게 화상을 입어 우글우글해진 목덜미 피부도 서서히 매끈해지기 시작했다. 에스퍼가 아무리 회복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런 경우는 본 적 없었다.

“탄…….”

애쉬의 눈동자에 섞여 있던 회색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순수한 초록색만이 남았다. 애쉬는 긴 숨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탄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끝이 꾸물거리며 살갗을 계속해서 문질렀다.

“아파…….”

애쉬가 웅얼거렸다. 피부의 상처가 사라져 갈수록, 애쉬의 눈빛과 힘은 흐려졌다. 모든 이능력을 끌어다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거다. 얼마 남지 않은 힘은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탄은 본능적으로 가이딩을 시도했다. 손목으로 애쉬의 뒷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런데 가이딩할 때마다 늘 굳어만 있던 애쉬가 움직였다. 꽈악. 탄의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는다. 상체를 숙이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튼다.

“어…….”

당황한 탄은 작게 소리 냈다. 애쉬가 다가오고 있다. 선명한 초록빛이 가까워진다. 이 모든 걸 인지할 만큼 느린 움직임이었다. 탄이 피하고자 했다면 그럴 수 있었단 거다.

힘이 쇠해 가는 에스퍼가 하려는 행동. 그게 무엇인지 빤히 알고 있었으나, 탄은 움직이지 못했다. 혹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쪽인지 스스로 단언할 수 없었다. 애쉬와 입술이 맞붙는 그 순간까지도.

애쉬가 홀린 듯이 탄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단단한 콧날이 탄의 피부를 찔렀다.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꾸욱. 입술로 다른 입술을 힘주어 짓누르기만 할 뿐이었다.

이걸 키스라고 부를 수 있나. 탄은 빳빳하게 굳은 채 생각했다. 키스라기에는 너무 어설퍼서, 나는 가만히 있는 건가. 혹은 이게 가이딩 효율을 높인다는 걸 알아서인가.

가이딩은 신경 전달 물질을 변환시키는 과정이었다. 구세계 종말 후 대기의 구성이 변하면서 인간의 호르몬 작용도 이전과 달라졌다. 예전에는 옥시토신이라 불리던 호르몬이 특히 그랬다.

가이딩은 옥시토신의 구성을 바꾸어 구세계 인류에게는 없는 새로운 호르몬을 만들어 냈다. 가이딩을 잘한다는 기준은 에스퍼의 몸속 옥시토신을 얼마나 빠르게 또 많이 변화시키는지였다. 그럴수록 에스퍼의 힘이 강해지고 안정되었다.

제 등급을 뛰어넘어 가이딩을 폭발적으로 일으키는 방법도 있었다. 옥시토신이 분비될 만한 일을 행하면 된다. 스킨십이었다. 단순히 살갗이 맞닿는 정도를 넘어선.

증폭률이 가장 높은 것은 섹스였지만, 이론적으로 그렇다고 알려졌을 뿐. 섹스로 가이딩을 하지는 않는다. 긴급 상황 시에 사용하기에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맞춤은 실제 긴급 매뉴얼 중 하나였다. 가이드와 에스퍼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전제하에.

“읏…….”

꾸욱. 애쉬가 턱을 비틀면서 더 강하게 탄의 입술을 짓눌렀다. 탄의 것은 터져 있었지만, 애쉬의 입술은 그새 치유되어 폭신거리고 말랑했다.

탄은 몸이 굳은 채로 눈도 감지 못했다. 파르르, 애쉬의 속눈썹이 떨리는 게 보였다. S급 가이드인 탄은 여태껏 손을 잡는 것 외의 스킨십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입맞춤으로 가이딩하는 건 그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래 이런가. 탄은 등골을 타고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죽을 뻔했다가 되살아나서 너무 흥분한 탓일지도 모른다. 탄은 애쉬의 뒷덜미를 잡은 손을 떼지 않았다. 애쉬를 밀쳐 내지 못했다.

어차피 이건 키스도 아니고 뽀뽀에 불과하니까. 애쉬는 키스하는 방법도 모르고 무턱대고 입술부터 붙이고 보는 애였다.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애쉬의 회복력이 더 증폭되는 게 느껴졌다. 탄이 붙들고 있던 뒷덜미는 완벽히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입맞춤이 효과가 있었다.

가이딩. 가이딩 하는 거다. 탄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 때문에 저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당연히 내가 가이딩을 해 줘야지. 그래서 밀어내지 못하고, 그래서……. 애쉬가 남자인데도 별다른 거부감이 안 드는 거야. 그저 어린애랑 뽀뽀하는 거에 불과…….

스스로 달래던 탄의 마음속 속삭임이 뚝 끊겼다. 스윽. 애쉬의 엄지가 움직인 탓이다. 정지된 상태로 입만 붙이고 있던 애쉬가 손끝으로 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입술에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다. 애쉬가 본능적으로 입을 살짝 벌려 탄의 입술을 오물거렸다. 혀끝이 거친 표피를 건드렸다.

탄은 잠시 숨을 참았다. 애쉬에게 붙들린 양 뺨이 아릿하다. 평소에는 조잘조잘 떠드는 텔레파시 때문에 애쉬의 속을 투명하게 알 수 있었으나, 지금은 조용했다. 불안할 정도로.

애쉬는 회복에 온 힘을 쏟고 있느라, 텔레파시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간 상태이기도 했다. 입술이 닿은 순간 그랬다.

애쉬의 턱이 더 비스듬하게 틀어졌다. 혀끝이 탄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려 했다. 탄은 눈을 뜬 채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가이딩이라 생각하면 참을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은 딱히 참는 게 아니란 것이다. 축축한 살덩이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때에도, 역함이 들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열기만 솟구칠 뿐.

오히려 키스가 답답해서, 끝만 들어오고 방황 중인 애쉬의 혀를 잡아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은 어지러워졌다. 내가 왜 이러지. 그런데 얘 정말 키스하는 법을 모르는구나. 키스 이렇게 하는 거 아닌데. 아니, 뭔 생각 하는 거야. 내가 미쳤나.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런가? 아, 근데 답답한데…….

탄이 울렁거리는 생각의 흐름에 빠져 어떠한 반응도 못 할 때였다. 내내 감겨 있던 애쉬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애쉬가 눈을 반쯤 떴다.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초점도 맞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얽혔다. 탄이 입 안에 고여 있던 침을 삼켰다. 때마침, 계속 조용하던 머릿속을 애쉬의 텔레파시가 메웠다.

『좋아…….』

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쾌한 소름이 아니라, 기묘한 쾌락을 동반한. 깜빡. 애쉬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는…….』

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탄이 좋아.』

조금의 왜곡도 없이 전달되는 마음. 탄은 애쉬가 지금 얼마나 흥분했는지, 또 얼마나 행복한지 완벽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텔레파시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애쉬와 정신과 몸 모두가 동기화된 것만 같았다.

애쉬는 약간 겁을 먹은 기색으로, 조심스럽지만 꽤 단호하게 제 마음을 규정짓고 있었다. 그리고 탄은 문득 애쉬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젠장,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상한 자포자기의 심정도 들었다.

머릿속에서 끈 하나가 끊어진 것 같았다. 꽈악. 탄이 애쉬의 뒤통수를 움켜잡으며 턱을 틀었다. 이왕 키스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별로 논리적이지 않은 변명을 자신에게 던졌다.

탄이 입에 들어온 혀를 혀로 밀어내면서, 애쉬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초록색 눈동자를 계속 바라볼 자신이 없어, 이번에는 탄이 눈을 감았다. 대신 애쉬가 눈가에 힘을 잔뜩 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사삭.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최대치로 빨라졌다. 사랑의 호르몬이 폭발하면서 애쉬의 몸을 집어삼켰다.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탄은 얼굴을 물에 깊이 처박고 있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사랑 어린 속삭임이 감각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웅웅, 물에 번지는 파동처럼 들린다. 현실감이 옅어지고 주저함은 멀어지고 흥분은 선명해진다.

탄의 혀가 능숙하게 움직였다. 애쉬는 빳빳하게 굳어서는 숨을 참고 있었다. 호흡이 부족한 몸이 작게 경련했다. 탄은 키스라는 행위를 처음부터 알려 주듯이 속도를 조절했다. 조심스럽게 혀끝으로 잇몸을 두드리고 혓바닥을 쓸었다.

“읏…….”

애쉬가 큰 덩치를 바르르 떨었다. 탄의 얼굴을 붙잡은 손끝을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탄은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가 낯설고 놀라웠다. 남자와의 키스는 난생처음이었는데도. 오히려 까마득하게 옛날이었던 풋사랑 시절의 입맞춤 같아 색다르기까지 했다. 왜 싫지가 않지. 탄은 어수룩한 애쉬의 혀를 옭아매며 생각했다.

이전에 경비대에서 동성이 접근한 적이 있었지만, 늘 유들유들하게 빠져나가기만 해 왔다. 거절하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지금까지 연애는 모두 여자와만 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확신했다.

탄의 연애사는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면이 있었다. 꾸준히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는 것 외에는. 한 명을 오래 만나지도, 여러 명과 난잡하게 놀지도 않았다.

연애 상대를 좋아하긴 했지만, 열렬히 불타는 사랑이었는가 물으면 고개가 비딱하게 기운다. 적당히 꽂힌 상대와 만나고, 초반에는 좋았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충돌이 발생했다. 미처 몰랐던 성격의 어긋남이 불화의 씨앗이 되고, 싸움이 잦아지면서 지치고, 식고, 그러다 헤어졌다. 모두가 그렇듯이.

비슷한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 이제는 처음 두세 번의 만남으로, 상대가 자신과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대강 판별할 수 있었다.

연애란 뮤턴트 사냥과 비슷했다. 반복과 반복.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과정과 공략법을 꿰뚫게 된다. 짜릿할 때야 있지만, 가끔은 모든 게 예측대로라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정체도 제대로 모르는, 저보다 한참 큰 남자와 키스하는 건, 탄의 예측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도 몰랐다.

꽈악. 탄은 애쉬의 뒷덜미를 더 붙잡아 당겼다. 턱이 틀어지고 입맞춤이 한층 더 진해졌다. 타액이 섞이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애쉬는 엉망진창으로 숨을 쉬었다. 벌어진 입술 틈새로 눅눅한 숨 덩어리를 간신히 내뱉었다가 다시 참았다가, 코로 겨우 들숨만 이어 나가기도 했다.

애쉬를 첫사랑도 못 해 본 애 취급 했는데, 내게 그럴 자격이 있나. 탄은 자문하다가, 이별의 순간마다 상대에게 들은 말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늘 비슷한 패턴이었다. 진부했다. 표현만 조금씩 달랐을 뿐, 이별을 고하는 상대는 언제나 비슷한 점을 지적했다. 그러다가 새로이 자각했다. 자신이 차인 적은 있어도, 찼던 적은 없다는 걸.

여러 명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여 정신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넌 모든 걸 괜찮은 척, 아는 척해. 다 네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인생도, 연애도.>

당연히 그러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아무렇게나 혼란스러운 상태로 내버려 둬야 해?

<약간의 혼란스러움도 못 견디는 게 네 문제라고. 그래서 먼저 혼자서 선을 그어 버리고 그 이상은 안 넘으려고 하지.>

내가 언제.

<넌 연애만 하는 거야. 사랑이 아니라. 연애 관계라는 역할 놀이에는 익숙하겠지만, 사랑할 줄은 모르잖아. 무서우니까. 누군갈 진심으로 좋아하다가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되는 순간이 올까 봐. 그게 무서워서!>

서른여섯인데, 내가 아직도 사랑을 모르겠어? 내가 뭘 그렇게 무서워하겠어. 내가, 왜…….

탄은 본능적으로 기억의 소리에 반박하다가 멈칫했다. 아니야. 내가 왜 그러겠어. 내가, 나는……. 그러다 조금 전 눈을 뜨자마자 목격한 애쉬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또 잃을까 봐?

성벽 밖에서 온몸을 뒤틀며 죽어 가던 우고, 살해당한 엄마의 모습이 이어서 정신을 점령했다. 흐읍. 탄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이 놀란 기색으로 입술을 뗐다. 타액으로 젖은 채 붙어 있던 입술이 촉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꽈악. 탄은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입만 뗐을 뿐, 둘의 얼굴은 여전히 가까웠다. 침묵 위로 둘의 젖은 호흡이 엇박자로 덮였다. 입가와 혓바닥이 온통 저릿했다.

불규칙하게 숨을 내쉬며 탄은 손끝으로 애쉬를 느꼈다. 뒷덜미에서 내려가 등을 더듬거렸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다쳤던 살갗이 어느새 거의 재생되었다. 아직 울퉁불퉁한 부분이 있었지만, 많은 곳이 아물었다.

“흐으…….”

애쉬는 고통과 쾌락이 섞인 신음을 나지막이 흘렸다. 탄은 애쉬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하게 닿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질 정도로 강렬한 안도감을 느꼈다.

애쉬는 무사해. 애쉬는 죽지 않았어. 이 애만은 아직 잃지 않았어.

애쉬가 바로 앞에서 헐떡이고 있다. 숨이 탄의 콧잔등을 스쳤다. 툭. 애쉬의 고개가 미세하게 기울어지더니, 둘의 이마가 맞닿았다. 애쉬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탄은 마음이 울렁거려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애쉬가 축축해진 입술을 움찔거렸다. 탄 덕분에 통증은 사그라드는 중이었지만, 가슴이 조이는 감각만은 점점 더 심해졌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에 무언가 박힌 것처럼 이물감이 느껴졌다. 뱉어 내고 싶었다. 탄. 처음 육성으로 그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이번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시끄럽게 외치고픈 단어가.

“사…… 사랑.”

탄이 낮게 울리는 한 단어에 움찔거리며 눈을 떴다. 동시에 애쉬도 눈꺼풀을 들어 올렸고, 열기에 젖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어서 타액으로 젖은 애쉬의 붉은 입술이 시야에 박혔다.

“사, 사랑. 사랑. 사랑.”

애쉬는 사랑이라는 단어밖에 모르는 것처럼 되풀이했다. 서툴게 마음부터 무작정 내보이고 보는 순진한 목소리였다. 그것과 대비되는 부풀어 오른 입술. 탄이 키스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애쉬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탓이었다.

탄은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몰려드는 배덕감과 자책에 허우적거렸다. 내가 뭘 한 거지. 이미 혀는 섞을 대로 다 섞어 놓고 지금에서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애쉬, 잠깐…… 이거는, 그러니까.”

움츠러들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애쉬는 성큼 그만큼 다가왔다. 탄의 얼굴을 꽉 잡고 있던 손이 살살 내려가더니, 양 팔뚝을 거세게 붙들었다.

“이, 이제 감정 압니다. 애쉬.”

“어?”

탄은 어물거리며 멀거니 서 있었다. 애쉬에게 붙잡힌 팔이 옆구리에 찰싹 붙어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애쉬는 몽롱한 눈으로 탄을 빤히 응시했다. 이윽고 탄에게 텔레파시가 흘러들어 왔다.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애쉬의 생각이 아니었다. 탄은 머릿속으로 제 목소리를 들었다. 애쉬가 기억의 한 조각을 탄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어이고, 첫사랑도 아직인 애가…….』

탄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애쉬. 우선 가이딩에 익숙해지고 나서, 다시 생각하자. 그때 너도 네 감정을 찬찬히 살펴봐.』

과거의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거다. 발뺌할 수도 없게끔. 이런 능력은 또 언제 생겼지. 탄이 얼이 빠져서 입만 뻐끔거릴 때, 애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사랑. 탄.”

“어, 아니, 야…….”

“확신합니다.”

이제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어를 수도 없었다. 농담도 못 하겠다. 목숨 바쳐 자신을 감싸다가 자칫하면 죽을 뻔한 애였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애착을 느낀다지만, 그건 가이드가 자기 자신의 생존에 유용한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서다. 생존 욕구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선후 관계를 흐트러뜨리는 혼란이 있다면, 그게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고 온몸으로 말한다면. 감히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탄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애쉬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탄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뜨거운 숨결이 표피에 닿자, 탄이 붕 떠오른 제정신을 낚아채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알겠어. 알겠는데.”

애쉬의 눈썹이 살짝 아래로 처졌다. 탄은 힘 빠진 손바닥을 애쉬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우선, 여기서 나가야지. 너도 좀 괜찮아진 것 같고…….”

꾸욱. 손바닥에 힘을 주었는데, 애쉬가 밀리지 않았다. 돌덩이 같았다. 애쉬는 그대로 버텨 내며 탄에게 꿋꿋이 다가왔다.

“탄.”

“나가야, 읍, 한다고, 읍.”

애쉬가 탄이 말하는 사이에 무작정 입술을 부딪쳐 비비고 문댔다. 혀끝을 빼내서 할짝거리기도 했다.

“정신, 읍, 차려 봐.”

늘 빳빳하게 굳어만 있던 애쉬가 이제는 제법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아픕니다…….”

“그러니까,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이내 탄의 말은 입술에 집어삼켜졌다. 애쉬의 혀가 미끄러지듯 탄의 입으로 들어왔다. 탄이 해 주었던 것을 하나씩 복기하듯이 따라 했다. 혀끝으로 잇몸을 두드리고 혀끝을 훑는다. 애쉬는 뭐든지 가르쳐 주면 금방 배웠다. 키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꾸욱. 탄은 손으로 애쉬의 너덜거리는 점프 수트를 움켜잡았다. 제가 했던 키스보다 훨씬 격하고 거친 듯했다. 힘 조절에 실패한 채 밀어붙이는 기세에, 숨이 막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애쉬는 탄에게 받았던 키스를 좀 더 강도 높여 돌려주었다. 꽉. 탄이 했던 것처럼 송곳니로 입술도 깨물어 보았다.

“아!”

탄이 반사적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입술이 어릿하다. 송곳니에 표피가 뚫리는 줄 알았다. 무작정 들러붙는 힘이 버거웠고, 점점 상체가 뒤로 기울었다. 애쉬가 몸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애처럼 입술 꾹꾹이를 하든 말든 내버려 두었어야 했나. 탄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수어 번 애쓰면서, 애쉬를 계속 밀어냈다. 입가가 얼얼하게 달아올랐을 즈음. 여태껏 꿈쩍도 안 하던 애쉬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혀 놀림도 조금씩 느려졌다.

이제야 좀 진정했나 보다. 안심하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안심은커녕 더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애쉬가 키스 도중에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어, 어어!”

기우뚱 넘어가려는 애쉬의 몸을 탄이 가까스로 낚아채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무리한 등과 팔 근육이 아우성쳤다.

“애, 애쉬?”

탄은 비틀거리며 애쉬를 붙들었다. 다급하게 귓가를 애쉬의 가슴팍에 갖다 댔다. 새액, 색. 호흡은 안정적이다. 얼굴도 고이 잠든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하아.”

탄은 맥이 풀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몸을 치유하느라 이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다 쓴 탓에 기절한 모양이었다. 가이딩한답시고 입술을 비비지 않았더라면, 애쉬는 그대로 폭주 상태로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입술 깨물리고 혓바닥 뽑힐 기세로 키스 당하는 게 낫지. 어찔하던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끙. 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애쉬의 팔을 제 어깨에 둘렀다. 기절한 애쉬는 온전히 몸을 탄에게 기대고 있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업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만 했다. 탄이 온몸을 비틀면서 저보다 큰 애쉬를 등에 얹으려 애쓸 때였다.

지하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순간 탄은 모든 동작을 중지했다. 이런, 씨발. 워치가 폭발했으니, 당연히 이곳에 침입자가 왔다는 걸 들킨 셈. 누군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좀 더 빨리 나갔어야 했는데.

탄은 제 속도 모르고 기절한 애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애쉬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탄이 애쉬를 벽에 기대어 앉혀 놓고서,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폭발로 날아가면서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놓쳤었다. 다행히도 구석에 처박힌 총을 바로 찾아냈다. 탄이 발소리 없이 걸어가 총을 들고서 문 옆에 몸을 숨겼다.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입맞춤으로 혼이 빠져 있던 몸이 다시 긴장으로 바짝 채워졌다.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서넛 정도는 되는 듯했다.

다 처리할 수 있을까. 몸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총이 있으니 한 명만 우선 기습으로 보내 버리면…….

“보안관?”

또다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긴장하던 탄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꽂혔다. 아. 탄이 탄식했다. 총신을 꽉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여기 있나?”

이어 지하실 안쪽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보안관님!”

가장 선두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혼과 다언. 바짝 솟아올라 있던 탄의 어깨가 탁 풀렸다. 살았다. 머릿속에 그 문장이 떠오르자, 다리에까지 힘이 풀렸다.

다언이 제때 지원 요청을 하여 아혼과 그의 수족들 몇을 끌고 이곳을 찾았다. 다언은 폭발의 여파로 허름해진 탄을 발견하고서는 깜짝 놀라 뛰어왔다.

“괜찮으세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 근처에서 폭발음이 들렸다는데…….”

아아. 살았다. 애쉬도 살렸다. 탄은 밀려드는 안도감에 눈가가 욱신거렸다. 지친 몸을 벽에 툭 기대며 말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우리는 무사해. 그런데…….”

마침 아혼이 굳은 얼굴로 지하실 한편에 놓인 시체들을 살피고 있었다.

“……유해만 수습해서 얼른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언제 누가 닥칠지 몰라.”

공장 출신이 넷이나 죽어 나갔다. 아혼의 통제 범위 밖에서. 이곳에, 아니, 63구역 전체에 위험이 드리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 * *

비쩍 마른 남자가 홀로그램 화면에 대고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그 무두장이 놈이 배신할 줄은 몰랐습니다.”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 이래서 검증되지 않은 잡놈은 쓰지 말라는 거야. 확실하게 제거했나?

“바로 자폭 모드 발동시켰습니다.”

- 이번 표본은 총 네 명이랬지?

“예. 네 명 모두 거부 반응으로 사망했고, 시체는 잘 처리했습니다.”

- 확실한 거지.

“예. 죄송합니다.”

- 그래서 한 명도 발현된 놈이 없다고? 시장님께서 얼마나 날 쪼는지 알아? 어? 이번에도 목표치를 채워 가지 못하면…….

홀로그램 화면 속 인물은 한참을 혼자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분을 푸는 동안,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그 히스테리를 들어 주었다.

한참 후에야 통신이 끝났고, 남자는 홀로그램 화면을 내리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씨발.”

뒷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시티 홀에 급조한 거짓말을 둘러대느라 진이 다 빠졌다.

하필이면 왜 이 일에 마에가 끼어든 거지?

남자는 짧게 깎은 손톱을 송곳니로 딱딱 짓이겼다. 시티 홀에 사실대로 보고했다면, 마에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녀를 죽일 거야. 죽이고 말 거야.

그것은 원치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남자는 초조하게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원을 돌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었다. 63구역에서 시티 홀의 끄나풀 노릇을 한 게 처음도 아닌데. 늘 만족스러울 만한 성과를 냈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즈에게까지 손을 뻗친 게 문제였나. 실험체를 빨리 구해 오라고 상부에서 독촉하는 탓에, 순간 판단력이 흐려졌다. 부작용으로 죽어 나갈 확률이 70%이니, 최대한 많은 표본을 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즈를 꾀어낸 게 패착이라고 볼 수 있나. 다섯 표본 중 나즈만이 유일하게 부작용을 겪지 않고 살아남았다.

중간에 그 보안관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나즈를 무사히 시티 홀에 넘겼을 텐데. 이제 와 나즈를 빼내 오지도 못한다.

현재 나즈를 보살피고 있는 게 하필이면 마에였다. 계속 이발사 일만 할 것이지. 왜 갑자기 끼어든 거야. 왜냐고. 남자는 분노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발을 쿵 굴렀다.

마에를 지키려면, 방법은 하나였다. 이렇게 모욕적으로 몇십 분 동안 까이더라도, 실험체 수급에 실패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실험체를 다섯이 아닌 넷으로 줄였다. 나즈의 존재는 쏙 뺀 채 보고했다. 침입자도 없었던 척했다. 그저 그 멍청한 운반책이 실수해서, 죽였을 뿐이라고. 아무도 이 사건에 대해, 그 지하실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모른다고.

평소라면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보안 장치가 뚫리는 순간, 시티 홀에서도 알아차렸을 테니. 하지만 아예 침입자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어떻게 보안 장치를 해제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무두장이 아들놈의 워치에 도청 기능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손 놓고 있다가 당할 뻔했다. 바로 자폭 모드를 켜서 보안관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살아남았다. 그것도 너무 멀쩡하게.

남자는 입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새 보안관 녀석이 지하실을 들쑤셨던 것, 보안 장치가 비밀스레 해제된 것, 그 건물에 들어간 놈이 한둘이 아니란 사실까지 다 발설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러면 마에는 죽는다. 분명히 죽게 될 거다.

남자가 빙빙 제자리를 도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나이도 들었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실험체를 두셋 정도만 수급해 줘도 큰 포상을 주겠다고 했다. 사회 기여도도 대폭 상승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가게를 정리해서 50구역대로 이사 갈 생각이었다.

여기보단 훨씬 살 만하겠지. 마에도 분명히 좋아할 것이다. 언제나 어물쩍 자신을 거절하지만, 63구역을 벗어나게 해 준다고 하면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누가 그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남자는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다. 시티 홀은 좋은 곳이다. 권력은 항상 옳은 법이니까. 권력을 활용하여 생존하는 것을 비난하는 놈들은 다 멍청이라고 여겼다. 효과적인 생존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전구에 불을 밝힐 수 있었다. 63구역에 살면서도 조금 더 좋은 옷을, 좋은 음식을 누렸다. 남자는 제 삶이 현명했다고, 63구역 같은 구렁텅이에서 태어난 것치고는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마지막만 잘 장식하면 된다. 여기를 떠서 마에와 살림만 차린다면……. 그런데 모두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는 일그러졌던 얼굴을 펴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식은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허벅지에 벅벅 문지르며 나갔다.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온 건 지긋지긋하고 꼴사나운 손님이었다. 늘 저 미끈한 얼굴이 재수 없었다. 문득 칼로 그를 찌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주방장. 오늘의 메뉴 하나.”

옆에 꼴사납게 부관을 달고 다니던 놈이 오늘은 혼자였다. 다언은 나즈를 보살피고 있을 테고, 애쉬 그놈은 무슨 일인지 며칠간 보이지를 않았다. 아프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마도 지하실에서의 일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구석에 혼자 자리 잡은 보안관의 얼굴에는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잔 흉터가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느글거리던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걱정되겠지. 불안하겠지. 지하실에서 본 건 뭘까. 자기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누군가 찾아오진 않을까 조마조마하겠지.

너는 나 때문에, 마에 때문에 산 거야. 내가 입 한번 벙긋하면 시티 홀이 내려와서 널 죽여 버릴 거라고. 남자는 속마음을 삼키고, 웃으면서 보안관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남자는, 주방장 겐즈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식칼을 손에 쥐었다.

진짜 미치겠는 건 나인데. 죽여 버리고 싶다. 보안관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난 그냥 사랑했을 뿐이야. 사랑하는 사람과 좀 더 잘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어차피 다 죽을 사람들이었어.

나즈 그 어린애가 진통제로 버티는 게 불쌍하지도 않아? 걔한테도 좋은 일이야. 그렇게 죽으나 이렇게 죽으나. 어쨌든 운 좋게 살아남았잖아. 걘 성공작이었다고! 너만 아니었어도. 나즈는 시티 홀에서 교육받고 훌륭한 에스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재수 없는 새끼, 이기적인 새끼…….

너 때문에, 네가 부탁하는 바람에, 마에까지 이 일에 휘말렸어. 네 그 알량한 영웅심 때문에 마에가 죽게 생겼다고!

시티 홀이 언제까지 거짓말을 믿어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만만한 놈들은 아니다. 얼마간은 버텨도, 결국에는 진상이 밝혀질 테다. 그러면 이번 일에 연루된 모든 이들이 죽을 것이다.

시티 홀은 실험이 안정화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하길 원했다. 비밀을 알아챈 놈들을 살려 둘 리 없었다.

결국, 마에는 잔인하게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시티 홀에 반항한 자들의 말로는 똑같다. 저 재수 없는 보안관의 어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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