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단 한 명의 루
“나 왔어.”
탄은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사무소 2층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애쉬는 인형처럼 가만히 누워서 간간이 숨만 내쉬고 있었다.
지하 통로에서 탈출한 지 사흘째. 애쉬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외상은 거의 치료된 상태였고, 호흡과 혈압 등 기본적인 수치도 모두 정상이었음에도.
나즈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마에와 나즈는 공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에는 나즈를 보살피면서 지하실에서 수습해 온 시체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시체는 이제야 느리게 부패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죽은 이들의 공통점은 다들 중증 대기병 환자였다는 것. 선천적으로 신인류와 구인류 사이의 면역 체계를 타고난 이들. 시티 홀은 그들에게만 반응하여 어떠한 효과를 내는 물질을 개발해 냈다.
치사율 70%라는 엄청난 부작용을 지닌 약물 실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는 나즈뿐. 분명히 나즈의 몸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터였다. 아이가 깨어나야만, 정확히 어떤 실험이었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더 자세하게 알게 되리라.
하지만 탄은 그 전에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시티 홀에서 사람을 보내 나즈를 납치해 가거나 자신을 죽일 것이라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아혼에게 부탁하여 공장에 나즈와 마에를 맡긴 이유였다. 적어도 아혼의 보호 속에 있는 게, 지금으로서는 더 안전할 테니까.
그런데 사흘째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유지되는 평화와 안전에 기뻐하기에는, 탄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왜 시티 홀에서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는 걸까.
탄은 고민 끝에 이 의심스러운 평화를 설명해 줄 만한 새로운 가정을 떠올렸다. 무두장이 아들은 꼬리 중의 꼬리였다. 의뢰인이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놈. 시티 홀과 직접 연락하지 않고, 그 사이를 이어 주는 브로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브로커가 중간에서 이 사건을 덮으려 했다면? 왜? 쉽게 짐작 가는 이유야 있었다. 건물이 침입당했고 실험체를 빼앗겼다. 시티 홀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처벌이 무서워 우선은 꼬리만 잘라 내고 함구해 버린 거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지하실을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내가 브로커라면……. 탄은 상상했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겠지. 살아남기 위해, 비밀을 알게 된 자들을 직접 처단하려 할 것이다.
탄은 상대를 몰랐다. 정체를 모르는 적을 대할 때에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며칠 내도록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으나, 의식 불명인 애쉬가 옆에 있는데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하루면 깨어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애쉬는 잠잠했다. 에스퍼가 이능력을 지나치게 끌어다 쓰면 정신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의식이 없는 건 처음 보았다.
탄이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자조적으로 웅얼거렸다.
“이 와중에 산 사람이라고 배는 고픈데…….”
<다크>에서 포장해 온 오늘의 메뉴가 탄의 손에 들려 있었다. 허기가 져서 뭐라도 먹어야지 싶어 식당에 다녀왔다. 막상 사서 오니 그새 입맛이 달아나 버렸다.
탄은 음식을 아무렇게나 구석에 밀어 놓고, 누워 있는 애쉬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손바닥으로 애쉬의 이마를 덮었다. 살갗이 닿고 있는데도, 머릿속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애쉬의 의식 자체가 꺼져 있다는 증거였다. 자꾸만 애쉬가 이대로 사라질 듯한 불안감이 들었다.
적막함에 숨구멍이 조여든다. 분명히 손으로 만지고 있음에도, 애쉬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너무 고요하다. 가이딩도 시도할 수 없었다. 애쉬가 느껴지지 않는다.
탄은 가라앉은 얼굴로 물 대야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힘주어 물기를 쭉 짜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면서 보살피는 일뿐이었다.
끙. 탄은 애쉬의 몸을 힘주어 뒤집었다. 헐렁한 셔츠를 돌돌 말아 올렸다. 등을 물수건으로 살살 닦기 시작했다. 화상은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군데군데 가장 상처가 심했던 곳에만 우글거리는 흔적이 남았다.
탄은 애쉬의 몸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그러다가 불쑥 지하실에서의 일이 떠오르곤 했고, 물수건을 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커다래서 몸 한 번 닦이는 것도 일이네…….”
일부러 가벼운 투로 중얼거리면서 애쉬를 조심스레 옆으로 눕혔다. 정자세로만 누워 있으면 피부가 짓누를까 봐,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닦고 자세를 바꾸어 주고 있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네가 봐야 하는데.”
탄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두 무릎을 모아 세웠다. 물수건을 바닥에 툭 내려놓고서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탁한 숨을 몰아쉬며 애쉬를 빤히 응시했다.
애쉬는 도저히 죽을 위기를 겪었던 사람답지 않게 피부가 매끈거리고 광이 났다. 입술도 부르튼 것 하나 없이 부드럽고 말랑해 보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 비현실적이었다.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은 그저 애쉬의 껍데기일 뿐, 진짜 애쉬는 느낄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간 듯했다.
탄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늘 단정하게 올리고 있던 앞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졌다. 머리카락이 이마를 반쯤 덮었지만, 다시 정돈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탄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저걸 물고 빨았던 게 한참 전 일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그런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무심코 손을 뻗어 애쉬의 아랫입술을 톡 건드렸다.
이 녀석은 그게 인생 첫 키스였던 것 같은데. 처음이 곧 마지막이 되어 버리면 너무 아쉽지 않나. 얼른 좀 일어나지.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살짝 힘을 주어 꼬집어 보았다. 이래도 요지부동이다.
탄의 미간이 점점 조여들고 턱에 힘이 들어갈 무렵, 1층에서 호출 신호가 울렸다. 요 며칠간 보안관 사무소를 아무나 출입할 수 없도록 입구에 잠금장치를 걸어 두었다. 홀로그램 워치로 확인해 보니, 마에였다.
마에는 공장에 지내면서 하루에 한두 번씩은 이곳에 들러 애쉬를 진찰해 주었다. 탄은 직접 1층으로 뛰어 내려가 마에를 마중했다.
“오셨어요.”
“애쉬는 좀 어때?”
“어제랑 똑같아요.”
마에는 왕진 기구가 들어 있는 가방을 갖고 다녔다. 의사로 일하지 않은 지 오래. 그녀가 지닌 장비는 가장 기초적인 것뿐이었지만, 63구역에서는 이것조차 보기 힘들었다.
둘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도대체 알 수가 없네, 왜 의식이 없는지. 에스퍼들은 자주 이러냐?”
“아뇨. 저도 처음 봅니다.”
탄은 마에에게 애쉬의 정체에 관해 얼추 털어놓았다. 에스퍼이긴 한데, 아무래도 일종의 돌연변이 같다고.
“민간인만 봤지, 나도 형질 보유자는 처음이라서.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은데. 무슨 약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보러 와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죠, 저는.”
두 사람은 애쉬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에는 애쉬의 호흡과 혈압 등을 측정하고, 외상을 입었던 부위를 살폈다. 탄은 옆에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공장 쪽은 좀 어때요?”
“아혼이 벼르고 있어. 죽은 사람들 주변을 다 캐묻고 다니는데, 건진 게 없대. 모두 비밀로 하고 실험에 참여한 모양이야. 비밀 유지까지 계약의 일부였겠지.”
“실험에 참여하면 돈을 준다고 했다던데. 돈이 들어온 흔적은 없고요?”
“전혀. 돈이라도 오갔으면 뭐 말이 돌았을 텐데. 그냥 사기당한 거지. 시티 홀이 늘 그렇잖아. 죽으면 그만이고, 만약에 살아남았다면 자기들이 데려갔지 않았겠어.”
“또 여기서 사람 한둘 없어지는 건 흔한 일이니…….”
“다른 구역으로 몰래 갔나 하지, 뭐. 어차피 시티 홀이 협조를 안 해 줘서 찾지도 못하는데.”
“아혼은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랍니까.”
“지금 길길이 날뛰는 꼴을 보면 쿠데타라도 일으킬 작정이야.”
“공장 전력으로 시티 홀을 상대한다는 건 자살 행위일 텐데요.”
“아혼도 알겠지. 나도 알고. 다 겪어 봤으니까.”
마에의 목소리가 잠시 잠겼다.
“애쉬는 별 이상 없어 보여. 체온도 정상이야. 근데 넌 밥은 좀 챙겨 먹었니?”
“아, 방금 식당에서 포장해 왔어요.”
“거기서 먹지 않고?”
“여길 오래 비워 두기가 그래서요.”
“그래. 애쉬는 네가 옆에서 계속 살피는 게 낫지. 공장에 맡겨 두기도 좀 그렇고.”
탄은 애쉬가 남들과 다른, 특별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걸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아혼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장에는 아혼 외에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시한폭탄 같은 녀석이다. 우고처럼 갑작스러운 과폭주 상태에 접어들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애쉬 옆에 없다면? 그 장면을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단 하나의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마에가 어두워진 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혼은 둘째 치고. 탄,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저요?”
“상황이 너무 이상해. 시티 홀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그 자식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중간 브로커가 있었다면, 시티 홀이 정말 상황을 모르는 거 아닐까 싶어요. 지금 당장은요.”
“브로커?”
탄은 자신이 생각한 가정을 마에에게 설명해 주었다.
“시티 홀이야 해야 할 일이 넘치니까 말입니다. 이런 변방까지 신경 쓸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버려뒀으니. 그래도 마음만 먹는다면, 뭐든지 알아내겠죠.”
시티 홀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것. 실제로 그러하든 아니든, 사람들에게 그런 공포를 심어 주고 대항할 의지를 꺾는다는 것.
시티 홀도 완벽한 조직은 아니다. 사람이 운영하는 모든 게 그러하듯, 허술한 지점이 어딘가에는 있을 테다. 하지만 그걸 파헤칠 만한 용기를 원천 차단하는 데에 능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분노만으로는 무엇도 이루어 내지 못한다. 굴종이 편하다. 시티 홀은 모든 것을 보고 있다.
캐슬 전체를 아우르는 무형의 세뇌. 불의를 불의라 느끼지 아니하고, 자유를 스스로 걷어차게 만드는.
“사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인데. 아혼이랑 제 뜻이 얼추 맞네요. 어떻게든 해 봐야죠. 쿠데타를 일으키든, 시장의 모가지만이라도 따든.”
하지만 탄은 무력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63구역으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들 인류가 멸망할 줄 알았지만, 결국은 살아남았으니까요. 이전 세기만 해도 뮤턴트는 불사의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급소와 대응법을 알고요. 시티 홀이라고 뭐 별수 있겠습니까? 약점 하나는 있겠지. 찾아내야죠.”
“…….”
“누가 이랬는지 알아낼 겁니다.”
아픈 이들을 실험체로 쓰고 우고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 그리고 애쉬를 이렇게 만든 자들. 지나치게 웃자란 어린애는 서툴고 순진했다. 키스하는 법은 모르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수십 번도 절절하게 읊을 수 있는 사람.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망가진 사람.
누군가를 망가뜨렸으면 그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 탄은 그게 세상의 이치라고 믿었고, 적어도 제가 가야 하는 방향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다치고 삶이 혼란스러워질지언정.
아낀다는 마음은 혼란스러움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용기를 포함했다. 탄은 애쉬를 아꼈다. 비록 또렷한 자각이나, 당당하게 사랑이라 읊을 확신은 없을지라도. 탄은 애쉬를 다치게 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넌 정말 네 엄마를 닮았구나. 피는 못 속이겠다.”
한참 조용히 탄의 말을 듣던 마에가 입을 열었다.
“엄마랑 저랑요? 아혼은 전혀 안 닮았다고 하던데요.”
탄은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하면서 손끝으로 애쉬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애쉬가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또 다른 상실을 곱씹자니 벅찼지만, 불가역적인 호기심이 일었다. 마에는 저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아는 듯했다. 적어도 여나에 대해서는 그럴 게 분명했다.
탄이 기억하는 엄마는 파편적이었다. 이름은 여나. 63구역 출신이 아닌 외부 구역에서 온 이주민. 당시 의사였던 마에의 잡일을 도와주며 같이 산 미혼모.
늘 다정하고 섬세한 여나였지만, 어떤 부분에서만큼은 단호하게 굴었다. 특히 과거의 일을 언급하는 것은 터부시되었다. 여나는 한 번도 자기 가족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탄의 친부에 대해서도.
63구역에는 부모가 없거나 한쪽만 있는 애들이 부지기수였기에, 탄은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징집되어 전투 학교에 들어간 이후에야 의문이 들었다.
내 아빠는 누구였을까. 엄마가 나의 엄마이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던 걸까.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을 텐데.
여나의 과거는 공백이었다. 마치 홀로 태어난 존재처럼.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장막을 걷어 내면, 오랫동안 숨겨 놓은 무언가가 튀어나올 테다.
탄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에 대해서 많이 아시겠죠.”
“같이 지냈으니까.”
덮어 두었던 기억이 꾸물거리며 올라온다.
“어릴 때 엄마랑 숨바꼭질을 자주 했어요.”
탄은 태연한 척 말을 이어 나갔다.
“엄마가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당부하던 날들이 있었죠. 숨바꼭질하는 거라고요. 술래한테 안 들키고 저녁까지 잘 숨어 있으면 상도 받았어요. 상은 제가 정했던 것 같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 진짜 별것도 아닌 거 달라고 했네. 시장에서 팔던, 그 조그만 인공 설탕 덩어리 있잖아요. 맨날 그거 골랐는데.”
한번 기억을 곱씹기 시작하자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갔다.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세세한 것들까지. 잊었다고 생각했으나, 그저 머릿속 한구석에 쑤셔 박아 두었을 뿐이다.
“어릴 땐 술래가 누군지 궁금해하질 않았어요. 아무튼 상을 받는 게 중요했죠. 저 혼자 술래는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은 해 봤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자 괴물이라 생각했는데, 물론 아니었겠죠. 선생님은 술래가 누군지 아세요?”
탄이 예전 호칭을 입에 올렸다. 마에는 별다른 지적도 대답도 없이 묵묵히 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시죠, 선생님은.”
“…….”
“혹시 리베라단이랑 관련된 겁니까?”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과거에 사라진 그 단체가 있었다. 마에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간 침묵이 지나가고,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어쩐지 고통에 잠겨 있었다.
“여나는 네가 이걸 알기를 원하지 않았을 거야.”
“모른 척 발 빼기에는 좀 그른 것 같은데요. 게다가 엄마가 원하지 않을 법한 짓을 이미 너무 많이 해 버려서요. 이거 하나 추가된다고 천국에서 목덜미 잡진 않겠죠.”
여유를 능숙하게 가장해 내는 탄을 바라보며, 마에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너도 이제 어린애는 아니니까.”
망설임 끝에 마에가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탄이 어린애일 때도 아닌,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 * *
여나는 허름한 가방에 닥치는 대로 값이 나갈 만한 것을 쓸어 담았다. 뮤턴트 세공품과 상위 구역에서만 볼 수 있는 최신 기기들.
처음에는 이걸 쓰는 게 구역질 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빼고 모든 가족이 죽어 버린 날. 저택이 활활 불타던 그때, 아득바득 혼자 살아남아 집에서 챙겨 나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여유는 없었다. 63구역에서 새로이 자리 잡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족의 죽음에 아파하던 3구역 아가씨는 사라진 지 오래다. 비유가 아니라 서류상으로도 그랬다.
본디 타고난 나나라는 이름을 버리고 여나로 다시 태어났다. 나나는 저택이 불탈 때 가족과 함께 죽은 것으로 처리됐다. 하둔이 다른 시체를 나나인 척 저택에 갖다 두었다. 그 후 가짜 신분인 여나로 살아간 지도 1년.
나나라면 지금 상황에서 겁을 먹고 울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여나는 그러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야만 했다.
그렇게 여나가 급하게 짐을 꾸리고 있을 때, 창고 안으로 하둔이 들어왔다. 말없이 둘의 시선이 얽혔다. 하둔의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며칠 전 시티 홀의 추격을 피하다가 생긴 상처였다.
하둔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하려는 말이 있는 듯싶었지만, 그는 언어보다는 본능적 몸짓을 택했다. 하둔이 두 걸음 만에 성큼 여나에게로 다가왔고 여나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둘의 입술이 포개졌다.
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둔과 키스하자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눈물을 참았다. 오랫동안 다듬지 못해 길게 자란 하둔의 머리카락이 뺨에 스쳤다. 이 까만 머리카락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키스는 짧았고, 하둔은 몸을 빠르게 뒤로 물렀다. 일부러 여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얼른 출발해.”
“……언제 따라올 거야?”
“이번 계획 마무리되면 바로.”
“정말?”
“응, 바로.”
여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나나는 울지도 모르지만, 여나는 끝끝내 울지 않았다. 지금이 하둔과의 마지막임을 마음속 깊숙이 예감했지만, 금세라도 재회할 것처럼 굴었다.
얼마 전 리베라단의 주요 기지 하나가 발각되었다. 단원들끼리도 서로 모르는 점조직 형태라, 단숨에 모두가 색출당하진 않았다.
그러나 시간문제다. 이대로 두면 조직력은 약해지고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다. 우선은 몸을 웅크리고 후퇴해야만 했다. 시티 홀의 시선이 가장 덜 닿는 곳으로. 캐슬 시티의 외곽, 63구역에 새로이 기지를 차리기로 했다.
문제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테러 계획이다. 실행일은 이틀 후. 그날은 캐슬 시티 건립일을 기념하여 축제가 열린다. 이례적으로 시장과 최고 시의원들이 10구역까지 직접 둘러보며 선전할 예정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 올지 모른다. 후퇴할 때는 후퇴하더라도, 몇 명은 10구역에 남아 예정대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폭탄 기술자인 하둔은 개중 빠질 수 없는 인력이었다.
이미 기지 하나가 발각될 정도로 정보가 새어 나간 상태. 시티 홀에서도 방비책을 준비했을 것이다. 테러가 완벽하게 성공할 가능성은 드물다.
그래도 최고 의원 한둘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상위 구역 시민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다시없을 기회였다.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만, 하둔은 참여하기로 했다. 그의 아버지는 시티 홀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 하나로 성벽 밖으로 추방당했다. 공포 정치의 시대였다. 어린 아들은 저 멀리서 아버지가 뮤턴트한테 산 채로 뜯기고 잡아먹히는 걸 바라봐야만 했다. 그날, 소년 하둔은 직감했다. 자신은 영영 평범하게 살 수는 없을 거라고.
하둔은 상대적으로 관리가 느슨한 중하위 구역에서 사람을 모았다. 모든 행보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당장 죽더라도 아쉽지 않았으니, 과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둔이 거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너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 싶다.”
하둔은 여나와 이마를 맞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히 생이 아깝지 않았는데, 증오와 분노로만 가득 차 있었는데. 여나를 만난 이후 달라졌다. 구질구질한 미련이 차올랐다.
“날 만나기 싫었다는 소리야?”
“아니, 널 만난 건 축복이었지.”
손에 닿는 이 부드러운 온기를 놓고 싶지 않다. 이대로 같이 63구역으로 도망가서, 가짜 신분으로 살아갈 순 없을까. 배고프고 죄책감에 시달릴지라도. 수치심 속에서도 행복할 것 같았다. 여나와 함께라면.
물론 하둔은 이 모든 게 헛된 망상임을 알았다. 여나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소년 하둔과 마찬가지로, 여나도 영원히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에 분노했다.
“여나, 널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한 것 같아서…….”
여나가 하둔에게서 이마를 떼어 냈다.
“내가 선택했어.”
단호한 목소리였다.
집이 화염에 집어삼켜지던 날, 그때야 여나는 깨달았다. 제 부모가 리베라단을 은밀하게 지원하던 사람 중 하나라는 걸. 늘 시티 홀에 충성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던 여나는 당혹스러웠다.
여나가 살았던 3구역은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시티 홀은 인류의 마지막 방주이자, 새로운 미래의 발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위 구역 사람들의 삶도 별반 다를 것 없다고 들었다. 배급품이 덜 부여되기는 하지만, 그거야 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적어서였다. 시티 홀의 사회 기여도 측정은 오차 없이 정확하다고 배웠고 믿었다.
시티 홀에 반항하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부모 또한 여나만큼은 아무것도 모르도록,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새장 안에서 안전하게 키웠다.
그러다 새장이 불에 타 버린 날. 낯선 남자, 하둔이 나타났다. 눈빛이 공허한 미남이었다. 회의감과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하둔은 엉엉 우는 여나, 당시에는 나나였던 여자를 업고서 집을 빠져나왔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당신부터 구하고 피신시키라고 했어. 당신 부모가.>
<난 이런 걸 원한 적 없어. 나, 나만 살았잖아. 나 혼자서 도대체 뭘 어떻게…….>
사람이 앞에서 훌쩍이든 말든, 하둔은 사무적인 투로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이건 가짜 신분증. 그리고 집에서 갖고 온 것을 팔면 중하위 구역에서 평생은 먹고살 돈이 나올 거야. 우리 기지에서 며칠 머물렀다가 새 삶을 찾아 떠나.>
하둔을 따라간 나나는 내내 세계가 무너지는 혼란 속에 잠겨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하둔은 도대체 언제 떠날 거냐고 그녀를 재촉했다.
나나는 가짜 신분증에 적혀 있었던 여나라는 이름을 속으로 수십 번 되뇌다가 말했다.
<나도 여기 있을래.>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야. 우린 당신이 필요하지도 않고.>
<하지만 인력이 부족해 보였어. 기지를 관리하는 잡일이라도 맡겨 주면 되잖아. 게다가 난 글도 잘 쓰고, 상위 구역에 관한 정보도 많이 알아. 거기서 평생을 살았으니까. 이 정도면 쓸모 있지 않아?>
<당신 부모가 들으면 기절하겠군.>
<난 성인이고, 내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여태까지 늘 무미건조했던 하둔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거칠어졌다.
<권력의 좋은 면만 보고 자란 사람이 여기서 뭘 어쩌겠다고? 선택한다는 말을 읊는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뼛속부터 시티 홀 사람이라는 증거야. 우리는 선택하지 않아. 그럴 권리도 없으니까. 인생에서 아무것도 택할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내몰리다가 이곳에 모였지. 우리는 선택권을 되찾기 위해 시티 홀을 무너뜨리려는 거야. 복수심에 잠깐 이성을 잃었나 본데, 정신 차려.>
나나는 두 눈동자에 물기를 그렁그렁 매단 채 하둔을 쏘아보았다. 눈물이 어려 있으나 거센 눈빛이었다. 하둔이 순간 멈칫했고, 그사이 여나가 말을 쏟아 냈다.
<복수심에 이성을 잃으면 안 돼? 나도 당신과 같은 처지잖아. 제발, 여기에 남게 해 줘.>
<이봐.>
<철없고 곱게 자란 아가씨 취급 해도 돼. 상관없어. 그래도 여기 있고 싶어. 나도 뭔가를 하고 싶어.>
나나가 여나로 다시 태어나던 날, 그때와 똑같은 눈빛을 한 채, 지금의 여나가 하둔을 쏘아본다.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눈동자에 물기가 메말랐다는 것이다. 그간 눈물을 삭이는 법을 배웠다.
“내가, 선택한 거라고.”
여나가 한 마디씩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여나는 리베라단에서 지내면서 자신과 단원들이 다르단 걸 종종 실감했다. 가족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나쁘게 볼 줄 몰랐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해서 부숴 버리고 싶은 마음을 느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여긴 그래야만 하는 공간이었다. 모든 걸 부수고자 만들어진 곳이다. 새로이 탄생시키는 게 아니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둔. 당신과 잔 것도, 내가 선택한 거야.”
여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월경이 끊긴 지 두 달이 지났다.
대의에 사랑은 방해되는 요소다. 이 지점에서만은 하둔과 여나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했다. 둘은 몇 개월간 서로 밀어내고 싸우기만 반복했다. 가까이 가면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묘한 긴장감을 부정했다.
그러다 그날, 딱 한 번이었다. 둘 다 술에 취해 있었다. 단원 하나가 중압감에 못 이겨 자살해 버린 날이었다. 그는 시티 홀을 부수지 못해서, 스스로를 부수기로 선택했다.
슬픔을 성욕으로 덮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살아 있음을 맨살로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는 삶을 선택했다는, 허상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서로 부정해 왔던 사랑을 한시적으로 인정했다. 나 당신이 마음에 들어. 좋아해.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사랑해. 밤새도록 비슷한 말만 수십 번 곱씹었다.
정말 그 한 번으로 아이가 생겼을까. 하둔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며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그러니 죽으러 가지 말라고, 테러 계획을 무르라고, 당신의 목숨을 대의에 버리지 말고 나에게 달라고. 그냥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면서 살면 안 되냐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참았다. 몇 개월간 서로를 끊임없이 밀어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사랑하면 살고 싶어진다. 목숨을 던지고 싶지 않다. 그들이 아닌, 그 혹은 그녀, 하나의 대상에게 마음이 고정된다. 합리적이지 않다.
여나는 수많은 말을 꾸역꾸역 삼켜 내고 건조하게 말했다.
“성공해. 그리고 꼭 63구역으로 따라와.”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은 더하지 못했다. 비밀을 품은 채 여나는 63구역으로 떠났다.
테러로 최고 의원 둘이 죽었으나, 그에 가담한 단원 모두가 붙잡혀 끔찍하게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 후. 배가 부풀어 오를 무렵이었다.
* * *
격변기였다. 최고 의원의 죽음으로 시정이 혼란스러웠다. 위기는 곧 기회. 여나는 개혁적인 인사가 의회에 여럿 들어오기를 바랐으나, 상황은 그녀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기술국장이던 폴이 급작스레 권력의 중심부로 튀어나왔다. 구세계 홀로그램 디지털 기술을 복원해 낸 천재 과학자. 가짜 신분증이 먹힐 만큼 아날로그 위주의 체제였던 캐슬 시티가 그로 인해 변해 갔다.
폴은 모든 행정 체계를 디지털로 빠르게 전환하고 서버 권한을 손에 쥐었다. 수많은 정보가 그의 손 아래에서 통제되었다. 폴 없이는 시티 홀의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가 되자, 자연스레 시장직은 그에게로 넘어갔다. 기술의 진보는 힘을 가져왔다.
시티 홀은 더 견고해졌다. 폴은 소통과 평화를 좋아하는 리더처럼 보였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캐슬은 그 어느 때보다 중앙집권적으로 변했다. 구역 간 이동이 엄격히 통제되기 시작했다. 구역 사이에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벽이 세워졌다.
반대 의견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짓밟혀 죽었다. 아무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느끼지 못한다. 잡음을 강박적으로 다 지워 버린, 그렇게 평화를 획득한 시대였다.
63구역은 고립되었다. 무법 지대 쓰레기장이 되어 가는 땅에서 여나는 탄을 낳았다. 탄은 하둔을 닮아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 부정할 수 없이 하둔의 자식이었다.
여나는 자신이 나서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기로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 63구역으로 도망친 것 아니던가. 이번에는 더 철저하고 신중하게 준비할 것이다.
마에의 잡일을 돕는 식모인 척하면서, 마에와 함께 리베라단을 재건립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마에도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63구역으로 이주해 온 단원 중 하나였다. 여나는 마에와 함께 하위 구역에 흩어져 조용히 지내던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하나씩, 아주 조용히, 의심을 사지 않도록.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지하 통로도 건설했다. 새로운 기지가 만들어졌다.
여나는 시티 홀의 빈틈을 찾아 완벽하게 파고들기 위해 노력했다. 늘 불안에 시달리고, 곤궁하게 살아가도 괜찮았다. 아이가 살아갈 미래를 바꿀 수만 있다면.
탄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탄이 가이드로 발현하고, 그토록 증오하던 시티 홀에 징집되어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 * *
탄은 형질 보유자로 발현한 이후, 유독 차갑게 굴었던 여나를 떠올렸다. 집을 떠나 전투 학교로 들어가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넌 이제 캐슬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몸이야. 나는 잊어. 여기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고.>
탄은 여나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전투 학교에서 연락 한 통 보내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네요.”
모든 이야기를 들은 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여나가 숨겼으니까.”
탄은 강박적으로 저와 연을 끊어 내려던 여나를 이제야 이해했다. 행여나 나중에 탄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한 것이다. 자신의 행적이 아들의 목구멍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까 봐. 절연한 것처럼 사는 게, 탄을 그나마 안전하게 보호하는 길이라 여겼다.
결국에 여나는 제 부모와 똑같은 길을 밟은 셈이다. 탄은 죄 없는 어린애다. 아무것도 몰라야만 했다.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걸으라, 엄마인 나를 따르라 강요할 수 없었다.
모순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여나는 탄이 편하게 살기를 바랐다. 이미 경비대에 몸 바쳐야 하는 신세다. 징집을 거부하면 추방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탄만은 시티 홀의 체제에 아무런 불만도 없이, 젊은 나나처럼 부드럽게 살기를, 이기적으로 소망했다.
탄은 하둔의 이목구비를 닮았고, 눈빛은 여나처럼 견고했다. 마에는 두 사람이 다 담겨 있는 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핏줄에 반골 기질이 흐르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자란 걸 보면.”
탄은 한숨을 내쉬고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여태껏 알고 있던 모든 정보가 희미해진다. 무엇 하나 진실인 게 없었다. 거친 음성이 목구멍을 긁어내며 흘러나왔다.
“여덟 살에 엄마랑 강제로 떨어져야 했죠. 게다가 그 후로 몇 년간 연락 한번 안 되다가 강도한테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구라도 반골로 자라지 않겠습니까?”
마에는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앞머리를 헤집던 탄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잠깐. 엄마가 강도한테 죽은 건 맞습니까?”
“……여나는 단장이었어. 시시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지.”
여나는 혁명을 장기전이라고 생각했고, 제 인생을 모두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1, 2년으로는 현재의 체제를 뒤바꿀 수 없었다. 한 세기가 걸리더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늦되더라도, 변화의 방향이 옳기만 하다면.
여나는 63구역에서 지도부와 함께 계획을 짰다. 각기 다른 구역에 숨어 있는 단원들이 임무를 수행했다. 개혁파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로비를 넣거나, 시티 홀에 직접 들어가 관리 채널 정보를 조금씩 빼내기도 했다.
목표는 시티 홀의 완벽한 무력화였다. 시장인 폴을 잡아다가 죽이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또 다른 폴이 나타나 자리를 꿰찰 것이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시티 홀을 통제하는 관리 채널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채널이 먹통이 되면, 캐슬은 즉시 혼란에 빠질 테다. 10여 년을 노력한 끝에, 목표에 근접한 듯했다.
“배신자가 생겼어.”
마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시티 홀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티 홀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우리를 배신했지. 거긴 63구역과 너무 멀었고, 우리한테서 시선을 돌리는 건 쉬웠으니까. 그리고 폴은 무척 교활하고 영리했어.”
리베라단은 여전히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밀고자도 단원의 정보를 모두 알지는 못했다. 단장과 부단장인 여나와 마에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폴은 여나를 붙잡아 가 고문하지 않았다. 밀고자가 말한 단원들을 즉시 색출하여 처형하는 쇼도 벌이지 않았다. 대신 하나씩 천천히 메마르게 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몇 주에 하나꼴로 단원이 죽어 나갔다. 겉으로만 봐서는 시티 홀과 전혀 무관한 사인이었다.
남은 단원들은 궁지에 몰렸다. 보이는 공포보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더 두려웠다. 적이 또렷할 때는 같이 뭉쳐서 싸우자는 전의가 들끓었지만, 유령처럼 파고든 두려움에는 서서히 무력해졌다.
내가 단원인 걸 아직 모르나. 지금이라도 가서 추가 밀고를 하면, 내 목숨은 살려 주지 않을까. 이렇게 배신자가 늘어났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 먼저 자살한 자도 있었다. 폴은 어떠한 선전도 하지 않고, 리베라단이 스스로 자멸하게 했다. 안에서부터 조직이 무너져 내렸다.
“여나가 제일 마지막이었어. 일부러 그랬을지도 몰라. 지켜보라고. 너의 사람들이 어떻게 떠나가고 어떻게 죽는지.”
“단순…… 강도가 아니었군요.”
탄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나의 부고를 전해 들은 건 열다섯 살. 이미 여나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여나는 강도에게 죽었다고 했다. 살인자는 평소 정신 착란 증세를 겪는 데다, 사건 당시에 만취 상태인 것을 감안하여 감형받았다. 성 밖으로 추방되지도, 처형당하지도 않았다.
시티 홀은 과연 공정한가. 이때 탄은 뼈저리게 느꼈다. 절대 아니라고. 63구역 변방에 사는 사람쯤이야 어떻게 죽든 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살인범은 모범수로 빠르게 복역까지 했다. 열여섯, 드물게 얻은 포상 휴가로 전투 학교에서 나올 때까지, 탄은 살인자를 수소문했다.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묻고 싶었다. 왜 하필 여나였느냐고. 당신은 정말 반성하고 교화의 기간을 마쳤느냐고.
살인범은 여나라는 이름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 냈다.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였는지, 죽어 갈 때 여나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흥분시켰는지. 남자는 어제 일처럼 늘어놓았고, 탄은 깨달았다.
캐슬이 누군가는 지켜 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다.
여나는 죽었지만, 저 녀석은 죽지 않았다. 그런 식이다. 인생이.
엄마가 미운 만큼 사실은 엄마가 그리웠다. 왜 나를 그렇게 내쳤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눈앞의 남자가 영영 박탈해 버렸다. 죄의식도 느끼지 않은 채.
탄은 훈련받은 대로 몸을 움직였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여나가 좋은 엄마였는지는 모르겠다. 집을 떠난 후로는 미울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이런 놈에게 이런 말을 들으며 죽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탄도 그 살인범처럼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건은 묻혔다. 시민을 지켜야 하는 예비 경비대원이 사람을 죽였다니.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묻히는 걸 묵묵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캐슬 시티는 우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 절대로.
살인은 전혀 기분 좋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목숨값만큼 늘 심장 언저리가 무거웠다. 짓눌려 있었다.
복수는 쾌락과 거리가 멀다. 탄은 자신이 어딘가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엉엉 울면서 총구를 갖다 댔던 순간. 스스로 삶을 망치는 길을 택한 거였다.
그래도 복수했으니까. 시티 홀이 해 주지 않는 것을, 내가 대신했으니까. 그것 하나만을 위안으로 삼았는데.
“결국, 그 새끼는, 아무것도 아니었네요.”
나는 무엇을 위해 사람을 죽였나. 사적으로나마 복수했다고 자만하고, 그러다 스스로 역겨워하고, 여나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던 시간은. 과연 무엇을 위한 거였나.
어린 날의 살인 이후로 평생을 마음 편히 살아 본 적 없었는데. 이것마저도 거짓 위에 세워진 감정이었다. 모든 게 거짓이다. 서늘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들었다.
“시티 홀이 고용한 깡패였던 것 같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도록, 일부러 시티 홀과 관련 없는 놈을 구했겠지. 폴은 자기 손을 직접 더럽히는 건 싫어하거든.”
탄이 튀어나오려는 욕을 씹어 삼켰다. 잠깐의 정적 후에 마에는 독백하듯이 웅얼거렸다. 답을 원하고 발화하는 게 아닌, 저 혼자 감정을 풀어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다 죽고 나만 살아남았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어. 빠짐없이 다 찾아내 죽여 놓고, 왜 나는 그대로 뒀는지. 내 존재를 모를 리 없을 텐데.”
“…….”
“분명히 이번에는 나겠지, 내일은 날 죽이러 오겠지…… 그렇게 몇십 년이 지났네. 거짓으로 얻은 삶 같아. 의사도 그래서 그만둔 거고. 내가 누구 목숨 살릴 처지겠니.”
마에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른 어깨가 둥글게 굽어졌다. 이토록 약해 보이는 마에는 처음이었다.
“난 왜 살아 있을까? 왜 스스로 죽지 않았지? 누군가 날 죽이러 오면, 그놈 면상이라도 확인하려고? 시티 홀이 그랬느냐고 다그치려고?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
“마에.”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다. 몇십 년을 품고 산 거야. 아혼도, 그 누구도 몰라. 이걸 어디에 말하겠니. 나만 추잡하게 살아남았다고, 도대체 이걸 어디에…….”
탄이 작게 떨리는 마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모든 걸 알면서 고통스레 사는 삶. 그 수십 년이 어떠했을지 탄은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어설프게나마 마에를 달래는 말을 읊을 뿐이었다.
“마에. 진정해요. 마에가 아니었으면 나즈는 그대로 시티 홀에 끌려갔을 겁니다. 그리고 애쉬를 봐 줄 사람도 없었을 테고요. 저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
탄은 중간에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 복수한 게 아니었다.
아직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시작조차 한 적 없었다.
* * *
애쉬가 의식을 잃은 지 나흘째.
꾸벅. 탄은 방구석에서 등을 기대고 앉아 졸고 있었다. 그간 경계심을 벼르고서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나흘간의 수면 시간을 다 합쳐 봤자 열 시간 조금 넘었다. 지친 몸에 속절없이 졸음이 밀려들었고, 저절로 고개가 꾸벅거렸다.
탄이 얕은 선잠에 빠져 있을 때. 부스럭. 방에 미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윽. 이불 아래에서 애쉬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곱게 감긴 눈두덩이가 두어 번 파들거리더니, 애쉬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처음에는 시야가 흐릿했다. 그리고 편도체 부근이 화끈거렸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는 것만 같았다. 애쉬가 통증을 참아 내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여기가 어디지. 순간 머릿속이 몽롱했다.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여러 가지 이미지가 섞여, 공간을 이루는 선과 점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는…… 교실이 아닌데. 놀이터도 아니고. 그렇다면 여기가 쓰레기장인 걸까?
정신이 덜 든 애쉬의 몸에 두려움이 몰아닥쳤다. 그간 선생들에게 숱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쁜 행동을 하면 쓰레기장으로 가게 돼.
그곳으로 끌려가서 돌아온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듣기로는 무시무시한 일을 당한다고 했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아야 하니, 당연한 처사긴 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기억이 뒤섞인다.
아. 욕망을 참지 못했지. 맞아. 거세함을 거부했고. 그리고, 그리고……. 타인의 몸을 탐했다. 입술. 입술. 입술은 부드러웠는데. 누구의? 누구의? 누구의? 누구의? 누구의?
애쉬가 느리게 눈을 끔벅이며 입을 달싹였다. 열에 들뜬 음성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자…… 잘못했어요.”
애쉬는 의식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웅얼거렸다. 목소리에 훌쩍거림이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루가 잘못했어요. 쓰, 쓰레기장에 보내지 말아…… 말아 주세요. 잘못했어요. 형…… 형이랑 또 만, 만나고 싶…….”
형이란 단어를 내뱉은 순간, 입술이 멈칫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선이 일치한다. 둘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다. 애쉬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 아파. 아파…….”
어깨를 움츠리면서 몸을 옆으로 틀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뇌에서 불이 난 것만 같았다. 요란하게 정신을 뒤덮는 여러 이미지에 멀미가 났다. 속이 메슥거리고 토하고 싶었다. 며칠간 영양액 말고는 몸에 들어간 게 없는데도.
루, 애쉬, 루, 애쉬. 두 이름이 번갈아 울려 퍼졌다. 탁! 애쉬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끝으로 더듬거리면서 바닥의 냉기를 피부로 흡수했다.
머릿속에 박혀 있던 무언가가 깨지고 있다. 그 틈으로 거센 물살이 쏟아져 나온다. 기억. 기억이 선명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기억? 정말로 내 기억이 맞나? 네가 어떻게 알아, 루!
메스꺼움은 계속된다.
“허억, 헉…….”
애쉬가 가쁘게 헐떡였다.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충혈되고 물기 어린 눈동자에 누군가가 비쳤다.
“……탄.”
구석에서 조용히 졸고 있는 탄이었다. 탄을 보자마자 애쉬의 혼란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니야. 여기는 그곳이 아니야. 봐, 탄이 있잖아.
플래시백처럼 거북한 장면이 쉼 없이 끼어들던 머릿속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기억과 생각이 시간순으로 줄을 섰다.
맞아. 나는 이제 루가 아니야. 나는 애쉬야.
애쉬가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켜서 탄에게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탄이 내뱉는 미세한 숨소리를 들었다.
난 탈출했잖아. 맞아. 힘을 잃은 척하고 쓰레기장으로 갔지. 하지만 중간에 들켜서…… 맞아. 아버지가 내 머리통을 가르고 칩을 심고…… 아팠어. 아팠어. 그런데, 왜 탈출하려 했지?
애쉬가 꾸역꾸역 기어간다.
그야 나가고 싶어서. 왜? 나가야 하니까. 그 사람을, 형을 만나려면. 이제 더는 형이 나한테 와 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보러 가려고. 그래, 나는…….
가까스로 탄의 앞까지 기어간 애쉬가 힘없는 팔을 내뻗었다. 꽈악, 잠든 탄의 손을 붙들었다. 익숙하고도 따뜻한 체온이 스며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나의 가이드를, 탄을,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 모든 짓을…….
그 모든 것을…….
…….
기억이 쏟아져 내렸다. 거센 물살처럼 애쉬를 집어삼켰다. 애쉬는 섬광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물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가는 느낌이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개괄적인 이야기만이 떠올랐다. 아직 모든 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연결 고리가 빠진 듯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기억도 있었다. 급작스레 머릿속을 점령한 정보량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만큼은 익숙하고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리움. 그 강렬한 감정이 옛 기억을 하나로 묶어 냈다.
다른 맹렬한 기억도 드문드문 떠올라 심장을 압박했다. 예를 들면 규율을 어겨 더러운 수조에 몸이 처박혔던 일. 심장이 멎기 직전까지 수조에 갇혀 있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버티지 못했겠지만, ‘만들어진’ 에스퍼는 쉽게 죽지 않았다.
목적을 알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실험들도 기억났다. 선생들은 수업이라고 불렀다. 뇌파를 감지하는 장치를 온 머리통에 매단 채 고통을 참아야 했던 시간. 선생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록했다. 특히나 개인 수업이 끝난 후에는 온몸이 흐물거렸고 머릿속의 편도체가 불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몇 주에 한 번 탄을 만나고 나면, 사흘간은 무슨 수업을 들어도 멀쩡했다.
통증이 없는 상태를 처음 경험했다. 여태껏 어딘가 한군데는 꼭 아팠다. 고통과 함께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탄으로 인하여, 편안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한번 겪고 나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형질이 비정상적으로 날뛰며 생기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애쉬는 탄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시작은 어쩌면 단순하고 본능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아프기 싫어서. 며칠만이라도 편히 숨을 쉬고 싶어서.
그러나 애쉬는 점점 탄이라는 인물 자체를 원하기 시작했다. 집착적으로 탄에 관한 생각만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와 나눈 대화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기억했다. 당시에 느꼈던 오감까지도. 혼자 있을 때 수십 번씩 곱씹으며, 탄과 다음에 만날 날을 기다렸다.
탄은 신기하다. 어린 애쉬는 그 표현 외에 탄을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한 가지만이 확실했다. 탄은 ‘학교’에 있는 어른들과는 몹시 다르다는 것.
말을 못 하는 척 입을 꾹 다물었음에도, 탄은 지치지 않고 저에게 말을 걸어왔다.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탄은 단순히 몸의 통증만 없애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쉬는 어느새 탄과 나눈 모든 시간을 수십 번씩 곱씹고 외웠다.
내가 예의 없이 옷깃을 붙잡았는데도 혼내지 않았어. 오히려 내 눈높이에 맞추려고 쪼그려 앉았어. 날 쓰다듬었어. 나에게 착한 아이라고 했어. 나에게 말을 해도 된다고 했어. 말을. 내 말을 듣고 싶다고 했어. 탄은 이상해. 탄은 이상해…….
아버지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하였다. 나는 죄에 빠진 아이구나. 애쉬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탄과 만나는 날을 간절히 원했고 욕망했고 갈구한다는 것을.
탄이 필요했다. 온통 머릿속에 탄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특별 수업을 받고 나면 하나도 아프지 않아. 좋아.>
어느 날에는 다른 루에게 수줍게 자랑하듯이 말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날카로운 시기와 질투였다. 그 애는 가이딩을 받아도 통증에서 완벽히 해방된 적이 없다고 했다. 애쉬를 제외한 모두가 그랬다.
<거짓말. 가이드는 별로 쓸모없는 존재야.>
그제야 애쉬는 자신이 이례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놓였음을 인지했다. 학교에서 이례적이라고 낙인이 찍히면 꼭 안 좋은 일을 겪게 된다. 개인 수업이 대폭 늘어나거나, 그 강도가 세지거나, 혹은 쓰레기장에 끌려가기도 한다.
애쉬는 영민했다. 탄이 자신에게 얼마나 황홀한 평안을 주는지 밝히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탄과의 시간이 문제없이 이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학교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쉽게 주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특별 수업을 받으러 갔더니 탄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다른 가이드가 앉아 있었다. 탄이 사라졌다. 아니, 탄을 빼앗겼다.
<1단계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서 환경 요인을 좀 바꿔 봤어, 루. 아주 잘했다.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칭찬을 받았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넌 금방 어른이 될 거야. 신기록을 찍을지도 모르겠는데. 잘만 따라오면 상을 주마.>
다시 통증에 시달렸다. 새로운 가이드는 말 그대로 쓸모없었다. 상이고 뭐고 받고 싶지 않았다. 애쉬는 침묵에 빠지기 시작했다. 입술을 열면, 그 형은 어디 있어요? 저한테 돌려주세요, 이런 말만 웅얼거릴 게 분명했다.
그러다 성장 촉진제를 맞고 암실에 갇혀 있었다. 지독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그때도 지금도 늘 흐릿하다. 암실에서 나와 빛을 보았을 때, 애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몸에만 시간이 몇 배로 빠르게 흘렀던 거다. 거울 속에는 어린애가 아니라 낯선 청소년이 서 있었다.
<아주 잘했어. 아버지께서 네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무척 기뻐하신단다.>
이어지는 축하에도 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지, 애쉬는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칭찬받을 일을 하면 할수록, 나는 탄과 멀어진다. 탄이 모르는 낯선 남자가 된다.
<상을 줄까?>
선생의 말에 애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탄을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여태까지의 교육과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버지나 선생이 달갑지 아니할 만한 상을 말하면, 수조에 몸이 처박히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수조 안에서 원하던 그 무언가가 파괴되는 모습을 꼼짝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것이 진보를 위한 규율이었다. 허용된 범위 밖의 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언젠가 루가 다른 루를 원해서 학교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루끼리는 사랑할 수 없었다. 루는 오로지 아버지만을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으므로.
하지만 어떤 루가 다른 루를 원했고, 결국 눈앞에서 제가 원하던 루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애쉬는 담담하게 답했다. 탄을 달라고 한다면, 탄을 파괴해 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내가 탄을 원한다는 것을, 탄이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들켜서는 안 돼.
탄을 다시 얻을 방법은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파괴해 버리자. 나를 쓸모없는 아이로 만들어서, 학교에서 쫓겨나자.
쓰레기장에 끌려간 루 중에 돌아온 애는 없었다. 아마도 거기에 가면 파괴되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아니다. 미지의 공간이니까. 설령 파괴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곳에 갇힌 채로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갇힌 채로는.
애쉬는 두 번째 성장 촉진제를 맞을 때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갇힌 존재였다. 나는 지금 이곳에 갇혀 있다.
다시 암실에서 나왔을 때, 애쉬의 몸은 시간을 무시한 채 혼자서 자라나 버렸다. 20대 중후반의 얼굴과 체격이었다. 촉진제의 부작용인지, 금발이었던 머리는 잿빛으로 물들었고 초록색 눈동자도 탁해졌다.
점점 다른 존재가, 탄이 모르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버려지기로 굳게 결심했다. 다시 태어나려면, 어차피 죽어야만 한다.
“탄, 타안…….”
애쉬로 재탄생한 루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 몸을 더 웅크려 잠든 탄에게 바짝 붙었다. 울먹거리는 눈동자로 탄을 올려다보았다. 탄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탄이 이곳에,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결국에 제 계획은 모두 실패했음에도.
왜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지, 기억을 어떻게 되찾은 건지도, 알지 못했다. 애쉬는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백치가 되어 이곳에 가만히 존재한 게 전부라 생각했다.
그런데 탄이 이곳에 와 주었다. 이번에도 탄에 의해서 끌어 올려졌다.
운명에 순종합니다.
애쉬는 순간 그 말을 떠올렸다.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제 운명인 줄 알았다. 아니다. 탄에게 몇 번이고 다시 구원 당하는 것이, 기억이 있든 없든 탄에게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이, 운명이었다. 이런 운명이라면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다.
코앞의 탄을 빤히 바라본다. 오랜 기간 상상으로만 떠올렸던 그가 앞에 있다.
성장 촉진제를 맞고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육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애쉬는 강박적으로 탄의 몸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곤 했다. 지금의 나는 탄보다 작을까 클까. 그런 생각을 하면, 소름 끼치는 이인감을 조금은 버텨 낼 수 있었다. 껍질은 달라졌어도 머릿속은 여전히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노라고 자위했다.
그때는 성장 촉진제를 몇십 번 더 맞더라도 탄이 저보다 클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의 감상이 남아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놓인 탄은 그렇지 않다. 애쉬의 그림자 속에 탄이 완전히 가려졌다. 며칠 사이 살도 좀 빠진 것 같았다. 피곤함이 잔뜩 내려앉은 어른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그러다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다. 상상으로 그리던 몸이 아니라 실제다. 심지어 저것의 감촉을 알고 있다. 마음이 부풀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애쉬는 충동적인 본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대로 턱을 틀어서 탄의 입술에 무작정 입술을 붙였다. 탁. 부르트고 거친 표피가 느껴졌다. 흐읍. 숨을 참았다.
지하실에서의 키스를 찬찬히 떠올렸다. 혀끝을 살짝 빼내어 톡, 톡, 마른 입술을 건드렸다. 저 안으로 파고들어 헤집고 싶다. 선명한 욕망을 그대로 실현하려 할 때. 탄이 몸을 움찔하며 눈을 반쯤 떴다.
“……읍?”
탄이 막힌 입술 사이로 억눌린 소리를 냈다. 선잠에서 깬 직후. 잠시 상황이 파악되지 않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탄이 어깨를 화드득 떨며 애쉬의 가슴팍을 확 밀어냈다. 의외로 애쉬는 순순하게 밀려났다.
탄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뭐야. 언제 깨어났어? 방금 도대체 뭐 하고…… 아,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몸은? 괜찮아?”
탄은 혀가 자꾸 꼬였다. 바로 앞에서 눈을 끔벅거리는 놈은 분명히 애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애. 안도감과 놀라움이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애쉬는 탄을 빤히 바라보며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타…….”
두 눈을 마주한 채 이름을 읊으려는데, 갑작스레 울음이 차올랐다. 두 눈동자에 빠르게 습기가 스몄다. 기억을 되찾은 채 호명하려니 갑자기 목이 메었다. 수없이 질리도록 불렀던 한 음절인데.
“타안…….”
애쉬가 울먹거리면서 간신히 말을 끄집어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일단 다시 누워.”
탄은 애쉬의 몸 상태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애쉬가 조금 전까지 제 입술을 물고 빨려 했다는 사실은 이미 머릿속 뒤편으로 넘어가 버렸다. 애쉬의 양 뺨을 꽉 붙잡고서 심각한 눈빛으로 여기저기 살폈다.
애쉬는 콧잔등을 움찔거리며 멍하니 탄을 바라보았다. 탄이 다르게 보였다. 탄의 이름 또한 다르게 들렸다.
탄 때문에 학교를 탈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에는, 아직 제 감정을 몰랐다. 웃기게도 그랬다. 왜 그렇게 탄이 보고 싶은 것인지, 이유도 모른 채 그리워했다. 아버지가 행여나 탄을 해할까 봐, 그 이름을 수없이 내뱉고 싶으면서도 속으로만 읊었다.
기억을 잃고 난 후, 백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감정 위에 이름을 또렷하게 적을 수 있었다. 사랑. 사랑이었구나. 두 번의 첫사랑 모두 탄이었다.
“탄, 탄…….”
애쉬가 웅얼거리면서 와락 탄에게 안겨들었다. 탄을 끌어안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깐, 애쉬.”
“사랑…… 사랑 또 해요.”
“뭐?”
“또 했어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놔 봐. 마에 데리고 올게. 힘쓰는 거 보니까 나은 것 같기는 한데…….”
며칠간 체력을 끌어다 쓴 탄은 지쳐 있었다. 무작정 안겨 드는 애쉬를 떼어 낼 힘이라고는 없었다.
“사, 사랑…….”
애쉬는 벅차올라서 막무가내로 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덜미를 콧잔등으로 비비고 문질렀다. 탄의 냄새를 맡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운 애처럼 몇 번이고 중얼거리다가, 학교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섭식을 위해 만들어진 구강으로 서로를 탐하는 것은 매우 천박하고 나쁜 짓이다. 혀를 나누어 더러운 타액을 섞는 것도, 구강으로 성교를 하는 짓도 모두 옳지 않다. 세간에서는 혀를 나누는 것을 키스라고 부르며, 사랑의 행위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타락의 증거다…….
애쉬는 제 기억을 또렷하게 되짚었다. 세뇌의 목소리를 아무렇게나 저 듣고 싶은 대로 들었다. 나머지는 다 무시하고 중간의 몇 마디만 건져 올린다.
사랑의 행위.
혀를 나누는 것은, 키스는 사랑의 행위. 그러니까 나와 탄은 사랑을 한 거야. 지하실에서. 그렇다면 탄도 날 사랑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떨렸다. 숨이 목구멍 아래에서 깔딱거렸다. 탄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박동치는 가슴팍 부근이 찰싹 맞붙었다. 애쉬는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키, 키스. 사랑…… 또, 또 하고 싶습니다.”
“이것 좀 놔 봐.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너 며칠 동안 기절해 있었는지 알긴 해? 내가 그동안 잠도 못 자고 얼마나 걱정을……!”
탄의 목소리 끝이 바르르 떨렸다. 애쉬가 화들짝 놀라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탄의 코끝이 붉었다.
“탄.”
“왜, 뭐.”
“슬퍼 보입니다.”
“아니? 하나도 안 슬픈데?”
탄은 코가 막혀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애쉬를…… 걱정…….”
두근두근. 애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누군가가 아프면 눈물이 나고, 키스까지 했다면.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탄도 날 좋아하나 봐.
애쉬는 귀와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몸을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싶었다. 기분이 좋았지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한참을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조, 좋아해요?”
“어?”
애쉬가 마른침을 삼키고, 탄을 붙들고 있는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애, 애쉬를 사랑해요?”
탄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몇 초간 굳어 버렸다.
애쉬의 두 눈은 일렁이며 반짝이고 있었다.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듬뿍 품은 눈빛이었다.
탄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비현실적이고 낯설게 들렸다. 아니, 지금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 같기도 했다.
사람이 죽어 나갔고 이제 더 죽을지도 모른다. 애쉬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애 아닌가.
애쉬는 그런 상황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정만이 중요했다. 탄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일 뿐 쉽사리 침묵을 깨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랑하냐고? 그 어떤 대답도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타인에게 이런 답변을 요구받은 것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날 사랑해? 이토록 직설적인 질답은 아직 서로 연애가 미숙하던 20대에나 오갔던 것이다.
쟤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저렇게 부끄러운 말을……. 사랑……? 이렇게 갑자기? 귀엽기는 한데, 며칠 만에 정신 차리자마자 바로? 이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있지 않던가.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서툴지만 순도 높은 감정을 받아 내는 일에는 면역이 없었다.
무슨 사랑 타령이야. 그럴 때 아니다. 누워. 이렇게 애 어르듯이 넘길까.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뭉쳐서 커다란 공을 만들어 그 위에서 혼자 방방 뛰는 어린애 같았다. 기대감으로 상기된 얼굴이 탄의 말을 틀어막았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또 어떠한가. 저 빛을 꺼뜨리는 것은 마치 죄악처럼 느껴졌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평소처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탄이 오랫동안 침묵을 이어 나가자, 애쉬가 긴장된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키스……했습니다. 탄. 그러면, 탄도 나를……. 당신도…….”
애쉬가 커다란 어깨를 움찔거리며 옹알거렸다. 탄은 제 이마를 내리치고 싶었다.
키스 아니고 그냥 가이딩의 일환이었어. 이렇게 답한다면 어떨까. 자문자답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건 너무 쓰레기잖아.
이제 와 가이딩이라고 둘러대기에는 지나치게 열렬히 키스했다. 헤매는 애쉬의 혀를 적극적으로 잡아당기고 입천장을 두드렸던 사람이 누군데. 별거 아니었다고 말하면, 애를 갖고 논 못된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난 애쉬를 사랑하는 건가? ……사랑이 뭐지? 그게 뭔데 도대체. 아니, 애초에 이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지금 어디에선가 시티 홀이 우리를……! 머릿속이 삐거덕거린다. 마에에게서 부모의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더 혼란스러웠다.
목숨을 걸고서 반동 행위를 꾸미는 도중에도 피어나는 게 사랑인 건가. 탄에게는 무척 비이성적으로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비이성의 결실이 심지어 자기 자신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무겁고 낯설다. 그렇게 관계를 단정 짓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서로의 이성이 지켜지는 한도 내에서 오가는 애정이 편했다.
애쉬를 귀여워하고 아끼는 건 확실했다. 키스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의식을 잃은 내내 힘겨웠고, 시티 홀 건물을 불태우고 싶다는 상상도 했다.
이제 애처롭게 저를 바라보는 애쉬를 끌어안으며, ‘응, 나도 사랑해’ 하고 투정 많은 애인 달래듯이 굴어야 하나? 애쉬의 마음이 가벼웠다면, 정말로 투정에 지나지 않는 질문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애쉬는 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다. 그런 애한테 확신 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건 잔인한 짓이었다.
키스 자체는 기분 좋았다는 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 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못 했다. 어쩌면 너랑 키스 이상이 가능할지도 몰라. 해 봐야 알겠지만……. 차라리 이 말이 쉬웠다.
그런데 정말 내가 남자를 안을 수 있으려나? 물론 그 반대는 탄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흔쾌히 받아 줬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어떡하지. 곰곰이 따져볼수록, 탄은 본인이 몹쓸 놈처럼 느껴져서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지하실에서 충동적으로 애쉬의 입 안에 혓바닥을 집어넣었을 때부터 시작된 자충수였다.
“우선…… 우선 누워.”
탄은 애쉬의 어깨를 와락 붙잡아 짓눌렀다. 애쉬는 얼떨결에 탄에게 떠밀려 매트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탄이 그새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른 선택은 후퇴. 후퇴를 모르던 탄이 후퇴했다.
애쉬는 이불 끝자락을 손으로 꽉 움켜잡은 채 탄을 멍하니 응시했다. 도톰한 입술로 웅얼거렸다.
“……왜?”
탄은 기어코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쳤다. 살짝 시무룩해진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죄책감으로 심장이 따끔했다. 좀 봐줘라.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진짜 쓰레기가 된 것 같잖아. 애쉬에게 사정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탄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 잘 모르겠어서 그래.”
“우리 키스……했습니다.”
“맞지, 응. 했지. 그래, 키스라고 볼 수도 있지. 아니, 아아니, 확실히 키스였지…….”
탄이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투박한 뽀뽀에서 멈춰 있던 것을 키스로 이끈 건 다름 아닌 본인이었으므로.
“……해, 했는데.”
애쉬가 입술을 내밀며 작게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탄이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키스를 가르쳐 놓고 어떻게 내뺄 수 있느냐며 타박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미안.”
탄이 재빠르게 사과했다.
“응. 내가 나쁜 놈이다.”
“탄은 나쁘지 않습니다…….”
애쉬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얼굴에 얼핏 시무룩한 기색이 비쳤다. 탄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당, 당황스러워서. 당황스러워서 그래. 네가 싫다는 게 아니고.”
젠장. 굳이 이런 말 붙이는 게 더 나쁜 놈 같았다. 탄은 머리가 아뜩해졌다. 알 수가 없었다. 연애적으로 엮인 사람 중에 애쉬가 제일 덩치가 커다랬음에도, 제일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주로 연상의 여자만 만나다가, 때 묻지 않은 애를 상대하려니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키스도 처음인 애였다.
“생각할 시간 좀 줘…….”
“…….”
“너 완전히 낫게 되면 다시 얘기해 보자. 그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정말로.”
애쉬의 턱에 잡혀 있던 주름이 살며시 펴졌다. 애쉬가 누운 채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애쉬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해서 속이 상하긴 했지만, 떼쓰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그, 그래. 마에한테 너 좀 봐 달라고 연락하고 올게. 기다려.”
분명히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탄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애쉬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탄을 붙들었다. 손가락 끝이 파들거렸다. 탄이 애쉬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 아니고, 금방 와.”
끄덕끄덕…….
애쉬는 머리와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탄을 놔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은 자꾸만 꾸물거리며 탄에게로 다가갔다. 탄이 잠시라도 자신을 떠나는 게 싫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탄의 팔뚝에 얼굴을 치댔다.
탄은 쉽사리 애쉬를 밀쳐내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어르듯이 애쉬의 등을 도닥였다. 애쉬에게는 자꾸 물러져서 문제다. 이런 손짓이 여지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며칠을 누워만 있었는데도 애쉬의 등은 단단했다. 커다란 몸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탄은 한숨을 삼켰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야 하지만…… 끝까지 가능할까? 이렇게 커다란데…….
키스할 때 애쉬가 달려들었던 꼴을 생각해 보면, 성애를 빼고 관계를 논할 수는 없을 테다. 이 확신만 든다면 어떻게든…….
탄은 어지러운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진짜로 괜찮은 거 맞아? 몸이 조금이라도 달라졌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
애쉬는 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 중얼거렸다.
“기억…… 기억만 돌아왔습니다.”
“응?”
“그것 빼고는 다 괜찮…….”
“뭐라고? 옛날 기억이 돌아왔다는 거야?”
탄이 화들짝 놀라 애쉬의 얼굴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네에…….”
말랑한 볼살이 탄의 손바닥에 짓눌려, 어눌한 발음이 나왔다.
“아니. 그 중요한 걸 왜 지금 말해? 이것부터 말했어야지!”
애쉬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당연히 기억이 돌아온 것보다는, 탄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우선순위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허. 탄은 어처구니없어하며 한숨 쉬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아니다. 아니야. 방금 깨어났는데. 뭐라도 좀 먹이고 이야기를 듣든지 해야지. 여기 있어.”
끄덕끄덕.
탄이 이번에야말로 애쉬를 떼어 놓고 일어서려다가 다시금 멈칫했다. 애쉬의 잿빛 머리카락이 온통 부스스하게 뻗쳐 있었다. 탄은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기억이 돌아와서 힘들지는 않아?”
이것부터 물었어야 했는데. 탄의 후회가 무색하게, 애쉬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좋습니다.”
“돌아온 기억이 좋다고?”
끄덕끄덕.
“……그래?”
사람은 본능적인 자기방어 기제를 지니고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변질시켜 저장하거나,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기억은 자기방어 기제를 발동시킬 만큼 충분히 힘든 경험이었다. 규율을 어기면 갇히게 되는 체벌실. 허락된 이외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교만의 대가로 혹독한 벌을 받아야만 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개인 수업들. 자극되고 교란되는 뇌파. 머리 앞부분이 불타는 듯한 고통.
이제 대뇌 전반에 활성화되어 있는 그 기억들은 충분히 끔찍했다. 트라우마로 남을 만했다. 그러나 애쉬는 좋았노라고 단언했다.
탄이 있었으니까.
그곳에는 암실도 고통도 외로움도 있었지만, 탄도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좋은 기억이다. 영영 그때의 탄을 잊어버린 채 사는 게 더 끔찍한 일이다.
애쉬가 탄의 손바닥에 얼굴을 지그시 기댔다.
“좋았……어요.”
목소리가 흐릿하게 떨렸다.
* * *
좋기는 뭐가.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탄은 곱게 잠든 애쉬를 바라보면서 소리치고 싶었다.
씨발 새끼. 죽여 버려도 시원찮을 새끼.
애쉬의 이야기 속 등장한 ‘아버지’나 ‘선생’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긴 이야기를 떠듬떠듬 토해 낸 애쉬는 다시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아직 온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중간중간 텔레파시까지 사용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탄은 손끝으로 잠든 애쉬의 이마를 매만졌다. 여러 이야기를 한꺼번에 받아들인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애쉬의 말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이상한 단어 사용이 계속되었고, 연도가 맞지 않았으며,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도 있었다.
명백한 고문과 생체 실험을 애쉬는 수업이라고 불렀다.
함께 실험 받았던 아이들을 모두 루라고 불렀다. 자신의 이름도, 그 친구의 이름도, 저 친구의 이름도 모두 루였다. 명명조차 하지 않고 폭력적인 통일성 아래에서 애들을 짓눌러 버리는 환경이었다.
애쉬는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뇌에서 해방된 듯 보였지만, 오랜 시간 그렇게 자라 왔던 애였다.
애쉬는 자신이 어딘가 망가져 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겪은 폭력을 폭력이라고 부를 줄 몰랐다. 오히려 담담하게 전달했다.
<제가 잘못해서 벌을 받았어요.>
그러다 어느 구간은 들떠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탄. 다, 당신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순수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애쉬 앞에서, 탄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분노와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학대를 교육이라고 배우며 자란 아이에게 섣불리 말을 쏟아 낼 수 없었다. 욕을 속으로 참았다. 시발 새끼. 개새끼. 죽여 버릴 새끼. 미친놈.
탄은 고요히 잠든 애쉬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야 낯익은 소년의 이목구비가 하나둘씩 보였다.
어린 애쉬와 만났던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심지어 그 애를 종종 떠올리며 궁금해하기도 했다. 코앞에 두고 매일 봤는데도, 루가 애쉬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다언과 동년배였어야 했다. 갓 성년이 되었을 나이.
애쉬는 시간을 거슬러 웃자란 어린애였다. 덩치는 크지만, 실제로 그 안에 담긴 시간은 10년가량 더 적다. 탄은 스쳐 지나가듯이 건넸던 호의가 아이의 안에서는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눌러앉아 있었다.
탄은 처음부터 애쉬가 은근하게 신경 쓰였다. 아이치고는 지나치게 순종적이라 눈에 걸렸다. 가이딩하는 동안 집중력이 산만해질 법도 한데, 애쉬는 몸 한번 비틀지 않았다. 늘 침묵을 지킨 채, 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눈동자를 내리깔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저 얌전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탄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전투 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의 자신이 계속 떠올라서였다.
여덟 살 때, 탄은 떠밀리듯이 고향을 떠났다. 여나는 유달리 매몰찼다. 경비대의 일원으로서 성실하게 살라는 말만 남기고 자신과 거리를 두었다.
마에에게 모든 사실을 듣고 난 지금은 여나의 속마음을 알지만, 당시에는 엄마에게 내쳐졌다고 생각했다. 63구역 사람들이 캐슬 시티에 반감이 큰 것 정도야 어린 탄도 눈치챘다. 그들은 중앙 권력을 원망했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경비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까, 엄마는 내가 미워진 거야.
탄, 너는 이제 배곯지 않고 살겠구나. 인생 역전이네. 다른 이들이 약간의 질시를 담아 건넨 말들이 탄의 가슴에 깊이 남았다. 뒤늦게서야 발현된 S급 형질. 모두 기적이라 불렀으나, 탄은 기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을 여유도 없이 급하게 징집되었다.
외롭고 서러웠다. 처음 얼마간은 입을 꾹 다물고 지냈다. 형질이고 뭐고 다 복잡하게 느껴졌다. 63구역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애들도 간혹 있었기에, 더더욱 조용히 혼자 다니려 했다.
탄은 무심코 그때의 자신을 애쉬와 겹쳐 보았다. 그래서 다정한 말을 한마디라도 더 건네려 애썼다.
사실 탄의 외로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탄은 가이딩 실력과 발육 속도 등이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났고, 아이들은 저절로 강한 탄에게 이끌렸다. 겉으로라도 웃고 떠들면서 63구역을 잊고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애쉬에게는 친구도 없었다. 형질이 계속 불안정하다면, 전투 학교에 들어가는 시기가 더 늦춰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가끔 보는 나라도 잘해 주자. 아이가 제 형질을 무서워하지 않게. 나중에 다른 아이들 틈에 내던져졌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게끔. 이런 마음으로 애쉬를 대했다.
그게 다였다. 거창한 무언가를 애쉬에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탄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했다고. 나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무지한 내가 너에게 해 준 일은 사소하기 그지없는데.
너무나 사소해서 그것을 희망 삼아 버텼다는 애쉬의 말이 아팠다. 그 사소함마저도 없었던 삶, 고작 그 정도의 평온과 호의도 누리지 못했던 삶이란 거다.
꾸욱. 탄이 제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살갗 아래가 욱신거리고 시렸다. 당시 애쉬의 감정과 지나치게 동기화된 탓일까. 지금 느껴지는 슬픔이 애쉬의 것인지, 온전히 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쉬는 육성으로 말하다가 지치면 종종 제 기억을 텔레파시로 흘려보내 주었다. 그러면 탄은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차근차근 애쉬의 기억을 같이 되짚고 따라갔다. 당시에는 몰랐던 아이의 속마음까지 텔레파시로 들을 수 있었다.
『“자. 오늘 가이딩은 여기까지야. 최대한 빨리 다음번 날짜를 잡아 볼게.”
끄덕끄덕……. 아아, 목이 무거워. 아쉬워하면 안 돼. 가는 건가? 혀, 형이 일어났어. 가나 봐. 떠나나 봐. 아, 가지 마세요. ……아냐.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뭘 더 원하는 거야, 루?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 다른 루들은 특별 수업을 받아도 별 소용이 없대. 혼자만 이렇게 편하게 지내면서. 탐욕스러워. 탐욕스러워.
“다음에도 몸이 아프면 꼭 말해 줘. 잘 지내고 또 보자.”
아. 아. 아. 진짜 가잖아. 아…….
“루?”
욕심쟁이 루! 어른을 붙잡다니. 그런데 이 소매를 놓을 수가 없어. 사흘간 갇혀 있어도 모자란 짓이야. 어른이 떠날 때는 공손히 얌전히 있어야 하는데. 혼날 거야. 형도 화가 났을 거야. 루가 감히 붙잡아 버려서…….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형이 나한테 실망했을까 봐. 영영 다시 안 올까 봐.
“죄, 죄, 죄송해요…….”
미친 루! 나도 모르게 말까지 해 버렸잖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무서워서 다리가 떨려. 금기를 몇 개나 어긴 거야? 체벌실이 아니라 쓰레기장으로 갈지도 몰라. 어제 그 빨간 머리 루처럼.
“너…… 말할 줄 알았구나?”
너무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나. 내가 바보 같아서.
“어? 왜, 왜 울어?”
바보, 바보, 바보…….
“왜 사과한 거야, 루? 무슨 일 있니?”
형이 날 때릴 거야. 그러는 게 당연하지. 팔이 다가오고 있어. 아프겠지? 아파야 하는 게 당연하지. ……이상해. 아프지 않아.
“어이구. 애가 갑자기 왜 울지. 이리 와, 이리 와.”
이건 뭐 하는 거지? 숨 막혀, 따뜻해, 기분 좋아. 나를 때리려고 팔을 든 게 아니었어. 하지만 왜? 루는 엄청난 잘못을 했는걸.
“뭔지는 몰라도 형이 미안.”
어른은 사과하는 거 아니랬는데…….』
애쉬의 일인칭 기억 속에 빠졌다가 나올 때마다, 탄은 후회했다.
어리둥절하게 아이를 끌어안고, 얼빠진 목소리로 사과할 게 아니라, 그대로 거기서 뛰쳐나와야 했다. 아이를 품에 단단히 안은 채 놓지 말았어야 했다. 과거를 다시 쓰고 싶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와 함께 여기서 나가자. 어린 애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탄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애쉬 말고도 여러 아이가 어딘가에 갇힌 채 실험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도 어디선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애쉬의 정보는 통제받았고 오염되었다. 애쉬가 해 준 이야기로 정확히 파악 가능한 것은 몇 없었다. 시티 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실험을 진행했다는 것. 그 애들이 모두 에스퍼였다는 것.
봉사 가이드를 만날 때만 잠깐 꾸며진 일반 저택으로 나오고, 평소에는 ‘학교’에서 지냈다고 하였다. 아이들을 몰래 수용해 놓았던 곳 같은데, 그런 시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애초에 그 많은 애를 어떻게 모은 걸까. 나즈에게 했던 것처럼 납치하려고 했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혹은, 애초에 실험을 목적으로 ‘만들어 낸’ 존재들일까.
유독 최근 들어 각성이 빠르고 불안정한 에스퍼들이 늘어나긴 했다. 전투 학교에 입학할 나이도 아닌데, 가이딩 없이는 버티지 못할 만큼 형질이 강렬한 아이들.
경비대 소속 고위급 가이드들이 차출되어, 아이들을 도와주러 갔다. 탄은 여태껏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봉사였다고.
아니었다. 사실은 끔찍함 위에 끔찍함을 덧발랐을 뿐이다.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함구증에 걸린 줄만 알았던 조용한 아이. 여덟 살이라기에는 약간 큰 몸집. 이상할 정도로 들끓던 이능력. 내가 그때 조금의 위화감이라도 느꼈다면…….
탄은 과거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여나의 일부터 애쉬까지. 온 생애에 점철되었던 기만과 거짓이 이제야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그저 예외적인 줄 알았던, 어린 에스퍼들. 형질 보유자에 대해 밝혀진 것은 아직 적었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특성이 발굴되거나 생겨났다. 그런 변화의 흐름 속에 태어난 아이들이라 여겨졌다.
새액. 새액. 탄은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애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변화가 아닌, 폭력과 억압 속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애쉬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일을 겪어야 했을까. 폭력의 기억을 되찾고서도, 분노와 서러움을 느끼기보다는 사랑부터 읊는 애인데.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애쉬가 습관적으로 읊던 말을 떠올렸다.
이상하잖아.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죄의 무게로 치자면,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신의 것이 훨씬 무겁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청산해야 한다면, 애쉬보다는 자신이 먼저 나서야 했다.
하지만 세상이란 이상해서, 상벌이 논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탄은 그 사실이 항상 불만이었다.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어떤 사람은 죄 없이도 아플 수 있다는 것.
그 아픔은 과연 합당한가. 애쉬는 그렇게 아파도 되는 아이였나.
* * *
이틀 후, 나즈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탄은 낮잠이 든 애쉬의 옆에 짧은 메모를 남기고 곧장 공장으로 뛰어갔다. 애쉬는 의식을 차린 이후부터는 탄의 가이딩을 받을 수 있어 빠른 속도로 회복 중이었다. 약간의 피로감 외에는 멀쩡한 듯했지만, 탄은 애쉬가 업무에 복귀하는 건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공장에 도착한 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체적으로 위협적인 분위기가 맴돌았다. 공기는 굳어 있었다. 여차하면 정말로 아혼이 쿠데타라도 일으킬 것처럼 보였다. 공장 전투 인력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탄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아혼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혼은 독이 잔뜩 오른 얼굴이었다. 며칠간 공장 전체를 뒤집어 놓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마에에게 전해 들었다.
탄은 아혼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나즈가 깨어났다며. 애는 좀 어때?”
“대화도 가능하고 괜찮아. 금방 피곤해하는 것 빼고는.”
“얘기는 좀 들었고?”
“그 무두장이 아들놈 말고는 다른 사람과 접촉한 적이 없다더군.”
“애는 배후를 전혀 모른다는 거네. 실험에 관한 건?”
“대기병을 낫게 해 주는 신약이라고만 알고 있어. 부작용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큰돈을 준다니까 어린 마음에 홀린 것 같고. 그래야 언니를 돕는다고 생각했나 본데…….”
“그 얘기 듣고 우리 부관 마음 찢어졌겠네.”
“말도 마.”
“음. 나도 나즈와 직접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지쳐서 다시 잠들었어. 뭐, 얼굴이라도 보고 갈래?”
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혼이 순순히 탄을 나즈가 머무는 방으로 안내했다. 리베라단 접선지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로, 아혼은 탄을 대하는 태도가 한층 유해졌다. 63구역에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혼과 그녀가 데려온 측근 몇 명, 그리고 유가족들 정도였다.
특히나 시티 홀이 연루되었을 것이란 이야기는 더 조심스럽게 오갔다. 아혼과 탄은 이제 비밀을 공유한 사이였다. 친밀한 사이는 아닐지라도 공동의 적을 지닌 동맹에 가까웠다. 둘의 목표는 비슷했다. 63구역에 침입해 있는 시티 홀 세력을 색출하고, 그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것.
나즈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다언도 함께 있었다. 다언은 내내 동생 옆을 지키느라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며칠 사이 얼굴이 홀쭉해졌다.
다언은 피곤이 깃든 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안관님 오셨네요.”
“나즈가 깨어났다길래.”
“네. 다행히 지금으로서는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추가 증세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런데 엊그제부터 사무소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서요.”
“아, 애쉬도 깨어났고 해서.”
“그러면 저는 잘리는 건가요?”
“뭐? 왜 그런 생각을 해?”
“안 부르시길래요.”
“됐다. 동생 보기 바쁜 거 빤히 아는데. 사무소 운영하는 것도 그냥 겉치레하는 거야. 시티 홀한테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되니까.”
“애쉬는 괜찮아요?”
“응. 애처럼 잠이 는 것 빼고는. 어제는 합성육 통조림 두 캔을 한자리에서 까먹더라. 마에는 어디 갔어?”
“잠깐 눈 붙이러 가셨어요.”
며칠간 누구보다 혹사당한 사람은 마에였다. 이리저리 환자를 보고, 신약을 먹고 죽어 나간 의문의 시체들까지 살펴야 했으니.
탄은 조심스레 나즈가 누워 있는 매트 옆으로 다가갔다. 침상은 정돈되어 있었고, 나즈의 행색도 깔끔했다. 섬세한 보살핌을 받은 티가 났다. 안색만 보았을 때는 크게 아픈 사람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급작스레 기묘한 꿀렁임이 몸을 덮쳤다. 오랜 시간 벼려진 본능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잔털까지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탄이 미간을 찡그렸다.
“잠깐만……. 뭐 좀 확인해 볼게.”
설마. 탄이 마른침을 삼키며 잠든 나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살갗이 맞닿자마자 기묘한 감각이 몸에 소용돌이쳤다. 이게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익숙해지라고, 누구보다 기민하게 알아채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배운 것이다.
에스퍼의 기운.
“……실험의 목적을 알 것 같네.”
비형질자였던 나즈가 에스퍼로 발현했다.